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격동의 로베니아!
"들으셨습니까?"
"네, 하지만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서 기간민가 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서 서두르시지요. 회의시간에 보다 자세한 이야기가 나올 테니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겁니다."
화려한 옷을 갖춰 입은 중년의 남자들이 급히 돔 지붕을 한 그랜드 홀에 들어섰다.
50여 명의 사람들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하게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그 속에 섞여 들어갔다.
잠시 후, 우렁찬 나팔 소리와 함께 시종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위대하신 알버스크의 발렌시아 로크론 국왕 전하이십니다!"
건장한 체격의 무장들이 호위를 하는 가운데 건장한 체격의 50대 중반의 남자가 머리에 화려한 왕관을 쓰고 나타나자 실내의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드시오!"
옥좌에 자리를 잡은 발렌시아 국왕이 손을 들자 실내에 있는 귀족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트웨인 백작! 오늘 우리가 모인 궁금증을 그대가 풀어주리라 믿소. 지금 떠돌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오?"
발렌시아 국왕이 단상아래 있는 백발의 남자에게 눈빛을 빛냈다.
국왕의 눈빛을 받은 트웨인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친애하는 국왕 전하 그리고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지금 폴렌시아 대륙을 충격 속에 몰아넣은 한 가지 소문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트웨인 백작이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사실입니다."
트웨인 백작의 말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여기저기서 감탄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발렌시아 국왕이 손을 들어 장내를 조용히 시켰다.
"자, 자세히 말해보게. 어서!"
재촉하는 발렌시아 국왕의 얼굴은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약간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트웨인 백작이 다시금 국왕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모두가 혼란스럽겠지만, 케린버그가 로베니아의 원정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것도 완벽한 승리라고 합니다. 15만의 로베니아 원정군 중 살아남은 병력이 일만이 되지 않다고 합니다."
또다시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느라 법석을 피웠다.
지금 폴렌시아 대륙에는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케린버그와 로베니아 제국의 전쟁소식이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가며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대제국 로베니아를 상대로 검을 들이대다니 자신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을 북방의 작은 왕국에서 해냈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입었을 것이 틀림없다.
자신들이 머리를 숙이는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일궈낸 케린버그의 용기를 시샘하는 졸렬한 행동이었다.
야단법석이던 홀 안의 귀족들에게 발렌시아 국왕이 또 다시 주의를 주고 트웨인 백작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믿기 힘든 말이오.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제국에게 승리를 했다는 말인지. 짐은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고 해도 말이 되지가 않는다고 생각하오!"
발렌시아 국왕의 말에 대부분의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국왕의 말에 동감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트웨인 백작의 말에 사람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실은 이번 전투에서 케린버그는 무려 20여기의 기간테스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기간테스가 이십 여기, 그것이 정말이오?"
얼마나 놀랐는지 발렌시아 국왕이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홀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네, 전하! 게다가 케린버그의 기간테스가 로베니아의 그것보다 훨씬 기량이 뛰어났다고 하옵니다."
"그럴 수가! 어떻게 기간테스를 이십 여기나, 허 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구려."
발렌시아 국왕이 허탈한 표정으로 옥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맥이 풀렸는지 아니면 이웃 왕국의 엄청난 전력을 듣고 놀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허탈한 표정이 좋은 기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네, 전하! 그것은 사실이옵니다. 로베니아와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이 들판에서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굉장했다는 후문이옵니다."
"그럴 수가, 도대체 믿을 수가 없구려. 도대체 어떻게 그 작은 케린버그가 소리 소문도 없이 로베니아를 물리칠 정도로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냈단 말이오. 짐은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소."
발렌시아 국왕이 다소 흥분한 상태로 입을 열자 트웨인 백작도 안색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미 케린버그는 작은 왕국이 아니옵니다. 이웃하고 있는 세린디아를 이미 복속시켰다고 합니다."
이 말은 결정타가 되어 사람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로베니아에게 꼬리를 흔들며 자존심을 팔고 있을 때, 케린버그는 칼을 품고서 절치부심해왔다는 이야기였다.
발렌시아 국왕은 그저 너털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15만이나 잃은 로베니아의 반응은 어떻소? 가만 있을 리가 없지 않소?"
국왕이 조심스럽게 로베니아의 대응에 대해서 묻자 트웨인 백작이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소상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장의 반격은 없을 거란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전하! 아시다시피 이제 혹한기이옵니다. 더구나 가장 춥다는 윈터러의 마지막 달에 누가 군대를 일으키겠습니까? 눈 폭풍이 부는 시기이옵니다. 로베니아도 무리하려고 하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그리고 15만이라는 숫자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도 조심할 것입니다."
