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11화 (11/55)

Chapter 11. 지옥 같은 나날들.

그리고 마침내!

2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디안 요새 너머 깊은 골짜기에 있는 공터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숀! 몬스트리자작가의 숀 아처 아니야?"

"저 사람은 데릴, 알렌시 집안의 데릴이야!"

"젠장! 대단한 인물들이 모여들었구먼. 저쪽의 갈색 머리는 레이몬드의 크리스야. 벌써 소드익스퍼트에 들어선 자라고 하던데, 쟁쟁한 놈들이 모두 모인 거 같아!"

"휴~ 우리 같은 이들은 이름도 못 내밀겠군. 안토니오, 젠장 할! 왠지 기가 죽어!"

"벌써부터 그렇게 물렁해서야 어떻게 조국을 위해서 일한다는 거야? 가슴 좀 펴라구!"

"니키! 자네도 온 거야?"

"그래. 우리 케린버그가 힘을 키울 수 있다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 자, 자! 기운내자고! 호크 백작님과 함께하는 거라면 난 그분 말지기라도 좋아! 우리 모두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하자구. 이곳에 벼슬을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당연하지. 니키! 정말이지, 너는 그 말재주 하나는 타고 났다니까?"

"하하하하!"

동향 사람들끼리 모인 듯 2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잡담하고 있었다.

잠시 후, 3명의 남자들이 젊은이들을 가로질러 바위 위로 올라갔다.

"모두 들어라! 이곳에 모인 이유는 잘 알겠지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오늘 이후로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가족과 만날 수 없다는 말이다. 오로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는 자들만 오른쪽으로 서라. 그리고 지금이라도 결심이 서지 않은 사람은 왼편에 서라!"

중년의 사내의 말이 끝나자 무리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조용히! 어서 빨리 결정해라.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때다!"

이번에는 30대 중반의 사내가 날카롭게 외치자, 청년들이 모두 오른편에 섰다.

"아버님, 모두 결심이 선 듯합니다!"

"좋아! 사이클론님, 그럼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후후! 자, 그럼 따라오시지요, 하워드 백작님."

"네. 자, 모두 인솔해서 가자. 제임스, 서둘러라!"

"자, 모두 우리를 따라와라!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사람만 따라와야 한다!"

잉글햄의 백작과 그의 아들, 게다가 사이클론까지 대단한 인물들이 직접 마중 나온 이들은 바로 케린버그의 국왕파에서 비밀리에 모은 인재들이다. 전국 각지에서 소집되어 추리고 추린 2천여 명이 이렇게 조용히 디안 협곡으로 모여들어 꼬불꼬불한 산길을 일렬로 걸어 들어갔다.

"후우! 후우~ 이러다가 몬스터라도 만나면 떼죽음 당하겠는데!"

"바보 같은 소리! 이곳의 몬스터는 지난번 디안 요새 전투 때 호크 백작님이 거의 몰살시켰다고! 게다가 저 앞에 계신 분이 바로 바람의 마법사인 사이클론님이셔. 뭘 제대로 알고 말하게."

앞서 가는 청년의 말에 뒤에 있던 청년이 매몰차게 몰아붙이자 비슷한 걱정을 마음에 품고 있던 이들이 군말 없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걷고 또 걸은 후에 거대한 폭포 앞에 멈춘 사이클론이 조용히 손을 들어 마법 주문을 영창했다.

그러자 잠시 후, 그의 마법 지팡이 끝에 달린 수정구에서 밝은 빛이 발하며 폭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곧 계곡을 울려 퍼지던 폭포 소리가 잦아들면서 물줄기가 줄어들었다.

신비스런 광경에 청년들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자! 모두 폭포 속으로 들어가라, 어서!"

2천여 명의 청년들이 모두 폭포 속으로 들어가자, 다시금 물줄기가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폭포가 흐르기 시작했다.

"길에 흔적이나 표시를 남긴 자는 없었습니다, 백작님!"

소리 없이 나타난 기사들의 말에 적이 안심한 하워드 백작이 서둘러 여러 가지 지시를 내렸다.

"흠! 그래, 좋아. 저 속에 저들의 간세가 없을 리 없으니 매사 조심해야 해!"

"아버님! 아무래도 이쪽에 군사를 더 늘려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야. 괜한 짓을 벌여서 저들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다. 자! 나머지는 모두 호크 백작에게 맡기고 우리는 영지로 돌아가자.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흔적을 남겨서는 안 돼! 우리는 이곳에 온 적도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폭포를 쳐다보던 하워드 백작과 캐더린의 오빠 제임스가 말없이 주위의 흔적을 지우면서 돌아갔다.

이에 2천여 명이나 지나왔던 숲길이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어두운 동굴 속을 걷던 청년들은 밖으로 나오자 강한 햇살에 모두 두 손으로 눈을 가리기 급급했다. 그 바람에 미처 앞을 보지 못한 이들이 발이 걸려 넘어지는 소동이 일었다.

"헉! 으학!"

"이런! 멍청한! 조심해!"

한바탕 소동이 일고 나서 커다란 광장에 들어선 청년들의 눈에 낯선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폭포를 통과해서 나오니 숲속에 또 다른 숲이 있었다. 전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듯 울창한 수림에 모두들 탄성을 자아냈다.

사이클론이 다시 선두에 서서 걷자 모두들 그 뒤를 따라서 걸었고, 이윽고 커다란 공터에 도달했다. 1만여 명이 족히 모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공터였는데, 그 앞에 조그마한 단상이 있었고 단상 뒤로는 커다란 계단이 있었다.

"헉! 머스탱 공작님이시다!"

"오! 강철의 소드마스터 머스탱 공작님이다."

청년들의 뜨거운 반응에 머스탱 공작이 사람 좋은 미소로 답했다. 단상에는 케린버그의 소드마스터 머스탱 공작과 사이클론, 그리고 정말 위대한 존재인 케린버그의 찰스 국왕이 서 있었다.

"헉!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2천여 명의 젊은이들의 무릎이 동시에 꺾였다.

"하하하! 모두 일어서게, 어서!"

찰스 국왕의 말에 일어선 젊은이들의 두 눈에는 감동으로 가득했다. 국왕이 친히 마중을 나오다니! 이 어찌 커다란 영광이 아니겠는가?

어느새 계단 위에는 악단이 등장해서 기병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자! 모두들 조국을 위해서 이렇게 한 몸 던져준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이 자리에 서 있는 자네들이야말로 케린버그의 희망이자 미래들이라고 할 수 있네. 모두 무사히 이곳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일당백의 전사가 되어서 더 이상 우리 백성들이 타국의 손에 우롱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세!"

"우와와아! 케린버그에 영광을!"

"케린버그여, 영원하라!"

들끓는 열기가 광장의 나무들을 모두 태워버릴 듯이 뜨거웠다.

이어서 1명씩 계단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 밑에서는(?) 머스탱 공작과 찰스 국왕이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환영했다.

"어서 오게!"

"영광입니다, 전하!"

"자네는 어디 출신인가?"

"그래, 수고하게!"

정겨운 인사와 흥겨운 음악소리에 젊은이들은 정말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계단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이 새끼들 봐라! 대가리 안 숙여!"

"치아 보인다, 이 쉐이들아! 입 다물어. 아쭈! 빨리빨리 안 움직여!"

이제 막 계단을 넘어선 숀 아처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경악했다. 먼저 올라온 이들이 모두 귀를 잡고 쪼그려 뛰기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온몸이 흙투성이에, 군데군데 얼굴이 멍든 이들도 꽤 있었다. 멀쩡히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처음 보는 빨간 모자에 이상한 무늬의 옷을 입고 방망이를 든 사내들뿐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넌 뭐야! 빨리 안 움직여!"

퍽! 으허허헉!

빨간 모자 사내의 발길질에 바닥으로 나뒹군 숀아처는 가슴의 통증이 꽤 심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벌떡 일어났다.

"크흑!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난 바로... 으악!"

"하여간 꼭 이런 놈들이 있어요. 네가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 이 쉐이야! 에라이!"

퍼퍼퍼벅! 퍽퍽!

복날에 개 패듯이 하는 몽둥이질 풍경에 그 뒤를 이어 넘어온 자들은 군말 없이 열심히 토끼뜀을 했다.

2시간여를 땅바닥에서 열심히 구른 뒤, 모두 열과 오를 맞추어 단상 앞에 모여섰다.

"모두 모였나?"

"충성! 총원 2,114명 집합 완료했습니다."

"좋아! 에밀!"

"넵, 대장님!"

"지금부터 부대 편성해서 옷 갈아입히고, 작업 준비시켜라. 한 놈이라도 농땡이 치면 모두 굴려! 단체 행동의 의미부터 머릿속에 심어줘라! 실시!"

"실시! 모두 자신 앞의 교관을 따라서 이동한다!"

"이 쉐이들, 빨리빨리 안 움직여! 어쭈, 다리 보인다!"

"이런 부당한 대우는 참을 수 없소!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단상을 내려서려던, 역시나 빨간 모자를 두 눈이 가려질 만큼 푹 눌러쓴 사내가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교관들이 지금 소리친 청년을 제지하려는 것을 막았다.

"부당해? 뭐가? 너희들 목숨은 모두 내 손에 넘어왔다. 너희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내 마음이야. 뭐야, 겨우 이 정도에 벌써 포기하는 건가? 조국을 지키겠다는 너희들이 아니었나? 로베니아에서 떼어주는 떡이나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뭐가 그리 잘났나? 요크샤리 지방에서는 처녀들은 모두 로베니아 귀족들이 먼저 맛본 뒤에야 결혼할 수 있다며? 크크크! 자기 여자들도 못 지키는 주제에 뭐가 부당한 대우야! 뭐 잘한 게 있다고! 저 앞의 종을 봐라! 견디기 힘들고 더 이상 못하겠다는 자들은 저 종을 치고 이곳을 떠나라. 그런 나약한 녀석들은 우리 부대에 필요 없으니까! 피터슨, 자네가 책임지고 오늘 안으로 열 명을 만들어내! 저 종을 치고 패배자의 길을 걷게 할 열 명을 말이야. 큭큭큭!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당, 당신은 누구십니까?"

