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9화 (9/55)

Chapter 9. 선택!

"해리슨 사범님, 승급시험 준비가 다 끝나갑니다! 어서 오시라고 하는데요?"

"응, 그래? 이런, 깜빡했구나. 알았다. 먼저 가라.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호크의 호무관은 그 명성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관원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서 건물을 증축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원들도 케린버그뿐 아니라 각국에서 모여들었다. 가지각색의 사연들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었다.

호크는 처음에 그랬듯 그 사람의 인성만을 보고 관원을 뽑았다. 그 상대가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었다. 처음에는 힘으로 반발하는 귀족들도 있었으나, 호크가 백작위를 수여받게 된 지금, 아무도 이 기준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연히 호무관의 사범들 또한 그 위상이 대단히 높아서 스스로 행동을 조심했다.

호크의 수석제자인 해리슨은 호크가 없는 동안 언제나 새벽 일찍부터 호무관 구석구석을 돌면서, 청소부터 시작해서 일반사범들과 관원들까지 일일이 챙겼다. 호크의 기대대로 해리슨 사범은 훌륭하게 호무관을 관리해왔다.

다만 저 사람만 빼고 말이다. 호크가 떠나면서 혹여 자살이라도 하지 않나 잘 살피라고 해서, 자신이 없을 때에는 실전반 수련생들에게 교대로 지켜보라고 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정자에 앉아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 있는 남자는, 그동안 수염도 전혀 깎지 않았는지 마치 섬에 유배된 죄수처럼 더벅머리에 까칠한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을 지켜보던 해리슨은 제자에게 잘 지켜보라고 한 뒤 부랴부랴 승급시험장으로 달려갔다.

"후! 이거야말로 정말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군."

'죽어버릴까? 차라리 그냥 죽어버릴까? 이렇게 살면 뭐 하는가. 내가 사랑하는 군대도 나를 버렸으니... 저렇게 부상당해서 누워 있는 김재덕 대위 볼 낯도 없구먼. 괜시리 내 부하가 되어서 이렇게 황당한 곳에 떨어지기나 하고 게다가 먼저 간 아내에게 미안하군. 그렇게 고생 시켰으면 끝까지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남았어야 하는데... 여보, 그곳은 어떻소? 나도 그리로 갈까?'

바스락!

아주 작은 소리에 넋을 잃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정자 기둥으로 돌려졌다. 그곳에는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미줄 끝에는 제법 커다란 거미가 줄의 진동을 느끼고 먹이를 향해 징그러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내 신세가 바로 저 거미줄에 걸린 나비꼴이 아닌가? 너도 그만 포기하려무나. 거미줄이란 일단 걸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이란다. 지금의 나처럼 말이야.'

남자의 한탄에도 나비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저... 저! 그렇지! 힘 내! 어서 힘을 내서 날갯짓을 해!'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던 사내가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보더니 어느새 벌떡 일어나서 손에 땀을 쥐고 나비를 응원했다.

그러나 사내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비의 코앞까지 다가온 거미는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점점 나비에게 다가들었다.

'제발! 기운 내라! 어서! 어서!'

마치 자신이 나비라도 된 듯이 사내는 애를 태웠다.

거미의 앞발이 나비의 몸을 내리눌렀다. 이제는 거의 끝난 듯이 가슴팍까지 들어 올렸던 사내의 손이 다시 축 쳐져서 내려갔다.

사내의 고개가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나비의 힘찬 날갯짓이 시작되었다.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지만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는 나비의 모습이 삶의 소중함을 그에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그래, 그거야! 힘을 내! 어서! 넌 할 수 있어! 날아라! 날아!"

사내의 고함소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더욱 퍼덕거리면서 날갯짓을 하던 나비가 기적처럼 거미줄을 벗어나 팔랑거리면서 날아올랐다. 자신에게 용기를 준 사내에게 감사를 표하기라도 하듯 몸 주위를 몇 번 돈 나비는 이내 멀리, 멀리 사라졌다. 나비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사내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정자 밑에서 사내를 살피던, 실전반 수련생인 스웬이 사내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서 뛰어 올라왔다.

"헉헉! 무슨 일이에요?"

자신 앞에 서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금발의 소년에게 몸을 돌린 사람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형석 장군이었다.

"요... 라니? 제군, 모든 말은 '다! 나! 까!'로 끝난다는 것을 모르나?"

돌아선 사내의 눈빛은 조금 전의 흐리멍덩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구부정했던 허리도 늠름하게 펴져 있었고, 뒷짐을 지고 선 모습은 영락없는 대한민국 육군 장성 나형석 장군이었다.

"누구세요? 아니, 누구십니까?"

스웬은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늘 보던 그 폐인이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었다.

"멈춰라! 이곳은 대케린버그의 왕성 캐틀로트요!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신분을 밝히시오!"

제법 근사한 갑옷으로 무장한 1백 명의 병사들이 양옆으로 무기를 든 채 도열하고 있는 모습이 위압감을 주었다.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호크는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표정으로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일일이 살폈다. 처음 수도에 방문한 호크가 넋을 잃고 한눈을 팔고 있자 보다 못한 핸들러가 대신해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잉글햄에서 온 호크 경 일행입니다. 이번 백작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왔소!"

핸들러의 외침에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무슨 시장터의 돼지 보듯 하던 검은머리의 청년에게 열이 받았지만, 이내 잉글햄의 호크, 아니 그 유명한 디안 요새의 영웅이라는 소리에 모두가 존경과 감탄의 눈빛으로 호크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성문이 열리고 안에서 은빛 경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뛰쳐나와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는 최대의 경의를 호크에게 표했다.

"영광입니다, 백작님!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좀 전의 무례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누군데? 난 수도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하하! 저도 지난번 디안 요새 전투에 참가했던 기사단원 중 한 명입니다. 그때 백작님을 멀리서 뵈었습니다. 백작님이야말로 저희들의 우상이십니다!"

"잉? 내가? 하하! 이놈의 인기가 이제는 이곳 수도에까지. 아! 이래서 스타는 힘든 건가 봐. 안 그래, 핸들러? 에밀? 피터슨?"

"......."

"......."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호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빠직!

그나마 짐마차 마부석에 나와서 구경하던 스톤이 '이야, 역시 호크님의 명성은 대단해!'라고 거들지 않았더라면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성 안으로 인도된 호크는 동화 속에서나 그려봤을 이국적인 풍경에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잉글햄보다 수백 배는 더 큰 도시 규모에 놀랐다. 척박한 국토의 환경 탓인지 분위기는 단조로운 색채의 잘 정비된 계획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표정은 활기차고 기운이 넘쳐 보였다.

성문을 지키던 경비기사를 따라 도로를 지나가자 수많은 인파들이 호크 일행을 알아보고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성 안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을 질렀다.

뜻밖의 환대에 호크 일행은 놀라워했지만, 호크만은 당연하다는 듯이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환영 인파를 겨우겨우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자 도시 위의 언덕에 고색창연한 고성이 나타났다. 성으로 향하는 길은 직선로가 아닌 수없이 굽은 도로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적의 침입을 대비해서 그렇게 만든 것 같은데, 전쟁을 생각한다면 아주 좋은 방법이지만, 방문하는 호크 입장에서는 구불구불한 길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결국 1시간여를 허비한 끝에 국왕의 성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호크 일행을 안내한 기사가 먼저 말에서 내려 수속을 밟자 곧바로 성문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러 나왔다. 호크는 일행들과 함께 꽤나 몸집이 좋은 시종장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아름답고 화려한 화원과 분수대를 지나자 드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호크 일행은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정원 가운데로 대리석으로 나 있는 돌길을 따라서 이동했다.

정원을 지나치자 천장이 크리스털 유리로 뒤덮인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시종장이 더 안쪽으로 안내하자 하녀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모두들 디안 요새의 영웅, 케린버그 구국의 영웅이라는 호크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호크는 팬들에게 둘러싸인 연예인처럼 얼굴에 함지박만 한 미소를 머금고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호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고 눈 꼬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저렇게 젊다니! 검은머리라더니 정말이네? 마족이란 말이 사실인가 봐?"

"그것뿐이 아냐.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며?"

"정말? 저 사람이 입을 벌리면 불이 뿜어져 나온다던데?"

"어머머! 세상에!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

"그렇데 방귀를 한 번 뀌면 그 독한 냄새에 몬스터들이 수천은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지, 아마?"

"이... 이... 이것들이, 정말!"

주로 여자 하녀들의 귓속말이었지만, 예민한 호크에게는 다 들렸다. 물론 자기들 딴에는 속삭인다고 했으나, 여자들 수다란 것이 워낙 시끄러운지라 핸들러까지 얼굴이 벌게졌다. 점잖은 성품인 핸들러조차 저렇게 화가 날 정도이니, 호크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참다못한 호크가 폭발하려는 순간, 하녀들을 꾸짖는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이런 못된 것들이! 어디서 감히 망발을 일삼는 것이냐? 어서 물러가서 너희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할까! 감히 어느 분 앞에서 망발이냐! 썩 사라져라!"

"이... 이, 이런!"

한바탕 퍼부어주기 위해 모든 기를 입에 집중하던 호크는 그 상대들이 사라져버리자 전의가 상실되었는지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내 호크는 오히려 자신을 맥 빠지게 한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헉! 오... 크? 저것은 분명 몬스터? 어떻게 몬스터가 성 안에 있단 말인가? 병사들은 뭐하는 거지?'

호크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적인 외모를 소유한 여성이 뒤에 10여 명의 시녀를 대동한 채 호크가 걸어가려는 복도에서 홀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놀랍게도 입술이며 코가 오크의 그것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게다가 몸은 드레스를 터트려버릴 듯이 엄청나게 뚱뚱하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두 눈이 예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고 할까?

'뭐냐, 저 괴물은?'

자신도 모르게 등 뒤에 메고 있는 혼돈의 검, 제로의 손잡이에 손이 가던 호크는 핸들러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깊숙이 숙이자 더욱 경악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핸들러를 시작으로 모두가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심지어 사이클론까지. 이제 홀에 서 있는 사람은 돼지괴물과 호크뿐이었다.

"뭐냐! 너 무슨 마법을 쓴 거야? 단 한 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제압하다니, 대단한데? 흠,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혹시 마법 아이템이라도 쓴 거야?"

최근 들어 마법 아이템에 부쩍 관심이 높아진 호크는 생각하는 것이 그쪽으로만 흘렀다.

"호호호호!"

돼지괴물이 입을 가린 채 웃어대자, 호크는 등 뒤로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몸이 일시적으로 굳어지는 듯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헉! 요사한 것! 감히 나한테까지 사술을! 에잇! 덤벼라, 괴물아!"

기어코 참지 못하고 혼돈의 블레이드까지 꺼내든 호크의 행동과 동시에 비명 섞인 외침이 여러 군데에서 터져 나왔다.

"꺄아악! 당신 미쳤어요? 감히 뉘 앞이라고!"

"백작님!"

"이런! 호크야, 어서 칼을 집어넣어라!"

"크으윽! 우린 이제 다 죽었다!"

"......?"

'뭐지, 이 분위기는? 핸들러의 저 겁먹은 표정은 뭐야? 어라, 영감탱이도 하얗게 질린 얼굴이네? 흠흠! 내가 뭔 실수를 했나? 뭐야? 돼지괴물 앞을 막아선 또 다른 돼지는? 어쭈, 나한테 덤벼보겠다는 얼굴인데, 왜 그러지? 저 돼지괴물이 누구라고 그러는... 가만, 저 머리에 쓴 것은 혹시 왕관이니?'

슬그머니 검을 등 뒤의 검집에 도로 꽂아 넣은 호크는 슬며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핸들러에게 눈짓으로 구조요청을 했다.

그러자 이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핸들러의 입에서 호크를 경악시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케린버그의 영애를 뵈옵니다. 잉글햄 호크 경 일행의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공주 마마!"

'뭐라고!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공... 공주라니? 이거 장난인 거지? 그렇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게 꿈이라고 말해줄 것을 바라며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았지만, 속절없이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이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음을, 그리고 이것이 현실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제 모습 때문에 놀라셨나 보네요. 저도 가끔 거울을 보고 놀라고는 한답니다. 호호호!"

'뭐야! 미친 거 아냐? 차라리 화를 내라! 그래야 정상이지!'

"아! 하하하하하하! 아, 아닙니다. 공주님, 제가 원래 심장이 약해서 잘 놀라기는 합니다."

"호호호! 디안 요새의 전투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케린버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소문을 듣고 훨씬 더 크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호크 경."

'어쭈? 이게 기분 나쁘다, 이건가? 하... 참, 내가 먼저 실례를 했으니 어쩔 수 없지. 끙~'

"뭐... 소문이란 과장되게 마련이지요. 제가 살던 고향에서도 소문은 처녀도 애를 배게 한다는......."

"감히! 찰스 국왕님의 무남독녀이신 에이린 공주님에게 무례를 범하다니! 당장 이자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공주님!"

'뭐야, 이 뚱보 아줌마는!'

공주가 직접 나선 덕택에 조금이나마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뚱보괴물 2 때문에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자 에이린 공주가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말을 삼가세요, 죠셉 부인! 이분들은 구국의 영웅들이랍니다. 저처럼 하찮은 소녀보다 몇 배나 소중한 분들이지요. 자! 우리는 어서 어머님에게 가도록 하죠. 많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하, 하지만 공주님! 아이구, 당신들! 나중에 봐요. 하여튼 운 좋은 줄 알아요!"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 치고 무섭다는 사람 없다!'라며 호크는 마음속으로 실컷 비웃어주었다.

공주 일행이 사라지자 핸들러를 비롯한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크는 갑자기 핸들러의 멱살을 쥐어틀어 잡은 후, 복도 구석으로 끌고 갔다.

"하하~ 웃어! 웃으라고, 핸들러. 사람들이 보잖아~"

"네? 아~ 하하하... 그런데 왜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지금 장난하냐고! 공주라면 말이야, 적어도 금발에 눈부시게 아름다워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지금 이 시츄에이션은 뭐야, 뭐냐고? 정말 공주 맞어?"

"휴~ 말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저분이야말로 케린버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사랑받는, 우리 케린버그의 하나뿐인 에이린 공주님이 맞습니다. 실은 어떻게 된 이야기인가 하면......."

"이런! 호크, 자네는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서 가자고!"

디안 요새 전투 이후에 처음 만나는 머스탱 공작과 마주치는 바람에 공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은 건가? 영지에서 떠난 지 꽤 된 걸로 아는데 말이야."

"그게 좀 사연이 있습니다. 나중에 국왕 전하께 해야 할 이야기도 있고, 좀 복잡해요. 쯥~"

뭐가 그리 마땅치 않은지 찡그리는 표정의 호크를 보면서 머스탱 공작은 천하의 호크가 무슨 걱정이 있다고 저렇게 심각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작님!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어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국왕 전하와 따로 자리를 만들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흠, 사이클론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뭔가 중요한 일인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전하께 말씀드려 따로 시간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자, 어서 가시죠. 지금 그랜드 홀에 모두 모여 계십니다."

"네? 모레가 수여식 아닌가요?"

"허허! 참, 이렇게 답답한 친구가 있나? 그거야 그날 백성들에게 공표하고 공고를 내는 날이지. 실제로 국왕 전하께 작위를 수여받는 날은 오늘이란 말일세. 벌써 하워드 남작은 이틀 전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단 말일세. 어서 가세나!"

호크가 '너 죽었어!'라며 핸들러에게 눈을 부라리자 핸들러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혔다.

