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20화 (20/55)

Chapter 20. 비밀의 지하도시

"여기가 정말 맞아?"

"네, 중령님! 스마일즈가 말한 약속장소가 이곳입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곳을 고를게 뭐야."

코를 막고 투덜거리는 호크의 말처럼 고약한 냄새 때문이 챠챠 대위도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있었다.

사이클론만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도 어떻게 안 돼요?"

"허허허! 미안하구나. 이건 시전자에게 적용되는 거라서 말이야."

사이클론 머리 주위로 뿌연 막 같은 것이 투구처럼 둘러싸고 있었는데, 그것이 냄새를 막아주는지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호크는 부러운지 괜히 시비를 걸고 있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로브 차림의 스마일즈가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왔다.

"아니, 공중 화장실 앞에서 뭐하고 계시는 겁니까? 한참을 찾아 다녔습니다."

"뭐하다니 여기가 접선 장소라며."

"네? 아니 제가 미쳤습니까. 이런 화장실에서 접선을 하게요. 분명히 빨간 지붕에 하얀 테라스가 있는 건물에서 보자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빨간 지붕......."

호크와 챠챠 대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공중 화장실 지붕이 빨간색 지붕이기는 했다.

호크의 눈이 가늘어지자 챠챠 대위의 눈은 어지럽게 좌우로 움직였다.

"대위......."

"네, 중령님!"

"아무래도, 자네 다음 근무지는 될 수 있는 한 아주 먼 곳이 될 거란 예감이 드는 걸."

"주, 중령님!"

거의 울상이 된 챠챠 대위가 애원하다시피 호크에게 매달렸다.

"누구세요? 어쭈, 이거 안 놔?"

두 사람이 옥신간신 다투는 모습을 보며 스마일즈는 정신적인 타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저분들이 우리 외인부대의 전설적인 호크 중령님과 비검(飛劍) 챠챠 대위님이 맞는 겁니까, 사이클론님?"

스마일즈의 물음에 사이클론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후후후~ 자네는 아직도 내가 사이클론으로 보이나?"

썰렁한 농담으로 결정타를 날린 사이클론이 옷자락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의 귀를 잡고 접선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스마일즈는 얼음이 되어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후로 작전이 끝나고 정신치료를 받았다는 후문이 전해졌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가 본 것들은 모두 군사기밀이었기 때문에 누구에게 이야기도 하지도 못하고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군 입장에서는 지휘관의 명성에 흠집이 날만한 것들은 덮어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긴장감을 푼다는 명목으로 행한 장난이 유망한 군인 한 명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작은 장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세 사람이 광장 분수대를 지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스마일즈와 같은 로브 차림의 남자들이 주위로 모여 들었다.

"다 모인 건가?"

"네, 그렇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여왕의 여사제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모을 겁니다."

"후! 이거 정말 살 떨리는 걸. 모두 알고 있겠지만, 앞으로 6시간 안에 우리가 특별한 보고를 하지 않는 한, 언덕 위의 본대가 전투를 개시한다. 이 안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지 우리가 알아내지 못하면 전우(戰友)들이 개죽음을 당한다. 우리 목숨을 걸고 이 작전을 성공해야 돼!"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좋아! 다들 명심했겠지. 그럼 이걸 삼켜라. 얼마동안 우리의 모습을 바꿔줄 거다!"

호크가 모두에게 빨간 구슬을 하나씩 건네주고 먼저 입안에 넣었다.

잠시 후 놀랍게도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검은머리의 호크가 금발의 하얀 피부를 가진 전형적인 세린디아 남자로 변했다.

호크의 변신을 본 다른 이들도 입안에 구슬을 물고 얼굴을 변형시켰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특이하게도 어린 남녀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사람들을 감시하듯 눈을 빛내며 모여든 군중 속을 살피고 다녔다.

허술하던 정문 경비와는 달리 이곳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아이들이 모두 사람들 주위로 쭉 늘어서자 내성의 문이 열리며 그린로즈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그 수가 100여 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들과 지긋지긋 한 싸움을 했던 호크는 그 머리색만 봐도 이가 갈렸다.

