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Run and Hit!
다음날 새벽 5시.
검게 얼굴을 칠한 1개 사단 병력이 몽뜨 근처 숲속에 집결했다.
"중대장들은 작전을 잘 숙지했겠지?"
"넵!"
"좋아! 중대장들은 작전 시작 전까지 소대장들에게 다시 작전 전달을 하고 각 중대별로 맡은 임무를 수행하는데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중령님!"
"좋아. 잘 알겠지만, 이번 작전의 관건은 스피드야!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몽뜨를 점령하지 못하면 우리는 앞뒤로 갇힌 꼴이 된다. 명심하도록, 해산!"
겨울에 들어선 로크 산맥의 새벽바람이 살을 에면서 차갑게 휘몰아쳤다.
숲속의 잣나무 사이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외인부대원들의 입김이 새벽안개처럼 숲속에 퍼져 나갔다.
휘익~
"소대장들은 주목! 우리가 선봉 중대다. A포인트까지 빠르게 통과해서 성벽 위에 교두보를 확보한다. 브라보 중대가 엄호사격을 하는 사이, 우리가 성문과 성벽을 점령한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야 한다. 모두 잘 알겠지?"
"하하하! 중대장님, 제일 먼저 교두보를 확보하는 소대에게 포상휴가나 잊지 마십시오!"
"에단 소위,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겁먹고 오줌을 지리는 것 보다는 훨씬 낫군."
"지옥주 훈련도 나중에는 웃으면서 통과한 저희들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1소대장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이지 중대 중대장인 피터슨 대위는 안심했다. 또한 지옥 같은 훈련들을 이겨내면서 얻은 이들의 자신감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첫 전투여서 겁을 먹거나, 긴장한 나머지 실수할 수도 있는데 다행히도 적당하게 긴장하고 신중한 모습인 소대원들이었다.
지금 이 정도가 딱 좋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잠시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던 피터슨 대위가 소대장들에게 한마디 내뱉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많이 살아남아라!"
"......."
다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대답은 필요 없었다. 각자의 소대로 소대장들이 돌아가자 피터슨은 마나 수정구로 만든 무전기를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필요 없이 음성전달만 가능하도록 만든 일종의 무전기 같은 수정구였다.
삑! 삑!
수정구에서 비프 음이 들리자 피터슨 대위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돌리다가 앞으로 뻗었다. 드디어 전투개시였다.
폴렌시아 성력 879년 겨울의 달, 윈터로의 첫날이었다.
스패로우를 꼭 움켜쥔 이지 중대원들이 잣나무 숲속에서 뛰어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하늘마저 외인부대를 돕는지 새벽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웠다.
"헉헉헉!"
1소대원 드론 하사는 숨이 턱에 차오도록 달리고 또 달렸다. 겨울 새벽의 찬 공기가 폐가 얼어붙는 것처럼 차가웠지만, 잠시도 다리를 쉴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등 뒤의 군복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최초 돌파지점인 A포인트를 돌파하자 엄호부대인 브라보 중대가 본대에서 보내온 신무기를 땅바닥에 장착하고 있었다.
브라보 중대를 뒤로하고 달리는 드론 하사의 눈앞에 성벽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곧 작전 도달 지점이었다. 드론 하사는 애타는 심정으로 마음속으로 외쳤다.
'조그만 더 조금.'
거의 도달지점에 도착하자 기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성벽을 바라보았고 위에서 무언가 번쩍하고 빛이 났다.
잠시 후, 따끔한 통증과 함께 세상이 옆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서서히 그는 겨울 들판에 모로 쓰러졌다. 이지 중대의 첫 번째 전사자였다.
"적이다!"
날카로운 비명성과 함께 성벽 곳곳에서 횃불이 불타올랐다. 곧이어 수많은 횃불이 성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성벽 아래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려던 이지 중대가 적들에게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새벽의 어둠을 이용하려던 작전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젠장! 뭐하는 거야, 피터슨! 모두 죽일 작정이야? 어서! 성벽을 타라, 어서!"
핑~
"으아악! 내 다리!"
"크허헉!"
"위생병!"
"빌어먹을, 저런 방법이 있구나. 브라보 중대는 뭐하는 거야! 엄호사격은 어떻게 됐나? 이러다가는 모두 죽어! 이지 중대장에게 어서 성벽 위에 거점을 확보하라고 해라! 어서!"
나형석 장군의 다급한 외침에 무전병들이 바빠졌다.
"사령부에서 어서 성벽 위에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적들의 반격이 거세서 고개조차 들 수가 없습니다."
"젠장, 여기서 죽느니, 올라가다 죽는 게 더 나아! 어서 올라가! 어서!"
망원경으로 상황을 살피던 나형석 장군은 이지 중대가 성벽아래에서 적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하나둘씩 쓰러지자 애가 탔다.
"도대체, 브라보 중대는 뭐하는 거야! 어서, 캐논포로 엄호하라고 해!"
무전병이 나형석 장군의 노성에 급히 브라보 중대에게 무전을 쳤다. 설마하니 횃불을 성벽아래에 떨어뜨려 시야를 확보할 줄 미처 생각 못한 나형석 장군은 피가 마르는 듯했다.
"엄호사격을 빨리 시작하라는 명령입니다. 중령님!"
"젠장, 안다고 알아! 이게 생각보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어!"
"사격 준비 완료됐습니다. 중령님!"
"그럼, 뭘 기다려! 어서 쏴! 준비된 사수부터 쏴라!"
3인 1조가 달라붙은 신형무기는 한국군의 50MG 같은 형태의 무기였다. 캐논포의 캐터필터처럼 생긴 총구 입구에서 길이 2미터의 강전이 동시에 20여 발씩 발사되었다.
투투투투퉁!
사이클론과 김재덕 대령 그리고 드워프 일족의 피땀 어린 노력과 연구의 산물이었다. 2미터의 거대한 강전이 5발마다 한 대에는 화살촉 대신에 검은 구체가 달려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사이클론이 개발한 마법 화염탄(火焰彈)이 들어 있었다.
아직은 설치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연습과는 달리 실전에서 발사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 결과는 이지 중대원들의 희생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브라보 중대에서 쏘아 올려진 수백 발의 강전이 몽뜨 성벽 위를 향해서 날아들었다.
"어서, 화살을 쏴라! 그리고 경비대는 뭐 하는가, 어서 기름을 부어라! 전령을! 내성으로... 크헉!"
성벽 위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던 수비대 장수가 미처 말을 잇지 못한 채 강전에 꿰뚫려 한참을 날아 성벽에 박혀버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몽뜨 성벽 위는 수백발의 강전과 화염탄(火焰彈)에 의해서 지옥으로 변했다.
쿠아아앙!
"으악! 살려줘!"
후방의 지원사격 덕택으로 성벽 밑에 고립되었던 이지 중대에게 쏟아지던 적의 공격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숨통이 트이고 기회가 생기자 이지 중대는 지체 없이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곧 성벽 위에 거점을 확보한 이지 중대원 중 한 명이 노란색 깃발을 흔들어 거점 확보를 알렸다. 브라보 중대의 지원사격이 멈췄다.
"됐다! 알파 중대, 찰리 중대 돌격! 앞으로! 고(Go)!"
