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5화 (5/55)

Chapter 5. 몬스터 침공

수련장의 두 사람은 마치 돌풍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옷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세차게 휘날렸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긴장감도 마치 팽팽히 당겨놓은 실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바람이 멎고 고요함이 찾아왔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꿀꺽!

마치 그 소리가 공격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호크가 쌍검을 교차했다가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빨랫줄처럼 튕겨졌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동작을 제대로 본 사람은 드물었다. 다만 호크가 머스탱에게 달려가 붙었다가 떨어진 것만 보았을 뿐, 호크가 3번이나 검을 휘두른 것을 제대로 본 사람은 머스탱의 호위기사와 호무관의 몇몇 제자들, 그리고 영주의 기사들 뿐이었다.

'후우~ 이것이 소드마스터라는 거군. 가볍게 내 검을 막아내다니! 후우! 후우~ 숨을 깊게, 그리고 더 낮게 깊이깊이, 저 깊은 심연으로... 후우~ 후우~!'

그동안 잉글햄에 도착한 이후로 밤마다 미친 듯이 수련에 매달린 탓에 그의 실력은 깨달음의 바로 직전까지 다가와 있었다. 예전에 그의 특공무술 사부인 권 상사가 해주었던 이야기들 중 전혀 이해되지 않았던 많은 부분들을 지금은 거의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였다.

태극심법을 극성으로 익힌 뒤로는 몸 안에 쌓이는 기의 양에 자신이 더 놀라고 있을 정도였다.

사이클론이 가끔씩 그의 상태를 물어보고, 마법으로 무언인가 매일 자신의 몸을 체크하면서 마나의 운용에 대해 함께 나눈 수많은 대화 또한 호크의 눈이 트이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다시 눈이 깊게 가라앉은 호크는 별안간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권투선수처럼 스텝을 옮기면서 머스탱의 약점을 찾기 위해서 움직였다.

머스탱은 머스탱대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는 생각했지만, 방금 전에 나눈 한 수는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가슴 언저리를 보니 희미한 칼자국이 가슴의 하드레더(Hard Leather)에 새겨져 있었다.

'훗! 이거 내가 긴장한 건가? 이 머스탱이! 찰스 머스탱이! 허허허! 나도 늙나 보군. 하지만 손이 떨리도록 신나는군. 이렇게 제대로 싸울 만한 상대를 만나보는 게 얼마만이지? 그럼 어디 다시 즐겨볼까?'

이내 머스탱의 애검인 선 블레이드의 검신에 붉은 기운이 덮어가기 시작했다.

"오... 러... 블레이드!"

"과... 과연 소드마스터로군!"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일반 백성들은 물론 기사들까지도 탄성을 금치 못했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구경거리지만, 기사들로서는 평생의 염원인 오러블레이드를 눈앞에서 목격하자 배울 만한 것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집중했다.

'이런! 늙은 색마께서 이제부터 제대로 힘을 쓰시려나 보구먼. 검기(劍氣)라... 조심하지 않으면 첫날밤도 치르기 전에 목이 날라 가겠는걸.'

양손에 들린 검을 돌리며 이번에도 호크가 먼저 선공을 했다. 지그재그로 스텝을 밟으면서 머스탱에게 치고 들어간 호크는 상대의 면전에서 뛰어올라서 왼손의 검과 오른손의 검을 좌우로 한 번씩 베었다.

머스탱은 오러를 머금은 검으로 가볍게 호크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손목을 돌려 검을 회전시켰다. 그리고는 호크를 향해 찔러갔다.

호크는 오러에 불타는 듯한 상대의 검을 양손 검의 십자 교차로 막아낸 다음, 그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키면서 뒤로 몸을 뺐다.

그러나 머스탱이 그리 호락호락 상대를 보내줄 리는 만무하다.

달아나려는 호크에게 따라붙으면서 자신의 검을 상하좌우로 엑스 마크를 남기게 휘둘렀다. 그러자 땅이 깊게 파이면서 검기가 호크를 쫓아왔다.

이제 막 땅으로 내려서던 호크는 검기가 자신의 코앞에 닥치자 서둘러 단전의 기운을 검에 실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어나 호크의 모습이 잠시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먼지가 가라앉자 눈에 보인 장면에 구경꾼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우와! 멋지다!"

"저럴 수가! 오러윈드(Aura Wind : 검기를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는 원거리 공격법)라니!"

'크흑! 위험했다. 젠장, 검풍이라니! 완전히 무협소설이군. 정신 차려야겠다.'

머스탱 공작의 검 끝에서 시작된 두 줄기의 검기에 깊게 파인 홈이, 수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검을 교차해서 막고 있는 호크 앞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호오! 이거 소드마스터의 오러윈드를 막아내다니! 놀랍군. 마법검인가? 아닌 거 같은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검인데... 저럴 수가!'

안력을 돋우어 호크의 쌍검을 살피니 마나가 호크의 검과 호크의 몸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처럼 마나를 시각적으로 응축시키지는 않았지만, 상대방 역시 마나를 검에 실어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양이었다.

"놀랍군! 자네도 소드마스터였나?"

머스탱의 이 한마디에 군중들은 난리가 나버렸다.

"소... 드마스터? 호크님이......?"

호무관 관원들도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지 에밀 일행만이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머스탱의 호위기사 중 소드익스퍼트 상급인 뉴튼 또한 호크의 절륜한 실력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의 청년인데, 어떻게 저런 실력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글쎄, 소드마스터니, 익스퍼트니 그런 것은 내 무술하고는 맞지 않는 이야기이고, 내가 아는 것은 바로 대한민... 아니, 호무관의 특공무술일 뿐이지! 일기당천! 백전백승!"

호크의 호기로운 외침에 호무관 관원들의 가슴속에서는 뿌듯한 마음이 퍼지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호무관 관원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함성을 외쳤다.

호크가 손을 들어 보이고서는 몸에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하하하하! 이거 정말 십 년 만이로구먼. 이렇게 원 없이 싸워보는 거 말이야. 전쟁 중에도 모두가 몸을 사려서 말이야. 자! 더 놀아 보자고. 나는 지금 즐거워서 미칠 것 같네."

"미친 늙은이 같으니라구. 지금 이게 즐거워......!"

'...간 떨어지겠구먼.'

뒷말은 체면 때문에 속으로 삼켰지만, 정말 호크는 머스탱과 손을 섞을 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상대는 수많은 전장을 누벼온 백전노장이었고, 호크는 실전 경험이 상대에 비해 일천했기에 경험에서 오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머스탱 공작이 먼저 득달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발이 공중에서 뜬 것처럼 그가 나는 듯이 호크에게 압박을 가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호크 또한 진기를 전신에 돌리면서 가운데로 찌르고 들어오는 검을 위로 쳐내고 간격을 벌렸다. 상대방과 자신의 거리나 위치의 관계가 간격이다. 호크로서는 치기 쉽고, 상대인 머스탱으로서는 치기 힘든 거리가 이상적이지만, 그 간격이란 게 항상 일정하지 않다. 가만히 제자리에서 맞으려고 서 있을 상대방이 어디 있겠는가! 호크는 지금 그 간격이라는 검도의 묘리를 목숨을 담보로 체득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던 두 사람은 간격이 서로 얼굴의 점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든 채 마주한 채 검을 교환하고 있었다.

챙! 챙! 챙!

캉! 캉! 캉!

검을 든 두 사람이 서로 1미터를 떨어지지 않은 채 쉴 새 없이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베고 찌르고 하는 동작들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지금 호크와 머스탱은 서로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두 사람이 대결하고 있다는 것도, 한순간의 실수로 목이 날아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검에 빠져들었다.

수백 차례 검이 오고 간 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추어 섰다.

두 눈을 꼭 감은 호크는 지금 깨달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머스탱 또한 그동안 보일 듯하면서 보이지 않던 그 경계가 보였기에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면서 격렬히 몸을 떨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사람들은 손을 가리고 눈을 막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기사들은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있었던지라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후후후! 정말 고맙네. 호크라고 했나? 자네 덕분에 십 년 동안 나를 괴롭히던 숙제가 풀렸어."

대결 전에도 50대 후반의 건장한 모습이었는데,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더 젊어진 듯했다.

호크 또한 두 눈의 깊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가라앉았다.

머스탱의 눈에만 호크의 전신 주위로 일렁이는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대단하군, 대단해! 내 자네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군. 하하하하!"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새 말투까지 달라진 호크, 역시나 강자와의 대결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다.

"꺄아악!"

"저길 봐! 봉화다! 어서 서둘러!"

