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 빛바랜 승리
"하이디스! 하이디스!"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 하는 천막촌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는 청년 하나가 애타게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전투는 끝났지만 슬픔은 이곳까지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가족, 사랑하는 이를 잃은 여인, 오빠, 형을 잃은 이방인(異邦人) 부족민들이 곳곳에서 오열하고 있었다.
그 사이를 피로 얼룩진 손수건을 손목에 메고 뛰어다니던 루크 소위의 발걸음이 드디어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멈췄다. 말라비틀어진 군용 빵을 입에 물고 있는 야윈 소년을 발견한 루크는 급히 소년에게 다가갔다.
"안녕, 꼬마야! 잘 있었니?"
소년의 머리카락을 흩어버린 루크가 기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누나는 어디 있니? 꼬마야?"
그래도 빵을 준사람 이라고 기억은 하는지 배시시 웃으며 루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점점 더 험난해 지는 길을 걸으며 루크는 왠지 모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킬 수가 없었다.
"누나! 빵 형아 왔어!"
"빵 형......."
어이없어 하는 루크가 꼬마에게 굴밤을 먹이려고 들었던 손이 돌처럼 굳어졌다. 다 쓰러져 가는 천막에서 낡은 베일을 걸치고 걸어 나오는 그녀에게서 눈부신 빛이 나왔고 신비한 아름다움에 루크의 온몸에 벼락을 맞은 충격을 받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루크님!"
"......."
"루크님! 괜찮으세요?"
"아! 네? 뭐라고 하셨죠. 저 그게 제가 말이죠... 그러니까?"
"킥킥킥!"
"하하하하!"
"그게 그러니까... 아하하하!"
할 말을 잊어버린 루크의 어색함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치는 재미난 구경을 위해 주위로 몰려든 아이들이 참기 힘든지 웃음을 터트렸다. 루크도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루크님!"
"아! 네, 다 하이디스님 덕분입니다."
루크의 끈적거리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인 하이디스의 눈에 낯익은 손수건이 들어왔다. 전투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것을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하이디스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피어났다.
"고맙습니다. 은혜로운 쥬(Ju)님 이시여!"
깍진 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신을 향해 감사 기도를 하는 그녀를 보면서 루크는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사랑...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믿을 수 없게도 사랑이란 감정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것이 전쟁터이든 풀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이든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기적은 일어난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아이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면서 웃고 있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하이디스! 하이디스!"
"어머, 어... 어머니!"
천막 안에서 낡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 나오는 짚시 할머니를 뛰어가 부축하는 하이디스의 말에 루크 또한 달려가 거들었다.
"뉘시우? 젊은이는?"
"예? 그러니까 저는 루, 루크라고 합니다."
"호호호! 참으로 씩씩한 젊은이로군요."
"네! 제가 그거 빼면 시체입니다. 어머님!"
이 친구 봐라, 언제 봤다고 어머니란 말인가? 사랑은 사람을 뻔뻔스럽게도 만드는 것 같다.
"지난번 빵도 루크님이 주신거에요, 어머니."
"이런,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정말 고마워요, 젊은이"
"아닙니다. 말을 낮추십시오. 한참 아래 사람입니다. 그리고 크게 도움이 된 것도 아닙니다. 아, 참 깜빡 했네요."
"제가 말씀 드렸죠, 오늘 저녁은 따끈한 빵을 드리겠다고요."
자루를 건네받은 하이디스 두 눈이 커졌다. 자루를 열어보니 부드러운 빵이 가득 들어있었다.
"루... 루크님 이렇게나 많이......."
"아뇨, 많지 않아요. 물론 곧 이곳 난민들에게도 배급이 있을 테지만 저희도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리 많지 않을 듯해서요, 더구나 저희 소대원들은 워낙에 식탐이 없어서 많이 남아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드세요."
"하... 하지만"
"쉿! 그냥 받아주세요. 하이디스님께서 기도해준 덕에 제가 지금 이렇게 숨 쉬고 있어요. 그거에 비하면 빵은 약소합니다. 제발 그냥 받아주세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것을 알고 루크의 두 손이 어쩔 줄 몰랐다.
"하이디스야, 손님을 앞에 두고 웬 청승이냐, 어서 그치지 못하겠니?"
"흑흑, 죄송해요. 어머니! 제가 그만.... 흑!"
"하... 하이디스."
"미... 미안해요, 루크님!"
두 눈에서 눈물을 훔치고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니 가뜩이나 방망이질 치던 루크의 가슴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에이, 울다가 웃으면 거기에 뭐 난다던데, 하하하!"
"네? 어머 참, 루크님도 호호호!"
두 사람의 닭살 대화에 천진난만한 아이들마저 몸을 떨었다. 물론 하이디스의 어머니마저 십수년 만에 두 눈이 크게 떠질 정도였다.
'저 아이가 벌써, 하기야 올해 벌써 19인가? 이제 사랑을 할 나이가 되었군.'
