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39화 (39/55)

Chapter 39. 죽음만이 가득한 전장!

콜록! 콜록!

"어, 어서 보고해! 피해 상황을... 빌어먹을!"

사람 모양의 시커먼 숯덩이가 조각상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로베니아 제국의 고대 무기 사릉가 전대가 퍼부은 뇌전 공격이 통곡의 벽 위에 자리한 케린버그 진영을 덮쳤을 때, 미처 벙커(bunker)로 피하지 못한 대원들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처참한 전쟁터가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의 동작들을 하고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고통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웃!

벙커의 외부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벙커에서 병사들이 뛰쳐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아마도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살아 나온 느낌일 것이 틀림없었다.

"호크 장군님!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대대 병력 정도가 당한 듯싶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부관이 피해상황을 보고하자 호크는 눈을 부릅뜨고 숨진 병사의 눈을 조심스럽게 감겨주고 일어섰다.

강철도 녹일 정도로 강한 열기에 사망한 시체들은 이미 딱딱한 숯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전우들의 시체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할리 없었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당할 수만은 없었다.

"이제 시작이다. 이 정도에 겁먹고 물러서면 끝이야. 부대별로 통신 확인하고 피해상황 점검해! 내가 직접 나간다. 다시 반격한다. 캐논포대를 준비시켜라. 제대로 복수해 줘야지!"

이를 가는 호크의 명령에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부관들이 바삐 뛰어갔다.

호크는 시선을 성벽 멀리 있는 로베니아의 새로운 전차부대 사릉가 전대에 고정시켰다.

예상치 못한 강력한 무기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무기력하게 물러서려고 이곳에 배수진을 친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다음 기회라는 것은 더 더욱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만 하고 또한 그것이 케린버그의 숙명이었다. 정말이지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머스탱 공작 각하이십니다!"

공작의 출현을 알리는 보고에 호크의 표정에도 잠시나마 기쁜 기색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머스탱 공작이 왔다니 천군만마가 온 거나 다름없었다.

"늦으셨습니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호크를 보며 공작도 안색을 굳혔다.

성벽으로 올라오면서 아비규환이 된 현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공작도 호크의 무뚝뚝한 말을 이해해주었다.

그와 함께 나타난 샹그릴라 성기사단장 베르트니도 가슴에 성호를 그으며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피해가 크군!"

"늦으셨군요. 공작님!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서요."

호크가 가리키는 손끝으로 시선을 돌린 두 사람은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마법 전차 부대인가?"

"헉! 사... 릉가 전차가, 오 쥬여! 결국 예언이... 예언이......."

베르트니 성기사단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고 절규했다.

"저게 뭔지 아십니까?"

베르트니 단장의 반응에 호크는 깜짝 놀랐다.

수많은 신관들을 데리고 참전해준 샹그릴라 지원군의 지휘관인 베르트니는 다른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몰랐던 적의 비밀 병기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호크와 머스탱 공작은 궁금하기만 했다.

호크의 눈이 가늘어지며 베르트니 단장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신 뭔가 알고 있으면 지금 당장 털어 놓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다음 공격 때에는 맨몸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만들어 주겠어."

"이... 이보게 이 손 좀 놓고, 손은 놓고 말하게 이게 무슨 짓인가?"

"한 번의 공격으로 대대병력을 몰살시킨 괴물들이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것이 안 보이십니까? 저놈들을 해치우려면 이름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체면 차리고 그럴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눈에서 독기를 쏘아내는 호크의 등 뒤로 사정거리를 좁히고 2차 공격을 퍼붓기 위해 전진하는 사릉가 전차대가 통곡의 성벽 위에서 방어진을 구축한 케린버그 병사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오랜 지기인 베르트니 단장이 나이 어린 호크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었지만, 호크의 말마따나 지금은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피도 눈물도 없는 참혹한 전쟁터였다.

머스탱 공작은 애써 그 모습을 외면했다.

"말하라고. 어서!"

"크으윽! 이, 이것 좀 놓게. 다 말할 테니!"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창백해진 베르트니가 손을 흔들자 호크가 베르트니를 바닥에 내던졌다.

컥! 쿨럭!

숨을 몰아쉬며 폐 속의 바람이 빠져나오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난후에, 베르트니는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버렸다.

"자네도 쥬의 예언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갑자기 그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지 호크는 의아해했지만, 뭔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샹그릴라의 금역인 기도하는 자의 신전에 가보면 고대의 수많은 벽화들이 있다네. 개중에 아주 깊숙한 지하의 비밀 방에는 인류가 보아서는 안 되는 그런 벽화들도 있지. 그런 몇 개의 벽화들 중에 나오는 신의 군대가 보유한 무기 중에 바로 저 사릉가 전대가 존재해!"

말하기 괴로운 듯 주저하는 베르트니의 말에 머스탱 공작이 놀란 눈을 했다.

"자, 자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쥬의 군대가 어떻게 로베니아 제국을 위해서 싸운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가 않잖아!"

머스탱 공작은 되지도 않은 말을 들었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호크는 하얗게 질린 베르트니 단장의 얼굴을 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땅에서 인류가 멸하기를 바라는 것은 여신 미르네보가 아니었던가?

만약에 사릉가 전차가 쥬의 군대라면 그의 의중은 무엇인지 호크는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이 마구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지자 호크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일인지 모르겠네, 이런 일은 사이클론 영감이 필요한데. 아니야, 지금 당장은 저놈들부터 막고 봐야지.'

"장군님! 적의 괴 전차부대가 가까이 접근해 옵니다."

부관의 외침에 호크와 머스탱 공작이 성벽 모루로 뛰어갔다.

흙먼지를 피우며 사릉가 전차대가 근접하고 있었다.

원거리에서의 공격에 이 정도 피해를 입었는데, 만일 저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직격탄을 맞는다면 전멸을 피할 수 없었다.

그때는 벙커도 성벽의 두꺼운 돌 벽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짐작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살아남은 뒤에 하죠. 우선은 저 사릉가인지, 사랑가인지 하는 괴물 전차들부터 처치한 다음에 다시 따져보기로 하죠."

사릉가 전차대를 보고 호크가 주먹을 벽에 내리쳤다.

"머스탱 공작님, 부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전 땀 좀 흘려야겠습니다."

호크가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가자 깜짝 놀란 머스탱 공작이 호크를 불러 세웠다.

"자네, 뭘 어쩌려고 그러는가?"

"신의 무기라니 신의 무기로 상대해주려고 합니다."

"신의 무기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보시면 알아요. 그것보다 통곡의 벽이나 단단히 지켜주세요!"

말을 채 끝내지도 않고 사라지는 호크를 보며 머스탱 공작은 헛바람을 삼켰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짐을 떠넘기고 사라지는 호크를 보며 도대체 무엇으로 저 가공할 전차부대를 상대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아냐, 아니겠지. 설마하니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공작님, 기동 전대들이 출동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성벽 위의 각 부대들의 배치를 하달해 주십시오."