트웨인 백작의 말속에 숨은 뜻을 읽어낸 발렌시아 백작이 눈을 빛냈다.
"무엇이 문제라는 건가?"
"이것은 저도 좀 황당해서 믿기 어렵지만 첩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둠의 마법사 말도르가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내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충격도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법인데 어둠의 마법사 말도르라니 이것은 좀 지나치다 싶었다.
그가 누구인가, 제국 로베니아에서 황제 다음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고 알려져 있는 신적인 존재였다.
그런 초인이 죽었다니,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갑자기 누군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웃음은 쉽게 전염된다.
가볍게 터진 웃음이 주위로 퍼져 나갔다.
"푸하하하! 트웨인 백작 농담이 지나치오. 하하하!"
발렌시아 국왕마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나 트웨인 백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웃음을 멈춘 발렌시아 국왕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농담이 아니군."
농담일 리가 없었다.
어느 신하가 군주 앞에서 농담 따위를 지껄이겠는가.
다른 일도 아니고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놓고 말이다.
"그럼 케린버그가 15만의 로베니아 정병을 전멸시키고 100여 기의 기간테스를 파괴시켰으며 대륙 최고의 마법사를 죽였다는 말인가?"
무겁게 가라앉은 발렌시아 국왕의 말에 트웨인 백작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정보가 틀릴 가능성은 없는가?"
발렌시아 국왕이 다짐을 받으려는 듯이 재차 확인하려 하자 트웨인 백작이 입술을 깨물었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끙~"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지긋이 눌러보는 발렌시아 국왕에게 알버스크 왕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는 로크로이드 남작이 의견을 제시했다.
"전하! 다른 왕국에서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케린버그에 사람들을 보낼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희도 사람을 보내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오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오오~ 그래. 좋은 의견이오. 그런데 로베니아에서 이것을 트집 잡지 않을까?"
발렌시아 국왕의 고개가 꺾이면서 회의적인 표정을 하자 로크로이드 남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발렌시아 전하,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케린버그에 보내는 사절단은 비공식적인 방문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량과 구호물품을 가지고 방문한다면 케린버그 쪽에서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테니 자연스럽게 내부를 둘러볼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저는 지금 이 상황은 아주 미묘하고 중요한 사건이라고 판단됩니다. 어쩌면 조용했던 폴렌시아 대륙의 일대 변화를 몰고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옵니다.
이 바람을 타느냐 타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느냐, 미래의 역사속 주인공이 되느냐가 결정될 것 같은 예감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로크로이트 남작의 진중한 말에 발렌시아 국왕의 얼굴도 침중해졌다.
"그렇게까지나......."
발렌시아 국왕의 옆에 서 있던 검은 제복의 중년인이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전하, 로크로이드 남작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거대한 둑도 작은 틈으로 시작해서 무너지는 법입니다. 제 귀에도 대제국 로베니아의 한쪽 축이 기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테렌스 공작, 당신도?"
알버스크 왕국의 제일 가신 테렌스 할렌 공작, 왕국의 군권을 움켜쥔 알버스크 최고의 군이이자 무인이었다.
비록 검술 면에서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지만. 전략 전술면에서는 최고의 지휘관이었다.
지금 폴렌시아 대륙에서 제국을 빼놓고 가장 군사력이 뛰어난 곳을 말한다면 누구나 알버스크 왕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 강군을 만들어낸 테렌스 공작은 본신의 실력은 수하 기사들 보다 못하더라도 병사들을 조련하는 능력만큼은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발렌시아 국왕의 신임 또한 절대적이었다.
여러 귀족들의 의견에 회의적이던 국왕도 테렌스 공작의 말 한마디에 결심을 굳혔다.
이후로 왕정회의는 케린버그에 파견할 사절단의 선발 작업과 지원 규모를 정하는 걸로 긴 회의를 마쳤다.
국왕이 빠져나가고 귀족들도 삼삼오오 그랜드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트웨인 백작, 잠시 이야기 좀 나누지."
"네? 아~ 알겠습니다. 테렌스 공작님!"
테렌스 공작이 트웨인 백작을 불러 세웠다.
두 사람이 조용히 실내를 빠져나가자 그 뒤를 로크로이드 남작이 뒤따랐다.
