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32화 (32/55)

Chapter 32. 레퀴엠(requiem)

- 망자(亡子)를 위한 진혼곡(鎭魂曲)

"후후후후! 사이클론, 아직도 마나의 축복을 받고 있었구나!"

말도르가 여유롭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는 바람을 타고 나는 듯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한가로이 떠 있었다.

그는 사이클론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공중부양을 즐겼다.

"아직도 어둠의 마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소?"

사이클론의 싸늘한 말에 감았던 눈을 뜨고 말도르가 반문했다.

"이런, 이런, 자네도 이제는 깨달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아직도 그런 말장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흑이니 백이니 하는 것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는가? 선이나 악이나 다 부질없는 것이야. 절대자의 경지에 이르면 말이야 바로 자신의 힘이 선이요 악이라네. 하하하하!"

말도르는 무척이나 이 순간이 즐거운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고위 서클 마법사를 본 것이 꽤나 즐거웠나 보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말도르가 사이클론과의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그 따위 궤변이나 듣고자 당신 앞에 선 것이 아니오. 당신 제자를 쥬(ju)의 곁으로 보냈으니 이제 당신도 쥬(ju)의 품으로 보내주겠소. 그 분에게 용서를 구하고 참회하시오."

사이클론의 말에 궁중부유를 즐기던 말도르의 몸이 똑바로 섰다.

"어쩐지, 프랑시 그 녀석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했더니 네놈이 손을 썼더냐? 녀석이 모자란 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제법 영혼을 모아오는데 재주가 있었는데 아쉽군."

혀를 차는 말도르를 보며 사이클론은 어둠의 마법사 프랑시가 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을 희생시켰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스승인 말도르에게 인간들의 영혼을 모아주기 위해서였던 사실이 밝혀지자 사이클론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예전에 드래곤 산속의 동굴에서 죽어간 프랑시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단지 말도르 하수인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무참하게 죽어간 고향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도르, 당신은 그만 사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겠어!"

"큭큭큭!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볼까?"

말도르의 몸 주위로 거센 바람이 일어났고 사이클론의 몸이 서서히 떠올랐다.

어둠의 마나를 끌어올린 말도르가 먼저 지팡이를 내질렀다.

그러나 방향이 사이클론을 향하지는 않았다.

지팡이에서 튀어나간 커다란 불덩이가 로이든의 성문을 때렸다.

커다란 소음과 함께 성문이 크게 흔들렸지만, 부서지거나 불타지 않았다.

말도르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호오~ 자네 솜씨인가?"

말도르는 정말 감탄했다는 듯이 박수까지 쳤다.

그러나 사이클론은 크게 놀랐다.

성문에 걸어놓은 방어마법이 그의 공격 한 번으로 깨져 버린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대 역시!"

사이클론이 지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나무이 스호 노히라아 모혼!"

말도르의 주문이 끝나자 말도르의 주위로 커다란 박쥐들이 나타났다.

온통 검게 그을린 듯한 몸통과 섬뜩한 검은 눈을 가진 지옥의 괴수(怪獸)들이 침을 흘리며 사이클론을 향해서 이빨을 드러냈다.

지팡이를 옆으로 누인 사이클론이 조용히 주문을 영창하자 사이클론의 소매 속에서 하얀 매와 수리들이 튀어나왔다.

조그마했던 새들이 점점 크기가 커지더니 말도르가 불러낸 괴수(怪獸)들과 크기가 비슷해졌다.

"큭큭큭, 이거 나이를 먹더니 사람이 낭만적으로 변해가는군. 기껏 새란 말인가? 이보게, 내가 소환한 츄파카브라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말이야 지옥의 흡혈귀라고 불리는 아이들인데 얘네들도 체면은 세워줘야지, 겨우 새라니, 쯧쯧."

말도르가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자 사이클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당신은 너무 어둠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군. 위대하신 쥬(ju)의 수호수가 매와 수리라는 것을 잊었단 말인가?"

사이클론의 비꼬는 듯한 말투에 말도르의 인상이 크게 구겨졌다.

"그놈의 신 따위는 죽어버리라고 해! 신이 있다면 왜 그 많은 인간들의 죽음을 나몰라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왜 나는 더 강해져 가는 거냐? 입이 있으면 말해봐!"

주신 쥬(ju)의 이름이 사이클론의 입에서 튀어 나오자 말도르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러나 사이클론은 주변을 날아다니는 매와 수리를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신은 진실한 물음에만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너의 잔혹한 짓에 눈물을 흘리시고 계시지. 이제 너의 악행을 잠재우려고 나를 보내셨다."

사이클론의 진지한 말에 말도르의 입 꼬리가 비틀어졌다.

"헛소리!"

말도르의 손이 주먹을 쥐자 침 흘리기에 지친 츄파카브라(Chupacabra)들이 괴성을 지르며 사이클론에게 이빨을 들이댔다.

그러나 하얀 매와 수리들이 발톱을 세우고 츄파카브라에게 달려들었다.

하늘에서 괴수와 새들 간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하늘에서 벌어지는 마법 대결이 보는 이들에게는 환상적으로 보였다.

쿠콰콰쾅!

힘과 힘이 거인과 거인의 충돌이 일어나며 지축이 흔들렸다.

