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31화 (31/55)

Chapter 31. 로이든 공방!

"옵니다!"

엄청난 규모의 진동이 지축을 통해서 울렸다.

먼지를 피워 올리며 다가오는 로베니아의 대군은 단지 걸음만으로도 그 위용을 자랑했다.

특히나 비마스의 모습은 지옥의 악신들이 몬다는 불의 전차를 보는 듯했다.

성벽의 모루에 늘어선 외인부대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젠장, 여기까지 찌릿찌릿한 느낌이 오는데 대단한 걸!"

"에밀 소령님! 사령부 무전입니다!"

무전병에게 마나 통신기를 건네받은 에밀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로베니의군의 상황을 보고했다.

에밀의 눈이 모루의 길 위로 늘어선 캐논 포 진지를 바라보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네. 충성!"

무전을 끝낸 에밀이 턱밑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먼지로 보이던 로베니아군들의 실체가 템즈 강 가까이 다가오자 드러나 보이기 시작했다.

"중위! 각 단위 부대에 하달해라! 첫 공격은 우리로부터 시작한다고. 어서!"

사령실에서 날아온 무전은 에밀에게 첫 공격권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최대한 가까이 적을 끌어들이되 적의 기동전차인 비마스가 움직이기 전에 공격을 가해야 했다.

이 전투는 모든 것이 타이밍이 중요했다.

첫 공격의 타이밍부터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타이밍까지 모든 것이 현장의 지휘관이 판단을 잘해야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전과를 올릴 수 있는 전투였다.

햇빛을 받은 비마스가 빛을 반사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와라! 단숨에 숨통을 끊어주마!"

모루의 엄폐물 사이로 외인부대원들이 빠짝 몸을 붙였다.

에밀도 몸을 깊숙이 숨겼다.

"아크라스 단장님! 저것을 보십시오!"

수하 기사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에 깃발이 꽂혀 있었다.

말안장에서 엉덩이를 들어 고개를 뒤로 돌려보니 일정한 간격으로 색상이 다른 깃발들이 들판에서 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뭔가 불안한 느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시 몸을 돌려 앞으로 내다보니 위풍당당한 중장갑 기병들이 오늘따라 불안하게 보였다.

아크라스 단장이 급히 부관을 불렀다.

순식간에 로베니아 진영에서 푸른색 깃발이 곳곳에서 솟아오르더니 좌우로 흔들렸다.

그와 더불어 나팔소리가 길고 짧게 울리자 정방형 진군의 대열이 멈추고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평소 전술 훈련 하나만큼은 잘 되어 있었는지 짧은 시간에 맨 앞에 창병들이, 그리고 그 뒤로 중장갑 기병들이 늘어섰고 궁기병들이 활에 시위를 팽팽하게 메기고 있었다.

그 뒤로 무서운 투기를 흘리고 있는 기사단들이 투레질하는 말들을 달래고 있었다.

진형이 넓게 퍼지자 아크라스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모여 있을 때보다야 넓게 퍼진 진형이 피해가 덜 할 거라는 판단은 옳았다.

며칠 전에 헤나스톤에서 당한 기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위력적인 새로운 화살과 정체를 알 수 없는 화염탄(火焰彈)의 위력은 대단했다.

같은 수에 두 번 당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언덕 위에 만들어진 임시막사에서 이를 지켜보던 미트랑 군단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크라스 기사단장의 진영 변형이 매우 적절한 조치라고 느껴서였다.

시동들이 가져온 갑옷을 모두 입은 미트랑 군단장이 몸을 일으켰다.

하얀 백마 위에 몸을 실은 미트랑 군단장은 투구의 가리개를 열고 케론스 공작을 보았다.

"저는 이제 그만 전장으로 갑니다. 생각보다 일이 틀어졌지만, 로이든을 확실하게 점령한다면 황제께서도 노여움을 푸시리라 생각이듭니다.

그리고 이제 이곳의 지휘권도 넘어갈 예정입니다. 곧 본국에서 마법진을 통해 제1기사단과 앙리 백작님이 오신다고 하니까요. 죄를 지은 저는 이제 백의종군하러 갑니다. 후우~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공작님!"

그냥 듣기에도 기운이 없어 보이는 풀죽은 목소리였다.

어젯밤부터 마법사들이 언덕 위에 부산스럽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더니 본국에서 오는 추가 파병 때문이었다. 미트랑 군단장의 말에 모든 사태를 깨달은 케론스 공작도 얼굴을 굳혔다.

그도 예상을 했지만, 설마하니 전투 중에 지휘관을 교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앙리 백작이라면 골수 황제 추종자였다.

케론스 공작이 운신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었다. 본국에 있는 롯셀리니 추기경이 얼마나 난리를 칠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착잡한 심정으로 마법진을 바라보던 케론스 공작은 롯셀리니 추기경의 성정으로 보건데, 지금쯤 자신에게도 처벌이 내려와야 하는데 너무 조용한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가슴을 흔드는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말들의 투레질 소리와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화살의 사정거리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로베니아의 대군이 진군을 멈췄다.

휘이이잉!

스산한 바람이 로베니아군과 템즈강 사이로 지나갔다.

전운(戰雲)이 감도는 가운데 로베니아의 진영에서 한 필의 말과 병사가 걸어 나왔다.

