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16화 (16/55)

Chapter 16. 다가오는 전운(戰運)!

모르카시의 주력부대를 맞이하기 위해 전략 수립에 여념이 없던 외인부대 총 사령관 나형석 장군은 뜻하지 않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온몸을 지방덩어리로 완전 무장한 남자가 금장식물로 치장한 비곗살을 출렁거리면서 몽뜨 요새로 들어왔다.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순간 하얀 원피스 입은 남자아이들이 마차 계단 아래로 달려 나와서 엎드려 인간 계단을 만들었다. 그 비대한 사내가 아이들의 등판을 밟고 내려서자 잘 먹지 못했는지 가녀린 몸들이 부서질 듯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그 중대 그레이 중위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남자에게 다가갔다.

"신분을 밝히시오."

그레이 중위의 딱딱한 질문에 남자는 몹시 불쾌한지 낯을 붉혔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색을 바꾼 다음 가볍게 목례하며 입을 열었다.

"세린디아의 요한 드리크 남작이라고 하오! 그대들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대들의 주인을 만나고 싶소!"

건방지게 고개를 치켜들며 위세를 뽐내자 그레이 중위가 혀를 찼다. 비록 요한이라는 세린디아의 귀족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교전국가의 전령이었으니 자신의 마음대로 내칠 수는 없었다.

"벅!"

"네, 중위님!"

"상황실에 보고해라, 세린디아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넵, 알겠습니다, 충성!"

요한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마차 주변을 걸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려서 요새 안을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나 요한이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난생 처음 보는 군복에 무기들, 생소한 인사법 등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들 같았다. 대륙 공용어를 쓰는 것을 보니 폴렌시아인들이 맞기는 한 거 같은데, 그 외 자세한 것을 알아내는 것은 무리였고 도저히 정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만 병사들의 면면이 절도 있고, 하나같이 눈매들이 사나운 것으로 보아 혹독한 훈련을 받은 정예병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저를 따라 오시지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상황실에서 달려 나온 정보장교를 따라서 요한 일행이 내성으로 들어가자 그레이 중위의 목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뭣들 하나, 구경났어! 경계 근무 중에 누가 한눈파는 거야?"

요한에게 받은 짜증을 부하들에게 퍼붓던 그레이 중위가 뭘 발견했는지 반색을 하며 앞으로 뛰어갔다.

"부대 차렷! 대령님께 경롓!"

"충성!"

우렁찬 경례 구호가 몽뜨의 요새를 무너뜨릴 만큼 울려 퍼졌다. 무수히 많은 마차 중에서 예의 검은 선글라스의 사내가 내려섰다. 나형석 장군의 비서관에서 케린버그 외인부대의 대령으로 초고속 진급을 한 김재덕 대령이 마차에서 내려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각자 요새 방어 준비에 한창이던 병사들이 부동자세로 잔뜩 긴장했다.

김재덕 대령이 머리에 붕대를, 손에는 삽을 들고 있는 병사의 앞에 섰다. 삽을 든 손에도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를 악물은 김 대령의 선글라스 사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고맙다. 모두 살아남아서."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김 대령이 뒤돌아서 다시 마차에 올랐다. 오르기 전에 다시 뒤를 돌아본 김 대령이 크게 소리쳤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외인부대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군인들이다. 내가 너희들의 지휘관이란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고맙다."

마차 행렬이 내성으로 사라져 들어갈 때까지 수많은 병사들의 거수경례한 손이 오랫동안 내려지지 않았다.

전투 개시 후 10일 만에 외인부대의 모든 병력이 몽뜨로 이동했다. 옥쇄를 각오한 최후의 결전이 곧 떠오를 내일의 태양처럼 다가오고 있었지만, 병사들의 사기만은 그 태양만큼이나 뜨거웠다.

"수고했네, 중령!"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대령님!"

"그런 소리 말게.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피를 흘리면서 싸운 병사들에게 욕먹을 소리야. 그나저나 이지 중대의 피해가 너무나 크군."

"네. 선봉 부대인데다가 첫 실전이라서 손발이 조금씩 맞지 않았습니다. 캐논포도 실전에서는 장착과 발사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고요. 앞으로 좋아질 테지만, 수업료 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 아까운 목숨들이 사라졌어!"

"신병 보충은 어떻게?"

"음, 이번에 이지 중대 보충 병력으로 신병들을 데려왔네. 아마 지금쯤 배속을 마쳤을 거야!"

"햇병아리들이군요.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 그럴 만한 시간이나 여유가 없어.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고 있는 젊은이들을 더 훈련시키고 싶어. 조금 더 훈련하면 전장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더 늘어난 다는 것을 알지만 어쩌겠나? 시간이 없는 것을. 이곳에서 패하면 훈련받을 의미가 없어지는 거 아닌가? 몽뜨를 점령했다지만,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만한 때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었네. 저들 중 많은 수가 죽을 테지만, 우리들이 노력해서 한 목숨이라도 더 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해! 저들의 죽음을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가 벌써부터 이렇게 나약한 말을 해서는 안 되지. 우리는 죽고 싶어도 그렇게 쉽게 죽을 수가 없어. 그러기에는 짊어진 죽음들이 너무나 많아! 자! 정신 차리고 모르카시에서 몰려올 적들이나 대비하세!"

"네, 알겠습니다. 대령님!"

"참, 그나저나 도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시다가 이제야 나타나신 겁니까?"

"하하하! 내 자네를 위해서 선물을 준비해왔지. 기대하게나. 하하하하!"

"선물이요?"

그저 말없이 웃음만 지어 보이는 김재덕 대령를 호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지 중대장님! 신병들입니다. 여기 서명을 해주십시오."

"신병? 벌써?"

피터슨 대위는 아직 죽어간 대원들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는데, 벌써 신병들이 배속되어 오자 조금은 당황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내일이 될지 오늘 당장이 될지 모르는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 병력 보충은 필수였기에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일렬로 서 있는 50여 명의 병사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일일이 쳐다보던 피터슨 대위는 설익은 그들을 보면서 죽어간 중대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좀 더 많이 훈련시켜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번 전투 때에는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제군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우리 이지 중대는 대대 선봉부대다. 언제나 맨 앞에 서서 돌격하고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싸운다. 외인부대 중 가장 명예로운 중대에 온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라. 그리고 고참들 옆에 붙어서 하나라도 더 배워라. 그것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상! 각자 소대로 가서 신고하도록."

피터슨 대위의 연설이 끝나자 각 소대장들과 분대장들이 신병들을 호명해서 데려갔다.

진지 구축을 하던 더그 중위는 갑자기 신병이 왔다는 소리에 옷도 걸치지 않고 신병이 있는 장소로 왔다.

그는 땀이 번들거리는 근육질의 상체를 자랑하면서 신병들 앞에 섰다. 햇빛에 군번줄이 반짝거리자 신병들이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더그 중위의 손이 그들의 멱살을 잡았다.

"전투 중에는 절대로 두 눈을 감지 마라. 왼쪽 눈에 화살이 틀어 박혀도 오른쪽 눈을 감지 말라는 뜻이다. 알겠나?"

"네, 넵! 중위님!"

"후후, 좋아! 앤더슨 상사, 신병들 인수하게."

"알겠습니다. 중위님! 모두 나를 따라와라!"

멀어져가는 3명의 신병들을 바라보던 더그 중위가 다시 삽을 들고 입에 문 잎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들의 등 뒤로 전사한 소대원들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젠장, 오늘 따라 담배 맛이 왜 이렇게 쓴 거야!'

푸념하는 중위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앤더슨 상사를 뒤따라간 신병들은 내성 쪽에 마련된 숙소에 더블 백을 들고 따라 들어갔다. 임시 내무반은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중사 한 명이 침대에 누워 단검을 매만지더니 더블 백을 내려놓으려는 신병을 향해서 단검을 내던졌다.

"그 침대는 임자가 있다. 다른 걸 써라!"

"하... 하지만 아까 상사님이 여기는 주인이 없다고."

"시끄러 ! 주인 없기는 왜 없어. 거기 지금 누워 있는 게, 안 보여!"

"무슨 말씀인지 이 침대에는 아무도 없는......."

"이 자식이!"

"그만! 그만하게. 중사."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알아. 나도 안다. 밤마다 꿈속에서 놈들이 나타나서 얼마나 괴로운지. 하지만 새로 온 신병에게 그 화풀이를 해서야 되겠는가? 이제 그만하게, 중사."

"빌어먹을!"

멱살 잡힌 신병을 내동댕이친 중사가 군복 상의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후후, 놀랐지. 절대로 너희에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이번 전투에서 친한 동기를 먼저 보내서 저런 것이니까 마음에 담지 마라. 어서 더블 백 정리하고 소대장님께 신고하도록 해라."

"넵,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소대장님은 어디 계시죠?"

그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쪽 침대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모습이 잠을 자던 중이었나 보다.

"소대장? 여기 있잖아. 너희 소대장, 어서 빨리 더블 백 정리하고 집합하는데 일 분 주겠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2소대장의 제법 무서운 소리에 신병 3명의 움직임이 번개처럼 빨라졌다.

전우들의 죽음으로 그늘졌던 부대에 신병들이 들어오자 시끌벅적해졌다. 신병들이 어설픈 행동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이지 중대원들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씁쓸한 헛웃음으로 변해버렸다.

- 케린버그 수도 로이든 -

"몽뜨를 점령했다지. 나 장군과 호크가 고생이 많았겠어."

"네, 국왕 전하! 그러나 이제부터입니다."

"그래, 희생은?"

"전하! 대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소서!"

"병사들이 얼마나 희생됐냐고 물었네?"

"그게, 백여 명이라 들었습니다. 전하!"

"벽여 명이라 아까운 생명들이 희생되었어. 내가 힘이 없어 그들을 사지로 내밀었군. 무능한 국왕 밑에 사는 죄로세."

"전하! 어찌 그런 나약한 말을 하십니까. 이제부터가 케린버그의 국운을 피워나갈 때입니다. 부디 마음을 굳건히 하십시오!"

"후, 그래. 내가 이렇게 감상에 빠진다면 죽어간 병사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좋아! 우리가 지원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다 하게. 최대한으로 말이야. 필요하다면 왕성의 기둥이라도 뽑아다 쓰게. 머스탱 공작!"

"네, 국왕 전하, 심려치 마십시오."

"케론스 일당은 어떤가?"

"호크 경의 공작 덕분인지 아주 난리가 난 듯합니다. 우리 쪽 귀족 한 명을 포섭한다고 로베르트 그 작자가 웨일로스 영지의 밀턴 자작에게 접근했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기회다 싶어서 그를 이중 첩자로 집어넣었는데, 그 밀턴 자작의 보고에 의하면 지금 케론스 공작 일파는 무슨 유물을 찾는 일과 레센의 그림자 기사단의 행방을 추적하는 일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린디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전혀 없다고 하니, 우선은 걱정을 덜어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째든 매사 조심하고 조만간 몽뜨에 한번 들러야겠어."

"아, 아니 됩니다. 전하! 그곳은 전장입니다. 절대로 가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시끄럽소, 머스탱 공작. 내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있는 곳이요. 어찌 내가 모른 척할 수가 있소. 이곳에 있다고 내가 마음이 편하리라고 생각하오? 그보다 머스탱 공작은 호크 경의 작전대로 모르카시를 점령하는 것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시오!"

"네 전하!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이미 병사들을 로크 산맥 인접 영지인 리버크로 모으고 있습니다. 기별만 오면 바로 모르카시로 쳐들어갈 것입니다. 전하!"

"좋소! 칼은 이미 뽑혔고, 그냥 집어넣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피를 봤어, 끝을 봐야지."

옥좌의 손잡이를 움켜진 찰스 국왕의 눈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굳은 의지와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 * *

"중령님! 어디 가십니까? 위험합니다. 혼자서 다니시면."

호크가 요새 정문을 지나 들판으로 나가자 놀란 핸들러 소령이 챠챠 대위의 특임대 소속 대원들을 데리고 따라 붙었다.

"뭐냐? 핸들러. 내가 무슨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렇게 줄줄이 엄마 돼지 소풍 가듯이 따라나서게."

"하지만, 여기는 아직 적진입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하셔도 혼자서 다니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구. 흠, 이쯤이 좋겠군. 모두 물러서라!"

정문을 지나 왼편 언덕을 넘어서니 널따란 수풀지대가 나타났다. 주변을 살피니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분지였다. 마침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한 호크가 모두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외쳤다.

그 말에 핸들러가 대원들을 뒤로 물렸다.

주변이 정리되자 호크는 가슴에서 검은색 메달을 꺼내 손바닥 위로 튕겼다.

"좋아! 까짓 거 한번 해보지, 뭐! 이 길이 병사들을 한 명이라도 살리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말이야."

위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메달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바닥으로 굴렸다. 동판이 빙글빙글 돌다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놀랍게도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모르카시의 동굴에서 만난 검은색 기간테스 엥귀오스가 나타났다.

검은색 엥귀오스를 바라보는 호크의 심정은 복잡했다. 막상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적 기간테스를 무찌를 방법을 찾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기간테스에게 희생된 기사들의 모습이 상상이 되자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고 한동안 몽뜨 요새의 분지에서 별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거구의 금속 거인과 그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인간이 서로 멀뚱히 바라보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한참동안 엥귀오스를 바라보던 호크가 팔짱을 꼈던 팔을 풀고 고개를 좌우로 꺾어 보았다.

'그날 부서진 기간테스 안에서 죽어간 애쉬라는 녹색기사는 수많은 촉수가 몸속에 틀어 박혀 있었지. 그리고 순식간에 몸속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말라 비틀어져서 죽어버렸어. 젠장! 잘못하면 나도 그 꼴이 될 수 있다는 건데, 어떻게 하나? 휴, 어쩔 수 없지.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라는 옛말도 있으니까. 제발 아프지나 않았으면 좋겠군.'

"어이, 이봐 내가 네 안에 들어가도 되겠냐?"

[물론이다. 당신과 난 이미 계약을 맺었다. 이미 난 그대의 종이다.]

"하하~ 웃기시네. 종이라면 그 말투부터 좀 고치시지. 그게 종이 주인에게 하는 말투냐?"

[말투가 어때서 그러는가? 내게 입력된 언어는 이것뿐이다.]

"그래, 어련하실까! 그나저나 많이 아프냐? 네 안에 들어가면?"

[아프냐고? 아프다는 것이 무엇인가?]

"알았어, 알았다고. 졌다, 졌어!"

버럭 신경질을 낸 호크가 결심이 서자, 엥귀오스를 향해 손짓을 했다.

"좋다. 네 안 좀 구경해보자!"

호크의 말에 엥귀오스의 가슴 흉갑 부분이 빛을 내면서 문이 열렸다.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좌우로 열렸다.

"어라, 뭐야? 이거 다른 기간테스와 전혀 다르네?"