수적으로 열세인 케린버그의 기간테스 17기와 수나 기량에서 우세한 로베니아의 기간테스 50여기가 충돌하며 천둥번개 치는 소리가 귀를 찢듯이 울렸다.

수에서도 기량에서도 밀리는 케린버그의 열세를 호크의 엥귀오스가 가진 뛰어난 실력과 로베니아의 기간테스에게는 없는 검과 방패가 보완해주고 있었다.

만만히 봤던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이 제법 거칠게 나오자 트리제드 남작의 인상이 구겨졌다.

"제법이군. 하지만 저 검정 기간테스만 잡으면 나머지는 그렇고 그런 정도야, 젠장 기간테스에게 검을 들리다니 우리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한 거지?"

못한 것이 아니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기간테스는 제국의 전유물이었다.

당연히 기간테스를 사용하는 일은 제국간의 일년전쟁 이외에는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기간테스의 운용에 그리 큰 비중을 두거나 전술적으로 연구를 하는 점이 부족했다.

오히려 비마스의 전술적 활용에 더 많은 연구와 훈련을 부여했다.

하지만 기간테스를 적극 활용하는 적이 나타난 이상, 로베니아의 기간테스 전술 운용은 앞으로 대대적인 수정이 불가피해 보였다.

호크의 엥귀오스가 뒤에서 끌어안은 적을 떨어뜨리고 흑검을 상대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상판을 뚫고 들어간 검이 기사마저 꿰뚫어버렸다. 방금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를 쓰러뜨린 호크의 엥귀오스가 잠시 주춤 거렸다. 쉼 없는 전투로 호크의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호크와 케린버그 지휘부는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있다고 하더라도 설마 했지만 이렇게나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호크는 이를 악물었다.

3사단이 무사히 로베니아의 후미를 치려면 자신들이 고철 더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저들을 막아야만 했다.

다행히 2인1조 싸우는 것이 들어맞아서 적은 수지만, 평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김재덕 대령이 생각해낸 고육지책이었다.

짧은 훈련기간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다행이 예상은 적중했다.

물론 그것은 호크의 엥귀오스가 혼자서 10여기를 상대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크는 세린디아와 전투에서 엥귀오스의 사용법을 숙련했기에 상당한 스킬(skill)을 구사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기간테스와 달리 호크의 엥귀오스가 가진 흑검은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를 쉽게 베어버렸다.

지금도 엥귀오스를 잡기 위해서 몸을 날린 기간테스를 반으로 갈라버렸다.

몸체가 반으로 잘렸으니 그 안에 탑승한 기사의 생명은 보나마나 였다.

엥귀오스의 선전에 힘입어 다른 기간테스들도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을 작동 정지시키고 있었다.

로시텔 남작은 지금 이 상황이 차라리 꿈이기 빌었다. 제국의 기간테스들이 이렇게 힘없이 쓰러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시텔 남작은 지휘를 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큰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아군의 기체를 보며 곧 정신을 차렸다. 주변의 정황을 살핀 로시텔 남작은 호크의 엥귀오스에 시선을 집중했다.

엥귀오스가 아군의 기체와 들러붙었다가 떨어지면 영락없이 고철로 변해 버렸다.

이를 악물은 로시텔 남작이 전황을 살펴보니 50여 기나 되던 아군의 숫자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어 버렸다.

정말이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로시텔 남작이 어려운 전황을 타파할 방법을 찾아냈는지 모두에게 작전을 하달했다.

"좋아! 토끼몰이를 해보자!"

로시텔 남작의 지시에 5기의 기간테스가 뒤로 몰래 빠져 나왔다.

갑자기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이 전면으로 돌진하며 거세게 나오자 당황한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과 뒤섞여 혼전이 벌어졌다.

호크도 아군을 돕기 위해 그 혼전에 뛰어들었고 그 뒤를 노리고 5개의 그림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로시텔 남작이 탑승한 기간테스의 손에 비마스에게 당한 케린버그 기간테스가 떨어뜨린 장검이 들려 있었다.

엥귀오스가 흑검을 들고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를 내려치려는 순간!

뒤에서 그림자들이 엥귀오스를 덮쳤다.

"뭐, 뭐야?"

호크는 기겁을 했다.

뒤에서 달라붙은 적기가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용을 써도 엥귀오스가 꼼짝하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거 놔! 이 개자식들아!"

엥귀오스가 파워을 올렸지만, 오히려 더 압력이 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양옆에서 두 기가 더 엥귀오스를 옭아매자 엥귀오스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쿵!

"크흑!"

강한 충격이 호크에게 전달되었다.

로시텔 남작의 기간테스가 엥귀오스의 가슴에 발을 올려놓았다.

"귀찮은 놈! 네 녀석의 잔재주도 여기까지다!"

거꾸로 든 검을 엥귀오스의 흉갑을 향해 내리찍었다.

"안 돼!"

엥귀오스가 위기에 빠지자 케린버그의 기체들이 경악하고 도우려고 했지만, 적 기체들이 육탄돌격으로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을 막아섰다.

바닥에 눕혀진 채 가슴을 관통 당하게 생긴 엥귀오스를 보며 호크의 부하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돼!"

"크욱!"

"......."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답답한 신음소리와 낭패한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쿨럭! 주... 중령님 어... 어서!"

