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프롤로그
그때가 아마도 1994년쯤인가 그랬죠. 아무튼 그때쯤이었을 겁니다.
그냥 제대했어야 하는데, 차라리 인사계와 중대장의 사악한 유혹에 넘어가버렸다면 지금쯤 토끼 같은 자식들 낳고 여우같은 마누라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에휴! 후회하면 뭐 합니까?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 걸. 뭐, 여기도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힘들다면 가끔 김치찌개, 라면, 떡볶이 등등 뭐, 이런 것이 그리울 때가 많아서 그렇지,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어느새 이곳 사람이 돼버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네요.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더니, 제자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황당하던지. 하하! 그때 생각을 하니 웃음만 나옵니다.
대한민국의 육군하사인 저, 권혁이 이 낯설고 물 선 폴렌시아란 땅에 떨어져서 호크아이라고 불리는 외인용병대의 대장으로, 그리고 왕국 군대의 지휘관이 되기까지 참으로 아찔한 순간도 많았고, 즐거운 때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제법 명성도 얻고 재산도 얻었죠.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제 내일이면 고대하던 제 결혼식입니다. 정말 이곳 사람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거죠. 입맛도, 모습도... 이 폴렌시아란 곳에 적응해서 많이 변했습니다.
그래도 간간이 한국의 풍경들과 전우들이 살고 있는 제 조국, 대한민국이 그리워집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에고고, 비가 올려나 봅니다. 이런 날은 동동주에 파전이 최고인데 말이죠. 그나저나 그날도 이렇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죠, 아마.......
Chapter 1. 말뚝 박기 싫어요!
ATT(부대 전투력 측정훈련)를 끝내고 행정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인사계 책상 앞 소파에 중대 간부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구름과자를 먹고 한껏 웃으면서 떠들고 있었다.
'이런 잘못 들어왔다.'
'하필이면'이라고 땅을 쳤지만,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라고 했던가. 서울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친구가 오고 있어서 들뜬 마음에 앞뒤 생각 없이 사제전화 한 통 쓰려고 들어왔다가 재수 없이 말코들에게 걸려들자 권혁의 표정이 뭐 밟은 사람처럼 구겨졌다.
권혁은 서둘러 문을 닫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누가 그랬던가?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오~ 이게 누구야? 권 하사 아닌가? 어서 오게!"
'윽! 똥 밟았다!'
이상하게도 인사계 앞에만 서면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대대장을 빼놓고 그 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인사계에게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인사계란 무릇 부대의 어머니이요, 그 부대 안팎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존재이다. 각 처부의 담당 간부들도 늘 눈치를 보지 않는가? 계급을 떠나서 말이다. 역시나 군대는 보직이 깡패라는 말이 실감난다.
"추... 충성! 하사 권혁!"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권혁을 바라보는 간부들의 시선은 따뜻하기만 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00사단 수색중대가 각종 전투지휘 검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 것이 바로 권혁 하사가 선임병이 되면서부터였다.
그 덕에 만년 중령이던 대대장이 진급해서 전출도 가게 되었고, 간부들 인사 평가도 좋아져서 그를 보는 간부들의 눈빛이 부드러운 것은 당연했다.
더욱이 이번에는 국방부 참관단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고 갔으니 부대 분위기가 좋은 것은 당연지사. 한마디로 권혁은 인사계 눈에 복덩이나 다름없었다.
'복덩이!'
정말이지 똑똑한 고참병 1명이 얼마나 부대 분위기를 바꿔놓을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 아직 위장크림도 지우지 않고 빼꼼히 행정반에 머리를 들이밀며 들어오는 권혁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엽기까지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포상휴가를 인사계원에게 시켜서 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쉬어. 수고했어. 하하하하하! 좋아, 좋아!"
"우하하하! 역시 권혁이야. 이 자식 신병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그러나 간부들의 환대가 전혀 반갑지 않은 권혁은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재수 없게 하필이면... 이따가 저녁 집합 때나 올걸.'
'간부들이 퇴근하고 난 후에 오는 건데'라면서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어쩌겠는가? 간부들은 계속해서 권혁에게 칭찬을 하면서 좀처럼 그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거기에 온갖 짜증에 입가가 푸들거리던 그를 더 미치게 만들 일이 더해졌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대대장까지 끼어들어서 한입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간부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에 대대장도 '허허허' 하는 너털웃음소리를 실어주었다.