"이런! 하필이면. 어쩔 수 없지. 자네와의 대결은 뒤로 미뤄야겠군. 불청객이 몰려왔네!"

삽시간에 장내에서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져 나가자 당황한 호크가 소리쳤다.

"뭐야! 이게 무슨 난리야, 갑자기? 뭐야? 무슨 일인데 다들 소란인 거야!"

"스승님! 몬스터들이 디안 계곡의 방어선까지 몰려온 거 같습니다. 붉은색 봉화가 피워 올랐다는 뜻은 몬스터들이 디안 요새의 성벽까지 이르렀다는 말이고, 봉화의 수가 세 개라는 것은 그 수가 측정 불가의 대규모라는 뜻입니다. 저와 피터슨은 기사단에 복귀해야 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핸들러와 피터슨이 급히 내성으로 돌아가자, 수련장에는 호무관 사람들만 남았다.

"이런, 개쉐이~ 들! 내가 장가 좀 가겠다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 거야! 이익!"

"관장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지금 영지의 남자들은 모두 디안 요새로 무기를 들고 몰려가고 있을 겁니다. 저희도 어서 가서 힘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왜? 자고로 위험한 곳은 근처에도 가지 않는 게......."

"흠, 대규모 몬스터의 침입을 막아내는 공을 세운다면, 혹시 작지만 귀족의 작위라도 받지 않을까"

혼자 말하는 듯했지만, 사이클론의 중얼거림이 호크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당연하지! 영지의 위험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법! 사범들은 모두 무기를 챙겨라! 실전반, 특공반을 이끌고 디안 요새로 간다! 소년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록!"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린 호크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전의를 불태웠다.

'나의 연애전선을 방해하는 자는 다 쓸어버리겠다!'

즐거운 청춘을 보내지 못한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호크의 몸 주위에서 강한 냉기가 폭사되자 사이클론은 불쌍하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석아, 빨리 가자. 이러다가는 공이 다른 놈의 손에 떨어지겠다!"

사이클론의 재촉에 호크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관원들을 이끌고 디안 요새로 향했다.

케린버그의 가장 중요한 방어지역, 디안 요새!

로스크 산맥과 유일하게 연결되는 디안 계곡은 깎아지른 듯한, 10킬로미터의 거대한 협곡이고, 브이자로 패인 이 협곡을 마치 댐처럼 막아놓은 것이 바로 디안 성벽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지만 천 년도 훨씬 전에 칼드레고니아란 블랙 드래곤이 너무나 많은 수의 몬스터가 인간 세상을 어지럽히자, 로스크 산맥 전체에 결계를 쳐놓아서 이곳, 디안 협곡으로만 인간이나 몬스터가 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어른들이 꾸며낸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 몬스터들이 다른 곳으로는 인간 세상에 넘어오지 못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래서 다른 많은 왕국에서도 국가를 초월해서 디안에 많은 물자를 지원해왔고, 적은 수나마 파견식으로 기사들을 파견해놓고 있었다. 케린버그 또한 왕국의 정예 기병, 보병 등 무려 10만의 군세를 파견해놓고 있는 군사 요충지였다.

저 북쪽의 레센 제국의 도발에 대한 염려도 있었지만, 하여튼 호크 일행이 호든가를 지나 하늘 숲 속을 벗어나자 수많은 청장년들이 갑옷에 무기를 움켜쥐고서는 디안 계곡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호크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향토예비군이 아닌가!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지키세! 너와 내가 하나 되어 내 마을을 지키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지키세!'

어릴 적에 들었던 향토예비군 노랫말이 생각났다. 평상시 자신의 생업에 충실하다가 이렇듯 봉화가 피어오르는 국가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잉글햄의 주민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자신의 가족과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디안 협곡으로 전의를 불태우는 사람이 모여들었다.

"샹그릴라의 쥬(Ju)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내려주소서!"

계속해서 떨리는 몸을 억누르는 디안의 제1수비대장 레온은 성벽 밑을 바라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가 입속으로 들어가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병사들의 창끝이 모두 떨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곳이 뚫리면 모두 끝장이야! 우리의 죽음으로 백성들이 편안할 수 있다면 기꺼이 죽어주마.'

"모두 정신 차려라! 이 디안 요새의 성벽은 무적의 철옹성이다! 절대로 뚫리지 않는 성벽이니 두려워 말라! 자! 디안의......."

"와! 와! 케린버그에 영광을!"

"무슨 일이지? 이봐! 캐론, 밑에 무슨 일인가?"

수비대장은 성벽 위의 병사들을 독려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후방의 진지에서 함성이 터져 나오자 당황했다. 성벽 위 병사들도 뒤를 돌아볼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헉헉! 대장님, 기뻐하십시오! 머스탱 공작 각하가 오셨습니다!"

"뭐라고? 기별은 넣었지만 어떻게 벌써!"

"그것이... 마침 잉글햄에 와 계셨답니다!"

"오오, 자애의 신, 에바른이시여! 정녕 저희들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전령의 보고를 들은 후,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끝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찰스 머스탱 공작! 불타는 태양검, 소드마스터!

머스탱 공작의 이름값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워! 워! 뉴튼, 어서 성벽의 첨탑으로 가자! 수도에서 출발한 기사단은 아직인가?"

말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면서 앞으로 내달리는 머스탱 공작은 뉴튼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공작 각하, 아마도 지금쯤 무장을 끝내고 마법진의 이동을 준비 중일 것입니다."

"그래! 자, 어서 가보자! 봉화가 세 개라니, 도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왠지 불길해."

뒤따르는 뉴튼도 오늘따라 저 성벽 너머가 마치 알 수 없는 악의 기운으로 가득한 것 같아서 불안했다.

수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디안의 요새로 들어선 호크는 그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졌다.

해발 1,750m의 로스크 산맥을 가로막고 협곡에 우뚝 서 있는 디안 요새는 길이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길이가 200m, 높이는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 평에 이르는 큰 규모였다. 잉글햄의 성은 이곳에 비하면 마치 레고 장난감 같았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2중 구조라는 것이다. 우선 든든한 외벽이 있고, 그 안에 외벽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벽이 협곡을 둘러싸고 있다. 외벽과 내벽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었다.

내벽은 성벽을 직각으로 쌓지 않고 그 밑 부분을 45도 각도의 경사면으로 만들어, 해자를 넘어온 적들이 성 밑까지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요새 밑 부분을 경사지게 만든 축성법은 지진에도 견딜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요새의 내부는 잉글햄에서 몰려든 자치군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수많은 정규군들이 높은 성벽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자치군들은 익숙하게 정규군들을 돕고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요? 그렇게 멍하니 있지 말고 저 건물로 가서 할 일을 배당받으시오!"

호무관 일행은 한 병사의 지시대로 붉은색 건물로 들어갔다. 그 수가 어림잡아 2백 명 정도 되고, 모두가 하얀색 도복을 입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대여섯 개의 책상에 앉은 서기관들 앞으로 자치군들이 역할을 배당받기 위해 죽 늘어서 있었다.

"뭐요, 댁들은! 줄 서요, 줄 서!"

"아니, 뭐야! 이것들이 기껏 도와주러 왔더니, 내가 그리 한가... 읍읍!"

"하하하하! 저희들은 호든가의 호무관 수련생들입니다. 일반 자치군들보다 훨씬 전투력이 좋으니, 전선에 배치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또 제 성질대로 날뛰려는 호크의 입을 사이클론이 잽싸게 막고서는 대신 서기관에게 이야기했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던 사이클론의 생각과는 다르게, 호무관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서기관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고는 호크를 풀어주었다.

이에 호크는 더럽다는 듯이 사이클론을 한 번 째려보고서는 입을 닦아냈다.

"하하하! 이거 호무관 분들이셨군요. 저희 아들들도 호무관원생입니다. 그 허약했던 애들이 이제는... 아니, 이거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때입니다. 수도에서 정규군이 오기 전까지 외성 벽을 맡아주십시오! 이봐, 자네! 어서 이분들을 제1수비대로 안내해드리게!"

서기관의 말에 다른 수련생들은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할 때라는 생각으로 흥분했지만, 적당히 발만 담갔다가 뺄 요령이었던 호크는 사이클론 때문에 최전선으로 배치 받게 되자 입이 대자로 나왔다.

하지만 사이클론의 한마디에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호크였다. 이곳이 뚫리면 캐더린이고 뭐고 다 끝장이라는 말과 함께, 이곳에서 너의 활약상이 소문나면 아마 캐더린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겠느냐는 그럴듯한 말 때문이다.