로시텔 남작이 내리찍은 검은 엥귀오스가 아니라 화급한 순간에 몸을 날린 루브카의 기체를 내리찍었다.

죽어가는 루브카가 기체의 마지막 힘을 짜내서 자신을 관통한 적의 장검을 움켜잡고 놓지 않았다.

"루브카! 야, 이 미친 새끼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루브카의 기체가 자신을 가로막았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 중령님 죄송합니다. 먼저 갑니다. 다른 녀석들... 부탁......."

"루-브-카!"

호크의 울부짖음과 함께 엥귀오스의 몸체 주위로 마나가 일렁거렸다.

엥귀오스를 내리누르고 있던 기체들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로시텔 남작의 기체도 안간힘을 썼지만 엥귀오스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몸을 날려 대신 검을 맞은 루브카의 기체를 눕히고 일어선 호크의 엥귀오스는 분노로 타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흑검을 든 엥귀오스는 사신이었다.

흑검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라 몸체를 뒤덮었다.

가뜩이나 검은색 기체를 가진 엥귀오스는 암흑 그 자체로 변했다.

갑자기 변한 엥귀오스의 기운에 양편이 모두 뒤로 물러섰다.

"젠장 뒤로 물러서라, 중령님 곁에서 떨어져! 어서!"

호크의 부하들이 쓰러진 루브카의 기체를 끌고 뒤로 물러났다.

명령을 내린 밀턴 중위의 판단은 정확했다.

사실은 사이클론에게 미리 언질을 받은 탓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엥귀오스에게서 떨어지라는 주의를 받은 터라 바로 뒤로 부대를 물린 것이었다.

사이클론은 늘 엥귀오스를 보고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색 기체에 숨겨진 거대한 힘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그 덕에 우군끼리 해치는 참사를 모면했다.

그러나 근처에 있던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은 지옥을 경험해야만 했다.

"크아악!"

"도망쳐!"

이미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기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엥귀오스는 완전히 달라진 움직임을 보였다.

거의 인간의 움직임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몇 배는 더 빠르고 더 강력했다.

엥귀오스는 검은 표범같이 들판을 내달렸다.

표범이 노루의 목 줄기를 물어뜯듯이 인정사정을 두지 않고 로베니아 기체들을 유린했다.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흐르자 들판에는 더 이상 똑바로 서 있는 로베니아의 기간테스가 없었다.

엥귀오스의 흑검이 로시텔 남작의 기체를 벌집으로 만들었다.

'쿵!'

엥귀오스 뒤로 기간테스(gigantes) 한 기가 다가와 움직임을 못하게 막았다.

"중령님! 정신 차리세요! 제발요! 이미 녀석은 죽었습니다. 그만하세요!"

밀턴 중위의 간절한 외침이 효과가 있었는지 갑자기 엥귀오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끄러워! 귀 안 먹었다."

"주, 중령님! 전 중령님이......."

밀턴 중위의 기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울렸다.

"왜 내가 미치기라도 했을까 봐? 멀쩡하니까 비켜라. 아니면, 확 던져버릴 테니까!"

밀턴 중위가 엥귀오스를 풀어주자 몸이 자유로워진 엥귀오스가 대원들에게 돌아왔다.

바닥에 누워 있는 루브카의 기체 상판 갑주에 난 구멍이 너무나 커 보였다.

엥귀오스가 상판을 열자 거대한 기간테스의 장검에 루브카의 몸은 짓이겨져 있었고 콕피트 안은 피바다가 되어 있었다.

"미친 새끼, 뭐가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 바... 보... 녀... 석!"

끝의 말은 울먹이고 있어서 거의 잘 들리지 않았다.

무릎 꿇은 엥귀오스도 왠지 울고 있는 듯했다.

"치이익! 기동전대! 기동전대!"

마나통신기에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나왔다.

"말하라!"

"호크, 녀석들이 기간테스로 로이든을 넘으려 한다. 어서 빨리 움직여 3사단이 맨몸으로 녀석들과 조우하겠어! 어서!"

김재덕 대령의 다급한 무전에 엥귀오스가 일어섰다.

"자, 다 들었지. 어디 다친 놈 있냐?"

"없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부대원들을 보고 호크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바보 같은 녀석들, 가자! 죽기에 좋은 날씨야!"

기간테스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가자 엥귀오스도 몸을 돌렸다.

잠시 죽은 루브카를 바라보던 호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조그만 기다려라, 곧 뒤따라가마!'

엥귀오스도 몸을 돌려 달렸다. 잠시 후 호크와 기동전재의 시야에 로이든 성을 넘기 위해 공성전을 벌이고 있는 로베니아군이 들어왔다. 수성이라는 유리한 위치에 놓은 케린버그 였지만 로베니아 군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작전이 더 힘들어진 것은 후방을 치기로 되어 있는 3사단이 D포인트를 넘은 것이 너무 늦었다는 점이었다.

이미 3사단은 로베니아 장갑기병들의 후미를 교란하고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3사단은 오히려 호크의 기동전대보다 더 늦었다.

이를 악물은 호크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왼편 언덕에서 3사단이 뒤늦게 달려오고 있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지만, 너무 늦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50여 기의 기간테스들이 로이든 성벽을 올라타고 있는 광경이었다.

