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40화 (40/55)

Chapter 40. 저주스런 예언이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아악!"

"조금 더 힘을 내세요. 아가씨!"

"으흑!"

산파가 이마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캐더린의 이마에서 땀을 훔치고 있었다.

괴로운 듯 연신 신음을 흘리는 캐더린은 이를 악물고 오직 한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연인 알렉스 호크.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의 분신을 낳는 일이 너무나 숭고하고 행복했다.

이깟 몸을 찢는 듯한 고통쯤이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다짐하며 이를 악물었다.

"허, 참내, 이거 도대체 몇 시간째인가?"

캐더린의 아버지 하워드 남작은 진통이 오래되자 초조한 듯 복도를 이리저리 오갔다.

그녀의 가족들은 애처로운 신음이 방문 밖으로 흘러나올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아아악!"

엄청나게 강한 비명이 터져 나온 뒤로 방 안이 잠잠해지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가족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거야, 원, 부인이 한 번 들어가 보시오.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소이다."

하워드 남작이 재촉하자 부인이 마지못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하워드 남작은 부인의 비명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이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시녀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 하워드 부인의 얼굴에 찬 수건을 올리며 부인을 깨우려고 하고 있었고, 매파는 뭐가 그리 무서운지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었다.

하워드 남작은 매파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 캐서린을 보았다.

"헉! 이... 이게 도대체?"

격하게 몸을 떠는 하워드 남작의 두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딸 캐서린이 낳은 분신이 하얀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왜 하필 이 아이에게 이런 고통을 내려주시는 겁니까? 왜?"

아이를 낳고 혼절한 캐서린의 침대가에 힘없이 주저앉은 하워드의 남작은 구슬프게 오열했다.

하얀 보자기 속에서 크게 울음소리를 내어야 할 어린 생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생명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던 잉글햄은 기쁨과 축복 대신에 깊은 슬픔과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 * *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는 절규했다.

도저히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견딜 수도 없었다.

대제국 로베니아가 북쪽의 작은 왕국 따위에게 밀린다니, 그의 자존심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병력면에서 저희가 훨씬 월등하옵니다. 진정하시고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얼빠진 소리! 트리쉬엥 군단장! 우리는 제국이야, 제국이라고. 그런데 이게 뭔가?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발렝 황제의 입에서 쏟아지는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통함과 절망감 그리고 견디기 힘든 패배감이었다.

그의 말대로 로베니아가 승리해 봐야 이 전쟁은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나게 된다.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은 전쟁, 그것도 황제가 직접 지휘에 나선 전쟁에서 제국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다니.......

한동안 황제의 입지가 흔들릴 것은 자명했다.

그동안 그토록 전력을 기울여 눌러왔던 귀족파들의 기세가 등등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원정길에 나서며 그가 머릿속에 그렸던 청사진들이 한낱 물거품으로 변해버리자 발렝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죽은 선황의 유언이 떠오르자 몸에 오한이 들었다.

'네가 틈을 보이면 놈들은 네 목을 물어뜯기 위해 덤벼들 것이다.'

콰당!

발렝 황제가 의자를 걷어차자 지휘 막사 안의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이번 전쟁이 잘못되면 그동안 황제가 어렵사리 쌓아온 군부의 힘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장교들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케린버그만으로는 제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한다."

낮게 가라앉은 발렝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교들은 섬뜩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 황제를 주시했다.

"모스크 산맥을 넘어야겠어!"

"폐, 폐하!"

발렝 황제의 발언에 막사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그, 그것은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게다가 레센과의 전쟁이라면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장교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발렝 황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리? 무리라고? 저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게냐? 겨우 저런 녀석들에게 쩔쩔매면서도 그런 자신 있게 하냔 말이다. 제국에 돌아가서 뭐라고 말하려고 그러지? 제국의 구할이나 되는 기간테스를 모두 잃은 것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소꿉놀이라도 하고 왔다고 제국민들에게 설명할 참인가?"

황제의 분노에 찬 음성에 아무도 변명하지 못했다.

눈앞에서는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지휘 막사의 그 누구도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발렝 황제의 서슬 퍼런 눈이 치열한 전장으로 향했다.

"반드시! 우리는 납득할만한 전과를 가지고 돌아가야 해!"

