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22화 (22/55)

Chapter 22. 악전고투(惡戰苦鬪)!

"장군님, 침투조의 공작이 시작됐습니다!"

김재덕 대령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서 불길과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망원경으로 살피던 나형석 장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랐다.

"호크 중령은?"

김재덕 대령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자 나형석 장군의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하는 수 없지. 기다릴 만큼 기다렸으니! 작전명령 하달하게."

"네, 장군님!"

김재덕 대령의 손짓에 지휘부 참모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마나통신기들이 시끄러워졌다.

"호크, 어떻게 된 건가?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나지막이 읊조리는 나 장군의 말이 조용히 갈대 숲속에 묻혀 들어갔다.

"중대장님! 지휘부 명령 하달입니다."

이지 중대장 피터슨 대위가 마나통신기를 통해서 작전 명령을 하달 받았다.

"소대장들을 소집해! 공격개시다!"

베를로니아의 성벽을 마주보고 길게 늘어선 외인부대가 시끄러워졌다.

공격명령이 떨어지자 일사불란하게 부대원들이 장비를 챙기며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이지를 비롯해 찰리, 알파, 도그, 브라보 중대가 제일 중앙에 배치되었고, 다른 대대가 양옆으로 늘어섰다.

그리고 이방인(異邦人)들로 구성된 부대가 후미에 위치했다.

이번 전쟁의 결말을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되는 베를로니아가 검은 장벽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장군님! 한 시간 전입니다!"

부관의 전투준비태세 완료 보고를 받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보인 나형석 장군이 김재덕 대령을 바라보았다.

"이제 끝을 봐야지?"

"네, 장군님!"

"그나저나 호크 이 친구는 끝까지 애를 먹이는군."

"글쎄요, 아마도 아군을 위해서 고생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만, 보고는 제때 해야 할 거 아닌가?"

두 사람이 근심스런 얼굴로 베를로니아의 내성을 바라보았다.

"헉! 헉! 젠장 너무 늦었나?"

갔던 길을 되돌아온 호크가 숲속의 신전으로 뛰어들어보니 이사벨라의 몸이 제단 위에 둥둥 떠 있었다.

호크가 불안하게 느낀 것은 이사벨라의 몸이 떠 있는 현상 때문이 아니었다.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공간 저편에서 나올 때와 같은 강한 힘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호크의 손이 서서히 혼돈의 검 제로의 손잡이로 향했다.

추운날씨는 아니었는데 주변이 갑자기 서늘해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낀 호크는 주변의 변화에 최대한 집중했다.

한 발, 한 발 이사벨라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몸을 만지려고 하자 갑자기 그녀가 있는 공간이 호크를 밀어냈다.

두 발이 바닥에서 쭉 밀리자 길게 흔적이 남았다.

검을 교차시켜 방어한 호크는 어떤 기운이 갑자기 자신을 밀어냈는지 몰라 긴장해야만 했다.

그때 이사벨라의 몸이 똑바로 서기 시작했다.

긴 머리가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자신을 바라보니 안 그래도 수십만 명의 시체 더미 속에 서있는 호크는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소름끼치는 기분을 떨쳐버리기 위해 소리 질렀다.

"이사벨라! 정신 차려! 이사벨라!"

드... 드드드... 둑!

호크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갑자기 그녀의 몸에서 관절이 꺽이는 소리가 나며 몸이 움직였다.

"빌어먹을, 이번에는 또 뭐가 나오려고 하는 거지?"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베로니크에게 들은 헤카톤케이르가 각성하기 전에 해치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한 호크의 행동은 빨랐다.

제로도 주인의 마음을 알았는지 검신에 붉은빛 오로라가 주변을 밝혔다.

검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서 점프한 뒤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두 손으로 베어가는 두 개의 검!

제로가 거의 이사벨라를 베어내려고 하는 순간, 그녀의 신형이 뒤로 저절로 물러났다.

호크의 검이 허공을 베었고 다음 순간, 그녀에게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폭사되어 호크에게 짓쳐들었다.

난데없는 강렬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서 날아들자 호크는 망설임없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호크가 피하고 난 자리에 무시무시한 기운이 덮쳤고 그 자리에 서 있던 돌기둥이 가루가 돼서 바람에 날아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사벨라의 머리카락이 점점 변해갔다. 놀랍게도 머리카락은 수없이 많은 사람의 얼굴로 변해갔다. 게다가 징그럽게 등이며 옆구리에서는 기다란 팔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헤카톤케이르......."

