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6. 진정한 동맹!
[1. 케린버그는 공화국으로 새로 태어난다.
2. 세린디아를 6개의 영지로 나누고 원래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한다.
3. 귀족들 중 시험을 거쳐 관리들을 선별한다.
4. 문맹률을 줄이기 위해 영지별로 국립학교를 신설한다.
5. 징병은 의무병 제도를 기본으로 삼는다. 복무기간은 4년이며 만 18세가 되는 신체 건강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6. 새로운 법령을 포교하고 국법의 시행을 엄격하게 시행한다.
......
끝으로 케린버그와 세린디아는 하나의 시민이며 위대하신 찰스 국왕의 백성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우리들 삶의 터전을 집어 삼키려는 비열한 제국의 야욕을 막아내야만 한다.
케린버그의 백성들이여, 짐이 검을 들고 앞장설 것이니, 모두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내자!]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최종수정안이 발표되면서 케린버그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열심히 일했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법률은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그만한 대가를 돌려줄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군대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디안 요새의 훈련소는 훈련병을 소화내기 힘들 정도로 지원병이 끊이지 않았고 훈련소를 퇴소한 병사들이 자대 배치를 받고 훈련에 전념을 했다. 곧 다가올 전투를 위해서 가혹하다 시피 장교들은 병사들을 단련시켰다. 당장은 야속할지 몰라도 지금 흘리는 땀이 전장에서 그들의 생명을 지켜줄 힘이었다.
지난겨울 동안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면 따스한 바람이 찾아온 봄은 발전을 위한 시기였다.
온 나라 백성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자신들의 손으로 나라를 건설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귀족들은 귀족들 나름대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이 귀족으로서 대우를 받으려면 그만한 소양을 지녀야 했고, 실력 또한 갖추어야 했다.
여전히 구습에 젖어 있는 지방 귀족들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도태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케린버그를 급성장시켰다.
새로운 공화국체제는 많은 오류를 거쳐 점차 서서히 적응되어가고 있었고, 사람들 또한 새로운 제도에 익숙해져 갔다.
자유와 책임이란 두 가지 문제를 조금씩 받아들여가고 있는 것이었다.
버려진 북부의 땅이 폴렌시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근대국가로 거듭나고 있는 중이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군. 눈 뜨면 달라진다고 하더니, 지금의 케린버그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네."
금발의 장한이 하얀 백마 위에서 관도를 여유롭게 거닐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마차들이 길을 가득 메우고 새로이 세워지고 있는 건물들은 번영의 상징 같았다.
"변화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죠. 그 힘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후후후, 어째, 자네 말투가 귀에 거슬리는군. 처음 봤을 때처럼 편하게 하지, 그러나?"
사내의 말에 옆에서 말을 몰던 남자가 어개를 으쓱거리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럴 수야 있나요? 그때야 적성 국가의 원수였지만, 지금은 동맹국의 사자가 아니십니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드려야죠."
자꾸 입술을 이죽거리는 것이 그가 장난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누가 자네를 보고 한 국가의 사령관이라고 하겠는가?"
"그거야 공작님도 만만치 않은데 피의 군주라고 불리는 양반치고는 너무 점잖아서요. 안 그래요, 봄멜 공작님!"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야. 알렉스 호크 경!"
두 사람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한가로이 로이든 시내를 거니는 두 사람의 정체를 사람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사람은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제국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호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봄멜 공작은 종업원이 가져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음 그래 이렇게 표현하면 맞겠군. 레센은 말이야 슬픔 속에서 태어난 나라라고 해야 하나? 정확하게 말하면 로베니아로부터 버림받은 유민들이 세운 제국이지, 풀 한포기 나지 않는 동토(東土)의 땅에서 터전을 만드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네, 그때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복수였겠군요."
"그래. 레센 제국의 시민들은 모두 가슴속에 응어리를 가지고 있지. 그것이 제국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네."
"또한 제국의 불안요소이기도 하죠."
호크의 지적에 봄멜 공작의 몸이 굳어 버렸다.
"호~ 이거 자네는 볼수록 위험인물이야!"
호크의 지적에 탄복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던 봄멜 공작이 콧수염을 쓸어 만지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자네 말대로네. 우리가 지난 세월 끊임없이 일년전쟁을 벌인 까닭도 내부에서 팽창하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함이지. 그 좁은 곳에 갇혀 지내기에는 제국민들의 꿈이 너무 크거든!"
"네, 네, 그러시겠죠. 지난번에 레센을 방문했을 때, 보니 제국의 시민들이 모두 군인이더군요. 언제든지 비상시에는 시민들이 군인으로 당장에 전선에 뛰어들어도 될 만큼 훈련이 잘되어 있는 걸 봤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저 대단한 로베니아와 세 차례나 전쟁을 치러낸 저력이겠죠.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군인들의 욕구를 풀어 주어야만 했겠죠."
호크의 지적을 즐기듯 찻잔을 홀짝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던 봄멜 공작이 빈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래, 하지만 이제 그것도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어. 대립하던 원로원마저 무너진 지금 우리는 로베니아와 전면전을 벌이지 않으면 안 돼. 만에 하나라도 원정을 포기한다면 군부세력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터뜨리겠지."
