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저주받은 예언
드넓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밀밭뿐인 끝이 보이지 않는 평원!
그 넓은 밀밭 사이로 난 길을 흑마 한마리가 사납게 달리고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 보아 언덕 위의 검은 성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밀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잠시 들어보더니,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이내 다시 고개를 밀밭으로 돌렸다.
말에 탄 검은색 옷차림의 사내 역시 오로지 말을 몰아 성으로 향했다.
이히이잉!
"워! 워!"
"푸른 달이 창공에 떠오를 때!"
성의 정문을 지키던 흑색 갑옷의 기사들과 병사들 중 2미터가 넘어 보이는 거구의 기사가 입을 열자, 말안장 위의 사내도 화답을 했다.
"아크나무아(Arknamua)가 세상을 열리라!"
"통과시켜!"
그그긍!
무거운 성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몰아 성 안으로 사라졌다. 다시금 성문이 닫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기사들과 병사들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닌 듯한 곳에 성이 있고, 온통 검은색뿐인 이곳의 분위기는 평화로워 보이는 자연풍경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똑똑!
"쟝입니다!"
"음,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들어와!"
쟝이라 밝힌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역한 피비린내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쟝이란 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심지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익숙하게 피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흐... 읍! 아~ 음... 이봐, 쟝! 분명히 이 성스러운 기도시간을 방해하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흐... 읍... 음!"
쟝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서 커튼을 조금 여니,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어두웠던 방 안에 햇살이 조금 들어오자 방 안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방바닥의 대리석은 원래가 붉은색인지, 아니면 지금 바닥에 누워 있는 시체들의 피로 물든 것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붉은 피바다였다. 모두 여자들의 시체였는데, 눈이 부릅떠진 것이 매우 고통스럽게 죽은 것이 분명했다.
시체를 따라 벽을 향하니, 거대한 대리석 의자 위에 가냘픈 은발의 남자가 가운만 입고 앉아 있었는데, 그의 품에서는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것 같은 처녀가 전라의 몸으로 안겨 있었다.
은발의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손은 인간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새하얀 손가락이 너무나 긴 것이, 자세히 보니 그것은 손톱이었다. 마치 칼날처럼 길고 날카로운 그 손톱이 너무나 쉽게 소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이제 겨우 솟아나던 가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면서 더운 피를 뿜어냈고, 은발의 사내는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피를 빨아들였다.
소녀의 고개가 꺾인 다음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소녀는 바닥에 버려졌다. 다른 시체들처럼.......
"후~ 이번 아이들은 별로군. 쟝! 다음에는 좀 더 신경 쓰도록 하게!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기에 신성한 기도의 시간을 방해했나?"
어린 소녀들의 피를 빠는 것이 신성한 기도란 말인가? 너무나 역설적인 말을 내뱉은 사내가 의자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테이블에 다가왔다.
놀랍게도 햇살 속에 드러난 모습은 아주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었다. 아까의 은발 사내는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추기경님! 사색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죄를 물어 마땅하지만, 시급을 요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시급을 타투는 문제라? 샹그릴라의 일은 예정대로 잘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둘 중에 어떤 것을 먼저 듣고 싶으신가요?"
테이블에 놓인 은쟁반 위에는 2개의 보고서 두루마리가 있었다.
"끙! 또 자네의 수수께끼 장난인가? 좋은 소식부터 듣지!"
"성스러운 돌의 위치가 파악되었습니다."
"흠! 그거야 이미 알고 있던 거 아닌가? 잉글햄의 디안 요새에서 첫 번째 스티그마(Stigma)가 나타났으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시급을 다투는 소식인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추기경을 바라보며 쟝이란 사내가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벨레데스의 거울도 함께라는 소식입니다."
"뭐야! 정말인가! 으하하하하하! 드디어 예언의 수레바퀴가 정말로 돌기 시작했어. 우하하하하!"
"그런데 나쁜 소식이 더 큽니다. 흠흠!"
"하하하! 그래, 나쁜 소식도 있다고 했지? 자네가 그렇게까지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꽤나 심각한 모양인데, 좋은 소식을 들었으니 나쁜 소식도 들어야겠지. 말해보게!"
