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깨어나는 진실!
'부스럭!'
아직 눈들이 쌓인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자 고요하던 숲속이 시끄러워졌다.
그리고 숲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도 바짝 긴장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잠시 후 일단의 무리들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겨울의 끝자락이라지만 아직 모스크 산맥을 넘기에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일행들의 몰골은 형편없었다.
100여 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눈 신을 등에 걸치고 가죽옷으로 몸을 가린 채 지친 몸으로 수풀을 헤쳐 나왔다.
"손들엇! 움직이면 쏜다!"
금속음이 요란하게 울리며 일행들을 에워싼 낯선 군인들의 출연에 수풀 속에서 나온 사람들도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그들을 빙 둘러싼 군인들의 숫자도 숫자였지만,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석궁에서 느껴지는 살기는 차갑게 얼어붙은 피부마저 따끔거리게 만들 정도였다.
"이곳은 케린버그의 영토다. 무단으로 국경을 넘은 자들은 모두 검을 버리고 소속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검을 버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일행의 중간에서 건장한 체격의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남자가 걸어 나왔다.
가죽옷을 벗어던지자 그 위에 얼어 있던 얼음조각들이 공중으로 비산했다.
햇살을 받은 얼음조각들이 마치 크리스탈처럼 반짝거렸다.
"레센 제국의 반 봄멜 공작이다. 그대들의 왕을 만나러 왔다!"
"......."
평상시에는 아름다웠을 금발의 머리가 엉망인 사내가 내뱉은 말에 그들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은 한동안 공황상태에 빠졌다.
"당신 말이 거짓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거요!"
"어느 미친놈이 이 겨울에 모스크 산맥을 넘어와서 헛소리를 하겠나?"
입을 다문 사내가 조용히 자신이 내던진 짐승 가죽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런 사내를 한동안 뚫어지게 바라보던 군인이 고개를 돌렸다.
"지미, 본부를 호출해라! 레센에서 손님들이 왔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본부 여기는 고양이......."
무전병이 통신하는 동안, 반 봄멜 공작은 두 눈을 감았다.
레센의 최고 무장이자 군인인 반 봄멜 공작이 직접 찾아오다니 이것은 보통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모르기는 몰라도 통신 라인에 불이 났을 것은 뻔했다.
이들을 감시하는 소대장은 심한 갈증을 느꼈다.
다시 자신을 봄멜 공작이라고 소개한 사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년전쟁 당시 저 자의 손에 수많은 케린버그 용사들이 죽었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고 해도 1개 중대 병력의 스패로우를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전략상 중요 지역이기에 여기에는 캐논포도 장착되어 있었다.
자신의 명령만 떨어지면 이곳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묵은 원한을 갚을 좋은 기회였다.
그의 오른손이 심하게 떨렸다.
고뇌하는 시간이 천년만년 같이 길게 느껴졌다.
"중대장님! 본부입니다."
"응? 아, 그래, 이리 줘봐!"
마나통신기를 건네받은 중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충성!"
통신기를 무전병에게 건넨 중대장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곧 본부에서 사람이 나올 거요. 대신 당신들 무기는 우리가 압수하겠소."
"뭣이? 그런 말도 안 되는 감히 우리에게 뭐가 어쩌고 어째?"
봄멜 공작 뒤쪽에 시립해 있던 중년의 사내가 발작적으로 검을 겨누며 앞으로 나섰다.
모욕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졌다.
"베른하트! 진정하게 우리는 이곳에 손님으로 온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말썽은 원치 않아. 어서 검들을 건네주라고 해!"
"하, 하지만 공작님, 어찌하여 공작님께서 이런 푸대접을 받으신단 말입니까?"
그림자 기사단장인 베른하트가 흥분한 얼굴로 씩씩대자 봄멜 공작의 눈이 떠졌다.
"푸대접? 이 친구야, 모스크 산맥 너머 동토(東土)의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치욕이야. 그걸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까짓 일이야. 골백번도 더 할 수 있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무기나 저들에게 줘버려!"
봄멜의 차디찬 명령에 베른하트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곧 기사단 전체가 공작의 명령에 복종했다.
한곳에 무기가 쌓이자 일부 병력이 내려와 무기들을 회수했다.
"자, 그럼 가시죠! 디안 요새가 멀지 않습니다."
군복에 나뭇가지를 잔뜩 꽂은 군인들이 관목 숲에서 내려오자 봄멜 공작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숲속에서 숨어 있어서 잘 몰랐는데, 가까이 내려오니 복장이 아주 생소했다.
석궁도 자세히 보니 자신들의 무기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석궁 밑에 붙어 있는 카트리지가 신기한 듯 바라보는 기사들에게 씨익 웃어주는 케린버그 군대의 군인들이 그들에게는 신기했다.
게다가 얼굴에는 왜 검은색을 칠했는지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봄멜 공작은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그 어떤 군대에서도 이들과 같은 행동을 보지 못했다.
길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것이나 전방에 후방에 경계조를 두고 유기적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보통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장비들 또한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동 중에도 수신호로 움직일 뿐 별다른 대화도 없었다.
전시를 위해 급히 동원된 시민군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디안 요새에 정병들이 파견되어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일년전쟁 때 검을 섞었던 케린버그 군대가 아니었다.
뭐랄까?
이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존재 같았다.
반나절을 걸어가자 지평선 멀리 거대한 성벽을 드러내는 디안 요새가 위용을 드러냈다.
아련한 과거의 단상이 떠오르자 씁쓸한 미소가 봄멜 공작의 입가에 떠올랐다.
일년전쟁 당시 이 디안 요새를 넘지 못해 좌절했던 기억과 패주하며 로베니아군에게 쫓겨 결국 수만은 병사들을 모스크 산맥 속에서 동사시켰던 악몽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찰리 중대입니다. 배달할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무전병이 마나통신기를 통해 무전을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반 봄멜 공작 일행은 성벽에 가까이 도착하자 깜짝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벽 주위로 또 하나의 요새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이런 정보가 그들에게 들어오지 못했는지 이해가가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을 놀라게 만든 것은 제국 내에서도 보기 힘든 기간테스들이 요새에 있다는 것이었다.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기사들은 움찔거렸다.
천하의 봄멜 공작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볼 때, 그에게도 꽤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들에게도 있는 기간테스였지만, 너무나 달랐다.
보기에도 예리해 보이는 검과 단단한 방패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기간테스를 가동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인데, 무기까지 사용하다니 로베니아의 기간테스 100기를 파괴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기간테스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협곡을 향해 사라지는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다보니 어느새 정문에 다다르게 되었다.
"충성!"
"그래, 수고가 많다! 전달은 받았겠지?"
"네, 마일즈 대위님! 속히 보고하라는 명령입니다."
"알았다. 사단장님이 기다리시는 모양이군."
"저,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실은......."
초소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일즈 대위의 얼굴색이 변했다.
"뭣? 자... 장군님이 오셨어?"
초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일즈 대위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봄멜 공작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가 거물은 거물이었던 모양이다.