일전에 드래곤 숲속에 사투를 벌였던 기간테스와 모르카시 협곡의 동굴 속에서 보았던 기간테스는 같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엥귀오스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 당시에는 녹색기사의 외침과 동시에 빛에 이끌려서 녹색기사가 기간테스의 몸 안으로 사라졌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엥귀오스는 마치 무슨 자동차나 비행기에 탑승하듯이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호크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에 반해 호기심 또한 아주 강하게 일어났다. 용기를 내서 조심스럽게 엥귀오스에게 다가갔다.

열린 흉갑 안을 보니 전투 비행기의 콕피트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그 앞에는 조정관인 듯한 둥글게 생긴 금속판들이 처음 보는 문자와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엥귀오스 내부를 살피던 호크는 그 안에서 기계 문명의 흔적이 느껴지자, 이전부터 느껴왔던 이 세계에 대한 모순점들이 더욱 강한 의심으로 다가왔다.

'이것은 마치 전투 비행기 내부 같아. 분명히 이곳의 과학력은 아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명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인가?'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에 잠긴 호크를 엥귀오스의 기계음이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한 손을 엥귀오스의 흉갑에 올려놓고 고개를 숙여 내부를 살피던 호크는 점점 더 알 수 없는 존재들에 의해서 휘둘려지는 것은 아닌지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의 결정을 내리자 주저 없이 콕피트 안으로 들어갔다. 호크가 의자에 앉자 갑자기 기간테스의 좌석이 호크의 신체에 맞게 자동으로 움직이면서 위치를 조절했다.

잠시 후.

기이잉!

기계음이 들리면서 흉갑이 닫히기 시작했다.

"웃! 뭐, 뭐야 의자가 뭐 이래? 몸에 달라붙잖아! 왜 이래? 이거 놔! 읍! 읍!"

호크가 콕피트 안의 의자에 앉는 순간, 검은색 의자로 보았던 것의 모양이 젤리처럼 변하면서 호크의 몸에 들러붙었다.

호크는 드래곤 산속에서 죽은 녹색 기사가 생각나자 자신도 똑같은 꼴이 될까봐 두려웠다. 서둘러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판단하고 사력을 다해서 온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지만 슈트처럼 변형되어 온 몸을 둘러싸고 있는 우주복을 입은 모습이 되어 버려서 움직이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정관처럼 보였던 곳에서 촉수 모양의 케이블들이 슈트의 여기저기 구멍이 난 곳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놀라운걸!"

시야가 가려져 답답했던 호크는 온몸에 케이블이 연결되면서 모니터 화면이 켜지듯 외부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화면 왼쪽 상단과 오른쪽 하단에 알 수 없는 글자와 그래프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때 호크의 머릿속으로 기간테스 엥귀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당신에게 나의 주문을 알려주겠다. 그대의 머릿속에 직접 새겨 넣어 줄 것이다. 그 이후는 그대의 노력 여하에 달렸다. 이제 내 임무는 끝났다. 그럼, 나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엥귀오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당황한 호크가 엥귀오스를 불렀다.

"뭐야 이대로 끝이야! 이게 다냐?"

[당신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는 나의 임무를 다했으니 이제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사라지면 곧 운용법을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은 그대에게 인계되었다. 그럼, 무운을 빈다.]

"자... 잠깐만 거 되게 급하네. 그러니까 너의 임무가 그렇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말이야. 몇 가지 대답해주고 가면 안 될까?"

[무엇인가? 내 기억 속에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려주겠다.]

"휴, 눈물 나게 고맙구나. 흠흠, 내가 전에 본 기간테스에 탑승했던 기사가 매우 젊은 청년이었는데, 나중에 보니 미이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있었거든, 나도 그렇게 되는 것인가?"

[흠, 잠시 기다려라.]

무언가를 찾는 듯 뜸을 들인 엥귀오스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1분여가 지나서였다.

[그대가 본 것은 어느 종류인가?]

목소리와 함께 화면에 여러 종류의 기간테스가 디스플레이 되어 나타났다.

"오우, 멋진데. 가만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래, 바로 그거야!"

오른쪽 두 번째 그림의 기간테스가 선택되더니 메인으로 확대되어서 나타났다.

산양의 얼굴을 하고 있던 그 기간테스는 모르카시 인근 산속 동굴에서도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흠,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종류가 아니다. 내게 데이타가 부족해서 보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것은 인간형 모델이 아니다. 어떻게 인간이 탑승한 건가? 모순이다!]

"인, 인간형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누가 탑승하도록 설계된 거지?"

[알 수 없다. 내 데이타의 일부분이 삭제되어서 그것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상당히 오래된 전투형인 것은 사실이다.]

"구, 구형이라니. 그렇다면 도대체 기간테스의 종류가 얼마나 되고 누가 만들었단 말이야?"

[그것에 대한 대답 또한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난 스스로 소멸한다. 더 이상... 이... 무운을... 빈.......]

마치 배터리가 다 된 카세트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엥귀오스의 목소리가 늘어지더니 아주 사라져 버렸다.

"허참! 도대체 이거 도깨비놀음도 아니고 이게 무슨 일이지? 이 폴렌시아는 분명 증기기관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중세 시대 정도의 문명 수준이고. 특이하게 마법이란 것이 존재하지만, 기계문명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는 세상인데 마치 애니메이션에나 나올 법한 이 괴물들은 무어란 말이지? 드래곤에 신들의 저주라니. 음, 아무래도 아레네스와 로테니어스라고 했던 그 드래곤 산속에서 만난 신들이 내게 뭔가를 속이고 있는 거 같은데, 다시 한 번 만나 봐야겠어. 뭔가 더러운 음모의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호크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자 엥귀오스 또한 손에 턱을 괴는 행동을 취했다. 호크가 하는 행동과 똑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호크만 몰랐다.

들판에서 이를 바라보던 핸들러와 특임대 대원들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호크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려고 할 때, 갑자기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누군가 머릿속에 대고 직접 말하는 것처럼 굵은 목소리가 울렸다.

"잠깐! 아직 준비가 헉! 으... 으아아악! 그만, 그만!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호크가 머리를 감싸고 발광하자 엥귀오스 역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들판을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핸들러와 특임대원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황급히 벗어났다. 몽뜨 요새에서 이를 지켜보던 도그 중대원들도 급히 뛰어 나왔다.

핸들러는 엥귀오스에게 다가가려던 그들을 저지시킨 다음,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엥귀오스를 바라보는데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중령님, 제발 무사하셔야 합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견디셔야 합니다. 제발요!'

핸들러의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분지의 수풀을 짓뭉개던 엥귀오스 몸부림이 갑자기 멈춰졌다.

"크으윽! 젠장, 우욱!"

다른 생각을 하던 와중에 갑자기 머릿속으로 엄청난 양의 정보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자, 호크는 자신의 머리가 터져 나가는듯한 통증을 느꼈다. 어찌나 괴롭던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었다.

두 눈을 감았다 뜨는 동작을 반복하던 호크는 뒤쪽 머리에서부터 전혀 생소한 기억들이 샘솟는 경험을 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닌 정보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기간테스 엥귀오스에 대한 여러 가지 작동법과 기술 설명들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정도로 지쳐 버린 호크는 도대체 이 정도 정보면 용량이 어느 정도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좋게 보아도 호크의 머리는 1기가도 안 되는 하드웨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 배가 넘는 정보를 집어넣은 엥귀오스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계속해서 속이 울렁거리고 어질어질한 느낌에 호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기초적인 동작들을 실행해 보았다. 자신의 두뇌에서 생각하는 것을 전달받은 엥귀오스가 그 즉시 감응해서 움직였다.

휙~ 휙~

주변의 풍경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 외로 빠른 움직임에 호크는 깜짝 놀랐다. 전신의 기운이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자 호크는 태극심법을 끌어올려 몸 안의 기운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엥귀오스의 몸 주변 또한 이상한 기류에 감싸이면서 빛을 냈다.

그러나 곧 시간이 지나면서 또 다시 온몸의 기운이 빠져 나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제길, 후우~ 후우~ 이러다 그 세린디아의 애쉬라는 기사 꼴이 되겠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더니 정말 그 말이 실감나는군. 아쉽지만, 그만 동작을 멈춰야겠어. 더는 무리야."

기억을 더듬어 엥귀오스를 멈추게 하는 명령어를 기억해낸 호크가 겨우 입을 달싹이자 주변 경치가 서서히 멈추면서 주변 사물도 정지했다.

주변에서 호크의 기간테스 엥귀오스를 지켜보던 핸들러와 대원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왔을 때, 엥귀오스의 흉갑이 열리면서 호크가 떨어져 내렸다.

"중령님!"

기겁한 핸들러가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왔다.

"중령님! 중령님!"

"소리... 소리 지르지 마라. 귀청 떨어지겠어. 후우~ 후우~"

"괘...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속이 뒤집어진 것 빼고는 괜찮으니 호들갑 떨지 마. 누가 죽기라도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핸들러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겨우 상반신만 세울 수 있었다. 핸들러가 상의를 벗겨내자 온몸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붉었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쉴 새 없이 어깨를 들썩이던 호크는 물주머니를 건네받자마자 머리위에 물을 쏟아 부었다.

"푸우! 하아~ 하아~ 죽다 살아났어. 젠장! 객기라는 게 이런 건가 보네."

완전히 탈진한 호크가 핸들러에게 부축을 받아 요새로 돌아갔다. 문득, 뒤돌아본 호크의 두 눈에 자신과는 달리 당당히 들판에 서 있는 엥귀오스가 들어왔다.

"자식! 내일 보자......."

그렇게 또 전운이 감도는 몽뜨 요새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다음날 한낮이 되도록 호크와 엥귀오스의 연습은 계속되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켜보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부서진 잔해만 가지고 씨름을 해왔던 김재덕 대령은 온전한 기간테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면서 새벽부터 호크를 닦달했다.

이미 오전 내내 엥귀오스의 내부를 살펴본 김재덕 대령 옆으로 대령의 절대적 파트너들인 드워프 일족의 장인들이 눈빛을 빛내면서 호크가 조정하는 엥귀오스를 살피고 있었다. 김 대령이 그만 하라는 소리가 나오기까지 그렇게 엥귀오스에 매달렸던 호크가 오후 늦게 역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몽뜨 요새 옆의 언덕 아래 분지는 그야말로 초토화, 엉망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호크가 부하들에게 실려 나가자, 아예 정비복을 입고 대기하던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들이 기다렸다는 듯 엥귀오스에게 달라붙었다. 김재덕 대령이 디자인한 군복 이외에 작품이 이 정비복이었다.

처음에는 외인부대 무기제작을 연구하는 자신을 위해 만든 옷이었는데 같이 작업하던 드워프들이 존경하는 기술자인 김재덕 대령의 모든 것을 배운다는 취지로 저렇게 아주 유니폼으로 만들어서 모두가 입고 다녔다. 짧달막한 키에 위아래 한 벌인 정비복을 입고 뛰어 다니는 모습이 더 우습게 보였지만, 드워프들에게는 이 정비복이 너무나 자랑스러운 옷이었다.

그렇게 정비복에 때를 묻혀 가면서 엥귀오스에 매달리고 있는 그들 주위로 마법등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오늘도 밤을 새기로 작정했는지 아무도 작업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주위로 도그 중대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이들이 하는 작업결과에 따라서 이번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터이니 모두의 기대가 큰 것은 당연했다.

또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놀랍군, 놀라워! 다시 봐도 경이로울 지경이야. 저 괴물을 보고 있노라니 대마법사란 내 칭호가 부끄럽기 짝이 없구먼."

"아니, 언제 오셨습니까? 사이클론님!"

"어서 오십시오. 먼 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사이클론님."

완전히 작업장으로 변한 요새 근처 분지에서 도면과 씨름하던 김재덕 대령과 핸들러가 깜짝 놀랐다. 비밀 임무를 띠고 여행 중이던 사이클론이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김재덕 대령이 기름때 묻은 정비복 차림인 것을 깜빡하고 힘차게 포옹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허허허. 괜찮아요, 괜찮아. 옷이야 빨면 그만이지요. 그나저나 이 기간테스는 처음 보는 것이군요."

"네, 호크 대령이 세린디아의 비밀기지에서 탈취해 온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저것을 움직이고 있는지?"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호크 중령입니다."

"뭐라고요? 아니? 호크가? 당장 멈추게 하세요! 어서요!"

드래곤산에서 죽어간 청년이 기억에 떠오르자 기겁한 사이클론이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진정하세요, 사이클론님. 이제는 제법 요령을 익혀서 괜찮습니다. 첫날은 거의 곤죽이 되었는데 요즘은 조금 피곤한 정도니까요."

"그럴 수가! 어떻게 된 겁니까?"

놀란 사이클론을 이끌고 많은 드워프들이 작업하고 있는 작업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금속으로 만든 기간테스가 세워져 있었고 실물보다 1/3 정도의 크기에 표면을 덥지 않아서 내부가 다 보였다.

"이... 이게 도대체?"

"네, 녀석을 분석 중입니다. 놈들의 전령이 다녀갔으니, 이제 곧 들이닥칠 겁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죠."

팔짱을 끼고 이야기 하는 김재덕 대령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읽은 사이클론은 크게 고무됐다.

"뭔가 실마리도 잡은 건가요?"

"하하하하하! 네, 확실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꽤 많은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데 곧 보여드리죠. 잘하면 우리가 살 확률이 조금은 올라가겠죠."

대령의 말은 들은 사이클론의 얼굴에는 비로소 안도감이 서렸다.

"고생하셨소. 정말 수고했어요!"

"아닙니다, 고생은. 고생이야 사이클론님이 더 하시지 않았습니까?"

"허허, 뭐 제가 무슨 고생이라고. 그나저나 핸들러, 자네가 호크를 잘 보살펴주고 있으니 내 한시름 놨어!"

"무슨 말씀을, 중령님이야말로 혼자서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고 계십니다. 별 도움이 못되는 제 자신이 한심스러울 따름입니다."

들판 위에서 어색하게 움직이는 검은색 엥귀오스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표정은 달랐지만, 느끼는 감정은 똑같았다.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힘을 쏟은 호크가 디스플레이 화면을 통해서 핸들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클론을 보고 기간테스를 중지 시켰다. 슈츠와 케이블이 해체되고 가슴의 흉갑이 열리면서 땀범벅이 된 호크가 사이클론을 부르면서 뛰어 나왔다.

"영감!"

와락 사이클론을 끌어안은 호크가 반가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항상 티격태격해도 두 사람만의 끈끈한 애정은 남달랐기에 보는 이들의 가슴까지 훈훈하게 만드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래 어떻게 지......."

"우엑, 으... 미안해요 갑자기 땅을 밟으니 속이... 우욱!"

움직이는 기체에서 장시간 앉아있던 사람이 갑자기 땅에 내려서니 뱃속이 울렁거리면서 멀미가 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뱃속이 탈이 난 호크가 고의는 아니지만, 사이클론의 고귀한 품위를 유지 시켜주는 회색의 마법로브 등 뒤로 자신의 아침식사 내용물들을 줄줄 흘려보냈다.

