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8화 (8/55)

Chapter 8. 로이든을 향한 험난한 여정(2)

"뭐라고?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

"이제라뇨? 급한 보고서라고 제가 직접 다크나이트를 시켜서 보냈는데,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겁니까?"

'이런, 젠장! 그날 추기경님이 크게 노하시는 바람에 떨어뜨린 것이 네 보고서였구나!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크윽!'

"형님, 제 말을 듣고 계시는 겁니까? 형님!"

"그래, 듣고 있어, 듣고 있다고!"

"설마하니 먼저 손을 쓰신 것은 아니시겠죠? 소드마스터와 소드마스터의 제자들, 그리고 7 써클의 대마법사로 구성된 파티(Party)입니다. 엄청난 전력이라고요."

통신구에서 한마디, 한마디 흘러나올 때마다 쟝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이래서 정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게... 말이지, 후! 좋아! 너를 속여서 뭐 하겠냐. 이미 작전을 시행했다. 아마 지금쯤 벌써 일이 벌어졌을 게다."

"저... 저런! 제게 그 병력을 보내셨다면 더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었을 텐데, 누가 책임자입니까?"

"데브론이다."

"뭐라고요? 아니, 그자는 마스터도 아닌데 왜? 어째서 그자를... 혹시... 설마?"

"그래. 네 짐작이 맞다. 그는 레드 블러드(Red Blood)의 맹약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누가 승인한 겁니까? 설마하니 형님께서 허가하신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야. 추기경님이 지시한 사항이다. 하지만 나도 딱히 반대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추기경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전 대륙에 알려진다면 저희는 끝장입니다."

"그분의 깊은 뜻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느냐. 하지만 첫 번째 낙인이 사라진 것에 매우 충격을 받으신 것 같다. 그래서 호크란 자를 없애는 데 레드 블러드의 사용을 묵과하신지도 모르지."

찌이이잉~ 퍽!

"제기랄......!"

"왜 그러십니까? 형님!"

"데브론의 레드 블러드 소울(Soul)이 방금 깨져버렸다. 그 정도 인원을 가지고도 실패란 말인가? 어째든 귀찮은 놈들은 해치웠으니 뒷정리나 해야겠다. 다크 문의 메이슨에게 연락해서 에딘버그를 청소하라고 해라! 우리 흔적은 조금도 남겨서는 안 돼! 내 말, 알아들었겠지?"

쟝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검은 가죽옷의 사내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서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케론스! 방해물들이 사라졌으니 너는 어서 케린버그의 장악에나 신경 써라. 벌써 오 년이다. 첫 번째 낙인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신의 안배가 그렇게 쉽게 사라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조만간 다시 징조가 보일 것이다. 운명의 시계는 절대로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럼, 이만 통신을 해제하자. 아나무나크에게 영광을!"

팟!

통신 수정구에서 자신의 형인 쟝의 모습이 사라지자 케론스 공작은 벽의 줄을 잡아당겼다. 벽이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벽난로가 돌아가면서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재로 돌아온 케론스 공작은 창가에 기대어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운명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디안 협곡으로 사람을 보내라. 가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조사해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보고하라고 해."

서재의 그늘진 천장에서 예전에 론이라 불린 다크나이트가 말없이 내려섰다가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뚝.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가지 하나가 부러지더니 공작이 서 있던 창문에 날아와 부딪쳤다.

'레드 블러드의 저주 속에서 살아남지는 못하겠지. 분명히 죽었을 거야.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살아남을 리가 없어.'

공작의 눈은 바람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자꾸만 엄습하는 불길한 마음을 부러진 나뭇가지에 실어 보내려는 듯이.

"케에헥! 콜록콜록! 후우우! 이런 쓰바! 진짜로 죽는 줄 알았네. 무슨 원자폭탄도 아니고. 콜록콜록! 너무 방심했어. 이 정도 위력의 폭발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이거 좀 생각해보아야겠는걸."

돌무더기가 만든 틈새에 아슬아슬하게 엎드려 있던 호크는 정말 구사일생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절감했다.

정신을 차린 호크는 포복으로 바위 틈새를 기어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언제 2차 붕괴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더구나 호크처럼 삶에 애착이 강한 인간은 생존에 관해서는 타고난 본능 같은 것이 있다고 할까?

무작정 기어가는 것 같아도 어느새 점점 빛이 새어나오는 곳을 찾아가고 있었다.

투두둑!

와르륵!

돌무더기가 우르르 쏟아져 내리더니 사람이 한 명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는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쓴 호크였다.

"헥헥! 죽다 살아났군. 어떻게 된 곳이 마나가 전혀 모이지 않을까? 오랜만에 몸이 고생을 하는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곳도 그리 안전한 거 같지 않은데, 서두르자! 빨리 빠져나가야지!"

호크는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서 방금 떨어져 내린 방 안을 살펴보았다.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외부에서 기가 모이지 않았다. 그것은 대기에 마나가 흐르지 않는다는 말이었고 그렇다면 이곳은 누군가에 의해 결계가 쳐진 곳이라는 말인데... 호크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씨! 이럴 줄 알았다면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는 건데. 뭐가 이리 어두워? 도대체 앞이 전혀 보이지를 안잖아! 영감한테 마법이라도 배워둘 걸! 그랬으면 '빛이여! 어둠을 밝히소서!' 하고 외치면... 어라?"

빛이라는 말에 갑자기 강렬한 섬광이 사방에서 터졌다.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된 호크는 팔을 들어 두 눈을 가렸다.

잠시 후,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호크가 작은 방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아주 넓은 광장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를 살펴보니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광장 가운데에는 나신으로 조각된 아름다운 여인이 항아리를 들고 있는 석상이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는 분수대가 서 있었다.

더구나 놀랍게도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석상의 항아리에서는 아직도 물이 나오고 있었다. 분수대 주위로는 입구에서 본 것과 같은 석상들이 둥글게 둘러서서 분수대를 감싸고 있었다.

갈증을 심하게 느낀 호크는 분수대에 다가가서 손으로 물을 조금 떠서 냄새를 맡아보고 살짝 맛을 본 후, 이상이 없자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휴! 이제야 좀 살겠네. 그나저나 누가 이런 건물을 지어 놓은 거지? 천장에 저 빛은 마법등인 거 같은데, 우리 호무관에 있는 것보다 훨씬 밝은데, 그렇다면 우리 영감보다 마법 실력이 더 좋은 사람이 만든 건가? 흠? 뭐지, 이 느낌은? 누구냐!"

분수대에서 뒤로 훌쩍 물러난 호크의 양손에는 어느새 블레이드가 쥐어져 있었다. 분명히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모이지 않는다고 해서 감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호크는 두 눈을 감고 최대한 감각에 집중했다.

'젠장 내가 너무 예민했나! 분명히 뭔가가 나를 훔쳐본 것 같은데.'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은 호크가 막 발을 떼려는 순간, 광장 안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야? 이런 돌더미에 깔린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또 뭐야!'

분수대를 둘러싸고 있던 석상들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별게 다 사람을 놀라게 한다고 생각한 호크는 거대한 석상들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데도 실없이 웃고만 있었다. 너무 놀라운 일들을 연속적으로 겪게 되면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된다. 지금 호크는 패닉까지는 아니어도 순간적인 판단이 흐려진 상태였다.

제일 가까이 다가온, 오크 형상을 한 석상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리자 호크는 그 발그림자 속에 묻혀버렸다. 이제 석상이 발을 내리면 이곳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보겠다던 호크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나게 될 순간이었다.

[호크님! 호크님! 정신 차려요!]

"헉! 캐더린! 이런 젠장 할! 에잇!"

믿을 수 없게도 어디선가 캐더린의 목소리가 호크의 정신을 일깨웠다. 주위가 어두워진 이유가 자신을 짓뭉개려는 석상이 들어 올린 발 그림자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호크는 힘껏 몸을 바닥으로 굴려서 분수대 옆으로 빠져나갔다.

쿵!

엄청난 굉음과 함께 대리석 바닥이 커다란 발자국을 남기며 움푹 파였다.

"허억! 젠장! 영락없이 쥐포 신세가 될 뻔했군, 고마워, 캐더린! 당신의 사랑이 나를 구했어!"

잠시 캐더린을 떠올린 호크는 분수대 물에 고개를 처박았다.

"푸우! 좋아! 이제 정신을 차렸으니 여기에서 빠져나갈 궁리부터 해야겠다. 어디 보자... 오크, 드워프, 인간, 저건 저번에 본 엘프라는 거고. 흠, 디안 요새 전투 때 본 몬스터들이 몽땅 다 집합했군. 대체 어떤 놈이 이런 피규어(Figure)를 수집해 놓은 거야!"

이번에는 엘프 형상의 석상이 화살을 쏘려고 했다.

"하하! 장난하냐! 돌 활이 어떻게 쏘아지... 헉! 쏴지는구나! 젠장!"

쿠앙!

"후우! 후우!"

바닥에 반 이상 박혀버린 돌화살을 보면서 호크는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보통사람이면 겁을 먹거나 도망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호크는 정반대의 성격이니 그것이 문제였다.

한국에 있을 때도 아버지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팔자에도 없는 군사훈련으로 고통을 받았던가! 그 영향 때문인지 가끔 폭발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 역시 꼭지가 살짝 돌아간 상태였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보이네? 좋아! 해보자, 이거지? 이것들이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새삼스레 디안 협곡에서 부숴버린 K2 소총이 무지 그리웠다.

다행히도 석상들의 움직임이 그리 빠르지 않아서 호크는 석상의 발 사이를 요리저리 빠져나갔다.

하지만 모든 석상들이 다 움직이기 시작하자 움직일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게다가 석상들이야 먹지도 않고 잠을 잘 필요도 없으니까 상관없겠지만, 자신은 벌써 지쳐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마나를 쓰지 못하니 제아무리 뛰어난 체력을 가졌다고는 해도 근력으로만 버티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헉! 헉! 이것들 봐라? 내가 광장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잖아? 젠장! 느리다고 만만히 봤는데, 내 착각이었어. 어떻게 하지? 자자, 머리 좀 굴려봐라, 어서 생각해라!"

숨 가쁜 순간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호크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중이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라!'

아버지가 늘 강조하던 말이었다. 눈과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하면서 머릿속은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가만히 있던 놈들이 갑자기 움직였다면, 누군가 작동시켰거나 아니면 내가 동작하는 장치를 건드렸다는 얘긴데, 내가 이곳에 들어와서 건드린 것이... 응? 설마?'

호크는 뭔가 생각난 듯 등지고 서 있던 분수대를 뒤돌아봤다. 그랬더니 분수대의 여인상이 자신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설마하니 너였어?"

호크의 말을 알아듣는지 여인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환해진 호크는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다. 그럼 이놈들 좀 멈춰줄래? 그래줄 수 있지!"

하지만 석상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이자 호크는 애가 탔다.

"야! 야! 너무하는 거 아냐? 내가 어쨌다고 이러는 거니? 제발... 나 좀 살려주라. 으... 헥!"

그 와중에 드워프 모습을 하고 있는 석상의 돌도끼가 호크의 가랑이 사이에 떨어졌다.

"헉! 헉! X될 뻔했네!"

도끼를 피하려다 분수대 안으로 빠져버린 호크는 젖은 몸으로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도끼자루를 타고 드워프의 어깨에 올라탔다. 설마하니 제 몸에 상처를 내랴 싶어서였는데, 다행히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드워프 석상은 그저 손을 올려 호크를 잡으려 할 뿐이었다. 어깨에서 머리로 올라온 호크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움직였다.

"응? 뭐야, 이게? '드워프의 노여움을 멈추려면 이곳에 쥬(Ju)의 눈물을 떨어뜨려라' 눈물? 무슨 눈물? 젠장 할! 무슨 퀴즈 프로도 아니고 뭐야, 뚱딴지처럼."

호크는 드워프의 투구 부근에 있던 이상한 문양의 글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석상이 크게 요동치면서 호크의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그 문양의 가운데로 떨어졌다.