브라운 중대 뒤에서 대기하던 알파 중대와 찰리 중대가 돌격 신호를 시작으로 몽뜨를 향해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갈대숲에 숨어있던 나머지 대대병력들이 요새성벽을 향해서 전력 질주를 했다.
"우와와와와! 돌격 앞으로!"
수많은 외인부대원들이 스패로우를 굳게 움켜쥔 채로 달려 나갔다.
"이번 작전은 런 앤 히트(Run and Hit)가 생명인데 이렇게 늦어지면 마법사들이 개입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힘들어져 제발 서둘러!"
심장이 쪼그라드는 긴장감에 나 장군의 입술이 메말라 타들어 갔다.
한편 성벽 위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벽 한쪽에 거점을 확보하자 이지 중대원들이 그곳을 통해서 성벽 위를 점령해 나갔다.
이제야 작전이 수월해지나 싶었지만, 피터슨 대위는 내성에서 달려 나온 세린디아 병사들과 기사들이 성벽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밀고 올라오고 성벽과 내성 방어축대와 연결된 연결 통로를 타고 많은 숫자의 병사들과 기사들이 곧장 무기들을 들고 달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기 시작하자 이지 중대원들은 예상 밖의 저항에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적들은 겨우 백여 명이다. 어서 빨리 주살해라!"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거의 마법공격에 의해서 전멸 당했고, 게다가 저들의 석궁은 기사들의 갑옷을 뚫고 들어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젠장, 어떤 놈들이 감히! 이 몽뜨를 넘보는 건가? 이제 거사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하필이면... 마법사들은 뭐하는 거야? 도대체 모두 어디에 있는 건가?"
"어제 파티 때문에 다들......."
"이런 미친 것들이, 어서 목을 끌고서라도 데려와 어서!"
"네. 그렇지 않아도 벌써 그린로즈 기사단과 마법사들에게 내성 수비대를 보냈습니다."
"좋아. 그때까지만 이 모욕을 받아들인다. 마법사와 그린로즈 기사단이 도착하면 저 녀석들은 영혼조차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싸늘하게 외친 로버트 남작의 말에 몽뜨의 병사들도 힘을 내기 시작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버트 남작님! 어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뒤늦게 마법사들이 나타나자 로버트 남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얼굴과는 다르게 입에서 나온 말은 험했다.
"이런 상황에 달리 명령이 어디 있나? 무조건 성벽 위를 탈환해! 어서! 그린로즈 기사단은 어디 있는가? 요새가 점령당하고 나서야 말을 타고 검을 뽑을 텐가?"
녹색머리를 한 그린로즈 기사단들이 갑옷을 입고 나타나자 몽뜨의 로버트 남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하다 이제야 나타나는가? 몽뜨가 함락되면 어쩌려고 그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이제부터 나설 것이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백작님."
그린로즈 기사단들이 외인부대를 우습게보고 일렬로 늘어서서, 검을 가슴 앞에 올려 세우고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내린 뒤, 성벽을 향해 다가섰다.
"중대장님, 기사단입니다!"
"젠장, 드디어 나타나셨군. 양쪽의 통로를 방어하는 병사들 빼고 모두 전방의 녹색 기사단을 향해서 사격해라. 준비된 사수부터 발사해!"
투투투퉁!
성벽 위에서 이지 중대원들의 스패로우가 화살을 토해냈다.
수십 발의 화살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린로즈 기사단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방어를 무시한 채 다가섰다. 다른 석궁보다 제법 빠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자신들이 입고 있는 방어마법이 걸린 훌륭한 갑옷의 위력을 믿고 자신하면서 정통 기사단의 공격 방법대로 천천히 걸어서 다가섰다.
푹!
"헉!"
"욱!"
"단장님, 화살이 갑옷을 뚫고 들어옵니다! 크아아악!"
"뭐, 뭐야? 저 석궁은!"
순식간에 10여명이 희생되자 그린로즈의 예하 기사단인 블루 기사단 단장인 에론크만은 크게 당황했다. 이런 일은 생전 듣도 보도 못했다. 저 작은 석궁의 화살이 강력한 방어구인 자신들의 갑옷을 뚫고 들어오다니! 그가 머뭇거리는 와중에도 대여섯 명의 기사들이 쓰러지자, 그는 그제야 황급히 기사들을 뒤로 물렸다. 상대편은 기사들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황급히 물러서다니 치욕스런 결과에 그는 분노했다.
"기사단을 도와라!"
난잡한 파티로 밤을 새서 전투에 늦게 참가한 마법사들의 수장인 불로이가 그린로즈 기사단들이 낭패를 보고 물러나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마법사들을 독려했다. 이십 여명의 마법사들이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곧바로 두 팔을 하늘 높이 올린 그들의 입에서 음산한 마법주문이 성내를 울렸다.
"이사벨라님의 전능하신 권능으로 명하노니, 얼음의 꽃이여! 그 날카로운 가시로 적들을 피로 물들여라!"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차가운 눈보라가 일었다. 점점 거세지면서 커졌다가 갑자기 바람이 멈추었다. 바람이 멈추고 눈보라가 거두어지자 마법사들 머리 위로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 있었다.
얼음 조각은 조각인데 아주 날카로워서 마치 조각칼과 같이 예리한 날이 서 있는 얼음 조각이었다. 마법사들의 손이 힘에 부치는 지 덜덜 떨리다가 곧 성벽 위의 이지 중대를 향해서 펼쳐졌다.
"중대장님!"
"이런, 빌어먹을 모두 엄폐하라! 엄폐해!"
이지 중대장의 다급한 외침에 모두들 급히 몸을 숨겼다.
"헉, 헉"
브라보 중대의 캐논포 설치를 감독하던 호크는 성벽 위의 깃발 신호를 본 뒤, 곧바로 알파와 찰리 중대를 이끌고 몽뜨의 들판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차디찬 들판에 드러누워 있는 전우들의 시신을 뛰어넘는 호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호크의 양옆으로 예하 대대 병력들이 속도를 내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공격에 참가한 모든 외인부대원들이 물밀듯이 몽뜨의 성벽을 향해서 쉬지 않고 뛰어갔다. 가쁜 숨을 쉬며 요새 성벽을 향하던 호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아... 안 돼!"
엄청난 마나의 기운이 그것도 빙계(氷界)의 마나 폭풍이 성벽 위에 퍼부어지는 순간, 호크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에~!"
쿠아아아아앙!
마치 우박이 쏟아지듯 몽뜨 성벽 모루 위로 얼음의 폭우가 쏟아졌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호크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알파! 찰리! 더 빨리 성벽 위로 올라가, 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호크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성벽 위를 오르는 알파와 찰리 중대원들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그들도 이번 마법 공격으로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이지 중대원들의 피해가 얼마나 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지 중대원들이 피터슨 대위의 외침에 성벽 위로 올라와서 임시로 만든 모래주머니 참호와 성벽 모루 뒤로 분분히 몸을 숨겼다.
츳츠츠츠츠-
슈아악!