괴물로 변해가는 이사벨라를 본 호크가 처음으로 두려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드래곤에게도 겁을 먹지 않던 호크가 거대한 힘을 가진 어둠의 존재가 서서히 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더 늦기 전에 끝내버려야 해!"

정체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만으로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

전신의 피부가 따끔거리는 전율을 맛보며 검을 휘둘렀다.

텅!

"커헉!"

손목을 부여잡고 뛰어든 속도보다 더 빨리 뒤로 물러난 호크는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던 손목을 문질렀다.

분명 이사벨라를 베었지만, 마치 무쇠 벽을 내려칠때의 통증이 밀려왔다.

고개 숙인 긴 머리가 여전히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이사벨라의 오른손이 들렸다. 손가락을 들어 호크를 가리키는 이사벨라를 보며 호크도 잔뜩 긴장했다.

[방해하지 마라. 큭큭큭, 도대체 이 얼마 만에 맡아보는 인간의 냄새란 말인가?]

드드드득!

이사벨라의 고개가 꺾이다 들리며 끈적거리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호크의 귀를 거슬리며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그냥 계속 푹 자면 안 되겠니?"

[큭큭큭,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가 눈떠 처음 본 인간이라 자비를 베풀려고 했건만,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완전히 고개를 든 이사벨라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머리카락들이 짧아지며 그 속에서 해골들이 하나둘씩 징그럽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니, 난 오래 살아야 해. 먹여 살릴 식구들이 많아서 말이야! 그래서 네가 죽어져야겠다. 윈드 커터(Wind cutter)!"

혼돈의 검 제로가 호크의 손을 떠나 맹렬히 회전하면서 나선형의 호선을 그렸고 이사벨라 아니, 이제는 헤카톤케이르가 된 몸을 향해 날아갔다.

윈드 커터(Wind cutter) 바람을 가른다는 말처럼 대기를 찢는 굉음을 내며 모든 것을 절단 내려는 듯 무섭게 날아서 이사벨라와 충돌했다.

카카카캉!

또다시 벽을 긁는 듯한 소음이 주위를 울렸지만, 이번 공격은 전혀 소득이 없지는 않았다.

이제는 거의 머리가 해골바가지로 가득한 괴물로 변한 헤카톤케이르가 비틀거리며 뒤로 상당히 물러섰다.

[끄아아아아! 으... 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해서 그 검이 인간의 손에 있단 말인가?]

검의 손잡이와 호크의 손과 연결되어 있는 영혼의 줄을 잡아당겨 돌아온 제로를 받아든 호크가 여전히 검을 가슴에 교차한 채 헤카톤케이르에게 달려들었다.

"그건 지옥에나 가서 물어봐라!"

두 개의 제로를 합치자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철컥~ 소리가 나며 검의 손잡이 부분이 끼워졌고, 제로에 태극심법(太極心?)의 기운을 불어넣자 검이 마나로 덮였다.

봉처럼 빙글빙글 돌리며 비틀거리는 헤카톤케이르에게 접근한 호크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있는 힘껏 제로를 던졌다.

양쪽 끝을 연결한 검이 회전하자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날아갔다.

대리석 바닥이 회전하는 제로의 기운으로 기다란 홈이 생기며 목표를 향해 빠르게 접근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깜짝 놀란 헤카톤케이르의 머리에 달린 해골들이 귀가 찢어질 정도로 기괴한 소리를 질러댔다.

어찌나 그 소리가 크던지 주변의 나무들과 조각상이 폭죽 터지듯 터져나갔다.

소리와 검의 대결이 펼쳐졌다. 그 소리는 일종의 음파 공격이었다.

제로가 음파의 공격을 가르며 뚫고 들어가자 더욱 커다란 굉음이 일어났고, 충돌하는 순간 주변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석상들이 파괴되면서 돌가루가 날리고 그 때문에 잠시 시야가 불투명해져서 주변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주변이 진정되자 헤카톤케이르가 제로의 검신에 꼬치처럼 꿰어서 제단 돌기둥 중간에 박혀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단 계단 뒤로 밀려난 호크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음파의 공격 때문이었는지,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너덜너덜해졌다.

입으로 비릿한 것이 흘러 들어왔다. 손으로 만져보니 코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제로를 향해 손을 뻗자 영혼의 사슬이 나와서 다시 호크의 손으로 제로가 돌아왔다.

검이 빠지자 헤카톤케이르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으으으윽. 억울하구나! 애타게 중간계로 나가길 소원했는데, 결국 또다시 쥬(Ju)가 방해하다니... 빌어먹을! 애송이! 좋아하지 마라. 너에게 진 것은 아니다. 그 징그러운 괴물에게 당한 거지.......]