내성으로 들어가는 도개교까지 죽 늘어서서 모두 검을 빼들고 여차하면 목을 벨 심산인지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얼마나 살벌한지 고개를 제대로 드는 사람이 없었다.

호크 일행도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성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여사제의 날카로운 외침이 울리자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멈췄다.

"거기, 후드를 쓴 자들은 모두 후드를 벗어봐라!"

다름 아닌 호크 일행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린로즈 기사들이 주위를 에워싸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그때 호크가 손뼉을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 아~ 진정하시지요.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녁 장사도 때려 치고 여왕님을 위해 기도하려고 모인 백성들에게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소년소녀단원이 딸내미 성화에 나왔는데 무섭게 이러시지 마십시오."

호크가 눈짓을 보내자 무기에 손을 가져가던 부하들이 모두 후드를 벗고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사제의 두 눈이 녹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오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별 탈은 없는듯하니 들여보내라!"

여사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길을 텄다.

그날 시내에서 사람들에게 주워들은 말을 잘 써먹은 호크는 그때 두 남자가 너무 고마웠다.

작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들통이 날 뻔했으니, 그 순간만큼은 정말 간이 콩알 만해졌다.

내심 안도한 호크가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이건 호랑이굴이 아니라 사자굴이야. 조금만 발을 잘못 디뎌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옥의 수렁이구나. 후우~.'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에 침을 묻힌 호크는 내성으로 들어온 후에 서서히 일행을 뒤로 처지게 만들었다.

내성에 들어오고 나니 선두에서 인솔하는 여사제만 있을 뿐 입구에서 보았던 그린로즈 기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호크가 고개를 끄덕이니 한 명씩, 한 명씩 대열에서 몰래 이탈했다. 마지막으로 챠챠 대위가 코너를 돌면서 몸을 날렸다.

호크와 사이클론은 천천히 무리의 뒤에서 따라갔다.

내성은 외성과 달리 구불구불한 미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만일에 시가전이 벌어진다면 지리에 어두운 외인부대에 무조건 불리 할 것이 뻔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들어 선두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상한데요, 여기는 외부에 영향을 받지 않나 봐요. 마치 한여름 같은데요?"

"후우~ 그 정도가 아니야. 너는 아직 못 느끼고 있구나. 마나가, 마나가 괴로워하고 있다."

사이클론의 말에 깜짝 놀라 바라보니 사이클론의 숨소리가 거칠게 변해 있는 것을 알았다.

호크가 사이클론의 등에 손을 대고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운기하자 서서히 호흡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고, 고맙구나."

"아니에요. 그런데 할아버지 말대로 마나가 요동치고 있네요. 꼭 뭐에 놀란 것처럼 말이에요."

"그렇지, 한겨울에 여름 날씨에다 요동치는 대기의 마나까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틀림없어!"

확신하는 사이클론을 보면 호크는 이번 작전에서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에 땀을 가슴에 문질러 닦아낸 호크는 주먹을 꽉 쥐고 사이클론을 부축하며 걸음을 계속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앞으로 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곳의 비밀을 모르고 본진이 들이닥친다면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꽤 높은 계단으로 올라서자 피라미드 모양의 건축물이 나타났다.

뒤돌아보니 내성뿐만이 아니라 베를로니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숙에서 멀리 보이던 검은 실루엣의 건물이 바로 이 피라미드였던 것이었다.

사람들도 험한 길에 지쳤는지 제자리에 털썩 털썩 주저앉는 이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서자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빛 때문에 모두들 눈을 가리기에 바빴다.

서로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는 통에 아수라장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눈이 익숙해지고 주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세, 세상에나!"

각자의 입에서 저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밖에서 본 피라미든는 검고 칙칙한 건물이었는데, 내부는 온통 백색이었고 천장에는 하늘처럼 구름과 태양이 떠 있었다.

눈이 부신 빛의 정체는 바로 그 태양에서 내리쬐는 빛이었다.

