소설리스트

호크-42화 (42/55)

Chapter 42. 폭풍의 폴렌시아 대륙!

탁탁탁탁!

누가 봐도 다급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허겁지겁 달려가는 전령은 귀족들을 밀치며 달리고 있었다.

대노한 귀족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지만, 그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이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의 등에 맨 붉은색 깃발을 보고 내성의 경비병들은 창을 들어 비켜주었다.

등에 붉은색 깃발을 단 전령은 황제에게 가는 최지급 전령이었다.

저걸 막았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멈춰라!"

하늘이 무너져 내려도 멈출 것 같지 않던 전령이 서릿발 같은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의 제지에 다리를 멈추고 허리를 굽혔다.

"하아~ 하아~ 이... 이... 것을......."

너무 숨이 가빠서 말을 떠듬떠듬 거리던 전령이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가죽 주머니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기사에게 전해주었다.

두루마기를 받아든 기사의 표정이 엄청난 것을 본 얼굴이 되었다.

"수, 수고했다. 여봐라, 이 자를 편히 쉬게 해라!"

기사는 경비병들에게 전령의 편의를 봐주게 한 다음, 무거운 갑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듯이 뛰었다.

검은색 두루마기는 왕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을 요하는 최고의 보고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전령은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 왔으리라.

자신도 주저할 틈이 없었다.

무거운 갑옷 속으로 땀이 흘렀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검은색 두루마기는 전령에서 경비기사에게 그리고 또 몇몇의 손을 건너서 두루마기를 읽어야 하는 알버스크 왕국의 발렌시아 로 크론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두루마기를 펼쳐든 발렌시아 국왕의 두 손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잘못하면 두루마기가 찢어질 듯이 보였다.

옆에서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던 테렌스 공작은 목이 타는 갈증을 느끼며 검은색 두루마기를 뚫어질듯이 쳐다보았다.

"전하! 무슨 내용인데 그렇게 놀라시는 것입니까?"

국왕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두루마기도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테렌스 공작이 두루마기를 집어들었다.

자연히 두루마기의 내용에 눈이 간 테렌스의 공작의 눈썹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존경하옵는 국왕 전하 급한 보고가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되었사옵니다. 지난 그믐날 벌어진 로베니아와 케린버그의 전투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케린버그가 로베니아 제국의 군대를 궤멸시켰습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그들에게는 동맹국이 있었는데, 동맹국은 다름이 아니라 동토의 제국 레센이었습니다. 케린버그와 레센의 연합군은 헤나스톤에서 로베니아의 대군을 맞아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결과, 양측 모두 엄청난 희생을 내고 말았지만, 결국 케린버그와 레센 연합군의 승리로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 케린버그 왕국은 건국 이래 최고의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를 사로잡았거나, 죽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발렝 황제가 제국으로 돌아갔다는 보고 또한 없기에 소문이 더욱 무성해지고 있사옵니다. 저희 왕국이 케린버그에 원조를 한 것은 아주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사료되옵니다. 추후로 모아지는 정보를 최대한 선별하여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발렌시아 국왕님의 충직한 종 트웨인 백작.]

"이걸 믿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로베니아 제국이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드래곤이 케린버그를 돕고 있는 걸까?"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발렌시아 국왕은 충격으로 인해 비틀거리며 테라스로 나갔다.

가슴이 답답해오자 호흡이 곤란해졌기에 넓게 트인 곳이 필요했다.

테라스 난간을 두 손을 집고 몸을 지탱한 발렌시아 국왕은 오늘 따라 아름다운 알버스크의 왕성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던 거지, 테렌스 공작?"

진한 슬픔이 배어 나오는 국왕의 목소리에 테렌스 공작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바닥에 박았다.

"소신들이 불충한 탓이옵니다. 전하!"

한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발렌시아 국왕은 테라스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테렌스 공작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말렸다.

"후후후! 누가 누구를 탓하겠는가? 결국 용기 없는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하겠지."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테렌스 공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발렌시아 국왕은 가운데 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역사는 용기 있는 자들이 써내려간다는 선왕의 말씀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지. 어리석은 만용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능성을 내다보며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늘 완벽한 준비를 외치며 백년대계를 준비해왔지만, 정작 로베니아를,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싸운 케린버그이지 않나. 우린 결국 겁쟁이에 불과했던 거야."