"뭐라고 했나, 중위? 기동 전대들이 출동한다고?"

깜짝 놀란 머스탱 공작의 반응에 보고하던 작전부서의 중위가 도리어 당황했다.

"이 친구가 벌써부터 기동 전대를 투입하면 어쩌려고 그래? 게다가 기간테스들이 사릉가 전차를 파괴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잖아!"

다급해진 머스탱 공작이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케린버그의 특수부대 기간테스 기동 전대들이 호크의 지휘에 따라서 모두 뛰기 시작했다.

통곡의 벽을 막고 있는 정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 문안에서 기간테스들이 지축을 울리며 뛰쳐나왔다.

한 손에 검을, 한 손에는 커다란 방패를 들고 달리는 기간테스들의 모습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며 들판을 질주했다.

사릉가 전차대의 일차 공격에 의기소침했던 병사들이 자국의 기간테스 부대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에 환호성을 질렀다.

단박에 케린버그는 사기가 올라갔고 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빌어먹을, 마나석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벌써 투입하면 나중에 저들의 기간테스들은 어떻게 막을 셈이야? 나중에 힘을 잃고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당할 셈인가?"

병사들과 달리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머스탱 공작은 오늘 전투가 짧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때 마침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전장과 겹쳐지며 머스탱 공작의 눈을 어지럽히는 순간 공작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런 눈동자 속으로 기간테스들의 공격해 들어가는 모습이 투영되었다.

"황제 폐하께 아뢰옵니다. 적들이 기간테스 부대를 내보냈습니다."

"나도 눈이 있어. 고대 문명의 도시는 로베니아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여기저기 남아 있는 모양이군. 하지만 왜 하필이면 케린버그인거야? 정말 기분 나쁜 단 말이지. 그나저나 저 녀석들이 우리의 스카라무슈를 패퇴시킨 놈들인가?"

"그렇게 사료되옵니다."

"좋아 그렇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지. 우리도 기간테스 기사단을 내보내라. 사릉가 전차대를 보호하는 한편, 적 기간테스에게 진정한 기간테스의 무서움이 뭔지 알려주거라!"

"하! 알겠습니다. 황제 폐하!"

샬린 제1군단장이 힘차게 복명한 후, 1군단에 신속하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로베니아 진영에서도 회색빛 기간테스들이 지축을 흔들며 케린버그 진영에서 돌진해 나오고 있는 기간테스들을 향해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미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를 발견한 사릉차 전차대가 위협을 느끼고 서서히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사릉가 전차대가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기간테스를 상대하기에는 손색이 있는지라 뒤에서 지원 나온 기간테스의 배후로 빠지려는 것이었다.

그런 이후에 다시 사릉가 전차대의 2차 공격 후, 보병과 기사단을 투입하여 통곡의 벽을 점령하는 것이 로베니아군의 공격 작전이었다.

뻔히 보이는 속셈을 모를 리가 없는 호크는 특별한 자신의 기간테스 엥귀오스를 믿고 가능한 한 있는 힘을 끌어냈다.

지난 몇 차례 전투 덕분에 이젠 거의 모든 동작과 기능을 완전히 익히고 있어서 조정한다는 느낌보다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그런 감각으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다른 대원들 또한 겨우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기동훈련으로 로이든 전투 때와는 천지차이를 보이는 실력 향상을 가져왔다.

그 때 케린버그 진형에서 갑자기 검은색 기간테스가 속도를 더 내면서 빠르게 돌진해오자 여유를 가지고 후퇴하던 사릉가 전차대의 지휘관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저, 저! 저런 괴물이 다 있나? 전속으로 후퇴하라! 후퇴해~!"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전차의 바퀴보다 호크의 엥귀오스가 달리는 속도가 한 발 빨랐다.

쾅! 콰과광!

엥귀오스의 무시무시한 검이 허공에서 휘둘러지니 공포스러울 정도의 위력을 보이던 사릉가 전차들도 허무하게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젠장! 고장이 난 전차대원들은 어서 전차에서 탈출하라! 탈출해!"

전차대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전차들에서 로베니아 병사들이 탈출을 시도했다.

그들의 눈에 전차를 집어 던지는 괴력을 보이며 전차대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검은색 엥귀오스의 모습은 가히 전신(戰神)의 모습이었다.

엥귀오스의 검이 사릉가 전차대를 순식간에 괴멸시키자 발렝 황제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제국의 대공인 크리시앙이 어렵사리 지원해준 귀중한 무기였다.

낙승을 기대했던 발렝 황제로서는 도저히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저, 저절 수가! 어서 빨리 전차대를 구하라고 해! 어서! 도대체 우리 쪽 기간테스는 왜 저렇게 느린 건가?"

발을 동동 구르는 발렝 황제의 재촉에 참모진들도 애가 탔다. 샬린 제1군단장이 보낸 기간테스 부대도 사력을 다해 질주했지만, 사릉가 부대가 케린버그 진영에 너무 다가갔기 때문에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보다 늦을 수밖에 없었다.

제1군단 소속의 매기사단 단장인 뒤세냐프는 사릉가 전차대가 단 한 기의 적 기간테스에게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며 피가 거꾸로 솟았다.

"1, 2전대는 나와 함께 검은색 기간테스를 맞고 나머지 부대는 뒤에서 접근하는 적 기간테스를 막는다. 모두 명심해라! 로이든에서 참패한 불명예를 오늘 우리 매기사단이 되찾는다."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뒤세냐프 단장의 목소리가 전달되자 매기사단의 기간테스들이 더욱 속도를 냈다.

"장군님, 조심하십시오! 전방에 적 기간테스들이 출현했습니다."

한창 도망치던 전차대를 공격하며 호크는 자신만 혼자서 깊숙이 들어온 걸 뒤 늦게 눈치 챘다.

전방을 향해 시선을 돌리니 50여 기의 기간테스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붕!

쿵!

"크흑! 이런 무식한 놈들을 봤나."

아이들 돌팔매질도 아니고 로베니아 제1군단 소속의 매기사단들이 조정하는 기간테스들이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엥귀오스에게 몸을 날렸다.

아무리 엥귀오스였지만, 수십 기의 기간테스들이 몸을 날려 덮치니 그 충격이 엄청났다. 당연히 엥귀오스도 멀쩡할 리 없었다.

호크의 엥귀오스가 위협을 느끼고 사릉가 전차들이 부서진 파편 들 틈으로 몸을 던진 다음 파괴된 사릉가 전차 파편들을 집어 던졌다. 온 사방이 전차들의 파편으로 어지러웠다. 날아오는 사릉가 전차 파편이 모두 육중한 금속들이어서 매기사단 기간테스들도 기간하고 날아오는 파편들을 조심스럽게 쳐냈다. 막강한 힘을 가긴 기간테스들이 전차 파편들을 집어 던지고 쳐내자 파편들이 땅에 떨어 질 때 마다 대지가 들썩였다.

그 바람에 들판은 흙먼지가 높이 피워 올라 시야가 가려졌다.

