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드러나는 이사벨라의 검은 음모!
"호호호호! 드디어... 드디어... 이제 의식을 시작한다! 서둘러라. 별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어!"
이사벨라 여왕이 제단 위의 해시계 모양을 한 반원의 구체 주변에 있는 그림자들이 구체의 구멍과 일치하게 되자, 여사제들을 재촉했다.
계단 위의 여사제들이 제단의 위로 올라와서 덮여 있던 천을 걷어냈다.
'용이잖아. 아니,여기서는 드래곤이라고 한다고 했지. 그럼 이사벨라 여왕이 숭배하는 것이 드래곤이란 소리인데, 드래곤을 믿는 종교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데. 어? 저건 또 뭐하는 거지?'
호크는 여사제들이 제단 아래에서 끌고 나오는 구슬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100여 명의 사제들이 끝도 없이 구슬을 꺼내오고 있었다.
밑에서부터 구슬을 쌓아 갔는데 그 모양이 피라미드 형태의 구슬 탑이 되었다.
마지막 한 개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여사제가 조심스럽게 올려놓자, 구슬 탑에서 진동이 일어나며 우는 소리가 났다.
호크는 저 구슬들이 뭔가 자연을 역행하는 기운을 품고 있는 것을 느꼈다.
깨달음 이후로 감각이 훨씬 예민해져서 작은 변화나 사물의 본질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뭘까? 저 구슬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이사벨라 여왕이 제단에서 내려와 목에 걸린 금속 목걸이를 벗어서 구슬 탑에 던졌다.
당연히 구슬에 부딪히면 땅에 떨어졌어야 하지만, 목걸이는 구슬 탑 가까이에서 멈춰서 떠 있었다.
구슬들이 또다시 기이한 소리를 내자 금속 목걸이 부서지며 조각조각 나더니 구슬 탑 주위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 갑자기 멈추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깊숙이 박혔다.
그때 바닥에서 빛이 올라오면서 바닥에 낯선 문자와 도형들로 이루어진 원형 그림이 구슬 탑을 중심으로 새겨졌다.
그 그림과 문자들은 호크가 처음 폴렌시아에 와서 트로이얀의 숲속에서 본 그림과 문자들과 같았다.
6개월 동안 동굴 속에서 매일 보아왔기에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사벨라 여왕의 울부짖음에 호크도 바짝 긴장해야 했다.
뭔가 벌어지려 한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여사제들이 구슬 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를 잡았고, 손에는 날이 선 검들을 들고 있었다.
이사벨라 여왕은 우는 것인지 노래를 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며 춤을 추었다.
빙글 빙글 돌 때마다 주변의 기운이 변했다.
숲 전체에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여사제들의 검도 위로 올라갔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지던 여왕의 춤이 일순간에 멈추자 여사제들의 검이 자신들의 목으로 향했다.
100여 명의 여사제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에 새겨진 그림들을 따라서 흐르면서 붉은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림이 핏물로 채워지자 구슬 탑의 구슬들이 모두 공중에 떠올랐다.
"야누아리우스(Januarius-로마 신화 속에 나오는 모든 문의 신 흔히 야누스라고 알려져 있다)! 어둠과 빛의 문지기여 당신의 힘을 원하오니 그대의 권능으로 금지된 곳의 문을 열어주오!"
"이, 이게 뭐야! 으윽! 공간이... 공간이 갈라진다."
대기가 들끓고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호크는 제단 위의 공간이 갈라지며 상상도 못할 거대한 존재가 나오는 것을 느끼고 그 힘에 압도 되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칼로 자른 듯 잘라진 검은 공간의 틈에서 수염이 가득하고 몸에는 로인클로스(고대 페르시아시대 남자들의 의복 하얀 천을 허리에 둘러서 입는 바지 대용의 의복)를 걸친 건장한 키가 거의 10여 미터 정도의 거인이 걸어 나왔다.
[누군가? 잊혀진 고대의 문지기를 불러내는 자가?]
"오~! 오~! 영원의 약속을 지키고 계시는 분이시여, 미천한 것의 부름에 답하여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네가 나를 불러냈느냐?]
"그러하옵니다."
이사벨라 여왕은 기쁨에 몸을 떨며 두 팔을 벌려 의문의 존재를 열렬히 환영했다.
[무엇을 원하는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여!]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가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자 바닥에 엎드린 이사벨라 여왕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미천한 제가 그대를 불러내어 죄송하오나, 당신은 저의 부탁을 들어주실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이사벨라의 도발적인 물음에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건방진 것!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쿰 클라비(cum clavi-라틴어로 열쇠로 잠긴 방 이라는 뜻. 음식과 물도 넣지 않고 가둬 두던 곳이다)를 열어주십시오!"
이사벨라 여왕의 요구에 여유를 부리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쿰 클라비(cum clavi)를 열어 달라... 그 뒷감당을 할 수가 있겠느냐?]
잠시 뜸을 들인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목소리가 냉랭해졌다.
"이미 천년의 시간을 고통 받았습니다. 무엇을 더 잃을 게 있겠습니까?"
[음.......]
고민하는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목이 돌아가자 뒤편의 다른 얼굴이 나타났다.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지만, 그는 문의 양쪽을 나타내는 두 얼굴의 존재였다.
[쿰 클라비(cum clavi)를 열어 그 존재들을 꺼내면 대신 그 방을 채워 넣어야 한다. 무엇을 대신 넣을 것이냐?]
새로 나타난 얼굴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인간의 영혼입니다."
차갑게 내뱉는 이사벨라의 말에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두 번째 얼굴이 냉소하며 손을 벌렸다.
[여전히 인간에 대한 증오는 지독하구나! 그럼 약속은 지켜질 것이다.]
원형의 그림 위에 떠 있던 구슬들이 비명을 질렀다.
숨어서 지켜보던 호크는 귀를 막아야만 했다.
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고음의 끔찍한 비명이 숲속을 가득 채웠고 빛이 터져 나오며 구슬에서 하얀 영체들이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걸 몰랐느냐? 어림도 없다.]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비웃음에 이사벨라 여왕은 표독스런 얼굴로 맞받아쳤다.
