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 제국의 혼란!
"흠, 기가 막히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화... 황제 폐하! 송구스럽사옵니다. 모든 것은 저의 불찰이니 소신에게 벌을 내려주옵소서!"
대 제국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 앞에 엎드려 몸을 벌벌 떨고 있는 롯셀리니 추기경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황제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작은 계단을 내려서니 홀 안에 있던 모든 귀족들이 무릎을 꿇었다.
뚜벅! 뚜벅!
황제의 발걸음 소리가 무척이나 불안하게 들렸다.
갑자기 홱! 돌아선 발렝 황제의 얼굴은 궁금함을 못 이기고 조급해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상해! 어떻게 케린버그 같은 곳에서 우리에게 대항할 생각을 했지?"
발렝 황제는 정말 모를 일이라며 무척이나 심각해했다.
주변 귀족들이 별일 아닐 거라며 위로했지만, 그의 귀에는 그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봐, 롯셀리니 추기경!"
"네, 네에!"
화들짝 놀란 롯셀리니 추기경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살짝 들어보았다가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기겁했다.
"으헉!"
발렝 황제가 바로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폐... 폐하!"
평소와 다르게 반응하는 황제 때문에 롯셀리니 추기경 죽을 맛이었다.
케린버그의 케론스 공작에게서 전문이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이제 곧 승전보를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나 예상과 달리 어이없는 패전 소식이 들어왔을 때는 정말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자신의 귀를 후벼 파야만 했다.
이 정도 규모의 엄청난 사상자는 지난 일 년 전쟁 이후 백여 년만의 처참한 결과였다.
그동안 전쟁이 없기도 했지만, 근래에 일어난 전쟁에서 로베니아가 이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적은 결코 없었다.
오죽하면 전문을 수령하는 곳에서 몇 번을 확인하고 또 했을까?
쉬쉬 한다고는 했지만, 이미 제국 안팎으로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제국민들도 제국이 패배했다는 소식은 대단한 뉴스거리였기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퍼져 나가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제 끝난 귀족회의 때 이미 결론을 내렸지만, 발렝 황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이 들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기분 나쁜 뭔가가 황제를 괴롭혔고 계속되는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귀족들의 말대로 고개를 쳐드는 저항의 싹은 발로 밟아 응징하면 되겠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낌이 달랐다.
주변의 다른 왕국에서 일어난 저항 세력들의 반발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가볍게 여기고 있었지만, 발렝 황제의 직감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 한쪽이 서늘해지는 게 큰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다시 바닥에 박은 롯셀리니 추기경을 보고 황제는 눈을 찌푸렸다.
'뭘까? 이 기분 나쁜 느낌은? 롯셀리니, 이 작자가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걸까?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롯셀리니 추기경에게서 눈을 뗀 발렝 황제가 뒷짐을 쥐고 홀 안을 서성거렸다.
그런 황제를 보는 귀족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황제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케린버그가 전략상 중요한 요충지이기는 하지만, 대제국의 황제가 겨우 그런 변방의 조그만 왕국에서 일어난 전투에 대해서 지나치게 심각해 한다는 것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현재 이 일을 가장 냉철하고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발렝 황제가 유일했다.
롯셀리니 추기경도 그저 일을 제대로 처리 하지 못한 케론스 공작을 원망하고 있었고, 군 지휘관들도 경계를 소홀하게 해서 큰 전사자를 배출한 미트랑 군단장의 지휘 능력만 탓했다.
그러나 발렝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경계를 소홀히 했다고 하더라도 일당백의 제국군이었다.
그런 그들이 아무리 기습이었다고 해도 3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다니 그동안 제국의 전투사에서 단 한 번의 기습으로 3만의 피해란 상상조차 불가했다.
똑똑한 머리도 이럴 때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동물 같은 본능적인 직감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들어맞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이 그런 때였다.
"앙리!"
황제가 망토를 펄럭이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넵! 황페 폐하! 하명하십시오!"
앙리 샤를리앙 백작이 황제 앞으로 뛰어 나왔다.
"당장 준비 가능한 스카라무슈가 얼마나 되지?"
발렝 황제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황제의 결심을 읽은 앙리 백작이 짧게 대답했다.
"제국의 스카라무슈들은 항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황명만 내리십시오!"
황제의 말에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폐... 폐하! 스카라무슈는 갑자기 왜......?"
옥좌 아래에 위치한 의자에서 노인이 일어섰다.