"젠장! 놈이 보이지가 않잖아? 하지만 그것은 놈도 마찬가지일 거다. 적은 하나다! 잡아서 부숴버려!"

매기사단의 기간테스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를 드러내며 흙먼지 속으로 몸을 날렸다.

콰직! 가가각!

"이... 제길!"

"크흑!"

매기사단 단장인 뒤세냐프는 기간테스의 내부 공간으로 부하들의 답답한 신음성이 울리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요세프! 크리앙! 상황을 보고하라!"

"......."

"제1전대! 제2전대! 보고하란 말이다!"

뒤세냐프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짙게 피어오른 먼지 구름 속으로 100여 기의 기간테스들이 뛰어들자 흙먼지가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뒤세냐프 단장은 성급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마법사들의 지원이 필요하다!"

뒤늦게 마법사를 떠올린 뒤세냐프의 요청에 뒤를 따르던 전차와 공성탑에서 마법사들이 몸을 내밀고 강력한 윈드 마법으로 들판의 흙먼지를 날려버리자 로베니아 진영에서는 끔찍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각기 다른 의미를 내포한 신음성과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무척이나 놀랐다는 점은 공통된 생각이었다.

흙먼지가 사라지고 나타난 광경은 로베니아의 제1, 2전대 기간테스 부대가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에 의해 꼬치구이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맨손으로 뛰어든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과 달리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은 검과 방패 들고 있었고, 게다가 커다란 장창으로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의 가슴장갑을 뚫어버렸다.

기체를 조정하던 기사들이 대답을 못한 것은 당연했다.

"이, 이럴 수가!"

매기사단 뒤냐세프 단장은 믿고 싶지 않은 눈앞의 현실에 그저 이를 악물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50여 기에 달했던 용맹한 매기사단 소속의 기간테스들은 더 이상 움직임을 거부한 채 그 수명을 다했다.

"뒤세나프 단장! 지금 뭐하는 건가? 어서 후퇴하라! 어서!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어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

귀청을 울리는 다급한 전언에 충격에서 벗어난 뒤세냐프 단장은 몸을 전장에서 급히 뺐다.

어느새 전열을 정비한 사릉가 전차대와 비마스 전대가 그 위용을 자랑하며 들판에 죽 늘어서 있었고, 이미 공격준비를 마친 듯 빛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아군의 공격을 받아 불에 구운 고기 신세가 될 처지였다.

사력을 다해서 전장을 벗어난 뒤세냐프 단장은 아까운 부대와 수하들을 잃었지만, 사릉가 전차대와 비마스 전대가 그들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 믿고 물러났다.

"호크 장군님! 앞쪽에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래, 나도 보고 있다. 하지만 뒤로 물러날 수 없다. 전원 앞으로 돌진한다. 전속력으로 전진해서 사정거리를 벗어난다. 돌격!"

이판사판 격으로 몰아치는 호크의 명령에 기동전대 소속 장교들도 이를 악물고 조정관을 움직였다.

거칠게 대지를 울리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호크의 엥귀오스와 기동 전대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전면을 향해 내달렸다.

번쩍!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인다고 느낀 순간, 엄청난 화염이 통곡의 벽에 떨어졌다.

"아뿔사! 목표가 우리는 아니었어, 우리가 아니었다고!"

뒤를 돌아본 호크의 입에서 절망적인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놈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아닌 뒤쪽의 본진이었다.

사릉가 전차대만으로도 엄청난 위력인데 거기에 더해서 비마스 전차대의 불줄기는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통곡의 벽을 강타했다.

세상이 끝장나는 소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호크는 지금 자신의 귀를 울리는 저 소리라고 서슴없이 말했을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흠 하나 내지 못한다던 통곡의 벽이 눈에 띄게 허물어져 있었다.

심지어 몇 군데는 불타고 있기조차 했다.

온몸에 힘이 빠져 나가려는 것을 애써 참아낸 호크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면서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분한 마음보다 더 큰 것은 병사들의 죽음이었다.

동생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마련해주기 위해 자원 입대했다는 어린 병사의 이름이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다.

부디 그 녀석이라도 무사하기를 빌어 보지만, 호크도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늘 상 들어왔던 전쟁이란 그런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냉정하게 다가왔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호크는 다시금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숨 가쁜 전투 중에 이런 상념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본대는 머스탱 공작을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기동전대를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으로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다음 공격을 명령해야만 했다.

그것이 더 큰 피해를 줄이고 아군의 거점을 방어하는 필승의 방법이었다.

로이든에서 김재덕 과학부 장관과 사이클론이 베를로니아의 지하도시에서 발견한 기간테스를 개조하여 보내온 신형기체들까지 포함된 기동전대는 도합 60여 기였다.

그 성능과 훈련 상태는 레쎈 제국의 봄멜 공작까지 벌떡 일어나 크게 감탄하여 손뼉을 칠 정도였으니 달리 설명이 필요 없었다.

게다가 새로이 기간테스 용으로 만들어진 무구들은 단 한차례 접전의 결과로 명확하게 그 위력이 드러났다.

악을 쓰며 전진을 독력하는 호크의 명령을 받은 기동전대들이 날카로운 빛을 내는 장창을 들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적 기간테스들이 방해하기 전에 적의 수뇌부를 괴멸시켜 지휘체계를 흔들어 놓아야 한다. 우리가 죽더라도 이것을 성공하면 이번 전투에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간절한 호크의 바람이 부하들에게도 전해졌는지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밀턴 대위! 자네 부대가 적 전차대를 맡아라, 내가 적의 본진을 맡는다."

"알겠습니다. 장군님! 몸조심 하십시오!"

"후후! 자네나 조심하게!"

르부카가 전사한 후, 기동 전대의 새로운 지휘관이 된 밀턴 중위가 대위로 진급한 후, 그동안 얼마나 훈련에 목숨을 걸고 피나는 노력을 해왔는지는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이 전투를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시험받는 무대에 오른 것이다.

60여 기의 기간테스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서 움직였다.

호크가 이끄는 30여 기는 일직선으로 내달렸고 밀턴 대위의 부대는 넓게 퍼지며 다음 공격을 위해서 힘을 충전하고 있는 사릉가 전대와 비마스 전차대를 향해서 검을 꺼내들고 뛰어들었다.

뜻밖에도 그토록 엄청난 공격 속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부서진 통곡의 벽 사이에서 몸을 일으켜 그들을 응원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좌절과 패배감보다는 승리에 대한 염원이 가득했다.

살아남은 이들이 보내는 절대적인 성원을 등에 지고 케린버그의 기간테스 기동 전대들이 힘차게 돌격했다.

두드드드드!

"헛! 뭐가 저렇게나 많은 거야? 로베니아 제국 놈들 정말 지긋지긋 하다!"

기세 좋게 돌격하던 호크와 밀턴 대위는 부대를 정지시켜야만 했다. 아까보다 더 많은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이 전차대 앞을 가로 막으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 이럴 수는 없다고 수도 없이 외치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에 호크는 이를 악물고 검을 높이 들었다.

