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34화 (34/55)

Chapter 34.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전하! 기뻐하십시오. 잉글햄으로 떠났던 반란군들이 모두 항복했다고 합니다."

헬렌 백작이 호들갑을 떨자, 찰스 국왕과 나형석 장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미 상황실에서 보고받아 알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허둥지둥 달려온 헬렌 백작이 우습기만 했다.

"하하하! 알고 있고말고. 헬렌 백작, 자, 자! 잠시 숨 좀 돌리시오. 그러다가 숨넘어가겠소!"

찰스 국왕의 배려에 의자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헬렌 백작을 뒤로하고 찰스 국왕과 나형석 장군이 국정을 의논했다.

잠시 후, 사이클론과 머스탱 공작이 들어와 자리를 함께하자 케린버그의 최고위 회담이 시작되었다.

작은 왕국에 불과했던 케린버그가 이제는 북부의 패자가 되었다.

세린디아까지 병합한 케린버그는 명실공이 강국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그 누가 있어, 지금의 케린버그를 깎아 내리겠는가?

그러나 케린버그는 케린버그 나름대로 많은 숙제를 떠안고 있었다.

세린디아는 지배계층인 아마리아족과 피지배계층이었던 여러 소수부족들인 이방인들과의 갈등과 이사벨라 여왕이 퍼트린 사교(邪敎)가 큰 문제였다.

게다가 워낙에 물자부족에 시달려왔던 나라였는데 무리하게 전쟁 준비를 해온 터라 피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 나라를 통합하고 재건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방인들이 어렵게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케린버그에서 보내준 적은 구호품에도 감사해했다. 만약에 세린디아의 이방인들이 풍족한 삶을 살아왔다면 폭동이 일어났을지도 몰랐다.

외부의 문제가 그렇다면 내부에도 문제가 심각했다.

바로 케린버그의 문제였다.

일단은 병력 손실이 극심했다.

1사단은 거의 궤멸한 상태였고, 3사단도 적의 주력을 상대하면서 사상자가 엄청났다.

또한 귀족들이 차출한 왕국군도 성 안으로 끌어들인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을 상대하며 많은 희생을 치렀다.

로이든 성이 피해를 입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회의실 가득 쌓여 있는 서류가 처리해야 일들이 산적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후~ 이거야, 원,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군."

찰스 국왕이 서류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흔들자 머스탱 공작이 두루마리 서류를 내밀었다.

"민심을 잡는 데는 배불리 먹이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머스탱 공작이 내민 서류를 살펴본 찰스 국왕이 한숨부터 내쉬었다.

"세린디아 유민이 이렇게나 많았나?"

서류에 적힌 숫자를 보자 찰스 국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윈터러의 폭설이 시작되었다.

혹독한 동절기(冬節基)가 시작된 것이었다.

무려 4개월이나 계속되는 혹한기는 케린버그에게도 힘든 시기였다.

케린버그도 로베니아와의 전쟁으로 비축분의 식량을 써버린 터여서 나누어줄 형편이 아니었다.

이제 벌어 먹일 입이 늘어났으니 머스탱 공작의 말이 아니더라도 먹이고 입히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곡식이 뚝딱 하고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서 곡물을 사올 만한 여력도 케린버그는 부족했다.

찰스 국왕은 그동안 로베니아에게 수탈당한 물자들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전하, 그 점은 심려 놓으셔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헬렌 백작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이런 비상시국에 식량걱정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헬렌 백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를 부렸다.

"헬렌 백작, 그게 무슨 소리지? 고구마도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나?"

찰스 국왕이 볼멘소리를 토해내자 헬렌 백작이 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은 1차 재배 이후 비밀리에 2차 재배를 대규모로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사이클론님의 도움이 무척이나 컸습니다."

"오호, 그런 일이! 그래 그래서?"

찰스 국왕이 손뼉을 치면서 기뻐하자 헬렌 백작도 힘을 얻어 부연 설명을 시작했다.

"호크 백작이 이후에 디안 계곡에서 여러 가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작물을 발견해서 이후에 김재덕 대령과 사이클론님께서 대규모 재배를 했고 그 사이 엄청난 수확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헬렌 백작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가 크게 기뻐했다.

당장 먹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니 기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그래, 하지만 정말 케린버그와 세린디아 양쪽을 다 먹일 정도의 양이 되는가?"

찰스 국왕이 진지하게 운을 떼자 헬렌 백작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양도 양이지만, 자라는 속도가 엄청납니다. 디안 요새의 비밀 계곡은 지금도 여름 날씨 같습니다.