"들어라! 어리석은 케린버그의 병사들아, 감히 너희들이 우리 대 로베니아 제국의 신성한 군대에 그 간악한 이빨을 드러냈으나, 위대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너희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당장 성문을 열고 목숨을 구걸한다면 능히 자비를 베풀 것이되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집한다면 케린버그에는 향후 100년 동안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게 될 것이다."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한 로베니아 병사의 어눌한 공용어가 로이든 성벽의 템즈강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말이 좋아서 항복이지 쉽게 말하자면 손들고 안 나오면 모두 죽이겠다는 말이었다.

쉬운 말을 어렵게 하는 로베니아를 보고 외인부대원들이 킬킬거렸다.

워낙에 같이 힘들게 구르면서 훈련 받고 전투를 치르다보니 병사들과 장교들의 성격이 비슷했다.

사관학교 같은 것이 없다 보니 모두 야전군인들 스타일이 되어버려서 하나같이 걸걸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베니아의 전령이 말을 끝내자마자 에밀이 고개를 내밀고 욕설을 퍼부었다.

"병신, 삽질하고 있네!"

"우하하하하하!"

평소 호크가 훈련소에서 늘 훈련병들에게 하던 말인데, 이제 웬만한 병사들은 생활용어로 다 쓰고 있었다.

다만 로베니아에서만 한동안 뜻을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비웃음이 가득한데 그 뜻을 모를 리가 없었다.

로베니아 진영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아크라스 남작이 검을 높이 뽑아 들었다.

말들도 그런 기분을 눈치 챘는지 흥분하여 투레질을 몹시 많이 했다.

어느새 옆에 자리한 미트랑 백작과 눈이 마주치자 아크라스 남작의 검이 앞으로 숙여졌다.

궁기병들의 활시위가 손을 떠났다.

투두두퉁!

현이 울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장대비처럼 로이든을 향해서 쏟아졌다.

대부분이 성벽을 넘어서 성 안으로 떨어졌다 간간히 성벽의 모루에도 떨어졌지만, 이미 방비하고 있었다.

모루와 모루 사이마다 철로 만들어진 벙커(bunker)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다. 벙커 속에 있는 부대원들은 귀청이 떨어질듯 시끄러운 금속음 내며 벙커의 천장을 두들기는 소리에 간담이 서늘했다.

벙커에 뚫린 곳으로 로베니아의 궁기병들이 화살을 쏘아 올리는 것이 보였다.

"저 새끼들 정말 더럽게 많이 쏘아 올리네. 젠장, 저걸 그냥 확! 성질대로 한번 붙어봐?"

"진정하세요, 중사님. 그랬다가는 군법회의 감이라고요. 아니다. 전시의 명령 불복종은 총살입니다. 그것도 그 자리에 즉결 처형이라고요.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좀 참으세요!"

중대 병사들이 겨우 붙들어 말렸지만, 평소 성질이 불같은 선임하사가 길길이 날뛰자 중대원들만 죽을 맛이었다.

"이것들을 전부 확 불살라버려야 하는데, 응?"

있는 성질 없는 성질부리던 캐논포 포병대대 2중대 선임하사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위험해!"

분통을 터트리던 선임하사의 몸이 쓰러졌다.

머리만 빼놓고서 벙커 안으로 들어온 선임하사의 시체를 보고 부사수가 기겁했다.

뜨거운 열기가 벙커를 덮쳤다.

쿠아앙!

로베니아의 마법사들이 선공을 시작했다.

궁기병의 화살 공격에 이은 마법사들의 화염(火焰)계 마법공격은 그야말로 멋진 시간차 공격이었다.

세상을 다 태워버릴 고열이 성벽 위를 휩쓸고 지나갔다.

"콜록! 콜록! 카악~ 퇫! 후아! 죽다 살아났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에밀이 벙커에서 기어 나왔다.

다른 벙커에서도 병사들이 뛰쳐나와 몸에 물을 뿌리고 열기를 식히느라 법석이었다.

그나마 계절이 겨울이라서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적의 공격을 받기도 전에 벙커 안에서 고기구이 신세가 됐을 거다.

"소령님, 제법 피해가 큽니다."

"뭐야?"

부관의 보고에 에밀의 고개가 돌아갔다.

"또 옵니다. 엄폐, 엄폐! 벙커 안으로!"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며 부대원들이 벙커로 번개처럼 기어들어갔다.

또다시 무시무시한 폭음이 성벽 위에서 터져 나왔다.

"쿠아아아!"

지옥의 화염이 뱀의 혀처럼 불꽃을 날름거리며 로이든의 성벽을 유린했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마법사들도 마나를 보충해야 합니다."

"좋아! 녀석들도 혼쭐이 났을 거다. 장갑기병 앞으로!"

미트랑 백작의 검이 앞으로 향하자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로이든의 성을 향해서 다가왔다.

"생각보다 성벽이 견고한 것 같습니다. 저 정도 공격이면 어디 한군데 정도는 무너졌어야 정상인데요."

아크라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미트랑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방어 마법이 걸려 있어! 케린버그에 이 정도 마법사라니 사이클론이라고 했던가?"

"네, 그런 고위 마법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혼자 힘으로 이렇게나 견고한 방어 마법을 걸다니 놀라운데요."

아크라스가 로이든의 성벽을 흩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트랑이 말고삐를 잡아채며 얼굴을 굳혔다.

"아니면, 그 이상이든지."

"네?"