"그깟 인간의 영혼 따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 이지를 상실한 채 서 있는 수만의 사람들을 보며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쇠가 갈리는 거친 음성이 낮게 깔리며 손목을 칼로 그어 흐르는 피를 공중에 뿌렸다.
그녀의 피는 방울방울이 되어 흩어졌다.
점점 커지는 방울은 구슬이 되었고 구슬은 사람들 머리 위에서 맴돌았다.
구슬이 도는 것을 멈추고 빛을 머금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여름철 반딧불이 수풀에서 날아오르듯 사람들의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구슬 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영체로 변해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광경에 호크는 경악했다.
결국 그녀는 세린디아의 여왕도 아니었고 인간도 아니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비록 전쟁 중인 적국의 사람들이었으나, 같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안 돼! 그만둬."
다급하게 소리를 지른 호크가 석상 뒤에서 뛰쳐나왔다.
두 손에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Zero)가 들려 있었다.
손을 떠난 두 자루의 제로(Zero)가 호선을 그리며 구슬들에게 날아갔다.
검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한 번에 수백 명씩 쓰러지고 있었다.
이제 곧 제로가 구슬들을 박살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어딜 감히! 신성한 약속의 지킴을 방해는 거냐.]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손짓에 맹렬히 구슬에게 날아가던 제로가 반대 방향으로 튕겨졌다.
제로의 검 손잡이와 호크의 손에 연결되어 있는 영혼의 쇠사슬을 호크가 잡아당기자 거친 소리를 내며 호크에게 돌아왔다.
"빌어먹을! 그 따위 약속은 개에게나 줘버려!"
[태고로 부터의 약속이며 이를 지키는 것은 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신성한 의무이다. 이를 방해하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의식을 방해받아 분노한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리며 얼굴이 돌아갔다.
또 다른 얼굴이 나타나며 호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대는 누군가? 인간이여.]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호크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크하하하하!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가, 나를 웃기게 한 자네의 이름을 알고 싶네만.]
"이름을 알려주면 이 미친 짓을 그만둘 거요?"
[흠, 그건 힘들겠는데, 아니 불가능하지. 대신 자네의 그 하찮은 영혼은 건드리지 않겠네.]
"젠장!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렉스 호크라고 부른다."
호크를 내려 보던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가 무릎을 굽히고 호크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제로를 가슴에 교차시키며 잔뜩 긴장을 한 호크를 보며 재미있는지 또다시 크게 웃었다.
그러자 반대편의 얼굴이 또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안 돼! 절대 안 된다고!]
아주 심하게 짜증을 내며 인상을 쓰자 웃고 있던 반대쪽 얼굴이 돌아왔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재미있을 거 같은데, 안 그래?]
[안 돼 ! 절대 안 돼! 지난번에도 네 말을 들었다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천년이나 고생했는데 또다시 그 짓거리를 하라고 난 못해!]
[이런 어차피 할 일도 없지 않은가? 덕분에 심심하지 않게 잘 지냈잖아! 그리고 이 친구 그와 닮았어!]
[응? 어디... 이런 저 검은... 젠장! 그의 자식인가?]
[하하하, 이제 안 건가? 일찍도 알아챘군,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 얼마나 된다고 그의 자식일 수 있겠나. 아마도 먼 후손쯤 되겠지.]
[빌어먹을! 아직은 인간들이 멸망할 때가 아닌가 보군.]
[미르네보가 이 사실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되는데.]
[난 벌써 머리가 아파온다고. 젠장! 어떻게 할 셈이야?]
[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계집과의 약속은 지켜야지. 태초의 맹세를 어길 만한 배짱은 우리에게 없으니까.]
[그럼, 어서 끝내고 돌아가자고. 인간들의 냄새를 맡아서 그런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해!]
[허허허! 그래. 하지만 아직 인간의 영혼들이 부족해!]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의 말에 뒤를 돌아보니 이제 땅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영체들이 땅에서 올라와 구슬로 흡수되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무 놀란 호크가 영혼을 잃어버려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있는 힘껏 뛰었다.
수만 명의 시체를 넘어 그 끝에 다다른 호크는 눈앞에 펼쳐진 비극적인 참상에 입을 벌린 채 손을 떨었다.
끝에 도달해보니 그 밑으로 커다란 분지가 있었고, 분지에 수십만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도 하나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이, 이 개 같은 년! 그만두지 못해! 으아아아아!"
너무 화가 나서 뒤로 돌아선 호크의 전신에서 투기(鬪技)가 불타올랐다. 제로를 가슴에 교차한 채 이사벨라를 향해 달렸다.
깨달음 이후로 한 단계 더 성장한 호크의 몸놀림은 이제 이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결계에 더 이상 구속받지 않았고,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서 지상에서 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이사벨라 여왕 앞에 도달한 호크의 허리가 뒤로 젖혀지며 두 손의 검을 머리 위로 올렸다.
눈을 감고 하늘에 손을 든 채 주문을 외우고 있는 그녀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 방해로 맥없이 바닥을 굴러야 했다.
"크흑! 이런 빌어먹을 자식! 왜 방해하는 거냐?"
[쯧쯧,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했나? 내가 그리 일러주지 않았나. 이건 태초의 맹약이라고 무조건 이행해야 하는 거야. 불변의 진리이지. 곧 끝날 테니 잠시만 기다리게.]
"야, 이 미친놈들아, 수십만의 생명을 저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너희들이 무슨 권리로 빼앗아가는 거냐?"
발악하듯 악을 쓰는 호크를 보며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가 고개를 숙여 호크에게 윙크를 했다.
[그까짓 인간의 삶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지. 자꾸 귀찮게 하면 아까의 약속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어!]
으름장을 놓는 문지기 야누아리우스(Januarius)를 보며 호크는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호크의 귀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깨문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맥없이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 검을 잡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나머지 한 손도 더해서 두 팔을 앞으로 벌리니 더 많은 영체가 더 빠른 속도로 흡수되었고, 구슬에서는 슬픈 비명성이, 영혼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릎을 꿇고 검을 땅에 박은 호크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 왜 이런 거냐... 도대체 인간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가래 끓는 목소리로 절규하는 호크를 보며 이사벨라가 냉소했다.