발렌시아 국왕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젖어들어 갔다.

그런 모습을 보는 테렌스 공작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다.

힘이 없음을 한탄하는 국왕을 바라보는 신하의 마음이라는 것은 겪어 보지 않은 이는 알 수가 없는 참담함이었다.

어금니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테렌스 공작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악다문 입가로 붉은 선혈이 흘러 나왔다.

"후~ 이제 대륙에 새로운 패자가 나타났으니 우리는 그동안 해왔던 대로 또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야지. 특사를 준비하게 케린버그와 협정을 맺어야지. 아니, 레센인가 아니면 그들 연합군과의 협정인가? 뭐, 상관없겠지. 어떻든 간에 말이지. 서둘러 주게 다른 왕국에서 선수를 치기 전에 우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나서야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선 발렌시아 국왕이 테라스를 나서다 말고 몸을 멈췄다.

"그런데, 정말로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가 저들의 손에 잡혔을까?"

"빠른 시간 안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결벽증 환자가 자존심도 버리고 도망 쳤다니 지금쯤이면 아마 미쳐서 날뛰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약에 잡히지 않았다면 말이야."

"네, 전하!"

"그 변태 같은 자식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적어도 케린버그 국왕이 그런 쓰레기는 아니길 빌어야겠군."

국왕의 등을 향해 군례를 올린 테렌스 공작은 멀리 로베니아 쪽을 바라보았다.

* * *

"헉! 헉!"

"폐하! 조금 더 힘을 내십시오!"

만신창이가 된 발렝 황제가 근위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힘겹게 강을 건너고 있었다.

위풍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화려했던 군복은 넝마가 되어 있었다.

얼굴을 아름답게 보이던 금발은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곱디 고왔던 얼굴에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 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고생에도 발렝 황제는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저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며 모든 것을 참아내고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자신을 위해 몸을 내던진 병사들의 마음을 짊어진 발렝 황제는 이 정도 고통을 받았다고 입을 벌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유약하기만 했던 황제가 아니라 진정한 남자로 거듭 태어났다. 애석하게도 일찍이 눈을 떴다면 좋았을 것을 너무 늦은 다음의 깨달음이라 그 아쉬움이 너무 컸다.

차가운 강물에 지친 몸을 담그니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이 일행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점점 몸이 차가워지며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지자 쉴 틈이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물속에서 동사 할 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하지만 흔들리는 불빛이 보였다. 바로 그들의 목적지 리하나 요새였다. 점점 요새에 다가갈수록 일행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멀리 보이는 요새에 공격을 받은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불에 그을린 흔적과 무너진 요새의 벽들이 전투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더욱 불안하게 하는 것은 요새에 전혀 인기척이 없어서 발렝 황제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힘들게 물살을 가르고 요새에 들어선 일행은 고개를 떨구어야만 했다.

수많은 병력과 인부들로 분주했던 리하나 요새가 폐허로 변해 있었다.

터덜터덜 안으로 들어간 발렝 황제의 눈에 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흙과 돌로 이루어진 산이 아니고 인간의 시신으로 만들어진 산이었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이 죽어서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못느꼈을 분노라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타인을 위해서 처음으로 느껴본 가슴이 아련해지는 통증에 발렝 황제는 가슴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결국 그는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나, 나 때문에...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이 많은 생명들이... 우욱!"

오열하는 발렝 황제의 몸을 비록 헤지기는 했어도 고급스러운 망토를 조심스럽게 감싼 근위기사가 황제를 일으켜 세웠다.

"폐하! 고정하십시오. 그러시다가 옥체를 상하기라도하면 큰일이옵니다."

"큭큭! 빌어먹을 옥체는 무슨 옥체! 나도 저기 있는 저들과 뭐가 다르겠어.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하잘것없는 육신일 뿐인데."

낙담한 황제를 한쪽에 앉히자 살아남은 십여 명의 기사들이 자리를 에워쌌다.

잠시 후, 여기저기 피가 묻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굳은 얼굴로 다가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놈들이 마법진을 훼손해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젠장!"