세 사람이 왕실 정원을 가로질러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공작이 깎다 만 대리석 돌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트웨인 백작은 갑작스런 공작의 이런 행동에 적지 않은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왕국의 실세인 테렌스 공작과의 독대는 이도저도 아닌 중도파의 길을 걷는 트웨인 백작으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나보다 케린버그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더군, 좀 당황스러웠네."
"아, 네? 그건 저의 직책이......."
트웨인 백작이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후후후, 긴장하지 말게. 자네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자네의 정보력에 감탄했을 뿐이야. 수없이 많은 돈을 들여 끄나풀을 심어놨지만, 우리 쪽 아이들은 소식조차 끊어져버렸는데, 자네 라인은 어떻게 아직까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건가?"
테렌스 공작이 표정에서 어떤 감정도 읽지 못한 트웨인 백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경험상으로 이런 류의 사람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머릿속 생각을 정리한 트웨인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가 대외정보를 담당하는 관리의 직책을 얻고 나서 어린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가족들을 뽑아서 기본적인 교육을 마친 다음, 각국으로 이주시켰다는 내용이었다.
트웨인 백작이 말을 마치자 테렌스 백작이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그것은 놀리거나 비웃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을 한 테렌스 백작의 칭찬이었다.
"자네는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군, 자네 같은 인물을 우리가 놓치고 있었다니 한심하구먼."
자조적인 테렌스 공작의 말에 로크로이드 남작이 자신의 잘못인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제라도 진흙 속에 묻힌 진주를 발견했으니 위안을 삼아야겠지. 그건 그렇고 아직 다 내놓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지?"
테렌스 공작의 한마디에 역시나 정치판에서 오래 버텨온 자의 관록을 느꼈다.
트웨인 백작은 전혀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자신을 뱃속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이런 사람에게 머리를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 것을 잘 아는 트웨인 백작은 숨겨둔 정보를 모두 그에게 풀어놓았다.
제법 오랫동안 이어진 그의 설명에 테렌스 공작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여기까지가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트웨인 백작이 입을 다물고 숨을 고르는 동안 테렌스 공작의 얼굴 표정은 수차례 변화를 맞이했다.
"후~ 좋은 정보를 들었으니 나도 보답해야지. 자네 우리 알버스크 왕국에 기간테스가 몇 기나 되는지 알고 있나?"
"고, 공작님 아, 안됩니다."
깜짝 놀란 로크로이드 남작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놀란 것은 로크로이드 남작만이 아니었다.
트웨인 백작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기간테스에 대한 것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상위의 기밀이었다.
그의 국왕과 소수의 인원밖에 알지 못하는 정보였다.
또한 그것이 왕국 내에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자신에게 들려주려 한다는 것은 트웨인 백작에게 자신의 품안에 들어오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당황한 트웨인 백작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테렌스 공작님, 저는 그런 것을 알기에는......."
"10기가 있네!"
"......?"
트웨인 백작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나 했지만 그래도 10기라니 놀라웠다.
만약에 로베니아에서 이 사실을 안다면 당장에라도 알버스크 왕국은 쑥대밭이 될지도 몰랐다.
꿀꺽!
긴장한 트웨인 백작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무려 10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과 막대한 재물을 쏟아 부어서 얻은 결과네.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알버스크 왕국은 고대 신들의 전쟁 때 최대 격전지였다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겠지. 사실 우리는 오래전부터 고대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피땀을 흘려왔지.
지금도 기억이 나는군. 첫 유물을 발견했을 때 기뻐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말이야. 그로부터 무려 60년이 흐르고 그 기쁨은 절망으로 뒤바뀌었지.
너무 일찍 축배를 들었던 탓일까. 그 후의 발굴은 너무나 더디기만 했어. 제국을 넘어설 것이라던 희망은 제국의 거대한 실체를 확인하고 나자 우리에게 잔인한 화살이 되어서 되돌아왔지. 지난 일년전쟁 때 보여준 로베니아의 힘은 차라리 공포였지."
잠시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괴로운지 주먹을 쥔 테렌스 공작의 손이 몹시도 떨려왔다.
"오래전 일인데도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손에 땀이나. 후후후!"
허무하게 웃는 테렌스 공작의 웃음소리가 트웨인 백작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혀들었다.
"자네의 고향은 어디인가?"
"네?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테렌스 공작의 말에 트웨인 백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 고향은 이 넓은 폴렌시아에 알버스크뿐이네, 누가 더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해도 난 이 땅이 좋아. 죽어서도 고향에 묻히고 싶네. 비록 내 고향이 힘이 없고 볼품없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있고 싶어. 자네는 어떤가?"