"너희 족속들은 버러지야. 그것도 존재 의의가 없는 것들이지. 은혜도 모르고 배반을 일삼는 것들. 이제 천년의 굴욕에서서 벗어나 너희 족속에게 징벌할 시간이다. 우리의 노여움이 얼마나 큰지 폴렌시아는 화염 속에 불타며 깨닫게 되겠지. 오호호호호!"
허리를 잡고 통쾌하게 웃는 이사벨라를 보며 호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다 갑자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사방이 조용해졌다.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너무나 조용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무시무시한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호크는 뒤를 돌아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광경이었으니까.
[천년 만에 고대의 오래된 약속을 요구한 이여, 쿰 클라비에 대한 대가를 받았으니 이제 천년의 세월 동안 닫혀 있던 곳을 열어주마. 네가 만나보기 위한.......]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수십만이나 되는 인간의 영혼을 취한 대가로 이사벨라 여왕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 쿰 클라비를 열어주었다.
쿰 클라비, 그것은 문(門)이었다.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두 손을 모았다가 바닥에 조심스럽게 펼치자 빈 손이었던 손에서 석조 문이 나타났다.
하얀 대리석 기둥 위에 뱀들이 얽혀 있는 조각이 위에 올려져 있었다.
[자, 이제 내 할 일은 끝났다. 나는 이제 안식의 시간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사벨라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울고 있었다.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호크에게 무릎을 꿇어 작게 속삭였다.
[얼마나 알고 있나?]
"뭘 말이요?"
[신들의 장난에 대해서 말이지. 그 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네도 이 웃기지도 않는 장난에 뛰어들었다는 말이잖아?]
"장난? 당신은 이게 장난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모든 것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요, 물론 당신은 그 의미를 모르겠지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호크는 이사벨라 여왕이 도대체 저기서 무엇을 꺼내려고 하는지 궁금해서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호크를 문지기 야누아리우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똑똑한 미르네보도 미처 생각지 못한 변수들이 생기고 있다라... 하하! 정말 재미있어. 재미있다고. 하하하! 좋아, 나도 그 일에 한몫 보태주지. 이렇게 재미난 일에 끼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할 테니까.]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커다란 손을 호크의 손에 들린 혼돈 블레이드 제로로 가져갔다.
손끝에서 불꽃 나비가 솟아나더니 호크 주위를 맴돌다가 제로에 부딪히니 검신이 불꽃에 휩싸이며 검명(劍鳴)이 울렸다.
검을 쥔 손이 아플 정도로 떨리던 진동이 멈추자 아무것도 없던 검신에 복잡한 도형과 문자가 나타났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도대체 이게 뭐야?"
[후후후! 그 검의 봉인을 풀어준 걸세. 앞으로 자네의 모험에 작은 힘을 보태준 거라고 생각하라고. 또한 이 야누아리우스님의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자, 그럼 알렉스 호크라고 했나. 자네의 활약상 멀리서 지켜보겠네. 하하하하!]
자신이 나왔던 공간으로 사라지기 직전 문지기 야누아리우스의 반대편 얼굴이 호크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찮은 인간아,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알아? 잘해보라고 심심한 우리를 즐겁게 해봐!]
갈라졌던 공간은 거짓말처럼 원상태로 돌아갔다.
낯설게 변한 검을 바라보던 호크는 지옥의 부저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리가 나는 곳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이사벨라가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놓고 간 문 앞에서 이상한 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너희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야. 더구나 사람의 목숨 가지고 장난쳤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이사벨라!"
"하찮은 인간이 감히 내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역겹군.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뭐 어쨌든 네가 몽뜨 요새를 치는 바람에 계획이 좀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 덕분에 고대문자를 해독하는데 전력 투구를 해서 문지기 야누아리우스의 비밀을 풀 수가 있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까?"
냉소하는 이사벨라가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제단 위에 서서 호크를 내려보는 그녀는 문의 기둥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닥쳐! 대체 네 속셈이 뭐야?"
"속셈? 호호호호~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내가 아직도 이 보잘것없는 인간 왕국의 여왕으로 보이는 거냐? 나는 위대한 존재다. 감히 너희들 따위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훗! 헛소리 하고 있네. 그렇게 위대한 분이 아까는 그 괴물한테 엎드려 절했냐? 더 이상 너하고 말을 섞는 것도 시간 낭비다. 어서 항복해라! 베를로니아 밖에는 케린버그의 정예군대가 이제 곧 진격을 할 거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는 비극을 피하려면 어서 항복해!"
검을 그녀에게 향하게 하고 소리치자 오히려 이사벨라는 미친 듯이 웃었다.
"세린디아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가 아냐. 내 목적은 다 이루었으니까."
"뭐야?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하는 짓을 보니 결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그 괴물을 불러내서 무슨 짓을 한 거냐. 너도 운명의 시계가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는 해? 네가 바로 두 번째 낙인의 징조라고, 알고 있어?"
"오호호호~ 운명의 시계? 두 번째 낙인? 어린애 장난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 정체를 알고 싶다니 너에게 천년만의 부활을 보는 영광을 주도록 하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잘 보거라!"
지팡이를 문 안으로 던져 넣자 문 안에서 바람이 거세게 불어 나왔다.
강한 바람에 호크도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려야 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세찬 바람에 몸이 뒤로 밀릴 지경이었다.
바닥에 있는 시체들도 바람 때문에 이리저리 굴러갔다.
"제, 제길! 이번에는 또 뭐야?"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안에서 갑자기 뭔가 불쑥 튀어 나왔다.
그것은 용이었다.
밖으로 나오기 힘이 부치는지 나오는 모습이 힘들어 보였다.
겨우 겨우 한 마리가 밖으로 나오며 바닥에 쓰러졌다.
한 마리가 나오자 바람의 세기도 줄어들었다.
그 뒤로 또 한 마리가 이미 몸의 반쯤을 밖으로 내밀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마리가 모두 나오고 나자 무섭게 불던 바람도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문도 점점 그 모습이 흘려지더니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두 마리의 용은 기운이 없는지, 그저 눈을 껌뻑이며 일어서려 애를 썼다. 전설에서 듣던 것보다 크기가 너무나 작았다. 사람의 두 세배 정도 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뭐, 뭐야? 정말 용이야. 이 폴렌시아에는 별의별 괴물이 다 있구나."