하얀색의 스파크가 성벽 위의 이지 중대를 향해서 달려들었다. 처음에는 흰색 스파크였는데 성벽에 가까이 다가가자 수백 개의 얼음 조각으로 변했다. 그것도 마치 칼처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서 성벽 위에 몸을 웅크린 이지 중대원들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짓쳐들었다.
퍼퍼퍽!
하늘에서 얼음 칼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으아아아악!"
"내 눈! 앞이 안 보여!"
"제기랄 위생병! 위생병 어디 있나?"
"빌어먹을! 가만히 있어. 웃! 차가워!"
2소대 존 밀턴 상사가 마법사들의 공격에 적중당한 자신의 소대원이 발작하자 한 팔로 내리누르면서 두 눈에 꽂힌 얼음 조각을 손으로 떼어냈지만 얼음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인적인 한기에 놀라서 손을 뗐다. 손에 들고 있던 얼음조각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얼음조각은 전혀 녹지를 않고 그 날카로움을 빛내고 있었다.
위생병을 외치던 존 상사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고개를 오른편으로 꺾자 그의 눈에 3소대가 몸을 엄폐하던 참호가 얼음조각으로 뒤덮여 고슴도치가 되어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동기인 헤이크 상사와 소대원들이 걸레 조각처럼 찢겨져 쓰러져 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몇 개 소대가 전멸한 것이었다.
"크윽!"
벽을 주먹으로 내려친 피터슨 대위는 성벽 위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중대원들을 보면서 악에 받쳤다.
이제 몸이 성한, 이지 중대원들은 50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불과 한 시간 만에 중대 병력의 반수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중대장님! 저 공격을 다시 받으면 위험합니다!"
"알파와 찰리는?"
"이제 곧 성벽에 도달합니다."
"알았다."
'우리가 당하면 성벽 위로 올라서던 알파와 찰리도 당하게 된다.'
결심이 선 피터슨 대위가 호각을 불었다.
삐익!
중대장 피터슨 대위의 수신호가 소대장들에게 전달되었다. 살아남은 소대장들이나 소대장들이 죽은 소대는 상급자들이 명령을 수행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앞으로 내던지는 수신호를 보냈다.
운신이 가능한 중대원들이 모두 가슴의 X반도에 달린 빨간 공들을 떼어내서 두 손에 파지했다. 피터슨 대위가 빨간색 공을 반반씩 잡고 반대 방향으로 비틀자 공의 중간 부분에서 파란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빛이 들어온 걸 확인한 피터슨 대위가 공을 마법사들과 병사들이 몰려있는 곳에 던졌고 그 뒤를 이어서 성벽위에서 빨간색의 파란빛을 내는 공들이 수십여 개가 하늘을 수놓으면서 마법사와 기사단, 몽뜨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공들을 바라보는 피터슨 대위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제발 반 이상만 작동해다오. 부탁이다!'
아직은 미완성인 물건이었다. 심지어 시험 테스트에서 시험 교관의 팔이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래서 아직 실전에 사용하기가 불안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어쩔 수가 없다고 판단한 피터슨 대위가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지금 공중을 날고 있는 것은 바로 수류탄을 응용한 수화탄(手火彈)이었다. 몬스터의 뼈로 만든 구체에 화염계(火焰界) 마법을 적용시켜서 구체의 절반을 어긋나게 회전시켰을 때, 작동되게 만든 것이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성벽을 내준 몽뜨의 로버트 남작은 마법사들의 공격으로 성벽 위의 적들의 수가 줄어들자 크게 고무되었다. 병사들 역시 마법사들의 공격이 성공하자 환호성을 지르면서 기운을 냈다.
그린로즈 기사단만이 이지 중대의 석궁 공격에 낭패를 당해서 물러난 것 때문에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짐마차와 가구들을 꺼내서 방어벽을 만들어 힘겹게 방어하다가 마법사와 기사단의 합류로 숨통이 트이자 남작은 병사들을 독려했고 성벽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그런 그들 머리 위로 주먹 크기의 공들이 떨어지자 처음에는 모두 놀랐으나, 그저 땅바닥을 퉁퉁거리며 구르자 움찔했던 자신들이 우스웠던지 멋쩍게 웃은 뒤, 성벽을 향해서 다가섰다.
'젠장 모두 불발탄인가?'
빠른 속도로 달려간 뒤, 소리 없이 성벽 위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이지 중대의 임무였기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한 것이 오히려 악재로 작용한 것이었다. 대다수 중대원의 스패로우 카트리지에 화살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저들이 몰려오기 전에 알파와 찰리 중대원들이 성벽을 넘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마법사의 수장인 블로이는 자신들의 공격 한 번에 적의 대부분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믿고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방어하는 데 급급했던 몽뜨의 병사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자신들 바로 뒤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제 이대로 성벽 위의 잔당들을 쓸어버리면 이 새벽녘의 소동은 끝나는 거였고, 그 공은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당연했기에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때 자신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공들을 보고 블로이는 공들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엎드렸다. 조금 전 기사단이 당한 적들의 뛰어난 석궁을 보았던 터라, 지레 겁을 먹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저 바닥을 구르는 저런 구슬들을 두려워한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던지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다가 마주친 몽뜨의 병사도 부끄러운 듯 얼굴이 빨개지면서 머리를 긁었다. 마법사로서 그런 행동을 보인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창피했다. 발아래 굴러온 빨간 공을 보니 화가 나서 발로 걷어찼다.
번쩍!
퍼퍼펑!
쿠아아앙!
그 순간을 기점으로 온 사방이 불지옥으로 변했다. 자신의 동료 마법사들도 불에 휩싸여 몸부림쳤고 아까 눈이 마주친 병사는 아예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재로 변해 버렸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체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갔다.
"이... 이럴 수가 이건 악몽이야. 악몽!"
검을 든 손을 벌벌 떠는 로버트 남작은 자신의 소중한 병사들과 굳게 믿었던 마법사들이 불꽃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광경을 보며 이성을 상실했다.
"이... 이 모두 저 간악한 무리들을 죽여라! 저들은 악마다. 우리 이사벨라 여왕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자!"
여왕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두들 최면에 걸린 듯 함성을 지르면서 두려움도 잊은 채 불길을 뚫고 성벽 위의 이지 중대원들을 죽이려 몰려들었다.
"젠장, 뭐야! 이제 터진 거야. 휴~ 그래도 다행이군."
천만다행으로 수화탄(手火彈)를 던지다가 사고가 난 대원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가슴을 쓸어내린 피터슨 대위가 성벽아래 광장을 바라보았다.
수화탄(手火彈)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적병들과 위풍당당하던 마법사들이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화탄(手火彈)에 피해를 입지 않은 병력들이 두려움도 없는지 다시 이지 중대를 향해서 무기를 들이대며 다가왔다.
"지독한 놈들!"
좌우를 둘러본 피터슨 대위가 소리쳤다.
"카트리지 잔발 확인!"
스패로우를 확인한 병사들이 하나둘씩 복창했다. 대부분이 십여 발에서 대여섯 발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피터슨 대위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스패로우를 장전했다.
성벽 밑에서 밀려오는 몽뜨의 병사들을 향해서 방아쇠 고리를 당겼다.
금세 곳곳에서 화살이 다됐음을 알리는 외침들이 쏟아졌다. 피터슨 대위의 스패로우에서도 빈카트리지가 공회전하는 소리만 들렸다.
