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뜻밖의 방문
"어이! 어이! 이게 누구야! 핸... 핸 뭐였더라?"
"핸들러입니다, 호크님!"
"그래, 그래. 맞아. 핸들러! 하하하하! 이거 아주 반가워."
호크는 처음부터 핸들러를 잘 보았기 때문에 다시 그를 보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물론 핸들러가 자신에게 금화 주머니를 주었다고 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저기... 이쪽에 저희 아까씨도 오셨습니다."
핸들러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던 호크는 핸들러가 몸을 비키자 갑자기 눈부신 광채가 온 방 안을 채우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헉!"
"안녕하세요, 호크님!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말도 많이 배우셨나 보네요."
"......."
"호크님! 호크님?"
"......."
"자! 차라도 드시면서 말씀들 나누세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귀한 손님이 오셨기에 루니 어머니가 다과를 준비해서 들어오다가, 돌처럼 굳어 있는 호크와 그런 호크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손님들을 보고서는 바로 상황 파악이 된 듯 쟁반을 내려놓고 호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손이 호크의 허벅지를 사정없이 꼬집었다.
"으... 헉!"
"호호호호! 호크님이 어여쁘신 아가씨 때문에 혼이 빠지신 거 같네요.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오셨으니 대화들 나누세요."
루니 어머니가 호크에게 윙크를 해보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호크는 불이 난 것 같은 허벅지를 문지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 하! 안... 녕."
"풋!"
캐더린은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고, 핸들러는 명색이 기사라고 고개를 돌리고서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런! 하필이면 저 애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야! 젠장 할! 하여간 내 팔자에 무슨 여자 복이 있다고. 아서라, 호크야!'
제 딴에는 정색하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까의 고통으로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으니 정말 가관이었다.
"호호! 호크님, 이제 보니 귀여우신 면도 있네요."
"푸-읍!"
차를 한 모금 마시던 호크는 또다시 추태를 보이고 말았다. 그가 뱉어낸 찻물이 그대로 캐더린의 치마에 튀어버린 것이다. 귀족 영애의 치마에 이런 실례를 범하다니! 귀족 모독죄에 해당하는 큰 죄였지만, 캐더린이나 핸들러는 호크의 너무나 다른 모습에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햐~ 나, 이거 참.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 왜 이러냐! 그것도 연속으로. 우씨! 이거 대한 건아 체면이 다 구겨지는구먼. 어떻게 이 상황을 반전시키지?'
내심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호크는, 캐더린의 고운 음성이 들리자 또다시 사고가 정지되는 현상을 맞이했다.
"호크님, 요즘 호크님 이야기가 장안에 화제거든요. 처음에는 혹시나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그때의 호크님이 맞네요. 그날 너무나도 고마웠는데, 제 처지가 좀 그래서 인사도 제대로 못했답니다. 오늘 이렇게 호크님을 만났으니 제대로 인사드려야겠네요. 핸들러님, 호크님에게 준비해온 것을 드리세요."
핸들러의 지시에 병사 2명이 제법 큰 상자를 호크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호크는 사양한다는 말도 없이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상자 가득 들어 있는 동전을 보면서 호크의 얼굴은 스쿠르지 영감을 그대로 복사한 표정으로 침까지 한 방울 흘리고 있었지만, 뚜껑이 닫히는 순간에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 이거 난감하네요. 받지 않으면 캐더린님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하하! 뭐, 어쨌든 좋은 일에 쓰겠습니다. 고맙게 받지요. 하하하하!"
'아싸! 이거면 장가 밑천 확보에다가 남은 인생 쿨하게 살기 충분하겠구나! 핸들러! 너, 이 자식! 고마운 놈! 싸가지 있는 놈! 어째 너는 볼 때마다 이렇게 돈을 주냐! 흐흐흐!'
핸들러는 호크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왠지 모를 두려움에 오한이 들었다.
그러나 캐더린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는 호크를 바라보았다.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왜 날 빤히 쳐다보고 난리야. 어이! 어이!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확! 데이트 신청한다!'
"캐더린님! 지금 캐더린님께서는 범죄를 저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제가 언제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그러시죠?"
너무나 황당한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캐더린이 핸들러를 쳐다보자, 핸들러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긴 호크는 이내 그윽한 눈으로 캐더린을 바라보면서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는 저같이 여린 남자들이 보기에는 살인미소거든요."
"헉! 아~"
실내는 두 가지 반응으로 엇갈렸다. 캐더린은 호크의 말에 가슴이 뛰었고, 반대로 핸들러와 병사들, 그리고 그녀의 시녀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똑같이 '우엑~ 느끼해!'를 연발하고 있었다.
"더구나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은 세상의 모든 어둠을 걷히게 하는 마법 같네요, 세상의 모든 것을 지우고 지우면, 아마 캐더린님의 미소만 남을 거 같아요."
'어라~ 웬일이니, 웬일이니. 오늘 아침에 먹은 버터의 효과인가? 내가 이렇게 술술 작업을 걸다니! 신이시여! 가혹했던 제 운명을 불쌍히 여기셨군요! 이제 이쁜 마누라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그런 겁니까? 감사히 받겠나이다.'
"호... 호크님도 참, 짓궂으세요."
목덜미까지 붉어진 캐더린을 보면서 호크는 '스트라이크!'를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뒤에 서 있던 핸들러와 병사들은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참아내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흠흠! 아가씨! 시간이 꽤 지났습니다. 그만 들어가 봐야 할 시간입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시녀의 재촉에 캐더린도 상상 속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무척이나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난 캐더린은 호크와 인사하고서는 마차에 올랐다.
호크도 마차가 한참이나 멀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호크님! 그 아가씨는 안 돼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루니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휴! 참내, 또 딴 세상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저분들은 귀족이에요, 귀족! 우리는 평민이고요. 게다가 이곳 영주의 따님이라고요! 꿈도 꾸지 마세요! 괜히 상처 입게 되는 것은 호크님뿐이라고요. 이제 아시겠죠!"
두 눈이 크게 치켜떠진 호크를 뒤로하고 루니 어머니와 영주의 딸을 배웅하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모두 들어가자, 홀로 남겨진 호크는 무도관 돌담길의 벤치에 힘없이 앉았다.
'정말... 처음으로 이런 감정이 생긴 여자인데. 제기랄! 어째 일이 잘 풀린다고 했어. 그래, 이곳은 아직은 봉건 신분제였지. 무도관에서만 지내다 보니 그걸 깜빡했어.'
호크는 고개를 들어 마차가 사라진 곳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따가닥, 따가닥.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던 캐더린은 온통 호크 생각뿐이었다. 처음 봤을 때의 떨림이 착각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와 함께하는 동안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왜 이럴까?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고, 헤어지는 순간에 가슴이 아플까? 처음 느낀 사랑이란 열병이 두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핸들러는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불쌍하신 분, 미망인이 되신 것도 부족해서 시댁에서 쫓겨났으니... 앞으로 저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제발 더러운 귀족의 잠자리 상대로 전락하지 않아야 할 텐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래도 한 영지의 영주의 딸이 아닌가? 애석하게도 이곳 풍습 중에 좋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미망인이 사별 후에 남편의 본가에서 내쳐질 경우,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취할 수 있다는 해괴한 풍습이다.
원래의 취지는 과부들의 재가(再嫁)를 돕기 위한 것이었지만, 남자들의 성욕을 채우는 방법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대부분이 자신의 첩실이나 잠자리 상대로 데려다가 그 매력이 떨어지면 길에 내치는 식이어서, 그런 여인들은 대부분 비참한 생을 살아가게 된다.