"황제가 위험하겠군요."
"그래, 슬픈 이야기이지만 사실이지. 레센은 지금 광기(狂氣)에 휩싸여 있는 굶주린 늑대와 같지.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힘이야. 이유야 어쨌든 레센은 로베니아와 싸우지 않으면 존재할 의미가 없어! 어리석다고 해도 어쩔 수 없네. 몇 마디 말로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봄멜 공작의 말을 묵묵히 듣던 호크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니 측은하군요."
호크의 절망적인 탄식에 봄멜 공작은 아니라고 말했다.
"전장에 나가본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무섭고 두려운 공포의 체험이지. 그러나 전쟁을 본 우리는 결코 전쟁을 가슴속에서 지울 수가 없네. 그것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니까. 레센이 잘못되었다는 것 잘 아네. 하지만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네. 이 전쟁을 부인하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봄멜 공작의 눈가에 가득한 주름을 보며 호크는 그가 세월과 역경의 수많은 고개를 넘어온 역전의 용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각기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각자의 길을 헤쳐 나간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혹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결국은 각자가 알아내야 할 인생의 숙제 같은 것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보는 호크였다.
"발렝 황제 폐하! 군사들이 준비가 끝났습니다."
중무장한 기사들이 성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겨울 내내 로베니아의 황궁은 그야말로 전시체제였다.
궁에서 일하는 하녀와 하인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할 정도로 살얼음판이었다.
언제나 기사들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돌아다녔고 매일매일 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사열을 받았다.
게다가 황제의 내성은 얼음궁전이라는 소문이 나올 정도로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로이든 전투에서 사망한 1군단장을 대신해서 새로 부임한 샬린 백작이 중무장한 채 군례를 올리자 가볍게 무장한 발렝 황제가 단상에서 내려왔다.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단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견디기 힘들었던 오욕의 세월이여, 가라! 더러운 귀족들이여, 가라! 오로지 대 로베니아 제국의 영광만 있으라!"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검을 높이 치켜든 발렝 황제의 눈빛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피에 굶주린 이리 같았다.
황제의 기운을 느꼈는지, 기사들의 표정들도 험악해졌다.
지난겨울 제국의 군사들은 지옥을 경험했다.
늘 최고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로베니아 병사들이 언제 땅바닥을 구르면 훈련을 해 보았던가 손과 발이 부르텄고 흙과 모래가 식사였으며 내리는 빗물이 식수였다.
성 밖에 움집 한 50만 대군의 눈빛이 하나같이 대단했다.
성벽 위에 올라선 발렝 황제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피어났다.
"믿어도 되겠는가?"
조용한 황제의 음성에 병사들은 황궁이 무너지도록 함성을 질러댔다.
"가자,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러!"
겨우내 칼을 간 제국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대군의 행렬 뒤로 화려한 마차들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큰 마차 위에 발렝 황제가 우뚝 섰다.
그는 지금 승리에 대한 열망 속에 빠져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황제의 마차 행렬 맨 끝에는 검은색 한기가 새어나오는 마차가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마부석에는 로브를 입은 난쟁이가 고삐를 쥐고 웃음을 흘렸다.
제국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핵심전력이 케린버그를 향한 원정길을 나섰다.
그런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결국 황제가 따라 나섰군요, 숙부님!"
"네, 황후 마마! 크리시앙 대공께서 저희들의 부탁을 들어주신 셈이죠. 크리시앙 대공과 함께 하는 참전이 황제에게는 커다란 영광이자 그와 함께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로베니아 남자들의 로망이니까요"
몽셀 공작과 앙뜨네트 황후가 멀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표정이 굳어졌다.
"그럼 이제 저희들의 결정만 남았군요."
황후가 힘들게 입을 떼자 몽셀 공작이 조심스럽게 황후의 의중을 살폈다.
"후회하십니까? 마마!"
드레스의 치맛자락을 들고 몸을 돌리던 황후의 몸이 멈췄다.
"후회는 없어요. 단지 아픔만 있을 뿐이죠."
사라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보며 몽셀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정이 있든 없든 자신의 손으로 남편을 쳐내야 하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어려운 일을 받아들였고 스스로 고행의 길에 뛰어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그녀 스스로 짐을 지려 한다는 것을 몽셀 공작은 알았다.
하지만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앞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잠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은 몽셀 공작이 수하를 불렀다.
"롯셀리니 추기경에게 기별을 넣어라! 때가 왔다고!"
멀리 성벽 너머 점이 되어가는 로베니아의 출정군을 보며 몽셀 공작은 주먹을 쥐었다.
천년의 제국을 뒤엎으려는 위험천만한 모험이 시작되었다.
끝이 없는 막사가 들판을 메우고 있었다.
들판 위에 막사가 세워진 것인지 아니면 막사가 들판을 먹어치운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로베니아의 케린버그 정벌군 진지가 대지를 뒤덮었다.
그 중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휘황찬란한 막사가 눈에 띠었다.
거의 인의 장막을 둘러친 고급스런 막사 안으로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음식들이 들어갔다.
막사 안은 바닥이 고급 천으로 되어 있었고, 푹신한 쿠션들로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상석에 로베니아의 황제 루이 드 발렝이 상기된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고 서 있었다.
