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드러나는 세린디아의 힘!
"하아~ 하아~ 제길, 저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나?"
나무 위에서 강 반대편을 바라보던 호크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어느 정도 따돌렸다고 생각한 호크의 귀에 강 건너에서 호흡이 가쁜 말울음 소리가 들려오자 눈살을 찌푸렸다.
지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호크가 숲속을 가로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어느새 가까워지고 있었다.
점점 베일을 벗는 세린디아의 모습에 호크는 적잖이 놀랐다. 관심 밖의 지역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보가 왜곡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니, 그보다는 누가 어떻게, 이렇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짧은 시간에 세린디아의 무력을 지금의 수준으로까지 올려놓았는지 존경스럽기조차 했다.
몽뜨는 그렇다고 해도 이 모르카시는 규모 면에서 놀랍도록 거대했다. 또한 몽뜨와는 다르게 처음 보는 양식의 건축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한 요새 도시였다.
호크의 눈에는 모르카시의 아야크 성이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처럼 보였다. 언덕 위에서 모르카시를 지켜보던 호크는 뒤에서 추격대의 기운이 느껴지자 군장 속에 준비해둔 로브를 뒤집어쓰고 군장은 땅을 파서 묻어버렸다.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어깨에서 가슴 쪽으로 내려 맨 다음, 땅에 떨어진 나무 막대기를 들고 성문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냐?"
"나리, 불쌍한 나그네입니다. 제발 오늘 성에서 유할 수 있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윽! 뭐야, 이 냄새, 이 더러운!"
"잠깐! 로브를 벗겨봐라, 어서!"
이곳의 성문에도 역시나 녹색머리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병사가 코를 쥔 채 거지 차림의 로브 사내에게 다가왔다. 병균이 옮는 것이 두려운 듯 멀찍이 서서 창을 들어 후드를 벗겨냈다.
"욱! 젠장!"
후드가 벗겨지면서 드러난 모습은 두 눈이 흰자위만 있는 장님의 모습이었고, 게다가 얼굴에는 울긋불긋 종기 같은 것이 돋아나 있었다.
후드를 벗겨낸 병사는 고개를 돌리고 토악질을 했지만, 녹색기사들은 호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회색로브의 사내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고, 그 즉시 두 팔을 벌리고 영창을 외쳤다.
곧이어 호크의 몸 주위로 반짝거리면서 빛이 번쩍였다.
"마법에 의한 역용이나 변장은 아닙니다."
마법사가 변장이 아니라고 했지만, 뭔가 의심스러운 마음이 스물 스물 피어오른 녹색기사 중 한 명이 호크에게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기사의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호크의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이제 조금 더 다가오면 변장이 들통 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손이 점점 가슴에 숨긴 블레이드의 손잡이로 움직였다.
바로 그때 성문 밖에서 수십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뭐... 뭐야?"
"깃발을 보십시오! 몽뜨의 로버트 남작입니다."
"젠장, 서둘러라! 남작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이봐, 너는 지금 즉시 이 사실을 백작님에게 알려라. 어서!"
녹색기사의 명령에 어린 병사 하나가 발바닥이 보일 새라 있는 힘껏 내성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야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몽뜨의 로버트 남작이네. 오늘 성문을 통과한 사람 중 수상한 사람은 없었나?"
"별 다르게 수상쩍은 인물이나 일들은 없었습니다. 남작님!"
"빌어먹을 분명히 흔적이 이곳으로 이어졌는데, 알 수가 없군. 도대체 어떤 놈이지, 내부의 적인가 아니면 외부인가?"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닐세. 백작님을 만나 뵈어야겠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로버트 남작 일행이 정문 경비 기사 중 한 명의 안내를 따라 사라지자 부산했던 정문의 소란이 정리되었다.
"우헥헥헥 쿨럭!"
"저 더러운 거지새끼가, 어서 썩 꺼지지 못해!"
"제발, 자비를!"
젊은 병사가 날카로운 창날을 장님에게 들이대자 나이든 중년의 병사가 이를 제지했다.
"그만두게, 찬이슬이야 피하게 해주어야지. 들어가라, 대신 시내에 돌아다니다가 눈에 띈다면, 그때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천민촌 다리 밑의 할렘 쪽으로 가라!"
"감사합니다, 나으리. 복 받으실 겁니다요. 위대한 쥬(Ju)의 은총을 받으시길!"
장님거지의 입에서 쥬(Ju)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대번에 성문 경비대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다시는, 쥬(Ju)라는 더러운 이름을, 이 세린디아에서 올리지 마라. 알겠느냐?"
"아, 알겠습니다요."
후드를 다시 뒤집어쓴 장님거지는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안으로 사라졌다. 큰 대로변을 피해서 하천 밑의 빈민촌으로 발을 들여 놓은 장님거지가 거적으로 된 문을 들어 올려 비어있는 움집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주위를 살피던 장님거지가 두 눈을 매만지더니 무언가를 빼냈다. 흡사 콘택트렌즈처럼 보였다. 그리고 입에서 작은 구슬을 빼내자 흉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깨끗하게 변했다.
"휴, 사이클론 할아버지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혹시나 해서 챙겨둔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사이클론에게서 받았던 변장도구를 사용해서 장님거지로 분장했던 호크는 예상 밖으로 빠르게 적들이 자신의 꼬리를 잡자 오히려 모르카시의 아야크로 들어온 것이다.
품에서 지도를 꺼낸 호크가 한참을 들여다본 후, 다시 품에 갈무리했다.
고통 속에서 죽어간 정보원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귀를 울렸다.
'모르카시에 그 무서운... 고대 유물이... 반드시 파괴... 해야.'
"몽뜨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곳 아야크는 정말 대단한 군사요새구나. 폴렌시아의 모든 국가가 속고 있었어. 다른 왕국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로베니아에서도 몰랐다니 이해가 안 가.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분명히 행크 공작이 3일이면 돌아오고 곧 케린버그가 대가를 치룰 거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많은 병력은 어디에 모여 있는 걸까? 그리고 어디로 언제 어떻게 침략하려는 거지? 휴, 챠챠 대위의 포로가 그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좋으련만."
마음은 급하고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자 호크는 짜증이 밀려왔다.
"여기서 머리를 굴리고 있어봐야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겠지. 일단 놈들을 따돌렸으니 귀대해야겠다. 슬슬 움직여 볼까?"