권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욕이란 욕을 마음속에서 퍼붓고 있었다. 이렇다 할 친구 하나 없는 권혁에게 유일한 벗인 고교동창이 곧 도착할 터인데, 이렇게 발목 잡혀 있으니 여간 열불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대대장까지 나와서 어깨를 두들기면서 술자리 안주처럼 집적대고 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란 걸 잘 알지만, 그 내면에는 자신들의 진급을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기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때,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밖에 없던 권혁에게 천국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천사는 아니었고, 행정반 인사계원인 유 상병이었다.
"저... 인사계님, 저기 이거 문제가 있습니다."
"응? 뭐야? 그깟 휴가 상신 하나 올리는데 무슨 문제? 가져와봐!"
유 상병에게 건네받은 공문을 읽던 인사계의 표정이 갑자기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차려 자세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권혁도 눈동자만 굴려서 인사계를 살폈다. 그동안 먹은 짬밥이 얼마던가. 눈치, 코치 9단이다. 군대도 사회와 똑같아서 눈치 없이는 편히 살 수 없는 조직이다.
잠시 굳은 표정을 지어 보인 인사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류를 책상에 덮으면서 권혁에게 이만 내무반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어째 인사계의 억지 미소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멀뚱히 서 있는 거보다야 백번 낫겠다는 생각에 얼른 행정반 문을 나섰다.
그러나 자꾸만 뒤통수를 잡아끄는 불길한 느낌에 몇 번이나 행정반 문을 뒤돌아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서 내무반으로 향했다.
훈련도 끝났겠다, 친구와 통화하고 내일 정기외박 때 자신이 꿈꾸던 장밋빛 청사진을 펼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떴다. 권혁은 PX에 있는 공중전화를 쓰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중대를 벗어났다.
권혁이 행정반을 빠져 나가자 다시 인사계의 표정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마치 땅이 꺼지기라도 할 듯이 깊은 한숨을 내쉬자 중대장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인사계는 말없이 공문을 중대장에게 건넸다. 천천히 공문을 읽던 중대장 또한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다들 궁금증이 커지자 인사계의 닫혔던 입을 열렸다.
"이거 참, 휴~ 권혁이가요... 권혁이... 특명이 떨어졌어요! 말년휴가도 보내줘야 하고... 아니지, 그게 문제가 아니고 권혁이가 제대한다, 이 말씀입니다. 제대요!"
화기애애하던 행정반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섭도록 추운 동토의 땅 시베리아 벌판으로 변해버렸다. 몇몇은 담배를 빼어 물고서는 고개를 숙였고, 대대장은 뒷짐을 진 채 연신 '허! 이거 참!', '허허!'를 연발했다.
모두들 고민의 정도는 달랐지만 제각각 똑같은 생각에 잠겼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각종 평가에서 항상 지적사항으로 1등이던 부대였다. 한 달에 한 번은 탈영사고, 음주사고, 심지어는 자살사건도 있었다. 그러니 중대장은 항상 진급 누락이 당연했고, 결국은 옷 벗고 나가기 일쑤였다. 00군 지역에서 근무지로서 일급 기피 대상 부대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자 나중에는 진급 누락한 장교가 제대 전 마지막으로 거쳐 가는 그저 그런 부대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 그런 엉망진창인 부대에 복덩이 신병이 하나 들어오더니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뭘 하던 놈인지 예사롭지 않은 카리스마로 부대원들을 사로잡더니, 타고난 군 체질인 듯, 아니 군대 오기 전에 어디서 군사훈련이라도 받고 왔는지 모든 훈련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였고, 마치 FM(야전교범)에서 살아나온 군인 같았다. 모든 훈련에서 늘 앞장서서 뛰었고, 오히려 어떤 때는 간부들이 권혁에게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심지어는 외국의 특수부대에서나 사용하는 각종 전투기술을 몸에 익히고 있었다.