로브의 사내는 마법사였다.

마법사로부터 나쁜 소식을 들은 근위기사는 주먹을 쳤다.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게이트는 몰라도 마법진까지 찾아내서 없애버릴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는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가 결심을 했는지 얼굴을 굳혔다.

"폐하! 송구스럽게도......."

"됐다. 나도 귀가 있으니 상황이 어떻다는 것은 잘 들었다. 말이 있는지 확인해서 말을 타고 이동한다. 로베니아로 가면 이 원한을 갚아줄 수 있다. 서두르자. 우리를 기다리는 로베니아의 수도 페르샤이어 가야 해! 황성으로 가서 재정비를 하고 복수를 해야지!"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기사들이 흩어져 살아 있는 말들을 찾아오자 발렝 황제는 말위에 올라 수도 페르샤이어로 말머리를 돌렸다.

"가자! 제국으로!"

금세 어디서 기운이 솟아났는지 발렝 황제의 목소리에 제법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황제의 뜻을 알기라도 한 듯이 말들이 힘차게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평원을 가로지는 발렝 황제의 눈은 복수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 * *

우와아아!

죽여라!

지옥이 따로 없었다.

지옥의 악귀들이 악다구니를 하면 이런 모습이라고 보여주고 싶었던지 인간들이 서로의 몸에 검을 꽂아 넣기 위해서 잔혹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살을 에는 비명소리와 듣기에도 섬뜩한 비명소리가 성 안을 가득 채웠고 병장기들이 내는 소리가 곁들여지자 인간 군상들이 만들어내는 가장 잔인한 행동이 합법화 되는 전쟁이라는 행위가 벌어졌다.

"역도들을 막아라!"

"총사대는 뭘 하는가? 저 악적들에게 죽음을 선사하라!"

화려한 깃털로 장신된 투구를 눌러쓴 총사대 대원들이 사제복 안에 무기를 감추고 들어온 반도 무리들과 어려운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이미 외곽 경비대들과는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경비대 대장의 전령이 왔을 때 준비했지만, 저들은 훨씬 전부터 대비해왔는지 순식간에 성 안의 중요 거점을 점령했다.

다행히 황실 근위대가 건재하여 이렇게 밀고 밀리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앙리 백작님이 지원 병력을 보내오셨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총사대 대장 루이 필리페 남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있나. 어서 그들을 동쪽에 배치하게 그 쪽이 가장 허술하니 서두르게."

필리페 남작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실 근위대 소속 병사들이 총사대원을 따라서 성벽을 타고 달리자 머리 위로 각종 공성 무기가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저놈들이 발리스타까지 들여오다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성문 경비들은 눈뜨고 근무했나?"

"밖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옵니다. 성 안에 있던 것입니다."

"뭐라고?"

수하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본 루이 필리페 남작의 두 눈이 놀라서 동그랗게 변했다.

반역도들이 쓰고 있는 발리스타는 분명히 제국군의 무기였다.

누군가 무기고를 열어 주었다는 뜻인데, 더 좋지 않은 것은 위치를 안다고 하더라도 성 안의 무기고는 쉽게 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도대체 어떻게 무기고 문을 열고 무기를 탈취해 왔는지 루이 자작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 한 발 발리스타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 첨탑의 중간에 틀어 박혔다.

황급히 몸을 숙였던 루이 남작은 반역도들이 쓰는 발리스타에 선명하게 새겨진 황실 근위대의 문장을 보고 벽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늙어빠진 여우가 단단히 작정했군. 진즉에 그 늙은이를 없애버렸어야 했는데. 황제 폐하의 예상이 맞았어. 언제고 큰 후환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 몽셀 공작과 귀족들을 쓸어 버렸어야 했어."

그러나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날아오는 공성무기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다시 굉음을 내며 성벽이 흔들렸다.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총사대원들의 가슴속은 견딜 수 없는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루이 남작님!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뭔가 수를 내야 합니다."

얼굴에 검뎅이를 묻힌 총사대원 하나가 눈빛을 빛내며 루이 남작의 팔을 잡았다.

