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MORTAL COMBAT! 사투(死鬪)!
이히히힝!
사나운 전마들의 울음소리와 투레질 소리가 크림 평야를 가득 채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뒤로 거대한 그림자들이 굉음을 내면서 수풀 지대를 파괴했다. 높이 뜬 달빛이 몽뜨 요새 앞의 크림 평야를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 예고 없이 등장한 이들의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는가?"
"네, 공작 전하! 바로 몽뜨입니다."
"워워~ 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스탈리안!"
"죄송합니다. 그러나 중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어이없게도 그런 쓰레기들의 성전(聖戰)에 훼방을 놓다니, 웃기지도 않아."
"이번에 몽뜨 일 해결되면 이방인(異邦人)을 이 세린디아에서 말살해버리도록!"
"예! 공작 각하, 심려 마십시오!"
"좋아. 진지를 구축하고 서둘러 야영준비를 시키게. 내일 식사는 몽뜨의 내성에서 해야지. 안 그래, 스탈리안?"
"지당하신 분부십니다, 공작 전하."
무리하게 행군을 감행한 모르카시에서 출발한 세린디아의 주력이 지금 막 몽뜨 요새 앞 평야에 도착했다. 대군(大軍)이 소란스럽게 야영을 준비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어두웠던 들판이 순식간에 대낮처럼 밝아졌고, 수많은 천막이 세워졌다.
적이 눈앞에 있지만, 아예 무시하는지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세린디아의 병사들은 승리가 당연하다는 분위기로 좀 들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들의 등 뒤로 어마어마한 중압감을 주는 기간테스 군단이 위협적으로 서 있었다.
멀리 몽뜨에서도 그 모습들이 들어왔다.
"어마어마하군. 15만은 되어 보이는 걸!"
"아닙니다. 20만은 더 되어 보입니다. 저 뒤쪽에 있는 보급부대까지 합치면 말입니다."
"그렇군. 일부러 기간테스를 전진 배치했어. 약은 놈들 같으니라고!"
"네. 제법 심리전을 펼칠 줄 안다는 이야기겠죠."
"좋아! 특임대는 준비됐나?"
"넵, 장군님! 챠챠 대위가 벌써 저들 진영 안에 침투에 들어가 있을 겁니다."
"좋아, 중령! 내일은 반드시 우리가 기선을 제압해야만 해. 작전대로 싸워야 해. 조금의 빈틈이라도 발생하면 둑이 무너지듯 우리는 바로 끝이야!"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임하는 전투입니다. 필승(必勝)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필승(必勝)!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말이네. 그나저나 내일 날씨가 맑아야 할 텐데, 걱정이군."
"그 점은 심려하지 마세요, 제너럴! 내일은 반드시 태양이 뜰 테니까요."
"오~ 사이클론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분명하겠죠. 안심입니다."
"이제 6시간 남았습니다, 장군님!"
"동틀 때까지 6시간이라, 모두 편히 쉬라고 전하게. 오늘밤은 푹 자두라고 전해. 내일부터는 잠잘 시간이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장군님!"
망원경을 들어 자세히 적진을 관찰하던 나 장군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젠장, 다리가 후들거리는군."
휘이잉~
살을 에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몽뜨 요새와 들판에 세워진 세린디아군의 진영 사이를 빠져나가며 슬피 울었다. 날이 밝으면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예견하는 듯해, 두려움에 떨던 호크는 오랜만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모두 어머니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보살펴주세요. 내일 당신의 아들들이 가능하면 많이 살아남도록 기도해주세요.'
호크의 간절한 기도가 통한 것일까?
밤하늘에 유성이 긴 꼬리를 그리며 사라져갔다.
"전원! 대열을 준비하라!"
부~ 웅~
거대한 뿔 나팔 소리가 세린디아 진영의 아침을 깨우며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모든 부장들은 병사들을 무장시켜라!"
"말들을 준비하라! 어서 기사단을 준비시켜!"
뿌우우! 뿌우우!
다급하게 울리는 나팔소리에 맞춰서 병사들의 움직임도 급박해졌고, 서서히 인간들의 물결이 몽뜨 요새 평야를 뒤덮었다. 차디찬 동토(冬土)가 병사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15만 대군이 뿜어내는 입김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이윽고 2시간이 흘러 드넓은 크림 평야는 세린디아의 정예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전투대형을 이루어놓으니, 그야말로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공작 전하! 준비되었습니다."
"수고했네, 스탈리안!"
눈처럼 하얀 백마를 타고 나타난 행크 공작이 죽 늘어선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말이 몇 차례 투레질과 함께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고 공작이 다시 고삐를 당기기를 수차례, 갑자기 검을 뽑아 높이 치켜들고 공작이 일렬로 늘어선 병사들 앞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서 세린디아의 병사들이 방패와 창을 높이 들고 함성을 질러댔다.
"와! 와!"
세린디아 진영에서 터져 나온 거센 함성이 몽뜨 요새를 부숴버릴 듯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아침부터 시끄럽게 목소리로 싸우냐? 그런 거야? 목소리 크면 이기는 거야?"
호크가 볼멘소리로 크게 소리치자 등 뒤에서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홱!
"이것들 봐라!"
뒤돌아선 호크의 두 눈에 완전무장한 외인부대원들이 가득 들어왔다.
"왜! 니들 쫄았냐?"
"아닙니다!"
"이것들이 아침 안 먹었어? 목소리가 그게 뭐야?"
"아닙니다~!"
"좋아! 남자 목소리가 그 정도는 돼야지. 하늘을 보니, 죽기 딱 좋은 날이군. 제군들도 그렇게 생각하나?"
"네, 맞습니다!"
병사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요새 안을 떠나가도록 울렸다.
"좋아, 좋아! 우리 외인부대는 어떻게 싸우는가?"
"악으로! 깡으로!"
"뭐라고?"
"악으로!! 깡으로!!"
악을 쓰는 외인부대원들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독기로 똘똘 뭉친 그들에게서 두려움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새로 개발된 전투용 투구을 눌러쓴 호크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전원 투구를 머리에 쓰는 것을 신호로 굳게 닫혔던 성문이 열리고 도개교가 서서히 내려갔다.
"핸들러, 군가 하나 때리자!"
"넵, 중령님!"
명령을 받은 핸들러 소령이 호크 중령이 좋아하는 군가를 선창했다.
"...번쩍거린다!"
"모스크산까지 앞으로, 앞으로! 무찔러, 찔러~ 케린버그 남아의 창검이 번쩍거린다!"
"원수여! 침략자들이여!"
신명난 호크의 추임에 병사들의 군가소리가 더욱 드세졌다.
"어서 빨리 물러가라! 두 손 들어라!"
저벅저벅.
묵직한 군화소리가 성내를 울리는 가운데 무서운 기세로 외인부대가 성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성벽 모루 위에 자리한 임시 상황실에서 지켜보던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이 밖으로 나와 출정하는 부대원들을 배웅했다.
"부~대 전방에 대하여, 받들어~ 총!"
"충-성!"
병사들의 진심어린 경례를 받은 나 장군의 마음도 뜨겁게 불타올랐고 나 장군의 답례 또한 힘차게 올라갔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나갈 때까지 나 장군의 손은 내려가지 않았다.
"모두! 건승하길......."
외인부대가 나가는 길에 늘어선 이방인(異邦人) 여인들이 구슬픈 울음소리를 냈다. 호크가 예전에 본 영화 '아라비아 로렌스'에서 사막부족의 여인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뭐야, 저 여자들 왜 소리 지르는 거야?"
"전장(戰場)에 나가는 남자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신에게 호소하는 겁니다. 세린디아의 오래된 풍습이죠."
"그런데 꼭 저런 소리를 내야 해! 으유! 소름 끼쳐!"
"하하하하! 신에게 들리게 하려면 보통 소리로 되겠습니까?"
호크와 핸들러의 대화를 뒤로하고 외인부대 병력이 요새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때 울음소리를 내던 수많은 여인들이 광장으로 달려와 병사들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루크님! 루크님!"
"누구? 아! 하이디스! 어떻게 왔어요?"
전날 아이들에게 빵을 건네줄 때 만났던 아름다운 여인이 숨을 헐떡이면서 루크를 따라왔다.
"네, 루크님! 이것을......."
닿을 듯 말듯 애타게 손을 내미는 그녀의 손끝에 달린 손수건이 겨우 루크의 손에 들어왔다. 손수건을 건네고 바닥에 넘어진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자신도 모르게 대열에서 뛰쳐나갈 뻔했지만, 행군 중에 대열을 이탈할 수는 없었다. 멀어져 가는 그녀에게 그저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손에 쥔 손수건에서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제 처음 본 그녀였지만, 밤새 루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하이디스... 그녀의 향기가 손수건에서 묻어나는 듯했다. 손수건을 품에 갈무리한 루크의 얼굴에는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가지는 미소가 떠올랐다.
정문을 통과한 외인부대가 요새 밖으로 이동했다.
"휘이~ 정말 벌떼처럼 몰려왔군."
"젠장,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중령님만 믿어! 그럼 돼!"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세린디아의 병사들을 보면서 에밀과 루브카가 넋두리를 늘어놓자, 다가오던 핸들러가 못을 박듯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바위 위에 올라서 있는 호크에게 향했다.
"자식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그렇다고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어."
"전령이 옵니다!"
세린디아 진영에서 한 마리 말이 백기를 든 기수를 태우고 달려 나왔다.
"젠장! 가까이 오게 하면 안 돼!"
깜짝 놀란 호크가 급히 몸을 날려 전령에게 다가갔다. 누군가 달려 나오는 모습에 전령도 급히 말의 고삐를 당겼다.
"누군지 신분을 밝히시오!"
"젠장, 내가 누군지 알 거 없고, 뭐야?"
"이... 이런 무례한!"
"아! 시끄럽고 뭐냐고?"
"무식한 것들 같으니라고. 잘 들어라 위대하신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님께서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푸시니 지금이라도 모두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시겠다는 친명이시다."
"웃기는 소리 하네. 지금 장난해! 내 대답은 이거다!"
호크가 가운데 손가락을 얼굴 높이 들어 올리면서 침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뜻인지 짐작한 전령이 이를 갈면서 돌아갔다.