멀리 허공을 보고 말하는 테렌스 공작을 보며 그동안 무수히 떠도는 소문들이 다 엉터리였다는 것을 깨달은 트웨인 백작은 저도 모르게 테렌스 공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도 알버스크를 떠나서는 못사는 촌놈입니다."
담담한 트웨인 백작의 말에 테렌스 공작도 너털웃음을 흘렸다.
"케린버그에 가 주겠나?"
"기꺼이 다녀오겠습니다. 공작님!"
"고맙네. 가서 그대의 맑은 눈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해주게 자네를 믿네."
나라를 위해 평생 열정을 바쳐온 남자의 뜨거운 마음을 읽은 트웨인 백작은 오랜만에 남자에게 반했다.
"열과 성의를 다해서 알버스크의 귀와 눈이 되겠습니다."
"고맙네."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다.
갑자기 왕국의 중요인물로 떠오른 트웨인 백작이 남은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칠 일이 생긴 것에 대해 의욕을 불태웠다.
* * *
"하하하하 하... 하... 하!"
허리를 뒤로 젖혀가며 웃음을 그치지 못하던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웃음을 멈췄다.
발렝 황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눈빛이 쏟아져 나와 장내를 흩었다.
만약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면 지금 발렝 황제의 눈빛은 수백만 명을 죽이고도 남을 정도였다.
제국의 대소사를 논의 하는 그랜드 홀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누구 하나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로베니아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장 치욕적인 패전이 발생했으니, 황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는 것은 당연했다.
북부의 제국 레센과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숙적 레센 제국과의 전쟁은 피를 얼마든지 흘려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지만, 케린버그는 아니었다.
15만의 정병이 전멸했다는 것도 좋다고 치고 10기의 비마스가 파괴된 것도 그럴 수 있다고 억지로 이야기한다고 해도 스카라무슈 100명이 당했다는 것은 발렝 황제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결과였다.
그것도 그들 모두가 기간테스를 사용하고서도 지리멸렬했다니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병력을 준비해. 얼마든지 좋으니까 모두 끌어 모아. 무기도 병력도 전부! 지금 당장 케린버그를 밟아 버리지 못한다면 나는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한마디 한마디에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통에 귀족들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어야 했다.
호위 기사의 검을 꺼내들고 계단에서서 소리치는 발렝 황제는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황제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내놓아야 할 분위기였다.
"안 됩니다. 황제 폐하!"
"쿨럭!"
얼마나 놀랐는지 긴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난데없이 터져 나온 외침에 결국 사래가 들어 급하게 기침을 했다.
감히 누가 있어 서슬 퍼런 황제 앞에서 반대 의사를 표했는지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아지니 그곳에는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찬바람이 불던 그랜드 홀 안에 봄바람이 불어 온 듯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안으로 들어선 여자는 앙뜨네트 황후였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자 귀족들이 모두 허리를 숙이며 그녀에게 절을 했다.
천천히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니 실내가 숨통이 트였다.
"당신이 언제부터 내정에 관심을 가졌지?"
비아냥거리는 황제의 조롱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고 단상위로 우아하게 걸어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실로 갑작스런 황후의 등장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황후의 출현으로 회의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저는 이 나라의 국모입니다. 단 한순간도 로베니아를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죠?"
조용하지만 힘이 실린 앙뜨네트 황후의 말에 발렝 황제의 눈 꼬리가 많이 흔들렸다.
"그래, 그렇다면 저 멀리 대륙의 북쪽에서 피를 흘린 우리 제국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왜 군대를 모으면 안 되는지 이 자리에서 설명을 해보시지."
이죽거리며 앙뜨네트의 존재를 드러내놓고 무시하는 황제의 태도에 귀족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황제는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의 타는 듯한 눈은 앙뜨네트 황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은 위쪽의 땅은 윈터러의 계절 중 가장 추운 때입니다. 게다가 이제 곧 폭설과 매서운 겨울 한파가 휘몰아칠 겁니다. 설마하니 그곳으로 또 다시 군대를 파견 하시려는 것은 아니시겠죠. 북부의 늑대인 레센 제국도 이 윈터러를 우습게보았다가 결국 모스크 산맥을 넘지 못했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은 잘 알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앙뜨네트의 황후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사내의 말에 발렝 황제가 또다시 허리를 뒤로 꺾으며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게 누구야? 잘나신 다니엘 끌로드 남작 나리가 아니신가?"
