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12화 (12/55)

Chapter 12. 다가오는 암운(暗雲)!

"행크 공작,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국경까지 폐쇄한 마당에 서두르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당하기 쉽다는 거 아시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왕님! 다행히 유물의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양호해서 작업 속도가 예상보다 배는 단축되고 있습니다. 곧 우리의 염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겁니다."

"호호호호! 그래야지요, 반드시 그래야지요. 이 폴렌시아에 우리 아마리아족만이 진정한 주인이 될 자격이 있으니까요. 저 더러운 잡종들을 쓸어내 버려야만 우리의 순순한 피를 지켜나갈 수 있어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여왕님!"

"이제 더러운 세월은 보내고, 오욕의 상처도 지울 때예요. 힘이 없어 우리의 피를 지키지 못하고, 저 로베니아의 돼지들에게 돼지죽처럼 희생해온 그 아픔들을 되돌려줄 때입니다. 세린디아의 아픔과 고통을 저들에게 알려주어야 해요! 아니, 이 폴렌시아 전체가 알아야만 해요, 반드시!"

"여왕 폐하 만세! 세린디아 만세!"

부복해 있던 모든 이들이 여왕을 향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집회처럼 실내는 광기로 물들어갔다.

좌중을 둘러보는 왕비의 두 눈이 뱀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오호호호호호! 더러운 위선 덩어리 쥬(Ju)의 신앙을 불살라버리면, 내 의지에 따라 아마리아의 영광을 위해 움직이리라. 호호호호호!"

"단장님! 이상하게도 또다시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호든가에서 기운이 느껴졌는데, 어느 사이엔가 또다시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무래도 호크 백작의 호무관이라는 게 의심이 갑니다. 확인해보지 못한 곳은 그곳뿐입니다."

"젠장! 하필이면 백작령이란 말인가? 어쩐다? 무턱대고 들어가서 뒤져볼 수도 없고."

똑똑!

"들어오게!"

"단장님! 대주교님의 지급입니다!"

로베르트니 성기사 단장은 수하기사가 조심스럽게 건넨 수정 구슬을 가슴 어림께로 올리고서 신성력을 뿜어냈다.

그러자 하얀빛이 수정구와 로베르트니 단장을 잠시 감싸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무슨 전갈입니까, 단장님?"

"별일 아닐세. 그저 진행상황이 궁금해서 보내신 게야. 마음이 어지간히 급하셨나 보네. 이런 걸 지급 서신으로 보내실 정도이니 말이야. 허허!"

로베르트니 단장의 어색한 변명에 셔논 사제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어차피 자신의 신분에서 알 수 없는 사실이란 것을 잘 알기에 더 이상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였던 로베르트니 단장이 몸을 일으켰다.

"이곳 영주인 하워드 백작과는 안면이 있으니 직접 부탁해 보아야겠네. 호무관에 방문할 핑계를 만들어볼 테니까, 그때 성스런 돌을 찾아봐야지. 그럼 다녀오겠네."

로브를 뒤집어쓴 채 여관 계단을 내려오는 로베르트니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대주교의 전갈은 자신은 전혀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로베르트니, 운명의 시계가 두 번째 칸을 돌고 있소. 저주스런 예언이 멈추지 않는 것 같소. 서두르시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소이다.>

'후후~ 불쌍한 사람. 대주교! 우리에게는 시간만 부족한 것이 아니고 믿음 또한 부족하다오. 아니지, 아예 없는 믿음이었나? 운명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아! 제길!'

호든가를 지나 시장을 통해 영주의 내성으로 향하는 사라지는 로베르트니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쳐다보는 눈길이 있었다. 온통 검정색으로 뒤덮인 사내들이었다.

"공작님께 알려라! 샹그릴라의 개들이 움직였다고. 아마도 성스런 돌의 행방을 찾은 거 같다. 서둘러!"

이내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마치 벽에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하악! 하악!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

"우엑! 우우욱!"

"도저히 더는 못하겠어. 하아! 하아!"

"이런 썩어빠진 쓰레기들아! 그래, 힘드냐? 많이 힘드냐? 그러면 저 자유의 종을 치고 패배자의 길을 걸어라! 어서! 너희들은 쓸모없는 패배자들일 뿐이야!"

"으음! 저거 기합이 너무 들어간 거 아냐? 저러다 진짜 애들 잡겠는데!"

"괜찮습니다. 에밀과 제이크 등이 따라다니면서 수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도 조심해야 해! 조교가 흥분하거나 하면 큰 사고가 나니까."