성벽 위에서 챠챠 대위의 특임대원들이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다.

"막아라! 안 되면 몸으로라도 막아!"

인간의 몸으로 어떻게 저 거대한 괴물을 막겠는가만 특임대 대원들은 비장한 각오로 전투에 임했다.

실제로 온몸에 화염탄(火焰彈)을 두른 특임대 대원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이 뚫리면 미래는 없었다.

살아남은 1사단 병사들도 모두 성벽 위로 올라왔다.

팔이 하나라도 성한 병사들은 스패로우를 들고 나섰다.

"뭐하는 거야? 가서 몸이나 치료해!"

부득불 모루에 까지 기어올라온 병사들을 보고 챠챠 대위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성치 않은 팔을 가지고 스패로우을 모루에 걸쳐 놓은 중위가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위님, 혼자 잘난 척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챠챠 대위가 기가 막혀서 쳐다보자 1사단 병사들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럼 온몸에 화염탄(火焰彈)을 휘감은 특임대는 더 미쳤게요."

"끙~"

앓는 소리를 내는 수밖에 없는 챠챠 대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희들은 네놈들 대장처럼 별종이야, 별종!"

"그러게요, 바보 같은 대장 같으니라구."

죽은 에밀 소령을 생각하는 대원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챠챠 대위도 코가 찡해지자 바닥에 침을 내뱉었다.

"울기는 왜 울고 지랄이야, 이 자식들아 곧 뒤따라 갈 텐데 질질 짜지마! 먼저 가는 놈이 자리 닦아 놓고 기다려!"

악을 쓰는 챠챠 대위의 목소리가 마나통신기를 타고 모두에게 전달되자 통신기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챠챠 대위님! 대위님이 제 자리 좀 맡아두세요!"

"저도요!"

"저희 중대는 단체 예약입니다."

한동안 마나통신기가 시끌벅적해졌다.

챠챠 대위는 처음으로 외인부대와 함께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스콜피온 용병대에 남아 있었다면 평안하고 보장된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겠지만, 이렇게 진짜배기 사내들하고 멋들어지게 한판 싸울 기회는 영원히 갖지 못했을 거란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놈들이 기어 올라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성벽을 울리는 충격으로 모두가 기간테스들이 기어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작전이고 뭐고 없다. 각자 할 수 있는 것을 다해라. 제군들!"

마나통신기를 집어던진 챠챠 대위가 함성을 질렀다.

"으아악!"

성벽 위에서 스패로우를 비롯해서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이 모두 쏟아졌다.

그러나 너무도 힘없이 기간테스의 기체를 맞고 튕겨 나갔다.

그래도 포기하는 병사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앙리 백작의 입에서 코웃음이 흘러 나왔다.

"발악을 하는구나. 어리석은 놈들."

앙리 백작의 손이 높이 올라갔다.

"장갑기병~ 앞으로 전진!"

마법사의 수정구를 통해서 기간테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샤론, 에밀리앙! 성문을 열어라!"

성벽을 타려던 2기의 기간테스가 방향을 바꿔서 성문을 향했다.

성문을 파괴하려는 기간테스를 향해서 모든 화력이 집중되었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상황실에서도 결전의 의지가 불타올랐다.

검을 꺼내든 귀족들이 모두 밖으로 향했다.

"전하! 전하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찰스 국왕은 헬렌 백작의 어깨를 눌렀다.

"헬렌, 그동안 수고했소. 이제 끝낼 시간이야."

"저... 전하!"

울먹이는 헬렌 백작을 뒤로하고, 찰스 국왕이 계단을 내려서다 고개를 돌렸다.

"제너럴, 잘 부탁하오!"

"전하, 먼저 가시면 안 됩니다."

나형석 장군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린 찰스 국왕을 따라서 모든 귀족들이 따라 나섰다.

"크흑! 빌어먹을 시간만 더 있었더라도......."

주먹으로 벽을 내려치는 김재덕 대령을 보고 나형석 장군이 대령을 위로했다.

"우리는 할 만큼 했어, 후회를 남길 필요는 없겠지."

"네, 장군님, 하지만 분합니다."

"그래, 나도 분하지만, 끝까지 해봐야지. 아직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부하들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어! 오퍼레이터 스크린을 잘보고 즉각 대응하도록!"

비록 창검을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가 귀가 되어서 정보를 전달하는 이들도 전선에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성문은 나둬. 어차피 성 안으로 끌어 들이려고 했던 것이 계획이니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이나 떨어뜨려!"

"알겠습니다, 대위님!"

성벽 계단을 뒤뚱거리며 올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정비창에 있던 리온과 드워프들이었다.

그 뒤로 기구에 실린 커다란 통들이 운반되어 왔다.

"뭐야, 리온! 자네들은 굳이 이 전투에 낄 필요는 없어. 대령님도 자네들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전달했잖아!"

"가기는 어딜 가요. 여기가 우리 고향인데, 자! 이 리온님의 특제 기름입니다."

기구를 타고 올라온 기름통을 병사들이 힘을 합쳐서 기간테스를 향해 쏟아 부었다.

제법 효과를 발휘해서 기어오르던 기간테스들이 템즈강으로 떨어졌다.

"성공입니다. 효과가 있어요!"

리온이 기뻐서 펄쩍 뛰었다.

