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크-2화 (2/55)

Chapter 2. 신세계 폴렌시아

짹짹!

우~ 꾸꾸꾸~

"......?"

"우~ 머리야!"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번쩍하는 빛 무리가 자신을 덮친 것은 기억이 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생처음 보는 숲속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낯설기만 한 숲속에서 겨우겨우 몸을 수습하고 일어선 사람은 바로 권혁 하사였다.

코피도 흘렸는지 입 안이 찝찔했다. 근처 개울가에 가서 얼굴을 씻으니 한결 개운했다.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차에 돌아오다 보니 엄청나게 큰 나무가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커도, 커도 세상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다니! 고개를 젖혀서 위를 쳐다보던 권혁은 쳐다보는 것을 포기하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무 등걸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고, 둘레는 장정 10여 명이 두 손을 맞잡고 둘러싸도 모자랄 정도로 컸다.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본 권혁은 달지차로 향했다. 어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량의 바퀴를 지지하는 크랭크축이 아예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차가 왼쪽 앞쪽으로 기울어져서 땅바닥에 박혀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그래도 군인이라서 그런지 권혁 하사는 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뒤에 실린 각종 무기와 탄약을 모두 꺼내서 옆에 있던 나무의 구멍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막상 나무 안에 들어와 보니 생각보다 넓었다. 일어서도 머리에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이도 제법 되었고, 또 나무 둘레가 워낙 크다 보니 안의 넓이도 상당했다.

1시간을 정리하자 차 안은 텅 비게 되었다.

"휴~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여기는 어디고, 어디로 가야 하나!"

[호호! 이곳은 폴렌시아 대륙이랍니다, 성자시여!]

느닷없이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권혁은 앞구르기로 K2 소총을 집으면서 차량의 바퀴에 들러붙었다.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란 것이다. 만약에 적이었다면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다.

꿀꺽!

권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조심스럽게 보닛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다시 뒤쪽으로 포복을 해서 차량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이럴 때가 가장 위험하다. 자신은 상대에게 노출되어 있고, 상대는 자신을 파악하고 있고.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호호호! 왜 그렇게 숨으시나요, 성자님! 제가 놀라게 해드렸나 보네요.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나오세요.]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번에는 소리가 난 방향을 알 수 있었는데, 뒤쪽의 나무였다. 하지만 고개를 내밀어 봐도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권혁은 '앞에 총' 자세로 빠르게 이동해서 나무에 등을 대었다. 그리고는 사격자세를 취하고는 나무 등걸을 타고 나무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한 바퀴 돌아서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 왔지만, 여전히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군복 등 언저리가 축축이 젖어서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그만큼 긴장했다는 뜻이다.

[호호호! 일부러 장난하시는 거죠? 자꾸 제 주위를 돌아서 뭐 하시려고요?]

그 소리에 너무 놀라서 위를 올려다보니 그 큰 나무 위에 눈, 코, 입이 생겨난 것이 아닌가?

"흐에엑!"

권혁은 기겁하면서 나무에서 떨어졌다. 물론 소총은 그 나무에 겨누어진 채로 총구는 언제라도 불을 뿜을 듯이 떨리고 있었다.

"뭐... 뭐야! 너 뭐하는 놈이야......!"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나무는 계속 웃어댔다.

[호호호! 위대한 성자님이 그렇게 허둥대는 모습이 웃기네요. 그리고 저보고 누구냐고 하신 거예요? 참내, 숲의 스톤(Stone) 트로이얀입니다. 숲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창조와 조화의 관리자이잖아요? 그걸 성자님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흥!]

'뭐... 뭐냐! 저 괴물이 마치 여자애처럼 투정을 부리고... 정신 차리자, 정신! 제발 긴장 좀 하자! 그러니까 여기가 폴... 뭐시깽이라고, 게다가 말하는 나무라... 숲의 관리자... 아~ 머리가 더 아파온다, 젠장. 이거 꿈은 아닌 거 같은데. 진정하고 정리 좀 하자.'

처음에 당황했던 권혁도 차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나무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나무를 통해서 이곳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곳은 폴렌시아라고 불리는 대륙으로, 북부와 남부의 제국을 사이에 두고 여러 왕국들이 존재하는 곳이라고 했다. 말 그대로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초자연 현상으로 가득하고, 여러 종족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무와, 아니 트로이얀에게 많은 정보를 얻은 권혁은 그날의 빛은 뭔가 강력한 폭발이었고, 그 폭발의 영향으로 자신이 시공간을 넘어서 이곳에 도달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뭐, 반은 맞고 반은 틀렸지만 지금 현재 그가 추측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숲속에서 혼자 아담처럼 살 수도 없고, 다시 돌아갈 방법 또한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나가서 같이 살아가든지, 아니면 뭔가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결심이 서자 권혁은 트로이얀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바깥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트로이얀이 말하기를 이곳, 쥬(Ju)의 숲에는 폴렌시아 쥬의 성자밖에는 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여전히 그를 성자로 알고 있었기에 권혁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바로 권혁을 자신을 창조한 주인의 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이얀은 세계수로서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권혁을 이동시킬 만한 세계수 잎을 만들 수 없었다. 이곳 시간으로 6개월은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에 맥이 풀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 권혁은 포기도 빨랐다.

우선 이곳에서 6개월을 지내야 했기에 자신의 짐 속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찾기 시작했다. 팔자에도 없는 로빈슨 크루소가 될 생각에 막막했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부산을 떨었다. 낯선 곳이었지만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였다.

30여 분을 짐 속에서 씨름한 끝에 바닥에 깐 판초 우의 위에는 증식용 건빵 5봉지, 전투식량 3일분, 봉지라면 10개가 놓여 있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던 권혁의 이마에 주름살이 생겼다.

"이걸로 육 개월을 버텨야 한다니. 휴! 정말 어쩌냐?"

하늘을 바라본 뒤 탄식한 권혁 하사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만약 이곳의 1개월이 45일이란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마 미쳐 날뛰다가 트로이얀을 베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의 윗주머니에 있던 담뱃갑을 꺼냈다가 속에 단 1개비만이 남은 것을 확인하고는, 아쉬웠지만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도저히 피울 수가 없었다. 이것마저 피워버리면 아무런 낙도 없을 거 같아서였다.

이곳 시간으로 1개월이 흐른 뒤, 신성한 쥬의 숲 심장부에 웬 폐인 1명이 돌아다니며 숲의 정기를 흩뜨리고 있었다.

"후아아~ 암!"

끈이 풀어진 군화를 질질 끌면서 위에는 깔깔이만 걸친 채 어깨에 K2 소총을 꿩 사냥총인 양 메고 숲속을 마구 헤집고 다니는 이 남자, 바로 권혁 하사였다.

"아~ 이런! 이제는 과일 비슷한 것도 눈에 안 띄네. 뭐 먹고 살라는 거야, 정말!"

손에 든 나뭇가지로 수풀을 헤쳐 나가던 권혁이 수풀을 통과해서 나오자 처음 보는 널따란 공터가 드러났다.

"어렵쇼? 이런 곳이 있었네? 오호~ 이거 봐라. 뭔가 있어 보이는데? 흠흠."

공터에 들어서자 주위를 둘러싼 바위들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가공된 흔적이 보이자 호기심이 생긴 권혁이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위에는 처음 보는 그림들이 가득했다. 이것이 문자인지 그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바위에 새겨진 것들을 무시하고 바위 틈 사이로 생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동굴 안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는데,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있는 힘껏 숨을 들이쉰 권혁은 온몸의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전신이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자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트로이얀 주변에 있다 보니 그 수다에 거의 미쳐가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혼자 지내기에 너무 좋은 장소를 알아내자 뛸 듯이 기뻤다. 당장에 짐을 이곳으로 옮긴 권혁은 트로이얀의 수다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기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폴렌시아에 온 지 45일 만에 갖게 된 편안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새벽녘에 잠이 깬 권혁은 자신의 몸이 상쾌하다 못해 무척이나 가볍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몸이나 풀어 볼 요량으로 가볍게 체조를 시작했다.

20여 분의 스트레칭을 끝낸 권혁은 뭔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을 느꼈다. 단순히 기분 상으로 몸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었다. 긴가민가한 느낌을 확인해보기 위해서 권혁은 기합짜기를 시작으로 기본자세를 연결형으로 해서 몸을 풀었다.

몸을 풀면서 권혁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자신의 특공무술 사부인 권영수 상사는 특공무술의 대가였다. 청와대 경호실에 매년 파견 강사로 나갈 정도로 그의 손속은 육군 내에서 독보적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든 것이 권혁이었다.

단번에 권혁의 재능을 알아차린 권 상사는 정해진 훈련시간 이외에도 따로 불러서 개인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권혁은 거의 야간경계 근무에 나가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고참들에게 꽤나 미움도 많이 받았다.

하여간 수도와 연속 발차기를 하던 중, 주변의 기를 느끼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권 상사 말에 의하면 지금은 세상이 혼탁하고 오염되어서 그렇지, 정말 예전처럼 세상에 기(氣)가 충만하다면 장풍(掌風)을 쓰는 것도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권혁도 잘 알고 있었다.

권 상사가 알려준 태극심법(太極心法)이라는 호흡법은 그가 지난 2년간 꾸준히 해온 토납법이다. 이 호흡법을 연마하고 나서부터는 몸이 훨씬 더 가벼워졌고 기운도 더 세졌다. 그때 느꼈던 것으로, 그나마 새벽에 할 때는 괜찮지만 날이 밝고 사람들이 많아지면 대기 중의 기(氣)가 흐려지거나 아예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기(氣)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충만한 것이다.

몸을 서너 차례 푼 다음 조용히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한 후, 눈을 반개(半開)했다. 그리고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짧게 내뱉기를 반복하자 그의 아랫배가 불록거리면서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런 그의 몸 주위로 하얗게 수증기 막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무아지경(無我之境) 속으로 빠져든 권혁은 주변의 숲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자연과 하나가 되어갔다.

그렇게 5개월이 흐른 뒤, 드디어 세상을 향해 나갈 때가 되자 굳건하게 감겨 있던 권혁의 두 눈이 떠졌다.

"후~ 이제 나갈 때가 되었나? 권 상사님이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 입에 거품을 무시겠군. 사람의 신체 능력을 이렇게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니, 정말 놀라운 곳이야. 도대체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떨까? 전부 슈퍼맨 같은 사람들일까? 아냐. 에고고! 혼자 상상만 해봐야 뭐 하겠어. 일단 나가보자구."

트로이얀은 오랜만에 나타난 권혁에게 그동안 밀렸던 수다 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덕분에 권혁은 정신적인 고문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적 학대를 근 2시간여 동안 받고 나서야 겨우 트로이얀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권혁은 폴렌시아 사람들이 보면 경악할 세계수 잎을 몇 장 얻었다. 그러나 보통 나뭇잎과 똑같이 생긴 세계수 잎을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권혁은 자신을 째려보는 듯한 트로이얀의 시선을 느끼고서는 군소리 없이 품에 넣었다.

그 다음으로 휴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기기 시작했다. 일단 전투배낭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 넣고서는 K2 소총을 어깨에 걸쳐 메고 방탄모 턱 끈을 조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쳤다.

남겨놓은 짐들이 걱정되었지만, 자신이 준 나뭇잎을 찢으면 대륙 어디에 있든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트로이얀의 말에 크게 안심하고서는 트로이얀과 별로 아쉽지 않은 작별을 하였다.

얼마나 숲을 가로질러 나왔는지 모르겠다. 트로이얀에게서 푸른빛이 퍼져 나오는 통에 눈이 부셔 잠시 두 눈을 가렸다가 떠보니 어느새 '쥬'의 숲에서 나와 있던 것이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 걸어 나가면 인간들의 마을이 나온다기에 권혁은 무작정 그 방향으로 걸었다. 천리행군으로 단련된 그였기에 별 어려움 없이 숲속을 헤쳐 나갔다. 숲을 통과하는 동안 보게 된 동물이나 식물들은 확실히 지구에서 보던 것들이 아니어서 그러지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벌써 일주일째 이렇게 산속을 헤매고 있다. 수풀을 헤치고 나오던 권혁이 탄성을 질렀다. 드디어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길의 상태를 보건대, 오랜 세월 동안 닦여진 것이었다. 조금 더 가면 사람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권혁은 힘을 내서 걸었다.

그렇게 1시간여를 걸었을까? 앞쪽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소리, 비명소리, 그리고 무슨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권혁은 재빨리 자세를 숙이고 속보로 앞을 향해 달려갔다.

소리의 진원지에 가까이 다가가자 중세시대 배경의 영화에서나 보던 마차 3대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자들이 커다란 검을 들고 돼지머리를 한 녹색괴물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마도 기사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 일반 병사들로 보이는 자들이 창과 검, 석궁을 들고 녹색괴물들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녹색괴물은, 아니 돼지괴물은 20여 마리 정도였는데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창을 찔러오는 병사 두셋을 창을 들고 있는 채로 잡아서 집어던지는 것이 아닌가!

