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결과가 있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있는데 신성력도 마법도 아예 듣지 않고 있습니다."
마법사가 힘이 다한 듯 얼굴로 병실에서 나오며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어렵게 말을 꺼낸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사라졌다.
"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글쎄다. 우리가 할 일이 별로 없으니 나도 답답하구나."
"녀석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죽었을 거예요? 게다가 녀석에게서 세 번째 낙인이 나왔고요? 무슨 일일까요?"
호크가 많이 상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자 여기저기 찢어진 로브를 입고 있던 사이클론도 피곤한지 복도의 벤치에 몸을 던졌다.
"성자께서 다시 태어나신 거다!"
복도 끝에서 들린 난데없는 목소리에 호크의 몸이 반사적으로 튕겼다.
제로까지 꺼내든 그의 손을 머스탱 공작이 잡아당겼다.
"진정하게. 장군, 진정해! 우리라고... 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샹그릴라의 베르트니 기사단장 이었다. 그가 머스탱 공작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베르트니가 병실 문에 손을 잠시 올려놓더니 호크를 향해서 돌아섰다.
" 쥬의 믿음이 도리어 배신하며 그의 마음이 사악하매 아나무나크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폴렌시아의 반석인 성자가 나도다."
베르트니 기사단장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지만, 머릿속에 각인된 말이 나오자 호크와 사이클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호크의 목소리가 거칠게 대답하자 사이클론이 등을 토닥였다.
"자자, 싸우자는 것이 아니잖아. 베르트니 경, 당신의 말은 세 번째 예언이 실행되면서 저 아이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사이클론님! 이제 성자는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저 불쌍한 아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베르트니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하자 호크가 펄쩍 뛰며 소리를 질렀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베르트니 단장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 당신은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잖아! 이곳에서는 그 추잡한 짓을 하지 못하니까, 당신들 본거지로 데려가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건가? 저 어린 녀석을 끝내 죽여야겠어?"
말리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호크가 베르트니 단장을 어떻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베르트니는 조금도 흔들림 없이 호크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내가 한 짓이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이제 그것도 늦었네. 예언은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었고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어. 우리는 그저 운명을 따라갈 수밖에 없단 말이네."
베르트니의 말에는 그 어떤 거짓이나 꾸밈이 없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초연한 자의 모습이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 쉽게 이야기해봐요."
훨씬 누그러진 호크의 말에 베르트니도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듯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네 번째 낙인은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성스런 돌이 샹그릴라를 떠나지 아니하매 폴렌시아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길 바라매,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단 말일세.
그 아이는 통곡의 벽 전투에서 자신이 샹그릴라의 성자임을 자각했네. 불행하게도 말이야.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 인간을 배신하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충격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거지. 이제 그 아이는 샹그릴라로 가야만 하네. 그것만이 그 아이를 살리는 길이야."
베르트니 단장의 말에 호크는 주먹으로 벽을 쳤다.
"빌어먹을! 그런 개소리는 내가 듣다듣다 처음 듣는군. 운명을 따른다니 그런 헛소리를 내가 들을 것 같아? 결국 그 예언대로 이 세상을 끝장내자는 거야, 뭐야?"
악을 쓰는 호크를 보며 오히려 베르트니가 비웃음을 흘렸다.
"자네야말로 이기적이군그래, 알렉스 호크 경?"
베르트니 단장의 도발에 호크의 눈썹도 꿈틀거렸다.
"그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면 당신은 오늘 나한테 끝장 날 줄 알아!"
그러나 베르트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호크의 모습을 보고 역겹다는 얼굴을 했다.
"정말로 저 아이를 걱정하는 것인가? 웃기는군. 이제 자네는 낙인을 세 개나 모았어. 그렇다는 것은 자네도 어쩌면 예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운명 중 하나라는 것이겠지. 이제 하나만 모으면 자네가 원하는 나라는 파멸의 저주에서 살아남게 될 텐데 왜 그렇게 흥분하지? 오히려 예언이 하루 빨리 실행되어야 좋은 것 아닌가?
아니지, 성자가 죽든지 말든지 자네는 상관이 없겠군. 성자가 죽어서 예언이 멈추든지 그도 아니면 어차피 자네 손에 인류의 운명이 들어올 테니 뭐든 자네 마음대로 아닌가? 내 눈에는 자네의 행동이 위선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언제까지 연극을 할 텐가?"
냉랭하게 내뱉은 베르트니의 말에 호크는 당혹한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전투로 그런 생각을 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니,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었을까?
호크의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흘러갔다.
호크의 얼굴빛이 수없이 변했고, 뒤로 물러서던 호크는 딱딱한 벽이 등을 가로막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지며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두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 쥔 호크가 괴로운 듯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잠시 우리끼리만 있게 해주시겠소. 금방 결정을 내리리다."
사이클론의 부탁에 머스탱 공작이 베르트니를 데리고 나갔다.