"후후! 나? 지옥의 사자, 호크 론 케린버그야!"

그날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밤이 새도록 광장에서는 혹독한 기합이 계속됐지만, 아무도 종을 치고 떠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를 악문 그들의 두 눈에는 악만 남은 듯이 전의에 불타올랐다. 구령을 외치면서 바닥을 구르는 그들 뒤로 사람 머리만 한 종이 달린, 패배자의 길이라고 쓰인 문이 있었다.

"너무 거칠게 다루는 것 아닙니까?"

"뭐가? 더 잔인하게 굴 거야. 눈물 콧물 다 뽑아내게 만들어야 해!"

"하지만, 말입니다 백작님!"

"그만해. 핸들러, 자네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아니까. 하지만 말이야, 지난번에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과 기간테스 안에서 말라 죽은 애쉬라는 청년을 보고 나서 정말이지 너무나 무서웠어. 아니, 소름끼쳤다고. 난 그런 사람들이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봐왔어. 아니,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지. 그런 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거야. 결국 폴렌시아에서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만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더 잔인하고 더 모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결국 케린버그는 망할 거야! 자네는 기사라서 그런지 아직도 명예라든가 기사도에 집착하는 거 같아. 다시 말하지만, 지금부터는 완전히 다른 전투를 보게 될 거야. 핸들러, 아직도 기사가 되고 싶다거나 기사도가 마음에 걸리면 떠나도록 해."

"백... 백작님!"

"난 전쟁을 치를 거야.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슬픈 일을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나를 따르는 사람이 필요해. 나를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야."

"백작님, 전 이미 제 몸과 마음을 백작님께 바쳤습니다. 백작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제가 너무 건방을 떤 것 같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백작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휴~ 고마워, 핸들러. 나에게 네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를 거야!"

똑똑!

"들어와!"

"충성!"

"무슨 일인가?"

"......."

"응... 뭐? 이런! 알았네, 나가보게."

"무슨 일인데 그래?"

"그게 말입니다, 드워프들이 말썽인가 봅니다."

"에구구, 조용한 날이 없군, 가보자구."

145cm 정도의 키에 단단한 체구, 얼굴은 온통 수염으로 뒤덮여서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난쟁이 노인과 선글라스에 군복을 입고 있는 김재덕 대위, 아니 이제는 대령으로 진급한 김 재덕 대령이 서로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었다.

벽면에는 온갖 도면과 설계도가 붙어 있었다.

"충성! 대령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 어서 오게, 호크 중령. 이 난쟁이 똥자루가 고집이 보통이 아니어서 미치겠구먼."

"뭐야! 이 무식한 안경쟁이가! 나랑 한번 붙어보겠다는 거야!"

"감히 부사령관님에게 버릇없이!"

김 대령의 뒤에 서 있던, 부관인 루브카나 톰슨이 검을 빼들려 하자 호크가 제지시켰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걸 보게. 씨피(CP)에서 각 단위 직할대를 주변에 나열해야 하는데, 무슨 놈의 건물을 예술관 짓듯이 하려고 하니! 우리가 원하는 것은 군대 막사지, 예술 작품이 아닌데 말이야!"

김 재덕 대령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호크는 일전에 호무관을 지을 때 겪었던 일이 발생하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대령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곧 해결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팔십 퍼센트 이상 진척이 되었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제 곧 겨울인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들이 실력은 있으니 곧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밖으로 나온 호크는 드워프족의 수장인 엠톤과 나란히 걸었다.

"거 웬만하면 저희 대령님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죠?"

"으득! 그럴 수는 없네. 그렇게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니! 뭐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라구? 그게 무슨 건물인가? 벽에는 아무 장식도 하지 말라니! 그것은 우리를 모독하는 처사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이만 한 키의 드워프가 두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호크는 애써 나오는 웃음을 참아냈다.

"자, 자! 진정하시고! 이걸 한번 보세요!"

"헉, 이럴 수가! 이것은......!"

'후후후! 어때, 눈 돌아가지?'

어느새 돋보기를 꺼내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엠톤은 기쁨으로 온몸을 떨었다.

"이, 이 정도 순도의 금이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금이네. 어떻게 이런 금괴를! 이런 것은 거의 드래곤들만이 소유했던 것인데!"

"흠흠! 뭐,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이런 금괴를 충분히 드릴 테니 제발 저희 대령님이 원하는 대로 건물들을 지어주시죠."

탐욕스런 눈길로 금괴를 훑어보는 엠톤은 행여나 호크가 도로 가져갈까 봐 얼른 뒤로 감추었다.

"하하하! 물론이네. 때로는 의뢰인의 의사도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장인의 자세지. 하하하! 안전만 보장된다면 우리 일족을 모두 데려와서 작업할 수도 있네만. 그러면 공사기간이 훨씬 단축될 텐데 말이야. 그러자면 비용이 좀......."

어느새 두 손을 비비면서 발그레해진 두 볼을 들이미는 엠톤을 보면서 혀를 차는 호크였다.

"비용은 상관하지 마시고 일을 추진해주세요. 그리고 안전이야 보시면 알겠지만 걱정 없습니다. 그리고 또 부탁할 것이 있는데....... 핸들러, 그걸 가져와!"

"네, 백작... 아니 중령님!"

아직은 초반이어서 호칭이 쉽게 나오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만.

핸들러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조심스럽게 호크에게 건네자, 호크가 보자기째 엠톤에게 넘겼다.

"이걸 좀 대량 생산할 수 있을까요?"

"흠, 뭔데 그러나?"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던 엠톤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그리고 곧이어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더니 온몸을 떨어댔다. 아까 금괴를 봤을 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 흥분이었다.

"이... 이... 것이... 어... 떻게!"

워낙 흥분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호크가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올린 다음에 엠톤의 등 위에 손바닥을 얹고는 따뜻한 기운을 밀어 넣자 겨우 호흡을 바로 하고 진정했다.

"후우! 내 생전에 이것을 보게 되다니! 조상님들의 보살핌 덕분이야."

보자기를 내려놓은 엠톤이 호크를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호크가 얼른 엠톤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엠톤은 끝내 10번의 절을 하고서야 일어섰다. 보자기에 싸여 있던 물건은 호크가 드래곤 산에서 얻은 석궁이었다.

잠시 두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던 엠톤이 입을 열었다.

"이것은 우리 드워프 일족의 슬픈 비사와 함께 수많은 조상님들의 영혼이 담긴 물건일세.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저주의 마물이기도 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지."

아주 오래된, 드워프만의 비밀이 호크에게 알려지는 날이었다.

천 년도 더 오래전의 어느 날, 블랙 드래곤 카로고니아가 드워프의 뿌리인 포렌포렌 숲 속에 나타나면서 드워프들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카로고니아가 가져온 것은 하나의 설계도였는데, 바로 석궁을 만드는 설계도였다. 게다가 꺼내놓은 금속은 그들로서도 생전처음 보는 금속이었다. 아무리 녹이고 다듬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신의 요구대로 되지 않자 카로고니아는 드워프 중에서 아이들을 골라 산 채로 삼키기 시작했다. 슬픔과 죽음이 온 마을을 뒤덮었고, 보다 못한 장로들이 자신의 몸을 화덕에 던져서 그 금속을 녹였다.

결국 1백 명의 드워프 장로들과 장인들의 목숨을 집어삼킨 뒤에야 저 저주스런 석궁이 완성되었다.

카로고니아가 떠난 뒤 희생된 드워프의 수는 5백이 넘었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위대한 장인들이 갑자기 죽어버리자 훌륭한 기술이 실전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드워프들 사이에서는 저주받은 저 석궁을 생각하기조차 싫었지만, 자신들의 진정한 정수가 담긴 저 석궁을 찾아내서 조상들의 기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유지가 계속해서 내려왔던 것이었다. 그 상대가 비록 오크라 하여도 반드시 절을 10번 해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것도 그때부터 내려온 당부였다.

"자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우리가 부탁해야 할 처지네. 바로 부족에게 연락을 넣겠네. 곧 일족 모두가 이리로 옮겨와야 할 것이네. 괜찮겠나?"

"훌륭한 기술자들이 제 발로 온다는데,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종신 계약이나 할까요?"

호크의 넉살에 엠톤 역시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짧은 다리로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가는 엠톤을 바라보던 호크가 예상외의 소득에 기분이 좋아 휘파람을 불었다.

"석궁은 어쩌시려고요?"

"응? 저거? 후후! 우리 외인부대의 기본 무기가 될 거야. 크크크크! 이제 좀 해볼 만해지겠는데?"

"하지만 어떻게......."

"자네는 아직 저 괴물의 위력을 알지 못하니 그래. 프로토 타입이 나오면 시험발사를 자네에게 맡기지. 아마 놀랄 거야!"

서서히 준비하던 것들이 마무리되자 호크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연병장에서 구령소리에 따라서 구보를 하고 있는 훈련병들을 보더니 이내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사람이 문제군. 어느 세월에 저들을 훈련시키고 저들이 또 일반병사들을 훈련시키지? 휴우! 훈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군!"