호크가 다가오자, 이사벨라가 뛰어내려와 앞을 막아섰다.
"자, 이제 보았겠지. 어리석은 인간아, 어서 무릎을 꿇고 숭배해라. 중간계의 지배자이며 모든 만물을 주인이신 드래곤 로드이시다."
이사벨라가 호크를 비웃었다. 거만하게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에게 훈계하는 이사벨라가 호크는 너무 기가 막혔다.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겨우 도마뱀 새끼 가지고 나랑 장난 하자는 거냐. 그래 겨우 도마뱀 두 마리 구하자고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이다니, 도저히 너는 용서할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지,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다니, 옴 하니크 디 하르!"
기운이 빠져 허덕거리는 드래곤에게 다가가던 호크의 발아래에서 나무 넝쿨이 솟아나더니 수십 가닥의 넝쿨 줄기가 호크를 공격했다.
빠른 속도로 호크에게 달려드는 넝쿨 줄기는 날카로운 창처럼 위협적으로 호크의 전신을 노리며 짓쳐 들었다.
이사벨라는 곧 꼬치신세가 될 호크의 모습을 예상하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수를 너무 많이 했다.
서걱!
호크가 손에 든 제로를 위아래로 휘두르자 넝쿨들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말라비틀어지더니 흙으로 변해버렸다.
"헉!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요사스러운 것 같으니라고 역시나 생긴 것처럼 노는구나."
열 받은 호크가 가까이 다가가자 몹시 당황한 이사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정체가 뭐냐? 이곳은 고대 신들의 도시 이곳에서는 마나를 쓸 수가 없는데, 어떻게 너는 아무렇지도 않지. 그린로즈 기사들도 이곳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데 너는 검에 마나까지 불어넣다니, 누구냐? 너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사벨라를 보며 호크는 비웃음 흘렸다.
"병신,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세상이 네 뜻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야, 알아? 뭔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네가 하는 짓을 막지 않으면 세상에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분명한 일, 네가 한 악업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해. 너와 그 도마뱀들은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니까, 부디 다음 생에는 착하게 태어나기를 바란다."
호크가 혼돈의 검 제로를 머리위로 들어올리자 검신이 붉게 불타올랐다.
세상의 모든 악(惡)을 태워버릴 것처럼 이글거렸다.
"이... 얼마나 오랜 세월을 기다려왔는데 호락호락하게 당하지는 않아! 드리아 오훔 아센 크리아 센!"
이사벨라의 주문과 동시에 호크의 검이 앞으로 내쳐졌고,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불의 기운이 뱀처럼 무섭고 빠르게 땅을 타고 뇌전(雷電 )처럼 짓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얼음 기둥이 수없이 솟아나고 겹겹이 싸이면서 벽을 만들었다.
두 개의 힘이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으아아아악!"
이사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불과 얼음이 충돌하자 그 영향으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가라앉고 옷이 거의 찢어져 반라의 옷차림이 된 이사벨라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일어섰다.
"이, 이럴 수는 없어! 얼마나 오래 기다려 왔는데, 이럴 수는 없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힘겹게 호흡을 하고 있는 드래곤들에게 기어가는 이사벨라가 애처로워 보였다.
"후~ 권 상사님의 스승님이 아니었으면 지금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은 이사벨라가 아니라 나였겠군."
깨달음을 얻고 나자 전신을 압박하던 이곳의 기운이 오히려 호크에게는 득이 되었다.
마나를 제어하는 이곳의 지형 특성이 순수한 기운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체득하게 해주게 되었고, 문지기 야누아리우스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에 혼돈의 검 제로의 봉인을 풀어준 것이 방금 펼친 엄청난 위력의 공격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사벨라가 필사적으로 기어가 겨우 드래곤의 곁에 다가가자 그녀의 볼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시여, 죄송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지만, 제가 가진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용서하소서! 천년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가는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이사벨라를 보면서 소름끼치는 오한이 든 호크는 절대로 그녀를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호크가 검을 들어 드래곤의 심장을 겨누자 이사벨라가 몸을 들어 자신의 몸으로 드래곤을 감쌌다.
"나를 먼저 죽여라!"
순간 호크는 망설였다.
분명히 그녀가 운명의 시계를 돌리는 두 번째 낙인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준비해논 안배 치고는 너무 쉽지 않은가?
첫 번째 낙인을 깰 때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투를 벌였는데 호크가 그때보다 많은 성장을 했다고 해도 이것은 너무나 쉬웠다.
그리고 예언과도 맞지 않았다.
'이교도(異敎徒)의 왕은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젠장! 고민할 것 없지. 아무 일도 안 생기면 좋은 거니까. 부디 극락왕생해라!"
검을 든 손이 머리 위로 높이 올라갔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이사벨라는 두 눈을 감았다.
"머, 멈추게~ 호크!"
조금 전만 하더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던 드래곤이 어느새 몸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검을 내려치려던 호크도 깜짝 놀랐다.
어떻게 저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한 발 뒤로 물러선 호크가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를 알지?"
"그야 우리는 구면이니까"
"누가? 우리가?"
"하하하, 내 모습이 이러니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겠지."
드래곤의 모습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태로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호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 빌어먹을......."
"하하하! 이제 알아보겠나!"
"당연하지. 이 사기꾼들아!"
그들은 다름 아닌 드래곤 산속에서 만났던 아레네스와 로테니어스였다.
"사... 크허허허허허! 오해가 있는 거 같네만, 그거야 대화로서 풀어나가면 되지 않겠나?"
아레네스가 그날 그때처럼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자를 다루듯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다.
그 뒤에 서 있는 로테니어스는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당신 동료는 그렇지 않은 거 같은데."
호크가 검을 들어 로테니어스를 가리키자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로테니어스가 폭발했다.
"뭣이라! 이 천하디 천한 생물이 감히 위대한 존재이신 드래곤에게 감히 뭐라고! 이......."