그의 말이 무거운 짐이 되어 모두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생각보다 케린버그가 곧잘 싸우는데요, 주인님?"

루스펠이 전황을 살피며 흥미로운 표정을 하는데 반해, 크리시앙 대공은 좀 짜증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말이야. 흠~ 어쩐다."

비스듬히 누워 있던 크리시앙 대공이 귀찮다는 듯이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어디를 가시려고?"

루스펠이 주인의 갑자스런 행동이 의아한지 엉거주춤 일어서며 따라나서려 하자 크리시앙이 손을 들어 말렸다.

"좀 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야 우리의 구원자께서 힘을 얻고, 울보 성자께서 반석에 서는 날이 가까워 오지 않겠나? 귀찮지만, 내가 나서야지, 별수 있나."

잠시의 시간도 기다리기가 힘든지 크리시앙 대공은 예언을 좀 더 앞당기기로 작정했다.

마차에서 내려선 크리시앙 대공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것은 마치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보고 흥분한 것과 같았다.

전장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숫자에서 밀리는 기간테스 싸움에서는 호크의 엥귀오스가 분전을 펼치는 바람에 비등한 전세를 유지했지만, 보병 전에서는 수의 열세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그나마 머스탱 공작과 리하나 요새 전투 이후에 쉬지도 않고 달려온 핸들러 중령 그리고 챠챠 소령의 특임대가 가세하여 전멸하는 것을 겨우 면하고 있었다.

사이클론이 홀로 공격 마법을 퍼부어 주어서 10배가 넘는 로베니아 병력의 공격에 케린버그가 겨우겨우 전투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다.

"이익! 많다, 많다!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다. 징글징글하구나!"

머스탱 공작이 자신의 목을 노리고 덤벼드는 로베니아 기사들을 베어 넘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말대로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서서히 케린버그 진영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전력이 좋아도 수에서 뒤지니 점차 전력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많아졌고 기간테스들과의 전투도 오랜 시간 기체를 조정하는데서 오는 피로감으로 점차 대지에 쓰러지는 기동 전대의 수가 늘어났다.

"빌어먹을! 여기까지인가?"

한계를 드러내는 광경이 여기저기서 나타나자 호크의 눈이 침울하게 변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역시나 숫자놀음은 쉽지가 않았다. 여기저기서 전열이 무너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전쟁은 의욕만 가지고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로베니아 전력에 큰 피해를 입힌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머스탱 공작도 이런 상황을 눈치 챘는지 서서히 병력을 뒤로 물리고 있었다.

이미 무너져 부서진 통곡의 벽은 더 이상 방어벽 구실을 하지 못했고, 이제 케린버그 병사들은 마지막 저지선인 헤나스톤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후퇴를 하다가는 로베니아에게 몰살당하기 쉬웠다. 천천히 물러섰다, 전진했다 하면서 전선을 이동했다.

거기에는 챠챠 소령의 특임대와 사이클론의 강력한 마법이 큰 보탬이 되었다.

로베니아 진영에서도 이번에는 확실한 결과를 얻으려고 작정했는지 공격의 수위를 더 높이고 있었다.

"이봐! 스톤, 후방으로 후퇴하란 명령이 떨어졌어. 어서 피해야 해! 조금 있으면 이곳은 불바다가 될 거라고."

부상병들을 옮기던 위생병 중 한 명이 무너진 성벽아래 쭈그리고 앉아서 울먹이고 있는 꼬마 스톤을 발견하고는 잡아끌었다.

그러나 스톤의 몸이 땅에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리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게 웬일이래!"

제법 덩치가 있는 그가 제아무리 힘을 써도 요지부동이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이러고 있으면 모두 죽는단 말이다. 제발 고집부리지 말아!"

어린 녀석이 전장을 누비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것이 기특하기도 하고 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이어서 위생병들 사이에서 스톤은 아주 인기가 좋았다.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스톤을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위생병은 스톤이 거칠게 손을 뿌리치자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쿠, 이 녀석이 정말! 왜 이러는 거야?"

성난 목소리로 스톤을 질책하던 위생병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고개를 든 스톤의 얼굴은 그 알고 있던 순진하고 맑은 눈을 가진 그 스톤이 아니었다.

"쥬(Ju)의 믿음이 도리어 배신하며 그의 마음이 사악하매, 아크나무아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폴렌시아의 반석인 성자가 나도다!"