반문하는 아크라스를 뒤로하고 미트랑이 앞으로 나갔다.

그 앞으로 몇 차례 무서운 공격을 선보인 로베니아군이 굉장한 기세로 진군했다.

로이든의 성벽 위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켁! 컥! 카학!"

외인부대원들이 벙커에서 쏟아져 나왔다.

놀랍게도 그런 엄청난 마법공격에도 살아남은 병사들이 많았다.

모두들 벙커에서 나온 다음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냈다.

각 부대 장교들이 피해 상황을 점검했다.

"2대대 3대대에서 3개 소대가 전멸했습니다."

"뭐야? 왜?"

부관의 보고에 에밀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그것이 아마도 벙커의 문을 열어 놓고 있었나 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젠장!"

에밀의 주먹이 벽을 쳤다.

전사(戰死)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이런 경우는 개죽음이었다.

싸워 보기도 전에 실수로 소대 전체가 전사하다니, 이것은 자신의 책임이기도 했다.

아까운 자원이 전투도 하기 전에 전사한 것은 아주 큰 전투력 손실이었다.

현장의 지휘관이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이었다.

"제길, 부대장들에게 전달해라. 더 이상의 전투력 손실은 금한다고. 서둘러 캐논포를 정비해라. 당한 만큼 돌려줘야지!"

이를 가는 에밀의 모습은 진급하여 지휘관이 되자 그 불같던 성정이 많이 변해 있었다.

아마도 예전 같았으면 검을 꺼내들고 성벽을 뛰어 내려가고도 남았을 일이었다.

"대대별로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입니다. 캐논포 발사 준비 완료입니다."

에밀이 이를 가는 사이 공격 준비를 마친 부대별로 보고가 들어왔다.

길게 늘어선 성벽 모루 위의 1사단 병력들이 로베니아의 거센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의를 불태웠다.

순식간에 많은 전우들을 잃었지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캐논포에 카트리지들이 장착되면서 벙커 안의 캐논포들이 목표를 향해서 움직였다.

로베니아 장갑기병들이 하얀색 깃발을 지나자 거리를 잰 캐논포 대대에서 에밀의 목소리가 마나통신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모두 발사해라. 적 장갑기병의 씨를 말려버려!"

에밀의 명령이 내려지자 벙커안의 캐논포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캐논포가 불을 뿜었다.

콰콰쾅!

대지를 찢는 소리가 검은 연기구름과 함께 울려 퍼졌다.

로이든 성벽 위에서 두 번째 캐논포들이 로베니아군을 노리고 쏘아지자 템즈강 앞이 불바다로 변해 버렸다.

살이 타는 내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젠장, 콜록! 캐논포의 약점은 저 연기라고 몇 번이나 개선을 요구했는데 아직도 이 모양이... 뭐야 어디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는 거야?"

에밀이 매캐한 연기에 눈물을 흘리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오자 놀라서 고개를 내밀었다.

"젠장! 한 번 당해 봤다. 이건가? 역시 로베니아는 쉽지 않아. 세린디아와는 차원이 달라."

연기가 걷히면서 드러나는 광경은 무척이나 놀라웠다.

지팡이를 손에 든 남자들이 앞에 나섰는데 한눈에 봐도 마법사들이었다.

조금 전에 성벽 위를 화염마법으로 공격한 것은 저들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연기가 이쪽에도 불리했지만, 저들의 발을 한동안 묶어 주리라고 생각했던 에밀에게 마법사들의 출현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캐논포의 집중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을 노린 공격의 성과는 미비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적 장갑기병의 절반 이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다.

투명한 우유빛 실드가 로베니아군의 방패막이를 하고 있었다.

주먹으로 성벽을 내려친 에밀이 이를 악물었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 한번 붙어볼 맛이 나지. 좋아! 어차피 우리의 임무는 적들의 눈을 최대한 오래 붙잡아두는 거잖아. 자, 어디 한 번 놀아 보자구!"

수신호를 좌우로 보내니 성벽을 따라서 죽 늘어선 벙커들이 부산해졌다.

다시금 마나통신기들이 시끄러워지자 부대원들이 모두 달려들어 캐논포의 카트리지를 바꾸고 있었다.

그 사이 로베니아의 장갑기병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활약에 고무된 장갑기병들이 길이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창 콘토를 말안장 굽쇠에서 꺼내들었다.

전투태세로 들어간 장갑기병의 위세는 콘토를 앞으로 쳐든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말들도 본능적으로 전투의 시작을 느꼈는지 발걸음이 힘찼다.

그 사이로 마법사들이 몸을 숨길 수 있는 강철 마차에 올라타고 템즈강을 건너기 위해 앞으로 전진해왔다. 이제 곧 비마스 불벼락이 떨여저 성벽이 무너져 내리면 로베니아의 군대가 로이든 안으로 들이닥쳐 학살을 자행할 것이다.

"자식들 죽을 줄도 모르고 기고만장한 꼴이라니, 그래 계속와라! 중위! 적 비마스는 기동하고 있는가?"

에밀의 다급한 외침에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부하가 대답했다.

"예, 후미에서 계속 전진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격 형태는 아닙니다."

"개새끼들, 가까이 와서 이 로이든을 불태워버리려는 심산이구나, 오냐! 그렇게 나온다, 이 말이지. 그 괴물을 빨리 사용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장갑기병이 푸른색 깃발을 통과했다.