여사제의 인도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꽤나 넓은 광장위에 신전 건물과 비슷한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입구에 서 있던 다른 여사제들이 사람들을 인계 받아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분명히 건물 내부인데 저 하늘은 진짜 하늘같아요. 태양도 그렇고요"

"후우~ 후우~ 나, 나도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이 건축양식은 디안 요새의 건축양식과 비슷하다는 것 정도밖에 모르겠구나."

사이클론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호크도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다.

"몸이 이상한데요. 기운이 쭉 빠지는 것 같고,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후우~ 후우~ 겨, 견딜 만하다. 너는 이런 것을 본 적이 있느냐?"

"네, 예전에 드래곤 산속에서 본 동굴 입구도 이것과 비슷했고, 아! 그러고 보니 행크 공작이 기간테스(Gigantes)를 보관하던 곳에도 피라미드 형태의 건물이 있었어요."

"설마?"

"설마, 뭐요?"

"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아니지. 그 많은 기간테스(Gigantes)를 찾아냈으니 어쩌면......."

"뭔데요?"

"고대유물... 잃어버린 신들의 왕국이.........."

세차게 몸을 떨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클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호크는 또다시 심법(心法)을 끌어올려 사이클론의 심장 부위의 마나를 진정시켜야 했다.

건물 안으로 깊이 들어오자 호크도 기(氣)를 운용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예전에 드래곤 산속의 신전에서 겪은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우~ 후우~ 괘, 괜찮다. 이제 괜찮아."

손을 들어 호크의 얼굴을 만지는 사이클론의 얼굴은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호흡은 거칠어지고 있었고, 얼굴을 갑자기 노인의 얼굴로 변해 버렸다.

8써클의 깨달음을 얻고 나서 젊어졌던 사이클론의 얼굴이 주름살이 가득한 할아버지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심장 주변에 마나 써클을 만들어 마나를 회전시키는 마법사인 사이클론은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면서 마법의 원천인 마나가 죽어가는 것을 느꼈다.

심장 주변의 마나 써클이 점점 움직임을 멈추자 심장이 조여드는 고통에 호흡마저 힘들어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단전에 마나를 쌓는 호크는 기운이 빠지는 정도에 그쳤지만, 마법사인 사이클론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호크의 눈물이 떨어졌다.

"후우~ 후우~ 다 큰 녀석이 울기는, 백작씩이나 되는 녀석이 창피하지도 않아?"

"그만 말하세요, 그만요. 힘을 아끼셔야 해요"

"하아~ 하아~ 아니다. 잘 들어라. 만에 하나 이곳이 고대의 신들의 왕국이라면 이사벨라는 하아~ 엄청난 힘을 얻은 것이 틀림없다. 서둘러 이 사실을 알려야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어. 호크야, 고대의 힘을 얻은 여왕과 상대하면 죽음뿐이다.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어. 어서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

의식을 잃어가는 사이클론을 보며 호크가 절규했다.

벌써 여사제가 이끄는 사람들은 계단을 통해 내려가고 보이지 않았다.

사이클론의 생명과 임무,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고통스런 기로에 선 호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임무냐 사이클론의 생명이냐, 그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호크에게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결국 대의를 선택한 호크가 사이클론을 업고 마나통신기를 작동시키기 위해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갔다. 챠챠대위에게 연락한 호크는 싸이클론의 상황을 알리고 후송을 명령했다.

"죄, 죄송해요 할아버지, 금방 돌아올게요. 힘내고 계세요. 돌아가시면 안 돼요!"

정말로 이사벨라 여왕이 위험한 무기를 준비했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라도 막아야 했기에 호크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계단을 나는 듯이 뛰어갔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자신이 늦으면 사이클론의 목숨도 언덕 위에서 진격 준비를 하고 있는 외인부대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에 있는 힘을 다해서 움직였다.

'장군님! 제발 기다려 주세요. 조그만 기다려 주세요!'

애타는 호크의 마음과 달리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었다.

호크의 몸도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부대 별 전투 준비 완료됐습니다. 장군님!"