"휴~ 큰일 날 뻔했네."
가슴을 쓸어내린 호크는 진영으로 돌아왔다.
전령의 대답을 들은 행크 공작의 표정에 비웃음이 가득 번졌다.
"천한 것들은 제 죽을 자리를 모른다니까? 후후!"
"하인스 백작, 그러니 버러지 같은 것들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하하하하!"
"하하하하!"
세린디아 진영은 이미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행크 공작이 몽뜨 요새를 좀 더 자세히 살펴서 호크를 발견했더라면, 이 전쟁의 결과가 다르게 변했을까? 아니면 마찬가지였을까? 그 대답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선봉은 제가 맡겠습니다. 행크 공작님!"
"아니. 하인스 백작, 그대가 친히 나서겠다는 말이오!"
"후후, 세린디아를 위해서 큰일을 하실 분이 굳이 이런 작은 일에 나서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제가 금방 정리할 터이니 공작님은 케린버그를 손봐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그럼, 구경이나 하시지요."
"알겠소이다. 그럼, 백작의 솜씨를 감상하겠소!"
행크 공작의 격려 속에 하인스 백작이 전장으로 나섰다. 백작의 하얀 장갑이 땅바닥에 떨어지자, 세린디아의 보병이 보부도 당당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묵직한 북소리에 맞춰서 병사들의 발소리가 위협적으로 외인부대의 숨통을 조여 왔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전쟁에서 긴장하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모두가 똑같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극복하느냐 아니면, 굴복하느냐가 승리를 결정짓는 요인이다.
호크의 고개가 요새로 향했다.
"장군님! 적 보병이 먼저 전진을 시작했습니다."
"좋아! 예상대로야. 캐논포 대대 에 알려라. 불꽃놀이를 시작하라고!"
"알겠습니다, 장군님!"
망원경으로 적진을 살피는 나형석 장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전원, 전투개시 명령을 하달한다. 전투명령 1호 개시! 필승의 신념으로 임해라!"
"넷! 알겠습니다. 통신병! 작전명령 하달하라."
임시 상황실 요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다행히도 적들이 저희 예측대로 움직여주는군요."
"네, 사이클론님. 하지만 언제까지나 우리 뜻대로 되리라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그때를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걱정 마십시오. 살 만큼 살았으니 오늘 그 값을 해야겠죠. 그럼, 제너럴! 무운을 빕니다."
"사이클론님도......."
서로의 손을 꽉 잡은 노장들의 두 눈에는 젊은 병사들 못지않은 열기가 타올랐다.
"이거, 저 녀석들 살기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야!"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투두둥!
쐐애액!
적군과 대치중인 외인부대 머리 위로 수많은 강전들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세린디아 보병들에게 날아갔다.
"드디어 작전개시다! 전원 돌격 앞으로!"
호크의 입에서 찢어지는 고함이 터져 나오는 것과 완전무장한 외인부대 용사들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뭐야? 발리스타인가? 성을 공격하는 발리스타로 보병을 공격해? 미치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있나?"
"저희들의 군세에 겁을 먹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큰 화살로 병사를 몇이나 죽일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
쿠아앙!
콰쾅!
"으아아악!"
"살려줘!"
몽뜨 요새에서 날아오는 강전을 우습게보고 이야기하던 세린디아 지휘부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강전이 세린디아 병사들 사이로 떨어질 때마다 천지가 흔들리는 폭발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옛날이야기에서 나오는 지옥의 불길처럼 거대한 불꽃들이 병사들의 목숨을 집어 삼켰다.
"이... 이......."
얼마나 놀랐는지 행크 공작이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공작님! 정신 차리십시오. 병사들을 뒤로 물려야 합니다. 공작님!"
"그... 그래. 보병을 뒤로 물리고 기병을 보내라. 어서! 기사단을 준비해! 어서!"
"알겠습니다. 공작 전하!"
여유롭던 세린디아 진영에 뿔 나팔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불길도 사그라졌다.
그러나 주위는 온통 죽음뿐이었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지난번 몽뜨 요새 점령 작전에 쓰였던 마법 화염탄(火焰彈)의 개량형이었다. 좀 더 용량을 늘인 결과 무시무시한 효력을 가져온 것이었다.
하인스 백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냥 말을 몰아 요새 안으로 들어가면 적들이 줄행랑치고 그러면 모든 공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었는데, 뭔가 날아오더니 다음 순간 주위가 불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동안 애지중기 키워왔던 병사들이 눈 깜작할 사이에 한줌 재로 사라져 버렸다. 더 할 수 없는 분노로 그의 몸이 세차게 떨려왔다.
"이런... 죽일... 놈들!"
백작의 부관이 깃발을 올리고 나팔을 세게 불어대자 살아남은 병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으아악"
"억!"
속절없이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면서 하인스 백작이 기겁을 했다. 백작 주위로 기사들이 모여들어 방어를 했다.
"뭐... 뭐냐?"
불길에 의해서 생긴 연기가 안개처럼 시야를 가려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적입니다! 전방에 적... 크억!"
핑!
적을 발견하고 소리치던 병사도 목에 화살이 뚫고 지나가면서 몸이 무너져 내렸다. 계속 부는 바람 덕택에 연기가 가시자 눈앞에 처음 보는 군복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젠장!"
겨우 몸을 추스른 세린디아의 이름 모를 병사가 머리 위에 올려진 검을 보면서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깊이 들어가지 말고, 적들을 처치해라! 절대로 깊숙이 들어가지 마라!"
"중령님, 이지 중대가 보이지 않습니다."
"젠장, 피터슨 대위에게 어서 돌아오라고 명령해! 곧 적 기사단이 들이닥칠 거야. 어서!"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캐논필터의 공격 때문에 연기가 너무 심합니다."
앞뒤로 공격해오는 그린로즈 기사 두 명을 베어 넘긴 호크가 능선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이를 악물었다.
"젠장, 피터슨! 너무 깊이 들어갔어! 찰리와 알파는 나를 따라와라. 이지중대를 구출한다. 나머지는 적들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우리를 엄호한다. 스패로우를 아껴라! 마지막 순간에 몽땅 퍼부어! 핸들러, 어서! 가자!"
적진을 향해 깊숙이 뛰어든 호크의 뒤로 200여 명의 외인부대원들이 사지(死地)를 향해서 돌진했다.
핑! 핑! 핑!
캐논필터의 공격을 받아 아수라장이 된 전방과 달리 공격을 덜 받은 후방 지역은 이미 반격태세를 갖추고 장창을 든 병사들이 대열을 맞춰 달려왔다. 불운하게도 연기 속을 뚫고 나온 이지 중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열을 정비한 세린디아의 장갑보병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너무 깊이 들어왔어. 중대 후퇴! 참호로 돌아간다! 서둘러!"
"늦었습니다, 중대장님!"
재빨리 주위를 살펴보니 어느새 날카로운 예기를 발하는 창들이 고슴도치처럼 이지 중대를 에워싸고 있었다.
"모두 죽여라! 죽여 버려!"
하인스 백작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하인스 백작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외인부대의 공격으로 공격일진이 몰살당한 것에 분노한 병사들의 살기가 창을 통해 이지중대에게 전해졌다.
"모두 준비해라! 한 놈이라도 저승길 동무로 삼는다."
둥글게 대형을 유지한 이지 중대를 향해 적 창병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저... 저런! 어서 지원사격을 해라! 도대체 어느 중대야!"
"이지 중대입니다. 장군님! 아군과 적군이 너무 가까워서 캐논필터의 지원사격이 불가능합니다, 장군님!"
"빌어먹을, 도대체 호크 중령은 뭘 하는 거야!"
"캐논필터의 화염탄(火焰彈)에 연기를 나게 한 것이 유리한 점도 있지만, 저희 쪽 시야도 가린다는 것을 간과했습니다, 장군님!"
"젠장, 양날의 칼인가?"
"저길 보십시오! 장군님! 호크 중령님이 돌파하고 있습니다."
기뻐 소리치는 작전장교의 외침에 도리어 나형석 장군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벌써 연기가 걷히는 건가? 호크 중령도 고스란히 적에게 노출되게 생겼어."
예상외의 변수가 발생하자 화가 난 나 장군이 주먹을 내리쳤다.
"기다려! 아직이야, 더 기다려!"
적 창병들의 창날에 이지 중대원들의 얼굴이 비춰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중대원들이 서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대형이 무너지려고 하는 순간에 피터슨 대위의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대형을 유지해! 한 놈이라도 이탈했다가는 내 손에 먼저 죽을 줄 알아!"
중대장의 고함소리에 중대원들의 마음이 진정되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견디다 못한 루크 소위가 소리쳤다.
"으아아악!"
"적이다!"
익숙한 스패로우의 발사음과 세린디아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구조대가 온 것이었다. 피터슨 대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이다, 모두 방아쇠를 당겨!"
중대장의 다급한 명령에 이지 중대의 스패로우에서 화살들이 떠났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이지 중대를 중심으로 원형의 물결이 퍼져나가듯 적병들이 수수깡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호크중령이 온몸에 피칠을 하고 나타났다.
"후아 후아! 니들 나중에 보자! 모두 함께 돌아간다! 어서 뛰어!"
300여 명의 스패로우에서 발사된 화살의 위력은 괴기스럽기 그지없었다. 적의 중기갑 보병의 금속 가슴보호대를 무차별로 뚫고 들어가 버렸고, 일반 보병들은 두세 명의 생명을 앗아간 다음에야 멈추었다. 2만의 창병들이 300여 명에게 뚫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비켜. 이 새끼들아! 앞길을 막지 마!"
호크의 블레이드가 쉴 새 없이 번뜩였다. 이리저리 사방을 뛰어 다니면서 퇴로를 열던 호크의 몸이 멈칫거렸다.
적진을 거의 다 빠져 나갈 무렵, 등 뒤에서 전해오는 찌릿찌릿한 살기에 놀라 뒤돌아본 호크가 탄식을 터트렸다.
"이런, 엿 됐다!"
