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19화 (19/55)

Chapter 19. 베를로니아를 점령하라!

"겨울바람이 무척 사납군!"

"네, 장군님! 어디나 겨울은 혹독하고 잔인한 계절인가 봅니다."

"그래. 그런 거 같아 하지만 하필이면 우리가 싸울 때 춥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야."

"그나마 병사들이 잘 견디어주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모두 지치고 힘들 텐데 군소리 없이 따라주니 고마울 따름이야."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은 녀석들입니다. 자신들도 모르게 고참병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좋아, 좋은 일이지. 참! 호크 중령은 이미 출발했나?"

"네, 내일이면 베를로니아에 도착할 겁니다."

"휴~ 이번에도 어려운 짐은 다 녀석에게 떠넘기는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그렇다면 본인 말처럼 호크 이상 가는 적임자는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휘관으로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서둘러 결혼식이라도 올려줘야겠어."

"하하하! 장군님도 결혼식 주례라면 질색하시지 않습니까."

"응? 내가 언제 주례를 맞는다고 했나, 그저 호크 중령을 장가보낸다고 했지. 원 사람도... 허허~."

"장군님도 그럼 호크 중령이 장가가는데 주례를 누구에게 부탁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장군님이지 또 누가 있겠습니까. 주례사 준비 하셔야 될 겁니다."

"그, 그렇게 되나? 허허~ 이것 참 오랜만에 주례를 해보게 되나. 허허~."

모르카시를 떠나 베를로니아 정벌에 나선 외인부대의 행렬을 바라보는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에 의해서 어느새 호크의 결혼식이 결정되고 있었다.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악천후를 뚫고 행군하는 외인부대원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전의(戰意)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모르카시에서 알렉스 국왕의 진심어린 위로와 애국심을 보았기 때문인지 두 차례의 전투로 심신이 지칠 만도 할 텐데 오히려 기운들이 넘쳐나 보이고 있었다.

이제 저 강을 넘어 3일이면 이 모든 전쟁의 원흉이 숨 쉬고 있는 베를로니아가 있다.

어서 가서 미친 마녀를 죽이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자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이사벨라 여왕을 향해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고귀하신 여왕 마마, 지금 적들이 하인즈 강을 넘었다고 하옵니다."

"오오~ 그렇다면 이거 정말 큰일이 아닙니까? 하인즈 강을 넘었다면 수도까지 불과 하루거리입니다. 이사벨라 여왕님, 뭔가 대책을 마련하셔야 합니다. 행크 공작도 전사하고 모르카시의 주력 부대마저 패퇴한 마당에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 주옵소서."

늙은 신하들이 그랜드 홀(@3권에는 그랜드 홀@)에 모여 여왕에게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맹신에 의한 주종관계는 이처럼 능동적인 대처에 약하다.

오로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적인 존재에 의지할 뿐이 자의적인 사고에는 취약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걱정스런 모습과 달리 이사벨라는 여전히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백성들이여! 근심하지 말라! 곧 그분의 사자가 도착하신다. 그렇게 되면 저 간악한 악마의 무리들은 열화와 같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사라질 터이니 모두 걱정하지 말고 더욱 더 그분에게 성력을 모으도록 하라!"

"오~ 역시 이사벨라 여왕님, 저희에게 구원을......."

그나마 지각이 있던 자들도 모두 이사벨라 여왕에게 세뇌되어 이의를 제기하거나 다른 생각을 품는 이가 전혀 없었다.

신하들이 모두 돌아가자 이사벨라의 눈 꼬리가 사악하게 변했다.

"오호호호~ 어리석은 인간들, 정말이지 천하기 짝이 없다니까."

호위무사들을 안내를 받아 기도실로 돌아온 이사벨라는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수많은 구슬들이 영롱한 빛을 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슬들 위로 기도실 천정의 커다란 수정구에서 나온 하얀빛의 영체들이 끊임없이 구슬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여왕은 그 광경을 매우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멍청한 세린디아 놈들. 어차피 죽어 없어질 영혼과 육신을 내가 잘 거두어주마! 호호호호"

여왕의 광소에 기도실의 구슬들도 빛을 내며 반응했다.

케린버그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전혀 두려움을 내보이지 않는 이사벨라 여왕은 과연 어떤 비책을 준비해 두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궁금하기는 피차일반이라고 하더니, 베를로니아의 정문을 통과하는 짐마차의 인부들이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얼굴에 검은 재 가루를 묻혀서 구분하기 어렵지만, 지금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이 사이클론이라는 사실은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마차가 외성 광장을 지나 허름한 여인숙 앞에서 멈췄다.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지만,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중령님."

마차의 짐칸에서 뛰어내린 챠챠 대위가 호크의 짐을 받아 내리며 속삭였다.

"침투조의 보고를 받고 설마 했는데... 이건 그것보다 더 하군."

마차의 짐을 부리는 사이 사이클론이 마차에서 말을 떼어내 여물을 먹이고 호크와 챠챠에게 다가왔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도무지 알 수가 없군, 광장이며 경비병들 모두 넋이 빠진 모습이라니......."

"침투조의 말에 따르면 최근 들어 갑자기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챠챠 대위가 사방을 경계하며 마지막 배낭을 내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이 여인숙이 틀림없지?"

"네, 중령님! 이곳이 침투조와 접선하기로 한 곳입니다."

"좋아, 모두 들어가도록 하자. 겨울의 밤바람이 너무 차구나!"

딸랑! 딸랑!

여인숙의 현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사람이 들어왔음을 알렸다.