아무리 간부들과 사병들이 어디서 배운 것인지 물어보아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신비스러운 존재였고,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연례 한미 합동 훈련에서 발군의 기술로 미 육군 레인저들을 제치고 모의전투에서 승리하자 사단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당연히 포상이 줄을 이었고, 일반병으로는 곤란한 점이 생기게 되자 일병 때 단기 하사를 달아주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지난달 말에는 드디어 육군 최우수 선봉부대 표창도 받았다. 사단의 미운 오리 새끼가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당연히 간부들의 주름살은 줄어들었고, 내년 제대인 중대장도 인사 평가점수가 아주 좋아졌다.
그래서 사회에 진출할 때 공기업에 들어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그늘진 인생에 봄날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쬔 것이다. 그래서 한껏 들떠 있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대대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좀 전에 육본 평가단들 중에서 안면 있는 육사 선배가 이대로만 계속하면 진급은 따 논 당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별을 다는 것이었다. 별! 그것이 군인에게 있어 얼마나 큰 의미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들 이유야 어쨌든 목적은 같았다.
권혁, 그의 제대는 절대 불가하다는 것이다.
인사계를 필두로 간부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시작했다. 이렇게 한 남자의 운명이 자신도 모르게 결정되어지고 있었다.
불쌍한 권혁 하사! 그에게 애도를.......
"혁아, 정말 오랜만이다. 지낼 만하냐?"
"나야 뭐 밥 먹여주고 재워주는데 잘 있지. 넌 어때? 사업은 잘돼?"
"그럼. 물장사야 불황이 따로 있나. 그럭저럭 할 만해."
간부들이 어찌되었든 토요일 날 정기외박을 나온 권혁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동춘이를 만나서 오랜만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동춘이는 신촌에서 락 바(Rock Bar)를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 권혁의 유일한 소망은 조그마한 바(Bar)를 갖는 것이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도 군 입대 전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생각하기도 싫은 아버지란 작자도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에게 남은 유일한 낙은 대학가 근처에 자신만의 멋진 바를 차리는 것이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 돈이었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남긴 돈이 꽤 되어서 친구인 동춘이가 가게를 미리 알아보고 온 것이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지금 계약하고 인테리어 마치고 이것저것 준비하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포상휴가, 말년휴가 모두 가게 오픈하는 데 쓸 요량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동춘이가 홍대 근처에 알아본 가게의 위치나 자신이 수배해놓은 인테리어 업체에 대한 이야기 등이 오고갔다. 곧 다가올 자신의 밝은 미래를 상상한 권혁은 입이 째지도록 술자리가 끝날 때까지 웃어댔다.
"하하하! 미래의 사장님을 위해서! 건배!"
"하하하! 그래, 좋아! 이제야말로 인생을 즐길 때가 온 거야, 나도!"
생맥주 잔을 부딪치는 두 사람의 호기에 주변 사람들도 웃어주었다. 그렇게 자신의 아름다운 락 바를 생각하면서 권혁은 점점 취해갔다.
그 시각, 근처 대포집에서도 인사계를 필두로 중대 간부들이 모여서 모종의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다들 만장일치를 보았지만, 일자무식 보급관의 계획이란 점이 내내 찜찜한 인사계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부대를 위해서!"
쨍!
여러 개의 소주잔이 부딪쳤다. 마치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소주잔들이 부딪치는 소리는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것을 부딪치는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한쪽에서는 자신의 핑크빛 인생을 꿈꾸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꿈을 오직 꿈으로 끝내기 위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주일 뒤, 사단 헌병대 영창.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빌어먹을! 이게 말이 되냐고. 엉! 장난해? 장난하냐구?"
감방 안에서 미친 듯이 소리치는 권혁 하사의 두 눈이 뒤집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복도를 마주하고 앉은 군 헌병대 영창 안에서는 다른 죄수병들이 손을 앞으로 뻗어 책을 들고 읽고 있었다. 군 헌병대 영창 안에서는 일과시간과 휴식시간을 두어서, 이렇게 손을 직각으로 뻗어서 책을 들고 읽는다. 이것이 얼마나 고역인지는 지금 한번 해보시면 알 것이다. 10분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사단 수색대대 권혁 하사만이 쇠창살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 젠장! 열나 시끄럽네! 고만 허고 찌그러져 자랑께, 제발!"