"위대한... 로베니아의... 태양이신... 루이 드 발렝... 황제 페하이시여......."
힘이 부치는지 느릿느릿한 입을 떼는 노인을 보며 발렝 황제의 얼굴은 정말 보기 흉할 정도로 구겨졌다.
노인을 보며 황제는 손바닥을 돌렸다.
빨리 말하라고 재촉하는 거였지만, 세월의 무게를 짊어진 노인의 입은 듣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젠장, 저 인간 말을 다 들으려면 내가 먼저 늙어 죽겠군.'
발렝 황제의 속마음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금 폐하의 말씀은... 지나치다고... 사료되옵니다. 에... 또... 스카라무슈를... 겨우......."
"그만! 몽셀 공작의 말을 다 듣다가는 내가 늙어 죽겠소."
화가 난 발렝 황제가 몽셀 공작의 말을 잘라 버렸다.
제국의 공작이라 내칠 수도 없고 성질대로 하고 싶어도 워낙에 오래된 공신 귀족의 후속이라 그 세력이 만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껄끄러운 것은 바로 황후의 숙부라는 것이었다.
"송구스럽사옵니다. 황제 폐하, 몽셀 공작의 말은 다름이 아니라 겨우 북부 변방의 왕국을 정벌하기 위해서 이미 많은 군대를 보냈는데 겨우 한 번의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제국의 최고 검사들인 스카라무슈를 보낸다면 주변 왕국들이 제국을 우습게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야들야들한 입술만큼이나 번지르르한 얼굴을 가진 중년 사내가 달변을 쏟아내자 여러 귀족들의 고개가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옥좌 위에 앉은 발렝 황제의 눈꺼풀은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니엘 끌로드 남작! 맞나?"
중년의 사내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발렝 황제에 비해 사내는 화살을 쏴도 비껴 나갈 것같이 느물거렸다.
"보잘것없는 소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지만, 황제의 눈초리는 여전히 매서웠다.
"기억을 못할 수가 있나... 쥐새끼들의 이름이야 늘 기억하고 있지......."
뒷말은 황제가 속으로 삼켰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만약에 크게 소리 내었다면 아마도 한바탕 난리가 났을 지도 몰랐다.
몽셀 공작을 중심으로 주변에 몰려 있는 귀족 떨거지들을 보며 발렝 황제는 하나 하나 얼굴과 이름을 맞춰나갔다.
놀랍게도 황제는 제법 많은 이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한의 몽셀 공작은 자신들을 흩어보는 발렝 황제의 눈빛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노구의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케린버그에 겁을 먹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거지?"
발렝 황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갑자기 홀 안의 분우기가 살벌해졌다.
홀 안을 둘러싸고 있는 기사들의 눈빛도 황제의 기분을 따라서 날카로워졌다.
숨 막히는 실내의 공기가 터질듯이 긴장됐다.
옥좌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황제의 손가락 소리만 조용한 실내를 울렸다.
누군가의 침을 넘기며 목울대를 울리는 소리가 홀안에 크게 들렸다.
"내가 내 병사들을 부리는 데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하나? 앙리 백작, 그래야 하는가?"
착 가라앉은 황제의 말에 앙리 백작이 몸을 더욱 낮췄다.
"아닙니다. 폐하! 이 로베니아 땅 위의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시라면 흐르는 물이라 할지라도 멈출 것입니다."
앙리 백작의 말에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앙리 백작의 말에 발렝 황제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고 몽셀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새삼 주위를 둘러보니 그의 젊은 시절과 비교해 보니 황궁은 많이 변해 있었다.
공신 귀족들과 중도 귀족파들이 군부세력을 서로를 견제하면서 제국을 이끌어가던 그 광경은 사라지고 어느덧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군인들로 대신 바뀌었다.
무력을 신봉하는 발렝 황제의 품성으로 인해 황실에는 군인들과 기사들로 넘쳐났던 것이었다.
노회한 몽셀은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든 발렝 황제의 눈빛에서 무서운 광기(狂氣)를 느꼈다.
그런 눈을 가졌던 황제는 늘 공포정치를 펼쳤다고 역사가 말해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명의 황제를 모신 몽셀 공작은 직감적으로 발렝 황제의 광기(狂氣)를 알아차린 것이다.