벤치에 한동안 앉아 있던 사이클론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호크 옆에 주저앉았다.
"너랑 처음 잉글햄의 여인숙에서 만났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네가 나를 물건 파는 사람으로 오해했었지?"
사이클론이 옛 추억을 떠올리자 고개 숙인 호크의 입에서 큭큭큭!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우!"
겨우 고개를 들어 올리자 호크의 양 볼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할아버지가 내 팔목에 그 통역 팔찌를 채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저냥 살고 있었을까?"
푸념석인 호크의 넋두리에 사이클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야말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또 하릴없이 대륙을 헤매고 다녔겠지. 그리고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8써클의 대마법사가 될 수도 없었을 테고, 그냥저냥 허무한 삶을 후회하다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운명이었을 거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추억들을 거슬러갔다.
그 속에는 웃음도 있었고, 슬픔도 있었다.
자신에게는 한 개인의 삶이요 살아온 이야기였지만, 삶이란 그 속에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가 함께하는 살아있는 생물 같았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그렇지? 사람의 인생만큼 재미있고 슬픈 이야기가 없다고들 하잖니."
"누가 한 말인지 참 멋지다!"
호크가 기분이 많이 풀어졌는지 얼굴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얘야!"
사이클론의 부름에 호크는 이미 그의 뜻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저도 베르트니 단장의 말이 옳다는 것을요. 다만 제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던 거 같아요. 결국 세상은 저 혼자 아등바등 거린다고 되는 게 아닌 걸요."
내심 호크가 고집을 부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던 사이클론의 얼굴이 밝아졌다.
"신의 예언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봐야죠."
로베니아가 잠시 진군을 멈추는 듯하더니, 다시 전열을 정비해서 북상한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다.
정보부의 분석으로는 상당한 피해를 입은 로베니아군에게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했지만, 생각보다 로베니아는 강했다.
정보부의 분석보다 열흘이나 빨리 로베니아는 진군을 시작했다.
"정말 무섭고 지겹구나. 제국이란 것은 말이야."
"네, 그러니까 제국이겠죠."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선 호크가 창문 밖에 노을 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또 손에 피를 묻히러 가야겠어요. 제발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빌어야죠."
"그래, 나도 그게 소원이다."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이 복도를 빠져 나갔다.
잠시 뒤를 돌아본 호크는 마음을 다잡고 문을 열고 빠져 나갔다.
'스톤, 너도 강한 녀석이니 이겨내리라 믿는다. 신의 운명이니 하는 따위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호크의 간절한 마음의 기도를 들었는지 스톤이 잠들어 있던 방에서 스톤의 대답소리가 들려나온 듯했다.
그날 밤, 로이든 성에서 많은 병력들이 헤나스톤을 향해서 움직였다. 마지막 최후의 전쟁을 위해서 두 나라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동원했다.
이젠 죽거나 살거나 둘 중에 하나만 남았을 뿐이다.
* * *
저 멀리 헤나스톤이 보이기 시작하자 로베니아 진영에서 척후병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전과 달리 척후병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그만큼 자존심이 상할지언정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로베니아의 각오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회색 바위만 존재하는 기이한 헤나스톤의 광경에 로베니아의 척후병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어디 하나 몸을 숨길 풀 한 포기 없는 암반 지역에 들어서자 척후병들은 고심했다.
"조장님,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이곳에 적이 있다면 차라리 우리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게 낫다. 이런 곳에서 기습을 받는다면 피해가 엄청날 거야, 더구나 이곳은 기간테스를 움직이기도 힘든 장소다. 우리가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의 매복을 알아내야 한다. 모두 전력을 다해서 수색하라!"
수색조 조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비장한 각오를 한 채 검을 꺼내들고 헤나스톤의 암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하얀 캔버스 위에 개미떼들이 기어오르듯이 점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헤나스톤에 감춰진 비밀을 찾기 위해서 로베니아의 수색대는 사력을 다했다.
"후! 이런 바위산은 처음 본다."
"하다못해 잡초라도 있어야 정상인데 저주 받은 땅 같아요."
대원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수색대를 책임지고 있는 조장은 허탈한 표정이 되었다.
적어도 케린버그에 아직은 병력이 남아 있을 테고 아니, 분명히 쥐어짜서라도 병력을 모아서 로베니아와 적대할 것이고.
그렇다면 최적의 방어지는 이곳인데 이렇게 조용하다니 맥 빠지는 일이었다.
"케린버그는 이미 전쟁을 포기했다는 인상이 보이지 않습니까? 조장님!"
"그렇기도 하겠지. 하지만 통곡의 벽에서 보여준 그 지독함을 생각한다면 정말 기운 빠지는군. 어쨌든 우리 임무는 계속해야지, 본진에 보고해라! 헤나스톤은 깨끗하다고. 상황 종료하고 자리를 뜬다!"