호크 백작이 무언가 수를 쓴 것 같습니다. 그 지역만 기후가 다르고 곡물의 재배 속도가 마법 같습니다. 지금 문제는 수확할 인원이 부족할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헬렌 백작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심정이었다.

식량 문제가 해결되자 다른 사안들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로이든 성벽 보수도 이미 외인부대에 몸을 의탁한 수많은 드워프일족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일차 결정이 났다.

그리고 세린디아의 민심 수습책으로 샹그릴라의 지원을 받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샹그릴라 입장에서도 이교도로 인해 상처 받은 곳을 다시 쥬(ju)의 이름으로 회복시킨다는데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이 일은 머스탱 공작이 맡았는데 친분이 있는 성검 베르티니 성기사단장의 협조와 대주교의 전폭적인 지지로 무려 일만 명의 신관들이 파견되는 사상초유의 선교행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비밀리에 숨겨 두었던 외인부대가 전면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현대적 군대의 위력을 절감한 머스탱 공작이 먼저 기존의 왕립군을 폐지하고 외인부대를 케린버그의 왕립군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 역시 금세 결정이 났고 모든 귀족들의 사병 제도는 최소한의 치안유지 정도로 결정되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왕립군이 지방의 방어와 치안을 맡게 될 터여서 그리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군사령관으로 추대된 나형석 장군의 보직이 결정되었다.

평소 김재덕 대령과 헬렌 백작이 함께 추구해온 국가 시스템에 대해서 많은 토의를 해왔던 찰스 국왕은 이제야말로 꿈꾸던 원대한 국가경영을 해야 할 시기로 판단했다.

그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그러한 결정은 모두가 고개를 숙일 만큼 욕심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를 위한 거룩한 선택이었다.

자칫 왕권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할 수도 있었는데 찰스 국왕은 공화국 체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민주주의 실현은 기득권층들이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다.

반발이 엄청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막중한 책임은 머스탱 공작이 맡게 되었다.

케린버그의 초대 수상으로 머스탱 공작이 추대되었다.

수차례의 밀고 당기는 씨름 끝에 겨우 승낙을 한 머스탱 공작은 케린버그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나서 겨우 승낙했다.

국내의 재정 및 살림을 맡아볼 내무장관 자리는 헬렌 백작으로 결정되었다.

그의 주름살이 늘어날 일이 더 많아졌지만, 나라살림을 맡아줄 사람으로 헬렌 백작만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김재덕 대령의 강한 요구에 의해서 과학부가 설립되었다.

과학부에는 마법과 과학기술을 접목시키는 학술기관이었다.

이 과학부의 필요성은 누구나 절감했기 때문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이 과학부의 책임자로 사이클론이 거론되었지만, 바람의 마법사란 명칭답게 관직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라 결국 김재덕 대령이 위임됐다.

나형석 장군이 군보다는 연구분야에 그가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하여 강력하게 주장을 펼친 덕분으로 그는 군복을 벗게 되었다.

며칠에 걸친 왕실회의에서 결정된 사안들이 빠르게 시행되었다.

디안 요새에서 재배된 곡물들은 게이트를 통해서 곳곳으로 운반되었다. 이 일에는 세린디아의 유민들이 발 벗고 나섰다. 부족한 인력이 해결되자 케린버그와 세린디아의 합병이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다.

세린디아에서 발견한 고대의 게이트는 윈터러의 폭설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법진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 게이트의 위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게이트는 케린버그와 세린디아 전역에 최우선적으로 빠르게 설치되었다.

그저 양쪽 게이트를 열기만 하면 옆집 드나들듯이 오고 갈 수 있었다.

사용이 편리한 대신 악용될 소지가 있기에 수송국이라는 부서를 창설해서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수송국에서 승인받지 못하면 게이트의 사용은 불가했다.

운송수단의 발전은 곧 국력의 발전을 가져왔다.

말이 최고의 운송수단이었던 이곳에서 시간 차이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고대의 게이트는 그야말로 신의 선물이나 다름없는 기적이었다.

물자수송만 빨라진 것이 아니라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는 데도 수월해졌다.

관리의 감독 및 파견이 쉬어졌고 명령 전달 체계가 확고해졌다.

예전에는 중앙정부의 명령이 미치지 못하던 곳에도 관리의 파견이 가능해지고 정부의 정책 시행과 관리 감독이 가능해지자 케리버그는 현대적인 행정력을 가진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윈터러의 폭설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막아주었고 케린버그가 조용히 내부적으로 재정비하는데 천혜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 사이 케린버그는 새로운 국가방향을 온 나라에 알렸다.