몸에서 기운이 빠진 몽셀 공작은 유일하게 이 안에서 의자에 앉을 수 있는 선대 황제의 폐하의 배려가 이렇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의 눈에 머잖아 피로 물들 로베니아 황실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몽셀 공작의 입이 조용해지자 발렝 황제의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좋아, 잡초는 밟아도 또 고개를 드는 법. 앙리 그대가 직접 스카라무슈를 차출해서 당장 케린버그로 보내라. 나는 케린버그에 풀 한포기 하나 남아 있기를 원치 않는다."
"네,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앙리 백작이 주먹을 들어 가슴을 쳤다.
그 뒤로 허리에 검을 찬 무장들이 소리 높여 황제를 연호했다.
귀족들은 머리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옥좌에서 일어나 무장들과 같이 주먹을 들어 가슴을 두드리는 발렝 황제는 곱상한 외모와는 달리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빛이 무서웠다.
"위대한 황제 폐하를 위하여!"
"위하여!"
기사들과 군인들이 검 자루로 바닥을 두드리며 황제를 연호했다.
군부는 100퍼센트 황제의 손에 있었다.
홀 안은 황제와 기사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진 채 황제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끝이 나 버렸다.
이전 제국회의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 * *
황제와 군인들의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공신 귀족들과 중도 귀족파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하고 회의는 황제의 결정대로 끝이 났다.
황궁의 넓은 복도를 지나는 귀족들은 한결같이 두려움에 떠는 얼굴들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귀족들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으나, 머릿속의 생각들은 비슷했다.
어느 쪽에 줄을 서는 것이 현명한 결정인지 저울질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번의 선택에 남은 인생이 결정되니 다들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삼삼오오 복도를 빠져나가는 귀족들이 다소 걸음이 늦는 몽셀 공작에게 가볍게 예의를 차린 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다니엘 끌로드 남작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아니. 감히 이것들이 어디서 이런 무례를 범한다는 말인가?"
천천히 뒤를 따른다고 해도 모자를 판에 감히 제국의 공작을 앞질러 간다니 공작 일행들의 노성이 울렸다.
비록 황제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지만, 제국의 제2인자였다.
옆을 스쳐가던 귀족들이 찔끔거리며 우물쭈물했다.
다니엘 끌로드 백작이 큰소리로 호통치려 했지만 몽셀 공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후후, 다 소용없는 짓이야. 소용없는 짓이라고."
"공작님,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다니엘 끌로드 백작이 놀란 얼굴을 하고 몽셀 공작에게 눈을 맞추었다.
노구의 몽셀 공작이 잠시 몸을 멈추더니 다니엘 끌로드 백작에게 손짓을 했다.
"가까이......."
얼른 몽셀 공작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간 다니엘 끌로드 백작은 공작의 귓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네에? 아니, 왜 그 작자를 만나시려 합니까? 그 자는 뭔가 야심을 가진 위험한 자입니다."
다니엘 끌로드가 완곡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자 몽셀 공작이 혀를 찼다.
"욕심이 있는 사람이 포기도 모르는 법이지.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손잡을 상대는 롯셀리니 추기경뿐이야. 평소라면 우리가 내민 손을 뿌리치겠지만, 황제의 눈 밖에 난 지금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 은밀하게 사람을 보내게 우린 지금 그 자가 필요해. 그 자의 속내도 알아볼 겸 말이야."
노구의 몽셀 공작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백전노장의 얼굴에서 아무런 것도 찾아내지 못한 미셀 끌로드가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지만, 그 자는 악마의 후손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자의 영지에서는 어린아이를 재물로 바친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위험한 자입니다. 소신은 너무 걱정이 되옵니다."
"자네의 걱정은 이해하고도 남지만, 지금은 모험을 할 때야! 서둘러 주게!"
고개를 숙인 다니엘 끌로드의 어깨를 두드린 몽셀 공작이 비장한 표정을 하고서 노구를 이끌고 복도를 빠져나갔다.
뒤에 남겨진 다니엘 끌로드 백작의 귀로 작게 중얼거리는 몽셀 공작의 말이 들렸다.
"악마이면 어떻고 천사이면 어떠하리. 내 내라를 건질 수 있다면 모래라도 못 씹어 먹겠는가?"
몽셀 공작의 깊은 뜻을 헤아린 다니엘 끌로드 남작이 멀리 사라지고 있는 몽셀 공작의 뒤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 뒤로 저녁놀이 복도의 햇살을 쫓아내며 밤을 재촉했다.