휘익.

구경하고 있던 권혁이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을 정도였다. 손에는 나무도끼 비스무리 한 것을 들고 있었는데, 저 조악한 무기가 기사의 플레이트 메일을 강타하자 덩치 큰 기사가 2, 3미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고 단단하게 보이던 메일의 가슴 부분이 움푹하게 찌그러졌다. 무식하면 힘만 세다더니, 바로 저놈들을 두고 한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권혁은 점차 인간들이 괴물들에게 밀리면서 뒤로 물러서자 저들을 도와줄 것인지, 그냥 모르는 척 지나갈 것인지 갈등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 세계에 자신이 뛰어들어도 되는지 결심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권혁의 결심을 도와준 것은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비명을 지른 것은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금발의 30대 초반의 여인이었는데, 눈부시게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돼지괴물 하나가 병사들의 방어진이 무너진 틈을 타서 마차 쪽으로 치고 들어왔고, 갑자기 녹색괴물이 자신의 앞까지 다가오자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여인이 죽어라 비명을 내지른 것이다. 그 비명소리가 자신을 살리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만, 어쨌든 시기적절한 행동이었다.

결심을 굳힌 권혁은 접혀진 K2 소총의 개머리판을 펴서 고정했다. 그리고 '서서 쏴' 자세를 취했다. 이는 명중률은 떨어지지만, 기동성이 가장 좋은 자세였다. 가늠좌 사이로 금발 여인을 덮쳐가는 돼지괴물의 머리가 들어왔다.

"굿바이~!"

탕!

털썩!

여인을 향해 침을 흘리던 괴물의 머리가 날아가면서 그 큰 몸뚱이가 쓰러지자 삽시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탕!

쿵!

다른 1마리가 쓰러졌고, 그런 식으로 엄청나게 큰 굉음이 1번 날 때마다 녹색괴물들이 쓰러져갔다.

잉글햄의 근위기사인 핸들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케린버그 왕국의 조그만 영지인 잉글햄의 해밀턴 남작 영애 캐더린을 영지로 호송하는 임무를 맡을 때만 하더라도 아주 가벼운 임무라고 생각했다.

남작의 영애는 인근 영지인 로덴로우의 둘째아들에게 시집을 갔지만, 그가 지난 제2차 일년전쟁 중에 사망하여 미망인이 된 처지였다. 그런 그녀를 불쌍히 여긴 두 집안에서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것이다.

두 영지 사이는 겨우 하루거리. 워낙 작은 영지인 탓도 있지만 근처는 대도시가 있는 햄튼 영지가 있어서 몬스터 토벌이 종종 일어나고 있기에 몬스터에 의한 피해가 그리 크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에 이 숲길은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정한 길이었는데, 운이 없게도 오크가, 그것도 20여 마리가 덤벼드니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더구나 오크 중에서도 그 힘과 덩치가 제일이라는 하크오크였다. 근위기사인 자신과 동료 기사 10명에 병사 30명으로는 절대 무리였다. 몬스터와 싸워본 경험이 있는 노련한 병사들을 대동하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이미 병사 절반이 죽어나간 후였다. 그러니 당연히 방어진에 구멍이 생기게 되었고, 몬스터들의 공세는 더욱더 거세어졌다.

기사들마저 한두 명씩 부상을 당해서 바닥에 쓰러지자, 그 빈틈을 뚫고 오크들 중 1마리가 캐더린 부인을 노리고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런 광경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천천히 움직였다. 비명을 지르는 부인도, 부인에게 달려가는 오크도, 그리고 그 오크가 머리에서 피를 뿜으면서 쓰러지는 모습까지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두 번째 굉음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이내 부인의 비명소리와 병사들의 악쓰는 소리, 그리고 동료 기사들이 부인을 에워싸는 모습을 보며 그는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탕!

그리고 또다시 총소리와 함께 오크 1마리가 쓰러졌다.

오크들도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했는지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얼룩무늬 군복 덕택에 금방 권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막대기에서 불을 뿜어대면 자신의 동료들이 푹푹 쓰러진다는 것을 알아차린, 오크들 중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키가 거의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오크가 쇠가 갈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르륵, 마법사다! 어서 마법사를 죽여라!"

오크들도 그제야 권혁의 정체를 파악했는지 마차와 기사들을 내버려둔 채 권혁에게 달려들었다.

20마리 중 10마리가 벌써 권혁에게 당하자 남은 10여 마리 모두가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면서 권혁에게 달려들었다. 그것도 아주 친절하게 무리지어서.

그 모습에 권혁은 나 죽여 달라고 달려드는 돼지들을 보는 것 같았고, 반자동에서 자동으로 클립을 돌렸다.

딸깍.

탄창을 갈아 끼운 권혁은 총열이 위로 튀지 않도록 왼손으로 총열을 내리누르면서 오크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

20발들이 탄창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탄창을 갈아 끼우면서 권혁은 횡으로 달렸다. 사격 후 이동은 현대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전투방식이었다.

재장전한 권혁이 다시 앞으로 뛰어나오면서 살아남아 일어서려는 오크 2~3 마리를 사살했다. 전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는 오크머리에 확인사살까지 마저 했다.

"후우!"

가볍게 호흡을 하고서 마차와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니, 병사들과 기사들이 자신에게 칼과 창을 들이미는 것이 아닌가!

권혁은 순간 화가 폭발했다.

'아니, 이것들이 겨우 구해주었더니 어디서 칼질이야, 칼질이! 이것들을 그냥!'

하지만 권혁이 그들의 표정을 자세히 살폈더라면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표정을 보라! 공포에 절어 다리를 덜덜 떠는 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오크 때문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오크 20여 마리를 해치운 권혁도 무서운 존재였다. 게다가 권혁이 이것도 훈련이랍시고 얼굴에 위장크림을 잔뜩 바르고, 온몸에는 위장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어서 꽂아놓았으니,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권혁이 아마도 숲속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화가 난 권혁이 두 눈에 쌍심지를 돋우자 더욱 험상궂은 모습으로 비쳐졌다.

그때, 무리 중에서 갈색 머리의 청년이 병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갑옷과 검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아 기사임에 틀림없었다.

"fkldjklfjls fjkldjlkjfls fjdlkjlfknvl."

"뭐... 뭐냐, 이거? 어디 말이야? 영어도 아니고 불어도 아닌 거 같은데? 아차차! 여기는 지구가 아니지? 트로이얀이랑은 정신을 통한 대화였기에 의사소통이 가능했지만, 이 사람들과는 안 되나 보네."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결국 아무런 뜻도 전달하지 못했다.

답답하기는 잉글햄의 근위기사인 핸들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자신도 상대가 인간이 아닌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어찌 되었건 사람인 것은 틀림없었다. 방탄모를 벗으니 귀도 보였고, 그러니 엘프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마에 문장도 없으니 마족 또한 아니었다. 혹시 위대한... 존재... 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장난이라도 그 잘나고 고귀하신 드래곤께서 폴렌시아의 공용어를 못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지 않은가?

핸들러는 그의 머리색이 검은색임을 알아보고 저 바다 건너 뮤슐란 대륙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수없이 들었던 모험담 가운데 뮤슐란 대륙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하지만 피부도 검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위장크림에 대해 알 리 없는 핸들러가 착각 속에 빠져 있을 때, 권혁은 바디 랭귀지를 시도했다.

그렇다! 만국 공용어!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바디 랭귀지 하나면 되지 않던가!

권혁의 손짓 발짓에 금발멀리의 청년이 검의 손잡이를 오른쪽 가슴에 올려붙이고서는 상체를 가볍게 숙였다.

권혁은 상대가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을 알아보고서 음식을 먹는 흉내를 내면서 뭔가 먹을 것을 달라고 했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자 그가 이해했다는 듯이 따라오라고 손짓을 했고, 그 청년이 뭔가 지시하자 병사들과 기사들이 주변을 정리하고서는 마차를 이동시켰다. 권혁도 멀뚱히 바라보다가 얼른 일행들을 뒤쫓아 갔다.

1시간 정도 이동하자 숲 안에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 한쪽에는 커다란 고목이 있었고, 고목 옆에는 고목보다 더 오래된 것 같은 통나무집이 일행들을 반겼다.

그 옆에는 우물도 있었는데,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병사들이 마차를 세우고 말들을 마구간으로 옮기는 등 야영 준비로 바쁘게 움직였다. 익숙하게 이곳 시설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꽤나 많이 이용하는 곳인 듯했다.

권혁은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해서 한쪽 나무 등걸에 기대앉았다. 간만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아서 방탄모와 소총을 내려놓고 아예 상의마저 벗었다. 시원한 바람이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몸을 감싸자 그동안 이세계(異世界)에 와서 쌓인 피로가 모두 풀리는 듯했다.

고개를 꺾으면서 관절을 이리저리 움직여본 권혁은 식사 준비를 하는 병사들 사이로 걸어갔다.

권혁이 나타나자 식사 준비를 하던 병사들이 움찔거리면서 비켜주었다. 병사들의 행동에 권혁도 조심스러웠다.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두레박으로 물을 뜬 권혁은 얼굴부터 닦았다. 위장크림이란 게 피부 상하게 하는 데 특효였다. 게다가 얼마나 갑갑한지, 군용 다이얼비누로 몇 번이나 거품을 내보았지만, 잘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차례 세수를 하고 나니 한결 기분이 개운했다.

병사들은 권혁이 세수를 하고 본래의 얼굴로 돌아가자 놀라서는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권혁은 수건을 목에 걸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군화도 벗도 군장을 등받이 삼아서 편히 기대어 앉았다. 그때 즈음, 병사들도 더 이상 권혁을 훔쳐보지 않고 자신들의 할 일을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권혁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동안 지치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사람을 보니 긴장이 풀어진 것이다.

곤하게 자다가 순간 놀라는 그때처럼 긴장될 때도 없을 것이다. 권혁 또한 갑자기 헉! 하는 소름끼치는 느낌에 벌떡 일어났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저녁놀이 물들고 있었다. 공터에는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지개를 펴다가 발밑을 보니 나무 그릇에 스프와 빵 몇 조각이 놓여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이던가! 권혁은 누가 보든 말든 순식간에 그릇을 비웠다.

"꺼억~!"

하고 트림을 하자 그 모습에 얼마 전까지 자신을 두려워하던 병사들이 실실 웃어댔다. 게다가 좀 나이가 있는 듯한 병사가 자신에게 다가와 스프와 빵을 좀 더 건네주었다.

권혁이 고개를 숙이면서 고마움을 표하자 노병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손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댔다. 많이 먹으라는 호의에 권혁은 사양하지 않고 아주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병사들과 함께 모닥불에 모여 앉아 있게 되었다. 자신이 먹는 모양을 빤히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니 아무리 위장이 좋은 권혁이라도 좀 거북했다. 입에 빵을 가득 문 채로 씨익 하고 웃어주니 병사들도 크게 웃으면서 권혁에게 술을 권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식사를 같이 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어색함을 덜어낸 병사들과 권혁은 권하거니 받거니 하면서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렇게 웃고 즐기는 동안에 하나 둘 잠자리로 들어갔고, 권혁도 오랜만의 포식으로 배를 두드리면서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공터 주변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많은 걸로 보아 오늘은 편히 자도 될 것 같았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것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던가? 권혁은 오랜만에 사람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낯선 땅, 폴렌시아에서 처음 만난 인간들과의 첫날밤이었다.

아침 이슬 때문에 한기가 들자 권혁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위에는 러닝셔츠를 입고 하의만 전투복을 입은 권혁은 침낭을 정리하고서 공터 한구석으로 갔다. 그런 다음 특공무술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권혁이 특공무술를 시작하자 쇠가 갈리는 듯한 고함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그 덕에 아침잠을 깬 병사들이 어기적거리면서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처음 보는 특이한 동작을 하고 있는 권혁을 구경하기 위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기합소리와 함께 한 동작 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움직이는 권혁의 전신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권(拳)이 춤추고 각(脚)이 날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일반병사들은 몰랐지만, 근위기사로서 이제 검에 마나를 보내기 시작하는 단계에 들어선 핸들러는 권혁의 몸 주위에서 마나의 기운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이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30년 가까이 오로지 검에만 매달려 살아온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눈앞의 모습에 그는 절망감을 느꼈다.

검에 마나의 기운을 싣는다는 것이 검사로서의 꿈이자 마지막 경지였으나, 그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 이룰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핸들러에게 있어서 케린버그의 유명한 검사였던 아버지의 명성은 커다란 짐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미친 듯이 검에만 매달렸지만, 간신히 검에 마나의 기운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 겨우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청년이 아예 온몸에 마나를 두르고 있지 않은가? 괜한 자괴감이 들어 핸들러는 몸을 돌렸다.