병사들도 크게 고무되어서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잠시 후 엄청난 파괴음과 함께 성문이 부서졌다.

문이 열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베니아의 장갑기병과 궁기병 그리고 기사단들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갔다.

말과 사람, 둘 다 중무장을 한 장갑기병들이 선두에 서서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쐐기 모양의 진형을 이루고 돌격했는데 첫째 열에는 30명의 중갑기병이 제2열에는 34명의 중갑기병, 제3열에 38명의 중갑기병, 그리고 마지막 열인 제12열에는 74명의 중갑기병을 배치해 쐐기진형을 구성하고 돌격했다.

무기는 기병창인 콘토를 들거나, 짧은 투창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뒤를 화살로 무장한 궁기병들이 중갑기병을 엄호사격하며 뒤따랐다.

10만의 군세가 로이든의 성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이제 함락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쿵! 쿵! 쿵! 쿵!

"앙리 백작님, 적입니다!"

"응? 뭐야 로시텔 남작이 당했단 말이야? 어서 통신을 보내. 어서!"

당황한 마법사가 서둘러 기간테스에게 명령을 내리자 성벽을 오르려던 기간테스들이 모두 방향을 바꿔서 로베니아 군의 후미로 뛰어갔다.

그냥 두면 로베니아군을 짓밟을 듯한 기세로 달려오는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부대에게 뒤통수를 맞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싸움을 오래 끌면 골치 아파진다. 서둘러 본성을 점령해. 녀석들의 국왕을 잡아 무릎을 꿇리면 전투는 끝이 난다. 아크라스! 너의 기사단을 이끌고 케린버그의 국왕을 잡아라. 어서!"

아크라스가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말고삐를 잡아챘다.

그 뒤로 100여 명의 기사들이 햇살에 갑옷을 빛내며 달렸다.

앙리 백작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분명 수적으로는 우세인데 왠지 자꾸 적에게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고개를 흔들어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려는 그의 귀로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3사단이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선두에 선 머스탱 공작의 검이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머스탱 레이 공작!"

앙리 백작도 검을 꺼내들고 말머리를 돌렸다.

"빌어먹을 놈들, 단단히 작정한 전투였어. 아무래도 우리가 속은 것 같군!"

주변에 척후병들을 두었을 텐데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겨두었단 말인데, 저만한 병력을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로베니아 군은 앞뒤로 갇힌 꼴이 되어버렸다.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도움을 받아야 할 로베니아 최고의 마법사 말도르는 사이클론과 혈전을 벌이고 있느라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 아니었다.

앙리 백작과 남아 있던 2만의 장갑기병들이 배수진을 치고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케린버그 3사단 병력을 기다렸다.

"마법사! 적의 수를 줄여라!"

앙리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도 황제에게 죽을 목숨이었다.

케린버그를 쑥대밭이라도 만들어야 최소한 목숨이라도 구걸할 판인데,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단지 가까워지는 머스탱 공작이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언젠가 손을 섞어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는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캐스팅이 끝나는 것을 보며 앙리 백작이 눈을 감았다.

커다란 화염구(火焰球) 수십 개가 하늘 위에 떠올랐다.

대지를 흔드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리는 3사단도 마법사들을 보았다.

핸들러와 머스탱 공작의 눈빛이 교차하자 두 개의 무리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핸들러가 이끄는 외인부대원들이었고, 나머지는 머스탱 공작이 이끄는 기사단이었다.

그들이 일렬로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말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커지며 속도도 빨라졌다.

말이 숨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와 말을 채찍질하는 소리가 들판을 울렸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화염구(火焰球)가 아직 크기가 다 완성되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적군을 보며 마법사들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두두두!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뭐해! 어서 마법을 사용해!"

"아직 마나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법사들이 힘겨운 소리를 내자 앙리 백작이 발작했다.

"이런 미친 소리를 봤나? 우리 앞에서 터트릴 셈이야? 어서 서둘러!"

앙리 백작의 말마따나 화염구를 제대로 연성했다가는 써보지도 못하고 당할 판이었다.

적군은 상상외로 빠르게 접근했다.

마법사들의 손이 앞으로 내뻗어지자 덜 연성된 화염구가 케린버그 군대를 향해서 날아갔다.

그러나 3사단을 멈추지 않고 더 빨리 달렸다.

아니 오히려 더 속력을 냈다.

화염구들이 3사단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슬아슬한 간발의 차이로 화염구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행운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속도가 뒤쳐져서 화염구에 적중당한 부대는 참담한 비명 속에서 재로 변했다.

"멈추지 말고 달려라!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핸들러의 악쓰는 소리가 들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핸들러는 고함을 질렀다.

먼지를 뒤집어쓴 3사단의 병력과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이 충돌했다.

"으아아악!"

비명과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을 진동했다.

어느 한쪽도 물러설 수 없는 피를 튀기는 전쟁이었다.

레센과의 일년전쟁보다 더 힘들고 참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앙리 백작도 온몸을 피로 물들였다.

그런 그의 눈앞에 멋진 수염을 기른 머스탱 공작이 로베니아의 장갑기병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서로에게 미소를 보냈다.

"끝장을 보자!"

앙리 백작의 도발에 머스탱 공작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싸우는 사이를 비집고 두 거물이 검을 마주쳤다.