로베니아의 수색대는 나타날 때보다 더 재빨리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자 몇 군데 바위들이 흔들거리며 움직였다.
"적 정찰병들이 사라졌습니다."
고개를 살짝 내밀었던 병사가 작게 속삭이자 바위 속에서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흔적이 남지 않게 다시 위장해라!"
고개를 내밀었던 병사는 조심스럽게 다시 바위를 움직여 겉에서 보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보였다.
지난겨울 동안, 쉬지 않고 작업한 결과가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시기적절하게 써먹게 된 것이었다.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각하!"
"나도 알고 있다. 그동안 케린버그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레센의 병사들은 빚을 갚을 준비가 되었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봄멜 공작님! 모두들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른하트 기사단장의 씩씩한 보고에 반 봄멜 공작의 입술이 악다물어졌다.
통곡의 벽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몇 번이고 달려가려고 했는지 모른다.
군인에게 기다림이란 엄청난 고문이자 고통이었다.
전선에서 날아오는 소식을 들으며 그는 좀이 쑤셔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것은 봄멜 공작뿐이 아니었다.
로베니아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온 레센의 병사들은 눈동자 안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로베니아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레센의 병사들은 하루하루가 더디기만 했다.
그런 그들에게 로베니아의 수색대는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살기로 가득 차며 팽팽한 긴장감이 일대를 뒤덮었다.
"드디어! 모스크 산맥의 복수를 하게 되는가? 드디어!"
검의 손잡이를 움켜쥔 봄멜 공작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 * *
"황제 폐하, 리하나 요새와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원정은 불길한 징조가 너무 많습니다. 다시 한 번 심사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트리쉬엥 제2군단장이 조심스럽게 발렝 황제의 의사를 살폈지만, 결국 황제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만 확인할 뿐이었다.
"마법사들이 게으름을 피운 것이겠지. 예비부대도 아무 일 없이 도착했는데 무슨 일 있으려고, 서둘러 케린버그 잔당을 쓸어버리고 레센을 지도상에서 지운다. 그것만이 이 원정에서 나 루이 드 발렝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는 유일한 길이야."
확고부동한 황제의 의지에 트리쉬엥 군단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이 달아날지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트리쉬엥이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케린버그는 몰라도 레센은 다시 한 번 심사숙고를 하심이 좋을 듯하옵니다. 게다가 수도를 오래 비워두는 것도 불안하옵니다. 황제 폐하께서 안 계시는 수도에 만약에 무슨 일이라도......."
-뿌우우~
전방에서 급하게 나팔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트리쉬엥 군단장의 말문이 끊겼다.
군대가 숲을 벗어나니 회색의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졌다.
바로 로이든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헤나스톤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세계, 풀 한 포기조차 없는 헤나스톤은 로베니아 병사들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음산하기 그지없는 풍경에 황량한 바람까지 부니 그야말로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로베니아 진영까지 불어왔다.
트리쉬엥 군단장의 오감이 위험을 알려오고 있었다.
찌릿! 찌릿!
번갯불에 몸이 맞은 듯 헤나스톤에 발을 들이지 말 것을 그의 본능이 쉬지 않고 경고하고 있었다.
"폐, 폐하! 이것은 생각보다 훨씬 좋지 않습니다. 기습 받기 너무 좋은 위치입니다. 우선 선발대를 보내심이......."
"닥쳐라! 트리쉬엥, 그대는 제국의 군단장이라는 사람이 입만 열면 죽는 소리구나, 지금 그대의 모습이 겁에 질린 아낙네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말 한심스럽구나. 이미 수색대가 정찰을 마쳤거늘, 에잉! 꼴도 보기 싫다. 에밀리앙!"
"하! 황제 폐하!"
오크만한 몸집의 거대한 장수가 고개를 숙이자 트리쉬엥 때문에 기분 상한 발렝 황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2군단장이 겁을 먹었으니 너의 3군단이 진격해주어야겠다. 자신 있느냐?"
"하! 소장 황제 폐하의 명령이라면 지옥의 불길에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크하하하! 그래 바로 그거야! 하하하!"
발렝 황제는 새로이 임명된 제3군단장 에밀리앙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트리쉬엥 군단장에게 눈을 흘기며 검을 꺼내 에밀리앙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제3군단 병력이 별다른 사전 조치 없이 헤나스톤의 좁은 길목으로 들었다.
황제에게 미운 털이 박힌 트리쉬엥이었지만, 그래도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했다.
서둘러 자신의 기사단과 궁수들을 바위산 위로 올려 보냈다.
그제야 황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오만한 황제는 통곡의 벽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루며 얻었던 교훈을 모두 잊었는지 전혀 조심성이 없었다.
애꿎은 지휘관들만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녀야만 했다.
새로이 임명된 3군단장 에밀리앙은 전과를 올려 황제의 신임을 받기 위해서 공명심에 눈이 먼 나머지 군인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자신의 말마따나 지금은 황제가 불속에 뛰어들라고 해도 시늉이라도 해야만 할 때였다.