하늘을 새카맣게 수놓으면서 적 궁병대가 쏘아올린 화살이 이지 중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하늘의 태양빛을 가릴 정도로 엄청난 양의 화살비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호크의 눈에 마나가 이질적인 형태로 뭉쳐지는 것이 보였다. 화살이 거의 이지 중대를 덮쳐왔을 때 화살비와 그들 사이에 우윳빛 희끄무레한 벽이 생겼다. 세린디아 궁병들이 쏘아올린 수만 발의 화살은 그 벽을 뚫지 못하고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휘유! 십년감수했네. 고마워요, 영감!"
사이클론의 마법 덕택이라는 것을 안 호크가 요새를 향해 눈길을 한 번 준 뒤 이를 악물었다.
"야, 이 새끼들아! 발바닥이 보이지 않게 뛰란 말이야!"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적의 방어진을 뚫고 이지 중대가 요새의 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 뒤를 적 보병대가 귀신처럼 달려들었다.
"젠장, 개떼가 따로 없군. 저런, 이봐, 괜찮나? 일어나 어서!"
눈앞에서 달리던 외인부대원이 다리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호크가 어깨에 들쳐 메고 달렸다.
"조금만 참아! 곧 요새다."
적들도 석궁을 무차별로 쏘아댔고 기적적으로 별 희생 없이 사지(死地)를 뚫고 탈출한 외인부대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졌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숨 가쁜 상황에서도 그들의 전우애(戰友愛)는 뜨거웠다.
"커억!"
"존슨! 일어나. 어서!"
"빌어... 먹을... 난 틀렸어. 어서 가! 어서!"
"헛소리!"
"뭐... 뭐 하는거야? 나를 업고 뛰다가는 둘 다 죽어!"
"너를 두고 가느니, 그게 나아!"
"이 쌔끼가... 놔! 내려놓으란 말이야!"
"시끄러워. 떠들 힘이 있으면 적들이나 죽여!"
자꾸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억지로 참은 존슨이 스패로우의 방아쇠를 당겼다. 후퇴하는 도중에 쓰러진 전우(戰友)를 들쳐 메거나, 두 명이 한 사람을 끌고 빗발치는 화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전우(戰友)를 구출하는 처절한 광경이 펼쳐졌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동료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은 차라리 숭고하기까지 했다. 피가 튀고 순식간에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는 전장(戰場)에서 피어나는 마지막 인간애(人間愛)였다.
"엎드려!"
앞에서 느닷없이 외치는 소리에 달려오던 3개 중대원들이 땅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투두퉁!
핑! 핑! 핑! 핑!
호크의 명령대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병력들이 일제히 스패로우를 연사모드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4개 연대병력이 가진 스패로우의 카트리지가 화살이 바닥날 때까지 돌았다.
"크어억! 빌어... 먹을...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화살이라니......."
제일 근접해 추격하던 세린디아의 장갑보병들이 스패로우의 희생양이 되었다. 끔직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그 틈을 이용해서 이지, 알파, 찰리 중대가 겨우 요새 밑의 진지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후퇴하는 적들을 향해 쐐기를 박듯이 캐논필터가 또다시 비상했다.
세린디아의 마법사들이 나서서 방어마법을 펼쳤지만, 마법사들의 행동보다 캐논필터의 강전들이 훨씬 빨랐다. 또 다시 전장(戰場)은 살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이...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검! 검을 다오!"
흥분한 행크 공작이 미친 듯 검을 찾자, 그린로즈 기사단장 스탈리안이 행크 공작의 보검 아이스커터를 조심스럽게 행크 공작의 손에 건넸다.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자 주변 공기가 모두 얼어붙는 듯한 냉기를 뿜어내는 녹색검을 치켜들어 무릎을 꿇고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중년의 뚱보에게 향했다.
"이런 쳐 죽일 놈, 형편없는 군세(軍勢)라고, 마법사가 없다고!"
"고... 공작 전하, 그때는 분명히 그랬습니다. 아마도 보충 병력이 도착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발 소신의 말으... 끄으... 윽!"
입으로 흥한 자, 입 때문에 망한다고 했던가?
특유의 입담으로 남작에 오른 요한 남작은 결국 몽뜨 요새에서 보고 들은 것을 거짓으로 고한 대가로 격분한 행크 공작의 검에 허무한 인생을 마감했다. 그에게 있어 몽뜨 요새의 전령 임무가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의 말만 듣고 별다른 정보수집 없이 전쟁에 임한 책임은 다름 아닌 행크 공작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탈리안! 기사단과 기병들은 아직인가?"
"아닙니다. 모두 무장을 마쳤습니다."
"좋아. 그린로즈 기사단이 왜 무서운지 가서 확인시켜 주거라! 그리고 스탈리안, 반드시 놈들의 목을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공작님!"
긴 녹색머리를 흩날리면서 지휘 막사에서 사라지는 스탈리안을 바라보는 행크 공작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된 채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냉정하고 현명한 행크 공작이 아닌 이미 이성을 상실한 지휘관이었다. 가장 냉정하고 차가운 머리를 지녀야 할 사령관이 전투상황에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은 병력의 열세와는 관계없이 이 전투의 축이 이미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장군님, 기사단과 기병대가 전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아! 전투명령 2호! 전달하라. 이 한 번으로 적의 기세를 꺾어 버려야 해!
나 장군의 명령이 마나통신기를 타고 전 부대에 타전되었다.
"하아! 하아! 이봐, 다 왔다. 집이야! 이 친구가 언제까지 내 어깨에 매달려 있으려고 하는 거야? 이봐 어......."
다리에 석궁을 맞은 병장을 들러 메고 뛰어온 호크가 진지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말이 없는 부상병을 보고 실소를 흘렸다.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데려가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였다.
"이봐! 나한테 고맙다고... 제길!"
그 병사는 이미 머리와 상체에 화살들을 맞아 죽어 있었다.
"빌어먹을......."
부릅뜬 두 눈을 감겨주자 호크의 손에 묻어 있던 피가 병사의 얼굴에 묻어났다. 놀란 호크가 닦아내려고 만질수록 죽은 병사의 얼굴은 피로 더욱 물들어갔다.
"씨파! 이게 아닌데. 야, 이 새끼야! 눈 좀 떠봐! 야!"
"중령님! 그만하십시오. 이미 죽었습니다, 중령님!"
호크를 말리는 핸들러의 얼굴도 이미 엉망이었다.
"중령님, 2호 작전 명령 하달입니다."
"그래...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지."
자신의 얼굴을 힘껏 내려친 호크가 핸들러의 어깨를 짚고 일어섰다.
"괜찮아! 핸들러, 서두르자!"
"네, 중령님!"
핸들러가 목에 걸린 호각을 세게 불어 신호를 보냈다.
곧이어 사단 전체로 호각 소리가 이어졌다. 뒤로 물러나는 병력들을 살피면서 뒷걸음을 치던 호크가 핸들러와 눈이 마주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핸들러는 그저 피식거리는 미소로 대답했고, 호크 역시 그거면 충분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때 이번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는 최대 변수인 기사단과 기병대가 세린디아 진영에서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나왔다. 중앙에서는 기사단이 좌우에서는 기병대가 커다란 창을 들고 돌격태세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람을 가르면서 짓쳐들어오는 기세는 가히 땅을 뒤집고 하늘을 무너뜨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세린디아 전투 마법사들이 총동원되어 펼친 빙계(氷界)의 공격마법이 전방 사단병력을 덮쳐왔다.
"허허허! 이놈들이 나를 우습게 아는구나! 공기 중에 숨 쉬는 생명의 힘들이여, 나의 요청에 화답하기를 소망하노니, 태고의 약속에 따라서 힘을 내게 나누어다오. 바람의 숨결을 토해내라!"
사이클론의 영창이 끝나자 로브자락이 세차게 펄럭였고 들고 있는 지팡이를 전면으로 내려치는 순간, 회오리바람이 무섭게 날아오던 얼음 조각들을 공중에서 흩어버렸다.
그러나 마법과 마법이 충돌하는 순간, 그만큼의 충격이 마법사들에게 전해졌다.
"쿨럭! 흐읍!"
"사이클론님! 괜찮으십니까?"
알렉스 국왕이 비밀리에 파견한 왕국마법사들이 휘청거리는 사이클론을 부축했다.
"괜찮네, 괜찮아... 후우! 마나 간섭이 일어나다니 혹시나 했지만, 저들의 마법은 고대의 기운이 숨겨져 있는 거 같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자연의 어머니 마나이시여! 제게 잠시 치유의 능력을 빌려주소서! 힐링!"
마법사의 손에서 은빛가루가 퍼져 나와 사이클론의 몸을 감쌌다. 창백했던 안색이 훨씬 좋아진 사이클론이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요새의 방어벽에 기댄 사이클론이 양 옆의 기둥에 손을 올렸다. 기둥은 다름 아닌 아주 큰 마나석이었다.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들이 사이클론의 마법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인챈터 비슷한 마법 아이템으로 일종의 마나 증폭기였다. 영롱한 빛을 내던 마나석 기둥이 두 번의 마법 시전으로 색이 많이 바래졌다.
"후우! 벌써 이렇게 힘이 부치다니 이제 한두 번이면 한계인데, 나도 이제 다 됐나 보군. 이 정도에 지치다니. 하지만 그렇게 쉽게 목을 내줄 수는 없지. 암! 사이클론이라는 이름이 왜 위대한지 알려주마!"
노익장의 기세를 받은 주변 마법사들도 용기를 내서 성벽 위의 자리를 지켰다. 공포를 느끼게 하는 적의 대규모 마법공격이 무위로 끝나자 성벽을 수비하는 외인부대원들의 기쁜 함성이 요새를 가득 메웠다.
"후우! 이거 정말 피를 말리는구먼."
"아직! 중요한 고비가 남았습니다, 장군님!"
"그래, 대령! 전쟁은 말이야. 지금부터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적의 기병대와 기사단을 바라보는 외인부대 상황실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중령님! 참호를 좀 더 넓게 팔 걸 그랬나요?"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뭐해! 그냥 놈들이 뚱뚱하길 빌어!"
"주... 중령님!"
"크크, 농담이야, 농담! 모두 정신 차리고 대열을 흩뜨리지 마라!"
하늘에서 마법사들의 공방이 다시 시작되었다.