작은 홀에는 빈 테이블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주방과 연결된 카운터에는 초로의 할머니가 삶에 찌든 모습으로 졸고 있었다.

"할머니! 할머니!"

"으, 응, 아이고머니나, 놀래라! 누, 누구슈?"

"참내, 여인숙에 뭐 하러 왔겠습니까,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가 필요해서죠. 방은 있죠?"

호크가 다소 짓궂게 말을 하자, 할머니는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호! 내가 이렇다우. 요즘 들어 더 정신이 깜빡 깜빡 한단 말이야. 방이야 많지. 이상하게 근래 들어서 여행자들 발길이 뜸해."

할머니는 카운터 위의 핸드 벨을 들어 흔들었다.

귀에 거슬리는 금속 종소리가 여인숙 안을 크게 울렸다.

잠시 후 꾀죄죄한 몰골의 십대 소년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요한! 이 게으름뱅이 녀석, 어서 손님들을 맞지 않고 뭐하는 거냐? 또 어디 숨어서 잠이나 퍼 자고 있었지? 밥만 축내는 식충이 같으니라고!"

할머니의 구박을 전혀 개의치 않는지 때가 절은 목덜미를 긁으며 천연덕스럽게 일행을 이층으로 안내했다.

삐그덕~ 거리는 계단의 소음이 여인숙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빛바랜 벽과 기둥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흐아암~ 이쪽과 저쪽 방을 쓰시면 되고요. 목욕물은 가만있자, 아~ 불을 때야지 나도 정신없네. 이제 데워야 하니까 기다리세요. 식사는 하실 거예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비틀거리는 꼬마를 보며 호크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네가 음식도 하는 건 아니겠지?"

"네? 당연히 안 하죠. 손님이 보시기에는 제가 그렇게 재주가 많아 보이나요? 아~ 함!"

하품을 할 때 손으로 입이나 가리면 좋으련만, 누런 이빨과 고약한 냄새가 복도 안을 가득 채웠다.

"헉! 아, 알았다. 식사 3인분 준비해주고 다 되면 알려줘."

수고비로 호크가 동전 한 개를 던져주자 녀석의 졸린 눈이 번쩍 떠졌다.

"와우~ 손님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거예요!"

동전을 이빨로 깨물어 확인하더니 얼른 품에 넣고 사라졌다.

"귀여운 녀석이군."

"아마리아인이 아닙니다. 중령님!"

"응, 뭐라고 무슨 말이야?"

"저 꼬마 말입니다. 이방인입니다."

챠챠 대위의 말에 꼬마의 모습을 떠올린 호크의 고개가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대위 말이 맞군. 그럼 노예인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저 어린애를 부려먹다니......."

"케린버그와 달리 세린디아는 노예제도가 아주 오래 전부터 뿌리 박혀 있기에 저들에게는 뭐가 잘못되고 그른지 알지 못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듯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인가?"

"뭐, 좀 비약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픈 현실이군."

"모르카시에 있는 이방인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들 중에는 빵을 처음 먹어본 이들도 상당했습니다. 그걸 그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만 봐도 이 세린디아가 얼마나 폐쇄적이었는지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 이제는 달라질 거야~"

호크가 다짐하듯이 말하자 챠챠 대위도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네, 중령님이시라면 해내실 겁니다."

먼저 방으로 들어갔던 사이클론이 방문을 열고 두 사람을 불렀다.

"통신이 준비 됐다. 이쪽 상황을 빨리 전해줘야지."

"네, 할아버지."

호크와 챠챠 대위가 방에 들어가자 어느새 방의 마룻바닥에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검은색 상자를 올려놓은 작은 테이블이 서 있었다.

호크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뚜껑 속에 있는 거울의 색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혹시 적에게 들킬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해서 사이클론은 탐지방어마법을 펼쳤고 챠챠 대위는 문밖을 경계했다.

무사히 적진에 잠입했음을 알리고 현재 베를로니아의 분위기를 전한 뒤 무전을 끝내자, 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꼬마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상자를 덮고 배낭 속에 잘 갈무리한 호크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오늘 메뉴는 뭐니, 꼬마야?"

"글쎄요.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하지만 우리 누나 솜씨가 좋다고 오셨던 손님들이 항상 칭찬했으니까 뭐가 나오든지 맛 하나는 제가 보증해요!"

가슴을 탕탕 치면서 제법 호기를 부리는 꼬마를 보며 호크와 사이클론, 챠챠 대위는 적진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모처럼 즐겁게 웃으면서 계단을 내려갔다.

꼬마의 말이 아니더라도 식사는 정말 맛이 있었다.

음식 이름은 몰랐지만 만든 이의 정성이 가득 담긴 훌륭한 요리였다.

"놀랍구나. 재료는 극히 평범한 것들인데 이런 맛을 내다니 굉장한 솜씨라고 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구나."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사이클론의 입에서 이 정도 칭찬이 나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를 맛보았을 노인의 칭찬은 웬만한 요리 평론가의 입맛과 비교할 수없는 경험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은 너무 맛있게 식사를 마치자 기분이 정말 좋았다.

호크는 카운터에서 여전히 졸고 있는 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 할머니!"

"아우, 무슨 일이유. 식사가 입에 맞질 않수?"

"천만에요, 그 반대입니다. 너무 맛있는 저녁을 먹어서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어서 그런데 좀 볼 수 있을까요?"

"호호호, 그래요 우리 집 밥맛은 베를로니아에서도 제법 유명하지요. 잠시 기다려보소"

할머니가 카운터 의자에서 몸을 내려 주방 커튼을 젖혔다.