얼굴에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하이디스의 어머니가 공터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냈다. 수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간 처참한 전쟁터에서도 애절한 사랑은 지지 않고 피어났다.
"선임하사님 뭐 찾으세요?"
"응, 전사자 유품수거 작업을 했더니 좀 시장해서, 오늘 보급 된 빵이 어디 있나?"
"아! 그거요, 소대장님이 전부 짊어지고 나가시던데요."
"응? 어... 어디로?"
"난민촌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
"나... 난민촌?"
"네, 급하게 뛰어 가셨습니다."
"이... 이런 젠장! 소대장님~~~!"
흠짓!
'뭐... 뭐지 이 섬뜩한 느낌은?'
"왜 그러세요, 루크님?"
"아, 아닙니다. 누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아서,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좀 걸을까요?"
"네, 루크님."
달빛을 받아 사라지는 연인들 뒤로 배고픈 배를 움켜쥐고 절규하는 이지중대 선임하사의 굶주린 외침이 구슬피 밤하늘에 울려 펴졌다.
"하하! 달빛이 밝으니 늑대도 좋은가 보네요, 하이디스."
"네, 늑대도 외로운가 봐요. 호호호!"
저 울음소리가 자기 소대원의 외침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무책임한 소대장을 둔 덕에 소대원 모두 오늘은 물로 배를 채우게 되었다.
* * *
코와 입을 천으로 가린 수많은 이방인(異邦人)들과 세린디아 포로들이 들판을 뒤덮은 시체들을 불에 태우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배한 세린디아 병사들은 전쟁에 패해서 기운이 빠진 것 보다 무언가에 홀렸다가 깨어난 사람들 같았다. 개중에는 정신적인 공항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발악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행크 공작이 죽으면서 마법이 풀리듯 그렇게 광기로 물들었던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변해버렸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전쟁이라서 시체를 치우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다행이 이방인(異邦人)들이 발 벗고 나서서 그나마 수월했다. 자신들을 그렇게 핍박하던 아마리아 부족들이었지만 시체를 화장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는 모습에서 오히려 순수함과 자부심을 잃지 않은 것은 들판으로 내쫓긴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후세의 사서들이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몽뜨 요새와 크림평야에서 싸웠던 이들에게는 그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내일의 해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그 작은 일에 행복해했다.
그러나 단지... 먼저 간 전우(戰友)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부대~~ 차렷! 사령관님께 대하여 경롓!"
"충성~!"
빰빠라라~ 빰빠바~ 빰빠라라~
나팔수의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나형석 장군이 단상에 올랐다.
"좋아, 쉬어!"
좌중을 둘러본 나형석 장군이 무너진 요새의 돌 더미위에 서서 자랑스런 자신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친애하는 장병 여러분! 본인은 위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대들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느낀다. 우리는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싸웠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국가와 국민을 싸웠고 또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신념을 수호했다. 이것은 위대한 인간 승리이며, 나아가 우리 외인부대의 존재의의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했다."
잠시 말을 끊은 나형석 장군이 돌 더미에서 뛰어 내렸다.
"애석하게도 아직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그리고 내일 당장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자신에게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랑스런 외인부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저 무모한 아마리아 인들에게 평화가 얼마나 달콤한 것인지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다시 죽음의 전장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두려운 자 앞으로 나서라!"
"......."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앞으로 나서는 이가 없었다.
"고맙다. 전우들이여! 이제 우리는 적의 심장부 베를로니로 진격한다. 사단별로 장비와 인원을 점검한 후 보고하도록! 이상!"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장군님!"
"응? 자네 벌써 그렇게 움직여도 되나?"
"벌써요? 한참 누워있었습니다. 사이클론 그 영감탱이도 벌떡 일어나서 저 난리 법석인데, 아마 저를 보면 젊은 놈이 엄살 부린다고 할 겁니다."
"하하하! 그래, 대단한 노익장이야, 보면 볼수록 대단한 분이시지 이번 전투에서도 그분이 아니었으면 우리 모두 오늘 이렇게 숨쉬고 있지 못했을 거야?"
"네, 정말이지 아찔했었으니까요. 그나저나 김재덕 대령님하고 사이클론 영감은 어디로 사라진 겁니까? 도통 보이질 않으니......."
"사리지기는 자네도 잘 아는 곳에 있다네, 벌써 일주일도 넘은 것 같군, 드워프 일족들도 디안 본부에서 전부 다 넘어오다 시피했고 도착하자마자 모두들 그곳으로 몰려갔네."
"그곳?"
"그래, 그곳! 자네가 세린디아의 괴물들과 결전을 벌인 곳 말이야!"
"네? 아니 그곳에는 왜요?"
"글쎄, 내 노라 하는 전문가들이 모두 기간테스에 달라붙었으니 뭔가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이번에도 결과가 좋았으니 말 일세."
"네, 전 그 바람에 죽을 뻔 했다 이 말씀입니다."
"하하하하! 자네 모친이 친 점에 의하면 오래 산다고 했다면서?"