그 흔한 미팅도, 소개팅도 못해보고 낯선 아버지와 함께 산속을 헤맸던 청춘 권혁! 이제 그 울분을 보상받으려 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미녀와 함께 행복한 삶을 살려는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자에게 줄 선물은 오직 저주와 죽음뿐이라고 다짐하는 호크였다.

물론 사이클론이라는 노마법사의 손바닥 안에 꽉 잡힌 줄도 모르고 말이다.

병사의 안내로 성벽 밑으로 이동한 호크 일행들은 마법진을 이용해서 성벽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 너무 높은 곳이라서 이렇게 마법진을 이용해서 이동했다.

호무관 일행들도 처음이었지만, 마법진을 처음 경험해본 호크는 속이 좀 울렁거리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자신의 관원들 앞이라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관리를 했다.

2백 명의 인원을 한꺼번에 옮길 만큼 거대한 마법진에 대마법사 사이클론도 매우 놀랐다.

'흠! 역시나! 드래곤의 작품이란 것이 사실일까?'

사이클론도 이 마법진의 원리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이곳의 시설물들은 대부분 사용법만을 알지, 그 작동원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몇 천 년 전부터 그렇게 내려왔을 뿐, 아무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법진이 있는 첨탑에서 성벽의 연결다리로 나오자, 높은 고도라서 그런지 제법 강한 바람이 불었다. 다리를 다 건너서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외성 벽이었다.

먼저 올라간 관원들의 입에서 경악스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저... 저!"

"세... 세상에!"

그 덕에 위로 올라가는 호무관 일행의 발걸음도 멈춰지게 되었다.

"어이! 뭐 하는 거야! 어서 빨리! 빨리 앞으로 가지 못해!"

자신이 언성을 높여도 앞에서 꼼짝하지 않자, 호크는 가볍게 점프해서 관원들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라 성벽 모루 위에 올라섰다.

"꾸에웩! 크어어어억!"

"이런 미친! 이게 다 뭐야!"

요새의 성벽 밑은 온통 녹색 물결이었다. 전에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메뚜기 떼가 논밭을 덮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과 흡사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단지 메뚜기 떼가 아니고 오크에 고블린, 오우거, 트롤, 미노타우르스 등등 수백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협곡을 가득 메운 것도 모자라서 무식하게 해자를 동료의 시체로 메워가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주 깊고 넓은 해자였지만, 인해전술에는 당할 수 없는 듯 거의 절반이 메워져버렸다.

뒤에 서 있는 몬스터들이 빨리 안 가고 뭐 하냐는 듯 괴성을 질러대니, 밑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성벽 위에서는 몬스터들의 살기가 피부로 직접 전해져 따끔거릴 정도였다.

이 정도 살기와 공포라면 무척 두려울 텐데, 병사들의 표정은 두렵다기보다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병사들의 시선을 따라가니 그곳에는 좀 전에 자신과 한차례 대결을 벌였던 머스탱 공작이 성벽의 초소 위에서 팔을 낀 채 당당히 서 있었다.

'훗! 저 영감 때문에 병사들이 저렇게 용기를 낸다, 이건가? 이런 것이 바로 카리스마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나도 우리 관원들에게 저런 카리스마를 심어줄 좋은 기회다, 이건데.'

머리를 재빠르게 굴린 호크는 성벽의 격자 위에 올라서서 관원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웬걸, 관원들의 얼굴은 두려움보다는 '자! 한번 붙어보자'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동안 좀 험하게 관원들을 굴렸던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얼차려가 생활화되어 있고, 대한민국 수색대와 동일한 하루 일과와 악과 깡을 기르기 위해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대련과 훈련을 일상으로 지내온 이들에게는 오히려 어설프게 굴다가는 망신만 당할 상태였다.

'이런, 오늘 보니 애들 눈빛이 장난이 아니네? 해병 특전대냐 니들이? 에고고고, 내가 너무 갈궜나?'

"에휴! 내 주제에 무슨 카리스마냐. 애들아! 가자!"

"넵! 악으로 깡으로!"

두 눈으로 보고 있지만,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머스탱 공작은 난감해 하고 있었다. 이 정도의 몬스터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치 폴렌시아 대륙에 있는 모든 몬스터가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아니, 폴렌시아 대륙에 있는 모든 몬스터를 모아도 눈앞에 있는 것보다는 적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수가 나타난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머스탱은 이 상황을 수도에 알리고 국왕에게 피신할 것을 요청했지만, 백성들을 버리고 절대로 떠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자신도 전선으로 달려오겠다고 하는 것을 말리는 데 겨우 성공했을 뿐이다.

저 대군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벌써 다른 국가에서 파견 나온 기사들이 자국으로 줄행랑을 친 지 오래다.

이 소식은 벌써 여러 나라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들은 자국에 피해가 없이 몬스터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하면서 문을 꼭 걸어 잠글 것이 분명했다.

케린버그의 운명은 지금 풍전등화였다.

갑자기 늙어버린 듯 수척한 얼굴의 머스탱 공작은 성벽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서는 조금 표정이 좋아졌다.

'호오~ 저 친구도 왔군. 그래! 저 친구가 도와준다면야 조금은 숨을 돌릴 수 있겠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바로 호무관의 호크였다.

호크 역시 머스탱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머스탱도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단지 뉴튼만이 버릇없는 호크의 행동에 눈치를 줄 뿐이지만, 그렇다고 신경 쓸 호크가 아니었다.

사이클론만이 중간에서 난처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이거 고맙군. 강력한 원군이 도착했으니 말이야!"

"뭐, 영감님 도우려고 온 것은 아니니까 너무 좋아하지는 마시죠!"

"여... 영감? 감히 왕국의 공작님에게, 이런 무례한 녀석을 봤나!"

"아아, 그만하게 뉴튼. 이 친구는 괜찮아! 하하! 이보게, 호크라고 했나? 좋아. 호크,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승산이 있겠나?"

자신의 부관을 진정시킨 머스탱 공작이 호크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호크는 턱을 손으로 괴고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머스탱 공작에게 바짝 다가갔다.

이에 머스탱 공작은 뒤로 살짝 물러섰다. 물론 호크가 두렵거나 해서가 아니고, 갑자기 바뀐 호크의 표정이 너무나 간사하고 사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뭐... 뭔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뭐 다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아하하하하!"

"허허! 참, 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좀 쉽게 이야기해보게!"

"아이참! 이거 직접 말하기도 뭐하고, 참 내......."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에게 눈을 깜빡이는 호크를 보면서, 사이클론은 내심 '저런 뻔뻔한 놈을 봤나' 하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방법을 알려준 것은 자신이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 설마하니 저렇게 대놓고 요구할 줄은 사이클론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흠흠, 공작님, 사실은 말입니다......."

사이클론이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서 호크의 내심을 공작에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머스탱 공작은 한참을 크게 웃었고, 호크는 자신 스스로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겨우 웃음을 멈춘 머스탱 공작은 호크의 어깨를 잡고서는 마구 흔들어댔다.

"크하하하! 난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얼마든지 들어주지. 아니, 내가 직접 중신을 해주지. 대신, 저 몬스터들을 다 물리치고 나서 일이네. 그렇게만 된다면 나, 머스탱의 이름을 걸고 자네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네."

머스탱 공작의 확언에 호크의 입 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한편, 케린버그의 수도, 왕성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외교를 담당하는 귀족들은 각종 통신마법으로 주변국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필사적이었고, 백성들도 분연히 무기를 들고 수도 방어를 위해 나섰다.

각 영지들도 주변 영지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건국 이래 최고의 위기상황이었다.

"헬렌 경,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네, 전하! 지금 알버스크와 스베인 왕국에서 기사단과 병력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샹글리라에서 대규모의 신관들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겨우 두 곳에서? 다른 왕국들은? 허허! 참담하구만. 그보다 로베니아 제국에서는 파병 움직임이 없소?"

"그... 그것이......."

"역시나... 내정간섭에는 열을 올리면서, 막상 왕국의 위기에는 모른 척하겠다? 이대로 방관하다가 북부 왕국들이 몬스터들로 약화되면 그 야욕을 드러내시겠다, 이거로구먼. 더러운 놈들!"

"전하!"

"내 나라, 내 백성들이 위기에 처했는데, 왕이 된 자가 자신의 힘으로 지켜주지 못하고 다른 나라에 의지하려고 하는 내 자신이 참으로 한심하구려."

힘이 없어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 슬퍼하는 군주 앞에서, 정작 자신도 힘이 없어 주군을 돕지 못하는 헬렌 백작은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시종장! 내 갑옷과 검을 준비하라! 내 직접 디안 요새로 가겠다!"