"백병전 준비!"
대위의 외침에 모두들 등 뒤에서 블레이드를 꺼내 들었다. 다리를 다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병사들도 모두 검을 꺼내어 벽을 의지해서 몸을 일으켰다.
얼마 후, 성벽 모루 위로 몽뜨 병사들이 올라서기 시작했다.
"제기랄! 이지 중대 돌격! 앞으로!"
최후의 결전을 향해서 달려드는 이지 중대원들의 두 눈에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었다. 새카맣게 기어오르는 몽뜨의 병사들과 이지 중대원들이 충돌하려는 순간, 이지 중대 뒤에서 수없이 많은 화살들이 이지 중대를 넘어 적들에게 쏟아졌다.
"크아아악!"
"켁!"
"으아아아악!"
투투투퉁!
"사격! 일제 사격! 모두 노리쇠를 자동으로 놓고 당겨!"
"찰리 중대도 전원 사격하라! 연사모드로!"
이지 중대 뒤로 이제 막 성벽을 올라온 알파 중대와 찰리 중대가 지원 사격을 시작했다. 계속해서 많은 수의 중대원들이 올라와서 거점을 확보하고 사격을 하니 이제 몽뜨의 병사들 중 성벽 위로 올라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위생병, 이지 중대원들을 보살펴라. 나머지는 적들을 사살해!"
"젠장, 일찍도 오셨습니다!"
피터슨 대위가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넋두리를 하자 호크 중령이 피터슨의 어깨를 툭 치면서 지나갔다.
"미안하다... 조금 늦었어. 이제 이지 중대는 좀 쉬도록. 알파와 찰리 중대는 도개교를 확보하고 문을 열어라! 이제 내성을 장악한다!"
호크의 외침을 들은 알파와 찰리 중대는 몽뜨의 병사들을 이지 중대의 복수라도 하듯 무참히 사살하였고, 양 옆의 모루에서 올라온 나머지 병력들은 성벽을 장악하면서 통로 계단으로 올라오던 적들에게 스패로우 공격을 퍼부어주었다.
몽뜨 요새는 세린디아 병사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임무를 마친 이지 중대원들이 성벽에 기대앉았다. 모두들 위장 크림과 땀으로 범벅이 되서 번들거리는 얼굴들이었다. 서로의 눈들이 마주치자 중대원들이 피터슨을 향해서 거수경례를 건넸다.
피터슨 중대장은 그렇게 살아남은 중대원들이 자랑스러운지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온통 검은 얼굴에 치아만 하얗게 보이는 얼굴이 꽤나 우스꽝스러웠는지 모두들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안도의 웃음이지 기쁨의 웃음은 아니었다. 이번 작전으로 같이 동고동락했던 동기, 선후배들이 죽어갔으므로... 그 죽음으로 자신들이 살아 있으므로.......
"그린로즈 기사단! 어서 막아 어서!"
로버트 남작의 발악하자 몸이 성한 기사단들이 하나의 진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녹색 검에서 녹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중령님! 분수대 옆에 적 기사단입니다!"
핸들러의 외침에 막 몽뜨의 병사 한 명의 생을 마감 시킨 호크의 고개가 홱 하니 돌아갔다. 드래곤 산에서 만났던 녹색머리 기사단 이었다.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천만에!"
차갑게 한마디 내뱉은 호크가 성벽 계단에서 그대로 몸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거의 땅에 이르자 몸을 공처럼 굴린 다음 바닥을 수차례 구른 후, 기사단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 뒤를 알파 중대원들이 몽뜨 병사들의 육탄 공격을 뚫고 뒤를 따랐다. 그 선두에는 핸들러 소령의 검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린로즈 기사단의 아이스(Ice) 마법 공격 준비가 끝나갈 무렵, 그들의 머리 위가 어두워지자 에론크만 기사단장의 고개가 하늘로 향했다. 그 곳에는 아침햇살을 받은 두 개의 검을 번뜩이면서 호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슈각! 서걱!
"으아아악!"
"저 자를 막아! 어서."
남작이 기사단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 남지 않는 병사들로 호크를 공격했다.
호크가 적들에게 둘러싸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핸들러 소령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중령님를 지켜라!"
핸들러는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무참히 베면서 전진했다. 앞에서 가물가물 보이는 호크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호크가 저렇게 혼자 뛰어드는 통에 핸들러의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호크가 제로를 정신없이 휘두르자 위풍당당하던 그린로즈 기사단들은 속절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갑옷도 더 이상 그들의 몸을 지켜주지 못했다.
겨우 한 사람에게 30여 명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그나마 병사들이 합세를 하고 나서 겨우 숨을 돌린 그린로즈의 에론크만은 이렇게 쉽게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몸이 성한 10여 명의 기사들과 뒤로 물러나 자신들의 검을 한곳으로 모았다.
호크는 쉴 새 없이 앞을 가로 막는 병사들의 품으로 파고들어 목을 베어갔다. 자신이 한명이라도 기사들을 제거해야만 부대원들이 한 명이라도 무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을 돌보지 않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깜짝 놀란 호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린로즈 기사단이 검을 모두 겹친 후, 주문을 외우는 모습에서 일전에 애쉬라는 청년이 보여준 그 검기를 그들이 재현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급하게 몸을 반대편으로 피한 순간, 호크의 발밑으로 10여 개의 녹색 검기가 호크의 발밑을 흩고 지나갔다.
슈아아악!
"중령님!"
핸들러의 다급한 외침에 중대원들의 마음도 급해졌다. 찰리 중대원들까지 합세하자 더 빨리 길이 터졌다.
일순간에 기운을 터뜨린 그린로즈 기사단원들의 검은 모두 유리조각처럼 깨어져 버렸고 기사들도 무릎을 굽힌 채 숨을 헐떡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 핸들러와 중대원들이 나타났다.
"모두 해치워!"
스패로우를 떠난 화살들이 기사들의 몸을 처참하게 꿰뚫었다.
"중령님! 괜찮으십니까?"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호크가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손사래를 치는 모습에 겨우 안심한 핸들러가 호크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콜록 콜록! 젠장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카악! 퉤! 조심해야겠어."
호크의 군복 오른쪽 어깨 보호대가 반 이상 잘려 나가고 그 안쪽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 내렸다.
"중령님이 부상을, 위생병!"
"됐어. 호들갑 떨지 마! 이건 다친 게 아냐, 알겠어! 그냥 스친 거라고. 명심해!"
제로에 묻은 피를 바닥에 흩뿌린 호크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이 저항하고 있는 내성 입구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핸들러는 무서운 기세를 드러내는 호크에게서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었다. 그런 생각은 잠시 뒤로 접고 호크의 뒤를 쫓아갔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어서 빨리 모르카시로 가셔서 이곳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모르카시... 모르카시... 모르카시! 그래 아직 행크 공작님과 이사벨라 여왕님이 계시지. 보급 기지인 이곳을 잃은 것이 큰 실수이기는 하지만, 모르카시에는 우리 세린디아의 정예가 있다. 아직은 기회가 있어. 좋다! 서둘러라! 그런데 아직도 통신 마법은 불가능한가?"