"로베니아의 수호신이신 크리시앙 대공께서 함께하시는 이상, 이번 원정길에 실패는 없다. 전설을 위하여!"
발렝 황제의 선창에 막사의 장교들이 모두들 잔을 높이 들었다.
그들은 우렁찬 환호성에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선 크리시앙 대공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잔을 들었다.
"로베니아의 위대한 전사(戰士)들과 싸움을 함께한다니 나의 피도 끓어오른다. 모쪼록 선조들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로베니아의 힘을 보여주도록!"
"와아! 로베니아! 로베니아!"
막사 안은 금세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군인들은 어릴 적부터 우상인 크리시앙 대공과 함께하는 것에 다들 흥분해 있었다.
크리시앙 대공은 그들에게 인간이 아니라 신(神)이었다.
그것도 제국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전투신(戰鬪神)으로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런 전설과 함께 자리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일생의 영광이었다.
출정식이자 자축연이 된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술이 어느 정도 돌았을 무렵 발렝 황제가 경건한 자세로 크리시앙 대공에게 술을 건넸다.
"앞으로도 제국을 수호하는 용사로서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든 크리시앙 대공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제로서는 의당 하는 말이었겠지만, 크리시앙의 입장에서는 지독한 악담이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말은 가뜩이나 영원한 삶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저주나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국이나 제국의 시민들로서는 크리시앙의 인생이나 그가 받는 고통에 관심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로지 그가 영원히 제국을 지켜주기만을 바랬고 크리시앙도 제국의 지키는 수호신이란 자리가 영광스러울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크리시앙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이라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가 이 원정에 참가한 것이 제국의 승리보다 자신의 지겨운 운명의 끈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사실 크리시앙은 제국이 멸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여신 미르네보의 저주를 끝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발렝 황제와 군인들은 크리시앙을 칭송하며 건배를 하고 있었고, 크리시앙은 그저 어색한 미소로 사람들의 기대에 답할 뿐이었다.
"주인님, 자리가 불편하시면 그만 잠자리에 드시죠."
"아니야, 앞으로 이런 자리도 마지막이겠지. 자, 자네도 즐기라고. 루스펠! 한 잔 들지!"
크리시앙이 붉은 와인을 루스펠의 잔 가득히 따라 주었다.
찰랑거리는 와인을 잔속에서 흔들어 본 루스펠이 단숨에 삼켜버렸다.
"후아~ 독하군요!"
"훗! 독하다라... 우리의 이 거지 같은 인생보다 독한 것은 없지 않을까?"
자조적인 크리시앙의 말투에 루스펠도 한 잔 더 따라서 마셨다.
"오늘은 좀 취해도 될까요, 주인님?"
"후후후, 이제야 사람다운 말을 하는군. 난 가끔 자네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거든. 천년 가까이 늘 똑같은 자네를 보고 난 많이 괴로웠어. 어리석은 주인 때문에 영원히 고통 받을 자네를 생각하면 늘 괴로웠지."
크리시앙의 진심어린 말에 루스펠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술잔의 술을 들여다보던 루스펠이 긴 한숨을 쉬었다.
"저도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주인님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시는 것을 보며 그날 주인님을 막지 못한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죠. 그녀를 원망했습니다. 너무너무 미워서 매일매일 저주를 퍼부었죠. 제가 좀 더 똑똑했더라면 주인님을 고통 속에서 살게 만들지 않았을 텐데......."
크리시앙의 손이 작은 체구의 루스펠을 끌어 당겼다.
"이 친구야, 자네 잘못이 아냐! 복수에 눈이 멀었던 철부지 크리시앙의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일 뿐이야."
"대가 치고는 너무 가혹한 걸요!"
"그래 너무 심했지......."
두 사람의 대화가 술기운에 흥이 나서 노래를 부르는 기사들의 소란에 잠시 끊어졌다.
두 사람은 무표정으로 막사안의 흥겨운 파티를 바라보았다.
이미 승리를 한 것처럼 모두들 자만에 취해 있었다.
더욱이 발렝 황제는 젊은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무용담에 빠져서 넋을 잃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부딪치고 술을 들이켰다.
"내 인생을 바쳐서 구한 제국의 미래가 이런 거였나?"
"저들은 대공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아니 제국 전체가 이미 대공의 희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배은망덕한 것들이죠."
이를 가는 루스펠과 달리 크리시앙은 그저 키득거리기만 했다.
쿠션 위로 몸을 기대고 누운 크리시앙이 머리 뒤로 팔을 두르고 눈을 감았다.
"이젠 아침이 오는 게 너무 두려워, 루스펠!"
잠이 든 모습처럼 보이는 크리시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스펠이 그의 몸 위로 담요를 덮어주었다.
"이제 곧... 곧 끝나겠지요. 주인님! 케린버그의 그 자를 만나게 되면요... 저도 어서 빨리 그 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검은 머리의 청년을요......."
루스펠도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후드를 눌러썼다.
잠이 와서가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 모든 것을 바친 제국의 모습이 보기 싫어서였다.
두 사람은 아마도 같은 꿈을 꾸고 있을지 몰랐다.
케린버그에 있을 여신 미르네보의 예언속 남자를, 길고 긴 저주의 끈을 잘라내고 편안한 안식을 쥐어줄 사내를 만나고 있을지 몰랐다.