물론 사이클론의 한쪽 눈썹이 심하게 떨리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호크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입을 '슥' 하고 닦아 버리고 가볍게 사이클론의 어깨를 두드릴 뿐이었다.

"너, 이 녀석! 오랜만에 보자마자 겨우 한다는 짓이......."

사이클론이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려고 에너지를 폭발 시키려는 찰나, 입가를 닦는다고는 했지만, 오른쪽 뺨에 그 흔적을 그대로 붙이고 있는 호크가 애절하고 감상적인 표정으로 사이클론의 손을 잡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에휴, 수고하셨어요. 사실 할아버지 보내면서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거든요.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고마워요, 정말."

그 큰 두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눈앞에 들이대자, 왠지 모르게 사이클론도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러나 그건 그것이고 등 뒤로 흐르는 뜨거운 토사물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현자로서 길길이 날뛰면서 체면을 손상시킬 수도 없자, 애꿎은 트집을 잡아 화풀이를 했다.

"허허, 그래도 한 무리를 이끄는 수장이라는 놈이, 더러워라. 입가에 묻은 거나 닦아라. 에잉, 마나의 힘이여, 그대의 따사로운 숨결과 정결한 눈물로 대지의 더러움을 정화시켜주오!"

사이클론의 영창에 호크 주위에 물보라가 휘몰아치더니 호크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서 빙글빙글 회전시켰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오물들이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마법의 힘으로 겨우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호크였지만, 비틀거리면서 지그재그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모두들 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번 혼쭐이 나자 호크는 실실거리면서 사이클론 곁에 바짝 붙어서 귀여움을 떨었는데, 그 나이에 귀여움이라니 다른 사람들의 뱃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어땠어요, 여기저기서 꽤나 많이 따라 붙던가요?"

"허허허! 말도 마라. 나중에는 레센의 그림자 기사단까지 따라 붙었더구나. 그놈들이 젤 귀찮은 놈들이었어."

"그럼, 어떻게 마무리하셨어요."

"가짜 낙인을 모르는 척 슬쩍 레센의 그림자 기사단에게 넘겨줬지. 녀석들은 지들 힘으로 탈취한지 알겠지만, 뭐 상관없지. 나머지 놈들도 모두 녀석들을 쫓아다닐 거다. 녀석들 솜씨가 제법이니 아마도 한동안은 눈을 피할 수 있을 게야. 가짜 낙인을 찾고 난 후의 놈들의 표정을 생각하니... 허허허!"

"그래요. 다행이네요. 사실 이곳 사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나마 좋은 소식을 들으니 한시름 놓게 됐어요."

"몽뜨를 점령했으니 이제 곧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겠구나?"

"네, 일반 병사나 기사는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문제는 저런 괴물이 세린디아에는 칠십구 기가 존재한다는 것이 문제예요. 전령도 다녀갔다니, 전열을 정비한다고 하더라도 이십 일 이내에 이곳에 도착하겠죠. 행크 공작은 분명히 저 괴물들을 몰고 나타날 텐데, 걱정입니다."

"그래. 그런데, 저 괴물을 어떻게 수중에 넣은 것이냐?"

"아, 저거요."

호크에게 몽뜨 요새 작전부터 모르카시로 숨어 들어간 이야기 그리고 모르카시 외곽에 숨겨진 비밀기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사이클론이 팔짱을 낀 채 사뭇 심각한 얼굴을 하고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인간이 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그래, 이제야 답이 보이는구나!"

"네? 답이라니요? 그럼, 그동안 뭔가 알아낸 것이 있으세요?"

"사실은 말이다, 그때 드래곤 산속에서 너와 대결을 한 기간테스의 잔해와 그 녹색기사의 사체를 잉글햄의 사령부에 있는 연구실로 옮겨와서 김재덕 대령과 그동안 쭉 연구를 해왔었다. 마법사로서 어쩌면 이것이 나에게 마지막 과업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말이야, 정말이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놀라운 사실이라니요? 그게 뭔데요?"

"그것은 말이야, 네 말대로 기간테스가 인간보다는 오히려 몬스터에게 더 친밀한 반응을 보였거든. 그래서 몬스터들을 잡아와 실험해보았는데 결과가 아주 놀라웠다."

"어떤 결과인데요?"

"그 기간테스는 너도 알다시피 많은 부분이 파손되었는데도 작동하고 있었단다. 더구나 놀랍게도 그 녹색기사 또한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었어. 온몸에 꽂혀 있는 촉수를 통해서 생명을 빼앗긴 줄 알았는데 기간테스가 최소한의 생명은 남겨 두었더구나."

"그럴 수가!"

"그래. 아주 놀라웠지. 사실 그 촉수가 나를 덮치려고도 했었네. 하마터면 내가 그 녹색기사 꼴이 될 뻔했지 그래서 실험 도중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

김재덕 대령이 거들고 나섰다. 잠시 뜸을 들인 김재덕 대령이 호크를 마주 보면서 커다란 수정구를 건넸다.

"이것이 그 결과네. 한번 보게나."

김재덕 대령이 건넨 하얀 수정구 속의 영상을 보던 호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게 정말이에요? 제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요!"

경악한 호크가 사이클론을 보면서 소리쳤다.

"이거 트롤 맞죠? 기간테스와 완전히 동화된 모습이군요?"

호크가 들여다본 수정구 속에는 반파되어 가슴 흉갑이 뜯겨 나간 기간테스 속에 수십 개의 촉수를 몸에 꽂고 흉포한 두 눈을 번뜩이며 모든 것 을 파괴할 듯 트롤이 발광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맞다. 너도 알다시피 이놈의 재생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그런데 그런 질긴 생명력을 가진 이 녀석도 겨우 반나절이었다. 반나절이 지나는 순간, 마치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온몸에 생명력을 빼앗긴 채 죽어 버렸어, 그나마 트롤이었으니 반나절이지 오크나 인간은 한 시간 정도가 최대였지. 기간테스를 같이 연구하던 드워프 중 셋이나 저 촉수에 당했다. 녀석은 탑승자가 더 이상 생명력을 공급하지 못하자 주변의 다른 대상을 흡수하려 했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말이야. 그리고 더 놀라운 건 트롤이 말을 했다는 사실이야. 그것도 첫마디가 '전쟁!'이었다. 그때는 나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어."

사이클론은 그 당시 상황이 생각이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면 제가 타고 있는 기체는 인간을 탑승시키기 위한 모델이 맞다는 말인데,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냈을까요?"

"글쎄, 하지만 현재로는 거기까지 알아볼 수 있는 여력이 없네, 중령. 우선은 눈앞에 닥친 적부터 상대해야지."

"그야 그렇죠!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답 또한 이 세린디아에 있을 것이 분명해요. 갑자기 그렇게 많은 기체를 확보했다는 것도 믿기 힘들고. 드래곤 산맥에서 찾은 유물이 저 기간테스에게 인간을 탑승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든 것은 모르카시 넘어 세린디아의 수도 베를로니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그 또한 그럴듯한 이야기이구나. 그나저나 쉽지 않은 전쟁이 되겠어. 마치 누군가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구나."

"저 역시요. 혹시 할아버지는 이 폴렌시아의 탄생 배경이나 아니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순점을 느끼지는 못하셨어요?"

"후, 글쎄다? 너는 이세계(異世界)에서 살아왔기에 남들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살아온 나로서는 힘이 드는구나, 아! 이걸 보겠니?"

사이클론이 건네는 낡은 책 한 권을 펼쳐본 호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이, 이건?"

"그래, 기간테스이지. 사실 이번 여행길의 최종 목적지로 알버스크 왕국을 택한 까닭은 알버스크가 신들의 전쟁이 벌어진 장소라는 전설 때문이었지. 그래서 그곳 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사가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옮겨 적어놓은 책인지 아니면 그 시대의 학자가 기술해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그림만큼은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지."

책에는 세린디아가 보유한 기간테스와 매우 흡사한 기체에 오징어를 닮은 괴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수많은 촉수로 기간테스를 마치 인형극의 인형처럼 조정하면서 인간들을 살육하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머리는 귀가 뒤로 길게 늘어난 모습에 어깨는 좁고 팔은 발까지 닿아 있는 듯했고 몸 전체는 마치 사마귀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밑에 뭐라고 적혀 있는 겁니까?"

김재덕 대령이 그림 밑에 붉은색으로 쓰인 글자를 가리켰다.

"흠, 어디보자. 파괴하라! 살육하라! 끊임없이 싸워라! 네 개의 스티그마(낙인)가 나타나 성스러운 돌과 조우할 때 피의 강이 땅을 적시리라!"

"빌어먹을! 또 그 낙인이야.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 이런 짓거리를 즐기고 있는 거야?"

"낙인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건가?"

"이제는 모두에게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구나, 호크야."

"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모두와 함께 이 일에 대해 같이 고민해야 될 것 같아요. 대령님, 궁금하시더라도 조금 참으세요. 곧 모든 것을 말씀해드릴 테니까요."

"그나저나 조금 후에 드워프 알곤 수장과 일레이드 장로들이 젊은 장인 드워프 50여 명을 보내온다고 하더구나."

"네? 아니 그 짠돌이들이 웬일로?"

"후후, 나는 자신들의 작품들이 제대로 쓰이는지 궁금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 흑색 기간테스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 귀에 들어간 모양이구나. 여하간 그들이 거든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 굳이 내칠 필요야 없지 않겠니?"

"그야 물론이지요. 한 손이라도 아쉬운 판인데요."

"그럼, 김 대령이 더 좋아하는군요."

"하하하하! 당연하지요. 그렇지 않아도 손이 부족했는데 말씀을 들으니 기운이 납니다."

"참! 이번에 오는 드워프 중에 리온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좀 특별한 친구야. 아무리 드워프라지만, 그렇게 기계에 미친 드워프는 나도 처음 봤지. 모두 알다시피 나도 학구열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에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김 대령! 그 친구가 말이지요, 기간테스 잔해를 보더니 그야말로 식음을 전폐하고 연구에 몰두하더군. 그렇게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연구하는 드워프는 처음 봤지. 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로 많은 것을 알아냈다고 하니, 도착해서 김재덕 대령이 알아낸 사실과 드워프들이 알아낸 결과들을 합치면 뭔가 좋은 결실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듭니다."

"그렇다면 정말 한시름 놓겠는데요. 어서 빨리 그들이 도착했으면 좋겠군요."

여전히 김 대령의 발음이 힘든지 김재덕 대령을 부를 때마다 어색해하는 사이클론을 보면서 언제나 받기만 하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모든 것을 다 내주는 사이클론이 너무 고마웠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거예요.'

"중령님! 그들이 오고 있답니다."

"젠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는군! 할아버지, 이 내용은 장군님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야겠어요."

도그 중대 그레이 중위의 보고에 호크는 대화를 중지해야 했다.

서둘러 옷을 챙겨서 자리를 뜨는 호크는 김재덕 대령과 사이클론을 분지의 작업장에 남겨두고 요새로 움직였다. 저녁놀이 지는 들판을 뒤로하고 몽뜨 요새로 향하는 호크가 몽뜨 요새의 크림 평야 언덕 위로 올랐다.

"세... 세상에 저렇게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정도일 줄이야!"

언덕 밑 요새로 향하는 관도에 늘어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젠장, 저 많은 인원을 어디에 수용한다?"

"요새가 발칵 뒤집어졌겠는데요.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핸들러가 서두르자 호크 역시 걸음을 서둘렀다.

"아, 안 돼요. 안 돼! 아직 아무런 명령도 받은 게 없습니다. 기다리세요."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려오자 전진 초소를 경비하고 있던 도그 중대는 죽을 맛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과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실랑이가 한바탕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도대체 어떤 멍청한 인간이 이 따위 일을 벌인 거야!"

"그 멍청한 인간 여기 있네, 소위."

"헉! 충성! 중... 중령님, 사실 그게......."

사람들을 헤치고 나오는 호크를 발견한 도그 중대 말즈 소위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랐다.

"괜찮아! 괜찮아! 나도 지금 후회하고 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자~ 내 약속은 지켰소. 이제 당신 차례요!"

짐승 가죽을 걸친 40대 중년 남자의 눈빛은 지난번 호크와 얘기 할 때의 그런 나약한 것이 아니었다. 당당하다 못해 강한 카리스마 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이 아저씨 봐라. 한 가닥 하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아예 나를 잡아먹을 기세잖아.'

"흠흠, 네. 그런데 약속을 좀 과하게 지키신 거 아닙니까?"

남자 뒤의 수많은 인파를 한 번 쳐다본 후, 호크가 어깨를 으쓱 거렸다.

"우리는 모든 것을 걸었네. 우리가 이 싸움에 끼어든 것을 안 이상, 저들은 아마도 이번 기회에 우리들의 씨를 말려버리려고 하겠지. 마지막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네."

"좋습니다. 뭐 저승길 동무가 많으니 외롭지는 않겠죠. 그나저나 아직까지 통성명도 못했네요! 전 알렉스 호크라고 합니다."

호크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가 서서히 손을 맞잡아 갔다. 호크의 손을 꽉 쥔 상대의 손을 통해 호크와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군터 드 하이델이라고 하네. 지금은 잊힌 이름이지만 예전에 늑대라는 뜻의 하울로 족(族)의 수장이지."

"반갑습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죠."

호크의 명령에 육중한 철문이 '그그긍' 소리를 내면서 길을 열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지친 발걸음을 옮겨서 요새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몰려 들어갔다.

"그레이 중위! 요새 후문을 열고 그곳 공터에 임시 주거지를 만들어야겠어. 핸들러 소령는 지하 창고에서 천막이든 뭐든 저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풀어!"

"중령님! 식량 사정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아시겠지만, 본국도 겨울인 지금이 가장 힘들 때라서 지원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들에게 나누어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어차피 행크 공작이 들이닥칠 텐데 뭘 그래?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모든 게 결판이 날 거야. 죽고 나면 식량이 무슨 소용이야, 안 그래?"

핸들러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 호크가 군터라고 자신을 소개한 세린디아의 이방인(異邦人)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요새로 들어갔다.

그러나 보급품을 나누어줄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한 핸들러의 표정은 불쌍하리만치 처량했다.

그날 저녁 요새의 내성에서는 아주 반가운 해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하하! 이게 누구십니까? 어서 오세요 자! 이리로......."

"제너럴! 반갑군요. 한 달이 몇 년은 흐른 것 같네요."

사이클론과 나형석 장군이 한 달만의 해후에 서로 반갑게 맞이했다. 호크가 자신들이 살던 세계에서의 나형석 장군의 호칭을 묻기에 생각 없이 대답한 영어 단어가 이제는 그대로 나 장군의 애칭이 되어버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형석 장군을 '제너럴'이라 부르는 모습에 뒤에 서 있던 김재덕 대령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이클론님!"

"아닙니다. 저야 뭐, 이리저리 유람한 것밖에 더 있나요. 피가 흐르는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운 여러분들이 정말 고생하셨지요."