"네, 남작님! 이상하게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다 죽어버려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도대체 누구야? 로베니아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소란 중에 들리는 말이 케린버그 말 같습니다."
"케린버그? 말도 안 돼. 어떻게... 헉!"
부관과 살 궁리를 모색하던 로버트 남작은 위에서 날아든 화살들이 몸을 숨기고 있던 짐마차의 벽면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위협을 가하자 헛바람을 삼켰다.
"남작님! 어서!"
"좋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나머지는 모두 적들을 막고 우리는 모르카시로 후퇴한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남작님!"
행여나 이곳에서 귀족의 명예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서 옥쇄를 감행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마음을 졸이던 로버트 남작의 부관 헤이스는 남작이 쉽게 마음을 바꾸자 얼씨구나 하고 짐을 챙겨서 남작을 쫓아갔다. 방금 전까지 당황하고 좌절했던 로버트 남작이 헤이스의 설득에 용기백배해서 당당한 후퇴(?)를 했다.
이제 백여 명 남은 병사들이 적들을 막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잠시 뒤를 돌아본 헤이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네, 다들 그러나 나도 살고 봐야 하지 않은가? 모두 신의 은총을... 아니지. 그 신을 우리는 버렸지 않은가, 허허.'
충성스런 부하들을 전장에 남겨두고 부관과 수행기사 두 명만을 대동한 로버트 남작이 요새의 뒷문으로 빠져 나갔다.
불타는 요새를 뒤돌아 본 로버트 남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고 보자, 이 녀석들아! 지금은 실컷 기뻐하겠지만, 내일이면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얼굴에 숯 검뎅이를 묻히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행색에서 나오는 소리치고는 제법 비분강개했지만,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누... 누구냐?"
"누구긴 저승사자지! 모두 체포해!"
"감히! 저 녀석들을 막아라!"
아직도 착각 속에서 헤매는 로버트 남작의 지시에 어리석은 기사 둘이 검을 빼어들었지만, 검을 꺼내는 속도보다 빠르게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온몸에 화살을 두른 채 갑옷 무게만큼 무겁게 땅바닥으로 뒹굴었다.
약삭빠른 남작의 부관 헤이스는 벌써 두 손을 들고 항복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로버트 남작은 고성을 고래고래 지르면서 저항했지만, 애석하게도 수많은 병사들에게 꽁꽁 묶인 채 끌려가는 수모를 당하자 이내 조용해졌다.
"통신병, 본부에 보고해라! 적 수뇌급 인사를 체포했다고."
"네! 중대장님,"
치이이익.......
"...여기는 도그 중대......."
통신병이 무전을 날리자 망원경을 잡아 빼고 몽뜨 요새의 후문을 살피던 도그 중대 제이로 대위가 중대원들에게 요새 진입을 명령했다. 나형석 장군의 명령에 의해 몽뜨 요새의 후미를 감시하던 도그 중대도 전투가 끝나가는 것을 느끼고 후방을 정리하기 위해서 요새로 진입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전투가 정오가 되어서야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요새의 문이 열렸습니다, 장군님!"
"그래. 깃발이 바뀌고 있군!"
작전장교의 들뜬 목소리에 망원경으로 몽뜨를 지켜보던 나형석 장군이 세린디아의 깃발이 내려지고 외인부대의 깃발이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사령부에 전해라. 이 시각 이후부터 몽뜨는 케린버그의 영토라고!"
"알겠습니다, 장군님!"
무전병 역시 승전보를 전하는 것이 마냥 좋은지 들뜬 모습으로 무전을 보냈다.
"가자, 요새로!"
"네, 장군님!"
나머지 병력이 장군과 함께 몽뜨로 입성했다.
성력 879년 겨울, 윈터러의 첫날은 그렇게 피로 물들었다.
"부대 차렷! 충성!"
"충성!"
나형석 장군이 장교들과 몽뜨에 입성하자 매캐한 연기와 시체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성벽과 요새 광장 곳곳에 세린디아의 병사들 시체가 즐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나형석 장군은 말에서 내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목발을 짚고 자신에게 경례를 한 병사에게 다가갔다.
"소속은?"
"이지 중대입니다, 장군님!"
"그래, 고생이 많았군."
"아... 아닙니다. 장군님, 저희는 당연히......."
"아냐. 그런 식상한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네. 어차피 전쟁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야. 가능하다면 피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게 문제이지. 이름이 뭔가?"
"유... 유진 하사입니다, 장군님!"
"유진이라 좋은 이름이로군, 유진 하사,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도록. 명령일세!"
이지 중대 유진 하사는 지옥 같던 전투가 끝나고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기 속에서 나타난 사령관을 보고 얼이 빠져 버렸다. 최고 사령관을 만나게 되니 예전에 받았던 힘든 훈련도 있고, 말단 병사가 부대 사령관을 만나게 되니 얼마나 긴장이 되겠는가... 그 이유 덕택에 전투의 흥분마저 잊어버린 것이었다.
친히 병사들을 일일이 돌보는 나 장군의 모습에 대부분의 외인부대원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더욱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부대원들의 시체가 위생병들의 실수로 바닥에 떨어지면 급히 달려와서 시체를 보살피는 모습에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광장 한가운데 나란히 눕혀진 외인부대원들의 시신이 100여 구가 넘었다. 그중 대부분이 선봉 중대였던 이지 중대원들이었다.
"뭐라고 위로해줄까...."
"위로요? 후후, 그랬다가는 저놈들이 벌떡 일어나서 얼굴에 한 방 날릴지도 모르는데요!"
"그래, 그렇겠지. 모두들... 좋은 곳에 가겠지?"
"네! 아마도 전쟁도 미움도 없는 곳이 있다면, 다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죠."
"그래, 우리도 곧 따라가야겠지."
광장에 눕혀진 100여 구의 시신 앞에 선 이지 중대장 피터슨 대위와 호크 중령은 그 후로 오랫동안 말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중령님, 데려왔습니다!"
병사 두 명이 밧줄에 묶인 로버트 남작을 데려와서 예전에는 남작의 집무실이었을 서재의 책상 앞 의자에 앉혔다.
"상황이 좀 그렇지만, 어쨌든 만나서 반갑소, 로버트 남작!"
호크의 비꼬는 듯한 말에 로버트 남작의 눈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비... 비겁한 놈들, 기습이나 하는 야비한 것들 같으니라고."
"아니, 감히 저 작자가!"
핸들러가 불손한 말을 입에 담은 로버트 남작에게 황급히 다가서자 호크가 괜찮다고 하면서 핸들러를 막았다.
"비겁하다... 비겁하다... 누가 누구에게 비겁하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럼 가만히 앉아서 당신들이 우리 케린버그를 짓밟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정당당한 것인가?"
호크의 비아냥거림이 계속되자 로버트 남작은 무척이나 분한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웃어라. 실컷 비웃어! 하지만 이제 곧 너희들은 죽은 목숨이야! 알겠어. 크하하하하!"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광소하는 로버트 남작의 모습을 지켜보던 호크는 손가락으로 귀를 파면서 딴청을 부렸다.