병장 마크를 달고 나타난 덩치 큰 사내를 보자 권혁은 더더욱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병장! 야, 임마! 제발 이걸 열어라. 응? 이게 말이 되냐고! 이거 열어, 빨리! 다 쏴 죽여 버리기 전에!"
훈련소 동기인 이준호 헌병대 병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자라는 자신이 생각해보아도 권혁 하사에게 일어난 일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영창 안에서 발광하는 권혁을 바라보면서 한숨만 내쉰 이 병장은 철창 안으로 담배 한 갑을 던져주고는 돌아 나왔다. 잠시 고개를 돌려서 권혁의 영창을 쳐다보고서는 몸을 돌려 나가는 이 병장의 입에서 'X같은 군대'라는 말이 씹어뱉듯이 흘러나왔다.
한밤중이 되자 권혁도 지쳤는지 영창 안이 잠잠해졌다. 안을 들여다보니 권혁이 무릎을 감싸고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파묻고 있는 모습이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문 밖에서 물끄러미 보다가 사라지는 사람, 바로 권혁 하사의 부대 인사계였다. 밖으로 나오니 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인사계를 태우고 사라졌다.
지프 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눈을 감고 있던 권혁의 고개가 들렸다. 부릅떠진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 권혁의 손에는 아까 훈련소 동기가 던져준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는 영창 열쇠가 들어 있는 담뱃갑이었다.
권혁은 열쇠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영창 안은 이미 취침시간이 지나서 모두 잠들어 있었고, 이 병장이 미리 보초를 밖으로 불러낸 뒤라 권혁은 쉽게 복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온 뒤, 담뱃갑 안에 들어있던 쪽지대로 이 병장이 일러준 길을 따라서 헌병대 막사 뒤를 돌아 수송부 연병장을 가로질러 부대를 빠져나갔다.
훈련소 동기인 이준호 병장은 자신의 눈앞을 지나쳐가는 권혁을 보면서 무사히 서울로 빠져나가길 조용히 빌었다. 아니, 서울 말고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수배기간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살았으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으며, 권혁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이미 그는 한마디로 머리꼭지가 돌아버린 상태였다. 너무나 화가 나서 이성을 상실했고, 그런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병장은 그저 권혁이 잘 도주하기만을 기도했다. 이 일로 훈련소 시절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빚을 갚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각 서울 시내로 향하고 있어야 할 권혁은 수색대대 탄약고 앞에 서 있었다.
달빛을 받고 탄약고 정문에 서서 실소를 흘리는 권혁의 표정은 그야말로 악귀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감히 내 성질을 건드려! 이것들, 다 죽었어! 그동안 지들 위해서 뺑이 치게 뛰었더니, 나를 이 꼴로 만들어? 그리고 동춘이, 이 자식! 하나뿐인 친구라는 놈이 사기를 쳐! 다 죽었어! 니들한테는 미안하다만, 다 간부 잘못 만나서 그런 줄 알아라!"
권혁은 기절시킨 경계병을 참호 속에 던져 넣으면서 이를 갈았다. 열쇠를 부숴버리고 안으로 들어간 권혁은 눈에 보이는 것은 모조리 챙겼다.
M18A1 크레이모어, 5.56MM 실탄, KE200HE(40MM 유탄), 닥치는 대로 쓸어 모았다. 밖에 있는 수송부에서 몰래 끌고 온 달지차(K-301)에다가 차곡차곡 쌓아서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싣고서는 시동을 걸었다.
'나를 원망 마라. 너희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실수가 어떤 건지 똑똑히 알려주마. 크크크!'
미쳐도 단단히 미친 권혁 하사,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제발 이성을 찾기만을 빌 뿐이다.
다음날, 부대가 발칵 뒤집힌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 간부들은 모두 중대장실에 모여들었다.
"거 보드래요. 그런 방법은 안 된다고 하지 않았드래요. 그놈이 어떤 놈인데, 그리고 그 친구라는 놈은 왜 가게 계약금을 해먹고 도망가서 속을 썩인대요."
염장을 지르는 말만 골라서 하는 수송관에게 눈을 한번 부라려주고 인사계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아직은 상급부대에 보고하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든 일이 커지지 전에 부대 내에서 수습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이다.