호크와 머스탱 공작, 사이클론이 홀 안으로 들어가고 밖에 남은 에밀과 피터슨 등이 핸들러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앞으로 호무관에서 당할 고역을 생각하면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빠라랑! 빠라랑! 빰빠빠빠밤!

"케린버그의 위대한 영웅! 디안 요새의 호크 경과 사이클론님이십니다!"

시종장의 우렁찬 호명 속에 호크와 사이클론이 머스탱 공작의 뒤를 따라서 홀의 계단을 내려섰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려 있는, 베이지색으로 꾸며진 홀에는 국왕이 앉아 있는 단상을 중심으로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레드카펫을 밟고 홀의 중앙으로 걸어 나가는 호크는 부담스런 시선들 때문에 양복에 맨 넥타이가 목을 조르듯 숨이 막혀왔다.

'젠장, 이런 자리는 영 질색인데! 캐더린을 위해서 참는다.'

어색한 미소로 홀의 중앙으로 걸어가던 호크는 캐더린과 그녀의 오빠 제임스를 발견했다. 물론 호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캐더린뿐이었다. 호크는 그녀 주위가 환해지는 환상을 보았고,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랑하면 다 이런 것일까? 호크는 캐더린에게 윙크를 하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고마워요, 호크님! 무사해서 정말 고마워요!'

마주잡은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있던 캐더린은 호크의 미소를 보고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제임스가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다독거려주었다.

그녀 주위로 자신에게 윙크를 보냈다고 생각한 다른 귀족 여식들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지만, 호크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앞쪽에 있는 국왕의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단상 바로 앞까지 다가간 호크와 사이클론이 무릎을 굽히고 국왕에 대한 예의를 차리자, 케린버그의 국왕인 찰스는 마치 집 나간 동생이 돌아온 듯 단상에서 내려와 직접 호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물론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설명하지 않아도 될 케론스 공작과 그의 무리들이었다.

'젠장 할! 역시 소드마스터는 다르단 말인가? 레드 블러드를 이겨내다니! 어떻게 그 저주의 마법에서 빠져나왔는지는 몰라도 오늘만은 절대로 네놈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가는 케론스 공작, 지금의 저 눈빛은 그 시선 한 번으로도 사람을 죽일 정도로 살벌하기만 했다.

"하하하하!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군. 그날 이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그래, 잘 지냈나?"

"네, 전하의 염려 덕분에 아주 잘 지냈습니다."

"오오! 사이클론님도 오셨군요. 우리 케린버그의 구국 영웅인 두 사람이 모두 이렇게 한자리에 있으니, 나는 천하를 얻은 기분입니다. 하하하하!"

누가 들어도 좋을 만치 청량한 국왕의 웃음소리에 홀 안의 분위기도 점점 고조되어갔다. 이날의 꽃인 하워드 남작과 호크의 백작 수여식이 진행될 때가 오늘 파티의 정점이 되었음은 물론 말할 나위도 없었다.

하워드 남작의 백작 수여식이 끝나고 호크의 차례가 되자 호크를 호명하려던 시종장이 뭔가 곤란한 듯 머뭇거렸다. 그 바람에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자, 즐거운 분위기가 깨질 것을 우려한 국왕이 직접 시종장을 불렀다.

"무엇이 문제인가? 지금 한창 분위기가 좋은데 자네 때문에 파티 분위기 엉망이 되겠어."

"황공하옵니다, 전하! 사실은 호크 백작님의 성(姓)이 없어서... 수여 인증서를 꾸미려면 풀 네임(Full Name)이 있어야 합니다, 전하!"

"호! 그렇군. 이보게, 호크. 자네 따로 성을 준비한 것이 있는가?"

국왕의 질문에 호크야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사이클론과 머스탱은 '아차' 하는 생각으로 머리를 쳤으나 이미 배는 떠난 후였다.

두 사람의 표정에서 미처 준비 못했다는 것을 읽은 찰스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시종장! 호크 경의 풀 네임은 바로... 호크 론 케린버그 경이네."

국왕의 명에 홀 안에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이 시대의 폴렌시아에서 이름이란 그 사람의 배경을 말해주는, 그야말로 명함이나 다름없었다. 사람들이 놀란 만도 한 것이, 나라명이 자신의 이름에 들어간다는 것은 개국공신에게나 내려지는 최고의 성은(聖恩)이라는 뜻이고, 론이란 이름은 바로 찰스 론 디스 하베스트 크라운이란 국왕의 풀네임 중에서 따온 것이다. 자신의 이름 중 하나를 선뜻 내어줄 만큼 국왕이 호크를 생각하는 마음이 크고 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시종장의 입에서 호크의 풀 네임이 외쳐지고, 국왕 앞에 무릎 꿇은 호크의 어깨 위로 케린버그의 수호검 드래곤 소드가 놓이자 수많은 귀족들의 축하 박수소리가 그랜드 홀을 울렸다.

호크는 호크 나름대로 이런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작위를 수여받자 알지 못할 흥분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이클론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취해보리라 마음먹을 정도로 기쁜 모습이었다.

수여식이 끝나자 많은 귀족들이 호크에게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호크는 모든 사람들을 뿌리치고 캐더린을 찾았다. 마치 이산가족 상봉보다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파티가 시작된 중앙 홀에는 이제 막 댄스 파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홀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서 두 손을 맞잡은 채 꼼짝하지 않고 있는 한 쌍의 남녀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은 그들만의 마음속 대화를 나누었다.

'보고 싶었어요, 호크님!'

'나도 그래, 캐더린!'

악단의 지휘자가 더는 참지 못하고 연주를 시작하자, 춤을 추려고 모여든 사람들을 피하며 호크와 캐더린은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허허허~ 아쉽군, 에이린에게 좋은 배필이 될 텐데 말이야!"

"그렇게 말입니다, 국왕 전하!"

"허허! 남자에게 부인 두셋쯤이 뭐 문제가 되겠는가? 안 그렇소, 머스탱 공작?"

"네, 전하! 자고로 영웅에게는 수많은 여인이 따르는 법이지요. 하하하하!"

"그렇지. 하하하하하하!"

캐더린의 두 손을 맞잡고 테라스로 향하던 호크는 문득 등 뒤가 서늘해져 몸을 떨었다.

"왜 그러세요, 호크님!"

"응? 아냐, 아무것도.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이상하네?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자신도 모르게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캐더린을 만난 기쁨으로 아무 생각이 없는 호크였다.

"어서 오세요, 사이클론님! 지난번 디안 요새에서 위대한 바람의 마법사 사이클론님이 안 계셨다면, 저희 케린버그는 그야말로 오크의 왕국이 될 뻔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귀족도 아닌 자신에게 깊이 예의를 차리자, 사이클론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수많은 나라를 다녀봤지만 대부분 그저 자신의 능력만 탐했을 뿐, 정말로 이렇듯 인간 사이클론으로 존중해준 적은 없었다. 그것도 한 나라의 국왕에게 이런 대우를 받으니, 사리사욕(私利私慾)과 거리가 먼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동안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절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이클론은 이 찰스 국왕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허허허! 아닙니다, 전하. 천한 평민에게 그런 예의를 차리시다니요!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나저나 저의 호크를 많이 위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사이클론님이 원하지 않으셔서 그렇지, 지금이라도 공작의 위를 내린다고 하더라도 누구 하나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감동받은 사이클론은 이런 나라라면 호크와 함께 이곳에 정착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좋지 않은 기운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낀 사이클론이 단상 아래의 오른쪽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자 국왕과 머스탱 공작의 눈매도 사나워졌다.

"저런 썩은 열매나 파먹을 벌레 같은 자들이 감히!"

"진정하게, 공작. 다 내가 부덕해서 생긴 일인 걸 누구를 탓하겠나? 저들이 나를 왕이라고 생각이나 할까? 하루라도 빨리 힘을 키워서 저들을 뿌리 뽑아야 비로소 백성과 나라가 평안해지겠지!"

"저들은......?"

"휴~ 죄송합니다, 사이클론님. 저들은 바로 로베니아의 친정세력들인 케론스 공작 일파입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를 악물며 얼굴이 벌게지는 머스탱 공작을 보면서 전에 들었던 풍월을 떠올린 사이클론의 표정도 좋지 않게 변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상황과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저자들이 그동안 호크의 목숨을 줄기차게 노려온 자들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 무리들에게 저주마법을 퍼부어줄 뻔한 사이클론은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겨우 참아냈다.

세 사람의 눈길을 받고 있는 케론스 공작 일파의 눈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쳐왔다. 이제 곧 타오를 불길의 서막이었다.

호크가 캐더린과의 달콤한 밀어를 왕성의 테라스에서 한가하게 나누고 있을 무렵, 댄스파티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그랜드 홀의 국왕 단상과 그 아래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신경전을 펼치던 두 무리 중 먼저 움직인 것은 케론스 공작파였다. 몇 차례의 댄스가 끝나고 홀 안이 정리되자 케론스 공작의 오른손이라 불리는 로베르트 남작이 와인 잔을 높이 들면서 외쳤다.

"케린버그의 영광을 위해서!"

느닷없는 로베르트의 외침에 국왕파의 헬렌 백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네 이놈! 어디서 감히 신성한 케린버그란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는 것이냐!"

부들부들 떨면서 손가락질을 해대는 헬렌 백작을 보면서, 로베르트 남작은 낚시꾼이 미끼에 걸린 물고기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간교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 왜 그러냐는 듯이, 마치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헬렌 백작이 괜히 자신을 비난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또한 위대한 케린버그의 백성이며, 신하로서 못할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데요, 헬렌 백작님?"

"허~ 케린버그의 백성이며 신하다? 누가? 네가? 국난(國亂)이 닥치자마자 저만 살겠다고 도망간 자들이 누구의 백성이며 신하라고? 하늘이 두렵지 않고 천벌이 무섭지 않더냐! 샹그릴라의 쥬(Ju)께서 너희들의 죄업을 분명코 단죄하실 것이다!"

샹그릴라라는 단어에 눈살을 찌푸리던 로베르트 남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헬렌 백작을 향해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이시네요. 저에게 죄가 있다면 위대한 케린버그의 찰스 론 디스 하베스트 크라운 국왕 전하께서 벌을 내리셔야지, 왜 신의 이름을 들먹이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제가 케린버그를 떠나는 것을 보시기라도 했습니까? 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이... 이... 쳐 죽일 놈들! 어... 어떻게......!"

얼마나 억울한지 헬렌 백작은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뒤에 서 있는 근위기사의 검을 뽑아들고 케론스 공작 무리 속으로 뛰어들 듯이 흥분한 헬렌 백작의 어깨 위로 거칠고 두꺼운 손이 올려졌다. 일시에 마음을 가라앉게 만드는 그런 손이었다.

헬렌 백작이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그 손의 주인은 머스탱 공작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머스탱 공작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참으라는 뜻이었다.

반발하려는 그의 어깨를 또다시 한 번 세차게 누른 머스탱 공작의 시선을 따라가니 왕좌에 앉은 찰스 국왕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국왕의 어깨가 살포시 떨리고 있었다. 애써 분을 참는 모습을 본 헬렌 백작도 그 기분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왕의 슬픔을 받아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슬픔과 분노로 목이 메어왔다.

그러던 헬렌 백작의 두 눈이 치켜떠졌다.

"저, 전... 하! 헉! 전하의 옥체가......!"

찰스 국왕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와인 잔이 어느새 깨졌는지 깨진 잔의 조각이 새하얀 장갑을 붉게 물들이면서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뚝! 뚝!

국왕의 손에서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때리면서 나는 소리가 모두가 숨을 죽인 그랜드 홀 안에 울렸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어서 왕실 이발사를 불러라!"

"됐네! 소란 피울 거 없으니 이발사를 부를 필요도 없네."

국왕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껏 고조되었던 파티는 그야말로 엉망이 돼버렸다. 수많은 귀족들이 국왕과 케론스 공작을 바라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로베르트는 자신의 목적이 성공하자 득의 미소를 지었다. 그랬다! 그가 무리하게 나선 이유는 국왕파 쪽으로 기운 민심과 아직 로베니아를 등에 업은 케론스 공작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국왕파로서는 절체절명의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들의 수여식을 국왕파 주도로 치러냄으로써 백성들과 귀족들에게 애국심을 부추기고,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귀족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포석의 장이었는데, 간사한 로베르트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의당 보통의 다른 왕국이었다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를 한 로베르트는 벌써 목이 달아나도 달아났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국왕은 그저 두 눈을 감고 분을 삭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마음속에서는 '역시나 아직 우리 케린버그는...'라는 생각이 이번 디안 요새 전투를 통해 불타올랐던 자긍심을 사그라지게 만들었다.

머스탱 공작 또한 두 눈을 감은 채 인내를 시험당하고 있었다.

마지막 결정타를 준비하던 로베르트는 케론스 공작에게 몰래 신호를 보냈다.

"험험~ 이보게, 로베르트. 자네 언사가 지나치구먼! 어서 헬렌 백작에게 사과하게! 어서!"

완전히 짜고 치는 도박판이었다.

"그건 그렇고. 국왕 전하, 이번 디안 요새 참사에 대해서 대제국 로베니아의 황제께서 황공하옵게도 밀과 보리를 일백만 섬씩이나 보내주시기로 하셨답니다. 위대한 로베니아의 황제, 루이 드 발렝 폐하께 감사의 뜻을 전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케론스 공작의 쐐기를 박는 듯한 이 말 한마디는 찰스 국왕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꽂혔고, 국왕파 귀족들의 고개를 땅에 떨구게 만들었다.

케린버그는 대륙 북부의 산악 왕국이다. 당연히 곡물을 재배할 경작지가 부족하다. 곡물에 비해 국민의 수는 상당히 많은 기형적인 국가 구조 때문에 늘 식량문제가 왕국 살림살이의 가장 관심거리였다.

더구나 산악지형과 수많은 전쟁을 경험한 국민들이어서 상당히 호전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문제는 곧 민심과 연결되었고, 케론스 공작파는 이 리스크(Risk)를 아주 적절히 이용하여 케린버그의 내정을 손에 쥐고 흔들어왔다.

남부 대륙의 곡창지대를 가지고 있는 로베니아에게 곡물 1백만 섬이야 그리 큰 부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케린버그의 내정을 간섭하면서 얻을 수 있는 풍부한 천연광물과 건축자재를 헐값에 들여와서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로베니아로서는 부담이 큰 레센 제국과의 분쟁을 언제나 케린버그에 국한시켜왔기에 전쟁이 벌어져도 케린버그였고, 죽어나가는 것도 케린버그의 백성들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로베니아 제국의 모습이다. 식량과 강대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 폴렌시아의 모든 왕국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단 북쪽의 레센 제국만 제외하고. 그래서 알게 모르게 많은 백성들과 귀족들은 이미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물들어 있었다.

참담하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것일까? 눈앞의 똥개들이 짖어대는데 그 주인이 무서워서 아무 말 못하는 신세라니. 찰스 국왕은 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니, 뜨고 싶지가 않았다. 자신의 검으로 두 눈을 파내버리고 싶었다.

말없이 두 주먹만 움켜쥐고 있는 국왕의 모습을 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피워 올린 케론스 공작이 이제는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로베르트에게 눈짓을 한 뒤, 국왕에게 형식적인 예를 표하고 돌아서서 파티장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아유! 어디서 똥개가 짖나 했더니, 바로 여기였네! 내 세상 살다 살다 이런 개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저런 것들은 그냥 싸그리 몽땅 싸잡아서 비 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두들겨 패주어야 하는데."