번들거리는 발렝 황제의 눈동자가 초생달 모양으로 변했다. 당장에라도 사고를 칠 듯했다. 황족의 핏줄에서만 보이는 초생달 모양의 눈동자 샤를르트 대제의 눈이 초생달로 변했을 때 제국은 피로 물들었다. 제국의 역사중 가장 슬프고 냉혹했던 기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발렝 황제의 눈동자가 초생달로 변하고 있었다. 선황들이 가진 잠재된 광기(狂氣)를 물려받은 것이다.
발렝 황제의 손에서 흔들거리는 검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위태롭게 보였다.
그러나 다니엘 끌로드 남작은 죽음 따위는 초월했는지 조금도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것이 더 황제를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한 번의 패전이 보이지 않는 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발렝 황제는 문득 돌아가신 선황의 유언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이제 나는 신이 주신 시간을 다 써버렸구나, 어린 너를 두고 떠나는 나의 가슴은 슬픔과 걱정으로 고통스럽구나. 너에게 당부 할 말이 있단다, 명심에 명심을 해야 할 것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한 노환의 황제가 자신의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어린 황태자를 근심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발렝 드 루이 앞으로 로베니아 제국을 이끌어나갈 나의 황제여, 내 말을 명심해라. 제국은 서커스단이야. 무시무시한 동물과 몬스터로 가득한 서커스단이지. 그리고 우리는 그 녀석들을 다루는 조련사란다. 동물을 사육하는 조련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두려움이다. 동물들이 너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해. 눈도 못 마주치게 너의 냄새만 맡아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이 짐승들로 가득한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네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녀석들은 너를 물어뜯으려 할 거고 나중에는 결국 너의 뼈까지 먹어 치울 거다. 명심해야 해!]
그렇게 선황은 어린 발렝에게 황제로서의 덕목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떠났다.
황제는 자라면서 한시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너무 지나쳤다고 해야 했다.
그의 공포정치는 로베니아의 제국 내에서 오직 발렝 황제만 존재하게 만들었다.
귀족들은 그 존재가 무의미했다.
더구나 황제는 추기경이란 작자를 가까이 두고 귀족들을 농락했다.
그의 주위에는 대륙 제일의 기사들이 가신으로 있었다.
그런 황제는 귀족들과 제국의 시민들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절대적인 존재가 흔들리자 그 밑에서 꼬리를 말고 있던 승냥이들이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 끌로드 남작을 바라보는 발렝 황제의 입 꼬리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서걱!
"쿨럭! 끄으으으......."
황제의 손에 들린 검이 반원을 그렸다.
힘이 약한 황제의 검에 다니엘 끌로드 남작의 목이 반쯤 잘려나가자 목을 움켜진 채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힘들게 버티던 다니엘 끌로드 백작의 몸이 무너지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귀족들은 헛바람 집어 삼키는 소리를 냈고 몽쉘 공작과 앙뜨네트 황후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황후의 두 손이 심하게 떨렸다.
웅성거리던 귀족들의 소란이 홀 안을 둘러싼 기사들의 살기에 주눅이 들어 조용해졌다.
기사들이 모두 검 자루에 손을 얹고 눈빛을 흉흉하게 빛냈다.
순백의 의복에 붉은 무늬를 수놓은 황제가 검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기사의 검이 날카롭지 못 하군. 좀 더 날을 세워두게. 그래가지고 어떻게 적의 목을 베겠나?"
손을 턴 후, 계단으로 내려가자 귀족들이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자신들 중 누가 황제의 광기어린 검에 희생될지 몰라서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실내에는 오로지 황제의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세상에서 제일 기분이 더러운 일은... 기르던 개한테 주인이 물리는 경우이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귀족들을 향해 경고하듯 조용히 읊조리는 발렝 황제의 목소리가 그랜드 홀 안에 넓게 퍼져 나갔다.
"그럼, 기르던 개한테 물린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주 비대한 몸집의 귀족 앞에서 황제가 멈춰 서자 그의 몸이 오한이 이는 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흘린 땀이 옷을 적시고 바닥에 흐르자 옆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였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황제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걸음을 옮기자 긴장이 풀리면서 힘없이 쓰러졌다.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한 것을 보고 혀를 찬 발렝 황제가 다시 옥좌로 올라갔다.
"전부 죽여 버리는 거야. 개란 개는 다 죽여 버리는 거지. 아주 싸그리 몽땅 없애버리면 다시는 개에게 물린 일이 없겠지. 안 그렇소, 황후?"