머리에 있던 해골들이 다시 머릿속으로 사라지고 얼굴도 이사벨라의 예전 얼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카학~ 퇫! 젠장, 말 되게 많네. 누구도 너 같은 것이 이 세상에 나오길 바라지 않으니까 헛소리 작작하고 그만 꺼져!"

[큭큭큭, 그럼 나를 불러낸 이 아이는 뭐란 말이냐. 점점 이세계도 쥬(Ju)의 믿음이 시들해져가는 모양이군. 이교도인 나를 떠받든 것을 보니, 뭐 앞으로도 기회는 있겠지. 어차피 영원히 사는 존재니까. 크흐흐흐흐흐!]

헤카톤케이르가 조소 섞인 말로 호크의 감정을 자극했다.

"미친 놈! 적어도 내가 있는 동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돌아서는 호크의 등에 대고 헤카톤케이르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후후후! 애송이, 나는 다시 저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지만, 내가 왜 마계의 공포라고 불리는지 알려주지. 이대로 돌아가면 내 체면도 말이 아니고 준비해둔 것도 써먹지 않으면 이 아이가 서운해 할 테니까 말이야.]

급하게 돌아선 호크가 가까이 다가가 머리를 억지로 들어올렸다.

"무슨 소리야? 준비해둔 것이라니."

[크크크, 곧 알게 될... 거... 야.]

그 말을 끝으로 이사벨라의 몸이 눈 녹듯이 검은 물로 변했다.

이사벨라가 입고 있던 옷을 바닥에 버린 호크는 대기가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 벌떡 일어섰다.

"이, 이런,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다."

두두두두두두!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넘어질 뻔한 몸을 바로 세우며 주위를 둘러본 호크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제단의 계단 밑으로 땅이 갈라지며 헤카톤케이르의 머리에 붙어 있던 해골들이 새카맣게 튀어나왔다.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것처럼 주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뭘 하려는 거야?"

해골들이 시체들을 덮고 지나갈 때마다 시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어색한 몸짓으로 몸을 세워 일어나는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졌다.

수십만의 시체가 되살아나 숲을 가득 채웠다.

시체를 모두 살린 해골들이 하나로 뭉치더니, 헤카톤케이르의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색 해골들이 꿈틀거리며 만들어낸 형상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자~ 이제 나를 소환했던 이사벨라라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차례다. 큭큭큭, 나에게는 기쁨이지만, 너희들 인간에게는 악몽이 되겠군. 으하하하하! 혼돈의 검을 가진 자여! 그대의 운명을 시험해 보거라!]

웃음소리와 함께 해골들이 뿔뿔이 흩어지더니 다시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흔들거리던 대지도 거짓말처럼 멈췄고,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다만 영혼을 잃고 헤매는 시체들을 빼면.......

우어어어~

관절이 굳은 인형의 움직임처럼 비틀거리는 시체들이 호크를 향해 몰려들었다.

빠르지는 않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았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모두 시체들이었다.

"제길, 드래곤에 신이라고 자처하는 것들에다, 지옥의 마왕에 이제는 좀비들까지 완전히 연휴 공포영화 특선이군!"

스패로우(석궁)를 못 가져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근거리 사격무기가 얼마나 절실했지만, 곧 그것도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아는데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제로를 들고 길을 내면서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베고 또 베어 넘겼지만,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허리가 잘리면 두 팔로 상체를 끌며 쫓아왔고 머리를 날리면 목 없는 시체가 두 팔을 벌리고 공격해왔다.

"헉! 헉! 이런 제길 끝이 없잖아. 이러다가는 제풀에 쓰러지겠어. 헉! 헉!"

상대가 강하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수의 문제였다.

일대 수십만의 게임은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가랑비에 옷 젖는 다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주고 있었다.

듣기 민망할 정도로 가쁜 숨소리와 비 오듯 흐르는 땀이 호크가 얼마나 악전고투(惡戰苦鬪)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비록 깨달음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엄청난 존재와 사투를 벌이고 두 드래곤을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 많은 힘을 소모하고 나서 또다시 쉼 없는 전투의 연속이니 제아무리 철인(鐵人)이라고 해도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으니 힘들어 죽겠네. 젠장!"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시체들을 보며 이를 갈던 호크는 얼마 남지 않은 기운을 터트리며 주변의 공간을 확보한 뒤 후퇴했다.