"하하! 아닙니다, 아니에요. 어차피 전쟁이란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니까요. 더욱이 많은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모두 저의 잘못 이지요."

무겁게 입을 연 나형석 장군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사이클론이 십분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 장군의 말에 방 안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호크가 얼른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런데 장군님, 세린디아에서 사자가 다녀갔다면서요?"

사이클론의 말에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나형석 장군이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항복을 권유하러 온 거였어. 물론 우리가 누군지 살펴보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다소 어이없다는 듯 김재덕 대령이 혀를 찼다.

호크는 항복문서를 작성한 것이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응? 그거 뭐 적당히 둘러댔네. 항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이지!"

이제 그가 개입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세린디아의 주력인 모르카시의 군대가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호크가 조심스레 입을 떼자 나형석 장군이 테이블 위에 놓인 오른손에 주먹을 쥐면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진짜배기 전투가 시작되는 거지. 헌데 정보가 너무 부족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이야. 작전처에서 올라오는 내용 가지고는 작전을 짜기가 너무 힘들어. 게다가 그 괴물들, 기간테스라는 그놈들이 70여 기가 있다니, 더 있을 지도 모르고. 적은 보병, 기병에 기갑부대까지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달랑 보병만 있으니 전력 차가 너무 커!"

"허허! 장군님, 그에 대한 대답은 저기 김 대령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사이클론이 걱정하는 나형석 장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말을 건네자 모두의 시선이 김재덕 대령에게 쏠렸다.

"아... 그게 아직은 뭐, 검증이 되지 않아서, 딱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연구 결과 그 괴물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뭡니까? 성공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까?"

호크가 답답한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에 손을 짚은 채 얼굴을 붉혔다. 나형석 장군 또한 호크의 말에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는 김재덕 대령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입술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대령이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시더니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대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귀를 세웠다.

"그것은... 말입니다. 다름이 아니고... 비밀입니다."

"헉!"

쿠다당!

엉뚱한 대답에 호크는 의자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실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농......."

김재덕 대령이 뒤통수를 긁으면서 자신의 실수를 무마하려고 했지만, 나형석 장군의 떨리는 담배 파이프를 보고 난 뒤, 재빠른 동작으로 벽에 걸린 보드에 석필을 가지고 그동안의 연구 성과에 대해서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브리핑 내용을 듣고 사람들의 얼굴은 점점 밝아졌고, 반대로 호크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럼 저보고 인간 마루타가 되라는 소리입니까? 그러다 그 실험했던 몬스터 꼴이 되면 어떡하라고 그러시는 겁니까? 게다가 아직은 장가도 못 갔는데 만약에 실험이 잘못돼서 첫날밤도 못 치르게 되면, 누가 책임지실 겁니까? 네?"

"이봐, 호크 중령, 자네,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죽어갔는데, 그리고 며칠 전,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날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 장군님 그게 아니고......."

"자, 자! 다들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진정하세요. 호크, 너도 앉거라! 어서!"

사이클론이 일어나서 주위를 환기시키자 다소 흥분했던 호크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서는 얼굴을 붉힌 채 자리에 앉았다.

"자! 자! 제너럴도 화를 좀 참으시고, 이제 곧 커다란 싸움을 앞에 두고 우리끼리 자중지란을 일으키면 안 되지요, 흠... 김 대령의 방법이 다소 거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크 중령의 안전 또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요."

이 대목에서 사이클론이 호크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사실 이 방법에 관해서 김 대령과 수차례 의논했는데, 다행히도 이번 여행길에서 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사이클론이 손가락을 튕기자 밖에 대기하던 루브카가 조그만 나무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이번 사이클론의 여행길을 수행했던 루브카가 상자를 열자 얇은 은사로 만들어진 옷이 그의 손에 펼쳐졌다.

당사자인 호크의 시선이 그 옷으로 쏠린 것은 당연했다.

"이번 작전 때문에 들른 알버스크 왕국에서 구한 '영혼의 갑옷' 입니다. 바로 이번 실험에서 우리 호크 중령의 안전을 책임질 마법 아이템이죠. 소문으로는 드래곤의 비늘로 만들었다는 말도 있으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소드마스터의 오러도 막아낼 수 있는 강화성에 7써클의 공격 마법도 막아낼 수 있는 절대 방어아이템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허허! 어떻게 그렇게 귀한 것을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힘든 일을 맡겨서 면목이 없었는데, 이렇게 폐를 끼칩니다."

나 장군과 사이클론이 죽이 맞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호크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보니, 말인즉, 네들이 잘하면 우리가 왜 이 고생이냐, 그런 뜻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그렇다고 대들 수도 없고 이래저래 열 받는 호크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서 당번 하사가 들어왔다.

당번 하사가 호크에게 귓속말을 건네자, 호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뭔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구실을 찾고 있던 그에게 희소식이었다.

"장군님! 지난번 말씀드렸던 그들의 대표 구성이 끝나고 장군님과의 만남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나보시겠습니까?"

"그들?"

"네. 세린디아의 버림받은 혈족들......."

"아, 그렇군. 그런데 왜?"

"아마도 최고사령관의 확답을 듣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좋아! 만나보지. 지금이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니까 말이야!"

답답했던 방 안 분위기가 기간테스에 대항할 방법에 대한 해결점이 보인 것과 세린디아에서 버려진 이방인(異邦人)들의 합류로 밝아졌다. 기대감을 가지고 방 안을 나서는 나형석 장군과 호크의 얼굴도 무척이나 상기되었다.

* * *

"공작님, 몽뜨에 갔던 요한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어서 들여보내게."

"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인이 나가자 곧이어 기사들과 몽뜨에 사신으로 갔던 거대한 비곗덩어리 요한이 그 살들을 출렁거리면서 행크 공작 앞에 엎드렸다.

"위대하신 세린디의 태양이......."

"그만! 그따위 인사치레는 됐다. 그래, 갔던 일은 어찌되었나?"

"네. 공작님, 그들의 수장을 만나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답신 또한 가져왔습니다."

요한이 거의 없는 목을 돌려 고갯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어린 남자 하인이 봉인된 문서를 은쟁반에 올린 채, 행크 공작에게 바쳤다. 봉인을 뜯고 문서를 펼친 행크 공작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요한이 곁눈질로 행크 공작을 훔쳐보고 있다가, 공작의 행동을 보고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로 살아온 40평생이었다. 죽음의 위기를 느낀 요한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 거짓을 이야기해야 자신이 살 수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몽뜨에서 보고 들은 것과는 다른 내용을 이야기 해야만 했다.

"공작 각하! 너무 심려하실 바는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들의 병사들은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 기사들 또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수장이라는 자는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습니다. 모르카시에 있는 저희 기사들만 가더라도 그들은 꽁지 빠지게 도망갈 것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승리는 저희 것입니다."

"그래,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싸늘한 공작의 대꾸에 거대한 요한의 거구가 흠칫거렸다. 오랜 세월 정치로 살아온 그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것이... 또... 윽!"

행크 공작이 던진 봉서에 얻어맞은 요한이 신음을 토했다.

"네가 직접 읽어 보라. 그것이 과연 두려움에 떠는 적장의 대답인지 말이다!"

호흡을 제대로 못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요한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문서를 펼쳐보았다.

<미쳤냐? 너나 해라!>

문서에는 달랑 그 한마디만 쓰여 있었다.

"이... 이... 미친놈들......."

"휴, 도대체 어디서 온 놈들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도 아니고 정체를 알 수가 없구나. 어쩔 수 없지.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고 여왕님도 확고하게 명령하셨으니 몽뜨에 가서 놈들을 쓸어버리는 수밖에......."

잠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요한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던 행크 공작이 문밖에 대고 소리쳤다.

"비상회의를 소집해라. 단장급 이상과 귀족들에게 모두 연락해! 이제 전쟁이다. 케린버그를 치기 전에 좋은 연습 상대가 되겠어."

두 주먹을 꽉 진 행크 공작이 전의를 불태우는 동안 바닥에 엎어진 요한은 살아남을 구멍을 찾기에 급급했다.

그런 그에게 벼락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공... 공작님! 중요한 정보가 있습니다."

"뭐냐? 그것이."

"그것은 다름 아니옵고 그들에게는 마법사들이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매우 지쳐 있었고 부상자들이 상당수에 달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목숨을 걸고 그들을 정탐한 결과이므로 확실한 것입니다."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행크 공작은 혀를 차면서 요한을 돌려보냈다. 솔직히 그 자리에서 목을 칠까도 생각했지만, 살다보면 정치를 하는데 있어 저런 자도 요긴한 법이었다.

요한 때문에 끊긴 생각을 이어가던 행크 공작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 나갔다. 몽뜨를 치기 위한 전략회의실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그 시각 몽뜨의 요새 지하회의실에 일단의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지하실에는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 호크 중령, 사이클론 그리고 세린디아의 평원을 떠돌아다니던 수많은 혈족들의 대표들이 자리에 함께했다.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지켜보던 침묵을 짐승 가죽을 덮어쓴 군터가 입을 여는 것으로 역사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분명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땅으로 만들겠다고 했소?"

나 장군이 잠시 호크를 바라보자 호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장군도 대충 이야기를 들었지만, 오늘 막상 직접 얼굴을 대하고 보니 그들이 겪은 고통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흠... 적어도 이 추운 겨울, 애들을 밖에서 재우지 않는 곳은 되겠죠."

대답을 한 나형석 장군이 파이프 담뱃재를 털어 낸 뒤 테이블 위에 파이프를 올려놓고 말을 계속했다.

"제가 어릴 때 말입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있습니다. 참고로 저희 할아버지는 두 다리를 잃어버리셨죠. 전쟁 중에요... 그런데 제가 마당에서 흙투성이가 되어서 놀다가 부모님과 나누시던 할아버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제 아버님께서 '아버지, 전쟁 중에 다리를 잃은 것이 후회되지 않으세요?'라고 물으시자, '저애를 보렴. 저렇게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데, 내가 보탬이 됐다니 여한이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

뭐! 제가 더 약속드릴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저희는 지금의 세린디아처럼 피부색이나 인종 문제로 아니, 혈족이 어떻다니, 아마리아족이 어쩌고 하는 짓은 하지 않습니다. 같은 붉은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같은 땅을 살아가는 동료로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형석 장군은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안도 침묵에 빠져들었다.

맨 뒤에서 별 표시가 찍힌 하얀 옷을 입고 있던 노인의 쉬어 갈라진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렸다.

"후후, 내 평생 들어본 말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말이로군. 나 또한 동감일세. 내 아이들이 짐승들의 음식쓰레기를 뒤지지 않고 추운 겨울 난롯가에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내 이 한목숨 기꺼이 내놓지, 우리 호안족은 그렇게 결정했네."

노인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손을 든 노인의 행동에 모두 조용해졌다.

"늙은이의 말을 좀 더 들어주게나! 나는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하네. 더 이상은 말이야. 우리야 개처럼, 돼지처럼 살아도 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미래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우리 힘만으로는 힘들겠지만,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으니 한번쯤 모험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자네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난 저들의 말을 믿어보고 싶어. 적어도 아마리아인들 보다야 나쁘지는 않겠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 앉은 채 두 눈을 감아버린 노인을 쳐다보던 다른 혈족들의 수장들이 서로 의논한 끝에 외인부대에 모든 협조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무려 50만이란 숫자가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형석 장군이 호크를 향해서 돌아서면서 미소 지었다.

"이로써 승률이 60%가 되었군. 그렇다면 자네가 기간테스에 대한 실험에서 좋은 결과만 내어준다면 사이클론님의 합류와 더불어 8할의 우세를 점칠 수 있겠어."

나 장군의 뜨거운 시선을 받은 호크는 어색한 미소로 화답했다.

'젠장! 나보고 어쩌라고... 나도 애쓰고 있다고요.'

그러나 그것은 속마음뿐이었고,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달랐다.

"넵! 알겠습니다. 장군님! 반드시 그 해답을 찾겠습니다. 충성!"

까라면 까야 한다는 것이 군대 아니던가. 그렇게 대답한 호크는 축 늘어진 어깨로 성벽을 내려와야만 했다.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는 나 장군의 머릿속에는 다가올 전투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는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 몽뜨 요새 분지 기간테스 작업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젠장! 이 옷이 안전하다고 사이클론 영감이 장담했지만,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네. 약한 모습 보이지 말자! 애들도 다 보고 있는데 쪽팔린다, 호크야.......'

늘 당당하고 겁을 모르던 호크이지만, 막상 실험대상이 되니 여간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번 실험을 연구하고 총지휘하는 김재덕 대령이 실험 직전에 호크에게 던진 말이 더욱 불안에 떨게 했다.

"대령님... 괜찮은 거죠?"

"글쎄, 이론상으로는 확실한데 말이야. 이렇게 대상이 크고 용량이 많아지면 장담을 못하겠는데, 부족하면 모르지만, 만약에 약품 양이 좀 많다면 뭐, 펑! 하고 날아가기밖에 더하겠어?"

"아... 네, 펑하고 날아간다고요, 하! 하! 하!"

'이런 미친 소리를 저렇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하다니. 저 사람도 앞으로 요주의 인물이군. 휴! 캐더린, 날 위해 기도해줘. 내가 믿을 건 오직 그대밖에 없나 봐.'

호크의 애절한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분지에는 수많은 부대원들과 사이클론, 김재덕 대령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마 핸들러만 다소 걱정스런 표정으로 처진 어깨를 끌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는 호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호크가 엥귀오스 앞에서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곧 결심이 선 듯, 엥귀오스 앞으로 걸어갔다.

기계공학도인 김재덕 대령의 두 눈은 탐구욕으로 번들거렸다. 그 모습은 탐구심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이클론마저 온몸에 소름 끼치게 만들 정도였다.

호크가 기간테스에게 가까이 다가가 손을 대자 무릎을 꿇고 나더니 흉부의 두터운 갑옷이 열리면서 내부가 드러났고 몸을 안으로 던진 호크를 집어삼켰다.

잠시 후, 엥귀오스의 두 눈에서 파란 광채가 빛을 뿜었고, 요란한 기계음을 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적응이 잘 안되네. 으... 윽 이놈의 케이블들이 그렇게 마나를 처먹고 아직도 모자른가... 또 마나를 뺏어가네. 후우욱! 당황하지 말고 태극심법(太極心法)을 운기하자. 호흡은 짧게. 그러나 깊게 가라앉히고, 전신의 기운을 단전으로, 후우~'

호크의 모든 힘이 엥귀오스와 연결된 촉수처럼 생긴 케이블로 빠져 나간다고 생각했다. 파리해졌던 안색이 태극심법을 운기하자 한결 혈색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졌던 전면의 디스플레이 창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심신이 안정되자 비행기 콕피트 내부와 비슷한 실내를 다시 한 번 천천히 훑어보았다. 여전히 검은색 피부막 같은 것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고, 그곳을 통해서 수많은 촉수들이 호크와 연결되었다. 그것들을 통해서 호크는 외부의 상황과 엥귀오스의 움직임을 제어 할 수 있었다.