조용하던 제국의 황실에 작은 파랑이 일고 있었다.
100년이 넘게 지속되어 오던 평화가 너무 길었을까.
슬그머니 다가온 어두운 그림자가 로베니아의 한 귀퉁이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 * *
"황후 마마! 몽셀 공작이시옵니다."
"안으로 뫼시게!"
화려한 실내 장식은 그만두고서라도 기품 있는 여인들이 둘러앉은 방안은 마치 아름다운 장미 꽃밭 같았다.
그 중에서도 유독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는 꽃이 있었다.
발렝 황제의 아내이며 로베니아 제국의 제일 황후 앙뜨네트였다.
고고한 자태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는 여인이 초로의 노인을 보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숙부님!"
"그간 소원하였습니다. 황후마마, 소신의 불충이 크옵니다."
몽셀 공작의 고개가 숙여지자 황후를 제외한 여인들이 모두 일어나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고 몽셀 공작에게 인사했다.
몽셀 공작도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몽셀 공작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두 눈을 감자 황후도 몽셀 공작의 의도를 알아채고 주위를 물렸다.
잠시 후 시종들이 자리를 비우고 황후와 몽셀 공작만 자리에 남게 되자 감고 있던 그의 눈이 뜨였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황후 마마! 제국의 초생달이.....초생달이.....떴습니다."
입가로 가져가던 찻잔을 내려놓은 황후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확실한가요? 아니 확신하세요?"
무릎에 위에 올려놓은 찻잔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몽셀 공작의 입에서 작은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미 선을 넘어섰습니다. 최근 들어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몽셀 공작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은커녕 황제의 얼굴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애시 당초에 여자보다 남자를 좋아하는 발렝 황제는 그녀와의 잠자리보다는 피를 튀기는 남자들의 싸움을 좋아했다.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연약한 신체를 타고 났다.
하얀 피부와 곱상한 외모는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지는 몰라도 발렝 황제에게는 지옥의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나름대로 우수한 검술 선생을 초빙해 검술도 익혀보았고, 좋다는 약이나 운동은 다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저주 받은 육체는 시간이 갈수록 여성스러워졌고 얼굴에서는 남자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근육질 육체에 대한 발렝 황제의 집착은 거의 병적이었다.
황제의 친위대 기사들을 보면 모두 근육질의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성향 덕에 그는 문신들보다 무신들을 가까이 했고, 그의 병적 집착은 역대 최대의 스카라무슈를 만들어내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다른 왕국은 기껏해야 한 명 또는 그나마 있지도 않은 소드마스터가 300여 명이나 있었다.
모두가 황제에게만 충성을 맹세한 사병조직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중도 귀족파들은 유약했고 황제의 권력은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쓸모없이 밥만 축내는 귀족들은 하천에 쓸어버리자는 시민들 사이에서 나오는 농담은 귀족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시민들의 여론은 발렝 황제의 일인 독재 통치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미 군부는 황제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오늘 회의 시간에 발렝 황제의 눈빛은... 샤를르트 대제의 눈빛 같았습니다."
딸칵!
황후의 손에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카페트 위로 떨어져 잔이 깨지지는 않았지만, 찻물이 그녀의 드레스를 더럽혔다.
그러나 앙뜨네트 황후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샤를르트의 초생달이.....또 다시...."
치맛자락을 움켜쥔 앙뜨네트 황후의 뺨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지난날의 비극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황후 마마!"
몽셀 공작이 황후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이 순간 만큼은 황후와 제국의 공작으로서가 아닌 숙부로서 부탁을 하마. 또다시 그 비극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중간계의 모든 생명체는 끝장이 날 거야. 네가 결정해야 해, 모두를 위해서."
"숙부님......."
몽셀 공작이 힘주어 말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원치 않았던 황후의 자리, 순탄치 않았던 하루하루, 행복하지 않은 그녀의 인생에, 또다시 잔인한 운명이 끼어들었다.
"이제는 내 손으로 지아비를 해치라는 건가요? 그게 왜 저야만 하는데요. 왜요!"
그녀의 작은 어깨가 몹시도 떨렸다.
공작은 깊은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미안하다. 얘야, 너에게만 짐을 지우는 못난 숙부를 용서하지 말거라. 모든 죄업은 내가 짊어지고 갈 것이니, 너는 선조들의 안배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몽셀 공작의 눈가에도 이슬이 살짝 내비쳤다.