"왜? 아직 모르카시에 알리지도 못했을 텐데 안 그래? 마법 통신이 안 되지 않았나? 그리고 전에 우리가 침투했을 때도 당신의 전통이 행크 공작에게 들어가지 않았거든?"
남작의 두 눈이 부릅떠지는 것을 보고 호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더니 로버트 남작을 쳐다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몽뜨가 보급기지이니 연락이 없으면 곧 이곳 상황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야, 남작 나리."
"이, 이, 그날 밤 요새에 침입했던 놈들이 너희들이었구나. 그날 끝까지 정체를 밝혔어야 하는 건데,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구나. 으득!"
"뭐, 상황은 벌써 이렇게 된 거니까, 후회하셔도 소용없고. 이봐, 로버트 남작 나리 되도록이면 피를 덜 흘리고 싶어서 그러거든, 당신이 협조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어때, 의향은?"
"뭐? 나보고 변절자가 되라는 건가? 푸하하하하하! 어리석기는. 난 세린디아의 귀족이며 이사벨라 여왕님께 충성을 맹세한 자이다."
호크는 비록 패장이지만, 두 눈에 서려 있는 로버트 남작의 각오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이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꽉 막힌 인물인 줄은 몰랐기에 호크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너희들이 어떻게 우리의 거룩한 성전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우리에게는 말이야."
"그래그래. 그 잘난 신의 전사들인 기간테스가 있지. 그 말 하려고 그랬지?"
"어... 어떻게 그 사실을......."
"후후, 내가 행크 공작, 그 친구와 일면식이 좀 있거든. 그건 그렇고 요즘 당신들을 보니까 말이야. 마치 여왕에 대한 태도가 거의 종교적 맹신에 가깝더군."
"맹신이 아니라 진정한 믿음이다. 어리석고 야만스러운 것들 같으니라고."
"야만스럽다? 하, 참내. 이거, 좋아. 뭐 어째든 샹그릴라의 신전들과 쥬(Ju) 관한 모든 것이 사라졌던데 나라 전체가 개종을 한 건가?"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다. 죽일 테면 죽이고 고통을 주려면 주어라. 내 마음속에 깊고 큰 믿음이 있는 한, 나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견딜 수 있다."
"후회할 텐데...."
"여왕님에 대한 충성은 영원불멸이다! 너희 케린버그의 야만인들은 천만년이 지나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
"뭐,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말이야. 그렇다면 평화적인 방법이 안 되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지. 밖에 누가 있나?"
완강히 거절하는 로버트 남작을 끌어내자 정보 장교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어떻게 됐어? 그쪽도 완강히 버티고 있는 거야?"
호크의 질문에 조금은 맥 빠진 표정의 정보 장교들이 서류를 앞에 내놓았다.
"그게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령님!"
"웃지 못 할 일?"
"기가 막히게도 심문도 하기 전에, 모든 것을 이야기해버렸습니다. 이 보고서도 남작의 부관 헤이스란 자가 직접 작성한 것입니다."
서류철을 넘기는 호크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뭐야? 지금 이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이거 무슨 소설도 아니고. 그러니까 5년 전에 세린디아의 국왕 한스 슈마트가 죽자 그의 아내인 이사벨라가 여왕이 되어서 통치를 했다. 그 후 행크 공작을 중심으로 세린디아를 뭐라고 했지, 음, 그래 성스런 정화를 위해서 아마리아족만 남기고 다른 인종들을 학살하거나 추방했다. 하! 참내! 이거 뭐 히틀러야, 뭐야? 그래서 그 여자 자신이 신이라고 카르고니아란 신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우습지도 않군, 이런 거 말고 고대유물과 기간테스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잖아!"
"그게 말입니다, 아직도 진술서를 쓰고 있습니다."
"뭐? 이봐, 지금 무슨 자서전 쓰나. 요점만 쓰라고 해. 요점만!"
"네, 대령님! 저희도 독촉하고 있습니다. 다만 워낙 특이한 작자라서 한번 입을 열면 도무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이런, 자고로 주먹을 가깝고 법은 먼 법이야, 알겠어? 지금 그렇게 평화적인 방법을 쓸 때가 아니야! 당장 족쳐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 이런 쓸데없이 이야기는 빼고 말이야!"
호크의 호된 질책에 정보 장교들이 사색이 되어서 밖으로 뛰어나갔다.
"중령님, 본부에서 전갈입니다."
"뭐야?"
전문을 읽어 내린 호크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그래, 장군님이 오셨군. 후! 좋아, 핸들러 소령에게 전하고 맞이하도록 해. 부관! 특임대 챠챠 대위를 불러와."
호출된 챠챠 대위와 함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한참 걸어서 내려가 경비의 안내를 받으며 어둡고 축축한 습기 가득한 지하실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경비를 보던 병사 두 명이 부동자세를 취했다. 호크가 고갯짓을 하자 병사 한 명이 철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낯익은 사람이 딱딱한 돌침대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온몸이 철로 된 걸쇠로 묶여 있었는데, 심지어 머리조차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있었다.
"로버트 남작 나리, 아직은 기회가 있는데 우리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어때?"
"......."
"어쩔 수 없지. 시작해라! 당신이 자처한 일이야 오늘밤을 넘기지 못한다는데 내 목을 걸지. 그럼, 나중에 봅시다."
호크가 막사 안의 병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돌침대에 묶여 있는 로버트 남작의 이마 위로 물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고문을 예상하고 있던 로버트 남작은 황당했다.
'뭐야? 고작 이거야, 이거냐구! 날 놀리는 건가?'
하지만 이것은 로버트 남작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이제 얼마 후면 저 작은 물방울의 공포를 알게 될 것이었다.
"한나절만 물방울 세례를 맞으면 아마 인사불성이 될 거야. 그때는 물어보는 말에 술술 대답할걸세. 그때 그 헤이스란 자의 진술과 비교해보고 보고해! 챠챠 대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전부 알아내. 지금 비인간적이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야. 알았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령님! 특임대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대위만 믿어. 그럼 수고해!"
밖으로 나온 호크는 내성이 외인부대의 거점으로 빠르게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며 한 손에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성벽에 도달한 것도 모르는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중령님! 아직 밖은 위험합니다. 가드를 대동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응? 뭐라고!"
호크가 그제 서야 겨우 고개를 들어 어느새 자신이 요새 정문까지 걸어왔다는 것에 놀라면서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 수고가 많군. 도그 중대인가?"
"그렇습니다. 대령님, 도그 중대 2소대 그레이 중위입니다."
"그래, 밖은 어떤가?"
"한번 보시죠!"
그레이 중위와 성벽 위에 오른 호크가 물어오는 질문에 그레이 중위가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조용합니다. 주변 1km 정도까지 정찰을 보냈지만, 적 병력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가? 헌데 저 들판에......."
호크의 손짓에 그레이 중위의 시선도 따라 갔다. 그곳에는 누더기를 걸치고 무리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 저들은 이방인(異邦人)들입니다."
"이, 이방인(異邦人)들?"
"네, 대령님! 포로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아마리아족들만이 순순 혈통이고 다른 종족들은 모두 질병과 병균이며 악의 종자라고 말하면서 저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다른 혈족들은 아무런 재산도 가질 수 없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없어서 저렇게 들판을 떠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해야겠죠."