* * *
"언제 출발했다고?"
"어제 오전이라고 합니다. 지금 참모급 이상 지휘관들이 모두 소집되어 있습니다."
"그 자식들 어지간히 열 받은 모양이군. 눈이 녹자마자 공격하는 걸보니, 젠장!"
부관의 보고에 복도를 뛰어가는 호크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예상보다 두 달이 빨랐다.
로베니아도 겨우내 쉬지 않고 준비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가 생각보다 얼어붙은 강이 빨리 녹아버렸다.
지금 케린버그는 전시 태세가 발동된 상태였다.
로이든의 깊숙한 작전회의실에 케린버그의 중요인물들이 모여들었다.
"호크 장군입니다!"
호크를 마지막으로 각료회의가 시작되었다.
"자, 이제 인원이 성원이 되었으니 시작합시다."
찰스 국왕의 명령으로 각료회의가 시작되었다.
핸들러 중령이 상황판 앞에 서니 칠판 크기의 상황판에 불이 들어왔다.
지도 위에 수많은 점들이 표시되었고, 지휘봉을 든 핸들러 중령의 설명에 의해서 의미 없던 점들이 살아있는 생명체로 바뀌었다.
핸들러 중령의 설명이 끝나자 회의실은 난상토론에 들어갔다.
수없이 많은 의견이 쏟아졌고 갑을박론이 이어졌다.
하지만 예전처럼 비관적인 분위기속에 진행되는 회의는 아니었다.
뭔가 할 수 있다는 그런 강한 자신감들이 팽배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배경이 되는 한 사람이 일어섰다.
"잠시 저를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수지간이었던 레센 제국의 반봄멜 공작이었다.
그가 동맹국 대표의 자격으로 케린버그의 각료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봄멜 공작에게 집중되었다.
"감사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은 혼자 힘으로 로베니아의 원정군을 물리쳤습니다. 그것은 대륙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며 여러분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도 좋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봄멜 공작의 연설은 케린버그 수뇌부에 힘을 실어주었다.
모두의 표정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린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로베니아의 2차 원정이 비록 대규모의 병력이라고 하지만, 이쪽도 이번에는 다르다고 봅니다. 저희 레센과 함께이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을 보며 봄멜 공작도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곧 모스크 산맥을 넘어 레센의 정예가 케리버그와 함께 할 것입니다. 대륙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될 레센과 케린버그 양국의 연합군이 오만한 로베니아에게 패배의 쓴맛을 또다시 안겨주리라 믿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륙의 절대 강자 중에 한 사람인 봄멜 공작의 말은 강한 믿음과 확신을 주었다.
그때 머스탱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록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문서상으로 맺은 조약이 얼마나 믿음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머스탱 공작의 이 한마디가 회의실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다들 레센이라는 거대 제국과의 연합을 기뻐하기만 했지, 다른 이면을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냉철한 머스탱 공작은 이를 짚고 넘어갔다.
어색한 분위기가 회의실에 흐르자 난처해진 것은 알렉스 국왕이었다.
동맹의 제의가 왔을 때 가장 먼저 기뻐하며 조약체결을 서두른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묘한 기류가 흐르자 모두들 눈치 보기 바빴다.
그러나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머스탱 공작의 시선을 웃음으로 받아준 봄멜 공작이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 이건 나중에 알려드려서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분위기상 지금 하는 게 낫겠군요!"
뭔가 대단한 것을 발표 하려는 듯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된 봄멜 공작이 알렉스 국왕을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양국의 우의를 증진하고 아울러 폴렌시아 대륙를 좀먹는 로베니아를 정벌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저희 레센의 요한 황제 폐하께서 케린버그를 방문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 정도면 저희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겠죠, 머스탱 공작님!"
봄멜 공작의 뜨거운 눈길을 받은 머스탱 공작이 피식 웃고 말았다.
실소(失笑)를 머금은 머스탱 공작이 고개를 흔들며 박수를 쳤다.
"내가 졌소이다. 솔직히 당신과의 자리가 편하지 않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소. 당신 손에 전사(戰死)한 나의 병사들을 생각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대의 말처럼 양국의 뿌리 깊은 원한도 따지고 보면 다 로베니아 제국의 만행 때문이니 양국의 힘을 합쳐 썩어 빠진 제국을 무너뜨린다면 두 나라의 전사자(戰死者)들도 이해해주리라 믿소."
그랬다.
사실 머스탱 공작은 처음 레센의 동맹제의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결코 그들과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귀족들 또한 거세게 반발했다.
원수와 손을 잡느니 차라리 모두 죽는 것이 났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장관 ,사이클론 그리고 헬렌 장관 등이 끈질기게 귀족들을 설득했고 처음의 흥분이 가라앉고 현실을 직시한 귀족들은 하나, 둘 동맹의 타당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특히나 각료 회의시간에 호크의 진심어린 연설이 모두의 마음을 돌리게 한 계기가 되었다.
단 한 사람 봄멜 공작과 피맺힌 원한이 있던 머스탱 공작을 제외하고 레센과의 동맹을 받아들였다.