"황후 마마, 이제 곧 헤냐의 무녀들이 도착할 것입니다.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로베니아의 역사가 어떻게 쓰여 졌는지 명심하시고 대의를 위해서 고결한 선택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불충한 소신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늙은 노구를 끌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친 몽셀 공작이 물러가자 오후의 햇살이 비껴간 황후의 방 안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암시하듯이 어두운 그늘 속에 가려졌다.
그녀의 한숨도 슬픔도 방 안의 어두움과 함께 조용하게 묻혀 졌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작님! 황후께서는 달리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다니엘 끌로드 백작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황후의 처소에서 나오는 몽셀 공작에게 다가왔다.
"후~ 그 불쌍한 아이의 가슴에 못을 박고 오는 일이 성공한 거라면 걱정하지 말게나."
공작의 불편한 마음을 깨달은 다니엘 끌로드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공작의 심기가 아주 불편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
침묵 속에서 마차로 자리를 옮긴 몽셀 공작이 지팡이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마차의 진동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황성에서 마차가 멀어지자 그의 입이 열렸다.
"그래, 어떻게 되었나?"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니엘 끌로드 백작이 몽셀 공작의 귀에 공작이 맡긴 일에 대해서 보고를 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들은 몽셀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아마 모르기는 해도 그 작자 역시 똥줄이 바짝 탔을 테니까."
"고, 공작님!"
"후후, 왜 내 말이 지저분한가?"
"그런 뜻이 아니고 저는 단지......."
다니엘 끌로드 백작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한 기색을 보이자 몽셀 공작이 껄껄 거렸다.
"걱정 하지 말게. 이제부터 정말 지저분한 일들로 가득할 거야. 눈 뜨고는 못 볼 더러운 일들로 말이야."
창밖을 내다보는 몽셀 공작의 눈에 회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의 눈에 오후의 햇살이 저물어가며 곡물이 익어가는 들판이 들어왔다.
'두두두두!'
한 무리의 군마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곡물이 익어가는 들판을 내달리고 있었다.
곡물을 돌보는 농부들이 잠시 허리를 펴고 시선을 주었다가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언덕 위의 검은색 성으로 향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이곳의 불문율이었다.
"멈추시오! 누구신지 신분을 밝히시오!"
거인을 보는 듯한 거구의 기사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사람보다 큰 할버드의 도끼날이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푸른 달이 창공에 떠오를 때!"
"아크나무아(Arknamua)가 세상을 열리라!"
수신호가 오가고 말 위에 사람이 인장을 나무판에 박아서 확인해주자 육중한 성문의 도르래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성문을 들어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문이 반쯤 열리자 말들은 재빠르게 성 안으로 달렸다.
그냥 보기에도 매우 급박한 일들이 발생한 듯했다.
성문을 지키는 검은 갑옷의 기사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한 듯 고개를 돌려보고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죽여 버릴 거야! 감히 나에게 그런 모욕을 주다니 으으으으!"
대리석 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비단 가운을 입은 롯셀리니 추기경의 가운 자락도 바닥의 피에 젖어 있었다.
손에 걸리는 것은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는 롯셀리니 추기경은 발렝 황제에게 황성에서 당한 모욕 때문에 자신의 영지로 돌아온 다음 날부터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백여 명이 넘는 소녀들의 피로도 그의 분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방 안 한가운데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이 모두 어린 소녀들의 시체였다.
바닥에 흐르는 피는 모두 소녀들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추기경의 몸은 또다시 젊어져 있었다.
길고 긴 은발이 바닥의 피를 쓸고 지나갔다.
잿빛 피부의 추기경은 길고 긴 손톱을 아직 숨을 헐떡이는 소녀의 심장에 박아 넣었다. 손톱은 피를 빨아 들이는 빨대 같았다.
소녀의 눈빛에서 점차 생명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소녀의 몸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하더니 미이라처럼 말라붙었다.
소녀의 생명을 빨아들인 롯셀리니 추기경의 눈빛은 더 사악하게 음산한 빛을 쏟아냈다.
"진정하시지요, 추기경님!"
"누구야?"
"쟝입니다."
추기경이 가운을 여미고 어둠속에서 나타났다. 어둠속에서 밝은 빛으로 나오자 추기경의 모습도 변했다.
어느새 길고 탐스러운 은발과 탄탄했던 몸도 사라졌다.
쟝의 앞에 선 롯셀리니는 평소와 같이 흰머리에 구부정한 모습으로 쟝 앞에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또 황제가 나를 찾는가?"