권혁이 마무리 동작을 끝내고 호흡을 고르자 구경거리가 끝났는지 병사들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편, 권혁은 두 주먹을 단전 위에 멈추고서는 호흡을 짧고 깊게 이어나갔다. 숲에서 느껴지는 기운들이 점점 더 확실해지고, 이제는 신체가 크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권영수 상사가 자나 깨나 말하던 그 기(氣)라는 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느끼고 몸 안으로 축기(築氣)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수련을 끝내고 나면 아랫배가 뜨거워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권 상사 말에 의하면, 축기가 많이 진행되면 신체변화가 생길 거라고 했는데, 아직은 별다르게 느끼지는 못했다. 단지 전신이 터질듯 기운이 넘쳐 났고, 시력과 청력이 무지 좋아졌다는 것 정도. 아직은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자신은 알지 못했다.

또다시 자연의 기운에 흠뻑 취했던 권혁이 한참 후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서 눈을 떴다. 몸을 돌려보니 어제 돼지괴물을 향해서 비명을 질렀던 여인이었다.

벗은 상체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가쁜 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들썩이는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의 청년이 그녀에게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단지 어제의 충격으로 밤잠을 설치는 덕에 새벽녘부터 잠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밖에서 들린 괴성을 듣고 나와 본 것인데, 자신을 구해준 이방인이 이상한 몸동작을 취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에 다가갔다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미망인이다. 남편을 잃은 지 오래됐지만, 단 한 번도 외간 남자를 마음에 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낯선 이방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사실 귀족들의 결혼이란 게 사랑에 의한 만남보다 그저 가문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는 거래나 마찬가지였다. 잉글햄의 해밀턴 남작의 영애인 캐더린 또한 남편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결혼했고, 당연히 그런 결혼에 사랑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첫날밤 이후로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수도에 있는 고위 귀족에게 끈을 대기 위해 늘 수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8년 전, 전쟁이 터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참전한 그녀의 남편은 한 달 만에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그녀의 이름 뒤에는 미망인이란 꼬리표가 붙었다.

생활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변화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던 삶에 남편이란 존재가 없어졌다는 것뿐, 그러던 차에 두 집안 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무려 10년 만에 돌아가는 귀향길이다. 20살의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10년 만에 돌아가게 되는 길이다.

그 10년 동안 자신은 죽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죽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름도 모르는 낯선 남자 때문에.......

"휴~ 세상에, 저런 수련법이 있다니!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 주위의 마나 움직임이 대단한 것 같은데? 정말이지 부럽군. 저렇게 강하다니! 그러니 오크 무리들을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 흠, 나도 부지런히 연습을 해야겠구나. 부끄럽다. 응? 아니, 아가씨께서......! 다들 뭐 하는 거야?"

핸들러는 권혁에게 받은 충격으로 잠시 딴 짓을 하다가 보호대상인 캐더린 영애가 낯선 이방인 가까이 있자 기겁하고 뛰어가 서둘러 캐더린을 데리고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다른 기사들과 하녀들이 허겁지겁 뛰쳐나와서 호들갑을 떨었다.

권혁은 자신의 마음을 뛰게 했던 여자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다가 떠나자 왠지 허전해졌다. 이날 이때까지 여자를 가까이 대해보지 못했던 권혁은 이 이상야릇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식한 군인 아버지를 둔 덕택에 왕성한 사춘기를 군사훈련으로 보냈으니, 그에게 이런 감정들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추스른 권혁은 가부좌를 틀고서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하얀 피부의 맑은 두 눈을 가진 어여쁜 아가씨가 떠올라 더욱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는 기억을 되짚어 과거로 돌아갔다. 그러자 아버지 다음으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었던 특공무술 교관, 권영수 상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험악한 얼굴에서 커다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우주와 인간은 하나라고 했다! 사람의 몸속에 소우주가 있으니, 이는 곧 사람이 우주요, 우주가 사람이라고 했다. 숨을 쉬는 것에 있어 들이는 것과 내는 것의 순서와 질서가 있고, 이를 행할 때 경건한 마음을 지니며, 이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철 같은 몸과 늙지 않는 젊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첫째로 들이는 숨에 있어서 길게 한 번 들이는 숨은 배꼽 아래에 머물게 하며, 그 시간은 일 분을 넘기지 말 것이며.......'

그렇게 시작한 명상은 아침을 넘기고 일행이 출발할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눈을 뜬 권혁은 자신의 몸 주위로 하얗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놀라기보다는 단지 자신의 몸이 상쾌하고 가벼운 것에 만족했다. 피부도 훨씬 좋아졌다. 그가 명상에 빠진 사이, 태극심법의 효능이 그의 몸 안에 있던 노폐물을 모두 밖으로 배출시켰던 것이다.

순간의 깨달음으로 수십 년간의 공부를 당길 수도 있고, 그러한 깨달음이 없음으로 인해 발전 없이 답보 상태로 수십 년간 머물기도 하는 것이 무술의 어려움이라면 어려움이다. 권혁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기연을 얻는 행운을 갖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살펴보자 다른 이들은 벌써 짐을 다 챙기고 출발하려고 하고 있었다. 권혁도 얼른 군장을 챙긴 다음에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어제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청년이 다가오더니 마차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권혁이야 걷지 않고 편히 간다는데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짐마차 위에 몸을 실은 권혁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앞으로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문득 궁금해졌다. 알지 못하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깊은 한숨이 입 밖으로 나왔다. 덜그럭거리며 흔들리는 마차의 흔들림에 몸을 내 맡긴 채 두 눈을 감았다.

'휴~ 그래. 한 치 앞도 못 보는 것이 사람의 앞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저 몸으로 부딪쳐보는 수밖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저녁이 되자 모닥불이 피워졌고, 모닥불 위에 걸린 냄비에서 풍기는 스프 냄새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주는 듯했다.

아침의 그 노병사가 권혁에게 스프 그릇을 권하자 모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토해냈다. 손짓 발짓 해가면서 의사소통을 하고 제법 병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권혁은 작은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 부대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자신이 살던 한국에서는 알지 못했고, 어이없게도 이 낯선 땅 폴렌시아에 와서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즐겁고 유쾌한 저녁 식사가 끝나자 다들 잠자리로 돌아갔다.

권혁은 불씨만 남은 모닥불을 들쑤시면서 부지깽이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두 눈에 여자의 발이 들어왔다.

어제야 경황이 없어서 못 봤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여인이 자신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켜놓았다. 눈부신 금발, 오뚝한 콧날, 도톰한 입술, 무엇보다 매력적인 크고 맑은 두 눈.

'딱! 내 스타일이야!'

이것이 꿈인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사내를 보고서 캐더린은 수줍게 웃었다.

키는 180센티미터 정도에 아까 보니 온몸이 근육질인 것이 용병인 것 같았다. 처음 보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무섭기도 했지만 어제 오크에게서 구해준 걸 생각하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그보다는 이상하게도 자꾸 이 남자에게 시선이 갔다. 그리고 아침부터 쿵쾅거리는 자신의 심장소리 때문에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당황한 캐더린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권혁이 귀족 부인을 빤히, 그것도 거의 침을 흘리는 수준으로 쳐다보자 당황한 캐더린이 서둘러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봐야 겨우 이름 정도였지만, 자신을 가리키면서 그 예쁜 입을 열었다.

"캐더린!"

"캐더린!"

권혁도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고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권혁!"

"거 허그... 허그?"

엉성한 발음에 잠시 권혁의 이마에 주름살이 그어졌다.

그때 마침 달빛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매를 바라본 권혁은 빙긋 한 번 웃고서는 캐더린을 바라보았다.

"호크! 호크!"

"아! 호크. 호호! 좋은 이름이네요. 저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호크님!"

캐더린이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권혁의 이름을 호크라 불렀다. 그것도 아주 기뻐하면서. 이 작은 만남이 앞으로 폴렌시아 대륙을 뒤흔들 세기의 로맨스가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묘한 감정을 느낀 채 밤을 보냈다.

캐더린은 마차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낯선 이방인과 두 눈을 마주쳤을 때, 온몸이 떨리는 전율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용맹한 기사들과 병사들도 쩔쩔매던 괴물들을 혼자서 해치운 무시무시한 사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어제 보았을 때는 얼굴마저 검은색이어서 무섭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구릿빛 피부에 커다란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이국적인 얼굴이 짧게 자른 머리와 썩 잘 어울려 오히려 신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뭐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너무나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캐더린은 자신이 외간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누구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놀라 온몸이 붉은색으로 염색한 듯이 붉게 변했다.

자꾸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캐더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기 위해 고개를 들자, 시녀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괜히 머쓱해진 캐더린은 헛기침을 하면서 창문의 커튼을 내렸다.

한편 권혁, 아니 이제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호크는 짐마차 뒤에 누워 있다가 뒤따라오는 마차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사라지자 마음이 이상해졌다.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가 다 있을까.'

딱 이런 느낌이었다. 원래 어머니를 빼놓고 그다지 여자를 가까이 해볼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TV나 영화에서 봤던 그 어떤 연예인보다 아름다웠다.

그녀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만의 상상의 세계에 빠져 기분이 좋았는데, 선두에서 누군가 지르는 고함소리에 그만 상상 속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몸을 일으키니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핸들러라는 기사가 다가와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호크도 마차의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하얀 구름이 펼쳐진 들판을 가로질러 햇살을 비추고 있는 언덕 아래로 중세 유럽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휘익! 설마, 설마 했지만 이거 아더왕이 따로 없네. 정말로 저런 성들에서 사람들이 사는 건가? 이거 원, 정말 영화세트 같아.'

처음 보는 이국적인 광경에 호크는 넋을 잃었다.

마차가 도개교(跳開橋)를 통과해서 성내로 진입하자 그의 벌어진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다.

너른 광장을 중심으로 처음 보는 건축물들이 방사형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전형적인 유럽인들의 모습이었다.

짐마차 천막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주변 풍경을 구경하던 호크는 그래도 사람 사는 데는 다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마차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정중히 길을 비켜서는 모습에, 짐작은 했지만 마차 안의 여자가 꽤나 높은 귀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맞았나 보다.

마차가 광장에 이르자 핸들러라는 기사가 일행을 멈춰 서게 했다. 말을 몰아서 마차에 다가가자 마차 창문에서 여인의 손이 나오더니 가죽주머니 하나가 건네졌고, 다시 핸들러가 호크에게 다가오더니 가슴에 오른손을 얹고는 고개를 숙였다.

대충 다 왔다는 뜻으로 알아들은 호크는 군장을 둘러메고서는 훌쩍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가벼워 보였기에 핸들러는 역시나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다.

호크 역시나 뛰어내리면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렇게 몸이 가볍다니! 흠~ 이거 태극심법의 영향 탓인가? 그러고 보니 온몸에 힘이 넘치는 게 벽이라도 손으로 무너뜨릴 것 같은 기분이야.'

호크가 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자 핸들러는 그런 호크의 행동을 다른 뜻으로 오인해, 마차에서 건네받은 가죽주머니를 호크에게 건넸다.

무심결에 주머니를 받아든 호크는 여전히 딴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그런 호크에게 핸들러는 다시 한 번 예의 갖추고서는 일행을 이끌고 언덕 위의 내성(內城)으로 사라졌다.

마차가 골목으로 사라지는 동안, 마차의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이 올려져 있던 것을 알지 못한 호크는 귓가로 작은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 이쁘던데, 아쉽다. 한번 사귀어볼걸? 에이! 아서라, 아서. 지금 제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든 놈이 연애질은. 응? 뭐야, 이거?"

자신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가죽주머니를 열어본 호크는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가죽주머니 안에는 금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오호라! 그 녀석 핸들... 뭐라고 했는데, 암튼 싸가지는 있는 놈 이구만. 하하하하! 그런데 이게 얼마나 되려나?"

이곳의 언어도 모르는데 화폐 가치야 말할 나위도 없다. 두리번거리는 것이 영락없이 서울역 앞에서 갈 곳을 몰라 허둥대는 김 서방 같았다.

호크의 이상한 옷차림과 생김새에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동물원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창피해졌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눈에 식당으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왔다. 글은 몰라도 건물 위에 흔들거리는 나무간판에 음식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식당이나 여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들러는 낯선 이방인을 위해 잉글햄에서 가장 유명한 여관 앞에 그를 내려준 것이다. 여러모로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 호크는 여관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둥근 테이블이 10여 개에 식사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왼쪽에 있는 벽난로에서는 바비큐가 구워지고 있었다.