머스탱 공작은 만약에 총리의 입장이 아니었다면 봄멜 공작을 봤을 때, 검을 꺼내들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한 나라의 총리로서 막중한 책임이 그의 이성을 지탱해주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오늘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모두에게 주위를 환기시키는 의미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봄멜 공작의 지금 말은 머스탱 공작을 한발 물러서게 만들었다.
'후~ 보기 좋게 한 방 먹었군!'
머스탱 공작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볍게 혀 차는 소리를 낸 머스탱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봄멜 공작에게 군례를 했다.
봄멜 공작 역시 조금 전 머스탱 공작의 딴지걸기를 다 잊었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화답했다.
두 사람은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들을 낮추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머스탱 공작과 봄멜 공작의 모습은 모든 이의 귀감이 될 만 했다.
얼어붙었던 회의실 분위기가 다시 살아나자 찰스 국왕이 매우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좋아, 레센에서 귀한 손님이 오신다니 우리도 손님 접대에 소훌 함이 없어야겠군. 헬렌 백작 내무장관으로서, 그대가 알아서 손님맞이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오!"
찰스 국왕의 명령에 헬렌 백작이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머스탱 공작이 이어서 총리로서 회의를 주재해나갔다.
다가오는 로베니아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단계별 준비사항을 검토하고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 사항에 대한 검토를 시작했다.
또한 각 정부 부처 간의 협력체제를 전시태세로 바꾸고 모든 관리들은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했다.
물론 전군에 전시준비태세가 하달된 것은 당연했다.
각료회의에서 결정된 사항 중 비밀을 요하는 몇 가지를 제외하고 대국민 포고문이 작성되었고, 이는 곧 케린버그의 모든 영지로 전달될 사항들이었다.
이 시각 이후로 케린버그는 국가 전체가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각료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텅 빈 회의실에 남은 것은 봄멜 공작과 호크뿐이었다.
"후~ 치사하게 이게 뭡니까?"
호크의 볼멘소리에 봄멜 공작이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무슨 말인가? 치사하다니?"
전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봄멜 공작을 보고 호크는 회의실 탁자에 발을 올려놓으며 인상을 썼다.
"레센의 황제가 온다는 말이요."
"아~ 난 또 뭐라고."
이마를 '탁!' 치며 이제 알았다는 표정을 하는 봄멜 공작을 보고 호크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섭섭한 걸요."
호크의 짓궂은 말에 봄멜 공작은 그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마요."
"하하하, 이거 자네가 단단히 화가 났군. 그래 내가 어떻게 하면 기분이 풀어지겠는가?"
짐짓 엄살을 떠는 봄멜 공작을 보고 호크가 술잔을 꺾는 시늉을 해보였다.
"한잔 사시죠!"
"좋아! 얼마든지 사지!"
기분 좋게 받아들인 봄멜 공작을 보며 저녁때 시내의 술집에서 만날 것을 약속 받았다.
회의실 밖으로 사라지는 봄멜 공작을 보며 호크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전쟁을 앞두고 찜찜한 것은 털어내야지. 그래야 뒤끝이 깨끗해져!'
무슨 생각인지 호크는 웃음을 뒤로하고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로이든 시내의 한 다운타운의 선술집.
녹이 슨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선술집은 이미 수많은 손님들로 가득했다.
담배연기가 가득한 술집은 실내는 남자들의 열기로 숨 막히게 후덥지근했다.
손을 들어 연기를 흩어버린 남자가 홀 안으로 들어서자 그를 본 손님들이 경례를 붙였다.
남자 역시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하며 일행을 찾아 테이블 사이를 누볐다.
한참을 헤맨 후에야 일행을 발견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 이거 수도 방위 병력은 죄다 모여 있는 것 같아."
"하하하, 루크 대위님! 농담도 심하십니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로이든 전투의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2계급 특진한 루크 대위가 자신의 소대원이었던 병사들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곧 비상이 떨어질 거야. 아마도 한동안 술 구경하기 힘들 테니 오늘 실컷 마셔두게. 선임하사, 아차! 이제는 아니지 미안하네, 소위!"
선임하사도 이미 진급했지만, 아직 입에 안 붙었는지 여전히 선임하사라고 부르는 루크를 보고 소대원들이 키득거렸다.
"중대장님은 어떻게 된 게 진급을 해도 티가 나지 않아요. 미스테리입니다!"
한 소대원의 농에 루크도 하얀 이빨이 드러나도록 낄낄거렸다.
"큭큭, 나도 전투 체질이지, 장교 체질은 아니라서 말이야.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싫다고!"
시끄러운 술집 안의 소음 때문에 고성이 오고가야만 겨우 의사소통이 되었다.
모처럼 주말을 맞이해서 외박을 나온 병사들이 술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독한 럼주가 나무잔에 가득 채워져 나오자 모두의 손에 잔이 들렸다.
루크가 잔을 들어 바에 길게 늘어선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처음 부임해 왔을 때와 다른 얼굴들이 많았다.
하나둘씩 죽어간 전우(戰友)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술집 바(BAR) 뒤에서 녀석들의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훗~ 지겨운 녀석들, 형제들을 위해!"
루크가 잔을 높이 들고 외치자 소대원 모두가 잔을 부딪치며 소리를 질렀다.
"커레히(currahee)!"