"전하!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지금 몸을 피하셔도 모자란 판국에 전선에 가신다니요!"

"뭣이라! 몸을 피해! 네가 정녕 죽고 싶더냐! 내 땅이, 내 백성이 죽어 가는데, 나만 살자고 도망을 가! 케린버그의 백성들이 없다면 내가 누구의 주군이고, 누구의 왕이란 말인가? 다시는 그 소리를 입에 담지 마라! 근위기사단은 뭐하는가! 어서 디안 요새로 간다!"

망토를 휘날리면서 국왕이 사라지자, 대전 안에는 대신들만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은가요, 헬렌 경!"

"허허... 어쩌겠습니까,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이 저리 큰 것을. 저도 창고에 있던 제 갑옷을 오랜만에 꺼내야겠습니다. 하하!"

허무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재상, 헬렌 백작을 보면서 나머지 대신들도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 걸음이 우국충정의 길인지, 생존을 위한 도망의 길인지는 각자의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번쩍! 쿵!

"우웨엑! 우으욱!"

[어서 오세요, 성자님. 오랜만이네요!]

"우하~ 아구구구! 이거 마법진보다 더 속 뒤집어지네. 우욱!"

[꺄! 더러워, 더러워! 이렇게 아름다운 성지를 토사물로 더럽히다! 성자님, 미워요! 흥!]

호크는 막 넘어오던 어제 먹은 아침 식사물이 도로 위장 속으로 들어가는 전율을 느껴야 했다. 텔레포트로 인한 울렁증보다 저 숲의 스톤(Stone) 트로이얀의 닭살이 더 공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으응, 미안하게 됐다. 진작 이럴 거라고 말해주었으면 비닐봉투라도 준비했지."

구차한 변명을 하는 호크를 보면서 트로이얀이 까르르 웃었다. 나뭇잎이 사방으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호크는 앞으로 저 나무괴물과 될 수 있으면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이세요? 인간세상이 궁금하다면서 가신 분이? 아! 혹시 이 아름다운 트로이얀이 보고 싶어서 돌아오신 건가요? 아~ 어떡하지? 전 인간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어쩜 좋아!]

화염방사기로 트로이얀을 재로 만들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자제한 호크는, 자신의 짐을 찾으러 왔다는 말로 겨우 트로이얀을 상상의 세계에서 꺼내왔다.

호크의 말에 트로이얀이 손 같은 가지들을 들어 올리자 이내 몸통이 드러났다.

"잘 있었니, 얘들아? 어디 보자, 너는 필요 없고, 너도 그렇고. 흠흠, 그래! 이것도 가져가야지. 예전 같으면 혼자서 들지 못했을 텐데, 확실히 몸이 좋아지기는 했군! 어라? 이것도 있었네? 내가 이걸 어떻게 혼자 옮겼지? 이상한데? 암튼 있으니 가져가야지. 응차!"

[필요하신 것은 다 챙기신 거예요, 성자님?]

"응, 대충. 그리고 트로이얀, 부탁인데 나를 잉글햄의 디안 요새 근처로 옮겨줄 수 있어? 이 물건들도 함께 말이야!"

[흠, 디안 요새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디안 협곡의 다른 스톤이 있는 곳으로 옮겨줄 수는 있어요.]

"잉? 너 같은 게 또 있단 말이야?"

[저 같은 거라니요!]

"아차! 아니, 너처럼 예쁜 나무가 또 있냐는 말이지. 헤헤헤!"

[호호호! 성자님도. 세상에 저 같이 예쁘고 아름다운 나무는 저밖에 없답니다. 디안 협곡에 있는 스톤은 그저 그곳의 정화를 위해 존재하는 거예요. 저처럼 말을 한다거나 생각을 하지는 못하지요.]

"그거 정말 다행이로군!"

[네? 뭐라고 하셨죠, 성자님?]

"응? 아냐, 아냐. 아무것도. 그럼 부탁해!"

[네, 성자님! 태초에 약속된 그 언약을 위해! 폴렌 스어니 호산 디 오프리!]

환한 빛과 함께 호크와 물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와! 와!"

"물러서지 마라! 우리가 밀리면 케린버그와 우리의 가족들은 모두 몬스터의 먹이가 될 것이다. 힘을 내라!"

그 깊고 넓던 해자도 초록빛 바다로 변해버렸다.

성벽 밑에 나무와 돌을 쌓으면서 올라오고 있는 오크 무리는 그래도 나았다. 트롤과 오우거들이 오크들을 잡아서 성벽 위로 던져대는 통에 성벽 위는 정말이지 난전의 연속이었다.

"비켜!"

슈각!

불의 사자 기사단장 뉴튼이 오크의 허접한 블레이드에 목이 날아갈 뻔한 병사를 구해주고는 쉴 새 없이 성벽 마루에 올라섰다.

돌덩이처럼 날아오는 오크를 베어버린 뉴튼은 어느 정도 성벽에 떨어진 오크들이 정리되자 목이 터져라 외쳤다.

"궁수들은 뭐하나! 어서 화살을 퍼부어라! 성벽 밑으로 집중해서 쏴라! 어서!"

그제야 몸을 숨기고 있던 궁수들이 성벽 아래로 화살을 발사했고, 하늘을 뒤덮을 듯이 수많은 화살들이 성벽 밑으로 날아갔다.

"꾸웨엑!"

"크아아악! 크르륵! 물러서지 마라! ! 물러... 컥!"

엄청난 화살 비가 쏟아지자 오크들을 격려하던 대장 오크도 목에 화살이 뚫린 채 쓰러졌다. 그러나 단지 그뿐, 그 시체를 밟고 수만의 오크들이 더 몰려들었다.

"이 징그러운 놈들!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몰려드는 거야!"

"젠장! 에밀, 입 닥치고 오른쪽 궁수들이나 보호해!"

"알았으니 피터슨이나 도와줘!"

제1수비대의 방어진인 왼쪽 성벽으로 밀고 올라오는 몬스터는 거의 대부분이 오크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수가 문제였다. 베고 또 베고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개미집에서 나오는 개미처럼 끝도 없었다.

호무관 관원들은 뛰어난 실력 덕택에 가장 피해가 적었지만, 문제는 호무관 관원들도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새하얗던 도복도 이젠 짙은 초록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연이 내게 허락한 영광된 힘이여! 그 위대한 힘을 빌리려 하오니, 그대의 뜨거운 숨결로 대지를 불태우소서!"

7서클의 마법사 사이클론이 대단위 공격마법인 화이어 레인(Fire Rain)을 시전하자 성벽과 그 밑에 붙어 있는 수만의 몬스터위로 불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만은 몬스터들이 불에 타버렸지만, 어느새 그만큼의 몬스터들이 성벽에 다시 달라붙었다.

중앙 성벽으로의 몬스터 공격이 제일 심했기에 이곳에는 사이클론과 궁중 마법사들, 그리고 머스탱 공작과 왕궁 근위 기사대가 혼신의 방어를 하고 있었다.

또 한 사람, 황금갑옷을 입고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휘두르는 금발의 장년인 바로 '찰스 론 디스 하베스트 크라운', 케린버그의 국왕이었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제발 후미로 빠지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후욱~ 후욱! 내 병사,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다. 한 놈이라도 더 목을 베어야 해! 헬렌 경, 말할 틈이 있으면 칼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게!"

"전하! 젠장, 비켜라! 천한 미물들이 감히 어디라고! 에잇!"

케린버그의 재상인 헬렌 백작이 자신의 검으로 몬스터 한 마리를 양단했다. 온통 초록색 피로 물든 갑옷과 검이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베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모두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고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기세는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성벽 위에 쓰러진 수많은 병사들의 시신을 보면서 머스탱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결과가 너무나 참담했기 때문이다. 벌써 희생된 병사들만 3만이 넘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저 밑 디안 요새에도 남은 병사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비열한 로베니아의 충복, 케론스 공작이 자신의 병력을 꽁꽁 묶어두었기 때문에 이제 남은 병력으로 버텨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원조를 약속한 나라의 군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뭐 하나! 좀 더 대단위 공격을 퍼부어라! 어서! 이런 젠장!"

마법사들이라고 무한정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마나가 고갈되어서 바닥에 쓰러진 마법사들이 과반수였다. 정말이지 대마법사 사이클론이 없었다면 벌써 디안 요새는 몬스터들이 장악했을 것이다. 아직은 사이클론이 버티고 있지만, 그의 얼굴이 파리해진 것으로 보아 그도 이제 한계에 도달한 것 같았다.