그날 호크의 대뇌로 주입된 엥귀오스의 매뉴얼이 다시금 호크의 머릿속을 채어왔다. 그대로 촉수와 연결된 신경을 통해서 동작을 명령하자 엥귀오스의 거대한 몸체가 대지를 울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에 따라 호크의 시선도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제는 앞뒤로 기울거나, 좌우로 몸체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그 며칠, 연습한 것이 꽤나 효과가 있었다.

김재덕 대령은 파손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기간테스만을 보아 오다가 실제로 동작이 가능한 실물을 보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래, 맞았어!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움직임이야. 아! 저렇게까지. 아! 그렇군. 저기는 저렇게......."

김재덕 대령이 정신없이 엥귀오스에 빠져들자 그의 어깨를 말없이 꽉 잡은 사이클론 덕택에 그를 현실세계로 데려올 수 있었다.

"흠흠, 잠시 제가 또 추태를 부렸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기계만 보면 잠시 정신이 빠지는 경향이 있어서."

"허허허~ 괜찮소. 학구심이 불타는 것은 아주 고무적인 현상이요. 그나저나 양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글쎄요. 저도 실험실에서 소량으로 해보았지만,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많은 양을 실험하기는 처음이어서 제작한 것의 1/100 정도만 준비했습니다. 과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을지 저도 기대되네요."

"그래요? 그나저나 호크가 위험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무리 드래곤의 갑옷을 입혔다고는 하지만 실험은 실험이니까요."

"네. 사람도 다치지 말고 실험도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에게는 시간도 물자도 전부 부족한 처지이니까요."

"대령님! 깃발이 올랐습니다."

전방을 살피던 부관의 외침에 실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들이 끌고 온 이상한 수레에 집중되었다. 호크가 탑승한 엥귀오스 앞에 수레를 놓고 모두가 뒤로 물러났다. 폴렌시아의 겨울, 윈터러의 차가운 북서풍이 분지에 몰아치자 수레 앞에 선 호크의 기분은 착 가라앉았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쉰 호크의 귀에 김재덕 대령의 통신이 들어왔다.

삐익!

"이봐, 중령! 마음의 준비는 됐나? 뭐, 마지막으로 남길 말 같은 거 없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김재덕 대령의 질문에 호크의 눈썹이 점점 치켜져 올라갔다.

그때 갑자기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통신기의 목소리 주인이 바뀌었다.

"허허허! 호크야, 걱정 말고 실험에 응해라! 드래곤의 갑옷은 틀림없이 네 몸을 무사하게 보호해줄 테니 말이야, 자! 이제 시작할 테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탈출해라! 알았지."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면서 즉시 탈출하라는 소리는 무엇인지, 어쨌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인 걸 어찌하겠는가? 곳곳에서 호각소리가 울리고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엥귀오스 앞에 놓인 짐수레의 천막이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저게 뭘까?' 하면서 지켜보던 호크의 궁금증이 커지려는 순간!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엥귀오스의 주변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소리도 없었고 물리적 충격도 없었다.

들판 언덕 위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사람들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당당히 서 있는 검은색 기간테스 엥귀오스의 모습뿐이었다. 수레는 완전히 분해돼서 주위에 그 파편만이 흩어져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김재덕 대령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는 다 갈라져서 듣는 사람의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실패인가?"

이를 악물은 김 대령이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고 생각하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클론 역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김재덕 대령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김 대령... 너무 실망하지 말게. 생각만큼은 아주 좋았......."

"저길 보십시오! 변화가 있습니다."

한 병사가 가리키는 손끝을 사람들의 시선이 좇아가니, 그 어떤 일에도 변화가 없을 것처럼 당당히 서 있던 엥귀오스의 가슴 흉갑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뛰어내렸다. 바로 호크 중령이었다.

수많은 부대원들과 핸들러 사이클론, 실험의 총책임자 김재덕 대령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그래, 어땠어? 아무 느낌이나 변화가 없었나? 응? 말해보게."

김재덕 대령의 재촉에 호크는 그저 말없이 김 대령을 쳐다보다가 씨익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 올렸다. 뜻밖의 행동에 모두가 놀랬지만, 다음 순간 더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호크 중령의 코에서 빨간 피가 두 줄기 흘러내렸다.

곧이어.......

"우웨엑! 우욱!"

다양한 내용물들이 호크의 뱃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자신들의 옷에 튈까 봐 황급히 물러섰다. 그 바람에 힘없이 서 있던 호크의 몸이 차디찬 들판에 넘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호크를 일으켜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핸들러마저 고개를 돌린 채 외면하고 있었다.

불쌍한 호크 중령.......

"크하하하하! 대령님, 성공입니다!"

쓰러진 호크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사이, 공방의 드워프들은 엥귀오스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응? 성공이라니?"

사이클론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던 드워프 리온과 이번에 합류한 새로운 드워프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기뻐하고 있었다.

김재덕 대령이 참지 못하고 사다리를 타고 엥귀오스에 오른 뒤, 리온과 몇 마디를 나누고 내부를 살폈다.

"부관! 장군님께 전해라. 실험은 대성공이라고 말이야, 하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효과가 대단하군요."

"예, 그렇다마다요! 이제 우리에게도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짓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두 손을 꽉 맞잡은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 일족 최고의 장인 리온의 외침에 주위를 둘러싼 부대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모두가 작은 희망에 들떠서 웃고 있을 때, 이들이 잊은 것은 무엇일까?

자신들이 고개를 젖히면서 크게 웃을 때, 그 아래 차디찬 바닥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던 호크가 정신만은 멀쩡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모두들 이렇게 웃고 있지는 못했을 거다.

아무튼 호크의 기억 속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여전히 등을 들썩거리면서 오늘 아침에 먹은 것들을 확인하고 있는 호크 중령이었다.

* * *

"공작님! 이제 곧 다스커스 강입니다."

"그렇군. 생각보다 많이 늦어졌어. 이러다 눈이라도 오면 곤란한데 말이야! 좀 더 속도를 내라고 하게."

"넵, 공작님. 그러나 기간테스의 이동속도에 맞추다 보니 좀 더뎌지고 있습니다."

"흠, 벨레데레스의 눈물로 장시간 운용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대신에 마법소환이 불가능해져서 이렇게 도보로 이동해야만 하는 것이 통탄할 노릇이구먼!"

"그렇습니다. 공작님, 너무 무리하면 기간테스에 탑승한 그린로즈 기사들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머리를 조아리는 그린로즈 기사단장 스탈리안을 보면서 행크 공작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게 왜 자네 잘못인가?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 아직도 고대문자를 해독하지 못한 탓이야. 후, 로베니아와 일전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마지막 장을 풀이해야 하는데 말이야."

행크 공작의 두 눈이 저 멀리 보이는 세린디아의 젖줄 다스커스 강줄기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그 뒤로 수없이 많은 대군이 꼬리를 물고 강을 건너기 위해 행군하고 있었다.

"가지, 스탈리안. 그 문제보다 우선 발등의 불부터 끄고 봐야지 않겠나? 몽뜨에 자리 잡고, 우리 목을 조르고 있는 그 도적떼들부터 처리해야 해."

"네, 공작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저희 전력은 최강입니다. 모두 자신감에 불타고 있으니 당장 로베니아로 쳐들어간다 한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하하하! 그래. 이보게, 스탈리안, 자네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는 것을 아나? 그래. 우리는 반... 응? 뭐지? 저것들은?"

행크 공작의 시선을 따라가던 스탈리안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이방인(異邦人)들입니다, 공작님!"

"이방인(異邦人)? 아니, 아직도 저것들의 씨가 마르지 않았나?"

이제는 행크 공작의 얼굴마저 잔뜩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것이 저렇게 들판을 떠돌아다니면서도 좀체 줄어들 기미가 없습니다, 공작님!"

"쯧쯧, 쥐새끼들하고 똑같군. 잡아 죽이고 죽여도 끝이 없는 것이 말이야."

못마땅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행크 공작과 동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스탈리안 단장이 말고삐를 돌려 다스커스 강을 도하(渡河)하는 군사들 속으로 사라졌다.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세린디아의 주력 부대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다스커스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윈터러의 차가운 겨울바람이 다스커스 강 위를 건너는 세린디아 병사들에게 매섭게 몰아쳤다.

앞으로 다가올 잔인한 미래를 예견하듯이.......

멀리서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던 떠돌이들의 두 눈이 빛났다.

"몽뜨에 전해라. 모르카시의 병력이 다스커스 강을 건넜다고 말이야. 군사들 수와 무기 등을 상세하게 알려줘. 그리고 너는 어서 가서 호스메스 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이제부터는 그들 몫이야. 저들은 어디를 가도 우리들 눈에서 벗어나지 못해!"

차가운 겨울 강바람에도 이들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고 세린디아 병력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가자. 이제 더 이상 저들의 음식 쓰레기를 뒤지는 일이 없겠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든지 죽든지 간에......!"

이를 가는 사내의 말을 끝으로 언덕 위의 무리들도 자취를 감췄다.

"장군님! 적의 주력부대가 다스커스 강을 도하했다는 보고입니다."

"좋아! 모든 변동사항은 놓치지 말고 상황판에 표시해라. 작은 정보 하나가 수많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다."

세린디아의 버려진 혈족, 이른바 이방인(異邦人)들로부터 모르카시를 떠난 행크 공작의 일거수일투족이 이곳 상황실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몽뜨의 야전상황실의 중앙에 만들어진 모형 축소판 지도를 쳐다보고 있는 나형석 장군의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한 오퍼레이터가 밀대로 한 지점에 있던 모형을 몽뜨를 향해 움직였다.

"뭔가?"

"넵! 장군님. 머스토란 지역에서 수상한 무리들이 몽뜨를 향해서 움직였다는 보고입니다."

"수상한? 뭐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런 엉성한 보고를 하는 것인가! 어서 빨리 정체를 파악해. 우리는 지금 세린디아의 모기 한 마리의 이동도 파악해야 한다. 알았나!"

"죄송합니다, 장군님!"

장군의 호통에 얼굴이 상기된 오퍼레이터는 황급히 자신의 손에 들린 문서를 들고 뛰어 나갔다.

"너무 긴장하신 것 같습니다. 장군님! 여유를 좀 가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유? 그런 사치스런 말을 하다니, 대위에서 대령으로 진급하더니 자네야말로 너무 여유를 부리는 거 아닌가? 지난번 전투에서 전사한 부대원들의 죽음이 바로 그 여유에서 비롯됐다는 거 아나? 중세시대 수준이라고 얕보았다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아까운 병사들을 잃었어. 이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앞으로 내게 여유란 없네. 그건 자네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야. 이제 자네도 점점 그 계급의 무게를 느끼게 될 테지. 이제는 비서관 시절의 습관은 버리는 게 좋아.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야. 그 여유는 우리가 살아남고 난 후에 이야기하지."

"네... 장군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알면 됐네. 그나저나 괴물들을 상대할 준비는 잘 되어가나?"

장군의 물음에 다소 의기소침해졌던 김재덕 대령의 얼굴이 밝아졌다.

"넵! 장군님, 호크 중령의 협조로 실험결과가 아주 만족스럽게 나왔습니다. 준비할 수 있는 재료가 한정되어 있어서 더 많은 실험은 할 수가 없었지만, 효과는 확실히 입증되었습니다. 적들에게는 더 치명적인 충격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예상? 예상 가지고는 부족하네. 확실한 결과가 필요해! 제2, 제 3의 복안을 마련해보게. 적들이 다스커스 강을 건넜으니. 이제 채 5일도 남지 않았어. 빌어먹을, 시간이, 시간이 너무 부족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황실의 병사들을 2층에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시시각각 전쟁의 그림자가 몽뜨를 향해서 드리워지고 있었다.

- 케린버그 수도 로이든 -

"음... 그래. 음... 그렇지."

"네. 그것 또한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전하! 헤이스트 케론스 공작 각하입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실내에 있던 인물들이 크게 당황했다.

"크흡, 들... 들라 해라!"

다소 놀란 목소리가 대전을 울리면서 시종들이 커다란 문을 열었고, 그 문을 통해 케린버그의 영원한 숙적이 들어왔다.

"케린버그의 영명한 통치자 찰스 국왕을 뵈옵니다."

퉁명스런 목소리만큼이나 뻣뻣한 케론스 공작의 형식적인 인사에도 찰스 국왕은 이전과는 다르게 전혀 불쾌한 내색을 하지 않고 반갑게 맞이했다. 오히려 그것이 케론스 공작의 의심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하하하! 어서 오시오, 공작. 그렇지 않아도 요즘 왜 이리 적조하셨소?"

'어렵소, 뭐야? 이 반응은.'

뜻밖의 반응에 케론스 공작의 사갈 같은 두 눈이 번뜩이면서 좌중의 인물들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머스탱 공작, 헬렌 백작 모두 자신과 두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거나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이것 봐라. 분명 뭐가 있는데. 제길, 그동안 쥬(Ju)의 스티그마(낙인)와 레센의 그림자 기사단을 상대하느라 너무 방심했어. 안 되겠군. 당장에라도 감시를 붙여야겠어.'

서로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연극을 하는 사람들의 어색한 연기도 형식적인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끝맺었다.

몸을 돌려 나가려던 케론스 공작이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탄성을 지르고 몸을 돌려 세우면서 입을 열었다.

"국왕 전하, 황망하옵게도 위대한 로베니아의 발렝 황제 페하께서 약조하신 곡물을 보내셨다고 합니다. 한 달 후면 도착할 예정이니, 저희도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케론스 공작의 이 한마디에 억지웃음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반면 의기양양해진 케론스 공작만 어깨를 펴고 대전을 빠져 나갔다.

"저, 저런 씹어 먹어도 모자를 놈 같으니라고."

"전하, 저런 역적을 눈앞에 두고도 어쩌지 못하는 소신들을 벌하여 주소서!"

"후후! 아닐세. 이까짓 모욕이야 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네. 내 백성들이 배부를 수만 있다면 말이야. 그건 그렇고, 정말 이번 윈터러의 계절을 보낼 식량 사정은 어떠한가?"

국왕의 질문에 재상인 헬렌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저의 부족한 능력 때문에 올해도 아주 열악하옵니다. 모든 것은 소신이 무능한 탓이옵니다."

"아니야. 그게 어째서 헬렌 경 탓이란 말인가. 이 척박한 땅덩어리 때문이지. 그나저나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이라도 잘 먹여야 할 텐데, 이거 참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에게 배불리 먹이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국왕 전하. 다행히도 몽뜨 요새는 세린디아의 보급기지였기에 당분간 버틸 식량이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리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그래요. 후! 정말이지. 힘들구먼, 힘들어. 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았소.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거요?"

"황공하옵니다. 전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호크 경의 그 물건이 조금 있으면 수확이 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추운 윈터러에 많은 백성들이 배를 덜 곯게 될 것입니다."

"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이야. 빌어먹을, 언제쯤이나 저 로베니아에게 손을 벌리게 되지 않을까?"

"곧입니다, 곧! 전하."