"참내,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나저나 정말 몸은 괜찮은 건가?"
"워낙에 막 굴러먹던 몸이라,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은 쓸 만하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이번 원정에 자네가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니까 말이야."
부대를 둘러보며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새 외인부대 전사자들을 모아놓은 곳에 이르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이곳은 이방인(異邦人)들의 도움으로 묘지를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호크의 명령에 의해서 폴렌시아의 방식과는 다른 매장법인 비석과 함께 십자가가 꽂혀있는 생소한 무덤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만들어 지고 있었다.
"젠장! 이렇게나 많이, 빌어먹을!"
"그래, 거의 두 개 사단병력을 잃어버렸어"
나형석 장군이 무릎을 꿇고 묘비의 흙을 털어냈다. 묘비글에는 이제 16세의 어린 소년의 인생이 이곳에서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나형석 장군이 조심스럽게 거수경례를 했다.
'자네가 준 목숨 덤이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케린버그를 위해서 싸우겠네, 편히 잠들게나. 부관!'
어린 소년 병사의 무덤은 지난 전투 중에 몸을 던져 나형석 장군을 구한 나이 어린 부관이었다.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덤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의 심정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대가가 너무 컸다고 생각했다. 희생 없는 싸움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나 많은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금쯤 끝났겠지?"
"아마도요, 머스탱 공작님이라면 잘 하실 거라고 믿으니까요."
"그래야지 날이 점점 더 추워지는데 어서 이곳을 떠나서 모르카시로 진지를 옮겨야 해!"
"곧,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제발, 그래야 할 텐데......."
허리를 편 나형석 장군의 고개가 저 평야 넘어 모르카시로 향했다.
* * *
"으아아악!"
"쿠아아앙!"
"콜록! 콜록! 이런 빌어먹을, 연기 때문에 도대체 앞이 보이질 않으니, 행크 공작님과는 아직도 인가?"
"네, 저쪽에서 전혀 응답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력부대가 빠져나가고 바로 들이닥치다니, 게다가 생전 처음 보는 저 무기는 또 뭐고,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는데."
"그럼, 항복하라고 친구!"
"헉! 누... 누구냐?"
"누구긴 저승사자지!"
모르카시를 수비하던 그린로즈 기사단 검사는 화들짝 놀라서 어깨위에 올려 있는 차가운 검을 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 우리 쉽게 가자고. 부하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말해!"
"소... 소드마스터!"
검에 서린 마나의 기운을 본 남자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차피 성내의 병력가지고 저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검사가 검을 거꾸로 들어 목에 검을 겨누고 있는 사내에게 넘겼다.
"하... 항복합니다."
"하하하하하! 좋았어. 이제야 호크 백작에게 체면이 서는군. 이보게 헤임즈 자작, 어서 몽뜨 요새에 통신을 타전하게 모르카시도 이제부터 케린버그 영토라고 말이야, 하하하하하!"
오랜만에 광소를 터트린 머스탱 공작이 검을 검 집으로 돌려보낸 후 투구의 가리개를 들어 올렸다. 서서히 연기가 걷히면서 수많은 병력들이 사다리를 이용해서 담을 넘거나 이미 활짝 열린 정문을 통해서 모르카시로 진입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얼마 되지 않던 수비 병력도 진입 전에 쏘아올린 캐논필터의 화력에 의해서 대부분 전멸된 상태였다. 머스탱 공작의 병사들이 빠르게 모르카시 내부를 점령해 나갔다.
"이봐 헤임즈 병사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겠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공작님! 이곳 주민들에게 손끝 하나 대지 말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그래, 잘했네! 이곳은 이제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곳이고 나아가 우리 왕국의 영토가 될 곳이야. 민심을 잃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그들에게 절대로 해를 가해서는 안 돼!"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를 어긴 자는 군령에 의해서 엄격히 다루어 질것입니다."
"좋아! 어서 빨리 모르카시를 정리한다, 곧 몽뜨에서 고생한 우리 병사들이 올 거야,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넵, 알겠습니다. 공작님!"
"참, 최우선적으로 식량부터 확보하게나, 하필이면 겨울에 전쟁을 시작하다니 젠장, 본국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너무 힘들어"
성벽위에 선 머스탱 공작은 케린버그의 영토가 된 모르카시의 전경을 둘러보며 이 무모한 전쟁이 서서히 그 끝을 향해서 달려가 있음을 느꼈다. 저 태양이 지는 쪽으로 열흘을 가면 이 전쟁의 원흉인 이사벨라 여왕이 기다리고 있다. 이 전쟁은 베를로니를 점령해야 만 끝이 난다는 것을 머스탱 공작 자신도 알고 있었다.
"장군님께 전해드려, 지급으로!"
"알겠습니다!"
전령은 공작에게 받은 전문을 들고 급히 요새를 가로 질러 뛰기 시작했다.