그리고 세린디아와 케린버그는 한 나라로써 같은 형제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두 곳으로부터 제일 환영받은 것은 다음의 공고문이었다.

찰스 국왕이 직접 작성한 칙령은 게이트를 통해서 전국에 울려 퍼졌다.

왕실의 전령들이 국왕의 칙령을 읽어 내릴 때마다 나이든 사람들은 목 놓아 울었고 젊은이들은 감격해 했다.

[친애하는 케린버그와 세린디아 백성들이여,

여러분에게 대죄인인 나 찰스가 무릎 끓어 사죄하노라!

여러분의 딸이, 어미가 로베니아에 개처럼 끌려가도 짐은 따뜻한 식사에 편히 잠들었다.

여러분의 소중한 재산을 로베니아에 수탈당할 때도 짐은 옥좌를 지키기에 바빴다. 로베니아의 개들이 왕실에서 날뛰어도 짐은 지켜보기만 했다.

백성들이여, 나를 욕하라!

손가락질해라!

여러분이 용서한다고 해도 조상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로베니아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백성들의 원혼이 나를 저주할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다오! 나는 이제 검을 들고 그대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다시는 로베니아나 다른 나라에 내 백성들이 머리를 숙이게 만들지는 않겠다. 설사 이 케린버그가 사라진다 해도 나는 싸울 것이다.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기 바란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일국의 왕이 백성들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백성들은 찰스 국왕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어려운 혹한기의 고통 가운데에서도 백성들이 국가의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혹독한 겨울 속에서 케린버그는 더욱 강하게 단련되어 갔다.

* * *

"부대~ 차렷! 충성!"

"쉬어!"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이 단상 위의 인물을 경외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머리를 짧게 깎고 군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해 보였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앳되어 보이는 소년들도 중간 중간 보였다.

늘 무기력하기만 했던 케린버그의 젊은이들에게 외인부대는 가히 충격이었다.

미래가 없는 젊은 층에게 로베니아와 맞서 싸워 승리를 일궈낸 외인부대의 활약상은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 남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그런 곳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된다는 국왕의 말처럼 모두가 당당해지기 위해서 지원입대가 줄을 이었다.

"누가 차렷 자세에서 움직이라고 했나! 정신 못 차리지!"

교관들의 목청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자 훈련병들이 움찔거렸다.

"어린애들이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중령님!"

기가 막힌 표정이 된 핸들러가 나란히 걷고 있는 교관을 나무라자 교관도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래도 어린애들은 안 돼! 돌려보내게!"

핸들러가 단호하게 말하자 교관도 난처한 얼굴을 했다.

"중령님이 저 녀석들에게 돌아가라 말씀해 보십시오. 저희들은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런......."

10열종대로 서있는 훈련병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 핸들러가 자신을 존경심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훈련병 앞에 섰다.

아무리 많이 봐도 17살 정도였다.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던 핸들러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름이 뭐냐?"

"네! 237번 훈련병 쏜 아서입니다."

군기 하나는 확실히 들어 있었다.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핸들러의 귀가 '윙윙'거렸다.

"크으~ 이 녀석 목청이 대단하네, 몇 살이지?"

"넵, 18살입니다."

"누가, 네가?"

"네, 18살이 확실합니다."

어찌나 거짓말을 잘 하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네가 18살이며 난 20살이냐?"

핸들러가 뚫어지게 쳐다봤지만, 쏜 아서라는 훈련병은 지지 않고 똑바로 핸들러의 눈을 응시했다.

"젠장! 교관! 모두 입소시켜라!"

핸들러의 허락이 떨어지자 훈련병들이 연병장이 떠나가도록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핸들러의 얼굴은 구겨 질대로 구겨졌다.

훈련병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막사로 돌아온 핸들러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업무를 보던 행정병들이 모두 일어섰다.

"쉬어!"

"중령님 사령부에서 급히 들어오시라는 명령입니다."

"응, 그래! 알았다."

들어오자마자 다시 밖으로 향하는 핸들러는 인력부족을 절감하면서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을 참아야 했다.

김재덕 대령이 과학부로 빠져나가면서 영관급 장교가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부족한 장교로 인해 정식 편제가 되지 않았던 외인부대는 이제 케린버그의 정식 왕립군이 되면서 재편에 들어갔다.

세린디아와 로베니아와의 두 번의 전투로 경험을 쌓은 고참병들이 늘어나면서 장교로서 자질을 보이는 병사들은 모두 진급해서 장교로서 활동 중이었다.