움집에서 나온 호크가 어둠이 밀려오는 하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후, 할렘가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 *
"자연의 위대한 힘이여! 그대의 위대함을 나는 찬양하네."
"아우! 제발요, 할아버지, 그게 노래예요? 듣는 사람 괴롭다고요, 제발!"
"허허! 녀석도 위대한 바람의 마법사, 사이클론님의 노래를 듣는 것이 얼마나 영광인 줄 아느냐?"
"에이, 마법은 위대하실 줄 몰라도 노래는 전~혀 그렇지 않은걸요."
"내 노래가 그렇게 형편이 없더냐 ? 원 녀석도,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나를 따라나섰느냐? 나야 말동무가 생겨서 심심하지 않다만, 너는 호무관에 남아 있으면 편할 것을 말이야."
"헤헤, 전 원래가 모험가 체질이거든요.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요, 그런데 정말 호크 백작님에게 가는 건가요?"
"지금 당장은 아니다만, 가긴 가야지. 너 혹시 성기단장이 호무관에 방문하는 것 때문에 일부러 피하는 것이냐?"
"네? 아니 뭐, 그게 저 같은 말단 신관이 뭐 그런 분 뵐 일이 있나요. 그냥 요즘 백작님이 보이지 않아서 보고 싶어서요."
싸이클론의 말에 스톤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하는 모습이 저 지금 거짓말이에요, 하고 얼굴에 쓰여 있었다.
"뭐라고? 허허허! 기가 막혀서 그렇게 매일 구박당하면서도 그리 좋으냐?"
"네, 전 별로 행복했던 적이 없는데 백작님과 함께하면서 늘 행복해요, 즐겁고요!"
이번만큼은 진실이라는 듯 두 눈을 반짝이면서 사이클론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사이클론은 그런 스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 무슨 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호크와 내게 있는 동안에는 마음 편히 지내도록 해라, 불쌍한 녀석!'
스톤의 사연을 알기라도 하듯이 사이클론이 자애로운 미소로 스톤을 안아주었다.
"사이클론님, 뒤에 꼬리가 붙었습니다."
루브카가 말에 속력을 낸 다음, 사이클론의 마차에 바짝 붙으면서 말을 건넸다.
"이제야 우리를 발견한 건가, 허허. 그놈들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어떻게 첩자 노릇을 해먹겠다는 거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아니 오히려 늦었다고 힐책하는 사이클론의 태도에 어린 스톤은 이해하기 힘든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누군가 우릴 쫓고 있다는데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허허허, 우리의 이번 여행은 숨바꼭질 같은 거다, 얘야! 그런데 좀 다른 숨바꼭질이지. 술래가 많고 숨는 사람은 바로 우리 하나 거든, 허허허허!"
무엇이 그리 기분이 좋은지 사이클론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 뒤로 짐마차의 짐칸 안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특이한 궤짝 하나가 짐칸을 채우고 있었다.
"단장님! 성스런 돌의 기운을 찾아냈습니다!"
"뭐야, 도대체 이번에는 어디인가?"
"그게 잉글햄 밖입니다. 요크셔 지방이 있는 신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성스런 돌이 쥬(Ju)의 눈물에 모습을 보였답니다."
"방향은 어디인가?"
"요크셔 남쪽의 맨체트 영지로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흠, 호무관에서 폐를 끼치는 것은 이제 그만두어야겠군. 모두에게 알리고 당장 떠날 채비를 갖추게. 어서!"
샹그릴라의 성기단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케론스 공작 집무실 -
"로베르트 틀림없나?"
"네. 공작님, 추적자들이 스티그마(낙인)의 흔적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드디어! 어서 빨리 추격대를 보내라!"
"그렇지 않아도 이미 추적자들이 맨체트 영지로 떠났습니다. 공작님!"
"아니다. 그들만 가지고는 안심이 안 돼. 모든 인력을 전부 그쪽으로 투입해! 최우선 상황이다. 우리의 사활이 걸린 일이야, 로베르트!"
"넵! 공작님 총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본국의 형님에게도 기별을 넣어라. 어서! 아마도 크게 기뻐하실 거다."
그날 밤 잉글햄과 케린버그 각지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케린버그 남쪽의 맨체트 영지를 향해 움직였다.
- 폴렌시아 동토의 제국, 레센 -
"크라우슈, 그림자 기사단에서 연락이 왔다고?"
"네, 봄멜 공작님. 거의 모든 첩자들이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그래? 웅크리고 있던 무리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테이블 바닥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봄멜 공작이 결심이 선 듯 입을 뗐다.
"이 겨울이 지나기 전에 모스크 산맥을 넘어야겠어!"
"공... 공작님!"
아직 세린디아와 전쟁도 끝나지 않은 마당에 케린버그에 또 다른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사이클론 영감이 잘해주고 있어야 하는데, 가짜 낙인이 정말 잘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각국의 정보원들의 눈을 돌릴 수 있을지는 의문인데......'
"응, 뭐야! 이 사람들은?"
호크가 할렘가에서 나와 성의 외곽을 벗어나기 위해 성벽 쪽으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것을 보고 호크는 호기심이 생겼다. 잠시 어떻게 할지 갈등했지만, 지금은 하나라도 정보가 아쉬운 상황이었고 호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후드를 더 깊이 눌러쓰고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니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왔다. 잠시 후, 엄청나게 큰 규모의 광장에 도착했다.
"들어라! 들어라! 세린디아의 백성들이여, 위대한 이사벨라 여왕님의 뜻을 받들어 이제 곧 더러운 로베니아의 충견 케린버그를 응징하자!"
"와와와! 세린디아 만세! 세린디아 만세!"
"백성들이여, 위대하신 이사벨라 여왕님을 맞이하라."
그 순간 광장 안은 패닉상태로 빠져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여왕을 칭송했다. 비명을 지르면서 광분하는 사람들과 극심한 감정 변화로 기절해서 쓰러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뭐야, 이거 완전히 사이비 종교 행사장이잖아!'