"무엇을 겁내는가? 수천만 년 살기를 바랐는가? 오늘 여기가 우리가 죽을 자리다. 가자!"

"우와아! 우리에게 영광스런 죽음을!"

마나 통신기가 터질듯이 부대원들의 함성이 울렸다.

일직선으로 내달리던 호크의 부대도 넓게 늘어서자 곧 밀턴 대위의 부대와 합세했다.

눈앞에 보이는 적들은 어림잡아도 150여 기가 넘었다.

아마도 저 기간테스들이 마지막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저들만 막아낸다면 승리의 여신이 케린버그를 위해 미소를 지어줄지도 모른다고 호크는 기대했다.

그러면 헤나스톤 계곡에 진을 치고 있는 마지막 저지선까지 전투가 이어지지 않아도 되고 희생은 크게 줄어들 것이니 호크는 자신이 죽더라도 이곳에서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잠시 사랑하는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안해, 캐더린! 행복해야 해!'

엥귀오스가 호크의 마음을 전달받자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그것을 신호로 양측의 기간테스들이 대지를 흔들며 힘과 힘을 앞세워 충돌했다.

* * *

"후~ 젠장! 정말이지 살 떨리는데."

"진정하십시오. 한두 번도 아닌데 왜 그러십니까? 새삼스럽게."

"훗! 이보게, 챠챠 소령, 자네는 새삼스러울지 몰라도 나는 매번 전투가 시작되려고 하면 심장이 떨린다고. 특히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에 투입되는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야."

손바닥을 비비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는 핸들러의 얼굴은 잔뜩 긴장한 채 굳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끝나는 곳에는 거대한 규모의 요새가 들어서 있었다.

로베니아 제국에서 야심차게 계획한 리하나 강 유역의 전진기지였다. 기지 구축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안 되어 벌써 거대한 성을 무색케 하는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시작하자고. 더 바라본다고 적들이 스스로 죽어줄 것도 아닐 테니."

"네, 핸들러 중령님!"

간밤의 습격작전 계획은 취소되었다.

수많은 군대와 전차부대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전선에 보충되는 예비부대가 틀림없었고, 이는 전선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음이 급하고 피가 마르는 느낌은 핸들러를 괴롭혔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임무를 두고 전선으로 뛰어갈 수는 없었다.

이곳을 끝장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로베니아 제국은 엄청난 물량을 앞세워 케린버그를 초토화시킬 것이 뻔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곳을 쓸어버려야 했다.

그것만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었다.

보충 병력이 모두 통곡의 벽을 향해 떠나자 시끌벅적했던 요새도 서서히 조용해졌다.

밤새 힘든 작업으로 피곤했는지 로베니아 병사들과 인부들은 연신 하품하거나 일부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리하나 전진 기지를 책임지고 벨뜨레 남작은 까칠한 얼굴을 두 손으로 세수하듯이 쓸었다.

"남작님, 숙소로 가셔서 눈 좀 붙이시지요."

"오, 레이오드 자네구먼. 간밤에 수고 많았네."

벨뜨레 남작은 기지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3군단 소속의 레이오드 경비대장의 권유에 유쾌한 얼굴로 크게 웃었다.

"아닙니다. 남작님! 저야 뭐 수고라고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연로하신 남작님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전쟁은 누구에게나 고생이야. 괴로운 일이지. 모두가 고생하는데 이 늙은이가 어떻게 침대에 몸을 눕히겠나. 죽고 나면 영원히 잠잘 수 있는 것을!"

벨뜨레 남작은 80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전장을 누벼온 노장답게 다부졌다.

"전선의 상황은 어떻다고 하던가?"

"생각보다 교착상태가 길어지고 있나 봅니다. 예상보다 케린버그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걱정이구먼. 서둘러 케린버그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북쪽의 레쎈에서 개입하게 될 텐데. 그나저나 황제께서 너무 서두르시고 있어서 걱정이야."

"남작님께서 너무 심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레쎈은 지난 일년전쟁 당시 저희들의 계략에 빠져 모스크 산맥 속에서 거의 대부분의 병력을 잃어 버려 그 피해가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참모부의 분석으로도 향후 5년간은 움직이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자신 있어 하는 젊은 장교를 보며 노회한 벨뜨레 남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쟁은 결코 숫자놀음이 아니라네.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내는 하나의 드라마이자 비극이란 말씀이지. 전쟁에서 절대라는 말은 결코 없는 법이야.'

리하나 강의 시원한 강바람이 요새의 모루 위에 서 있는 벨뜨레 남작의 긴 수염을 간질였지만, 그는 가슴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레이오드, 주변 경계를 다시 확인하게. 순찰대 수를 늘이고 리하나 강 하류와 저 산 주변들까지 철저히 수색하게. 시간이 없어서 저 산을 그냥 둔 것이 못내 찜찜해."

"이미 충분한 수색대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경계근무에 절대로 충분한 것은 없네. 레이오드,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지키지 못하는 법이야."

확고한 남작의 의지에 레이오드는 노인의 노파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벨뜨레 남작이 그의 상관이니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요새의 성벽 모루에서 내려온 레이오드는 그의 휘하 장수들을 소집했다.

갑작스런 소집에 모두 의아해했지만, 뒤이어 나온 레이오드의 명령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대장님 감히 누가 있어 로베니아의 기지를 노린다고 그렇게 멀리까지 수색한단 말입니까?"

오크만 한 덩치를 가진 장교가 투덜대자 다른 장교들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레이오드가 휘하 장교들의 생각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오른 레이오드는 퉁명스럽게 수하들에게 말을 내뱉었다.

"지금 감히 케린버그 따위가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서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은가? 군말 말고 어서, 수색대를 조직해서 주변 경계를 강화하게! 어서!"

"아직 정찰조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대장님!"

몸을 돌려 돌아가려던 레이오드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간밤에 나갔던 정찰조들 중 산속으로 들어간 놈들이 돌아오지 않아서 말입니다. 녀석들이 돌아와야 뭐를 해도 할 수가 있습니다."

뚱한 목소리로 보고하는 장교를 멱살을 틀어쥔 레이오드가 황급히 소리쳤다.

"이런 멍청한 녀석! 왜 이제야 그런 보고를 하는 거야. 지금은 전시 상황이다. 우리가 어디 놀러 나온 줄 아는 거냐?"

무서운 얼굴이 된 레이오드를 보며 장교는 목이 자라처럼 움츠러들었다.

"그, 그게 어디서 농땡이라도 치고 오는가 보다고......."

"이, 이렇게 어리석은 놈을 봤나. 혹여 저......."

털썩!

뭔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레이오드의 등덜미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멱살을 잡고 있던 장교를 놓아주고 몸을 돌린 레이오드의 눈에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었던 벨뜨레 남작이 가슴에 짧고 낯설게 생긴 화살이 틀어박힌 채 바닥에 엉망이 되어 죽어 있었다.

"적이다!"