외인부대의 창시자이며 이제는 케린버그 왕립군의 정신적이 지주인 알렉스 호크 장군이 그를 보기 위해 직접 디안 요새까지 온 것을 보고 자신이 데리고 온 인물의 비중을 새삼 깨달았다.
"자, 들어가시죠. 저의 우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마일즈 대위가 봄멜 공작에게 말을 건네자 초소장의 손이 올라갔고 거대한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사람의 힘으로 여는 것이 아니어서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마법문이었다.
도대체 이 놀라움의 끝은 어디인지 봄멜 공작은 호기심이 일어났다.
그들이 요새 안으로 발을 들여 놓자 낯 선 광경에 또다시 넋을 잃어야만 했다.
병사들이 이동할 때, 모두 행렬을 지어 이동하는 모습에서 스쳐 지나갈 때 서로 손을 들어 올리는 모습은 그들의 군대에서는 볼 수 없는 규율과 절제미였다.
연병장 옆을 지나가면서 제식 훈련을 하는 모습을 보고 봄멜 공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와 열을 맞춰서 제식훈련을 하는 케린버그의 군대는 결코 그가 알고 있던 예전의 케린버그가 아니었다.
천하의 봄멜 공작의 예하 기사단이 절로 위축된 모습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충성! 마일즈 대위님, 속히 사단장실로 오시라는 명령입니다."
통신병이 마일즈를 재촉하자 그도 곧 고개를 끄덕이고 소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각 소대별로 군장을 풀고 휴식을 갖는다. 찰리 중대와 임무 교대는 익일 13시까지니까 소대별로 임무 전달하고 연병장에 익일 12시까지 집합하도록!"
"넵! 알겠습니다. 부대 차렷. 충성!"
마일즈 대위의 명령을 받은 소대장들이 절도 있게 경례를 마치고 소대원들을 데리고 사라지자 팔에 완장을 두른 헌병들이 나타났다.
"공작님을 빼고 나머지 분들은 저들을 따라 가십시오. 쉴 곳을 마련해 줄 겁니다. 공작님은 이제부터 제 상관을 만나러 가시죠."
"나도 간다!"
베른하트가 이를 악물고 나서자 마일즈 대위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들어보이고는 헌병에게 지시를 내리고 앞장 섰다.
"훈련들이 잘 되어 있군!"
지금까지 아무 소리도 없던 봄멜 공작이 입을 벌리자 마일즈 대위가 다시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왜, 웃나? 내 말이 우스운가?"
봄멜 공작이 물음에 마일즈 대위가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늘 엉망이라는 소리만 듣는데 칭찬을 들으니 저도 모르게. 자, 이 건물입니다."
마일즈 대위의 말에 봄멜 공작은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넘치는 데 모자라다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처음 외교부의 지하르트 백작이 제안한 케린버그 방문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반 봄멜 공작은 디안요새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지하르트 백작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에 사전에 미리 통보하고 왔다면 이런 것들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만남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지하르트 백작의 말이 지금까지는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떠나기전 요한 황제와 밤을 새며 나누었던 말들이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레센의 운명이 케린버그에 달려 있다는 지하르트 백작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 할 수 없었다.
계단을 오르자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는 군인들이 그들을 반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금발의 멋진 제복을 입고 있는 남자가 공작 일행을 맞이했다.
봄멜 공작 옆에 있던 마일즈 대위가 잔뜩 긴장한 채 경례를 붙이는 것을 보고 봄멜은 이 자가 이곳의 책임자라고 생각했다.
"레센의 반 봄멜 공작이오. 그대가 이곳의 책임자요?"
공작의 기대와는 달리 상대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분을 모시는 하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따라 오시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기도가 범상치 않은데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기지까지 지닌 자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봄멜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전혀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못했던 케린버그에 뛰어난 인물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적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친구가 너무 똑똑해서도 곤란했다.
봄멜 공작이 이를 악물자 복도 끝의 방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죠. 공작님의 말씀을 들어주실 분입니다."
열려진 문으로 들어가던 봄멜 공작이 걸음을 멈췄다.
"자네 이름이 뭔가?"
공작의 물음에 사내가 해맑게 웃었다.
"핸들러라고 부릅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기억해두지!"
공작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어두운 실내에 사람으로 보이는 실루엣이 창가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 덕분에 방 안의 공기가 상당히 무거웠다.
단지 존재감만으로 실내의 공기를 이렇게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한 자였다.
적어도 자신과 동수를 이루거나 그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
봄멜은 성큼성큼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앉는 거요?"
칼칼한 목소리가 어두운 실내와 잘 어울렸다.
"나이가 들면 말이야, 오래 서 있는 게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야."
무릎까지 매만지며 엄살을 떠는 봄멜을 공작의 행동에 커튼 뒤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 허풍 마스터군."
세상 누가 있어 피의 군주라고 불리는 레센 제국의 반 봄멜 공작에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반 봄멜 공작 자신도 이런 말을 듣고도 왜 화가 나지 않고 웃음이 나오는지 몰랐다.
"하하하하하!"
고개를 뒤로 젖히며 호탕하게 웃는 공작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하하! 하... 후우~ 초면에 미안하네. 하지만 얼마 만에 웃어보는지, 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말이야. 정말 기분이 좋군!"
정말 기분이 좋은지 살짝 상기된 그의 얼굴이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봄멜 공작이 고개를 흔들고 커튼 쪽을 바라보았다.
"얼굴 좀 보면서 이야기 하면 안 되겠나? 난 옛날 사람이라서 말이야 이런 대화는 불편하군."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는 공작은 눈빛을 빛내며 커튼 뒤의 인물을 주시했다.
커튼이 흔들거리고 건장한 청년이 걸어 나왔다.
커튼이 열리며 햇살에 드러난 청년의 얼굴은 봄멜 공작을 긴장시켰다.
가까이 다가오는 청년의 얼굴은 봄멜 공작이 가장 싫어하는 그런 표정을 가진 자였다.
더욱이 겨우 모든 것을 알아버린 듯한 얼굴을 한 자라면 더더욱 조심해야만 했다.
맞은편 의자에 앉은 젊은 사내의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긴장한 근육을 심호흡으로 풀어낸 봄멜 공작은 어두운 실내에 눈이 익자 천천히 눈앞의 사내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세를 드러내기는 쉽지만, 저렇게 느껴지는 듯 않는 듯하는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런 경지는 수련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봄멜은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경험도 많다는 이야기였다.
단순히 나이를 가지고 그를 애송이 취급했다가는 오히려 그가 당하기 쉬웠다.
"많이 더운가 보네요."
"응, 뭐라고 했지. 미안하네.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봄멜이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지만, 상대는 손가락으로 봄멜의 이마를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만진 봄멜의 공작의 몸이 '흠짓!'거리며 순간 온몸이 위축됐다.
식은땀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문질러보는 땀방울이 무척이나 새로웠다.
"후후후, 머릿속에 쌓였던 눈이 녹은 모양이군."