"그래, 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느냐?"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를 보며 루이 남작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 있어 하는 얼굴을 보니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있는 거 같았다.

총사대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몇몇이 모여서 한쪽으로 사라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 루이 남작은 빗발치는 공격 속을 헤치고 가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무엇이든 꼭 성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콰쾅!

"이런 젠장! 마법사들까지!"

화이어 볼이 작렬한 곳의 초소가 날아갔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모두 죽었으리라.

오늘 따라 주먹이 벽을 치는 일이 많아졌다.

"역시나 황제의 군대는 호락호락하지 않군!"

"예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기야 하지. 어쨌거나 우리 쪽 병력은 잘 감춰두었겠지."

"네, 몽셀 공작님! 길잡이를 빼놓고 저희 쪽 병력은 지시하신 대로 대기하고 있습니다."

"좋아, 제라드 백작! 이번 일은 자네의 군사들이 얼마나 재빠르게 움직이느냐 달렸어!"

"심려하지 마십시오. 전선을 지키던 최정예 병사들입니다. 하나하나가 일당백을 자랑하는 자들이니 거사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이제 로베니아에 몇 남지 않은 경험 많은 백전노장 제라드 백작이 자신 있게 가슴을 두드리자 주름진 몽셀 공작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래, 그래야지! 반드시 앙뜨네트 황후마마를 옥좌에 올려야 해! 그것만이 이 로베니아 제국을 바로 세우는 길이야!"

노인답지 않은 투지를 불태우는 몽셀 공작을 보며 제라드 백작도 주먹에 힘을 실었다.

평생을 제국을 위해 싸워왔지만, 결국 변방으로 내쳐진 자신의 굴욕을 새로운 로베니아 제국의 여제가 바로 세워줄 거라 생각하니 그도 이 거사에 반드시 성공하리라 스스로 다짐했다.

내성의 성벽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두 사람 뒤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셀 수 없이 늘어서 있었다.

몽셀 공작은 황제의 궁을 공격하기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치루며 죽어가는 롯셀리니 추기경의 아크나무아 교도들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 롯셀리니 추기경이었다면 몽셀 공작의 병력이 없다는 것을 의심해 보았을 테지만 교단의 사도들에게 영혼을 말살당한 롯셀리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던 쟝은 조급함을 드러냈고 그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황제의 궁을 점령하고 아크나무아의 신물을 시간의 틈에서 꺼내와 교단에 자신의 공적을 내세울 생각뿐이었다.

사실상 낙인에 대한 회수가 어려워진 상태에서 이것만이 추궁을 면할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몽셀 공작 쪽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시끄러워! 케론스, 네가 케린버그에서 똑바로만 했어도 우리가 이 고생을 할 리가 있느냐? 다 네놈이 멍청해서 애써 키워온 교단의 정예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거다. 네 녀석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

괜히 나섰다가 망신만 당한 케론스는 케린버그에서 도망치다시피 하여 교단으로 돌아온 뒤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자신의 형인 쟝이 추기경이 되어서 크게 기뻐했지만, 케린버그에서 공작을 실패하고 돌아온 그를 쟝은 냉대했다.

요즘 들어서는 차라리 케린버그에서 공작의 자리에 있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팔을 로베르트가 잡아 당겼다.

한소리 하려던 그에게 고개를 저어보이며 더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다.

두 사람은 이제 아크나무아 교단에서 귀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의욕을 잃은 두 사람은 치열한 전투의 한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마치 상관없는 일에 끼어든 사람들 같았다.

낯 설은 소리가 귀를 거스르면서 황제의 궁을 방어하던 총사대 눈길을 끌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뭔가?"

"좀 오래되었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합니다."

뭔가 방법이 있다며 동료들을 데리고 사라졌던 부하가 오래된 무기를 끌고 나타났다.

"맞습니다. 루이 남작님! 저도 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위력 하나만큼은 확실합니다."

총사대 부대장인 쟝미르도 동의하고 나서자 루이 남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은 돌멩이 하나 아쉬운 처지였다.

색이 바랜 커다란 금속 원통에 그보다 더 색이 바랜 바퀴 두 개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성벽의 모루로 굴러갔다.