그그그긍~

그러자 그 순간, 석상의 문양에서 회색빛이 터져 나오더니 돌이 서로 맞부딪는 소리와 함께 움직임이 딱 멈춰버렸다.

"헉! 헉! 뭐야? 눈물, 물? 이런 분수대의 물을 말하는 거였어?"

실마리를 잡은 호크는 이제는 정말 석상이 되어버린 드워프 상에서 뛰어내린 다음에 분수대 물을 입에 머금고는 오크 석상의 다리에 매달려 올라탔다. 역시나 머리 부근에 같은 문양과 글이 있었다.

거의 반나절의 사투를 벌이고서야 호크는 모든 석상들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헉! 헉! 너! 두고 보자! 내... 가 잠... 깐만... 쉬었다가... 너... 죽었어!"

비틀비틀 분수대의 여인상에게 다가가던 호크가 기운이 다했는지 결국은 바닥에 쓰러졌다.

드르렁! 드르렁!

넓다란 광장 안이 호크의 코고는 소리로 진동했다.

"꺄악! 안 돼!"

"왜... 왜 그래요, 언니?"

"하아, 하아! 미... 미안해, 루니야. 놀랐지? 어서 다시 자렴. 깨워서 미안해."

"하~ 암! 언니도 참. 나쁜 꿈을 꿨나 보네. 아우우! 언니도 어서 자요, 우웅."

"그래. 호크님, 무슨 일이 생기신 거 아니죠? 아무리 꿈이지만, 너무 생생했어. 샹그릴라의 신들이시여, 저의 호크님이 무사할 수 있게 축복해주소서!"

깊은 밤, 잠 못 드는 여인은 캐더린 J. 아서 드모네이였다.

드르렁! 드르렁!

"커커컥! 누구야, 시끄럽게?"

자신이 뀐 방귀에 성낸다고 하더니, 자신이 골던 코골이가 시끄러워서 깨어난 호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멋쩍었는지 뒤통수를 긁더니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으~ 읍!"

우두득.

깊이 심호흡한 호크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스트레칭을 하자 뼈가 소리를 내면서 관절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지막으로 목 관절을 불량스러운 태도로 힘껏 꺾은 뒤, 뒷짐을 지고서는 말년군인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여인상에 다가갔다.

"흐흐흐! 너! 이 자쉭! 아니지, 이 석상아! 아, 됐어, 됐어. 그냥... 야! 너 정체가 뭐야! 생각 같아서는 그냥 조각조각 내주고 싶지만, 이 오빠가 마음이 좋아서 참는 거야! 알았어? 알았으면 여길 나가는 길이나 알려주라, 그럼 이뻐해 줄게, 응!"

초반에 힘 있게 나가던 깡패모드에서 결국은 비굴모드로 끝난 호크의 애원에도 여인상은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야! 이게 끝까지 너 정말 해보겠다는 거야!"

첨벙거리면서 분수대로 뛰어든 호크가 여인상에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갑자기 분수대의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빠지는 것이 아니라 소용돌이치면서 변기의 물 빠지듯 급물살이 일어났다. 호크도 물살에 휩쓸려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어푸! 어푸! 너 정말... 어푸! 주... 거서어어어어!"

쏴아아~

애처로운 호크의 목소리가 물 빠지는 소리와 함께 끝도 보이지 않는 지하로 사라졌다.

쩌저적!

물이 다 빠지자 분수대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광장 안에 있던 석상들도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무너져 내렸다. 항아리를 들고 있던 여인상도 금이 가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운명을 구원할 자여! 긴 시간 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부디 그분의 잘못된 길을 막아주시길 빕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부서지기 직전, 여인상에서 흘러나왔다.

그 직후, 넓디넓은 광장도 무너져 내렸다.

"으~ 아~ 아~!"

호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물줄기를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내려가는 것이, 마치 놀이동산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신나게 내려가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호크는 소리 지르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도대체 언제쯤 이 지겨운 통로가 끝날까? 젠장! 바닥이 물이어야 할 텐데. 이 속도로 맨땅에 착지한다면 그냥 죽사발이 될 텐데! 이럴 때가 아니잖아!'

바닥으로 떨어질 생각을 하자 정신이 번쩍 난 호크가 블레이드 한 자루를 빼어들고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브레이크 대용으로 바닥을 긁었다.

귀를 자극하는 거북한 소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호크는 팔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있는 힘껏 바닥에 블레이드를 꽂으려 힘을 주었다.

카카캉! 쨍! 캉!

"이런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럴 때 칼이 부러지다니! 제발 너는 더 버텨다오!"

하나 남은 블레이드를 뽑아서 바닥에 세웠다.

돌에 칼이 갈리는 소리와 불꽃이 튀면서 또다시 힘겨운 사투가 시작되었다. 결국은 호크의 손아귀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찢어졌다. 붉은 피가 검신을 타고 바닥에 혈선을 그리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꽃이 튀는 순간마다 드러나는 호크의 얼굴은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로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호크의 집념 덕분이었을까? 내려가던 속도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10분여를 더 내려오자 거의 멈춰 서게 되었다.

겨우겨우 검에 의지해서 몸을 일으켜 세운 호크는 경사가 처음보다 많이 완만해진 것을 깨닫고서는 두 발로 벽을 짚으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아주 조심스럽게 내려가기를 2시간여. 발밑이 밝아오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가진 호크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면서 천천히 내려갔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을 때까지 내려오자 호크는 머리를 거꾸로 해서 자신이 내려온 통로 밖을 내다보았다.

눈에 들어온 풍경은 아주 오래된 지하 동굴이었다. 온통 종유석과 석순들로 가득했고, 신기하게도 동굴 벽에는 수정인지 보석인지 모를 것들이 온통 박혀 있어서 마치 조명처럼 사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물과 함께 내려온 통로에서 동굴 바닥까지는 거의 60미터가 넘는 높이였다. 게다가 바닥에는 종유석들이 칼처럼 날카롭게 솟아나 있었다. 만약에 그냥 떨어졌다면 꼬치 신세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피던 호크는 왼쪽 편에 커다란 종유석이 기둥처럼 바닥까지 이어져 있는 석주(돌기둥)를 보았다. 그리고는 곧 유일하게 남은 검을 꺼내서 가지고 있던 밧줄을 검의 손잡이 고리에 단단히 묶었다.

두 발을 통로 벽에 단단히 고정시켰다지만, 벽이 물기를 머금은 상태이고 점점 다리의 힘이 풀리고 있어서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한 번의 기회밖에 없다고 판단한 호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중하게 검의 끝을 잡고 석주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센 후에 검을 있는 힘껏 석주에 던졌다.

그 바람에 호크의 몸도 동굴 바닥을 향해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라! 제발! 꽂혀라, 제발!'

휘이이익! 퍽!

다행스럽게도 검신이 반쯤 석주 기둥에 박혀 들었다. 순간, 중력의 법칙에 의해 밑으로 떨어지던 호크의 몸무게로 인해 검에 묶인 줄이 팽팽해졌다. 그리고 호크는 줄을 따라 반원을 그리면서 단단한 석주 기둥에 부딪혔다.

퍽!

"윽! 빌어... 먹을!"

제대로 부딪혔는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고통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손을 놓았다가는 그야말로 황천길이니, 새어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삼킨 호크는 말을 듣지 않는 왼손을 줄로 한 바퀴 감고서 발에 줄을 꼬은뒤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피 때문에 줄이 미끄러웠지만, 발을 잘 이용해서 천천히 내려갔다. 숨을 내쉴 때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어났다.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폐를 찌르고 있는 것이다.

목구멍으로 자꾸 넘어오는 비릿한 피를 계속해서 삼켰지만, 그래도 목이 막힐 정도로 출혈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자꾸 현기증이 밀려오면서 어지러웠다. 그냥 손을 놓아버리면 편할 텐데...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뭐 하러 이렇게 고생, 고생하는 건지. 이 손 놔버리면 힘들지도, 아프지도 않잖아'라고 누군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호크의 두 눈이 점점 감겨왔다. 위태롭게 잡고 있던 오른손에서 힘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뭐? 똑바로 살라며! 기왕 살려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놈이 겨우 이 정도에 포기하는 거야! 나한테 큰소리치던 그 기백은 어디 간 거냐! 너, 그 줄 놓기만 하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권 하사! 정신 못 차려!'

"헉! 하아~ 하아~ 제... 젠장! 이번에는 그 차가운 장군까지 나타나네. 절... 대로 안 죽는다! 내가 얼마나 악바리인데! 절대로 못 죽어! 이렇게는 하아, 하아~"

다시 몸에 힘을 준 호크는 힘겹게 긴 시간의 사투를 벌이고서야 겨우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다.

"겨우 살았구나! 정신 차려야 하는데, 이대로 잠들면 정말 죽는다. 여기 뭐가 있나 찾아보자. 후욱~ 후욱~ 응? 뭐지? 저기 사람이 사는 집 같은데. 가보자! 죽더라도 사람 사는 데 가서 죽어야지, 길바닥에서 죽을 수는 없지."

호크는 걷는 건지, 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구부러진 몸을 끌고 집처럼 보이는 건물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계단, 한 계단 걸음을 옮기던 호크의 몸이 결국은 차디찬 돌계단 위로 쓰러졌다.

호크의 손과 입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가 돌계단 위로 떨어져 내리자, 오랜 가뭄에 말라버린 대지 위의 빗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스며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어느 순간, 호크의 피를 한껏 빨아들이던 돌계단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그긍-

기계음 소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처럼 계단이 위로 움직였고, 호크의 몸도 계단 위로 올라갔다.

계단 위로 올려진 호크의 몸이 이끼로 가득 뒤덮인 건물의 입구로 굴러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구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호크를 집어삼키고 문은 말없이 닫혔다.

"하아! 하아! 아직은 안 죽는다! 아직 아니다, 이놈들아! 좀 더 기다려야 할 거야. 후욱~ 후욱~"

굴러떨어진 충격으로 정신이 든 호크는 귓속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저승사자들이 자신을 데리러 온 거라고 생각하고 악을 쓰면서 몸을 일으켰다.

"후욱~ 후욱~ 여긴 또 어디지? 아까 계단 밑에서 봤던 건물 안인가? 젠장! 더럽게 어둡네. 세상에... 이렇게 어두운 곳이 있다니."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인간의 눈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어둠에 적응해서 주변을 볼 수 있건만, 어떻게 된 것이 지금 호크가 있는 건물 안은 그야말로 어둠 그 자체였다.

꽤 오랫동안 있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호크는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호크는 손에 만져지는 벽을 의지해서 걸어 나갔다. 계속해서 걷다가 벽이 끝나면 꺾어진 벽을 더듬어서 돌고 돌아서 앞으로 나갔다. 자꾸만 쏟아지는 잠도, 귓속에서 울리는 웅웅거림도 이겨내며 호크는 사랑하는 캐더린을 생각하면서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나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한 호크 앞에 희망의 불꽃이 나타났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한 어둠 속에서 하얀빛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다, 빛! 후아~ 아직 죽으란 소리는 아닌 거 같군. 설마 저승길은 아니겠지?"

눈이 부셔 한 손으로 눈앞을 가리고 빛 안으로 들어선 호크의 귀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하하! 이것 보라구, 내 말이 맞았지! 크하하하하!"

"이런 젠장, 이게 좋아할 일이냐구요!"

"그럼 좋아할 일이지, 이제 이 지겨운 기다림이 끝나는 순간이지 않은가.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으하하하하하!"

"하여간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분이시라니까요?"

눈부시던 주변 환경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자 호크는 두 눈을 가렸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호크의 앞에는 도서관 같은 방 안에 한 노인과 젊은 남자가 예전 그리스 로마 시대의 복장을 입고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사람을 보게 되자 호크는 이제야 살았다 싶었다. 정말이지 사람이 이렇게 반가워 보기는 처음이었다.

"저... 저기... 죄송한데 물 좀 얻어......."

"이런, 이런! 로테니어스, 자네는 사고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누누이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이것 보게, 가능성에 대한 나의 논리가 들어맞지 않았는가? 하하하하!"