그랜드 홀을 울리는 엄청난 욕지거리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터져 나온 곳으로 향했다. 군중들이 갈라지면서 그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이는, 방금 전에 작위를 수여받은 따끈따끈한 호크 백작이었다.

호크는 국왕을 향해 예의를 차린 후, 케론스 공작 무리를 스윽 하고 쳐다본 후, 로베르트 남작을 향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봐, 당신부터 좀 맞아야겠는데? 먼지 나도록 말이야! 오늘 죽었다고 복창하는 게 좋을 거야!"

모두들 황당해하는 가운데 사이클론만이 '이제부터 재미있어지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즐거워했다.

"허어~ 이거 어이가 없구먼! 이제 귀족이 되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나 보군! 어디서 감히 그런 무식한 언행을 일삼는 것인가? 어서 로베르트 남작에게 사과하게!"

케론스 공작이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호크에게 쏘아붙였다.

호크는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 기분이었다. 온갖 더러운 오물이 온몸에 달라붙어서 샤워를 하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 더러운 기분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는데, 그 잘난 세 치 혀를 놀리던 로베르트를 박살을 내버려야 이 꿀꿀한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케론스 공작이 나서자 아예 머리뚜껑이 열려버렸다.

"이런 개... 새......."

"그만! 모두 그만해라. 오늘은 좋은날! 추태는 이걸로 끝내라!"

국왕의 외침에 호크의 쌍심지가 높이 올라갔다.

홱~ 하고 고개를 돌린 호크가 볼멘소리를 냈다.

"전하! 저런, 못돼먹은 놈들을 그냥 두시다뇨! 말만 하시라고요.제가 아주 아작을......."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그만하게......."

"하지만......."

"그만하게!"

마지막 말은 거의 절규하듯 호크에게 들렸다. 흠칫거린 호크의 두 손이 내려갔다. 찰스 국왕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느꼈기 때문이다.

벌겋게 충혈된 호크의 두 눈과 이를 악문 그의 턱 근육이 떨리는 것으로 보아 호크의 분노 또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크윽! 젠... 장 할!"

"후우~ 자자! 파티에는 댄스가 있어야지. 분위기가 이게 뭔가? 시종장! 음악을!"

한껏 냉랭했던 그랜드 홀에 부드러운 선율이 흐르자 군중들은 다시 삼삼오오 모여서 파티를 계속해나갔다.

물론 아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다시 돌아올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후후~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애송이 백작 건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럼 건승을 빌면서, 케린버그 만세! 국왕 전하 만세!"

케론스 공작이 호크를 날카롭게 쏘아보고서는 앞을 스쳐지나갔다.

그때, 케론스 공작의 귓가에 호크의 속삭임이 들렸다.

-앞으로 밤길... 조심해라! 알았지!

놀란 케론스 공작이 몸을 돌렸을 땐 호크는 어느새 머스탱 공작 곁에 가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두 손이 호크에게 삿대질을 하려는 순간, 살을 에는 듯한 살기(殺氣)가 케론스 공작파 무리에게 쏘아지자 순식간에 일행들은 칼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전신의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날카로운 호크의 기운에 자신이 주눅 들자 케론스 공작은 부끄러워 화가 폭발했다.

"이익! 애송이 꼬마 자식이!"

케론스 공작이 발작하듯 몸을 돌렸지만, 어느새 그들에게 쏘아지던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새삼 호크가 소드마스터란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입술을 깨문 케론스 공작이 망토를 신경질적으로 펄럭이면서 그랜드 홀을 빠져 나갔다.

"호크 경! 첫날인데 이런 추태를 보여서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나라가 힘이 없으면 다 그런 거죠. 예전에 제가 살던 나라의 대통령... 아니, 왕도 그랬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설설 기었죠. 젠장 할~ 그 꼴을 여기서 또 보다니!'

속으로는 비꼬는 말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자신도 이 나라의 백작이라는 신분이지 않은가? 실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주 점잖았다.

"아닙니다, 국왕 전하! 심려가 매우 크시겠습니다. 저런 좀 벌레들이 나라를 좀 먹고 있으니......."

애써 말을 줄인 호크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땅이 꺼질 정도로 깊은 한숨을 내쉰 국왕이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머스탱 공작과 헬렌 백작에게 의지해서 그랜드 홀을 떠나는 찰스 국왕을 보면서 호크는 약소국 수장의 운명이란 참으로 불쌍하다고 느꼈다.

호크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지만, 끓어오르는 분을 참기 힘들었다. 예전에 우리의 역사가 미 열강에 의해서 계속해서 어긋난 길을 걸었을 때의 분노처럼 미칠 듯이 가슴을 들끓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케린버그의 수도 캐틀로트 왕궁에서의 첫날밤은 원통함과 분노, 그리고 힘없는 자들의 슬픔으로 가득한 길고 긴 어두움으로 지새운 고통의 시간이었다.

이틀 뒤, 국민들에 대한 공고문이 발표되었는데 그 내용의 중점은 잉글햄의 하워드 백작과 호크 백작의 작위 수여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외 나머지 칙령 및 기타 공고와 함께.

하지만 그 시각, 궁성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례 대신 회의는 국왕파와 케론스 공작파의 설전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열기로 가득했다.

국왕파에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잉글햄 영지의 군사력을 4배로 늘리려고 했으나, 케론스 공작파에서 부족한 식량과 인원을 핑계로 오히려 로베니아에 파병을 요청하는 것이 낫다는 억지소리가 나오는 바람에 숙원이었던 국왕의 군대를 늘리는 일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미 전전날의 파티에서 케론스 공작파의 작태로 보아 오늘 일을 충분히 예상했던 국왕파는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난 후, 국왕의 침실에서는 앞으로 케린버그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밀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자네가 실망을 많이 했지? 내가 국왕이라고는 하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부끄럽네!"

"뭐! 좀 쪽팔리기는 했죠!"

"헉! 이... 보게, 자네 아무리 그렇다고......."

호크의 상소리에 머스탱 공작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찰스 국왕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만류하자 오히려 호크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언제까지 이렇게 풀죽어 있을 건데요? '아~ 역시 우리는 아무리 해도 안 돼, 케린버그가 뭘 하겠어!' 설마 이런 마음인 건 아니겠죠?"

"후후~ 자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이 마음만은 뜨겁다네. 저 태양도 녹여버릴 정도로 뜨거워.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네. 누구보다도 긍지가 높은 케린버그였지. 말과 활을 잘 다루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호쾌한 민족이었지. 그러나 일, 이차일년 전쟁이 끝나자 나라는 피폐해지고, 결국은 로베니아의 원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자충수였지. 선황께서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그날따라 회색빛의 비가 온 나라에 내렸다고 하네. 마치 모두의 슬픔을 대신하듯이 말이야! 그 비가 그치고 로베니아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케론스 같은 자들이 수백, 수천 명씩 나타났네. 혼을 팔아버린 불쌍한 영혼들이 말이야! 이 나라는 지금 병들어 허덕이고 있어.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네......."

자조 섞인 국왕의 탄식에 호크는 몸을 일으켜 국왕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인 국왕과 두 눈을 맞추었다.

"곪은 곳은 도려내면 됩니다. 그럼 새 살이 자라날 테니까요! 적어도 제가 살아가기로 한 나라가 이렇게 썩어 들어가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힘을 키워봐야죠!"

호크의 자신에 찬 말 한마디에 실내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이 기운을 얻었다. 이럴 때는 제법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호크였다.

"그래. 자네 말대로 힘을 키워야 하는데 제약이 너무 많아. 아까도 봐서 알겠지만, 병력을 한 명이라도 늘이려면 로베니아의 제재가 들어오니까 말이야. 그리고 병력도 문제지만, 식량 또한 큰 문제라고. 하나를 해결하자면 하나가 걸리고 이런 식이어서 말이네. 쉽지가 않아, 쉽지가......."

고개를 모로 젓는 머스탱 경을 바라보면서 호크는 잠시 턱을 잡아당기면서 방 안을 돌아다녔다.

"흠! 그렇다면 사병은 어떤가요? 그것은 개인의 병력이니 상관없지 않나요?"

"허허! 순진하기는. 사병이란, 곧 국왕의 병력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예를 들어 국왕파의 귀족 스무 명이 이만 명의 사병을 가지고 있다면 국왕에게 이만의 병력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걸 눈앞에 뻔히 보고도 그대로 내버려둘 바보들이 아니지!"

헬렌 백작의 대답에 호크의 인상이 더 험악해졌다.

'젠장!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어쩌란 말이야!'

"흠흠! 그렇다면 용병은 어떻습니까, 헬렌 백작님? 만일에 말입니다. 호크 백작이 용병대를 운영한다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용병대라면 그 인원수를 일일이 보고할 필요도 없구요. 저들도 정규군이 아닌 이상 제재를 가할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요."

"어!"

"아니, 그런!"

사이클론이 내놓은 뜻밖의 제안에 방 안의 인물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순간적으로 모두들 어떤 말도 꺼내놓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용병들이란 존재가 아시다시피 워낙 부평초 같은 자들이고, 통제 또한 쉽지가 않습니다. 또한 집단전에 대한 전술훈련도 받지 않은 자들 아닙니까? 전쟁이란 것이 인원수가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인데, 저희 왕국에서 그만한 자금을 준비하기란......."

"하하하! 머스탱 공작님이 뭔가 오해를 하셨나 본데, 저는 기존의 용병들을 돈으로 사 모으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호크 백작은 자신이 살던 나라의 군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대단한 신분이죠. 그에게는 뛰어난 전투경험과 지휘 능력이 있다고 제가 보증합니다. 그런 그가 용병대라는 껍데기를 쓰고 정규군을 육성해내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용병대이지만, 실상은 케린버그의 주력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잉글햄은 케린버그의 오지 중에 오지. 물론 저자들이 감시를 철저히 하겠지만, 제가 도우면 그 정도 눈속임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사이클론의 설명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무언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하하하하하하!"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느닷없이 찰스 국왕이 크게 웃어댔다.

갑작스런 왕의 대소(大笑)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어둠으로 가득했던 케린버그에 갑자기 광명의 햇살이 비추는 것 같습니다. 어때요, 해볼만 하지 않나요?"

찰스 국왕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금은......?"

역시나 재상을 맡고 있는 헬렌 백작이 돈 걱정부터 했다.

"후후~ 자금은 호크 백작이 해결할 능력이 됩니다. 그렇지 않느냐?"

사이클론의 말 한마디에 모두의 눈빛이 호크에게 쏠렸다. 여기서 안 된다고 하면 두들겨 맞아 죽을 것이다.

"하하~ 네. 그동안 모은 비... 자금... 이 좀 됩니다만, 곧 결혼식도... 있고......."

"하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천문학적인 돈입니다. 아무리 호크 경이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란......."

"아아~ 저, 사이클론이 보장하지요. 돈의 출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충분한 양의 금괴를 가지고 있답니다."

"금... 금괴... 를......?"

"하하하하~ 정말이지, 호크 백작은 우리 케린버그의 구국의 영웅입니다, 전하!"

흥분한 머스탱 공작이 호크의 어깨를 감싸면서 호들갑을 떨자, 떨떠름한 호크의 얼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우스꽝스런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에 사이클론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면서 아까워하는 호크를 보면서 혀를 살짝 내밀어주는 센스까지 보여주었다.

'젠장! 어차피 폴렌시아의 사람들을 위해서 쓰려고 했지만, 막상 내 주머니에서 나가려니 왜 이리 속이 쓰린 거야!'

"좋습니다. 자금까지 준비되었다면 병력을 훈련시킬 장소와 인원만 확보되면 비밀리에 잉글햄으로 보내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동안 답보상태에 놓였던 케린버그 독립 프로젝트가 서서히 윤곽이 잡히자 모두의 눈에 전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호크... 자네는 정말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인가? 이제부터 자네는 내 의형제일세. 내 이름을 나누어가진 형제여!"

찰스 국왕이 와락! 호크를 끌어안았다. 피부색도, 살아온 세계도 달랐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나이 대 사나이로서 그 뜨거운 마음이 통했다. 호크도 어색하게 내려져 있던 팔을 들어서 찰스 국왕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런 두 사람을 마주보는 방 안의 사람들 또한 뜨거운 격정으로 두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부디 제 선택이 헛되게 되지 않도록 해주세요, 국왕 전하.'

찰스 국왕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은 호크의 마음속 바람이 싸이클론에게도 닿았는지 같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빌어먹을 애송이! 감히 내게 덤벼들다니! 언제가 꼭 그 상판떼기를 짓밟아주겠어!"

회의실 탁자를 집어던진 케론스 공작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어깨를 뜰썩이면서 탁자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공작 각하, 그만 진정하시지요. 모든 게 뜻하신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고, 자신들의 무기력함만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로베르트의 위로에도 케론스는 호크의 얼굴만 떠올리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했다.

"알아! 하지만 뭔가 찜찜해. 오늘 국왕파 놈들이 너무 순순히 물러났단 말이야. 이보게, 로베르트! 국왕파 중에서 제일 믿음이 약한 놈을 골라서 우리 쪽으로 회유하게. 아무래도 정보가 부족한 거 같아."

"휼륭하신 생각입니다, 공작 각하! 당장 물색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아무래도 우리 힘만 가지고서는 좀 부족한 듯하다. 본국의 형님에게 기별을 넣어서 전력을 좀 보충해달라고 해! 이쪽은 소드마스터가 두 명에다가 칠 써클의 대마법사까지. 휴~ 이번에는 꼭 형님에게 직접 전달하고 확인을 받도록 해라! 지난번과 같은 실수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아!"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그래!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실수할 여력이 없어. 이제 곧 그날이 다가오는데, 첫 번째 낙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분명히 운명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디안 요새에서 첫 번째 낙인이 나타났어야 하는데... 염탄꾼들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나?"

천장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검은 인영. 언제나처럼 소리 없이 공작의 뒤에 다가와 탁한 저음으로 대답했다.

"스무 명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돌아온 자가 없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고현장을 조사해본 결과, 사이한 기운이 현장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마나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법도 아닌......."

"뭐! 정말이냐! 왜 이제야 그런 보고를 하는 것이냐! 젠장! 로베르트! 형님께 보내는 전령에 이 말도 추가하도록 해라! 디안 요새에 쥬(Ju)의 첫 번째 낙인 발현 가능성 농후!"

"헉! 쥬의 낙인이! 알겠습니다. 지급으로 수행하겠습니다."

로베르트가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가자 케론스 공작은 말없이 상념에 잠겼다.

'낙인이 발현하면 성스런 돌이 저주의 낙인을 거두어가리. 그리하여 네 개의 낙인이 모이는 날, 하늘의 문이 열리리라.'

"그렇다면 이곳에 성스런 돌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후후! 샹그릴라의 성기사단이 어디론가 떠났다더니, 바로 이곳에 숨어들었단 말이군. 미안하지만 성스런 돌은 우리가 먼저 접수해야겠어!"

"너는 지금 즉시 다크 문의 모든 인원을 풀어서 잉글햄을 뒤지라고 해! 당장! 승기를 잡아야 해! 모든 싸움은 때를 잘 잡은 자가 이긴다! 반드시 우리가 이겨야 해. 반드시!"

"봄멜 공작 전하! 파수꾼들에게서 기별입니다."

"응? 크라우스, 자넨가? 들어오게!"

크라우스가 양피지 뭉치가 잔뜩 올려진 쟁반을 책상에 올려놓고 벽면 진열장에서 와인을 가져와 따르는 동안, 쟁반 위의 양피지가 빠르게 펼쳐지고 있었다. 크라우스가 건네준 와인 잔을 받아든 봄멜 공작이 잔을 빙글빙글 돌리자 투명한 유리잔 속에 핏빛의 와인이 물결쳤다.