"한나! 한나야! 손님들이 부르신다. 어서 나오거라."

잠시 후 주방 앞치마를 걸친 30대 초반의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숙 종업원 꼬마 요한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이방인 여인이었다.

색 없는 값싼 천으로 만든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운 미모를 감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호크도 제법 놀랐지만 챠챠 대위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거의 메가톤급의 충격을 받고 심장의 박동수가 급격히 빨라지는 패닉상태로 빠졌다.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생사의 갈림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두려운 감정이 가슴에 피어올랐다.

그것이 첫눈에 반했다는 연인들의 기본적인 진행과정이란 것을 사내들 틈에서 반평생을 살아온 챠챠 대위는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감정이 스스로 조절이 안 되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를 찾으셨나요?"

차분한 음성이 홀을 울리자, 챠챠 대위는 온몸이 터져 나갈 듯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호크와 사이클론은 목까지 올라온 웃음을 참느라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네? 네... 그게... 저 뭐냐... 그러니까... 물 좀 더 주세요. 네, 맞아요! 물이 참 맛있네요."

"풋!"

챠챠 대위의 얼빠진 모습이 그녀에게도 재미있게 비쳐졌는지 입을 가리고 터진 웃음보를 참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챠챠 대위에게는 아름답게 보였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

이대로 뒀다가는 아무것도 되지 않을 듯싶어 호크가 나섰다.

"흠흠, 이분은 챠챠라고 불리시는 아주 유명한 용병이십니다."

"어머, 용병이시라고요. 어쩐지 늠름하신 게 달라 보이더라니."

그녀는 용병을 처음 본다면서 신기해했다.

게다가 호크의 지원 사격으로 그는 아주 유명하고 멋진 용병으로 탈바꿈한 터라 보통의 세상을 사는 그녀에게는 소설에서나 나오는 주인공을 직접 봤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손님도 없던 터라 주인 할머니도 별다른 간섭 없이 그저 다시 졸음에 빠져들었고 꼬마 요한은 호크의 동전을 가지고 어디론가 나가 버려서 호크와 사이클론이 자리를 비켜주자 자연스럽게 데이트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호크와 사이클론은 챠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주고 건투를 빌어줬기에 챠챠 대위도 용기를 얻어 그녀와 술잔을 기울였다.

"저는 아마리아인이 아니고 이곳에서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노예인데, 이런 저하고 술을 마셔도 괜찮으시겠어요?"

한나의 걱정스런 말에 챠챠 대위는 그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사랑이란 사치이며 자신과는 다른 세계라고 단정 짓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런 그를 단 한순간에 무너뜨린 여인을 만났는데 하필이면 적진 심장부에 사는 노예란 말인가?

참 운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곧 이것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본 두 사람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층에 있는 호크와 사이클론은 그 사이 밑에 층에서 한창 로맨스에 불타오르고 있을 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교도(異敎徒)의 왕은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에서 이교도(異敎徒)의 왕이란 이사벨라 여왕을 말하는 거겠죠. 군대의 반격이란 저희 케린버그를 말하는 걸 테고 그렇다면 오히려 우리가 여왕에게 패해서 여왕에게 쫓긴다는 말인데... 지금의 이곳의 분위기로 봐서는 전혀 아닌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네 말도 일리가 있다만 꼭 그렇게 해석이 되는 것도 아니야. 이교도(異敎徒)의 왕이 꼭 이사벨라가 아닐 수도 있고 또 여기서 말하는 군대가 꼭 군인들이란 법도 없다. 원래 신화속의 문구들은 대개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쓰기 때문에 다른 의미도 있는지 살펴봐야 해."

"젠장, 전쟁 치르는 것 하나도 힘이 부쳐서 쓰러질 지경인데, 신들의 장난까지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니 죽을 맛이에요."

"그래. 시련은 언제나 그렇게 한꺼번에 닥치기 마련이야, 이 고비를 어떻게 슬기롭게 넘기는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네, 좌우지간 일단은 전쟁이 먼저예요. 우리 부대는 너무나 오래 싸우고 있어요. 그것도 이 엄동설한에 말이죠. 한시라도 빨리 마무리 짓고 쉬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서서히 무너져 버릴 게 뻔해요. 할아버지가 이번에도 많이 도와주셔야겠네요. 죄송해요. 매번... 수고롭게 해드려서요."

"원 녀석도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고 내일의 정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네, 할아버지! 자~ 이 지도를 보세요. 저희 들어오면서 본 왼편과 오른편 망루에도 최소 경비인력만 있었어요. 적어도 적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상대방이 이렇게 무관심할 수도 있는지 믿기지가 않아요. 게다가 지금 베를로니아 주민들은 군대가 이리로 진격해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지 않아요?"

호크의 말에 사이클론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 그런 것도 문제이지만, 만약에 그들이 이렇게 여유부리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니?"

"아뇨, 아직은......."

"우선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는데, 하나는 우리의 전력쯤은 우습게 볼 정도로 강력한 비밀무기를 가지고 있다든지, 아니면 다른 하나는......."

"다른 하나는 뭐요?"

"대항을 포기했다는 건데. 이것은 아무래도 실현 가능성 없는 일인 것 같다. 그렇다면 결론은 내성에 잠입해서 여왕이 우리를 상대할 비책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다."

"네. 듣고 보니, 할아버지 말씀이 전적으로 옳아요. 결국은 모든 해답은 이사벨라 여왕이 쥐고 있단 말이군요."