"저... 저기 제가 좀 다쳐서 그러는데 물과......."

"가능성은 무슨 가능성이요! 만일 저자가 인간이 아니라 오크나 오우거였어도 그런 말씀을 하시겠어요?"

"헉! 오... 오크? 흠흠! 뭐, 그럴 경우의 수는 거의 가능성이... 희박한데. 흠, 그럴 때의 논리의 수는......."

"아이쒸, 이런 xxxx같은 것들이 있나! 야, 이것들아! 사람 다쳐서 피 흘리는 거 안 보여! 뭐 이런 쉐이들이 있어! 이... 윽! 아우윽!"

자신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흥분한 대가로 호크는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에 숨을 헐떡거려야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결국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졌다.

"흠~ 특이한 반응을 하는 청년이로군. 흠흠, 이것 또한 예상하지 못한 경우인데, 참으로 당혹스럽군!"

"에휴! 아레네스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어쩌실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정신상태가 좀 위험스런 인간 같은데, 아레네스님의 안배를 이자에게 맡기실 건가요?"

"흠흠! 뭐, 인간의 성격이야 천차만별 아니겠는가? 더구나 문제가 있는 인간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네. 보아하니 쥬(Ju)의 눈물을 마셨나 본데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가? 내가 기다려왔던 사람일세. 이런, 이런! 이 보게나, 상세가 위태롭구먼. 화를 낼 만도 하네. 하하하하!"

"참내, 저도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아레네스님의 부탁 때문에 일천 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지낸 걸 생각하니... 에휴~ 좋습니다. 어쨌든 빨리 끝내고 이제 저희들의 공간으로 돌아가죠. 너무 오랫동안 비워두었습니다. 이유야 어떻게 됐건 이자부터 살리죠!"

로테니어스라고 불린 청년이 호크의 몸 위에 손을 올리자 손에서 하얀 빛 무리가 쏟아져 내려왔다. 빛 무리가 호크를 에워싸자 서서히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오~ 이렇게 순순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있다니, 놀라운데요. 끊어진 생명의 오라만 붙잡아주면 되겠네요. 흠, 아니지! 어차피 말 같지도 않은 운명에 휘둘리게 되었으니 선물이나 하나 줄까나?"

하얀 빛 무리에 노란 빛 무리가 더해지자 호크의 몸은 수증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으... 으... 허억~!"

"하하하! 이제야 신수가 훤해졌군. 그래, 이제 다친 곳은 다 치료가 됐네. 기분은 좀 어떤가?"

'이럴 수가! 찢어진 손이 멀쩡하잖아. 그리고 가슴의 통증도. 아무리 신관들이라도 이렇게 빨리 치료하지는 못할 텐데!'

"너... 넌 누구냐!"

"넌 누구냐? 허 참! 이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서 감히!"

"어허, 그만 로테니어스! 자, 이제부터 이 할애비하고 이야기 좀 해볼까나? 자네 이름이... 권... 혀... 크! 뭐야, 이름이 왜 이리 어렵나? 응... 아! 호크! 그래, 그렇구먼. 호크라... 좋아. 이것은 좀 쉽구만!"

"어... 떻게... 당신들, 뭐야?"

너무 놀란 호크가 경계 자세를 취하면서 눈앞의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등에 손을 가져갔지만, 두 자루의 블레이드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다. 어느새 뒤쪽의 벽까지 밀린 호크가 메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하하하! 이렇게 대화하기 힘들어서야. 자, 그만 놀라고 이리 와서 앉게나!"

노인이 손짓을 하자 의자가 돌려지고, 호크의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붕 날아서 의자 위에 올려졌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장난 같은......."

"자자! 무릇 대화란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나누어야 제 맛이지. 안 그런가? 하하하!"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고, 저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그렇지. 대화란 자고로 이렇게 오고 가야지. 하하하! 그럼 내 소개부터 할까? 우리는 신계에서 살고 있는... 아니지, 살았던 아레네스와 로테니어스라고 하는 하급 신일세. 나는 수와 통계를 좋아하고, 저 친구는 생명과 부활에 관심이 많은 신일세. 하하! 뭐, 신이라고 해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허허! 이 친구, 그렇게 부담스럽게 존경스런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는데......."

아레네스는 착각을 크게 하고 있었다. 호크의 눈빛은 결단코 존경의 눈빛이 아니었다.

'뭐야? 이것들은 신이라고? 미친 거 아냐? 하... 이런, 어쩌다가 이렇게 재수 없게.......'

뭐, 대충 이런 마음이었다. 물론 이들의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에 아무런 소리 없이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아레네스님, 이자가 결계를 움직였으니 우리들이 돌아갈 문도 곧 열릴 겁니다. 빨리 끝내시죠!"

"아차, 그렇지. 흠흠, 오랫동안 이곳에 봉인되어 있다 보니 기억이 가물가물 하구만. 아무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게. 이것은 자네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될 걸세.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할지는 자네 마음이지만, 운명의 시계는 결코 멈추지 않고 돌아갈 테니까 인간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인 셈이지. 그럼 그 누구도 몰랐던 신들의 추잡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잘 듣고 어떻게 할지 자네가 판단하길 바라네."

호크는 대체 눈앞의 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런 호크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신이라 칭한 이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폴렌시아는 신계의 신들 중 주신이신 쥬(Ju)님이 창조하신 세계네. 물론 에게니아 해(海) 너머의 뮤슐란이나 그 너머의 수많은, 알려지지 않은 곳 또한 그분의 작품이시지. 그분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사랑하셨네. 다른 신들과 달리 자신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잊지 않으시고 항상 눈여겨보셨지. 그런데 그 관심이 좀 지나쳐서 이 폴렌시아를 사랑하시게 되었네. 굳이 말하자면 인간들에게 애정이 생겼다고나 할까? 뭐, 자신의 창조물들을 좋아한다는데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문제가 좀 생기게 되었지."

"문제라뇨?"

어느새 그의 말에 빠져든 호크는 바로 되물어보았다.

"흠흠, 그것이 바로... 그분의 아내가 되시는 미르네보님의 질투심를 폭발하게 만들었거든?"

"하하! 웃기네요. 신들도 결혼하나? 아내가 있게. 그리고 무슨 신이 질투를 하나요? 그것도 하찮은 인간들에게 말이에요. 좀 엉뚱한 이야기 아닌가요?"

호크의 비꼬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레네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하간 미르네보님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게 되었지. 자신을 내팽개치고 저 한없이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들에게만 관심을 쏟는 그분에 대한 분노가 그 애정의 대상인 인간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네.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미르네보님은 그 첫 번째 복수극의 시작으로 스스로 소멸하려 했지. 물론 속임수였지만, 그분께서는 엄청나게 놀라셨지. 그리고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이라고 판단하시고 인간에게 관심을 갖지 않겠다고 그녀에게 맹세했지. 당신께서도 이제는 그녀가 모든 것을 용서했을 거라 생각하셨지만, 그것은 정말이지 착각이었어.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해나갔네. 일단 인간들에게서 그분의 관심을 돌리자 자신의 발아래 꿈틀거리는 인간들의 존재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그분 모르게 서서히 일을 꾸몄다네. 그것이 바로 네 개의 낙인과 성스런 돌이네. 성스런 돌이 세상 밖으로 움직이는 날, 네 개의 낙인이 출현할 것이고, 그것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일 때 폴렌시아의 인간들은 종말을 맞이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지.

이 모든 것이 미르네보님의 인간에 대한 일종의 복수심이랄까? 미르네보님은 그분의 믿음이 가장 강한 곳인 샹그릴라에 성스런 돌을 내려 보냈지. 그리고 잔인하게도 종말론까지 신탁이랍시고 인간들에게 알렸다네."

"이상하네요. 정말 인간들을 없애버리고 싶다면 뭐 하러 그런 사실을 알린 거죠? 그냥 놔두면 될 텐데?"

"하하하! 그게 바로 진정한 복수의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자네도 생각해보게. 인간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알고서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나! 바로 그것까지 생각한 것이지. 그나마 똑똑한 인간들이 그 사실을 숨기고 지금까지 버텨왔네만, 이제 운명의 시계가 돌기 시작할 거야. 그럼 모든 게 끝이지! 안타깝게도 말이야."

"그럴 수가! 여자의 질투란 정말 무섭군요. 그렇다면 이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고 인간들끼리 힘을 합쳐서 운명을 이겨내야죠!"

"큭큭큭! 이보게, 신이란 존재가 그렇게 어리석은가? 영악한 미르네보님은 신탁을 내릴 때 한 가지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네. '성스런 돌과 네 개의 낙인을 모은 자는 그 운명에서 벗어날 것이며, 그자의 땅과 백성들은 자손대대로 번영하리라'라고 말이야. 아마도 왕국이나 제국의 고위층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걸세. 그러니 네 개의 낙인 중 하나라도 출현하게 되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될 거야. 그 또한 인간들끼리의 상잔을 즐기려는 미르네보님의 계획이고 말이야."

"이... 미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쥬(Ju)라는 주신은 그냥 수수방관했다는 말입니까? 자신이 창조한 세계이니 자신이 책임을 져야...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네요!"

"그게 그럴 수밖에 없네. 영악한 미르네보님이 그분에게 신의 언약을 얻어냈기 때문이야. 신의 이름으로 약속하면 그 어떤 존재든지 자신이 약속한 바를 어길 수가 없게 되네. 만약 어기게 되면 그 순간 바로 소멸하게 되지. 인간이 죽음을 싫어하듯 신 또한 소멸되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

"결국 욕심 많은 인간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마차를 돌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군. 무섭네요."

"그렇지, 바로 그것이 내가 말하려는 바이네.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욕심에 눈이 먼 제국이나 왕국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는 예언을 통해 오히려 폴렌시아를 장악하려 할 테니까 말일세.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형제에게까지도 칼을 들이대는 족속들이니 말이네. 아! 미안하네. 자네도 인간인 걸 잠시 잊었구먼. 허허!"

"아뇨, 뭐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없는 말 하는 것도 아닌데요. 그건 그렇고, 이런 말을 저에게 해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이것이 너의 사명이다!' 하고 '이 재앙을 막아내라!' 뭐, 이런 건가요?"

"허허허! 이해가 빠르구먼. 뭐, 대충 비슷하네. 그분이야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다른 신들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불만이 많다네. 그래서 우리 하급 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몇몇이 이 폴렌시아를 살릴 방법을 모색했지."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래도 싸가... 아니, 흠흠! 정의로운 신들이 계셔서요."

"그... 그래. 싸... 아... 는 아니고, 정의롭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폴렌시아의 소멸을 지켜볼 수 없는 우리가 몇 가지 안배를 준비했다네."

"그게 뭔가요? 그냥 미르네보를 절단 내면 안 되나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게. 그녀는 주신급이란 말일세. 우리 같은 하급신은 그녀의 눈 부라림에도 한순간에 소멸할 걸세."

마치 눈앞에 미르네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레네스는 진땀을 닦아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 안배란 다름이 아니고, 어차피 운명의 시계를 멈출 수는 없네. 그만큼 그녀의 준비가 대단한 것이어서 말이지. 그렇다면 그 성스런 돌과 네 개의 낙인을 우리가 안배한 사람이 모두 회수하고 예언을 실행시키지 않고 파괴시키는 거야. 그렇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셈이지."

"흠, 그런데 예언이 실행되지 않아서 화가 난 미르네보가 다시 복수하려 들면 어떻게 하지요?"

"흘흘, 걱정 말게나. 그것이 언제 이야기인데, 벌써 미르네보님도 다 잊은 일일 테고, 설사 아직까지 마음에 앙금이 남아 있다고 해도 그녀 역시 신의 언약을 했기에 이제 두 번 다시 폴렌시아에 손을 댈 수가 없다네. 알겠나?"

"네. 대충 이해는 하겠는데요, 그런데 저보고 지금 그 모든 것을 하라는 이야기인가요? 저 혼자 어떻게 그 많은 왕국과 제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이 예언을 무산시키라는 것인지... 좀 황당하잖아요?"