이윽고 마지막 양피지를 모두 읽은 봄멜 공작이 몸을 일으켜 창가에 마주섰다.

"크라우스, 자네 생각에도 내가 피에 굶주린 야수라고 생각하나?"

"그런 말도 안 되는, 감히 어느 누가 레센의 봄멜 공작님께 누가 되는 소리를 한다는 말입니까?"

"후후! 나도 귀가 있네, 크라우스. 원로원 쪽에서는 내가 전쟁귀신이라고 한다며? 일, 이차성전 때도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던 거 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말이야, 국민들 생각이야. 시민들의 생각. 언제까지나 이 차디찬 동토에 웅크리고 살아야 하는 걸까? 저 원로원 늙은이들은 이대로라면 우리 레센은 자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현실에 안주하는 자는 반드시 자멸하고 만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인데 말이야."

"각... 각하! 심려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국민들과 시민들만은 봄멜 공작님을 존경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하! 사탕발림이라도 듣기에 좋구나, 크라우스."

"각하! 저는 어디까지나......."

"그래그래. 자네 마음은 내가 잘 알아, 걱정하지 말게. 그나저나 우리가 모스크 산맥에 가로막혀 눈뜬장님이었군. 그 사이에 대륙에서는 이렇게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케린버그에 새로운 소드마스터의 출현이라, 게다가 샹그릴라의 성기단이 잉글햄에 숨어들었다, 그것도 그 대단한 로베르트니 단장이 직접 나섰다, 이건가?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겠군. 이 땅에 말이야. 하지만 이번에 피를 흘린 놈들은 로베니아 놈들이지, 우리에게 쥬(Ju)의 낙인과 성스런 돌이 들어온다면 말이야. 베른하트를 만나봐야겠군. 좋아! 나는 지금 입궁할 테니 자네는 그림자 기사단의 베른하트를 불러오게. 이제 레센도 서서히 움직일 때가 왔어."

"아얏! 왜 때려요! 우쒸!"

"뭐? 왜 때려? 하~ 나 이것 참. 뭐 이런 쨔샤가 다 있어? 이봐, 에밀! 내가 이 녀석 신전에다가 반납하고 오라고 하지 않았어?"

"네. 그게 그런데... 저 녀석이 어디에 꽁꽁 숨어 있다가 언제 나타났는지 저렇게 캐더린 양의 마차에 숨어 탔는지 모르겠습니다."

호크는 수도에서 국왕과 여러 날 동안 가진 회의를 통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고서는 오늘에서야 다시 잉글햄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하워도 백작과 그녀의 오빠인 제임스는 영지를 오래 비워둘 수 없기에 이미 돌아간 후였고, 그녀만이 홀로 남아 있다가 호크와 함께 귀향길에 올랐다.

일행의 선두와 후미까지 한 번 둘러보고 마차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마차 창문으로 낯익은 쥐새끼, 아니 머리통 하나가 '쏙' 하고 고개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호크의 레이더망에 걸린 그 머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스톤이었다.

"에이! 내가 무슨 도서관의 책이에요, 반납을 하게!"

"어쭈! 방귀 낀 놈이 성낸다더니, 딱 너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얌마, 신관이 신관으로 돌아가야지, 왜 자꾸 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냐? 응? 여기라면 아직 그렇게 멀지 않으니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떠니! 엄마가 걱정하겠다. 응?"

"저... 저기, 백작님, 저, 죄송하지만 신관들은 대부분 고아들이 많습니다. 흠흠!"

"응? 뭐야? 에밀, 그래? 그럼 저 꼬마도......?"

아니나 다를까, 스톤은 고개가 푹 꺾인 채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젠장! 어째 저 녀석하고 이야기만 하면 꼭 결과가 좋지 않단 말이야!"

호크가 마차 가까이에 말을 대자 창문이 열리면서 마차 안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톤이 캐더린의 무릎에 고개를 묻고서는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고, 사이클론이 맞은편에서 한숨을 쉬면서 호크를 째려보았다. 캐더린마저도 스톤의 등을 다독거리면서 호크에게 그만하라고 눈짓을 했다.

벌레 씹은 표정의 호크가 말을 몰아 핸들러에게 다가갔다.

"아니, 백작님! 마차에 타고 계시지 않고 왜 말을 몰고... 더구나 선두에 나서시는 겁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이렇게 앞으로 나서시면 표적이 되기 쉽습니다."

"으휴~ 제발 그러라고 해라. 그렇지 않아도 성질나니까 말이야. 그냥 확! 들이받을 놈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깨질 것처럼 골치가 아프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휴~ 말이야 쉽지, 군대를 육성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뭐, 전술훈련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다지만, 역시 부대를 만들려면 장교 출신이 있어야 하는데 말이야. 젠장! 그 장군이 제정신이기만 해도... 정말이지 지금 그의 도움이 가장 절실한데 말이야. 세상에! 내게 장교의 도움이 이렇게까지 필요하게 될 날이 오다니 우습군. 응?'

선두의 호크가 오른손을 들자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오른손이 V자를 한 번 그리고 손가락을 3개만 세웠다. 다시 주먹을 쥐자 일행들이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만들어갔다. 마차를 중심으로 둥글게 원형으로 방어진을 구성하고, 에밀과 피터슨이 마차 지붕 위로 올라섰다.

방어태세가 완비되자 호크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왼편에 선 핸들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아~ 우리는 준비가 되었고, 그럼 앞에 계신 손님들 차례인가? 자! 할 말이 있든 볼일이 있든 나와 보시지!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지난번 폭발 이후로 드래곤 산의 숲은 산사태로 엉망이었다. 숲과 흙더미들이 뒤섞인 바위산 곳곳에서 붉은 하드레더를 걸친 검사들이 튀어 나왔다. 그중에서 아주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진 중년인이 굵직한 음성을 토해냈다.

"우리도 말썽은 원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 그럼 모두가 만족할 것이다."

"뭐야? 우릴 노리는 그놈들이 아니잖아!"

"백작님, 저들은 스콜피온 용병대들입니다. 저기 애꾸눈의 사내가 바로 비검(飛劍) 챠챠라는 유명한 용병이자 단검술에 명인입니다!"

'오호~ 용병이라!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보는 직업인들이구만. 어째 울 아버지하고 같은 직업이라니 좀 관심이 가기는 하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것들이 언제 봤다구 반말이야, 반말이!'

호크의 생각이 어떤 줄도 모르고 스콜피온의 챠챠는 상대가 자신들의 신분을 알아보고 겁을 먹었다고 판단하자 일이 쉽게 풀려간다고 착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상대도 상대 나름이건만

"그대들이 돌아가야 하는 불편을 감안해서 숙박비 정도는 보태줄 수 있네. 밀러!"

챠챠의 외침에 거구의 뚱보가 돈주머니를 핸들러 앞에 던졌다.

순간, 핸들러가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눈이 치켜떠졌다. 손도 어느새 소드 손잡이로 향하고 있었지만 다음 순간,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에이~ 뭐야! 구리동전 아냐? 그것도 겨우 이게 뭐야!"

"헉! 백작님! 이게 무슨 추태이십니까? 제발 체통을......."

가까스로 안장걸쇠를 잡고 말에서 떨어질 뻔한 위기를 모면한 핸들러가 발작적으로 호크에게 소리를 질렀다.

"어이, 어이! 자고로 챙길 건 챙기고 봐야지. 백작이 뭐 밥 먹여주나? 그건 그렇고, 뭐 이렇게 용돈을 주어서 고맙기는 한데 말이지, 우리도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안 그러면 그 이동 마법진을 이용해야 하는데......."

기억하기 싫은 냄새와 장면이 떠오르자 세차게 고개를 흔든 호크는 캐더린이 있는 마차를 한 번 쳐다보고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 숲길로 가야 하니까 그냥 비켜라. 우리도 너희들이 그 숲에서 뭘 지지고 볶든 관심 없으니까 말이야. 알았으면 빨리 비켜. 이러다가 길에서 밤새겠다. 남자들끼리면 모르겠지만, 우리 어여쁜 캐더린이 노숙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어서 비켜라! 길게 말 안 한다!"

호크의 거친 말투에 스콜피온 용병대의 챠챠의 눈 꼬리도 보기 싫게 올라갔다.

어느새 그의 좌우로 용병들이 모두 손에 검을 뽑아들고 여차하면 달려들 태세를 하고 있었다.

챠챠는 지금 갈등하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저런 태도를 보이는 자들은 둘 중에 하나였다. 입만 산 애송이던지, 진짜배기 실력자이든지.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도 눈매를 보니 모두 한가락 하게 생긴 자들이었다. 게다가 지금 선두에 선 금발 머리 사내의 기세가 제법 심상치 않았다. 동전주머니를 톡톡 치면서 지껄이고 있는 놈은 대충 보아도 시시한 놈이라고 생각한 챠챠는 일이 쉽게 풀린다고 반색했는데, 이렇게 일이 꼬여들자 앞에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는 호크가 그렇게 밉살스러울 수 없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이들과는 다른 복장의 중년인이 인상을 험악하게 쓰면서 챠챠를 노려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너희들 뭐 하는 거냐? 이럴 거면 뭐하려고 그 많은 돈을 주고 고용했냐? 지금 너희들 반상회 하는 거냐?'라고 말하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챠챠는 자신과 마주친 밀러의 눈을 본 순간, 고개가 끄덕여졌다.

"핫! 가랏!"

순식간에 붉은 하드레더의 스콜피온 용병들이 발끝을 세우고 거리를 좁혀왔다.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지 않고 바닥을 향한 채 상체를 숙이면서 대쉬했다.

샤샤샤삭!

매우 빠르게 다가들던 선두의 5명이 호크를 지나쳐 말 위에 앉아 있는 핸들러를 치려 했다.

그러나 핸들러의 표정이 공격하는 자신들을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뭔가 섬뜩한 기운이 그들의 등 뒤에서 파고들었다.

털썩! 털썩!

"저, 저런! 저럴 수가! 어떻게......!"

호크를 막 지나치려던 5명의 용병들이 마치 수수깡 쓰러지듯이 땅바닥으로 쓰러지더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대다수의 용병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그제야 호크의 실력을 알아본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세차게 목을 푼 호크가 어깨를 돌리면서 몸을 풀더니 잔뜩 긴장해 있는 용병들을 향해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양손을 모았다가 발을 벌리고 무릎을 구부린 후 양손을 옆구리에 가져다 대었다. 기를 서서히 단전(丹田)에 모은 후, 서서히 양팔을 앞으로 뻗어서 어깨와 수평이 될 때까지 올렸다. 가슴에서 앞으로 사나운 기합과 함께 수차례 양팔을 내뻗은 호크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특공무술의 기합 짜기로 기운을 돋운 호크가 맹수와 같은 기합성을 내면서 앞으로 쳐들어갔다. 그의 온몸에서는 아지랑이처럼 마나가 일렁거렸다.

팟.

스콜피온 용병들 사이로 호크가 뛰어들자 처음의 안일한 생각을 완전히 버린 20여 명의 용병들이 호크를 에워쌌다. 호크는 특공무술의 12지 걸음으로 방어수기를 이용해서 등 뒤에서 찔러오는 검들을 흘려보낸 후 땅바닥을 쓸어버릴 듯이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연속 발차기로 2명의 용병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낙법으로 몸을 굴리자 호크가 서 있던 자리에 표창이 우수수 꽂혔다. 몸을 일으킨 호크가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이거 잘못하다가는 애들 앞에서 망신당하겠는데? 이 녀석들 보통내기가 아냐. 달리 형식은 없지만, 몸의 움직임이 동물 같아. 좋아! 이래야 싸워볼 맛이 나지. 그래도 죽지 않게 하려니까 힘 조절이 여간 쉽지가 않은데!'

마음을 정리한 호크는 손에서 힘을 뺐다. 잘못하다가는 부상이 아니라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을 짧고 깊이 가져간 호크가 시선은 앞을 향한 채 게걸음처럼 옆으로 빠르게 이동하자, 2명의 용병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호크를 향해 긴 창을 찔러왔다.

호크는 자신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드는 2개의 창을 한 손으로 잡아챈 후 옆구리에 낀 다음, 상대방의 힘을 이용해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밑에서 또다시 수십 개의 표창이 날아들었다. 이번만큼은 호크도 얼굴을 굳히더니 등 뒤에서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들었다.

검을 빼든 오른손에 단전에서부터 기가 응축되었다. 그 순간, 제로의 검신에 붉은 오러가 뒤덮였고, 호크의 기합성과 함께 블레이드가 교차 베기로 휘둘려졌다.

호크에게 날아들던 표창들이 오러로 뒤엎이자 모두 조각조각 나서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뒤로 호크의 신형 역시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호크가 오러를 구체화시키지 않아서 용병들은 호크가 소드마스터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단 비검(飛劍) 챠챠를 제외하고. 챠챠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넋이 나간 사람의 것이었다. 분명히 표창을 잘라내는 검 주위로 마나가 일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색깔 있는 오러가 없었다. 그것은 저 사람이 소드마스터이거나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챠챠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부하들을 뒤로 물려야 하는데 소드마스터의 기술을 본다는 생각에 이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검집에 검을 돌려보낸 호크가 놀라서 당황한 용병들 사이로 다시 한 번 몸을 던졌다. 무리 속으로 뛰어든 후 술기(術技)를 사용해서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차고, 꺾고, 치고. 호크가 붙었다가 떨어지면 당연하다는 듯이 상대방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검으로 찔러오면 어느 틈에 검을 잡은 손목을 비틀고, 상대의 품에 뛰어 들어 당수로 목을 쳐서 상대를 바닥에 뒹굴게 만들었고, 창으로 찔러오면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서 상대를 무력화시켰다.

스콜피온 용병들도 전쟁터와 생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백전노장들이었다. 결코 그들은 단 한 번의 손길에 정신을 잃을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챠챠는 적의 현묘한 움직임에 매료되어 버렸다. 비록 적이지만 일 대 다수의 전투에 대한 극치를 보는 것 같았다. 치고 빠지고 하면서 하나하나 쓰러뜨리는 모습, 그렇다고 절대로 상대에게 틈을 주지도 않는 그 모습은 바로 전신(戰神)의 모습이었다. 쇠갈퀴 그물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제대로 땅에 서 있는 자는 3명도 되지 않았다.

챠챠가 허리벨트에 꽂힌 단검을 매만지면서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전신의 근육들이 아우성쳤다. 33년을 살면서 오늘처럼 긴장했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장담하건대, 눈앞 의 상대는 자신의 용병대 대장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서는 것은 의뢰인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끓어오르는 피 때문이었다.

다른 상대도 아니고 꿈에서나 꿈꾸던 소드마스터!

온몸의 피가 절규하고 있었다. 비록 싸운다면 자신이 죽을 것은 뻔했지만, 어서 싸우라고 자신의 본능이 계속해서 부르짖고 있었다.

챠챠가 나서자 장내의 사람들이 물러섰다. 무릎을 굽힌 다음 챠챠의 두 손이 엇갈리게 머리 위로 올려졌고, 손바닥에는 시리도록 빛나는 단검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눈물의 비검(飛劍), 오늘날 그를 있게 한 소중한 보물을 두 손에 집어든 챠챠의 숨결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후우! 후우! 내 단검에는 눈이 없소. 조심하시오!"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위협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우스웠던지 피식 하고 웃었다.

"큭큭! 그건 내 손도 마찬가지야. 눈이 좋군. 제대로 상대해주지!"