핏발선 두 눈만이 롯셀리니의 잔인했던 행동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아닙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네, 아크나무아(Arknamua)에서 사도들이 오신 것 같습니다."
"뭣이!"
어찌나 놀랐던지 롯셀리니의 얼굴이 벼락 맞은 사람 같았다.
"왜 그걸 이제야 이야기 하는 거야, 지금 어디 계신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에 모셨습니다."
"앞장서라!"
"......."
"뭐하는 게야, 어서 앞장서라니까?"
주저하는 쟝의 태도에 화가 난 롯셀리니 추기경이 쟝을 닦달하자 쟝이 롯셀리니에게 옷을 가져다주었다.
그제야 알몸인 것을 깨달은 추기경이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쟝과 함께 복도를 뛰었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통로를 지나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자 검은 해골 모양의 투구를 눌러쓴 병사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추기경을 보고 서둘러 문을 여니 지하로 향하는 좁고 긴 복도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위태로운 계단을 나는 듯이 달렸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도대체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겉으로 보아도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장소였다.
쟝이 소매에서 해골로 장식된 단검을 꺼내들고 손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흘러내리자 피를 바닥에 흘리며 주문 비슷한 것을 중얼거렸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조그만 숲이 나타났다.
지체하지 않고 숲으로 뛰어든 두 사람은 곧 커다란 나무가 잘린 밑동을 탁자 삼아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롯셀리니 추기경이 나는 듯이 달려와 몸을 엎드렸다.
"아크나무아의 충복이 인사 올립니다."
어깨를 들썩이는 롯셀리니의 인사에도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롯세리니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얼마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흘러 무릎을 꿇고 있는 롯셀리니의 다리에 감각이 없어질 정도가 되자 그의 머리 위에서 나이를 가늠키 어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카드! 속세에 너무 오래 나와 있었구나."
도대체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롯셀리니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몸을 떨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닥에 엎드려 공포에 떠는 것이 전부였다.
요즘 들어 너무 자주 바닥에 엎드린다고 생각한 롯셀리니 추기경은 이게 다 발렝 황제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잠시 딴생각을 한 대가는 아주 컸다.
"감히 아크나무아의 사제 앞에서 딴 짓거리를 하다니 네가 정녕 죽고 싶어진 게구나!"
"크허어억! 제... 발 자... 비를......."
검은 로브 무리 중 맨 좌측에 있는 인물이 크게 화를 내며 팔을 내밀어 손을 움켜쥐었다.
놀랍게도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롯셀리니 추기경이 고통스럽게 목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고통으로 몸부림 쳤다.
로브의 소매 밖으로 나온 팔은 앙상한 잿빛의 팔에 손톱은 흉측할 정도로 길게 자라 있었다.
공중에 매달려 발버둥 치는 롯셀리니 추기경의 몸부림이 점점 잦아졌다.
맨 처음 롯셀리니 추기경에게 말을 한 사람이 손을 들자 롯셀리니추기경을 고문하던 자가 손을 풀어버렸다.
털썩!
바닥에 힘없이 내팽겨 쳐진 롯셀리니는 숨 쉴 기운도 없을 텐데 악착같이 기어와 다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역시나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기도를 하듯 주문을 외우자 롯셀리니 추기경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부정한 몸이 펴지고 흰머리의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앙상한 몰골에 긴 은발을 흩날리는 기괴한 모습의 청년이 롯셀리니 추기경이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훨씬 낫군. 인간의 모습을 한 아크나무아의 자식이라니 아무리 봐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사내의 말에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롯세리니 추기경은 그저 몸을 덜덜 떨며 그들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나카드!"
"네, 네. 위대하신 아크나무......."
"그만. 시끄럽다! 나카드, 잘 들어라. 아크나무아님의 부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느냐?"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어찌 그것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카드, 이것이 롯셀리니 추기경의 본명인 듯했다.
모습도 거짓이더니 이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직까지 쥬(ju)의 낙인이 단 한 개도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냐? 어디 입이 있거든 한 번 말 좀 해보거라!"
벌 받는 아이처럼 나카드는 궁색한 변명을 하기 바빴다.
롯세리니 추기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모든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을 바꾸기 위해 그는 정말 안간힘을 썼다.