"그게 말입니다. 저도 믿기지 않지만서도... 운명의 시계가 멈추었답니다."
"뭐? 운명의 시계가 멈춰? 하, 하하하하하하!"
어이없어 하는 추기경을 바라보면서 쟝 또한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봐! 이봐! 운명의 시계는 인간이 아니고 신의 유물이네. 이 빌어먹을 폴렌시아의 창조자인 쥬가 만들어놓은 것이지. 바로 그 파멸의 예언이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는... 그런데 그것이 움직임을 멈춘다고? 하하하하! 자네가 요즘 심심했나 보군. 이런 장난을 다하다니 말이야. 하하하!"
"휴~ 실은 첫 번째 스티그마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잉글햄과 케린버그는 무사합니다. 그리고 몬스터들은 괴멸됐고요. 첫 번째 예언인 '괴물들의 물결이 인간 세상을 집어 삼키고, 로햐냐 강을 인간의 피로 물들이는 날, 성스런 돌이 빛나리라'라는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멸의 시간을 재는 운명의 시계도 멈춘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케론스 공작은 뭘 하고 있었나? 케린버그에 아직도 그럴 만한 병력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많은 몬스터를 어떻게! 예언에 따르면, 몬스터들은 성스런 돌의 마기를 받아서 더 강해졌을 텐데? 믿을 수 없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이걸 읽어보시지요. 그게 더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추기경이 거칠게 보고서를 펼치자 빼곡하게 적힌 글들이 눈에 들어왔다.
<디안 사태 보고서>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몬스터들이 디안 요새 협곡까지 진격, 케린버그의 대응은 정규군 ...(중략)... 괴멸 직전, 마법사와 그의 제자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 몬스터 전멸. 그들이 보유한 마법무구는 가공할 위력임!
"이걸 지금 믿으라는 건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숫자에는 한계가 있어. 다수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네. 일 대 수십만의 싸움에서, 그것도 인간 대 몬스터의 싸움인데, 이것에는 뭔가 다른 내막이 있어. 쟝!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게. 알았나? 이런 터무니없는 보고서 말고,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객관적인 보고서 말일세!"
"네, 추기경님! 하지만 그렇게 터무니없는 보고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 사이클론이 있었다는 보고입니다. 그 던전 발굴에 미친 늙은이가, 아마도 고대왕국의 마법무구라도 손에 넣은 것 같습니다."
"사이클론! 이 망할 늙은이가 끝까지 우리의 앞길을 방해하다니! 다크 문의 모든 인원을 동원해서라도 그 늙은이를 처치해버려!"
화가 머리까지 치민 추기경이, 눈앞에 사이클론이 있다면 정말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이 노발대발했다.
쟝은 그의 살기에 숨이 막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추... 추기경님, 제발 노여움을......!"
"크크크! 쟝,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모두 죽는 거야. 알겠어? 모두. 자그마치 천년을 기다렸어, 천년을! 더 이상은 안 돼! 우리 어둠의 자식들이 이 인간 세상에서 이렇게 숨어서 살 수는 없어. 쟝, 가자! 가서 우리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모두 없애버리자!"
"네... 네, 추기경님!"
갑자기 마수처럼 변해버린 추기경을 따라 쟝이 나가버리자, 열린 창문으로 사나운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 한줄기 바람에 두 사람이 보지 못한 보고서가 방바닥에 떨어졌다.
<잉글햄 호무관에 관한 보고서>
잉글햄 다크 문 지부 괴멸 장본인, 이번 디안 요새건의 장본이기도 함.
소드마스터이거나 그 이상의 능력자로 추정됨.
이자에 대한 충분한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됨.
최우선 지급으로 요청함.
이름 : 호크
나이 : 20대 중반
능력 : 소드마스터를 넘어선 것으로 보임.
우리의 대업에 가장 방해가 될 만한 위험한 자.
- 보고자 케론스 공작
오히려 더 중요한 보고서가 엉뚱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핏물에 얼룩져버렸고,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신들의 예언이 알게 모르게 다른 요소들로 인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에고, 오늘도 저러고 있는 거야! 나 원 참,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그만하거라! 네가 이상한 거지, 보통은 저런 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제가 뭐가 이상하다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꼭......."