싸늘하다 못해 냉기를 풀풀 날리는 발렝 황제의 말에 앙뜨네트 황후는 눈물로 대답했다.
"꼭, 그렇게 하셔야 했나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돌아서서 발렝 황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애증과 연민을 가득 담은 그녀의 시선에 발렝 황제는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왜? 마치 내가 불쌍하다는 그런 눈빛은 뭐란 말이냐고?'
황후와 황제 사이의 갈등에 모두가 불안해했다. 한참을 그렇게 황제를 말없이 바라보던 황후가 눈물을 떨구고 홀을 벗어나기 위해 계단을 내려섰다.
그랜드 홀을 벗어나던 그녀가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폐하, 제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폐하를 사랑해서라는 것을 알아주세요."
잠시 멈췄던 몸이 다시 움직이며 장내를 빠져나갔다. 한숨을 쉬며 사라지는 황후의 뒷모습을 보고 발렝 황제는 솟구치는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빠져나가자 참았던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꺼져 버려!, 모두 꺼져 버려!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모두 사라져라!"
손에 걸리는 대로 집어 던지는 발렝 황제의 난동에 귀족들은 서둘러 도망치듯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제풀에 지쳐 옥좌에 쓰러진 황제를 뒤로하고 그랜드 홀 밖의 로비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들었고 그 중심에 몽셀 공작이 있었다.
황제가 던진 물병에 이마를 얻어맞은 50대 후반의 장한이 몽셀에게 다가왔다.
"저런, 괜찮으시오! 제라드 백작!"
이마를 감싼 손수건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제라드 백작을 보고 몽셀 공작이 크게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이까짓 것 예전에 공작님과 전쟁터를 누비고 다닐 때에 비하면 긁힌 정도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제라드 백작은 로베니아의 원로에 속하는 귀족이었다.
젊은 군인들을 등용하는 황제의 정책 때문에 뒤로 물러난 상황이었지만, 그야말로 제국의 역사와 함께한 백전노장이었다.
"부끄럽구먼. 자네가 목숨 바쳐 싸운 제국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서 할 말이 없네."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당치도 않으십니다. 몽셀 공작님!"
두 사람의 눈빛이 얽히는 순간 반짝하고 빛이 나는 착각이 들었다.
입 밖으로 꺼내는 대화와 달리 두 사람은 눈을 통해서 마음속의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것이었다.
"고귀한 희생이었습니다."
제라드 말이 비수가 도어 몽셀 공작의 가슴에 꽂혔다.
"후~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살 만큼 산, 내가 나섰어야 했는데 앞길이 창창한 친구를 앞세웠으니 그 죄 값을 어찌 갚아야 할지 두렵기만 하네."
황제의 검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다니엘 끌로드 백작의 모습이 떠오르자 몽셀 공작이 고개를 흔들며 자학했고 그런 공작을 제라드 백작이 손을 들어 공작을 위로했다.
"공작님 자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것이 그의 잘못이라면 잘못입니다. 몽셀 공작님의 탓이 아닙니다. 아마 곧 저도 그 길을 갈지도 모르죠."
제라드의 말에 몽셀 공작의 노회한 눈이 물기로 젖어들었다.
"모두가 죽을지도 모르네, 목숨 간수하기는 힘들 거야."
"하지만 제국은 살리겠죠."
제라드 백작의 말에서 때가 되었음을 느낌 몽셀 공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황제의 폭정에 대항할 명분과 사람들이 모였음을 절감했다. 그 동안 자신의 살길만 모색하던 귀족들이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여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었다. 몽셀 공작과 제라드 백작이 분연히 일어나 황성을 빠져나가자 그들의 뒤로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처음으로 한마음으로 뭉친 귀족들이 함께 했다.
"태양이 이제 저물려 하는군!"
하늘의 태양이 저물어가며 황실의 복도 안에 햇살을 드리우자 제라드 백작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네, 햇살도 예전만큼 눈부시지 않네요."
그들이 말한 태양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공작이 귀족들에게 후일 만남을 기약하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귀족들이 분분히 자리를 떠났다. 귀족들이 모두 떠나고 두 사람만 남게 된 몽셀 공작과 제라드 백작이 조용한 황성의 후원을 거닐었다.
"어떤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제라드 백작의 이마에는 어느새 피가 멎어있었다.
"자네와 단 둘이 남았으니 내 계획을 말해주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몽셀 공작의 눈을 보고 제라드는 침을 삼켰다.
그만큼 노회한 공작의 눈빛은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다.