그와 동시에 요새의 경계 탑에서 귀청을 찢는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벨뜨레 남작의 눈이 '그러기에 내가 뭐라고 했나?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라고 말하는 듯했다.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에 치를 떤 레이오드가 검을 꺼내들고 소리를 높였다.

"전원 전투 태세! 요새를 사수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이다. 목숨을 걸어라!"

제국의 군인들답게 혼란스럽던 요새 안은 금세 진정되고 병사들은 각자의 위치를 찾아갔다.

"감히 제국의 귀족을 죽이다니 도대체 어떤 놈들이... 젠장!"

요새의 경계탑에 서둘러 뛰어 올라온 레이오드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어느새 지천에 일만이 넘는 적군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적이 여기까지 오도록 몰랐다는 말이냐?"

레이오드의 질책에 경계를 서던 병사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것이 갑자기 일대에 짙은 안개가 끼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정도 병력을 감출 정도라면 대단한 마법사가 상대편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레이오드의 머릿속에서 케린버그에 있다는 바람의 마법사 사이클론의 이름이 떠올랐다.

"젠장! 우리 측 마법사들은 뭐 하나?"

레이오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요새의 공성탑과 경계탑에 로베니아의 전투마법사들이 위치했다.

다행히 병사들과 달리 마법사들은 경계심을 풀고 있지 않았는지 미리 캐스팅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요새의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불덩이들이 나타나 하늘을 뒤덮더니 요새의 성벽을 오르기 위해 밀려오는 적군을 향해서 날아갔다.

엄청난 양의 화염구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그 결과가 비록 처참할 지라도 당장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황홀한 모습이었다.

화염구들이 적병들을 모두 불태워 버리려는 찰나, 적군들 틈에서 백색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노인이 전차의 지붕 위로 올라서는 모습이 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노인의 두 팔이 하늘 높이 들어 올려졌다.

"저, 저! 저럴 수가!"

마법을 시전한 로베니아 제국의 마법사들은 두 눈을 비비며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화염구들이 시간이 정지한 듯 적군들의 머리 위에서 멈춘 채 요지부동이었다.

마법사들만 아니라 레이오드 또한 이 기막힌 현실에 아연실색했다.

"궁수들! 모두 장전! 적 마법사를 향해 발사하라!"

요새의 성벽에 숨어 있던 궁수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화살을 쏟아 부었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화염구 위로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백색 마법사가 얼굴에 미소를 피워 올렸다.

"세상 어느 곳이든 날아가는 바람이여! 그대의 분노를 보여주어라!"

로브 자락이 펄럭이더니 리하나 강 일대가 거센 바람에 휩싸였다.

"저, 저것이 도대체 어떻게!"

레이오드는 갑자기 불어 닥친 거센 바람에 눈을 뜨기 힘들었다.

그것은 요새의 모든 병사들이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들 또한 사력을 다해서 마력을 쏟아 부었지만, 거센 폭우 속에서 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휘말린 화염구들이 요새에서 날아오던 화살들을 집어 삼켰다.

그때를 기다린 듯 사이클론의 마법 지팡이가 바쁘게 움직이며 빛을 냈다.

다음 순간 하늘에서는 볼꽃 놀이가 시작되었다.

화염구의 불길이 수천, 수만 조각나서 화살에 옮겨붙더니 바람이 불어와 화살의 방향을 바꾸어 날려 보냈다.

요새에서 날아온 화살이 불화살이 되어 자신들을 쏘아 보내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방패를! 방패를!"

레이오드의 절규에 병사들이 커다란 방패를 머리위로 급히 들어올렸다.

제발 방패들이 저 불화살들을 막아주기 바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박해진 그들의 마음일 뿐이었다.

크아악!

순식간에 요새는 불지옥으로 변했다.

불화살과 불덩이들이 싸이클론의 마법으로 거꾸로 요새 안을 강타하자 그야말로 처참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곳곳에서 사람들 살이 타는 냄새와 어렵게 쌓아올린 건물들이 불타오르며 매케한 연기가 요새 안을 가득 채웠다.

얼마전까지 웃음소리가 넘쳐나던 리하나 요새는 병사들의 비명소리와 죽음으로 인해 붉디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요새 경비대장 레이오드를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은 전선으로 보내야 할 중요한 보급품들이 장작더미가 타오르듯이 훨훨 타오르며 재로 변해가는 광경이었다.

조금 전에 요새를 떠난 예비부대 병력과 본진의 병력을 감안하면 이제 곧 군수 물자들이 동이 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시점에 전투를 치루는 병력에게 보급품들이 더욱 절실한 상황이었고 본국에서 다시 준비를 한다고 하더라도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다. 그러니 레이오드의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불을 꺼라! 어서 불을 꺼! 이놈들아, 뭐하는 것이냐? 불을 끄란 말이다!"

피를 토하는 레이오드의 명령에 정신을 못차리고 우왕좌왕 하던 병사들이 급히 우물에서 물을 퍼날랐다.

턱없이 부족한 물 때문에 병사들의 소방작업은 지지부진했지만, 몇몇 마법사들이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달려들자 겨우 불길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미 병사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보급품들은 시커멓게 재로 변한 뒤였다.

허탈해하는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바닥에 주저앉았지만, 레이오드는 기운을 잃지 않았다.

"남은 병력들을 모두 성벽 위로 올려라! 백인장들은 무얼 하는가? 어서 공성무기 사용하라! 우리는 성을 수비하는 유리한 입장이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에게는 두터운 요새가 있다. 구원 부대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레이오드의 말은 금세 효과가 나타났다.

적의 기습에 사기가 떨어졌던 로베니아 병사들은 곧 기운을 얻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로베니아 마법사들도 사이클론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마나를 쥐어짜냈다.

싸이클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실력을 숫자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 사이 요새 밑까지 접근한 케린버그 병사들의 사다리가 요새 벽으로 달라붙었다.

우와와와!

막아라!

대지가 떠나갈듯이 외쳐대는 병사들의 고함소리와 병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주변을 광기라는 전염병을 퍼트리며 병사들을 두려움을 모르고 오로지 서로를 죽이는 살인기계로 만들었다. 어느새 리하나 강은 푸른 물결 대신에 요새에서 흘러나오는 붉디붉은 핏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그뿐이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서 리하강 하류로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뒤 섞여 떠내려가고 있었다.

쿠콰쾅!

요새 안에서 돌덩이들이 쉴 새 없이 날아왔다.

말이 돌덩이지 그야말로 커다란 바위였다.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희생이 너무 크다. 전차는 어떻게 됐나?"

"아직 가동 중입니다."

"젠장! 도대체 언제 된다는 말이야. 전쟁이 끝나야 작동될 건가?"

"죄송합니다. 핸들러 중령님! 아직 시험 중이던 장비여서 문제가 좀 있습니다."

"서두르라고 해! 이러다 다 죽어!"

"알겠습니다!"