주변으로 빈 공터가 생성되며 두 사람의 세력권에서 병사들이 벗어나자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한 경기장이 마련된 듯했다.

캉! 캉!

두 사람의 검이 마주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소드 마스터 대 스카라무슈의 대결이 숨 가쁘게 벌어졌다.

로베니아 대 케린버그의 전투도 주위에서 죽어가는 병사들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검의 끝을 보려는 두 사람이 상대방의 검술에 빠져들었다.

"크아악!"

"병력을 뒤로 돌려! 밀어붙이란 말이야!"

핸들러가 악을 쓰자 이지 중대가 총대를 메고 로베니아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더 이상 적군이 로이든 안으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들판에 버려지고 있었다.

죽고 죽이는 죽음의 찬송가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죽음의 비명을 토해내는 병사들이었다.

루크 소위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베어 넘기고 또 베어 넘기고 낯선 복장의 군인들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스패로우를 쏘다대고 카트리지가 떨어지면 스패로우를 들고 후려쳤다.

저 멀리 자신의 아버지가 빛을 내며 적장과 싸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멋있고 아름다웠다.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기사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다른 길에 들어섰지만,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도 보람이 있었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과 등 뒤를 봐주는 든든한 전우들 그리고 외인부대원이라는 자부심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꽃핀 사랑도 그에게 최고의 행복이었다.

푹!

장검이 등 뒤에서 그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제길! 아직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고백도 못했는데.......'

루크 소위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를 보고 소대원들이 뛰어와 소리 지르는 것이 느린 화면으로 비쳐졌다.

점점 세상의 빛이 흐려져 갔다.

'하이디스.......'

"세상에! 저런 괴물이 있다니! 저건 전설의 기간테스 엥귀오스가 틀림없어! 어서 뒤로돌아! 으악!"

엥귀오스의 정체를 알아본 로베니아의 기사가 자신의 기체와 운명을 함께했다.

혼자서 순식간에 5기의 적 기간테스를 파괴한 호크가 상황을 살피다가 낮게 웃었다.

처음에는 한없이 불안해 보이던 기동전대원 들이 제법 훌륭하게 교전을 치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전만한 훈련이 없다고 하더니 다른 부대원들도 이젠 제법 능숙하게 기간테스를 운전했다.

2인1조의 콤비 플레이가 제법 잘 맞아 들어갔다.

호크의 엥귀오스도 더욱 힘을 드러냈다.

또다시 엥귀오스가 어둠에 가까운 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호크도 흥분하거나 이성을 잃지 않았다.

나름대로 엥귀오스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독보적인 엥귀오스의 활약에 적 기간테스의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급조된 외인부대는 늘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오버히트(Overheat)였다.

"3, 7, 15호기 기동 불능 예정! 연료 부족입니다."

"이런, 하필 지금!"

호크가 무척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생각보다 마나석의 기동시간이 짧았다.

"젠장! 에너지가 부족한 기체들은 뒤로 빠져라. 어서!"

"나머지 기체들도 거의 바닥상태입니다. 중령님!"

밀턴 중위의 보고에 호크가 이를 악물었다.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이 뒤로 물러서자 양측이 대치 상태로 들어섰다.

케린버그는 연료가 소모되어서 공격을 꺼리고 있었고 로베니아는 케린버그의 기체들이 휘두르는 장검의 위력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가운데 서 있던 엥귀오스의 호크가 좌우를 흩어보더니 통신기를 열었다.

"모두 잘 들어라! 이도저도 안될 때는 무식하게 들이대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한 판에 승부를 걸자!"

비장한 각오를 한 호크의 목소리가 흐르자 기체들이 모두 뛰어오를 자세를 잡았다.

케린버그 측의 변화에 로베니아도 긴장했다.

"하나, 둘, 셋! 물고 늘어져! 앞의 셋은 내가 맡는다. 절대로 떨어지지 마라 연료가 바닥날 때까지 끌어안고 있어! 절대로 놓지 마!"

호크가 악을 쓰는 동시에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기간테스들이 뛰어 들었다. 통신기가 터지도록 기동전대 대원들의 함성 소리가 콕피트안을 울렸다.

"악으로 깡으로!"

"그래! 악으로 깡으로!"

엥귀오스가 뛰어올라 흑검을 휘둘렀다.

그 사이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이 막무가내로 로베니아의 기간테스들을 끌어안고 쓰러졌다.

뜻밖의 공격에 당황한 로베니아 기간테스들이 적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죽기 살기로 끌어안고 누르자 버둥거리기 바빴다.

그 사이 호크의 엥귀오스가 양손에 검을 들고 적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때 호크의 귀가 따갑도록 마나통신기가 울렸다.

"야, 임마! 그 아까운 걸 다 부수면 어떻게 해!"

김재덕 대령의 고함에 귀청이 떨어져 나갈 뻔한 호크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지금 죽을 둥 살 둥 싸우고 있는데, 지금 그런 욕심을 내게 생겼어요?"

호크가 악을 쓰자 김재덕 대령이 더 악을 썼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네놈들만 연료가 바닥이 아니야. 아마도 로베니아 녀석들은 마나가 고갈되어 말라붙어 버렸을 거다. 녀석들이 세린디아보다 더 나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우리처럼 개조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기동시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그것도 기사들의 능력에 따라서 또 다를 게 뻔해! 여기 스크린을 통해서도 보이는데 너는 그게 안 보이냐?"