이 이상의 싸움은 쓸데없는 소모전이라고 판단했고 서둘러 밖으로 나가 사령부에 이 사실을 알려 베를로니아로 진입을 막아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이곳 사람들도 피신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호크는 땀이 말라서 소금기 가득한 얼굴로 고대도시를 빠져나가 피라미드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니 개미떼처럼 되살아난 시체들이 땅을 메우며 호크를 쫓아왔다.

왠지 소름이 끼친 호크는 몸을 한번 털어내고 계단을 올랐다.

"젠장, 아직 진입하면 안 되는데, 설마하니 벌써 공격을 시작한 것은 아니겠지? 제발 전선에는 별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호크는 자신의 걱정이 기우(杞憂)에 그치길 빌었지만, 세상일은 늘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

"루크 소대장님! 저희가 또 선봉이네요. 정말 이래도 우연이라고 하실 겁니까?"

"레니 중사,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전방 주시(注視)나 철저히 해 언제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 줄 모르니까!"

루크가 가뜩이나 소대원들 사이에서 말이 많은 자신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던 터라 레니 중사의 농담을 썩 기분 좋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신경이 곤두선 루크가 선임하사를 불렀다.

"선임하사, 갈대 숲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니까, 차라리 베어 넘기며 전진해!"

"알겠습니다, 소대장님!"

중앙의 이지 중대를 선두로 좌우로 길게 늘어선 외인부대 모든 대대 병력들이 베를로니아로 가는 갈대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불을 놔서 모두 불태워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언덕 위의 상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루크로서는 그저 명령을 따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부스럭! 부스럭!

"응?"

선두정찰병의 오른손이 번쩍 올라갔다.

소대원들이 모두 사주경계에 들어가며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사람 머리보다 더 큰 갈대숲이다 보니 수많은 군인들이 들어갔지만, 위에서 볼 때는 그저 갈대숲이 흔들리는 정도였다.

"차라리 불을 놓을 걸 그랬나 봅니다."

김재덕 대령이 갈대 숲으로 들어간 부대원들을 보며 불안한 듯 나형석 장군에게 푸념을 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네. 하지만 그러기에는 시간도 너무 없고 자칫 불길이 우리에게 덮칠 수도 있지 않은가 바람이 우리 편이 아니야."

"아~ 그점을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괜찮네, 그보다 머스탱 공작과 브리티니 단장은?"

"아~ 조금 전에 공격 신호가 떨어지자 바로 전장(戰場)으로 갔습니다."

"그래, 허허 그들도 천성이 군인이로군!"

나형석 장군이 망원경으로 갈대숲을 살펴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이 기운은? 요세프~ 요세프!"

다급한 브리티니 단장의 외침에 성기사단 부단장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단장님!"

"그래. 요세프, 성기사단을 모두 출동시켜라 어서!"

급히 말을 몰아 갈대밭으로 뛰어든 브리티니가 성수를 검에 뿌리며 이지 중대가 가고 있는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이렇게 어리석다니 이 정도의 강한 암흑의 힘을 어떻게 못 느꼈을까? 제발 늦지 않기를.......'

브리티니 단장을 태운 하얀 백마가 조금 전 루크 소대가 지나갔던 길을 말발굽 자국을 내며 숨 가쁘게 달려갔다.

그 뒤를 샹그릴라의 성기단원들이 급히 뒤를 좇았다.

"제이미, 뭐가 보여?"

"쉿!"

선임하사의 질문에 척후병 제이미 하사가 조용히 하라고 입을 가린 후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만치 앞에서 뭐가 갈대숲을 밟고 오는 소리가 들렸고 갈대들이 좌우로 넘어지고 있었다.

제이미와 선임하사가 스패로우에 걸린 안전장지를 풀고 전방을 향해서 조준사격 자세를 취했다. 수신호를 받은 나머지 대원들도 스패로우를 들었다.

이미 주변의 다른 소대들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상한 소리가 주변 곳곳에서 들리자 긴장한 제이미는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뺐다 하며 긴장을 풀었다.

우드득! 우드득!

"온다!"

제이미 하사의 경고성에 소대원 전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세, 세상에 저게 뭐야?"

갈대숲을 뚫고 나온 것들의 정체를 보자마자 소대원들은 경악했다.

"소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소대장님!"

선임하사의 다급한 외침에 루크 소위도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어제 정찰 때 보았던 시체들이 일어서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별게 다 덤벼드네, 뭘 명령을 기다려! 눈에 보이는 대로 갈겨버려!"

루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대원들이 겨냥하고 있던 스패로우의 카트리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았다.

투투투투투!

수십 발의 강전들이 비 오듯 하늘을 날았다.

푹! 퍼버벅!