호크 역시 실력 있는 상대를 보자 호기가 생겼는지 기를 죽이고 본신의 실력으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힘으로 붙어보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와라, 애송이!"

호크의 마지막 말이 챠챠의 심장에 불을 댕겼다.

"야하합!"

두 사내의 기합성이 숲을 가득 메웠다.

휙휙!

챠챠의 손을 떠난 단검이 무서운 속도로 호크의 머리와 심장을 노리고 날아왔다.

검에 실린 약한 마나의 기운을 느낀 호크는 생각대로 상대가 녹록치 않은 자라는 것을 알았다.

2개의 단검이 자신의 머리와 심장 가까이 다가왔을 때, 호크는 후방낙법으로 상체를 바닥에 뉘였다가 다시 앞으로 몸을 세웠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던 호크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2개의 단검 이외에 또 다른 단검이 목전에 짓쳐들었기 때문이다. 뒤로 튕겨졌다가 그 탄력으로 몸이 올라오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목젖을 정확하게 노리고 들어오는 또 다른 비수!

절체절명의 순간에 호크는 몸이 올라오는 속도 그대로 앞으로 텀블링을 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제각각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스콜피온 용병대는 챠챠의 승리를 확신하는 환호성이었고, 호크 일행들에게서 터져 나온 것은 마치 호크가 비수를 향해 몸을 내던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챠챠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가 가진 비기 중에 최고의 수를 썼다. 머리 위에 2개의 단검을 동시에 뿌린 후, 시간차를 두고 어깨 뒤에 숨겨놓은, 눈물의 비검이라고는 불리는 블러드 레인을 상대의 급소를 향해 던진 것이다.

처음 2개의 단검은 상대의 시야를 현혹하기 위한 눈속임이고, 마지막에 던진 블러드 레인이야말로 필살기였다. 이는 은회색의 얇은 단검으로, 날아갈 때 소리도 없거니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죽어가는 상대조차 무엇에 당했는지 알지 못할 정도다.

스콜피온 용병대 중 최고의 천인장인 챠챠는 이 한 수로 제법 이름깨나 날렸던 많은 기사들의 숨결을 멈추게 했다. 오늘도 필살의 이 비기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손을 떠난 블러드 레인의 느낌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챠챠의 불길한 느낌대로 몸을 구부렸던 호크가 허리를 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챠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블러드 레인이 호크의 입에 물려 있었던 것이다.

"후아! 정말이지, 심장이 덜컥했네. 아주 멋진 한 수였어. 이 단검, 아주 잘 만들어졌는데 그래? 돌이라도 무 베어버리듯 할 것 같은 날카로움에 무게도 적당하고 말이야."

블러드 레인을 손바닥에 빙글빙글 돌리는 호크의 모습에 챠챠는 이 드래곤 산의 숲이 오늘 자신의 무덤이 되리라고 짐작했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서 허리 벨트에서 뽑은 2개의 단검을 든 양팔을 아래로 벌린 다음 서서히 앞으로 다가섰다.

호크 역시 입에 걸렸던 미소를 지운 지 오래였다. 블러드 레인을 거꾸로 잡아서 검날이 손목에 바짝 붙도록 역검을 잡고서는 양손을 권투선수가 취하는 자세를 잡았다.

처음 보는 자세에 챠챠는 당황했지만, 붙어서 싸운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기에 호크와의 간격을 좁혀갔다.

싸움에서 간격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더구나 이처럼 단검을 가지고 하는 싸움이라면 한순간의 방심이 목숨을 좌지우지할 뿐더러, 스피드와 힘이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모든 것은 얼마나 상대방과의 간격을 잘 잡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두 사람이 빙글빙글 돌면서 서로 유리한 간격을 잡기 위해 다툼을 시작했다.

챠챠는 늘 그래왔듯이 늘어뜨린 양손의 검을 앞으로 들어 올려 현란하게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상대의 시선을 뺏기 위함이었다. 그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닌, 그동안의 생사결투에서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었다. 대부분의 적들은 챠챠의 현란한 칼춤에 현혹되어 심장이나 목에 단검이 꽂힌 채 세상을 하직했지만, 불운하게도 오늘 싸우고 있는 호크는 현대 군대에서 살상 무술로 발전된, 오랫동안의 노하우가 집약된 전투 무술을 익히고 있는 군인이었다.

'지금껏 본 사람들 중에서 칼 다루는 솜씨가 제일 나은 사람이다. 이자를 꼭 회유해야겠어. 그나저나 왜 이렇게 쓸데없이 칼을 흔들고 난리야? 쯧쯧! 불필요한 동작은 바로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모르나 보네, 바로 이렇게 말이야.'

호크는 챠챠의 칼춤이 서너 번 반복되자 다음번 움직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챠챠의 칼이 자신이 예상한 지점을 지나가는 순간,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인간인 이상, 눈에 대한 공격은 본능적인 공포심을 일으킨다.

호크의 칼날이 눈동자를 찔러오자 챠챠는 본능적으로 뒤로 걸음을 옮겼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크의 다리차기가 그의 발목을 걷어찼다.

몸이 붕 뜨면서 바닥으로 쓰러진 챠챠를 향해서 하이에나처럼 덤벼든 호크의 무릎이 챠챠의 왼손을 찍어 눌러 칼을 떨어뜨리게 한 후, 머리 쪽으로 몸을 빙글 돌려서 블러드 레인의 차디찬 검날을 챠챠의 목젖에 갖다 댔다.

"게임 오버!"

챠챠는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적어도 상대의 팔 하나는 보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크게 착각한 것이었다. 두 눈을 감자 그동안 파란만장했던 용병생활들이 눈앞에 그림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후회 없는 삶이었어! 안녕, 안젤리나!'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본 후, 챠챠는 이승에서의 미련을 버린 듯 편안한 얼굴로 죽음을 기다렸다.

"어이, 아저씨! 뭐해! 오늘 바닥에 누워서 잘 거야? 그만 일어나라고! 덕분에 아주 간만에 몸 좀 풀었으니까."

챠챠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상대방의 반응에 믿기지 않는 표정을 한 채 몸을 일으켰다.

"후! 뭐요? 아무리 용병이라지만, 결투한 상대를 모욕하는 것은 지나친 행위요!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언제 베였는지 하드레더에 의해 칼자국이 난 곳을 손가락으로 매만진 호크가 챠챠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면서 웃어젖혔다.

"푸하하하하! 모욕? 별 시답잖은 소리 다 듣겠네. 이봐요, 아저씨! 그깟 명예 때문에 목숨을 걸어? 그런 거 개나 소에게 줘버려! 그래도 제법 괜찮은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나 졌으니 죽여 달라?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 살아 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생각본 적도 없지, 당신! 어이없네. 간만에 기분이 좋았는데 말이야. 내가 상대한 사람이 이 정도였나? 오히려 내가 모욕당한 기분이잖아, 이거!"

호크의 말을 듣는 순간, 챠챠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사람의 사고라는 것은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한 모습은 그 사회의 분위기와 풍습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지금 들은 호크의 한마디는 챠챠라는 용병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호크가 실망했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면서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자 핸들러도 말에서 내려 호크를 도와줬다.

"백작님! 이제 이런 일에 제발 직접 나서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이러실 거면 뭐 하러 그토록 저희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신 겁니까?"

"쨔샤! 나도 몸을 움직여야 녹이 안 슬지! 이크! 저런! 캐더린이다! 젠장 할! 또 잔소리 듣겠구나!"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캐더린이 뛰어나왔다.

에밀이 만류했지만, 이내 캐더린에게 고양이 앞의 쥐처럼 혼나는 호크의 모습에 다들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호크님! 제발 이제는 자신의 위치를 좀 생각하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호크님에게 의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함부로 몸을 굴리시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러다가 정말 제가 쓰러지는 거 보고 싶으세욧!"

"아... 냐.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미안... 응? 애들도 있는데 오늘은 그만하자, 제발!"

호크가 캐더린을 끌어안고 애원조로 말하자, 한숨을 크게 내쉰 캐더린이 호크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이마에 가볍게 키스를 하고서는 마차에 올랐다.

캐더린이 마차에 오르자 하늘을 향해 한숨을 쉰 호크가 핸들러가 잡아준 고삐를 쥐고서 말안장에 올랐다.

"호... 호크 백작! 잉글햄의 몬스터 학살자!"

"헉! 소드마스터 호크 백작이었다니!"

캐더린의 커다란 목소리 덕분에 그제서야 스콜피온 용병대들도 호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고는 얼굴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용병들은 챠챠의 눈치를 살피면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챠챠 역시 자신이 상대한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자 자신이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호크가 자신의 사정을 많이 봐준 것을 깨달았다.

"휴! 스콜피온 용병대 중 늑대 천인대의 챠챠가 감히 호크 백작님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저 한 사람으로 귀족 능멸에 대한 죄를 물으시고, 제 부하나 용병대에게는 죗값을 묻지 않으시길 부탁드립니다."

챠챠가 검을 머리 위로 들고 호크 앞에 무릎을 꿇자 다른 용병들의 가슴이 울컥했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함께했던 전우이자 자신들의 대장이 저렇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다니!

어느새 뒷걸음질 치던 용병들의 손에는 모두 검이 들려 있었다.

"대장! 당장 일어나! 그게 무슨 꼴이야!"

"맞아! 천하의 챠챠가 그런 꼴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그래! 어차피 이 정도 살았으면 많이 산 거야. 우리들로서는. 크하하!"

"죽기에 좋은날인데!"

역시나 험하게 살아온 인생들답게 입담 또한 걸죽했다.

동료들의 뜨거운 마음이 자신의 심장을 뜨겁게 덥히자, 챠챠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지금까지 자신과 동료들의 삶을 부정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빛이 달라진 챠챠가 이내 검을 고쳐 잡고 일어섰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백작님! 저희 용병이란 게 전부 이렇게 바보라서요. 백작님의 검에 어쩔 수 없이 피를 묻히게 되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실례......."

"호오! 그래, 그렇지! 이런 게 바로 전우애라는 거야. 크! 멋지지 않냐, 핸들러! 사나이 우정! 역시나 멋져! 하하하하! 좋아, 좋아! 당신들, 마음에 들었어. 어이~ 핸들러, 이 아저씨들에게 내 명함 한 장씩 나누어줘. 어서!"

"백작님, 명함이라니요?"

"아참, 알 리가 없지. 시간나면 명함부터 파야겠다. 흠흠! 난 잉글햄의 호크 론 케린버그 백작이다. 당신들, 아니 특히나 챠챠, 당신! 내가 당신 칼 솜씨를 좀 사고 싶은데 말이야,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잉글햄의 호무관을 찾아오도록 해! 내 밑에서 한 일 년 손 좀 보면 훨씬 좋아질 거야. 자자! 그럼 가볼까? 잉? 이런 젠장, 아직도 길을 막는 놈들이 남아 있었나?"

막 말 고삐를 당겨서 길을 가려던 호크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챠챠를 닦달하던 중년 사내가 사라졌던 방향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다시 나타났다.

"젠장! 하도 스콜피온, 스콜피온 하기에 쓸 만하다 싶어서 고용했더니, 결국은 직접 손을 쓰게 만드는군. 이제 네놈들은 필요 없으니 사라져줘야겠어."

중년 사내의 고갯짓에 로브를 걸치고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로브를 벗어 던지면서 소드를 꺼내들고 용병들을 베어갔다. 그들의 검에는 모두 약하게나마 오러가 맺혀 있었다.

"크아악! 으헉!"

"아악! 살려줘!"

"저런! 상대는 정규 기사단이 틀림없습니다, 백작님! 모두 익스퍼트를 벗어난 자들 같은데요?"

"흐흠, 그래서 그런지 모두 오랫동안 훈련받은 모양인데?"

"백작님,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글쎄, 별로 돈 되는 일이 아니기는 한데......."

호크와 핸들러가 한가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순식간에 10여 명의 용병들이 피를 토하면서 목숨을 잃어갔다.

챠챠는 아무리 임무에 실패했다지만 갑자기 돌변해서 자신들을 죽이려 하는 고용주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만, 그만하시오! 이게 무슨 짓이오? 의뢰비를 돌려주면 그만 아니오, 어서 살상을 멈추시오!"

하지만 챠챠의 애절한 외침은 사내의 싸늘하고 가라앉은 대답에 힘을 잃었다.

"네놈들은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죽게 되어 있었다.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어차피 너희처럼 천한 것들은 이렇게 희생하게 되는 것이 하늘의 운명인 것이야. 크하하하하! 어서 빨리 일을 마무리지어라. 발굴이 늦어지면 여러모로 곤란해지니까. 해가 지기 전에... 헉! 이... 럴 수가! 말도 안 돼!"

"뭐가 말이 안 되는데?"

"헉! 언제......!"

시퍼렇게 날이 선 블러드 레인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자 중년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용병들을 처리 중인 수하들을 부르려 공터를 바라봤더니 마차를 호위하고 있던 10여 명의 사내들에게 자신의 수하들이 밀리고 있었다. 정규 기사 20명이었다. 그것도 추리고 추린 이들, 그중에는 소드익스퍼트 상급을 바라보는 자신의 조카도 있었다. 그 조카마저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사내와 나란히 서 있던 금발의 사내에게 검 한 번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밀려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정규 기사단이란 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다시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병진을 형성하고 대항하자 피해가 속출했다.

"이런! 에밀! 내가 뭐라고 했어? 그렇게 동작을 크게 하지 말라고 했지! 젠장! 피터슨, 발을 움직여! 루브카! 공격이 최선의 방어야!"

정체 모를 기사단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핸들러의 몸에도 여기저기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구나 부르카는 제법 깊은 자상을 입고 발을 움직이는 것이 불편해 보였다.

결국 에밀이 두 사람을 상대하다가 등에 검을 맞고 쓰러졌다.

"크윽!"

"저런 병신 같은 자식이! 그렇게 가르쳐주었건만!"

죽음의 문턱에 도달했던 용병들은 자신들이 죽이려 했던 호크 일행에게 도움을 받자 어리둥절했지만, 이윽고 호크 일행이 기사단에게 피해를 입는 상황이 되자 몸이 성한 자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나섰다.

그중에서 챠챠의 움직임은 단연 돋보였다. 밀고 밀리던 싸움은 용병들이 가세하자 결국은 정체불명의 기사단들이 쓰러지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악~ 하악~"

"후욱~ 후욱~"

호크 일행 중 에밀의 부상이 가장 중했다. 나머지도 모두 제법 깊은 상처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중년 사내의 목을 끌고 공터로 내려선 호크는 에밀을 돌려 눕히고 지혈을 시작했다. 자신이 진즉에 나서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언제나 자신이 나설 수만은 없는 법이다. 이렇게 살을 내주고 배우는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공부라고 나름대로 자위하면서 손을 피로 적셨다.

"비켜요! 아저씨! 쥬(Ju)의 영능과 권한으로 아픈 자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소서!"

꼬마 스톤이 신성력을 쏟아내자 가쁘게 내쉬던 에밀의 가슴이 진정되었다. 마차 안에서 마법서에 푹 빠져 있던 사이클론도 그제야 밖으로 나와서는 크게 놀라서 마법치료를 시전하며 용병들과 호크 일행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찌릿!

호크의 사나운 시선에 사이클론이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 바쁜 척 환자들 사이를 뛰어다녔다. 캐더린 또한 마차 안에서 나와 시녀들과 천을 뜯어서 붕대 대용으로 환자들을 돌봤다. 조용하던 숲 속의 공터가 순식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젠장, 조용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지? 빌어먹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자 화풀이 대상은 당연히 중년 사내가 되었다. 화가 난 이 중에는 챠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꽁꽁 묶인 중년 사내 앞에서 호크와 챠챠가 피를 묻은 모습으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자 사내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내... 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이... 이놈들......!"