서울 친척 집에도 아직 연락이 없었다고 했고, 권혁 하사가 힘들게 모은 전 재산을 가게 계약금과 인테리어비용이라고 받아서 꿀꺽 삼켜버린 동춘이란 친구 집 근처에서 잠복근무하고 있는 체포조도 그림자조차 못 봤다고 하니, 이 근처 어디에 있다는 얘기였다.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사고를 칠 줄은 상상도 못한 인사계는 아무리 사람이 욕심난다고 해도 미련한 보급관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초에 권혁 하사를 말뚝 박게 하자는 데 모두가 동의했지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지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일자무식 보급관이 내놓은 의견에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밀어붙인 것이 작금의 사태를 만들어냈다.
권혁의 유일한 즐거움이 제1내무반 철책 너머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먹는 계란 프라이와 라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보급관이 이를 이용해서 권혁을 잡아두자는 의견을 내놓았었다. 그래서 권혁이 운동복 바람으로 계란 프라이와 라면을 먹고 있는 현장을 덮쳐서 옭아맨 것이다.
그 다음은 인사계가 나서서 '너, 영창갈래, 여기다 사인할래?'였다. 처음 생각할 때는 너무나 그럴듯하고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헌병대 수사과에 뇌물까지 먹여가면서 공작을 벌였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장기복무 지원서를 들고 권혁을 찾아갔을 때, 그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씹어 먹을 듯이 쳐다보는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지 않았던가.
그제야 권혁이란 놈이 어떤 놈인지 생각났다. 동계 훈련 때에도 맨땅에서 혼자 일주일씩 버티던 놈이 아니던가. 당시에도 모두가 얼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전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혼자 터벅터벅 나타나서는 배고프다고 봉지라면으로 뽀글이를 해먹던 놈이 아니던가. 강원도 군 부대의 겨울날씨는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잘못하면 동상 걸리기 십상일 정도로 혹한의 날씨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팀 스프리트 훈련 때, 미 해병대 돌격대 놈들도 독종이라고 치켜세운 놈이 아니던가. 그가 지원서를 쫙쫙 찢어버리면서,
"더는 안 해!"
...라고 외치던 모습을 잠시 떠올린 인사계는 아무래도 사람 잘못 건드렸다고 후회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헌병대하고 이야기가 다 끝나서 내일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치다니! 분통이 터져도 보통 터지는 것이 아니었다. 간부들도 모두 똥 밟은 표정이었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가는 모두 옷 벗게 생겼으니 말이다. 십 수 년 해온 것이 군 생활인데, 이제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다들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인사계님, 권 하사 전화입니다!"
"뭐... 뭐야? 어서 이리로 전화 돌려. 빨리!"
인사계는 반쯤 정신이 나갔다. 권혁이가 전화를 했다는데 죽다 살아난 심정이 이럴까?
"아이고, 이 녀석아! 미안하다!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 그냥 돌아와라! 아무것도 묻지 않으마!"
"훗! 잘못한 줄은 아시나 보죠? 제가 그동안 얼마나 뺑이 쳤습니까? 덕분에 인사계님 편안했죠? 그렇죠? 안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네! 어떻게 제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신 거죠? 저 지금 돌아버렸거든요! 그냥 확 다 날려버리고 다 같이 가는 겁니다! 어때요? 좋죠?"
간부들은 수화기를 통해 나오는 권 하사의 목소리에 그야말로 사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이... 이보게! 제발 진정하고 부대로 복귀하게! 자네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테니. 응? 제발! 이렇게 비네!"
"야! 권 하사! 나다! 중대장이야. 너무 섭섭해 하지 말어. 다 네가 능력이 좋아서, 너를 붙들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냐. 우리가 잘못을 인정할 테니 제발 돌아와라, 권 하사!"
"오호라, 이게 누구신지요? 중대장나리 아니신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중대장님이 이러실 줄 몰랐습니다. 제 꿈이 뭔지 아시죠? 제가 제대 후에 뭐 하려고 했는지 아시는 그런 분이 이런 만행을 저질러요! 모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봐, 권 하사! 나 대대장이야, 대대장! 모두 내가 부덕해서 생긴 일이니 어서 복귀하게. 모든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어서 복귀해! 그리고 자네 친구 일도 잘 해결될 거야. 그 친구 부모님들이 자네 돈을 마련해준다고 했어. 그러니 제발 이성을 찾고 돌아오게!"