시체를 태우는 냄새로 가득하던 광장도 이제는 정리가 다 되어 지금은 외인부대 병사들이 기본훈련을 하고 있었다. 검술 훈련이 한창인 광장을 가로질러 무너진 성벽을 통해 들판으로 나가니 나무 십자가가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몸을 멈춘 전령은 묘지를 향해서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러나 곧 자신의 임무를 위해 묘지 사이로 뜀박질을 다시 했다. 하얗게 핀 들 꽃밭을 지나치자 우렁찬 함성 소리가 고막을 찢듯이 울려 퍼졌다.
"악!"
"목소리가 작다! 그거 밖에 목소리가 않나오나! 배에서 소리를 질러! 누가 목으로 소리를 내라고 했어!"
들판을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외인부대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 이방인(異邦人)들이었다. 살아남은 남자들 중에서 나이가 해당되는 젊은 남자들은 지원을 받아서 외인부대로 편성해 기초훈련을 하고 있었다.
처음 받는 군사훈련에 힘들어했지만 정신무장 상태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들이었다. 알렉스 국왕으로부터 그들도 케린버그 국민으로서 동등하게 받아들인다는 왕명을 전해들은 그들이 크게 감동해서 자발적으로 참전 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 전쟁에서 커다란 희생을 치루고 병력 부족에 시달렸던 나형석 장군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그들로서도 사명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헉헉! 충성! 장군님, 긴급전문입니다."
빨간색 봉투로 봉인된 편지를 읽어 내려간 나형석 장군의 표정이 밝아졌다.
"머스탱 공작이 성공했군, 전군에 하달해! 모르카시로 이동한다!"
전문을 움켜쥔 나형석 장군의 주먹이 전의를 불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아직도 승리에 목마르고 있었다.
"전군, 비상이야! 위관급들은 모두 대대 상황실로 집합해!"
몽뜨 요새가 '땡땡땡' 거리는 비상종 타종으로 시끌벅적 해졌다. 거의 모든 병사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뛰기 시작했고 종소리는 더 빨리 더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비상종이?"
"루... 루크님, 무슨 일이 생겼나요?"
"별것 아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도 이동명령이 내려진 것 같은데 이곳 사람들도 모두 같이 움직이게 될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급히 몸을 돌려 뛰어가려던 루크가 목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이디스의 손에 쥐어주고 다시 부대를 향해서 뛰었다.
"하이디스, 그건 제 생명이에요, 잘 보관해 줘요!"
소리치고 뛰어가는 루크를 바라보는 하이디스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했다. 손바닥을 펴보니 금속판에 낯선 글자가 새겨져있었다. 그것은 바로 루크의 인식표였다.
얼핏 인식표에 대해서 들었던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에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무릎을 꿇고 손에 쥔 것을 소중히 가슴에 가져간 하이디스의 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기도가 새어나왔다.
다음날 새롭게 편성된 외인부대가 모르카시로 이동을 시작했다. 처음 몽뜨에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병력도 많아 졌을 뿐 아니라 부대 뒤로 따라 붙은 이방인(異邦人) 부족민의 숫자 때문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긴 행렬이 다스커스 강을 건너 모르카시로 향했다.
"후~ 바람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 같군"
"네, 겨울이니까요."
"병사들은 그래도 버티겠지만 난민들이 걱정이군."
"네, 여자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점점 속도가 처지고 있습니다."
두필의 말이 급히 나형석 장군의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충성!"
"호크 중령,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가?"
"말들을 이방인(異邦人)난민들에게 지원해주고 오는 길입니다. 마차와 짐수레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니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수고했네, 미쳐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자네가 해주었군. 수고했어!"
"아닙니다. 장군님 명령이라고 했으니 모두 장군님에게 감사를 표할 겁니다."
"이 사람이 싱겁긴, 그 말들은 세린디아의 말들이지 않은가? 어차피 그들 것인데 생색은 내게 하다니, 그나저나 식량이 거의 바닥인데 큰일이야!"
"네, 헬렌 백작님에게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수확이 거의 다 되었을 텐데......."
"수확이라니, 뭔가 준비한 것이 있는 건가?"
"뭐,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이 춘궁기(春窮期)를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것이 뭐든 간에 빨리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네, 저도 미칠 지경입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힘든 걸음을 하고 있는 그들의 머리위로 야속하게 몰아쳤다.
* * *
"이... 이것이 무엇인가?"
"sweet potato(고구마)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국왕전하!"
"sweet potato(고구마)? 처음 들어보는 군, 아니 보는 것도 처음이지 그런데 이것은 왜 가져왔지?"
"지난번에 말씀드린 식량 대용이 이것입니다. 호크 백작이 디안 협곡 깊숙이에서 발견해온 것인데 맛이 일품입니다."
헬렌 백작의 말에 알렉스 국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테이블위에 쭉 펼쳐진 접시들을 턱을 고인 채 아주 신중히 고민하는 모습이 뭔가 마땅치 않은 듯하자 헬렌 백작이 난처한 얼굴로 국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도대체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헉~ 죄... 죄송합니다. 국왕전하! 자, 이렇게 여기 한번 드셔보옵소서. 뜨거우니 조심하십시오."