푸른색 깃발이 성벽 위에서 펄럭이자 에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투투투투투!

종전의 화염탄(火焰彈)이 발사될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나면서 캐논포의 카트리지가 숨가쁘게 돌아갔다.

파란 공들이 하늘을 뒤덮으며 로베니아 진영으로 날아가자 마차위의 차폐막이 열리면서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또 빛을 내뿜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파란 공과 로베니아군 사이에 뿌연 우유빛 막이 비온 다음 생기는 무지개처럼 환상적으로 나타났다.

공들은 모두 그 우유빛 막에 부딪혔다.

퍽! 퍽!

튕겨나가리라 예상했던 공들이 마법사들의 만들어낸 실드(shield)에 부딪히는 순간 모두 터지기 시작했다.

실드를 만들어냈던 마법사들은 이 황당한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물 풍선이 터지듯 실드에서 부딪치며 터지는 공들을 보며 이 해괴한 현상을 보고 로베니아 지휘부도 당황했다.

"뭐하자는 거지?"

미트랑 군단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자 아크라스 기사단장도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두려워서 미쳐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크라스의 궁색한 변명에 미트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는 헤나스톤의 참사를 벌써 잊었는가? 만반의 준비를 해온 자들이야 이유 없는 공격을 할 리가 없어?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전하고 도이 남작에게 비마스가 사정거리에 들어서면 별도 명령 없이 공격하도록!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철저히 부순다! 피의 대가는 받아 내야지!"

"알겠습니다!"

미트랑 군단장의 표정에서 단호한 의지를 읽은 아크라스 기사단장은 미트랑 군단장이 케린버그에게는 끔직한 재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 케린버그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크라스 기사단장이 부관을 향해 손짓하자 명령을 전해 받은 전령이 비마스 전대로 향했다.

"도이 남작님! 사령부에서 전령입니다."

비마스 사이에서 달리고 있는 전차 위에 백발의 기사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은 채 두 발로 서서 바람에 맞서고 있었다.

전령이 전차 옆으로 나란히 달리며 명령을 전달하자 전차가 서서히 멈추었다.

"훗! 아주 싹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군. 하기야 대로베니아 제국의 병사들이 죽어나갔으니 당연히 그 피의 대가는 받아내야지. 피는 피로서 말이야."

8마리의 마차가 모는 전차가 멈추자 비마스들도 일렬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전차 위에 병사들이 깃발로 신호를 보내는 것에 따라서 비마스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 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군. 전투준비로 들어간다. 비마스를 연결한다! 서둘러라! 장갑기병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기 쉽도록 로이든의 성벽을 태워버린다. 어서 서둘러!"

비마스를 담당하고 있는 도이 남작은 비마스 기동 전투에 많은 경험이 있는 백전노장이었다.

일 년 전쟁뿐만 아니라 수많은 작전에서 실전경험을 가진 베테랑이었다.

당연히 그의 수하들은 능숙하고 매우 민첩하게 비마스들을 통제했다.

뒤를 따르던 전차들이 멈춰서고 그 안에서 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차 몇 대를 연결하자 훌륭한 임시 막사로 변했다.

여러 개의 단상을 기준으로 나무상자에 수정구슬들이 펼쳐지면서 수정구에 영상들이 들어왔다.

수정구 한 개당 비마스 한 대였다.

일종의 네트워크 통신망이었다.

전투 시에만 사용되는 연락망이었다.

이것을 두고 그들은 비마스를 연결한다고 표현했다.

열 기의 비마스가 자리를 잡아가자 기세가 대단했다.

등에 깃발을 꽂은 병사들이 비마스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이어서 전차의 천장이 열리며 의자가 높이 솟아올랐다.

의자에 앉은 병사들의 등에도 깃발이 꽂혀 있었다.

병사들이 푸른색 깃발을 흔들었다.

"남작님, 유효사거리입니다."

부관의 보고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도이 남작이 손뼉을 쳤다.

"좋아, 평소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됐어. 좋은 출발이다. 전 기 공격준비! 비마스를 기동하라!"

도이 남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비마스의 몸체에서 귀를 거슬리는 기계음이 흘러나오며 상판 부분이 개폐되자 헤나스톤에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던 예의 촉수들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 촉수에서 나오는 엄청난 위력이면 로이든 성벽은 순식간에 녹아내릴 것이 분명했다.

케린버그 최대의 위기 순간 이었지만, 이 위기를 뒤집는 대반전의 시작이 에밀 소령의 캐논포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실드가 걷힙니다!"

마법사들도 무작정 실드를 만들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별다른 위험도 보이지 않자 실드를 걷어내는 순간, 실드에 공들이 부딪혀 터지면서 그 속에서 나온 가루들이 실드위에 쌓여 있다가 실드가 걷히자 로베니아 병사들 위로 쏟아졌다.

꽃가루가 날리듯 가루가 쏟아져 내리자 병사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들 갑옷 위로 떨어진 가루를 손으로 만져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파란 공이 터지며 나온 것은 가루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액체가 비처럼 흘러 내렸다.

한쪽에서는 가루가 한쪽에서는 액체가 쏟아지며 가루와 액체가 뒤섞여 내리자 장갑기병들이 진군을 멈추고 냄새를 맡아보기까지 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자 천인장과 백인장들이 뒤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진군 중에 명령도 없이 멈추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덕분에 장갑기병들이 다시 진군을 시작했지만, 다들 속으로 별 싱거운 녀석들 다 보겠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이었는지 곧 모두 알게 되었다.