수십 명이 달라붙어서 밀었지만, 더디게 움직였다.

오랜 세월 관리를 하지 않아서 바퀴에 녹이 슨 것이었다.

루이 남작은 회의적인 눈으로 무기를 바라보았지만, 쟝미르는 그렇지 않았다.

그 무기를 가져온 총사가 마나석을 원통의 아래에 나 있는 홈에 끼워 넣자 마나석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성벽 위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원통의 입구가 반역도의 무리 한가운데 겨누어졌다.

"모두 귀를 막아라! 귀를 막아!"

어리둥절하게 눈치를 보는 루이 남작의 귀를 쟝미르가 두 손으로 막게 만들었다.

옛 전쟁에서 그 무기를 본 적이 있는 노병들은 모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 모양을 보고 모두들 귀를 막고 엎드렸다.

번쩍!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섬뜩한 기운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검술의 대가인 루이 남작이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마나의 파동이 강했다.

조심스럽게 모루 넘어 광장을 쳐다본 루이 남작의 눈에 찢어질듯 커졌다.

"이, 이럴 수가!"

놀란 토끼눈으로 쟝미르를 쳐다보자 그의 늙스구레한 얼굴에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광장을 뒤덮고 있던 아크나무아 교단의 사제복을 입고 있던 반역도의 절반 이상이 숯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광장은 그야말로 불지옥을 연출하고 있었고 황제의 궁으로 그 어떤 공격도 날아오지 않았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을 대패시키자 총사대원들이 하늘 높이 함성을 질렀다.

"어떻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내가 몰랐지?"

"지난 일년전쟁 때 이후로 폐기 처분된 무기입니다. 엄마곰이라고 부르는 마나포입니다. 마나석의 마나를 빨아들여서 주변의 대기를 터뜨리는데 일단 한번 작동되면 그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쟝미르의 설명에 루이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되지 않아.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왜 폐기시킨 건가?"

"그것이 강력한 위력에 비해서 문제점도 심각하여 실전에 많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전 배치가 취소된 것입니다."

"문제점이라니?"

"연속 사용 시 폭발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뭐? 얼마나?"

깜짝 놀란 루이 남작을 보고 쟝미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문제입니다. 일정치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세 번일 수도 아니면 두 번일 수도 그렇지도 않으면 전혀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게 이 무기의 문제점이라서 폐기된 것입니다."

쟝미르의 설명에 자신들이 운이 좋았다는 것을 깨달은 루이 남작은 마음의 한번 발사해서 적들을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해야만 했다.

"서쪽의 앙리 백작님에게도 도움이 될 텐데......."

쿠와앙!

황제의 궁 서쪽 성벽에서 조금 전 울렸던 똑같은 포성이 들리자 쟝미르와 루이 남작은 미소를 지었다.

"저쪽도 이미 알고 있었군!"

"전쟁에 참가했던 자들이 많으니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반란은 진압되어 가는 건가?"

"네, 남작님!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야. 모두 황제 폐하의 은덕일 뿐이다."

루이 남작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발렝 황제에 대한 믿음으로 똘똘 뭉친 총사대는 자신들의 주군이 돌아올 때 지 이곳을 지키리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 * *

"무슨 소리지? 유모, 아이들을 보내서 어서 알아보도록 해요?"

"황후 마마! 전쟁터의 일은 숙부님에게 맡겨두십시오. 사람의 목숨이 벌레 목숨보다 허술해지는 전쟁터입니다. 어찌 소란스럽지 않겠사옵니까?"

그녀를 어릴 때부터 돌봐온 유모는 평정심을 잃으려고 하는 앙뜨네트 황후를 달랬다.

뭔가가 터지는 커다란 폭발음에 책을 읽으며 애써 태연했던 앙뜨네트 황후의 몸이 벌떡 일어서며 당황했던 그녀는 유모의 태연함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그랬다, 그녀의 말처럼 이것은 전쟁이었다.

상대를 죽여야만 우리가 사는 잔인한 규칙아래서 움직이는 게임이었다.

가슴에 책을 꼭 끌어안은 그녀의 몸이 조금씩 떨렸다.

진정이 되지 않는지 그 떨림은 점점 커져갔다.