"그래, 이번에 그 여자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봐야겠다. 뭔가 냄새가 나기는 나는데 도무지 확실치가 않아. 어쨌거나 내일 우리가 알아내야 할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것이 새삼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네, 할아버지. 반드시 알아낼게요. 분명한 건 그동안 우리가 고민했던 많은 의문들의 대답을 여기서 들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요."

"그래, 제발 그렇게 되길 빌자구나."

두 사람의 마음을 담은 염원이 이루어지길 빌며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렸다.

"선두~ 제자리! 상사, 소대별로 진지 구축하라고 하달해라."

"알았습니다. 중대장님!"

이지 중대가 제일 먼저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선봉 부대로서 본진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출발했던 이지 중대의 발아래 세린디아의 중추인 베를로니아의 전경이 들어왔다.

방사형으로 이루어진 도시를 두터운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처음 몽뜨에서 시작된 전투가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이제 모르카시를 넘어 이 베를로니아를 점령해야만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중대원 모두의 얼굴에는 다른 때와 달리 긴장감이 팽배하게 퍼져 있었다.

적어도 수도인 만큼 방비하는 것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기에 모두들 이번 전투가 얼마나 힘들지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내일이면 도착할 본진을 위해 중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충성!"

"응? 아~ 루크 소위 자넨가?"

임시 참호에서 지도를 살피던 피터슨 대위가 우렁찬 구령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군기가 잔뜩 들어가 있는 루크 소위가 서 있었다.

"네, 호출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그래, 여기 좀 앉게."

"괜찮습니다!"

"하하, 아주 군기가 팍! 팍! 들었어."

"이지 중대원으로서 부끄럼 없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고 다른 소대에 비교해서 자네 소대가 가장 희생이 적었더군. 고참병도 거의 그대로 있고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이야 자네 소대가 척후 활동을 맡아줘야겠어."

"네? 저희 소대가 말입니까?"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20시까지 무장하고 집결시키도록 하게. 베를로니아의 성벽을 넘기 전에 인근 갈대밭을 모두 조사해봐야겠어. 알파와 찰리도 참가하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넵! 충성!"

임시 막사를 빠져 나온 루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소대로 돌아왔다.

선임 하사가 야전삽으로 참호를 파다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루크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소대장님, 무슨 일이랍니까?"

"휴~ 그게 말이야. 정찰 임무가 떨어졌어."

"네, 또요?"

"응."

힘없이 말하는 루크 소위 주위로 소대원들이 모여 들었다.

"소대장님, 아무래도 소문이 사실인 거 같은데요."

"무, 무슨 소문?"

루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을 건넨 레니 중사에게 반문했다.

소대 고참 레니 중사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떠벌였다.

"소대장님이 윗선에 잘못 보여서 저희 소대가 항상 궂은일은 도맡아 한다고 중대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모르셨어요?"

"말도 안 돼!"

"그래, 그건 소대장님 말씀이 옳아. 군이란 사사로운 감정으로 움직이는 단체가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진지 구축을 끝내라 곧 밤이 오면 더 추워질 거야. 서둘러라!"

선임하사 소대원들의 말을 일축하고 야간 정찰 임무를 위해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루크는 레니 중사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루크가 부임해 오고 난 뒤에 거의 모든 작전에 제일 먼저 투입되고 있었다.

고민하던 루크의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해 졌다.

"혹시? 아냐. 에이 설마, 아닐 거야. 나야말로 엉뚱한 생각을 하다니. 휴~ 정신 차리고 지도나 숙지하자."

혹여 자신의 아버지 때문이 아닐까 하고 잠깐 생각했던 루크는 스스로의 생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잡념을 떨쳐버린 루크 소위가 정찰 지역의 지형 파악을 위해 중대본부에서 전달 받은 지도를 익히기 위해서 선임하사와 함께 지형 파악을 시작했다.

"중대장님, 이번에도 루크 소위 소대가 선발대인가요?"

"어, 그래.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그냥 중대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요."

"소문이라니?"

"저, 다름이 아니라......."

부관의 설명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피터슨 대위가 헛소문이라고 단언하자 중대본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당연히 '그렇죠'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사 밖으로 나온 피터슨 대위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후~ 후후, 군대에 들어오길 잘한 것 중 하나가 담배 마음대로 피울 수 있다는 거지. 하하하!"

김재덕 대령이 제작한 군수물자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군용 담배였다.

파이프 담배나 나뭇잎에 싸서 피는 잎담배가 고작이던 이 세계에 필터 담배를 내놓은 것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목화솜을 이용한 필터에 고온으로 쪄낸 훈제 잎담배 가루가 들어간 필터 담배는 단번에 외인부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보급품이 되어버렸다.

"후~"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낸 피터슨 대위가 불을 끈 담배꽁초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젠장, 그렇게 티가 났나? 너무 노골적으로 그 녀석 소대만 내세웠나 보군. 앞으로는 좀 더 횟수를 조절해야겠어. 쯧쯧~ 루크 소위, 나 말고 자네 아버지를 원망하게. 그러기에 왜 하필이면 호크 중령님의 눈 밖에 나는 짓을... 어쨌거나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다 명령 받은 대로 하는 거니까."

애써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막사로 돌아간 피터슨 대위가 호크에게 직접 하달 받은 명령은 루크 소위를 빡세게 돌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피터슨도 잘 알고 있기에 루크 소위가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덕분에 루크 소위는 점점 훌륭한 야전 장교가 되어가고 있으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루크 소위의 소대원들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도 루크 소위는 꽤나 심하게 원망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비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루크 소위는 작전시간이 다 되어가자 소대원들의 무장을 점검하고 중대본부 앞에서 신고한 뒤, 갈대밭으로 숨어들었다.