천지가 개벽하듯 하늘이 번쩍거리며 요동치는 것을 본 세린디아 지휘부에 있던 수석 마법사가 벌떡 일어났다.
"공작님! 아무래도 저쪽에 고위 마법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나서야 할 것 같군요."
회색로브를 입고 있는 세 사람이 전장으로 나서기 위해 일어섰다.
"이거 여왕님의 사제들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모두 여왕님을 위한 일, 신분 고하가 따로 있을 수 없지요. 그럼......."
그들이 천막에서 나와 도착한 곳에는 30여 명의 마법사들이 안색이 파리해진 상태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못난 놈들! 어서 일어나지 못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자... 장로님들, 죄... 죄송합니다!"
"듣기 싫다. 어서 마법진을 설치해라! 우리가 직접 나선다."
장로들의 호통에 기진맥진했던 마법사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마법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요새 성벽 밑에 3열 횡대로 늘어선 외인부대원들이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린디아의 군마들은 멈추지 않고 들판을 가로질러 호크의 부대와 20여 미터까지 근접했다.
이제 한 호흡이면 자신들의 창에 꼬치 신세가 될 적들을 생각하며 그린로즈 기사단장 스탈리안이 비릿한 조소를 투구 속에서 흘렸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린로즈 기사단의 돌격속도를 재촉하는 나팔소리가 급박하게 울렸고, 돌격속도도 배는 빨라졌다. 충돌 순간,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 가속도를 붙이는 것이었다. 그린로즈 기사들의 몸이 점점 창과 하나가 되어 바람처럼 날았다.
그때 겁에 질려 꼼작도 못할 것 같던 외인부대원들이 갑자기 손에 든 방패를 뒤로 반 바퀴 돌리자, 방패에서 반사된 엄청난 빛이 눈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 저거... 뭐야! 눈이... 으악... 안 보여!"
"으아아아악!"
기사단과 기병대의 시야는 엄청나게 강한 빛의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스탈리안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발아래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기사들은 말과 함께 아래로 추락했다. 분명히 평지를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다니 그들 중 아무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밖에서 바라보던 사람들만 빼놓고.......
"저... 저런! 안 돼!"
두 눈을 부릅뜨고 벌떡 일어선 행크 공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몹시 흔들렸다. 피와 땀으로 키운 그린로즈 기사단과 무적이라던 기병대가 땅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성공입니다, 장군님!"
"그래. 이방인(異邦人) 중 헤론족의 족장이 해준 옛날이야기 덕분이지."
"네? 무슨......."
"이 크림 평야가 옛날 고대어로 태양의 거울이라고 하더군. 예전에는 이곳 성벽에 반사된 빛이 다스커스 강까지 비췄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시각에는 태양이 적들을 등진다는 사실을 이용했을 뿐인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군."
"그렇군요. 하지만 장군님! 만족스럽다는 표현은 맞지 않습니다. 대성공입니다. 대성공이라고요. 이제 적은 기동력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작은 승리에 들떠 있는 김재덕 대령과는 달리 나형석 장군의 시선은 세린디아 진영에 우뚝 서 있는 기간테스들에게 향했다.
"아직은......."
그는 진짜 전투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다.
"으아아악!"
"살려줘!"
달리던 말을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돌격태세로 이미 들어갔기 때문에 쉽게 멈출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밑바닥이 허공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기에 피해는 더 컸다.
간혹 가까스로 말을 멈춘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뒤에서 달려드는 말과 충돌해서 역시나 밑으로 떨어졌다. 이방인(異邦人)들이 파놓은 참호의 목적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태양을 등지고 달려오던 기사단과 기병대의 바로 눈앞에서 특별하게 제작된 방패거울을 이용하여 강한 태양광을 그들에게 비추어 시력을 멀게 한 후, 천으로 위장해 놓은 함정으로 유인하는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함정 아래에는 말과 사람이 뒤엉켜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놀란 말들의 발길질과 위에서 떨어져 내린 말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의 기사들과 기병대원들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또한, 시력을 일시적으로 잃고 우왕좌왕하던 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든 외인부대의 돌격조에게 차례차례 쓰러져 갔다. 그러나 워낙에 기사들이란 존재가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고 더구나 이사벨라 여왕의 마법으로 탄생한 그들은 남달랐다. 아비규환(阿鼻叫喚)같은 그 구덩이 속에서도 마법공격을 퍼부으면서 땅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참호 위에서 사격을 하던 부대원들의 희생도 점점 늘어났다.
"젠장! 어쩔수 없지."
호크가 굳은 얼굴로 호각을 불었다. 참호위에서 사격을 하던 부대원들이 뒤로 물러나고 뒤에서 대기하던 병력들이 손에 든 검은 구체를 참호 속으로 던졌다. 하늘을 새카맣게 뒤 덮으면서 공들이 참호 속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참호 속에서 불기둥이 솟아 올랐고 차마 들을 수 없는 처참한 비명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호크가 남아있던 수화탄(手火彈)을 전부 세린디아 기사단과 기병대가 빠져있는 참호 속으로 던져 넣은 결과였다. 눈앞에서 생지옥이 연출되자 핸들러가 고개를 돌렸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호크를 바라보는 핸들러에게 호크가 차갑게 대꾸했다.
"아직도 감상에 빠질 여유가 있어? 그들에게 동정을 갖지 마라 저 불속에 있는 것이 그들이 아니고 우리라고 생각해 봐! 그 따위 동정심은 개에나 줘버려!"
호크의 호된 질책에 핸들러도 입술을 깨물었다. 호크의 말이 옳든 그렇지 않든 지금은 그의 말마따나 그런 생각은 사치스런 것이었다. 목숨이 오고가는 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행크 공작의 턱이 덜덜덜 떨렸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봤지만 모두 얼굴이 창백해진 채 얼이 빠져 있을 뿐, 누구 하나 사태를 파악하거나 해결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무언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행크 공작은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기억 저편에서 누군가 그의 의지를 짓눌렀다.
"빌어먹을! 우리는 전사(戰士)다! 겁먹지 말고 물러서지 마라! 위대한 이사벨라 여왕님의 충복들이여! 죽음으로서 순교하자!"
마법증폭기를 통해 세린디아 진영 사방으로 행크 공작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묘한 파장으로 울리는 행크 공작의 연설이 끝나자 패배감에 휩싸였던 세린디아의 병사들의 눈빛들이 변했다.
"이사벨라! 이사벨라!"
여왕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모두 잊은 듯 손에 무기를 들고 대열을 이루었고, 후방에서 도착한 보급 부대들도 모두 가담하기 시작했다.
"헤르미안! 네가 기간테스 군단을 이끌고 저 이교도 무리들의 씨를 말려버려라! 한 놈도 살려둬서는 안 돼!"
"명을 받드옵니다. 공작 전하!"
황급히 사라지는 그린로즈 기사단 부단장을 바라보던 행크 공작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말을 가져와! 어서!"
시동이 황급히 말을 대령하자 말에 뛰어 오른 행크 공작이 검을 높이 쳐들고 직접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의 검이 위에서 정면을 향해 내려오자 모두가 알아듣기 힘든 이상한 주문을 외우며 전진했다. 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위용을 자랑하는 기간테스군단이 지나갔다.
한 번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꺼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소리가 요란했다.
밀고 밀리던 지리한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몽뜨 요새 위에서 바라보던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이 기간테스들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악수를 나누었다.
"부탁하네, 대령. 자네 손에 이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어! 반드시 성공해주게."
"잘 알고 있습니다. 장군님!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장군님은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그 소리는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내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들과 최후를 같이 해야지."
굳은 결의를 보이는 나 장군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거수경례를 올렸다.
"충성! 반드시 살아계십시오!"
이를 악물은 김 대령이 밑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워프와 특임대 소속 병사들과 함께 정문으로 빠져 나갔다.
"자네들만 믿네!"
그 큰 다리로 뛰어오는 기간테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왔다.
임시 상황실의 부대원들도 바삐 움직였다.
"캐논필터의 모든 화력을 저 괴물에게 집중해라!"
성벽 위에 장착한 캐논필터들이 부서질 듯 요동치며 강전들을 발사했다. 보병들에게는 큰 효과를 보았지만, 기간테스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대부분 그냥 튕겨져 나갔고 화염탄(火焰彈)들도 별반 효과가 없었다.
"후~ 기다렸던 순간이군. 자! 모두 내게 힘을 보태주게!"
사이클론이 소리치자 왕실 마법사들이 모두 손을 잡고 사이클론 주위를 둘러쌓다.
"태고의 약속을 부탁하는 자로서 원하노니, 그대, 마나의 힘이여! 세상의 모든 것을 불로 태워주소서!"
영창이 끝나자 몽뜨 요새 성벽 위로 거대한 화염구(火焰球)들이 공중에 나타났다. 사이클론과 마법사들의 코와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 내렸다. 더 이상 화염구(火焰球)가 커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순간 마법사들은 기간테스를 향해서 손을 내뻗었다.
화염구(火焰球)가 날아가는 동안 외인부대의 모든 이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제발! 제발!'
...하는 모두의 염원이 실린 공격이었다.
"저... 저럴 수가! 누구란 말인가? 저 정도의 마법이라니 8써클의 마법사란 말인가? 도대체 누가?"
"마법진이 완성되었습니다."
"서... 서둘러라! 기간테스는 괜찮겠지만, 뒤를 따르는 병사들이 전멸하겠어!"
원과 별모양의 마법진 위에 마법사들이 각각의 방위 점에 올라섰다. 그리고 가운데 별모양의 그림 위에 세 장로가 올라섰다.
"후후~ 오늘이 태양을 보는 마지막 날이 될 줄 몰랐군요!"
"어차피, 여왕님이 주신 목숨이요! 안 그렇소?"
"하하하! 그렇지요. 이사벨라 여왕님을 위해!"
"여왕님을 위해!"
세 장로들이 손을 높이 치켜들자 마법진에서 녹색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이 점점 커지더니 몽뜨 요새에서 날아오는 화염구(火焰球)와 충돌했다.
공중에서 대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엄청난 폭풍이 불어 닥쳤다. 육중한 무게의 기간테스도 휘청거릴 정도였다. 병사들은 모두 들판을 뒹굴었다.