"아니면 노예가 되거나!"
"네? 아, 네! 그렇겠죠."
무심한 눈길로 들판을 가로 질러가는 이방인(異邦人) 무리들을 바라보던 호크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중위! 저들을 모두 데려와라! 어서 서둘러.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잘 타일러서 데려와!"
"네? 아니 그게... 아, 알겠습니다. 충성!"
뚱딴지같은 호크의 명령에 그레이 중위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하사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들판의 이방인들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호크의 얼굴에는 희망의 빛이 보였다.
'그래 어쩌면, 잘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렇게만 된다면 이제 남은 골칫거리는 이거 하나뿐인데.'
호크가 손바닥 위의 검은색 메달을 어루만지면서 고민에 빠져 들었다. 전투 개시 후, 12시간이 지난 몽뜨에서 또 새로운 작전이 호크의 머릿속에서 짜여지고 있었다.
"중령님! 아까부터 장군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아차차! 이런 멍청한, 알았다. 어서 가자!"
자신을 찾아온 전령과 함께 급히 성벽을 내려가는 호크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 * *
"휴,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도대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공작님! 그게 워낙 놈들이 빨리 움직여서 면목이 없습니다."
"아닐세. 로베르트, 자네가 무슨 죄인가? 본국의 형님께서 보내신 어쌔신들이라면 최고 중의 최고일 텐데 놈들이 더 약삭빠르다는 이야기일 테지. 분명히 본국의 형님께서도 애가 탈 텐데, 답답하군. 그나저나 머스탱 놈들이 어째 너무 조용한 것 같아. 레센과 스티그마(낙인) 때문에 그동안 우리가 너무 신경을 못 쓴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워낙 인력이 달려서."
"그런가?"
"네. 케론스 공작님! 레센의 그림자 기사단들이 만만치 않아서요."
"그래. 지독한 놈들이지. 도대체 놈들의 목적이 뭘까? 지난번 일 년 전쟁의 후유증이 아직 상당할 텐데, 그리고 원로원 늙은이 때문에라도 봄멜이 그리 쉽게 움직일 수은 없을 게 분명한데. 젠장! 요즘은 더 늙는 거 같아, 후!"
케론스 공작은 답답한지 셔츠 목의 단추를 한개 풀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피곤에 찌든 얼굴을 두 손으로 매만지던 공작이 왼손을 들어 로베르트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자 그가 깊이 허리를 숙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의 고민처럼 날이 저물어 찾아든 어둠이 공작의 서재를 집어 삼켰다.
- 케린버그의 외인부대 점령지 몽뜨 요새 -
"중령님, 데려왔습니다!"
"안으로 모시게."
잠시 후, 장교 한 명에게 이끌려 들어온 남자가 불안한 듯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마지못해 끌려 들어왔다.
"수고했어. 그레이 중위, 자네는 나가 보게."
"넵, 충성!"
사내는 지금 처음 보는 복장의 군인들과 낯선 인사법에 이들이 도대체 누구일까? 하고 열심히 기억 속을 더듬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편히 앉으세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성함이......?"
"우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아니 잃어버렸습니다."
"후후, 혹시 억지로 빼앗긴 거 아닙니까?"
호크의 한마디에 넝마를 걸친 더벅머리 사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입술도 한쪽이 올라갈듯 말듯 했고,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은 주먹을 말아쥔 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흠, 아직 자존심까지 잃어버린 것은 아닌 것 같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겠는데.'
"우리는......."
굳게 다물었던 사내의 입에서 감정에 복받친 갈라지고 탁한 소리가 떨려 나왔다.
"우리는 그저 참고 살아왔습니다. 그뿐입니다."
"아예, 참고 살아 오셨다. 그래서 저렇게 사람들과 들판을 떠돌아다니면서 살아온 겁니까? 이리나 늑대도 아니고 그럼 버려진 강아지인가요?"
뒤에 서 있던 핸들러의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모욕적인 말이 사내에게 쏟아졌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호크의 멱살을 잡을 정도였지만. 오히려 사내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호크를 쳐다봤다.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세린디아 사람들은 분명히 아닌데."
방 안을 둘러보던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것 봐라, 이거 보통내기가 아닌데 뭔가 있는 사람이란 뜻으로 봐도 되겠지. 이런 분위기를 내뿜는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닌란 말씀.'
"우리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그런 곳으로 만들 생각이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책상 위에 놓인 땅콩을 까먹으면서 얄밉게 말하는 호크를 바라보던 사내의 전신이 크게 떨려왔다.
"우리가, 우리가 사람으로 보이오?"
"그럼, 사람이지 가축이요? 내가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동물하고 이야기할 능력은 없는데? 이봐, 핸들러 소령, 자네도 이 사람이 동물로 보여?"
"설마요? 아주 좋으신 분 같습니다."
"들으셨죠, 그렇다네요. 그래, 어쩌실 겁니까?"
"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어떻게 하면 이곳을 사람 사는 냄새가 가득한 곳으로 만들 수 있겠소?"
드디어 원하던 대답이 나온듯하자 호크가 책상 앞으로 몸을 당긴 다음, 깍진 낀 두 손 위에 얼굴을 올려서 사내에게 바싹 다가갔다.
"사람 좀 모아주시죠. 아직은 짐승이 되지 않은 사람 냄새나는 자들로 가능하겠습니까?"
"내 당장 모아오겠소.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으니 말이요."
"또 하나 있습니다. 상당한 피를 흘려야 할 겁니다."
"내 아이들을 따뜻한 침대에서 재울 수만 있다면 내 심장이라도 꺼내줄 수 있소."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모험을 걸어볼만 하죠!"
"당신들을 믿어도 되겠소? 우리 아이들의 아니, 우리 혈족의 운명을 당신에게 맡겨도 되겠냐는 말이요."
"어차피 저희들도 성공하지 못하면 세린디아의 들판에 뼈를 묻어야 할 판입니다. 뒤로 물러날 때가 없는 것은 피차일반이죠."
두 사람의 눈빛이 오랫동안 오고갔다.
핸들러 소령이 무척이나 길다고 느꼈던 시간 동안 역사의 한축을 바꿀 담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저렇게 보내도 되겠습니까? 우리의 정보가 누출될 우려가 있는데요?"
"정보 무슨 정보? 저들이 뭘 봤다고 말이야, 게다가 저렇게 자신들의 가족을 남기고 갔는데, 게다가 저 사람 분명히 예전에 한 가닥 하던 사람이 틀림없어! 분명해. 저 사람 덕에 우리는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배는 늘었어."
"네? 그렇게나 저들이 도움이 되리라고 보십니까?"
"후후, 내가 살던 곳에 말이야 프랑스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전쟁 때 자신들의 나라가 점령당했었거든. 그런데 그때부터 그 나라의 평범한 사람들이 주부, 학생, 아이들, 노인들이 뭐 그런 보통 사람들이 저항군을 만들었는데, 그 활약이 대단했다네. 두고 보라고, 하물며 지금 우리는 젖 먹는 아이 손도 빌려야할 처지인데, 물불 가리게 생겼어? 예전에 우리 조상 중에는 어린 소녀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죽어갔어. 전쟁은 그런 작은 요소, 요소가 모여질 때 승리를 이뤄가는 거라고 장군님이 말씀하셨지. 이제 곧 모르카시에서 들이닥칠 테니 대비를 해야지."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왜, 중령님을 호출하신 겁니까?"