캐더린의 아버지 하워드 남작의 권력이 강하면 감히 그럴 위인이 없겠으나, 워낙 정치에는 관심이 없는 강직한 무인이고, 그의 힘이란 게 정말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고위 귀족 중에 쓰레기 같은 자가 캐더린의 미모를 보고서 '미망인의 선택(이 우습지도 않은 풍습을 이렇게 부른다)'을 요구하면, 그녀의 미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핸들러는 그녀를 걱정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보았다. 손을 펴자 금화 하나가 들려져 있었는데, 방에서 나오기 전에 호크가 손에 쥐어준 것이었다. 그때 살짝 윙크하면서 '내일 또 와~'라고 말할 때는 정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볼수록 색다른 매력이 있는 남자였다. 무섭도록 잔인하고 강하면서 오늘처럼 부드러운 모습이라니.
혼자 웃다가 고개를 흔든 핸들러는 내일이 근위기사들의 정기 외박일이니, 시내에 나온 김에 들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차가 내성을 통과하자 두터운 성문이 크게 소리 내면서 마차를 집어 삼켰다.
사랑에 잠 못 드는 사람들로 가득한 잉글햄의 밤이 그렇게 깊어만 갔다.
다음날, 핸들러는 근위기사 동료들과 친구들을 이끌고 호크의 호무관을 방문했다. 핸들러의 동료들도 그날 오크를 가볍게 해치우던 호크의 모습에 크게 감동받은지라 함께 갔다.
"어서 와! 간밤에 잠은 잘 자고? 편히 앉아, 아무 데나."
"밤사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신데요?"
"응? 아냐. 무슨 일은......."
밤새 잠을 못 이루었으니 수척해진 얼굴이 '나 고민 있소' 하고 광고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핸들러 또한 대충 그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기에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자신도 두 사람이 조용히 살 수 있으면 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지 않은가?
"아참! 제 동료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왼쪽부터 피터슨, 제이로, 지미, 톰슨, 루브카, 에밀 모두 친한 친구들입니다. 피터슨과 제이로는 그날 보셨을 테고, 다른 사람들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모두 그 근위기사들이신가?"
"아... 아닙니다. 피터슨과 제이로만 그렇고, 지미는 예전에 신관이었고 루브카는 용병, 에밀은 아카데미 교관이었는데, 지금은 루브카처럼 용병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아~ 애송이 기사들에, 쫓겨난 신관, 어리버리 용병들이구만."
"뭐요! 아니, 이 작자가! 핸들러를 봐서 대우를 해주었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구먼. 천한 평민 주제에 기사들이 존대해주니 기고만장해 가지고서!"
일행 중 에밀이라는 청년이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 모습에 가뜩이나 기분도 꿀꿀했는데 제 발로 덤벼드는 이가 있으니 울적한 기분을 풀기에는 딱 적당한 제물이라고 생각한 호크는, 에밀에게 기꺼이 도전을 받아주겠다고 한 후에 그들을 데리고 수련장으로 나갔다.
"관장님이 오셨다! 모두 동작 그만! 특공!"
"특공!"
수련장에 도착하니 한창 일대일 대련을 연습 중이었다. 호크를 발견한 사범들이 연습을 중지하고 군대식 경례를 하자,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호크가 관원들을 불러 모았다.
"자자~ 오늘은 특별한 시범을 보여주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누누이 말하지만, 일대일 대결에 있어서 수만 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공격과 방어를 해야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지 오늘 본 조교, 아니 관장이 시범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호크가 시범을 보인다는 말에 관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모두 수련장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사범들의 실력도 좋았지만, 호크의 동작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무 때나 있는 기회가 아니었기에, 취미반 관원들은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흠~ 에밀이라고 했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한번 보여주게. 우리 관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이... 이런 시건방진! 후회하지 마라! 내 칼에는 눈이 없다!"
"거 되게 말 많네. 자네는 입으로 싸울 건가? 빨랑하지."
호크의 껄렁껄렁한 말에 에밀의 두 눈이 뒤집혔다. 사실 이들은 모두 어떻게 보면 아웃사이더들이다. 소외된 자들. 그래서 누군가 자신들을 비하하면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오늘 호크가 거기에 불을 질렸으니 분이 폭발한 에밀은 검을 순식간에 뽑아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어쭈, 제법 기세가 있는데? 그냥 맹물은 아니라는 말인데. 하지만 어쩌냐? 내가 오늘 기분이 영 아니거든. 그렇다고 관원들을 상대로 화풀이할 수도 없고. 네가 이해해라.'
호크의 속마음이 어떤 줄도 모르는 불쌍한 에밀은 오늘 저 사내를 단단히 혼내주겠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제법 검을 익힌 듯이 자연스런 동작으로 몸을 앞으로 튕기면서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기세만은 바위라도 절단낼 것 같았지만, 호크는 오른발을 움직여서 몸을 비키는 것만으로 검을 피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한 번의 회피동작으로 어느새 에밀의 왼편 옆에 서게 되었다. 에밀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호크가 검지로 에밀의 머리를 톡톡 쳤다.
"보셨죠, 여러분! 이렇게 큰 동작은 상대편에게 역습을 허용하기 딱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세입니다. 이럴 때 기본 동작인 정권 지르기 하나로도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죠."
어린아이들이 호크의 설명에 키득거리면서 웃어대자 에밀은 너무나 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분노한 그가 몸을 급격하게 회전시킨 후, 검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갔지만, 이미 그 자리에 호크는 없었다.
"자~ 이제부터 검을 든 상대와의 공격법을 잘 보세요. 두 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마치 자신을 데리고 장난하듯 움직이는 호크를 보면서 에밀은 분노했다.
하지만 그도 두 번의 공격이 허무하게 빗나간 것이 결코 자신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에밀이 핸들러를 살짝 바라보자 핸들러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자신이 실수했다는 뜻이다. 에밀은 '진즉에 말려주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이미 칼은 뽑혀진 후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에밀은 왼손에 움켜쥔 검을 수평으로 뉘이고는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는 오른발을 축으로 힘을 모았다가 호크의 앞으로 달려갔다. 거의 그의 앞까지 다가가서는 왼발로 땅을 박차더니 몸을 빙글빙글 회전시키면서 수평으로 세운 칼로 호크를 베어갔다. 화려하고 날카로운 공격에 모두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호크는 하품을 한번 해보이더니 칼날이 자신에게 와 닿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으면서 돌려 차기를 했다. 빙글빙글 도는 신체의 구심점이던 에밀의 발에 호크의 발차기가 들어가자 에밀은 그대로 튕겨져서 볼썽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거의 정신을 잃을 뻔한 에밀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더니 두 눈이 뒤집혀버렸다. 그는 검의 손잡이가 위로 향하게 고쳐 잡더니 양손을 교차한 후, 호크에게 뛰어들었다.
'젠장! 내 밑천을 다 드러내게 하다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내게 모욕을 주었으니, 너의 목숨으로 그 값을 치러야 해!'
"에밀! 안 돼!"
동료들의 경악성에도 에밀은 멈추지 않았다. 이 마지막 한 수에 모든 것을 걸었다. 비록 저 사내가 죽겠지만, 모든 것은 저 사내가 시작한 일! 자신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녀석이 어쩌자고 선더 볼트를 이런 데서......!"
그 기술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루브카가 말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련장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핸들러가 손을 잡아챘다.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모습에 루브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뭐... 뭐야, 그렇다면 에밀이 진다는... 뜻이야?"
친구의 뜻밖의 행동에 놀란 부르카는 호크에게 달려들고 있는 에밀에게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양손을 교차하고 달려들던 에밀의 부츠에서 갑자기 '슈슈슉' 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려오던 속도가 갑자기 배가 되었다. 순간, 호크의 2미터 전방에서 급하게 멈춰서는 듯하더니 공중으로 무려 3미터를 뛰어올랐다.