지금 호크의 말을 저들이 들었다면 아마도 탈영을 시도했을지도 모르겠다. 새로이 시작된 군생활, 한국에서 하사였던 호크가 이제는 중령이 되었고 비서관 이었던 김재덕 대위는 대령으로 초고속 진급을 했다. 그러나 계급의 무게 만큼 책임과 업무가 늘어나자 두사람 다 조금식 지쳐가고 있었다.

"자! 이것으로 오늘 훈련을 마친다. 선임자 앞으로!"

"제일 선임병, 숀아처!"

"그래. 일곱 시까지 식사를 마치고 작업에 들어간다. 열외 병력 없이 모두 집합하도록! 이만, 해산!"

"충성!"

"아우, 또야! 도대체 왜 우리에게 인부들이나 하는 작업을 시키냔 말이야!"

"저번에 호크 백작님, 아니 중령님 말씀 못 들었어! 그것도 다 체력 훈련의 일종이라고 그러셨잖아!"

"제길! 왠지 그런 거 같지 않단 말이야. 빌어먹을!"

"조용히 해! 각 소대 선임병들은 모두 일곱 시까지 B동 막사 공사 현장 앞으로 집합한다! 모두 작업복 복장으로 모이는 것 잊지 말도록!"

투덜거리는 소리와 함께 석식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 식당으로 향했다.

부산하던 연병장이 조용해지자 연병장 나무 위에서 소리 없이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크크크! 다 그런 거야. 나도 신막사 공사할 때, 매일 일과 후에 모래자루 날랐다. 그 한여름의 고통을 생각하니. 우우! 끔찍하군. 이런 공사야 차라리 파티라고 생각해라. 다 너희들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니까. 후후! 나중에 자신들이 고생해서 지은 신막사에 신병들이 들어오면 꽤나 난 체를 하겠지. 나도 그랬었나? 암튼 내가 고생해서 지은 막사에 몸만 쏙 들어와서 편히 자는 모습을 보니 배가 좀 아프기는 했지. 그래서 군대는 줄을 잘서야 한다는 말이 생겼는지 몰라. 에휴~ 그나저나 이 드워프 아저씨들은 어째 소식이 없나? 오늘쯤에는 뭔가 결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디 간만에 공방에 들러봐야겠군. 참, 애들 짬밥은 먹을 만한가? 뭐, 잘 나오겠지!"

연병장 나무 위에서 훈련병들의 훈련을 지켜보던 호크는 이전에 맡긴 썬더버드의 양상형 개발이 늦어지자 조급해져 있었다. 병력은 준비되어 가는데 무기가 아직도 답보 상태여서 여간 갑갑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도 저녁을 거른 채, 이제는 이곳으로 아주 이주해버린 드워프 일족의 공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던 호크는 갑자기 화살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기겁해서 몸을 피했다.

탕!

두드드드드!

문에 꼬리 부분까지 단단히 틀어박힌 화살이 아직도 진동하면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뭐예요? 내가 좀 재촉했기로서니 대놓고 화살질입니까?"

문에 박힌 화살을 보고 성질을 내려던 호크는 공방의 작업대에 서 있는 드워프들의 표정을 보고서는 뭐가 잘못됐나 싶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호크가 가까이 다가섰는데도 드워프들은 문에 박힌 화살을 보고 넋이 나간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왜... 왜 그러는 거예요, 갑자기 왜 그래! 응? 저도 좀 압시다!"

"우핫핫핫! 드디어 성공이다!"

"우와! 해냈다!"

"이제야 조상님들에게 면목이 서는구먼. 허허허허허!"

"저기요, 여보세요! 여기 사람 있습니다!"

호크가 채신머리없이 드워프들 앞에서 두 손을 들고 '나 좀 봐라' 하듯이 손짓을 하자, 그제서야 호크를 발견한 드워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대체 갑자기 실성한 것처럼 왜 이래요! 무턱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화살을 쏘지 않나?"

"크하하하하! 백작, 아니 중령! 아니, 뭐든지 간에! 음하하하하하! 이걸 보시게, 자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썬더버드 양산형 스패로우(Sparrow)일세!"

이곳으로 새로 이주해온 포렌포렌 숲 속의 일족이자 이곳, 드워프 공방의 방장인 반델로스가 거만하게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석궁 하나를 내놓았다. 호크는 고대하던 물건이 완성됐다는 말에 흥분으로 온몸이 떨렸다.

젊은 드워프 하나가 호크에게 공손히 스패로우를 전해주었다.

썬더버드보다 가볍고 길이가 좀 길었다. 썬더버드가 은빛의 묵직한 느낌이라면, 스패로우는 검고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호크가 주문한 대로 무게 중심이 제법 잘 맞추어져 있었다.

호크는 등 뒤에 돌렸다가 재빨리 앞쪽으로 돌려 겨냥해보고, 다리 쪽으로 옮겼다가 동일하게 겨냥해보는 식으로 이동 중이나 순간적인 조준 발사가 가능한지 면밀하게 시험해보았다.

겉으로 본 모습은 대만족이었다. 현대의 소총처럼 가늠좌를 달고 이 세계에는 없는 카트리지 타입의 화살통 자동장전 석궁이었다.

"썬더보드보다 좀 가볍군요. 그것은 사격 시에 오히려 도움이 되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발사능력은 어떻게 됐나요? 사거리, 관통력 시험은 다 한 건가요?"

호크의 쏟아지는 질문에 반델로스가 뿌듯하게 웃으면서 호크를 끌고 공방 지하 내려갔다. 지하에는 각종 갑옷을 입힌 인형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다. 시험 사격장으로 꾸며진 이곳에서 비밀리에 스패로우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흠, 어디 한번 제가 시험발사를 해보죠."

호크가 방아쇠 안전장치를 풀고 가늠좌를 세웠다. 한쪽 눈을 감자 가늠쇠에 사격표적이 들어왔다. 갑옷의 심장 부위를 겨냥한 호크는 호흡을 잠시 멈춘 후, 하나, 둘, 셋에 방아쇠를 당겼다.

핑!

푹!

화살이 거의 꼬리를 감출 정도로 깊이 박혀 들어갔다. 실험용 갑옷은 결코 싸구려 갑옷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거리가 50미터인 걸 생각하면 대단한 위력이었다.

매우 만족한 호크가 스패로우를 쓰다듬은뒤 반델레스의 손을 맞잡고 기뻐했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지고 주위에 서 있던 드워프들의 박수소리가 커지자 서로 다른 이종족의 수장은 서로 다른 상념에 빠져 들었다.

'후후후~ 이제야 우리 조상님들이 남기신 기술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역시 우리 드워프는 예술을 위해 태어난 종족이야! 하하하하!'

'빌어먹을! 도대체 들어간 금괴가 얼마야! 금방 개발이 된다더니 젠장! 돈 아까워!'

"하하하하! 이렇게 훌륭하게 양산형 프로토 모델이 나오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언제쯤 양산에 들어갈 수 있는지?"

"언제라도 가능하네. 내일부터 양산에 들어가지. 그동안 최대 관건이던 카트리지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말이야. 하하하하!"

"다행이군요. 그럼 서둘러 주십시오. 이미 병력들은 준비가 되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 위험한 무기를 아무렇게나 나누어줄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양산형 모델이 나오면 사이클론님께서 적당한 조치를 취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안심일세. 이것은 위험한 무기가 될 수도 있어. 자! 이걸 보게. 자네가 설명해준 원리 중에서 착안한 건데 말일세. 안전장치를 뒤로 젖히게. 그렇지! 이제 방아쇠를 당겨보게. 두 손에 힘을 꽉 쥐고 말이야!"

호크가 어깨에 견착을 강하게 하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카트리지가 빨리 돌면서 윙윙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요란한 발사 소리와 함께 카트리지의 화살들이 쉴 사이 없이 표적을 향해 날아갔다.

핑핑핑핑핑핑핑~

눈 깜짝할 사이에 카트리지 1통이 다 비워졌고, 표적으로 세워진 갑옷은 고슴도치로 변해버렸다.

"이... 이게... 어떻게!"

"후후후! 보너스일세. 어떤가, 마음에 드는가?"

스패로우를 쳐다보던 호크가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돈 아깝다는 말은 취소요! 난쟁이 똥자루들이 제법이군. 하하하하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데? 이제 기본 무기가 생겼으니 본격적인 전쟁훈련을 시작해볼까?"

스패로우를 쳐다보는 호크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장군님!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그렇게 늦어지지는 않죠?"

"그래, 정말 다행일세. B동만 완성되면 다 끝나가니 말이야. 이제는 밤기운이 겨울날씨 같아!"

"네, 장군님께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후후! 아닐세. 건축과 기계 공학도 출신인 김 대위, 아니 이제는 이 외인부대의 김 재덕 대령이지, 나도 아직 입에 붙지를 않는군그래. 하여간 김 대령 덕택일세. 그 친구가 없었다면 꿈도 못 꾸었겠지. 나야 보병에 관해서밖에는 아무것도 모르잖은가? 그동안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네?"

"아닙니다. 병과가 어떻든지, 군종이 어떻든 장교는 장교입니다. 서로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폴렌시아에서 유일한 현대 군대의 장교이시지 않습니까?"

"하하~ 이거 사병들이 모두 자네 같은 생각이면 좋겠구먼!"

"그럴 리가요. 대부분 사병들과 장교들 사이가 좋지는 않죠. 그건 지나가던 개도 아는 일이죠. 그래도 작전 상황이 되면 다르더라구요. 전 그때 장교와 사병의 차이를 알았죠. 훌륭한 장교 한 명이 중대원들을 모두 살릴 수도 있고, 어리석은 장교 한 명이 대대병력을 몰살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눈으로 봤거든요! 그래서 저 녀석들을 악바리로 만드는 겁니다!"

"자네를 해병대에 파견훈련을 보낸 것이 잘한 일이였군."