눈동자에서 검은색이 사라진 무서운 얼굴이 섬뜩한 목소리로 알아듣지 못할 말을 주절거렸다.

벌떡 일어선 스톤이 무너진 통곡의 벽 사이를 지나 전투가 치열한 전장으로 걸어 나갔다.

피와 살이 튀고 죽음이 넘쳐나는 전장을 바라보는 스톤의 입가에 웃음이 피어났다.

순백의 얼굴을 가진 소년이 전장을 보고 짓는 웃음은 무섭도록 괴기스러웠다.

"아크나무아의 힘을!"

스톤이 손을 높이 들어 외치자 전장의 한가운데 느닷없이 거대한 기간테스가 떨어져 내렸다.

새로이 나타난 기간테스는 양측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단 무척이나 컸다.

다른 기간테스에 비해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악의 화신인 듯 온통 붉은색이었다.

혼란스럽던 전장이 고요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색 기간테스가 양손을 높이 쳐들자 초승달 모양의 환도가 빛을 냈다.

'아크나무아의 달이 높이 떠오르리라!'

슈각!

환도가 휘둘려질 때마다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이 모양을 잃어버리고 파괴되었다.

무차별적인 학살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서너 대의 기간테스들이 달려들어 움직임을 막고 다른 기간테스들이 장창과 검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창과 검이 부러지고 팔과 다리에 매달렸던 기간테스들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개자식! 네 상대는 여깄다."

분노한 호크의 엥귀오스가 날듯이 뛰어 붉은색 기간테스 앞에 섰다.

카가캉!

검과 검이 부딪히자 귀를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큭큭큭! 역시나 신이 기다리는 인간은 좀 다르군, 이거 인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몸이 근질거려서 안 되겠는걸. 오백년 만에 몸 좀 풀어 볼까나?"

붉은색 기간테스에 탑승한 사람은 다름아닌 크리시앙 대공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빈틈을 노리는 엥귀오스는 관심도 없는지 크리시앙의 시선은 통곡의 벽을 향하고 있었다.

'후후후~! 그래, 이제 샹그릴라의 성자께서 나서실 차례이지. 자, 이제 적당히 놀면서 구원자 나리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성자가 각성하면 네 번째 낙인이 출현하실 차례군. 그리하면 이 지겨운 영원의 삶도 이제 끝이야. 해방이란 말씀이지. 하하하하!'

크리시앙은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니 너무 기쁜지 웃음을 터트렸다.

"네 녀석 정체가 뭐야? 로베니아의 개냐?"

엥귀오스에서 절절히 흘러나오는 호크의 분노에 찬 음성에 크리시앙은 더욱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로베니아의 개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구원자 나리!"

"구, 구원자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자신을 보고 구원자라고 부르자 당황한 호크가 말을 더듬는 것을 보고 크리시앙은 즐거움을 멈추지 못했다.

"자네는 나의 소중한 구원자라네. 그래서 내가 자네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 이렇게 나섰지 않겠나."

뒤로 크게 점프해서 몸을 날린 크리시앙의 붉은 기간테스가 검을 휘두르자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피떡이 되어 짓뭉개졌다.

"안 돼! 이 미친 새끼 뭐하는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호크의 목소리가 금세 쉬어 버렸다.

"미친 새끼라...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게 될까?"

후퇴하던 병사들 위로 몸을 던져 바닥을 구르자 개미떼들이 인간의 발에 짓밟혀 죽듯이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그야말로 처참한 죽음이었다.

밀턴 대위와 대원들이 몸으로 막아섰지만, 역부족이었다.

붉은색 기간테스는 그야말로 전신(戰神)이었다.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엥귀오스의 공격도 가볍게 흘려보내며 케린버그 진영을 유린했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는 거냐고?"

호크는 붉은색 기간테스가 로베니아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은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장난을 하고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는 듯이 아니, 어린 아이가 투정 부리듯이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결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로베니아 병사들도 난데없이 벌어진 상황에 넋을 놓고 구경하기만 했다.

호크는 분노로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어떤 부하들인데, 어떤 동료들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생명을 잃는단 말인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으아아악! 이 개자식, 용서 못해!"

엥귀오스의 몸이 새처럼 날아올랐다.