더 놀라운 것은 교차되었던 양손 중 한 손에 있던 검의 손잡이를 누르자 검이 변신이라도 한 것처럼 3개로 변한 것이다. 에밀은 2개의 검을 호크의 가슴과 배를 향해 던진 후, 곧 바로 양손으로 검 하나를 거꾸로 잡고 찔러왔다.
호크도 제법 매서운 기술인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상대방에 대한 예우로 이쯤에서 화려한 기술로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바로 몸을 움직였다.
'권법(拳法)에는 정세가 없으나, 실은 그 세(勢)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십팔기 무편에서 권법의 요체를 제시하고 있다. 그 묘리를 떠올리면서 호크는 양손에 기를 모은 다음, 날아오는 2개의 검을 양손의 권(拳)에 기(氣)를 실어 쳐내고, 머리부터 몸통을 두 조각 낼 듯이 베어오는, 공중에 떠 있는 에밀에게 뛰어올랐다. 1명은 위에서 내려오고, 1명은 아래에서 위로 뛰어 오른 것이다.
두 사람이 교차하려는 순간, 호크의 몸이 180도 회전하면서 오른발을 크게 위로 올린 다음 찍어 차기를 했다.
그대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에밀은 처참한 몰골로 수련장 구석까지 굴러가서 정신을 잃었다.
'찍기'라는 발기술은 상대에게 큰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보는 사람에게도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겨주는 기술이다.
관원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은 호크는 그 와중에도 발차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다리 찢기의 필요성에 대해 잊지 않고 당부했다.
호크가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사라지자 핸들러와 동료들은 쓰러진 에밀을 돌보았다.
지미의 신성력으로 힐링을 몇 차례 시전한 후에야 에밀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몸놀림을 할 수 있지? 너희들도 봤지?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런 발차기를 할 수 있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어, 혼자서 하크오크를 스무 놈이나 해치우신 분이라고 했지? 오늘 뭔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거 같으니 이만 돌아가자. 내가 따로 만나봐야겠어."
핸들러가 한심하다는 듯이 동료들에게 말하고, 호크를 따라 수련장을 빠져나갔다.
"커헉~ 후아! 후아!"
"어이! 에밀! 괜찮은 거야? 이거 몇 개로 보이니? 말해봐!"
"젠장! 비켜! 장난하지 말고."
에밀은 주위에 있는 이들을 밀치고는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풀려서 한동안 일어서기 힘들 텐데도 억지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만하고 앉아서 쉬어. 지금은 어림도 없어!"
루브카가 큰소리로 만류하자 그제야 에밀도 그냥 바닥에 누워버렸다.
"멋있어... 반해버렸어!"
"뭐라고? 저 녀석 미친 거 아냐? 머리 한 대 얻어맞더니......."
"하기야, 그런 몸놀림이라니! 더구나 많이 봐주고 있는 듯했는데."
"이런! 피터슨, 너마저!"
"우리도 이걸 배울 수 있을까?"
"글쎄, 우리야 떠돌이에 쓰레기잖아. 여기저기에서 쫓겨난 우리를 누가 받아주겠어."
루브카의 회의적인 말에, 제이로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은 왠지 다를 것 같아, 지금까지 우리가 만나온 위선자들과는... 그리고 앞으로 저 사람과 운명을 함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모두의 시선이 호크가 사라진 수련장 뒷문을 향했다. 알 수 없는 운명의 끈이 자신들과 호크 사이에 얽혀 있는 것을 느끼면서.......
"휴~ 내가 왜 이러지?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나 하고, 왜 자꾸 짜증만 날까?"
"호크님, 저... 제 친구 에밀이 워낙 성격이 불같아서 종종 저렇게 앞뒤 안 재고 덤비는 통에 저희도 골칫거리입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에고, 아니에요. 왜 당신이 사과를 해? 핸들러, 너 때문에 그러는 것도, 그 에밀이라는 친구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 친구 몸놀림이 제법이던데. 그건 그렇고, 뭐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냐?"
"아참! 저 사실은 캐더린 아가씨께서 호크님에게 부탁이 있다고 하셔서."
"응? 아니, 왜 그걸 이제야 이야기하는 건데? 뭐야? 빨리 말해봐!"
방금 전만 해도 죽을상을 하고 있던 사람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핸들러는 겨우 웃음을 참고 캐더린이 부탁한 것을 이야기했다.
내용인즉, 호크의 호무관에서 호신술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고, 호크는 당연히 지금 당장 시작해도 된다고 법석을 피워댔다.
그렇게 시작된 캐더린 양의 호신술 수련으로 인해 호무관의 사범들과 수련생들은 애꿎은 수련장 바닥을 쓸고 또 쓸고, 닦고 또 닦아야 했다.
호신술 강의가 시작된 지 한 달여가 흘러가자 관원들에게 모두 한 가지 병이 생겼는데, 그것은 헛구역질이었다. 그것도 호크가 캐더린을 가르치는 간이 연무장을 지날 때 증상이 매우 강해졌다.
"좋아요, 아주 좋은데요! 캐더린은 아주 타고났어요. 우와! 저 멋진 발차기, 환상적이야!"
"호호! 정말이요? 신나라! 자, 그럼 또 가요!"
미트를 대주고 있던 호크를 향해 캐더린이 가녀린 팔로 정권 지르기를 하자, 호크는 정말 매트릭스 저리 가는 모션으로 뒤로 굴렀다.
"헉헉! 캐더린의 주먹은 너무 강해, 좀 살살해요!"
"호호! 호크님, 그러니까 너무 귀여워요!"
물론 근처에 있던 사범들과 관원들은 위산이 과다 분비되면서 견디기 힘든 욕지기를 참아야 했지만, 주위 사람이야 어찌됐든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더 서로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깊은 수렁으로 더욱 깊숙이 발을 들여 놓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함께하는 시간은 바람처럼 지나가고, 캐더린을 태운 마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호크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호크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면서 벤치에 힘없이 앉았다. 요즘 이 의자는 호크의 전용의자 되어버렸다. 캐더린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의자이고, 캐더린을 배웅하고 나서 멍하니 앉아 있는 의자.
오늘도 캐더린을 배웅하고서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함께 했던 그녀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에잉! 젊은 놈이! 하늘 안 무너지니까 그렇게 한숨 쉬지 마라!"
자신의 고성에도 호크가 아무런 대꾸가 없자 사이클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의 호크였다면, 이런 잔소리를 들으면 화려한 말솜씨로 사이클론을 궁지로 몰아넣었을 텐데. 넋 나간 사람처럼 저렇게 앉아 있으니 딴사람 같았다.
알게 모르게 같이 지내면서 어느새 정이 든 호크가 가슴앓이를 하자 사이클론은 꼭 자기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그렇게 좋으냐?"
그제야 자기를 바라보는 호크를 보면서 사이클론은 측은한 마음에 호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호크도 말없이 머리를 사이클론의 어깨에 기대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사람은 감정에 참 충실한 존재지. 그래서 상처받고 슬퍼하고.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사랑이지. 때때로 사랑은 죽음보다 위대하다고 하더라."
"할아버지, 사랑에는 국경도 인종도 없다는데, 제가 캐더린을 좋아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호크는 오늘 일부러는 아니지만, 우연히 캐더린을 호위하고 온 병사들의 잡담을 들었다. 그 내용이 호크가 주제넘게 영주의 딸에게 흑심을 품었다는 것이었다. 호크가 제법 부와 명성을 얻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평민일 뿐, 귀족을 사랑하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높았다.
"휴! 글쎄, 좋은 말이기는 하다만 현실적이지는 않구나."
잠시 호크를 바라보던 사이클론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만일 네가 귀족이 되면 가능하단다. 그러려면 힘을 키워서 국가에 큰 공헌을 해야 한다. 아니면 네가 소드마스터라도 된다면, 만약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세습은 아니지만 작위를 얻을 수도 있단다!"