"그래? 누군데? 말해보셔!"

부하들의 부상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호크가 중년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리자 사내는 숨이 막혀 캑캑거렸다. 인상을 한 번 쓴 호크가 그를 바닥에 내팽개치자 육중한 사내의 몸이 꼴사납게 흙바닥을 굴렀다.

"으헥~ 아구구구! 헉! 헉! 이보게들, 살... 살려주게! 살려주면 내... 보수를 섭섭지 않게 쳐주겠네. 제발~"

"지랄하네! 돈은 됐고, 아저씨는 누구고 왜 이 숲길을 막았는지, 그리고 저 안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말해보셔. 그렇지 않으면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말이야!"

화가 난 호크의 입에서 나오는 매서운 말에 중년 사내는 그 두꺼운 볼 살마저 부들거리면서 떨기 시작했다.

호크가 블러드 레인으로 사내의 몸 여기저기를 장난처럼 쿡쿡 찔러댔다.

"으악~ 그... 그만! 나... 나는... 세... 크으으으으으윽... 컥!"

중년 사내의 입에서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목이 옆으로 꺾였다. 어느새 그의 목에 얼음 조각이 박혀 있었다.

"누구냐!"

챠챠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거의 10여 개의 단검들을 날려 보냈다.

까까깡!

그러나 이내 유리벽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단검들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 마법사다!"

챠챠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호크는 이미 단검이 날아들 때, 그 주위로 마나의 움직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마법사의 방어마법임을 알아챘다. 당연히 뒤를 이을 공격에 대비하며 호크는 불의 기운이 급속하게 커지자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꺼내들고 마나를 검에 흘려보냈다. 순식간에 호크의 기를 머금은 제로의 검신이 붉게 타오르며 귀를 찢어 놓을 듯한 기합성과 함께 제로에서 붉은 기운이 허공의 한 지점으로 날아갔다.

퍽!

"으웨엑! 크아아악! 이럴 수가! 크흑! 마나의 배열을 흩트려놓다니! 너, 너는 누구냐?"

"알 거 없어, 이 쥐새끼들아! 핸들러! 부상자들을 모두 마차 뒤로 옮겨, 어서!"

호크의 검기가 적중한 곳에서 회색 로브 차림의 사내가 튀어나왔다. 온몸에 피칠을 한 채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가 바로 중년 사내를 해치운 주범임에 틀림없었다.

잠시 후, 쓰러져 있던 마법사에게 다가가던 호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위더미 위로 더 많은 수의 인물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것도 제법 강한 기운을 밖으로 내뿜는 실력자들이었다.

"이런 젠장! 이번에는 너무 많잖아! 모두 피햇!"

바위 더미 위에 올라선 대다수가 마법사임을 알아챈 호크가 제로에 기를 모으면서 피하라고 외쳤다. 이미 상대는 캐스팅을 끝냈는지 호크가 마나를 역류시키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곧이어 10여 개의 불덩이가 호크 일행들에게 닥쳐 들었다.

"젠장 할! 너무 방심했어!"

호크가 이를 악물고 제로를 휘두르려는 찰나! 뒤에서 밝은 빛이 퍼져 나왔다.

"세상 모든 만물의 어머니, 마나여! 그대를 숭배하는 자로서 청하나니, 모든 악의 기운을 막아내는 벽을 만들어주소서!"

쑤아아악!

드드드득!

바위 더미 위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화염구(火焰球)가 호크 앞에 생성된 우윳빛 막에 부딪치면서 소멸되었다.

어느새 사이클론이 호크 뒤에 서 있었다.

"후아~ 십년감수했네. 할아버지, 뭐 하다가 이제 오는 거예요!"

"이 녀석아, 내가 요즘 네가 준 책 때문에 좀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런다. 다 네놈 탓이야!"

"젠장 할! 그 망할 놈의 책을 괜히 줬어! 당장에 불살라버려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는 사이클론의 모습에 호크는 정말 화가 났다. 그래서 지금 사이클론이 펼친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을 감행한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헉! 그, 그레이트 월(Great Wall)! 말도 안 돼! 어떻게......!"

"흐흠, 이제 알아보았으면 모두 사라져라.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사이클론의 당당한 외침에 바위더미 위에 올라서 있던 마법사들이 뒤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큭큭큭! 케린버그의 잉글햄에 괴물 같은 놈이 둘 있다고 하더니, 바로 호크인가 하는 놈하고 사이클론, 당신인가 보군. 지겨운 인연이야. 크크크크! 게다가 어디서 팔 써클 마법 스크롤을 용케 구했나 보군. 하지만 여러 개는 아닐 테지. 모두 겁먹지 마라! 내가 있다. 여기서 아무도 살아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 마나를 퍼부어!"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벗은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자 사이클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어디서 그렇게 악취가 나나 했더니, 바로 네놈에게서 나는 거였군. 프랑시! 네 녀석이! 으드득!"

"젠장! 어둠의 마법사라니 도대체 저놈들 정체가 뭐지?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사나운가 봅니다, 백작님!"

"어둠의 마법사라니? 저 치는 또 누구야, 핸들러?"

"사이클론님과는 다르게 수많은 인간들에게 생체실험을 하고 여러 전쟁에 뛰어들어서 악명을 떨친 마법사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전에 어느 왕국에서는 아이들 백 명을 산 채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자는 악마입니다!"

"뭐라고! 저런 호로 새끼가 있나! 영감! 아니, 할아버지! 저놈 상대할 수 있겠어요?"

"크흐흐! 호크야,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란다. 나 역시 저놈에게 꼭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 오늘 아주 운이 좋구나.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전의를 불태우는 사이클론의 모습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언제나 '허허' 하고 웃기만 하던 자상한 할아버지인데, 저렇게 화 나게 만들다니, 대단한 악연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호크도 여유롭지 못했다. 프랑시 옆으로 나란히 선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네놈이 케린버그의 새로운 소드마스터인가 하는 꼬마냐?"

호크의 눈썹이 역팔자로 뒤틀렸다.

"꼬... 꼬마? 흐흐흐! 그래! 꼬마한테 죽도록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볼래?"

호크가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모처럼 2개 다 꺼내들었다. 호크의 기분을 느꼈는지 제로 또한 검신 가운데가 아주 붉게 타올랐다.

호크를 바라보던 악의 마법사 프랑시가 깜짝 놀란 듯이 검을 가리켰다.

"어... 어떻게... 저 검이......!"

"어쭈? 이 검을 알아보셨어요? 그래요? 그럼 너희들이 이제 죽은 목숨이란 것도 잘 아시겠네? 우리 애들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놨으니 오늘 죽었다고 복창하는 게 좋을 거다!"

호크가 쥐고 있는 2개의 블레이드 제로에서 모든 것을 다 녹여버릴 듯한 오러가 피어오르자 프랑시의 두 눈이 심하게 흔들렸다.

"젠장! 공작 나리, 이곳에서는 우리가 불리해. 물건이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야겠어. 자! 빨리!"

프랑시가 검은 로브의 사내에게 재촉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렸다. 왔던 방향으로 왔을 때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는 적들을 쫓아 사이클론과 호크가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핸들러 역시 재빠르게 호크를 따라갔다. 바위 더미를 넘어서자 숲길을 따라서 빠르게 달리는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호크와 사이클론도 기와 마법을 이용해서 그들을 쫓아갔다.

거의 따라잡았을 무렵, 숲길이 끝나는 산언저리에 커다란 동굴이 드러났다. 수많은 인부들이 동굴 주위에서 곡괭이와 삽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인위적으로 파낸 동굴임이 틀림없었다.

"뭐야! 얼마 전에 이곳을 지날 때만 하더라도 이런 동굴은 없었는데? 설마 그사이에 이만한 구멍을 파냈다고? 믿을 수 없어! 포크레인도 없는데?"

"주변에 매우 커다란 마법이 사용된 결계가 있다. 아무래도 마법을 이용해서 동굴을 파헤친 거 같아!"

"젠장! 저 산속에 신이라고 주장하던 놈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일 때문인 거 같은데? 동굴에 들어가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그냥 돌아갈까?"

사이클론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호크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두들 들어라! 이제 이곳에 큰 소동이 있을 테니 목숨이 아까우면 멀리 떠나라. 어서!"

사이클론의 증폭된 목소리에 인부들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있다가 모두들 아우성을 치면서 짐을 챙겨서 떠나기 시작했다.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던 드래곤 산 내부로 들어가려니 호크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의 제로가 '웅웅'거리면서 검명을 토해냈다. 이 녀석도 저 안에 좋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거대한 마귀가 입을 벌린 것 같은 동굴 안으로 사이클론과 호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프랑시! 비록 사이클론이 7 써클 마스터에 저 애송이가 소드스터라고 해도 우리 또한 그 못지않은 전력인데, 왜! 이곳까지 노출시키면서 위험을 감수하는 거요? 난 도저히 지금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소!"

"닥쳐! 젠장 할! 만일 내 생각이 맞는다면 오늘 우리는 모두 여기에 뼈를 묻어야 할지도 몰라. 주둥이 닥치고 저 녀석들을 어떻게 상대할지 궁리나 해!"

"뭐라고?"

통칭 어둠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프랑시, 그는 실제로 악마를 불러내서 악마와 모종의 계약을 맺은, 천리를 거스른 자였다. 어둠의 힘을 근원으로 하니 힘을 사용하는 데 언제나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인명을 해치게 되었고, 언제나 프랑시의 이름 뒤에는 마귀라던가, 지옥의 마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폴렌시아 대륙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어둠의 마법사 프랑시, 그가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자 검은 로브의 건장한 사내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뒤로 머리 하나가 더 큰 사내가 허리를 숙여왔다.

"남은 기사단 수는?"

"모두 스무 명 남짓 됩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발굴은?"

"삼분의 이 정도 진척됐습니다."

"늘 시간이 문제로구먼, 시간이."

"각하! 명령을......."

검은 후드에 가려 표정이 보이질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서 기사를 지나쳐갔다.

"기간테스(Gigantes)를 준비시켜!"

"헉! 이봐, 당신 미쳤소! 지금 그걸 사용하게 되면 대륙의 모든 나라가 발칵 뒤집힐 거고, 로베니아의 그 미친 발렝이 지옥 끝까지라도 찾아올 게 뻔한데, 지금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뭐야!"

"흥! 우리 왕국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지금 여기서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어차피 끝장이야. 오로지 산 자의 입을 막는 수밖에. 그리고 네놈의 관심은 그것뿐이잖아!"

"그거야 뭐......."

"그럼 잠자코 나를 도와! 저놈들만 해치우면 발굴이 끝나는 대로 물건을 넘겨줄 테니. 어차피 피차 목적을 위해 손을 잡았으니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같이 손에 피를 묻혀야 하지 않겠어?"

"흐흐흐! 역시나 자네는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단 말이야. 좋아! 사이클론은 내가 처리하지.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하는 운명이니까 말이야! 하하하하!"

목에서 가래 끓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동굴 한편에 난 구멍으로 사라지는 프랑시를 향해 침을 내뱉은 사내가 로브를 벗어던졌다.

"우리 세린디아의 운명이 네 손에 달렸구나. 오늘도 부탁한다. 여왕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사내가 자신의 손에 들린 녹색 검의 검신을 매만지면서 기도하듯이 읊조렸다.

똑! 똑! 똑!

동굴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서늘한 동굴 안의 기온 때문인지 호크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제로가 뿜어내는 빛을 등불 삼아서 들어오던 호크는 갑자기 안에서 부는 바람결에 실려 온 역한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났다.

사이클론 역시 냄새를 맡았는지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나 호크처럼 뱃속이 역겨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설마... 설마... 그 미친놈이 또 다시......!"

사이클론이 갑자기 전방을 향해 뛰어갔다.

"어어~ 왜 그래요, 할아버지! 같이 가요!"

10분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널따란 광장 같은 곳이 나타났고, 그곳은 수많은 마법 등으로 주위를 밝히고 있어서 대낮처럼 밝았다. 무슨 제단처럼 꾸며진 계단 위에는 처음 보는 거대한 조각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마치 지옥의 야차 같은 괴물들이 인간들을 잡아먹는 그런 그림이었다.

먼저 도착한 사이클론의 몸이 세차게 떨려왔다. 빛 뒤에 서 있는 호크는 갑자기 밝아진 실내에 잠시 앞을 볼 수가 없었지만, 이내 눈이 익숙해지자 실내 광경이 들어왔다.

"헉! 우-욱! 이런 미친 새끼들!"

발치 아래 드러난 광장은 물바다였다. 뭔가 가득 차 있는 느낌에 자세히 바라보니 물바다가 아니라 붉디붉은 피로 가득한 피바다였다. 그 주위로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이... 이!"

딱딱거리면서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내던 호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광장으로 뛰어내렸다. 쌓여 있는 시체 더미들 중에는 남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서로 껴안고 있는 시신도 있었다. 그 아이의 목에서 반짝거리는 것은 호크의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백작위 수여식을 위해 지나던 마을에서 자신의 말을 돌봐주었던 여관 주인의 아이들인 남매에게 준 것이다. 너무나 귀엽고 인형 같아서 오후 내내 말에 태우고 놀아주기까지 했던 아이들!

그때 여자아이에게 걸어주었던 목걸이가 눈에 띈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도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 모습이 역력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시체라고 하기도 민망한 죽음의 흔적들이 모두 어린아이들이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 으아아아아악! 어떤 새끼들이야!"

슈아아악! 쿠우!

커다란 화염구가 호크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분노한 호크가 휘두르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의 검세가 화염구(火焰球)를 반으로 쪼개버렸다.

콰콰쾅!

시체 더미를 강타한 화염구가 마른 장작에 불붙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광장 안은 살타는 냄새와 불길로 가득했다.

그러나 호크의 눈 속에는 그보다 더 큰 분노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런! 화이어 블래스터(Fire Blaster)를 반으로 갈라버리다니! 역시 소드마스터라, 이건가? 후후! 하지만 나는 일반 마법사 나부랭이가 아니라서 말이야. 자! 그럼... 헉! 본 실드(Bone Shiled)!"

특유의 가래 끓는 소리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면서 프랑시가 급히 캐스팅했다. 그러자 그 앞에는 뼈다귀들이 벽처럼 쌓아지면서 엄청난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

"크크크! 프랑시! 자네 상대는 여기 있지 않은가? 로안에서의 빚을 갚을 때가 되었나 보군. 이렇게 만난 걸 보니 말이야."

"후우~ 켁켁! 살살하지 그래? 이 나이에 먼지는 건강에 해롭거든. 크크크! 나 역시 그때 네놈이 방해만 하지 않았더라도 키메라 실험에 성공했을 텐데, 네 녀석 때문에 시간만 버렸어. 에잉!"

프랑시가 먼지를 가볍게 손짓으로 날려버리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하자, 사이클론의 두 눈이 무섭게 변했다.

"시간만 버렸다고! 무려 천 명이 죽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주민 천여 명을 학살하고도, 뭐! 겨우 시간만 버렸다고! 이 죽일 놈!"

"크크큭! 나한테 일 년이란 시간은 아주 귀한 거야. 사이클론, 네 녀석처럼 성자 흉내 내고 다니면서 시간 낭비하는 녀석이 뭘 알겠냐? 아~ 맞아! 로안이라... 로안... 크크크! 아마도 그곳이 네놈의 고향이었지? 아쉽군. 크크크! 잘만 했으면 네 녀석 혈육의 피가 내 키메라가 될 수 있었는데 안타깝네. 크하하하하!"