샹그릴라의 신관들이 마법사들에게 달라붙어 신성력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 신관들도 이제 서 있는 자들보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개를 돌려 성벽 주위를 살피니, 병사들의 얼굴이 몬스터의 피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절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밑에서 올려주는 돌과 기름을 기계적으로 들이붓고 던지고 있었다.

병사 하나가 몬스터에게 당하면 성벽 밑에서 대기하던 또 하나의 병사가 달려들었다.

죽음을 불사한 용기가 가상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기사들도 쉴 새 없이 올라오는 몬스터들의 목을 쳐대고 있었다. 오크는 쉽게 처리했지만 오우거나 트롤이 올라오면 희생이 컸다. 이제는 그 많던 기사들의 수가 반 이하로 줄어버렸다. 좀 더 대형 몬스터들이 올라온다면 힘들어질 것이다.

어느새 그 높던 성벽 밑에 몬스터와 인간의 시체로 산을 이루어서 높이가 낮아지고 있었다.

모든 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인간의 전멸이 눈앞에 다가왔다.

머스탱 공작은 오른쪽 성벽 마루에 서서 싸우고 있는 자신의 국왕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우아아악! 케린버그여! 영원하라! 불의 사자단은 나를 따르라!"

머스탱 공작이 검에 오러를 잔뜩 입히고서는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것을 신호로 공작의 기사 단원들이 모두 검에 오러를 빛내면서 뛰어내렸다. 이대로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성벽 밑에서 올라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작! 안 돼! 머스탱 공작! 돌아오시오!"

공작이 몬스터 무리 속으로 뛰어들자 이를 발견한 국왕이 애타게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그 자신 또한 성벽 밑으로 뛰어 내리려 했지만, 헬렌 백작이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안 되옵니다, 전하! 공작님은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전하!"

"하지만 머스탱... 공작이 저기......."

"전하마저 안 계시면 여기 남아 있는 백성들과 병사들은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전하! 부디 보중하옵소서!"

"이... 이! 궁수들은 공작과 기사들을 엄호하라! 어서!"

죽어가는 병사들과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사지로 뛰어드는 부하들을 보면서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삼킨 채 검을 휘두르는 찰스 국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신(戰神)의 모습이었었다.

모두가 죽음과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지만, 자신들의 국왕이 목숨을 내버린 채 성벽 위에 홀로 서서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는 모습은 병사들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빠져나와 검과 창을 들고 다시 싸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용기의 파도가 디안 요새 전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위대한 전설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죽어라, 죽어! 이 지독한 놈들! 끝이 없구나! 호크, 어디 있는 건가! 제발 빨리 나타나게!"

사방의 몬스터들을 무차별로 베어버리던 공작은 자신의 기사단들을 둘러보다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호크가 떠나면서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작님! 하루만 버티세요! 하루입니다. 그럼 제가 뒤에서 다 쓸어버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지만, 왠지 그를 믿고 싶었다. 그의 충복인 뉴튼은 호크가 도망간 것이라고 했지만, 머스탱은 왠지 그가 이 모든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줄 것만 같았다.

"루하트 오메가 옴 쟌 하트 그로디나 슈!"

"무슨 소리지? 어머나! 세상에! 엄마! 엄마! 여기 좀 봐요!"

"무슨 일인데 그러니, 루니?"

호무관의 루니 모녀는 디안 요새에서 실려 오는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호무관은 그야말로 야전병원과 같았다.

너무나 바빠서 오크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인데, 루니가 방에서 놀고 있는 줄 알았던 루니 엄마는 루니의 호들갑에 방 안으로 들어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루니가 호들갑을 떤 원인은 며칠 전에 호무관에 무단으로 들어온 금발의 꼬마였다. 호무관에서 무술을 배우고 싶다고 떼를 써서 기숙사에 머물게 해주었다. 호크는 건방진 꼬마라고 당장 쫓아내라고 했지만, 샌드백 기둥에 하루 동안이나 매달아둔 것이 불쌍해서 루니가 받아준 것이다.

그런데 그 꼬마가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황금빛에 휩싸여서 말이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람!"

"어쩐지! 보통 아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신관인 거 같다."

"신관이요?"

"그래. 아마도 우리를 위해 기도 중인 것 같으니 방해하지 말고 나가자꾸나."

"하지만 위험해 보이는데, 깨우는 게 좋지 않을까?"

"얘도 참! 어서 빨리 나오지 못해! 지금 캐더린 아가씨도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 오셨어! 어서 가자 빨리!"

"정말? 빨리 가요, 엄마!"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가는 루니 모녀는 혹시라도 소년에게 방해가 될까 봐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만약에, 만약에... 이들이 지금 이 소년을 깨웠더라면, 역사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역사학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그때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는 패러독스(Paradox)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어째든 그런 변수는 발생하지 않았고, 소년의 몸에서 나오는 빛이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잉글햄입니다! 주교님!"

"그래요? 틀림없나요?"

"네, 틀림없습니다. 지금 잉글햄의 디안 요새에 그 수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몬스터 무리가 공격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근 영지의 신전에서 파견나간 신관들이 잉글햄에서 성스러운 돌의 기운을 느꼈다고 합니다."

"오오~ 이럴 수가! 예언이... 예언이...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어! 안 돼! 안 돼요! 어서 막아야 해요!"

"성기사단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주교님!"

"좋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어요. 벌써 예언 중 하나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어서 성스러운 돌을 찾아와야 해요. 나머지 두 개의 스티그마(낙인)가 나타난다면 이 폴렌시아는 끝이에요."

"네, 주교님!"

"어찌해야 하옵니까? 쥬(Ju)여! 폴렌시아의 아버지시여! 가르쳐주옵서서!"

그러나 늘 그렇듯 신은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나무괴물이 나를 속여? 야! 빨리 빨리 못 움직이냐? 죽을래!"

디안 계곡 산등성이에 이상한 무리가 나타났다. 인간 1명에 20여 명의 엘프 무리였다.

그런데 엘프들은 모두 어깨에 나무상자를 메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재촉하는 인간은 바로 호크였다.

숲의 신성체인 트로이얀이 텔레포트해준 곳이 디안 계곡이 맞기는 했는데, 그게 디안 요새와 거리가 제법 멀었던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많은 짐이 있던 호크로서는 그야말로 낭패였는데, 다행히 지나가던(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불운한 거지만) 엘프 무리를 발견하고서는 복날에 개 패듯이 두들겨주고서 이렇게 짐꾼으로 부려먹고 있는 중이다.

사실 호크는 그날 엘프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그들이 조화와 평화를 사랑하는 유사인간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더군다나 하필이면 이들은 일반 엘프가 아닌 다크로이드 엘프여서 그 생김새가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몬스터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기에, 호크는 당연히 그들이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잠시 디안 요새를 찾기 위해 멈춘 호크는 방향을 잡기 위해 기감을 최대한 방출했다. 대기의 마나를 느끼기 위해 온몸의 기를 퍼트리자 엄청난 마나의 파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저기다! 가자, 치타들아!"

이미 전의를 상실한 엘프들은 호크의 말에 복종했다.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는 상자를 들고 부지런히 호크의 뒤를 따라갔다. 뒤로 쳐졌다가 그야말로 오징어포처럼 된 자신의 동료를 보았기 때문에 다들 군말 없이 뛰었다.

"다 왔다! 헉! 이런 젠장! 늦었군! 빨리 서둘러야겠다."

디안 요새의 성벽 반대편, 즉 몬스터 무리의 뒤편 오른쪽 산등성이에 올라선 호크는 성벽을 뒤덮을 정도로 성벽을 타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고 마음이 급해졌다. 약속도 약속이지만 저 성벽 위에는 자신이 아끼는 호무관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모두 짐 내려!"

호크는 모두에게 나무상자를 내리게 하고서는 무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참! 니들은 수고했다. 가라! 가! 가라구!"

호크가 가라고 손짓하자 미심쩍은 엘프들은 주저하며 망설였지만, 1명이 움직이자 다들 그 뒤를 따라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엘프들이 모두 사라지자 호크는 나무상자에서 꺼낸 무기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정말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대 병력이 설치해야할 것을 혼자서 해야 하니 시간이 좀 걸렸지만, 이미 보통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육체를 가진 호크에게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하지만 디안 요새 쪽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마음이 급했다. 우선은 계곡에서 자신이 있는 산등성이로 올라오는 길목에 M18A1(클레이모어)를 있는 대로 설치했다. 도폭선들이 얽히지 않게 배열하면서 몬스터들이 올라올 방향을 가늠하면서 설치했다.