"장군님이셨습니까? 영웅교육이라고 불리는 해병대 교육에 육 주간 파견 보내신 것이? 전 보병 중에서 우수 병사만 뽑아서 보낸다고 들었는데, 육본에서 시행한 것이 아니었군요."

다소 감정 섞인 호크의 말에 나 장군이 실소를 흘렸다.

"어째 기분 상한 거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요. 하지만 그때, 전 겨우 사 주하고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조금은 원망했을 겁니다."

옛날 일을 말하듯 하는 호크를 보면서 나 장군이 담배 파이프를 털었다.

"그래, 내 욕 많이 했을 걸? 그때 내 귀가 무지 가렵더구먼. 하하하!"

"하하하! 아마도요"

"그나저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훈련이 아닐까?"

"가혹이요? 아닙니다. 저희들과 쟤네들하고는 입장이 다르죠. 그 당시의 저희들이야 때 되면 제대하고 사회로 복귀하지만, 지금 연병장에서 구르고 있는 저들은 이제 곧 전쟁터에 투입될 운명들입니다. 전 말입니다, 장군님.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더 혹독하게 단련시킬 겁니다. 저들은 일반사병이 아니고, 모두 장교나 분대장급들이에요. 저들이 잘해야 수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겠죠. 지금 흘리는 땀방울들이 모두 안전한 귀향길을 보장하는 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휴! 그래, 전쟁이란... 이제 곧 지옥주지?"

"네, 내일부터입니다! 아마도 생전 처음 겪어보는 고문이겠죠."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연병장에서 2천여 명의 우렁찬 함성소리가 이제 막 겨울에 들어서는 디안 협곡에 울려 퍼졌다.

"우와! 웬일이야! 고기 스튜에 스테이크까지!"

"그러게 무슨 날인가? 누구 생일인가?"

"뭐, 어쨌든 포식하게 생겼으니 실컷 먹어두자고!"

훈련병들은 간만에 나온 진수성찬에 고무되어서 식당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순간, 왁자지껄한 식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부대! 동작 그만! 충성! 훈련병 석식 식사 중!"

"됐어, 됐어. 그만 쉬어!"

"후후후! 그래. 맛나게 들도록. 마지막 식사가 될 테니까 말이야. 크크크!"

훈련 조교인 에밀이 무엇이 그토록 즐거운지 점호판을 들고 식당 테이블을 툭툭 치면서 훈련병들 사이를 지나갔다.

"모두 식사하면서 듣도록! 그동안 모두 고생 많았다. 오늘로서 기초체력 및 군사훈련을 마친다!"

"와아아아아아."

또 다른 조교인 피터슨의 말에 모두들 식기를 포크로 두들기면서 함성을 질렀다.

"아, 조용! 그만! 그만하라니까! 좋아하기는 아직 이르다. 진정한 군인이 되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다. 내일 여섯 시를 기해서 지옥주가 시작된다. 살아남는다면 명예로운 외인부대의 배지를 받게 되겠지만, 탈락한다면 패배자로서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게시판의 공문을 참조하도록! 모쪼록 마지막 식사를 즐기도록 해라!"

"후후후! 자! 자! 어서 아침이 밝았으면 좋겠군! 흐흐흐흐!"

"......."

에밀의 소름끼치는 목소리에 다들 식판에서 손을 놓았다. 내일 다가올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기상! 이 새끼들이 여기가 무슨 여관인 줄 아나! 빨리, 빨리 안 일어나!"

새벽 5시에 들이닥친 조교들의 닦달에 그동안의 훈련으로 낡고 색이 바랜 군복에 모자만 걸친 훈련병들이 연병장에 집합했다. 다들 엄습하는 두려움으로 두 눈에 핏발까지 섰다.

"부대 차렷! 중령님께 경롓!"

"충성!"

"음~ 충성!"

단상에 올라선 호크는 깊이 눌러쓴 붉은색 모자의 창 밑으로 훈련병들을 좌에서 우로 훑어보았다.

"그동안 모두 수고가 많았다. 하지만 이 지옥주를 통과한 자만이 진정한 사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탈락한 자들은 통과할 때까지 반복 훈련이 계속될 것이다. 명심해라! 모두 사내가 되든지, 모두 죽든지, 너희에게 주어진 길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았나!"

"넵! 알겠습니다!"

"좋아!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이 시간부로 지옥주 훈련을 발효한다! 조교들도 각오, 단단히 해라. 그럼 파티를 시작해볼까?"

새벽 5시에 연병장은 때 아닌 아침 체조로 초겨울의 차가운 기운을 녹이고 있었다.

"헉헉!"

"힘들면 어서 가서 저 종을 쳐라! 그럼 편히 씻고 집에 가서 쉴 수 있다. 뭐 하러 이 고생을 하나! 어서 종을 치고 포기하란 말이다, 이 쓰레기들아!"

아침 8시가 다 되도록 체조를 거듭하고 있는 훈련병들의 목소리는 이제 아예 쉬어버렸는지 숨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취사병들이 스프 끓이는 통을 몇 개 들고 단상 앞에 나타났다. 에밀이 고개를 끄덕이자 취사병들이 통의 뚜껑을 열었다. 각각의 통에는 빵과 고기가 담겨져 있었다. 음식냄새가 연병장 안을 가득 채우자 모두의 목구멍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에밀이 단상에서 내려와 빵 1개를 집어 들고 맛있게 뜯어먹었다.

"음, 좋군. 금방 구워서 그런지 따끈해! 좋아!"

"에밀, 저 녀석! 지금 누구 흉내 내는 것 같은데?"

호크의 말에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나자 호크가 황급히 돌아보았다.

"뭐야, 너희들 왜 웃어?"

"흠흠! 아, 아닙니다."

"뭐가 아냐? 가만 보니까 저 녀석 나한테 쌓인 게 많은가 본데?"

"저...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에밀, 저 녀석이 중령님에게 개긴 적이 있다고 유독 많이 굴리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에밀 혼자 특훈이라고 중령님께서 두 번이나 지옥주를......."

"헉! 그... 그랬나?"

갑자기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듯 수많은 영상이 눈앞에 떠오르자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

"하하하! 뭐, 설마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니겠지? 옆에서 보다 이성을 잃을 거 같으면... 말 안 해도 알지? 피터슨, 책임지고 에밀을 지켜봐라!"

호크는 에밀의 전신에서 알 수 없는 살기를 느끼고서 몸을 떨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었다.

"좋아! 사랑하는 나의 훈련병들, 즐거운 식사 시간이다. 지금부터 삼 분간이다. 식사 시작!"

그 순간 연병장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빵 1개라도 더 집기 위해서 서로 밀치고 넘어지고, 넘어지는 와중에도 입에 빵을 집어넣는 훈련병도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흙이 묻어도 상관 없었다.다들 입에 꾸역꾸역 넣기 바빴다.

"쯧쯧! 조금만 먹는 게 좋을 텐데. 쯧쯧!"

"그러게 말이야! 슬슬 구보 준비를 해야겠군. 오늘은 어디로 갈까나?"

"그만! 모두 동작 그만! 이 새끼들이 안 떨어져!"

악을 쓰면서 후려치는 조교들의 몽둥이질에도 연신 입에다 빵을 집어넣던 훈련병들은 모두 몽둥이찜질을 받은 후에야 전술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전처음 보는 보트였다. 바로 IBS(공기 팽창식 고무보트)였다.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여기서부터는 본 조교가 특별히 직접 교육하겠다. 모두 IBS 훈련에 온 걸 축하한다! 하지만 우선 PT체조로 몸을 풀어야 한다. 이것 역시 모두 제군들의 안전사고를 막고자 하는 취지이지, 여러분들을 학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럼 즐거운 체조를 즐겨볼까?"

PT체조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자 아침 먹은 것을 토악질하기 시작하는 훈련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조교들이 따라붙어서 차마 듣기 힘든 욕설과 비방을 퍼부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언제나 같은 소리였다.

"포기해라! 그럼 쉴 수 있다!"

첫날은 괜찮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악마의 속삭임이 되어 찾아왔다.

요크샤이어에서 온 토미는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자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났는지,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 위에 놓인 IBS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지도 한참이 지났다. 물에 젖은 군화에서 나는 쩔꺽거리는 소리만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을 느끼게 해줄 뿐,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 같았다.

토미 자신은 못 느끼고 있지만, 어느새 대열에서 이탈해서 옆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풀썩~

"하아~ 하아아~!"

"그만하면 됐다. 포기해라. 그럼 푹 자고 쉴 수 있다. 창피할 거 없어! 그냥 포기한다고 하면 돼!"

토미의 귀에 달콤한 속삭임이 계속되었다.

'그래! 잘 수 있어! 달콤한 잠을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따끈한 물로 목욕을 하는 거야. 그래~'

참을 수 없는 유혹에 모자를 벗으려고 하는 순간, 여자의 날카로운 외침이 토미의 정신을 깨웠다.

'오빠! 오빠! 꼭 나 데리러 올 거지? 그렇지? 오빠! 오빠!'

"헉! 이, 이런 젠장 할!"

결혼식 전날 로베니아의 이름 모를 귀족에게 끌려갔던 여동생의 울부짖음이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그때처럼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자신의 모습을 본 토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자, 두 손으로 다리를 끌어 모아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 그렇게는 안 됩니다! 절대로! 제 위치로 가겠습니다!"

비틀거리던 토미가 어디서 기운이 났는지 자신의 IBS를 찾아갔다.

언덕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크가 상황판을 들여다보고 만족한 듯 핸들러에게 건넸다.

"호오~ 탈락률이 십 퍼센트가 안 되다니, 대단한데!"