권혁은 대대장의 말에 내심 가슴이 찔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대장에게는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시내에 외박 나갔을 때, 미군 애들하고 시비가 붙어서 레인저 놈들 몇을 병원에 보냈을 때도 그 당시에 대대장이 직접 나서서 겨우 화를 면하게 해주지 않았는가. 어느 날인가 빨래를 하다가 우연히 마주친 대대장에게 권혁이 그때 너무 고마웠다고 진심으로 감사를 드렸지만, 대대장은 고작 한다는 말이,
"됐어, 이 징그러운 놈아! 제대할 때까지 더 이상 사고나 치지 말어!"
그게 전부였다. 그때 정말이지 찔끔하고 눈물이 날 뻔했다. 그 후로 몇 번 큰 사고를 쳤지만, 그때마다 대대장이 직접 나서서 바람막이가 되어주었다. 그 덕분에 하사를 달고 제대를 기다릴 수 있었지, 그가 아니었다면 벌써 한참 전에 영창 신세였을 것이다.
그런 대대장이 저렇게 절실하게 부탁을 하고, 자신의 돈 문제도 해결됐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죄 없는 전화 부스를 주먹으로 두들기던 권혁이 뭔가 결심했는지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정말 아무 책임도 묻지 않는 겁니까?"
"그... 그럼! 당연하지! 어디야? 우리가 마중 나가지."
"아... 니오. 됐습니다. 후문에나 연락해놓으십시오. 후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잠시 후, 대대장실에서는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들 기쁨에 겨워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까지 했다. 대대장만이 지휘봉을 움켜잡은 채 소파에 앉아서 한숨만 쉬고 있었다.
한적한 산속에 위장해놓은 나뭇가지와 수풀을 치우고 권혁은 시동을 걸었다.
처음 나올 때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다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아까운 자신의 청춘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사실 권혁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가득한 불운한 청소년기가 있었다. 그에게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추억이나 소년시절의 즐거움보다는 지옥을 넘나드는 군사훈련의 연속인, 지옥 같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좀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그는 8살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아왔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아버지란 작자로부터.
갑자기 아버지의 기억이 떠오르자 권혁은 생각하기 싫은 듯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권용태' 혹은 '붉은 이리'라고 불린 그의 아버지는 바로 프랑스 외인부대(레종 에트랑제)에서 특수임무대 CRAP에 소속된 자였다.
권혁의 어머니는 그를 처음 파리에서 보고는 한눈에 반했다고 했다. 그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이며 낭만주의자라고,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몽롱한 눈빛으로 그리워하시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머니에게 국한된 이야기였다. 권혁 자신에게는 아버지란 악마보다 더 가까이 하기 싫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등산을 가르쳐준다는 명목 하에 산에 끌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등산이 아니었다. 나뭇가지로 불 지피기부터 독버섯 구분하기, 산 지형 파악하기 등 일종의 생존훈련이었다.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는 지리산 일대부터 시작해서 태백산맥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생존훈련을 받아야 했다.
남들은 방학을 맞아 자기개발을 한다니, 미래를 위해 뭘 배운다니, 아니면 여자친구를 만들어서 로맨스를 경험한다느니 했지만, 그 시각, 권혁은 숲속에서 치열한 군사훈련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일대일 대련을 할 때였는데 정말 이 아버지란 작자는 권혁을 죽을 정도로 혹독하게 다뤘다. 허벅지 깊숙이 군용 나이프를 박아 넣은 다음, 비명을 지르는 자신을 냉정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면서 2시간 안에 지정한 위치까지 도착하라고 말 한마디 던지고는 혼자 가버렸던 것이었다.
그렇게 훈련을 받는 동안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라는 사람의 표정이 바뀌는 것은 그 지옥 같은 훈련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볼 때뿐이었다.
그렇게 방학 때가 되면 나타났다가 또다시 부대가 있는 외국으로 떠나고는 했다.