"네, 조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교들의 교대를 3교대로 늘리고 있습니다."

"좋아. 그리고 조교들도 정신교육을 빠짐없이 실시하고. 나태해지는 순간 꼭! 사고가 발생하니까 항상 긴장해야 해! 전투도 하지 않고 안전사고로 전력에 손상이 오는 것만큼 아까운 건 없어!"

"알겠습니다, 대령님!"

IBS(고무보트)를 머리에 인 채 지옥주를 떠나는 훈련병들과 조교를 바라보면서, 점점 틀이 잡혀가는 부대를 돌아보는 호크의 감정은 꽤나 고무되었다. 부대로 돌아오니 마치 고향에 온 느낌이랄까? 왠지 안정되고 편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 분, 일 초도 있기 싫었는데 말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우향 앞으로 가! 뒤로 돌아가! 어쭈, 정신 안 차리고 뭐 하는 겁니까? 모두 머리를 연병장에 심습니다! 동작 봐라! 빨리빨리 못합니까?"

"어라! 3기생들인가 보네, 제식훈련을 하는 것을 보니. 그런데 쟤는 누구야? 정말 제대로 틀이 잡혔는데? 오호! 각이 나오는데? 하하!"

정말이지 한국의 유격대에서 파견 나온 듯 완벽한 재현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 푹 눌러쓴 빨간 군모, 15도 각도로 쳐든 고개, 그야말로 완벽한 조교였다.

"빨리빨리! 움직입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기도합니까?"

"하하하! 정말 명물인데? 저 녀석 이름이 뭐야?"

"아, 네! 1중대 소속인데, 아마도 루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중령님!"

"루... 크? 이봐, 핸들러! 루크라고 했어, 지금?"

"네, 맞을 겁니다. 동기 중에서는 제일 머리 회전도 빠르고 운동신경도 좋습니다. 아마도 중대 전체에서 성적이 제일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장교 추천이 예상되고... 아니, 중령님!"

보고를 하던 중 호크 쪽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오자 화들짝 놀란 핸들러가 기겁하면서 호크를 불렀다.

"응? 왜 그래, 뭐야?"

언제 그랬냐는 듯 호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자 핸들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헛것을 봤나?'

핸들러와 본부로 향하던 호크는 다시 뒤를 돌아보다가 열심히 조교 임무를 수행 중인 루크가 눈에 들어오자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크크크! 니 애비를 원망해라, 불쌍한 놈!'

"무슨 일이에요, 여보?"

"아, 아니요, 아무것도.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신관을 부를까요?"

"아... 니, 괜찮다니까 그러네. 후우! 혹시 루크에게 무슨 일이라도......?"

불길한 듯 잉글햄 쪽을 바라본 머스탱 공작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자꾸 호크가 웃고 있는 모습 같아서 불안했다.

"뭐... 설마하니 별일 있으려고."

별일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조금 지난 후의 일이지만, 루크가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충성! 장군님, 부대에 지금 복귀했습니다."

"그래, 어서 오게! 주변 상황은 어떤가?"

이제는 제법 부대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외인부대의 최고 사령관인 나형석 장군의 방은 거대한 작전실을 방불케 했다. 벽마다 폴렌시아의 지도가 붙어 있었고, 방 중앙에는 폴렌시아의 축소판 모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호크는 그동안의 외유로 알아낸 정보를 나형석 장군과 토의하기 시작했다. 핸들러 또한 자신이 알고 있는 사항과 두 사람이 모르는 정보를 보충해주면서 작전회의를 진행했다.

똑똑!

"들어와!"

"충~~성!"

"그래. 편히 쉬어!"

"뭡니까, 애들은?"

"자네가 없는 동안 작전 및 전술 교육은 내가 했는데 말이야, 그중에서 똑똑한 놈들이 몇 있기에 작전과 장교로 키워보려고 뽑은 아이들이네.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간부급들 모두 소집해서 첫 작전회의를 해야겠어! 앞으로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매우 중요한 회의가 되겠지."

"그렇겠네. 우리의 운명을 정하는......."

호크가 읊조리는 말을 나형석 장군도 마음속으로 따라하고 있었다.

곧 외인부대 작전회의를 위해서 간부들을 소집하는 종소리가 부대 안에 울려 퍼졌다.

"충성! 작전과 머레이 소위입니다. 모두 상황판을 주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 장군의 집무실 안에 마련된 상황실 테이블에 부대 장교들이 모두 착석해 있었다. 모두의 눈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벽면의 상황판으로 집중되었다.