"네?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실제로 그런 귀족들이 꽤 있지. 그렇게 된다면 너도 캐더린에게 청혼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지."
사이클론의 귀띔에 호크는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는 사이클론의 가슴은 편치 못했다. 귀족이 된다는 것은 호크가 꿈꾸는 평안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권모술수(權謀術數)가 난무하는 그런 난장판에 호크가 뛰어드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바람의 마법사라는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는 것은 호크의 특이한 마나 운용법을 연구하는 것에도 그 목적이 있지만, 기실 그보다는 자식처럼 느껴지는 부정(父情)이 둘 사이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한마디가 자신의 평화로운 삶 이외에는 관심이 없던 호크를 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변수는 케린버그의 수도 로이든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케린버그의 수도, 로이든의 윌리엄가.
"이런 시건방진 새끼가!"
옷 입은 모양새를 보니 제법 있는 집 자제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무슨 구경이 났는지 빙 둘러 모여 있었다. 아이들을 헤치고 들여다보니 바닥에 피둥피둥 살찐 뚱보 소년이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쓰러진 것을 주위에 있던 소년들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뚱보와는 대조적으로 가녀린 소년이 이를 악문 채 쓰러진 뚱보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악! 퉷! 저런 천한 자식에게 내가 이런 수모를 겪다니! 클락! 클락! 어디 있나?"
뚱보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소리치자, 허리에 검을 찬 20대 중반의 사내가 아이들을 밀치면서 걸어 나왔다.
"이런! 도련님, 여기 계셨네요. 한참 찾았습니다. 어서 마차로 가시죠. 마님이 많이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직 안 돼! 저 건방진 자식을 혼내줘라!"
클락이 뒤돌아보니 이제 16살이나 됐을 법한 소년이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몸을 옆으로 조금 튼 이상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자신의 골통 주인이 시비를 걸다가 저 소년에게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마에 주름살이 늘었지만, 어쩌겠는가. 자신은 이 바보같이 어리석은 꼬마 도련님의 보디가드였으니 말을 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면서 클락은 소년에게 어서 도련님에게 사과하라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어'라고 소리치면서 당당히 가슴을 폈다.
자신의 주인에 비하면 이 소년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자신의 꼬마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해 클락은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여야 했다.
클락이 왼팔로 소년의 어깨를 잡자 소년은 어깨를 빠르게 돌리면서 왼발을 앞으로 굽혀서 내딛고, 뿌리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마주잡고 클락의 하복부를 강하게 쳤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클락은 소름끼치게 놀랐다. 세상에! 저 어린 소년이 저런 몸동작을 할 수 있다니! 만일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성인이었으면 자신이 저 돌바닥에 누웠을 거라 생각하자 오한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뚱보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깟 녀석 하나 처리 못하냐는 둥, 돈이 아깝다는 둥 그런 소리였다.
화가 치밀자 클락은 이제 소년을 동정하던 마음을 버렸다. 배를 한번 문지르고서는 빠르게 앞으로 몸을 내던진 다음 팔을 뻗어 암킥(레슬링에서 쓰는 팔 공격)을 날렸다.
소년의 얼굴이 클락의 팔꿈치에 박살나려고 하는 순간, 또다시 기적이 벌어졌다. 클락의 팔꿈치가 눈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소년이 클락의 몸을 흘려버리더니 그의 몸이 자신을 조금 지나치려고 할 때, 번개처럼 뒤돌려 차기로 클락의 뒤통수를 날려버렸다.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클락은 데굴데굴 굴러갔다. 소년의 신발에는 무언가 들어 있는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악! 악!"
요상한 기합성을 내지르면서 자세를 취하는 소년의 모습에, 구경하는 또래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소년이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어른을 상대로 멋지게 승리하자, 모두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면서 소년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뚱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고, 뚱보의 외침을 들은 다른 하인들과 무사들이 모여들자 장내는 또다시 살얼음판이 되었다.
소년을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도 슬금슬금 뒤로 도망쳤고, 클락을 물리친 소년도 이번에는 상대가 무려 5명이 넘자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뚱보 소년의 하인과 무사들도 자신의 상관인 클락을 쓰러뜨린 소년이라면 무언가 한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검을 빼어들고 다가들었다.
왕국의 수도에서 어른 여러 명이 소년 하나를 둘러싸는 이상한 싸움판에 점점 더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이제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이 모여들었지만, 아무도 그 싸움을 만류하려 들지 않았다.
싸움을 일으킨 저 뚱보가 이 케린버그 왕국의 2명의 공작 중 1명인 케론스 공작 외조카의 손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괜히 나섰다가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해를 입을까 봐 열 받고 애가 탔지만,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두 주먹을 굳게 움켜진 소년은 자꾸 약해지려는 마음이 들어 두 눈에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가쁜 숨소리가 소년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싸울 때는 악으로 깡으로! 한번 시작했으면 끝을 본다는 자세로 임해야 된다! 죽을 때까지 치고 때리고, 때릴 힘이 없으면 물고 뜯고, 그래도 힘이 없으면 소리라도 질러라!'
"으아아아~ 악! 악! 악! 특공!"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소 겁먹은 표정을 짓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소년이 갑자기 기세가 살아나자, 다가가던 어른들이 오히려 주춤했다. 소년의 표정은 이제 독기가 가득해졌다. 어떻게 저런 어린 소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난데없이 박수소리가 들려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곳으로 쏠렸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멋진 공작 깃털을 꽂은 모자를 쓴, 꽤 부유한 귀족으로 보이는 50대의 건장한 남자가 뚜벅뚜벅 싸움터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하하하! 네 이름이 뭐냐, 꼬마야!"
뜬금없이 나타난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묻자 저도 모르게 대답한 소년은 지금 앞에 있는 남자의 기운이 사부님의 기세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놀라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호오~ 성을 보니 귀족가의 자제는 아닌 듯한데, 어쩌자고 저런 녀석과 시비가 붙었니? 그냥 굽히고 들어가지 그랬어?"
"정의를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말라고 배웠습니다."
어린 소년의 대답에 남자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한동안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던 사내는 뚱보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검을 든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남자들은 사내의 정체를 아는지 검을 모두 집어넣고는 예의를 표했다.
"좋아! 내가 누구인지 아는 듯하니, 이쯤에서 소란을 접기로 하자."
뚱보 소년이 분하다는 듯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검사 1명이 귓속말로 속삭이자 표정이 크게 변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군중들 사이로 몸을 감춰버렸다. 소년은 앞에 서 있는 사내의 신분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긴장했다.
"그래, 꼬마야. 너의 그 대단한 무술은 어디서 배운 거지?"
"네? 그게 저... 저는 호무관 출신인데요."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호무관 소년부 수련생인 데니스 조단이었다. 이날의 사건으로 저 외딴 영지 잉글햄의 호크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리게 된다.
"잉? 이거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럽지? 그나저나 행크 사범! 데니스였나? 발기술 좋던 꼬마는 요즘 왜 안 보이지?"
"네? 아! 데니스요? 부모님하고 수도에 간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 녀석 발은 이제 거의 무기 수준인데, 아무 데서나 휘두르고 다니지 말아야 할 텐데 말이야."
"하하! 설마요. 우리 관원 중에 그렇게 주먹질하고 다니는 원생은 없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아무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후아~ 생각보다 멀기는 하구나.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고도 넓구나."
이제 15, 6세쯤 되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년이 자신의 몸보다 큰 로브를 걸치고, 어깨에 멘 배낭을 땅에 끌다시피 하면서 케린버그와 스베인 왕국의 경계인 이스마란 산을 넘고 있었다. 왕국 사이의 대도(大道)라서 길은 잘 닦여 있지만, 그래도 사나운 산짐승이나 길 잃은 몬스터들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곳인데도 소년은 아무런 걱정도 없는 듯 열심히 작은 발을 움직여 걸음을 옮겼다.