"헉! 잊고 있었다. 이런 젠장!"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중령님!"
"아냐! 아무것도 그저 기간테스에 대한 일을 물으시더군."
"그럼 기간테스에 대한 대책도 마련하신 겁니까?"
핸들러 소령이 뭔가 희망찬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호크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핸들러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고개를 푹 꺾었다.
"에효, 생각하기 싫다. 어떡하지, 어떡하냐. 그게 젤 문제인데 말이야...."
고개를 치켜든 호크가 이번에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하늘에 구멍이 뚫리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전방 초소에서 연락입니다. 후속부대가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오른손으로 목을 매만지던 호크가 축 쳐진 어깨로 느릿느릿 방에서 걸어 나왔다.
뒤를 따르는 핸들러는 상관의 어깨에 짊어진 짐이 너무나 커 보이자 안쓰러웠다. 말없이 다가가서 망토를 걸쳐주었다.
"뭐야? 군복에 웬 망토야!"
"중령님은 외인부대의 장교이시지만, 저에게는 언제나 알렉스 호크 백작님이십니다. 오랜만에 백작 기분 좀 내셔도 괜찮습니다."
"참내, 싱겁기는...."
그래도 싫지는 않은지, 호크도 망토를 여미면서 후속부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정문으로 향했다.
정을 많이 받지 못한 호크는 언제나 다른 이의 관심이 그를 기쁘게 했다. 하늘에 뜬 달을 보니 사랑하는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연상녀였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이유를 느끼게 하는 여인이었다.
* * *
"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궁수들은 화살을 준비해라!"
꽤 멀리서 부터 흙먼지 일으키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 때문에 모르카시는 긴장 사태로 돌입했다.
말이 성벽 가까이 도착하자 기수가 말고삐를 채면서 끌어 당겼다. 그 바람에 말이 크게 울부짖으면서 앞발을 치켜들었다가 내렸고, 그 바람에 말안장 위에 있던 사람이 바닥으로 굴렀다.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군입니다! 부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경비병의 외침에 주변을 살피던 기사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일단의 병사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온몸이 피와 땀에 절어 있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봐! 정신 차려! 여기 물 좀 가져와라, 어서!"
조금 전의 기사가 소리치자 누군가 가죽물주머니를 건넸다. 마개를 열고 입가에 물을 부어주자 어디서 힘이 솟았는지 두 손으로 물주머니를 부여잡고 물을 정신없이 마셔댔다.
꿀꺽. 꿀꺽.
"후아, 후아, 고맙습니다."
"자네 어디서 온 건가?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보게. 어서, 이렇게 온몸에 피 칠을 하고 나타나서, 더군다나 어깨에 박혀 있는 화살은 처음 보는 건데."
"그보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몽... 뜨가 몽뜨가 점령당했습니다."
"뭐, 뭐라고 했나? 몽뜨가 어떻게 됐다고, 점령?"
"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쳐들어와서는......."
"이, 이럴 때가 아니다. 백작님께 알려! 어서!"
성문 경비병들이 불안한 눈으로 사라져 가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내성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마법사가 어디론가 통신마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모르카시 성은 한밤임에도 대낮처럼 불이 밝혀졌다.
"공작님! 비상입니다. 모르카시로 가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방해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 일분일초가 아까운 판인데."
"시급한 문제입니다. 듣고서 놀라지 마십시오."
부관이 뜸을 들이자 언덕 밑의 분지를 바라보던 행크 공작이 몸을 돌렸다. 허리에 양팔을 올려놓은 폼이 꽤나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은 하얀 백짓장처럼 변했다.
"...몽뜨가 함락됐답니다."
부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행크 공작의 몸은 계곡의 비밀 기지로 향하고 있었다. 부관이 언덕 밑의 광경에 시선을 한번 준 후, 서둘러 공작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이 사라졌지만, 언덕 밑 분지에서 여전히 요란한 굉음이 산속을 울렸다.
그 분지에는 거구의 괴물들이 무리를 지어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고 넘어질 때마다 산 전체가 울리고 흙먼지가 피어났다.
다름 아닌 세린디아의 비밀병기 기간테스였다. 모르카시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전술 훈련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번 전쟁 최후의 변수인 수십 기의 기간테스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움직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상대방 입장에서 본다면 공포와 두려움뿐일 광경이었다.
"여왕님의 충복, 행크입니다."
"어서 오세요. 이 일을 어쩌면 좋죠. 몽뜨가 함락되다니... 어떡하면 좋아요. 이 전쟁을 위한 모든 물자가 그곳에 있는데 경에게 무슨 대책이라도 있나요?"
"위대한 여왕 전하! 너무 심려하지 마옵소서. 저희들에게는 이만의 그린로즈 기사단과 여왕님의 말 한마디에 불속에 뛰어들 수백만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두려워 마소서!"
"호호호! 뭔가 오해했군요. 두렵다니요, 저에게 두려움이란 없답니다. 단지 위대한 성전에 차질이 있을까 그게 두려울 뿐이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 전후사정과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후, 대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기간테스들의 훈련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느니, 여차 하면 첫 실전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호호! 그래요? 역시 그린로즈 기사단답군요."
"네, 여왕님! 모든 것은 고대 유물들의 비밀을 파헤쳐주신 여왕님의 지혜 덕분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저희들이 그렇게 급속도록 기사단을 양성해내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야, 세린디아를 사랑해서 그런 거지요. 더한 일도 할 수 있답니다. 행크 경!"
"저 같이 미천한 자로서는 도저히 여왕님의 넓고도 큰 나라사랑의 마음을 도저히 좇아갈 수 없을 겁니다."
행크 공작이 깊이 무릎을 꿇고 예의를 올리자 여왕이 직접을 손을 들어 일으켜 세웠다.
"자! 자! 장수가 싸움도 하기 전에 이렇게 기운을 빼면 쓰나요. 그나저나 누굴까요? 혹시 로베니아에서......."
"로베니아는 아닙니다. 그들이 움직였다면 첩자들의 정보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혹여 정보가 없다고 해도 로베니아는 아닙니다. 만약에 그들이었다면 몽뜨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벌써 수도인 베를로니로 쳐들어 왔겠죠."
"휴, 그렇겠죠.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이죠?"
"일단은 적들의 정체를 파악해볼 겸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들이 누군지 그리고 무엇이 목적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좋아요! 경이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믿고 저는 수도로 돌아가겠어요. 성전을 위한 준비를 저도 서둘러야겠군요."
"네, 여왕님. 이곳은 심려 마시고 어서 수도로 돌아가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호호호호, 그럼 좋은 소식을 기대하죠."
행크 공작과 두 눈이 마주치자 여왕의 두 눈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가 사라졌다.
그때 여왕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행크 공작은 이미 이지를 상실했는지 그저 몽롱하게 여왕의 두 눈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네, 여왕님!"
행크 공작의 턱을 쓰다듬은 이사벨라 여왕이 시녀들과 함께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