관록이란 게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능청스럽게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화제를 돌리는 솜씨가 군인이 아니고 정치가 타입처럼 보였다.
"왜죠?"
"찾았나?"
다른 이들이 들으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 오고 갔지만, 이 두 사람은 그 의미를 잘 알고 있는지 똑같은 미소를 입가에 드러냈다.
다소 여유를 찾은 봄멜 공작이 다리를 꼬고 앉았다.
목을 한 차례 꺾은 뒤 낮게 속삭이는 공작의 목소리는 늑대의 '으르렁'거림과 같았다.
"찾았군!"
상대의 표정에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눈꺼풀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반대편 소파의 그늘 속에 숨어 있던 얼굴이 허리를 세우고 나타났다.
"손을 내밀러 왔군요! 나이가 드니 혼자서는 힘들죠?"
두 사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독종이군!"
"공작님도 만만치 않은데요."
상대의 눈 속에서 불길을 확인한 봄멜 공작이 이를 갈았다.
"그래, 생각은 있는가?"
"조건만 맞는다면 악마하고도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네?"
두 사람의 신경전이 극에 달하자 가뜩이나 무겁게 가라앉은 방 안의 공기가 숨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봄멜 공작의 눈이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까만 눈동자를 보고 있는 것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가벼운 한숨이 새어나오며 굳게 다문 입술이 벌어졌다.
"큰 걸 찾았죠."
공작의 눈이 먹이를 노리는 매와 같았다.
"어디지?"
"워~ 워~ 이거 왜 이러시나요.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요?"
상대가 손사래를 치며 엄살을 부리자 공작이 추태를 깨달았는지 응접실 테이블 위로 넘어간 상체를 소파의 등받이로 돌려보냈다.
"흠흠, 내가 잠시 흥분했군. 되지도 않을 걸 묻다니 말이야."
"후후후, 괜찮습니다. 그럴 만도 하죠.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까. 누구나 탐낼 만한 물건이지 않습니까?"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자네, 도대체 누군가?"
일어서서 창가로 가더니 커튼을 열어 젖혔다.
오후의 햇살이 눈부시게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이 알렉스 호크라고 하더군요."
호크의 말에 봄멜 공작이 벌떡 일어섰다.
"자네였군, 또 하나의 소드 마스터. 디안 요새의 영웅이라는 자가!"
"영웅? 누가요? 제가요? 푸흐흐흐흐! 웃기지도 않네요. 영웅은 제가 아니라 저들입니다. 제 자랑스런 전우(戰友)들이죠."
창밖의 연병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병사들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호크를 보며 봄멜 공작은 케린버그에 대한 모든 기존의 정보를 지워버렸다.
케린버그는 결코 제국의 아래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대륙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두 거물이 역사적 협정을 논의할 때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로베니아 제국은 광기로 물들어 갔다.
* * *
"폐하의 성정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황후 마마!"
근심이 가득한 노안의 몽셀 공작이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탄식하자 앙뜨네트 황후의 입에서는 그 보다 더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제 손으로 지아비를 해하는 일을 없기를 바랐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잡아가는 황후의 손을 살며시 잡아준 몽셀 공작이 따뜻한 눈으로 황후를 위로했다.
공작의 위로에 겨우 마음을 안정시킨 황후가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 안을 몇 번이나 서성거리던 그녀가 결국 결심이 섰는지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숙부님! 이 길이 정녕 제국을 위하는 길이겠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몽셀 공작도 황후의 아픔을 느끼는지 눈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최선의 선택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내린 판단에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결정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과연 누구를 위한 선택인지, 한번 되돌아보시면 마음의 선택이 쉬워지시리라 믿습니다."
숙부인 몽셀 공작의 말에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한참 그렇게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그녀의 눈이 떠지니 그녀는 조금 전에 나약하고 겁 없는 여인이 아니었다.
확신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몽셀 공작의 귀를 파고들었다.
"로베니아를 위해서, 그리고 보다 더 크게는 폴렌시아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악마가 되겠습니다."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몽셀 공작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고귀한 희생에 아니,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을 희생시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그럼, 추기경 쪽과 저울질만 남았군요."
"네, 그러하옵니다. 황후 마마!"
머리를 조아리는 몽셀 공작을 보며 황후 앙뜨네트의 눈동자가 몹시 흔들렸다.
"아무리 제국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전 그런 작자와 손을 잡는 것이 꺼림칙합니다."
"황후 마마, 대의를 위해서는 때때로 감내해야 할 일도 있는 법입니다. 내키지 않으시겠지만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시녀가 급히 들어와 황후의 유모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추기경, 그 작자가 찾아왔답니다."
유모에게 말을 전해들은 앙뜨네뜨 여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몽셀 공작이 몇 번이고 황후에게 다짐을 받은 후에야 그를 불러들였다.
문이 열리자 롯셀리니 추기경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머금고 들어와 황후의 발아래 입을 맞추었다.
앙뜨네트의 얼굴은 발에 징그러운 벌레가 기어가는 표정이었지만, 의자 손잡이를 굳게 잡고 버텨냈다.
"로베니아 제국의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롯셀리니 추기경은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예의로 황후에게 배례를 올리자 몽셀 공작이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행여 늘 그래왔듯이 방종한 행동을 하며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아주 점잖게 행동했다.
"불러주셔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황후 마마, 그리고 몽셀 공작님!"
롯셀리니 추기경은 그야말로 아주 예절 바르게 행동했다.
그런 추기경을 바라보는 주름이 가득한 몽셀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방안에 들어온 자가 오랜 세월 지켜봐온 롯셀리니 추기경과는 많이 달라서 였다. 그러나 모습이 롯셀리니와 똑같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의심스런 구석이 있었지만 몽셀 공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피차 쓸데없는 말은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케론스가 케린버그에서 벌인 일로 자네들도 입지가 좁아진 이상 다른 해결책이 필요하겠지."
사이에 말을 잠시 끊은 몽셀 공작이 롯셀리니 추기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결국 이대로는 자네들이나 귀족들이나 모두 사라질 판이야. 오늘 이 자리가 왜 필요한지 잘 알고 있으리라 믿네."
롯셀리니 추기경의 고개가 위아래 끄덕여지는 것을 보며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자네가 가지고 온 보따리를 풀어 보게나. 우리에게 줄 선물이 무엇인지 볼까? 자네의 선물 보따리가 부디 황후 마마를 기쁘게 해드렸으면 좋겠군!"
몽셀 공작의 시선을 받은 롯셀리니 추기경은 다소 긴장한 듯보였다.
너무나 진지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공작님의 기대에 부응해드려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섭니다."
잠시 숨을 고른 롯셀리니 추기경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발렝 황제 폐하의 독주를 막지 못한다면 공작님 말씀처럼 제국에는 황제 폐하와 기사들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제국이 원래 황제폐하의 일인체제라고 할지라도 지난 몇 달동안의 공포정치는 너무나 두렵고 무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관리들이 기사들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제국은 군인들의 국가가 되어버렸고 귀족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자네 교단도 사원들이 폐쇄 되었지, 아마."