변덕이 심한 황제가 언제 자신을 군단장에서 문지기로 내칠지 모르기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기 위해서 그는 몸부림 치고 있었다.
로베니아의 자랑스런 장갑보병과 기병들이 헤냐스톤의 길목에 접어들자 고요하던 일대가 소란스러워졌다.
수많은 병력들이 발걸음을 서둘러 움직였다.
그들도 이 음산한 지역에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병사들도 불안한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나마 바위산 위를 점령하고 있은 2군단 소속의 기사단과 궁수를 보며 안심할 뿐이었다.
저 바위산에 있는 것이 적군이라면,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 펼쳐질 것을 생각하자 잠시 머릿속에 그런 상황을 그려본 병사들이 겨울도 아닌데 몸을 떨었다.
"후후후후! 나의 구원자 나리께서 아주 똑똑한 것이 정말 다행이야. 이로써 저 어리석은 황제도 오늘로 끝장이군!"
"헉! 주,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제국을 돕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크리시앙 대공의 말에 그의 몸종 루스펠이 경악하며 마차를 몰던 손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마차 지붕 위에서 한가로이 와인 잔을 기울이던 크리시앙은 콧방귀를 뀌었다.
"어리석은 소리! 자네는 아직도 제국을 위해서 싸우고 싶은가?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데. 그 잘난 제국 때문에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자네는 아직도 제국에 충성하고 싶은가?"
냉소하는 크리시앙의 말에 루스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크리시앙의 말속에서 아주 무서운 것을 보고 말았다.
설마 했지만, 지금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의 주인이 그 오랜 세월동안 가슴속에 쌓인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것인지 깨달았다.
"주, 주인님은 설마......."
"후후후! 나하고 오래 살았으니 지금쯤 내 뜻을 눈치 채겠지? 그때 이 따위 세상은 없어졌어야 했어. 내가 어리석게도 영웅 심리에 빠져서 나설 필요는 없었단 말이지. 잘못된 일은 바로잡으면 그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대륙에 로베니아라는 제국은 필요하지 않지. 그 시작이 바로 오늘이야. 오늘 바로 이 장소!"
와인 잔을 단숨에 비운 크리시앙이 마차 지붕 위에 당당히 서서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크리시앙의 눈동자를 보며 루스펠은 귀를 막고 몸을 떨어야 했다.
자신의 주인이 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것을 깨달은 루스펠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가 예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겨우 알았다.
그는 인간이 아닌 악마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앞에 헤나스톤으로 들어가는 제국의 병사들을 보며 루스펠은 조용히 명복을 빌어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주인의 표정으로 보아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 신의 가호를! 아니, 아니지, 신은 저들을 버리지 않았는가? 비참하군. 누구에게 저들의 명복을 빌어야 하지?'
루스펠은 고개를 흔들며 마차를 멈춰 세웠다.
더 이상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지만, 그의 주인이 좀 더 높은 곳으로 마차를 움직이라고 명령해서 어쩔수 없었다.
살육의 현장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말에 루스펠은 그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기적이지만, 그도 이제 이 지겨운 영원의 삶을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영원히 죽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그 역시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언덕위에 마차를 세운 루스펠은 자신의 부도덕함을 감추기라도 하려는지 로브의 후드를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을 감췄다.
"큭큭큭! 자, 파티가 시작되는군!"
크리시앙의 말에 어깨를 흠짓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후 루스펠은 자리를 뜰 때까지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슈아아악!
퍼펑!
퍼퍼벅!
"기습이다! 기... 커헉!"
바위틈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화살세례에 제국의 병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뒤늦게 장갑보병들이 일반 보병들을 보호하며 방패를 들어 막아서자 피해가 줄었지만, 기습의 피해는 컸다.
바위산 위에 있던 2군단 병력이 기겁을 하고 중턱에서 쏟아지는 화살무리를 발견하고 뛰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은 뒤였다.
"어서 막앗!"
2군단 병력들이 정상에서 급히 뛰어 내려와 바위틈을 뒤졌을 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뭐, 뭐야?"
"천인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나는 듯이 바위에서 뛰어 내린 2군단 보병부대 세릴 천인장은 바위틈을 들여다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그곳에는 그들이 기대하던 적의 병사들이 아니라 기다란 원통 수백 개가 벌집 모양으로 원형을 이루고 있는 기계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미 화살을 모두 토해냈는지 윙윙! 거리는 소리만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세릴은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겨우 이런 속임수에 당하다니, 도대체 수색대는 뭘 했기에 이런 것도 발견하지 못한 거야?"
애꿎은 수색대를 탓할 필요는 없었다.
이 기계는 로베니아의 수색대가 철수하고 나서 설치된 무기였다.
결국 세릴은 분을 참지 못하고 수하 병사의 배틀엑스를 빼앗아 화살을 자동으로 발사하는 기계를 내리쳤다.