"크크크! 염려 말게. 그러니 우리가 안배라고 하지 않았겠나. 자네가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놓았다네, 호크 군! 하하하하! 자네가 승낙만 한다면 말이야!"

"젠장! 생각하고 말 것도 없죠. 이제 겨우 집 장만하고 살 만한가 했더니 이 땅덩어리가 지옥으로 변한다는데, 모른 척할 수야 없죠. 더구나 결혼이 모렌데... 좋습니다! 제가 맡죠. 줄 거 있으면 빨리 주세요!"

"크하하하! 시원시원하구먼! 좋아, 좋아! 이보게, 로테니어스! 준비된 것을 이 녀석에게 넘겨주게나."

"에휴! 자, 잘 들어라, 어리석은 인간이여! 이것은 혼돈과 파멸의 블레이드, '카오스 오브 제로(Chaos of Zero)'라고 불리는 블레이드다. 검의 손잡이와 연결된 맹세의 사슬이 검의 주인과 영적으로 연결되지. 이 쌍검은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 자네가 네 개의 낙인을 깨어버릴 때도 필요하지만, 적들과의 싸움에서도 무적의 힘을 자랑할 걸세. 자! 받게나."

팟.

허공에 갑자기 2개의 붉은 블레이드가 둥둥 떠올라서 호크의 앞으로 다가왔다.

호크가 손을 내밀자 쌍검이 마치 여인네가 흐느끼듯이 호곡성(號哭聲)을 내더니 호크의 머리 위에서 급격히 원을 그렸다. 검의 손잡이에서 황금빛 사슬이 튀어나와 호크의 양손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고통에 호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으... 으윽! 이! 왜 이러는 거야! 으... 윽!"

"참아내야 해! 여기서 버티지 못한다면 자네는 검의 주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숨마저 잃게 돼!"

"후아, 후아, 으드득!"

거친 숨소리와 이가 갈리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어느새 호크의 두 눈이 시뻘겋게 피로 물들었고, 전신은 땀으로 뒤덮였으며 서서히 한쪽 무릎이 굽혀 들어갔다.

그런 호크를 지켜보던 아레네스는 '이자도 틀렸군'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러나 곧 터져 나오는 욕설에 아레네스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런 쓰파! 헉헉헉~ 죽는 줄 알았네!"

어느새 호크의 두 손에 혼돈의 블레이드가 들려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호크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요동치던 검은 호크가 악을 쓰면서 움켜잡자 가냘픈 소리를 내면서 점점 그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후아! 뭐 이런 게 다 있나? 자자, 착하지? 그만하렴."

마치 사람을 달래듯이 검을 어루만지는 호크를 보면서 아레네스는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크게 웃어댔다.

"크하하하하! 정말이지,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보았다니까! 자자, 중요한 의식이 끝났으니 이제 사소한 것들을 살펴보러 가지. 모든 것이 자네를 위해 준비된 것들이네. 자, 따라오게."

아레네스를 따라가는 호크의 뒷모습을 살피는 로테니어스의 두 눈이 순간 뱀의 눈처럼 변했다가 사라졌다. 호크와 아레네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로테니어스도 어느새 이전의 얼굴로 돌아와서 그들을 따라서 사라졌다.

"이... 이게 뭡니까? 모두 황금 아닙니까? 이걸 다 내게 준다는 거예요?"

"그... 그렇지. 다 임무 수행에 필요한 자금이라고 할까?"

"그런데 표정이 굉장히 아까운 얼굴인데요? 신들은 이런 거에 초탈한 존재 아닌가요?"

"흐어업! 흠흠! 아... 아깝다니! 그 무슨 말을... 전혀 그렇지 않네. 다음 방으로 가지!"

'흠, 이상하단 말이야. 처음부터 좀 수상했는데 신들과 황금이라... 그리고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아까 그 황금을 쳐다보던 눈은 탐욕에 불타오르는 눈길이었는데.......'

"자! 자! 이곳에서 필요한 것을 골라보게나. 아무리 무서운 혼돈의 블레이드를 자네에게 주었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울 테니 이 석실에서 다른 좋은 무구를 찾아보라구!"

"세상에! 이거 완전히 고철 수집장이네. 도대체가 뭐 하러 이렇게나 많이 쌓아둔 거야!"

지금 막 호크가 들어선 방에는 검과 창, 방패들이 천장에 닿을 만큼 가득했다. 그 양이 얼마나 많은지 호크는 둘러보기도 전에 질려버렸다.

아레네스는 검과 창을 들어 보이면서 폴렌시아에서 가장 귀한 무구들이라고 침이 튀도록 떠들어댔지만, 애초에 그런 무기에는 흥미가 없던 호크로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혼자서 열을 올리는 아레네스를 뒤로하고 좀 더 안으로 깊이 들어간 호크는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황금갑옷과 방패들 사이에서 빛나는 물체를 발견하고는 빛을 내며 반짝이는 그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석궁이었다. 자신의 K2 소총을 부숴버린 후, 허전함을 느꼈는데, 지금 손에 들린 석궁이 그 허전함을 대신해줄 좋은 무기 같았다.

호크가 방아쇠 걸쇠를 생각 없이 당기자,

핑~

퍽!

찰칵!

화살 한 발이 발사되었고, 소리와 함께 화살이 석실 벽에 반절 가까이 파고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밑에서 기계음이 나면서 화살 한 발이 자동으로 장전되었다.

놀란 호크가 석궁을 뒤집어보니 석궁의 뒤 개머리판에 O자 모양으로 생긴 원통형의 카트리지가 달려 있었다. 카트리지의 홈 밑 부분을 누른 후, 오른손으로 석궁의 뒷개머리판과 흠을 이루는 윗부분을 잡고 석궁의 연결 바를 꺾어주니 카트리지가 분리되었다. 이렇게 장전하는 데 힘이 들지 않게 만들어져 있었다.

현의 중심을 방아틀에 정확하게 고정시켜주며, 카트리지 타입이라 표적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연사가 가능했다. 게다가 가벼워서 휴대가 편하고 조준선 정렬이 제법 그럴듯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현대의 소총 같은 느낌이 났다.

이런 중세시대에 이 정도로 과학적인 무기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호크는 혹시나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넘어온 것이 아닌지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만질수록 손에 '착착' 감기는 맛이 예전 K2를 생각나게 했다. 호크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그 석궁을 들고 걸어 나왔다.

"호오~ 그것은 썬더버드(Thunder Bird)로군. 흠, 꽤 유명한 크로스보우(석궁)이기는 하네만, 아무래도 기사라면 검이나 칼이 더......."

"썬더버드라! 정말 이놈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걸로 하겠습니다! 손에 감기는 맛이 딱인데요!"

"끙~ 뭐, 좋네! 어차피 직접 상대하는 것은 자네니까 자네 마음대로 하게나. 자! 이제 무기에 자금까지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폴렌시아의 미래는 자네 손에 달렸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그리고......."

"저기... 그런데 저 뒤의 녹색문은 뭡니까? 뭔가 예사롭지 않은 문양을 보니 대단한 곳 같은데요!"

"노... 녹색 문이라니? 헉! 아무것도 아닐세. 그냥 차... 창고라고나 할까? 허허허!"

아레네스의 멋쩍은 웃음에 호크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요? 그렇다면 한번 둘러봐도 괜찮겠네요?"

"이... 이... 보게, 그곳은 안 되네. 안 돼!"

미처 말리거나 할 사이도 없이 호크는 문을 열고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레네스 또한 방 안에 숨겨놓은 맛있는 음식을 들킨 아이처럼 허겁지겁 방 안으로 뛰어 들었다.

"아우~ 냄새! 뭐지, 이 썩는 냄새는?"

방 안에는 온통 화학 실험도구로 보이는 자재들과 비커 비슷한 유리병 속에서 온갖 약물들이 끓고 있었다. 호크는 괜히 들어왔다는 생각에 코를 막고서는 몸을 돌렸다.

"하하하! 거 보게나. 내가 별거 없다고 했지 않은가? 어서 나가세."

막 밖으로 나가려고 책상을 지나치던 호크는 책상 위에 있는, 고급 양피지로 된 책 한 권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객식구인 사이클론 영감이 애지중지하는 마법 책과 무척이나 비슷하게 생긴 책이라는 생각이 들자 호크는 재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쨍그랑!

쉬이이이익!

호크는 마치 실수인 것처럼 약물이 담긴 유리병을 손으로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유리병이 깨지면서 노란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고, 아레네스는 대경실색하여 주문을 외우듯 입을 달싹였다. 그와 동시에 노란연기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론 책상 위에 있던 책도 호크의 품속으로 사라졌지만, 약병이 깨지는 소동에 아레네스는 미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지하 석실들을 다 둘러본 후, 처음의 방으로 돌아온 아레네스와 호크는 한동안 긴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아레네스가 한 말은 예언이 발현될 때의 징후라든가 낙인이 어떻게 나타나고, 또 그것을 파괴하는 방법 등이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기에 이때만큼은 호크도 최대한 집중했다.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나자 아레네스는 오랜 세월 살아온 신처럼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네. 단순히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른 이의 생명을 함부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오랜 세월 그것을 막기 위해 준비했고, 그 적임자에게 이렇게 안배를 넘기고 나니 이제 편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네. 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지만, 모든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게나. 자! 그럼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도록 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의 시계는 다시 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네! 그럼 호크라는 젊은이여! 그대에게 쥬(Ju)의 은총과 가호가 늘 함께하길 빌겠네."

그 말을 끝으로 호크는 하얀 빛 무리에 휩싸인 채 사라졌다.

호크가 사라지자 석실로 사라졌던 로테니어스가 나타났다.

그러나 처음 호크를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나 모습이 사뭇 달랐다.

"베로니크님! 너무 저 인간을 믿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저는 왠지 저 인간에게 저희가 준비한 안배를 넘겨준 것이 불안하기만 합니다!"

"크크크! 테라토니어스! 모든 것은 그 빌어먹을 미르네보 때문이야! 그년이 우리에게 금제를 걸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았어. 크으윽!"

얼마나 세게 입술을 깨물었는지 이빨에 짓눌린 입술이 터져 나갈 듯했다.

"그 녀석이 우리가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따라줄까요?"

"하하하! 그렇지 않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언제 거짓말을 했나? 예언은 사실이니까. 하나하나 밝혀낼 때마다 내가 해준 이야기가 사실인 줄 알고 더욱 열심히 낙인(스티그마)을 찾아내서 파괴하겠지. 그리고 마침내 저 녀석이 성스러운 돌을 끝장내면, 천 년 넘게 우리의 목을 죄어온 족쇄가 풀린다, 이 말씀이야! 크하하하하하!"

"그렇기는 하지만, 저희 동족 백 명을 희생하고 얻은 혼돈의 블레이드를 저런 인간 따위에게나 주다니, 화가 납니다!"

"큭큭큭! 이봐, 테라토니어스. 정 그렇다면 일이 끝나고 나면 자네가 직접 저 호크인지 하는 녀석의 심장을 꺼내 먹으라고. 크하하하하! 그러면 속이 시원하겠는가?"

"심장이라... 놈은 제법 마나가 충만하던데, 그렇다면 저희가 세상에 다시 나간 기념으로 제일 먼저 시식해주어야겠군요. 하하하하하!"

"그래그래! 크하하하하! 중간계의 균형자인 우리 드래곤이 이렇게 지하의 땅속에 처박힌 채, 천 년을 넘게 치욕 속에서 몸을 사리고 지내오다니! 이전 로드께서 아시면 그 영혼이라도 편치 못할 걸세. 내 반드시 다시금 우리 드래곤의 위대함을 알릴 걸세. 예언이 파괴되는 날! 이 폴렌시아뿐만 아니라 그동안 우리를 핍박해온, 가증스런 저 존재들에게 우리 일족의 무서움을 알려주어야겠지."

"크크크! 맞습니다, 베로니크님! 무려 천 년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그것도 거의 완성되었고, 좀 전의 그 아이가 쥬(Ju)의 운명의 길을 무사히 통과해온 놈이 맞는 이상, 우리의 바램처럼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겠지요. 그리고 그 마지막 날, 이 폴렌시아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겁니다! 크하하하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지하 석실에 크게 울려 퍼졌다.