"네 공작님. 가슴 아픈 일이죠. 이제 우리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롯셀리니 추기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몽셀 공작의 인상이 구겨졌다.
뻔히 아는 일원론적인 이야기를 새삼 다시 꺼내는 저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좀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꼼수를 정치판에서 닳고 닳은 몽셀 공작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공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보게, 롯셀리니, 내가 처음부터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하지 않았나. 자네가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우린 지금 서로의 존재가 아주 절실하네. 그러니 그렇게 빙빙 돌리지 말게나."
공작의 말이 뜨끔했던지 롯셀리니의 얼굴색이 변했다.
몽셀 공작은 그런 추기경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롯셀리니 추기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리고 황후 마마 소신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저희 교단에는 십만의 성기사들이 있습니다. 그 밑으로 병력들 또한 꽤 돼지요. 그 정도 인원이라면 황궁을 손에 넣기에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단 황제 폐하가 없을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
롯셀리니 추기경의 말에 충격을 받은 몽셀 공작은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설 뻔 했다.
십만의 성기사라니 게다가 그 밑으로 병력들까지 있다면 그의 교단에 속해 있는 교인들 전부가 언제든지 군사력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늘 예의 주시해왔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은 몽셀 공작은 곰곰이 롯셀리니 추기경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리고 그의 의중을 간판한 몽셀 공작은 어떤 밑그림이 머릿속에서 그려졌고, 잠시 후 그의 입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그려졌다.
"후후후후, 제법 생각을 많이 해왔군. 롯셀리니! 좋아! 하지만 그 많은 군대를 원조해주는 대가는?"
추기경처럼 돌려서 말하지 않는 공작의 날카로운 질문이 익숙해졌는지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크나무아의 눈물을 주십시오!"
이번에는 황후 앙뜨네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의자의 손잡이가 부서질 듯 힘껏 움켜쥔 그녀의 표정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이......."
그녀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기 직전에 몽셀 공작의 걸걸한 목소리가 막아섰다.
"좋네, 자네의 아크나무아 교단의 신물(神物)을 달라고 하니 그거야 당연한 이야기이지. 황후 마마께서도 쾌히 승낙을 해주실 거라고 믿네."
표 나지 않게 눈짓을 보내는 공작을 보고 앙뜨네트는 공작을 믿고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롯셀리니 추기경의 요구를 들어주자 추기경도 크게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황후 마마! 저희 교단의 영원한 숙원을 풀어주신다니 황공하옵니다. 저희 아크나무아 교단은 영원히 황후 마마를 따를 겁입니다."
바닥에 엎드린 롯셀리니를 바라보는 황후 앙뜨네트의 표정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롯셀리니는 몰랐다.
"그것뿐인가?"
공작의 메마른 음성을 들은 롯셀리니가 고개를 들었다.
"샹그릴라를 넘겨주십시오! 이 땅의 가증스러운 쥬(ju)의 존재를 없애버리고 싶습니다."
이때만큼은 자신의 존재를 살짝 드러낸 롯셀리니 추기경이었다.
"후후후! 그래 좋아. 그까짓 샹그릴라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중요한 것은 말이야. 우리가 어떻게 자네를 믿느냐는 거지?"
공작의 말에 추기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황후 마마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니까요."
공작의 시선을 받은 황후 앙뜨네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몽셀 공작이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좋아, 그럼 우리 거래는 안전하다는 이야기로군. 이제 제일 중요한 문제는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가 하는 건데......."
공작이 말끝을 흐리자 롯셀리니 추기경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은 공작님께서 해결해주셔야 합니다."
"그래, 결국 가장 어려운 일은 내 몫이로군."
공작이 수염을 매만지며 답답해하자 롯셀리니 추기경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곧 출정할 이번 원정길에 황제가 따라나서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의 성격으로 볼 때 그가 따라 나선다면 그의 측근기사들은 모두 자리를 비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국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때 공작님과 황후 마마께서 문을 열어주시면 무혈입성이나 다름없을 테고 그런 다음 황제의 수족을 잘라내면 로베니아는 황후 마마의 발아래 놓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주 세세한 계획을 꺼내놓은 롯셀리니를 보고 몽셀 공작은 손뼉을 가볍게 쳤다.
"훌륭해, 아주 훌륭해! 게다가 원정길에 황제께서는 깊은 병환이 드시거나 전투 시에 돌아가시게 될 테고. 황후 마마께서 섭정을 하시게 되겠군."
롯셀리니 추기경은 대답 대신 깊숙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잠시 후, 롯셀리니 추기경이 떠나고 나자 황후가 공작에게 따져 물었다.
"숙부님, 어쩌자고 그 자에게 그런 약속을 하신 거예요? 아크나무아의 눈물이 저들의 손에 들어간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거란 걸 모르세요?"
앙뜨네트 황후는 너무나 걱정스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지만, 몽셀 공작은 여유작작했다.
"아크나무아의 눈물이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는 나도 안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 손에 들어갔을 때 이야기지, 황궁의 깊숙한 금역이며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황궁의 비고(秘庫)인 시간의 틈 속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담배 파이프에 불을 당기는 몽셀 공작을 바라보는 황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숙부님의 뜻은......."
"황후 마마, 소신은 저들에게 제국의 그 어떤 것도 나누어줄 의향이 없습니다. 아크나무아의 눈물은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롯셀리니 추기경과 그 더러운 교단도 곧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로베니아는 처음 제국이 세워졌을 때의 꿈을 다시 꾸게 될 것입니다. 그것도 황후 마마의 이름으로 반드시 그렇게 되게 만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몽셀 공작의 말에 적이 안심을 한 황후가 비로소 의자에 앉았다.
"후~ 그렇다면 숙부님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네, 믿고 따르십시오. 마마! 모든 것은 마마를 위한 일입니다."
황후 앙뜨네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 혼란한 시기를 넘기고 제국을 다시 세워야 했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겨진 사명이었다. 선대의 황후에서 다음대의 황후에게 황제의 광기(狂氣)를 막기 위해서 전해져 내려온 여인들만의 비사(秘事)였다.
역대의 황후들 중 누구도 자신의 대에 그런 일이 생기길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앙뜨네트 또한 자신의 손으로 황제를 죽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손으로 남편이자 나라의 아버지인 황제를 죽여야 했다.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사색을 몽셀 공작이 방해했다.
"마마,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사옵니다. 추기경 그 작자가 자신들이 결코 배신할 수 없을 거라 했는데 그 말뜻을 아시고 계십니까?"
앙뜨네트 황후가 고개를 들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실의 비고(秘庫) 중에 '시간의 틈'은 오로지 황후들만이 출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숙부님께서도 아시는 일이죠. 그 안의 물건들 또한 제 손으로만 부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만큼은 모든 것이 제 뜻대로 움직이죠.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될 것들이 그 속에 많이 있답니다. 저들이 혹여 딴 마음을 먹는다면 아크나무아의 눈물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터이니 결코 딴 마음을 먹지는 않을 겁니다."