"공기 중 자연 산화하고 산화열이 축적되어 발화하는 물질이 얼마나 많은지 몰랐던 것이 너희들의 실수다. 전성유(해바라기기름, 정어리기름. 아마인유, 들기름, 동유 등), 반건성유(채종유, 면실유, 옥수수기름, 대두유 등)가 적셔진 다공성 가연물, 원면, 석탄, 황철광, 금속분들, 니트로셀룰로오스, 셀룰로이드류, 니트로글리세린 등의 질산에스테르류로 변해서 물질이 주위의 기체를 흡착하고 그때 생기는 흡착열이 축적되어 발화하는 물질 탄소분말류(유연탄, 활성탄, 몰탄분말), 가연성 물질에 촉매제가 혼합되면 상상을 불허하는 일이 벌어지지."

사령실의 모니터를 지켜보던 김재덕 대령의 입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무기가 캐논포로 쏘아지는 것을 지켜본 대령이 가루와 액체의 혼합물이 로베니아 병사들을 뒤덮자 승리를 확신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마법사가 부족한 외인부대를 위해 개발한 새로운 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영상을 지켜보던 김재덕 대령의 입에서 그리고 성벽의 모루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에밀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외인부대원들이 스패로우를 들고 적 진영을 향해 발사했다.

화살에는 화살촉 대신 검은색 구체가 달려 있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로베니아 장갑기병들은 당연히 방패를 들어 화살들을 막으려 했다.

캉!

"후으으으-욱!"

스패로우르 떠난 화살이 로베니아의 기병의 방패에 부딪히는 순간 불꽃이 일어났다.

악마가 숨결을 토해내는 소리처럼 소름끼치는 괴성이 로베니아 장갑기병 진영의 끝에서 끝으로 뱀이 스쳐지나가듯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의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갑자기 밑에서 솟구친 불길이 불새가 날아오르듯 순식간에 타올랐다.

"끄아아악!"

"살려줘!"

목불인견의 참상이 템즈강 주변에서 일어났다.

말과 사람이 함께 불타오르는 광경은 처참했다.

불붙은 말과 병사들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어찌 해보고 말고도 없었다.

보통 불길이 아니었다.

너무도 빨리 강한 불길이 막아낼 겨를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불길이 퍼져나갔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가루와 액체가 무서운 화마(火魔)가 되어 자신들을 집어 삼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순식간에 로베니아 진영이 무너졌다.

불에 놀란 말들이 날뛰는 것이 가장 힘든 문제였다.

기사들이 투입되어 말들을 베어 넘겼다.

그리고 성한 병사들이 모포를 들어 불이 붙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나마 마법사들의 수가 많다는 것이 로베니아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

마법사들이 서둘러서 불을 진화하고 나섰다.

아쿠아 마법과 윈드 마법이 여기저기서 펼쳐지자 불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얀 연기가 잿더미 위에서 솟아오르자 이를 지켜보던 미트랑 군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불길이 가라앉자 드러난 광경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베니아의 막강 장갑기병의 전투대형이 가운데 이빨 빠진 것처럼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난번에는 시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재만 남았다.

"젠장! 이제 정말 내 목을 내놓는 수밖에 없겠군."

눈앞의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지만, 살 타는 내음이 코를 찌르며 미트랑 군단장을 괴롭혔다.

곳곳에서 기사들과 장수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장을 수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재앙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투투투퉁!

로이든의 성벽 위에서 에밀의 1사단이 스패로우를 무차별 난사하기 시작했다.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채 몸에 붙은 불을 끄기도 전에 온몸에 화살을 박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로베니아의 장갑기병들이 쓰러져 갔다.

창, 검을 막아주는 든든한 장갑옷이 오히려 죽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장갑의 무게 때문에 바닥에 쓰러진 로베니아의 장갑기병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 이... 개 같은 경우가......."

미트랑 군단장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그뿐이었다.

고삐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마스는 아직 멀었단 말이냐?"

"이제 곧 공격을 시작할 것입니다."

아크라스 기사단장도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리멸멸하고 있는 병사들을 보며 미트랑 군단장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기사단들도 스패로우의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궁기병들이 아무리 화살을 날려도 성벽 위에서 스패로우를 쏘아대는 외인부대에게는 강철 벙커가 방패막이를 해주고 있었다. 로베니아 궁기병들이 쏘아 올린 화살은 속적이 튕겨 나갔고 반대로 몸을 숨길대가 없는 로베니아 병사들은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제국 로베니아를 상대로 승기를 잡자 모두들 흥분했다.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단 전체로 퍼져 나갔다.

거대 제국 로베니아를 상대로 당당하게 싸우는 자신들이 대견하게 여겨진 것이었다.

스패로우의 카트리지를 바꿔 끼우는 병사들은 힘이 드는지도 모르고 전투에 집중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위에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하나둘 별처럼 빛나던 것이 은하수처럼 많이 빛을 냈다.

"소령님! 전방에 이상한 물체가 보입니다."

"나도 보고 있다. 도대체 저게 뭐야?"

에밀은 왠지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곧이어 그 반짝거림은 성벽의 길이만큼 늘어났다.

섬뜩한 기운이 에밀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사격 중지! 모두 벙커 속에서 나와! 어서! 몸을 피해라!"