발작하는 로테니어스를 아레네스가 뜯어 말렸다.
로테니어스가 왜 말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레네스는 그저 고개를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려 깊은 아레네스의 행동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로테니어스가 분을 삭이고 돌아섰다.
"하하하! 이 친구가 다혈질이라서 자네가 이해하게나. 그나저나 낙인을 회수하는 일은 잘 안되었나 보군."
어색하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아레네스의 뚫어지게 바라보는 호크의 시선은 만년을 살아온 고룡 아레네스마저도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하하, 젊은 친구가 웬 눈빛이 그리 살벌한가. 자, 자. 그러지 말고 우리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는 게 어떤가?"
"역시 사기꾼 새끼들이야, 이 개쉐이들. 왜 이곳에서는 마나가 모이지 않아서 힘드냐?"
"헉!"
아레네스는 표정의 변화가 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성질 급한 로테니어스가 단박에 속내를 드러냈다.
"그래서, 밖으로 끌고 나가서 아작내시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이제부터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아주 자세히 해 주셔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 거짓말을 해도 죽는다. 대충 대충 말해도 죽는다. 진실만을 말해라, 아니면 모두 죽는다."
말을 마친 호크가 기운을 전면으로 폭사하자 아레네스와 로테니어스가 견디지 못하고 뒤로 몇 걸음 달아났다.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이사벨라가 기겁하며 자신도 성치 않은 몸으로 아레네스를 부축했다.
그러나 아레네스는 기겁하며 이사벨라의 손길을 거부했다.
"어딜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느냐!"
"악!"
거칠게 밀쳐진 이사벨라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 아버지시여, 왜 제게 이러시는 거죠? 저는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이날을 위해서 노력해 왔는데 어째서, 어째서......."
"시끄럽다. 그것은 당연한 너의 의무였다. 그것도 제대로 못해낸 주제에 어딜 감히!"
아레네스는 온갖 고생을 하고 그들을 쿰 클라비의 감옥 속에서 꺼내준 이사벨라를 냉대했다.
마치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양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드래곤에게 그런 인정이란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불쌍한 이사벨라 과연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아버지의 따뜻한 부정(父情)이라도 느끼길 원했을까?
하지만 아레네스는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해야만 했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요, 어머니와 전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살았는데......."
"시끄럽다. 그저 젊은 날의 유희의 부산물일 뿐이야. 너는!"
"그럼 지난 날 제가 유일한 드래곤 일족의 희망이라며 용기를 주시던 그분은 당신이 아닌가요?"
처연한 표정으로 울부짖는 그녀를 외면하고 돌아선 아레네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너는 드래곤도 인간도 아닌 존재, 어쨌건 천년의 세월을 갇혀 있던 우리가 다시 중간계로 나올 수 있도록 했으니 그 보답은 하마."
"제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어요, 제가 바란 것은......."
이사벨라가 흐느끼자 짜증이 가득한 얼굴이 된 로테니어스가 화를 냈다.
"시끄러워!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의식을 행하기 전에 고대도시의 크리스탈을 깨뜨렸어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힘을 쓸 수 없으니 감옥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매한가지잖아!"
"로테니어스~ 제발 그 입 좀 다물게!"
일이 복잡하게 꼬이자 아레네스도 견디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좋아, 모든 걸 다 이야기해주지. 대신 진실에 대한 조건은 말 안 해도 알겠지!"
"들어보고 나서."
삐딱한 호크의 말에 수치심으로 입술을 깨무는 아레네스였지만, 결국은 입을 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래된 비밀 하나를.......
"그 옛날 이 폴렌시아는 수많은 인간의 작은 나라들과 유사인종인 엘프와 드워프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갔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네. 고대의 사라진 도시를 발견한 인간들의 나라 중 하나가 열어서는 안 될 고대의 비밀을 찾아냈지. 그것이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네. 힘을 갖기 시작하자 인간 내면의 본성이 드러났고, 그들은 다른 생명들을 짓밟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네. 고대문명의 무기들을 손에 넣은 그들은 무자비하게 다른 이를 점령해 갔고, 이윽고 중간계는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인간과 유사종족 모두 전멸에 이르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중간계의 관리자인 우리들 드래곤은 당연히 이 일에 개입하게 되었지. 우리는 우리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고대 문명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그 인간 왕국과 전쟁을 벌였고 양쪽 다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지.
정말이지, 그때는 이 폴렌시아가 거의 페허가 되다시피 했어. 다시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그 지경까지 왔는데도 그들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네. 마지막까지 싸우기를 포기 하지 않고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기까지 동원해서 우리 일족과 마지막 전쟁을 하려 했어.
만약 그 무기가 사용되었더라면 자네나 이 땅은 존재하지 못했겠지. 마지막 순간에 그분이 나타나셨네.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신 창조주 쥬(Ju)께서 이 땅을 창조한 이후 처음으로 현신하셨네.
당신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이 멸망해가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슬퍼하셨네. 눈물은 빗물이 되어 이 땅을 적셨고, 울음소리는 번개가 되어 대지를 강타했지. 아무것도 무사할 수 없었네. 그분의 분노 앞에서는 빗물은 곧 대지를 삼키는 홍수가 되어서 모든 것을 덮어버렸고 번개는 응징의 창이 되어 모든 것을 부숴버렸지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일족들은 그 창에 점점 숫자가 사라졌고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였지. 이대로는 서로 공멸(共滅) 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지.
그래서 우리는 타협을 해야만 했네. 싸움을 멈추고 고대인들의 유물인 그들의 도시에 숨어 창조주의 분노를 피하기로, 하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했어, 그런데 인간들은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여유롭더라고."
"너희들을 속였군!"
"그래, 맞아. 쿰 클라비라는 고대의 문을 열었지. 열쇠의 방이라고 불리는 한줌의 빛도 없는 어둠의 공간에 밀어넣어 버렸어. 위대한 생명체라며 떠벌이던 우리 일족이 인간의 세 치 혀에 모두 영원 속에 갇혀버린 거지. 무려 일만 년의 긴 시간 동안......."