황제의 검에 목숨을 잃은 미셀 끌로드 남작과 같은 눈빛이었다.
"난 제국을 살리려는 마음은 결코 없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 제라드 백작의 얼굴은 마치 괴물과 맞닥뜨린 표정이었다.
"너무 오래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야. 제국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잃은 대가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괴물이 되어버렸지. 오늘 그 미래를 보지 않았나. 나아갈 방향을 잃은 제국이 갈 길은 파멸밖에 없어.
그럴 바에는 차라리 우리 손으로 부숴버리는 게 더 나아.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도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리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네."
꿀꺽!
제라드 백작이 마른 침을 삼켰다.
너무도 놀라운 이야기라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네가 당혹스럽다는 것은 잘 아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제국의 미래를 그려보게. 난 자네라면 나와 함께 할 거라고 믿네!"
확신하는 몽셀 공작을 보고 제라드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레센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우리가 무너지면 그들의 손에 폴렌시아가 넘어갑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산의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산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제라드 백작의 강한 부정에 몽셀 공작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흘러 나왔다.
"누가 대륙의 주인이 된다고? 레센이 말인가? 후후후! 그들은 내년 봄에도 모스크 산맥을 넘지 못할 걸세.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그럼 자네의 결정에 도움이 되었나?"
'뭐, 뭐지 이 자신감은 도대체 이 영감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야?'
제라드 백작은 몽셀 공작에게 속내를 드러낸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무래도 줄을 잘못 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제 와서 발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었는데 몽셀 공작이 변심한 그를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이제는 한배를 타고 열심히 노를 저어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하는 방법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황후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제라드 백작이 조심스럽게 황후를 거론하자 몽셀 공작이 주먹으로 가볍게 제라드 백작의 가슴을 쳤다.
"모든 것이 황후의 뜻이라네!"
"황후께서......."
"그래!"
멀리 사라지는 몽셀 공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의 웃음소리만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제라드 백작은 시간이 흘러 황궁의 후원을 붉게 물들여 놓은 타는 노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레센이 모스크 산맥을 넘지 못한다고? 봄이 되면 황제는 반드시 케린버그를 칠 테고 와신상담하고 있는 레센이 이런 기회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텐데, 몽셀 공작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고개를 흔드는 제라드의 시선이 멀리 레센 제국이 있는 북부의 모스크 산맥을 향했다.
절제된 걸음걸이가 느껴지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방 안에 있는 제복입은 젊은이들을 긴장시켰다.
"그동안 제국은 병들어 있었다. 너무 깊은 병에 들어서 환부를 잘라내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걸음을 멈춘 남자가 몸을 돌리자 제복의 젊은이들이 한 입을 모아 소리쳤다.
"원로원입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남자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아주 잘 말해주었다. 제국을 병들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던 원로원이라는 병균을 위대한 요한 황제 폐하께서 제거해주셨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젊은이들을 바라본 남자가 단검을 꺼내들어 단상 뒤에 있는 벽을 향해 던졌다.
단검은 손잡이만을 남겨두고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벽에는 폴렌시아 대륙의 지도가 걸려 있었다.
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남자가 주먹으로 벽을 쳤다.
"레센은 그동안 너무나 웅크리고 지내왔다. 우리의 꿈이 겨우 이 모스크 산속에 안주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제복의 젊은이들이 모두 기립했다.
"무엇을 원하는가, 제군들!"
"로베니아를 원합니다!"
"크하하하하! 그래, 이 피맺힌 원한을 로베니아의 땅에 레센의 깃발을 꽂는 것으로 복수해야만 한다."
누군가 레센 제국의 행진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실내는 제국의 젊은 장교들이 내뿜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남자도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조금은 유약해 보이는 남자가 굳은 얼굴로 조용히 곁으로 다가왔다.
"공작님, 급한 보고가 있습니다."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남자가 목청을 높이며 군가를 따라 부르자 급하게 보고하러 온 남자의 얼굴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사내를 보고 명령을 내렸다.
"크라우스, 당장 제국이 무너지는 일이 아니면 우리 제국의 미래들이 부르는 군가를 자네도 소리 내어 부르게 알았나!"
안절부절 못하는 크라우스에게 저음의 목소리로 나무라는 남자는 레센 제국의 소드마스터이자 유일한 공작인 반 봄멜 공작이었다.
추수 때 들판을 가득 메운 곡식을 바라보는 농부의 눈을 하고 있는 봄멜 공작을 보며 크라우스도 내키지 않는 군가를 따라서 불렀다.