그래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이를 악다문 세릴의 배틀엑스가 힘껏 머리 뒤로 젖혀졌다.
콰광!
바위산 계곡에 여러 곳에서 비슷한 폭발음이 들리며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2군단 병력들이 화살을 발사하는 기계를 발견하고서 이를 제거하기 위해 기계를 건드리는 순간, 엄청난 화염과 함께 폭발한 것이다.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병사들은 화염과 함께 운명을 달리 해야만 했다.
"폐하 기습입니다. 군대를 뒤로 물려야 하옵니다."
트리쉬엥이 급히 발렝 황제에게 간언을 올렸지만, 발렝은 이 정도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의견을 무시했다.
"적의 잔당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 정도에 겁을 집어먹어서는 제국의 병사라고 할 수 없다. 계속 진군하라!"
발렝 황제의 굳은 결의에 제장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전진을 알리는 힘찬 북소리가 헤나스톤의 계곡을 울리자 병사들은 사방을 경계하며 전진했다.
2군단 소속의 병사들은 혹여 다시 있을지 모를 기습을 대비해서 바위 틈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한번 크게 당한 뒤로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이깟 잔장들의 도발에 기가 꺾일 내가 아니야. 어서 병사들을 독촉해라! 이곳만 넘으면 그 빌어먹을 케린버그의 로이든이다! 누구든 먼저가 가서 차지하는 자가 주인이다! 서둘러라!"
독을 품은 발렝 황제의 명령에 전우들의 시신을 밟고 병사들은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이게 저 언덕만 넘으면 곧바로 로이든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 지긋지긋한 전투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한 생각은 같았다.
고향을 떠올리자 전부 없던 기운도 샘솟았고 병사들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전차들이 폭이 좁은 길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자 전차대 뒤에 선 기병들은 속도를 맞추느라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는 발렝 황제도 조급한 마음에 계속해서 지휘관들을 재촉했다.
만약에 비라도 내렸다면 최악이라고 생각하던 트리쉬엥이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자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의 생각처럼 비라도 내리는 건가 하고 그러나 하늘이 어두워지건 것은 비가 아니라 적의 대 공세였다.
"적이다!"
콰아아아!
그림이 한 장, 한 장 그려지듯 움직였다.
사람들이 화염과 함께 하늘로 튀어 오르고 병사들의 악다구니가 천지에 가득했다.
옆에서 부관이 뭐라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지만, 트리쉬엥의 귀에는 그저 입만 뻐끔거리는 붕어처럼 보였다.
"군단장님! 군단장님!"
부관이 몸을 잡아 흔들자 겨우 현실세계로 돌아온 트리쉬엥 군단장의 귀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도 잔혹한 비명소리들만이 하나 가득이었다.
"빌어먹을! 능선을 확보해라. 능선을!"
트리쉬엥은 급히 말을 몰아 아비규환 속으로 뛰어들었다.
트리쉬엥의 명령을 받은 2군단이 다시 바위산 정상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미 그곳에는 낯선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잔인한 미소를 드리운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2군단 병사들이 낙엽처럼 쓰러져 갔지만, 트리쉬엥은 그들을 도울 수가 없었다.
좁은 길목에 갇혀서 우왕좌왕하는 병력들을 이 죽음의 계곡에서 빼내어야 했다.
그가 말을 달려 전장 깊숙이 들어오니 에밀리앙 제3군단장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뛰어난 전사이기는 하지만, 많은 병력을 인솔하기에는 그 자질이 부족했다.
바로 이런 위기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뭘 하는 건가?"
트리쉬엥은 애꿎은 병사들을 닦달하는 그를 질책한 후, 바퀴가 부서진 마차의 지붕 위로 뛰어올랐다.
마법사의 도움으로 그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한눈에 전황을 파악한 트리쉬엥이 현장을 통솔하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우왕좌왕하던 병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대항했고 후방에 있던 예비부대에서 능선을 확보하기 위해서 치열하게 교전하고 있는 2군단을 지원하자 양상이 급변했다.
게다가 기간테스들이 하나둘 어렵사리 움직이자 더 이상 로베니아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많이 들리지 않았다.
바위틈으로 마법사들의 마법이 쏟아지자 더 이상 날아오는 화살은 없었다.
트리쉬엥은 병력을 계곡에서 빼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부서진 전차나 마차는 기간테스들이 계곡 밖으로 밀어냈다.
그 바람에 병력들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숨통이 트이자 트리쉬엥 군단장은 능선의 전투로 눈을 돌렸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양측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저 녀석들이 여전히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통곡의 벽 전투가 저들에게 최후의 마지노선이 아니었다는 뜻인데, 도대체 케린버그 같은 작은 왕국에 이런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어!"
능선을 내주게 되면 헤나스톤 계곡에 갇힌 병력들은 꼼짝없이 당하게 되므로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전투였다.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는 것은 적은 병력으로 몇 배의 적군을 상대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나 다름없었다.