본진이 도착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혹시 모를 적의 암습이라든가 함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위장 크림을 바른 루크의 부대원들이 어둠과 하나가 되어 조용히 움직였다.

겨울밤의 매서운 바람이 갈대밭을 스치자 갈대 스치는 소리가 파도소리처럼 멀리 울려 퍼졌다.

"왠지 으스스한데요, 선임하사님."

"레니, 닥치고 사주 경계나 잘해."

"농담이 아니라 선임하사님, 정말 등골이 오싹거리는 게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지 않아요?"

"귀신도 네놈 얼굴을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칠 테니 걱정하지 마라!"

"킥!"

"큭!"

"크큭!"

선임하사에게 한 방 먹은 레니 때문에 소대원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필사적이었다.

무안해진 레니가 후임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는 소대원들 때문에 열불이 났다.

"젠장, 선임하사님 덕분에 오늘 완전히 체면 구......."

"쉿!"

선두에서부터 수신호가 전달되자 소대 전체가 제자리에서 사주 경계에 들어갔다.

선임하사가 전방으로 달려가고 일순간에 전투 모드가 돌입했다.

팅~ 팅~

소대원들의 스패로우에서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렸다.

레니 역시 갈대밭에 몸을 뉘이고 어두운 갈대밭 너머에 두 눈을 고정했다.

"뭔가?"

조용히 속삭이는 루크의 물음에 척후병인 다렌 병장이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갈대밭 중간 지점에 무언가 잔뜩 쌓여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어두운 탓에 정확한 식별을 할 수가 없었다.

픽! 픽!

루크의 휘파람 소리에 좌우에 있던 소대원 둘이 스패로우를 움켜쥐고 루크 옆에 다가왔다.

루크의 수신호에 따라 소대원들이 십자 형태로 퍼져 나갔다.

선두에 나선 다렌 병장은 갈대밭 위를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발끝을 들어 정체불명의 물체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늪지대처럼 바닥이 진흙 밭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군화가 점점 더 깊이 파묻히자 걷는 것이 점점 힘들어졌다.

거의 가까이 도달했을 때,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그때 마침 모습을 드러내며 달빛이 어둠을 걷어냈다.

"이, 이럴 수가!"

다렌 병장의 목소리가 갈대밭을 울렸다.

척후 임무의 제일 수칙인 침묵유지를 깨고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렌, 너 미쳤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도대체 뭘 보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이럴 수가......."

"우~ 우욱!"

레니 중사가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가 눈앞의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구토를 했다.

"지옥이 따로 없군, 도대체 누가 이랬을까?"

루크 소위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전으로 알려야겠어. 토니! 중대본부를 호출해!"

무전병 토니가 마나통신기로 중대 본부를 호출하는 동안, 다렌 병장은 진흙 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핏물이란 것을 알고 나자 속이 메스꺼워졌다.

달빛에 드러난 갈대 밭 풍경은 그야말로 참상이었다.

작은 산처럼 쌓여 있던 것은 산은 산인데 돌과 흙으로 쌓인 산이 아니고 사람의 시체로 만들어 놓은 산이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구의 시체가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

그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의 흙을 진흙 밭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흘러 넘쳤다.

다렌 병장은 시체를 살펴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선임하사님, 이것 좀 보세요!"

"뭐 발견한 거 있나?"

"시체들 좀 보세요. 이상하죠?"

"어, 그러고 보니 모두 배를 갈랐잖아."

"네. 내장을 전부 꺼내갔어요. 어린아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죄다 그런데요."

"세린디아 놈들은 모두 미치거나 마녀들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봅니다."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주변을 좀 더 살펴봐. 이런 곳이 또 있나 조사해."

"정말이라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시체들이 많은데 어떻게 냄새가 안 날 수 있냐고요."

다렌 병장의 말에 선임하사도 섬뜩했다.

좋지 않은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선임하사! A포인트까지 신속하게 이동한 후 귀대한다."

"소대장님, 애들 말이 아니더라도 왠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알아. 나도 그래! 찰리와 알파도 비슷한 걸 발견했나 봐. 본부에 연락했더니 이미 알고 있더라고."

"그래요? 세린디아의 이사벨라 여왕이 미친 마녀라고 이방인들이 그러던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 아닐까요?"

"낸들 알겠나? 우선은 작전부터 끝내고 보자. 이곳에 일 분도 더 있고 싶지 않아!"

"동감입니다, 소대장님. 다렌, 길을 터라. 나머지는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신속하게 이동한다!"

루크 소대가 서둘러 이동하자 달빛이 부끄러운 듯 다시 구름 속에 숨어버렸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상도 달빛이 사리지자 어둠이 덮어버렸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지 시체더미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미 장내를 벗어난 루크 소대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작전을 마치고 철수하는 루크의 시야에 베를로니아의 거대한 성벽이 들어왔다.

도대체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부대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서둘러서 뒤를 쫓았다.

새벽이 밤을 밀어내며 동이 터오자 루크가 바라보던 성벽 안쪽의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딸랑! 딸랑!

이른 아침 여인숙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지팡이를 쓰는 남자였다.

"아~함, 어서 오세요! 손님, 숙박하실 건가요. 식사를 하실 건가요?"

"어제 오신 손님들이 있는 방으로 안내해다오!"

탁하고 갈라진 음성에 졸음이 달아난 요한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저기 손님, 누가 찾아 왔는데요?"

방 안의 호크와 챠챠 대위는 이미 현관문의 방울소리가 들리는 순간, 침대에서 일어나 있었다.