대개 여행은 여러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소년은 대체 어디로 가는지 겁도 없이 혼자서 이렇게 산맥을 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단으로 보이는 무리와 조우하게 된 소년은 상단 행수의 배려에 마차 한 귀퉁이를 얻어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짐마차라지만 두 다리를 뻗고 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소년은 모처럼 다리를 쉴 수 있는 것이 기뻤는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차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이지만 너무나 귀엽게 생긴 꼬마였다.
"이봐! 아까 테일스턴 영지에서는 왜 그렇게 검문이 심했던 거야? 지난번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뭐 들은 거 없어?"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영지 병사들 사이에서 샹그릴라 신관들이 나와서 짐과 사람들을 살피던데? 샹그릴라 신전에서 뭔가 도둑맞은 거 아닐까?"
"그래? 아니,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신전의 물건을 건드리는 거야? 재수 없게시리! 괜히 신전에서 저주가 떨어지면 어쩌려구."
"설마하니 고매한 신관들이 저주를 내리려고. 그나저나 아주 중요한 게 사라졌나 봐. 성기사들까지 나선 걸 보니 말이야."
상단을 호위하는 두 용병의 말을 들은 소년은 좀 전에 기뻐하던 얼굴을 로브의 후드로 깊숙이 눌러 쓰며 몸을 마차 짐 사이에 깊숙이 묻고서는 침묵했다.
"영주님! 수도에서 연락입니다."
"총관, 무슨 일인데 이리 호들갑이오?"
"저... 그것이... 머스탱 공작이 오신다고 합니다."
"뭐라고! 머스탱 공작님이! 자네, 지금 농담하나? 아니, 그분이 무슨 일로 갑자기 이곳에 오신다는 말인가! 나하고 일면식도 없는 분이!"
케린버그의 하나뿐이 소드마스터이자 2명뿐인 공작 중 1명인 머스탱 공작이 자신의 영지를 방문한다는 사실에, 잉글햄의 영주인 하워드 남작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워낙 정치에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왕국 최고의 검사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공작이 갖는 무게에 심한 압박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공작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려 했지만,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보게, 피트! 자네 생각에는 공작 각하의 방문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저도 마땅히 공작님의 방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뭐? 말해보게."
"캐더린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계신 것은 아닌지......."
말끝을 흐리는 기사단장 피트 홀의 대답에, 하워드 남작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설마,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되자, 영주는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다.
얼마나 사랑하는 딸인가! 시집보내서 미망인이 된 것도 가엽기 그지없건만, 이제 70이 다 된 노인의 첩실이라니! 애비가 힘이 없어 딸을 돌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영주의 심장을 찔렀다.
"영주님, 혹여 공작님이 '미망인의 선택'을 위해 오시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번 기회가 저희 영지에게는......."
"됐네, 그만하게. 자식을 한 번 팔았으면 됐지, 두 번씩이나 그렇게 내몰 수는 없어!"
"하지만 영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머스탱 공작입니다. 그와의 연줄은 돈이나 재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오는 기회를 차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신중히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만하게, 그만해!"
"휴~ 영주님, 저는 오직 영주님을 위하는 충정에서......."
"알고 있네, 피트. 내 잠시 생각할 게 있으니 자리를 피해주겠나. 미안하네."
"아닙니다, 영주님.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오는 피트 홀의 마음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자식을 팔라는 말을 하는 게 기분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도 2명의 딸이 있다. 같은 아버지로서도 못할 짓이지만, 공작가의 연줄이라는 정말 대단한 권력의 끈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으므로 자신이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휴~ 영주님, 아가씨, 힘없는 신하로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피트의 힘없는 독백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편, 방 안에 홀로 남겨진 하워드 남작은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아냐. 혹시 디안 요새를 점검하기 위해서 방문하시는 것일지도 몰라. 너무 앞서 가지 말자.'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예전의 관례로 보아, 고위 귀족이 디안 요새를 다녀간다고 해서 자신에게 들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영주의 방이 그날따라 아주 어두워 보였다.
"캐더린은 언제 봐도 아름다워."
"아이참! 호크님은 제자를 가르칠 생각은 하지 않고 제 얼굴만 보고 있으면 어쩌겠다는 거예요?"
눈을 흘기며 째려보는 캐더린은 어째 그런 표정까지도 왜 그렇게 예쁜지, 호크는 귀가 터질듯 들리는 자신의 심장소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캐더린!"
"네? 왜요, 호크님!"
기마자세를 취하고 있는, 하얀 도복을 입은 캐더린의 손을 이끌고 나무 아래 벤치로 데려간 호크는 캐더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캐더린 J 아서 드모네이!"
"왜... 그래요, 갑자기?"
"내 비록 평민의 하찮은 이름을 가진 남자이지만, 그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니 내 숨결이 더 이상 이 폴렌시아에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호... 크님, 전... 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캐더린의 뺨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이토록 사랑해주리라고 생각해본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사랑이란 것이 이토록 가슴 시리고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캐더린은 호크의 조건 없는, 헌신적인 사랑을 담은 고백에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다.
"왜 그래요, 캐더린? 나 같은 비천한 평민이 귀족인 그대에게 사랑을 고백해서 화가 난 거예요?"
고개를 가로젓는 캐더린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저는 지금 기쁘기 한이 없답니다. 소중한... 제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 자신의 소중한 마음을 주어서 너무나 기쁘고 행복해요. 하지만... 저는 이미 순결한 처녀가 아니에요. 호크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나는 그런 거 전혀 상관없어요!"
말없이 호크의 뺨을 어루만지던 캐더린은 조용히 호크를 바라보다가 점점 얼굴을 호크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
사랑하는 이와 키스를 하면 귀에서 종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분명히 거짓말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호크의 머릿속에서 천사들이 사랑의 종을 울리고 있었다.
와락 캐더린을 끌어안은 호크는 자신의 심장만큼 크게 뛰는 캐더린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행복이 무엇인지 음미했다.
"캐더린! 내가 맹세할게! 나 반드시 귀족이 되어서 당신에게 청혼할 거야!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지?"
"네! 호크님! 언제까지나요."
눈물로 가득한 캐더린의 눈을 닦아주면서 호크는 가슴속에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 여인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겠다고,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이것 하나만 들어달라고 빌었다.
멀리서 이들을 지켜보던 핸들러의 친구들, 아니 이제는 호무관의 직전 제자가 된 제이로와 에밀 등은 코끝을 찡그리면서 돌아서서 오던 길로 다시 왔다. 이들은 호크에게 호무관에서 수련을 승낙 받고서는 아예 숙소를 이곳으로 옮겨와서 숙식하면서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핸들러를 통해 이들의 사정을 들은 호크는 일단 호무관에 들어오면 호무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요구했고, 호크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인 그들은 일반관원생들이 아닌 호크의 직계 제자로 들어온 것이다.
호크 또한 이들의 재능을 단번에 파악하고서는 이들에게 자신이 가진 전반적인 무술과 군사훈련을 가르치고 있었다. 생전처음 보는 체술과 전투방식에 흠뻑 빠진 이들은 그동안 당해왔던 멸시와 설움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려는 듯이 미친 듯이 수련과 훈련에 몰두했다.
이들의 의지와 대기에 가득한 마나의 영향으로 이들의 기량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호크 또한 성과가 크자 매우 기뻐했다.
오늘도 이들은 개인 훈련을 위해 연무장으로 향하다가 자신들의 스승인 호크의 구애 장면을 보고는 쑥스러워하며 돌아 나오게 된 것이다.
"이햐~ 저 무섭고 차가운 스승님에게 저런 면이 있었네?"