황후의 말에 크게 안도한 몽셀 공작은 황후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녀를 잠시 동안 다독인 후에 내궁을 나왔다.
"유모!"
"네, 황후 마마!"
앙뜨네트 황후가 굳은 얼굴로 일어서자 그녀의 평생지기인 유모가 긴장했다.
황후의 얼굴에는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편지를 뜯어야 할 때가 온 거 같아, 유모!"
"마, 마마!"
그녀의 몸이 몹시 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유모는 숨쉬기도 힘들어 보였다.
입술을 깨문 앙뜨네트의 얼굴에서 단호한 의지가 배어나왔다.
"운명이 나를 시험하려 들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아! 내 운명은 내가 헤쳐 나가겠어! 채비를 해줘, 유모! [시간의 틈]으로 가자!"
바닥에 주저앉은 유모는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어린 젖먹이 시절부터 키워온 그녀는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었다.
어린 그녀가 황궁에 시집올 때 따라와서 그녀도 평생을 답답한 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딸이 모진 운명 속에 몸을 내던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힘을 내야만 했다.
그 가시밭길을 그녀 혼자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붙들어 일으켜 세운 유모는 밝게 웃었다.
"네, 마마! 곧 준비하겠습니다."
"유모, 옆에 있어 줄 거지?"
환하게 웃는 유모의 눈가에 주름살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였다.
"그럼요, 언제나... 언제까지나요......."
남자들 못지않은 강한 의지로 뭉친 여인들의 용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조용한 성안을 빠져 나온 몽셀 공작의 마차가 황궁을 벗어나자 힘차게 내달렸다.
정방형의 타일이 펼쳐진 것 같은 시가지를 가로질러 어디론가 바삐 달려갔다.
해가 지지 않은 제국이란 말처럼 로베니아의 수도 페르샤이어를 빠져나가는데 해가 저물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인가가 드물어지더니 어슴푸레 밤이 찾아오는 황량한 들판을 마차가 홀로 달리고 있었다.
마차가 향하는 언덕 위의 오래된 고성은 첨탑에 초승달이 걸려 있어서 더욱 기괴해 보였고 차가운 달빛을 받은 성은 유령이라도 살고 있는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마차가 성문에 도착하자 저절로 문이 열렸다.
마차는 주저함이 없이 성안으로 들어갔고 그 모습은 꼭 성이 마차를 집어 삼키는 것과 같았다.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이래서 운명은 알 수 없는 거라고 했나?"
시종의 부축을 받아 바닥에 내려선 몽셀 공작은 사람기척이 없는 기분 나쁜 광장 안을 둘러본 후 시종에게 마차 안에서 절대로 나오지 말도록 당부한 후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공작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사람도 없는 벽에 걸린 횃불에 불이 붙었다.
그러나 공작은 익숙한 듯 전혀 놀라지 않고 노구의 몸으로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한참 동안 발을 놀려 계단위에 선 몽셀 공작은 가쁜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이고 해야만 했다.
'후우~ 후우~ 젠장! 이제 이 짓거리를 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어.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랄 뿐이야.'
커다란 문 앞에 선 몽셀 공작이 잠시 주저하다가 문고리를 두드렸다.
공허한 울림이 성안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녹슨 철문에서 나는 소리가 귀를 거슬리는 소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어두운 실내가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작은 주저하지 않고 발을 들여놨다.
문이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소음을 내며 문이 닫히자 횃불이 꺼지며 성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마차의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만 들렸다.
뚜벅 뚜벅!
공작의 부츠 소리가 유독 크게 울리는 복도를 지나서 널따란 홀에 이르자 원형의 홀 주위로 무기를 들고 서 있는 갑옷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살아나서 움직일 것처럼 흉흉한 기세를 내보이는 갑옷들 사이에 있으니 아무리 공작이라고 해도 등 뒤로 흐르는 땀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몽셀 백작님!"
벽을 긁어내는 기분 나쁜 목소리에 공작의 몸이 뒤로 돌았다.
그곳에는 한껏 쭈그러들어 난장이로 보이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후후, 정말 오랜만인가 보군. 자네가 나를 백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난장이가 공작의 가슴에 문양으로 보더니 다시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런, 이런! 진즉에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몽셀 공작님!"
"하하하하! 그런 소리 말게나. 이곳에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교만이나 다름없네. 그분께서 아시면 역정 내실 일이야."
"하하하, 설마요! 얼마 만에 손님인데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난장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작은 체구가 크게 흔들리도록 웃어댔다.
"그래, 그분은 여전하시가?"
웃음을 멈춘 난장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요, 요사이 며칠 전부터 뭐가 불안하신지 안절부절 못하고 계시기는 합니다만. 시간의 틈 속에서 사시는 양반이니 영원함을 견디지 못하셔서 일어난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몽셀 공작이 난장이를 재촉해 걸음을 옮겼다.
좁은 복도를 따라서 깊숙이 걸어 들어간 난장이와 공작이 흑목단으로 만들어진 단단한 문 앞에 이르자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방 안의 존재에게 두 사람 모두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렸고 안으로 들어서자 문은 조용히 닫혔다.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서니 벽난로에는 조용히 나무들이 불꽃을 토해내며 타들어가고 있었으며 그 앞의 흔들의자에 가녀린 사내가 손에 와인 잔을 들고 의자의 흔들거림을 즐기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행차하셨나?"
사람의 감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들어가지 않은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몽셀 공작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대공을 뵈옵니다!"
"대공은 무슨 얼어 죽을 대공!"
의자에서 일어나난 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방안의 촛불에 불이 붙었다.
실내가 환해지니 사내의 얼굴도 잘 보였다.
훤칠한 키에 긴 은발이 잘 어울리는 미남이었다.
다소 편협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제국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크리시앙 대공!"
"제국은 늘 문제를 안고 있었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손에 든 와인 잔을 흔들며 창가에 다가간 크리시앙 대공이 팔짱을 끼고 와인을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대공의 퉁명스러운 반응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공작은 연이어 준비해온 말들을 풀어놓았다.
그간의 사태를 일목요연하게 늘어놓는 공작을 설명의 크리시앙 대공의 몸이 약하게 떨렸다.
"한심한 것들! 겨우 케린버그 따위에게 그런 참패를 당하다니 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황제가 화가 날 만도 하군!"
황제를 두둔하는 크리시앙 대공의 발언에 몽셀 공작이 급히 뒷이야기를 꺼냈다.
"흠, 그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로군. 선대 황제들께서 늘 그 점을 조심하라 하셨는데. 이번 황제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문제야."
몹시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는 대공에게 몽셀 공작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것은 아주 간절하고 진중했으면 논리 정연했고 설득력이 아주 강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크리시앙 대공이 한참 후에 서서히 몸을 돌렸다.
"자네, 지금 나더러 반역을 하라는 말인가?"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크리시앙 대공의 눈빛은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가 몽셀 공작의 입에서 나온다면 바로 목을 벨 기세였다.