번쩍!

쏴아아악!

순식간에 텔레포트하여 숲속에 나타난 호크는 여전히 마법에 어색한 모습이었다.

"우욱! 제길! 이놈의 울렁증은 여간해서 적응이 되지 않는구먼! 후우~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드래곤인가 뭔가 하는 산 근처면 좋겠는데. 다들 걱정을 많이 할 텐데. 에휴~ 또 다리품을 팔아야겠군. 방향을 어떻게 정하지?"

"흑흑흑!"

"응? 뭐지? 어디서 울음소리가...? 저 바위산 너머인 거 같은데, 왠지 목소리가 익은데?"

호크는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가볍게 바위산을 넘는 것이, 몸놀림이 예전보다 더 가벼워진 이유는 로테니어스가 부여해준 능력이 그를 더욱더 강하게 변모시켜준 것이 틀림없었다.

"흑흑흑! 백작님!"

"제길! 모처럼 좋은 주군을 만났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가시다니......."

"호크야! 이 녀석아! 정말 죽은 거냐? 왜 대답이 없느냐? 허!"

산사태의 영향으로 흙더미에 묻힌 숲 한 귀퉁이에 10여 명의 사람들이 돌무덤 앞에 오열하고 있었다.

가볍게 바위산을 뛰어넘은 호크는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하자 너무 기뻐 한달음에 일행들에게 뛰어갔다.

"흑흑흑!"

"왜 그러는데? 누가 죽기라도 했어? 대충 보니 있을 사람 다 있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이야? 누가 장난하는 거야, 지금 백작님의... 으악!"

"헉! 왜 그래, 핸들러! 무슨 일이야?"

"유... 유령이다."

"엉?"

"아니, 백작님! 살아계셨군요!"

"백작님이 돌아오셨다! 우와!"

갑자기 나타난 호크의 출현에, 일행은 호들갑을 떨면서 기뻐했다. 사연인즉, 산에서 폭발이 일어난 직후에 일행들은 즉각 이곳에 와서 수색을 펼쳤지만, 호크의 머리카락 한 올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호크의 배낭이 발견되자 일행들은 호크가 미처 폭발을 피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서는 이렇게 임시 무덤을 만들었던 것 이다.

"젠장! 멀쩡한 사람을 두고 웬 무덤이야! 재수 없게시리 헉! 아... 읍! 답답해요! 이것 좀 놔요, 영감! 아니, 할아버지! 켁켁!"

"이 녀석아! 십년감수했단 말이다! 네 녀석이 죽었다면 나는... 나는......."

"아유~ 또 눈물이시네. 이것 참!"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사이클론의 따뜻한 마음을 호크가 모를 리 없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오자 호크는 서둘러 분위기를 바꿨다.

"자자!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서둘러라! 이러다가 주인공도 없이 파티가 시작되겠어."

백작 수여식에 늦을 것을 염려한 호크가 재촉하듯이 말하자 핸들러가 밝아진 표정으로 말고삐를 돌렸다.

"네, 백작님! 에밀, 피터슨, 뒤를 맡아! 선두! 출발!"

주인공이 돌아오자 일행들도 기운을 얻고 힘차게 출발했다. 산사태로 길이 막혀서 결국은 빙 돌아서 가야 했지만, 엄청난 사고에도 다친 사람 하나 없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따가닥! 따가닥!

"......."

짐마차 뒤를 따라가던 호크는 마차 짐칸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는 꼬마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그러자 꼬마도 호크에게 마주 웃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과 똑같이 사악한 미소를 흉내면서. 자고로 자신이 하면 좋은 것도, 남이 하면 보기 싫은 것이 간사한 인간의 마음이다.

'저... 녀석이......!'

괜히 부아가 치민 호크가 어디 이것도 해봐라 하는 식으로, 건들거리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 모습에 한동안 놀란 표정을 짓던 꼬마가 잠시 고민하더니 호크보다 더 건들거리면서 완전한 양야치의 침 뱉기를 재연해내자 호크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저... 저게!'

발작하려는 순간, 사이클론의 혀 차는 소리에 호크의 정신이 돌아왔다.

"에잉! 그 녀석 하고는. 애하고 싸우냐, 어른이! 쯧쯧쯧."

"아니, 그게 아니고. 젠장! 스타일 다 구기네. 그런데 왜 저 녀석만 보면 화가 나지? 이상하네?"

꼬마는 이제 아예 마차 난간에 엉덩이를 걸치고서는 호크를 향해 생글거리면서 웃고 있었다.

"얌마! 너 이름이 뭐냐?"

"저... 저요? 그러니까 제 이름이......."

"뭐야! 너 바보냐? 자기 이름도 모르게!"

"저... 그게... 흠흠! 아! 스톤(Stone)이에요, 스톤!"

"그래? 바보 맞구먼, 돌이라고 돌머리 하하하하!"

"이익! 그런 돌이 아니라구요. 바로 성......."

"성? 성 뭐!"

"그게... 아니, 그게 아닌데. 그런 것이 아니고......."

"아, 아! 됐어!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니까! 그런데 너 왜 자꾸 나한테 얽히는 거니? 너, 가출한 거 맞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스톤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벌떡 일어나면서 핏대를 올렸다.

"돌머리도 아니고, 가출한 것도 아니에요! 전 위대한 모험가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아저씨의 무용담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소문에 듣기론, 아저씨는 어린 소녀를 구하기 위해 백 명의 다크 문 악당들과 맨손으로 싸웠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에휴! 나 원, 이놈의 인기는. 이 폴렌시아에서도 식을 줄을 모르는구먼. 그래! 스톤이 아니구 스토커구나? 아 참! 너 신관 아냐? 그렇게 막 돌아다녀도 되는 거냐?"

"백작님! 샹그릴라의 신관들은 저 나이가 되면 고행의 수행길에 오릅니다. 세상을 돌면서 경험도 하고 위대한 쥬(Ju)의 이름을 알리는 수행을 하는 거죠. 하지만 그런 수행 길에는 선행 수도사가 인솔하게 되어 있는데, 아마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습니다. 수도에 가서 그곳 신전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호크 옆에 있던 에밀은 아카데미 교관 시절 주워들은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흠! 그럴듯하구먼. 좋아! 그럼 에밀이 기왕 말을 꺼냈으니 수도에 도착하면 저 꼬마 일을 알아봐. 아무래도 집 나온 애를 데리고 있는 기분이어서 영 그렇단 말이야!"

제법 기분이 상했는지 스톤이 마차 안에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고 있었다. 어린애를 울렸다고 생각하자 호크도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야! 꼬마야! 뭐라고 그랬지? 야! 스톤! 어이, 스톤! 내 뒤에 탈래? 마차 안에만 있으니까 답답하지? 싫으면 말고, 그럼 나 간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요. 정말 태워줄 거예요?"

"그래. 어쨌든 내가 놀린 죄가 있으니 뒤에 타라. 한번 달려줄 테니!"

"넵! 야호!"

역시나 아이는 아이였다. 그새 기분이 풀어진 스톤은 호크가 제법 속도를 내서 말을 달리자 연신 환호성을 질렀다. 일행들도 간만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붉게 물든 저녁놀이 행렬을 따라서 저물어갔다.

타다닥! 타닥!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기분 좋은 소리를 자장가 삼아 어느새 스톤은 모포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말없이 스톤의 머리를 매만지던 호크는 갑자기 등 뒤에서 혼돈의 블레이드가 진동하자 소스라치게 놀랬다.

"뭐야! 적인가? 아닌데? 주변은 조용하기만 한데. 왜 이러지, 도대체?"

호크가 한 자루를 뽑아들자 붉게 물든 검신의 가운데가 마치 타오르는 듯 불꽃이 일렁이면서 뜨거워졌고, 검신은 계속해서 요동쳤다.

'우욱! 왜 이래, 정말! 자자! 진정해라, 진정해. 벌써부터 나랑 이렇게 호흡이 맞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고! 진정해, 제발! 이 녀석! 너 자꾸 이러면 너하고 끝이다! 으윽!'

호크의 마음이 전달되기라도 한 듯이 요란하게 떨리던 검신과 붉게 타오르던 빛이 사그라졌다.

'후아! 십년감수했네. 보통 검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이 왜 이렇게 흥분했을까? 마치 무슨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말이야. 뭐야, 혹시? 이 꼬마가 싫은 거냐? 하하하! 나도 미쳤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는 그렇게 흥분하지 마라. 알았지!'

블레이드에 살며시 입맞춤을 해준 호크가 다시 검집에 검을 도로 집어넣자, 언제 다가왔는지 사이클론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예사로운 기운이 아니구나. 산에서 얻은 물건이냐? 아무래도 불길한 물건 같다. 가까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아! 영... 아니, 할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조용해지면 이야기할 게 있었는데, 조용한 곳으로 옮기죠."

호크의 조심스런 태도에 사이클론이 호크의 모닥불 주변에 마법으로 결계를 펼쳤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닥불 주위로 갈색의 마나가 마치 텐트를 친 것처럼 둥그렇게 모닥불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하하! 아무리 봐도 마법이란 게 참 신기하네요? 정말 주변에는 안 들리나요? 이봐, 핸들러? 에밀 바보! 멍청이! 삼식이!"

"아이고, 머리야! 이 녀석아, 장난 그만하고 할 이야기가 뭐냐?"

"헤헤헤! 참내, 역정 내시기는. 다른 게 아니라 그 산속에 동굴이 있었는데 말이죠."

한 30여 분간 호크와 사이클론의 긴 이야기가 끝나자 사이클론은 매우 굳은 표정으로 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었다. 호크는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스톤이 걷어 차버린 모포를 덮어주고 모닥불에 나무를 더 집어넣었다.

순간, 어느새 턱까지 괴고 고민하던 사이클론이 '탁' 하고 무릎을 쳤다.

"깜짝이야! 거 미리 말 좀 해요. 사람 간 떨어지겠네."

"그래! 쥬(Ju)의 눈물! 그 이야기가 바로 네가 말한 예언이었구나! 세상에 그 무서운 사실을 샹그릴라에서 비밀에 붙이고 있었다니! 무섭구나! 그렇다면 이번에 디안 요새의 일도 낙인 중 하나가 발현된 것이란 말인데... 하지만 너 때문에 발현되지 못했으니 이미 네가 운명의 시계를 멈추게 한 것이지. 그렇다면... 이미 예언은 어긋나기 시작한 게 아닐까?"

"뭐, 저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그 신이라고 주장한 노인네가 하는 말이, 운명의 시계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러니 이 웃기지도 않는 일들이 사실이라면 대비해야 하고, 더구나 제국이나 왕국의 높으신 양반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니 아마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이 땅에 한바탕 피비린내가 진동할 게 뻔하니 미리 미리 대비해야겠죠."

"운명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라...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헉!"

"왜 그래요, 영감! 할......."

"이런 멍청한! 시간이 없다! 내 손을 잡아라, 호크. 어서!"

"아니! 왜 그런지 말을 하라고요!"

호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이클론이 호크의 팔을 낚아채고는 품속에서 조그마한 책을 꺼내 들더니 주문을 외었다.

"미천한 자가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간청하오니, 시간과 공간의 틈을 여행할 기회를 주소서. 나옴크 산 보다만 옴 샤크 디안!"

"이런! 영감, 아니 할아버지, 난 마법이동 싫......!"

번쩍!

"백작님! 사이클론님!"

"이봐! 핸들러! 무슨 일이야?"

"나도 모르겠어, 피터슨! 무슨 급한 일이 생겼나 본데? 어쩔 수 없지, 기다리는 수밖에."

우우우웅!

번쩍~

"우웨엑! 카악! 퇫! 후아~ 후아~ 누구 죽이려고 작정했어요!"

"쉿! 조용해라.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진 놈이 어떻게 겨우 이따위 마법이동에 구토까지 하는 거냐? 그래도 일국의 백작이라는 놈이."