잠시 후,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웠던 하늘에 태양빛이 다시 나타났다.
"우... 8써클의 마법사라니... 이것은 토벌이 아니었어... 끄으으으."
세린디아 마법사들이 서 있던 마법진으로 바람이 불어오자, 사람도 마법진도 먼지로 변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성벽 위에 있는 사이클론과 왕실 마법사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들을 향해 병사들이 뛰어갔다.
"젠장, 마법 공격마저 실패로군. 내성에 방어선을 만든다. 신속히 철수해!"
요새 앞을 수비하던 병력들도 모두 내성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핸들러! 뒤를 부탁해!"
"중령님! 몸조심 하세요! 꼭입니다."
"저기... 핸들러, 혹시 말이야. 내가 잘못되면 이 편지를 캐더린에게 전해줘!"
편지를 건네받은 핸들러가 소중하게 품에 넣었다.
"아닙니다. 그저, 제가 잠시 보관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 전투가 끝나고 중령님이 꼭 다시 찾아가십시오! 이건 제 명령입니다."
"자식, 멋진 말도 할 줄 아네......."
핸들러의 목을 조른 호크가 그의 등을 떠밀었다. 병력들이 우르르 성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호크가 언덕을 넘어가는 김재덕 대령 일행을 발견하고 그쪽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어느새 기간테스들이 요새 가까이 다가왔고, 그 뒤로 10만의 대군이 무언가에 홀린 듯 진군해왔다.
"어서 오게, 중령!"
"준비는 다 됐나요?"
"그래! 자네는 어서 탑승하기나 하게.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호크가 덮여 있던 천을 걷어내고, 엥귀오스를 가동시켰다. 굽혔던 무릎이 펴지고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뭔가 달라진 모습이었는데 엥귀오스 곳곳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등에는 가방처럼 커다란 검은 물체를 메고 있었다.
엥귀오스는 밑에 서 있는 김재덕 대령에게 경례를 했다.
곧바로 언덕을 넘어가는 엥귀오스를 바라보며 김재덕 대령은 이 작전이 성공하기를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대령님! 저희들도 어서 움직여야 합니다."
드워프 중의 천재 드워프 리온이 감상에 빠진 김 대령을 깨웠다.
"아~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자, 가지!"
그들도 엥귀오스의 뒤를 따라서 언덕으로 향했다.
엥귀오스가 언덕을 넘어 세린디아의 기간테스 군단 측면으로 뛰어들었다.
쿠콰쾅!
거대한 몸과 몸이 부딪히며 굉음을 토해냈고 평야는 삽시간에 거인들의 투기장(投機場)으로 변해버렸다. 엥귀오스가 몸을 던져 부딪친 세린디아의 기간테스가 넘어지면서 주변의 기간테스들과 뒤엉켜 같이 쓰러졌다.
뜻밖의 엥귀오스 출현으로 세린디아의 기간테스를 조정하던 그린로즈 기사들은 무척 당황했다. 자신들 이외에 기간테스가 존재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엥귀오스는 자신들이 발굴해낸 기간테스였다. 분명 모르카시 협곡의 비밀기지에 있어야 할 것이 이곳에 나타난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자신들을 공격까지 하니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노릇이지! 저게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야!"
"피... 피해라!"
한 번의 충돌로 적 기간테스와 인사를 나눈 엥귀오스가 재빨리 일어섰다.
"헉! 후우욱!"
강하게 기간테스와 충돌한 후, 급히 일어서던 호크는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쉴 여유가 없었다. 그린로즈 기사단이 탑승한 기간테스들이 호크의 엥귀오스를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래, 더 모여라! 더!"
호크는 엥귀오스를 둘러싼 기간테스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폭탄을 쓸 기회는 단 한 번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호크의 눈에 2기의 기간테스가 세린디아 병사들과 함께 몽뜨 요새로 향하는 것이 들어왔다.
치이익!
"젠장! 대령님, 어떻게 합니까? 전부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치이익!
"어쩔 수 없다. 카운트다운에 들어간다. 적들과 뒤엉키게 최대한 근접해야 해!"
마나통신기의 수화기를 내려놓은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 리온의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한 두 사람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언덕 위에는 특임대원들이 커다란 흑색 구체를 등으로 밀어올리고 있었다.
쿠콰쾅!
쿵! 쿵!
호크가 방패를 이용해서 상대편 기간테스를 밀어내면서 적들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호크의 무식한 공격에 그린로즈 기사단들도 맞불을 놓았다. 그야말로 힘과 힘으로 부딪히는 원초적 싸움이 벌어졌다.
"우욱! 쿨럭!"
호크의 입에서 선혈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엥귀오스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호크의 몸속에서 마나가 급속히 빠져나갔다. 온몸의 힘줄이 피부 위로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마나가 고갈되어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운용해서 마나를 채워 넣는 속도보다 엥귀오스가 마나를 빨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엥귀오스의 움직임도 둔해졌다.
그에 비해 석상의 힘으로 에너지를 공급받는 세린디아의 기간테스들은 훨씬 여유가 있었다. 김재덕 대령이 될 수 있으면 무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등 뒤에서 엥귀오스가 흑검을 꺼내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호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린로즈 기사단 부단장인 헤르미안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어리석은 놈, 석상의 힘을 얻지 않고는 오래 버틸 수 없지. 블루, 레드, 놈을 부숴버려라, 나머지는 요새를 공략한다!"
단 두 기의 기간테스만 남아 호크의 엥귀오스를 공차기 하듯 희롱했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호크의 시야로 수많은 기간테스들이 요새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다. 그토록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고 마음속에서 말하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피를 흘렸는지 콧속이 말라버린 것 같았고,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캐... 더... 린... 안녕......."
바닥에 쓰러진 엥귀오스를 향해서 적들의 발길질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호크의 엥귀오스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언덕 위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김재덕 대령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대령님, 지금이라도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리온의 말에 김 대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리온 또한 그것이 별 소용없다는 것을 같이 연구 개발한 입장에서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두 눈을 뜨고 수많은 기간테스들이 물밀듯이 요새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 그들의 처절한 심정은 외인부대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 또한 외인부대의 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권 하사! 눈 떠, 이 새끼야! 대한민국 군바리는 악바리 몰라! 정신 차려!"
통신구를 통해서 김 대령의 외침이 엥귀오스의 조정석을 울렸다.
서서히 죽어가던 호크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 시끄러워요, 젠장! 죽지도 못하게 만드네."
"권 하사! 야, 임마! 살아 있었구나. 어서, 일어나! 어서!"
기쁨에 들뜬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호크의 귓속을 간질였다.
"제... 엔장, 일어서기는, 말할 기운도 없어요! 마나가 바닥이에요."
"이 새끼야, 그럼 마나를 그놈에게 더 주란 말이야!"
"쿨럭! 누가 그걸 모르냐구요. 내가 주는 거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빨아들이는 것을 어떻게 해요!"
발작하듯 외치는 호크의 말에 김재덕 대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답답해 미치겠군! 입에 깔대기를 꽂고 들이부울 수도 없고. 아답터를 꽂고 충전을 해줄 수도 없으니!"
자포자기 심정으로 뱉어낸 김 대령의 넋두리가 호크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래. 왜 그동안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꼭 나의 마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그저 이 녀석에게 마나를 공급해주기 위한 통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리 고대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신체능력마저 그렇다는 것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내가 뭔가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잖아!'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 호크의 얼굴에 잠시 후, 미소가 어렸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젠장! 머리가 모자라면 몸이 고생한다고 하더니.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군!'
"하하하! 순응하라! 그건 신에게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고 바로 마나에 순응하라는 뜻이었어. 하하하하하!"
통신구를 통해 호크의 웃음소리가 전해지면서 김 대령의 얼굴에도 희망의 빛이 보였다.
"순응... 순응. 젠장, 대기의 마나 자체가 에너지원이었단 말이군. 그동안 헛다리짚고 있었어!"
호크의 독백에 김재덕 대령도 모든 것을 알아챘다.
금방이라도 파괴될 듯 바닥에 누운 채, 기간테스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던 엥귀오스의 몸체에서 갑자기 변화가 생겼다.
번쩍!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엥귀오스의 옆에 서 있던 기간테스들도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몸체에 빛을 두른 엥귀오스가 당당히 일어섰다.
호크는 온 사방에서 마나가 밀려드는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예전에 배웠던 태극심법(太極心法) 수련 중 권 상사가 늘 하던 말이었다.
'산을 오를 때 네가 산을 오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산이 너를 오르게 해주는 거야! 알겠나? 자연을 거스르는 힘은 결코 강할 수 없어. 하지만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된 힘은 상상을 불허하는 거야!'
'심신을 일체하고 자연에 무위(無爲)하며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나를 호흡하는 것을 명심하라!'
얼마나 깊은 가르침이었는지 깨닫는 순간, 호크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했다. 대기 중의 마나가 엥귀오스를 향해 폭포수처럼 흘러들어 갔다. 자연의 기운을 받은 엥귀오스의 힘이 석상을 통해 인위적인 힘을 부여받는 기간테스보다 더 강한 힘과 스피드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호크의 엥귀오스를 짓밟던 2기의 기간테스는 강한 반탄력에 뒤로 튕겨나갔다.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호크의 몸도 그 어느 때보다 강한 기운으로 충만했다. 바닥으로 나가떨어진 기간테스들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요새를 공격 중인 기간테스들을 향해서 엥귀오스가 바람처럼 땅을 박찼다.
"쓰레기 같은 것들, 스탈리안 단장님을 위한 복수다! 모두 쓸어 버려라!"
수십 기의 기간테스들이 몽뜨 요새의 정문과 성벽에 물리적인 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어떤 공격에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요새 전체가 지진이 일어난 듯 흔들렸다.
"크하하하하! 좀 더 밀어 붙여라! 어서!"
"헤르미안, 뒤를 조심해!"
기간테스 뒤에서 병사들과 막 도착한 행크 공작의 다급한 외침이 마법사를 통해서 헤르미안에게 전달되었다.
"무슨... 헉!"
콰콰쾅!