"사격중지! 사격중지!"

고슴도치가 된 시체들이 바닥에 쓰러지자 선임하사가 머리위로 손을 흔들었다.

소대원들의 스패로우에서 더 이상 화살이 나가지 않자 선두에 섰던 제이미 하사가 조심스럽게 갈대숲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에게 접근했다.

"선임하사님! 모두 죽은 거 같습니다."

제이미 하사의 외침에 선임하사가 인상을 썼다.

"젠장! 이미 죽었던 것들이 살아났는데 죽긴 뭘 또 죽었단 말이야!"

선임하사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투덜거리자 루크 소위가 선임하사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며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검을 뽑아 시체를 들어보았다.

"느낌이 별로 안 좋은데. 비켜봐, 제이미!"

루크소위가 제이미에게 비키라고 말하자 제이미 하사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농담을 했다.

"소대장님!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물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우어어어워!"

"으아아악!"

농담 삼아 말을 꺼냈던 제이미는 정말로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뒤덮인 시체가 갑자기 루크 소위를 덮치는 광경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루크 소위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도록 놀랐지만, 본능적으로 손에 든 검을 힘껏 휘둘렀다.

서걱!

제대로 목을 벤 덕분에 시체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하지만 루크 소위는 너무 황당해서 뭐라고 말도 못하고 목 없는 시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저리 비켜!"

"죽엇! 죽으란 말이다! 이 괴물들아!"

"선임하사님! 살려주세요!"

"소대장님! 소대장님!"

온 사방 천지가 소대원들이 지르는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던 시체들뿐만 아니라 장막 같은 갈대숲을 뚫고 더 많은 시체들이 소대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지옥의 부저갱에서 기어 나오는 마귀들처럼 징그럽게 달려드는 시체들을 보며 모두 치를 떨었다.

스패로우의 카트리지를 갈아 끼울 틈도 없었다.

발로 하나를 차서 떨어뜨리면 뒤에서 두셋이 덤벼들었다.

무기도 없었다.

그저 피눈물을 흘리는 붉게 충혈된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물어뜯을 뿐이었다.

제이미 하사가 쓰러지자 그 위로 수십의 괴물들이 덤벼들었다.

고기를 물어뜯는 소리에 루크 소위는 정신을 차렸다.

초점을 잃어가는 제이미 하사의 눈동자가 루크의 눈에 파고들었다.

"제이미! 이 개자식들, 비켜! 비키란 말이다!"

루크의 전투용 검이 숨 가쁘게 움직이자 제이미를 덮고 있던 괴물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이미 제이미는 온몸을 괴물들에게 물어 뜯겨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더 비참한 것은 배속의 내장이 흘러나오는 것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리는 제이미의 모습이었다.

"소... 소대장님! 추... 워요."

"제이미! 정신 차려. 야, 임마, 죽으면 안 돼!"

"소대장님, 나중에 꼭 로베니아의 타크너에서 한잔 하자던 약속은 못 지......."

"이... 이...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결국 제이미의 고개가 꺽이자, 루크가 제이미를 끌어안고 절규했다.

처음 부임해 훈련소 시절부터 함께해온 제이미 하사의 죽음이 루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지난번 몽뜨 전투에서 다행히 소대원을 잃지 않았던 루크는 첫 전사자가 그것도 친한 기수의 훈련소 동기이자 친구였던 제이미라는 사실에 고개를 숙이고 오열했다.

혼전 중에 지휘관이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 통에 소대 전체가 몰살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노련한 선임하사 덕에 지리멸렬하던 소대원들이 하나둘 공황적인 공포심에서 빠져나와 차근차근 대응해나가기 시작했다.

"머리를 날려버려! 다른 곳은 소용없다!"

선임하사가 얼굴에 핏대를 세우고 악을 썼다.

소대원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수습해 나가던 그의 시야에 시신을 안고 넋을 잃은 루크가 눈에 들어왔다.

"소대장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루크 소위님 소대가 몰살당할 판이라고 정신 좀 차려요!"

선임하사가 팔을 붙잡고 당기자 루크의 눈도 겨우 제대로 돌아왔다.

"선임하사, 제이미가... 제이미가 죽었어!"

"네. 멋지게 살다 갔어요. 녀석은 워낙 착한 놈이니 천국에 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놈들은 달라요. 죽었다 깨어나도 천국에는 못가고 지옥에 떨어질 놈들이잖아요, 소대장님이 살려야죠!"

선임하사가 내미는 손을 잡고 표정이 풀어진 루크가 선임하사의 목을 물려고 달려들던 괴물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래, 나머지 녀석들은 살려서 데려가야지."