좀 오래된 것이라서 불안하기는 했지만, 국산보다 미제 클레이모어가 탄약고에 더 많았던 관계로 어쩔 수가 없었다. 꽤 많은 클레이모어를 설치하고서는 산등성 위에 참호를 만들었다.

참호 위에는 대공화기인 MG50를 설치했다. 몇 번 보지 않아서 설치하는데 애먹었지만, 겨우 거치대에 총을 올려놓고서 장전을 끝냈다. 그 옆에는 K4 고속유탄발사기를 설치해두자 마음이 좀 놓이는 호크였다.

그때, 성벽 밑 몬스터 무리 속에서 오러가 번뜩였다.

"이놈들! 내 시체를 넘지 않고서는 디안 요새를 못 볼 것이다. 자, 덤벼라! 나, 찰스 머스탱이 네놈들을 상대해주겠다!"

줄기줄기 내뿜는 오러 때문에 다가서는 몬스터들이 그 즉시 쓰러졌지만, 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무한정 오러를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새 기운이 빠졌는지 그의 오러는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와 함께 뛰어들었던 기사단도 이제 20명이 채 남지 않았다.

'이제... 이것으로 끝인가? 하하하! 후회 없는 삶이라고 생각했거늘, 아쉽기만 하구나.'

몬스터들의 기세에 밀려 공작을 중심으로 원형진을 만든 기사들은 서로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들도 이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해내고 이뤄낸 사람들의 눈빛이었다. 후회는 없고 자부심과 어떻게 보면 숭고하기까지 한 모습에 공작도 감명을 받아 검을 높게 쳐들었다.

"국왕 폐하 만세! 케린버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자!"

"케린버그를 위하여! 국왕 폐하 만세!"

이제 죽음을 도외시한 그들 앞에 몬스터들이 들이닥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투타타타타!

콰콰쾅!

"꾸웨엑!"

"이게 무슨 소린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몬스터들도 뒤에서 난 굉음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또다시 한차례 굉음이 일고, 하늘에서 몬스터들의 각 신체 부위가 흙더미와 함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갑자기 기사단 앞쪽에 있던 몬스터 무리가 우수수 쓰러지면서 사람 1명이 뛰어 들어왔다.

"헉헉! 영감님, 좀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좀 더 챙겨주셔야겠네요!"

"자... 자네! 와주었구먼, 와주었어!"

"인사는 나중에 하고, 제가 길을 뚫을 테니 저를 따라오세요!"

호크는 K2 소총을 연사하면서 길을 뚫었다. 사격하는 와중에 중간 중간 K413 세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조각조각 나면서 하늘에 수를 놓았다.

머스탱 공작은 정말이지 황당했다. 이제 보니 대단한 마법사임에 틀림없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막대기에서 불을 뿜자 몬스터들이 너무도 간단히 쓰러졌다. 자신과 수하들이 힘겹게 상대하던 몬스터들이 저렇듯 쉽게 당하자 허무하기조차 했다.

몬스터들 중 중형 몬스터들이 괴성을 지르지 시작했다. 오크 무리의 대장들도 호크의 등장을 알아차린 것이다. 성벽으로 향하던 몬스터들이 호크와 공작 일행을 뒤쫓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본 호크는 자신이 예상한 대로 상황이 바뀌자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따라와라! 지옥 구경을 시켜주마. 후우~ 후우~'

"우와아아! 관장님이다!"

"에밀, 저기 봐! 스승님이다!"

"세상에! 마법사였나? 저게 대체 뭐야!"

성벽 위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호크를 아는 사람들은 환호했고, 일반 병사들은 성벽을 오르던 몬스터들이 사라지자 살았다는 안도감에 그저 주저앉을 뿐이었다.

"폐하! 저것 좀 보십시오! 머스탱 공작이... 공작이... 흐흑!"

"나도 보고 있네! 머스탱이야말로 진정한 케린버그의 공작이야! 그런데 저 친구가 바로 그 호크인가 보군! 대단하네, 대단해! 어떻게 저 정도의 실력자가 알려지지 않았던 거지? 게다가 이제 보니 마법사가 아닌가? 머스탱은 검사라고 한 거 같은데?"

"저... 저 녀석이 저렇게 재미있는 것을 숨겨놓고 있었다니! 에잉! 비겁한 놈! 에후후~ 그나저나 때를 잘 맞추어 나타났어. 나도 이제 힘들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사이클론도 정신을 놓아버렸다. 신관들이 사이클론에게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가 정신을 잃지 않고 좀 더 지켜보았더라면 더 흥미로운 광경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했다.

"모두 상자들은 건드리지 말고 올라가세요!"

일행들의 후미에서 몬스터들을 상대하던 호크가 주의를 주자, 기사단원들과 머스탱 공작은 클레이모어를 피해서 호크가 파놓은 산등성이의 참호로 들어갔다.

호크는 일행들이 산등성이로 무사히 피하자 양손에 K2 소총을 들고 연사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막 호크에게 달려들던 오우거 한 마리가 머리에 5.56MM 실탄을 맞고서는 쓰러졌다.

지금까지 호크는 K2 소총 4정을 모두 부숴버렸다. 이 세상에 현대 지구의 무기를 남겨놓을 수는 없기에, 사용 불가능하게 된 소총은 모조리 부숴버렸다. K2 소총은 가스 조절식이어서 중간에 탄이 막히면 곤란했다. 그래서 그냥 부숴버리고 다른 총으로 바꿔가면서 사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접철식 개머리판이 잘 부러져서 이런 식의 전투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했다.

첫 번째 클레이모어 사선에 들어서자 호크는 재빨리 엎드려 뇌관을 집어 들었다. 호크의 사격이 멈추어지자 순식간에 성난 몬스터들이 밀려 올라왔다.

"꾸웨억!"

"취익! 저 인간을 죽여서 동족의 원한을 갚자! 취익!"

"그래! 어서 올라와라! 좀 더, 좀 더... 빙고! 헤이! 몬스터들, 아디오스!"

호크가 클레이모어의 뇌관을 일제히 누르기 시작하자 M18A1 속칭, 클레모어라고 부르는 지향성 지뢰가 살상각도 좌우 60도로 수많은 쇠구슬들을 부채꼴 모양으로 쏘아 보냈다.

1백 미터까지 살상력을 가지는 위력답게 반경 안에 들어섰던 몬스터들은 모두 피떡이 되어버려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만약에 인간이었다면 이 정도 위력에 몸을 사리고 돌아섰겠지만, 이들은 몬스터의 본능인 공격성만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무엇인가 강한 영적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두려움이란 게 아예 없었다.

눈앞에서 수많은 몬스터들이 사라졌지만, 뒤에 있는 몬스터들이 그 자리를 메우면서 달려들었다. 몬스터들이 달려들자 호크는 또다시 소총사격으로 몬스터들을 저지하면서 제2선의 클레이모어 방어선으로 옮겨갔다.

이런 방식의 방어선이 산등성이까지 모두 8개가 구축되어 있었다. 게다가 주위환경이 바위산이어서 공격효과는 배가되었다.

무식하게 진입로로 밀고 들어오는 통에 호크의 염려보다 쉽게 몬스터들을 처리해나갔다. 트롤은 워낙 재생력이 좋아서 팔다리가 날아가도 다시 일어섰기에 호크는 일일이 머리에다 실탄을 박아주었다.

아마도 6.25 때 중공군을 상대하던 국군의 심정이 이랬겠구나, 하고 생각한 호크는 정말 지겹게도 몰려온다고 느꼈다.

어느새 8개의 방어용 클레이모어 저지선을 뚫고 올라오는 몬스터를 보면서 참호로 올라온 호크는 빈 무기 박스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수많은 몬스터들이 참호가 있는 산등성이로 올라오려고 미친 듯이 발광하고 있었다. 그러자 입구에서 병목현상이 일어나서 자기들끼리 밟고 밟히는, 정말 아수라장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주 쌩쇼를 하는구먼! 참내! 어디 보자, 이거 시범 보이는 것은 한 번 봤는데, 처음 써보는 거라 나도 좀 떨리는데. 어디보자, 설명서가......."

호크가 들고 있는 휴대용 미사일에는 '팬저파우스트3'이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는 대전차용 화기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렇게 밀집되어 있는 몬스터를 상대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한 호크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간 다음 목표로 정한 지점을 조준하자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푸학!