한껏 뒤로 젖혀진 두 팔은 검을 굳게 잡고 크리시앙을 향해 힘껏 휘둘려졌다.

쿠앙!

초승달 모양의 환도를 머리 위로 교차해 막은 크리시앙도 이번에는 충격이 적지 않았는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후후후! 이거 손이 짜릿짜릿한데! 정말 피가 끓어오르게 만들어 하지만 이거 어쩐다? 응? 이런! 우리 성자께서 드디어 각성하기 시작하셨군. 그렇다면 이제 이 몸은 슬슬 퇴장해 주어야겠지."

병사들이 무참히 살육 당하자 꼬마 스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어째서 쥬를 따르는 아크나무아의 신장이 쥬의 백성들을 탄압한단 말인가? 당신은 진정 신의 껍데기를 쓴 악마란 말입니까? 제게 힘을 주소서. 정녕 신이 계시다면 제 영혼을 가져가고 저 백성들을 구원할 힘을 주소서!"

스톤이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자 하늘의 구름 속에서 한줄기 빛이 내려와 스톤을 들어올렸다.

그 장엄한 광경은 멀리에서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치열한 전투가 멈춘 지는 이미 오래였다.

아크나무아의 상징인 초승달이 아로 새겨진 크리시앙의 붉은 기체는 모두의 시선이 스톤에게 쏠린 틈을 타고 자취를 감췄다.

쥬를 섬기지는 않는 로베니아 병사들에게는 단지 희한한 광경이었지만, 케린버그 병사들에게는 구원과 희망의 빛이었다.

빛이 들판을 덮어가자 머스탱 공작은 후퇴를 서둘렀다.

얼이 빠져있던 병사들이 신속히 빛 속으로 숨어들어 통곡의 벽을 넘었다.

호크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폈지만, 이미 붉은색 기간테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구원자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었지? 악마 같은 자식! 다음번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이보게, 호크! 뭘 하는 건가. 어서 후퇴하게. 적들이 정신 차리기 전에 서두르게!"

머스탱 공작의 질책에 겨우 정신을 차린 호크의 엥귀오스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했다.

통곡의 벽에 가까이 다가오자 빛을 내던 스톤이 점차 땅으로 내려와 호크의 엥귀오스 품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스톤의 머리 위에서 작은 물병이 둥둥 떠 있었다.

제로와 엥귀오스가 그 물병에 반응을 보였다.

신의 유물이라는 뜻이었으니, 바로 세 번째 낙인이었다.

저주받은 예언은 이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 * *

"하아암! 젠장, 오늘 따라 교대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지?"

"예끼, 이 사람이 목숨에 여벌이 있는 거 아니면 입조심 하라고. 지금은 전시라고 전시! 잘못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이렇게 되기 십상이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군소리를 하는 동료 병사를 보며 잔소리를 한 병사가 손으로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하자 하품을 하던 병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그래도 겁은 나는지 연신 목 언저리를 매만지며 헛기침을 하던 병사의 눈이 놀란 토끼마냥 커졌다.

흐트러졌던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굳건한 자세로 경비를 서는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두 보초 사이로 많은 수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많은 병력들이 타고 온 말들의 말발굽 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었다.

한껏 먼지를 피우고 성문을 통과한 무리들이 사라지자 두 병사도 겨우 어깨의 힘을 풀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시간에 저 많은 병력이 성으로 들어가는 거래?"

"낸들 알겠나? 우리 같은 것들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야."

"쩝! 그야 맞기는 한데, 왠지 씁쓸해!"

입맛을 다시는 병사의 고개가 먼지만 남기고 통과한 병력들이 달려간 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저 흉흉한 기세는 뭐야? 감히 제국의 황성에 들어오면서 저것은 무례잖아?"

"옛끼, 이 친구가 정말 목숨이 두엇이라도 되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근무나 똑바로 서자고!"

동료 병사의 질책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아무래도 성으로 사라진 병사들이 영 마음에 놓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상해? 몽셀 공작가의 깃발을 달았는데 왜 그 모습이 다 처음 보는 것이지? 공작가의 기사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려보았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멀리 우뚝 솟은 거대한 첨탑들이 오늘은 왠지 불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무슨 말인가?"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던 황궁 경비 책임자 오뒤뚜르 백작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수하 기사의 무례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 그게 말입니다."