그러나 늘어난 부대를 채우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훈련병들은 끝없이 들어오고 이들을 훈련시킬 인력은 모자라고 조교들도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국가의 비상시기를 넘기기 위한 일이라 견뎌 내야만 했다. 전투 상벌에 의해 3계급 특진해서 중령의 영관 장교가 핸들러는 지금 훈련소 대장에 사령부 작전 참모의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대기하고 있던 게이트를 통해 수도 로이든까지 이동했다.

밖으로 나오자 핸들러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를 타고 성으로 향했다.

케린버그 왕실도 많이 변했다.

필요 없는 인원들을 줄이고 왕실은 중앙부처 기관으로 변했다.

새로 생긴 각 부서들이 왕실에 집무실을 내고 업무를 시작했다.

매일 아침 찰스 국왕의 주재로 각료회의가 있었고 회의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서 부서실의 관리들은 주야로 일하고 있었다.

케린버그는 그야말로 개혁의 물결 속에 있었다.

정문 경비들의 간단한 검문을 거친 핸들러가 국방부정문에 도착하자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헌병들을 안내를 받아 나 형석장군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충성!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오~ 어서 오게. 자리에 앉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당번병이 차를 내왔다.

향긋한 꽃차가 피로에 지친 핸들러의 후각을 자극했다. 따뜻한 차가 목을 넘어가자 살 것 같았다.

"힘들지?"

"아, 아닙니다. 장군님!"

당황한 핸들러가 자세를 바로 고쳐 잡으며 긴장하자 나형석 장군이 껄껄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힘들기는 다 마찬가지잖아. 여기서는 좀 편히 있어도 돼!"

"그렇지만......."

손을 내젓는 나형석 장군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핸들러에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령은 아직인가?"

나 장군의 말에 핸들러의 얼굴이 낙담한 사람의 표정이 되자 나 장군도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는 돌아와 주어야 하는데......."

"네, 그래야죠."

힘없는 대화가 계속되었다.

"이제 곧 윈터러가 끝나가네. 봄이 온다는 소리야. 언제까기나 그렇게 내버려둘 수 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장군으로 승진한 사람이 이렇게 무책임하게 있을 수는 없어. 자네가 가서 데려오게."

나형석 장군의 말에 핸들러가 빈 찻잔을 매만지며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겨우 입을 뗀 핸들러가 모자를 고쳐 쓰고 경례를 붙였다.

"가보기는 하겠지만,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그럼!"

거수경례를 마치고 돌아서는 핸들러의 등을 보며 나형석 장군은 고개를 뒤로 꺾었다.

뻐근하게 굳어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창가에 다가선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녹고 있었다.

너무 짧은 겨울이었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자연의 섭리는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꽃이 피고 강이 녹으면 로베니아라는 괴물이 또다시 피에 굶주린 사자처럼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가득해졌다.

"호크, 이 친구야! 시간이 없어. 시간이......."

나형석 장군의 한숨소리가 장관실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 * *

하얀 나무 십자가가 언덕과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십자가의 바다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대지를 덮고 있었다.

쌓였던 눈이 녹아 십자가에서 물이 되어 떨어지고 언덕너머 햇살이 땅속에 누운 영혼들을 위로하듯 따스한 아침햇살이 묘지 위를 비추었다.

그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밤새 앉아 있었는지 어깨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묘비 위의 쌓인 눈을 손으로 쓸어내리는 사람은 알렉스 호크였다.

[에밀 루이스 소령

조국과 친구들을 위해 육신과 영혼을

불태우고 여기 잠들다.]

묘비를 매만지는 호크의 얼굴은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도 못한 사람처럼 수염은 덥수룩했고 머리는 까치집을 지어놓았다.

묘비에 물방울이 '투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호크의 얼굴에 흔적을 남기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미안하다, 또 너희들만 먼저 보내고 나만 이렇게 숨을 쉬고 있구나. 참 질긴 목숨이지? 쫄따구 먼저 보내는 마음이 이렇게 괴로운지 몰랐어.'

에밀의 옆에 누워 있는 루브카의 묘비 위에 쌓인 눈도 손으로 털어낸 호크가 품에서 술병을 꺼내들었다.

마개를 따고 거칠게 한 모금 들이킨 호크가 에밀과 루브카의 묘비위에 술을 따라주었다.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어. 빌어먹을 전쟁 때문에 이것도 어렵게 구한거야. 너무 투덜대지 마!'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는 호크의 등 뒤가 어두워졌다.