자조하듯 씁쓸하게 말하는 아레네스는 조금은 슬픈 눈을 하고 멍하니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잠깐! 뭔가, 아귀가 안 맞는데, 분명 이곳 사람들은 드래곤을 천 년 전까지 기억하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거지?"
"후후, 모든 드래곤이 전부 쿰 클라비에 갇힌 것은 아니야. 몇몇은 창조주의 분노의 창을 피해 살아남았지. 그들은 일족의 전쟁을 반대하던 은둔자들이었어. 결국 그들이 이 땅에 살아남은 유일한 드래곤들이 되었지."
"그래? 그럼 그들은 왜 천 년 전에 사라진 거야?"
"그건... 그건 바로 우리들 때문이었네."
두 눈을 꼭 감은 아레네스의 얼굴은 회환의 후회 등이 점철된 복잡한 표정이었다.
"쿰 클라비에 갇힌 우리들도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었고, 밖에 살아남은 일족들도 우리를 구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지. 그래서 그들도 인간 세상에 나갈 틈이 없었던 거야.
그러던 중 우리는 쿰 클라비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전혀 없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것은 바로 고대인들의 유적지였어. 그곳을 통해서 잠시나마 우리는 폴렌시아에 있을 수 있었고 일족을 만나서 탈출을 위한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네."
말을 하면서도 씁슬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아레네스를 보며 호크는 일의 결과를 예측했다.
"잘 안 되었나?"
"그 정도가 아니었어. 남은 일족마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네, 고대인들이 유물 중에서 차원의 이동에 관한 고대문자를 발견한 일족이 그것을 남은 일족들과 힘을 합쳐 문을 열려고 했어. 그런데 우리는 그 문을 지키는 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지."
주먹을 꽉 진 아레네스는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놨다.
"태초의 맹세라나 뭐라나 그 무서운 존재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들을 한 줌 연기로 만들어 버렸다네."
호크도 문지기 야누아리우스의 무서운 힘을 떠올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럼 이 여자는 뭐야? 드래곤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이야?"
호크가 이사벨라를 가리키며 답을 요구하자 아레네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들어보였다.
"별거 아니네. 자네가 그 고대신전으로 들어왔듯이 가끔씩 그곳으로 우연히 들어오는 인간들이 있었지. 그때 들어왔던 인간여자와 나 사이에 생긴 잡종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여자의 머릿속에 세뇌시켜 놓은 것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네. 우리도... 아니 너무 잘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 단지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 빼고는 말이지."
호크가 정곡을 찔렀는지 아레네스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럼, 그날 나에게 이야기했던 여신 미르네보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나?"
호크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레네스가 당혹해 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그것은 진실이네. 우리 일족과 인간들의 전쟁이 발생한 것도 미르네보가 한 나라를 골라서 고대인들의 비밀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지. 단지 그것만으로 그녀는 창조주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무섭군. 인간이나 신이나 여자들의 질투심이란......."
모든 진실을 듣고 나자 허탈해진 호크는 갑자기 모든 게 허망하게 느껴졌다.
쓰러진 돌기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럼, 이제 저주는 끝난 건가?"
호크는 아레네스를 돌아보지 않았고 아레네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크도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아직 여신 미르네보의 저주가 끝나지 않았음을.
"그때 살아남은 인간들이 어떻게 쿰 클라비를 열 수 있었겠는가? 모두 그녀의 간교한 계책이었지. 우리가 모두 사라지면 그녀의 인간 말살 계획이 쉬워지니까. 창조주께서 우리를 만든 이유가 바로 중간계의 평화유지였으니까."
아레네스도 힘이 드는지 호크 옆에 와서 앉았다.
로테니어스도 그냥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많이 힘든가 보군."
"그래, 그때도 그랬지만 이놈의 도시에 들어오면 정말 무기력해지는군. 그래서 꼼짝도 못하고 걸려들었지 않았겠나."
"그래서 이제 인간들에게 복수할 참인가?"
별 의미 없다는 듯 툭 던진 호크의 물음에 아레네스는 편안한 얼굴로 힘없이 웃었다.
"아마 처음 백년 정도는 그랬던 것 같네 빈 허공에 대고 브레스를 죽을 때까지 내뿜던 어린 드래곤처럼 모두 밖으로 나가면 인간들을 모두 없애버리려고 작정했지. 그런데 얼마 전에 로드께서 돌아가셨네. 아니 스스로 생명의 불꽃을 꺼버리셨지. 우리 모두에게 충격이었고 그분이 남기신 말은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네."
"드래곤의 수장이 스스로 소멸하다니 의외로군. 그토록 대단한 존재께서 너무 오래 갇혀 지내셔서 지치신 건가?"
"만년을 넘게 잠을 자는 존재라네. 드래곤이란 말이지. 그러나 성격들이 너무 다르다는 게 문제였지. 광폭한 드래곤과 온순한 드래곤... 그런 존재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있으니 자연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네. 나이 어린 드래곤들부터 미쳐나가기 시작했지. 그걸 나이 많은 성룡들이 보아 넘기지 못했고, 결국 일족끼리 서로 상잔을 했지. 너무나 어이가 없는 일이지. 우리 둘은 그때 통로를 찾기 위해서 외부에 나가있었지 고대의 신전을 다녀온 우리는 정말 기가 막혔어. 인간들은 그럴 때 눈물을 흘린다지. 아마 내가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면 그때였을 거네.
로드께서는 비통해 하셨지. 결국은 죽어가는 어린 드래곤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심장을 꺼내셨지. 자기밖에 모르는 드래곤이 자신의 생명의 불꽃인 심장을 꺼낸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 숭고한 희생으로 많은 일족들이 살아남았지.
그때 그분이 유언하셨네. 우리는 자만과 이기심으로 지금의 사태에 직면했음을 그래서 멸종의 위기에 처했고 창조주로 부여받은 의무도 이행하지 못했음을 다시 세상에 나가게 된다면 절대 세상에 나가지 말고 세상의 조화에 힘을 쓰라고 말이야."
"그 말을 어떻게 믿지?"
호크의 말에 로테니어스가 발작했다.
"저 자식이 감히, 드래곤의 로드께서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거냐?"
"당신이?"