'이런 빌어먹을. 젠장! 한국에서도 차만 좀 오래 타면 오바이트하던 버릇이 여기서도 계속되네, 스타일 완전 망가졌구먼.'

"카악! 퉷! 뭐야? 여기는 디안 협곡이잖아요? 그것도 요새 근처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리로 오신 거예요???

"분명히 운명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고 했지? 그렇지?"

"네, 맞아요. 그렇게 강조하듯이 몇 번이고 말했어요. 왜요?"

"그날 몬스터들의 침공이 일어난 날이 바로 헤론의 달의 마지막 날이었어. 헤론은 시계를 의미한다.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헤론의 달은 지나갔지만, 이번 달인 야센의 달 중 오늘이 바로 헤론의 데이(Day)다. 추수와 감사의 달인 이번 달 중에 헤론의 여신이 추수를 축복하기 위해 대지에 내려오는 날이지."

"운명의 시계가 다시 돈다, 이 말인가요?"

"그래. 정말로 예언이 맞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무언가 일어날 테지."

"우리 말고도 이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 본데요?"

"응? 어디? 안개여, 달빛이여! 내게 부엉이의 눈을 주소서!"

영창과 함께 싸이클론의 두 눈이 검게 물들었다.

"흠! 어쌔신들인 거 같은데, 또 그 다크 문인가 하는 놈들인가 보구나?"

"네. 아마도요. 처음에는 그냥 건달패거리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보니 보통 놈들이 아닌 거 같은데요? 이 예언을 알고 있고, 더구나 어제 그런 망할 폭탄까지 만들어낸 걸 보면요."

"그렇구나. 과연 배후에 누가 있는 걸까? 혹시?"

"할아버지, 하늘 좀 보세요!"

"응? 아니, 저럴 수가! 달이 사라지다니!"

"이상한 걸? 이곳에는 일식이나 월식이 없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3개의 달이 점점 어둠에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달빛이 사라지자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사람도 숨을 죽이고 산도 짐승들도 모두 숨을 죽인 듯했다. 그야말로 적막과 고요만이 세상에 남은 듯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동이 커지자 디안 요새의 병사들이 횃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이내 성벽 위에서 횃불을 협곡 아래로 떨어뜨리자 땅바닥의 모습이 드러났다.

마법사들과 수많은 병사들이 치운다고는 했지만, 아직도 수많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그냥 방치되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덜덜덜 흔들리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나 곧 음산한 기운이 대지 위를 휩쓸기 시작하자 마나에 민감한 사람들부터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으... 윽! 뭐지, 이 차가운 기운은?"

"허억! 호크야, 심장이... 심장이 얼어붙는 듯하구나."

"젠장! 심호흡해요, 영감! 제길! 어서 앉아요, 어서!"

사이클론이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보이자 호크는 사이클론을 자리에 앉게 한 후, 그의 등에 장심을 대고 천천히 태극심법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잠시 후, 따뜻한 기운이 물밀듯이 사이클론의 몸을 덥히기 시작했다. 호크의 몸도 땀으로 젖어들었다. 온통 세상을 얼려버릴 듯이 밀어닥치는 찬 기운에 시체 더미 바로 아래에 있던 호크가 받는 영향이 제일 컸다. 태극심법으로 사이클론에게 기를 넣어주면서 자신도 외부의 기운에 대항하다 보니 전신내력이 폭발하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스으으으으윽!

팟!

그런데 그 무섭던 기세가 갑자기 사라졌다. 어리둥절해진 호크와 사이클론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싸이클론도 호크 덕분에 신색이 좋아졌고, 호크도 심호흡과 태극심법 중 중(重)의 묘리로 탁한 기운을 몰아내자 정신이 맑아졌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을 돌보지 않고 사이클론에게 내력을 쏟아 부은 것이 오히려 호크 자신에게 약이 된 것이다.

그때, 몬스터의 시체 더미에서 마치 유체이탈을 하듯이 하얀 영체 같은 것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개였는데 삽시간에 협곡을 채우고 있는 모든 몬스터들이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이 몬스터들의 영체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성벽에서 호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것이 꿈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더욱 요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영체들이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눈덩이가 불어나듯 수많은 영체들이 엉겨 붙기 시작하더니 매우 빠른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귀를 찢을 듯한 고성이 나면서 빙글빙글 돌던 구체가 점점 작아지더니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거의 지면에서 2미터 정도까지 내려오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어쌔신들이 이제는 손바닥만 하게 작아진 구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그 수가 20명이 넘었다. 거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저것들이 어딜 감히......."

"가만히 있거라! 함부로 가까이 하다가는 뼈도 못 추릴 거야!"

"하지만 저들이 먼저 훔치면 어떻게 해요?"

"훔쳐? 후후! 목숨이나 부지하면 다행일 거다!"

사이클론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호크는 고개를 돌려 이제 거의 구체 앞에 다가간 어쌔신들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구체 앞에서 멈추더니 서서히 다가갔다. 그중 맨 앞의 인물이 구체에 손을 대자 푸아아아아~ 하는 김빠지는 소리와 함께 강한 빛이 터져 나왔다.

호크가 눈을 가렸던 손을 내리자 구체 주변에 있던 어쌔신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떻게......? 혹시 저 빛 덩어리가 그랬나요?"

"그래. 죽은 영체들의 집합체이니 아마도 생명이 있는 존재가 건드리면 모조리 그 생명체를 흡수할 거야! 저것이 첫 번째 스티그마, 쥬(Ju)의 낙인이로구나!"

고오오오오!

우웅~

진동음과 함께 호크의 블레이드가 검명을 토해냈다.

"젠장 할! 그래, 너도 저것을 알아봤구나? 알았다, 알았다고. 빌어먹을. 그렇다면 그 노인네들이 한 말이 사실이란 말인데. 웃챠!"

호크가 검집에서 혼돈의 블레이드를 2개 다 뽑아들자,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검들이 울어댔다.

"영감! 가만히 그 자리에 있어요. 아무래도 저것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 검밖에는 길이 없는 것 같으니까요."

"호... 호크야, 조심해라. 절대로 맨손으로 만져서는 안 돼!"

"알아요, 안다고요. 나도 다 봤잖아요. 젠장! 너만 믿는다. 후읍~ 자, 가자!"

공중에 둥둥 떠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빛의 구를 향해, 양손에 블레이드를 움켜쥔 호크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양손의 블레이드가 미친 듯이 울어댔다. 어쌔신들이 다가갈 때와는 다르게 혼돈의 블레이드를 가지고 다가가는 호크에게는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빛의 구는 그 차가운 기운을 얼음 창으로 물체화시켜서 날려 보냈고,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얼음 창은 호크를 꼬치로 만들어버릴 양인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왔다. 귓가를 스쳐지나간 창끝이 귀밑을 찢어버리면서 순식간에 호크의 얼굴을 피로 물들었다.

"허억! 으! 정말로 머리가 날아갈 뻔했네. 정신 차려야지. 후욱! 후욱!"

한 개의 얼음 창이 실패하자 빛의 구가 마치 화가 난 듯이 빙빙 돌았다. 그리고 빙빙 돌던 움직임이 멈추자 이번에는 얼음 창이 수십 개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호크를 꿰뚫어버리겠다는 듯이 창끝이 예기를 빛냈다.

"후우~ 한기에 몸이 다 얼어버리겠는걸! 네 이름이 제로(Zero)라고 했지! 그렇게 징징거리면서 울어댔으면 뭔가 너도 실력발휘 좀 해라!"

답답한 듯 제로에게 투덜거리다니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검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호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서 양손의 검을 들어 가슴 앞에서 교차했다. X자 모양으로 검을 교차한 채 무릎을 굽히고 언제라도 전면의 창이 날아오면 피할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켰다.

그때, 혼돈의 블레이드에서 붉은빛이 퍼져 나오더니 호크를 감싸 안았다.

파팟!

빛이 사라지자 놀랍게도 호크는 전혀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디안 요새의 협곡이었는데, 지금은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황당한 것이, 남태평양의 산호섬 같이 따뜻한 섬이었다. 그리고 이런 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머리에 누가 보더라도 기가 죽을 만한 근육질의 사내가 호크와 똑같이 생긴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사내가 호크를 발견했는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다가왔다.

"하하하! 당신이 제로의 새로운 주인이로군. 이제 그대도 주인으로서 제로의 사용법을 배워야 하네. 내가 춤을 한번 추어 보일 테니 잘 보고 머릿속에 기억하게나. 단 한 번만 출 테니까."

말을 마치 사내가 호크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혼돈의 블레이드 제로를 엇갈리게 쥐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호크야~ 정신 차려라! 대지의 기운이여! 그대의 힘으로 방패를 만들어주소서!"

퍼퍼퍼퍽!

"허걱! 이런 제길! 크로스 윙(Cross Wing)!"

정신을 차린 호크가 제로를 양손목이 교차되게 비틀어 쥐더니 안에서 밖으로 나선형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제로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와 사이클론이 급히 펼친 마법 벽을 뚫고 들어오던 얼음 창들을 녹여버렸다.

"후아~ 젠장! 또 영화 같은 일이 벌어졌네. 네가 한 짓이냐, 제로(ZERO)인가 뭔가 하는, 이 검 같지 않은 놈아? 홀로그램도 아니고 신기하기는 한데, 네 주인이 골로 갈 뻔했다. 이런 비디오는 나중에 한가할 때 보여주어야지,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보여주면 어쩌자는 거야. 제길!"

빛의 구는 수십 개의 창으로도 실패하자 더 날뛰더니 높이높이 솟구쳤다. 호크 역시 높이 솟구친 빛의 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계속 올라가던 빛의 구가 정점에 도달했는지 잠시 멈추었다가 그대로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한데, 그 모양이 마치 독수리처럼 새의 모양을 하고 덮쳐왔다.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저 빛에 휩싸이면 결과가 어떨지 뻔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후우읍~ 머릿속에서 교육용 동영상처럼 막 떠오르는구나! 아까도 어떻게 간신히 흉내는 냈는데, 이번에도 꼭 잘 돼야 할 텐데. 저 공격을 막으려면......!"

다급해진 호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기억해내면서 검을 십자로 교차한 다음에 무릎을 굽혔다가 점프했다. 그리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떠오른 호크와 지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 듯이 공중에서 덮쳐오는 빛의 구체가 서로 충돌했다!

쿠! 콰왕!

"저... 저런! 호크야!"

사이클론의 외침이 커다란 폭음 속을 뚫고 디안 협곡을 울렸다. 빛의 폭발이 가라앉자 사이클론이 급히 몸을 움직여서 호크에게 달려갔다. 두 기운이 충돌한 지점은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 있었고, 그 구덩이 안에 호크가 엎드려 있었다.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듯이 내려간 사이클론이 호크를 안아들었다.

호크의 입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고, 귀에서도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힐링!"

사이클론이 자신의 마나가 바닥날 때까지 치료마법을 호크에게 퍼부었다.

어느새 구덩이 주위로는 디안 요새에서 달려 나온 병사들이 횃불을 밝힌 채 서 있었다. 병사들 중 백인장인 마크가 두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고서는 크게 놀라 요새에 통보했다.

그 후로 1시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신을 잃은 호크와 기진맥진한 사이클론은 요새의 안채로 옮겨졌다.

"후우~ 그래, 어떤가? 정신이 들었는가?"

"그게 아직... 하지만 샹그릴라의 신관들이 들어갔으니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는 사이클론을 보면서 디안 요새의 수비대장인 헹클러 경은 수심이 깊어졌다. 디안 요새와 케린버그의 영웅인 호크가 이곳에서 죽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었기에, 마치 자신의 자식이 아픈 것처럼 착잡했다.

'나의 모든 마나를 쏟아 부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신관들이라고 해도 소용없을 거야. 호크와 부딪친 기운은 신들이 준비해놓은 저주야! 일반적인 치료로는 낫지 않을 거야. 결국은 스스로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제발, 호크야... 정신을 차리렴. 넌 반드시 살아야 해. 너의 두 어깨에 이 폴렌시아의 운명이 달려 있단 말이다. 제발!'