"그러게 말이야. 난 얼음하고 사촌지간인 줄 알았는데. 하하하!"
"하하하하하!"
"응? 핸들러 아냐? 무슨 일이지? 표정이 영 좋지 않은데."
"에밀, 스승님은 어디에 있지?"
핸들러나 제이슨 등은 근위기사라서 이곳에 머물지 않고 내성에 머물고 있었다. 에밀 등은 그런 핸들러가 이렇게 다급하게 이곳을 찾은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야? 스승님은 저기 캐더린 아가씨하고 계시는데, 지금은 가지 않는 게 좋아. 오늘 스승님이 아가씨에게 고백했다고! 하하하하!"
"젠장! 빌어먹을!"
주먹으로 애꿎은 나무를 치는 핸들러의 모습에, 제이로가 깜짝 놀라 뒤로 다가가 그를 끌어당겨 진정시킨 후에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뭐야?"
"캐더린 아가씨에게 미망인의 선택이 들어온 거 같아."
핸들러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상대는......?"
"그게 하필이면... 머스탱 공작이다."
"뭐... 뭐라고? 소드마스터 머스탱 공작!"
"그래! 그렇다고! 젠장 할!"
순간, 모두는 행복에 겨워 두 손을 마주잡고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연인을 낙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동시에 모두의 입에서 같은 말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이봐! 로베르트, 분명히 머스탱 그 작자가 잉글햄으로 떠난다고 했단 말이지?"
"예, 공작님.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출발했을 겁니다."
"흠! 근래 그곳에 몬스터 출현이 잦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레센 제국에서 뭐 다른 낌새라도 있는 건가?"
"최근 들어 이상하게도 로스크 산맥의 몬스터들이 잉글햄과 주변 영지에 나타난다는 보고가 있기는 했지만, 레센 쪽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별다른 일이 없는데 그 말없고 신중한 머스탱이 잉글햄으로 떠났다? 평소에는 집과 왕성 이외에는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인간이 말이야. 디안 요새 점검 차원의 방문도 아니고, 정식으로 영지에 방문을 통보했다... 뭔가 있기는 한 거 같은데 전혀 감이 안 잡히네."
"사람을 붙일까요?"
"어디 적당한 사람이 있는가? 저번에 잉글햄의 다크 문 놈들이 멍청한 짓을 해놓아서 인원이 별로 없지 않은가?"
"본국에서 어쌔신(암살자)을 추가로 지원해주었습니다. 이번에는 눈들을 보아하니 상당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본국의 쟝님께서 꽤나 신경을 쓰신 듯합니다."
"아! 그래. 또 형님께 신경을 쓰시게 만들었군. 잉글햄 이야기가 귀에 들어간 건가? 메이슨 그 작자가 그새를 못 참고 일러바쳤구먼. 비겁한 놈 같으니라구!"
"자신의 입지를 생각한 처세였겠죠.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좋아, 좋아! 기왕에 잉글햄으로 간다니, 이번 기회에 예의 그놈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단신으로 다크 문의 그 많은 전투원을 상대로 해서 이겼다는 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머스탱! 네 놈은 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나를 괴롭히는구나."
케린버그 왕국의 또 다른 공작인 존 헤이스트 케론스, 그런데 본국이라니?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들이 풍성한 가지로 하늘을 덮어서 마치 지붕같이 햇살을 막아주는 아름다운 길 위로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한가로이 걸어가는 소년, 얼마 전에 상단의 짐마차를 얻어 타고 이스마란 산을 넘던 그 금발머리 소년이다.
어느새 이곳, 잉글햄까지 온 것인지 잉글햄의 유명한 하늘 나뭇길을 걸으면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손에 든 지팡이까지 빙글빙글 돌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소풍 나온 어린아이였다.
"아저씨! 여기 홀... 무... 콴이 어디인가요?"
"홀... 뭐라고? 아! 호무관? 하하하! 너도 태권도를 배우러 왔니? 우리 아들도 그곳 원생인데, 이 나뭇길을 지나서 호든가를 지나면 시장이 나오거든, 시장 앞에서 분수대 옆 돌담길을 따라가면 된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하하! 인석아, 넘어지겠다. 조심해야지."
마음씨 좋은 동네 목수의 길안내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소년이었다.
그 짧은 다리로 1시간을 걸은 후에야 소년은 난생처음 보는 건물 앞에 서게 되었다. 처음 보는 글자를 알아볼 리 없을 텐데도 공부하는 수험생처럼 열심히 살피는 모습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이곳이 목적지라면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갈 것이지, 그저 문밖에서 기웃거리는 모양이 집나온 강아지처럼 불쌍하게 보였다.
그때, 안에서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어잇! 하나!"
"태권!"
"둘!"
"태권도!"
소년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현관을 넘어서 연무장 안으로 숨어들었다. 덩굴 담장 너머로 고개를 올려다본 소년은 감동했는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 멋지다!"
새하얀 도복을 입은 수십 명의 소년들이 열을 맞춰서 태권무를 추고 있었다. 부드럽게 춤을 추는 듯하다가 주먹을 내뻗고, 다리를 차올릴 때는 무서운 기세로 주변을 압박하는 태권무에 소년은 자신이 몰래 들어온 것도 잊었는지 박수까지 치고 있었다.
호크는 아이들에게 심신을 수련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태권무를 가르쳤는데, 예상치 못하게 반응이 너무 좋아서 이렇게 따로 태권무 시간을 만들어서 수련하고 있다. 케린버그의 음악이 제법 리듬감이 있어서 그런대로 구색에 맞는 태권무를 만들 수 있었다.
"짝! 짝! 짝! 아! 아름다워요. 훌륭해요! 역시나 이곳에 오길 잘했어."
"야! 꼬맹아! 너 뭐냐? 여기는 잡상인 출입금지 구역이다."
"헉! 자... 잡상인! 뭐라고요?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네가 누군데?"
"저는 바로 샹... 아니, 그게 아니고, 원래 이게 아닌데, 그러니까 뭐냐 하면......."
"너, 가출했냐?"
'헉! 뭐지, 저 남자는? 게다가 저속한 저 말투는 또 뭐야? 생긴 거는 뭐 그런대로 볼 만한 거 같은데,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라니? 혹시 마족 아냐? 아니야. 마족이라면 나의 신성력에 거부감을 느낄 텐데 그런 것도 없고.'
딱!
"악! 뭐예요! 남의 머리를 함부로 때리다니! 예의도 없어요, 아저씨는?"
"뭐? 아저씨? 호오, 너 잘 걸렸다! 우리 호무관의 절대 금지어를 네가, 그것도 내 앞에서 남발하다니! 아... 저... 씨라니! 으득!"
저런, 누군가 소년에게 귀띔이라도 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호크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 바로 아저씨가 아닌가?
순진한 소년은 아직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얀 도복의 검은 띠를 맨 아저씨들을 그 맑은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해리슨 사범! 이 녀석 아무래도 가출소년인 거 같으니까 저기 샌드백 기둥에 반나절만 매달아놔! 그럼, 정신 차리겠지."
"후후! 알겠습니다, 관장님! 꼬마야, 네가 오늘 잘못 걸렸구나. 자! 따라와라!"
"어... 어... 저기요, 이게 아니거든요. 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제가 생각한 것은 이게 아니거든요!"
애절한 소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매정한 두 사범들은 그 소년을 보릿자루처럼 기둥에 매달아버렸다. 태권무를 하고 있던 소년반 아이들은 익숙한 광경인지 몇 번 키득거리더니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호크도 사라지고, 얼빠진 소년만이 그렇게 샌드백과 함께 기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저기요! 흑흑, 이게 아닌데요~ 이러면 안 되는 거거든요? 제가 꿈꾸던 이야기처럼 돼야 하거든요!"