날아오듯 순식간에 세린디아 기간테스들 사이로 뛰어든 엥귀오스는 호크의 조정에 의해서 특공무술을 발휘했다. 방금 전의 무기력했던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확연히 달라진 모습에 적들이 쩔쩔매자 호크는 물 만난 고기마냥 적들을 공격했다.
성벽을 무너뜨리던 기간테스를 들어 메치기로 던져버렸다. 불행하게도 그곳은 행크 공작과 세린디아의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으아악! 사람 살려!"
"모두 피해!"
일부러 엥귀오스가 싸움을 그쪽으로 몰아가자 땅 밑의 인간들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기간테스들 간의 싸움에서 어느 하나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 밑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그야말로 악몽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다급해진 행크 공작이 헤르미안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곳에서 전투를 더 하다가는 싸움도 못해보고 전멸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적들의 의도를 간파한 호크 역시 자신도 원하는 바였기에 요새 옆의 언덕으로 전투장소를 옮겨갔다.
그곳에는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던 대령과 드워프 리온은 뒤죽박죽 꼬였던 작전이 다시 성공하자 뛸 듯이 기뻤다. 특임대들이 굴리고 있던 검은 구체들을 그대로 두고 서둘러 장비만 챙겨서 분지를 벗어났다.
호크는 대령 일행이 분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중에 등 뒤에서 달려든 기간테스를 분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상대적으로 체술(體術)에 약한 그린로즈 기사들은 호크의 현란한 특공무술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석상에서 부여받은 힘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그들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기에 이 전투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쉽게 지쳐갔다.
어느새 분지 안에는 70여 기의 기간테스들이 뒤엉켜 혼전을 벌였다.
"어떻습니까? 대령님!"
"성공입니다. 자! 망원경으로 보세요. 적 기간테스의 발이나 등에 보면 거의 대부분 장착되어 있습니다."
"오오! 정말이군요, 어젯밤 침투한 특임대원들이 성공했군요."
드워프 리온이 살피는 곳마다 붉은색 흙더미 같은 것이 기간테스들의 신체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탑승하고 있던 기사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것은 이미 전날 밤 세린디아 진영에 침입한 특임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설치한 뇌관이었다.
김재덕 대령이 통신기를 들고 소리쳤다.
"호크 중령! 카운트에 들어가네, 자네도 충격에 대비해!"
"알겠습니다, 대령님!"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한 호크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예상하지 못한 호크의 행동에 멀뚱하게 서 있던 기간테스들이 지휘관인 헤르미안의 독기서린 명령을 받고 모두 엥귀오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고맙게도 스스로 거리를 좁혀주다니!"
대령의 엄지손가락이 아래로 향하자 대기하던 특임대원 중 한 명이 스패로우를 하늘을 향해 발사했다. 붉은 연기를 뿌리면서 날아가는 화살을 기다린 듯 분지 근처에서 기가테스들을 포위한 특임대원들이 손에 들고 있던 레버를 당겼다.
"뭐... 뭐야? 이 느낌은?"
목 뒤로 서늘한 느낌이 일어나자 깜짝 놀란 헤르미안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안심한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검은 구체들이 높이 떠올랐다. 헤르미안이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낀 순간, 거대한 폭발이 그들을 휘감았다. 그것은 마나의 폭발이었고 거센 자연의 파도였다.
바닥에 엎드린 호크를 중심으로 검은 구체가 마나를 날뛰게 했다. 소리도 빛도 물리적인 충격도 없었고 그저 한차례 바람이 휩쓸고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기간테스에 탑승하고 있던 그린로즈 기사단에게는 죽음을 선물한 바람이었다.
"우... 욱... 크으으윽!"
호크는 심장을 누군가 손으로 터트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를 얼마나 세게 악물었는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호크 중령, 괜찮나? 중령, 대답해!"
김재덕 대령이 다급히 통신기를 열었으나 호크에게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특임대원들과 김 대령 일행이 서둘러 분지를 향해 뛰어갔다. 분지에는 시간이 멈춘 듯 그대로 굳어버린 여러 자세의 기간테스들이 고요하게 서 있었다.
드워프들이 차례로 기간테스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김 대령과 특임대원들은 호크의 엥귀오스를 향해 뛰었다.
"이 자식, 제발 살아 있어라! 제발!"
"장군님! 성공이랍니다. 적 기간테스 기동 불가! 작전 성공입니다."
"와아아아아~"
요새를 파괴하던 기간테스들의 공격이 멈추자 의아해했던 사령부 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방어벽 밖을 내다본 나 장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전원 전투 준비! 옥쇄를 각오한 전투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라!"
허리에 찬 리볼버를 꺼낸 나 장군이 방어벽 뒤쪽으로 뛰어갔다. 내성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복도 창가로 장군의 모습이 보이자 외인부대원들이 전부 기립했다.
나형석 장군이 창가에 올라서서 입을 열었다.
"제군들, 적 기간테스들은 호크 중령과 특임대원들이 모두 처치했다."
"우와아아아!"
"아! 그만, 그만! 그래 기쁜 소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나 외성의 성벽과 정문이 거의 파괴되었다. 이제 곧 적 보병들과의 결전을 치러야 한다. 두려운가, 제군들!"
"아닙니다!"
"싸우기를 포기해야만 하는가?"
"아닙니다!"
"그럼 나아가 싸우겠는가?"
"그렇습니다."
"왜!"
"우리는 명예로운 외인부대이기 때문입니다!"
"좋아! 죽기에는 딱 좋은 날씨다. 뭐 그리 오래 살 목숨들도 아니지 않은가! 제군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문을 열어라, 나가서 싸운다!"
내성 출입문 앞으로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 외인부대원들의 얼굴은 모두 비장한 각오로 가득했다. 각자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었고 목걸이를 꺼내 입맞춤 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지 중대 1소대장 루크는 품속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손목에 묶었다. 하이디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자 세차게 고동치던 심장도 진정되었다.
굳게 닫혔던 내성의 문이 열리면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왔고, 승리를 향한 함성을 지르며 외인부대의 전 병력이 쏟아져 나왔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행크 공작과 세린디아의 병력들도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케린버그와 세린디아 역사상 가장 처절한 피의 날이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장군님! 몸을 피하십시오! 호위병들이 대기 중입니다."
부관이 짐을 든 채 나형석 장군에게 말을 건넸지만, 이미 장군은 권총을 꺼내들고 상황실문을 나섰다. 그곳에는 작전처 장교들이 완전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군."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후후후, 좋아! 그럼 가볼까?"
행정병들까지 모두 무장하고 나형석 장군을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 요새 광장으로 달려갔다.
두려움에 떨던 나 장군의 부관도 어깨에 멨던 짐 보따리 대신 검을 들고 따라 나섰다. 훈련소 시절을 빼곤 그동안 잡지 못했던 검이라 그런지 낯설게 느껴졌다. 심장은 세차게 뛰었고 두려움과 공포로 다리가 떨려 왔다.
계단을 모두 내려와 문을 향하는 그의 눈에 벽을 도배해 놓은 종이들이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병사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들이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편지들 중에는 반지나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도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편지를 읽어 본 부관의 얼굴에는 죽음의 두려움 대신 용기로 가득 차 끔찍한 비명과 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광장을 향해 힘차게 뛰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빠져 나간 광장엔 겨울바람이 불었다. 광장 안을 맴돌던 바람이 벽에 걸린 수많은 편지들을 하늘 높이 날아 올렸다. 바람이 편지의 주인공들에게 대신 전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내성의 방어벽을 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요새 중앙광장의 하늘로 멀리 퍼져 나갔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이번 추수기에는 제가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올 겨울에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람 있는 일을 하 고 있습니다. 언젠가 로베니아로 끌려간 동생을 찾고 싶다던 어 머니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2사단과 3사단이 우측을 맡아! 1사단과 4단이 우측을 막는다! 그리고 중앙은 우리 몫이야!"
"알겠습니다, 장군님!"
"서둘러!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적들을 성 밖으로 몰아내야 해!"
"장군님! 위험합니다!"
쿠아앙!
"으아아악!"
"으... 으 젠장!"
"괜찮으십니까? 장군님!"
"괜... 괜찮네! 도대체 무슨 공격인가?"
"적 마법사들의 마법공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몸을 던져 장군을 구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이 어린 부관이었다.
"빌어먹을, 이제 겨우 열여섯 살인데......."
부릅뜬 두 눈을 감겨주는 장군의 손길이 무척이나 떨렸다. 온몸에 심하게 화상을 입은 부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법사들을 우선적으로 제거해! 특임대는 오로지 마법사만 상대하라고 해!"
악을 쓰는 나형석 장군의 명령이 치열한 전장 속에서도 하달되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안느,
우리의 소중한 분신인 헬렌은 잘 크고 있지?
혹시 벌써 일어서서 걷고 있는 것은 아냐?
아기의 첫걸음은 아빠가 지켜봐주어야 한다는데,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것은 오직 아름다운 당신과 사랑스런 헬렌 때문이야.>
"으아아악! 내 다리!"
"젠장, 위생병!"
"중대장님! 스패로우의 카트리지가 다 떨어졌습니다."
"모두 마찬가지다.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사용해! 부상자를 뒤로 보내. 어서!"
중앙을 맡고 있는 이지 중대장 피터슨은 온몸을 피로 물들이면서 베고 또 베어도 끊임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래. 덤벼! 몽땅 덤벼! 이 새끼들아! 헉!"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그의 어깨에 박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살대를 부러뜨린 피터슨 대위를 향해 세린디아의 그린로즈 기사들이 검을 들이댔다.
"빌어먹을 여기까지인가?"
한쪽 무릎을 꿇은 피터슨의 입에서 절망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악!"
피터슨에게 달려들던 기사들이 벌집이 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 차려! 누가 명령도 없이 죽으라고 했나!"
"주... 중령님!"
"그래. 나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나중에 한 따가리 한번 해야 쓰겠어. 기합들이 빠져서 말이야!"
한쪽 눈을 찡긋하고 전투가 치열한 성벽 쪽으로 뛰어가는 호크를 보면서 피터슨 대위도 힘을 냈다.
"이지 중대!"
"이지 중대!"