챠챠 대위가 단검을 꺼내들고 문 뒤에 붙어 섰다.

호크와 눈을 마주친 챠챠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자 호크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챠챠 대위가 뒤에서 덮쳐 상대를 제압했다.

대위의 단검이 남자의 목젖 위에 놓여 있었다.

"누구냐?"

"윽~ 대위님, 이것 좀 놔주세요. 이러다 팔 부러지겠습니다."

"이런 자네였군."

상대방의 신원을 확인한 챠챠가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바로 일어서서 후드를 벗고 호크를 향해서 거수경례를 올렸다.

"충성, 특임대 스마일즈입니다."

"수고가 많았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우선 보고부터 듣지."

"네, 중령님!"

호크가 테이블에 의자를 끌어와 앉자 스마일즈도 호크 옆으로 다가와 준비해온 서류를 건넸다.

두루마기를 펼쳐든 호크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언제부터 벌어진 일인가?"

"저희가 침투하기 전부터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 이 도시는 거의 텅 비었다고 봐야 합니다. 외성 주변의 주택들은 이미 사림들이 살지 않은지 꽤 되었다고 합니다. 저희가 몽뜨 요새를 공략하고 나서부터 더 빨리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 도대체 적이 코앞에 닥쳐왔는데, 이사벨라 여왕은 군대를 움직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성문의 경계도 그렇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의문투성이야."

"저희 대원 둘이 여왕의 여사제들이 사람들을 끌고 기도하러 가는 모임에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가 연락이 끊겼습니다."

"뭐야? 언제 그랬나?"

"본진이 모르카시에서 출발하는 날이었습니다. 통신을 받고 나서 얼마 후에 여왕의 여사제들이 기도의 힘이 필요한 때라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내성으로 들어간 뒤에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성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인데, 후~ 미치겠군. 이제 곧 장군님이 본진을 이끌고 베를로니아에 도착할 텐데. 어떻게 한다?"

"중령님 다행히 내일 또 여사제들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광장에서 집회를 연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스마일즈의 말에 호크의 눈이 빛났다.

"정말인가, 그렇다면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성에 들어가야겠어."

"네, 저희도 내일 모든 인력을 투입해서 내성의 정보를 빼내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좋아! 챠챠 대위와 나도 간다. 언제지 집회가 열리는 때는?"

"항상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중령님."

"알겠네, 그럼 내일 저녁에 광장에서 보지."

"넵, 중령님. 하지만 변장을 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의 모습으로는 곤란하니까요."

"알고 있어.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거수경례로 보고를 마무리한 스마일즈가 챠챠 대위와 눈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 나갔다.

대위가 배웅하기 위해 따라 나서서 방 안에 호크 혼자 앉아 있었다.

"이사벨라,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군대가 곧 들이닥칠 텐데 종교 집회나 열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일까?"

창가에 서서 골목길로 사라지는 스마일즈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크는 계단을 올라오는 챠챠 대위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응. 답답해서 안 되겠어? 좀 둘러보고 올게."

"안됩니다. 혼자서 위험하십니다."

챠챠 대위의 놀란 눈을 보며 실소를 흘린 호크가 대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계단을 내려갔다.

"내 몸 하나 간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대신 할아버지께서 돌아오면 내일 작전을 설명해드리고 쉬시도록 해!"

"하, 하지만 중령님!"

"어차피 내일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해. 나도 긴장을 좀 풀 필요가 있어. 자네도 주방 아가씨와 데이트라도 좀 하지, 그래."

"아, 아니 무슨... 말씀을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당황해서 얼버무리는 챠챠를 보며 호크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벌써 우리라고 말할 정도가 됐나? 잘해 보게. 뭐하면 이 번 일이 끝나면 장가라도 들던지. 내가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주, 중령님!"

손을 흔들며 계단을 내려가 버린 호크를 보며 챠챠 대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티가 났나?"

괜히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던 챠챠 대위가 뺨을 가볍게 때리고 계단을 내려갔다.

기왕에 위에서 허락도 떨어졌겠다. 어쩌면 인생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숙맥인 챠챠 대위는 용기를 내서 돌진했다.

인생 최대의 전투라고 생각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향한 곳은 여인숙의 주방이었다.

주방을 정리하고 있는 한나의 뒷모습을 발견한 챠챠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용기 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라는 말이 귓가를 울렸다.

"한나 씨, 내게 시간 좀 내어주겠어요?"

오늘 따라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낀 한나도 왠지 모르게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의 손을 잡고 뒤뜰로 향했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요한이 입을 손으로 가린 채 키득거리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챠챠 대위는 떠듬거리며 가슴속에 숨겨둔 마음을 그녀에게 고백했고. 너무나 유치한 구애에 요한은 닭살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기절할 뻔했다.

그렇게 챠챠 대위가 진땀을 흘리며 구애하고 있을 무렵, 호크는 베를로니아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거리가 지금은 황량하기조차 했다.

찬 겨울바람이 낙엽을 흩날리며 휘몰아쳤다.

나무 창문이 삐걱거리는 집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지 거미줄이 쳐져 있었다.

한참을 걸었지만, 도시를 지키는 군인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광장 분수대에 도착하자 겨우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문을 연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과 무의미하게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베를로니아는 이미 죽은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의 인마가 광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린로즈 기사로 보이는 녹색머리의 기사가 두루마기를 펼치고 큰소리로 읽어 내렸다.