풍만한 몸을 가진 유모가 그녀를 끌어안을 때까지 그 떨림은 계속되었다.

그녀의 떨림은 갑작스럽게 그녀의 귀에 울리는 병사들의 비명과 전쟁터의 끔찍한 소리들 때문이었다.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공포에 그녀는 두려움에 떤 것이다.

따스한 유모의 체온 덕분에 환상에서 빠져 나온 앙뜨네뜨는 겨우 안색을 되찾았다.

"유모, 나 말이지... 아마도 지옥에 떨어지겠지?"

처연하게 넋두리 하는 앙뜨네트의 모습은 제국의 황후로서가 아니라 한 여인으로서 소박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던 유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마마! 지옥 갈 사람들은 마마에게 이런 선택을 강요한 악마들이겠지요."

유모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앙뜨네트는 두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많은 이유와 명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그녀가 힘을 보탰다는 사실을 버거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게임을 하기에는 너무나 심약한 여인이었다.

차라리 음모에 밝고 간계에 능한 모진 여인이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 유모는 착하기만 한 앙뜨네트의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줄 길이 없어서 괴로워했다.

"마마, 헤나의 무녀들이 도착했사옵니다!"

그 소리에 그녀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그런 그녀의 몸을 유모가 끌어안았다.

"힘드시면 지금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마!"

유모의 말처럼 굳이 지금 시간의 틈으로 갈 필요는 없었다.

"아니야, 병사들의 비명소리를 듣는 것보다. 의식을 행하는 게 오히려 더 편하겠어. 지금 해요, 유모!"

입술을 깨물고 드레스 자락을 들고 일어선 앙뜨네트는 어느새 제국의 황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모도 대견스럽다는 얼굴로 일어섰다.

"가요, 제국을 위해서 그리고 폴렌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치열한 전투를 뒤로 하고 로베니아의 황후 앙뜨네트는 자신만의 전쟁을 위해서 제국의 금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으으으!"

사방에서 살려달라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롯셀리니 추기경으로 위장하고 있는 쟝도 눈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뭔가 엄청난 충격파가 자신들을 휩쓸고 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상황을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쿨럭쿨럭! 도대체 그게 뭐였지?"

힘겹게 검을 의지해 몸을 일으킨 롯셀리니는 소리를 질렀다.

"아, 안 돼!"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악몽이었다.

수십 년 동안 공들여 키워 놓은 아크나무아의 정예들이 숯덩이로 변해서 널브러져 있었다.

귀에서 흘러내리는 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그의 몸을 누군가 덮쳤다.

퍼버벅!

눈에 익은 사제복을 입은 걸로 보아 자신의 수하가 틀림없었다.

그 등에 화살 수십 발이 박히는 동시에 눈에서 생명이 빠져나갔다.

털썩!

가죽부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사내의 차가운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승기를 잡은 총사대에서 무차별 적으로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그나마 살아남은 부하들이 속절없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자신의 문책 받아 영혼이 소멸당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자신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결과물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쓰러져가는 모습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뒤 쪽에서 케론스와 로베르트가 꽁무니를 빼는 거도 상관하지 않았다.

광장 안을 가득 채우는 부하들의 시신만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왜? 왜!"

울분을 토하는 그의 눈이 내성으로 향했다.

그의 눈은 대답을 원하고 있었다.

전투의 결과는 그들이 말한 것과는 너무나 다르게 진행되었다.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실수 했는지 깨달은 롯셀리니는 자신의 두 눈을 파내버리고 싶었다.

"허허허! 저 친구가 꽤나 열 받은 모양인데요."

"그럴 만도 하겠지, 제라드 백작이라도 그렇지 않겠나?"

몽셀 공작이 담배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연기를 내뿜었다.

공작의 말에 제라드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라도 저런 식으로 배신을 당한다면 결코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제라드 백작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고갯짓을 하자 수많은 갑옷들이 소음을 내며 사라졌다.

"푸후~ 자네 말대로 저들이 저 망할 마나포를 사용했군."

"저라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비록 위험 부담이야 있지만, 효력은 확실하니까요."