김재덕 대령의 말에 호크가 막 가슴을 찔러 버리려던 적 기간테스가 반항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검을 들어 적 기체의 상판을 뜯어내자 끈끈한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촉수에 매달려 탈진한 로베니아의 기사가 흔들거렸다.

우리도 오버히트(overheat)였지만, 상대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그들은 호크의 부대와 전투를 치루기 전에 로이든의 성벽을 넘기 위해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마나를 필요 이상 빼앗겨버린 로베니아 기사들에게는 자신들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케린버그의 기간테스들이 끔찍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호크도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엥귀오스도 오버히트(overheat)였다.

호크도 태극심법(太極心法)이 아니었다면 저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야, 모두 일어나 꼴사납게 남자들끼리 끌어안고 뭐하는 거냐?"

엥귀오스가 발로 툭툭 건드리자 통신기에서 어눌한 목소들이 들려왔다.

"바닥입니다. 손가락 하나 못 움직입니다. 중령님!"

"기체에서 내리려고 해도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니 콕피트가 개방되지 않습니다."

"들었죠, 대령님! 여기 좀 어떻게 처리 좀 해봐요! 그리고 안쪽은 상황이 어때요!"

"3사단이 늦기는 했지만, 다행히 우리가 파논 함정에 적들이 제대로 걸려들었다. 밖에만 정리하면 될 거 같아 모두 수고들 했어!"

밝은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서 들리자 호크도 한시름 놨다.

"겨우, 겨우 해낸 건가!"

호크의 시선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3사단과 로베니아의 장갑기병들이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근접전에서는 외인부대를 로베니아 군이 따르기 힘들었다.

무거운 장갑옷들이 근접전에서 그들의 목숨을 뺏는 무기가 되고 있었다.

방식의 궤를 달리하는 케린버그의 전투방법에 로베니아 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는 그들의 무기가 가장 현대적이고 위력 적이었지만 이번 전투에서는 케린버그의 무기와 전략, 전술이 훨씬 위였다.

처음 보는 작은 석궁은 로베니아가 자랑하는 장갑갑옷을 너무 쉽게 뚫고 들어갔다.

게다가 특공무술을 익히 외인부대는 악착같이 두세 명이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을 유린했다.

모든 것이 로베니아군에게는 악몽이었다.

가슴에 검을 틀어박아도 이놈들은 웃으면서 자신들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폭했다.

수화탄(手火彈) 가슴에 품고 끌어안으니 두 사람만 죽어나갔다.

이런 전투를 아무리 대제국 로베니아의 군대라고 하지만, 그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았다.

죽여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를 찌르면 둘이 달려들어 검을 찔렀다.

점점 로베니아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뒷걸음질 쳤다.

단 한 번의 패배도 모르던 제국의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거대한 곰에게 달려드는 늑대들이 무모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목숨을 도외시한 공격일 때는 거대한 곰도 서서히 지쳐가기 마련이었다.

산중지왕(山中之王)인 곰이 기운을 잃고 몸이 기울었다.

제왕이 몰락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놈들, 죽어라! 죽으란 말이다."

로베니아의 기사가 나이어린 외인부대 병사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가슴을 뚫고 등 뒤로 튀어 나왔지만, 이제 십대 소년이나 되었을 병사가 이빨 사이로 흐르는 피를 보이며 미소 지었다.

"쿨럭, 혼자는 못 가!"

"뭐?"

소년 병사가 자신을 찌른 기사를 끌어안자 불꽃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악!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으~~ 뜨거워!"

'푹!'

불길에 휩싸인 채 몸부림치던 기사가 등과 가슴을 창에 찔리고 생을 마감했다.

"이... 이놈들은 미쳤어! 미쳤다고!"

로베니아 병사들은 정말 치를 떨었다.

이번 원정길을 소풍 나들이쯤으로 여겼던 자신들의 안일한 생각을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러나 성 안으로 들어간 자신들의 동료보다 처지가 났다는 것을 알면 위안이 될까?

성 안에서는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지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고 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간 로베니아의 장갑기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무시무시한 함정이었다.

성 안의 바닥에서 땅을 파고 뚜껑을 덮고 숨어있던 외인부대와 케린버그 병사들이 로베니아군을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을 피해 빠져 나오면 성벽 위에서 스패로우가 쏟아졌다.

방패고 갑옷이고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장갑기병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또 함정 속에 숨어 있는 병사들이 쇠갈고리와 낫을 이용해서 로베니아의 말들을 집중 공격했다.

말들이 쓰러지며 바닥에 내동댕이쳐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장갑기병들은 성 안에서 밀려나오는 케린버그 병사들에게 처참하게 살육당했다.

특히나 이 병사들은 로베니아 병사들에게 아주 잔인했다.

그들은 세린디아에서 편입된 이방인(異邦人)들이었다.

한(恨)이 맺힌 그들의 공세는 내일 세상이 끝날 것처럼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게다가 케린버그의 모든 귀족들이 검을 높이 치켜들고 나섰다.