사이클론은 오늘 처음 자신의 마법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7써클의 대마법사라고 은근히 자부심을 가졌건만 그동안 자식 같은 호크에게 도움이 별로 안 되었고, 더군다나 지금 저렇게 인사불성인데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자 그 심정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헉헉! 백작님께서 눈을 뜨셨습니다. 정신을 차리셨어요!"

"뭐라고! 정말인가? 오! 오, 신이시여!"

전령의 반가운 소리에 헹클러 경과 사이클론이 버선발로 호크의 방으로 뛰어갔다.

"으으윽! 머리가 깨... 질 것 같네."

"정신이 드냐, 얘야?"

갑자기 더 늙어 보이는 사이클론의 눈물 젖은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호크는 이전 세상에서 못 느껴봤던 부정에 이번에는 자신도 참지 못하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할... 아... 버지......."

"그래, 인석아! 살았으면 됐어. 암! 그거면 되지."

꼭 끌어안은 두 사람을 보면서 신관들과 헹클러 경은 왠지 자신들도 눈에 눈물이 나는 것 같아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흠흠! 그럼 두 분이 할 말들이 많으실 테니 이야기를 나누시죠. 자, 모두 나가지!"

헹클러 경이 주변을 모두 물리자 호크와 사이클론은 빛의 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상했어요. 막상 그 녀석하고 충돌했을 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마치 무중력 상태 속에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빛 속에 어떤 여자아이가 나타났어요. 그때부터 이 제로라는 검이 폭주했다니까요. 갑자기 제 손을 떠나서 마치 생물처럼 혼자 움직였어요. 그 다음부터는 이 검과 그 여자아이의 싸움이었죠. 전 그냥 지켜보기만 했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제로가 밀리기 시작하더라구요. 어쨌거나 제가 주인인데 모른 척할 수도 없고, 그래서 제가 다시 뛰어들어서 검을 잡고 그 애와 싸웠죠. 말도 마세요. 어찌나 칼을 잘 다루던지, 다행히 저의 임기응변과 검속에 숨겨진 위력으로 간신히 그 얼음공주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었죠.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안 나요!"

"허허! 정말 신기하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네가 그 구체와 충돌한 것은 눈 깜빡일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 짧은 순간에 믿을 수 없는 일을 겪었구나! 놀라워, 정말 놀랍구나!"

"그거 가지고 놀라시기는요! 이걸 보세요, 이게 아마도 그 녀석이 소멸되고 나서 남은 것 같은데요. 자! 보세요!"

호크가 쥐었던 주먹을 펴자 호크의 손바닥 위에 얼음 결정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현미경으로 보면 볼 수 있는 눈의 결정체였다.

"허허! 이럴 수가! 정말 신비로운 모양이구나! 이것이 눈의 결정체라고!"

"네! 눈을 몇 만 배 확대해보면 이런 모양이에요.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녹지 않아요. 차갑지도 않구요!"

"어디 보자, 헉!"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호크야! 너는 이것이 차갑지 않단 말이냐?"

"네! 전혀요. 할아버지는 차가우세요?"

"그렇다마다. 심장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흠, 아마도 네 개의 낙인이란 것이 물, 바람 같은 자연의 속성이 담긴 결정체가 아닐까?"

"그런가요? 흠, 자연의 속성이라......."

"생각해보렴. 이 얼음의 기운 하나만 하더라도 무서우리만치 강한데 이런 기운이 네 개나 모이고, 성스러운 돌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이 기운들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이라면 아마도 폴렌시아의 생명체는 하나도 남아나질 못하겠지."

"빌어먹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그래. 아무래도 이 일에는 너무나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차분히 생각해볼 일이야!"

"그럼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죠!"

호크가 결정체를 책상 위에 올려놓자 책상이 얼음으로 뒤덮였다. 그제야 호크도 사이클론이 차갑다고 한 것이 이해가 갔다. 호크는 바닥에 내려져 있는 제로의 검집에서 블레이드를 뽑았다.

우우우우우웅!

벌 떼가 내는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검이 울었다. 책상으로 다가가자 결정체 또한 책상 위에서 마구 떨었다.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호크가 금방 결정체를 부숴버릴 듯이 발을 옮겼다. 동굴의 석실에서 만났던 아레네스라는 신이 '뭐 하는 거야! 어서 부숴버려, 어서!'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꽤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호크는 고민했고, 사이클론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탁!

검을 도로 검집에 꽂은 호크는 결정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서는 툭툭 위아래로 장난치듯 튕겼다.

"어쩔 셈이냐?"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왠지 그 영감탱이들에게 믿음이 가지 않아서요. 아무래도 부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요."

"흠~ 하지만 너무 위험한 모험이 아니겠느냐? 쥬(Ju)의 네 개의 낙인이 모이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느냐?"

"네. 그렇지만 그것은 그 두 인간인지 신인지 모르는 존재에게 들은 이야기잖아요. 뭔가 확실해질 때까지 보관해두어야겠어요. 할아버지, 어디 안전하게 보관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하하하하! 이제야 이 할애비의 마법이 빛을 발하는구나! 잘 보려무나! 창조주의 권능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열어주소서!"

사이클론이 마법으로 아공간을 불러내오자, 호크는 신기한 형상으로 눈앞에서 일렁이는 빛의 굴절을 만져보려는 듯이 손을 들었다.

"하하하! 지금은 만져봐야 아무 소용없다. 손끝에 피를 조금 내서 그곳에 뿌려라! 그리고 주문을 외워야 한다. 샤윰드 오프네!"

사이클론의 말을 따라서 하자 아지랑이처럼 분명하지 않던 모습이 번쩍이면서 하얀 나무문으로 변했다. 문을 열자 많은 서랍이 나타났다. 호크는 그중 맨 위의 서랍에 결정체를 넣고 문을 닫았다.

"정말 신기한데요! 이거 이제 저만 열어볼 수 있는 건가요?"

"그래, 그렇단다! 정말 신비롭고 위대한 학문이지. 이번 기회에 너도 마법을 배워보지 않을래?"

"아이고! 됐습니다. 군바리 주제에. 군대에 삼 년 있으면서 제 뇌도 돌처럼 굳어버렸거든요. 하하하!"

당황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던 호크는 이곳이 잉글햄이라는 사실을 머리에 떠올렸다.

"캐더린......."

"허허! 녀석. 벌써 색시가 보고 싶은 거냐!"

"촌스럽게 색... 색시가 뭐예요. 우쒸!"

얼굴이 벌게진 호크를 바라보면서 모처럼 사이클론은 크게 웃었다. 어서 빨리 이 무서운 일들을 끝내고 호크와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사이클론의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그럼 캐더린에게 가볼까? 위대한......."

"자... 잠깐! 헤헤헤! 저... 할아버지, 그냥 말 타고 가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마법이동을 쓸 것까지야. 헤헤헤!"

"흠흠, 그렇지만 네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그럴 수야 없지. 자! 위대한 자연의......."

"윽! 아니요! 할아버지, 저 말짱해졌다고요. 신관들이 신성력을 펑펑! 나누어주어서요. 이것 보세요, 헛둘 ! 헛둘! 백만 스물셋, 백만 스물넷!"

이미 호크의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짐짓 골려줄 심산으로 모른 척했던 사이클론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호크가 받은 충격은 물리적 타격이 아닌 다른 그 무언가에 의한 것이었는데, 어느새 멀쩡해진 것이 의문스러웠다.

호크가 헹클러 경에게 받은 말 위로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도 3개의 낙인과 부딪힐 때마다 저런 상처를 입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자 사이클론은 이 현상에 대해 연구해두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는 호크가 그렇게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휘파람을 불면서 말을 모는 호크의 머릿속은 잠결에 일어난, 귀엽고 섹시한 모습의 캐더린으로 가득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뒤에서 사이클론이 제대로 따라오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달렸다.

덕분에 노구의 싸이클론은 혼자서 쓸쓸히 말을 몰고 와야 했다.

얼마 후, 호크의 비명소리를 들은 사이클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뒤늦게 싸이클론이 잉글햄의 내성에 도착해보니 호크가 새벽녘에 잠이 덜 깬 채 불려 나온 집사 앞에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싸이클론을 길에 내려둔 채 열심히 달려왔건만, 호크가 이 늦은 새벽에 집사를 깨워서 얻은 소득이라고는 캐더린이 오빠 제임스와 어제 수도로 출발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젠장 할! 이게 무슨 TV 드라마도 아니고, 왜 이렇게 엇갈리냐고! 에휴! 어쩔 수 없지. 빨리 수도로 가서 캐더린을 만나는 수밖에.'

"할아버지, 그럼 여기서 하룻밤 자고 떠......."

"위대한... 시간과 공간의 틈을 여행할 기회를 주소서!"

"아... 안 돼!"

팟.

순식간에 응접실에는 처절한 호크의 울부짖음과 잠이 덜 깬 잉글햄 영지의 집사만이 남게 되었다. 그래서 항상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노인을 두고 혼자만 달려온 죗값이었다.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호크에게 언질 한 번 없이, 피곤한 상태에서도 과감히 마법이동을 한 사이클론은 조금 전까지 호크를 걱정하던 그 할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우... 웅? 어디서 오빠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음냐."

슬프게도 그것은 호크의 목소리가 맞았다. 또다시 구토로 옷을 더럽힐 불쌍한 잉글햄의 백작, 호크였다.

"우웨엑!"

"아! 백작님! 사이클론님! 돌아오셨군요!"

핸들러와 일행이 선잠을 자다가 갑자기 마법이동으로 나타난 호크와 사이클론을 반겨주었다. 물론 호크에게서는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제... 젠장 할! 이 영감탱이가! 어디 두고 보자. 후아~ 후아~'

'하하하! 요놈아, 쌤통이다. 그러게 노인을 공경해야지. 나를 혼자 버려둔 죄다. 클클클!'

가슴에 묻은 토사물을 닦아내려고 수건을 찾던 호크는 배낭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그 뒷모습을 바라본 사이클론은 큭큭거리는 호크의 웃음소리에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저 녀석이 왜 그러지? 마법이동이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나? 흠... 이거 연구감인데?'

언제나 학문적 열의에 불타는 사이클론이야말로 진정한 대마법사로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앞쪽의 호크의 얼굴을 보았더라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웃을 때마다 입 꼬리가 비틀어지며 쭉 올라가는 호크 특유의 미소와 최대한 가늘어진 눈매를 봤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일이 자신의 의지대로는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하~ 이상하네? 어디 수건을 넣어둔 것 같은데? 안 가져왔나?"

"백작님, 제 걸 쓰시죠. 여기 있습니다!"

"하하! 아니야. 됐어, 제이크. 세수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걸 닦아내는 건데 다른 사람의 것을 쓸 수는 없지. 넣어두게."

"아... 예, 알겠습니다."

'뭐냐, 저 안심한 표정은? 그냥 예의상 권해봤다, 이거냐? 이 녀석, 너도 이제부터 리스트에 올랐어!'

불쌍한 제이크, 이제부터 그의 고생길이 빤히 보이는 듯하다.

"에이, 어쩔 수 없지. 대신 이 쓸모없는 책이라도 찢어서 휴지 대신 써야겠네!"

일부러 누구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떠드는 호크의 목소리를 바로 뒤에서 마차를 몰던 사이클론이 못 들을 리 없다.

"저... 저 저런 무식한! 지식의 샘인 소중한 책을 휴지 대용으로 쓰다니! 무식한 놈이야. 정말이지, 어떤 책인지 참으로 안됐구나. 응? 저... 저 양피지는!"

일부러 사이클론이 보란 듯 오른손으로 살짝 집어서 위아래로 흔드는 책을 바라본 사이클론의 두 눈이 부릅떠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저... 저... 저것은... 허억!"

"왜 그러십니까? 사이클론님, 어디 편찮으신가요? 백작님, 사이클론님 상태가 이상합니다!"

"응? 영감이 왜! 참내, 사람 귀찮게 하네."