그의 말만 들어보면 정말 그는 열심히 일했고 잠시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나카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듯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여기까지 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롯세리니, 즉 나카드는 진실을 이야기하고 차라리 용서를 구하는 것이 더 현명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열심히 변명하기 바쁜 롯셀리니 추기경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사나워졌기 때문이었다.
"됐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우매한 녀석에게 우리 일족의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될 일!"
말을 끝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이들이 모두 일어섰다.
"제...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그동안의 노력을 봐서라도 기회를 한 번 더 주십시오. 억울합니다."
롯셀리니의 애절한 간청에 되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억울하다, 억울하다라... 네 몸에 흐르는 인간의 피는 무엇이란 말이냐. 아직도 입가에 흐르는 인간의 피가 네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말해주는데도 아직도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이냐!"
살기를 내뿜는 일침에 롯셀리니 추기경은 몸이 굳어 버렸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롯셀리니 추기경을 에워싸고 둘러선 이들이 손을 겹쳐서 그의 머리 위로 올렸다.
'아누스나 무스수나 크무나크 이스메하.'
주문이 흘러나오자 롯셀리니 추기경의 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뼈끼리 어긋나는 소리가 섬뜩하게 주변을 울렸다.
"나카드! 아크나무아님이 주신 생명, 다시 아크나무아님이 가져가시니 너는 너무 억울해 할 것 없다!"
롯셀리니 추기경의 몸통이 완전히 말라붙어서 마른 장작개비처럼 변했다.
대 로베니아 제국의 추기경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롯셀리니 추기경의 최후는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희생된 수많은 소녀들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동정할 가치도 없었다.
퍽!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롯셀리니 추기경의 몸이 가루가 되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가루가 살아 있는 듯이 날아올라 그들의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모시우스님, 나카드는 아크나무아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수고했네. 나카드를 이 일에 적임자로 추천한 것이 나였으니, 나 역시 아크나무아님의 처벌을 면키 어려울 테니 나를 거둘 때 또 수고들 해주게."
모시우스의 말에 다른 사제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했다.
대사제로서의 겸허함에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네 이름......?"
자신이 호명되자 쟝이 엎드려 기다시피해서 모시우스 앞으로 다가갔다.
"미천한 아크나무아님의 종인 메르넵투입니다."
모시우스의 눈이 쟝을 천천히 살폈다.
"나카드를 잘 보살피지 못한 죄도 크다는 것을 아느냐?"
"벌을 받아 마땅한 줄 압니다."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받아들이는 쟝을 보며 모시우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벌을 달게 받겠다면서 흐트러짐이 전혀 없었다.
심지어 목소리조차 떨리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모시우스가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쳤다.
"좋다, 이제부터 나카드의 일은 네가 맡는다. 아크나무아님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보거라!"
쟝은 준비된 일꾼이었다.
조리 있게 요목조목 지적하며 계획을 설명하는 얀을 보고 모시우스가 무릎을 펴며 일어섰다.
"좋아! 그동안 일을 맡아왔고 수하들의 장악 솜씨 또한 훌륭하구나,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끝났다. 앞으로 어떻게 일을 진행시키든지 간에 이제 채 일 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답 대신 깊이 고개를 숙이는 쟝을 보며 모시우스가 쟝의 머리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모시우시의 소매가 크게 부풀어 올랐다.
쟝은 고통스러운지 이를 악물고 있는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신음소리는 단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모시우스의 길고 긴 주문이 끝나고 손을 떼자 쟝의 머리 위로 검은색 고리 3개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아크나무아의 축복을 받았으니 네가 나카드의 일을 대신해서 아크나무아님의 부활을 위해서 몸 바쳐 일하거라!"
"아크나무아의 영광된 길에 빛이 있으라!"
사제들이 모두 일어나 양팔을 교차시켜 가슴에 대었다.
주변에 바람이 일어나 휘몰아쳤다.
음산하고 차가운 바람이었다.
세상의 생명이란 생명은 모두 빨아들일 듯했다. 바람이 그치고 고요해지자 어느새 쟝의 모습은 롯셀리니 추기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눈빛이 섬뜩할 정도로 웃고 있었다.
* * *
나팔소리가 울리자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경갑옷을 입은 그들의 발자국소리가 묵직한 소리를 냈다.
"위대하신 대 로베니아의 루이 드 발렝 황제를 뵈옵니다."
"황제 폐하, 만세!"
일사불란하게 무릎을 꿇는 기사들을 보며 발렝 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만발했다.