"돌격 앞으로!"
"우아아아아아!"
비록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호크의 출현은 부대원들을 용기백배하게 만들었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외인부대는 밀려드는 적들과 용감하게 맞서 나갔다.
<오~ 나의 안느,
만일 내가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이 전투에서 죽는 것은 그저 육신일 뿐 나의 영혼은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거요.
나중에 우리 헬렌이 크거든,
이 아빠가 얼마나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했는지
가르쳐 주기 바래. 사랑해. 두 사람 모두.......>
"으아아악"
"1사단은 반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입니다, 장군님!"
"젠장, 이방인(異邦人)들은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빌어먹을!"
자신들도 싸우겠다고 무기를 내어달라고 하더니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는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모두 엎드려!"
누군가의 외침에 작전처 연락병이 나형석 장군의 몸을 덮쳤고 곧이어 우박이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 빌어먹을!"
그린로즈 기사단의 아이스공격 마법에 사령부 인원 절반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나마 살아남은 장교들도 거동이 불가능했다.
"이봐, 하사!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자신을 위해 몸을 내던진 하사관의 생명이 꺼져가려고 했다.
"위생병! 위생병!"
"자... 장군님!"
"그래, 나야 정신차려!"
"반... 반드시 승... 승리를......."
마지막 말을 하고 고개를 숙인 부하를 지켜보는 나형석 장군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자신이 무능력해서 부하들이 죽어나간다는 생각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장군님!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김... 대령인가? 살아 있었군."
"네, 장군님, 호크 중령도 무사합니다."
"그런가?"
맥없이 나오는 나형석 장군을 보니 두 눈에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그런 나 장군을 바라보던 김재덕 대령이 입술을 깨물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대령의 오른손이 나 장군의 뺨을 때렸다.
짝~
고개가 휙 돌아간 나 장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은 여전히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미... 미안하네. 내가 추태를 부렸군."
"아닙니다. 어서 명령을 내리십시오. 모두가 장군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그래 좋아. 우선 부상병을 뒤로 옮기고 통신기를 모두 한곳으로 모아. 적 기사단과 마법사들 위치부터 파악한다. 챠챠 대위는 연락이 안 돼나?"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장군을 바라보면서 김재덕 대령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의 두 눈은 가장 크게 무너져서 마치 성문처럼 뚫린 요새 성벽을 바라보았다.
'마나 폭풍에 휘말려서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텐데. 이봐, 권혁 하사, 아니, 호크 중령, 제발 무사하게나.'
그곳에는 온몸이 망가진 채 검을 휘두르고 있는 호크 중령이 있었다.
"으아아악! 오러 블레......."
"소드마스터다!"
그린로즈 기사단들이 무너진 성벽을 넘어 내려서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 개의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고 있는 검귀(劍鬼) 호크 중령이었다. 두 개의 검에 서려 있는 검기가 그린로즈 기사단과 방패를 함께 잘라버렸고 아무리 에워싸여도 귀신처럼 빠져나가면서 기사들을 유린했다.
난생처음 보는 격투술에 그저 속절없이 쓰러지는 단원들을 보면서 다급해진 조장이 전령을 불렀다.
"공작님께 전해라! 적들 중에 소드마스터가 있다고 어서! 빌어먹을 이 전쟁은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어!"
고개를 가로젓던 그린로즈 기사단의 조장도 결국은 검을 높이 쳐들고 죽음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아침에 시작된 전쟁은 서서히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단장님! 계속 침묵하고 계실 겁니까?"
"......."
"단장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밖에 좀 나와 보십시오. 지금 쥬(Ju)의 종들이 쥬(Ju)의 가르침을 원하고 있습니다. 쥬(Ju)의 종들이 쥬(Ju)를 위해서 검을 들고 싸우고자 합니다. 성기사로서 의무를 잊어버리신 겁니까?"
"쥬(Ju)의 종이라... 의무? 후후, 누구를 위한 의무란 말인가?"
"단장님......."
"크하하하! 웃기지 말라고 해! 크흐흐흐... 흐흐흑."
"다... 단장님!"
어두운 동굴 속에 머리를 산발한 채 광소를 흘리고 있는 샹그릴라의 성기사단장 베르트니가 며칠 사이 늙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저 지경이 되었을까?
그날 밤 호크와 사이클론이 나눈 대화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밤을 새며 고뇌했지만, 그에 대한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평생 믿어왔던 신념이 무너진 그에게는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도 없었고, 대주교의 마지막 부탁도 실패한 지금 성기사로서의 사명감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눈앞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는 젊은 기사의 눈물도 모두 거짓처럼 보였다.
"부질없는 일이야. 부질없는 일... 이 따위 세상 차라리 없어져 버리면 좋으련만......."
힘없이 터벅터벅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는 베르트니가 밝은 태양빛에 두 눈을 가렸다.
"오오~ 쥬(Ju)의 사자이시여!"
"은총을 내려주소서!"
"길을 열어 저희를 인도하여 주소서!"
손을 내려 발밑을 내려 보니 끝이 보이지 않는 정도로 많은 인파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 두 손을 모아 베르트니를 위해 쥬(Ju)의 기도문을 외우며 은총을 바라고 있었다.
"은총이라,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네. 당신들은 모두 속은 거야! 모두 속......."
낯설은 느낌이 아래에서 느껴지자 베르트니의 고개가 아래로 향했다. 넝마를 기워 입은 어린 여자아기가 눈물을 흘리며 베르트니의 발목을 잡았다.
"기사님! 기사님! 제발 저희를 살려주세요! 제발!"
무릎을 꿇고 아이와 눈을 맞춘 베르트니는 두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미안하구나, 아이야! 나는 아무런 힘도 없단다."
"거짓말! 거짓말!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진실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베르트니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울부짖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미안하구나, 미안해!"
품에 안은 아이의 작은 심장 소리가 베르트니에게는 천둥 소리 처럼 들렸다.
두근! 두근!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두 눈에서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이 흘러 내렸고, 귓가에는 케린버그의 젊은 백작이 자신을 꾸짖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믿음은 당신 가슴속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믿음이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 지금 당신의 모습은 어린아이의 투정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오!'
쾅!
"오~~ 쥬(Ju) 말씀만은 진리요, 진실한 은총이었구나!"
깨달음의 순간, 베르트니의 몸이 광채에 휩싸였다. 기적의 광경을 바라보는 세린디아의 이방인(異邦人)들은 기쁨에 울부짖었다. 그리고 샹그릴라의 성기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중령님! 중령님!"
핸들러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광란의 전장 속에서도 멀리 퍼져나갔다. 세린디아의 병사들에 밀려서 호크와 멀어진 핸들러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인해전술에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저 앞쪽에서 적 기사단에 둘러싸여 보이지 않는 호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비록 웃고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본 상관이었다.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었다.
그런 몸으로 위험한 곳에는 모두 뛰어들어 싸우고 있었다. 적들도 호크가 소드마스터라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기사들만이 호크를 상대했다.
수없이 많은 적들을 죽였지만, 개미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 떼처럼 무너진 성벽 틈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왔다.
"헉! 헉! 정말 징글징글하다.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야!"
양손에 들린 검 중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군복에 묻은 피 때문에 원래부터 붉은색 옷인 것처럼 느껴졌다. 검이 부러지면 철모를 들고 적에게 휘둘렀다. 그나마도 손바닥이 터지면 부러진 창을 들고 적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들었다.
"지독한 놈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이란 말인가? 하나같이 모두 일당백의 전사들이 아닌가? 여왕님의 군대보다 더 강인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응? 저... 저 자는!"
이제 막 기울어진 성벽을 허물고 드실라 백작과 요새로 진입한 행크 공작은 요새 광장의 참상에 눈살을 찌푸렸다. 성벽을 넘은 군사만 5만이 넘었다.
그런데 광장에 서 있는 아군은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적군들이라는 사실에 낭패한 얼굴로 변한 행크 공작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그린로즈 기사단들을 무차별로 주살하는 검은 머리의 청년은 일전에 드래곤 산의 동굴 속에서 만났던 케린버그의 백작, 알렉스 호크! 그 사실을 안 순간, 그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행크 공작은 이들을 단순히 도적무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어리석은 판단이 이토록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성전(聖戰)을 끝내야만 하는 사명이 있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행크 공작이 애검(愛劍)인 아이스 커터를 꺼냈다.
"이사벨라 여왕님의 충복들이여, 성스러운 우리 땅을 침략한 간악한 무리들을 씨도 남기기 말고 없애버려라!"
또다시 혈광에 휩싸인 세린디아의 병사들이 기나긴 전투로 지칠 대로 지친 외인부대를 향해서 사납게 쳐들어갔다.
"대령! 자네와 함께해서 다행이었어!"
"자... 장군님!"
"전우들과 함께하니 외롭지는 않겠지!"
"네, 장군님!"
목이 메는 것을 애써 참으며 김재덕 대령 또한 스패로우를 들었다.
"제군들! 커레히!"
"커레히!"
처음 시작한 4개 사단 5만 여명의 외인부대의 절반이 영혼의 강을 넘었고 남아 있는 병사들도 성치 못했다. 그러나 검을 높이 쳐들고 '커레히!'를 외치는 그들의 모습에서 누구도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거대한 물결이 위태롭게 떠 있는 외인부대를 집어삼키려는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 이교도(異敎徒)들을 무찌르자!"
"세린디아에 평화를!"
내성 후문을 통해 사라졌던 이방인(異邦人)들이 외인부대 앞을 가로막으며 세린디아 병사들과 충돌했다.
콰쾅!
엄청난 굉음이 요새 안을 울렸다. 한 번의 충돌만으로도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양쪽 모두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피와 살이 튀고 비명이 난무했다. 추운 겨울 맨발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도 착한 아이들의 애비일 것 같은 아저씨도 모두 손에 든 검을 꼭 움켜쥔 채 두려움 없이 적들을 향해서 몸을 내던졌다.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바로 신념이었다. 가족과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갈망의 발로였다. 그리고 같이 싸우는 전우애(戰友愛)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싸움이었다.
"이지 중대! 중령님이 홀로 싸우고 계신다. 지원자만 간다."
피터슨 대위가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이지 중대원들 전원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참혹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크아아악!"