"그동안 왕실 방첩부대 중 일부가 저희 작전처로 배속되면서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분석한, 현 폴렌시아의 상황을 표시한 내용입니다. 현 상황은 호크 중령님의 말씀대로 일촉즉발의 상황입니다. 우선 중령님께서 지적하신 세린디아의 내부 사정은 그야말로 안개 속입니다. 원래 세린디아는 존재감이 없던 왕국입니다. 특별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강한 군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외부와의 왕래 또한 그다지 없던 곳이라서 그에 대한 정보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실상은 대륙 그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입니다. 단지 로베니아 제국의 수탈을 가장 극심하게 받은 곳이 세린디아라는 점 빼고는 말입니다.

"그건 왜지? 자원도 별로 없다면서?"

양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호크가 자신의 관심사인 세린디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했다.

"그게... 좀 그렇습니다만, 여자들을......."

"여자?"

"네. 세린디아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여인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 노예처럼 팔려갔다는 거야, 뭐야?"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딱 한 번 세린디아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로베니아의 집정관을 호위하기 위해서였는데......."

"응? 핸들러가 왜 로베니아의 관리를 호위했는데? 그것도 세린디아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로베니아의 관리가 북부에 오면 으레 저희 케린버그에서......."

"젠장! 지금도 그렇다는 말이야?"

"네. 지금도 어딘가에서 케린버그의 기사들이 호위를......."

"호위는 무슨. 완전히 길 안내꾼이잖아!"

"중령, 얘기를 좀 더 듣지!"

호크가 자꾸 끼어들어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나 장군이 나섰다.

"핸들러 대위! 마저 말해보게!"

"저도 세린디아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정말 놀랬습니다. 한낮에 밭에서 일하는 처녀들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습니다. 남자들도 준수했지만, 여인들은 정말이지 세상에 모든 미인이란 미인은 다 모아 놓은 듯했습니다.

일행이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그때부터 집정관의 인간사냥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마음에 드는 여자의 머리채를 끌고 짐마차에 싣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돼지우리에서 돼지를 고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놀란 것은 로베니아의 집정관이 벌인 행동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는 사람도, 화를 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행동도, 말도 없이 그저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집정관이 떠난 순간, 그 마을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살기를 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얼음 칼이 제 심장을 파고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젠장 할! 더러운 놈들!"

한 장교가 내뱉은 말에 모두 같은 감정인지 고개를 끄떡였다.

하지만 그 다음 말에 모두들 경악했다.

"후후! 더러운 것은 저희들이었습니다. 그 살기의 대상은 로베니아의 관리가 아닌 저희 케린버그의 병사들이었으니까요."

"헉!"

"아니, 왜?"

"그건 우리가 방관했기 때문이죠. 아니, 오히려 발 벗고 나섰다고 해야 하나? 로베니아의 관리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스스로 길안내를 하고, 심지어 인간사냥에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으니까요. 실례로 국경 부근의 십여 개 마을이 폐허가 된 것은 케린버그에서 벌인 일입니다."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런 일이......."

핸들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호크는 드래곤 산에서 만났던 기간테스를 조정하던 애쉬라는 청년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자신의 누이 이야기를 하면서 처연하게 웃던 그 순간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역시나 좋지 않아!'

"그런 일들이......! 휴~ 이거 보통 골이 깊은 게 아니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나형석 장군의 물음에 호크는 고개를 모로 저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가슴 한편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곧 세린디아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드래곤 산에서 만난 그들의 전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대 유물까지 확보한 이상 곧 움직임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로베니아를 상대하기 전에 우선 자신들의 힘을 시험해볼 상대가 필요하겠죠. 그렇다면 당연히 그 대상은 우리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기간테스를 열 기 이상 끌고 국경을 넘어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 싫어집니다."

호크의 말에 분위기는 땅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잠시 후, 눈치를 살피던 작전과 머레이 소위가 헛기침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일련의 보고를 바탕으로 현재 세린디아에 모든 정보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미 머스탱 공작님의 예하 방첩부대에서 1백 명의 인원이 투입되었고, 저희들 쪽에서도 삼십여 명이 모두 파견된 상태입니다. 또한 1대대 소속 이글, 브라보 중대가 국경 근처에 투입되어 있습니다."

"좋아! 최우선 경계 대상이 세린디아로 파악된 이상, 작전처는 사활을 걸고 정보 수집에 노력하도록!"