"모두들 가슴속에 응어리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녀석들이지만, 더 이상 잃고 싶지도 않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 좋아! 앞으로 지옥 같은 전쟁터를 누벼야 한다. 더! 힘들고 괴롭더라도 오히려 즐겁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밀어붙여야 해!"

호크의 열의에 핸들러가 조심스럽게 제동을 걸었다.

"백, 아니 중령님! 저희가 과연 로베니아를 이길 수 있을까요?"

"응? 로베니아라... 실은 핸들러, 나는 로베니아보다 세린디아가 더 무서워! 로베니아는 오랜 세월 강대국으로서 안정돼왔어. 그들이 비록 강하다고 하지만, 그들은 굳이 이 평화를 깰 생각이 없어. 하지만 말이야, 세린디아처럼 광기에 휩싸이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져. 내가 살던 세상, 아니 나라에서 많이 보아왔거든. 아마도 우리의 처음 전쟁은 세린디아가 될 거야. 빌어먹을! 게다가 신들의 장난까지! 모두들 지옥의 전사가 되어야 해! 타인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휘둘리는 게 싫다면 말이야!"

"신들의 장난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응? 아... 아냐, 아무것도. 이 지랄 맞은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뭐."

당황한 듯 얼버무리는 호크를 이상하다는 듯이 핸들러가 쳐다보았지만, 이미 호크는 IBS 훈련을 하고 있는 훈련병들에 시선을 돌린 후였다.

"허허! 이거 마치 좀비들 같구만!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재우지 않은 건가?"

"훈련기간인 138시간 동안 일체의 수면과 휴식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 시간 동안이나 사람이 견딘다는 말인가?"

거의 뒤로 쓰러질 뻔한 머스탱 공작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네. 전혀 문제될 거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옥주 훈련은 삼 일째가 가장 힘듭니다. 식욕보다 인간을 더 미치게 하는 것이 잠이거든요.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함께 밀려오는 잠은,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들죠. 식사는 보트를 머리에 인 채로 합니다. 보트의 무게는 장정 두 사람의 무게가 넘습니다. 그렇게 식사하는 이유는, 밥을 주면 먹기보다 잠들어버리기 때문이죠. 사 일째가 되면 훈련병들의 눈빛이 비로소 독기와 살기를 내뿜기 시작합니다. 겨우 군인다워지는 때입니다. 이렇게 점차 훈련강도를 높여가면 신체 근육 하나하나가 전투에 맞는 몸으로 바뀌게 됩니다."

"도대체 이렇게 훈련시키는 군대가 정말 있다는 말인가?"

"네. 제가 살던 나라에서는......."

"정말이지, 뮤슐란 대륙에는 무서운 인종들이 사는구먼! 만약에 폴렌시아와 뮤슐란 대륙이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면... 휴우! 생각하기도 싫구먼!"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호크는 당황했다.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려니 괜히 말만 더듬게 되지 않는가?

"흠흠, 그나저나 세린디아에 대한 조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자네의 보고서를 받고서 찰스 국왕께서도 크게 충격을 받으셨네. 그 어느 나라도 아니고 세린디아라니! 아무도 세린디아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지 않아서 말일세. 그런 약소국에서 감히......."

"그 약소국의 일개 기사에게 제가 죽을 뻔했단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미쳐 있었어요. 그자들이 그날 드래곤 산에서 가져간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 마당에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건 조커를 든 놈하고 카드를 하는 것하고 마찬가지라고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린디아의 내부정보를 캐낼 수 있는 대로 캐내야 해요! 지난번처럼 기간테스 같은 괴물이 또 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호크의 비장한 말에 머스탱 공작 역시 한껏 기분이 가라앉았다. 케린버그의 암운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안으로는 케론스 공작파가 있고, 밖으로는 북쪽의 레센 제국과 동쪽으로 예상하지 못한 세린디아까지. 정말이지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알고 있네. 그래서 가능한 인력을 모두 세린디아에 투입했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게야!"

"케론스 그 작자는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답니까?"

"아참! 그 일 때문에 내가 온 것이네. 그 작자가 로베니아에서 인원을 충당한 거 같아. 그것도 잉글햄에 거점을 마련한 것 같네. 우리 쪽 정보원들이 위치를 파악하려 최대한 노력하고 있네."

"후후! 그럴 거 없습니다. 아마도 호무관 주위에서 승냥이처럼 눈을 붉히고 있겠죠. 그나저나 저들의 교육이 끝나가니 병력 충원이 필요한데요?"

"그렇지 않아도 그게 문제일세. 이후로는 힘들 거 같아서 말이네. 더 이상 젊은이들이 사라진다면 분명히 케론스, 그 작자의 귀에 들어갈 것이 뻔하단 말이야!"

"흠, 어쩔 수 없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호무관을 이용하는 수밖에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호무관이 왜?"

"제게 생각이 다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로 돌아가시면 헬렌 백작님께 저번에 말씀드린 것이 거의 다 되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말씀드리면 아실 겁니다."

"그래, 알겠네! 그럼 계속 수고하게!"

'미안허이. 자네한테만 짐을 다 맡겨서 정말 미안하네.'

돌아가다 잠시 뒤돌아선 머스탱 공작이 호크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훈련병들을 잠시 살피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부관과 돌아갔다.

'아들아, 네가 과연 여기서 무엇을 얻을지 모르겠구나. 저 호크 백작에게 많은 것을 배우길 바란다.'

훈련병 중에 머스탱 공작의 아들이 있었다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미래를 보장받은 귀족의 자제가 지금 시궁창 똥물에 몸을 담그고, 그 물에 세수하고 이를 닦고 있다니. 적어도 멍청한 귀족이 되지는 않을 듯싶었다. 그것은 나중에 증명될 테지만, 지금은 그저 미완의 대기일 뿐이다.

"충성! 중령님, 이제 늪지훈련만 남았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좋아! 제일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군. 조교들, 다시 체크하고 난 사이클론 영감을 만나고 와야겠다!"

보트를 머리에 인 채 군가를 부르면서 구보하는 훈련병들을 보니 괜히 호크의 가슴속에서 뭔가 치밀어 올라와, 언덕 너머 사라지는 그들을 향해 조용히 경례를 붙였다. 그들의 모습이 두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요, 할아버지!"

"허허! 깜짝이야! 기척이나 하고 나타나라, 녀석아! 그래, 네가 말한 대로 주문을 걸었다. 이것 때문에 아까운 마나석을 이렇게나 많이 소모하다니, 아깝구나!"

사이클론이 작업하고 있는 탁자 뒤에는 빛을 잃은 마나석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적들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른 마법사가 풀 수는 없게 하셨죠?"

"그래. 네 말대로 일련번호 조합과 사용자의 피, 그리고 마나석을 이용한 맹세의 서약을 이용했기에 그럴 일은 없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이게 제일 중요했거든요! 할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절대로 이 일을 시작하지 못했을 거예요. 고마워요!"

"어라! 웬일이냐? 네가 이렇게 고분고분하다니. 오늘은 달이 하나만 뜨려나?"

사이클론의 농담에 호크의 이마에 주름이 가득 파였다.

'이 영감탱이가 좋게 대해주면 아주 나를 가지고 놀아요, 정말! 참자... 참자. 아직 우려먹을 게 많이 남았으니. 심호흡, 심호흡! 후우~ 후우~'

"하하하! 저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요, 변해야죠.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허허! 정말이지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모양이군. 저 망나니가 이제는 제법 어른 티를 다 내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호크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테지만, 어쨌거나 지금 싸이클론은 매우 만족한 듯 열심히 작업을 계속했다.

"그래, 놈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고?"

"네, 케론스 공작 각하!"

"가끔 캐더린 양과 산책을 하는 것 이외에 바깥출입은 없다시피 합니다. 호무관 안쪽은 아무래도 무술을 익히는 자들만 있는 곳이라서 어쌔신들이 잠입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 따로 사병조직을 마련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고?"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용병대를 조직한다고 합니다."

"용병? 옳거니! 제대로 걸렸다. 눈속임이구나! 이 녀석이 사병조직을 만들려고 그러는 것이야. 틀림없어!"

확신에 찬 케론스 공작의 생각에, 보고하던 어쌔신이 난감한 듯 고개를 들어 눈치를 보다가 힘없이 대답했다.

"저,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응? 무슨 소리냐, 그게?"

"말 그대로 용병대입니다.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뭐라고? 정말이냐! 확실한 거야?"

"네, 그렇습니다.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호무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정말 폴렌시아에서 떠도는 용병 무리입니다. 주로 상단호위를 맡아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도대체 녀석의 꿍꿍이가 뭐야! 그 속에서 뭘 꾸미고 있기에 웅크리고 있는 거냐구?"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어쌔신을 바라보던 케론스가 답답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좋다. 다 좋아! 그런데 형님이 준비 중이라고 하신 일은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 도대체 놈을 제거하실 의향은 있으신 거냐?"

"그렇지 않아도 곧 계획이 실행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내용은 저희들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틀림없겠지. 크크크! 이제 놈의 목숨도 바람 앞의 등불이로구나. 크하하하하!"

"저... 실은 호무관에서 이런 광고를 전국에 내고 있습니다. 아니, 폴렌시아 전 대륙에 퍼져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걸 보시죠. 이게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전단지입니다!"

"뭐야!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바라보자! 얼마나 헛되이 젊음을 낭비할 것인가? 바꾸고 싶다면 호무관의 문을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다?"

"갑자기 무도관의 관원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관원들을!"

"네. 그런데 그것이... 그 문구가 묘하게 젊은이들을 자극하고 있나 봅니다! 벌써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고 있답니다!"

"좀 더 파볼까요? 아무래도 수상한 냄새가 나는데요?"

인상을 쓴 케론스는 전단지를 구겨서 그 뭉치를 보고를 하고 있던 어쌔신에게 던져주었다.