"그래. 어서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 그건 그렇고 케론스 저작자가 눈치 채지 않았을까?"

"뭔가 이상한 낌새는 느꼈겠지만, 저희가 조심한다면야 더 이상 캐낼 것이 없을 겁니다."

머스탱 공작이 힘주어 말하자 찰스 국왕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래.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지.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고 하지 않았는가? 당분간 우리끼리 회의도 조심해야겠어. 세린디아로의 모든 통신과 이동은 이중, 삼중으로 점검하게. 정말이지, 아슬아슬한 얼음판이로구먼."

국왕의 한숨 섞인 한탄에 헬렌 백작이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저, 전하!"

"아닐세. 아냐! 이거 왕이 되어서 매일 매일 죽는 소리나 하지 않으면 신하들에게 매일 우는 모습만 보이는군. 이래가지고서 무슨 왕이라고......."

"전하! 어찌 그리 나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지난 날, 디안 요새의 성벽 위에서 목숨을 내던지고 싸우신 모습이 바로 진정한 왕으로서의 모습이십니다. 게다가 백성들의 배를 불리고자 이렇게 치욕스런 모욕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국왕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전하께서야말로 이 폴렌시아의 위대한 성군이십니다."

"하하하! 헬렌 경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말이라도 고맙네. 고마워!"

그러나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던 찰스 국왕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이제 곧 세린디아의 주력과 마주할 테지."

"네. 전하, 적들이 다스커스 강을 건넜다고 하니, 수일 내 조우하게 될 것입니다."

"쥬(Ju)의 가호가 그들과 함께하길 비는 수밖에!"

찰스 국왕이 간절한 마음을 말하자 헬렌 백작과 머스탱 공작 또한 같은 마음이었다.

"쥬(Ju)의 가호가 함께하길!"

찰스 국왕의 작지만, 힘 있는 말에 헬렌 백작과 머스탱 공작도 힘껏 외쳤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을 알기라도 하는지, 그늘 속에 숨었던 태양이 그 밝은 빛으로 대전 안을 비췄다.

- 알버스크 왕국 국경 인접 마을 -

"베른하트 단장님께 연락을 넣어라. 물건 확보 후, 곧 둥지로 돌아간다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들 중 얼굴에 길게 검상이 나 있는 남자가 작은 나무상자를 소중히 품에 갈무리한 후, 자리를 떴다. 그 뒤로 이십여 명의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바닥이 들썩이고 흙이 일어섰다. 가죽 부대 위로 흙을 쌓아놓고 숨을 죽인 채 숨어있던 자들이었다.

"나는 저들을 계속 감시할 것이니, 너는 로이든의 케론스 공작님에게 레센의 개들이 산맥을 넘을 것 같다고 전해라. 물건은 그들 수중에 있으니 지원 병력도 필요하다고 말이야. 저 상자 속의 물건은 우리가 찾던 물건이 틀림없어!"

말을 끝냄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신형이 사라졌다.

케린버그를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케린버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잉글햄이 되겠지만, 그렇게 두 무리가 서로 쫓고 쫓기고 있을 때, 많이 지친 듯한 옷차림을 한 30여 명의 인물들도 세린디아의 머스토란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써서 정체를 알기 힘들었지만, 로브 사이사이로 보이는 은빛 검과 중간에 은빛 머릿결을 드러내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샹그릴라의 성기사단장 베르트니였다. 오랜 여행에서 지친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쉴 사이가 없는 듯 부지런히 고삐를 당겼다.

삐이익~

"3조입니다. 예의 무리들이 저희 앞을 통과했습니다. 정확한 수는 38명. 이제 곧 소위님 앞을 지나갈 것입니다. 이상!"

"수고했다. 신속하게 본대로 철수해라. 지금부터 우리가 맡는다. 교신 끝!"

마나통신기를 내려놓은 이지 중대 3소대의 루크 신임소대장이 휘파람을 불자 소대원들이 모여들었다. 계곡을 살피면서 일일이 위치를 지정해준 뒤, 뒤를 잠시 돌아본 루크 소위 역시 몸을 숨겼다.

말발굽 소리가 계곡 안을 울리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일렬로 줄지어 계곡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이 계곡을 넘어가면 곧 바로 몽뜨 요새다. 분명히 케린버그 쪽에서 넘어오는 국경은 봉쇄되었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들 때문에 지금 사령부 상황실이 발칵 뒤집어져서 이렇게 이지 중대가 급파된 것이었다.

임무는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 루크 소위는 자신의 스패로우 방아쇠에 검지를 가져갔다.

'아버지, 제게 힘을 주세요! 머스탱 가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

루크 머스탱.

소위 바로 루이 머스탱 공작의 아들이었다. 지난날 디안 훈련소 시절, 호크의 눈에 띈 이후로 작전처 보직이 취소되고 전선에 그것도 제일선 선봉부대로 전입되었다.

이것은 영광스럽게도(?) 호크 중령이 직접 내린 인사 명령이었다. 루크는 자신의 뛰어난 작전 수행 능력 때문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만일 아버지 머스탱 공작과 호크 중령 사이에 사소한 감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그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되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임무를 받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첫 실전에 투입된 긴장감으로 그의 심장은 터질듯이 뛰고 있었다.

선임하사 피터 상사의 수신호를 시작으로 소대원들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소대원들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고, 루크의 스패로우 가늠좌에도 로브를 뒤집어쓴 무리들 중 한명이 들어와 있었다. 루크의 오른손이 휙~ 하니 올라왔다.

투두둥!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나면서 수십 발의 금속화살이 말들이 달리고 있는 앞쪽 땅속으로 박혀 들어갔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고 날뛰자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나 평소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듯 금세 안정을 회복하고 말에서 뛰어내려 말 뒤로 몸을 숨긴 뒤에 검들을 꺼내들었다. 상황을 유리하게 선점했다고 판단한 루크 소위가 소리를 질렀다.

"소속을 밝혀라! 이곳은 지금 금지 구역이다.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그만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느닷없는 화살 공격과 난데없는 질문을 받았지만, 상대는 침착하게 반응했다. 무리 중 맨 앞에 있던 자가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로브의 후드를 벗었다. 그것을 신호로 다른 사람들도 로브의 후드를 벗기 시작했다.

"응? 저 사람들은... 젠장! 어떻게 된 거야, 도대체? 무전병! 중대본부에 연락해! 목표물을 확보했다고, 어서!"

루크 소위의 명령에 무전병이 급히 마나통신기를 작동시켰다.

루크 소위가 스패로우를 여전히 겨냥한 채 엄폐해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허허허! 쥬(Ju)의 종이 이 땅 어디든 못가겠소? 그나저나 당신들은 누구지? 이곳 세린디아 사람들은 아닌 거 같은데?"

"나한테는 그걸 말해줄 권한이 없소.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우리를 따라오시오. 지금 당신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은 말해줄 수 있소."

"소대장님! 목표물의 신원을 파악했냐고 물어보는데요?"

"보고도 몰라? 샹그릴라 성기사단으로 판단된다고 보고해! 젠장,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잖아."

내심 적들과의 조우를 기대했던 루크는 일이 다소 김빠지게 되자 짜증을 냈다.

소대 선임하사 피터 상사가 다부진 몸을 흔들면서 루크에게 다가왔다.

"목표는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중대로 이동한다. 서둘러! 휴~ 어쨌든 피해 없이 작전 성공인가?"

계곡 밑으로 내려간 루크는 로브를 벗어서 온통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은빛 갑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자 더 인상을 썼다.

"로브를 다시 걸치는 것이 좋겠소. 눈들이 많으니까 말이요. 서둘러서 우리를 따라오시오. 서툰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피차 좋을 거요. 괜한 짓 하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루크는 일행의 선두로 뛰어갔다.

계곡 속에 숨어 있던 소대원들이 모두 나타나서 그들을 포위한 후, 이동하기 시작했다. 깃털 부분이 땅속까지 파고 들어가는 화살의 위력을 맛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다. 좀 전에 루크에게 대답했던 사내, 또 하나의 소드마스터 샹그릴라의 베르트니 때문이었다.

"알았소. 조심해서 따르지요."

성기사단장 베르트니는 화가 난 기사단원들을 눈짓으로 제지했다. 대륙 어디를 가든지 항상 존중을 받아왔던 그들이 이렇게 무례한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연륜이 많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니는 천천히 말을 몰면서 자신들을 경계하고 이동하는 낯선 군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하는 자신이었지만, 얼룩무늬 군복에 특이한 석궁. 게다가 저 괴상하게 생긴 투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얼굴들도 모두 위장해서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시커먼 얼굴 속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이 그들이 보통사람은 아니라는 것만 말해주고 있었다.

"중대 본부입니다!"

선두 척후병의 외침에 루크 소위가 말머리를 돌렸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다른 사람이 신병인수를 할 것입니다. 그럼!"

루크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소대원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뒤를 이어 건장해 보이는 사각턱의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모두 반갑습니다. 말에서 내리신 다음, 저기 보이는 천막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누군가 한 분은 신분 확인을 위해서 저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이... 이것들이 정말!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냐!"

성기사 단원 중 한 명이 기어이 분을 참지 못하고 성을 냈다.

"그만!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나? 분명히 자중하라고 일렀을 텐데!"

베르트니의 낮은 호통에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소드마스터의 기운이 주변의 공기를 바꾼 것이다.

'웃! 대단한 실력자인데, 저 정도 실력자라면 혹시 베르트니 성기단장인가?'

"하하하! 기분들을 상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도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라서 이해해주시지요. 그럼, 저와 함께 가실까요? 베르트니 단장님?"

사각턱을 가진 사내가 여전히 곱살스런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건네자 베르트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누군지 아는데도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뭔가 대단한 배경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내 역시 별다른 대답이 없는 상대방의 반응에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수풀을 덮어놓은 듯 주변과 구별이 잘 가지 않는 천막 안으로 베르트니와 사각턱을 가진 사내가 들어서자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이 부동자세로 멈췄다.

"중대 차렷!"

"아! 쉬어. 무전병, 사령부와 연결하게. 샹그릴라의 베르트니 단장님을 확인해야겠어."

이지 중대장의 말에 중대 본부 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베르트니에게 향했다.

샹그릴라의 전설적인 검신 베르트니 성기사단장, 혈혈단신으로 수없이 많은 신화를 써낸 불멸의 명장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옛날 얘기로 들어온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보니 한 번씩 눈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대장님! 연결됐습니다."

"그래. 자, 이리로......."

베르트니가 의자에 앉자 천막 안의 누군가가 유리 상자를 그 앞에 가져다놓았다.

잠시 후, 그 상자로 마나가 가득 모여 드는 것을 느낀 베르트니가 깜짝 놀라 사각턱의 사내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놀라실 것 없습니다. 그냥 마법통신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말하는 사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쉽게 말했지만, 베르트니 입장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개의 통신구는 흐릿한 화면으로 의사전달이나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물건은 마치 눈앞에서 마주대하고 있는 것 같이 선명하고, 더군다나 저쪽 방인지 어떤 곳인지 모르겠지만, 그곳 풍경도 아주 실감나게 비춰지고 있었다.

"안녕한가? 친구! 이제는 많이 늙었구먼. 그래."

"아니? 자네는... 자네가 거기 왜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 자들도......."

"하하하하!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고 그 사람들의 지시를 잘 따르게. 그럼 곧 보게 될 거야."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귀마개 비슷한 물건에 대고 잠시 이야기를 하던 남자가 잠시 후, 사뭇 달라진 태도로 베르트니 일행을 산등성이 너머로 안내했다. 그곳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20여 명의 군인들과 합류한 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저녁놀이 질 때가 될 무렵, 겨울의 황량한 평야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요새가 눈에 들어왔다.

"후우~ 이곳이 몽뜨인가?"

"네, 그렇습니다. 모든 궁금증은 저곳에 가시면 풀리실 겁니다. 곧 해가 집니다. 서두르시죠. 이럇!"

안내하는 군인들을 선두로 샹그릴라의 기사단들도 말을 재촉했다.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폭풍 전야의 고요 속에서 잠자던 몽뜨 요새의 평화를 깨뜨렸다. 잠에서 깨어나듯 요새의 횃불이 타올랐다.

"신성왕국... 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장군님! 특이하게도 유일신 쥬(Ju)라는 존재를 숭배하는 중심이자 근원이라고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폴렌시아 왕국들이 이 종교를 국교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 토대 아래 형성된 신성도시이자 국가죠. 제 생각에는 바티칸과 유사하다고 생각됩니다."

"바티칸이라, 그런데 그들이 왜,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이곳에 온 걸까?"

나형석 장군의 물음에 김재덕 대령 또한 모르겠다는 듯 도개교를 통과하는 사람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사이클론님께서 무언가 짐작 가는 곳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꼭 해드릴 이야기도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야기를?"

"모르겠습니다. 단지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는 애매한 말만 하셔서......."

요새 성벽 모루 위에서 외인부대의 두 수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무렵, 성내 광장에서는 노회한 영웅들이 마주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조우(遭遇)였다.

"머스탱, 로이 머스탱!"

"하하하하! 베르트니, 신성(神聖)의 검 베르트니!"

말에서 뛰어내린 베르트니 단장이 머스탱 공작을 힘껏 끌어안았다. 머스탱 공작은 크게 웃으면서 그의 등을 손으로 두드렸다.

"결국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구나!"

"응? 영감, 무슨 소리예요? 우려하던 일이라니?"

"혹시나 했는데, 사실은 이번 여행길에서 그 꼬마 말이다. 스톤이라 그 아이가 말이야......."

"네. 스톤이 왜요?"

"아무래도 샹그릴라의 성자(聖者)인 거 같다."

"네? 성자요? 그 꼬맹이가 말도 안 돼!"

광장에서 반가운 해후를 하고 있는 두 사람에게 눈길을 준 호크가 사이클론의 말에 크게 놀라서 목소리가 커졌다.

"쉿! 소리가 너무 크다."

"아, 네. 하지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겨우 십대 소년일 뿐이라고요. 별다른 특징도 없는 평범한 어린애예요."

"나도 그렇게 보았지만, 이번 여행길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 알버스크를 지날 때, 꼬마가 잠들었는데 말이야. 녀석을 재우려고 스티그마(쥬의 낙인) 옆에 뉘였는데, 그 순간 운반하는 마차가 부서져 나가는 줄 알았다."

"마차가 왜요? 누가 습격을 했나요?"

사이클론은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크의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스톤과 가짜 낙인이 서로 반응하더란 말이지. 그냥 단지 낙인의 기운을 조금 흘려 넣은 목걸이인데도, 주변 숲의 마나가 폭풍을 치듯 요동쳤어. 그 바람에 레쎈의 추격자들에게 덜미를 잡혔지만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낙인은 서로에게만 반응한다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면 성스런 돌과... 성스런 돌! 샹그릴라의 성자가 바로 쥬의 강림을 받은 피트 산트라!"