호크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란의 현장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무대 단상 위로 화려한 망토를 두르고 머리에는 황금빛 왕관을 쓴 섬뜩한 느낌의 여인이 나타나 손을 흔드는 것과 때를 같이해 광장 안의 인파들은 그야말로 광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단상 위 여인이 다시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니 광란의 괴성으로 가득 찼던 광장 안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세린디아의 백성들아, 영광스런 성전의 때가 다가왔다. 세린디아는 이제 깨어났다. 우리들은 베로니크의 힘을 얻었고 이제 우리는 위대했던 선조들의 힘을 얻어야만 한다. 나의 백성들이여, 나는 안다. 분명 그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는지. 그래서 그대들이 얼마나 새로운 변화를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고 애원했을 때, 너희들 혼자서는 절대로 행동하면 안 된다고 한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말에 따라야만 한다. 너희는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너희는 이 절대적인 지배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와아아! 여왕님 만세!"
세상이 돌고 있었다. 미쳐서 돌고 있었다. 사람도 돌고 하늘도 돌고 온통 광기에 휩싸여 돌고 있었다.
호크는 전신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공포였다.
'이, 이런 젠장 그렇게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군.'
호크는 보았다. 사람들 중간 중간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모든 것은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된 것이었다.
호크는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이들의 모습을 보건데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전쟁이 발발할 것은 자명한 일, 호크는 단상 위 여왕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난 후, 입술을 깨물고 광장에서 사라졌다.
호크는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모르카시를 빠져 나갔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들이 아닌, 광기에 휩싸인 집단과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괴멸해야만 끝난다. 이것은 어느 쪽이 승리하든 패배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의미 없는 살육전일 뿐이었다.
"헉헉, 젠장! 겨우 빠져 나왔군 그나저나 최악의 시나리오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렸어, 결국은 무조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인데,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승리를 하려면 속전속결뿐이야."
온몸에 서린 소름을 로브자락을 털어내면서 마음을 추스른 호크가 광란 속에서 빠져나왔다.
로크 산맥의 고지대를 향해 가던 호크는 언덕너머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기운에 저절로 몸이 이끌려갔다. 언덕을 오르는 호크의 등 뒤로 모르카시의 불빛이 어두운 매래를 암시하듯 점점 그 빛을 잃어 갔다..
"뭐야! 이거, 이놈들이 여기까지 세력을 확장했단 말이야?"
바위 뒤에 몸을 숨긴 호크는 계곡 아래에 만들어진 건물들과 수많은 병사들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여기서 외인부대의 야전진지까지 불과 4km 남짓이었다. 코앞에 적을 두고도 몰랐으니, 좀 전에 모르카시에서 놀란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등 뒤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십여 명씩 조를 이룬 경비병들이 횃불을 밝힌 채, 순찰을 돌고 있었다. 예의 녹색머리 기사단들이 눈에 불을 켜고 요소요소를 감시하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형성된 군막들 뒤로 커다란 동굴 입구가 보였다. 동굴을 살피던 호크의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낯익은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야, 반갑구만! 행크 공작. 재수 없는 자식, 너 잘 만났다!'
드래곤 산의 동굴에서 있었던 악연이 떠오르자 호크이 입 꼬리가 턱 선을 따라 말려 올라갔다. 혼돈의 블레이드를 손에 꽉 쥔 호크의 몸이 수풀을 따라서 동굴로 향했다. 두 눈을 행크 공작이 사라진 동굴 입구에 고정한 채 경비병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진땀나도록 힘이 들었다. 경비가 워낙 많았고 경비망이 이중 삼중이어서 동굴 입구까지 접근하는데, 호크는 한 십년쯤 걸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친 호크가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어슴푸레 동녘이 터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입이 바싹 타오는 것을 느낀 호크가 천막 사이에 몸을 숨긴 채 경비병들이 자신의 앞에서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경비병들이 막사로 돌아가자 호크가 몸을 날렸다. 동굴 입구 문턱 바위에 몸을 숨긴 호크는 동굴 입구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경비병들을 보니 기운이 쭉 빠졌다.
'제기랄! 도대체 뭘 숨겨두고 있기에 이렇게 많이 풀어놓은 거야? 이쯤 되면 그냥 갈 수는 없다는 건데.'
이럴 때는 전통적인 방법이 최고라고 생각한 호크는 발치의 돌멩이를 들어 동굴 입구 오른편 나무를 맞추었다.
딱!
"뭐야? 누구냐?"
덩치가 곰 같은 경비병의 외침에 동굴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시선이 오른편 나무로 향했다.
호흡을 가라앉혀서 기운을 전신에 돌리고 있던 호크는 기회가 오자 재빠르게 동굴로 몸을 던졌다.
등 뒤의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던 한 경비병이 주위를 둘러본 후, 고개를 갸웃거리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동굴 입구는 아무 일 없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후아, 이거 잠입하기 정말 힘드네."
동굴 벽에 붙어, 푸념을 털어 놓은 호크가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서 동굴 안으로 조용히 숨어들어갔다.
한참 안으로 들어가니 반대편 입구에서 불빛과 함께 인기척이 들려 왔다. 호크는 다람쥐처럼 천장으로 올라가서 몸을 고정한 채 기척을 숨겼다.
저벅, 저벅.
20여 명의 병사들이 시퍼런 창날을 번뜩이면서 호크 아래로 지나갔다.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착지한 호크가 더욱 신중히 상체를 숙이고 발소리를 죽인 상태로 조용히 길을 찾아 나섰다. 중간 중간 경비병들과 조우했지만, 그때마다 비슷한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꽤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그곳은 창문처럼 벽에 많은 구멍이 뚫린 복도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말소리와 기계음 비슷한 소음이 한데 어우러져서 매우 시끄러웠다. 호크는 구멍 중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곳 하나를 골라서 기어들어갔다.
고개를 내밀어보니 커다란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스탠드처럼 광장 주위를 두르고 있는 계단 위에는 녹색 기사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호크의 시선을 끈 건 녹색기사들이 자리하고 남은 스탠드 계단의 절반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기간테스였다.
"저 괴물들을 어디다 숨겨 놓았나 했더니 바로 여기였어. 도대체 몇 기나 되는 거야. 하나, 둘, 셋... 일흔 아홉, 여든! 미치겠군. 어디서 저렇게 많은 수의 기간테스를 구했을까?"
호크가 기간테스의 출처에 대해서 생각에 잠겼을 때, 허스키한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세린디아의 백성들아! 아마리아인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이사벨라 여왕님을 위해, 그대들의 피가 필요하다 준비되었느냐?"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매우 다르게 변해버린 행크 공작의 외침에 광장에 운집해 있던 수많은 세린디아인들이 최면에 걸린 듯이 기쁨에 떨면서 환호성을 외쳐댔다.