호크가 들어서자 왁자지껄하던 실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만큼 호크의 외모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 만했기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호크는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음식냄새에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하고서는 빈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호크가 자리에 앉자 마치 삐삐처럼 머리를 땋은 10대 아가씨가 조심스레 메뉴판 같은 것을 들고서는 호크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어차피 봐야 모르는 거, 호크는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더니 스테이크 비슷한 것을 먹고 있던 옆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소녀도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호크는 군장과 소총을 옆에 의자에 올려놓고서는 군복 상의 단추를 풀었다. 전형적인 예비군 훈련소의 복장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편히 쉬려던 호크 앞에는 여전히 소녀가 뭔가 하지 못한 말이 있는 듯이 망설이며 서 있었다. 잠시 소녀를 쳐다보던 호크는 '아~ 선불이구나'라고 생각하더니 가죽주머니에서 금화 1개를 꺼내 들었다.

그러나 금화를 본 소녀는 크게 놀라더니 손사래를 쳤고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녀의 엄마로 보이는 푸짐한 중년여인과 함께 돌아왔다. 이내 그 여인이 다가오더니 뭔가를 열심히 설명했다.

'젠장 할!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 대꾸를 하지? 내 참, 말이 안 통하는 게 이렇게 답답할 줄은 예전에 정말 몰랐네?'

호크와 여관 주인의 실랑이는 곧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잠시 후에 수도사들이 두르고 다니는 로브를 걸친, 번쩍이는 대머리에 근사한 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다가와서는 호크의 금화를 자신의 품에서 꺼낸 은화와 구리 동전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여인은 노인에게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고, 노인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관 주인은 구리 동전 5개를 챙기더니 나머지는 호크에게 돌려줬다.

'헉! 금화 한 개가 은화 오십 개, 구리 동전 백 개라니! 구리 동전 다섯 개로 스테이크 하나를 먹을 수 있으니, 그럼... 큭큭큭큭!'

자신의 가죽주머니에 있는 금화 수를 생각하던 호크는 입이 아까보다 더 많이 찢어졌다.

'핸들러라고 했지? 이 자식, 너 나한테 아주 좋게 찍혔다. 흐흐흐! 내가 나중에 한 번은 도와줘야겠구먼. 우하하하하하!'

이 금화 가죽주머니 하나의 보답이 나중에 이 잉글햄 영지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았더라면, 핸들러는 아예 금화 상자를 선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나중 일이고, 어쨌든 호크는 미친 사람처럼 연신 헤헤거리면서 식당 안의 손님들에게 맥주를 1잔씩 돌렸다.

맥주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호크에게 잔을 들어 보이면서 감사를 표했다. 특히나 노인에게는 좀 더 좋은 와인을 1병 보냈다.

이게 원래는 여자들에게 작업용으로 보내야 하는 것이어서 어째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오늘 호크는 부자가 된 기분에 한껏 기분을 내고 싶었다.

호크가 3번째 스테이크를 먹어치우고 있을 때였다.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뚱뚱한 중년 사내와 로마병정들이 입던 갑옷을 가죽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옷을 입은 사내들이 식당 안으로 들이닥쳤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던 식당 안의 사람들이 모두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숙이고 조용해졌다.

뚱보는 식당 안을 살펴보더니 메뉴판을 들고 있던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갯짓을 하자 뒤에 서 있던 험상궂은 사내들이 소녀를 잡아챘고, 소녀의 어머니가 주방에서 식칼을 들고 뛰쳐나왔다.

그렇게 밀고 당기는 실랑이 중에 소녀가 들고 있던 메뉴판이 열심히 본능에 충실하고 있던 호크의 머리에 떨어졌다

탁!

"이런! 어떤 개쉐이가!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것 몰라!"

열 받은 호크가 입 안 가득 든 음식물을 토해내면서 성난 표정으로 일어섰다.

기세 좋게 일어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흥분한 탓에 주위를 살피지 않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이런! 대가리 수가 왜 이리 많아! 폼 나게 나서기는 했는데 이거, 이거 좀 참을 걸.'

상대방의 수가 10여 명이 넘자 호크는 내심 괜한 일에 나섰다고 후회했다.

그가 누구던가!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 다녀야 한다는 대한민국 말년 하사가 아니었던가! 어느덧 제대 말년을 눈앞에 두고 조신하던 것을 잊어버린 자신을 스스로 질책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식당 안의 손님들과 여관 모녀의 눈빛이 그가 영웅이 돼주길 간절히 바라는 것을.

호크는 크게 한숨을 쉬고서는 목관절과 어깨를 풀면서 앞으로 나섰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후유증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호크의 행동을 젊은이의 객기라고 생각했는지, 뚱보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소녀와 엄마를 잡고 있던 부하 둘이 그녀들을 내팽개치고서는 호크에게 달려들었다.

평소 특공무술 연습 중에 이런 상황을 설정해놓고 하는 연습이 있다. 이것을 합(合)을 짠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의자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쓰러뜨린다거나, 포로를 구출하는 상황 등 실내에 가구들을 배치해서 가상의 작전상황을 만들어놓고 대처훈련을 많이 해왔다.

오늘도 평소에 하던 연습과 마찬가지였지만, 단지 적들의 인원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훈련 시에는 상대가 2명에서 3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서 달려드는 적들이 있으니, 생각은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호크는 우선 제일 먼저 뛰어 들어오는 왼쪽의 덩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호크를 잡아보려는 듯 두 손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덩치의 품안으로 뛰어든 호크는 양손의 수도로 덩치의 어깨 부근 견정혈(肩井血)을 내리쳤다.

견정혈은 목과 어깨의 경계선에 있는 혈(血)을 말하는데, 이 부분을 급격히 수도로 내리치면 팔 전체의 신경을 잠시 마비시킨다.

"윽!"

신음소리와 함께 덩치의 상체가 무너지자 그대로 품에 파고들어서, 유도의 '들어 메치기'로 넘어지려는 사내를 오른편에서 달려들던 그의 동료에게 내던졌다.

호크에게 달려들던 사내는 갑자기 동료가 자신에게 날아오자 엉겁결에 받아 들었지만, 중력에 가속도까지 더해져서 날아오는 남자를 받아내는 것은 던져진 100kg짜리 바벨을 받아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결과는 테이블 위로 두 사람이 구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식당 테이블 대여섯 개를 산산조각 낸 뒤 구르는 것을 멈춘 그들은 물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순식간에 동료 둘이 당하자 가죽갑옷을 입은 사내들 중에서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오! 빅 마더, 자네가 직접 나서는가? 후후! 저놈도 불쌍하구먼. 그냥 순순히 잡혔으면 몸이라도 성할 수 있었을 텐데. 쯧쯧! 이제 저 친구 인생은 볼장 다 봤군!"

빅 마더라고 불린 이 사내는 용병계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는 무투가(武投家)였다. 어느 왕국에서는 기사를 살해한 혐의로 수배중이라는 이야기도 떠도는, 손속이 잔인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자였다.

뚱보사내의 여유로운 말에 빅 마더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후우~ 그럴까? 저 애송이 놈의 몸 좀 보라고. 만만한 놈이 아니야. 이거 잘못하다가는 오늘 우리가 크게 망신당하겠어."

바닥에 침을 거칠게 뱉은 후, 양손에 건틀렛을 찬 빅 마더는 호크를 향해 자세를 취했다. 건틀렛의 손등 부위에 돋아나 있는 날카로운 침이 등불을 받아서 내뿜는 살기가 제대로 한 방 맞으면 몸을 건사하기는커녕 죽음을 면하기 어려워 보였다.

저 거대한 근육질 팔에서 나오는 풀스윙에 건틀렛 철심까지, 그야말로 사망진단서를 발부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웬만하면 자신의 이런 모습에 대개는 겁을 먹고 꼬리를 감추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었는데, 눈앞의 낯선 이방인은 목을 한 번 풀고서는 손가락을 들어서 까딱거렸다.

그 순간, 빅 마더의 눈썹이 치켜떠졌다. 이는 당연히 열 받았다는 뜻이었고, 그의 장딴지가 푸들거릴 정도로 떨리더니 순식간에 전면을 향해서 몸이 튕겨져 나갔다.

호크의 면전에 다다른 빅 마더의 상체가 뒤로 활처럼 구부러지더니 두 손이 머리 뒤로 한껏 젖혀졌다. 이제 저 두 손이 휘둘러지면 끔찍한 장면이 펼쳐질 것이다.

빅 마더가 호크를 거의 덮어가자 장내의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렸다. 빅 마더의 동료들과 로브를 입은 흰 수염 노인만 빼고서.

퍽!

욱!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도 의외의 상황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세상에나! 어떻게 저럴 수가!'

저 큰 덩치가 자신의 반도 안 되는 청년의 발에 가슴 부위를 얻어맞고서는 그대로 그 발에 걸려 있었다. 그것도 축 늘어져서.

호크가 발을 내뻗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고 해도, 세상에! 저렇게 옆차기 자세로 자신보다 체중이 서너 배는 더 나가는 사내를 발로 들고 있다니! 사람들은 너무 놀라서 입에서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넋이 나가버렸다.

호크가 발을 빼자 빅 마더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고, 호크는 가볍게 발을 손으로 털었다.

발? 바로 전투화. 잠시 깜빡 잊고 있었다.

호크는 지금 일반 신발이 아닌 군용전투화를 신고 있었다. 보통 전투화를 신으면 그 단단함과 파괴력 때문에 그 위력이 배 이상이 된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이곳에 와서 태극심법의 효능으로 신체능력이 10배는 더 극대화된 발차기라니! 왠지 모르게 빅 마더가 불쌍해졌다.

더군다나 호크는 지금 자신도 모르게 발경(發勁)을 하고 있었다. 왠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 감각을 찾기 위해, 조금 전의 발차기에서 전신에서 뻗어나가던 그 느낌을 기억해내려고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전투 중인 혼란스러운 상태여서 따로 시간을 낼 수 없는 점이 한스러울 뿐이다. 싸움을 계속할수록 몸이 체득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빅 마더가 쓰러지자 크게 놀란 뚱보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다급히 나머지 인원들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호크는 다시 한 번 깊게 호흡을 하고서는 좀 전에 빅 마더를 쓰러뜨릴 때의 그 느낌을 찾는 데 주력했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 선을 한 발자국 넘어서려고 하는 호크는 바로 발경의 경계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무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꿈에도 그리는 발경을 서서히 체득해 나가는 호크였다.

사내 서너 명이 더 바닥에 구르자, 서걱거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품속에서 단검이 빠져나왔다.

땀을 흘리자 호크는 오히려 몸이 풀렸다. 그리고 온몸의 근육들이 용수철처럼 탄력이 넘쳤고,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래, 꼭 피를 봐야겠나, 이건가? 크크크크! 좋아, 좋아! 나도 지금 이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어서 덤벼라! 이 몸이 식기 전에 어서 빨리!"

싸우면서 익힌다는 말처럼 호크는 철저히 실습을 통해 발경의 묘리를 체득해가고 있었다.

부하 몇이 더 바닥에 드러눕자 뚱보의 표정이 변했다. 호크를 너무 쉽게 본 것이 오늘 그의 실수라면 실수였다.

잉글햄의 어두운 경제를 손에 쥐고 있는 다크 문(Dark Moon)이 그들의 정체였다. 매춘, 도박, 술집 등 지하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다크 문의 행동대원이라고 할 수 있는, 다크 나이트(Dark Knight)라고 불리는 이들이 지금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들이다.

다크 문의 행동대인 다크 나이트들의 실력은 이미 폴렌시아 전역에 소문이 자자했다.

예전에 모두 유명한 용병대나 영지의 병사 출신들이어서 개개인의 실력이 모두 꽤 뛰어났다. 더구나 아까 호크의 발차기 한 방에 뻗어버린 빅 마마도 비록 한 방에 나가 떨어졌지만, 제법 이름 높은 용병이었다.

이제 제 발로 서 있는 자들은 뚱보를 포함해서 3명뿐이었다. 순식간에 8명이 호크에게 당해버렸다.

하지만 호크의 입장에서는 이 녀석들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들과의 육박전이 호크에게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으니까 말이다.

'후우! 후우~ 눈을 감아도 주변의 사물이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졌다. 그리고 단전에서 흘러넘치는 이 기운은 뭐지? 후우~ 자, 자! 흥분하지 말고 권 상사님이 알려준 대로, 힘이 넘칠수록 호흡은 느리고 깊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끊어서 뱉자.'

호크는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자신의 특공무술 사부인 권 상사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호흡을 서서히 느리게, 그러나 리듬에 맞추어 조절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태극심법에서 말하는 숨쉬기의 가라앉힘이었다.

'호흡을 하되 깊이, 그러나 끊어지지 않게 느리게, 그렇게 서서히 몸을 가라앉혀라. 깊이깊이 가라앉혀서 저 깊은 심해의 바닥에 내려앉은 느낌이 들 때까지. 그리 하면 호흡을 하고 있으나 호흡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에 따를 것이니라.'