"각급 지휘관들에게 작전 명령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캐논 포 및 중형무기들의 배치가 완료됐는지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충성!"

상황장교의 보고를 듣는 중에서도 나형석 장군의 망원경은 베를로니아에 고정되어 있었다.

"김 대령, 호크 중령에게서 아직 소식이 없나?"

"네, 아직입니다. 장군님!"

"후~ 답답하군. 앞에 낭떠러지가 있는데 보지 못하고 돌진하는 기분이야!"

"장군님, 그러나 오래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 빌어먹을 이놈의 날씨와 식량이 발목을 잡다니 미치겠군."

"헬렌 백작이 보내준 고구마도 벌써 바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새로 추가된 이방인 군대의 수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아니야,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게 못 돼. 그것보다 기간테스(Gigantes)라도 운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드워프들도 아직 인가?"

"네, 그것도......."

이래저래 확실한 답을 못주는 김재덕 대령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몽뜨 요새의 전투에서 적 기간테스(gigantes)를 수거해 탑승자의 생명을 갉아먹지 않고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개발에 들어갔지만, 메카닉적인 문제에 부딪혀서 진전이 없었다.

김 대령도 모든 것을 제쳐놓고 이 일에 매달리고 싶었지만, 당장의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을 외면할 수도 없었기에 개발은 더 지연되고 있었다.

나 장군도 얼마나 답답하면 그것까지 물어봤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김재덕 대령은 그저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찮아! 우리가 언제 갖출 거 다 갖추고 싸웠나! 이가 없으면 잇몸이 있다고 악으로 깡으로 싸워야지!"

입술을 깨무는 나 장군을 보며 김재덕 대령은 마음속으로 호크 중령의 작전이 부디 성공하기를 빌었다.

"헉! 헉!"

벌써 몇 개의 계단을 내려 왔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니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미 단전의 기운은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순수한 육체의 힘만 가지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계단을 뛰어 내렸다.

잠시 쉬며 숨을 돌리고 싶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이 낯선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준 친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사이클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고, 밖에는 그의 전우들이 사지를 향해 뛰어들려 하고 있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한이 있었어도 두 다리가 움직일 때까지는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어두운 통로의 끝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두 다리에 더 힘을 주었다.

"하아~ 하아~ 이사벨라, 여기에 숨어 있던 거냐?"

입구 벽면에 몸을 숨기고 안쪽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헉! 이, 이게 뭐야?"

크다 아니 거대하다고 해야 하나 수십 미터 아래쪽에 엄청난 크기의 도시가 있었다.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이 정비된 도시의 가운데에 들어올 때 본 것과 같은 피라미드가 보였다.

어떻게 내려갔는지 함께 들어온 사람들이 그 피라미드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냥 뛰어내리기에는 너무나 높았다.

입구의 벽면을 더듬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다행히 나무 넝쿨이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다소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다른 방도도 없었기에 계단이 있는 곳까지 물러섰다가 있는 힘껏 뛰었다.

"으아아아아!"

젖 먹던 힘까지 내서 점프를 한 호크가 실이 끊어진 연처럼 위태롭게 날아갔다.

털썩!

아슬아슬하게 넝쿨에 매달린 호크가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눈이 핑하고 돌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느껴지자 실수로 손을 놓을 뻔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호크는 이를 악물고 넝쿨을 타고 내려갔다.

바닥에 내려서니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길이 펼쳐졌다.

저 앞에 보이는 피라미드를 향해서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여유가 있었다면 주변 경치를 감상했겠지만, 지금은 조금도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고대 문명의 아름다운 건축물을 그냥 지나쳐 사람들이 사라진 피라미드에 도착하자마자 두 손, 두 발로 기어오르다시피 해서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섰다.

피라미드 안으로 들어오니 무슨 약초냄새 같은 것이 코를 찔렀다.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어른 5명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넓은 복도가 끝이 나고 이번에는 위로 올라가는 층층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벽을 타고 돌아가며 올라가게 되어 있었는데, 그 옆으로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었다.