메아리 없는 외침이 호무관의 아침 수련장에 울려 퍼졌다.
"꾸웨엑!"
"꾸웨엑! 크,크크크크!"
"그르륵! 그분의 냄새가 난다!"
"죽음과 파멸의 아버지시여!"
"어딘가... 족장이여! 그르륵!"
"산 아래... 인간들의 성이다. 그르르륵!"
"우리를 부르신다! 모두에게 알려라! 인간들의 성으로!"
갑자기 로스크 산맥 전체에 태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몬스터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대규모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산맥을 뒤덮을 듯 새카맣게 모여드는 몬스터들, 그곳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에는 인구 10만의 케린버그 북부 요충지인 잉글햄이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머스탱 공작님!"
"하하하! 오랜만이네, 하워드 남작!"
오랜만이라니? 자신은 언제 보았는지 기억조차 없지만, 머스탱 공작의 인사치레에 하워드 자작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영지가 잘 관리되어 있더군, 하워드 남작!"
"하하! 과찬이십니다, 공작님. 영지가 워낙 낙후되어서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겸손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요충지인지는 새삼 말할 것도 없고, 로스크 산맥 너머의 전쟁 악귀인 레센 제국과 그 수많은 몬스터들을 이곳의 잉글햄 영주가 막아주고 있다는 것은 케린버그 백성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만약 잉글햄이 뚫린다면 수도까지는 거칠 것이 없겠지. 잉글햄의 로얀 캐슬과 디안 협곡의 디안 요새가 아니라면, 나도 밤잠을 편히 잘 수 없을 걸세. 그 누가 발 뻗고 잠을 잘 수가 있겠는가? 영주와 영주 병사들의 노고에 국왕께서 내리시는 하사품일세."
공작의 손짓에 병사들이 커다란 궤짝을 1개 내려놓았고, 그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하워드 자작은 너무나 많은 금액에 머스탱 공작과 금화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공작님! 저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하! 놀랐나 보군. 진정하시게. 여기 국왕 전하의 편지가 있네. 이걸 읽어보면 자세한 것을 알게 될 거야."
<친애하는 로얀 캐슬의 하워드 남작, 그대의 노고에 우리 캐린버그의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소. 내 늘 그대의 노고를 알기에 보탬이 되려 했으나, 그대도 알다시피 우리 케린버그에는 로베니아 제국의 개들이 곳곳을 좀먹고 있소. 내가 내 영지에 지원을 보내고 병사를 늘려주려고 해도 그 간악한 자들이 그걸 놔두지 않는구려. 나는 그대가 로베니아의 검은손에 물들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소. 이번에 머스탱 공작이 잉글햄으로 간다고 해서 이렇게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보내오. 부디 우리 케린버그의 수호자로서 책임을 다해주시오. 그대 같은 자들이 하나, 둘 늘어갈 때, 우리 케린버그는 저 로베니아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요!
-케린버그 국왕, 찰스 론 디스 하베스트 크라운>
"크흑, 국왕 폐하! 성은에 감사합니다. 소신 하워드, 충정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서신 앞에서 무릎 끓고 오열하는 하워드 남작을 진정시키고 일으켜 세운 머스탱 공작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 사람아, 다 큰 사람이 애들처럼 울긴. 자, 자! 진정하게. 그리고 짐마차에 보면 위에 있는 화물은 눈속임이고 밑에 무기들과 갑옷들이 있네. 케론스 공작의 눈 때문에 많이 챙겨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만. 이 금화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병사들을 잘 훈련시키게. 자네가 국왕 전하의 손발이 되어주어야 하네."
"걱정 마십시오, 공작 각하. 저와 잉글햄의 병사들은 케린버그 최고의 강병들입니다."
"그야 잘 알고 있네. 눈빛들이 날카롭더구먼. 하하! 그리고 이제 밥 좀 주는 게 어떤가? 아주 시장하다네. 하하하!"
"이... 이런 실수를! 총관! 총관!"
자국의 귀족을 만나고, 자국의 군대에게 병기를 나누어주는 것도 이렇게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는 것에 머스탱 공작은 화가 났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참고 또 참았다.
케린버그는 폴렌시아 대륙에서 제법 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국이지만, 애석하게도 왕국 설립 초기에 남부의 패자 로베니아 제국 출신의 귀족들의 힘을 빌려 나라를 세웠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개국 공신들 중에는 로베니아 출신 귀족들이 많이 섞여 있었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케린버그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다. 그 때문에 케린버그는 어이없게도 로베니아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중 가장 손꼽히는 이는 바로 케론스 공작이다. 그는 정치적 수완이 상당해서, 국왕파와 비등한 세력을 손에 넣고 왕을 견제해오고 있었다.
머스탱은 그런 국왕파의 수장으로서, 케린버그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 암투 중이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머스탱 공작은 자신을 바라보는 로얀 캐슬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고 처음에는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이유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식탁에는 잉글햄의 모든 귀족들이 모여 들었다. 다들 왕국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파의 수장, 머스탱 공작과 연줄을 놓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서 호화스런 치장을 하고서는 부산을 떨었지만, 하워드 자작의 가족들은 침울했다.
권력에 눈이 먼 지방 귀족들의 아첨에 입맛이 떨어진 공작이 왼편의 하워드 자작의 가족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가족들 사이에 앉아 있는 캐더린을 본 것이다.
"허허! 남작에게 이렇게 예쁜 여식이 있는 줄 몰랐소이다. 정말 한 송이 장미꽃이로군."
공작의 한마디에 저녁 식탁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모두의 손길이 멈추어졌고, 시선은 일제히 하워드 자작에게 쏟아졌다.
"크헙! 콜록콜록! 하하! 네... 그게... 바로 제 딸인 캐더린이라고 하옵니다, 공작 전하."
"캐더린이라, 이름마저도 아름다구나!"
공작이 입을 열 때마다 가족들의 표정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소드마스터라서 비록 50대처럼 보인다고는 하지만, 80세를 바라보는 노인이 사랑스런 자신의 딸이자 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오빠 제임스는 견딜 수 없는 모욕감에 포크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호오! 저렇게 탐스런 아가씨를 아직 그대로 두었다니, 우리 케린버그 왕국의 젊은이들이 눈이 멀었나 보구먼. 허허허! 내가 중신이라도 서야겠는데?"
"이... 이! 너무하십니다, 공작님! 그렇게 말을 돌리지 마시고 사실대로 말씀하시지요. 제 동생, 캐더린을 미망인의 선택으로 데려가시려고 오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 미망인의 선택......?"
'오호라, 왜 나를 보는 시선들이 곱지 못했나 했더니. 그래, 그러고 보니 하워드 남작의 딸이 인근 영지의 영주 자제와 결혼했다고 했었는데, 지난 전쟁 때 사망한 모양이구먼. 후후! 이런, 이런! 오해도 아주 엉뚱하구먼.'
머스탱 공작이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캐더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워드 남작과 그녀의 오빠 제임스가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버지로서, 오빠로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이내 고개를 떨구어 버렸다.
"공작 전하! 보잘것없는 미망인인 저를 좋게 보아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저는 따로 마음을 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감당하기 어려운 공작 전하의 말씀은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하~ 나 참, 이거 오해를 해도 이만저만 하는 것이 아닌데?'
"이보게, 캐더린 양, 뭔가......."
"잠시 제가 말을 마저 하게 해주십시오. 이 자리를 빌려서 모두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호든가의 호무관 관장인 호크님의 청혼의 언약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와 제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캐더린의 폭탄선언에 식당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초대되어 온 귀족들은 이 놀라운 소식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내 식당 안은 아수라장처럼 시끄러워졌다. 어떻게 평민과 청혼의 언약을 할 수 있냐, 호무관의 호크라면 괜찮지 않겠느냐, 얌전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는 둥.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식당의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이 포크로 식탁을 두들겼다.