급하게 들어올 때는 언제고 눈앞에 어색하게 서서 머뭇거리는 기사의 행동에 결국 오뒤뚜르 백작의 목소리가 커졌다.

"자네가 지금 나의 소중한 시간을 뺏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백작의 질책에 찔금한 기사가 서둘러 말문을 열었다.

"저, 그것이 다름이 아니오라 몽셀 공작의 행동이 수상하기에 보고를 드리려고 온 것입니다."

"몽셀 공작? 자네 지금 헛소리를 하는 건가? 누가 어쨌다고?"

황당하면서도 머릿속 사고를 정지시키는 수하의 말에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오뒤뚜르 백작의 발은 이미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사실은 며칠 전부터 몽셀 공작님의 출입이 잦아지더니 여러 명목으로 사람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인원이 많습니다."

"그 수가 얼마나 되기에 그러는가? 혹여 파티라도 열려고 공작가의 하인들을 들여보내는 것이 아닌가? 황후의 숙부가 되시니까 능히 그럴 수 있잖아. 혹여라도 별궁의 일인지 확인은 해보았나?"

오뒤뜨르 백작의 이마에 생긴 주름살을 본 수하 기사는 어차피 이런 보고에 좋은 소리가 나올리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신의 생각을 다 털어 놓았다.

"매년 이런 일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뭔가 달라도 크게 다릅니다."

"다르다?"

"네, 백작님! 오늘만 무려 만 오천 명이 들어왔습니다. 게다가 오후에 그만큼이 더 들어온다고 하옵니다."

우당탕!

깜짝 놀란 오뒤뜨르 백작이 일어서는 바람에 의자가 뒤로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만들었다.

"뭐라고? 도대체 성 안으로 그 많은 인원을 들이는 일에 어떻게 내가 모르게 허가가 떨어졌다는 것이냐?"

"그것이... 내궁에서......."

"황후께서 내리신 명령이란 말인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하 기사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오뒤뜨르 백작은 갑자기 방 안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으로 상상하기도 끔찍한 몇 가지 가정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 들어라! 조용히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우선 알폰소 남작과 데르탕느 남작 그리고 총사대 루이 필리페 자작과 근위 기사대 앙리 샤를리앙 백작께 전령을 보내라. 절대로 전령인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오뒤뜨르 백작은 서둘러 책상 위의 종이에 재빠르게 몇 글자를 적어 수하의 손에 쥐어 주었다.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방안을 빠져나가는 기사의 등을 바라보던 오뒤뜨르 백작이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의 검을 허리에 찼다.

'몽셀 공작! 부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길 바라오.'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빌며 경비대장 오뒤뜨르 남작이 병력을 모으기 위해 방을 나섰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던 로베니아 황궁의 주변 공기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어서 오게. 필요한 인원은 모두 확보된 것인가?"

"아직입니다. 공작 각하! 오후에 들어오는 인원들이 도착하면 겨우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겨우라?"

몽셀 공작이 자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추기경을 보며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엄지로 누르고 있었다.

노회한 몽셀 공작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 덮혀 있어서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길이 없었다.

그것은 새로이 롯셀리니 추기경으로 변한 쟝으로서도 고역이었다. 아크나무아의 신물을 찾아야만 하는 그로서는 케린버그의 낙인 회수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지만, 시간의 틈에 갇혀 있는 아크나무아의 신물은 사명 이상의 중차대한 문제였다.

만약에 저 영감이 마음을 바꾸거나 꼼수를 부린다면 자신도 롯셀리니 추기경처럼 교단의 원로들에게 영혼마저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그런 저주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입안이 바싹 마르며 목안이 깔깔해지자 롯셀리니로 변한 쟝은 참지 못하고 마름기침을 토했다.

"자네도 긴장이 되나 보지?"

무미건조한 공작의 말에 롯셀리니 추기경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역모이옵니다. 실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떨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겠지요."

다소 퉁명스러운 롯셀리니의 말에 몽셀 공작은 무심한 눈길로 롯셀리니 추기경을 내려 보았다.

"그런가? 그런데 말이야, 나는 왜 자네가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자네는 왠지 내가 아는 그 추기경이 아닌 거 같아?"