껍질을 벗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스푼에 떠서 조심스럽게 입에 넣은 국왕이 두 눈을 감은 채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헬렌 백작이 가슴을 졸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이것을 재배하기 위해서 들인 고생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 후 국왕의 입에서 어떤 평가가 나올지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이... 이럴수가,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나다니, 후... 훌륭하오!"
국왕의 두 눈에 놀라움이 가득한 것을 본 헬렌 백작의 얼굴에 비로소 미소가 걸렸다.
"이것도 드셔 보십시오. 케이크입니다."
"오오~ 케이크 까지. 음, 이 맛은 허니 케이크보다 훨씬 좋구려."
"하하하! 맛있으시다니 다행입니다. 특별히 조리법도 필요하지 않고 맛과 영양에서 아주 뛰어난 작물입니다. 전하!"
"그래, 수확량은 충분한가?"
"네, 전하 호크경의 노력으로 아주 빨리 그리고 많은 양을 수확 하게 되었으니 국왕 전하의 윤허만 있으시면 곧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습니다. 전하!"
"정말 기쁜 소식이로군, 호크는 신이 내게 내리신 선물이 아닐까? 헬렌 백작!"
"네? 아, 아닙니다. 케린버그에 내린 선물이지 않을까요?"
"그래! 그래! 하하하하하! 맞아!"
"곧 모르카시에 도착한다고 하니 그곳에도 식량을 보내야겠습니다. 전하!"
"그런가? 그렇다면 이번 보급에는 내가 직접 가겠네!"
"저... 전하! 그것만은, 제발 위험한 전장에 국왕께서 몸소 나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만하게 지난번에 이 이야기는 끝난 걸로 아는데, 서로 기운빼지 맙시다. 이 일은 내 사명이기도 해! 나라를 위해서 피를 흘리는 병사들을 위해서 가서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어야 해! 반드시!"
"저... 전하!"
알렉스 국왕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헬렌 백작은 국왕의 뜨거운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깊숙이 머리를 조아렸다.
* * *
"공작님! 로베르트입니다."
"그래, 들어오게! 알아봤나?"
"네, 공작님 여기 보고서입니다."
"최근 들어 머스탱 공작은 저택에서 외출을 삼가고 있고 헬렌백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대규모 작물재배를 하고 있습니다. 보고서에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작물재배?"
"네, 그렇습니다. 식량난 해결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봅니다."
"허허, 이제 별짓을 다하는 군."
"그리고 그 눈엣가시 같은 호크 녀석은 어떻게 하고 있지?"
"그것이 호무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흠, 머스탱과 호크는 집에서 두문불출이고 헬렌 백작은 작물재배에 여념이 없다? 그럴 리가 없어 그날 분명히 뭔가 구린 냄새가 났단 말이지, 음......."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생각에 잠겨드는 케론스 공작을 보면서 로베르트는 공작이 요즘 너무 소심해 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년의 공작이라면 이렇게 자잘 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텐데 유달리 요즘 들어선 사소한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너무 조용해! 로베르트, 믿을 만한 아이들 중 몇을 추려서 왕궁에 들여보내. 주로 국왕 근처의 시녀나 하인들로 말이야. 좀 더 정보를 캐보라고 분명히 뭔가를 꾸미고 있는 느낌이야."
"네,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낙인은 어떻게 되었나?"
"그림자 기사단 손에 들어간 것이 쥬(Ju)의 낙인이 맞다고 보고가 올라왔고 지금 현재는 잉글햄으로 숨어들었다는 마지막 보고가 있었습니다."
"또, 잉글햄이란 말인가?"
이제는 잉글햄의 잉자만 들어도 소화가 되지 않는 케론스 공작이었다.
"예, 아무래도 그쪽이 레센으로 넘어가기가 수월 할 테니까요."
"뭔가 일이 꼬이고 있는 게 틀림없는데 어디서부터 얽힌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던 케론스 공작이 달리 방법이 없는 듯 고개를 들고 로베르트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명을 받은 로베르트가 방을 나가자 공작의 오른손이 가볍게 튕겼다.
딱!
천장에서 예의 사내가 소리 없이 내려와 다가왔다.
"네가 조용히 알아볼 일이 있다."
조용히 속삭이는 귓속말을 들은 사내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분명히 뭔가 잘못 돼가고 있어! 도대체 이 불안하게 떨리는 가슴은 뭐지?"
그 시각 레쎈의 그림자 기사단이 잉글햄 모처에서 본국의 지원세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들 주위로 그물처럼 조여 오는 적들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바심이 나는 것은 당연했다.
"에테른! 자네가 보관하게, 만일 일이 발생할 경우 자네 혼자 모스크산맥을 넘는다. 뒤는 우리가 목을 걸고 지킬 테니 반드시 베른 하트 단장님에게 상자를 전달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자정을 기해 움직인다. 레쎈 만세!"