"그래. 내 생각이 맞다면,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기 위해서 저렇게 친히 샹그릴라의 성기사단장이 직접 나섰어. 신성 모독이나 마족의 마물들이 나타난 것도 아닌데, 저 사람이 샹그릴라 밖으로 나온 것을 보니 말이야!"

"저 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대단해? 허허허. 그런 말로는 저 사람을 설명할 수 없다. 뭐랄까 정말 신의 사자라고 할까. 그는 신의 은총을 직접 받은 유일한 기사이며, 그의 성검에서 빛이 발하면 어둠의 모든 존재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성검의 기사일세. 나도 예전에 마녀들의 저주로 폐허가 된 마을에서 저 사람을 봤는데, 수많은 좀비와 소환된 마족들이 저 자의 검에 마치 촛불이 꺼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지. 그야말로 대단한 광경이었지."

사이클론이 저렇게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에, 호크도 베르트니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를 자세히 바라봤다.

"정말이네요.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氣)가 대단하군요."

"기(氣)? 마나를 말하는 것이냐? 후후,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이 그에게는 있단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전설이 된 것이지만."

"그래요. 그런 힘이 있다면 이번에 손 좀 빌렸으면 좋으련만......."

"하하하하! 녀석도 누가 그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뒤로 자빠졌을 거다. 천하의 성검 베르트니에게 손을 빌려? 하하하하!"

호크는 정말 심각하게 꺼낸 말이었지만, 사이클론은 무슨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웃어넘겼다.

하지만 해후를 끝낸 두 사람이 다가오자 표정이 굳어졌다.

"자! 이제 어쩔 거냐? 저 사람이 그 꼬마를 내어달라고 하면?"

"어쩌다니요?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그 아이는 저 사람들이 부모나 마찬가지인데, 제가 뭐라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이런 멍청한 소리나 하고... 예언을 떠올려봐. 그 드래곤 산속에서 신이라고 자칭했던 아레네스의 이야기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사이클론의 질책에 호크는 지난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낸 호크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젠장, 결국은 그 꼬맹이도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는......."

차마 뒷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사이클론은 호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하하하! 사이클론님, 제 오랜 친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허허, 성검(聖劍) 신의 사자, 베르트니님이시지요!"

"그런 공치사는 감당하기 힘듭니다. 말씀을 거두시죠. 위대한 바람의 마법사 사이클론님!"

"공치사라뇨? 기억을 못하시겠지만, 예전 호른 지방의 작은 마을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잠시 옛일을 떠올린 베르트니가 이제야 기억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랬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단장님 덕택에 큰 재앙으로 번지지 않아서 다행이었죠."

"이교도의 만행을 막는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사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모든 것은 쥬(Ju)의 뜻대로 되는 것이죠."

"하하하, 이런 두 분이 구면이셨군요. 자, 그럼 다음으로 이쪽은 우리 케린버그의 보물인 알렉스 호크 백작이야!"

호크는 베르트니가 상당한 압력을 뿜어내자 질 수 없다는 듯 투기(鬪氣)를 쏟아냈다. 두 사람의 기운이 부딪치자 바닥의 흙들이 바람도 없는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만! 이게 무슨 짓인가? 두 사람!"

대경한 머스탱 공작이 크게 소리치자 두 사람이 동시에 기운을 거두었다.

"하하하하! 미안하네. 이렇게 젊은 친구가 소드마스터라니... 나도 모르게 호승심이 일어났어. 추태를 부려서 미안하네, 호크 경!"

"아닙니다. 유명한 분을 뵙게 되어서 저도 영광입니다."

말은 부드러웠지만, 두 사람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베르트니가 투기(鬪氣)를 쏟아낸 것은 호크에게서 풍겨오는 쥬(Ju)의 성력에 반하는 기운 때문이었고, 호크는 그가 온 목적 때문에 서로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나무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의 소년은 바로 스톤이었다.

"허허, 이 사람들이, 자자,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지. 내가 자네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아. 어서!"

머스탱 공작의 재촉에 겨우 발을 뗀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간 뒤, 요새 첨탑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도 조용히 내성으로 발길을 향했다.

어느새 하늘 높이 뜬 달이 월광(月光)을 빛내니 몽뜨 요새에도 하나둘씩 횃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성의 회의실에도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절대 불가합니다."

"젊은 친구가 뭘 모르는군! 난 샹그릴라의 성기사단장일세. 나의 요구는 한 나라의 국왕이라도 거절하기 어려운데, 감히 백작인 자네가 내게 이럴 수는 없어. 그렇지, 친구!"

"그... 그야, 뭐."

더듬거리는 머스탱 공작을 바라본 베르트니가 득의의 미소를 짓는 것을 본 호크의 입꼬리도 역시 올라갔다.

"그런 개소리는 내 알 바가 아니고 지금 이곳은 전시상황이요. 그리고 책임자는 따로 있고, 그 분의 허락 없이 당신들은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나 본데, 당신들은 지금 이곳에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고 포로로 잡혀 왔다는 것을 알아야지!"

"뭐야!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내 친우를 봐서 참으려고 했거늘, 감히 쥬(Ju)의 사자인 나를 모욕해!"

당장에라도 달려들 태세인 베르트니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리던 머스탱 공작이 호크에게 간절한 애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호크는 테이블의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섰다.

"그 꼬맹이를 달라는 것이 단순히 아까 말처럼 성자의 여행길이 끝나서 데리러 왔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믿으라는 거요? 차라리 운명의 시계가 다시 움직였으니 꼬마를 없애야만 샹그릴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제발 그 꼬맹이의 목을 내놓으라고 하지?"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어떻게?"

"당분간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당신과 당신 일행은 이 시간 이후부터 우리 포로입니다. 그럼."

"이... 이보게, 호크 경! 이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이봐, 베르트니 자네답지 않게 이게 무슨 일이야? 그리고 성자라니 좀 속 시원히 말 좀 해보게. 어서!"

다그치는 머스탱 공작의 외침은 그에게 이미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무릎에서 기운이 빠져 나가자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자신의 신분과 머스탱 공작과의 친분으로 성자를 빨리 데리고 샹그릴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저 젊은 친구가 샹그릴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이미 운명의 시계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는 사실까지.......

'신이여! 이제 어찌하면 좋으리까?'

언제나 그렇듯 신은 대답이 없었다.

* * *

"빌어먹을!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또 식량마차인가?"

"면목 없습니다. 백작님, 후작님도 밤잠을 줄여가면서 경계하고 계시지만, 도대체 이것들이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는지 전부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통에......."

"미치겠군. 그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신성한 이사벨라 여왕님의 군대에 덤벼들다니. 진작 그것들의 씨를 말려 버려야 했는데, 젠장!"

몽뜨 정벌부대의 보급을 맡고 있는 드실라 백작의 이마에 주름이 가득해졌다. 들판에서 썩은 짐승고기나 찾아다니던 이방인(異邦人)들이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는지, 식량 마차만 골라서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 약탈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 힘은 보잘것없지만, 그 수가 엄청나서 병사들도 멍하니 서서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큰일이 발생했습니다, 백작님!"

무슨 사단이 났는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수행기사를 보면서 불안한 가슴을 진정시키는 드실라 백작이었다.

"본진에 보낼 식량마차가 불에 타버렸습니다."

"뭐라고? 이... 이런......."

드실라 백작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 보고를 한 기사도 고개를 떨구었다. 앞서가는 본진에 보낼 식량마차는 보급부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행군하는 본진의 전진 속도에 맞추어서 식량을 공급해야만 전체적인 작전에 차질이 없게 마련인데, 정말이지 큰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지금 다시 준비한다고 하더라고 저녁식사 때까지 도저히 댈 수가 없었기에 드실라 백작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한참 고민하던 백작에게 좋은 대안이 생각났는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우리들의 저녁식사 분을 본진으로 돌린다. 그리고 경비기사들을 모두 모아! 후작에게도 알려서 그의 병력을 전부 소집하라고 해. 근처의 이방인(異邦人)들을 청소해야겠다. 이대로는 전쟁을 하다가 굶어 죽겠어!"

백작의 명령을 받은 수행기사가 부리나케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갔다.

"후우~ 공작님이 아시기 전에 서둘러 끝내야 하는데......."

시동이 갑옷을 입혀주고 건네준 검을 손에 드니 불안하던 마음이 많이 가셨다. 드실라 백작이 막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두 눈에 단단히 기합이 들어가 있는 정예병들이었다.

"좋아! 내 말을 가져와라!"

시동이 드실라 백작의 말을 대령하자 위풍당당하게 말에 오른 드실라 백작이 검을 뽑아 머리 높이 치켜들었다.

"여왕님의 병사들이여, 저 들판의 들개들을 모두 쓸어버리자!"

병사들과 기사들이 검으로 방패를 치면서 함성을 질렀다.

잠시 후, 2천여 명의 병사와 기사들이 진영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어. 놈들의 보급부대와 본진의 거리를 하루나 더 떨어뜨렸다. 이 정도면 놈들에게 제법 피해를 줬다고 봐야지. 이제 곧 몽뜨의 크림 평야에 도착할 테니,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만 피하라고 전하고, 너는 몽뜨에 알려라. 이틀 후면 놈들이 도착할 거라고."

"네, 족장님!"

털가죽을 두른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덕을 내려가던 족장이라 불린 사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제 우리의 운명을 건 전쟁이 시작된다. 절대로 질 수 없는 전쟁이......."

그 뒤를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서 움직였다.

서서히 거대한 폭풍이 점점 몽뜨를 향해서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이보게, 제발 속 시원히 말 좀 해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머스탱 공작이 오랜 지기인 베르트니에게 간절히 물었지만,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넋을 잃고 그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머스탱 공작은 더 이상 그에게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크게 한숨을 토해낸 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열었다.

"응, 넌 누구냐? 누군데 여기에 함부로 서 있는 거지? 경비! 경비!"

깜짝 놀란 머스탱 공작의 외침에 경비를 서던 병사 두 명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님?"

"무슨 일이나마나, 도대체 이런 꼬마가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건가? 자네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던 거야?"

머스탱 공작의 호통에 도리어 병사들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공작님! 이 아이는 호크 중령님께서 보낸 겁니다."

"호크 백작... 아니 중령이 보냈다고?"

"네, 그렇습니다."

억울하다는 듯이 입을 내민 병사들과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공작이 입을 열려는 순간, 방 안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아이를 들여보내게. 머스탱!"

"아니.... 뭐? 이보게 지금......."

"부탁이네. 친구, 자네가 정말 친구라면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주게. 제발......."

갑자기 10년은 더 늙어버린 베르트니의 간절한 눈빛에 머스탱은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좋아. 나중에 꼭 이야기해주겠지?"

"그래, 약속함세."

그 말을 끝으로 아이를 방으로 들여보낸 머스탱 공작이 병사들과 복도에서 물러났다. 복도를 빠져 나오기 전에, 방문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불안하기만 했다.

곧 벌어질 전투보다 지금의 일이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왜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시지요, 성자님!"

베르트니의 말에도 여전히 문가에 서서 망설이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던 베르트니의 탄식이 방 안을 울렸다.

"모든 것은 신께서 주관하시는 일, 아무리 인간인 내가 발버둥 쳐도 어쩔 수 없는 일인가?"

자조 섞인 그의 말에 아이가 겨우 탁자에 다가와 앉았다.

"주교님하고 모두들 화가 많이 나셨나요?"

고개를 드는 아이는 바로 스톤이었다,

신성도시 샹그릴라의 신탁 받은 성자, 전설의 중심인 성스런 돌, 바로 스톤 얀 호이센이었다.

저주스런 운명을 받고 태어난 아이, 스톤을 바라보는 베르트니의 눈동자가 몹시도 떨렸다.

"성자님께서는 쥬(Ju)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신가요?"

"네?"

자신의 질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인 스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야, 뭐 전 쥬(Ju) 착실한 종이니까요......."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 수가 있겠군요. 성자님, 저를 절대로 용서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저를 저주하여 억겁의 지옥 속에서 고통 받게 하십시오."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단장님?"

지금 스톤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을 친손자처럼 귀여워해주던 샹그릴라의 그 베르트니가 아니었다. 미친 사람처럼 쥬(Ju)의 성 기도문을 읊조리는 그가 스톤은 너무 무서웠다. 의자에서 일어난 스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대주교, 이제 그대와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 그 더러운 진실을 보여주고 나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더니. 이제는 나를 천고의 죄인으로 만들 약속을... 쥬(Ju)여! 저의 죄를 사하소서......."

벌떡 일어서서 스톤에게 다가오는 베르트니에게서 지독한 살기가 피어오르자 나이 어린 스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허억! 다... 단장님! 왜 그러세... 잘못했어요. 다... 시는 말없이... 도망치지 않을 게요... 용서해주세요......."

"미안합니다, 성자이시여. 그러나 샹그릴라를 위해, 쥬(Ju)의 신성한 믿음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고통 없이 보내드리겠습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는 스톤의 등 뒤로 차가운 벽이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으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을 벌벌 떠는 가엾은 아이를 향해 베르트니의 커다란 두 손이 다가들었다.

"천상의 위대한 신이여, 그대의 이름 쥬(Ju)의 은총을 지키고자 살겁을 범하오니, 저를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그 죄를 벌하소서!"

처절하기까지 한 그의 외침과 견딜 수 없는 죽음의 공포로 어린 스톤은 기절해버렸다.

이제 조금만 손을 뻗으면 가엾은 이 아이의 생명이 사라질 순간이었다.

"오케이(OK)! 거기까지, 동작 그만!"

"헉! 누... 누구냐!"

"내 이럴 줄 알았지. 당신이 사고 칠 줄 알았어."

급히 몸을 돌린 그의 눈에 낯익은 남자가 들어왔다.

"알렉스 호크 경!"

"빙고! 자, 그 아이는 그냥 놔두고 나하고 대화 좀 하실까?"

베르트니의 눈이 스톤에게 향하자 호크가 다급히 소리쳤다.

"저 작자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벌집을 만들어 버려!"

벽장으로 알았던 곳이 열리면서 10여 명의 병사들이 손에 스패로우를 장전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들린 스패로우의 화살촉이 빛을 받아 날카로운 예기를 번뜩였다. 그 뒤로 사이클론이 걸어 들어왔다.

"휴~ 네 말대로 이 방에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구나."

"거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저 인간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요!"

"당신들은 몰라, 저 아이는... 저... 아이는......."

"아~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 서로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주위는 물리고 진솔하게 이야기 좀 합시다."

호크가 눈짓하자 병사들이 기절한 스톤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호크와 사이클론은 베르트니가 발작할 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바닥에 대자, 겨우 안심하고 주위를 물렸다.

"어이, 다혈질 아저씨, 이제 조용히 이야기 좀 해 보자구. 엿 같은 신들의 장난에 대해서 말이야. 어쨌든 그 빌어먹을 운명의 시계는 멈추게 해야 하지 않겠어?"

호크의 말에 고개를 든 베르트니의 얼굴은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의 모습이었다.

"신들의 안배를 어떻게 인간인 우리가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뭐? 이런 미친 작자를 봤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야! 내 이 작자를 그냥!"