쏟아지는 화살 속을 헤쳐 뛰어가는 부관을 보던 핸들러는 아직도 그그긍! 소리만 내며 움직일 줄 모르는 전차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김재덕 과학부 장관이 세린디아의 지하도시에서 발견한 고대인들의 무기 중 하나인 이 전차들이 결국이 말썽을 일으키고 말았다.

로베니아의 비마스와 비슷한 이 전차들이 큰 힘이 될 거라고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거치적거리고 있었다.

핸들러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도 병사들이 수없이 죽어나갔다.

"빌어먹을! 그들은 아직 멀었나?"

"중령님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조금 더 버텨야 할 것 같습니다."

"뭐야, 한가락 할 것 같이 생겼더니 아직도야?"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누구는 쉬워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핸들러의 성질이 한계에 달했을 때 등 뒤에서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슈왁! 슈왁!

빛줄기가 번쩍일 때, 로베니아의 요새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일순 소란스럽던 전장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성벽이 불타오르고 개중에는 누가 구멍을 뚫어 놓은 듯이 성벽 한가운데가 동그랗게 큰 원이 나버렸다.

그 주위에 불길이 남아 아직도 타들어가고 있었다.

"후우~ 다행입니다, 중령님!"

전차들이 때 맞춰서 요새를 공격한 것이다.

챠챠 소령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자 핸들러 중령도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사람 피 말리네. 후!"

요새의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자 로베니아 제국 병사들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반면 케린버그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더욱 기세를 몰아 로베니아 제국을 몰아쳤다.

하늘은 양측 진영의 공방으로 수많은 투석과 화살들이 오갔고 그에 따라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로베니아의 병사들이 쓰러지는 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좀 더 기운을 내란 말이다. 곧 있으면 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힘을 내라!"

레이오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요새의 광장에 있는 게이트가 크게 소리를 내며 웅웅! 거렸다.

마법통신을 통해 요새가 공격받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본국에서 원군을 보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에 로베니아 병사들도 필사적으로 무너진 요새를 넘어오려는 케린버그 병사들을 막아냈다.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바라보던 핸들러가 검을 꺼내들었다.

"전차의 추가 공격은 언제쯤 가능한가?"

"시험 가동 시에도 대략 추가 공격 시까지 30분 정도 걸렸습니다."

"늦어! 그래가지고서는 로베니아에서 추가병력이 게이트를 통해 밀려올 거야.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 챠챠 소령, 그들도 늦는 마당에 더 이상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챠챠 소령도 전황의 급박함을 깨닫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특임대가 길을 트겠습니다."

스패로우를 움켜쥔 검은 군복의 병사들이 챠챠 소령을 필두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 뒤를 핸들러와 대대병력이 따라 붙으며 더욱 강력해진 스패로우 크로스 보우를 연사했다.

공성전을 벌이던 요새 안의 로베니아 병사들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새로운 적군들이 퍼붓는 강력한 크로스 보우 공격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방패며 갑옷을 너무나 쉽게 뚫어버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무너진 성벽을 잘 막아내고 있던 수비벽이 금세 허물어졌다.

그곳으로 챠챠 대위의 특임대 대원들은 송곳이 구멍을 파고들 듯이 용맹하게 돌진하여 뒤편의 병력들을 위해 길을 냈다.

그 뒤를 커다란 쇠망치가 내려치듯 핸들러와 병사들이 돌진하여 로베니아 제국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막힌 둑이 터지듯 방어막이 깨지자 그곳으로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경계탑과 공격용 탑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법사들 중 일부가 사이클론과의 피 말리는 마법싸움에서 잠시 발을 빼고 성을 수비하던 병사들을 도왔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실수 였고 그 바람에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깨지자 사이클론의 매서운 마법공격이 힘을 얻어서 순식간에 로베니아 마법사들이 몸을 숨기며 싸우던 망루와 경계탑들이 날아가 버렸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케린버그 병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로베니아의 마법사들이 하나 둘 쓰러뜨린 덕분에 요새로부터 날아오는 마법공격이 줄어들자 케린버그의 병사들은 더욱 용기백배하여 함성을 지르며 요새에 대하여 더욱 강하게 몰아붙였다.

"게이트를 지켜라!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요새의 성루에서 밀려난 레이오드는 남은 병사들과 기사들을 데리고 요새 광장의 게이트를 지키기 위해서 인의 장막을 쌓았다.

"젠장, 기간테스가 한 기라도 남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요새 수비대장 레이오드는 기간테스를 남겨두지 않고 모두 전선에 보내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애초에 이곳에 대한 수비 불감증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레이오드의 눈에 무너진 성벽 틈으로 검은 군복을 입고 요상하게 생긴 크로스 보우를 든 케린버그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입술에 피가 배도록 깨문 레이오드가 검의 손잡이를 굳게 잡아갔다.

"모두 죽음으로서 제국의 명예를 지켜라!"

레이오드의 검이 하늘 높이 들리자 제국의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성을 질렀다. 고대 마법 이동게이트도 그에 동조하듯 크게 진동하며 흔들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레이오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희생이 컸지만, 이제 원군이 도착하면 저 쓰레기 같은 케린버그 도당을 무찌르고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항상 사람이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으아악!"

"커흑!"

갑자기 로베니아 진영의 뒤쪽이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수깡이 쓰러지듯 병사들이 맥을 못 추고 쓰러지자 다급해진 레이오드가 급히 뒤로 뛰어갔다.

"도대체 무슨... 이건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거짓말! 왜 레쎈 놈들이 이곳에!"

푹!

하얀 얼음처럼 눈부시게 날카로운 검이 레이오드의 가슴에 깊숙이 꽂혔다.

"끄으으윽! 어, 어떻게 케린버그와 레쎈이 함께... 어... 서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 보고를......."

"큭큭큭! 보고는 내가 해 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게나!"

레이오드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은 자가 검을 잡아 빼자 레이오드는 억울한 눈망울을 숨기지 못하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채 말을 잇지 못한 채 스스륵 몸을 무너뜨렸다.

결국 요새 책임자인 벨떼르 남작 뒤를 따라간 레이오드는 웅웅! 거리며 곧 공간을 열려 놓으려고 하는 게이트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서둘러라, 라인하프! 자네는 휘하 기사단을 데리고 케린버그를 도와서 로베니아 잔당을 처리해라. 나는 이 게이트를 정리해야겠다."

"하! 코들란 자작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레이오드에게 죽음을 선사한 코들란 자작이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마법사들에게 검으로 게이트를 가리켰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레쎈 제국의 병사들이 등에 지고 있던 등짐들을 마법사 앞에 내려놓았다.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서 각종 스크롤과 수정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마법사들은 재빨리 스크롤과 수정구를 들고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그중 가장 연로한 마법사가 스크롤 하나를 꺼내들고 게이트 앞에 있는 석판을 조정했다.

게이트가 점점 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위험을 알려오자 코들란 자작이 손을 높이 들었다.

강을 건너온 덕택에 온몸이 물에 젖어 움직일 때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레쎈 제국의 궁수들이 흐트러짐 없는 동작으로 게이트 앞에 정렬한 후, 시위에 활을 먹였고 기사들은 검을 꺼내 들었다.