"그겁니다. 어서 여기서 빠져 나가요. 저놈들 식사거리가 되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30명이 넘던 그의 소대원 중 스무 명만 남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루크가 진영으로 돌아가 소대원들을 지휘하자 우왕좌왕하던 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대응해 나갔다.

"다른 곳은 쏘지 마라. 일진은 목이나 머리를 노리고 이진은 쓰러진 괴물들의 머리를 부셔버려!"

갈대숲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과의 사투가 한겨울 한파도 잊게 해주었다.

"장군님, 지금 전 부대가 정체불명의 괴물과 조우, 접전중이라고 합니다. 3대대와 4대대의 지원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부관의 화급을 요하는 보고에 나형석 장군의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해졌다.

"저, 저런 안 돼! 어서 명령을 하달해! 수화탄(手火彈)를 쓰지 말라고! 바람이 역풍(逆風)이다."

전장을 바라보던 나 장군은 수화탄이 곳곳에서 터지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전투 중 당황한 대원들이 다급한 나머지 명령을 어기고 수화탄(手火彈)를 투척해서 갈대숲 중간 중간에서 불길들이 치솟아 올랐다.

쉽게만 생각했던 원정길이 시작부터 낭패를 보자 나형석 장군의 두 주먹이 심하게 떨렸다.

"장군님! 제가 가보겠습니다. 전황을 파악해야 합니다."

"안 돼! 자리를 지켜!"

그러나 김재덕 대령은 이미 무기를 들고 언덕 밑을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저 자식이, 야! 김재덕이, 너, 이 새끼 죽으면 알아서 해!"

멀어져 가는 김재덕 대령의 뒷모습에서 눈을 뗀 나형석 장군은 망원경으로 전장을 살피다 겨우 갈대숲이 짓이겨져 바닥이 들어난 곳에서 고립된 5명의 부대원들이 괴물과 싸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처음에 잘 버티던 그들도 점점 늘어가는 괴물들에게 속수무책이었다.

곧이어 새카맣게 대원들을 덮어버린 괴물들이 대원들을 먹어치우는 광경을 끝으로 망원경을 내려놓은 나형석 장군이 두 눈을 감았다.

대원들의 처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아서일까, 석상처럼 굳어 있던 나형석 장군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지휘부 장교들에게 소리쳤다.

"전원 후방으로 후퇴하라고 해! 상황장교, 부관은 마나통신기를 들도 따라와! 지휘부 연락병들은 모든 전선의 부대에 명령 하달하라! 어서!"

눈빛이 무섭게 변한 나형석 장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언덕을 내려갔다.

"헉! 헉! 갈대를 베라! 어서 갈대를 베고 공간을 만들어!"

갈대숲으로 뛰어든 김재덕 대령이 후퇴를 지휘하고 있었다.

삼삼오오 낙오된 병력들이 모아 갈대숲을 다 베어내고 있었다.

갈대들이 엄폐물이 되어 괴물들의 모습을 가려주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점점 합류하는 병사들이 많아지자 공터도 넓게 변해서 후방 전선 일대는 갈대밭이 사라지고 있었다.

"으아아아!"

무작정 뒤로 달리다 갑자기 공터가 나타나자 놀라서 바닥을 구르는 대원들에게 호통을 치는 김재덕 대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죄송합니다. 대령님, 헉! 헉!"

땀과 흙먼지 갈대 잎으로 범벅이 된 핸들러가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젠장, 그 딴 소리는 나중에 하고 어서 병력들이나 정비해. 어서!"

"네, 대령님!"

속속들이 갈대숲에서 패주한 병사들이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에 감사하며 땅에 엎드려 기도했다.

그들의 등을 잡아 끌어내며 핸들러가 대열을 정비했다.

"모두 정신 차리고 대열을 정비해! 모두 자기 소속대로 돌아가! 어서!"

"옵니다!"

누가 외쳤는지 그 고함소리에 후퇴해서 대열을 정비한 외인부대가 이를 악물었다.

"제길, 바람의 방향이라도 바뀌었으면 좋으련만!"

김재덕 대령이 하늘을 바라보며 애꿎은 바람 탓만 했다.

그때 뒤쪽을 모두 베어내 마치 벽처럼 펼쳐진 갈대숲 너머에서 듣기도 끔찍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망할, 괴물 놈들! 모두 정신 차리고 대응 준비해! 어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스락!

"우워워워우~"

"왔다! 사격!"

수천 개의 카트리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괴물들에게 쏟아졌다.