에밀이 다급하게 마나통신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난데없는 명령에 벙커 안에 있던 1사단 병사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별들을 보았다.

"빌어먹을!"

에밀의 입에서 절망스런 탄식이 흘러 나왔다. 대낮에 별들이 소나기처럼 성벽위로 쏟아졌다.

"위생병!"

"으아악! 내 팔!"

"소대장님! 살려주세요!"

승리의 분위기에 휩싸였던 외인부대 1사단은 성벽아래의 로베니아 장갑기병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대단위 마법공격에 1사단은 궤멸 지경에 이르렀다.

온몸이 찢겨진 시체들이 성벽 위에 즐비했다.

팔다리를 잃고 괴로워 신음을 흘리는 부상들이 즐비했다.

"선임하사! 부상자들을 확인해! 선임하사! 선임......."

끔찍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어느 중대 중대장이 자신의 선임하사를 애타게 찾다가 무릎을 꿇었다.

얼음 조각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져 있는 선임하사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명이 끊이지 않았고 로이든의 성벽 위는 지옥을 연출했다.

"뭐였나? 도대체 그게 뭐였어?"

얼마나 놀랐는지 나형석 장군이 벌떡 일어났다.

놀란 것은 나형석 장군만이 아니었다.

사령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것은 인간이 감당해낼 공격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1개 사단 병력을 날려버린 공격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밖에 없었다.

찰스 국왕을 비롯한 케린버그 귀족들도 너무 놀라 보고도 자신들의 눈을 믿지 못했다.

"미티어 스텀(Metear Storm)! 인간 살육자 말도르!"

로스웰 백작이 손을 덜덜 떨면서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오랜 세월 전장에서 살아온 백전노장이 공포에 떨고 있었다.

너무나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혼잣말만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는 거지? 어떻게 저 괴물이 죽지도 않고 살아 있는 거야?"

로스웰 백작의 모습이 순식간에 어린 십대 소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잘 보거라, 로스웰! 저것이 바로 제국의 힘이란다!"

어린 로스웰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꼭 붙들고 전장에 서 있었다.

로스웰이 서 있는 언덕 아래에서 로베니아 제국과 레센 제국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백발의 머리를 흩날리며 전장의 하늘에 우뚝 솟아 오른 노인이 있었다.

어린 로스웰의 눈에는 처음 보는 마법사의 모습이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그러나 초롱초롱했던 눈망울이 두려움에 떨며 할아버지 뒤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하늘에 떠오른 마법사가 두 손을 펼치자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로스웰은 무서워서 꼭 붙들고 있던 할아버지의 몸도 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집어 삼키듯이 어린 로스웰은 소리 내어 울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60년이 지났는데도 저 괴물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말인가, 아직도......."

노회한 로스웰 백작은 기운을 잃었는지 맥없이 의자에 몸을 던졌다.

"미티어 스텀! 저것이 정말 사실이었다니, 이럴 수가!"

찰스 국왕마저 의자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사령부 상황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실내를 감쌌다.

"무슨 일입니까? 누가 좀 설명해주세요!"

핏발선 눈으로 김재덕 대령이 로스웰 백작의 어깨를 흔들었다.

"말도르... 살육자 말도르......."

로스웰 백작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의미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말도르, 나이가 몇 살인지 어디 출신인지 말도르라는 그 이름도 맞는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로베니아의 수호신이라고 불리는 인간 살육자 말도르, 인간의 영혼을 먹고 산다는 괴물! 어둠의 마법사 말도르라고 불리는 자요"

찰스 국왕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밀고 밀리는 공방을 보며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들떴던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사령부의 상황실은 이미 패배감으로 가득했다.

귀족들도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놈들에게 어둠의 마법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백색의 마법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김재덕 대령이 의기소침한 귀족들에게 일침을 가하며 벌떡 일어섰다.

나형석 장군도 거들며 나섰다.

"그렇습니다. 벌써 포기하기는 이릅니다. 우리에게는 사이클론님이 계십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세린디아에서 이곳으로 오고 계실 겁니다."

"성벽 위에 사이클론님과 챠챠 대위가 나타났습니다."

오페레이터의 말에 실내 공기가 급변했다.

7써클의 마법사, 바람의 마법사 사이클론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희망의 빛을 보고 환호했다.

나형석 장군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부탁드립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됩니다. 신이 계시다면 저희에게 조금의 행운을 부탁드립니다.'

나형석 장군의 애절한 기도가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쿨럭! 제... 제엔장... 중위, 어서 피해 상황을 점검해. 반격... 해야지"

"소령님! 정신 차리세요! 소령님!"

"아, 일어나야 하는데, 젠장 자꾸 졸음이 와. 자면 안 되는데 잠들면... 안 되는......."

1사단을 책임지고 있던 에밀 소령의 고개가 한쪽으로 꺾였다.

"소령님!"

에밀을 지혈하고 있던 부관이 울부짖었다.

뒤늦게 위생병들이 뛰어왔지만, 이미 혼이 빠져나간 육신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잉글햄의 호무관에서 시작된 그의 새로운 인생도 로이든의 성벽위에서 그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비켜! 소령님! 소령님! 젠장!"

챠챠 대위가 에밀을 흔들어 보았지만, 시신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세린디아에서 방금 도착한 특임대 대원들이 빠르게 1사단의 빈자리를 메웠다.