그들의 아우성에 광장 안은 또 다시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뜨거운 이상한 열기가 광장을 뒤덮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어제 본 사이비종교 집회를 여기서 또 보는군.'
호크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려는 듯 녹색기사 두 명이 기간테스 앞에 위치한 하얀 천으로 뒤덮인 어떤 물체 앞에 서더니 천을 잡아끌었다.
덮어두었던 하얀 천을 모두 벗겨내자 그곳에 서 있는 한 여인상의 모습이 보였다. 여인상은 오른손에 달을 상징하는 들소의 뿔을 들고 있는데, 그 뿔에는 4개의 금이 그어져 있었고, 왼손은 유난히 부푼 자신의 복부를 가리키고 있었다.
드래곤 산속 동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여인상이었다. 지난번에는 물 항아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었고 지금은 임신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 외에 굳이 다른 점을 찾으라면 이 여인상의 두 눈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다는 정도였다.
행크 공작이 석상 앞에 다가선 후, 자신의 벨트에서 예리한 단검을 꺼내들고 손바닥을 베었다.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자 재빨리 흐르는 피를 석상의 머리 부분에 갖다 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행크 공작의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저음의 기괴한 소리가 동굴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행크 공작의 주문이 끝나자, 석상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가면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자, 선택받은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세린디아와 이사벨라 여왕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서 신의 전사들에게 그대들의 피를 바쳐 우리의 뜻을 보일지어다!"
행크 공작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제 겨우 16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기쁨에 떨면서 석상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곧이어 석상의 두 눈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를 감싸 안았다.
광장에서 벌어지는 집회를 지켜보던 호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헉! 이런 개 같은... 저 녀석이 기어코.......'
소녀의 뒤를 이어 몸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자 호크는 경악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빛을 쏘이게 되는 사람들은 서서히 미이라처럼 말라 비틀어져 갔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이가 빠지더니 곧 온몸이 쪼그라들어서 결국은 바람 빠진 풍선마냥 거죽만 남아 바닥에 쓰러졌고 금세 먼지로 변해 버렸다.
사람이 먼지로 사라지는 광경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망설임 없이 빛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호크는 두려움을 넘어선 공포를 느꼈다.
호크의 두 눈이 사람들의 생명을 쉴 새 없이 빨아들이는 석상으로 옮겨졌다.
그때 호크의 블레이드가 울기 시작했다. 제로는 쥬(Ju)의 신물에 반응한다고 드래곤 산에서 만난 아레네스가 말해준 것을 기억해낸 호크는 저 석상의 정체가 세상에 흩어졌다는 신물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웅웅~'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손잡이를 가볍게 쥔 호크는 아이를 달래듯 제로를 토닥거렸다.
'그래, 그래. 너도 저 석상을 느끼는구나! 아마도 저 석상이 여신 미르네보의 모습이겠지. 왜 그녀는 신이란 절대적 존재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토록 인간을 미워했을까? 정말 주신 쥬(Ju)가 인간을 총애했다고 질투를 느껴서 그랬다는 것은 뭔가 억지가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동굴에서 만난 아레네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도 의심스럽단 말이야. 인간들이 멸종하기를 바라는 어떤 속내가 있는 것일까? 아무튼 그날 드래곤 산의 동굴 속에서 저들이 기를 쓰고 찾고 있던 고대 유물이 저것이었구나. 저걸 파괴해버려야겠어! 그런데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사람들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는... 저, 저.'
순간 호크의 두 눈이 더 커지며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놀라운 광경에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생명을 끊임없이 빨아들이던 석상의 두 눈에서 붉은빛이 레이져 쇼를 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비산해서가 아니었다.
석상 뒤에 서 있는 기간테스들과 마치 거미줄로 연결된 듯 피빛 빛줄기들이 기간테스의 이마로 흘러들어간 뒤, 사람들이 더 많이 석상에 몸을 내던질수록 빛의 밝기는 밝아졌다.
기간테스들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온 세상을 밟아버릴 듯이 두 눈들이 더욱 짙게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호크는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손바닥에 흥건히 고인 땀을 닦아내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더욱 놀라운 일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중년부인이 빛 속에서 생기를 잃고 먼지가 되어 날아가자 석상이 크게 진동했고, 어느 순간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은 강한 빛이 광장 안에 쏟아졌다.
호크도 고개를 잠시 돌려 눈을 보호해야만 했다.
잠시 후 주변이 조용해지자, 고개를 들어 다시 광장 안을 살폈다. 이미 먼지가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시신이 사라지고, 광장 안에는 녹색기사들과 행크 공작 그리고 기간테스들만이 남아 있었다.
기기기긱......!
기기기긱......!
호크가 몸을 조금 들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광장 안은 귀를 거슬리는 기계음 비슷한 소리로 가득 찼다.
소리의 진원지는 석상 뒤에 나열된 기간테스들이 일제히 일어서는 소리였다. 기간테스들의 두 눈은 여전히 붉은빛을 뿜어댔다. 이어 음산한 소리가 처음에는 조용히 들리더니 점점 크게 퍼져 나갔다.
[전쟁!]
[전쟁!!]
[전쟁!!!]
작았던 소리가 이제는 귀를 막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두 눈이 붉은 빛으로 가득한 기간테스들의 외침이었다.
행크 공작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맨 앞의 기간테스에게 다가섰다.
"전쟁을 원하나?"
[너는 누군가?]
"너희들을 전쟁터로 이끌 전도사다!"
[전쟁?]
"그렇지. 위대한 성전이 될 우리 세린디아의 정복전쟁 말이야. 크하하하하!"
[좋다! 태고부터의 맹약에 의해서 우리에게 싸울 전장을 마련해준 그대의 의지에 우리의 발걸음이 함께할 것이다!]
행크 공작은 돌아서 녹색기사들을 향해 두 손을 치켜 올리고 괴기스럽게 외쳤다.
"그래, 그래야지 크하하하! 이제야 기간테스에 탑승한 기사들을 희생하지 않고, 오랜 시간 저 신의 전사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어, 크하하하하!"