"으득! 네놈이 죽을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할아버지 고향에서도 이 미친 짓을 또 했다니! 프랑스인지 프랭시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여기에다 너의 목을 두고 가야겠다!"

호크가 사이클론 옆으로 나란히 서면서 제로로 프랑시를 가리켰다.

"흐흐흐! 제법이다만 네놈 상대는 내가 아니걸랑! 나도 네놈의 몸이 탐나지만 아쉽게도 내 차례까지 안 올 듯싶은데."

프랑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장 곳곳에 난 구멍에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젠장!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계속 튀어나오는 거지?"

블레이드를 역검으로 잡고 자세를 취한 호크가 사이클론을 바라보았다.

호크의 얼굴을 잠시 매만지던 사이클론이 부드러운 미소를 호크에게 보이더니 프랑시에게로 걸어갔다.

"호크야! 저 녀석과 나는 이 길고 긴 악연의 끈을 끊어버릴 좋은 기회인 듯싶다. 이쪽은 나에게 맡겨두고 저 녀석들이나 상대해라. 조심해야 해! 죽으면 안 된다!"

"젠장! 영감이나 조심하라구요! 절대로 저런 미친놈에게 지면 안 돼요, 알았죠!"

껄껄껄 웃으면서 시체더미 사이로 사라지는 사이클론을 곁눈질로 살피던 호크는 사방에서 살기가 면도날처럼 난도질해오자 이를 악물었다.

'그래! 오늘 한번 미쳐보자. 피에 굶주린 놈들이니 실컷 피 맛을 느끼게 해주마!'

정식으로 갑옷을 무장한 기사들과의 싸움은 처음이었다. 온몸에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거대한 소드를 든 채 묵직한 걸음소리로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기사들을 보니 절로 위압감이 들었다. 게다가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싸워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마네킹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저벅저벅!

4미터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오자 기사들은 검을 수평으로 들고 원 모양으로 호크에게 다가들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검에서 녹색의 기운이 피어올랐고 순간, 강한 기운이 호크의 전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술에 몸이 굳어버리자 호크는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모든 싸움은 기세다'라는 말을 생각해낸 호크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검을 든 팔을 양쪽으로 벌렸다가 앞으로 교차하면서 기합성을 외쳤다.

"끄아아아아악!"

특공무술의 특유의 기합짜기 괴성이 동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동굴 벽이 흔들릴 정도로 거친 괴성이었다. 다가들던 기사들의 몸이 흔들렸다. 두터운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갑옷 속의 신체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실력이 떨어지는 몇몇은 귀를 막고 주저앉기도 했다.

원진이 무너지자 호크는 최대한 굽혔던 무릎을 펴면서 껑충 뛰어올랐다. 맨 앞의 기사가 휘두른 검을 피해 어깨에 올라탄 호크의 발길질에 상대가 고꾸라졌다.

그 순간, 다른 기사의 어깨로 뛰어올라 제로를 좌우로 휘둘렀고, 투구 2개가 피분수를 뿜어내면서 동굴 바닥에 굴렀다.

우드득!

그리고 올라탔던 기사의 목을 두 발로 감은 채 바닥으로 구르자 소리와 함께 목이 급하게 꺾였다.

바닥을 차고 오른 호크의 다음 상대는 불운하게도 오러를 가득 머금은 제로를 검으로 막아섰다. 결과는 검과 함께 자신의 몸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었다.

"으아악!"

"우욱!"

온통 기사들의 비명소리였다. 분노한 호크는 여느 때와 달랐다. 어른도 아니고 어린아이들을 학살한 이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 광장 안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치를 떨 것이 분명했다.

"왜! 아프냐? 그래, 너도 아프지? 이 어린것들은 얼마나 아팠을까? 이 개자식들아!"

제로가 어깨에 반쯤 틀어박힌 기사가 비명을 토해내자 호크는 그 기사를 마음껏 비웃주면서 제로를 내리그었다. 호크가 분노할수록 제로의 붉은빛도 점점 진해졌다.

"저럴 수가! 역시나 소드마스터! 각하, 어서 이곳을 피하시는 것이......!"

"닥쳐라!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우리가 실패하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덮는 수밖에 없다. 어서 발굴 현장에나 가보아라! 서두르라고 해, 어서! 저자의 실력이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불완전한 기간테스로 저자를 막을 수 있을까?"

등 뒤로 수하가 사라지는 소리를 확인한 검은 로브의 사내가 로브를 벗어 던지면서 광장으로 뛰어내렸다.

쿵!

위에서 떨어져 내린 2미터의 거구가 몸을 일으켰다. 녹색의 머릿결에 눈동자마저 녹색이었다. 마치 돌로 조각한 사람 같았다. 각진 얼굴에서 조금의 인간미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냉혹한 자였다.

그 주위로 똑같은 녹색 기사복장의 기사들이 20여 명이 뛰어내렸다. 이제 얼마 안 남은 은색 기사들보다 훨씬 날카로운 예기를 드러내는 자들이었다.

"소문이 오히려 부족하군. 호크 경! 뛰어난 실력이 아깝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엿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친놈! 집에 연락이나 해라!"

"뭐라고 무슨 소리냐 갑자기!"

"크크크! 병신! 집에 못 들어간다고 연락하란 말이다. 그것도 앞으로 영원히 말이야!"

호크의 비웃음에 사내의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순간 사내의 녹색 검에서 녹색 오러가 빛을 뿜어냈다.

"네놈도 소드마스터였구나!"

"그래! 하지만 네놈은 혼자고, 난 삼십여 명이 넘는 수하들과 함께이다! 조용히 그 검을 내려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물론 영원히 햇빛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올린 호크가 '이거나 먹어라~'라고 소리치자 양옆에 있던, 은색 갑옷을 입은 10명의 기사들이 호크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녹색 머리 사내와 그 뒤의 인물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호크는 양옆에서 달려드는 기사들보다 전면에 서 있는 자들이 더 신경 쓰였다.

"백작님!"

"저희가 왔습니다!"

휘리릭~

쿵쿵!

장내로 갑자기 10여 명의 사내들이 뛰어들자 상황은 또 다시 급변했다. 달려들던 은빛 기사들이 바닥으로 나뒹굴었고, 몇몇은 목에 단검이 박혀 있었다.

"이 녀석들! 뭐 하러 왔어? 그냥 쉬고 있으라니까!"

"헉헉!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한 번 전우는 영원한 전우입니다!"

"에이, 그냥 있었다면 호무관에 돌아가서 뺑뺑이 돌리실 거잖아요!"

부상당했던 루브카가 연신 헉헉거리면서 대답하자 다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호크 특유의 미소를 따라서 흉내 냈다.

"이... 자식들이......!"

갑자기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면서 호크는 갑자기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시야가 흐려졌다.

"뭐야! 넌 뭐 하러 왔어!"

"제 칼솜씨를 산다면서요? 그런데 그냥 죽어버리면 어떡하나 해서요. 확인하러 왔습죠. 그리고 저도 빚진 것이 있어서 좀 받아야겠는데요!"

챠챠가 전면을 노려보면서 말을 꺼내자 호크 역시 씨익 하고 웃으면서 녹색 머리를 바라보았다.

"어쩌나, 녹색 머리? 이러면 장군 멍군이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크하하하하! 그래! 어차피 모두 죽어줘야 하는데 이렇게 제 발로 걸어 들어오면 오히려 내가 고맙지."

"백작님, 조심하세요! 저자는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입니다! 저 녹색의 검에 스치기만 해도 얼음으로 변해버린다고 합니다."

"아니, 세린디아의 공작이 왜 우리 케린버그에서 이 짓거리야?"

"아까부터 발굴, 어쩌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에 뭔가 대단한 것이 묻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더더욱 용서할 수 없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함부로 땅을 파헤친 것도 용서할 수 없지만, 죄 없는 아이들을 해친 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어!"

이를 악문 호크가 제로에 묻은 피를 검을 휘둘러서 바닥에 뿌렸다. 녹색 검 행크 역시 검을 곧추세우더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호크 역시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앞으로 뛰었다. 두 사람을 신호로 양편의 기사들이 충돌했다.

쿠콰콰쾅!

"헉헉! 뭐... 뭐냐! 도대체 무슨 마법 아이템이냐?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아까의 호언과는 다르게 몰골이 엉망이 된 프랑시가 경악스런 표정으로 발악하듯 외쳤다.

"후후후! 어리석은 놈! 보고서도 모르겠느냐? 난 이제 팔 써클 유저야! 네놈의 상대가 아니라는 뜻이지!"

"뭐... 뭐라고? 말도 안 돼! 어떻게! 팔 써클의 마법서는 이곳 던전에... 헉!"

"그래그래! 이제 알았냐! 겨우 한다는 짓이 그 마법서를 얻기 위해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한 것이냐. 쯧쯧쯧!"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으아아악!"

실성한 듯 프랑시가 마법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자 사이클론은 비릿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마나의 힘이여! 내게 잠시 그대의 숨결을 빌려주오! 공간의 구속으로 잠시 시간을 멈추어주소서! 아함드 욘 드리프!"

마법이 발현되자 마법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던 프랑시 주변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춰버렸다.

"너는 그동안 너무나도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네가 소멸되더라도 네 영혼은 영원히 지옥을 떠돌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스스로를 원망하도록 해라!"

"불쌍한 영혼을 대지 품으로 돌려보내리! 본 오브 소울(Born of Soul)!"

멈춰버린 공간이 일그러지듯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있던 프랑시의 흔적 또한 사라져버렸다.

원수를 갚았다는 허탈감 때문인지, 아니면 8써클의 고위 마법을 쓴 후, 마나의 공백 때문인지 잠시 몸을 비틀거린 사이클론이 허무한 눈으로 프랑시가 소멸한 장소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호크의 걱정에 왔던 길을 급히 되돌아갔다.

스산한 바람이 동굴을 휘돌며 빠져나가자 프랑시가 있던 자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점점 커지더니 사람만 하게 변했다.

[흐흐흐흐! 네 녀석의 영혼이 이제야 내게로 오는구나. 크흐흐흐! 생전에 그토록 영혼만은 안 된다고 버티더니, 진작 내 말대로 했으면 이렇게 소멸될 일도 없잖아. 흐흐흐흐! 미리미리 녀석의 몸에 준비를 해두길 잘했군. 그나저나 이곳은 쥬(Ju) 안식처인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들어올 수 있었지? 흠,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더니, 그동안에 뭔가 큰 변고가 생겼나 본데? 크크크크! 그거야 내 전공이자 나의 즐거움 아닌가? 어디 슬슬 다시 한 번 유희를 즐겨볼까?]

온통 어둠과 그림자뿐인 존재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만 남긴 채 사라졌다, 손에 조그만 유리병을 든 채.

"학! 학! 이 새끼들, 뭐 이런 얼음덩어리들이 있어! 이런, 조심해!"

퍽!

크윽!

"하아! 하아! 고맙네, 친구!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제이크가 챠챠에게 고마움을 표한 후, 재빨리 검을 들고 2명을 상대하고 있는 피터슨에게 달려갔다. 가장 실력이 뛰어난 핸들러가 녹색 기사 셋을 상대하고 있었고, 나머지 피터슨과 루브카가 2명을 상대하고 있었다. 톰슨과 지미 등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한 몇몇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옆에서 달려들던 1명을 술기를 이용해서 목을 잡아 꺾어버린 피터슨이 장내를 둘러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부상당한 에밀의 공백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뒤에서 챠챠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단검을 던져주고 있기에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지리멸렬했을 자신들이다.

챠챠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준 후, 피터슨이 핸들러에게 뛰어들었다.

"웃챠! 이거나 먹어라! 이봐, 핸들러! 이렇게는 안 되겠어, 특공진을 써야겠어!"

"그래! 에밀이 빠졌지만, 그래도 그 방법밖에 없겠는데!"

핸들러와 피터슨이 달려드는 상대방들을 밀쳐내고 일행들과 합세했다. 모두 망토를 벗고 쓸데없는 것을 모두 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머리 위로 올리고 왼손은 당수자세로 들어 올렸다. 앞에 셋, 뒤에 둘이 선 상태에서 호크처럼 찢어지는 기합소리가 울렸다. 무리를 지은 다섯이 따로 떨어진 상대에게 뛰어들었다.

그때부터 일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앞에 선 셋이 공격하고 뒤에 선 둘이 후미를 막아섰다. 후미가 둘뿐이었지만, 챠챠의 단검이 후방을 방어해주자 효과는 만점이어서, 녹색 기사들이 삽시간에 쓰러져 나가기 시작했다.

악귀처럼 듣기 싫은 기합성을 내면서 달라붙는 핸들러 등의 지독한 공격은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공격이었다. 더구나 한 수, 한 수가 공격이 아닌 그야말로 살수(殺手)였다. 마치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공격법 같았다. 자신들처럼 검로가 있는 검법이 아니었다.

핸들러 무리가 제법 잘 버텨내자, 호크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행크를 상대할 수 있었다.

우드드드드!

호크가 왼쪽 어깨를 흔들자 얼음덩어리가 깨지면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세히 보니 정말 어깨 부위가 얼음이 언 것처럼 새하얗게 결빙되어 있었다.

"후우~ 얼음장수 하면 딱 어울리겠는데. 크윽!"

호크는 폐 속까지 얼어오는 한기에 치를 떨면서 심호흡을 계속하며 단전에서 뜨거운 기를 계속해서 몸 전체로 돌리려고 노력했다.

행크 공작의 저 녹색 검에 스치기만 하면 마법처럼 주위가 얼어붙었다. 지금 호크의 몸은 군데군데 동상이 걸린 것처럼 퍼렇게 멍이 들었다. 머리카락은 고드름처럼 얼어붙었고 얼굴에는 하얗게 김이 서리기까지 했다. 벌써 수십 차례 검이 오고 갔지만, 얄밉게도 행크라는 작자는 직접 검을 부딪쳐오지 않고 요리저리 피해가면서 자신이 가진 검의 특성을 이용해 호크를 괴롭히고 있었다.

게다가 신발에는 무슨 장치라도 달렸는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하면 슉슉! 소리가 나면서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후우~ 재수 없는 새끼! 저걸 믿고 큰소리 친 거 같은데? 후우~ 뭔가 수가 없을까? 젠장! 손에 잡혀야 어떻게 해보지, 원. 밧줄이라도 있으면 로데오 하듯이 목에... 가만! 크크크! 이런, 이런! 제로, 너를 잊고 있었구나. 크크크! 그동안 동영상 강의를 빼먹은 벌인가."

궁지에 몰리자 호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제로의 사용법에 대한 영상이 생각났다. 단전의 기운을 제법 끌어올려 몸에 엄습했던 한기마저 몰아내자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은 호크는 제로를 앞으로 들어 올려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붕붕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제로에게서 흘러나왔다.

행크 역시 그런 기운을 눈치 챘는지 자신의 녹색 검 블러디 아이스(Bloody Ice)에 마나를 주입하더니 녹색 강기를 만들어 호크에게 내질렀다. 야구공만 한 녹색 구들이 전면으로 날아오자 호크는 회전하던 제로를 X자로 교차시켰다. 그러자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회전하던 검날에 걸린 녹색 구들이 모두 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교차시킨 팔을 풀면서 제로를 행크에게 내던졌다. 놀랍게도 날아가는 제로와 호크의 팔 사이에 마치 쇠사슬 같은 노란색 줄이 연결되어 있었다.