"그럼 인석아, 자기가 살던 곳에서 다른 세계로 떨어졌는데, 그것도 앞으로 영영 돌아가지 못한다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너야 네가 살던 곳에 피붙이가 없다지만, 저 사람은 가족들이 있을 게 아니냐! 그러니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다. 게다가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그리움으로 평생 괴로울 테지. 아마 아주 혼란스러울 거다. 잘못하다가 미치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말이다."
"뭐, 설마 미치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그 힘들다는 대한민국 육군 장성인데, 괜찮을 거예요. 나처럼 편히 마음먹으면 괜찮을 텐데, 왜 저렇게 고민할까? 난 폴렌시아가 살기 좋은데. 캐더린처럼 이쁜 여자도 있고. 흐흐."
"......."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할아버지?"
"에휴~ 내가 백년 가까이 살았지만, 너처럼 천하태평에 무감각한 놈은 생전처음 본다. 다시 말하지만, 저 사람이 정상이고 네가 별종인 게야."
"아이고, 알았다고요. 그놈의 잔소리는. 그나저나 아시죠? 저 사람하고 제 출생지는 영원한 비밀이에요. 이 세상에서 오직 할아버지만 안다고요."
"걱정 마라, 인석아. 나도 쓸데없는 파리들이 귀찮게 달라붙는 것은 원하지 않아."
혼자 연구해도 부족할 판에 다른 놈들에게 연구거리를 줄 리 만무한 사이클론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은 어떠냐? 상처가 꽤 중하던데 말이야."
"아~ 네. 신관들이 매일 들락날락거리는데 도통 차도가 없나 봐요.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언젠가는 꼭 일어나겠죠. 휴우~"
정자에서 넋을 잃고 있는 그는, 일주일 전에 정신을 차린 후 호크와 사이클론에게 앞뒤의 모든 상황과 이곳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며칠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방 안에만 있다가 3일 전부터는 저렇게 호무관 뒤의 언덕에 있는 정자에서 넋을 잃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호크는 그를 볼 때마다 저쪽 세상은 잊고, 이제 이곳에 정붙이고 살라고 수도 없이 말했지만, 그 사람의 정신은 어디 출장이라도 갔는지 소귀에 경 읽기처럼 도통 반응이 없었다.
'참 내, 무엇에 그리 집착하는 걸까? 정말 할아버지의 말대로 내가 이상한 걸까? 어차피 살아야 되고, 살려면 주위환경에 적응하고 이겨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것이 한국이든 폴렌시아든 결국은 내가 중요한 게 아닌가? 나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닐까? 휴우~ 가족이라? 어렵다. 갑자기 그 보기 싫은 아버지란 작자가 생각날 게 뭐냐. 에이!'
정자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호크는 모르겠다는 듯이 바닥의 돌멩이에게 화풀이를 하고서는 사이클론과 밖으로 나갔다.
거의 죽어가던 자를 들쳐 업고 디안 요새에 도착했던 호크는 신관들을 어마어마한 살기로 협박하다시피 하여 그 사람을 살려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호무관으로 옮겨와 깨어난 사람은 바로 호크가 차원이동을 하던 날, 국방연구소 플라즈마 폭탄의 영향권에 휘말린 나형석 장군이었다.
"빌어먹을! 정말 억울하군! 이건 너무하잖아!"
애처로운 목소리가 공허하게 하늘에 퍼졌다.
"관장님! 영주성에서 손님이 와계십니다."
조금은 화가 난 상태로 쌍검술을 연마하던 호크는 손님이 왔다는 말에, 어차피 마음이 심란해서 연습도 안 됐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는 쌍검을 등에 메고는 관장실로 들어갔다.
"누구신지?"
"하하하하! 나를 모르는가? 하긴, 그럴 기회가 없었지. 하지만 난 그날 요새에서 자네의 눈부신 활약을 지켜보았네. 나는 캐더린의 오빠, 제임스 아서 드모네이일세. 반갑네, 호크."