"들어라! 위대한 세린디아의 백성들이여, 간악한 악마의 군대가 우리의 영혼을 빼앗기 위해 베를로니아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벨라 여왕님의 기적의 힘으로 적들을 물리칠 것이니, 모두 여왕님의 기도에 참석해서 여왕님에게 힘을 보태도록 하라! 오늘 저녁 이곳에서 성스런 여왕님의 사제들이 그대들을 인도할 테니 모두 참석하도록 하라!"

말을 마친 기사일행은 또 다른 곳으로 말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광장을 빠져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이 분분히 떠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하기에 사람들을 계속해서 모으는 거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 이웃집도 식구들이 모두 집회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요즘 들어서는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예끼, 이 사람아,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두 사람은 말을 하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괜시리 입을 잘못 놀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같은 무지렁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밖에 도리 있나. 그럼 이따가 저녁때 보자고."

"아니, 자네도 집회에 참가하려고?"

"우리 딸아이가 우리 집만 집회에 참가 안 한다고 성화야. 고것이 무슨 여왕님의 소년소녀 선교회 소속이라서 안 나갈 수가 없어."

"젠장, 자식 눈치 보고 살아야 하니, 이거야 원!"

"자네 집은 괜찮아?"

"괜찮기는 우리 집 아들놈도 내가 지난번에 여왕님 흉 좀 봤더니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더라고. 겨우겨우 빌고 용서 받았다니까."

"참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 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호크는 대충 현재 이곳의 상황이 짐작이 갔다.

그녀는 종교를 내세워 국민들의 귀와 눈을 막고 철저하게 독재정책을 펼치면서 세린디아를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을 이용해서 어른들을 감시하는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대중심리를 공포로 몰고 가는 예전 공산당식의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 사람들이 저렇게 생기가 없고 피폐한지 알 수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니 자연히 사회가 삭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은 극단으로 가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한국에서 발생했던 사이비 종교의 폐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호크는 베를로니아를 둘러보며 이곳은 이사벨라의 광신도들이 살고 있는 교회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린디아는 이곳에 없었다.

이사벨라의 나라였고 이사벨라의 도시였다.

그녀의 한마디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길 속에 뛰어들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다.

상점 앞 벤치에 앉은 호크의 입에서 탄식 비슷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제길, 어렵군... 어려워!"

"하늘 안 무너진다. 웬 한숨이 100년을 산 나보다 더 깊은 거냐?"

"어? 할아버지! 필요한 물건을 다 구하신거예요?"

필요한 물품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갔다던 사이클론을 우연히 만난 호크는 답답했던 가슴이 사이클론을 만나면서 확 풀렸다.

그의 손에서 배낭을 뺏어든 호크는 여인숙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야.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아직 전쟁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더구나. 그리고 내성 쪽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뭔가가 뒤틀린 기운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는데 처음 보는 현상이라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구나."

"맞아요. 장군님께 잠시 공격을 멈춰달라고 전해야겠어요.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게 그런 느낌이 드네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온몸이 끈쩍끈쩍한 것이 영 기분이 좋지 않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두 사람이 서둘러 여인숙으로 돌아와 내일의 작전을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바쁘게 일하는 것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아니면, 뒤뜰의 누구처럼 사랑에 빠지든지.......

"챠챠님, 저는 노예랍니다.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해요. 다행히 주인 할머니가 좋으신 분이어서 동생과 잘 지내고 있지만, 밖으로 한발자국만 나가도 개돼지 취급 받는 보잘 것 없는 여자일 뿐이에요. 그리고 또 챠챠님 주위 사람들도 손가락질 할 거예요. 하찮은 저에게 주신 그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 따스한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던 한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팔을 힘껏 잡아당기는 챠챠의 손길에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나, 내게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요 제발 내 마음을 받아줄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결국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그렇지 않다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 챠챠 대위는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한나의 어깨를 잡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없지만, 난 당신을 데려갈 겁니다. 노예 따위는 없는 그런 곳으로 말이에요. 그러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기다려줘요. 꼭이요!"

다짐 받듯 몇 번이고 대답을 들은 챠챠와 한나가 여인숙으로 들어가자 숨어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요한이 저린 다리를 주무르며 기어 나왔다.

"아우, 죽는 줄 알았네. 참내, 누나도 그냥 좋다고 하면 되지. 내숭 떨기는... 그런데 매형이 우리를 먹여 살린 능력은 되나?"

벌써부터 매형이라니 이 녀석은 정말 심상치 않은 놈이었다.

어쩐지 챠챠 대위의 선택이 조금 성급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층 방에서는 호크와 사이클론이 내일 내성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사용한 물건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챠챠 대위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들어오자 호크와 사이클론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여어~ 로맨스 가이, 왜 이렇게 기운이 없나?"

"허허허, 사랑에 빠진 군인이라... 꼴이 말이 아니야."

그러나 두 사람의 장난에도 챠챠 대위는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

"후~ 에~ 휴~."

호크가 더 놀려줄 심산으로 입을 열려 하자 사이클론이 호크의 어깨를 당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호크도 제법 심각한 표정의 챠챠를 보고 장난 거는 것을 포기했다.

"이봐 대위! 작전이 잘 끝나면 어차피 이곳은 우리 점령지가 될 거야. 그때 이곳에 남아서 그녀를 잘 설득해보는 게 어때? 여자는 자고로 시간을 많이 들여야 해. 여자의 마음은 군인 정신으로 밀어붙였다가는 백전백패라고!"

"하지만 특임대는 본진과 함께 귀국해야 하지 않습니까?"

챠챠 대위의 기운 없는 말에 호크가 어깨동무를 하며 실실거렸다.