행크 공작의 광소에 호크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 드래곤 산에서 자신과 대결을 벌였던 기간테스에 탑승했던 젊은 기사가 미이라처럼 말라 죽어있던 것을 기억해내자, 눈앞이 환해지고 흩어졌던 조각들이 들어맞으면서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호크는 저 괴물들을 오랜 시간 작동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시킨 행크 공작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호크의 손이 서서히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이 나치 같은 자식!'
감정이 폭발한 호크의 손이 떨렸다. 이대로 검을 들고 덤벼들면 당장에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차갑고 냉정한 이성이 분노한 마음을 붙들었다.
'아니야, 아니지. 지금 저놈 한 놈 죽인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휴, 진정하자, 진정. 후우! 후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내려 누르기를 수차례 반복하니 차가워진 머리가 감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이성을 되찾은 호크가 광장 안의 상황에 다시 신경을 집중했다.
"좋아. 그린로즈 기사단이여, 어서 기간테스와 맹약을 맺으라!"
행크 공작의 명령이 떨어지자 계단에 서 있던 수많은 녹색기사들이 기간테스들 앞에 서서 자신의 손바닥에 피를 낸 후, 기간테스의 가슴에 문지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기간테스의 가슴에 균열이 생기면서 황금빛이 기사들에게 쏟아졌다.
빛을 쏘인 기사들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쓰러진 기사가 있는 자리에는 대기하고 있던 다른 기사가 뛰어들어 맹약을 맺었다.
결국 수많은 기사들이 희생하고 그중에서 79명만이 기간테스 옆에 서 있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광장 안의 다른 사람들처럼 온몸이 말라비틀어지더니 먼지로 사라졌다.
행크 공작이 기간테스 옆에 서 있는 기사들을 향해 광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우리는 무적의 기간테스군단을 가졌다. 이제 곧 케린버그는 풀 한포기 남지 않는 죽음의 땅이 될 것이다. 이 땅에 오직 아마리아인과 그분의 말씀만이 세상에 울리게 만들 것이다. 크하하하하!"
"저.... 죄송합니다. 공작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기간테스 한 기가 맹약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그럴 리가?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어. 어떻게 태고의 맹약에 의한 계약을 거스를 수가 있단 말이지? 어떤 기간테스인가? 가보세!"
뜻밖의 상황에 놀란 행크 공작이 당황한 얼굴로 보고한 기사를 따라 나섰다.
행크 공작이 도착한 장소에는 다른 회색 빛깔의 기간테스들과 전혀 다른 타입의 기간테스가 서 있었는데 생김새가 온통 검은색으로 묵빛을 띠고 있으며, 투구를 눌러쓰고 투기를 뿜어내고 있는, 전사의 모습을 한 금속 거인이었다. 한 손에는 소드를 들고 한 손에는 방패를 든 모습이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행크 공작은 그 기간테스 앞에서 서서 한숨을 토했다.
얼마나 많은 인명, 시간과 돈이 들어갔던가? 특히 저 검은색 기간테스를 발굴할 때는 동굴이 무너져 내려 수많은 인명을 앗아 가지 않았던가?
말없이 그 검은색 기간테스를 바라보던 행크 공작이 아쉽지만, 결심이 선 듯 수하에게 출발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맹약을 맺은 기간테스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서서히 몸을 움직여서 광장 안을 빠져 나갔다.
행크 공작은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한동안 검은색 기간테스를 바라보다가 수행원들의 재촉에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서 광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던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나와 홀로 남은 검정색 기간테스를 통나무 굴림 통을 이용해서 어디론가 옮겼다.
어둠속에서 두 눈을 빛내고 있던 호크는 검은색 기간테스를 옮기는 무리를 좇아갔다.
밑에 통나무들을 받힌 채 천여 명의 사람들이 검은색 기간테스를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며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곳 사람들은 신의 무기라든가 고대 마법 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호크는 기간테스가 로봇처럼 느껴졌다. 자라면서 배운 교육의 차이 때문이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첨단 메카닉 기계의 이동 방식이 옛날 피라미드를 지을 때 쓰였던 돌을 나르는 모습이라니 좀 아이러니 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간테스가 지나간 자리에 있던 통나무를 다시 앞으로 옮기는 수고를 한참동안 한 후에 거대한 석조 건물 안으로 기간테스를 옮겨 놓고 말없이 왔던 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잠시 몸을 숨긴 후, 주의를 살피던 호크는 의외로 석조 건물을 지키는 병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내자, 지체 없이 몸을 일으켜 최대한 벽에 붙은 채 석조 건물의 안으로 들어갔다.
석조 건물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다. 아주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듯 곰팡이 냄새가 호흡을 하는데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손수건을 꺼내서 마스크처럼 얼굴에 두른 호크가 통나무가 끌리면서 난 흔적을 따라 건물 복도를 따라서 들어갔다.
어둡고 길고 긴 통로의 끝에 두 개의 횃불 사이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있는 검은색 기간테스가 호크의 눈에 들어왔다. 호크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일전에 드래곤 산에서 본 기간테스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 본 것은 산양 얼굴의 괴물 같은 형태였는데, 눈앞에 있는 이 검은색 기간테스는 마치 인간 기사가 갑옷을 입고 있는 형태였다. 머리에는 고대 트로이 병사들의 투구처럼 생긴 것을 쓰고 있었고, 양쪽 어깨에는 아주 단단해 보이는 보호구처럼 견갑이 둘러져 있었다. 가슴과 하복부 부분은 각진 플레이트가 보호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에게는 없는 검과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휘~유! 대단한 걸. 그때는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이라서 제대로 못 봤는데, 자세히 보니, 이거 완전히 건담(Gumdam)이잖아! 대단 하다. 분명히 여기 물건은 아닌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이런 메카닉이 존재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도저히 말이 되지를 않아. 21세기 지구에서도 이 정도로 동작하는 기계는 아주 먼 미래의 일인데 말이야. 흠, 너는 도대체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 거냐?"
꼭 사람에게 하듯이 호크가 혼잣말을 하자 투구속의 두 눈이 하얀빛을 띠면서 반짝거렸다.
우우웅~
제로의 검신이 마구 떨면서 또 다시 검명(劍鳴)을 크게 내었다. 제로가 울부짖자 호크가 깜짝 놀라서 두 개의 제로를 가슴에 끌어안고 기간테스에게서 떨어졌다.