사이클론은 숨을 거둔 에밀의 이마에 성호를 그어주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하고 후회해보았자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현실은 현실일 뿐 지금은 전투가 우선이었다.

몸을 돌려 세운 사이클론의 눈에 로베니아 진영에서 느껴지는 검은 마나의 이질감에 눈살을 찌푸렸다.

"늙은 괴물! 죽지도 않나?"

사이클론의 눈에서 분노가 솟아올랐다.

"말도르님을 뵙습니다."

미트랑 군단장이 말에서 뛰어내려 고개를 숙였다.

오로지 황제에게만 고개를 숙인다는 제국의 수석 마법사 말도르 앞에서 미트랑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마치 죽음으로 만들어진 존재 같았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느낌은 어둡고 음침하며 사악했다.

"끌끌끌, 로베니아의 병사들이 이렇게 많이 죽다니,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일인가? 지난 일 년 전쟁 때만큼이나 엄청나잖아. 그러나 그 때는 상대가 제국이었지, 오늘의 상대는 겨우 변방의 왕국! 이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 황제 폐하의 분노를 어찌 감당하려는가?"

미트랑 군단장을 조롱하듯 말하는 말도르는 한가롭게 전장을 거닐었다.

그 뒤로 중무장한 기사들이 나타났다.

"앙리 백작!"

"네, 말도르님!"

발렝 황제의 특명을 받은 앙리 백작과 제국의 스카라무슈들이었다.

"그대가 이 전투를 책임져야겠군. 나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황제 폐하의 뜻을 잘 알고 있겠지, 앙리 백작!"

"네, 심려 마십시오."

"그대를 믿지."

앙리 백작의 배웅을 받으며 천천히 사라지는 말도르는 소풍을 나온 노인처럼 백발을 흩날리며 로이든의 성을 향해서 걸어 나갔다.

그런 그의 눈에 성벽 위에 서 있는 사이클론이 들어왔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혔다.

"애송이가 많이 컸군!"

흑과 백, 어둠과 빛의 싸움은 눈싸움부터 시작되었다.

"미트랑, 그대는 이 원정군의 패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 한다. 기간은... 죽음이 그대를 인도할 때까지다!"

어느 정도 예감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에 대한 처벌이 내려지자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유능한 지휘관이라고 할지라도 자신과 결과는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린버그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대제국 로베니아라고 할지라도 이 전쟁에서 쉽게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트랑 군단장에게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인장과 문장을 떼어 버렸다.

이제 그는 죽을 때까지 제국을 위해 싸워야 하는 죽음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잠시 감았던 눈을 뜨고 가슴에 손을 대는 기사의 인사로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기사로서 마지막 하는 인사일 것이다.

그를 보는 기사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이를 안 앙리 백작이 소리를 질렀다.

"아크라스, 그대가 장갑기병을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해라. 비마스가 공격을 개시하는 것과 동시에 로이든에 진입한다. 더 이상 성벽 위에서 공격은 없을 것이다. 말도르님이 아예 성벽을 없애 버리실 테니 모두 전투태세를 확립하라!"

앙리 백작의 명령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전투는 이제 그 끝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도이 남작! 상황은 알아들었겠지. 서둘러서 움직이게. 날이 저물기 전에 오늘밤은 로이든에서 보내고 싶네."

수정구를 통해서 전해지는 앙리 백작의 말에 도이 남작은 오히려 반기는 표정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하하하, 다시 백작님과 함께하니 기운이 샘솟습니다. 그때처럼 한바탕 휘저어봅시다."

그동안 일선에서 같이 싸워온 전우인 앙리 백작이 도이 남작에게는 미트랑 군단장 보다 훨씬 반가웠다.

인텔리 출신인 미트랑 군단장 보다야 전장에서 같이 싸워온 앙리백작이 말도 잘 통하는 상대였기 때문이었다.

"1호기부터 10호기까지 모두 대기 완료입니다."

부하들의 보고에 도이 남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럼 불꽃놀이를 시작해 볼까?"

도이 남작의 말에 깃발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비마스 사이에서 깃발을 든 병사들과 전차의 전망대에 앉아 있는 병사들의 신호가 금세 전달되었다.

깃발의 흔들림이 순식간에 멈추고 적막이 찾아왔다.

"좋아, 시작은 제일호기부터... 으웃!"

두드드드드드!

도이 남작의 입이 열리려고 하는 순간, 지축이 흔들렸다.

"뭐, 뭐야?"

"땅이, 땅이 흔들립니다. 으헉!"

지진이라도 난 걸까?

비마스 전대가 무차별로 흔들렸다.

전차들이 흔들리며 쓰러졌다.

순식간에 전차대 진영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 무슨 괴변인가? 아니, 저, 저!"

도이 남작의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땅속에서 괴물이 솟아 나왔다.

괴물은 괴물인데 너무나 익숙한 괴물이었다.

그래서 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로베니아의 주력 기동장비인 기간테스였다.

그것도 한두 기가 아니었다.

무려 이십여 기의 기간테스들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도이 남작으로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땅속에서 나타난 기간테스들이 비마스를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부숴버리는 것이었다.

"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수하들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규하는 도이 남작을 아군 진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놔라! 이놈들아, 놔라!"

"남작님, 포기하십시오. 기간테스는 기간테스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몸을 피해야 합니다."

"으아아악! 어떻게 저런 미개한 것들이 기간테스를... 이건 말도 안 돼!"