잔들이 부딪히며 럼주가 흘러 넘쳤다.
거친 사내들의 웃음이 함께했다.
치열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함께한 전우(戰友)들의 얼굴을 보며 루크는 이 전쟁 속에서 과연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우리는 무엇을 위해 피를 흘리며 전쟁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뒤돌아보게 되었다.
너무나 어렵고 두려운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자신의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그것은 자신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 될 것이라는 것을 루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술집을 가득 메우는 병사들의 함성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커레히(currahee)!"
루크 소대원들의 합창이 술집 전체로 번져나간 것이었다.
루크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병사들이 모두 술잔을 높이 들고 외인부대의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곳곳에 다리를 잃거나, 팔을 잃은 부상자들도 있었지만, 커레히(currahee)!를 외치는 그들의 얼굴에는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었다.
함께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한 전우들이었다.
그들과 함께한 것만으로도 이 전투는 의미 있는 것이었고 자랑스러운 참전(參戰)이었다.
고개를 젖혀 크게 웃은 루크 대위도 목청껏 크게 외쳤다.
"커레히(currahee)!"
술집 안을 가득 메운 병사들이 술잔을 마주치며 군가를 합창했다.
루크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서로를 지켜주었던 자랑스러운 전우들을 보며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이 모두 오래오래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했다.
과연 이들 중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살아남을 줄 모르겠지만, 루크는 진심으로 그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신이 계시다면 저들을 굽어 살펴주소서! 그리하여 저들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희생을 보상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제발 간청하옵니다.'
루크의 간절한 기도가 통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적이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랬다.
"부대 차렷!"
한껏 고조되었던 술집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의 갑작스런 외침 때문이었다.
어리둥절하던 병사들이 모두 술잔을 내려놓고 부동자세를 취하자 마치 도미노 게임을 하듯 머뭇거리던 병사들이 모두 부동자세를 취했다.
"충성!"
고함을 외쳤던 병사가 대표로 인사를 하자 뒤늦게 실내에 들어온 호크가 인상을 쓰며 인사를 받았다.
"쉬어!"
호크의 명령에도 병사들은 쉬이 자리에 앉지 못했다.
호크 뒤에 서 있는 인물 때문이었다.
레센 제국의 반 봄멜 공작 때문이었다.
병사들의 차가운 눈빛을 느낀 봄멜 공작이 헛기침을 했다.
"자네도 참 장소 한번 제대로 잡았군."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아주 좋은 장소입니다. 꽤 고심해서 고른 곳이거든요."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호크를 보며 봄멜 공작도 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술집 안의 살기에 봄멜 공작은 뒤통수를 긁으며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일동 차렷! 충성!"
문 입구에서 또다시 터져 나온 구령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고개를 돌린 봄멜 공작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이번에는 제법 화가 났는지 봄멜 공작이 호크를 노려 보았다.
그러나 호크는 두 팔을 벌려 보이며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왜요?'라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봄멜 공작의 턱 근육이 움찔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술집에 들어온 인물이 꽤나 껄끄러운 듯했다.
나무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술집 안에 크게 울렸다.
술집 안은 또다시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어서 오세요, 머스탱 총리 각하!"
호크가 반갑게 반겨준 이는 케린버그의 초대 총리인 머스탱 공작이었다.
테이블 가까이 다가온 머스탱 공작의 표정도 그리 좋지 못했다.
봄멜 공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하... 하... 하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그래요. 이... 렇... 게 만나게 되는군요."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팔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호크 눈에는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손에서 마나가 일렁이는 환상을 보았다.
"자, 자, 쓸데없이 힘쓰시지 말고 자리에 앉으세요. 거 애들도 보고 있는데 이게 뭡니까! 어서 앉으세요!"
호크가 두 사람을 뜯어 말리자 겨우 떨어졌다.
'후~ 이거 두 노친네 고집들이 장난이 아니잖아. 생각보다 쉽지는 않겠는걸. 그래도 이 일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뒤가 찜찜해서 안 돼! 반드시 오늘 풀어버려야 해!'
단단히 마음먹은 호크가 손뼉을 치자 병사 하나가 득달 같이 달려 왔다.
그 모습에 호크는 얼굴에 주름살이 생겼다.
"뭔가 병장?"
"네, 그, 그게 장군님께서 부르셔서......."
"자네가 이 술집 종업원이야? 언제부터 외인부대... 아니 왕립군이 손뼉을 친다고 달려왔어? 이걸 그냥!"
호크가 화를 내자 병장은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 그를 구해준 것은 루크 대위였다.
"장군님! 사병들이 너무 어려워 합니다."
"어? 너 루크 아냐?"
호크가 반색하자 루크 대위는 자신을 기억해주는 호크가 고마웠다.
아직도 호크가 그를 괴롭히려고 최전방으로 보낸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호크는 머스탱 공작과 그의 아들 사이에 끼게 되자 식은땀을 흘렸다.
죄 짓고는 못산다더니 뒤가 켕기는 호크는 서둘러 화제를 돌리기에 바빴다.
어서 빨리 녀석을 쫒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이야, 너 대위로 진급했네. 하하하! 축하한다. 그건 그렇고 어르신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너는 좀 빠져라!"