들킬 것을 염려한 호크는 제로를 꼭 잡고 조용해지길 기도했지만, 점점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제로의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검은색 기간테스가 두 눈이 반짝거리며 무릎을 펴기 시작했다.
"젠장!"
호크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복도 벽으로 몸을 날린 호크는 밖의 동정을 살핀 후, 이제 막 일어선 기간테스에게 몸을 돌렸다.
[태초의 맹약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인도할 자여, 나는 그대의 종으로서 충성을 맹세한다!]
어눌한 기계음이 건물 안을 울리면서 검은색 기간테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호크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도 몸집이 커보였는데, 호크가 물러서면서 기간테스도 몸을 일으키니 신장이 8미터가 넘어 보였다.
호크는 기간테스에게서 위협감이 느껴지지 않자 기간테스에게 향했던 블레이드 제로를 검집으로 돌려보낸 뒤, 기간테스에게 다가갔다.
"태초의 맹약? 주어진 운명? 내가 너의 주인이라고? 허참! 이게 무슨 도깨비장난인지 모르겠네."
[그렇다! 헬레로니아 시대 이후, 이어져 온 맹약과 운명. 이제부터 나, 엥귀오스는 주인과 운명을 함께하겠다.]
대답과 함께 한쪽 무릎을 꿇은 기간테스의 행동에 오히려 호크가 당황해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무... 슨 소리야, 도대체! 주어진 운명이란 또 뭐야?"
[전쟁!]
어색한 발음으로 내뱉는 기간테스의 이 말 한마디가 지옥의 올가미처럼 호크의 전신을 옭죄어왔다.
조금 전, 광장에서도 다른 기간테스들이 전쟁을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기간테스에게 주어진 운명이란 것이 오직 전쟁 수행이란 말인데, 도대체 어떤 전쟁광들이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냈는지 호크는 머리가 깨질 지경으로 혼란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괜히 너하고 이야기해서 머리만 복잡해졌어. 미안하지만, 난 너의 주인이 될 생각도 없고 시간도 없다. 대신 너희들의 약점이 있으면 가르쳐주라! 될 수 있으면 치명적인 것으로 부탁한다!"
[기간테스는 기간테스만이 상대할 수 있다!]
잔뜩 기대하던 호크가 뻔한 대답을 듣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호크는 천장을 향해 한숨을 내쉰 뒤, 바닥에 주저앉았다. 행크 공작이 가진 기간테스는 79기나 된다.
이곳 모르카시에서 외인부대의 진영까지 불과 4km. 게다가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대마법사 사이클론까지 가짜 낙인을 만들어서 적국의 첩자들을 끌고 다니고 있으니, 오로지 자신들만의 힘으로 세린디아의 기간테스군단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이것은 그야말로 보병대 vs 기갑부대의 대결이었다. 일백 번 싸워 봐야 일백 번 질게 분명한 게임이었다. 게다가 이 일은 게임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과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린 전쟁이었다.
대전차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 디안 요새 전투 때 이미 가지고 있던 무기의 대부분을 소진해 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K2 실탄 몇 박스와 수류탄 정도였다. 그것 가지고 저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클론의 말에 따르면 기간테스에게는 마법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오로지 물리적 공격만이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자신도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겨우 한 기를 파괴하는데 그쳤다. 그것도 탑승자가 생명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긴 터라, 간신히 상대한 것이었다.
호크는 아예 그 자리에 누워 버렸다. 아무리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짜도 보이는 것은 어두운 절망뿐이었다.
한참을 그대로 바닥에 누워 있던 호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휴, 생각하면 뭐하니. 이제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으니 부대로 복귀하자.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일단 붙어보자. 군인이 죽을 때가 전쟁터밖에 더 있어!"
마음을 다잡은 호크가 뒤돌아서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응? 뭐야! 내 발자국 소리가 왜 이렇게 크지? 그럴 리가 없잖아? 어? 혹시?"
호크의 불길한 생각이 맞았다. 기간테스가 호크를 따라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육중한 몸이 따라서 걸어나오니 건물 내부를 울리는 소리에 호크는 경비병들이 나타날까봐 당황했다.
"이, 이봐 너는 왜 따라 나서는 거야? 그냥 거기 있어. 잠을 자든 뭘 하든 어쨌든 나오지 마라! 알았지?"
[신의 증표를 가지고 있는 자여! 이미 그대는 나의 주인, 그대와 함께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하! 참내, 이것 혹 붙인 결과가 되어버렸네. 이봐, 나는 갈 길이 멀다고 너하고 같이 다니면 곤란하거든. 게다가 신의 증표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대의 검은 혼돈의 검, 신들의 전쟁에 쓰인 검이다. 검의 주인으로서 맹약을 맺으면 나는 아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다. 대신 메달을 그대에게 줄 것이다. 메달을 가지고 나를 부르면 어디서나 소환이 가능하다.]
'제로가 신들의 전쟁에서 쓰인 검이라고? 예사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까지 대단한 검 인줄은 몰랐네, 그나저나 젠장! 저놈하고 더 실랑이하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좋아. 일단 어떻게든 달래고 보자.'
"좋아, 좋다고! 그럼 빨리하자고!"
적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빠져 나갈 생각뿐인 호크는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맹약을 약속했다.
기간테스가 운명에 따르겠냐고 물었고, 호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호크와 기간테스가 사이에 빛이 터져 나왔다. 눈이 부신 호크가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에는 황금빛 메달 하나가 눈높이에 떠 있었다. 그냥 두고 가려다가 기간테스는 기간테스만이 상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 호크는 이 한 기라도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고 재빨리 품속에 갈무리했다.
석조 건물을 빠져 나온 호크는 동굴 곳곳을 둘러보면서 전쟁 준비가 무르익었음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침 해가 중천에 뜨자 결국은 빠져 나가길 포기하고 문제의 석상을 찾기 위해서 하루를 더 소비했지만, 석상의 흔적은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윽고 다시 밤이 찾아오자 호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동굴 밖으로 빠져 나온 뒤, 밤새 쉬지 않고 로크 산맥을 거슬러 넘어갔다.
일촉즉발의 전쟁 전야였지만, 아침 햇살이 떠오른 로크 산맥의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 * *
"어서 오게. 수고했어! 자네 때문에 내가 제명에 못살겠구먼. 어디 다친 데는 없나?"