"넵!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그래, 다음으로 넘어가지. 계속해서 브리핑하게!"

"다음으로는 모스크 산맥 너머의 레센 제국의 움직임입니다. 천혜의 방어막인 모스크 산맥이 있다고는 하나, 일, 이차일년전쟁 당시에도 그들은 그 지독한 한파를 견디고 넘어온 적이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사실을 항상 상기하고 있어야 한다고 판단됩니다. 현재 대외 첩보부 소속 정보원 이십여 명이 레센의 함브르트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는 연락이 왔으므로 곧 정보가 모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정보로는 군부 최고 권력층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 중 봄멜 공작 쪽에서 그림자 기사단들이 이미 활동을 시작했다는 첩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봄멜... 봄멜이!"

케린버그로서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철혈의 공작 봄멜 폰 크라우트, 그의 철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디안 계곡의 요새 벽면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 중 대부분이 한 사람의 손에 죽어갔기 때문이다.

회의장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나 장군이 손뼉을 치면서 분위기를 쇄신했다.

"죄송합니다. 그림자 기사단의 중요 임무가 방첩활동인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의 목적이 전쟁인지, 아니면 다른 것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드러내놓고 정보활동을 감행할 만큼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전문 중에 특히나 피트 산트라나 잉글햄의 디안 요새가 자주 언급되고 있어서 이것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피트 산트라?"

"네, 장군님. 레센어로 성스런 돌이라는 뜻입니다!"

작전처 장교의 말에 호크가 헛기침을 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호크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그들 방첩부대가 이미 잉글햄에 잠입해 들어왔다는 뜻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중령님!"

"젠장! 집 안에 첩자가 들어왔군. 모든 전쟁은 정보전이다. 우리가 하나라도 더 아는 것이 전력이야. 최우선으로 정보수집에 집중해야 해!"

탁한 목소리로 소리친 나 장군이 테이블 위의 지휘봉을 집어 들고서 벌떡 일어났다. 상황판으로 다가선 그가 지휘봉으로 지도 위를 가리키면서 입을 열었다.

"위로는 레센 제국, 남쪽에는 스베른, 크로디널, 동쪽에는 알버스크, 게다가......."

잠시 뜸을 들인 그가 폴렌시아 남부 대륙에 빨간 깃발의 모형 핀을 상황판에 던졌다.

"폴렌시아 최강의 군대를 가진 로베니아가 자리하고 있다. 그 어느 하나 쉬운 상대가 없다. 그만큼 우리는 기름을 등에 지고 불길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처지다. 쉽게 말해서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최고 사령관의 입에서 절망적인 소리가 나오자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고개 숙인 장교들을 바라보던 나 장군이 지휘봉을 들고 뒷짐을 쥔 채 담담히 말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야, 우리에게는 최고의 훈련을 받고 있는 최고의 군인들이 있다. 자네들이라면 나는 한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테이블에 둘러앉은 젊은 장교들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자 나형석 장군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좋아! 어차피! 오래 살 목숨도 아니지 않은가? 한번 진하게 싸워보자. 우리 가족과 나라를 위해서 말이야!"

"케린버그를 위하여!"

한껏 고무된 장교들의 외침에 호크가 나 장군을 향해서 살짝 윙크를 했다. 선글라스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가 웃고 있다고 호크는 생각했다. 호크는 역시 장군은 장군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같으면 입에서 욕이나 나왔지, 저렇게 말로 사기 진작을 꾀하지 못했을 것이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하사관 1명이 봉인된 보고서를 들고 들어왔다. 빨간 봉투는 일급사항이란 뜻이었다.

봉투를 뜯던 나 장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젠장 할! 자네의 예감이 맞았군!"

"세린디아입니까?"

"그래! 데프콘 3이다. 부대에 비상 걸어!"

나 장군의 떨리는 듯한 목소리에 상황실은 삽시간에 돌변했다.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교들을 시작으로 비상 종소리가 부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전혀 바라지 않던 전쟁이 다가왔다.

"우욱! 놈들은 모두 미... 미쳤습니다. 온통 광신도가 되어서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저희 조원 모두가 희생하면서 얻은 것입니다. 기간테스만 팔십여 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스마법을 쓰는 녹색의 군인들 또한 2만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아! 더 무서운 건 세린디아 백성들 모두가 창과 칼을 들고 모이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쿨럭! 허억!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이사벨라를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어서 빨리 대책을......! 쿨럭!"