서둘러 쫓아내려는 호크를 보며 머스탱 공작이 의아해했다.
"호크 경! 젊은 장교와의 자리는 항상 즐겁기만 하다오. 함께 자리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머스탱 공작의 뻔뻔한 얼굴을 보고 호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뻔뻔한 노친네 좀 보라. 내가 뻔히 당신 아들이라는 것을 아는데 연극을 해!'
제법 열이 받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기에 참아야 했다.
"하! 하! 하! 총리께서 그러시다면야 저도 뭐......."
호크는 머스탱 공작이 보이지 않게 루크에게 눈을 부라렸다.
"호크 장군님! 눈에 뭐라도 들어가셨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이나 눈치 없기는 둘째라가면 서러워할 인물들이었다.
기가 막히는지 헛웃음을 토해낸 호크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원군이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봄멜 공작의 말에 호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하하하! 이래서 사람은 두고 봐야 한다니까. 고맙소, 봄멜 공작! 하하하하!'
봄멜 공작의 말에 루크도 소대원들에게 돌아갔고, 술집 안의 병사들도 다시 술자리를 즐기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흘린 호크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실실 거리며 웃었다.
"거, 애들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서로 확 털어버리고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호크가 두 사람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말을 건넸지만, 두 사람을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호크의 말은 쉬웠지만, 지난 일년전쟁 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고받은 두 사람에게 지난 일들을 잊으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호크가 계속해서 두 사람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뿌리 깊은 앙금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케린버그와 레센 제국의 연합군이 괴물 로베니아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연합군의 두 수장이 이렇게 불협화음을 낸다면 전선에 임한 병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종업원이 가져온 럼주를 돌린 호크가 먼저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자, 자, 자고로 남자들 끼리 쌓인 감정에는 이 술이 최고입니다. 쭉 들이켜세요!"
호크가 너스레를 떨면서 술을 권하자 두 공작도 마지못해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두 사람 모두 과중한 업무로 인해 이런 자리를 갖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강한 자극에 짜릿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딱딱해진 뒷목의 근육을 손으로 주물렀다.
시내 변두리의 술집에 거물들의 술자리가 벌어졌다.
술집 주위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진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술집 안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탁!
단숨에 독한 럼주를 들이 마신 머스탱 공작이 거칠게 술잔을 테이블위로 올려놓았다.
막 술을 넘기던 호크가 어찌나 깜짝 놀랐던지 사래가 들릴 정도였다.
"크헉! 켁~ 켁~ 후아, 깜짝이야! 뭐에요? 사람 놀라게시리!"
호크가 불같이 성을 내는데도 머스탱 공작은 호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낸 머스탱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깨의 상처가 비만 오면 쑤시고 아픕니다."
머스탱 공작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다고 생각한 호크는 왠지 위태위태한 분위기에 신경이 곤두섰다.
"후후, 저는 밤마다 옆구리의 상처 때문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답니다."
봄멜 공작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테이블 주위가 열기에 휩싸였다.
두 사람의 눈길 사이에 종이를 끼워 넣으면 불길이 타오를 것 같았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호크는 목이 타는지 연신 술잔을 들이켰다.
"꼭 50년 만이군... 기억하기 싫은 그날이 지난 지......."
머스탱 공작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과거 속으로 기억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모스크 산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계곡 안에 울려 퍼졌다.
하얀 눈밭에는 조금 전에 흘렀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 혈흔들이 가득했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니 수만의 병사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누군가 가슴에 검을 꽂아 넣자 그 병사의 뒤에서 또 다른 병사가 창을 찔러 넣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레센 제국의 문장을 한 병사들의 시체가 계곡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위로 피를 뒤집어쓴 혈마(血魔)가 핏빛의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악마 같은 놈! 내가 상대해주마!"
검은 갑옷을 입은 금발의 사내가 그에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곧이어 계곡 안은 귀청을 찢어놓을 듯한 검명(劍鳴)이 울러 퍼졌다.
마나로 충만한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生)과 사(死)를 오고가는 전투 속에서 사투(死鬪)를 벌이던 병사들의 싸움을 멈추게 만들었다.
일반인들의 경지를 벗어난 검술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윈터러의 초입에 들어서는 모스크 산맥은 위험한 곳이었다.
거대한 몬스터도 윈터러의 폭설에 갇히며 영원히 얼음 속에서 조각이 되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 악마 같은 놈, 로베니아의 개가 되어서 싸우다니 무인(武人)으로서 자긍심을 어디다 팔아먹은 것이냐?"
검은 갑옷의 사내가 피에 절은 절규를 토해내며 검을 휘둘러오자 피를 뒤집어쓴 머스탱 공작이 냉소를 흘렸다.
"누가 누구에게 악마라고 부르는가? 그대의 검에 차디찬 눈밭 위에 쓰러진 나의 병사들에게 그 말을 해보게! 아직도 멀었어. 레센의 더러운 피를 내 검이 원하고 있단 말이다! 이제 내 검이 너의 피를 원하는구나. 어서 와라, 봄멜 공작!"
"오냐! 이 전쟁은 패했지만, 너만은 내가 숨통을 끊어주마! 하앗!"
또다시 광풍이 휘몰아쳤다.