가쁘게 숨을 내쉬던 탓에 오르락내리락하던 호크의 어깨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마치 죽은 사람처럼 온몸의 동작이 멈추었다. 눈빛은 한없이 깊고 맑았으며 전신으로 마치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아련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그 기운을 알아차린 사람은 이 중에 오직 로브를 입고 있는 흰 수염 노인이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진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뚱보가 팔짱을 낀 손을 바닥으로 내려뜨리자 그의 뒤에 있던 용병 둘이 바스타드 소드를 머리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으면서 호크에게 교차해 들어갔고, 뚱보 역시 자신의 품속에서 지팡이 하나를 꺼내 들고 가슴에 돌려 세우더니 수인을 크게 영창했다.

"자연에 위대한 존재이시여! 저에게 부여된 권능을 쓰고자 하니, 저에게 그 힘을 나누어주소서! 그 날카로움과 냉혹함으로 저 자를 없애주소서! 얼음의 비수!"

뚱보의 영창에 머리 위의 대기가 급속히 냉기를 품더니 날카로운 얼음조각 10여 개가 나타남과 동시에 호크에게 쏘아져갔다.

좌우에서는 바스타드 소드로 양단할 듯 달려드는 용병 둘과 정면에는 1대라도 맞으면 그대로 산산조각 날 듯한 얼음화살 10발이 무서운 속도로 호크에게 달려들었다.

실내에 있던 사람들의 비명과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번만큼은 저 젊은이가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마법사까지 있지 않은가! 저 무시무시한 마법공격까지 더해지자 실내에 있던 모두가 크게 놀라 경악했다.

호크의 금화를 잔돈으로 바꿔준 친절한 노인은 입을 떡 하고 벌린 채 다른 이유로 놀라고 있었다.

'마나가... 마나가... 소용돌이 치고 있다. 저 청년을 중심으로 어떻게... 저... 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호크의 눈에는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좌우에서 바스타드 소드로 베어오는 두 사람이나, 눈앞으로 쏘아져오는 얼음조각도 마치 무중력 상태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보였다.

눈앞의 얼음비수는 당수를 이용한 수도치기와 뒤돌려 차기로 모두 날려버린 다음, 자신의 바로 옆구리까지 파고드는 바스타드 소드를 허리를 깊숙이 숙이면서 흘려보냈다. 그리고는 검을 휘둘러 빈틈이 보인 왼편의 용병 등을 타고 넘듯이 몸을 180도 회전하면서 오른쪽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돌려 찍어버렸다. 아마도 턱뼈가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순간, 등 뒤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1명이 바스타드 소드를 그대로 던져버렸다.

호크는 등 뒤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파동을 느꼈고,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바닥에 앉히면서 몸을 180도 다시 한 번 회전시키는 동시에 회축을 찼다.

날아오던 검을 발로 차버리자 검의 방향이 90도 꺾여서 날아갔다.

우연인지 호크가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뚱보에게는 불운이었다. 방향이 바뀌어 날아간 검이 뚱보의 왼쪽 어깨를 날려버린 것이다.

"으아아악! 내 팔! 내 팔!"

팔을 잃어버린 뚱보가 바닥을 구르면서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호크에게 칼을 던진 사내만이 뚱보에게 달려가 팔이 잘려나간 부위를 지혈하기 위해 테이블보로 급히 감쌌다.

정작 호크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뚱보에게 다가갔다.

호크가 다가오자 움찔한 사내가 그래도 동료라고 뚱보 앞을 막아서자, 호크는 웃긴다는 듯이 사내를 비켜서게 한 후 뚱보의 상박을 지압했다. 호크가 손가락으로 몇 번 눌러주자 철철 흐르던 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호크가 다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가서 식사를 계속하자, 정신을 차린 다크 나이트들이 동료들을 업고 사라졌다.

한바탕 소란이 잠잠해지자 식당에 있던 사람들도 서둘러 계산을 하고 나가버려서 홀에는 호크와 아까 동전을 바꾸어주었던 노인만이 남았다.

"이런, 이거 다 식어버렸잖아. 에잉~"

호크는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내려놓으면서 군장과 소총을 챙겼다.

"가만! 이런 멍청한 놈을 봤나. 아니, 소총을 두고 왜 땀을 흘린 거야. 괜히 아까운 에너지만 소비했잖아. 으이구~ 나도 참."

'그냥 냅다 K2로 날려버릴 걸' 하고 위험천만한 생각을 잠시 해보는 호크였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전에 남파 공작원들이 산을 타고 북으로 넘어가려 할 때, 그 진압작전에 호크의 부대도 참가했었다. 그 당시에 호크의 중대가 그 공작원 3명과 조우했는데, 무려 5명의 희생자가 났었다. 그때 호크의 동기가 눈먼 실탄에 그 자리에서 절명했었다.

전우의 죽음에 격분한 호크의 소대는 죽음을 도외시한 채 전방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자신도 몸에 총탄을 2발 맞고서 북한공작원들을 사살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수류탄을 떨구고 죽어간 간첩 때문에 호크의 소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했었지만, 호크의 부사수인 김호태 일병이 자신의 몸을 던져 수류탄을 덮어 분사했기에 큰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처음 겪어본 전투의 후유증은 매우 컸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방아쇠를 당기던 그 느낌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호크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이란 괴물은 최후의 선택인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들고 일어서는데, 손님 중 남자 몇몇과 주인 모녀가 부서진 테이블과 바닥을 치우고 있었다. 삐삐머리 소녀가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하자 호크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여관 주인도 호크의 손을 잡고서는 눈물을 그렁그렁 흘렸다.

"에휴!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따님 잘 키우세요. 하여간 어느 곳이나 여자 괴롭히는 놈들은 꼭 있다니까. 그나저나 오늘은 어디서 자나?"

한바탕 소동으로 호크는 이곳이 여관인지 깜빡한 듯했다. 주인 모녀에게 두 손을 모아서 자는 시늉을 하며 묻자 그 모습에 사람들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얼굴이 환해진 소녀가 손으로 2층을 가리키며 안내하자 호크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리고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쨌든 밥도 먹었겠다, 운동도 실컷 했고, 덕택에 몸도 마음도 상쾌해졌다. 나중에 소녀가 준비해준 목욕물에 몸을 담그자 천국이 이곳인가 싶었다.

오랜만의 목욕을 마치고 한결 개운해진 호크는 조금 전의 싸움을 되새겼다. 눈을 감고 정좌한 호크의 팔이 움찔움찔하는 것이, 머릿속으로 다시 재현하고 있는 듯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진지하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고, 다시 깊은 명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제처럼 명상을 하는 그의 머리 위로 생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기운들이 더 커져서 이제는 몸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렇게 권혁 하사, 아니 이제는 호크라고 불러야 할 그의 잉글햄에서 요란한 첫날밤이 저물어갔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꼴이냐!"

다음날, 날이 밝자 잉글햄 호든가의 한 모퉁이 건물에서 하드레더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이... 이... 멍청한 놈! 그래, 빌려준 돈 대신 계집아이 하나 잡아오라고 했더니, 한다는 짓이 다크 나이트 열한 명을 반병신이 만들어서 돌아온 것이냐!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상부에 보고한다는 말이냐! 군터! 도대체 입이 있으면 뭐라고 해봐!"

"크으윽! 죄송합니다, 마스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여관에 그런 무시무시한 사내가 있을 줄은 저희도 몰랐으니까요."

"아니, 도대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백인대 부장급이 아홉 명에 소드유저급의 빅 마더, 게다가 4서클의 마법사인 너까지 있었는데, 고작 한 명에게 당했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놈이 소드마스터라도 된다는 거야, 뭐야, 지금!"

마스터의 역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소드유저라면 약한 검기를 뿜어대거나, 검기를 뿜지는 못하나 마나를 활성화시킬 줄 아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게다가 4서클의 마법사라면 제법 강력한 공격마법이 가능한 강력한 유저다. 이 정도 구성이면 거의 전투 용병단 중에서 1급에 속하는 전력이다.

소드 익스퍼트(마나를 자유롭게 다루면서 검기를 일정 수준 뽑아낼 수 있는 경지) 두셋은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인데, 고작 한 사람에게 당해서 모두 반병신이 되어서 돌아왔으니 마스터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더욱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팔 병신이 되어서, 아직도 고통이 심한지 신음을 흘리고 있는 사내는 바로 자신의 뒤를 이어 이곳, 잉글햄의 다크 문 지부장으로 내정된 후계자가 아니던가?

호든가에 위치한 다크 문 잉글햄 지부에서 지금 노발대발하고 있는 자는 이곳의 지부장이다. 적어도 그동안 그를 이렇게 열 받게 할 만한 사건이 없었던 것이 그의 인내심 부족을 초래했고, 그 때문에 평소와 같은 신중한 사고를 할 수 없었던 탓에 어리석게도 행동을 먼저 취하게 되었다.

짹짹!

자신 때문에 열 받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호크는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고서는 깜짝 놀랐다. 어젯밤에 정좌한 자세 그대로 밤을 지새운 것을 깨닫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았다.

"어라, 이럴 수가! 이 상태로 밤을 지새웠는데도 이렇게 몸이 가뿐하다니. 아무리 이곳에 자연지기가 충만하다지만 이렇게 진기가 빨리 늘었다? 아무래도 그 폭발 때문에 내 몸에 이상이 생긴 건가?"

호크의 이런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다. 국방연구소의 플라즈마 폭탄은 건물이나 물체는 그대로 두고 인명만 살상하는 반중성자 폭탄이다.

그런데 그 당시 흑점의 이상폭발과 플라즈마 폭탄의 과열 피폭, 거기에 차원의 문이 열리면서 호크는 중성자 피폭을 당한 상태에서 차원을 통과하는 중에 받게 된,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에너지를 흡수했고, 그러는 동안 그는 보통의 인간들과는 달리 강력한 신체를 얻게 되었다. 보통사람보다 두세 배나 긴 수명에 강한 근력, 감각 등 뛰어난 몸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런 몸에 예전부터 익힌 태극심법이란 호흡과 명상수련이 자연지기, 즉 마나가 풍부한 이 폴렌시아에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호크를 점점 강하게 변화시키고 있는 것을 호크 자신은 알지 못했고, 그저 너무 빠른 진전에 놀랄 뿐이었다.

자신의 신체변화를 즐기던 호크는 위장이 아우성을 치자 배를 한두 번 튕겨주고서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다리를 얹어 놓고 머리에 깍지를 낀 채 아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잠시 후, 여관 주인의 딸이 어제와는 달리 아주 밝게 웃으면서 나타났다. 호크도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로 화답했다.

호크가 동전을 쥐어 주면서 숟가락으로 음식을 뜨는 시늉을 하자, 소녀는 오늘은 금방 알아듣고서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빵 구워지는 냄새가 홀 안에 가득하자 호크는 기분 좋게 눈을 감고서는 냄새를 음미했다. 그러던 그의 눈이 살포시 찌그러지더니 오른쪽 눈만 치켜떠졌다. 눈을 뜨고 바라본 자리에는 어제 그 노인이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어제 돈 좀 바꿔줬다고 너무 들이대는 거 아냐?"

'나 기분 안 좋소! 쳐다보지 마쇼!'라고 대놓고 표시했지만, 노인은 아예 호크의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없이 의자를 꺼내 앉았다. 호크도 테이블 위에서 다리를 내리고는 노인을 마주봤다.

다소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노인은 로브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뒤적뒤적 찾는 시늉을 하더니, 곧바로 팔찌 하나를 꺼내 호크에게 던져줬다.

"뭐야, 이거? 팔찌 아냐? 이거 보슈, 난 액세서리에 관심 없거든요?"

그런데 도로 돌려주려고 하니까 오히려 팔에 채워주는 것이 아닌가! 호크가 놀라 빼내려고 하자 노인이 재빨리 입을 달싹이면서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팔찌에서 붉은빛이 눈부시도록 터져 나왔다.

"뭐... 뭐야!"

놀란 호크가 의자에서 바로 텀블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자신도 모르게 신체가 방어한 것이다.

"아니, 이... 영감탱이가! 죽고 싶나!"

"허허! 난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없다네."

"그래요? 그럼 곱게 미치지, 왜 나에게......? 어라? 뭐야, 말이 들리잖아? 저기요, 영감님. 제 말 알아들어요?"

"훌훌훌! 그럼. 아주 잘 알아듣지. 자네 팔에 채워준 것은 바로 통역 아이템이네. 폴렌시아에서도 왕실에나 몇 개 있을 뿐이지. 하하하하! 아주 귀한 거네."

자신의 팔에 채워진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호크가 의자를 끌어당기더니 노인에게 바싹 다가갔고, 노인은 호크가 왜 이러는가 싶어서 빠끔히 쳐다보았다.