"어허! 호크야, 지금 뭐하는 게냐? 진정해라. 지금 이 사람도 제정신이 아니야. 그러니 장소를 옮겨서 계속하자. 여기는 눈도 많으니 말이야."

"휴~ 알았어요. 그럼, 할아버지께서 알아서 하세요!"

"빛과 공간을 틈으로! 대지의 품속으로 안내해주오!"

두 손을 맞잡고 하늘을 향해 영창을 하자 사이클론과 호크, 베르트니, 세 사람이 은빛의 빛 무리에 휘감겼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면서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자취를 감췄다. 미리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언제 그런 일 있었는지 모르게 방 안을 말끔히 정리하고 사라지니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 * *

"좀 더 깊고 넓게 파야 해!"

"병사들 사이에서 말이 많습니다, 장군님!"

"참호를 파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후후후! 아마 참호를 파는 것이 이 세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닐까? 전쟁 중에 말이야!"

"장군님,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저기 제일 불만이 많은 사람이 올라오네요."

"제너럴! 나 좀 봅시다. 도대체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지금 전쟁을 하자는 겁니까. 아니면 집을 짓는 겁니까? 적들이 다스커스 강을 건넜다는데 그럼 이제 곧 코앞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새 앞에 땅이나 파고 있다니, 아니 저... 저...... 국왕 전하께서 힘들게 보내주신 마법사들을 저런데 쓰다니! 제너럴!"

"하하하하! 겨울이다 보니 땅이 얼어서요. 마법사들에게 불 좀 지피라고 했죠. 덕분에 땅을 파기가 아주 수월해졌습니다."

"허... 허......."

나형석 장군의 대답에 할 말을 잊은 듯 허탈하게 웃고 있는 머스탱 공작을 홀로 나누고 나형석 장군과 김재덕 대령이 요새 아래 들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쌀쌀한 겨울이었지만,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상의를 벗고 일을 하고 있었고, 그런 그들의 몸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굵은 땀방울을 손으로 훔친 남자가 잠시 허리를 펴기 위해 고개를 들어보니 마법사들이 마법의 불로 언 땅을 녹이고 있었다.

"내 참! 세상에 저 귀하다는 마법사님들을 언 땅이나 녹이는데 쓰다니, 별난 일이야."

"그러게 말이야. 이제 곧 여왕의 군대가 들이닥칠 텐데 검술이라도 연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시켜서 하기는 하지만, 걱정이 드는 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땅이나 파! 행여 족장님이 아무 생각도 없이 일을 시키시려고. 어서 일들 해!"

들판에서 작업을 하던 이방인(異邦人)들이 수군거리자 작업감독을 하는 남자가 돌아다니면서 다독거리고 있었다.

"어르신, 나오셨습니까?"

"그래, 날이 찬데 수고가 많구먼. 그래, 잘 되고 있나?"

"네. 마법사들이 언 땅을 녹여주고 있어서, 수월하게 하고는 있지만, 다들 불안해합니다. 손에 칼을 들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땅이나 파고 있으니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이 땅을 파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야. 좀 더 넓고 깊게 파도록 시키게. 나중에 다 알게 될 거야. 왜 이 땅을 파는지 말이야."

감독관과 이야기를 나눈 초로의 노인이 성벽 위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형석 장군을 보았다. 자신이 해준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던 그가 갑자기 무릎을 치면서 땅을 파자고 했을 때, 자신도 웃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중에 그 무서운 심계를 들었을 때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지 않았던가.

"후~ 무서운 사람이야. 저 사람은 마치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인 거 같아. 별거 아닌 것을 전부 싸우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니, 저 사람 편에 선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군......."

노인의 넋두리에 삽질을 하던 사람들은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 시각 행크 공작의 대군이 크림 평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광기로 뭉친 군대가 이 몽뜨를 피로 물들이기 위해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서둘러! 물주머니를 더 만들어! 찰리와 알파 중대원들도 모두 달라붙으라고 해!"

요새 안쪽도 전투 준비로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병사들의 표정에서도 긴장감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에밀 대위님! 핸들러 소령님이 찾으십니다."

"그래, 알았다. 물주머니를 최대한 많이 확보해서 수레에 싣도록 해라!"

호무관 출신의 5인방이 격전 현장에 모여들었다.

"어서와. 얼굴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

"싱겁긴, 바빠 죽겠는데 왜 불러! 소령 나리!"

"에밀, 이 녀석은 왜 이렇게 퉁퉁 불었어!"

"이해하라고, 피터슨. 여태껏 혼자 디안 본부에 남아 있다가 이제야 전장에 왔으니 좀 많이 쌓였을 거야. 하하하하!"

"이런 젠장, 내가 코흘리개들 뒷바라지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이제 신병 교육이라면 이가 갈려!"

"루브카, 자네야말로 고생이 많았지. 사이클론님과의 비밀임무는 어땠어?"

"후~ 말도 마.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것은 해봤어도. 오히려 우리를 놓치지 않게 하는 게 더 힘들더라고. 참 이상한 임무였지."

"그나저나 우리도 많이 변했어!"

"그래. 그때 호무관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뭘 하고 있었을까?"

"뭘 하기는, 잉글햄의 어느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 신세한탄이나 하고 있겠지."

"그래. 맞아, 맞아.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한 친구들, 말은 별로 필요 없었다. 그저 이렇게 웃는 것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들을 핸들러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붙들었다.

"죽지 마라! 모두......."

뒤돌아보는 친구들의 얼굴에 익살스런 미소가 걸렸다.

핸들러도 웃음으로 답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몽뜨 요새를 덮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요새 안은 다시 이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장군님! 크림 평야의 미르 호수를 지났다는 보고입니다."

오퍼레이터가 적을 나타내는 모형을 지도에서 옮기고 있었다.

"흠, 쉬지 않고 달려오는군."

"네. 아마도 오늘밤에 도착해서 내일 바로 시작할 생각인 거 같습니다."

"그래. 이방인(異邦人)들이 잘해준 덕이야. 식량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이 유효했다는 거겠지?"

"네. 아마도 그렇게 여유가 많지 않을 겁니다. 어서 빨리 끝내고 싶겠죠. 더구나 추운 겨울 5일간 행군을 하고 왔으니 피로도도 심할 것입니다."

"그래. 그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고, 불리한 사항은 저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건데, 휴~ 정말이지, 너무 많군. 게다가 기간테스라는 괴물들까지 말이야."

"기간테스는 호크 중령과 제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장군님께서 전체적인 전황을 살펴주십시오."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나저나 중령이 보이지 않는군."

"네. 사람을 보내서 불러올까요?"

"아니네. 사이클론님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서 나름대로 무언가 준비하고 있겠지."

"장군님, 광장에서 문제가 생겼답니다."

"문제? 무슨 문제?"

"이방인(異邦人)들이랍니다."

"그들이 왜?"

"제가 가보겠습니다, 장군님."

"아니야. 같이 가보지."

나형석 장군과 수행원들이 광장으로 나가자 전투준비로 혼잡한 성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고 내성을 벗어나니 무기고 앞에 서로 대치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문제가 발생한 곳이 어디인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안 돼요! 안 된다고요. 모두 물러서세요!"

"무슨 일인가?"

"헉! 장군님. 모두 차렷! 충성! 근무 중 이상무!"

"쉬어. 누가 설명 좀 해보게."

"넵, 장군님! 실은 저들이 오후가 되면서 이렇게 몰려와서 무기를 내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무기를?"

"네, 장군님!"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무기고 경비책임자에게서 이방인(異邦人)들에게 시선을 옮긴 나형석 장군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주위를 봐주세요. 성벽을 수리하고 저 많은 물자들을 옮기고. 그리고 요새 앞에 그 넓고 깊은 참호를 파주셨습니다. 게다가 모르카시부터 이곳까지 저들의 동태를 일일이 보고해주셨고요. 또 적의 보급부대를 급습해서 적들에게 타격을 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여러분들은 할 일을 다 하신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전투는 저희들에게 맡겨두시고 요새 뒤의 야영지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돌보십시오."

나형석 장군의 간절한 부탁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잦아들었다. 이제 사람들이 돌아가기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군중이 갈라지면서 하얀 누더기를 걸친 초로의 노인이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장군의 앞에 섰다.

"허으~ 쿨럭! 높으신 양반, 당신들 보기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는지 잘 아오. 그렇지만 지난 며칠간 여러분들이 보여준 따뜻한 마음이 우리가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소. 또 다시 뒤에 숨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짐승들이 먹다버린 쓰레기를 뒤지고 다니는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소. 그대들 덕에 사람의 마음을 다시 찾았으니까, 제발 자비를 베풀어서 이들에게 사람답게 싸우다 죽을 수 있게 해주시오. 가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오! 쿨럭."

"그러나 저들은 정규군입니다. 당신들은......."

"김 대령, 그만하게. 중위! 무기고를 열어서 이들에게 무기를 보급해줘. 어서!"

"넵, 알겠습니다. 이봐, 들었지. 어서 문을 열어!"

중위의 명령에 대원들이 무기고의 문을 개방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검과 방패, 장창을 하나씩 들고 무기고를 빠져 나갔다.

"장군님, 어쩌시려고 그런 명령을 내리셨습니까? 저들은 민간인인데 그 피해가 엄청날 겁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승리해야지. 우리가 패배하면 저들에게 미래가 있을 것 같나? 전쟁이 끝나고 학살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것이 나을 거야. 게다가 숫자가 많으니 나중에 보병전으로 붙게 될 때 도움이 되면 되었지, 마이너스가 되겠나?"

"저들에게는 참으로 잔인한 운명이군요."

"전쟁, 그 자체가 잔인한 일이지, 안 그런가?"

"네, 그렇군요. 정작 전쟁이란 행위 자체가 더 잔혹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간부회의를 소집하지. 아니, 마지막 작전회의라고 해야 하나?"

"알겠습니다, 장군님!"

부관이 명령을 받고 급히 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 장군과 김 대령이 급히 상황실로 걸음을 돌리자 야영지에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무기고로 몰려들고 있었다.

천막으로 된 도시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수만 개 아니, 그 열 배는 되어 보이는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바로 몽뜨 요새 후문의 협곡 안에 있는 이방인(異邦人)들의 임시 거주지였다. 거주지의 치안을 위해 둘러보던 이지 중대 루크 소위의 발걸음이 멈췄다.

"소대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 잠시만 상사."

루크가 걸음을 멈추고 다가간 곳은 지금 무너져 내린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낡은 천막이었다. 그 앞에 이제 6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옷인지 누더기인지 알 수 없는 것을 걸치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는지 두 눈가가 눈물과 땟국물로 얼룩져 있었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엄마, 아빠는 어디 가고 혼자 그러고 있어?"

루크가 무릎을 굽히고 소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배... 배고파!"

"어? 배가 고팠구나. 가만있자 아저씨에게 먹을 게 있나?"

군복 주머니를 뒤지던 루크가 딱딱해진 보급용 빵을 꺼냈다.

"자! 꼬마야, 이거 먹어봐!"

루크가 건넨 빵을 받아든 소년은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대하듯 빵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다시 루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년이 맛있게 빵을 먹는 모습을 기대하던 루크는 맥이 빠졌다.

"뭐야! 너 배고프다며. 녀석이 어른을 놀려!"

루크가 짐짓 사나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루크는 장난이었지만, 소년은 겁을 잔뜩 집어 먹고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 꼬마야, 그게 아니고,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루크가 꼬마한테 쩔쩔매면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소대원들이 키득거렸다. 그 바람에 더욱 얼굴이 빨개진 루크는 꼬마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때 루크를 도와줄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슈! 울지 마라. 바람의 아이는 쉽게 눈물을 흘려서는 안 돼!"

갈색머리에 검은색 눈동자가 퍽이나 이국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걸치고 있는 옷은 형편없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고결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빵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런 겁니다. 이해하세요."

"네? 빵이 무엇인지 모르다니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두 들판에서 태어났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들은 아이들에게 빵을 먹여줄 형편이 못되고요. 아니, 저도 마지막으로 빵을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말을 하면서 빵조각을 뜯어서 입에 물었다. 잠시 후, 부드러워진 빵을 아이에게 먹이자 꼬마의 두 눈이 크게 커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아마도 태어나서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비록 보급 받은 지 오래돼서 딱딱해진 군용 빵이었지만, 소년의 미소를 본 루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맛있니?"

입을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꼬마의 모습에 비로소 루크도 안심했다.

"상사!"

"갑니다, 소대장님!"

"저기 남은......."

척하면 척이라더니 루크의 마음을 알기라도 했는지, 선임하사가 소대원들의 보급 빵을 모아왔다.

"저기, 보급 받은 지 오래돼서 딱딱하기는 하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이거라도 아이들에게 주세요!"

루크가 내민 빵을 소중히 받아든 여인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내일도 저희가 저 달을 볼 수 있을까요?"

여인의 질문에 루크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소대원들에게 돌아가던 루크가 몸을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꼬마에게 꼭 따뜻한 빵을 먹이도록 약속하죠."

손을 들어 작별을 고하는 루크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쥬(Ju)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어요!"

"그다지 좋은 이름은 아니지만 루크라고 합니다. 그쪽은?"

"하... 하이디스입니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고개를 숙이면서 루크의 눈을 피했다.

"하이디스라 예쁜 이름이네요. 그럼, 안녕히!"

야영지를 가로질러 부대로 복귀하는 루크는 등 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뭐야? 왜 그래?"

"흐흐흐흐흐, 소대장님 솜씨가 좋으십니다."

선임하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거기에 소대원들의 휘파람과 선수 아니냐는 야유까지 더해지자 루크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무... 무슨 소리야 그런 것이 아니고. 단지 순수한 마음에서......."

"괜찮습니다. 뭐 다 이해하니까요."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선임하사를 보면서 루크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어느새 후문에 도달한 루크의 눈에 취사병들이 커다란 솥단지에 국자를 젓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루크가 가까이 다가가서 솥단지 안을 살펴보니 물이나 다름없는 희멀건 죽이었다.

"뭐야, 이게? 고기라도 좀 더 넣지."

좀 전의 꼬마가 생각난 루크가 취사병에게 화를 버럭 냈다. 어린 아이들이 굶고 있는데, 겨우 이런 물 같은 멀건 죽을 주는 것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러나 곧 취사병들의 배식도 저 솥단지 안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나자 면목이 없어졌다.

"미... 미안하네, 병장."

"아닙니다. 소위님, 그래도 꽤 많은 병사들이 빵을 주고 가서 그나마 이렇게 빵이라도 넣었더니 밀가루 죽처럼 되네요. 어서 전쟁이 끝나야지. 이러다가 모두 굶어 죽겠어요. 날도 점점 더 추워질 텐데......."

취사병의 넋두리를 뒤로하고 빵을 끓인 죽이라도 먹겠다고 늘어선 이방인(異邦人)들의 줄을 보면서 루크와 소대원들은 착잡한 마음으로 부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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