무반동탄의 원리 덕인지 생각보다 반동이 세지 않고 소음도 적었지만, 직선으로 꼬리를 만들면서 날아가던 유탄이 몬스터 무리 중앙에 작렬하자 바위들이 깨지면서 그 파편까지 가세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그로인해 그 자리는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폐허가 되어버렸다.

"휘익! 엄청나네! 에고! 이거 한 발이 1백만 원이 넘는다는데, 아깝네! 그나저나 이 정도로 당했는데도 겁도 안 나냐? 에휴! 내 원망은 마라! 나도 어쩔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 너희들이 죽어줘야겠어."

팬저에 들어 있던 남은 2개의 유탄마저 몬스터들에게 날려버리고서는 호크는 MG50의 장전 레버를 당겼다.

"공작님! 부하들과 함께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요새로 돌아가세요! 어서요!"

"자네는 어쩌려고 그러는가? 아직도 놈들이 저렇게 많이 남았는데?"

"제 걱정은 마시고 어서 돌아가세요!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뛰어가세요! 어서요! 지금 가세요, 빨리!"

머스탱 공작은 호크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으나, 처음 보는 엄청난 무기로 몬스터들을 해치우는 것을 보았기에 안심하며 기사단원들을 데리고 능선을 타고 요새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청난 굉음이 산을 울렸지만, 머스탱은 호크의 당부도 있고 해서 그냥 요새로 향했다.

그러나 요새의 성벽 위에서 계곡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했다. 호크가 무슨 커다란 막대기에서 불을 뿜어대는데, 그것에 걸리면 칼로 잘라버린 것처럼 뭐든지 베어져버렸다. 그 무서운 위력에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젠장! 정말 열나게 시끄럽구먼! 귀가 다 멍멍하니, 고막이 터지겠어!"

캘리버 50, 속칭 MG50의 위력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나무든 돌이든 몬스터든 사정권 안에 들어온 것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반동 또한 엄청났다. 굵은 쇠로 만든 거치대가 부러질 것처럼 흔들렸다.

"앗! 뜨거! 젠장! 조심해야지. 후아!"

실탄박스를 교환하던 호크는 뜨거운 탄피에 손을 데일 뻔하자 장갑을 끼고서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계속된 연사로 총신이 너무 열을 받아 조만간 총신이 깨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중기관단총 덕에 몬스터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어 호크는 만족한 듯 방아쇠에서 손을 떼었다.

방풍고글을 벗고 보니 이제는 눈어림이 가능할 정도로 몬스터들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향해 오는 몬스터들을 보고서는 아주 질려버렸다.

"끝까지 해보자는 거냐! 빌어먹을! 이제 좀 그만하자고!"

호크는 이제 자신도 화가 나 옆에 있던 K4 고속유탄발사기 앞에 엎드렸다.

쓩슝슝!

휘이이~ 펑! 펑! 펑!

챠르륵!

빈 공탄소리가 들리자 호크는 사격을 중지하고 참호 밖으로 나왔다. 눈에 드러난 디안 협곡에는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비록 인간이 아닌 몬스터들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호크 역시 피곤한 몸을 바닥에 주저앉히면서 X반도에 숨겨두었던 담뱃갑을 꺼냈다.

"후우~ 젠장! 아무리 괴물들이라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네! 머리도 웅웅거리고, 며칠 동안 두통으로 고생하겠구먼. 그나저나 다들 무사한가?"

호크가 요새의 성벽을 향해 손을 흔들자 호무관 관원들과 성벽 위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그 무섭고 지겨운 악몽이 끝난 것이다.

담뱃갑에 든 마지막 한 개비를 꺼내든 호크는 불을 붙이려다 말고 그냥 입에 물고 있었다. 라이터를 든 손이 덜덜덜거리면서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보는 호크의 등 뒤로 저녁놀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후~ 돗대여서 그런지 도저히 못 피겠다. 에고, 이번 기회에 끊어야 하나?"

마지막 남은 연초를 음미하던 호크는 언덕 위를 올라오는 사람들 때문에 달콤한 시간을 방해받자 인상을 찡그렸다.

"하하하! 내 자네가 큰일을 해낼 줄 알았네, 아무렴! 하하하하!"

머스탱 공작은 마치 한국에서 서울대에 합격한 부모님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호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두 눈에는 정말 자식을 보는 듯한 애정 어린 눈빛이 넘치다 못해 흘러내렸다.

"에휴~ 영감님, 그만해요! 지금 온몸이 아프다고 아우성이라고요! 건드리지 마요!"

호크는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온몸에 화약 냄새가 가득 밴 호크는 지금 귀도 잘 들리지 않는데다가 전신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무리 소드마스터에 육박하는 체력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대규모 전투를 혼자서 치러낸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내기(內氣)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체력을 이용한 보병전이었다. 사격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몸을 구르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란 사람에게 배워온 전쟁놀이를 오늘 유감없이 펼쳐 보인 것이다.

"위대한 케린버그의 태양이신 찰스 국왕 전하이십니다!"

누군가의 거창한 외침과 함께 몬스터의 체액을 뒤집어쓴 황금갑옷을 입은 금발 사내가 등장하자, 참호로 올라왔던 머스탱 공작과 기사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요, 영감!"

사람들의 반응에 놀란 호크가 머스탱 공작을 부르자, 공작은 호크를 데리고 국왕 앞으로 갔다.

"전하! 이 친구가 바로 호크라는 청년이옵니다."

"하하하! 자네가 바로 호크로구먼! 고맙네! 자네가 우리 왕국을 살렸어. 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줄 것이니, 모두 말해보게나!"

"전하! 그는 케린버그의 충직한 백성입니다. 달리 사심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 백성들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작위를 내리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사료되옵니다, 전하!"

"오~ 그렇다 뿐이겠소, 공작! 수도로 돌아가는 즉시 그에게 합당한 작위를 내려야겠소!"

호크는 머스탱 공작과 젊은 국왕이 나누는 대화에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귓속이 웅웅거리면서 먹통이 되었기에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 사실을 호크가 안다면, 아마도 머스탱 공작은 두고두고 호크에게 원망을 들었을 것이다. 적어도 호크는 이 젊은 국왕이 통 크게 금화 상자를 넉넉히 챙겨주라고 하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스탱 공작이 국왕 몰래 호크에게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서 OK 사인을 보냈기에 그렇게 오해를 한 것이다.

머스탱 공작이야 '자네가 원하는 대로 작위 승위가 잘됐네! 축하하네'라는 뜻이었지만, 호크가 받아들인 뜻은 '돈 좀 챙겨주지! 좋겠어' 뭐 이런 뜻이었다.

어쨌거나 세 사람은 환하게 웃으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젊은 국왕이 물러나자 호무관 관원들이 몰려들어 모두들 자신들의 실력을 자랑하며 떠들었지만, 호크는 비록 많이 다친 자들은 있어도 사망한 사람이 없다는 사범들의 말에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 눈물을 흘렸다.

평소에 악마 같이 훈련을 시키던 호크가 자신들의 무사함에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하자, 그동안 혹독하게 훈련시켰던 그의 진심을 알고서는 모두가 숙연해졌다.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 하는 전우라는 존재는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서로의 등을 지켜주는 동료이자 친구이며 부모 같은 존재인 것이다.

"전체 차렷! 호무관 이백 명 중 사망 무, 부상 오십 명. 이상, 디안 요새 전투 종결을 보고합니다. 특공!"

핸들러의 보고에 호크는 목이 메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느새 이 정도까지 성장해준 이들이 고맙기만 했다.

"특공! 편히 쉬어! 고... 고맙다, 살아있어 줘서. 장하다!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나의 전우들이여~"

석양이 비추는 디안 요새, 그리고 언덕 위에서 경례를 하고 있는 2백여 명의 호무관 사람들과 호크의 무용담은, 이곳에 있던 음유시인들로 인해 폴렌시아 대륙에 두고두고 회자될 '디안 전투' 신화가 되어 후세에 전설처럼 남겨지게 된다.

"핸들러, 모두 잘 챙겨서 호무관으로 돌아간다! 이곳에서 밤을 보낼 수는 없잖아! 서둘러!"

이미 디안 요새에는 다른 왕국의 원군과 케린버그의 각 영지에서 보내온 원군들이 때마침 도착해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협곡에 쌓여 있는 몬스터와 병사들의 시체를 보면서 하늘에 감사했다.

마법사들이 몬스터들의 시체를 불태우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훗! 한동안 삼겹살 생각은 나지 않겠네!"

"이 녀석아! 괜찮은 거냐?"

갑자기 나타나서 와락 끌어안은 사이클론이 너무나 반가워 호크도 세게 끌어안았다.