호크는 노인을 한 번 바라보더니 더 가까이 다가앉아 귓가에 속삭였다.

"할아버지, 잡상인인가요? 길에서 파는 거치고 신통한 게 없는데, 이거 이러다 돈 내고 나면 고장 나는 거 아닌가요? 보증기간은 얼마나 돼요? 만든 데는 어디죠? 제조사가 없네?"

호크의 말에 노인은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기가 막혀 뒤로 자빠지려는 몸을 불굴의 의지로 견디어 냈다.

노인의 얼굴이 시뻘게지자 호크는 아무리 잡상인이라 해도 자신이 너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에고고! 죄송해요, 영감님. 기분 상하셨나 보네요. 미안해요. 그런데 솔직히 길에서 파는 거치고 제대로 된 거 없잖아요, 이거 통역 아이템, 괜찮은 브랜드에서 나오는 것은 어디서 팔죠?"

'크허허헉!'

노인은 결국 기혈이 들끓어서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졌다.

그래도 호크는 '이 노인네가 자존심 무지 세네, 안 팔면 그만이지, 뭐 그만한 일로 혈압까지 올리고 난리인가' 싶어 그냥 사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호크 딴에는 크게 선심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통역 아이템이란 것이 국가에서 지정한 반출반입이 금지된 중요품목인 줄 알게 된다면, 호크는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각 왕국에서 몇 개 되지도 않는 통역 아이템을 소지하고, 게다가 호크에게 선뜻 내어준 저 노인은 도대체 누굴까?

호크는 식전부터 재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주인집 소녀가 떠온 물바가지를 노인에게 뿌렸다.

차왁!

"에퉤퉤퉤! 허어~억~!"

"아유! 영감님, 이제 정신이 드세요? 그러게 혈압도 좋지 않으신 분이 뭐 하러 힘들게 일하러 다니세요, 집에서 손주나 보시지!"

혀까지 차면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호크를 보면서 노인은 이 청년이 혹시 마족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 저리 뻔뻔스러울 수가 있는지, 도대체 100년 넘게 살아온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험험! 내가 추태를 부렸네. 미안하이. 그리고 그 통역 아이템이란 게 어디서 팔고 그런 것이 아니네. 이 세상에 채 오십여 개도 안 되니까 말이네, 아주, 아주 귀한 것이란 말이네. 알아듣겠나?"

'오우~ 이 할아버지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네. 흠흠! 이거 꽤 뛰어난 영업사원 냄새가 풍기는데?'

호크가 의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자 노인은 정말이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이 누구던가! 바로 폴렌시아 대륙에서 3명뿐인 7서클의 대마법사 사이클론이 아닌가!

폴렌시아의 여러 왕국과 심지어 남부 거대제국 로베니아에서 왕국수석 마법사로 초빙한 것도 모두 물리치고, 자유마법사로 세상을 떠돌면서 약하고 어려운 백성들을 돕는 위대한 성인(Saint), 혹은 바람의 마법 성자로 불리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명예를 따지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동안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보았겠는가?

어디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 젊은이가 더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런 마법기구가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인지는 알고 있고, 더구나 이런 마법기구를 작동시켰다면 자신이 마법사란 것을 알 텐데 말이다.

대개의 평민들에게 있어서 마법사란 무척이나 두렵고 존귀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자신을 무슨 잡상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사이클론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내리누르고서는 호크를 천천히 살폈다.

"흠~ 자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거 같구먼?"

순간, 노인의 말에 호크에게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이 소총을 쥐어들고 있었다. 사이클론은 등에 이렇게 땀이 흐르는 것이 얼마만인지 스스로 놀랐다. 세상에! 아직 어려 보이는 청년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세를 뿜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사이클론은 손을 들어 외쳤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빛이 나오더니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숨이 막힐듯한 실내의 공기가 순식간에 부드럽고 가볍게 변한 것이다. 어제는 뚱보가 이상한 얼음화살을 만들어 내지 않나, 이 노인도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면 빛이 나오면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니, 호크는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감님! 혹시 마술사요?"

"잉? 마술사? 아니, 마법사인데."

"뭐, 마술이나 마법이나!"

"이... 이런! 이보게, 마술과 마법은 아주 다르네. 그것은 말이야......."

"아니, 됐어요. 그렇다고 치고. 이건 왜 저한테 주신 거죠? 제가 돈이 별로 없어서 비싸면 구입하기가 그렇거든요."

"하하하! 졌네, 젊은이. 내가 말로는 도저히 자네를 당해낼 수가 없구먼. 허허허허! 그 팔찌는 내가 자네를 만난 기념으로 선물로 주지. 대신 나하고 얘기나 좀 하세. 내가 지금 너무 궁금한 게 많아서 미치기 일보 직전이네. 어떤가?"

"정말이요? 그냥 이야기만 하면 된다, 이거죠?"

"그래. 내 이름, 사이클론을 걸고 맹세하지."

'아싸! 돈 굳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최대한 돈은 아껴야지. 말이 안 통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언어문제도 해결되었으니 한시름 놓았고. 이 노인의 질문에 대충 대답이나 해주고는 이곳에 대해 알아봐야겠다.'

내심을 들킬세라 호크는 아주, 아주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노인 앞에 앉았다. 무서운 놈!

아침을 먹고 나서 호크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자신을 사이클론이라 소개한 마법사 노인으로부터 호크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폴렌시아의 유래부터 시작해서 이곳의 관습과 문명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와 정치적 상황, 그리고 여러 국가들의 관계까지.

호크는 사이클론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갈수록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이곳의 문명은 중세 유럽 정도의 문명 수준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돌아갈 방법을 찾을 길이 요원해진 것이다. 눈앞에 있는 인물만 하더라도 자신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지식인이라는데, 차원이동이란 것을 상상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더 기대하겠는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머니도 1년 전에 지병인 심장병으로 돌아가시고, 친척이라고 해봐야 얼굴만 아는 명절용 친척들이 대부분인 터라 뭐,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다.

그 잘난 프랑스 외인부대 출신 아버지 덕택에 친구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친구라고 하나 있던 놈도 피 같은 돈을 꿀꺽 해먹지 않았는가? 자신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당분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이 폴렌시아란 곳에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예전부터 절망하고 포기하기보다는 매사에 희망적인 면을 우선 생각하는 성격인지라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이 땅에 정착해서 이전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호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호크는 앞에서 침을 튀어가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사이클론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하는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문득 얼굴에 비가 내린다고 생각한 호크가 정신을 차렸을 때, 사이클론이 아직도 열변을 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괜스레 미안해진 호크는 남은 부분이나마 열심히 듣는 척했다.

"에 또~ 그래서 말이지, 북부 레센 제국과 남부 로베니아의 일, 이차 일년전쟁을 끝으로 이 폴렌시아에도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는 말이지. 그 평화란 것이 또 언제 깨질지 모르지만 말일세."

"아, 네. 그렇군요."

"그렇지. 더 궁금한 것은 없나? 그렇다면 에게니아 해(海) 너머에 있는 뮤슐론 대륙의 오스완 제국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아... 아닙니다. 뭐...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사이클론님."

"허허~ 고맙기는 뭘. 아직도 해줄 이야기가 많네만."

아쉽다는 듯이 더 많은 이야기보따리를 꺼낼 기미가 보이자 호크는 재빨리 사이클론을 만류했다. 처음이야 낯선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열심히 들었지만, 장장 5시간이 넘어가자 호크는 온몸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그래도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사이클론에게서 따뜻한 마음을 느꼈던지 처음과 다르게 사이클론을 대하는 호크의 태도가 아주 좋아졌다.

"뭐, 좋네. 그렇다면 이제 자네 이야기 좀 해주지 그래. 내 얘기는 많이 들었으니 말일세."

"흠, 글쎄요. 뭐, 별로 특이한 사항이 없어서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일단은 말일세, 어제 격투에서 자네가 보여줬던 그 마나 파동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누구도 그렇게 몸 주위로 마나를 소용돌이치게 하지는 못하네. 더구나 자네 주변의 모든 마나가 자네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듯이 날뛰었네. 혹시 자네에게는 마나의 속성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마나? 그게 뭔데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데요?"

"허어~ 이것 참, 마나를 사용하면서 마나를 모르다니! 자네가 나에게 장난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어제 자네가 그놈들과 격투를 할 때 자네의 손과 발에 마나가 응축되어 있었다네. 이것은 검사들이 자신의 검에 오러를 입히는 것과 같아. 알겠나? 마나란 바로 우리 자신이며,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같은 존재지. 지금도 이 공간에서 숨 쉬고 있고 우리 폴렌시아 대륙 전체를 조화롭게 유지하고 있지. 자, 보게나."

말을 마친 사이클론이 두 손을 모으고 나직한 소리로 중얼거리자, 그의 두 손에서 빨간 불공이 생성되었다. 그 전에 호크는 방 안에 있던 기(氣)들이 그의 손으로 응축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사실, 어제 다크 문의 마법사는 인챈터를 이용한 수법이었기에 기의 흐름을 재빨리 느끼지 못했다. 더구나 호크 또한 당시에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사이클론이 일부러 천천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방 안에 있던 대기 중의 기운들이 사이클론의 두 손바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아하! 기를 말씀하시는군요!"

"지... 아니 기라고 했는가?"

"네. 대충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기를 말씀하시는 거 같네요. 제가 살던 곳에서는 마나를 기라고 부르거든요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느낀 건데, 이곳에는 사방에 기가... 음, 그러니까 마나란 것이 아주 풍부하던데요? 마나의 바다에 빠진 느낌이랄까?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온몸을 마나가 감싸주는 거 같아요."

사이클론은 호크의 말에 100톤짜리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눈을 감으면 마나가 감싸는 게 느껴진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자신도 아직은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는데, 눈앞의 젊은이는 어떻게 이 정도로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뛰어날 수 있을까! 어찌나 놀랐는지 자신의 입에서 침이 흐른다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저... 영감님, 영감님!"

"응? 아, 왜 그러는가?"

"침 닦으세요.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헉! 이런 추태를. 에고고! 늙으면 죽어야 된다더니... 참! 이게. 아니지, 자네 아까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했네. 마나의 속성이 보이는가?"

"속성이요? 흠... 뭐, 대기의 차가운 기운, 뜨거운 기운, 물의 기운, 뭐 이런 거 말씀인가요? 그렇다면 대답은 '네'인데요. 이곳은 희한하게도 신경을 집중하면 마나의 흐름이 물 흐르는 것처럼 잘 보이네요."

"헉! 크허허헉!"

호크의 대답에 사이클론이 또 뒷목을 잡고 넘어가려 하자, 오히려 대답한 호크가 사색이 되었다.

'하~ 이 노인네, 왜 툭하면 뒤로 넘어가고 난리야? 이거 이러다가 송장 치우는 거 아냐? 참내... 뭐, 자기가 대륙의 몇 안 되는 마법사라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아까 기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던데, 뭐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겠지.'

호크의 속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사이클론은 정색을 하고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절대로 지금 한 말을 어디 가서 하지 말게. 만약에 자네가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전 대륙의 마법사들이 자네를 그냥 두지 않을 걸세. 알겠나?"

호크도 귀찮은 것은 질색인지라 당연히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후로도 몇 번의 다짐을 받고서야 사이클론은 겨우 얼굴을 폈다.

그리고 몇 가지 이곳, 잉글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내일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겠다는 그의 말에 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뭐, 이곳에 대해 아주 잘 알게 되었으니 손해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뭐든지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보가 중요하지 않은가?

더욱이 이렇게 통역 아이템이라는, 비싸 보이는 실시간 통역기까지 얻었으니, 며칠 이야기해주는 거야,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할 일도 없었다.

오전에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호크는 허리를 몇 번 움직여 풀고서는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서는 저녁 장사 준비를 하는지 삐삐 머리 소녀가 엄마와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녕, 삐삐~ 오늘 저녁 메뉴는 뭐니?"

호크가 2층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말을 건네자, 소녀가 매우 기쁘게 답했다.

"호호호! 네. 아저씨도 편히 주무셨어요?"

'크헉! 아저씨 아닌데. 오빠라고, 오빠!'

"그... 그래. 흠흠! 그런데 아저씨 아니거든. 다음부터는 오빠라고 해라. 알았지"

"호호! 네. 그리고 저도 삐삐가 아니고요. 제 이름은 루니예요, 오! 빠!"

코에서 피가 튀려는 것을 호크는 특공정신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이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그가 결코 로리 타입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들 대한민국의 많은 남자들이 그 '아저씨'란 소리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것이다.

"흐흐흐흐~ 그래, 루니. 어디 가니, 우리 루니?"

삐삐... 아니 루니가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궁금증이 생긴 호크가 물었다.