"네, 장군님! 상처 하나 없이 다녀왔습니다.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대비는 했네만, 많이 부족하네."
"그럼, 한번 보도록 하죠."
"뭐? 지금은 좀 쉬고 나중에 확인하지 그래."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곧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휴, 그래 작전처의 분석도 그렇다네. 특공대가 수집해온 자료와 포로 심문을 통해서 얻은 정보를 분석한 결과, 보름 이내라고 보고서를 올렸더군."
"보름이라... 빠듯하군요."
나형석 장군과 호크가 본부 막사에서 나와 상황실로 이동하는 길로 수많은 병력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그동안 김재덕 대령과 드워프들이 개발한 신무기들도 검은 천에 둘러싸여 짐마차에 실려 오자 병사들이 진지에 설치하기 위해 달라붙었다. 호크는 저 무기로 기간테스를 막아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필패였다.
호크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본 나형석 장군이 호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려 했지만, 절망적인 전력 차이 때문에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작 그만! 충성!"
"편히 쉬어! 자, 호크 중령도 무사히 귀대했으니, 이제 브리핑을 시작하지."
"넵! 알겠습니다. 모두 상황판을 주목해주십시오. 그동안 모든 정보를 분석한 결과, 세린디아의 침공은 보름 안에 이루어질 가능성이 짙습니다. 특공대가 습득해온 정보 중에 유용한 정보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중에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었는데, 음... 바로 이것입니다. 하사! 이것을 보드판에 연결하도록!"
작전장교의 명령에 하사관 한 명이 재빨리 서류 하나를 보드판의 수정구 위에 올려놓았다. 마치 슬라이드처럼 작은 서류가 확대 되어서 상황실 테이블 위로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김재덕 대령과 사이클론의 작품이었다.
이제 대부분의 외인부대 장비는 사이클론과 김재덕 대령 그리고 드워프들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기계공학과 출신의 김 대령은 물 만난 고기처럼 부대관리 쪽보다는 이쪽으로 매진했다. 워낙 낙후된 장비 탓도 있었지만, 기계광인 그의 천성도 한몫을 했다.
"흠, 이것은 공격 계획서가 아닌가? 어떻게 이걸......."
수도에서 비밀리에 도착한 머스탱 공작이 크게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희로서도 이것의 진위여부 파악에 전력을 다한 결과, 상당히 타당한 서류라고 판단했습니다. 우선 공격 루트 및 병력 상황이 저희가 파악한 것과 일치하는 점. 그리고 몽뜨의 로버트 남작이 수신처로 되어 있는 점 등이 상당히 근거 있는 문서라고 판단했습니다. 단지 적들의 기간테스가 팔십여 기라는 사항은 다소 신빙성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사실이야, 중위! 정확한 수는 칠십구 기지. 젠장, 경비 병력이 너무 많아서 손을 쓸 수가 없던 것이 천추의 한이야. 그때 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놈들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호크가 모르카시에 침투해서 보고 들은 것을 제법 긴 시간동안 설명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하며 괴로워하는 호크를 보면서 핸들러 소령이 위로했다.
"자책하실 것 없습니다. 중령님. 적의 중심부였으니 그린로즈 기사단의 수가 일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행크 공작도 있었을 텐데 무리하지 않고 돌아오시길 잘하신 겁니다. 게다가 만에 하나 중령님 잘못되었더라면 저희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을 테니, 이렇게 정보라도 알아온 걸로 만족해야죠."
"맞는 말이야.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그것은 무리라네. 역시 인간인 이상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칠십구 기라니 세상에! 이거 원!"
머스탱 공작의 한탄 섞인 넋두리에 상황실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전력차이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느끼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아직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사기가 떨어지다니 최악의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호크가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모르카시의 적 비밀기지에서 기간테스 한 기를 탈취해 왔습니다. 곧 사이클론님도 도착하실 테니 약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호크의 확신에 찬 말에 장교들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오~ 그래, 모처럼 좋은 소식이야, 그런 작은 요인들이 합쳐져서 승리의 뒷받침이 되는 거야."
호크의 말에 힘을 보탠 나형석 장군이 지휘봉을 들고 상황판 위에 화살표로 표시된 두 곳을 가리키면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보를 취합한 결과, 적의 주 병력은 모르카시에 집결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바로 밑의 몽뜨는 보급기지로서의 역할일 테지 사로잡은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적들은 로크 산맥의 크로미앙 분지를 넘을 가능성과 바로 우리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곳 케렁텅을 통과하는 두 가지 진격로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적들이 크로미앙 분지를 힘들게 넘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들은 압도적인 전력을 믿고 이동하기 쉬운 케렁텅으로 올 것이다. 우리는 이것에 대비해야 한다. 각자 의견을 내놓도록!"
나형석 장군의 질문에 장교들은 분분히 의견을 내놓았지만, 특별하게 채택할 만한 의견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상황실은 작전처 병사들과 장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정보를 파악하고 바쁘게 움직였지만, 왼편의 작전회의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탕!
호크가 회의실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려쳤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호크에게 쏠렸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습니다. 전력 차가 많이 나는 상황인데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호크가 상황판의 지도 중 한곳을 짚으면서 입을 열었다.
"몽뜨를 치는 겁니다!"
호크의 갑작스런 의견에 모두가 소스라쳐 놀랐다. 방어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데 선공이라니,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새벽에 몽뜨를 급습해서 접수한 다음 모르카시의 병력을 몽뜨로 불러들여 결전을 치룹니다. 그리고 모르카시가 텅 비었을 때, 왕국 병력이 모르카시를 점령하는 겁니다."
뒤에 이어지는 말에 아예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저 호크의 얼굴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단지 한 사람을 빼놓고서.......
짝짝짝!
"좋아! 기습이야말로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작전이지. 열세인 병력을 감안할 때, 기습만이 최선의 방어이자 공격이고 공격이자 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군! 너무 무리요. 몽뜨야 점령한다고 합시다. 모르카시의 그 많은 기사단과 기간테스를 어떻게 상대하려는 겁니까? 그런 평지보다야 그래도 적들보다 높은 곳에서 상대할 수 있는 이곳 케렁텅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후후, 머스탱 공작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만, 어차피 그 기간테스라는 괴물들이 몰려온다면 케렁텅이든 몽뜨든 결과야 뻔하지 않습니까?"