수천발의 화살이 괴물들을 벌집을 냈지만, 그것이 다였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병사들을 향해 죽음의 이빨을 들이댔다.

무너진 개미집에서 쏟아져 나온 개미들처럼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괴물들을 보며 핸들러는 기가 막혔다.

병사들도 불가항력의 전투에 차츰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철컥~ 철컥~

"젠장, 카트리지가 다 떨어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빈 카트리지가 바닥을 구르는 소리와 스패로우를 버리고 검을 치켜드는 소리가 전장을 덮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괴물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며 이제는 괴물들이 흘리는 침이 괴성을 지를 때마다 얼굴에 튈 정도로 가까워졌다.

"대령님!"

핸들러의 충혈 된 눈이 김재덕 대령을 돌아보았고 김재덕 대령은 피가 베어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들이 뒤로 물러나면 뒤에 본진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제대로 된 공격도 불가능한 상황에 그저 핏발선 눈으로 괴물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모두 비키시오! 쥬(Ju)의 성스런 아들들이 악(惡)의 종자들을 벌하리라! 샹그릴라의 기사들이여, 성검을 높이 들고 쥬(Ju)의 가르침을 사악한 종자들에게 할지어다!"

최후의 방어선을 은빛의 성기사들이 뛰어넘으며 외인부대와 괴물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색의 갑옷이 빛을 받아서 눈부시게 주위를 밝혔고 그 뒤를 따라서 수백 필의 말들이 공터를 메워갔다.

은빛갑옷의 기사들이 은빛의 검을 휘두르자 괴물들이 괴성을 지르며 녹아들었다.

"크아아아악!"

코를 찌르는 악취가 사방을 뒤덮었다.

성기단이 뛰어들자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그 강력한 스패로우의 화살들과, 전력을 다한 검에도 끄떡없던 괴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럽게 죽어갔고 심지어 어느 기사의 검에서 나는 휘광에는 괴물들도 뒷걸음질 쳤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수십의 괴물들이 빛과 함께 소멸해갔다.

성검(聖劍) 브리티니라는 명성이 결코 과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모르카시에서 샹그릴라로부터 추가 지원받은 성기사들이 와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성기사들이 괴물들을 막아주자 다리가 풀린 몇몇 병사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했다.

"대령님!"

통신병이 건네준 마나통신기의 수화기를 받아든 김재덕 대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후퇴! 전원 일렬횡대로 천천히 본진까지 후퇴한다!"

나형석 장군으로부터 후퇴명령을 받은 김재덕 대령은 괴물들의 먹잇감이 될 운명에서 벗어나자 한숨을 쉬었다.

대령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물러나자 성기사들도 천천히 말을 뒤로 몰았고 성스런 빛과 기운이 사그라지자 남아 있던 괴물들이 또다시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들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대령님!"

핸들러의 외침에 대령도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의 아래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서는 되살아난 시체 괴물들이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살아 있는 고기를 먹기 위해 썩어가는 몸을 움직여 다가왔다.

"젠장, 이곳까지 저놈들을 끌고 오라고 하시더니, 장군님은 어디계신 거야?"

앞에서 괴물들을 막아내고 있는 성기사들도 이제는 서서히 힘이 부치는지 동작이 굼떠지고 있었다.

환하게 빛을 내던 성스러운 기운도 점차 옅어지고 있는 걸로 보아 그들도 지쳐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참호에 거의 가까이 다가가자 더 이상의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당황한 김재덕 대령의 귓가로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자네, 명령 불복종이야! 알아?"

"장군님도 참! 지금 이 판국에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농담이라도 해야 이 미친 상황에서 버티지. 좌우간 모든 병력을 참호 뒤로 돌려! 어서!"

갑자기 나타난 나형석 장군에 명령에 모두가 참호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참호 속에 숨어 있는 것을 본 대원들은 눈들이 커졌다.

"뭐야, 저것들은?"

"나도 몰라! 어서 뛰기나 하라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병사들이 참호를 건너뛰는 것으로 대부분의 병력들이 참호를 넘어서자 그 뒤를 성기사들이 말을 몰아 넘었고, 곧이어 수만의 괴물들이 참호를 향해 몰려들었다.

정확히는 언덕에 오른 외인부대원들은 살내음을 맡은 거였지만, 어쨌든 괴물들이 물밀듯이 참호로 밀어 닥쳤다.

"준비!"

나형석 장군의 손이 들려지고 참호 중간 중간이 있는 기수들이 모두 긴장한 얼굴로 명령을 기다렸다.

"지금이야!"