호크가 놀라서 물어보자 아레네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 그래서 문이 열렸을 때 모두가 나를 내보게 된 것이지. 문이 열리는 시간이 너무 짧아 우리 둘만 나오게 된 거야."
"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호크는 혼돈의 검 제로를 어깨에 툭툭 치면서 고민했다.
"이제 어쩔 건가?"
아레네스의 질문을 받은 호크가 되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떡하나, 지금 우리는 자네의 일 검도 받아낼 기운이 없는 처지인데."
오히려 왜 자신에게 묻는지 반문하는 아레네스를 보며 호크도 결심했는지 기둥에서 뛰어내렸다.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내가 뭘 도와주면 되지, 아레네스?"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말에 아레네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이런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놓고 진짜 통성명을 하지 못했군. 내 이름은 아레네스가 아니네. 베로니크라고 하네. 저 친구의 이름도 로테니어스가 아니라 테라토니어스라고 하지. 이름까지 속여서 미안하네."
"훗! 그 이름이 훨씬 더 낫군. 혹시 빼먹은 거 있으면 지금 다 하시지, 베로니......."
"베로니크네. 이제는 더 없네. 그게 다야. 내 부탁은 우리를 데리고 달라는 거네. 우리 힘으로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표정을 짓는 베로니크를 보며 호크가 쓴웃음 지었다. 몸을 일으켜 숲밖으로 나가려던 호크의 눈에 이사벨라가 들어왔다.
"그럼, 저 여자는 어떻게 할 거요?"
호크가 이사벨라를 가리키며 베로니크를 보자 잠시 갈등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와는 인연이 없는 아이네. 나와 함께 있을 수도 없고 이제 자기 삶을 찾아가야 하겠지."
"냉정하군. 이용가치가 없어지니까, 바로 버리는 건가?"
호크의 비웃음에 베로니크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네. 저 아이는 우리 세계에서 살 수가 없어. 차라리 인간세계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걸세. 우리 일족 누구도 이 애를 받아들이지 않을 테고, 설사 내가 데리고 있는다고 해도 결국은 상처받고 고통 받다가 죽게 될 거네. 우리와 인간의 혼혈들은 모두 그 끝이 비참하다네. 차라리 몸도 인간에 더 가까우니까 그 속에 섞여 살아가는 게 더 행복할 거야. 기억을 모두 지워주는 것이 내가 저애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겠군. 나의 마나 하트가 이곳에서 제대로 마법을 쓸 수 없지만, 그 정도는 이 반지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네."
베로니크가 커다란 반지를 낀 왼손을 들어올려 이사벨라의 머리를 짚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크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안 돼! 안 돼요! 그럴 수는 없어요. 나도 위대한 드래곤의 후손이라고요. 저를 버리시면 절대로 안 돼요!"
이사벨라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험난한 시련과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죽이면서까지 참고 견디어 왔던 건 오로지 자신이 위대한 드래곤의 일족이며 아버지를 구해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목마르게 기다렸던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하자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다.
"다,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냐. 나, 난 도대체 누구지? 여기는 어, 어디지?"
비틀거리며 제단 위를 도는 그녀를 보며 호크는 입 안이 씁쓸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녀 때문에 가족을 잃고 생명을 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크는 그녀를 곱게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미쳐버린 그녀를 보니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살아 숨 쉬는 존재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자, 그냥 갑시다. 너무나 많은 생명이 그녀 때문에 사라졌으니 그 죗값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이제 이곳을 나가지."
호크와 베로니크 그리고 테라토니어스가 이사벨라를 남겨두고 숲을 빠져나갔다.
이사벨라는 제단 위에 쓰려져 그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이지를 상실했는지 초점이 없었다.
제단 계단 밑으로 수십만 명의 시체가 널려 있는 가운데 이사벨라의 음침한 중얼거림이 지옥의 사자들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아까는 급해서 못 봤는데 정말 대단하네. 고대인들의 문명이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발전했는걸!"
숲속을 나와 고대인들의 도시를 가로질러 가던 호크는 잘 정비되고 구획된 도시의 건물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래,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지. 그러나 의문스러운 점도 너무 많아. 어째서 이렇게 발달된 문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 문명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야. 더욱이 궁금한 것은 창조주께서 말하시길 우리가 이 땅의 첫 번째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이 문명은 뭐냔 말이지?"
베로니크의 말에 호크도 의문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이봐~ 베로니크. 좀 물어봅시다. 도대체가 뭐가 뭔지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그럼 미네르보가 도대체 왜 복잡하게 낙인을 만들어 가며 일을 귀찮게 만든 거요. 중간계의 관리자인 당신들을 멸종 직전까지 몰고 간 초거대 문명을 다시 인간들에게 알려주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날 텐데, 이제 와서 복잡한 방법을 선택한 이유를 모르겠어."
호크가 진지한 표정으로 둘에게 눈빛을 보내자 베로니크가 힘이 드는지 돌 위에 잠시 앉아서 다리를 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제일 큰 이유는 신의 약속을 했다는 거지. 이전에도 자네에게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간을 증오하지만 절대 직접 개입하지 못하네. 그래서 인간에 대한 혐오는 더욱 극에 달했지 인간끼리 상잔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아래 전설을 만들어 일부를 인간들에게 알린 거지. 낙인을 모두 회수한 나라는 그 무서운 재앙으로부터 무사할 거라는 말을 퍼트림으로써 모든 작전은 계획대로 실행됐다고 봐야지."
"빌어먹을 계집!"
호크의 말에 테라토니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씹어 먹어도 부족할 정도지."
다시 힘겨운 걸음을 옮기던 중 베로니크가 광장의 분수대 위를 가리켰다.
"바로 저것 일세 저 크리스탈이 이 도시의 마나를 제어하고 통제하지 물론 지금은 마나의 자체를 묶어버렸지만 말이야"
호크가 혼돈의 검 제로(zero)를 들어 힘을 넣어주자 제로(zero)가호크의 손을 떠나서 크리스탈로 날아갔다. 검의 손잡이와 호크의 손에 연결된 영혼의 사슬이 크리스탈을 휘감았다. 크리스탈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지자 영혼의 사슬에 기운을 폭발 시켰다. 크리스탈이 감히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깨지면서 사방으로 크리스탈 조각이 비산했다.