정보원의 숨이 점점 가빠오자 호크가 무릎을 꿇고 손을 꽉 잡아주었다.

"이제 그만 쉬게, 수고 많았네. 말은 그만하고 힘을 아끼게!"

"아직... 하아~ 중요한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하아! 놈들에게는 무서운 고대 유물이... 하아! 그것이... 모르카시에... 반드시 파... 크으윽!"

"이봐! 정신 차려! 이봐!"

호크의 시선을 받은 신관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자 낭패한 표정의 호크가 한숨을 쉬면서 방에서 나왔다.

"젠장 할! 큰일이군!"

"무려 2백여 명이 투입되었는데 겨우 한 명만 돌아오다니! 도대체 이놈들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답답하십니다. 보면 모르겠습니까? 전쟁입니다, 전쟁!"

머스탱 공작과 헬렌 백작이 목청을 높이면서 흥분하자 호크가 그들을 끌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요새 방어벽 위의 모루에서 세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했다.

"우선,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여기 셋과 신관뿐이네. 아직 국왕 전하도 이 사실을 모르시네."

모루 벽을 잡고 고개를 숙인 호크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답답해진 헬렌 백작이 호크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뭔가? 생각하는 게 있으면 털어놔보게. 그렇게 혼자 속 끓이지 말고."

"휴, 좋습니다. 우선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합니다."

"뭐라고? 왜? 당장 전 왕국에 비상령을 내리고 군대도 소집해야 하는데, 비밀이라니? 자네, 미쳤는가?"

"아뇨. 미치지 않았습니다. 잘 들으세요. 만약 이 사실이 퍼진다면 케론스 공작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베니아도 알게 되겠죠. 그렇게 된다면 이 땅은 또다시 전쟁으로 황폐해지게 됩니다. 다른 나라에서 벌이는 전쟁이 어떤지 아시지 않습니까? 연합군이란 게 말이 그렇지, 결국은 자기 나라 땅에서 벌이는 전쟁이란 말입니다. 누가 신경을 쓸까요? 그리고 설사 이긴다고 하더라도 보상비 명목으로 무엇을 요구할지도 모르구요. 더군다나 지난번 디안 요새의 몬스터 사건 때만 보더라도 그들이 케린버그를 위해서 얼마나 피를 흘려줄지는 결과를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세린디아가 침공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휴, 난 도대체 자네 의도를 모르겠군. 어쩌자는 건가?"

"잔인하지만 전쟁터는 세린디아로 국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몰라야 합니다. 비명소리 하나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죽은 정보원의 말대로라면 기간테스만 팔십여 기야! 어쩔 수 없네. 자주국방도 좋지만, 로베니아 말고 기간테스를 막을 수 있는 곳은 없단 말일세. 분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야. 빌어먹을!"

머스탱 공작의 힘없는 말에 호크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정말 빌어먹을 소리만 하고 있네요, 공작님!"

"뭐라고! 국왕 전하께서 아무리 자네를 총애한다고 해도 자네가 나를 그렇게 막 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네!"

"맞네. 호크 경이 심했어. 어서 사과하게, 어서!"

"그깟 사과야 백 번, 천 번, 아니 백만 번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말입니다. 저를 이 정치판에 끌어들인 것도 공작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에게 기회를 달란 말입니다. 국왕 전하와 공작님들이 도와주시면 저희 외인부대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단 말입니다!"

호크의 간절한 부탁에 머스탱 공작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긴다? 우리 힘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케린버그의 역사 속에서 그동안 사라졌던, 승리라는 단어!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사대주의 근성에 빠져들어 버린 것인가? 그토록 자주를 외쳤던 자신이 위기의 순간이 오자 자신도 모르게 로베니아에 기대려고 하다니!

머스탱 공작은 자신이 헛살아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미안하네. 비굴하게 사는 데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나 보군. 자네 보기 창피하구먼. 지금 당장 국왕 전하께 보고 드리고 재가를 얻겠네! 그런데 자네가 생각하기에 승리할 확률은 얼마나 되나?"

"반반입니다."

"반반이라, 하하하하하! 그럼 서두르세. 기왕 마음먹은 것, 빠르게 움직여야지. 그럼 추후 연락은 통신을 통해서 하도록 하지. 헬렌 경, 갑시다!"

"아니, 공작님! 이러시면......! 허허, 이보게, 호크 경! 이러면 안 되는......."

동시에 돌아서서 사라지는 호크와 머스탱 공작을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헬렌 경만 애타게 발을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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