'헉! 오빠라...? 그렇다면 처남(妻男), 그것도 손위 처남!'
"하하하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캐더린의 말대로 정말 준수하시고 호남이십니다."
드디어 호크의 아부신공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하하하하! 캐더린, 그 애도 참. 내가 뭐 잘났다고 밖에서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지 쑥스럽구먼! 허허! 이거 참 민망하네. 거의 다 그 애가 부풀린 거니까 오해하지는 말게."
"무슨 말씀을! 오히려 들은 말에 부족함이 있는 듯합니다. 실물은 그 이상이신데요."
"허허! 이거 젊은 친구가 입에 아주 꿀을 발랐구먼."
"아닙니다. 저희 가문의 가훈이 '설사 목에 칼이 들어와도 늘 진실을 말하라'입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호크를 보고서는 제임스는 정말 감동을 받았다. 그 엄청난 무위에 저런 겸손함이라니! 평민이라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곧 작위를 수여받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제임스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비참하게 살아갈 뻔한 동생에게 저렇게 괜찮은 남자가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물론 그의 실체를 모르기에 가능한 생각이지만.
호크는 그야말로 수준급의 매너로 제임스를 접대하고 있었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내가 오늘 온 것은 다름이 아니고, 왕성에서 연락이 왔네. 국왕 전하께서 우리 아버님과 자네를 왕성으로 부르셨다네. 아마도 자네의 작위 수여와 이번 전투를 훌륭하게 이겨낸 아버님에게 포상이 있을 거라 생각되네. 한 달 후, 오늘이 출발 예정이니 차질 없이 준비하게나. 병사를 보내려 했으나, 내가 자네를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것이네. 그럼 그때 성으로 오게. 그럼 나중에 다시 보도록 하지."
내성으로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호크의 표정은 마차가 점점 안 보이게 되자 계속해서 유지하던 근엄한 표정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옴과 동시에 사악한 웃음소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큭큭큭! 큭큭! 드디어, 드디어! 가진 무기의 대부분을 써버렸지만, 캐더린을 얻는다면 하나도 아깝지 않아! 허니문아, 기다려라! 잘 가게, 처남! 크하하하하!"
광기로 물든 호크의 웃음소리에 구보를 마치고 돌아온 관원들은 길가에 얼어붙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폐하! 왕명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렇사옵니다, 전하. 말도 안 되는 왕명이십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 흠! 그렇다면 짐이 미치기라도 했다는 뜻이요?"
"그... 그것은 억지이십니다, 전하!"
"이런 발칙한! 이 더러운 것들이! 그래, 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너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멸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성스러운 백성에게 작위를 내리시려는데, 무엇이 옳지 않다는 말이냐? 감히 일국의 왕에게 억지라고! 내 이것들을!"
"머스탱 경, 그 성질 좀 죽이라고 하지 않았소! 진정하도록 하시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저놈들의 말이 하도 발칙한지라......."
케린버그 왕국의 왕성 그랜드 마스터 홀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이번 몬스터 침공을 목숨을 걸고 함께 막아낸 국왕파가 오른쪽에, 로베니아의 친정세력인 케론스 공작파가 왼쪽에 시립해 있었다.
다만 국왕파는 백성들을 위해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는 자부심으로, 그리고 케론스 공작파는 백성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조금 대조적이었다.
그들도 민망하고 부끄러웠기에 어지간하면 이번 궁정회의에서 조용히 있으려고 했지만, 국왕이 꺼낸 인사카드가 너무나 큰 패여서 불같이 반대를 토하고 있던 중에, 격분한 머스탱 공작이 참다못해 칼을 빼든 것이다.
이유야 어째든 국왕 앞에서 검을 빼든 머스탱 공작도 그리 옳은 행동은 아니었기에 겸연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자, 모두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으시오. 케론스 경, 당신은 수도와 각 영지민들이 그를 찬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오? 저 백성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가 보오?"
"하...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공작의 작위를 내리신다는 것은 국가 체제를 흔드는 일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케론스 공작께서 좋은 의견이라도 있소? 있다면 한번 짐에게도 들려주시구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고민하던 케론스 공작은 힘겹게 입을 떼었다.