"레쎈 만세!"
케론스 공작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림자 기사단들이 달빛이 구름 속에 숨는 오늘밤 자정에 국경을 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공터의 한 구석에 있는 땅이 조금 솟아나 있는 것을 어둠 때문인지 그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뿌우우우! 뿌우우우!
"공작님! 호크 백작님이 도착 하셨습니다."
아직 외인부대에 대해서 모르는 머스탱 공작의 불의 사자 기사단원들이 여전히 호크를 백작이라고 보고를 하자 머스탱 공작은 잠시 후 이들의 모습을 본 기사단과 병사들에게 뭐라고 설명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고민은 잠시였고 몽뜨에서 사투를 벌이고 승리한 병사들을 맞이하기 위해 머스탱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뭐... 뭐야! 우리 케린버그 군인들 맞아?"
"아... 아닌데, 저런 군인들이 있다는 말을 자네는 들어봤어?"
"아니, 나도 모르지. 허참! 저 옷 좀 보라고."
"다른 거 다 관두고 저 눈빛 좀 봐! 보통내기들이 아니야."
낯선 복장의 군인들이 정문을 통해 들어오니 도시가 시끄러워 졌다. 그러나 점점 군화 발소리가 도시 안을 묵직하게 울리자 그들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세 때문인지 시끄럽던 소란도 조용해졌다.
"부대~~ 정지!"
"각 부대별로 인원과 장비를 점검하고 구역별로 부대를 배치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충성!"
"휴~ 겨우 겨우, 시간을 맞췄어!"
"네, 장군님! 고생 하셨습니다."
"그래, 우선 병사들을 푹 쉬게 하게 오늘이 지나면 또 한동안은 편안한 잠자리하고는 안녕이니까."
"넵, 장군님!"
"작전장교들도 이제는 틀이 잡혀가네요, 장군님!"
"응, 자넨가? 그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면 사람들은 변하게 마련이지 이젠 제법 군기가 들어 보이나?"
"네, 제법 쓸 만해 진 것 같습니다."
"자네가 칭찬을 다 하고 별 일 이군. 그보다 말이지 생각보다 훨씬 크군. 이 모르카시 말이야."
"네, 정말 거대 도시죠. 수도인 베를로니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던데 상상도 안갑니다."
"그래, 어쨌든 이방인(異邦人)들과 약속은 지킬 수 있게 돼서 다행이군."
"네, 이번 전투로 도시의 정원이 감소했으니까요. 오히려 이방인(異邦人)들이 살 집이 생겼으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죠."
"그래도 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거야, 아마도 만감이 교차하겠지, 내쫓겼던 곳으로 반평생 만에 돌아오게 되었으니까."
어린아이들은 이곳을 몰랐지만 나이든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 입을 맞추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형석 장군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이 전쟁에서 많은 피를 흘린 그들에게 반드시 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건의는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승인되었다.
부족의 수장들이 나형석 장군과 호크 앞으로 지나가면서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그들이 표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투레질하는 말의 목을 다독여 주던 호크의 얼굴이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구겨졌다.
"죄송합니다. 장군님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나형석 장군도 샹그릴라의 성기단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호크 중령이 그다지 반기는 않는다는 것은 눈치를 채고 있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이방인(異邦人)들을 이끌어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니 딱히 나 장군 입장에서는 그런 호크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하게,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자네의 목숨을 구했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너무 심하게 대하지는 말게."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
"그래, 그럼 난 머스탱 공작을 만나봐야겠군."
성안으로 사라지는 나형석 장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호크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크 경, 여기서 보는 군."
"당신이 그렇게 안 불러도 내 이름이 호크인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어, 그나저나 당신 돌아간 거 아니었소?"
"돌아가기는, 자네의 궤변을 다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가지라는 말은 내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그래서 자네와 함께 하는 거야."
"헐, 그러세요. 그럼 내가 돌아가란 말도 했다는 것은 잊어버리셨나요?"
"그럴수야 없지, 저 나이어린 성자도 그분의 말씀을 저렇게 실천하고 있는데 어른이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겠나?"
베르트니의 시선을 따라가니 군복을 입고 부대원들과 섞여서 이동하고 있는 어린 스톤의 소매에는 위생병 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저 자식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하고 난리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개척하려고 하는 저 모습이 나보다 훨씬 났다네, 다가오는 저주스런 예언에도 굴하지 않는 거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알아듣게 말 좀 하시죠!"
"이런 자네 똑똑한 척은 다하더니 갑자기 멍청해지기로 한 건가, 아니면 자네야 말로 나를 놀리는 건가?"
"그게, 무슨?"
"이곳까지 오면서 보지 않았나? 쥬(Ju)의 신전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이사벨라 여왕의 신상이 세워져 있던 것을 말이야!"
"그래서요?"
"이 친구 보게, 그래서라니 자네는 두 번째 예언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두 번째 예언?"