"그렇군, 하지만 우리 병력을 움직이기 전에 한 번도 사용하게 해야지 않을까? 그래야 저 망할 마나포가 스스로 터질 기회가 되지 않겠나?"

걱정스러운 몽셀 공작의 말투에 제라드 백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저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마나포를 또 사용하겠습니까?"

제라드 백작의 자신 있는 말에도 몽셀 공작은 아니라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닐세, 사람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것이 바로 인간의 무서운 점이지. 미안하지만, 롯셀리니 추기경이 한 번 더 희생을 해주어야겠어. 병력은 투입하지 말고 공성 무기로 저들에게 숨 쉴 틈을 주고 그 사이 남은 병력으로 성벽을 점령하라고 전하게. 어차피 이제 와서 우리의 의도를 알았다고 해도 별다른 도리가 없을 테니까."

담배 연기 속에 파묻힌 몽셀 공작의 음성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아크나무아 교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하물며 롯셀리니와 약속했던 그들 교단의 신물을 넘겨줄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군례를 올리고 내성을 내려온 제라드 백작이 말에 오르자 내성에 대기하고 있던 정예 병력이 숨을 죽이고 나타났다.

성문이 열리고 반란의 주력 부대가 서서히 그 칼날을 드러냈다.

콰광!

"크아악!"

성벽 위가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적들의 거센 반격에 위험을 무릅쓰고 마나포를 재작동시켰다가 우려했던 문제점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발사한 후에 폭파했기에 피해가 이 정도였지, 발사하기 전에 마나가 충만한 상태에서 폭발했다면 근위대 병력은 전멸했을지도 몰랐다.

"젠장! 겨우 두 번도 못 버티다니!"

근위대장 앙리 백작이 노성을 토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금세 지리멸렬하던 반란군에게 지원부대가 나타나면서 근위대가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쪽에서도 똑같은 폭발소리가 들리자 앙리 백작이 깜짝 놀라서 성벽 경계탑으로 달려갔다.

"빌어먹을!"

건틀렛을 낀 손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벽을 쳤다.

폭발음이 난 곳은 총사대가 수비를 하고 있는 동쪽 벽이었다.

그들도 똑같은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앙리 백작은 답답했다.

마법통신마저 차단된 상태에서 각 군단장들에게 연락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추기경에게 무엇을 약속했기에 아크나무아 교단이 미쳐서 반란을 일으켰는지 몰라도 앙리 백작은 정말 무서운 것은 저 뒤에 도사리고 있는 몽셀 공작의 흉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약삭빠른 늙은이가 겨우 이 정도 준비로 거사를 일으켰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십여 명의 전령을 성 밖으로 내보냈지만, 그들의 무사히 밖으로 나갔을지는 미지수였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버티고 있었지만, 점점 한계에 다가가고 있었다.

"추... 추기경님, 아크나무아에게 영광을... 끄으윽!"

화살받이가 되어 고슴도치가 된 교단의 기사 하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롯셀리니에게 축복을 받고자 마지막을 말을 채 다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대에게 아크나무아의 영광이 있기를 기도하네."

어제만 하더라도 교단에 당당히 신물을 손에 넣었다는 공로를 치하 받는 행복한 꿈이 지금 참담한 지옥의 풍경으로 변해버렸다.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은 롯셀리니 추기경의 머리위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추기경 행색이 말이 아니구려."

어디에 힘이 남아 있었는지 롯셀리니 추기경의 고개가 바람처럼 돌았다.

"허허허! 거 사람 눈빛하고는 심장 약한 사람은 무서워서 쓰러지겠네."

으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지만, 여전히 담배 파이프를 입에 문 몽셀 공작은 딴청을 부렸다.

"이 배신자!"

이번에는 몽셀 공작도 얼굴이 딱딱해졌다.

입에 문 담배 파이프를 내려놓은 몽셀 공작은 마차의 문을 열고 롯셀리니 추기경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배신자라는 말인가? 내가? 아니면 자네인가? 처음부터 나를 속인 것은 자네였지 않은가? 가짜 추기경 나리!"