"전하! 그가 왕국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지만, 공작이란 작위는 나라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막중한 자리인 만큼, 경험이 일천한 자에게 내리시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옵니다. 하나, 그 공 또한 큰 바, 백작의 위를 하사하시는 선에서 결정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봅니다."
"흠, 애석하구려. 본인과 이렇게 생각이 다르다니. 하지만 신하들의 생각을 무조건 반박할 수도 없고, 어쩐다? 하는 수 없지, 그대들의 뜻이 정녕 그렇다면, 그럼 이번 디안 요새 전투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운 호크 경을 백작위에 올리는 데 반대가 없겠소?"
좌중을 둘러본 찰스 국왕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이다. 그럼 어서 왕명을 내리도록 하고. 아참! 호크 경이 잉글햄의 하워드 남작의 딸에게 청혼했다고 들었는데. 맞소, 머스탱 공작?"
"네, 전하! 그러하옵니다."
갑자기 뚱딴지처럼 잉글햄의 하워드 남작의 이름이 국왕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케론스 공작은 불안해졌다.
'갑자기 왜?'
"이런! 사위가 백작인데, 장인이 남작이라니! 보기가 좀 그렇군! 게다가 이번 디안 전투에서 그들 일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았나? 형평상 하워드 남작에게도 백작위를 내리는 것이 좋겠군. 안 그렇소, 케론스 공작?"
'제... 젠장! 당했다. 이런 능구렁이 같은 놈!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렇게까지!'
"그러나... 전하!"
"그럼 호크 경의 공작위를 다시 거론할까요?"
"아... 아니옵니다, 전하. 뜻대로 하시옵소서."
고개를 숙이는 케론스 공작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반면, 찰스 국왕은 이미 네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케론스 공작은 미친 듯이 가구를 때려 부수었다.
"우아아아아! 이 건방진 자식! 찰스, 내 이 녀석의 심장을 갈아 마시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지 못하리라!"
"공작 각하! 진정하십시오, 제발!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호크란 작자를 공작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셨는데, 왜 이렇게 역정을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하! 성공했다고? 뭘? 이보게, 로베르트.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오히려 애송이 국왕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었다고!"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런 멍청한 것! 국왕은 애초에 호크란 녀석을 공작에 올릴 생각이 없었어. 우리가 반대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하워드 남작을 잊고 있던 나의 불찰이지. 모르겠나? 하워드의 잉글햄은 이제 자작령이 아니라 백작령이야! 게다가 백작이 둘이나 된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잉글햄이 보유할 수 있는 군사의 수가 종전보다 세 배는 많아지게 된다, 이 말이야. 이는 공식적으로 국왕의 세를 늘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멍청아! 게다가 그곳은 군사적 요충지야.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저지해왔지만, 이번 사태로 그마저도 힘들게 되었어. 이제 민심은 모두 국왕파에게로 등을 돌렸어! 엎친 데 덮친 격이라더니, 그동안의 고생이 모두 헛일이 돼버렸어. 그 호크란 놈 때문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저들이 그리 비열한 방법을 쓰다니."
누가 누구에게 비열하다고 하는지 모를 말이다.
"이럴 때가 아닌데, 본국에 요청한 인원 보충은 어떻게 되었나?"
"그... 그것이 이상한 게 답신이 없습니다."
"젠장! 형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안 되겠다. 호크, 그놈에게 붙여놓은 어쌔신들은 어떻게 되었나?"
"저 그게... 그들도 나흘 전부터 소식이 끊겼습니다. 아무래도 발각된 듯싶습니다."
"이런, 잘 한다, 잘 해! 어쩔 수 없지. 통신마법을 써야겠어! 준비해라, 로베르트!"
"네? 안 됩니다, 각하. 낮에는 역탐지에 걸릴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밤에 방어마법을 펼친 후에야 통신을 시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더구나 놈들도 설마 하니 이렇게 대낮에 대놓고 통신마법을 사용할 줄은 모르겠지! 어서 준비해! 우리가 우물쭈물해서 이 케린버그에 소드마스터가 둘이나 생겼다. 게다가 사이클론까지. 이것은 상당히 위협적인 전력이야. 무슨 수를 내야 한다! 케린버그는 꼭 불타야 해! 반드시!"