"그만두고 낙인의 위치를 찾는 데 중점을 두게! 호크 녀석의 문제는 형님이 곧 처리한다고 하니, 이제 모든 인력을 낙인의 회수에 두어야겠어. 더불어 성스런 돌까지 말이야. 돌아갔던 성기사단 놈들이 다시 되돌아왔다고 하니 뭔가 찾은 게 틀림없어. 그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잉글햄을 뒤지고 있는데 그들보다 먼저 찾아야 해!"

"하지만 모이는 수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방관하시는 것은 좋지 않을 듯싶습니다만?"

"멍청한 것 같으니라고! 이 전단지 맨 밑에 작게 적혀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네? 그게 무슨... 헉!"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읽던 어쌔신은 헛바람을 삼켰다. 자신도 미처 보지 못한 문구가 아주 작게 쓰여 있었던 것이다.

<단, 입관비로 금화 1닢을 내야 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어쌔신이 민망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미친놈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병력을 모으려는 것은 아니야. 하기야,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데 그럴 수도 없겠지. 오히려 머스탱 쪽에 더 감시를 붙여야겠어!"

"아,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잉글햄 일이나 신경 써! 이 일은 우리가 직접한다. 로베르트, 지난번에 이야기한 회유 건은 어떻게 됐나?"

"네, 공작님. 이미 적당한 자를 구워삶아놓았습니다. 조만간 저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겁니다."

"좋아! 역시 내부에 사람을 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야!"

때때로 선입견이나 너무 빠른 판단은 대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그 밑부터 흔들리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처럼 거대한 조직도 그 수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틀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냉정하다는 케론스 공작도 호크의 분동에 참지 못하고 흥분해서 판단이 흐려진 것이다. 좀 더 세밀하게 호크의 호무관을 지켜보았더라면 나중에 자신들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섣부른 판단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케린버그는 소리 없이 강해지고 있었다.

"우아아악!"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지옥주 훈련의 하이라이트인 늪지훈련을 마친 훈련병들이 전방을 향해 훈련이 끝났음을 알리는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훈련장 인근의 늪에서 배출되는 독소와 진흙 뻘 사이에는 전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는 지독한 곳이었다(?). 그 진흙 뻘에서 밤낮을 뜬눈으로 지새운 훈련생도들이 집합한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표정은 힘든 것보다 기쁨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모습 그 자체였다. 핏발 선 붉은 눈과 함성을 지를 때 보이는 치아가 하얗게 보였다.

한숨도 못 잔 훈련병들은 다리 사이의 벗겨진 허물 때문에 움직일 때마다 쓰라린 고통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거의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모든게 굼뜨게 보였다. 인간으로서의 일반적인 사고를 버리고 어떠한 곳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본능, 또 전우를 위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이들 2천여 명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모두 차렷! 충성! 수고하셨습니다."

그동안 악귀처럼 괴롭히던 조교들이 모두 일렬로 서서 훈련병들에게 존경의 표시로 거수경례를 했다. 비로소 동등한 자격을 갖춘 전우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우아아아아!"

그 지친 몸 어디에서 그런 기운들이 나는지 훈련병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교관들을 덮쳐갔다.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내들만이 느낄 수 있는 뜨거움이 지금 여기 늪지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서로 진흙을 던지면서 웃고 울고 서로 뒤엉켜 뒹굴고 있는 그들은 더 이상 훈련병도 조교도 아니었다.

"진짜배기 사내들이 되었군! 거창한 퇴소식을 준비해야겠어. 핸들러?"

"하하하하! 저 기분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그래, 오늘 저녁에 술도 충분하게 넣어주고."

"알겠습니다, 중령님!"

'에효, 한국 같으면 막걸리를 아주 거나하게 쏘는 건데, 아쉽구나. 여하간 고생들 했다.'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호크가 지금도 어린아이들처럼 진흙 바닥을 뒹구는 다 큰 어른들을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마냥 신나는 그들이었다.

"어서 오게. 이리 와서 이걸 한번 봐주게 어떤가? 한다고 했는데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언제 이런 걸 다... 훌륭합니다, 대령님!"

"후후!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아직도 그 대령이란 호칭이 익숙해지지 않아. 마음에 들 줄 알았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해야지."

"아이고, 저는 어떻고요. 대령님이야 대위에서 대령이지만, 저는 일반 하사에서 중령입니다. 너무 빨리 올라와서 눈이 어지럽다고요."

서로 마주 보면서 웃고 있는 호크와 김재덕 대령은 찰스 국왕과의 면담 이후 전폭적인 지지 아래 지금의 부대를 만들어냈다. 처음 보는 군복과 호칭, 계급, 행동양식과 군법 때문에 다들 혼란스러워했지만, 정작 급속 승진한 이 두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계급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크를 불러들인 김재덕 대령이 호크를 이끌고 보급대로 향했다.

"이곳 드워프라는 종족들은 옷 만드는 데도 일가견이 있더구먼. 무슨 몬스터의 가죽과 생전처음 들어보는 고치에서 뽑은 실이라고 하던데, 천이야 그렇다고 쳐도 이렇게 얼룩무늬를 제대로 만들어낼 줄은 몰랐어. 하하하하!"

"이럴 수가! 정말 훌륭한데요? 충격입니다. 그나저나 이 많은 가죽들을 어디서 구했는지, 대단하네요."

"하하! 그 가죽은 자네가 다 구해준 거라고 하던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이런, 이 친구 좀 보게나. 자네가 지난번 디안 요새라는 곳에서 어마어마한 몬스터들을 지옥으로 보냈다며? 그때 나온 가죽들이 백 년은 쓰고 남을 정도라고 하더구만."

'이런 젠장! 그게 돈이 되는 거였어? 도대체 그 수가 얼마야?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아이구, 내 돈~'

김재덕 대령과 함께 보급대에 들어선 호크는 테이블에 쭉 널려 있는 군복 샘플을 보고 크게 놀랐다. 기본적인 것은 현대의 군복 형식을 따랐지만, 이곳의 특성을 살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게다가 가슴 부위에 덧입는 하드레더 프로텍터와 손목과 무릎을 보호하는 각종 아대 또한 이곳의 환경에 꼭 들어맞는 액세서리였다. 더구나 캡 모양의 군모가 아니고, 베레모 스타일의 군모 또한 멋져 보였다.

현역 시절에 괜히 공수부대원들의 베레모와 가슴에 달린 낙하산 마크만 보면 기가 죽곤 했던 호크는 조교 모자를 벗고 베레모를 착용해보았다. 왠지 가슴이 뛰었다.

그런 그에게 김 대령이 무언가를 손에 건네주었다. 군번줄이었다.

"제발! 이것을 앞니에 박는 일이 없길 바라네! 알겠지! 내가 한 말, 이것은 부탁이 아니고 명령이야. 죽지 말고 꼭 살아남아. 알겠어!"

자신의 새로운 군번줄을 만지작거리던 호크는 자세를 바로하고 김 대령에게 거수했다.

"넵! 호크 중령, 대령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충성!"

"이 자식이! 장난인 줄 알아!"

호통 치는 대령의 두 눈에 약간이지만, 물기가 보이자, 호크도 목이 콱 메어왔다. 요즘 들어 자꾸 이러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쉽게 마음이 물러지는 것이 불안했다.

호크의 예상대로 앞으로 겪게 되는 참담한 전쟁에 점점 감정이 메말라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상대의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호크였지만, 전투지휘관으로서 짊어지는 무게에 변하게 될 미래의 모습에 불안했던 것이다.

단상에 선 나형석 장군은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연병장의 퇴소병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 명 한 명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무척이나 애정 어린 모습이었다.

"기분 좋지? 그래, 그럴 것이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 같고, 온몸에 기운이 폭발할 것 같은 기분! 훈련을 마친 자로서 우리는 같은 전우이자 동료이며, 전쟁터에서 서로를 지켜줄 방패이다. 제군들! 나는 제군들이 훌륭한 장교로서, 지휘관으로서 성장해나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대륙은 일촉즉발의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다. 곧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으로 여러분들이 뛰어들 것이다. 그때 오늘의 일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그동안의 훈련을 믿고 행동해라! 먼 훗날,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나는 나의 손자, 손녀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영웅들과 함께했다고!"

"우와아아아아!"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휘장을 달아주는 호크와 나형석 장군의 마음은 휘장을 하나씩 달 때마다 그 무게를 느꼈다. 걱정했던 큰일들을 별 탈 없이 해낸 것도 있지만, 처음으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군인들이다. 이들의 삶에 대한 짐도 자신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 다음 들어오세요!"

문 밖에 서 있던 사람들 중에서 갈색머리의 청년이 머뭇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출신지는?"

"네, 네! 저... 맨체트스 영지의 로덴에서 온 마크라고 합니다."

"좋아요. 마크 군, 호무관에 입관하고 싶은 이유가 뭐죠?"

"네? 그야 뭐... 당연히 강해지고 싶어서죠."

"왜 강해지고 싶은데요?"

"네? 왜라뇨? 남자라면 당연히 강한 힘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네~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입관비 내시고 2층 사무실에 가시면 수속을 밟아줄 겁니다. 자, 다음 사람!"

"젠장! 어느 세월에 이런 어중이떠중이 다 가려내지? 에휴!"

"에고고!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백작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지,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난 우리 애들 자세 잡아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그러게 이번 달에도 승단시험은 그른 거 같아. 아이들이 승급심사를 얼마나 기다리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여러분!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수고스럽더라도 모두 힘내주세요!"

"헉! 부인!"

"백작 부인을 뵙습니다!"