"할아버지도 괜찮으신 거죠?"

"당연하지! 나야 이 폴렌시아의......."

"대마법사시니까요!"

"이 녀석이! 하하하하하!"

"그래, 이것들이 네가 살던 세계의 그것들이냐?"

"네. 하지만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것들이에요.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안 돼요!"

"그래,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학자로서 거짓말이겠지만, 네 말대로 너무나 위험한 물건이구나!"

"네. 갖게 된다고 해도 이 세상에서는 만들 수 없을 거예요. 이제 이 녀석들도 제 운명을 다했으니 보내주어야겠네요."

아쉽다는 듯이 쳐다보는 사이클론의 눈빛을 모질게 외면하고서 호크는 MG50부터 분해해서 부숴버렸다. 특히 공이나 중요부품은 사이클론에게 부탁해서 소멸시켰다. K2 소총을 매만지던 호크는 미련이 남는 듯 잠시나마 고민했지만, 이내 분해해버리고서 마저 소멸시켜버렸다.

이제 지구의 현대 무기의 흔적은 저 계곡 곳곳에 파인 땅과 몬스터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온 호크는 사이클론과 언덕을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탕탕탕!

"응? 이 소리는! 이럴 수가! 분명히 총소리인데 어떻게......! 할아버지, 먼저 내려가세요! 잠시 둘러보고 올게요!"

"이 녀석아, 혼자서 위험하게 어딜 가는 게냐. 같이 가자!"

"참 내, 저도 소드마스터라면서요! 걱정 마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어느새 저만치 사라지는 호크를 바라보는 사이클론의 눈은 이미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을 하고 있었다.

"조심해라! 아들아, 너를 해하려는 자는 나, 사이클론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투를 치르는 동안, 호크는 또다시 성장했다. 비록 현대 무기를 사용한 전투였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태극심법과 그동안 깨달은 발경의 오의 등을 극도로 끌어올려 사용했으므로 심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댔는데, 태극심법으로 전신의 기운을 돌리자 거짓말처럼 몸이 개운해지는 것이다. 숲을 내지르는 발걸음 또한 빠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호크 자신도 숲의 나무들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내심 혀를 내휘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 총기류의 소리였는데! 소리가 작은 걸로 보아 소총류는 아니고, 권총인 거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분명히 권총은 가져오지 않았고, 그렇다면 내가 떨어뜨린 것은 아닐 텐데. 아니지, 나도 모르게 가져왔다가 흘렸을 수도 있지. 아무튼 빨리 찾아서 없애버려야겠다."

탕탕탕!

"오케이! 저쪽이군!"

호크는 총성이 들린 곳으로 방향을 잡고 뛰어 올랐다.

휘익~

몸을 공중에서 두 번이나 돌린 호크가 한쪽 무릎을 굽히면서 착지한 분지에는 오우거 1마리가 날뛰고 있었고, 오크 2마리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너는 내가 상대해주마!"

어느새 호크의 손에는 2개의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그는 머스탱 공작과 대결할 때 썼던 짧은 블레이드를 십자로 교차한 채 뛰어 올랐다가 오우거의 주먹질을 피한 뒤 다시 텀블링해서는 오우거의 뒤로 돌자마자 양손 블레이드를 오우거의 목 주위에서 휘둘렀다.

호크가 오우거를 지나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우거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가 목에서 깨끗하게 분리된 오우거의 몸뚱이가 뒤뚱거리더니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면서 쓰러졌다.

"후우~ 확실히 더 레벨이 업! 됐군!"

탕!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헉! 뭐야? 빈 총 맞으면 삼 년 재수 없다는데, 어떤 멍청이가 실탄을... 잉? 이거 한국말이잖아? 누구세요?"

너무 놀란 나머지 호크는 상대가 총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뒤돌아섰다. 돌아선 호크는 그대로 몸이 얼어 붙어버렸다. 아니, 자신의 두 눈을 비벼보고 머리를 한 대 치려고 했다.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이의 모습에 호크는 기쁨에 겨운 소리를 질렀다.

"충성! 하사 권혁입니다!"

"공작 각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벌써 케린버그가 몬스터들의 손에 떨어졌나?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실은... 머스탱 공작이 디안 요새를 지켜냈다고 합니다!"

"뭐야! 이봐, 로베르트 경! 자네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거 아니겠지?"

"제가 감히 케론스 공작님에게 어떻게 허튼소리를 하겠습니까? 본국에서 보내온 어쌔신들의 보고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데, 절대로... 예언에 따르면 절대로 이럴 리가 없는데!"

"네? 예언이라뇨, 각하?"

"아... 아니네. 그냥 혼잣말이었네.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수십만의 몬스터였다고 아는데 말이야."

"그것이 좀 황당하게 들리지만, 어쌔신들의 보고로는 한 사람에게 전멸 당했답니다."

"커... 콜록! 컥컥컥! 허! 사실인가? 인간 혼자서 그 많은 몬스터를 전멸시켜? 혹시 드래곤 아닌가?"

"확실히 드래곤은 아닙니다. 드래곤이 역사에서 사라진 지 천 년도 넘었습니다. 게다가 그 인물은 저희도 잘 아는 자입니다."

"잘 아는 자라니?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강자는 없을 텐데?"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던 로베르트는 한숨을 크게 쉬어보이고서는 입을 열었다.

"그 왜... 다크 문 잉글햄 지부를 박살낸 그자입니다!"

"뭐야! 이런 빌어먹을! 어째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더라니. 그자에게 붙인 감시자에게서 나온 보고겠지?"

"예. 거의 소드마스터에 준한 자라는 보고입니다. 게다가 마검사라는 보고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마검사라?"

"네. 그들도 처음 보는 마법무구로 무장하고서는 그 많은 몬스터들을 도륙했다고 합니다. 보고서에 첨부된 사견으로는, 능력치 측정 불가였습니다."

"젠장! 거의 다 되어갔는데, 게다가 행운도 우리 쪽으로 기운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아닌가? 로베르트! 케린버그로 돌아간다. 모든 병력과 인원을 정비해 서둘러라! 몬스터 토벌이 끝났다면 이제 수도도 안정되고 있을 거야. 우리가 케린버그를 비웠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게 되면 안 돼! 서둘러! 난 본국에 보고를 넣어야겠다."

로베르트가 황급히 뛰쳐나가자, 잠시 창밖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던 케론스 공작이 서둘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글을 다 쓰자 봉인을 한 후 자신의 인장을 찍었다.

"론!"

공작이 허공에 대고 소리치자, 천장 구석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져 내려왔다.

"급하다! 어서 형님에게 전해라. 최우선 보고서야!"

검은색으로 뒤덮인 사내는 말없이 편지를 품에 넣고서 천장으로 사라졌다.

"머스탱, 그 작자 하나도 힘든데, 어디서 나타난 줄도 모르는 천방지축 때문에 우리의 대업에 차질이 생기다니! 모든 것이 완벽한데 자꾸 서늘해지는 한쪽 가슴은 왜일까?"

책상 한구석을 주먹으로 내려친 케론스 공작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섰다.

"이제 저곳만 넘으면 잉글햄입니다. 로베르트 단장님!"

"흠! 제법 빨리 도착했군. 어서 서둘러야 한다. 우리는 성스런 쥬(Ju)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은빛 갑옷으로 중무장한 2백여 명의 기사단이 잉글햄으로 가는 포들러 언덕을 넘고 있었다. 대륙에 저렇게 많은 이들이 은빛 갑옷을 입고 있는 곳은 신성도시 샹그릴라의 성기사단뿐이었다.

"응? 자네, 한국군인가?"

"넵! 00사단 00수색대대 00중대 00소대 권혁 하사입니다!"

"하하! 다행이군. 내가 미친 게 아니었으니......."

쿵!

그제야 M10 리볼버를 내려놓은 중년사내는 기대고 있던 나무에서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헉! 장군님! 장군님! 정신 차리세요! 이런 젠장! 당신을 절대로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구요! 얼마 만에 듣는 한국말인데, 조금만 버텨요! 알았죠? 죽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쓰러진 사람을 바로 눕힌 호크는 자신의 내기를 쓰러진 사람에게 모두 쏟아내면서 지압을 했다. 숨소리가 가늘어진 것이 오래 버티기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버텨요! 군인정신 몰라요!'

호크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하던 호흡이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후우~ 다행이다!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으으으! 장... 군... 님......."

"뭐야, 사람이 더 있어?"

얼른 인기척이 들린 곳으로 달려가자 반쯤 반파된 지프 운전석에 대위 1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해 있었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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