마법사들이 막지 못할 경우, 게이트를 통해 건너오는 로베니아 병력과 충돌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게이트를 조정하는 석판을 매만지는 마법사의 이마에서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지금이다!"

노 마법사의 외침에 다른 마법사들이 스크롤을 찢거나 수정구에 마력을 쏟아 부었다.

모든 마력이 석판으로 흘러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게이트가 열리며 로베니아 제국의 병력들이 발을 내디디려고 했다.

고오오오오!

동굴 속에서 바람이 부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번쩍이는 빛과 함께 귀청을 찢는 폭음이 터져 나오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매캐한 연기만이 마법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지며 한숨을 흘리는 마법사를 보고 웃음을 지어보인 레센 제국의 코들란 자작이 휘하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 큰 후환거리는 제거했으니 이제 아군을 도우러 가자!"

코들란 자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레센 제국의 병사들이 득달같이 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을 향해서 뛰었다.

묵은 감정이 보통이 아닌, 레센 제국 병사들의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이제 전세는 지리멸렬한 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이 바닥에 무기를 버리면서 끝나고 있었다.

"후~ 내가 설마하니 살면서 레센 놈들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어!"

"동감입니다, 핸들러 중령님!"

온몸에 피칠을 하고 있는 핸들러와 챠챠가 요새 광장을 장악한 레센의 특공대를 보고 반가워했다.

"늦었습니다."

코들란 자작의 짤막한 말에 핸들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정도면 무뚝뚝하기로는 대륙에서 제일일 것 같았다.

"아닙니다. 아주 시기적절할 때 도착하셨습니다. 강을 거슬러 올라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고생하셨네요."

핸들러가 진심으로 대하자 코들란 자작도 비로소 굳은 얼굴을 풀었다. 아직은 껄끄러운 사이이지만, 함께 싸운 전우 사이가 되다 보니 쉽게 말을 놓게 되었다.

"강에서 병력 절반을 잃었습니다. 이 리하나 강의 물살이 정말 괴물이더군요."

"네, 그렇죠. 하지만 그 덕분에 로베니아 놈들이 강 쪽에는 신경을 덜 쓴 덕에 우리 작전이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핸들러가 씁쓸한 표정으로 코들란 자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코들란 자작도 장갑을 벗고 핸들러의 손을 힘껏 잡았다.

핸들러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지 않더라도 케린버그 또한 수많은 사상자를 냈을 것이 분명했기에 수하를 잃은 장수의 심정은 똑같았다.

"고생했습니다."

"코들란 자작님도요."

모처럼 밝게 웃는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레센과 케린버그의 연합군들이 무기를 하늘 높이 들고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 * *

"장군님! 특공대로부터 전갈입니다. 작전 성공입니다."

케린버그와 레센 제국의 연합군 상황실이 순식간에 들뜬 함성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어려우리라 생각했던 기습 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은 승리에 목말라 하던 연합군에게 가뭄 속의 단비와도 같았다.

"휴~ 겨우 한 고비 넘겼군. 하지만 기뻐하기는 일러 통곡의 벽 상황은 어떤가?"

"아직도 통신이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장군님!"

"답답하군, 그래 아직도 지원 병력이 도착하지 않았나?"

"이제 곧 도착할 것입니다. 장군님!"

부관의 설명에 장군은 아직도 가슴이 답답한지 셔츠 깃을 풀어 헤쳤다.

뒤통수를 간질이던 적의 보급로는 차단했지만, 가장 큰 문제인 적의 주력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통곡의 벽이 문제였다.

호크의 건의대로 전선을 두 개로 축소하고 결전을 벌이고 있지만, 어려운 전투였다.

사실상 통곡의 벽은 자살부대나 다름없었다.

통곡의 벽에서 적의 주력이 가진 전투력을 반감시키고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서 이곳 헤나스톤에 모든 병력을 집결시켰다.

극단적인 방법이기도 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문제는 희생이 크다는 것이었는데, 호크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그 자리에 선 것이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나형석 사령관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스크린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 * *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울었다.

고대의 전쟁이 다시 재현되고 있는 통곡의 벽 앞으로 고대인들의 기간테스들이 파괴와 죽음을 위해 살육의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기간테스들이 서로 충돌할 때마다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젠장! 밀턴, 길을 뚫어라!"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호크 장군님! 놈들의 수가 워낙 많습니다. 게다가 이 녀석들이 우리를 한쪽을 몰아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등 뒤에 달라붙은 적 기간테스를 앞으로 집어던져 덮쳐오던 적들을 넘어뜨린 호크는 밀턴 대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워낙에 많은 숫자의 기간테스들이 뒤엉켜 싸우는 통에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호크는 당황스러웠다.

정신을 차리고 전황을 살펴본 호크는 통곡의 벽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을 발견하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한가운데를 내준 꼴이잖아!"

얽히고설킨 기간테스들 사이로 힘차게 전진하는 로베니아의 전차부대와 기사단 그리고 보병들이 보였다.

막대한 타격을 입은 케린버그 쪽은 결코 저 병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를 악물은 호크는 전신의 기운을 있는 힘껏 끌어올렸다.

"밀턴 대위! 내가 최대한 녀석들을 막아볼 테니 너는 적 보병과 전차대를 상대해라!"

"혼자서 뭘 어떻게 하시려고 합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 틈이나 놓치지 마라! 내가 명령할 때까지 잠시 나를 지키도록 해!"

통신을 끊은 호크는 엥귀오스와 교감의 폭을 크게 넓혔다.

호크의 혈관 하나하나가 엥귀오스와 연결되는 느낌이었다.

밀턴 대위와 부하들이 로베니아 기간테스들을 상대로 잠시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호크는 엥귀오스의 사념이 남긴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조종자와 엥귀오스의 영혼을 하나로 묶는 이 방법은 최고의 전투력을 끌어낼 수 있는 반면, 자칫하면 조종자의 영혼을 엥귀오스에게 빼앗길 수도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어차피 이번 전투에 목숨을 내던진 호크로서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승부였다.

자신이 희생해야 헤나스톤의 마지막 저지선에서 희생을 줄일 수 있었기에 호크는 자신의 위험보다 전투력을 높이는 데 모험을 걸었다. 엥귀오스의 몸체 주위로 푸른빛이 흘렀다.

어느 순간 엥귀오스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가 사라졌다.

"밀턴 대위! 내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니 기회를 놓치지 말게!"

"자, 장군님!"

목소리가 변한 호크의 음성에서 그가 자신의 생명을 쥐어 짜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밀턴 대위는 숙연해졌다.

다음 순간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은 눈앞에 지옥의 저승사자를 맞이해야만 했다.

"크으윽!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강해질 수가 있는 거냐?"

갑자기 날뛰는 엥귀오스를 막기 위해 나섰던 제3군단 소속 아르미앙 자작은 돌변한 엥귀오스의 힘 앞에 무력하게 파괴되었다.