나형석 장군의 손이 머리위에서 원을 그리자 참호에서는 파도타기 하는 것처럼 깃발들이 순차적으로 올라왔다.

때를 같이해 우렁찬 함성 소리와 함께 이방인(異邦人) 부대원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창을 들고 일어섰다.

날카로운 창은 괴물들의 몸통에 파고들었고 놀랍게도 창에 꿰인 괴물들은 뼈까지 녹아들며 사라졌다.

"이럴 수가, 어떻게 하신 겁니까?"

핸들러 소령이 감탄하며 나형석 장군 곁에 다가왔다.

엉망이 된 핸들러 대위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어준 나 장군이 핸들러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참호 뒤로 넘어갔다.

작은 분지 하나를 넘어가자 그곳에는 어수선한 작업장이었다.

투구를 거꾸로 돌로 만든 임시 화덕위에 올리고 그 안에 뭔가를 녹이고 있었다.

뒤로 줄을 서 있던 이방인(異邦人) 부대원들이 손에든 나무창의 날카로운 끝을 투구 속에 담갔다가 꺼내들자 끝이 은빛으로 빛났다.

"저, 저게 뭡니까, 장군님?"

궁금해 하는 핸들러의 질문에 나형석 장군이 은조각을 핸들러에게 던졌다.

"후후, 은일세!"

"은이요?"

"그렇지."

놀라는 핸들러를 뒤로하고 다시 참호위로 올라온 나 장군은 참호에서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는 김재덕 대령과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김재덕 대령 역시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은을 묻힌 나무창에 녹아버리는 괴물들의 냄새가 고약하게 났지만, 누구 하나 불평할 새가 없었다.

이방인(異邦人) 부대원들 뒤로 후퇴했던 외인부대원들도 새로 보충받은 스패로우 카트리지를 보급 받고 전선에 참가했다.

퉁투투퉁!

화살촉에 은도금된 화살들이 하늘을 날자 일대 장관이 연출됐다.

햇살을 받아 빛을 반사하는 통에 마치 하늘에서 은빛가루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크아아악!"

치이이익~

연기와 고약한 냄새가 주위를 뒤덮었다.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가?"

나형석 장군이 망원경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진정되어가는 전장(戰場)을 살폈다.

"후~ 겨우 겨우 어떻게 막기는 막았네요."

그을음과 땀으로 얼룩진 김재덕 대령이 나형석 장군 곁으로 다가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보게, 김재덕이!"

"네, 장군님!"

"또 한 번 그렇게 뛰쳐나가면 나한테 먼저 죽을 줄 알아!"

"네? 참 장군님도......."

"그나저나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데 성문 앞에도 가지를 못했으니 말이 아니구먼."

"저는 전사자가 얼마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장군님은 그런 생각까지 하셨습니까?"

"어차피 전쟁이야 전쟁이라고, 싸워서 이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게다가 오늘밤도 이 언덕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암담해. 전투를 끝내고 성 안에서 편히 휴식을 취했어야 하는데 큰일이야."

나형석 장군이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자 김재덕 대령도 이를 악물었다.

"장군님, 특공대를 투입하고 싶습니다."

비장한 표정으로 작전승인을 요구하는 핸들러를 보고 김재덕 대령이 경악했다.

"응? 뭐야 핸들러 소령, 지금 제정신인가?"

김재덕 대령의 호된 질책에도 핸들러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대령님, 부상자가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하늘을 보십시오. 곧 눈발이 날릴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전투가 벌어지는 데도 베를로니아의 성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질 않습니다. 안의 상황도 모르는데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군님! 갈대숲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핸들러 대위의 절박한 주장에 나형석 장군도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허가한다."

"감사합니다. 장군님!"

기뻐서 돌아서는 핸들러에게 나 장군이 명령했다.

"이봐 소령~!"

"왜 그러십니까, 장군님."

"대신, 죽지 마라."

말을 하고 다시 망원경으로 눈을 돌린 나 장군을 보며 핸들러가 거수경례를 했다.

참호를 내려간 핸들러 대위 앞에 천여 명의 이지 중대원들과 특임대 대원들이 중무장을 한 채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제군들, 지금이라도 빠질 사람은 빠져라. 마지막 기회다!"

"......."

"아무도 없나? 모두 멍청한 놈들이군, 죽고 싶어 안달난 놈들, 가자!"

끔찍한 괴물들과 혈전을 벌였던 그 갈대숲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숲으로 사라지는 대원들의 머리 위로 베를로니아의 검은색 성벽이 음산하게 서 있었고 성벽 안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수히 많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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