성기사 베르트니의 말에 기억을 더듬던 호크의 안색이 갑자기 바뀌었다.
'이교도(異敎徒)의 왕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 하리 로다!'
"빌어먹을, 두 번째 낙인의 조짐이란 말인가?"
"그래, 두 번째 낙인의 발현이지 어쩌면 세린디아와 케린버그의 전쟁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 아니었을까? 운명의 시계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고 있어, 파멸의 그날을 기다리면서."
"젠장, 그래서 베를로니까지 함께 가겠다는 거요?"
"당연하지 우리 성기단의 임무가 바로 이교도(異敎徒)를 처벌하는 것이지 않은가? 이교도(異敎徒)의 박해로 우리 쥬(Ju)의 자식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어찌 모른 척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좀 모른 척 좀 하시죠, 방해 되는데!"
"그럴 리가, 도움이 되면 됐지, 자네의 위기도 누군가 도와주지 않았나?"
"제길, 되게 생색내기는!"
"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그런 것들은 어울리지 않아!"
"아, 알았으니 그만 해요. 당신 잘난 것은 잘 아니까!"
베르트니를 쏘아 본 호크가 말머리를 돌려 성안으로 향했다. 길에는 이방인(異邦人) 부족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몸을 이끌고 성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사이로 말을 달리는 호크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그 예언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어서 빨리 사이클론과 의논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말고삐를 더 세게 잡아챘다.
* * *
"비켜라! 어서 여왕님을 뵈어야 한다!"
"안됩니다. 그 누구도 기도실에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여인들이 창을 교차시켜 출입을 막자 숨 가쁘게 뛰어 들어온 남자가 답답한지 혀를 찼다.
"이런 답답한 일이 있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비상사태란 말일세, 비상사태!"
그러나 여 사제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이사벨라 여왕의 기도실 앞이 소란스러워 지자 커튼이 올라가며 이사벨라 여왕이 나타났다.
"웬 호들갑이냐?"
"여... 여왕님, 큰일 났습니다. 행크 공작이, 행크 공작이 대패를 했고 모르카시 또한 적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일을 어찌 하올지 명을 내려 주십시오!"
"뭐라고? 미련한 녀석, 그 정도의 힘을 주었건만 로베니아를 정벌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도적 무리에게 당했다는 건가?"
"아닙니다, 여왕님 적들은 도적 무리가 아니고 정규군이라 하옵니다."
"정규군?"
"예, 여왕마마!"
"어느 나라, 군대란 말이냐?"
"그... 그것은 아직까지, 허나 지금은 몸을 피하셔야 할 때 입니다. 지금 수도에는 적들의 공격을 방어할 만 병력이 없사옵니다. 어서, 피난을 명하소서!"
"시끄러워! 쓸모없는 버러지들 같으니라고, 이래서 인간들은 안 된다는 거야, 도대체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도망갈 생각부터 한다니까!"
이사벨라 여왕이 일어서자 주위의 대기가 흔들렸다.
"헉! 크으으으윽. 여... 여왕님... 제발!"
간절하게 자비를 구하는 남자의 눈길을 외면한 이사벨라 여왕이 다시 기도실로 들어갔다. 곧 바로 온몸의 피가 다 빠져 나가는 것처럼 말라비틀어지고 이내 먼지로 변해버린 사내의 육신에서 빠져 나온 하얀 영체(靈體)가 기도실로 들어와 바닥에 놓인 구슬로 들어갔다.
여사제가 기도실 안에 불을 밝히니 작은 방처럼 보이던 곳이 매우 커서 그랜드 홀(grand hall)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광장 안을 엄청난 수의 유리구슬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구슬이 예사롭지가 않았는데 매우 흡족하게 구슬을 바라보던 이사벨라의 여왕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호호호!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많이 몰려오면 올수록 구슬에 채울 영혼의 수가 늘어나니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지, 어차피 인간들의 영혼이 필요해서 전쟁을 부추겼을 뿐이니까. 어리석은 인간들도 이럴 때는 귀엽다니까. 호호호호!"
케린버그의 대군이 곧 베를로니로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이사벨라 여왕은 느긋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어서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수많은 구슬들이 요사스러운 기운을 토해냈다.
* * *
"뭐야, 저 녀석들은 기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병졸들도 아닌데, 저 시건방진 태도를 그냥 보고 있어야 합니까?"
"그만해라, 머스탱 공작님이 명령하시지 않았나. 모두 모른척해!"
"하지만 뉴튼 단장님! 저놈들이 감히 기사들인 저희들에게도 예의를 차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명예에 관한 일입니다."
"빌어먹을, 그냥 모른 척 하란 말이다!"
"저 놈들에게 그럴 권리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래, 있지. 그것도 아주 많이!"
"헉! 모두 경의를!"
"위대한 케린버그의 국왕전하를 뵈옵니다!"
뒤에서 나타난 자신들의 국왕을 보고 깜짝 놀란 기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저들은 그래도 되니까, 괜한 트집 잡지 말도록,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전하!"