간간히 적군의 화염탄이 날아오는 것을 기간테스들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독안에 든 생쥐 꼴이 되고도 남았다.
트리쉬엥은 길가의 바위들을 부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순식간에 수많은 공병단과 기간테스들이 달라붙어서 길을 넓히기 시작했다.
공터가 생기자 트리쉬엥은 전차 몇 대를 그곳으로 몰았다.
비마스 몇 기가 자리를 잡자마자 공격준비를 시작했다.
공격 목표는 당연히 헤나스톤의 능선에 있는 케린버그 병사들이었다.
비마스들이 기계음을 내며 능선을 향해 번갯불을 뿜었다.
대낮에 하늘에서 마른벼락이 떨어지듯 번쩍거리며 일거에 적군들을 쓸어버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로베니아 병사들이 검을 높이 들고 환호했다.
트리쉬엥 군단장도 모처럼 주먹을 움켜쥐고 승리를 기뻐했다.
헤나스톤 계곡에 승리의 함성으로 흔들렸다.
"기뻐하기는 이르지, 이 냄새나는 제국 놈들아!"
로베니아 제국 병사들이 지르는 승리의 함성이 거친 함성에 밀려 사라졌다.
그리고 함성과 함께 늑대의 탈을 뒤집어 쓴 군인들이 로베니아제국의 군대를 덮쳤다.
기나긴 겨울 겨울잠을 자다 나온 독사처럼 맹독을 품고서 목 줄기를 물어뜯기 위해서 헤나스톤의 바위들을 밀어내고 동굴에서 쏟아져 나왔다.
바위들이 사라지고 동굴이 나타나서 놀란 것도 아니고 그 속에서 병사들이 튀어 나왔다고 해서 놀란 것도 아니었다.
로베니아 제국이 놀란 이유는 다름 아닌 그들은 정체였다.
"어... 어떻게 동토의 제국 레센의 늑대들이 어떻게 여기에?"
트리쉬엥은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센의 궁수들이 쏟아내는 화살이 자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레센 제국의 출현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트리쉬엥 단장님 제가 막겠습니다. 뒤를 부탁합니다."
에밀리앙 3군단장이 이를 악물고 휘하 기사단과 함께 바위산을 향했다.
능선을 장악한 2군단이 도와줘야겠지만, 그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작은 석궁을 발사하며 그들을 괴롭히는 케린버그 병사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기간테스는 뭐......."
예비대의 기간테스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려던 트리쉬엥의 입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기간테스 키만 한 장창들이 날아와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을 꼬치구이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여섯 대의 기간테스들이 고개조차 돌리지 못하고 당했다.
능선 위를 점령하고 있던 2군단은 이미 몰살당한 지 오래였다.
그 대신 능선 위로 검은색 기간테스가 불타는 장창을 들고 오연히 서 있었다.
그 모습은 지옥에서 나온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그제야 트리쉬엥은 자신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검을 높이 들고 소리를 높였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검들이여, 나를 따르라! 최후의 순간까지 비겁하지 않으며,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자랑스런 로베니아 제국이다!"
로베니아 병사들도 독을 품고 일어섰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수천 년에 걸쳐온 양 제국의 원한과 나라를 지키려는 케린버그의 결사대가 승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용기라는 이름아래 자신들을 내던졌다.
피가 튀고 고귀한 생명들이 불꽃처럼 사라져 가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누군가 잔인하고 한심한 짓거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전투에 참가한 그 누구도 이 자리에 섰던 것을 부끄럽거나, 한심한 일이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강력한 사명감과 조국애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피부색이 다르고 각자의 나라가 다를지라도 가슴속에 들어있는 뜨거운 열정은 다르지 않았다.
크아악!
콰쾅!
"물러서지 마라! 중앙을 내주어서는 안 돼!"
"전차들은 이미 무용지물입니다. 군단장님!"
"빌어먹을! 빌어먹을!"
자신에게 달려드는 레센의 기사들을 처리한 트리쉬엥이 충혈된 눈으로 전장을 돌아봤다.
"부관! 어서 가서 근위대에게 전해라! 화살이 부러졌다고."
"군, 군단장님!"
"어서! 이러다가 큰 별을 잃고 싶지는 않다. 기회는 또 있어! 어서! 서둘러!"
눈물을 훔치며 말을 달리는 부관의 등을 보며 트리쉬엥은 나직한 작별인사를 고했다.
"황제 폐하를 부탁한다! 위대한 황제시여, 언제고 이 복수를 꼭 해주시길 빕니다."
갑옷의 투구 가리개를 내린 트리쉬엥이 쉬어터진 목으로 함성을 지르며 바위산으로 향했다.
* * *
"역시나 로베니아 제국은 대단합니다. 이렇게 함정에 빠졌는데도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습니다."