호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던져 보았지만, 끝이 없는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내딛자 이상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돌과 돌이 서로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 같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호크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간 정도 올라섰을 때, 소리가 멈추면서 벽면에서 수없이 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으악!"

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화살세례에 기겁한 호크는 몸을 던져 계단 끝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천길낭떠러지였다.

얼마 되지 않아 무서운 쇳소리를 내면서 쏟아지던 화살세례가 멈추자 진땀을 뺀 호크가 힘들게 계단위로 몸을 올렸다.

"하아~ 하아~ 뭐야 이게! 정말 가지가지 하네."

다시 계단 위로 오르자 팔이 덜덜 떨렸다.

거의 육체가 한계에 이르렀는지 심장은 무섭게 고동치고 팔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지만, 잠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기계적으로 다리를 놀리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계단도 드디어 마지막 층계를 올랐다.

계단이 끝나자 이번에는 미로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며 언제 또 화살이 튀어 나올지 몰라 잔뜩 긴장한 채 걸어가는 것도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 된 얼굴도 바짝 말라비틀어진 입술도 여기저기 긁히고 찢겨진 상처도 느껴지지 않았다.

외줄 타는 광대처럼 모든 신경을 살려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응? 이 냄새는... 유황인 거 같은데... 젠장!"

기다란 복도에 들어서자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에 얼굴을 붉혔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지친 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그 순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벽면의 양쪽에서 화염(火焰)이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이 뿜어져 나왔다.

다행히 엎드린 호크에게는 화염(火焰)이 미치지 않아 포복으로 전진했다.

훈련소 시절 철조망을 통과할 때처럼 벅벅 기었다.

"엇! 뜨, 뜨... 거워!"

화염(火焰)의 복도를 지나자마자 호크는 상의를 벗어 던졌다.

불꽃이 몸에 닿지는 않았지만, 그 열기 때문에 상의에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다.

머리카락도 제법 많이 불에 그슬려 타들어갔고, 온몸에서는 목욕을 하고 나온 사람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아~"

더 이상은 힘들었던지 호크는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무릎에 고개를 박고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숨이 차서 들썩이는 어깨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돌처럼 굳어버린 것 같던 호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젖은 솜뭉치 같은 몸을 끌고 귀를 기울이며 벽에 몸을 의지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끝에 도달하니 조금 전 화염을 토해낸 부비트랩의 작동 장치가 있었다. 뒤에 올 후속부대를 위해서 화염이 나오는 부비트랩을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zero)를 사용해서 파괴했다.

어느 정도 복도를 벗어나자 앞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호크도 그 소리를 듣고 기운을 낸 것이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빠르게 움직였다.

복도에서 벗어나니 울창한 열대 숲이 나타났다.

도대체 이곳은 뭐 하는 곳이기에 건물 안에 하늘과 태양이 있고 또 그 안에 건물이 그리고 또 이렇게 숲이 있는 건지... 그동안 신기한 것을 제법 많이 봐왔지만, 오늘 본 것에 비하면 그런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후아~ 정말 덥다! 도대체 이 말소리는 어디서 들리는 거야?"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니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버지시여,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길고 길었던 어둠속에서 나와. 이 땅에 빛을 밝혀 주소서!"

열대 식물들을 젖히고 고개를 들어보니 제단 같은 것이 서 있는 곳에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엄청나군. 병사들도 꽤 되는데 여기서 뭘 하려고 이렇게 모여 있는 거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제단 위에 붉은 드레스를 입고 진한 화장을 한 여자가 예전에 모르카시에 보았던 이사벨라 여왕이라는 것을 알았다.

호크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제단 아래쪽에 석상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곳이 숨기에 적당해 보여 그쪽으로 낮은 포복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은 여왕의 기도에 빠져 있어서 호크는 들키지 않고 움직였고 그러는 동안에도 여왕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천년의 시련은 끝이 나고 광명의 시간이 도래했으니 이제 그 문을 열어 주소서!"

여왕의 기도가 끝이 나고 일어서자 신전 앞에 있던 수만의 군중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녀가 손을 들어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했다.