그러나 이미 강을 건넌 몽셀 공작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공작의 입이 다시 열리고 혼신의 힘을 다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용한 방 안에는 공작의 목소리만 열기를 뿜어냈다.
나이를 무색케하는 그의 열변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크리시앙 대공은 부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뜻은 잘 알겠지만, 제국은 황제의 것이야. 그걸 잊어서는 안 돼! 황제가 제국을 지옥의 나락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누구도 막을 수는 없어!"
와인 잔에 다시 술을 채운 크리시앙 대공이 의자에 창가에 몸을 기대며 푸념 섞인 탄식을 꺼냈다.
"애초에 로베니아는 그 시작부터가 잘못된 거였어."
크리시앙의 대공의 말에 깜짝 놀란 몽셀 공작이 되물었다.
"대공,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다. 제국이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말씀이......."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난장이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주제를 바꾸었다.
"하하하, 대공께서 술을 너무 많이 드셨나 봅니다. 가끔 이렇게 술주정을 하신다니까요."
난장이가 대공에게 다가가서 그를 다시 의자로 인도했다.
기운을 잃은 크리시앙 대공이 힘없이 난장이의 이끌림에 몸을 눕혔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런 눈을 한 채, 크리시앙 대공은 눈물을 흘렸다.
그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몽셀 공작은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떠올려 보고는 자신의 가슴 한쪽도 아련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에구구, 그러게 술 좀 작작 드시라니까. 에휴!"
난장이가 대공의 손에서 술잔을 뺏은 다음, 흔들의자에 누워 있는 대공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벽난로의 장작불빛에 그의 은발이 흔들렸다.
"공작!"
"네, 대공 각하!"
잠이 오는지 두 눈을 감은 크리시앙 대공이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제국이 이대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받아들여야 할 운명... 어차피... 제국은... 피로......."
잦아드는 숨소리가 대공이 잠이 들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난장이가 몽셀 공작을 조용히 끌어 당겨 방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 나갔다.
로비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하녀들이 준비해온 차를 마셨다.
"공작님이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많이 지치셨어요."
"그렇지. 벌써 오백년이나 흘렀나?"
몽셀 공작의 말이 이상했다.
오백년이라니, 그렇다면 크리시앙 대공이 무려 오백년을 살아왔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사람이 오백년이나 살 수 있다는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난장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신도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듯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훗! 공작이 대공의 나이가 천년도 넘었다는 것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난장이는 공작이 모르는 비밀을 아는 것이 즐거운지 미소를 지었다.
난장이가 고개를 들어 로비의 천정을 바라보니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천장이 횃불의 불빛을 받아서 빛나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는 난장이의 눈이 점점 몽롱해져 갔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듯 주변의 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루스텔!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갑옷을 걸치고 씩씩거리는 젊은 주인을 난쟁이 시동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래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젊은 주인의 힘을 막기에는 그의 힘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크리시앙 남작님! 제발 진정하세요. 지금 나가시면 개죽음일 뿐입니다. 고정하시고 기다리십시오. 기간테스 없이는 개죽음일 뿐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젠장!"
갑옷의 투구를 벗어서 바닥에 내던진 자는 크리시앙 대공이었다.
지금보다 더 젊어 보이는 크리시앙은 무엇이 그리 화가 나는지 막사 안에서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막사의 입구가 열리며 군인들이 들어왔다.
백발의 건장한 체구를 가진 은빛 갑옷의 주인이 들어오자마자 크리시앙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질렀다.
쿠당탕!
막사의 기물을 부수며 크리시앙의 몸이 나뒹굴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크리시앙의 눈빛은 무서웠다.
"제게 이러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하지만 은빛갑옷을 입은 사내의 표정이 더 험악했다.
"몰라서 묻는 거냐?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냔 말이다! 너로 인해 인류가 전멸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이냐?"
크리시앙은 사내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네 젊은 혈기로 인해 우리의 대업을 그르쳐서야 되겠느냐 말이냐?"
사내의 쏟아지는 질책에 억울함의 견디지 못한 크리시앙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바닥이 핏물로 물들어도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저 따위 도마뱀 무리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너무나 원통합니다! 크흑!"
크리시앙의 울분이 막사 안을 가득 채우자 그를 나무라던 사내도 무릎을 꿇고 크리시앙의 어깨를 힘껏 움켜쥐었다.
"상대가 강할 때 몸을 사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 분함을 잘 두었다가 때가 왔을 때 터트려야지."
크리시앙의 어깨를 다독이고 지금은 참아야 할 때임을 누누이 강조한 사내가 막사 밖으로 나간 후에도 그는 일어설 줄 몰랐다.
"참으라고, 뭘? 얼마나 더 참아야 한단 말이지?"
지옥의 부저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처럼 섬뜩한 말을 꺼내는 주인을 보고 시동인 난쟁이 루스텔은 공포에 휩싸였다.
겉모습은 자신이 익히 아는 착한 크리시앙 남작이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악마와 같았다.
루스텔은 그저 옆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기만 했다.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때 갑자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막사 안에 흘러 들어왔다.
청량하며 시원했고 따스하며 부드러웠다.
덕분에 크리시앙의 폭주로 인해 숨 막히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고개를 들어라! 나의 피조물이여!]
거역할 수 없는 절대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크리시앙과 루스텔은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천상의 여인이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크리시앙의 물음에 여인은 환하게 웃었다.
그 표정은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바라보는 자애로움이 가득한 것이었다.
[슬픔에 가득 찬 아들아! 난 너희들의 어머니 미르네보이니라!]
폴렌시아를 창조한 주신(主神) 쥬(ju)의 아내이자 세상의 조화로움을 관장하는 절대신 미르네보의 현신에 두 사람은 최대한 몸을 낮추는 것으로 신에 대한 예의를 나타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지 미르네보가 조용히 웃었다.
[너의 슬픔이 천상에까지 전해져 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구나. 나에게 너의 슬픔을 말해보려무나!]
신의 앞에서 두려움에 떨던 크리시앙은 어디서 용기가 샘솟았는지 고개를 들고 미르네보를 향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분함과 억울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여신이시여, 저의 분함을 저의 억울함을 들어주소서!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왜? 어찌하여 드래곤들이 인간의 싸움에 개입한 것입니까? 왜 저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인간을 유린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겁니까? 저들의 브레스에 오늘도 제 형제, 가족들이 사라져 갑니다. 미르네보님! 어찌하여 당신의 피조물들이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만 계십니까? 왜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피맺힌 한이 줄줄이 묻어나는 외침이었다.
실제로 크리시앙이 흘리는 눈물의 색은 붉은빛이었다.
시동인 루스텔은 그저 아무 말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행여 자신의 어린 주인이 저 위대한 존재에게 해코지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가여운 내 아들이여,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그러나 나로서도 창조주이신 쥬(ju)께서 행하시는 일을 막을 힘은 없단다.]
미르네보의 말에 크리시앙의 얼굴에는 실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신도 자신의 염원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실망했느냐? 나의 아들이여?]