"아, 조용, 조용해주시오! 이제는 내가 말할 차례가 된 것 같은데. 후후, 캐더린 양, 내가 이 먼 곳까지 와서 이런 거절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감히 공작인 나에게 말이야. 미망인의 선택을 거절한다면, 대신할 기사를 준비하시게. 어디 그 유명한 호크란 자에게 기꺼이 나의 검술을 견식시켜 주지. 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사라지는 공작을 바라보던 캐더린의 신형이 의자에 쓰러졌다.
'아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호크님, 어떻게 하죠? 흑흑!'
말없이 식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캐더린을 보면서 가족들은 애가 끓을 뿐이었다.
제국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검의 천재, 머스탱을 상대로 나설 기사가 어디 있겠는가?
식당에는 공작의 웃음소리만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공작님,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거짓말이라... 이보게, 뉴튼."
"네, 각하!"
머스탱의 직속 기사단인 '불의 사자' 기사단장 뉴튼은 식당에서 벌인 공작의 기행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무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한 것이다. 자신이 아는 공작은 절대로 이런 저속한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석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네. 이번 기회에 좋은 보석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음......."
"각하, 여자가 필요하시다면 저에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이런, 이런! 설마하니 자네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나? 하하하! 난 그녀에게 관심이 없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녀의 청혼자네. 호무관 관장이라는 자!"
"네? 아니, 왜 그런 평민에게......."
"겨우 십오륙 세 소년을 그렇게 단련시킬 수 있는 인재라면, 우리 케린버그에 꼭 필요한 존재야. 반드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 해. 그 전에 우선 실력을 알아봐야겠지. 자신의 여자를 지키려면 있는 힘껏 재주를 드러내겠지. 하하하하!"
"아! 그런 생각이셨군요. 부끄럽습니다, 각하!"
"하하하! 아닐세. 나도 식당에서는 정말 당황했으니까. 그나저나 언제쯤 만나게 되려나? 이거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는걸."
머스탱 공작, 그도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무인(武人)이었다.
호무관의 수련장 안쪽, 호크의 관장실.
와장창!
"어떤 개쉐이가 우리 캐더린에게 껄떡거린다구? 어떤 쉐이가 겁도 없이, 어디 있어?"
"진정하세요, 호크님! 우선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세요. 지금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니니까요."
"후우~ 후우~ 그래, 좋아. 일단 앉지."
관장실 집기가 반 이상 부서지고 나서야 겨우 진정한 호크를, 핸들러는 진땀을 흘리면서 달래고 있었다.
"일단 상대는 이 폴렌시아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소드마스터입니다. 절대강자란 말씀이에요. 그런 자를 상대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을 잃고 날뛰시면 어쩌란 말입니까? 냉정한 상태에서도 힘들 텐데."
"흥! 소드마스터인지 뭔지 내가 알 바 아니고, 당장 나하고 붙자고 해! 아작을 내줄 테니까!"
"휴~ 호크님, 아니 사부님, 도대체 소드마스터가 어떤 경지인지 아시고나 그러시는 겁니까?"
"뭐! 대충 들어서 아니까 걱정 마. 나도 내 밑천을 다 드러낸 것이 아니니까 걱정 마라. 가서 날짜와 장소나 받아와! 어서!"
관장실에서 나와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핸들러를 발견한 그의 친구들이 핸들러를 둘러쌌다.
"휴우~ 이제는 어쩔 수 없구나!"
"어이! 핸들러! 어떻게 된 거야?"
"기사 대결이다!"
"젠장! 결국은 이렇게 되는구먼."
"뭐야, 에밀! 너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거야?"
"그래, 지미. 사부님의 성격을 몰라서 그래?"
"그래. 에밀의 말이 맞아. 그리고 벌써부터 이렇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어. 지난밤에 사부님께서 혼자서 수련하시는 것을 봤는데, 내 생각이지만 사부님도 소드마스터일지 몰라."
"제이로,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우리 사부님이 소드마스터라고?"
"그래, 루브카. 그날 내가 본 것이 맞는다면 말이야."
제이로의 말에 모두가 깊은 상념에 빠져들어, 내성으로 호크의 말을 전하러 갈 핸들러조차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며칠 뒤, 호든가 거리는 난리가 났다. 호무관의 호크와 왕국의 스드마스터 머스탱 공작이 호무관 수련장에서 미망인의 선택 기사대결을 한다는 소식이 호든가에서부터 잉글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심지어 이웃 영지에서도 소문을 듣고 대결을 구경하러 몰려오기까지 했다.
소드마스터!
일반 백성들은 죽을 때까지 보기 힘든 존재이지 않은가!
게다가 거기에 애절한 러브 스토리까지 가미되었으니,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의 관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자고로 구경 중에 최고는 싸움 구경이라고 했으니, 어느 누가 마다하겠는가.
당일, 호무관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그 와중에도 호크는 사람들에게 입장료를 챙기는 사업수단을 발휘했다.
"와와!"
사람들을 헤치고 나서는 일단의 무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머스탱 공작이 호위기사 뉴튼과 몇몇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들어섰다. 연무장에 마련된 의자에 앉은 머스탱 공작은 은근한 떨림에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다. 싸움 직전의 이 떨림은 언제나 그를 흥분시켰다. 어서 빨리 휘둘러달라고 자신의 검이 떼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긴장감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낙이었다.
또 다시 함성소리가 들리자 머스탱 공작도 반대편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중에 검은 머리의 젊은이를 일견한 머스탱 공작은 절로 탄성을 질렀다. 호크의 전신에서 뻗어 나오는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다. 소드마스터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기에 호크의 기, 즉 마나의 변화를 알아차린 거였다.
"좋아! 정말 좋군. 이거 오늘 정말이지 즐거운 시간이 될 거 같은데? 기대 이상이야."
머스탱 공작이 망토를 풀고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꺼내 자유롭게 한 후,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호크도 전투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서는 폴렌시아에서 만든 새로운 전투복을 입고 연무장에 들어섰다.
머스탱 공작은 자신의 애검인 '선 블레이드(Sun Blade)'를 들고 있었고, 호크는 양손에 50cm 정도의 검을 손잡이를 거꾸로 해서 들고 서 있었다.
"반갑네. 자네가 그 유명한 호무관의 주인이시구먼."
"그래, 반갑다. 이 늙은 색마 영감탱이야!"
"헉! 저... 저 무례한! 감히 누구에게!"
검을 빼들고 달려들려는 호위기사들을 제지한 머스탱 공작은 아주 즐겁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자! 그럼, 어디 그 세 치 혀만큼이나 실력도 있는지 볼까?"
"좋지. 오늘 이후로는 아예 여자 생각이 안 나도록 해주지."
두 사람이 마주서서 자세를 잡자, 난데없이 연무장 안에 돌풍이 일기 시작했다.
잉글햄 디안 계곡의 디안 요새 전진 초소.
"아우~ 지금쯤 호든가에서 세기의 승부가 벌어지고 있을 텐데 그걸 못 보다니, 아쉽다!"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누가 이길까?"
"예끼, 이 사람아! 누가 이기다니? 당연히 머스탱 공작님이시지! 소드마스터란 게 뉘 집 강아지 이름인 줄 아나!"
"하기야,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야, 난 우리 아들이 배우고 있는 곳이라서 그런지, 호무관의 호크님이 이겼으면 좋겠어."
"나도 같은 마음이야. 그렇지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가?"
"어라? 이보게, 저기 숲이 움직이는 거 같지 않나?"
"숲이 움직여? 이 사람이 취했나, 어디 보자구. 저... 저런! 어서 봉화를! 어서!"
"오오! 샹그릴라의 신들이시여! 이건 악몽이야! 어서 성에 알려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