호무관의 사범들이 면접 사무실에 예고도 없이 캐더린이 나타나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의를 갖추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캐더린은 점점 더 그 미모를 더해가고 있었다. 원래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사랑을 하면 아름다워진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최근 들어 그 빛을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하나의 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다.

"호호호! 언니! 우리 호무관 사범들은 불평쟁이들뿐이라니까. 오빠, 오면 모두 일러바쳐야지!"

꼬맹이 루니가 어느새 처녀티를 낼 정도로 자라난 것이다. 두 사람이 실내에 들어서니 방 안이 환해졌다.

"호호! 우리 오빠는 내 말이라면 깜빡하는 거 아시죠? 두 사람 모두 큰일 났다구요!"

"누가 네 말이라면 꼼짝 못한다는 거냐?"

"응? 오... 빠!"

"호크님!"

"모두들 잘 있었지! 보고 싶었는데 환영도 안 해주기야!"

호크의 장난기에 캐더린과 루니가 함께 안겨왔다.

멍하니 서 있던 사범들은 부러운 듯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미리 기별이라도 하시지 그랬어요. 마중이라도 나갔을 텐데."

"하하! 그럴 수야 없지. 나는 공식적으로는 호무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걸로 되어 있는데, 당신이 마중 나오면 다 들통이 나잖아."

"아참, 깜빡했네요."

"그래, 우리 대역들은 연기를 잘하고 있나 보네,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네. 매일 같은 시각에 호무관 주위를 산책시키고 있습니다."

"응, 해리슨 사범! 수고가 많아. 그래, 이번 전단지 때문에 힘들지?"

"네?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질문지를 만들어 놓고 사람을 가리시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휴, 지금은 그저 묻지 말고 그냥 따라와 주면 돼! 아참! 두 사람은 어머니에게 가 있어요. 저녁때 봐요, 알았지!"

캐더린과 루니를 안채로 보낸 호크는 직접 의자를 꺼내 자리를 잡았다.

"계속하지, 해리슨!"

"네, 백작님! 다음 사람!"

"출신지역과 이름, 나이를 말하세요."

"뉴햄튼의 쇼어라고 합니다. 올해 열아홉입니다."

"호무관에 지원한 동기는요?"

"인간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뭐라고요? 다시 한 번 말해주시겠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라고 말했습니다."

"흠, 그거하고 호무관하고 무슨 상관인가?"

호크가 직접 쇼어라는 청년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케린버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제국의 사람들에게 케린버그가 더럽혀질 때마다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렇다고 기사가 될 수 있는 신분도 아니고. 하지만 호무관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받아주신다니, 이곳에서 무술을 배운다면 적어도 야수의 손에서 케린버그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싸워볼 수는 있다고 생각했기에 왔습니다. 비록 목숨을 잃어도, 적어도 사람 구실은 했다는 소리는 듣겠죠."

"좋아, 합격!"

"저 그런데... 제가 돈이 없는데, 금화는 일해서 갚으면 안 될까요?"

"너는 입관비 필요 없다. 건물 뒤에 가면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리로 가라! 다음!"

정오가 지났을 때, 호무관의 업무를 보는 사무실에서 정문을 지나 길고 긴 줄이 시내까지 늘어서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었다. 손에는 모두 전단지를 움켜쥐고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면접 사무실에서 갈리고 있었다. 2층 접수실로 향하는 자들과 건물 뒤편 공터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가슴에 작은 꽃을 단 사람들로.

"좋아! 계속해서 질문지에 있는 대로 진행해서 선별하도록! 조금 있으면 지원 인력들이 도착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고생해! 해리슨, 자네는 내일 나하고 면담 좀 하지. 그럼 수고해!"

호크가 면접실 밖으로 나오자 수많은 눈동자가 호크에게 쏘아졌다.

"저... 저분이 바로......!"

"그래. 디안 요새의 영웅, 호크 론 케린버그 경이다."

"세상에! 저렇게 젊다니!"

"그래! 우리는 저런 분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거야.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 이 얼마나 멋진 말이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모두 자신을 칭송하는 말 일색이자, 아무리 무쇠얼굴이라고 해도 겸연쩍은지 호크는 얼굴을 붉히면서 줄을 서 있는 청년들을 뒤로하고 건물 뒤편으로 급히 돌아갔다.

"충성!"

"쉬어. 인원은 모두 얼마나 되나?"

"머스탱 공작님이 보내온 자들이 모두 천이백 명입니다. 아직도 저기 줄 서 있는 자들 중에 또 있을 테니 면접이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노인네가 힘 좀 썼구만. 그리고 면접을 통한 순수 발굴 인원은?"

"오백여 명 정도 됩니다."

"생각보다 적군!"

"면접관들보다 면접 보러 온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중령님!"

"그래, 알아! 내일이면 지원 병력들이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 루브카, 영내는 어떤가?"

"분대장 교육 및 주특기 교육이 시작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중령님이 곧 복귀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령님이 거의 쓰러질 지경입니다."

"그래, 알고 있어! 네 녀석들이 다 모자란 탓이다."

호크의 억지 섞인 말에 루브카는 당황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에 호크는 피식 웃고 말았다. 비록 저들이 초기 멤버로 호크에게 1년이 넘게 단련을 받아왔지만, 주특기 및 병과 교육은 어림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정말이지 호크가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달라붙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케론스 공작의 눈을 피하기 위해 호크가 내놓은 고육책이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좋아서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국왕파에서 보내온 젊은이들은 모두 가슴에 케린버그의 국화인 스웨니를 꽂고 있었고, 그들은 면접실에서 바로 공터 뒤로 옮겨져 왔다. 그 외에 호크가 만든 질문지를 통해서 쓸 만한 인재들을 따로 뽑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인력들이 모두 소중한 외인부대의 병력들이자, 귀중한 인적 자산들이었다.

"디안의 영내로 옮길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해. 백 번을 주의하고 다시 또 한 번의 주의를 하는 것을 잊지 말도록! 알겠지, 루브카!"

"걱정하지 마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만은 금물이야. 자만 때문에 깡통 찬 놈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어!"

"명심하겠습니다, 대령님!"

"그나저나 신병들이 들어가니 1기 녀석들이 난리가 났겠는걸?"

"말도 마십시오!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한번 보시면 아실 겁니다."

"말 안 해도 상상이 간다. 크크크크!"

키득거리던 호크가 루브카에게 주의를 몇 가지 더 하고서 서둘러서 안채로 향했다.

디안의 비밀기지에서 케린버그의 영지 곳곳을 돌아보고 온 호크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가족들과 저녁을 함께했다. 사랑하는 여인과 이제는 어린티를 벗은 동생 루니, 그리고 언제나 자상한 어머니와 함께 오랜만에 집에서 먹는 식사였다.

잠시 행복감에 젖은 호크는 이 평화가 언제 깨질지 몰라 불안하기만 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전쟁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모처럼만에 캐더린과의 데이트로 불안한 호크의 마음도 평화를 얻었다.

"정말 오랜만에 걷는 거지, 캐더린?"

"네, 그래요. 거의 일 년 만인 거 같아요!"

"그런가? 이런, 벌써 겨울이니 그렇구나. 내가 너무 무심했지? 미안해!"

"아니에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아냐, 미안하기만 한걸. 그냥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냥 아침에 일하러 나갔다가 저녁이면 돌아와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후후,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한참을 걷던 두 사람은 널따란 잔디위에 자리를 잡았다.

캐더린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호크의 넋두리에 캐더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응? 이런, 울지 마. 에휴! 내 입이 방정이다. 제발 울지 마. 응? 잘못했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아니에요, 호크님이 왜 미안해요. 저 같은 여자 만나지 않았더라면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제가 나쁜 계집이에요. 흑흑! 차라리 그때 죽어......."

짝!

호크의 손이 캐더린의 가녀린 얼굴에 상처를 냈다. 세차게 돌아간 캐더린의 고개를 바라보는 호크의 두 눈이 몹시도 떨렸다.

캐더린의 자학하는 듯한 말에 벌떡 일어선 호크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섰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캐더린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알겠어? 그건 우리 사랑을 부정하는 말이야. 알아? 절대로 두 번 다시는 그런 말 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어서!"

울먹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캐더린을 감싸 안은 호크가 그녀의 고개를 들어 올려 키스를 했다. 두 사람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키스가 길게 이어졌다.

"이런 무심한 사람아! 도대체 이게 얼마만인가? 도대체가 유령처럼 말이야!"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워드 백작님!"

"이 사람이 백작이 뭔가! 장인어른이라고 불러야지. 하하하!"

"네, 장... 장인어른!"

쑥스러워하는 호크를 바라보는 하워드 백작의 사람 좋은 웃음소리가 잉글햄의 영주인 그의 내성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야, 매제!"

"아, 제임스님! 잘 지내셨는지?"

"하하! 참내, 제임스님이 뭔가? 자네도 원......."

"하하! 아직 좀 어색해서 말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는 호크를 보면서 두 사람은 서로 크게 웃어댔다.

"그나저나 머리는 왜 이렇게 짧게 깎은 건가?"

호크가 스포츠머리로 까칠해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의 헤어스타일이 이렇습니다. 군인이 머리가 길면 여러모로 불편하니까요. 그나저나 모두 같이 가실 건가요?"

"아닐세. 제임스는 영지에 남아 있을 걸세. 전부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지 않은가?"

"네, 그렇죠. 그럼 빨리 움직이죠. 시간이 부족합니다, 장인어른!"

"그래, 어서 가세나. 참! 그나저나 언제까지 저렇게 둘 셈인가?"

"네? 무슨 말씀인지......?"

"캐더린 말이네, 캐더린! 어서 빨리 식을 올려야 하지 않겠나! 보는 눈들도 있고, 말이 많다구."

"아,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청혼을 할 참이었습니다. 잠시만 더 시간을 주세요."