가히 검의 폭풍이라고 할 만했다.
주변의 병사들은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세 번째 일년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만 남긴 채 이렇게 모스크 계곡에서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큭!"
"우~욱!"
머스탱 공작과 봄멜 공작의 몸이 스쳐지나가고 서로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무너졌다.
답답한 신음성을 흘리며 머스탱 공작은 어깨를 봄멜 공작은 허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 채 뒤로 물러났다.
상처 입은 늑대가 더 무섭다고 했다.
피를 본 두 사람의 눈빛이 더욱 살벌해졌다.
그러나 그들의 대결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뭐냐? 이거 놔라! 이거 놔!"
봄멜 공작의 뒤에서 수하 기사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머스탱 공작 역시 병사들의 손에 의해서 뒤로 물러섰다.
분노한 머스탱 공작이 불같이 화를 냈지만, 병사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머스탱 공작님, 어서 빨리 디안 요새로 후퇴해만 합니다. 잘못하다가는 윈터러의 폭설에 묻히게 됩니다. 영원히요!"
부상을 입은 머스탱 공작과 봄멜 공작은 부하들에게 몸을 의지한 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윈터러의 폭설이 모스크 산맥의 깊은 계곡을 눈으로 덮어 버렸다.
감았던 눈을 뜬 두 사람의 얼굴을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머스탱 공작이 술병을 들어 봄멜 공작의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실로 오랜 세월이었소. 날마다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고 살아왔소.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든 적이 없었지. 무려 5만 명의 부하들을 모스크 산맥의 이름 모를 계곡 속에 묻어두고 혼자 도망쳤으니, 그 죄 값을 어떻게 치를까?"
머스탱 공작이 따라준 술을 단숨에 들이키며 넋두리를 하는 봄멜 공작을 보며 머스탱 공작도 자신의 빈 술잔에 술을 따라서 마셨다.
"지옥이었소. 그날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지. 서로 죽고 죽이기만 되풀이 하는 짐승이었소.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지금은 후회만 들 뿐이오. 그날 케린버그는 10만의 병사를 그 속에 묻어두고 왔소. 폭설이 덮치기 전까지 살아있는 부상병들과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까지......."
머스탱 공작 역시 괴로운 듯 연신 술잔을 꺾었다.
왁자지껄 하던 술집 안도 두 명의 늙은 전사(戰士)들이 이야기하는 옛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느라 조용해졌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서로에게 검을 들이댔을까?"
머스탱 공작의 회한이 가득한 음성에 봄멜 공작의 분노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로베니아 때문이지요."
"로베니아!"
머스탱 공작 역시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면 눈빛이 무서워졌다.
"큭큭큭! 우리를 모스크 산맥으로 몰아넣은 그놈들은 디안 요새에서 따듯한 식사를 하고 있더군. 그때 녀석들이 내게 한 말은... 뭐가 그렇게 시간이 걸렸냐는 거였지. 대로베니아 제국에서 지원을 해주었는데 말이야... 큭큭큭!"
기분 때문인지 독한 럼주 때문인지 머스탱은 취해 있었다.
봄멜 공작도 허무한 웃음을 터트리며 술병 째 입으로 가져갔다.
"후~ 오늘 따라 술이 받는군요. 아무리 술을 마셔도 문드러진 한 쪽 가슴의 아픔은 달래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을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노회한 두 영웅의 마음이 통했는지 서로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도려내야죠!"
두 사람의 잔이 부딪혔다.
단숨에 술잔을 비운 두 사람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손을 내밀어 마주잡았다.
"지난 일은 묻어두고 원수를 갚읍시다."
봄멜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로베니아에게 묵은 원한을 갚지 않으면 케린버그나 저희 레센이나 영원히 홀로 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하하하!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이제야 진정한 연합군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네요. 자, 모두 건배 하시죠!"
두 사람의 화해를 지켜보던 호크가 크게 기뻐하며 잔을 높이 들자, 술집 안의 병사들도 모두 환호했다.
그날 밤 때 아닌 술 파티가 벌어졌다.
레센과 케린버그가 문서 따위로 맺어지는 그런 사이가 아닌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보다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진정한 동맹관계로 출발할 수 있는 첫 단추를 무사히 끼우게 되었다.
안도한 호크는 겨우 마음 편히 술 한 잔을 할 수 있게 되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제길, 그러고 보니 잠을 제대로 자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
두 손으로 피곤에 절은 얼굴을 문지른 호크가 의자에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들이 축배를 드는 술집에서 호크는 테이블에 고개를 꺾고 잠이 들었다.
"허! 이 친구가, 이보게, 호크 경!"
코까지 골며 잠을 자는 호크를 보고 민망해진 머스탱 공작이 황급히 깨우려 하자 봄멜 공작이 만류했다.
"그냥, 두시지요. 이제 조금 있으면 자고 싶어도 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요."
봄멜 공작의 말이 아니더라도 호크는 거의 혹사당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를 이 정치판에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지 않은가, 측은한 생각이 든 머스탱 공작이 망토를 떼어내 호크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잠이 든 호크를 사이에 두고 양국의 수뇌가 술잔을 기울이며 앞날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웠다.
그 시각에도 로베니아 제국은 전진을 계속했다.
창날을 번뜩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