"큭큭, 내가 누구야. 내 짬밥으로 자네 근무지를 베를로니아로 바꿔줄 수도 있지. 어때 내 제안이?"

호크의 말에 챠챠 대위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이냐고 묻는 대위의 눈을 보며 호크가 고개를 끄덕여주자 금세 죽을 것 같던 사람의 얼굴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허~ 차갑기 그지없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니 바보가 되는구나. 허 참!"

예전에 드래곤 숲속에서 용병일 때, 챠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사이클론은 호크의 말에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챠챠도 챠챠였지만, 이러한 애매하고 답답한 상황에서 그런 그를 데리고 시시덕거리는 호크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내성의 검은 실루엣이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자 사이클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제너럴, 아무래도 이번 전투는 불길하기만 합니다."

"후~ 드디어 도착인가?"

"네, 장군님! 저기 보이는군요."

검은색 성벽으로 둘러싸인 베를로니아의 전경을 살피던 나형석 장군의 한쪽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음......."

"왜 그러십니까, 장군님?"

"아, 아닐세, 이곳은 뭐랄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지 않은 곳인거 같아."

"네? 원~ 장군님도 이상한 말씀을 다 하십니다."

"나이 많은 사람의 노파심이라고 생각하게. 아무래도 이번 전투도 쉽지 않을 거 같아."

"뭐, 언제는 쉬운 전투가 있었나요. 늘 악전고투(惡戰苦鬪)였지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내 말은... 아니네. 각 부대별로 점검하고 지휘관들을 소집하게. 기왕에 시작할 거면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지."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나 장군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는지 김재덕 대령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큰 전투를 앞두고 지휘관이 생각이 많아지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베를로니아를 발밑에 둔 언덕 위로 수많은 군인들이 자리를 채워 가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케린버그 군대와 베를로니아 사이의 갈대밭을 매섭게 흔들고 지나갔다.

눈으로 보이는 거리까지 적군이 진격해 왔는데도 여전히 베를로니아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후~ 도대체 이사벨라 여왕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대응을 하는 걸까?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싸우겠다는 건지. 아니면 포기를 한 건지 정말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

"제너럴! 여기 계셨군요."

"아~ 머스탱 공작님, 베르트니 단장님."

지휘 사령부 막사를 만들고 있은 언덕의 제일 높은 곳에서 베를로니아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형석 장군을 발견한 두 사람이 말을 몰아 가까이 다가왔다.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날 모르카시에서 밤새 술을 같이 하고 난 뒤 두 사람 사이가 무척이나 돈독해졌다.

역시 사람을 술을 같이 해야 친해지는 법인가 보다.

예전의 서먹함보다는 오랜 친구처럼 웃음으로 반기는 나형석 장군이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하하, 오셨군요. 강행군이었는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뭘요, 나라를 위한 일인데. 지휘고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나저나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는지 저도 알면 안 될까요?"

"후~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베를로니아에 가까이 오면서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두고 보니 더 심난하네요.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것 같은데 딱히 뭐라고 짚어 내지를 못하겠습니다."

한숨을 쉬는 나형석 장군을 보며 머스탱 공작도 베를로니아에 시선을 주었다.

"너무 심려가 크신 것 같습니다. 몽뜨와 모르카시에서 주력을 잃었으니 저들도 충격이 크겠죠. 호크 중령의 보고대로 도시가 텅 빈 것 같다고 하니 아마도 모두 도망간 것이 아닐까요?"

"글쎄요, 하지만 이 적막함이 왠지 불길하기만 합니다."

"제 생각에는 장군께서 지나치게 긴장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적 병력도 얼마 되지 않다는데 그냥 밀어붙이시는 것이 어떨까요.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데 저들이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머스탱 공작의 자신 있는 말에 나 장군도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도 이 추운 겨울에 병사들을 하루라도 들판에서 재우고 싶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꼭 불길 속에 뛰어드는 나방 기분이 드는 게 조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제너럴 의견에 찬성입니다."

베르트니가 끼어들자 머스탱 공작이 무척이나 당황했다.

"이보게, 베르트니, 자네마저 이러긴가?"

"아니야. 머스탱, 저 베를로니아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 뭔가 강력한 기운이 나의 성력과 반응하고 있단 말일세. 필시 저 성 안에서 요사스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어!"

베르트니의 말에 나형석 장군과 머스탱 공작이 불안한 눈으로 베를로니아를 바라보았다.

방사형을 둥글게 모여 있는 도시 형태가 어떻게 보면 무덤같이 보여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충성, 장군님! 지휘 막사가 완성됐습니다."

"알았네. 자 모두 막사로 가시죠.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서 작전을 구상해 봅시다."

나 장군의 권유에 머스탱 공작이 말에서 내려 막사로 향했다.

베르트니 성기사단장도 말에서 내려 막사로 향하다 뒤를 돌아보았다.

베를로리아의 중심 상공에 검은 먹구름이 짙게 뭉쳐지고 있었다.

'이교도(異敎徒)의 왕은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라! 추격하리라! 이 많은 군대가 이사벨라 여왕 한 사람에게 패한단 말인가? 도대체 그들의 신은 누구란 말인가. 이 무시무시한 기운의 정체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애로운 쥬(Ju)여! 이 하잘것없는 당신의 종에게 용기와 힘을 주소서. 고통 받고 있는 당신의 아이들을 구원하소서!'

가슴에 성호를 그으면 기도를 올린 베르트니가 등을 돌려 막사로 들어가자 검은 구름이 더욱 더 짙어지며 주변으로 점점 더 퍼져나갔다.

세상에 종말의 알리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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