"허허! 그런가? 딸을 가진 애비 심정이 다 그렇다네. 너무 언짢아하지 말게나."

"무슨 말씀을, 당연한 이야기인데요, 뭐. 오히려 미리 걱정을 덜어드리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좋아. 언제쯤이 좋겠나?"

"이번 기수들이 훈련을 끝내고 전술 훈련에 들어갈 때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쯤이면 잠시 몸을 뺄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래, 좋아. 육 개월 뒤가 되겠구만. 하하하하! 이거 너무 기다려지는구먼. 하하하! 자자! 어서 올라오게!"

"네? 어딜 가시는지? 헉! 장인어른, 마법진은 안 돼......!"

번쩍!

하워드 백작과의 대화에 정신을 놓은 호크는 자신이 이동마법진 위에 올라선 줄도 몰랐다.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해도 모자랄 상황인데, 대비도 못한 상황에서 이동 마법진이 실행되었으니, 그야말로 호크에게는 불행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호크의 토악질에 단련이 된 이동마법진의 당직 마법사들이 호크를 위해서 커다란 그릇을 준비해둔 탓에 옷을 버리는 사태는 모면했으나, 장인어른으로부터 사내가 그리 허약해서 어찌 내 딸을 맡기겠느냐는 소리를 국왕을 만나러가는 동안 내내 들어야만 했다.

'젠장! 이놈의 병은 어째 고쳐지지 않는 거야! 크흑! X팔려!'

"크핫하하하하! 자네 또 바닥에다가 한바탕 했다며! 소드마스터가 세상에나 이동마법진 멀미라니! 이거 정말이지 빅뉴스야! 카카카카카!"

'젠장! 저 영감탱이가 요즘 들어 나를 너무 가지고 논단 말이야. 이 분위기를 반전시킬 기회가 필요한데, 요즘 들어 너무 끌려 다닌 거 아냐?'

머스탱 공작이 배를 잡고 껄껄 대자, 호크의 얼굴은 볼썽사나워졌다. 미래의 장인어른에게 핀잔을 들은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국왕 앞에서까지 망신을 당하고 있으니, 속이 좋을 리 없었다.

"하하하!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법이지! 머스탱 공작도 그만하게."

"크크큭! 네, 전하! 크큭!"

웃음을 참느라고 얼굴이 벌게진 머스탱을 보면서 '두고 보자!'라는 말을 골백번도 넘게 되새기는 호크를 보았더라면, 머스탱 공작은 이쯤에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미처 눈치 채지 못한 탓에 누군가 앞으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불행이었다.

"그래, 호크! 디안의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

"네, 전하! 현재 1기생 2천여 명이 전술훈련에 들어갔고 새로운 신병들도 디안의 비밀기지로 옮겨져서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곧 정규군으로서 모습을 갖추어 갈 것입니다."

"오오, 훌륭하다, 훌륭해! 그 짧은 시간에! 비록 두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훈련이라고 하던데,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오다니, 그대는 짐의 홍복이자 신의 선물이야."

찰스 국왕이 기쁨에 겨운 듯 왕좌에서 내려와 호크를 끌어안았다.

"전하, 이러시면......."

"아냐, 아냐! 너는 내 동생이나 마찬가지인 걸. 네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지금 왕좌에 앉아 있지도 못했겠지. 어서 빨리 자주독립을 하고 싶을 뿐이야. 그게 꿈은 아니겠지, 호크?"

"네, 전하! 저희가 병력의 수는 부족하겠지만, 전력 면에서 폴렌시아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부족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케린버그는 강병대국으로 거듭날 것입니다."

"강병대국! 강병대국이라! 하하하하하하! 아냐, 아냐! 그런 것보다 내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살 정도면 되네. 그게 내 소원이야!"

넋두리 하듯 작게 내뱉는 찰스 국왕의 탄식에 호크는 자신이 운명을 건 사내를 잘못 본 건 아니라는 생각에 크게 기뻤다.

'네, 전하! 바로 그 마음입니다. 언제나 변치 않기를 빕니다.'

"그나저나 케론스가 너무 조용한데 말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북쪽에서 움직임이 있다고 하네. 그래서인지 케론스 쪽은 지금 모든 인력을 그쪽에 투입하고 있다네. 우리에게는 천운이지만서도 말이야!"

"네에? 레센에서 도발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허허! 진정하게나. 아직은 도발이라고 할 수는 없네. 뭐, 뚜렷한 정황도 없고, 우리도 이미 사람을 보내놓았으니 조만간 소식이 있을 거야. 그리고 레센이 정말 쳐들어온다고 해도 모스크 산맥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더구나 로베니아도 레센이라면 치를 떨기에 곳곳에 안전장치를 해두었다네. 아직은 여유가 있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놀란 호크를 헬렌 백작이 직접 의자에 앉게 하면서 진정시켰다.

"다행이군요. 세린디아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데 레센까지... 정말 그랬다면 저희는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믿을 수가 없어. 세린디아에는 병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야. 그렇다고 자네의 보고를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세린디아에 파견된 세작들의 보고는 없습니까?"

호크가 조용하게 목소리를 낮추면서 입을 열자, 원탁에 자리한 5명의 머리가 한데 모아졌다.

"그게 말일세, 무려 이십여 명을 보냈는데 단 한 명도 소식을 전해오지 않았네. 게다가 말일세......."

"게다가... 뭔데요?"

머스탱 공작이 뜸을 들이자 마음이 다급한 호크가 재촉을 했다.

"그놈들이 국경을 폐쇄했어!"

"상업교역이 아니면 먹고살 길이 빤한 놈들이 지들 스스로 국경을 폐쇄하다니, 말이 안 돼!"

"전염병 때문이라고 하는데, 웃기는 건 샹그릴라의 신관들도 출입을 안 시킨다는군! 뭔가 냄새가 나기는 하는데 말이야."

"냄새가 아니라 그놈들은 미쳤다, 이겁니다. 틀림없어요, 제가 그날 본 것이 그들의 의지라면, 조만간 세린디아에서 큰일이 벌어질 게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우리 케린버그가 그놈들의 제일 표적이 될 게 뻔하구요. 자! 지도를 보세요. 놈들이 세력을 키워서 로베니아와 맞서자면 우선 인접국인 우리 케린버그를 노릴 게 뻔합니다. 우리를 거쳐서 알버스크 왕국까지 점령하면 중간에 샹그릴라를 끼고 로베니아와 대치하게 되죠. 전략상 우위에 설 수 있는 위치에 우리 케린버그가 있으니, 반드시 저희 왕국부터 노릴 게 분명합니다. 인원을 더 보내서라도 정보를 모아야 합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해요. 그 괴물 같은 기간테스가 얼마나 있는지, 잘못하면 그 괴물들의 발아래 저희 국토가 유린될 게 분명합니다."

"후! 자네 말을 직접 들으니 무섭구먼. 알겠네. 지금 당장 모든 인력을 투입해야겠네. 최우선 상황으로 세린디아에 대한 정보수집을 시작하게, 머스탱 공작!"

"명을 받들겠습니다, 국왕 전하!"

"그나저나 루크가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해서 정보수집에 애를 먹겠군."

순간, 장내가 싸늘해졌다.

머스탱 공작은 그 자리에서 돌이 된 듯 굳어버렸고, 헬렌 백작은 너무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했다. 하워드 백작도.......

머스탱 공작의 아들, 루크라면 검술도 뛰어나지만 정보수집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어서, 그동안 국왕파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던 존재였다. 그런 인텔리가 고생문이 훤한 외인부대에 지원 입대했다니, 놀랍기만 했다.

그러나 점점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호크 론 케린버그였다.

머스탱 공작은 살을 에는 듯한 한기에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런 몸부림은 속절없이 좌절되고, 두려움에 떨던 그의 두 눈이 호크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마족 중의 마족이, 악마 중의 악마가 사악하고 끔찍한 미소를 지으면서 웃고 있었다.

"네에? 그런 사실이! 진작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특별히 챙겨주었을 텐데. 루크라, 루크......."

절대 잊어버리지 않겠다는 듯이 호크가 이름을 되뇌자, 머스탱 공작의 얼굴은 이미 사체나 다름없이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졌다.

"이런, 몰랐단 말이냐? 머스탱 공작, 왜 호크에게 미리 언질을 하지 않은 거요? 흠, 배경 없이 혼자 힘으로 해내겠다는 뜻이었나? 이거 내가 괜히 나선 꼴이 됐군. 미안하네, 머스탱!"

찰스 국왕이 진심으로 미안해했지만, 이제는 미안하고 안 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뿐인 외동아들의 생사가 저 극악무도 사악한 호크의 손아귀에 달린 것이다.

"하하하~ 뭐 특별히 챙겨주지 않아도 되네. 워낙 자기 할 일은 알아서......."

"그럴 수야 없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가 존경하는 머스탱 공작님의 자제분인데, 제가 확실하게 돌보도록 하겠습니다."

"크허억!"

거품을 물고 쓰러지려는 머스탱 공작을 보면서 헬렌 백작은 그러게 좀 작작 놀려먹지, 왜 그랬냐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루크라... 후후후! 불쌍한 녀석, 나를 원망 말고 니 애비를 탓해라. 크후후후후후!'

거의 실성한 듯 정신을 잃은 머스탱 공작을 뒤로하고 호크와 하워드 백작이 잉글햄으로 돌아가자, 국왕과 헬렌 백작마저 돌아간 회의실에는 머스탱 공작만이 홀로 남겨져 있었다.

'루크야, 미안하다! 제발 살아서 돌아와 다오. 크흑! 못난 애비를 용서해라.'

그러게 마음을 곱게 써야 한다는 사실을 왜 몰랐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