"헉! 어, 어떻게?"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버린 추기경에게 몽셀 공작은 담배 파이프를 흔들어보였다.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려면 그 사람의 습성까지도 파악했어야지. 자네는 어리석게도 껍데기는 추기경이었지만, 행동은 쟝 끌란 자신 그대로였지. 역겹더라도 소녀들의 피를 빠는 파티를 계속했더라면 자네를 덜 의심했을 텐데. 쯧쯧쯧!"

마차의 문이 닫히며 바퀴가 구르려 하자 추기경이 급히 마차의 문에 매달렸다.

"자, 잠깐! 나는 어찌되어도 좋소. 그러나 약속했던 신물은 넘겨주시오. 제발 부탁이오!"

애절하게 매달리는 추기경을 바라보는 공작의 눈에는 일말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마차가 매정하게 움직이자 추기경이 바닥을 굴렀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발이 보였다.

"공작님께서 종교인들의 최후는 순교가 가장 어울리다고 전하라 하셨소!"

기사의 말을 들은 추기경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개자식!"

푹!

기사의 검이 심장을 찌르자 굴곡 많았던 아크나무아의 사제였던 장 클란도 롯셀리니 추기경보다 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의 염원인 아크나무아의 미래는 빛을 잃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보기에는 그렇게 보였다.

< 작가의 주 >

약 11세기부터 대포라고 말할 수 있는 무기들이 동양과 서양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화약을 이용하여 폭발하는 포탄은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처음으로 12세기에 전쟁에 등장시켰습니다.

그에 비해서 유럽의 함포는 철로 만든 포탄를 멀리 날리는 방식이었습니다.

유럽의 역사를 보면 최초로 함포가 사용됐던 해전은 레판토해전으로 이 해전에서 사용된 함포는 함선을 격침시겠다는 목적보다는 위협사격에 가까웠습니다.

함포 사격으로 적함을 격침시킨다는 것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머리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적혀 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함포도 개발이 이루어 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함포와 포탄이 발전 거듭하면서 구형탄, 쇠사슬탄, 관탄, 포도탄등 여러 종류의 실제적인 공격이 가능한 포탄들이 전쟁에 쓰이게 됩니다.

이처럼 제대로 된 함포가 전쟁에 사용된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18세기 무렵부터입니다.

이 챕터에서 총사대와 근위대 병사들이 폐기 처분된 마나대포를 사용하는데 이 마나대포의 모델이 된것은 중세시대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거대한 대포를 모델로 했습니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포문이 열리면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없다고 합니다.

이 대포에 대해서 언급을 한 책들 중에 몽고메리 장군 저(著) '전쟁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중세의 거대한 대포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정확하게 이 대포의 이름은 밝히지 않고 대포의 성능과 제작 및 활용 등에 대한 이야기만 나옵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라는 역사소설인데 거대한 대포 혹은 엄마곰이라는 명칭으로 쓰인 이 대포의 위력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수도 아드리아노플에서 성능실험이 있었을 때, 그 포격 소음에 놀란 어느 임산부가 유산했을 정도로 그 포격음이 컸고, 그 소리는 드리아노플에서 한참 떨어진 먼 마을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합니다.

좀 과장된 면도 없지 않지만, 이 대포에 대한 또 다른 일화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는 '포탄이 떨어진 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간의 소문으로 이 대포의 제작자는 헝가리의 천재대포기술자였던 '우르반'이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원래 그는 기독교인으로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비잔틴의 황제에게 기독교를 수호하는 대포를 만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문전 박대만 당합니다.

그러나, 그가 크게 낙담하여 마지막으로 찾아간 오스만투르크 쪽에서는 황제였던 무라트 2세가 우르반의 설명과 설계도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리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그 거대한 대포가 중세 전투 전술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주게 된 겁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무겁고 큰 이 대포는 이동하기에도 또한 발사하기에도 너무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위력은 엄청났지만, 사용하기가 너무 힘든 양날의 칼과 같았죠.

결국, 나중에 서유럽 등지에서 개발되어진 가볍고 이동과 발사가 간단하며, 시간이 좀 더 흘러 기술의 발달로 좀 더 강력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신형 대포들에게 밀려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너무 강력해도 사용하기가 불편하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나 봅니다. 마나포의 운명도 이와 같이 묘사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