머스탱 공작이 나형석 장군을 보며 혀를 내두르자 나형석 장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형석 장군은 목에 서너 개의 통신기를 걸고 분주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전황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반 봄멜 공작이 대단하기는 합니다. 그의 활약은 눈부시기까지 하네요. 응? 이런 젠장!"
"장군님,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머스탱 공작님께서 남은 부대를 이끌고 일을 마무리 지어주셔야겠습니다. 적의 머리가 도망치려고 합니다."
나형석 장군의 말에 머스탱 공작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후후후! 당연히 가야죠. 제가 죽는다 하더라도 꼭 가야만 할 일이지 않습니까."
머스탱 공작은 도리어 기쁜 얼굴을 했다.
"황제를 호위하는 병력이니 만큼 그 힘이 대단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전황이 급박해서 여유병력이 없군요. 미안합니다."
차마 눈길을 마주하지 못하는 나형석 장군의 어깨를 두드린 머스탱 공작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장군, 살 만큼 살았으니 미련은 없소. 게다가 그런 일에는 내가 나서야지, 누가 가겠소?"
막사를 나서던 머스탱 공작이 휘장을 들추다 말고 마지막으로 장군을 바라보았다.
"알게 돼서 고마웠소, 장군!"
"꼭 살아 있어야 합니다."
"물론!"
휘장이 내려지고 공작이 사라지자 나형석 장군의 메마른 음성이 통신기를 울렸다.
더 많은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지만, 그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것이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서로가 죽이기 위해서 검을 상대의 몸에 박아 넣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두렵기는 모두가 매한가지였지만, 같이 싸우는 전우들과 등을 맞대고 싸우는 동안 용기를 얻으며 전장에서 힘겹게 버티었다.
그 중에 마치 사자의 왕처럼 커다란 검을 휘두르며 로베니아 병사들을 도륙하는 이가 있었다.
바위산을 피로 물들이며 검을 멈추지 않는 금발의 중년인은 악귀처럼 병사들의 생명을 꺼뜨렸다.
"반 봄멜! 이 악마 같은 놈!"
에밀리앙 3군단이 그 광경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검을 휘둘렀다.
캉!
"훗! 로베니아도 그동안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군. 제법이야."
"이 마귀 같은 놈! 내가 비록 죽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내가 지옥을 데리고 가마! 하앗!"
에밀리앙은 평생에 걸쳐 훈련해온 거의 검술을 펼쳤다.
마치 오늘 다 타고 꺼져버릴 장작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그 무서운 기세에 주변이 공터처럼 비워졌다.
두 사람의 검이 펼치는 공격권에 휘말렸다가는 목숨을 보장하기 힘들어서였다.
"헉! 헉! 언제나 네놈들이 문제였어. 언제나 네놈들이! 더러운 변절자들!"
"훗! 내가 들어본 말 중 가장 웃기는 말이야. 변절자? 우리가 변절자라면 네놈들은 악마에게 혼을 판 쓰레기들이다. 더러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악취가 심하군. 이제 그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해주마!"
몹시 화가 난 봄멜 공작의 검이 푸른색으로 뒤덮였다.
털썩!
에밀리앙의 머리가 몸을 잃고 추락했다.
3군단장 임기를 한 달도 채우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에밀리앙은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후! 대단하군. 역시나 로베니아 제국이야. 하나같이 매섭기가 그지없어. 저 친구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군."
반 봄멜 공작의 시선이 로베니아 기사단을 유린하고 있는 호크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늑대의 제국이라는 레센의 별명이 저 친구 때문에 우습게 되어 버렸어."
봄멜 공작의 푸념을 들은 베른 하튼 단장과 검은 사자기사단 기사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케린버그와 레센의 연합군내에서 서로 높은 전공을 세우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심이 치열했는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전투에서 연합군들은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전투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등을 보이고 황제가 도망간 로베니아에게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절대로 이럴 수는 없다고! 뭣들 하느냐? 어서 크리시앙 대공을 불러라! 어서!"
꽁지 빠지게 도망치던 발렝 황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더 옳았다.
수십만의 정예 병력이 마치 도살장의 소나 돼지들이 도살되듯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다가 도망쳐 나온 황제는 트리쉬엥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퇴로를 열어준 트리쉬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뿐 그는 여전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크리시앙 대공이 도와주면 우리는 다시 승리할 수 있다. 아직 진 게 아니야!'
어리석음에 한번 빠져든 자는 쉽사리 그 진흙탕에서 벗어나기 힘든 법이었다.
"폐하! 크리시앙 대공 각하께서는 헤나스톤에 들어설 때부터 보이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흙투성이의 기사 하나가 급히 머리를 숙이며 보고했지만, 황제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로베니아의 수호신이야, 수호신이 우리를 버릴 리가 없다. 그, 그래 어디선가 반격을 준비하고 계실 거야. 틀림없어!"