질질 끌려가는 도이 남작을 뒤로하고 위용을 자랑하던 비마스 전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중령님! 오른쪽의 비마스들이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뭐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방향을 틀었지? 헤나스턴 계곡에서는 몇 배는 더 오래 걸렸잖아!"

호크가 탑승한 기간테스 엥귀오스가 흑검을 꺼내들고 땅위를 날았다.

이제 막 선회를 끝낸 비마스에게 무서운 빛줄기들이 뿜어져 나왔다.

쿠하악!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광선처럼 내뿜어진 빛줄기가 엥귀오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비마스 위로 떨어진 엥귀오스의 흑검이 빛을 갈랐다.

전신(戰神)이 있다면 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일 것이다.

비마스의 촉수를 잘라내며 흑검을 휘두르는 묵(墨)빛의 기간테스는 전율스러웠다.

"중령님, 비마스의 공격에 1, 8, 11호기가 당했습니다. 순식간에 녹아 내렸습니다."

"젠장"

호크의 엥귀오스가 마지막 비마스를 고철로 만들고 나서 몸을 돌렸다.

걸을 때마다 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조금 더 훈련을 했더라면 모두 살 수 있었을 텐데,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말이야."

엥귀오스가 녹아내린 기간테스의 잔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파괴된 기간테스가 남긴 검을 들어 땅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편히 잠들어라......."

엥귀오스에 탑승한 호크의 슬픔이 통신기를 통해 다른 기간테스에 탑승한 조종사들에게 전해졌다.

새롭게 개조된 외인부대의 기간테스 기동전단이었다.

탑승자의 마나와 생명을 갉아먹는 기간테스의 시스템을 김재덕 대령의 현대과학과 사이클론의 마법 그리고 드워프의 손기술에 마지막으로 새로운 조력자들인 두 드래곤의 손길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방식의 기간테스였다.

마나석을 연료로 소모하며 가슴속의 콕피트를 개조했다.

현대의 건설 장비의 동작 원리를 응용해서 개조한 조정석에 앉은 탑승자는 마나를 뺏기거나 생명을 빼앗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기간테스의 의지력을 없애버렸다.

완벽하게 수동으로 움직이는 로봇화한 것이다.

그동안 철저한 비밀 속에 훈련을 하고 있었다.

호크가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장담한 것도 다 이 기동전대를 믿고서 한 말이었다.

멀리서 달려오면 비마스에게 당할 가능성 있어서 비마스가 기동할 예상 위치에 미리 땅을 파놓고 그 속에 숨어 있다가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작전을 개시한 것이었다.

이번 전투의 분수령은 비마스를 제압하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아군 기간테스 3기를 잃은 호크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다.

조금 더 훈련을 받고 기체에 익숙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큰 산을 넘은 것은 사실이었다.

무전을 통해 성벽 위를 사수하던 1사단의 피해를 전해들은 이들의 마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중령님, 3사단이 D포인트를 통과했답니다. 이제 곧 적의 배후를 칠 것입니다."

무전을 들은 호크의 엥귀오스도 몸을 일으켰다.

"좋아! 가자 1사단, 애들 빚을 받으러 가야지!"

호크의 엥귀오스가 검을 어깨에 걸치자 다른 기간테스들도 방패와 검을 치켜들었다.

"가자!"

비마스 전대를 괴멸시킨 외인부대의 비밀병기 기간테스 기동전대가 지축을 울리며 달렸다.

비마스 전대의 괴멸을 지켜본 로베니아 진영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저걸 믿고서 일을 벌인 거였군. 어리석은 것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면 꿈을 꾸게 된다더니 녀석들도 기간테스를 손에 넣고 꿈을 꾸었겠지. 로시텔 남작! 녀석들의 꿈이 악몽이었음을 알려주게!"

앙리 백작의 명령에 스카라무슈의 리더인 로시텔 남작이 상대를 압도하는 거구를 움직였다.

"맡겨주십시오!"

살기 짙은 그의 미소에서 성격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의 평화가 로시텔 같은 군인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전장에서 피 냄새를 맡으니 몹시도 흥분되었다.

"기사단을 반으로 나눈다. 절반은 나와 적 기간테스를 맡고 나머지 절반은 앙리 백작님을 따라서 로이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길을 튼다. 늦게 끝내는 쪽이 술을 사야 한다!"

로시텔 남작의 말이 끝나자 기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들에게 전장에서의 긴장감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자신감이 가득 차게 만드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달려오는 적군에 대한 예의는 아닌 거 같았다.

뒤에서 기간테스들이 달려오고 있는데도 로베니아의 군대는 스카라무슈들만 남겨두고 로이든 성을 향해 진군했다.

"자~ 우리도 몸 좀 풀어볼까?"

목을 꺾으며 몸을 푸는 로시텔 남작의 뒤로 마법사들이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케린버그의 기간테스 기동전단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마법진에서 낯익은 물체들이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기간테스였다.

로베니아가 자랑하는 제국의 기동병기들이 마법진에서 튀어나오자 스카라무슈들이 제각기 자신의 기간테스에 탑승했다.

순식간에 로베니아의 후방에 50여 기의 기간테스가 위용을 드러냈다.

훈련 기간이 짧은 케린버그의 기간테스 대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스카라무슈의 기간테스들간의 대결이었다.

템즈강의 들판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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