권혁은 아버지가 너무나 두려웠다. 아니,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없는 시간이 행복하고 좋았다. 그런 아버지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어머니의 인생이었으니까 말이다.
돌아가시던 그 순간까지 아버지를 사랑했노라고 말했다. 권혁의 모친상은 초라했고, 역시나 그 자리에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권혁은 군에 입대했고 아버지를 보지 않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랬던 권혁을 허탈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가 단기 하사를 달았을 때였다. 어느 날 전사 통보가 온 것이다. 아버지의 동료라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왔고, 권혁은 불어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대충 분위기로 파악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아버지는 화장해서 어머니의 유골이 뿌려진 외가 마을 강가에 뿌려졌다. 그날 유골을 뿌리는 강가에서 왠지 모르게 아버지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권혁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장례가 끝나던 날, 아버지의 동료 중 한 사람이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피가 묻은 베레모와 수표 1장을 건넸다. 그때만큼은 권혁도 이상하게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한밤중의 숲길이어서 앞도 잘 보이지 않는데, 왜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는지, 정말 재수 없는 하루다.
숲길을 빠져나온 권혁은 국도를 타고 부대 후문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어쨌든 빨리 부대에 복귀해서 무사히 제대를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자신의 필생 소원인, 제대 후에 대학가에 근사한 바(Bar)를 차려서 그동안의 청춘을 보상받겠다는 중차대한 염원을 떠올리면서 기운을 냈다.
그러나 하늘은 그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시각, 그가 달지차를 몰고 부대로 복귀하는 중, 그의 머리 위에선 전투기 1대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김영후 소령은 지금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무사고 비행 기록이 오늘을 마지막으로 끝이 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 비행은 처음부터 꺼림칙했다. 더구나 오늘은 그의 비행 일정이 아니었다. 동료 비행사가 집에 우환이 생겨서 대타로 나서게 된 것인데, 정상적인 야간비행이 아니고 국방연구소에서 개발한 무슨 플라즈마 폭탄을 시험 발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타게 될 F-4E 팬텀에 달라붙어서 폭탄을 장착하는 것을 보면서 왠지 오늘 비행이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자신의 예감이 들어맞을 거라고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현재 고도가 계속 하락중입니다. 기체 상승 불가! 탈출하겠다!"
"안 됩니다! 김 소령, 듣고 있습니까? 전 국방연구소의 남 박사입니다. 지금 이대로 기체가 추락하면 불안정한 상태의 플라즈마 폭탄이 연쇄 폭발합니다. 김 소령님이 타고 계신 기체에 실린 양이면 강원도 일대는 쑥대밭이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당신 결정에 달렸어요. 잘 들으세요! 오른쪽에 있는 컨트롤 박스의 버튼을 눌러서 게이지가 이백이 될 때까지 탈출하면 안 돼요. 게이지가 이백이 되면 다시 한 번 버튼을 눌러요. 그러면 핵폭발은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에게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어요, 김 소령!"
리시버에서 들리는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에 김영후 소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빌어먹을! 왜 하필 나야!"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시를 받은 대로 컨트롤 박스를 열어 붉은 버튼을 눌렀다. 게이지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1000... 900... 800... 700.......
비행기 고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양 흑점의 대폭발로 계측기 종류에 이상 작동이 생길 수 있기에 비행이 될 수 있으면 제한된 상태였지만, 국방연구소에서 무리하게 세운 계획 때문에 아까운 비행기와 조종사를 잃게 생긴 강민수 중령은 관제탑에서 피를 말리고 있는 중이었다.
벌써 고도가 탈출 제한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김 소령! 어서 탈출해! 어서!"
"치이익~ 미안합니다, 강 중령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저녁 먹으러 못 갈 거 같다고요... 다음에 소주 한잔 하자던 약속도 못 지킬 것 같네요... 그럼 필승!"
"야! 야, 임마! 김 소령, 이 새끼가!"
"이미 탈출 고도를 넘었습니다, 강 중령님!"
"이런... 이게 아닌데... 우아아아악!"
관제탑 안에서 사랑하는 후배를 잃은 강민수 중령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김 소령은 고도계가 600미터 이하가 되자 이미 탈출을 포기했다. 최대한 인가가 없는 곳으로 떨어져서 피해를 최소화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안해... 여보. 사랑해, 얘들아... 안녕......."