그 선두에는 케린버그의 찰스 국왕이 선두에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너... 너는 누구냐? 내가 아는 사이클론이라면 절대 8써클의 마법을 펼치지 못해! 더구나 이것은 인간의 마법이 아니야!"

만신창이가 된 말도르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사이클론을 가리켰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오. 어리석은 사람 아직도 모르겠소. 인간의 영혼에 손을 대기 시작한 순간부터 당신은 마법사로서 이미 끝났던 거요. 마나의 축복을 받아야 할 마법사가 마나의 축복을 거부하고 어둠의 힘을 신봉했으니 그 대가는 아주 클 것이오."

"개수작하지 마! 내가 그 따위 궤변에 흔들릴 것 같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자, 이것도 막아 봐라!"

말도르가 허공에다 소매에서 꺼낸 이빨과 발톱 등을 뿌렸다.

"크하하하! 그 따위 개똥철학은 동네 개에게나 줘버리라지.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여유가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겠어!"

공간 한쪽이 일그러지며 악마의 모습을 한 괴물이 튀어나왔다.

말도르의 츄카파브라도 모두 매와 수리에게 소멸되었다.

폴렌시아에서 매와 수리는 빛과 희망을 의미했다.

이번에도 사이클론의 지팡이가 높이 올라가자 하얀 매와 수리가 말도르를 향해 날았다.

공중에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하늘을 한 번 쳐다본 앙리 백작이 인상을 쓰며 검을 고쳐 잡았다.

마법사 말도드가 함께할 때만 해도 자신들은 별로 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둠의 마법사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의 명성이 오늘은 아주 많이 퇴색해 버렸다.

이제 믿을 것은 자신의 검밖에 없었다.

자신의 주위로 들리던 수하들의 목소리가 잦아든 걸 보면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소드마스터 로이 머스탱 공작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예전에 발렝 황제 앞에서 그를 폄하하는 발언을 했던 자신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지금도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헉헉! 강철의 소드 마스터라는 게 허명은 아니었군!"

"싸우는 와중에도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니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별소리를 다하는군!"

숨 가쁘게 어깨를 들썩이는 앙리 백작과는 달리 머스탱 공작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얼굴에 흐르는 냉막함은 앙리 백작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끼아아악!"

하늘에서 말도르가 소환한 괴수(怪獸)가 사이클론이 불러낸 매와 수리의 발톱과 불리에 걸레 조각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사이클론의 지팡이에서 나온 백색 광선이 말도르의 몸을 에워쌌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잠시 하늘을 흘깃거린 머스탱 공작이 검을 앞으로 내세웠다.

"자, 이제 우리도 끝을 내지!"

아무 감정도 없는 목소리에 앙리 백작은 다시는 로베니아 땅을 밟을 수 없음을 알았다.

"닥쳐! 시작도 끝도 내가 하는 거다! 으아아악!"

두려움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앙리 백작이 검에 마나를 쏟아 부으며 휘둘렀다.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땅바닥에 복잡한 선이 그려졌다.

그 검의 폭풍 속에 뛰어든 머스탱 공작의 검이 은빛 호선을 한번 그렸다.

'서걱!'

앙리 백작이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몸의 움직임이 어색했다.

비틀거리던 몸이 쓰러지며 크게 소리가 났다.

머스탱 검에 잘린 머리가 멀리 굴러갔다.

이를 본 로베니아 병사들이 하나 둘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머스탱 공작의 수하가 로베니아 장갑기병의 장창 콘토에 앙리 백작의 머리를 꿰어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케린버그 병사들의 함성소리와 고개 숙인 로베니아 병사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졌다.

붉게 타는 태양이 로이든 성을 넘어가고 있었다.

노을 아래 아비규환의 전쟁터가 수채화 그림처럼 펼쳐졌다.

무릎 꿇은 로베니아의 병사들과 죽은 전우들의 시체를 한데 모으는 외인부대원들의 모습, 부상당한 병사들이 신음하는 소리, 멀리 성벽 위에서 챠챠 대위의 고성 소리와 특임대 대원들의 웃음소리까지 땀으로 젖은 호크의 머리카락을 흩어버리는 삭막한 겨울바람이 피 냄새를 날려 버리려는 듯이 들판을 휘감아 돌았다.

무릎 꿇은 엥귀오스의 어깨에 걸터앉은 호크 주위로 기동전대 대원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모여 들었다.

기간테스 위에 아무렇게나 호크를 따라서 걸터앉은 대원들이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감상에 빠졌다.

꼬마 스톤이 위생병 완장을 차고 뛰어 다니다 호크를 발견했는지 손을 흔들었다.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호크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것에 실려 지나갔다.

루크 소위였다.

가슴에 붕대를 칭칭 감은 것이 위중한 듯했다.

가슴이 덜컹했던 호크는 루크가 힘들게 주먹을 들어보이자 호크도 주먹을 쥐어 보였다.

스톤이 들것을 쫓아가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살아 있다는 거, 정말 좋은 거네요!"

밀턴 중위가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건넸다.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식도를 타고 흘러 들어가는 느낌은 치열한 전투 후에 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카하~ 그래 물맛이 참 좋군. 루브카를 위해!"

술 대신 수통을 들어 올린 기동전대 대원들이 죽은 루브카의 영혼을 기렸다.

아울러 오늘 죽어간 수많은 이름 모를 전우(戰友)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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