"네, 솔직히 그렇습니다."
어린주인의 당돌한 대답에 루스텔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신의 노여움이라도 사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호호호호호! 역시 내가 너를 잘 보았구나. 샤르트르 크리시앙! 너는 복수를 하고 싶으냐?]
자애롭기만 하던 여신의 얼굴에 음사한 미소가 아로새겨졌다.
크리시앙은 못 봤지만 루스텔은 보고 말았다.
얼른 고개를 숙였지만, 루스텔은 영원히 그 미소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잘 들어라. 몽매한 인간이여, 주(ju)의 법칙은 누구도 깰 수 없다. 창조주께서 만든 법칙이 무너진다면, 이 폴렌시아도 모래성이 무너지듯 허물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나.......]
말끝을 흐리는 미르네보의 입을 크리시앙은 애타게 바라보았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절박한 크리시앙은 미르네보에게 매달렸다.
[방법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느냐? 설사 영혼을 파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불사하겠느냔 말이다.]
크리시앙의 시동 루스텔은 절대 안 된다고 외쳤지만,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어린주인이 악마의 속삭임에 빠져 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너무나 무서워서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시앙, 크리시앙! 불쌍한 어린 양이여,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대신 너도 나의 일을 하나 들어주어야 한다. 어떻게 하겠느냐? 하겠느냐?]
크리시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좋다, 한 번 언약을 맹세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
내가 드래곤을 없애도록 도와주지. 대신 너는 나를 도와야 해!
잘 들어라!
이제 너에게 한 가지 예언을 내려주겠노라!
너는 이것을 인간의 지도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예언을 이룬 자가 네 앞에 나타나면 '시간의 틈'으로 그 자를 인도해라.
너는 그 자가 나타날 때까지 영원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크리시앙은 미르네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의 시동 루스텔이 울며불며 매달렸지만, 그는 냉정히 뿌리치고 복수의 길을 선택했다.
미르네보는 고대 문명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를 크리시앙에게 알려주었고, 고대문명의 비밀마저 속속들이 풀어주었다.
그 후 강력한 무기를 얻은 로베니아 제국은 멸망의 벼랑 끝에서 대반격을 시작했다.
드래곤들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고대 문명의 무기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동족의 죽음에 분노한 드래곤들의 대반격에 인류와 드래곤들의 전쟁은 더욱더 치열해져 갔다.
둘 중에 하나가 멸종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을 전쟁은 대륙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고 결국 주신(主神)의 분노를 산 인류와 드래곤 모두 파멸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에 두 종족은 생존을 위해 잠시 휴전을 합의했다.
유일한 피난처인 고대도시로 드래곤과 인류는 숨어들었지만, 이 또한 여신 미르네보의 사주를 받은 크리시앙의 계략이었다.
결국 드래곤들은 끝도 시작도 없는 어둠의 감옥 쿰클라비(cumclavi) 속에 갇혔고 주신(主神)의 분노를 피한 로베니아만 살아남았다.
신의 분노에 휩쓸린 대륙은 피폐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로베니아는 손만 움직이면 대륙을 점령해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장 비옥한 땅인 남부 대륙만 점령한 채 그 이외의 곳은 인간들 스스로 살아나가도록 방관하였다.
물론 이 이면에는 크리시앙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대륙에 다양한 인간의 문화를 꽃을 피우라는 것이 바로 여신 미르네보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대륙에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은 로베니아의 비밀이었다.
그 당시 이런 크리시앙에게 반발한 왕족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북부 대륙의 패자 레센 제국이었다.
그들은 크리시앙의 무서운 힘에 대항하지 못하고 동토의 땅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쫓겨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고대도시의 비밀을 가지고 떠났기에 곧 로베니아에 버금가는 전력을 구비할 수 있었고, 넘치는 힘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로베니아 대 레센 제국의 일차 일년전쟁과 이차 일년전쟁으로 양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크리시앙은 침묵했다.
그러나 삼차 일년전쟁에는 크리시앙의 공포가 재현되었고 백 년이 지난 후에도 나타난 크리시앙은 레센에게 좌절을 맛보게 만들었다.
크리시앙의 가공할 힘 앞에 레센 제국은 군사의 태반을 모스크 산맥의 눈보라 속에 남겨두고 후퇴해야만 했다.
미르네보에게 받은 명령을 착실하게 이행하는 크리시앙은 그렇게 영원한 삶을 이어왔다.
그러나 죽지 않은 삶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무료한 삶이 이어질수록 크리시앙은 허무한 시간 속에서 점점 자아를 잃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이 선택한 복수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후회라는 괴물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날 여신 미르네보의 언약에 피를 바친 이가 또 하나 있었다.
바로 난쟁이 시동 루스텔이었다.
영겁의 세월동안 젊은 주인의 광기와 고통 좌절을 모두 지켜본 루스텔은 늙지 않은 주인과 달리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왜 그런지 그도 크리시앙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천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커다란 비밀을 간직한 채로.......
"루스텔! 루스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손길에 긴 회상에서 깨어난 루스텔의 흐린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졌다.
"아~ 하하,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죄송합니다. 몽셀 공작님!"
"아니, 괜찮네. 잠시 숨 돌릴 시간이었다네."
천년의 회상이 그렇게 짧았다니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인 루스텔이 식어버린 찻잔의 차를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몽셀 공작은 루스텔에게 희망을 걸었다.
크리시앙 대공을 설득할 자는 루스텔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는 필사적이었다.
크리시앙 대공에 대한 비밀은 제국의 절대기밀 중 하나였다.
일년전쟁 당시 어린 몽셀 공작을 귀엽게 본 크리시앙 대공이 그를 한동안 가까이 곁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무료한 삶속에 몽셀 공작은 그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위안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크리시앙의 행동이 오늘날 몽셀이 제국의 공작에 오르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크리시앙 대공은 황제마저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였기 때문이었다.
몽셀에게 크리시앙 대공은 이번 거사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끌어내야만 했다.
크리시앙이 거절한 지금 그를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오로지 그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오고 있는 루스텔뿐이었다.
몽셀은 간곡하게 루스텔에게 부탁을 했다.
루스텔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애가 타는 몽셀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되었다.
"지금 대륙은 혼란으로 뒤죽박죽이야. 황제는 미쳐가고 있고 제국의 힘은 약해지고 있어. 게다가 떠도는 소문이라던 쥬(ju)의 예언도 되살아나고. 그래서 샹그릴라에서는 성자가 사라지기도 했다지......."
"잠깐!"
모든 것에 무심해 보이던 루스텔의 눈이 반짝거렸다.
"공작님, 지금 뭐라고 하셨죠?"
"응? 대륙이 혼란스럽다고 했는데?"
갑자기 심각한 반응을 보이는 루스텔을 보고 오히려 몽셀 공작이 당황해했다.
"아니. 그거 말고 말입니다. 쥬(ju)의 예언이라고 한 부분이요."