붉게 빛나는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자신을 향해서 붉은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자 행크 역시 부츠에서 요란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순식간에 검의 공격범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호크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걸렸다.

"걸렸구나! 흐어업!"

호크의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제로와 호크의 팔 사이에 연결된 노란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호크의 양손이 줄을 잡아당기면서 머리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검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행크는 마치 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방향을 비틀더니 춤추듯이 자신을 찔러오자 대경해서 바닥에 몸을 굴렸다. 망신스런 모습이었으나, 체면보다는 목숨이 소중한 법! 그렇게 첫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지만, 안타깝게도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는 한 자루가 아니라 두 자루였다.

서걱!

"크아아악!"

외마디 비명이 동굴 안을 울렸다. 바로 세린디아의 행크 공작이 내지른 비명이었다. 선홍빛 피가 동굴 바닥에 흘러내렸고, 그의 녹색 검은 그의 피로 붉게 변해버렸다.

"후우~ 후우~ 어떠냐? 너도 피를 흘리니 저 애들의 심정이 좀 느껴지냐?"

호크가 금세 회수한 제로를 들고 시체 더미를 가리키자, 수하들에게 부축을 받아 일어선 행크가 입에서 선혈을 흘리면서 비웃듯이 소리쳤다.

"개소리 마라! 힘이 없으면 당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다. 너도 나보다 힘이 있으니 내게 큰 소리 칠 수 있는 것. 그렇지 않다면 바닥에 쓰러져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것은 너일 테지......."

"저... 저 새끼가... 아직도 입만 살아서......!"

"쿨럭! 제길! 내 블러디 아이스에 금이 가다니! 정말이지 대단한 검이다. 하지만 우리 또한 억겁의 세월 동안 수난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과 여인들을 힘이 없다는 이유로 눈뜬 채 빼앗겨왔고, 우리 아버지들은 피를 토하면서 고개를 숙여왔다. 크크크크!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이다. 우리는 힘을 얻을 것이고, 더 이상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쿨럭! 크크크!"

"미친 새끼! 그렇다고 죄 없는 애들을 저렇게 죽였냐? 너희 놈들 편하자고 저런 짓거리를 저질러!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너도 네 자식들이 있을 거 아냐, 조금도 양심에 꺼리지 않는 거야? 그런 거냐!"

"내 조국을 위해서, 나의 왕과 백성들을 위해서 악마가 되어도 상관없다. 아니, 나는 오늘 악마가 될 것이다. 어서! 프랑시님에게 시간이 없다고 말씀드려라! 여기는 내가 막는다!"

"공작님! 안 됩니다. 저희가 막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쿨럭! 이놈들아, 시간이 없어! 어서! 우리 세린디아의 미래가 너희들 손에 달려 있다, 어서!"

"모두 공작님을 모시고 떠나라! 이곳은 내가 맡는다!"

"오~ 애쉬님! 언제......."

"쿨럭! 애... 쉬, 안 돼! 자네는... 쿨럭!"

"공작님을 커크님에게 모셔라, 어서!"

갑자기 나타난 은발 머리의 청년이 명령하자, 이제는 4명뿐인 녹색 기사들이 행크 공작을 부축한 채 제단 뒤로 사라졌다.

"이런 젠장! 멈춰!"

호크가 바로 쫓아가려 했지만, 애쉬라는 은발 청년의 검에서 백색의 오러가 뿜어져 나와 어쩔 수 없이 호크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후우~ 이런 젠장! 세린디아에 소드마스터가 이렇게 많았어? 뭐야, 약소국이라던 세린디아가 맞아?"

새파랗게 생긴 젊은이가 백색의 강기를 쉽게 뿜어내자 놀란 호크가 핸들러에게 질문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까 행크 공작 이외에 소드마스터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아까 그 녹색 기사들도 대단한 무위를 가지고 있던데, 저런 자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세린디아는 이 폴렌시아 대륙에서 가장 힘이 약한 약소국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젠장!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케론스 놈들의 일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이제는 주변국도 신경 써야 하는 거냐! 흐유, 어찌 됐던 간에 우선은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고 봐야겠지."

호크가 전신에 기운을 돌리자 온몸의 근육들이 터질듯이 팽창했다. 강렬한 기운을 느낀 애쉬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마치 죽음에 초연한 듯한 모습에 호크는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쉬는 자신이 가진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금속의 검이 바닥에 닿자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처럼 조각조각 나버렸다.

"뭐, 뭐야!"

"후후~ 세상에 소드마스터가 그렇게 많다면 웃기겠지. 안 그래!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아. 강대국에서만 계속해서 나오고, 그래서 그들의 힘은 더욱더 강해지고. 반면에 약소국들은 수탈당하고. 악순환의 연속이라고 할까! 내 누이는 말이야, 로베니아의 어느 돼지 같은 귀족 놈의 하녀가 됐는데 말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나? 하하하하! 바로 화장실 시녀라네.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그 돼지 놈의 엉덩이를 닦아주는 하녀 말이야. 크크크크!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는 힘을 갖기로 했지. 우리가 강해지기로 했단 말이야! 그래서 그걸 방해하려는 사람은 그냥 둘 수가 없어! 알아! 나는 여기서 죽지만, 우리 세린디아는 이제 곧 신의 병기를 얻어서 강해질 거야! 그래서 이 폴렌시아 대륙을 발아래 두게 될 거라고. 하하하하!"

"이런, 이것도 미친놈 아냐? 어떻게 된 놈들이 다 미쳐버렸어!"

"하하하하! 아까는 마법검의 위력이었지만, 지금부터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이헤스린 디욤크라 기간테스(Gigantes)!"

애쉬라는 은발 청년이 옆에 서 있던 동상에 손을 대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소리치자, 평범한 동상인 줄 알았던 동상의 흉부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우웃!"

강렬한 빛에 광장에 있던 호크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시력이 돌아오자 모두들 무언가 주변의 기운이 변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그그긍!

우웅!

동상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그 동상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금 영화 찍어?"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광경에 호크의 입에서 절박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늦게 달려온 사이클론이 광장 전체가 울리도록 다급하게 외쳤다.

"세,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기간테스라니! 어떻게 저 괴물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레드 블러드에 이어서 기간테스까지! 모두 피해라! 동굴 밖으로 달아나!"

호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동굴 밖으로 피하는 것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백작님! 어서요!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기간테스는 기간테스가 아니면 막을 수 없어요, 어서요!"

"비켜! 어서 너나 영감을 데리고 피해! 여기서 물러선다면 저기 죽어 있는 아이들의 원한은 누가 갚는다는 말이야! 나는 저런 녀석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 게다가 저 따위 궤변을 늘어놓는 놈들이 저 괴물보다 더 엄청난 것을 가져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냥 보고 있으란 말이야? 오늘은 이곳이지만, 내일은 잉글햄이 될지 어떻게 알아! 이 개자식들 하는 짓이 꼭 뭐 같아!"

서서히 움직이던 청동상의 속도가 빨라졌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기간테스를 바라본 핸들러는 바닥에 침을 한 번 내뱉은 후에 검을 들고 호크 곁에 나란히 섰다. 사이클론 역시 어느새 호크 옆에 서 있었다.

"모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어서 동굴 밖으로 피햇!"

"이 정신 나간 놈아! 기간테스는 기간테스가 아니면 상대할 수 없단 말이다!"

"그 재수 없는 아레네스인가 뭔가 하는 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가 베지 못하는 것은 없다고 했어요. 할 수 있다구! 이대로는 억울해서라도 도망 못 가! 젠장!"

자신을 끌어당기는 사이클론의 손길을 뿌리친 호크가 이제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기간테스의 앞에 섰다.

"젠장 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완전히 로봇 아냐? 이건 마법이나 그런 차원이 아냐. 뭔가 뒤가 구린 내막이 있는 게 분명해! 신의 낙인이라는 둥 하는 것부터가 수상했는데. 젠장! 엄청 구린 냄새가 나는데? 문명 수준은 중세 시대인데 어떻게 이런 메카닉이 존재하는 거지?"

기간테스가 점점 더 다가와 그 위용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한편, 안으로 흘러 들어간 애쉬의 코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렸다. 정신이 혼미해지던 애쉬는 기간테스가 물어오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누군가?]

"쿨럭! 세린디아 그린로즈 기사단의 애쉬다!"

[계급은?]

"제일 기사대장."

[목적은?]

"전... 전쟁!"

[전쟁!]

전쟁이란 소리에 기간테스의 두 눈이 붉게 타올랐다.

[승선을 환영한다. 이제부터 그대가 이 아크원의 주인이다.]

"빌어먹을! 더럽게 크네, 쳐다보는 사람 목 부러지겠군."

호크는 기간테스 주위를 맴돌면서 빈틈이 있나 살펴보았다. 전장 5~6미터에 폭이 2미터 정도 되었다. 겉을 보니 분명 금속 재질이었고, 관절과 관절 사이가 움직이기 용이하게 접합되어 있었다. 가슴에는 그로테스크(Grotesque)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 흉갑이 덮여 있었고, 얼굴은 구부러진 뿔이 달린 산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호크가 기간테스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오자, 사이클론이 어느새 마법 발현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기간테스에게 마법을 건다는 것은 미친 짓이지만 어쩔 수 없지. 불꽃의 여신이여! 그 화염의 창날로 저 괴수의 심장을 뚫어주소서!"

마법 영창이 끝나자 사이클론의 전면에 불꽃으로 뒤덮인 뱀의 형상이 생겨났다. 그리고 사이클론의 두 손이 기간테스를 향하자 이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불꽃을 토해내면서 기간테스의 가슴에 적중했다.

쿠콰콰쾅!

"이야! 성공이다!"

바위 뒤에 숨어 있던 호크가 기쁨에 겨워 소리쳤지만, 이내 핸들러의 기운 없는 소리에 머쓱해졌다.

"아니에요! 흠집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백작님, 어서 피해야 합니다."

"이런! 어서 피해!"

호크가 핸들러와 사이클론을 끌어안고 바닥에 뒹굴었다.

그 잠깐 사이, 호크 등을 발견한 기간테스가 그 묵직한 발로 호크 등이 숨어 있던 바위를 짓밟아버렸다. 그러자 단번에 단단한 바위가 가루로 변해버렸다.

"젠장! 역시나 저 괴물에게는 마법도 통하지 않는구나! 호크야, 피하는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야!"

화염계 마법 중에서 폭발력과 관통성이 가장 높은 마법이 너무도 허무하게 소멸해버리자 다소 허탈한 목소리가 사이클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호크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백작님!"

호크는 핸들러와 사이클론을 자신이 들어왔던 동굴 속의 구멍 안으로 들어서 던져버렸다.

"안 돼! 얘야, 그건 자살행위야! 어서 돌아와!"

"알아요! 그래도 너무 분해서 도망갈 수가 없어요. 여기서 몸을 피하고 계세요! 자, 이제 끝장을 보자, 이 고철덩어리야!"

두 사람의 안타까운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크는 제로를 꺼내들고 기간테스에게 달려들었다.

호크가 기간테스 발치 아래에 도달하자 기간테스의 발이 또 다시 찍어 내려는 듯 밟아왔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공격해오자 호크는 아슬아슬하게 옆으로 몸을 피했다. 예전에 석상들을 상대할 때처럼 기간테스의 몸을 타고 뛰어오른 호크는 머리 부근까지 도달해서는 제로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까까깡!

쇠를 긁는 소리와 함께 호크는 기간테스의 몸에서 튕겨져 나와 바위에 부딪쳤다.

"으웩!"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낸 호크가 제로를 목발처럼 짚고서 힘겹게 일어났다.

"크읍! 퉷! 후~ 죽을 뻔했어! 쿨럭! 젠장! 그놈 손 한번 맵구나!"

호크가 기간테스의 머리를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로 내려치는 순간, 기간테스의 주먹이 호크의 전신을 강타했다. 다행히 미리 몸을 빼기는 했지만, 공격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해서 바위 더미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기간테스의 몸체도 성치는 않았다. 투구 부근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미소 짓는 호크의 입속이 검붉은 피로 가득했다.

"우욱! 효과가 있단 말이지? 이런 괴물이 세상에 나가게 할 수는 없지. 오늘 너 죽고 나 죽는 거다!"

호크는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내고 제로의 손잡이 위에 있는 동그란 보석을 눌렀다. 그러자 제로의 검신이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톱니 모양으로 바뀌었다. 제로를 역검날 형태로 바꾼 호크가 단전에 쌓여 있는 태극심법의 정수를 제로에게 쏟아 부었다.

호크의 기운을 받자 미친 듯이 울어대는 제로의 검신에 잠시 시선을 준 뒤, 양손의 검을 돌리면서 호크의 몸도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광장 안에 회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체 더미들도 바람에 날리고 시체 더미를 태우던 불길도, 연기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기간테스를 조정하는 애쉬의 얼굴은 마치 피를 모두 빨린 사람처럼 파리했다.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어! 이것이 마지막이야! 커크님, 행크 공작님, 우리 세린디아에 부디 평화를! 가자, 아크원(Arc One)!"

고오오오!

굉음을 울리면서 기간테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호크에게 두 주먹을 움켜쥐고 달려들었다. 그 주먹에 걸리면 드래곤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위력이었다.

"안 돼! 호크야!"

"백작님!"

기간테스가 내뻗은 두 주먹이 회전하고 있는 호크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호크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흐아얍! 윈드 커터(Wind Cutter)!"

호크의 손을 떠난 제로가 맹렬히 회전하면서 기간테스에게 날아들었다. 기간테스의 두 주먹이 동굴 바닥을 치는 동안, 몸을 뺀 호크는 제로의 손잡이와 자신의 팔목을 연결하고 있는 영혼의 사슬을 잡아당기면서 기간테스(Gigantes) 다리 사이를 맴돌았다. 마치 동물을 밧줄로 잡듯이 제로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면서 기간테스를 옭아맸다.

카카카캉!

2개의 검이 마치 드릴(Drill)처럼 기간테스의 가슴에 박혀 들어갔다. 제로가 기간테스의 온몸에 황금빛 사슬을 칭칭 감은 채 가슴 흉갑에 박혀 들자 호크의 입에서 또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으하합!"

기합성과 함께 사슬을 있는 힘껏 끌어당기자 호크와 제로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영혼의 사슬이 황금빛을 더욱 빛내면서 기간테스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호크의 안색은 창백해져갔고, 입가로 흐른 검붉은 피가 상체를 적시고 있었다. 한동안 힘겨루기를 하던 기간테스의 몸체에서 깡통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가슴의 흉갑이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려 호크를 잡으려던 기간테스의 몸체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로를 회수한 호크는 흉갑이 뜯긴 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은발의 잘생긴 청년 애쉬는 이미 미이라처럼 흉측하게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 있었다.

"후우! 후우! 어리석은 놈! 쿨럭! 우웩!"

끓어오르는 기혈을 참지 못하고 호크가 계속해서 각혈을 해대자 구멍 속에 숨어 있던 사이클론과 핸들러가 광장으로 뛰어내려와 호크를 부축했다.

"하아! 하아! 젠장 할! 그 녀석 정말 괴물이네. 할아버지, 괜찮아요?"

"그래, 이 녀석아! 어쩌자고 이랬냐, 어쩌자고!"

"백작님! 정신 차리세요!"

"우웅... 난 괜찮은데......."

"백작님!"

호크의 신형이 무너져 내리자 그를 받쳐 든 핸들러가 비명을 질렀다.

'제기랄... 너무 힘드네... 사는 거 말이야.......'

정신을 잃기 전에 호크가 한 상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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