"호호호! 고기를 사러 가요. 오늘 저녁은 비프슈트와 호밀 빵이거든요."

"오호! 그래? 그럼 이 아저... 가 아니고, 오빠가 에스코트해줄까?"

"정말이에요? 손님에게 그러면 엄마에게 혼나는데......."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던 터라 지루했던 호크는 주방을 바라보면서 눈치를 살피는 루니를 설득해서 잉글햄의 가장 큰 시장을 향해 밖으로 향했다. 단순히 산책을 겸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살게 될지도 모를 이곳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호크와 루니가 시장으로 향해 나선 그때, 여관 건너편 골목 안쪽에는 호크와 루니를 뒤따르는 자가 있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호크는 소풍가는 학생처럼 들떠서 루니와 함께 골목길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또 1명 더 있었으니, 바로 사이클론이었다.

"흠, 어제 그 일당들이 복수하려는 것인가? 뭐, 그 정도 실력이면 혼자서도 충분하겠지. 그나저나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 이거지? 내가 찾던 인재를 이런 작은 영지에서 보게 되다니. 허허! 참,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먼. 다행히 맑은 눈동자를 보니 심성은 나쁘지 않은 듯한데. 흠, 이것도 다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지. 휴~ 나도 이제 늙었나 보군. 이렇게 심약해지다니. 오늘은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구나. 내일은 또 무슨 즐거운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려나."

창문을 닫고 잠을 청하는 사이클론. 호크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당장에 길길이 날뛰면서 욕을 해댔을 것이다.

"뭐 혼자서 충분하다고!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라고 하면서.......

호크가 전해들은 잉글햄은 북부 레센 제국과 경계인 로스크 산맥에 인접한 케린버그 왕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은 로스크 산맥과 인접한 산악지대여서 환경이 매우 척박하고, 영지의 남부는 다른 큰 영지와 인접해 있어서 도로라든가 치안 문제가 좋았지만, 북부지역은 로스크 산맥에서 넘어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라고 했다.

다행인 것은 이곳이 뚫리면 수도까지 바로 직행이기 때문에 왕국에서 군대가 파견 나와, 몬스터에게 희생당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지의 시장은 호크에게 아주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작은 영지의 시장이 이 정도인데 사이클론이 말하는 대도시는 얼마나 크다는 건지 상상이 안 갔다. 더욱이 왕국이 이런데 제국은 어느 정도 규모인지 전혀 추측이 불가능했다. 언제 어디서 들은 말인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사람 사는 데야 어디든 다 똑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복장이나 언어, 생김새가 달랐지만, 정말이지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 비슷한 것 같았다. 이국적인 풍경에 넋을 뺏겼던 호크는 '뭐, 이만하면 살 만하네. 나도 어서 빨리 자리 잡고 루니 같은 딸이나 낳고 살아야 하는데'라면서 루니의 손에 이끌려 시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상권을 파악하고 다녔다.

일단은 호크도 먹고살아야 했기에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이곳에서 찾아보려고 했다.

루니와 정육점에서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한 아름 들고 시장 입구를 빠져나올 때였다.

갑자기 짐마차가 호크와 루니를 덮쳐왔다.

"위험해!"

호크는 바구니를 길바닥에 내팽개치고서는 루니를 안고 반대편으로 굴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커다란 나무통들이 골목 위에서 쏟아져 나와, 이를 악문 호크는 어쩔 수 없이 뒤에 보이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몸을 날렸다.

건물 사이에 난 좁을 길을 빠져나오니 제법 큰 공터가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는 어제 여관에서 행패를 부렸던 놈들과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 30여 명이 험악한 인상을 쓰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크의 손을 잡고 있는 루니의 손이 떨리자 호크는 루니를 바라보면서 아무 걱정 말라고 진정시켜주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허둥지둥 집 안으로 피해버리고, 곧 공터에는 호크와 루니, 그리고 다크 문의 전투원들만 남게 되었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루니를 돌볼 수가 없기 때문에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크크크크크! 네놈이냐! 감히 겁도 없이 우리 다크 문에게 덤빈 놈이!"

건장한 사내들 사이로 나서는 검은 로브의 인물은 다름 아닌 다크 문의 잉글햄 지부장이었다. 수하들과 자신의 후계자가 반병신이 되어버리자, 지부의 남은 인원과 이웃 영지인 요크쇼어의 지부에서 인원을 보충 받아서 이렇게 함정을 파놓고 호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부장은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뭐... 좋다! 지금이라도 내 발밑에 무릎을 꿇고 네놈의 양손을 내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미친놈, 간밤에 뭘 잘못 먹었냐? 웬 피똥 싸는 소리냐!"

"피... 똥이라고, 이 녀석이! 너! 이 녀석......! 애......!"

"당장 멈춰라! 이곳은 나의 영지다. 모두 물러서라!"

"커헉!"

다크 문의 지부장은 호크의 저속한 말투에 혈압이 있는 대로 올라서 부하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려고 하는데, 바로 그 순간에 누군가 절묘하게 끼어들어 바로 기혈이 들끓어서 쓰러질 뻔했다. 광장 안의 모든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웬 놈이냐? 감히... 어떤... 크헉!"

지부장은 이번에도 또 쓰러질 뻔했다. 그의 이마는 힘줄이 무지막지하게 튀어나와서 오크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몰골이 흉악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한 것이, 지부장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광장 한쪽 구석에 쌓여 있던 나무상자에 우르르 몰려 있는 동네 꼬마들이었다.

많이 봐야 12살이 넘지 않았을 것 같은 꼬맹이들이 무기랍시고 어디서 목검들을 들고 와서는 자신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않은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거 이곳 터가 안 좋아서 자꾸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보는 지부장이었다.

"흥! 이곳은 우리 실버 나이트 기사단의 영토다. 나, 실버 나이트기사단의 단장인 제임스가 명하노니, 모두 내 땅에서 물러가라!"

꼬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크 문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자 말을 한 꼬마의 얼굴은 이내 시뻘게졌다.

"이... 이것들이, 실버 나이트기사단이여! 우리를 능멸한 저 악적들을 혼내주자. 모두 공격!"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꼬마들은 이게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제임스란 아이를 쳐다봤다.

"이... 이봐, 대장. 제정신이야? 우리가 어떻게 어른들을 상대로 싸워. 그만하고 가자!"

"그래, 맞아. 난 또 윗동네 애들이 쳐들어온 줄 알고 왔지. 그냥 가자."

풀죽은 아이들의 말에 제임스는 더욱 분이 났는지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든 호크가 루니를 데리고 제임스 앞에 섰다.

"뭐... 뭐냐? 결투냐?"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호크는 이 녀석들이 여간 반갑지 않았다. 웃기기도 하고 어이도 없었지만, 호크는 애써 웃음을 참으면서 제임스에게 부탁했다.

"흠... 아닙니다, 단장님. 다만 제가 저 깡패들과 싸울 동안 이 아가씨를 지켜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뜻밖의 말에 제임스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고마워요, 단장님!"

루니를 안아서 상자 위로 올린 호크는 제임스의 머리를 한 번 헝클어주고서는 다크 문 무리에게 다가갔다.

우드득! 우득!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예의 몸 풀기를 끝내자, 호크는 여관에서 보여줬던, 약 올리기 자세인 손가락 까딱거리기를 보여주면서 바닥에 침을 뱉었다.

"빨리 끝내자, 다크 물인지 문인지......."

"으아아아아! 당장 저놈을 죽여 버려, 어서!"

끝내 무너지는 이성을 뒤로한 채 지부장의 외침을 시작으로 전면에 서 있던 10명이 검을 빼어들고 나섰다.

내심 권총이라도 가져올 걸 하고 후회해보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꼬마들 쪽을 보니 상자를 타고 건너편 건물 창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제 걸리는 것이 없으니 마음 놓고 싸울 수 있었다.

호크는 가볍게 권투선수처럼 뛰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특공무술을 배울 때, 사부인 권 상사는 이런 상황을 설정해놓고 많은 연습을 시켰다. 빈 건물의 방이나 건축현장 같은 데서 맨손 대 칼이나 각목, 혹은 단검 대 단검 등, 호크는 그때의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서서히 자리를 잡아나갔다.

싸움에 있어서 자리를 어떻게 잡느냐가 그 싸움의 승패 50%를 좌우한다. 호크는 그 간단한 진리를 이제부터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1대 30의 싸움! 나중에 잉글햄에서 두고두고 이야기될 신화가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람의 파이터로 유명한 극진 가라데의 시조, 최배달(최영의) 선생은 실전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평소에도 실내에 들어서면 반드시 벽을 뒤로 해서 앉고 전기 스위치의 위치를 버릇처럼 확인했다. 그는 항상 불상사에 대비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또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싸움에 임하는 데 있어서 항상 태양을 뒤로 등지고, 그것이 여의치 못할 때는 오른쪽으로 두라고 하였다. 방 안처럼 좁은 실내에서도 등(燈)을 뒤로하고, 마찬가지로 피치 못한 경우라면 역시 오른쪽으로 하라고 말하곤 했다. 싸움의 주도권을 항상 본인이 가져야 하며, 그것은 상대방의 수와 상관이 없다고 말하면서 언제나 뒤에 몰리지 않도록 하고, 왼쪽을 넓히고 항상 오른쪽을 좁히도록 자리를 잡으라고 당부했다.

이는 바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늘 이야기하는 병법이었다. 이것은 권 상사가 매번 주지시켰던 말들이었고, 호크 또한 공터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주위를 모두 살피고 머릿속에 기억시킨 뒤였다.

호크는 서서히 호흡을 태극심법에 맞추어 리듬을 조절했고, 어느덧 그의 주위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하지만 톡톡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호크의 동작이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장내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서서히 어둠이 찾아들고, 공터에 있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전기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궁금증이 일었지만 힐끔 가로등을 쳐다본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앞에 나선 10명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사내들을 주시하면서 가로등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였다. 이제 뒤는 두터운 건초더미가 쌓여진 벽이고, 불빛마저 피했으니 뒤에서 공격당할 일도 없다. 적은 밝은 곳에 노출된 상태고 호크는 어둠속으로 피해들었으니 이로써 50%의 승률이 확보된 셈이다.

툭! 툭!

호크가 상체로 건초더미를 뒤로 계속 밀치자. 맨 위에 있던 건초더미가 아래로 떨어졌다.

건초더미가 눈앞에 이르자 호크는 힘껏 기합을 외치며 그것을 발로 찼고, 그가 돌려 찬 발길질에 단단히 묶여 있던 건초더미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검을 들고 호크를 압박해가던 다크 문 10명의 검사들은 순간, 사방이 온통 건초들로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자 매우 당황했다. 싸움에 있어 순간의 방심이나 머뭇거림은 언제나 필패(必敗)로 귀결된다.

호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표범처럼 뛰어들었다.

맨 앞의 사내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타고 오른다고 느낀 순간, 정신을 잃었다. 호크는 어깨를 밟고 뛰어올라 사내의 목을 발로 차고, 다시 다른 상대에게 뛰어 들어서 드롭킥을 안면에 날렸다. 땅에 발이 닿기가 무섭게 뒤로 텀블링을 하면서 하이킥을 먹이고, 옆에 어정쩡하게 검을 들고 있던 2명에게 양발 올려 차기를 가볍게 넣어주자 고목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지 몰라 당황하던 뒤쪽의 3명에게는 고양이 낙법으로 굴러서 다가섰다. 무언가 시커먼 것이 앞에 나타나자 그들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휘둘렀지만, 하얀빛이 휙휙휙~! 3번 지나가자 그 수만큼 사람들도 맥없이 쓰러졌다.

어느 정도 건초나락들이 땅에 떨어져 시야가 보이자, 남은 2명이 고함을 지르면서 호크에게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어느새 호크는 등과 오른쪽을 벽과 나무상자로 막아버렸다. 각도가 좁아지자 두 사람 중 한 사람만이 호크에게 먼저 덤벼들었다.

호크는 검을 휘두르는 사내의 팔이 가슴에 닿자 왼손을 들어 상대의 손목을 낚아채고서는 상대방을 자신에게 끌어들이는 동시에 왼발을 구르면서 어깨로 받아버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뒤에서 달려들던 사내와 사이좋게 끌어안고서는 데굴데굴 굴러서 벽에 쿵 하고 부딪치고서는 기절해버렸다.

호크는 몸에 묻은 건초를 탁탁 털고서는 다시 두 손을 들어서 기수식(騎手式)을 취했다.

다크 문의 지부장은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얼굴의 볼을 꼬집어봤다.

아프다! 그렇다면 꿈은 아닌데, 꿈같은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본 베테랑 검사들이 맥주 한잔 마실 시간 동안에 모두 바닥에 누워버린 것이다.