뭐든지 불태워 버릴 듯한 눈빛, 그 어떤 적이라도 상대할 수 있는 제국의 검사들을 보며 발렝 황제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저들이 모두 오직 자신의 말을 듣는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황제 폐하, 제국 최고의 검사 스크라무슈입니다. 제1기사단 소속의 일급 검사들로만 추렸습니다."
100명이 넘는 스카라무슈급 기사들이었다.
전체 스카라무슈 중 3분지 1에 해당하는 많은 수였다. 그동안 그 어떤 일에도 이만한 병력이 동원된 적은 없었다.
그만큼 황제의 분노가 크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발렝 황제가 옥좌에서 천천히 내려와 기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얼굴에 하나씩 있는 상처들이 더 듬직해 보였다.
거친 사나이들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꿈꾸는 발렝은 기사들의 땀 냄새를 맡으며 작은 흥분을 느꼈다.
황제의 자리만 아니라면 이번 원정을 따라나섰을지도 몰랐다.
사나이들이 피를 튀기며 싸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그의 온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쟁반을 든 시녀들이 황제 옆으로 다가왔다.
금색 수실이 가득 든 쟁반이었다.
화제가 수실을 하나 들고 기사 앞에 나서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받쳐 올렸다.
발렝 황제는 거만한 태도로 수실을 검의 손잡이에 묶어 주었다.
기사로서 최고의 영광이었다.
100여 명이 넘는 기사들에게 일일이 수실을 묶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발렝 황제가 와인 잔을 높이 들었다.
술잔이 가득한 쟁반들을 들고 시녀들이 나타나서 기사들 사이로 술잔을 날랐다.
이윽고 기사들의 손에도 술잔이 하나씩 생겼다.
"앙리, 누가 책임자인가?"
황제의 물음에 금발의 장년인이 앞으로 나섰다.
"샤르테르 가문의 로시텔 남작입니다. 샤를렌느 영지 출신입니다."
앙리 백작의 설명에 황제의 눈이 크게 떠졌다.
"크리앙 백작의 아들인가? 그래, 자세히 보니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
"그렇사옵니다. 폐하,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놀랍다는 표정의 앙리 백작을 보며 황제가 술잔을 돌리며 뭔가 기억을 떠올렸다.
"후후후, 기억하다마다. 로시텔 남작!"
"황공하옵니다, 폐하!"
영광스럽게 호명이 된 로시텔 남작이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기억을 해준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문신들의 이름이야 기억 못할지라도 무신들의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더구나 로시텔 남작의 아버지는 전장의 라이언이라고 불리던 투사 중에 투사였다.
황태자 시절에 로인 왕국이 로베니아에 조공 바치는 것을 거부하자 주변 왕국들과 연합에서 로베니아에 대항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었다.
당연히 로베니아에서는 응징을 가했고. 그 원정군의 일행과 같이 했더니 어린 황태자의 눈에 로시텔 남작의 아버지 크리앙은 들판을 뛰어다닌 한 마리의 늑대였다.
피를 뒤집어쓰고 적군을 도륙하는 모습은 그에게 우상이 되어버렸다.
"그대의 아버지 크리앙은 용사 중에 용사였다. 그대는 전장의 라이언이라고 불리던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충심을 다해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겠습니다."
로시텔 남작의 호기에 찬 대답에 황제의 얼굴에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다오!"
황제가 손을 내밀자 호위 기사 하나가 황금빛 검을 쿠션 위에 올려서 가져왔다.
"로시텔 남작은 고개를 들어라!"
로시텔 남작의 고개가 들리고 황제가 직접 검을 하사했다.
출병하는 기사에게 황제가 검을 하사하는 것은 최고의 영예요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 검을 집에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가문은 황제의 은총을 입은 가문이 되는 것이었다.
감격한 로시텔 남작이 감동하고 있을 때, 황제의 마지막 당부가 나왔다.
"난 더 이상 대륙 최고의 검사가 케린버그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디안 요새의 영웅이라는 케린버그의 호크 백작이 소드마스터라면 그대는 우리 로베니아가 자랑하는 최고의 검사 스카라무슈, 제국의 검술이 어떤지 그들에게 똑똑히 알려주고 와라!"
광오하기까지 한 황제의 외침에 기사들이 모두 뜨겁게 불타올랐다.
"황제 폐하 만세! 로베니아의 영광을!"
발렝 황제도 손을 앞으로 뻗었다.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