움켜진 케론스 공작의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왜 케린버그를 멸망시키려고 하는지, 그 이면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롯셀리니 추기경, 이번에 케린버그 왕국에서 제법 큰 소동이 있었다는데 들은 바가 있소?"
"네, 황제 폐하, 그러나 소문이 좀 과장되게 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 관심을 가지실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요? 그럴 리가. 앙리 백작의 말에 의하면, 정말 신화적인 전투였다고 하는데. 흠, 아무래도 그런 방면에서는 앙리 백작이 훨씬 났구먼그래."
"폐... 폐하! 하오나 그것은 말입니다......."
"폐하, 근위기사대장이신 앙리 샤를리앙 백작과 총사대 대장이신 루이 필리페 자작입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추기경의 변명은 입속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위대하신 로베니아의 태양이시여, 당신의 영원한 충복, 앙리가 축복하옵니다, 황제 페하!"
"저 또한 페하의 은덕에 오늘도 숨 쉬며 살아가는 로베니아의 백성들을 대신하여 축복하옵니다."
황제가 양손을 내밀자 앙리 백작과 루이 자작이 나란히 국왕의 손에 키스했다.
"호호호! 어서들 와요. 지금 추기경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앙리 백작이 이야기해준 것과는 다르게 별일이 아니고, 그저 소문이 과장된 것이라고 하던데, 그런가요?"
"폐하! 어찌 제가 감히 위대하신 로베니아의 주군에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난번에 제가 해드린 이야기를 재미있어 하셔서 당시 현장에 있던 자를 데려왔습니다, 폐하!"
"오오~ 정말이에요? 오호호호! 역시나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백작뿐이라니까. 어서 들어오라고 해요."
남부의 대제국 로베니아의 황제, 루이 드 발렝은 선천적으로 여성 호르몬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목소리라든가 신체가 여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성격까지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성격은 그야말로 지옥의 야차와 같이 잔인하고, 무서우리만치 냉정했다. 그랬기에 지난 30년간 이 거대한 제국을 잡음 없이 이끌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큰 콤플렉스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강한 신체를 가진 남성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검사들을 동경하고 검투사들의 무용담을 듣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위대하신......."
"그만! 인사는 됐고, 어서 디안 요새에서 보고들은 것을 고해라, 어서!"
불려 들어온 기사를 재촉하는 황제의 얼굴은 그야말로 부모님이 들려줄 옛날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와도 같이 들떠 있었다.
디안 요새에 파견 나가 있던 로베니아의 젊은 기사는 그날의 전투에 적당히 살을 붙이고 하면서 아주 맛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야기를 듣는 황제는 간간이 무릎을 치면서 호응했고, 그 모습에 앙리 백작과 루이 자작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석양이 물들어가던 저녁 무렵에야 그 엄청난 전투가 끝이 났습니다. 그런 후, 언덕에 앉아 저녁놀에 감싸인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영웅, 그 자체였습니다."
추기경에게는 너무나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황제에게는 요 근래 들었던 그 어떤 무용담보다 스펙터클하고 판타스틱한 이야기였기에 매우 만족했다.
당연히 재미있게 이야기를 한 기사에게는 많은 포상금이 내려졌다.
"오호호호! 이렇게 재미날 수가 있나."
"즐거우셨습니까, 폐하?"
"즐겁다마다요. 제 손 좀 보세요. 땀이 가득하네요. 호호호호! 앙리 백작! 그렇다면 그 호크란 자가 우리 로베니아 제국의 스카라무슈(Scaramouche) 정도의 실력자란 소리인가요?"
"흠, 글쎄요? 저도 직접 보지 않아서 뭐라 확실히 드릴 말씀이 없지만, 스카라무슈, 즉 검기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을 저들은 소드마스터라 부른다고 합니다. 제가 만나본 케린버그의 소드마스터, 그러니까 스카라무슈 머스탱 공작은 대단한 자였습니다. 아마도 루이 자작과 거의 대등한 실력일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호오! 그 정도나?"