의기 높은 군가가 실내를 가득 메웠다.
젊은 장교들을 교육하던 반 봄멜 공작과 그를 찾아온 부관 크라우스가 망토를 휘날리며 급히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입술을 굳게 다문 공작의 얼굴은 심각했다.
경계를 서는 기사와 병사들의 군례도 무시하고 안으로 뛰어갔다.
"기립!"
봄멜 공작이 들어서자 장교들이 모두 부동자세로 일어섰다.
공작이 자리에 앉아 긴 회의 테이블에 죽 늘어선 장교들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은 후에 학자 타입의 장교가 지휘봉을 들고 나타났다.
"친애하는 공작님, 이하 지휘관 여러분 저희는 일 개월 전에 로베니아의 출병 소식을 듣고 난 이후로, 계속해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분석가들의 견해는 모두 케린버그의 필패였습니다만, 결과는 예상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다음의 영상은 비밀작전 관계로 케린버그에 잠입해 있던 그림자 기사단원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마법영상 자료입니다. 화면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것을 감안하시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법사!"
젊은 마법사가 자신의 앞에 놓인 수정구에 마나를 집중하자 테이블 위로 영상이 펼쳐졌다.
잠시 차 마실 정도의 영상이 테이블 위로 흘러지나가자 곳곳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의자가 뒤로 넘어질 정도로 벌떡 일어선 이도 있었다.
"언제 일인가?"
착 가라앉은 봄멜 공작의 목소리에 보고하던 장교가 급히 대답했다.
"3일 전 소식입니다."
테이블 위의 화면은 정지 상태였다.
마법사가 힘이 부치는지 이마에 흘리는 땀이 굉장했다.
뒤에 서너 명의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기간테스들의 전투장면을 다시 보여주게!"
공작의 명령에 영상이 거꾸로 움직였다.
다시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공작의 명령에 의해서 화면이 정지했다가 다시 움직이고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
"첩보국!"
"하! 공작 각하!"
작은 키에 단단한 몸을 가진 장교가 벌떡 일어섰다.
"첩보국은 지금부터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케린버그에 대한 정보 확보가 목표다. 기존의 케린버그에 대한 모든 정보는 지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케린버그는 없는 거다. 알겠나?"
"하! 알겠습니다."
두 손에 턱을 괴고 있던 봄멜 공작의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작전구상을 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기동전단의 아인쯔 백작이 이 영상을 세밀히 분석해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도록!"
"하!"
짧은 명령과 대답들이 오고갔다.
"봄까지 로베니아도 2차 원정은 무리겠지?"
"그렇습니다. 이미 샹그릴라 이북의 모든 땅은 얼어붙었고 결정적으로 윈터러의 폭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제 아무리 로베니아라고 해도 에냐 강과 호카나 강을 건널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북부 대륙의 윈터러 폭설기간에는 마법진도 불안해서 마법이동도 불가합니다.
발렝 황제가 이를 갈고 있겠지만, 그들로서도 별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피해가 대단해서 2차 원정에는 시간이 좀 필요할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끝낸 장교에게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 봄멜 공작이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장교들이 모두 일어서자 공작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아마도 발렝 황제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을 거다. 하지만 자네의 보고대로 로베니아의 보물이라는 대마법사 말도르까지 희생되었다면 좀 더 신중해지겠지.
게다가 스카라무슈가 100명이나 죽었다니. 이번 겨울동안 로베니아는 많은 땀을 흘릴 것이 분명해!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로베니아의 개로 불리던 케린버그가 주인에게 칼을 들이댔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는 외교부의 지하르트 백작의 책임이다!"
봄멜 공작의 시선을 받은 지하르트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군은 모스크 산맥이 열리는 봄까지 상시전시체제를 유지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전군 지휘관들은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모두 전심전력으로 예하부대를 육성하도록!"
말을 마친 봄멜 공작이 자리로 돌아오자 보고하던 장교가 부동자세로 외쳤다.
"레센 제국, 만세!"
"레센 제국, 만세!"
손을 들어 앞으로 뻗은 장교들의 외침이 회의실이 떠나가도록 울렸다.
봄멜 공작도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 군례에 답했다. 회의실을 빠져 나온 그의 눈동자가 뜨거운 불길에 타올랐다.
조용하던 폴렌시아 대륙이 격동의 폭풍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웅은 난세에 난다고 했다.
절대 강자 로베니아가 휘청거리자 숨죽여 지내던 각국의 야심가들이 기지개를 펴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세상은 혼돈의 시간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