어리석음은 결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법이었다.
발렝 황제는 그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퇴로 또한 쉽게 열리지 않았다.
쉬잉!
퍽퍽!
"뭐, 뭐냐?"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소리에 발렝 황제는 깜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폐하! 적군의 추격이옵니다."
"뭣이라! 이... 이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누구를!"
분하고 원통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레센과 케린버그가 손을 잡은 것을 몰랐던 것은 크나큰 실수였고, 더구나 헤나스톤에서 전투를 하고 병사들의 생사도 모르는 판국에 추격병이 있다는 보고는 황제를 공황상태로 만들었다.
든든한 마음의 버팀목이던 크리시앙 대공이 사라졌고 잔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백전노장 트리쉬엥 군단장도 옆에 없었다.
그의 곁에 수많은 기사들과 마법사 그리고 정예 근위대 병력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발렝 황제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그를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한 번 두려움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그는 더 이상 위대한 제국의 황제가 아니었다.
그저 겁에 질린 허약한 사내에 불과했다.
"막, 막아라! 어서 막아! 나를 보호하란 말이다."
겁에 질려 벌벌 떠는 황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황실 마법사 위고가 급히 황제를 붙들었다.
"폐하 고정하옵소서!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근위기사만 백여 명에 황실 마법사가 30명이옵니다. 무엇이 두려운 것입니다. 게다가 제국의 근위대 일만 오천이 함께하고 있사옵니다. 하루만 내리달리면 리하나 요새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미 통신을 넣었으니 요새에는 보총 병력이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옵니다. 제발 고정하소서!"
황실 마법사 위고는 황제에게 마법을 사용하였다.
황제의 흥분한 마음을 마법을 이용하여 진정시킨 것이다.
마법 덕택에 머리가 차가워진 발렝 황제는 깊이 심호흡을 들이쉬더니 냉정을 되찾았다.
"후~ 고맙네. 위고, 자네 아니었으면 내가 큰 실수를 할 뻔했군."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신하된 도리로... 크윽!"
"위고!"
얼굴 위로 붉은 피가 튀긴 발렝 황제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따듯한 미소로 자신을 위로해주던 마법사 위고의 목에 강철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위고......."
힘없는 황제의 목소리는 처량하기만 했다.
얼굴에서 떨어지는 피도 더 이상 황제를 놀라게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신기한 마술을 보여주며 자신을 즐겁게 해주던 할아버지 같은 위고가 처참하게 눈앞에서 죽어갔지만, 그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마음이 더 이상 자신이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 위고의 시신이 힘없이 쓰러지자 황제 주변이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했다.
말발굽소리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고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벌벌 떨기만 했던 발렝 황제가 검을 꺼내들고 용기 내어 소리쳤다.
"물러서지 마라! 대열을 정비하라! 너희는 자랑스러운 로베니아 제국에 병사들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의 군주다. 이 자리에서 죽을지언정 명에를 더럽히지 말자. 나와 함께 오만한 케린버그를 혼내주자!"
한없이 나약하고 어리석기만 했던 로베니아 제국의 발렝 황제도 살벌한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 단계 성장했다.
단지 애석한 것은 그것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나서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여하간 황제가 검을 들고 나서자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당황하던 황제의 근위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로베니아 놈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습니다."
머스탱 공작의 부관이자 기사단 단장인 뉴튼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어려워지자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머스탱 공작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언제 우리가 유리한 상황에서 싸운 적이 있나? 하지만 뉴튼, 우리가 로베니아 제국의 황제를 뒤쫓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그, 그야......."
머스탱 공작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달관한 사람처럼 들렸다.
황제의 근위대가 어림잡아 2만이 넘어 보였고 그에 비해 머스탱 공작의 기습부대는 일만이 겨우 넘는 병력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에게는 마법사까지 있었다.
벌써 머리 위로 화이어 볼이 몇 개나 지나갔는지 몰랐다.
더구나 유약하고 괴팍하다고 알려진 로베니아의 황제가 저렇게 용감히 진두지휘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황제가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보니 먼저 기습을 한 상황임에도 로베니아 병사들을 투지를 잃지 않고 용맹하게 싸워서 오히려 전황은 머스탱 공작에게 불리해지고 있었다.
머스탱 공작이 투구 가리개를 내리자 그의 기사단원들도 모두 투구 가리개를 내렸다.
머스탱 공작의 검집에서 오래된 그의 검이 조용히 빠져 나오며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국왕을 위해!"
"국왕을 위해!"
많은 검들이 허공을 향해 솟아올랐다.
"승리를 위하여!"
"우와아아아!"
검을 앞으로 세운 머스탱 공작이 박차를 힘껏 차자 말이 갈기를 휘날리며 죽음의 전장을 향해 내달렸다.
그 뒤로 그의 용맹한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 모습은 장렬하기 그지없었고 처절하게 기록될 헤나스톤 전투의 또 다른 전설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