놀랍다는 루이 황제의 제스처에 앙리 백작은 황망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저희 제국에는 스카라무슈가 무려 1백 명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길."
"호호! 그렇지요. 내가 잠시 그걸 잊었군요."
'빌어먹을! 그것 때문에 나의 대업이 늦어지고 있는데, 뭐? 잊었다고? 국가 재정사용에 항상 최우선으로 삼고 있으면서. 저 빌어먹을 호모자식은 검사라면 사족을 못 쓰니.......'
추기경이 자신을 욕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루이 황제는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호호호! 기회가 된다면 우리 제국의 기사로 삼고 싶은데."
"그것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케린버그의 백작입니다, 황제 폐하!"
"하기야 어느 멍청한 왕이 그런 인재를 그냥 두겠어. 호호호호! 아쉽지만 포기해야지. 하지만 언제라도 우리 쪽 스카라무슈와 한번 대결을 시켜보고 싶군. 폴렌시아 최고의 검객이 겨우 저 케린버그에 있다니,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
'미친 변태새끼!'
추기경은 루이 황제가 비밀리에 즐기는 지하 검투사 경기를 잘 알고 있다. 검투사들의 피를 보면서 흥분하는 루이 황제를 보면서 그는 늘 변태자식이라고 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린 소녀들의 피를 빨아 먹는 추기경은 변태 할아버지쯤 되나?
아니다. 그에게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루이 황제와는 다른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후일 밝혀질 그의 피 맺힌 아픔의 이야기가 지금은 그저 가슴에 묻어둔 채, 추기경의 반쯤 숙인 얼굴에 가렸지만, 언젠가 이 거대 제국, 로베니아를 손아귀에 쥘 기회를 노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롯세리니 추기경!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샹그릴라에서 우리 로베니아에 신전을 열어달라고 사신을 파견해왔는데, 이번에도 경의 생각은 그대로요?"
"폐하! 그것은 절대로 안 될 말입니다. 폐하께서도 선황 때 저들 쥬(Ju)를 믿는 자들이 얼마나 추악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직도 그 상처는 백성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절대로 불가한 사항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송구스럽게도 그것은 추기경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샤르리엥 지방에서는 쥬의 신상을 세워놓고 오물을 투척한다고 합니다. 백성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의 깊이가 아주 깊사옵니다."
"흠, 앙리 백작마저도 그렇게 말하니, 나도 더 이상 거론치 않겠소. 그만들 나가보시오!"
'휴~ 이번에도 샹그릴라 건은 잘 넘겼군. 절대로 놈들이 내 땅에 발을 들이밀게 놔둘 수는 없지. 그리고 이 바보 같은 녀석들! 그 호크란 놈 뒤에는 사이클론이란 대마법사가 있었단 말이다! 제대로 된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지. 나중에 황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아주 재미나겠는데? 쟝에게 말해서 어디 그럴듯한 이야기꾼을 찾아내서 황제를 기쁘게 해주어야겠군. 저 앙리 자식의 재수 없는 얼굴을 보니 더 늙는 거 같아.'
"흠, 그럼 앙리 백작, 루이 자작, 다음에 또 뵙기를."
"네, 추기경님도 안녕하시길."
복도에서 사라지는 추기경을 바라보던 앙리 백작과 루이 자작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늙은 여우 같으니라고!"
"보면 볼수록 위험한 자야! 어쩌자고 저런 자를 가까이 하시는지 걱정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앙리 백작님! 저자의 세력이 정말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 좀 알아보았나?"
"정보원을 스무 명이나 보냈는데 단 한 사람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미쳐서 말이죠. 저자의 영지는 다른 사람들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는 폐쇄구역입니다. 아무리 페브리페교의 성지라지만,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병사들을 동원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휴~ 알겠네. 나도 왕비님께 보고해야겠네. 자네는 추기경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게나. 그리고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샹그릴라의 템플(Temple)을 싫어하는지 알아보게. 뭔가 석연치 않은 게 있어."
"알겠습니다, 앙리 백작님!"
거대한 로베니아의 왕성 복도에서도 보이지 않는 권력암투로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