조금은 격앙된 알렉스 국왕이 헬렌백작과 외인부대의 진영으로 들어섰다.
"부대~ 동작 그만! 충성!"
짐을 나르던 병사의 구령에 모든 이들의 동작이 멈췄다. 부대 안으로 들어갈수록 알렉스 국왕의 손이 떨렸다. 그의 두 눈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간직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지치고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국왕의 갑작스런 방문에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뛰어나왔다.
한 명 두 명 국왕이 지나갈 때 마다 거수경례를 붙이기 시작했다. 목발을 짚고 힘겹게 일어서는 병사도, 머리에 붕대를 감아 한쪽 눈만 보이는 병사도, 그리고 팔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소매만 펄럭이는 어린병사도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례를 국왕에게 했다.
그 어떤 이의 인사도 이렇게 뜨겁지는 않았다. 오른팔이 없어 왼손으로 경례를 하는 소년 병사 앞에서 멈춰선 알렉스 국왕의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제......."
목이 메이는 지 알렉스 국왕의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았다.
"제군들 승리를 축하한다."
알렉스 국왕이 다리를 붙이고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답례의 경례를 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의 진심이 그렇게 소리 없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헬렌 백작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오늘처럼 제 자신이 미운적은 없었습니다. 선왕께서는 늘 당당하고 국민을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늘 비겁하기만 했습니다. 빵을 얻기 위한 명분으로 늘 머리를 숙여야 했고, 나라의 여자들이 팔려 가는데 두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병사들이 죽어가는 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왕입니까?"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는 알렉스 국왕을 보며 나형석 장군이 편지하나를 꺼내서 국왕 앞에 내보였다. 천천히 편지를 읽어보는 국왕을 보면서 나형석 장군이 몸을 일으켰다.
"상자 안에 많이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면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릴 수 있을 겁니다. 국왕전하, 누구나 인생은 이 세상에서 한번 뿐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다르듯 그 길도 다르겠죠. 하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서 노력한다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서 싸웠고 죽었습니다. 명예로운 죽음이었고 행복한 죽음이었습니다. 앞으로 이곳을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만드시면 그것으로 전하의 짐을 벗을 수 있으실 겁니다."
알렉스 국왕이 편지에 빠져들자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온 나형석 장군이 복도로 빠져 나오자 가드들이 따라 붙었다. 그러나 나 장군이 손을 들어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을 비추자 좀 더 멀리서 장군을 따르기 시작했다. 한 참을 길을 걸어 성루에 오르자 모르카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뒷짐을 지고 야경을 바라보는 나 장군의 두 눈에서도 물방울이 고였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매만지는 그의 뒷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해 보였다.
"혼자 청승을 떨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늙으면 잠이 안 온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가 보네요."
"하하하! 그럼 늙다리 끼리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머스탱 공작이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나형석 장군에게 술병을 건넸다. 받아든 술병을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모습을 보면서 공작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나 제너럴은 진정한 사내요! 술은 자고로 그렇게 마셔야, 제 맛이지!"
"크으! 엄청 독하군요."
술병을 건네받은 머스탱 공작도 몇 모금 들이켰다.
"후아! 제가 가장 아끼던 겁니다. 우리가 승리하면 축하하려고 간직하고 있던 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너럴, 승리의 축하주 인데 이렇게 맛이 왜 이렇게 쓸까요?"
"글쎄요, 아마도 죽은 병사들의 피 냄새가 스며들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런가요, 우리만 마신다고 녀석들이 화를 내는 모양이군, 자 너희들도 마셔라!"
행크 공작이 술병을 기울이자 술이 바닥으로 흘러 내렸다.
"그리고 영혼이라도 편히 쉬기를......."
공작의 마지막 말을 듣고 있던 나형석 장군도 조용히 그 말을 따라 했다.
"제너럴,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뭡니까? 아까부터 계속 만지작거리고 계시던데 소중한 건가 봅니다."
"이번 전투에서 제 대신 죽은 부관의 군번줄입니다. 미련하게도 몸을 날려 저를 살렸죠. 겨우 16살이었습니다. 16살... 그런데 웃기는 건 녀석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녀석이 했던 말이나 실수들은 기억이 나는 데 도무지 얼굴이 기억이 나지를 않네요."
씁쓸히 말하며 군번줄을 목에 거는 나형석 장군의 말에서 깊은 아픔을 느낀 머스탱 공작도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승리를 해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줄은 몰랐습니다."
"왠지 빛바랜 승리처럼 들리는 군요."
"빛바랜 승리라..., 그럴지도."
말없이 모르카시의 야경을 바라보는 두 사람과 전사자들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알렉스 국왕 그리고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병사들의 밤이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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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1. 커레히: 북미 인디언들의 말로서, '홀로 끝까지 맞서 싸운다'라는 뜻으로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 이지 중대의 구호로 유명합니다. 책에서의 외인부대 또한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을 가진 것과 유사하여 외인부대의 구호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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