"아~ 그거 말이군. 글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떠도는 소문이 있지 않은가? 쥬(ju)의 네 가지 낙인을 손에 넣는 나라는 대륙에 찾아오는 멸망에서 벗어나 영원히 부흥한다는 전설이었지. 아마도."
공작의 말에 루스텔은 거의 흥분상태가 되었다.
"그래서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음... 그게 그러니까... 아~ 맞네. 감히 로베니아에 반기를 든 그 케린버그에서 낙인이 발견되었다는 그런 보고가 나와서 한때 대륙이 좀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네.
우리 로베니아야 쥬(ju)와 상극이고 그런 전설 따위야 믿지 않기에 별다른 조사를 벌이지 않았지만, 다른 왕국들과 샹그릴라는 난리가 난 모양이더군.
심지어 레센에서도 그 낙인을 찾겠다고 꽤 많은 인원을 동원한 거 같았지. 우리도 조사반을 편성했는데 별다른 소득은 없던 걸로 알고 있네."
공작의 말이 끝났지만, 루스텔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루스텔의 몸에서 작은 떨림이 시작되었다.
그 떨림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격한 전율로 변했다.
루스텔의 급작스런 변화에 놀란 몽셀 공작이 그를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심장이 놀라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영원한 삶을 사는 그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하간 공작의 손길에 겨우 정신을 차린 루스펠은 허둥지둥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의 일을 도와주실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크리시앙 대공께서 곧 수도를 방문하실 겁니다."
"정말인가?"
반신반의하는 공작을 배웅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로비를 떠나는 루스펠을 보고 자신의 방문이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가 성 밖을 나와 수도로 온다니 이후의 일은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몽셀 공작은 마차로 돌아갔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던 시동과 마부는 공작을 크게 반겼다.
이렇게 음산한 곳은 결코 다시 방문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들이 울음을 터트리며 힘차게 발길질을 하자 마차가 크리시앙 대공의 성을 빠져 나갔다.
"공작님, 대체 이곳은 누구의 성이기에 이다지도 음산하고 무서운 것입니까?"
어린 시동이 무척이나 궁금한지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크리시앙 대공의 성을 흘깃거렸다.
"영원히 사는 저주를 받은 이가 사는 곳이지."
"네? 공작님, 뭐라고 하신 겁니까?"
"아니다. 더 알려고 할 것 없다. 너는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도착하는 대로 집사를 불러와라. 이제부터 바빠질 테니까."
"예, 공작님!"
고개를 조아리는 시동을 보며 얼굴에 미소를 띠웠던 몽셀 공작은 도대체 루스펠이 케린버그의 이야기에 왜 그토록 흥분을 한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을 자장가 삼아 공작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주인님! 주인님!"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는지 몽롱한 눈을 하고 있는 크리시앙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루스펠을 나무랐다.
"이봐, 루스펠, 도대체 왜 나를 깨우는 거야? 모처럼 잠들었는데. 너무하잖아?"
영원의 삶을 사는 크리시앙은 불면증에 시달려 왔다.
그런 그에게 잠이 드는 것은 유일한 즐거움이자 행복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짜증도 관심 없는지 루스펠은 끝내 크리시앙의 단잠을 날려 버렸다.
"후~ 도대체 오늘 자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오랜만에 손님이 찾아와서 흥분한 거 아냐?"
술 때문에 두통이 있는지 머리를 잡고 흔드는 크리시앙이 흔들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리시앙은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이 이상했는지 머리에서 손을 떼고 뒤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바닥에 엎드려 오열하고 있는 루스펠이 있었다.
"허~ 왜 이래, 정말?"
"주인님, 드디어... 드디어...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다가온 것 같습니다."
루스펠의 말은 크리시앙을 충격 속에 빠뜨렸다.
"정... 말... 인가? 정말인 거야, 루스펠?"
너무 감격했는지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루스펠을 보고 크리시앙은 한달음에 달려와 루스펠을 몸을 잡고 흔들었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크리시앙도 흥분했다.
"어서... 거울의 방으로... 주인님, 어서!"
루스펠의 말이 아니더라도 당장에 가볼 참이었다.
루스펠과 크리시앙은 먼지가 잔뜩 쌓인 복도를 지나 성 안에 가장 구석진 곳의 첨탑으로 뛰어갔다.
사실 크리시앙은 여신 미르네보의 신탁을 포기했었다.
부질없는 복수의 대가로 권태와 허무로 가득 있는 이 저주 받은 끝나지 않는 삶은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다.
미르네보가 예언한 낙인을 모은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은 길었고 포기는 빨랐다.
낙인의 출현을 알려주는 거울의 방에 발길을 끊은 것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첨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거미줄로 가득했다.
녹슨 철문 앞에 선 크리시앙과 루스펠의 가슴은 세차게 뛰었다.
힘들게 뛰어와서가 아니라 저주받은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크리시앙의 목에 걸린 열쇠가 오랜만에 빛을 보았다.
묵직하게 자물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녹이 슨 철문은 귀를 거슬리며 천천히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는 두 사람만이 알 것이었다.
"주... 주인님... 주인님! 오~ 오오오~"
루스펠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었다.
크리시앙도 격정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온갖 희비가 교차했다.
널따란 방 안에는 4개의 작은 거울이 가운데 커다란 한 개의 거울과 나란히 서 있었다.
크리시앙이 거울 앞에 섰다.
"드디어... 드디어... 이 지옥 같은 나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가?"
떨리는 크리시앙의 목소리가 방 안을 메아리 쳤다.
4개의 거울 중 두 개의 거울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거울 안에는 빙설(氷雪)의 결정체와 은빛의 목걸이가 비쳐지고 있었다.
두 개의 낙인이 출현한 것이었다.
빙설(氷雪)의 결정체는 호크가 디안 요새에서 찾아낸 것이었고, 은빛의 목걸이는 이사벨라 여왕이 죽고 나서 사이클론이 회수한 것이었다.
크리시앙이 커다란 거울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어. 이름 모를 친구여! 어서 와서 나에게 안식을 찾아주게!"
커다란 거울 속에는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바로 케린버그의 알렉스 호크였다.
거울이 뚫어지게 바라보던 크리시앙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몸을 홱 돌렸다.
"루스펠! 외출 준비해주게!"
"네? 주인님, 어디를 가시려고......?"
느닷없는 크리시앙의 명령에 루스펠은 깜짝 놀랐다.
"우리가 낙인을 찾는 것을 도와주자고, 자네는 여기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흥분한 크리시앙을 보고 루스펠도 미소 지었다.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주인님! 곧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루스펠이 재빠르게 사라지자 방에 홀로 남은 크리시앙이 다시 거울을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긴 시간이었어... 이제 끝을 내야지."
크리시앙이 녹슨 철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장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비밀을 간직한 방문이 굳게 닫혔다.
그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비밀이 대륙을 흔드는 혼란과 함께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여신 미르네보가 예언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그 실체가 서서히 베일을 벗으며 인류의 운명도 미래를 알 수 없는 거센 물결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