호크는 적기의 가슴에 새겨진 문장들을 보며 지휘관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기간테스들을 골라서 집요하게 공격했다.

갑자기 이렇게 상황이 돌변하자 로베니아 기간테스들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엥귀오스에게 몰려들었다.

어수선한 틈을 타고 길이 생기자 밀턴 대위가 기동전대를 이끌고 전장을 빠져 나갔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파직!

또다시 밀쳐냈지만, 기분 나쁘게 생긴 검은색 기간테스는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리 부분이 파손되었는지 일어서는 동작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화가 난 조종사가 엥귀오스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갑자기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헛바람을 토해야만 했다.

엥귀오스의 커다란 검이 로베니아 기간테스 흉갑에 박아 넣은 검을 거칠게 뽑아내고 다음 먹이를 향해 뛰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엥귀오스의 몸 주위로 푸르스름한 빛이 따라 다녔다.

마치 유령처럼.......

"잡아! 잡으란 말이다!"

콰직! 으드드득!

"헉! 헉! 믿을 수 없어. 이건 말도 안 되는 거야."

그토록 많은 수를 자랑하던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 중 대지 위에 두 발로 서서 움직이는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전투 중 파괴된 것들도 있었지만, 장시간 전투에 따른 조종사의 마나 소모로 인해 정지하는 기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기체에서 떨어져내린 조종사들의 몰골이 처참했다.

무리해서 기간테스에 머문 대가였다.

숨을 헐떡이며 그들의 눈에 들어온 엥귀오스의 활약상은 가공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엥귀오스를 조종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전차대 공격 준비."

다시 한 번 전차대에 공격명령을 내리려던 제3군장 에밀리앙은 지축이 흔들리는 현상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아... 아니, 저, 저럴 수가!"

화들짝 놀란 에밀리앙 군단장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군의 기간테스들에게 발이 묶여서 꼼짝하지 못해야 할 적 기간테스들이 자신들을 향해서 돌진해오고 있었으니 혼비백산할 일이었다.

"저, 전차대를 돌려! 어서!"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지만, 전차대를 돌려서 기간테스들을 공격하기에는 적들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쿠콰광!

로베니아 제3군단 군단장 에밀리앙은 이율배반적으로 아군의 전차대들이 파괴되는 소리가 무척이나 경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소프라노 톤으로 비명을 지르는 이가 있었다.

"이건 악몽이야, 악몽이라고. 트리쉬엥, 지금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발렝 황제가 발악하듯 소리치자 제2군단장 트리쉬엥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니 그로서도 별달리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전차대와 병사들이 지리멸렬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리하나 요새를 떠난 예비부대가 방금 도착했사옵니다."

"오! 이렇게 시기적절할 수가 있나. 어서 적 기간테스를 막으라고 하시오. 어서!"

죽다 살아난 표정이 된 발렝 황제가 서둘러 재촉하자 리하나 요새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예비대의 앙스나르 백작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휘하의 기간테스 부대를 내보냈다.

이제 로베니아 제국의 2/3에 해당되는 기간테스들이 이 전쟁에 투입되는 순간이었다.

"대위님! 적입니다."

"나도 알아! 젠장, 제국 놈들은 도대체 기간테스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길래, 끝도 없이 몰려나오는 거야?"

밀턴 대위는 로베니아 진영 앞에 기간테스들이 모습을 나타내자 이를 악물었다.

아직 조종사들이 탑승하고 전투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었다.

마나석을 살펴보니 색이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연료인 마나석을 보충하지 않으면 꼼짝없이 앉아서 당할 판이었다.

"대위님! 보급 부대입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어느 미친놈이 마나석을 들고 온다는 말이냐?"

수하의 보고에 깜짝 놀란 밀턴 대위는 자신이 탑승하고 있는 기간테스의 몸을 돌리다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미친놈들이 제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오기는 어디를 와!"

내뱉는 말은 거칠었지만, 그 속에 울먹거리는 울음소리가 묻혀 있는 것을 통신을 듣고 있던 부하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여기저기 그을리고 다쳐서 붕대를 감고 있는 케린버그 병사들이 마차며 이동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끌고 그 안에 마나석을 싣고 달려왔다.

기동 전대의 보급을 맡고 있는 보급대 병사들이었다.

손을 높이 들어 미소를 짓는 병사들을 보고 밀턴 대위는 억지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능숙한 솜씨로 마나석을 내려서 4인 1조로 마나석을 들고 이동하는 이들을 보며 기간테스를 조정하던 조종사들은 지친 몸과 마음에 힘을 얻었다.

힘들어 죽겠다고 불평하던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곡의 벽 너머에서 이들을 응원하고 있는 병사들의 들리지 않는 환호성도 함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나석이 교체되는 동안 통곡의 벽에서 붉은색 깃발이 높이 솟구쳤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마나석이 교체되자 흐릿하던 조종석의 빛들이 밝아졌다.

기체를 힘차게 일으켜 세운 밀턴 대위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커레히!"

이를 보았는지 통곡의 벽에 늘어선 케린버그 병사들도 목청을 돋우어 커레히!를 부르짖었다.

"자, 어디 죽어 볼까나!"

로베니아의 전차대와 보병부대를 박살낸 밀턴 대위와 기동 전대들이 힘차게 로베니아 본진을 향해 뛰었다.

어느새 다가온 호크의 엥귀오스가 밀턴의 기체 옆으로 나란히 섰다.

"아직 살아계셨습니까?"

"하악~ 하악~ 씨팔 죽을 거 같으니까 말 시키지 마라!"

"큭큭큭!"

여기저기서 대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것들이 뭐가 좋아서 키득거리냐?"

"호크 장군님! 이제 나이가 드셨나 봅니다."

"헉!"

"저희 먼저 갑니다. 힘드시면 쉬엄, 쉬엄 오십시오."

우와아아아!

엄청난 함성과 함께 통곡의 벽에서 케린버그의 병사들이 진격했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머스탱 공작이 칼을 꺼내든 것이다.

머스탱 공작과 말머리를 나란히 하는 이는 리하나 요새에서 돌아온 사이클론과 핸들러 중령, 챠챠 소령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온 것이다.

"참내, 좀 쉬면 누가 뭐라고 하나. 다들 죽고 싶어서 환장 한 거야 뭐야?"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힘들었지만, 이렇게 좋은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니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어! 가자, 이렇게 살다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

호크의 엥귀오스도 몸을 돌려 로베니아 진영으로 향했다.

처음처럼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지는 않았지만, 용맹한 기운은 그대로였다.

많은 병력을 잃은 로베니아였지만, 평원에 늘어선 로베니아의 본진은 엄청난 위세를 가진 대군이었다.

불나방이 모닥불에 뛰어드는 꼴이었지만, 그 용기만은 하늘을 찔렀다.

"위대한 케린버그의 영광을 위해 우리 모두 소리 높여 외치자!"

어떻게 보면 가련할 정도로 보였지만, 통곡의 벽은 말없이 이 전쟁을 지켜보았다.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이 진한 핏빛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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