"장군님!"

무겁게 가라앉은 핸들러의 목소리가 호크의 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잠시 동작을 멈췄던 호크가 계속해서 술병의 술을 묘비 위에 천천히 흘렸다.

"큭큭큭! 장군이라 그새 내가 진급했나?"

"네, 에밀과 루브카도 일계급씩 특진하지 않았습니까."

핸들러의 설명에 호크가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어댔다.

"푸하하하하! 일 계급 특진이라 죽은 다음에 그게 무슨 소용이지?"

쭈그리고 앉아서 술병의 남은 술을 따라내는 호크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있었다.

술병의 술이 비자 술병을 버린 다음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묻었다.

"백작님! 제발 정신을 차리십시오! 겨울이 끝나가고 있습니다."

간절한 목소리로 핸들러가 애원을 하자 고개를 들지 않고 호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 눈이 녹고 있으니 나도 그쯤은 알아, 이제 또 전쟁이 시작되겠지. 후~ 지겨워. 지겹다고!"

짜증이 섞인 신경질적인 호크의 말에 핸들러도 깊이 한숨을 쉬었다.

호크 곁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은 핸들러도 품에서 술병을 꺼내 에밀과 루브카의 묘비에 술을 따라 주었다.

"네, 그러니까 이놈의 지겨운 전쟁을 빨리 끝내자고요. 그래야 저도 이 녀석들 묘지 청소할 시간이라도 있죠."

핸들러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후~ 이거 술이 아니고 불을 들이키는 것 같네요."

입가를 문지르는 핸들러를 바라보던 호크가 피식 웃었다.

전쟁으로 물자 보급이 어려웠다.

식량문제는 디안 계곡에서 재배된 곡물로 굶주리지는 않았지만, 기호식품이 모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국가에서 통제하는 담배, 술 등의 품목이 품귀현상을 빚었고 질이 떨어지는 밀주(密酒)와 잎담배가 시중에 나돌았다.

로이든을 떠났던 수많은 시민들이 승리에 소식을 듣고 다시 수도로 몰려들어서 수요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었다.

"계급장 떼고 말할게요, 백작님! 죽은 놈은 죽은 놈이고 산사람은 살아야 된다고 말한 게 누구였습니까. 녀석들도 웃을 거예요. 그만큼 하셨으면 놈들도 알아줄 겁니다. 이제 그만 가요."

핸들러가 호크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호크도 어깨 위에 놓은 핸들러의 손을 꼭 잡았다.

"에밀과 루브카 때문만은 아니야, 이 들판에 묻힌 녀석들 전부가 매일 밤 꿈속에서 나를 찾아와. 매일 매일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 고향의 부모 이야기, 형제, 여자친구, 끝이 없지... 셀 수도 없는 젊은이들이 여기 묻혀 있어.

그리고 또 우리는 더 많은 젊은이들을 이곳에 묻기 위해 또다시 무기를 들어야 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던 거야. 변명이라도 좋고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한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꼭 해야만 했어. 이곳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답을 찾아야만 했어."

얼굴은 초췌했지만 번뜩이는 눈빛만은 무서우리만치 살아 있었다.

"답은 찾으셨나요?"

핸들러의 물음에 호크는 오랜만에 밝은 미소를 떠올렸다.

"핸들러, 인생에 정답이란 없어. 그저 살아갈 뿐이야. 대신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야."

"잊지 말아야 할 것?"

무릎을 펴고 일어서 호크가 궁금해 하는 핸들러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등지고 선 호크의 모습이 신비로워 보였다.

"먼저 간 전우들의 삶이지. 그들의 삶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말을 끝내고 돌아서서 터벅터벅 내려가는 호크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은 핸들러가 에밀과 루브카의 묘비를 보고 거수경례를 올렸다.

'잘 있어. 친구들, 중령님... 아니 이제는 장군님이지. 장군님, 모시고 로베니아랑 한바탕 또 전투를 하러 간다. 너희들이 장군님을 보살펴주길 바래. 사랑하는 전우들이여, 그럼 나중에 보자.'

하얀 십자가들이 가득한 들판을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두 젊은이가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묘비에 잠들어 있는 전우들이 소리 내어 웃어주는 것 같았다.

언덕의 끝에 선 호크와 핸들러가 뒤돌아서서 조용히 경례를 붙였다.

케린버그의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 위로 봄을 재촉하는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대지 위의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삶을 보내고 있었지만, 세상은 변함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준비가 부족했지만, 무정한 시간은 그래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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