말머리를 돌려서 사이클론의 마차 옆으로 다가온 호크의 손에는, 여전히 위태롭게 붉은 양피지의 고급스런 책 한 권이 달랑거리면서 매달려 있었다.

"왜요! 어디 아파요?"

"너... 너... 그 책... 책!"

"책? 아항, 이거요? 하하! 뭐, 별거 아니에요. 휴지 대신 앞으로 제가 쓸 건데요. 왜요, 한 장 드려요?"

호크가 책을 펼쳐서 한 장 찢으려고 시늉을 하자, 사이클론은 거의 기절하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끄어어어어억! 이... 미......."

"미? 아하! 미남이라고요? 에이, 따로 말씀 안 하셔도 다 아는 사실인데. 저 스톤이라는 스토커 녀석만 봐도 저의 인기는 대단한 거죠. 그렇죠, 하하하하!"

호크의 미지왕적인 발언에 짐마차에서 졸고 있던 스톤마저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특히나 눈치 없는 제이크는 얼굴에 우웩 하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서 호크의 블랙 리스트에 밑줄까지 그어지는 위험한 지경에 처해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지금 호크가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클론의 간절한 마음만 하겠는가? 도대체 1백 년을 넘게 살아온 어른이 책 한 권에 멍해져서는 입가에 침까지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숨넘어가고 있으니,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치매 걸린 노인이라고 생각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어이구, 어이구, 제발 진정 좀 하자. 후우우! 후우우! 훅! 호크야, 사랑스런 나의 호크야!"

"누가요? 제가요? 에이, 설마요. 사랑한다면 그렇게 마법이동을 무식하게 하지는 않겠죠. 그렇죠?"

"무... 무식한? 으드득!"

사이클론의 어금니가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호크는 여전히 생글거리면서 이제는 아예 책을 뉘여서 검지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입이 다 타들어가고 온몸에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이클론이 거의 애원조로 호크를 달랬다.

"허허허! 이 할애비가 노망이 들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호크야! 이 할애비를 용서하렴. 그런데 말이다, 그 책은 너에게는 필요 없는 책이란다. 그러니 이 할애비에게 주는 것이 어떻겠니? 응? 응?"

"에이, 왜 필요 없어요? 지금도 이렇게 더렵혀진 곳을 닦을 수 있죠. 게다가 급할 때는 뒷간에서 사용하기 딱인데, 질감도 좋은 것이. 흐흐흐흐!"

사이클론의 얼굴이 이제는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변했다가 창백해지기 시작하자 호크는 이제 그만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할아버지에게 주려고 훔쳐온 것이 아닌가? 피식 한 번 웃은 호크가 사이클론에게 바싹 붙더니 귓속말로 몇 마디 건네자 사이클론의 얼굴에 비로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떼끼! 이놈! 이 할애비를 놀려! 하하하하!"

"그러니까 제발 그놈의 마법이동인가 할 때는 좀 살살 하라구요.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아우, 냄새! 죽겠네. 이거 봐요! 저놈들도 저한테 가까이 안 온다구요!"

"하하하! 녀석도. 흠! 자, 이걸 받거라. 손가락에 끼고서 '정화(淨化)!'라고 외쳐봐라."

호크가 반지를 끼고서 정화라고 외치자 주변의 마나 중 물의 기운들이 발밑에서 모여들더니 호크를 중심으로 세탁기처럼 돌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후~ 아~ 이 청량함! 흠, 마치 사우나 한 듯한 이 느낌! 좋구나!"

"헐헐헐! 마음에 드냐?"

"들다마다요. 아주~ 아주 짱입니다요!"

"뭐? 짜... 뭐라고?"

"에이, 그런 게 있어요. 그냥 좋다는 말이에요. 가만! 그건 그렇고, 이런 게 있으면 진작 주지. 왜 이제야 주는 거예요!"

"허참! 아, 이 녀석아, 이런 마법 아이템의 값어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거냐? 너한테 들어간 통역 아이템, 그 장군인가 뭔가 하는 작자하고 또 같이 있던 한 놈에게도 줬지. 게다가 이 정화의 반지는 웬만한 왕국하고도 안 바꿀 정도로 값어치 있는 거다, 이 녀석아, 내가 이걸 지하 던전에서 구하려다 황천 갈 뻔했다구. 얼마나 애지중지하던 건데, 이 녀석이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생각 외로 사이클론이 세게 나오자 오히려 호크가 당황했다. 자신한테야 저 붉은 마법책이 무용지물, 즉 아무 소용도 없지만, 이 반지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닌가?

사실 호크는 사우나 매니아였다. 그래서 남들은 외박을 나가면 여자친구나 서울에서 온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내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지만, 호크는 시내 유일한 사우나에서 땀 빼는 것을 즐겼다. 뭐, 사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지만.

어쨌든 이 조그마한 구리반지가 사우나를 한 것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실로 오랜만에 느낀 시원함에 영감을 놀리려던 마음까지 씻겨 나갔다.

"헤헤헤! 뭐, 말이 그렇다는 거고요. 어때요, 마법서 맞지요?"

"그... 그래. 그것도 대단한 것인 듯하다. 내 심장의 마나 써클이 이렇게 빠르게 돌다니!"

마지막 말을 꺼내고서는 책에 정신을 빼앗겨버린 사이클론이 책을 들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호크는 수행원 중 1명에게 마차를 몰게 하고 핸들러와 나란히 앞으로 나섰다.

이제 즉위식까지 겨우 3일 남았다. 추수와 감사의 계절인 이 달은 유난히 시간이 짧았다.

어느새 폴렌시아의 밤을 밝히는 3개의 달이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예정보다 일정이 늦어진 관계로 호크 일행은 야영 대신 야간이동을 했다. 다행히 여기서부터 수도까지는 관도가 발달되어 있어서 훨씬 길을 가기가 편했다. 이대로 아침까지 이동한 다음, 마지막 마을에서 오전에 잠시 쉬고 오후에 바로 수도로 입성하기로 했다. 그러면 3일의 시간을 하루 반나절이나 줄일 수 있기에 무리수를 둔 것이다. 다들 핏발 선 눈으로 말을 몰아 이동했지만, 사이클론의 마차는 마법등으로 불을 밝힌 채 한낮이나 다름없었다.

<연자여! 우리 드래곤들이 이렇게 책으로 마법을 남기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나, 어리석은 우리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이제 다시는 폴렌시아의 아름다운 태양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나, 레드일족의 수장인 크라토이나는 나의 연구 실적이 유실됨이 안타까워 이렇게 글로 나의 연구를 남기노라. 그대가 누가 되었건 내가 보지 못한 끝을 보기 바란다. 9써클은 드래곤의 절대용언 마법으로만 가능하다지만 혹시 아는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법을 사랑해서 마나를 따르는 존재여! 마나가 함께하길.......>

책을 남긴 듯한 이의 당부의 말을 끝으로 책은 끝나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덮은 사이클론은 두 눈을 감은 채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 찌뿌드드한 몸을 심호흡으로 풀어버린 호크는 갑자기 사이클론의 마차 주위로 마나가 물결치는 것을 보고 급히 말을 몰았다.

그러나 마차 안의 상태를 알아차린 호크는 이내 말없이 마차 옆에서 말을 몰았다. 그리고는 주위에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두 눈을 번뜩였다. 심지어 호크가 다가오자 예의를 차리려던 마부에게까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하라고 했을 정도다.

저 멀리 동이 터오자 물결치던 마나의 흐름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깊고 청아한 호흡소리가 마차 안에서 터져 나오자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푼 호크가 올 때처럼 조용히 선두로 돌아갔다. 잠시 뒤를 돌아본 호크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앞으로 더 나아가셨네요!'

'고맙다, 호크야!'

사이클론 역시 자신이 깨달음을 얻는 순간에 옆에서 호크가 지켜준 걸 알았기에 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달되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전설로만 생각되었던 팔 써클의 마법서라니! 더구나 이 책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이론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혁신적인 사고로 가득하구나. 그동안 보일 듯 보이지 않던 벽이 사라졌어! 부지런히 이 책을 익혀서 호크의 한 손이라도 거들어야겠다. 그나저나 마지막의 말은 무슨 뜻일까? 다시는 태양을 볼 수 없다니? 이것이 바로 천 년 동안 드래곤들이 사라진 이유인가?"

사이클론의 상념은 선두에서 마을이 나타났다고 외치는 소리에 멈춰졌다. 마차에서 내린 사이클론의 얼굴은 밤새 무척이나 달라져 있었다. 더더욱 현기가 짙어진 학자의 얼굴에, 50대 정도로 보일 만큼 젊어졌다.

일행들도 처음에는 사이클론님이 저렇게 동안이었나 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서둘러 마을로 향했다. 더 이상 새벽이슬을 맞기 싫어서였다.

오전 나절을 달콤한 휴식으로 보낸 호크 일행은 서둘러 길을 따라 수도로 향했다. 길을 갈수록 커다란 대도시들이 보였고, 잉글햄도 제법 큰 도시라고 여겼던 호크는 그것보다 수십 배는 큰 규모에 넋이 나가버렸다. 중세시대라고 우습게보았던 선입견이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길은 깨끗한 대리석으로 깔려 있었고, 건물들은 마치 현대의 콘크리트로 지은 것처럼 하얗고 깨끗한 건물 일색이었다. 사람들도 잉글햄 영지의 주민들보다 얼굴색도 하얗고 여유가 넘치고, 옷들도 훨씬 밝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수도에 와본 듯이 놀라지 않았지만, 호크는 계속해서 '우와~ 이야! 오예!'를 외쳐댔다. 이를 보다 못한 핸들러가 귀족으로서 품위를 지켜달라고 하지 않았으면 지나가던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영감! 이 건물들은 어떻게 된 거예요? 여기에 비하면 잉글햄은 돼지우리라고요. 젠장!"

"하하하! 그게 다 마법의 힘이란다. 전부 천 년 전에 사용된 고대의 수법이지. 하지만 아직도 그 원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연구했지만, 모두 다 실패했지. 디안 요새도 그렇지만 그저 고대 마법의 일부분인 건출물들의 사용법과 몇 가지 마법을 이용한 건축만을 할 뿐이야. 하얀 건물들은 아크테리아라고 불리는 흙인데, 케린버그의 주요 수출품이기도 하단다. 신기하게도 마법과 반응하면 저렇게 돌처럼 강도가 높아지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건축마법에 의해 지어진 도시야. 아름답지? 하지만 로베니아 제국에 비하면 이곳도 돼지우리이기는 마찬가지란다."

"네에? 세상에! 이거 왠지 점점 기죽는데요!"

호크가 죽을 쑨 표정을 짓자 사이클론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호크의 어깨를 쳤다.

"뭐가 걱정이냐? 너도 이제 케린버그의 백작 아니냐? 게다가 이제 곧 팔 써클의 대마법사가 될 이 할애비가 있는데... 잉글햄도 천천히 멋진 도시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

"정... 정말 가능한가요?"

"허허허! 당연하지. 너도 백작이니 네 영지를 위해 아크테리아를 하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 건축마법에 관한 책은 나도 몇 권 가지고 있거든. 허허허! 어떠냐? 이 할애비의 실력이!"

"흐흐흐흐! 고마워요, 할아버지. 흐흐흐흐!"

"녀석, 이럴 때만 할아버지로구나. 허허허허!"

'흠흠흠~ 그렇다면 말이지, 잉글햄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를 조성해야겠구먼. 집은 역시 아파트가 최고지! 그럼! 돌아가신 울 오마니 소원이 서울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는 거였는데. 영지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잉글햄에는 아파트가 최고지. 크크크! 이제 나는 부동산 재벌로 등극하는 거야! 우하하하하. 도널드 트럼프가 부럽지 않겠구나. 하하하하!'

돈방석에 앉을 생각으로 말 위에서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기던 호크의 저만치 앞에, 북부 제일 왕국인 케린버그의 수도 로이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호크의 꿈인 편안하고 안락한 삶 대신에 앞으로 호크를 전쟁과 살육 속으로 몰아넣을 잔인하고 거대한 운명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주스런 예언을 움직이는 운명의 시계 또한 호크를 향해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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