여기서 그냥 물러선다면 그나마 자신의 몸이라도 간수할 수 있었을 텐데, 사람의 자존심이란 게 뭔지 악에 바친 지부장이 어리석게도 재차 공격 신호를 보냈고, 남은 인원 전부가 호크에게 검을 들이대면서 덤벼들었다.

호크는 아까 자신이 공격할 때, 밟은 진각에 파인 땅을 보았다. 꽤 깊게 파인 것을 본 스스로도 놀랐지만, 기를 방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자신이 도망칠 수 있는 퇴로를 다 막은 채 다가오는 적들을 살펴보니, 이번에는 만만치 않은 놈들이란 것을 직감했다. 좀 전에야 순간적인 기습이 먹힌 거였고, 이놈들은 상체를 굽히고 검을 앞으로 세우면서 접근하는 모양새가 상당한 경험이 있는 자들이었다.

호크는 예전에 권 상사가 가르쳐주었던 발경(發經)과 촌경(村徑)에 대해 떠올렸다. 그때 커다란 물통에 들어가서는 얼마나 많은 정권 단련을 했던지, 지금 생각해도 이가 갈릴 정도다. 그때는 물이 찰랑거릴 정도였는데, 만약에 지금 같은 기운이라면 권 상사 말대로 장풍도 가능할 것 같았다.

호흡을 더욱 가라앉히면서 마음을 끝없이 가라앉혔다. 그러자 눈이 더 밝아지고 귀는 더 예민해졌다. 저들의 호흡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왼쪽에서 강한 살기가 칼로 찌르듯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호크는 호흡을 짧게 끊으면서 양손을 가슴 어림으로 끌어들였다가 어깨를 틀면서 손바닥을 바깥으로 내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을 일자로 세우고서는 몸을 날린 건장한 사내가 호크의 손바닥과 30cm까지 접근했다가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끌어당긴 것처럼 뒤로 나뒹굴었다. 공격을 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되... 된다! 하하하~! 정말 되는데! 어디 보자, 이렇게 되면 좀 더 몸을 풀면서 이 느낌을 익혀서 빨리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호크는 처음 생각을 바꾸어서 한 명씩 상대하면서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으니까. 꿈으로만 꾸었던 무술 고수가 된다는 사실에 호크는 지부장 뒤에 서 있던 회색 로브의 사내들을 보지 못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야 되겠는가?

젊은 마법사도 수인을 맺더니 영창을 했다.

"번개의 고통이여! 그 무서운 전율로 모든 생명을 거두어라!"

그러자 마법사의 머리 위에서 뇌전(雷電)이 스파크를 일으키면서 커지더니 돌바닥을 타고 마치 독을 품은 뱀처럼 달려 들었다, 기겁한 호크는 쉴 새 없이 바닥을 굴렀다.

파- 파파박!

마법이 한바탕 쓸고간 뒤 벌떡 일어난 호크와 마법사들 사이에는 전격계 뇌전(雷電)마법에 당한 다크 문 검사들이 형편없는 모양새를 하고서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호크의 모습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온통 머리털이 곤두서 있고 그 속에서 하얀 김이 피어 올랐다. 호크의 귀로 뒤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헉헉! 이 개새끼들! 니들 다 죽었어!"

뇌전마법을 시전한, 제일 고위 마법사인 그랜트는 기가 막힌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격계 마법인 뇌전마법에 격중당하고서도 쓰러지지 않는 호크를 자신의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보조 마법사로 따라온 빌과 스톤도 비록 3클래스이지만, 다른 마법은 익히지 않고 공격마법만 익히 전투 마법사였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보이지는 않지만, 팔에 마법을 증폭시켜주는 아이템 팔지를 차고 있었다. 그런 증폭마법이 걸린 공격마법에 격중당하고도 살아 있다니... 아니 ,멀쩡하다니! 눈앞의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랜트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서는 양팔을 내밀고 빌과 스톤에게 눈짓을 했다. 두 사람도 그랜트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팔을 맞잡았다.

그러자 그랜트의 중얼거림과 함께 세 사람의 로브가 폭풍 속에서처럼 휘날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이런 미친!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그것을 쓰면 어쩌자는 거야!"

지부장은 본부에서 파견 나온 그랜트란 마법사가 사용하려는 마법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다.

수개월 전에 다크 문의 비밀창고를 만들기 위해 로스크 산맥에 들어갔을 때, 저렇게 마법사들이 손을 맞잡고 펼친 마법에 의해 그 일대가 쑥대밭이 된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지부장은 망연자실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이곳에서 다크 문의 활동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직의 특성상 그들은 비밀스럽게, 어둠 속에서 활동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커다란 소동을 일으켰으니, 대대적인 조사와 수색이 시작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지부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랜트와 두 마법사는 자신의 머리 위에 엄청나게 큰 물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물의 기운이 강한 그것은 주변의 수분을 모두 끌어 모았다가 응축시킨 다음에 터트리는 공격마법이었다. 불이 나면 재라도 남지만, 홍수가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처럼 이 마법이 쓸고 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위험이 큰 만큼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마법인데, 그랜트는 눈앞의 저 자를 지금 해치우지 못한다면, 나중에 자신들에게 크나큰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때문에 나중에 일어날 파장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나에게 축복된 자연의 힘이여! 그리고 호수의 여신 비비안이시여! 그......"

비록 상처입고 지쳤다고는 하나, 마법사들은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조금 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쳤다면 호크는 이 이름 모를 공터에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지만,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으려는 욕심에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마법을 사용한 것이 실수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기운을 회복한 호크의 눈에는 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모여드는 마나의 길이 보였다. 이내 그는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 손에 들고 있던 창에 기운을 실어 3개의 마나가 모이는 중심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창날에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장창이 마나의 중심을 뚫어버리자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현상이 일어나더니 거대한 수구(水球)가 펑! 하는 소리를 내면서 터져 버렸다.

"지랄하네, 이거나 먹어라! 한 번 당했으면 됐지, 두 번은 안 당해!"

"그대의 눈물로 대지를 적시고 정화하... 헉! 으아아악!"

지부장은 엄청난 참사를 예상했는데, 오히려 마법사들이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자 넋을 잃었다.

마법사를 보호하기 위해 전면을 막고 있던 검사 셋이 영문을 몰라 쓰러진 마법사들을 일으키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형성되었던 수구(水球)가 터지면서 물벼락을 맞은 마법사들은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다.

"크헉! 우웩! 어떻게... 어떻... 게 쿨럭~"

"후아~ 후아~ 두 번은 안 당한다고 했지? 퉤!"

뚜벅뚜벅 걸어오는 호크의 모습에 지부장은 벌벌 떨면서 사죄했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동안 살아온 모든 처세술이 발현되었다.

"이... 이보게, 젊은이. 용서하게! 나도 이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나야 단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이... 나 좀 봐주게! 제발! 집에는 토끼 같은 자식이 셋에다가... 늙으신 부모... 컥! 헉! 우아악!"

자비를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발길질과 구타였다. 사람의 몰골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변하자 겨우 발길질을 멈춘 호크였다.

"시끄러워. 쯧!"

지부장을 걸레로 만들고 마법사에게 다가가자, 검사 셋이 앞을 막아섰다. 물론 쓸데없는 행동이었지만, 호크는 그들 3명도 땅바닥하고 친구를 만들어주고서는 숨을 가쁘게 헐떡이면서 곧 죽을 것 같은 그랜트에게 다가갔다.

"하아~ 하아~ 어떻게... 어떻게 마나를 흩뜨려버릴 수가 있지? 어떻게......!"

"크크크! 그냥 뭐. 내 눈에 보이더라고, 마나들이 모여드는 모습이. 그리고 서로 융합되는 모양도 말이야. 그래서 그 중심점을 내 마나로 흩뜨려버린 거지. 나도 혹시나 했는데 제대로 됐지. 앞으로는 사람 봐가면서 덤비라고. 알았어, 제길! 군복도 한 벌밖에 없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그것... 헉!"

자신이 다친 것보다 더 큰 충격적인 소리를 들어서인가? 그랜트는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버렸다.

호크는 죽어버린 그랜트를 내려다보다가 벽 뒤쪽에 꽂혀 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조금전에 마법사들이 손을 맞잡고 마나를 모으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많은 양의 마나들이 마법사들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융합되면서 기운이 커지자, 호크는 마나의 융합점에 다른 기운을 밀어 넣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순간, 들고 있던 창에다 본신의 기운을 밀어 넣은 다음 그 가운데로 창을 날렸다.

한창 마법이 완성되고 있던 시점에, 호크의 창에 실린 기운으로 인해 마나가 폭주해 폭발하자 그 대가는 그대로 마법사들의 죽음으로 나타났다. 시전될 경우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겠지만, 시전되지 못할 경우, 그 위력이 자신들에게 돌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기에 그들은 삶을 이곳에서 끝내야 했다.

싸움이 끝나자 그제야 골목에서 호각소리가 울리면서 경비대들이 나타났다. 여기나 저기나 왜 경찰들은 사건이 끝나면 나타나는지 모를 일이다.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고, 쓰러진 자들이 모두 다크 문이라는 소리에 경비대는 크게 놀랐다. 겨우 단신으로, 왕국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다크 문을 이렇게 만들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워낙에 사태를 지켜본 눈들이 많았기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잉글햄의 호든가를 책임지고 있는 홉스는 비록 만신창이의 모습이었지만, 눈빛이 살아 있는 호크를 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영지 경비대의 문은 열려 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지원할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호크는 피곤하다면서 거절하고 아이들과 함께 있던 루니를 찾았다. 호크는 울먹이면서 다가오는 루니를 발견하고서는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바보, 왜 울어! 울지 마! 내가 그랬잖아.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응, 아저씨!"

'오빠라니까!'

"끄응! 에고, 오늘은 기운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잉? 이런, 자... 잠깐만!"

호크는 경비대들이 끌고 가는 다크 문의 지부장의 품을 뒤져서 돈주머니를 챙겼다.

경비대장이 왜냐고 묻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피해보상비죠. 헤헤! 뭐, 이 정도는 눈감아주시겠죠. 그럼, 안녕히."

너무나 뻔뻔히 사라지는 통에 경비대장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경비대에 들어오라고 한 것은 아닌지 후회하기 시작했다.

"에고고고, 허리야! 루니야, 다시 고기 사러 가야지? 엄마가 걱정하시겠다."

"응, 아저씨!"

호크의 이마에 생기는 주름살을 보지 못했는지 루니는 계속해서 대한민국 남자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인 곳을 사정없이 찌르고 있었다. 다크 문 일당들과 싸우다 다친 상처보다 루니가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가 비수가 되어 호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저기요, 아저씨!"

빠직!

'언놈이야, 또~!'

아저씨란 말에 고개가 홱 돌아간 호크의 눈앞에, 나무 목검을 들고 눈망울을 빤짝거리고 있는 꼬맹이들이 들어왔다.

"잉? 뭐야! 아까, 그 뭐... 실버 어쩌구 기사단 꼬마들이구나. 왜, 나한테 볼일 있냐?"

다소 퉁명스런 호크의 대꾸에, 아이들은 겁먹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그중에서 대장이라던 꼬마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저... 기요, 저희도 배울 수 있을까요?"

"응? 뭘......?"

"그 체술(體術)이요."

"체술? 아! 특공무술? 하하하하! 너희들이 보기에도 멋지디? 하하하! 그런데 이것은 아무에게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다. 동네 도장에서 배우렴. 알았지?"

"트... 고... 뮤슐이요? 그리고 도장은 뭐예요?"

"잉? 도장? 하하! 이런 실수! 음, 그러니까 뭐 있잖아. 돈 받고 가르쳐주는 곳 말이야. 알았지? 그럼 우리는 바빠서 이만."

"아! 아카데미요? 하지만 저희는 귀족이 아니어서 갈 수가 없어요. 배우고 싶어도......."

"잠깐. 그럼 이곳에는 이런 무술을 가르쳐주는 곳이 없단 말이냐?"

옆에서 보다 못한 동네 아저씨가 아이들의 말을 거들었다.

"허허! 이 양반이 어디 딴 세상에 왔나? 아니, 세상에 누가 그런 비전(秘傳)들을 남에게 가르친단 말이요! 전부 가문의 비전이라고 해서 다 자손들에게만 전수하지. 그나마 귀족들은 아카데미에서 유명한 용병 강사들에게 배울 수나 있다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에게는 어림도 없지. 허참, 우리 애들도 당신 같은 체술을 배우게 하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겠구먼."

순간, 호크의 머릿속에서는 헨델의 메시아 중 '할렐루야' 코러스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으하하하하하! 그래! 이거야, 이거! 우하하하하하!"

루니는 이제 곧 정육점이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이 아저씨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별로 다치지 않고 악당들을 물리친 호크가 어쨌든 멋있게 보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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