처음에는 낮게 우는 목소리였다가 점점 고음으로 올라가며 신경을 자극하는 강한 음색이 높은 소리를 냈다.

제단의 계단에 층층 서 있던 여 사제들도 입을 열어 노래하자 더욱 음색이 짙어지며 무겁고 답답한 노래로 변해서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윽! 뭐야. 심장이 빨리 뛴다."

노래를 듣자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면서 눈앞이 희미해져갔다.

호크는 머리를 흔들고 뺨을 때려 보았지만, 점점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정신이 흐려지려고 하고 있었다.

"안 되는데... 정신을 차려야... 하... 는... 데......."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호크의 의지도 눈꺼풀과 마찬가지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서 쓰러진다면 이 세계는 여왕의 발아래서 신음하게 될 운명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랑하는 이의 염원이 그를 믿고 따르는 전우들의 전우애가 가족들의 사랑이 기적을 만들어냈다.

마지막 정신의 끈을 놓지 직전에 호크는 혀를 이빨 사이에 넣고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목구멍을 통해서 흘러 들어가자 가물거리던 시야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의식이 있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 일을 끝내야 한다는 그의 정신의 그의 사랑이 이루어낸 불굴의 의지였다.

옷자락을 찢어 귀를 틀어막은 호크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워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전신에 돌려 보았지만, 텅 빈 물통처럼 한줌의 진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에 적이 있는데 어찌해볼 도리가 없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일단 정신을 잃게 하는 노래는 피했지만,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럴 때 수색대 권 상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고 생각을 하니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권 상사에게 이 태극 심법(太極心法)을 가르쳐주신 스님께서 마지막에 해주신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깨우치면 진실한 공부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는데, 자신은 조금도 깨우치지 못해서 아쉽다고 하면서 해준 말이었다.

[공(空)이란 무엇이냐? 무(無)자연이란 무엇이냐? 유(有)란 무엇이냐? 어리석은 놈!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다.]

이것이 권 상사님의 스승이신 고승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하셨다.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보면 지금 호크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상태이기도 했다.

허탈해진 호크는 웃음밖에 안 나왔다.

태극심법(太極心法)를 통해 얻은 기운도 사라졌고 본신의 힘인 육체의 기운도 몽땅 써버리고 그저 육신의 껍데기만 남을 꼴이었으니까.

그래서 헛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때 벼락 맞은 것처럼 호크의 몸이 떨렸다.

두 눈은 찢어질듯 부릅떠지고 입은 크게 벌어졌으며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귓속에서 누군가 크게 꾸짖는 말이 계속해서 울렸다.

[어리석은 놈! 아직도 모르겠느냐,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라는 말뜻을, 냉큼 일어나지 못할까!]

호크이 입이 달싹이면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랬구나, 공(空)이란 공(空)에 머물러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생멸변화(生滅變化-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뜻. 모든 현상은 찰나에도 변화한다는 말을 나타내기도 함)를 하고 있으니까, 색(色) 즉 만물은 모두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空)도 공(空)이요 그 구분을 짓는 거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어."

아픔도 미련도 없는 평안한 얼굴이 된 호크의 몸이 잠시 땅 위에 떠올랐다.

깨달음에서 오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빛이 나거나 주변이 요동치는 그런 요란함은 없었다.

그저 모든 게 조용하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몸이 땅 위에 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자연의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일까.

잠시 잠이 든 모습으로 보였다.

서서히 눈이 떠지고 몸을 일으키니 움직임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고 여유 있었다.

만물의 근원을 깨달음이니 호크의 머리 위로 고색창연한 빛 무리가 언뜻 비춰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권 상사님!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스님! 당신들의 가르침이 많은 생명을 구할 것입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기에 얻은 기연이었다.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호크는 짧은 시간에 무척이나 달라졌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석상 뒤에 가서 섰다.

일어서서 천천히 걸어갔지만, 누구도 호크를 보지 못했다.

그의 기운에 달라진 까닭도 있었지만, 여왕과 여 사제들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러 이미 모든 사람들이 이지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그저 서 있을 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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