쟝은 롯셀리니 추기경이라는 옷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늙은 생강이 맵다더니 이 험난한 제국에서 오랜 세월 공작의 신분을 유지하며 폭정 하는 황제 밑에서 살아남은 귀족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쟝은 등 뒤로 옷들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사제복이 목을 조르는 듯한 느낌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무슨 유령도 아니고. 하하하!"

답답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추기경의 어깨를 짚고 일어난 공작은 수행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방 안을 빠져 나갔다.

"뭐, 유령이든 뭐든 상관없겠지. 내 일에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정해진 시간에 우리 쪽 기사들이 길을 안내할 걸세. 부디 자네가 딴 마음을 먹지 않길 바라네."

묘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 공작을 보며 추기경은 겨우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등 언저리가 눈에 띄게 젖어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작 나리, 저희 쪽에도 중요한 일이니 당분간은 절대적으로 협력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저 늙은이는 기회가 되면 반드시 제거해야겠어. 아무래도 우리를 의심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 후환이 되기 전에 처리해야겠군."

마음속으로 정리를 마친 추기경도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추기경이 밖으로 나오자 사제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의 뒤를 따라서 움직였다. 길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의 수가 많아졌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제의 성이었다.

* * *

"황제 폐하! 이대로 진격하는 것은 병법에 옳지 않습니다. 군을 물리시고 후일을 도모하시던가 아니면, 이곳에서 병력을 재정비하시고 난 뒤에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원로 귀족의 간곡한 청에도 발렝 황제는 조금도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너무나 쉽게 생각한 대가라고는 하지만, 그 피해가 너무나 컸다.

기간테스를 또다시 이백여 기 넘는 숫자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로베니아 기간테스의 2/3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전력의 손실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크리시앙 대공이 어렵게 구해준 고대유물인 사릉가 전차대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으니 기가 차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상처 나고 찢길 대로 찢긴 자존심은 차치하고라도 이것은 로베니아 제국이라는 이름아래 벌어진 전쟁이라고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참담한 결과였다.

케린버그가 대패해서 도주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로베니아의 피해가 미약한 상태에서의 승리여야 만족스러운 것이지, 수하 장수들이 회군을 종용할 정도로 피해를 입은 상처뿐인 승리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발렝 황제는 더더욱 이 진군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처참한 전장의 모습도, 크게 부상당하고 피해를 입은 아군의 진영을 살피면서도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진군하여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케린버그를 말살하라고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닥쳐라! 이것은 성전이다. 대 로베니아 제국의 승리를 향한 위대한 걸음이자 필승의 전쟁이다. 멈춰도 안 되고 물러설 수도 없음이다. 전 대륙이 이 전쟁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물러선다면 우리는 웃음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럴 바에 나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발렝 황제의 눈은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그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통곡의 벽 너머에 있을 케린버그의 잔당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다시 황제에게 간언하려는 노귀족을 트리쉬엥 군단장이 만류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을 향해 트리쉬엥 군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 귀족도 샬렘 군단장처럼 황제의 검에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했다.

가뜩이나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아군끼리 피를 흘리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트리쉬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하하! 역시나 제국의 황제다운 대범함이 넘쳐 흐르십니다."

박수를 치며 막사에 들어온 크리시앙 대공은 크게 웃었다.

"황제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 정도 희생에 물러선다면 제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보셨다시피, 아크나무아의 전사가 뛰어들어 로베니아를 돕지 않았습니까? 이는 신들조차 제국이 전쟁에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크리시앙 대공의 말에 발렝 황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런가요? 그 붉은색 기간테스가 아크나무아의 전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다 폐하께서 제국 내에 아크나무아의 사제들을 돌보신 은덕을 갚는 것이지 않고 무엇이겠습니까."

크리시앙 대공의 무한한 신뢰의 눈빛을 보내자 발렝 황제는 크게 고무됐다.

"하하하하! 모두 들었지? 신들조차 나의 뜻을 돕고 있다. 모두들 전열을 재정비해서 케린버그를 쓸어버린다. 이는 나의 뜻일 뿐 아니라 신의 뜻이기도 하다!"

미친 듯이 광소하는 발렝 황제와 그 뒤에서 의심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시앙 대공을 바라보는 제2군단장 트리시엥 군단장은 점점 더 이 전쟁이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전쟁에서 제국이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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