비참한 몰골의 사람이 바닥을 뒹굴었다. 온몸에 유혈(流血)이 낭자했고 옷이 이미 걸레 조각이 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때 너를 없앴어야 했는데, 그날 이후 왜 그렇게 개운하지 않았는지 오늘 알았다. 그건 바로 너 때문이었어. 위대한 이사벨라 여왕님을 위해 너를 없애야겠다."
"쿨럭! 카ㅡ 악! 퇫! 지랄하고 있네, 미친 새끼!"
"곧 죽을 놈이 큰소리는 여전하구나!"
"하아~ 하아~ 개소리 하지 마라 성전(聖戰)? 사람들 선동하고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하찮게 여기는 게 너희들이 말하는 성전(聖戰)이냐? 그건 성전(聖戰)이 아냐. 소위 위선이라고 하는 거다. 더러운 위선을 가리기 위해서 성전(聖戰)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쓰고 있을 뿐이지!"
"이... 궤변을 늘어놓다니, 여왕님을 욕되게 하지 마라!"
"미친 놈 말끝마다 여왕님, 여왕님! 왜? 젖이라도 먹여 달라고 할래!"
"이... 이 천한 종자가 어딜 감히! 죽엇!"
호크와 말을 섞던 행크 공작이 아이스커터의 끝을 호크를 향해 휘둘렀다. 검에서 생성된 녹색 검기가 바닥에 선을 그리면서 호크를 양단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짓쳐들었다.
호크 역시 혼돈 블레이드 제로에 기(氣)를 실어 두 개의 검을 교차하면서 검기(劍氣)를 흘려보냈다. 두 개의 기운이 돌바닥에 긴 선을 그리면서 충돌했다.
"욱!"
"크허헉!"
행크 공작은 짧은 신음성만을 토해냈지만, 호크는 몸이 뒤로 튕겨나가 바닥을 굴렀다. 평소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부상에 겹겹의 부상을 입은 상태로 서 있는 것조차 경이로운 지경이었다.
수많은 그린로즈 기사단을 불귀(不歸)의 객(客)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기운을 다 쏟아냈기에 아마도 단전이 텅 빈 상태였다. 그런 몸 상태로 검기(劍氣)가 충돌하니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몇 배의 충격을 받으면서 쓰러진 것이다.
"어리석은 놈! 여왕님을 욕되게 한 죄, 그 천한 목숨으로 갚아라! 이얍!"
챙!
"헉! 누구냐?"
은빛의 갑옷을 입은 백발의 남자가 호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쥬(Ju)의 말씀을 전하는 충복이지!"
"빌어먹을 더러운 샹그릴라의 개들이로구나!"
"자... 자네는 행크가 아닌가?"
"그 더러운 입으로 나를 부르지 마라! 나는 위대한 아마리아의 후손 이사벨라 여왕님의 사자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신(神)이시며 이 폴렌시아의 지배자이시다. 너희 더러운 쥬(Ju)의 개들을 이 땅에서 멸할 것이다."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가? 그 순수했던 아이는 어디로 간 거지!"
"지옥에나 가서 물어봐라!"
분노에 이지를 상실한 행크 공작은 눈앞의 인물이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가 성검(聖劍) 베르트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렇게 무모하게 덤볐을까? 이사벨라 여왕의 막강한 힘이 베르트니의 검과 부딪칠 때마다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베르트니의 성력이 행크 공작의 검을 통해서 공작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자 우람했던 공작의 몸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머리색과 얼굴이 베르트니의 검에서 성력이 흘러나와서 그의 마나와 충돌하면서 마치 저주에서 풀리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두 눈 또한 꿈에서 깨어나는 듯 녹색의 녹안에서 갈색의 따뜻한 눈으로 바뀌어 갔다. 녹색의 한기를 내뿜던 검의 색깔도 점점 옅어져갔고, 그 무엇도 상하게 할 수 없다던 아이스 커터가 베르트니의 검과 충돌할 때마다 금이 가더니 결국은 그 수명을 다했다.
챙!
캉!
허무하게 부러진 검을 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행크 공작은 불쌍하리만치 처참한 몰골로 무릎을 꿇었다.
베르트니의 검에서 환한 빛이 쏟아질 때마다 행크 공작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디서 그 힘을 얻었나? 저주 받은 그 힘을 어디서 얻었냐고 물었다!"
"끄으으윽!"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행크 공작을 베르트니가 급히 달려가 부축했다.
"행크! 나를 기억하겠나? 나 베르트니다! 생각나나?"
"아... 아저씨......."
"그래, 신관이 되겠다던 네가 어떻게 된 거냐?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죄... 죄송해요. 아저씨... 이사벨라... 그녀를 조심하세요! 무서운 여자... 예요"
"행크야! 정신 차려, 행크야!"
"쥬(Ju)께서 저의 죄를 사해 주실까요?"
"그럼, 그렇고 말고!"
"다... 다행이네요. 전 결코 싸우고... 싶지... 않았......."
거대한 폭풍의 눈이었던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이 허무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베르트니의 품에서 죽어간 행크 공작의 얼굴은 아주 평온했다. 녹색머리가 원래의 금발로 돌아오니 아주 어려 보였다.
친우의 아들을 자신의 품에서 땅으로 돌려보낸 베르트니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지에 은총을 내리시어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의 손길로 이 영혼이 더 이상 악의 유혹에 들지 않게 해주소서......."
베르트니의 은총을 가득 담은 기도가 소란스런 전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성력(誠力)을 가득 담은 베르트니의 기도소리가 세린디아의 병사들에게도 통했는지 점차 많은 이들이 무기를 내려놓았다.
"헉헉! 죽어, 죽엇!"
"그만해! 에밀! 그만해! 끝났어, 끝났다고!"
철모를 들고 적의 머리를 내리치던 에밀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말린 루브카가 광기에 휩싸였던 에밀을 진정시켰다.
"됐어! 그만해! 그 친구는 벌써 죽었다고. 그리고 전쟁은 끝났어. 저길 봐!"
에밀이 가리키는 곳에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세린디아 병사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외인부대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끝난 거야?"
"그래, 그러니까 이제 내려놔도 돼! 이리 줘."
굳게 움켜쥔 철모를 루브카가 뺏으려고 했지만, 에밀이 놓지 않았다.
"놓으라니까?"
"헤헤, 미안해! 그런데 손이 안 풀린다. 나도 그만 놓고 싶은데 말이야!"
"너... 너... 이 자식이"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루브카가 고개를 숙이고 에밀의 손가락을 주물렀다.
"휴~ 정말 끝나긴 끝난 건가 보네."
돌더미 위에 엉덩이를 걸친 에밀의 시야에 처참한 전쟁터가 들어왔다. 바닥의 흙보다는 사람의 시체가 더 많이 보였고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시신에서 나오는 살타는 냄새가 광장 안을 뒤덮었다.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부대원들의 슬픈 표정이 에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래도 살아남은 부상자들이 부축 받아 가면서도 에밀을 향해 경례하자 에밀도 기꺼이 받아주었다.
"대위님! 괜찮으십니까?"
"응? 뭐야? 너는 스톤 아니냐? 너 어떻게?"
"이래보여도 신관이라고요. 위생병 자격 충분해요. 이만하면 저도 자랑스러운 외인부대원이죠! 그럼, 더 많이 다친 사람들에게 가볼게요. 충성!"
"젠장, 저런 어린아이들까지 전쟁터로 내몰다니......."
"저 아이 스스로 원한 걸세.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야! 뭐든 되는 곳이 전쟁터라잖아! 부디 이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무사하길 빌어야지!"
위생병들이 전투가 끝난 전장을 뛰어 다녔다. 위생병들 사이에는 큰 군복을 걷어 올려 입은 채 뒤뚱뒤뚱 뛰어다니는 스톤도 섞여 있었다.
"훗!"
"왜 그러십니까? 중대장님!"
"아냐. 전투 중에는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전투가 끝나니 저렇게 나타나네."
"그런가요, 아마 저들도 경황이 없었을 겁니다."
"그래. 중위! 생존자들을 확인해봐! 죽은 전우들을 찾아서 묻어줘야지. 이렇게 찬 겨울 땅 위에 놔두고 싶지 않아!"
"알겠습니다, 중대장님!"
외인부대원들만큼이나 피 흘린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세린디아의 버려진 부족, 이방인(異邦人)들도 절반 이상이 죽음의 사신을 맞이했다. 부족의 여인들이 시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남편이나 아버지 혹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무거운 발을 끌고 움직였다.
핸들러도 시체더미들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호크를 발견했다.
"일어나세요! 중령님! 어서요! 잠들면 안 됩니다."
"쿨럭! 쿨럭! 젠장... 자꾸 졸리는데... 핸들러!"
"안돼요! 정신 차리세요! 위생병! 위생병!"
"젠장.... 저녁놀 한번 더럽게 멋지네......."
"중령님!"
점점 눈앞이 흐려지는 호크의 귓가로 이방인(異邦人) 부족 여인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잃어가는 호크에게는 아름다운 노래로 들렸다.
붉게 타는 저녁놀이 무너진 성벽 틈으로 아름다운 석양이 드리워졌다.
피를 흘리는 호크의 입에서 힘없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Mama, take this badge off of me.
(엄마, 이 배지를 떼어주세요.)
I can't use it anymore.
(난 더 이상 이걸 사용할 수 없어요.)
It's get in' dark, too dark to see.
(이젠 앞을 볼 수도 없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Mama, put my guns in the ground.
(엄마, 내 총들을 땅에 내려주세요.)
I can't shoot them anymore.
(이젠 더 이상 쏠 수도 없어요.)
That long black cloud is comin' down.
(넓게 퍼져가는 검은 구름이 다가오고 있어요.)
I feel I'm knockin' on Heaven's door.
(마치 천국의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이....)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Knock knock knockin' on Heaven's door
(두드려요. 천국의 문을.... 천국의 문을 두드려요.)
- 밥 딜런의 Knockin' On Heaven's Door 중에서 -
노래가 잦아지는 것과 함께 전투가 끝난 요새에도 어둠이 찾아왔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살아남은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는지는 영원히 숙제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