"후우~ 결계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 군"
베로니크의 혈색이 좋아지는 듯하자 호크도 안심했다.
"이제 기운을 바로 회복하는 거야?"
호크가 궁금해하자 베로니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무려 만년을 갇혀 지냈던 몸이 어떻게 쉽게 회복 되겠나. 시간이 좀 걸리네. 하지만 크리스탈이 깨졌으니 우리가 이 고대도시에세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게 되었네. 고맙네 호크!"
베로니크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호크는 그가 정말로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았다. 호크와 두 드래곤은 도시가 끝나는 곳으로 움직였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궁금증을 베로니크에게 물었다.
"아차! 맞아. 그런데 말이야 ,난 이사벨라가 두 번째 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니 기운이 빠지는 걸"
호크의 난데없는 말에 베로니크가 어리둥절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몰라? 두 번째의 낙인 이교도의 왕이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그거 있잖아! 그거!"
"뭐라고, 허허허 말도 안 돼. 이교도의 왕이 이사벨라일 리가 없지... 이, 이런 맙소사!"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마나를 쓸수 없어 기운이 없다던 베로니크가 벌떡 일어섰다.
"뭐, 뭐야, 왜 그래?"
베로니크의 놀란 눈을 따라간 호크는 도시의 끝나는 부분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석상을 바라보았다.
그 석상은 여자의 얼굴에 해골들이 모자처럼 잔뜩 붙어 있고 팔은 수없이 많이 있는 석상이었다.
그런데 석상의 여자 얼굴이 이사벨라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헤카톤케이르! 저것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설마......."
베로니크와 테라토니어스의 입에서 서로 상반된 말이 튀어 나왔다.
"자네 설마?"
베로니크가 질책이 담긴 눈빛으로 테라토니어스 노려보자 고개를 떨구었다.
"네, 제가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설마하니 진짜로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테라토니어스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도 좀 압시다. 왜 그런지."
답답한 호크가 대답을 원하는 눈빛을 보내자 테라토니어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내 실수다. 이사벨라, 그 애가 우리의 염원을 실현시킬 좋은 인간들의 왕국을 찾아냈다고 하면서 인간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을 좋은 방법이 뭐냐고 하기에 종교 이야기를 얼핏 꺼내기는 했지만, 어떻게 헤카톤케이르를 찾아냈을까?"
"저게 뭐 어쨌다는 거야, 좀 쉽게 말해봐?"
호크의 짜증에 테라토니어스도 화난 목소리도 말했다.
"이런 멍청한 아무리 무식해도 어떻게 헤카톤케이르도 모른단 말이냐?"
"참 내, 모를 수도 있지, 별거 가지고 구박이야."
호크의 볼멘소리에 베로니크가 나섰다.
"저것은 마계의 악신이네. 결코 중간계에는 있어서는 안 될 존재지. 인간들에게는 아주 위험천만한 존재야. 아니, 생명체에게는 모두 위협적인 존재지. 그래서 우리 드래곤들도 절대로 헤카톤케이르와 접촉을 금지하고 있어."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한 호크가 머리를 긁적이자 베로니크가 한숨을 쉬었다.
"저 석상을 다른 곳에서도 봤나?"
베로니크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호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각해보니 수도인 베를로니아에서 곳곳에 세워져 있던 것 같은데, 하지만 크기는 훨씬 작고 색깔로 전혀 달랐던 거 같아."
"이사벨라, 그것이 일을 이렇게 크게 벌였을 줄이야? 마신의 강림이 아니, 더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다시 되돌아가야겠어."
테라토니어스가 두려움 떨면서 잘 움직여 지지 않는 몸을 일으키자 호크의 인상이 구겨졌다.
"젠장, 어째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더라니, 당신들은 이곳에서 나가! 이사벨라는 내가 맡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베로니크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조심하게. 만에 하나 그녀의 머리가 저 석상처럼 변했거든 무조건 도망치게. 알았나?"
손을 흔들어 대답한 호크의 몸은 나는 듯이 좀 전에 빠져나온 숲으로 향했다.
"낙인이, 낙인이 이사벨라였어. 예언의 실현을 막아야 할 우리가 오히려 낙인이 만들어지게 도왔다니......."
몸을 벌벌떠는 베로니크를 부축하며 테라토니어스가 베로니크를 설득했다.
"베로니크님!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헤카톤케이르가 각성한다면 저희부터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어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어디로? 이제 아나무나크마저 각성하고 성스런 돌이 이들과 함께하면 하늘이 열리고 그 저주 받은 괴물이 이 땅을 멸할 텐데. 어디로 간다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쿰 클라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어. 차라리 열쇠의 방에서 영원히 갇혀 있는 것이 나을 뻔했어!"
절규하는 베로니크를 테라토니어스가 억지로 끌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 힘을 되찾고 볼일입니다. 제가 실수한 일,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변한 테라토니어스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며 높은 계단을 힘겹게 걸어 올라갔다.
저곳만 벗어나면 그토록 염원하던 자유로운 세상, 그토록 꿈꾸던 중간계의 공기를 숨 쉬게 되는 것이었다.
비록 빛바랜 자유였고,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해서 한걸 음, 한 걸음 발을 옮겨 피라미드의 출구에서 벗어났다.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며 스쳐갔다.
가슴속에 마나하트가 힘차게 박동을 시작하자 구부정했던 그들의 허리도 펴지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려... 일만 년 만입니다. 감회가 어떠십니까? 베로니카님!"
두 손으로 가슴을 쓰다듬던 테라토니어스는 스스로 무너지며 바닥에 두 손을 짚는 베로니크를 보고 놀라서 부축했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가 편찮으십니까?"
베로니크의 손이 앞을 가리키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테라토니어스의 몸을 붙잡았다.
"이교도의 여왕이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라!"
베로니크를 부축하던 테라토니어스가 뒷말을 받았다.
베로니크가 가리키고 있는 곳에 수없이 많은 인간의 군대가 지평선을 가득 메우며 곧이라도 베를로니아로 진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 베를로니아 곳곳에서 불길이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