"그야......."
"아무리 왕국에서 많은 기사단과 군사들을 파병해 온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의견을 내놓은 호크 중령에게 좋은 복안이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만...."
나형석 장군이 선글라스 속의 두 눈을 빛내면서 호크를 바라보았다.
호크는 특유의 입 꼬리가 올라가는 미소로 답했다. 호크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군인은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지금은 이렇다 저렇다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에 승부수를 띄우고 싶습니다. 적어도 앉아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세린디아 땅이라도 밟아 보고 죽어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호크의 결의에 찬 말에 좌중의 젊은 장교들도 뭔가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움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쾅!
나형석 장군 역시 미소를 지어보이고 지휘봉으로 몽뜨를 찍었다.
"그럼 결정됐군. 몽뜨를 친다!"
작전회의가 끝난 후, 막사 밖으로 나선 나형석 장군과 호크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노르망디 작전을 계획했던 아이젠하워의 심정도 이랬을까요?"
"후후~ 아이젠하워라? 글쎄 지휘관이란 어찌 보면 참으로 잔인한 존재야. 내가 사령관이 되어보니까 말이네, 병사의 안위보다는 승리가 더 우선이더라, 이 말씀이야.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죽어간 병사들을 생각하면 그도 많이 괴로워했겠지.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겠지."
"제 작전이 마켓가든 작전 꼴이 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큭! 하필이면 그런 최악의 작전을 생각하고 있나 불길하게 말이야."
"걱정입니다. 적들의 기간테스를 생각하니 네덜란드에서 독일의 정예 제 2SS기갑군단을 만난 영국 30군단 꼴이 나지 않을까 해서요."
"제길! 기갑부대라니 사막에서 롬멜을 만난 꼴이로구만! 6.25 때도 소련제 탱크에 얼마나 많은 국군이 희생당했나, 갑자기 우리 국군이 맥없이 후퇴했던 역사가 생각나는군. 당시 강원도 양구에 있던 펀치볼에는 한국 해병대 군인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네. 잘못하면 몽뜨의 들판이 우리 부대원들의 묘지가 될지도 모르겠어. 어떻게 해서든지 이 열악한 전력 차를 극복하고 승리를 해야 해. 그것은 바로 내 몫이겠지."
장군도 답답한지 뒷짐을 쥔 채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치고 있었다.
주 - 펀치볼
▶ 전투기간 : 1951. 8. 31 ~ 9. 20 (21일간)
▶ 참전부대
ㅁ 아 군 :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ㅁ 적 군 : 인민군 제1사단
▶ 전투유형 : 공격전투
▶ 전투개요
이 전투는 휴전회담이 제기된 이후 전투력을 신속히 재정비한 인민군 제2군당이 펀치볼지역의 돌출된 지형을 이용하여 국군과 미군을 분리시키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국군은 전략적 요충인 펀치볼을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해병사단과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는 펀치볼과 그 북쪽 감제고지를 목표로 선제공격을 하게 되었다.
인민군은 도로상에 지뢰를 매설하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나 한·미해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포병 및 근접 항공지원사격을 지원받아 3주동안 치열한 혈전을 벌인 끝에 인민군 제1사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펀치볼과 주변 고지들을 확보하였다.
인민군은 전략적 요지인 펀치볼에서 후퇴하였고, 아군은 펀치볼도 수중에 넣고 차후공격의 발판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미 종군기자가 이 지역이 마치 칵테일을 담는 펀치볼그릇과 비슷하다고 붙인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말도 있다.
호크 역시 메말라서 부르튼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나저나 왕국군이 이동하는데 그 케론스 공작이란 자가 눈치 채지 않을까?"
"후후~ 지금쯤 미친개마냥 미끼를 쫓아서 다른 생각할 여력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이미 국경 근처 영지에 병력을 차출해 놓았기 때문에 수도 쪽 병력은 전혀 이동이 없으니까, 그들도 이런 변두리 영지까지 신경 쓸 틈이 없을 겁니다. 머스탱 공작님과 기사단이라면 주 병력이 없는 모르카시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테고. 성공만 한다면 이 전쟁에서 기선을 잡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성공만 한다면 말이야. 아마도 희생이 크겠지? 저 중에 몇이나 살아남을까?"
애써 나 장군의 말을 외면한 호크가 이를 악물고 시선을 돌렸다.
"내일 작전이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나올 겁니다. 부대를... 잘 돌봐주십시오."
"그런 것은 걱정 말고, 자네나 눈먼 화살에 맞지 않게 조심하게!"
"예전에 저희 어머니께서 사주를 봤는데, 아주 길게~ 살 팔자랍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그래. 제발 나보다 오래 살게."
"그나저나 김 대령님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 판국에 아직도 공방에서 드워프들하고 기계나 만지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죠?"
"그 친구가 노닥거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이클론님이 보여주신 기간테스 잔해를 본 뒤로 사람이 무섭게 변해버렸어. 내가 지난번에 찾아갔을 때는 사람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집중하고 있더군. 그만큼 김 대령도 필사적이라는 것을 알아주게!"
"휴~ 네. 저도 압니다. 그냥 답답해서 장군님에게 투정부렸나 봅니다."
"사령관님! 상황실로 가셔야 하겠습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부관의 말에 나형석 장군이 호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부관과 함께 상황실로 내려갔다.
잠시 후 저녁놀이 붉게 물든 케렁텅의 언덕 위에 호크가 꽃 한 송이를 들고 서 있었다. 호크 앞에 작은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하얀 장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호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이 들고 있던 장미꽃을 내려놓았다.
찰리 제이슨 중사.
성력 859년에서 태어나 성력 878년에 지다.
찰리 제이슨 중사는 외인부대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서
조국과 국민들을 위해 싸우다
여기 케렁텅에 잠들다.
부디 그 영혼이 편히 쉬게 할 수 있도록 하소서.
커래히(Currahee)!
"찰리 중사! 내일 자네의 전우들을 위해 무운을 빌어주게. 부탁이네. 우리에게 승리의 여신이 미소 짓게 말이야."
저녁놀이 지는 무덤가에서 죽은 부하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호크의 모습이 수많은 외인부대원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전우애(戰友愛)를 느끼게 해주었다. 내일의 전투 때문에 팽팽해졌던 두려움과 긴장감이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전의(戰意)로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