김 소령의 감긴 눈에는 작은 이슬이 맺혀 있었다.
부우웅!
야심한 국도변을 짚차 1대가 어둠속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차창 속으로 비친 모습은 왠지 슬퍼 보이는 중년의 장군과 운전을 하고 있는 젊은 대위였다.
"김 대위! 오늘은 왠지 한잔 하고 싶은데, 어떤가?"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김 대위가 잠시 자신의 상관을 바라보더니 핸들을 꺾었다. 국도에서 벗어난 지프가 대대 훈련장 쪽으로 이동했다.
헤드라이트가 숲길을 비출 때마다 중년 사내의 얼굴에는 희비가 교차했다.
책상을 쓰다듬는 사내의 손길이 무척이나 아쉬운 듯이 한참을 천천히 움직였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듯이 구석구석을 살피더니 문을 열기 전에 잠시 뒤돌아서 모든 것을 두 눈에 담아두려는 듯이 바라보았다.
깊이 숨을 한번 토해낸 후 문을 열었다.
"아... 아니, 이 사람들이......."
"전체 차렷! 사단장님께 경례!"
"충성!"
"이런 사람들하고는. 지금이 몇 신데 퇴근들도 안 하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건넬 때마다 조금씩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건만, 숨소리 빼고는 들리는 것이 없었다.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왜 사단장님이 희생되셔야 합니까? 왜요?"
작전처 박 소령의 외침에 장내의 분위기는 더 처연해졌다.
"그만하게!"
"하지만......."
"그만하라는 말 안 들리나? 장군님도 참고 계시는데 자네가 뭐라고 나서는 건가!"
"저는......."
"그만하게. 나는 괜찮네."
"죄송합니다, 사단장님. 모든 게 제 잘못......."
"아닐세. 내가 부덕해서 그런 거지, 자네 탓이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말게. 어쨌거나 모두에게 짐만 남기고 가는구먼. 새로 부임하는 사단장과 합심해서 대한민국 최우수 전투사단으로서의 명성을 계속 지켜나가길 빌겠네."
사단 CP 정문으로 나오자 1호 짚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단장의 운전병인 김일준 병장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김 병장, 제대가 언제라고 했지?"
"두 달 뒤입니다!"
갈라진 목소리와 붉어진 눈가가 애써 슬픔을 참고 있음을 드러냈다.
"두 달 뒤라... 이것 참, 자네보다 내가 먼저 제대하는구먼. 허허! 자네, 제대 전에 시내에서 밥이나 한 끼 하려고 했는데, 애석하게 됐군."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운전병의 어깨를 두드려준 사단장이 탑승하자, 김 병장은 평소처럼 운전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비서관인 김재덕 대위가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며 김 병장을 돌려보냈다.
사단장의 지프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돌아서 내려가자 정문까지 배웅 나온 장교들이 모두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들을 뒤로하고 짚차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형석 장군. 대한민국 육군의 독보적인 전술 전략가이자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추진력으로 수많은 일화를 만들어낸 훌륭한 장군이었다. 그가 맡은 00사단은 전투사단으로 최우수 전투력과 신화 같은 훈련성과로 육군 내 전설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뼛속까지 군인인 사람이다. 그만큼 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군에서 떠나게 만든 일은 어이없게도 일개 사병을 구타한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면서, 결국은 이렇게 옷을 벗게 되고 만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다소 문제가 있던 직할대 사병 1명이 술에 취한 채 근무를 서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 장군이 지휘봉으로 머리를 때리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돌면서 이슈화되었고, 평소 나 장군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사람들의 공작이 보태져서 한창인 나이에 군복을 벗게 된 것이다.
그는 전술가로서, 군인으로서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사교적이지는 못했다. 지독한 독설가였으며 전투적인 사람이었다. 당연히 정치적이지 못했고, 정치적인 군인들을 경멸했다.
그는 서슴지 않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독설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은 수많은 적을 만들었으며, 그 적들은 먹이를 문 이리처럼 때마침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고 철저하게 그를 망가뜨렸다.
"후~ 그래, 억울하군."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단장님?"
"아... 아닐세. 어서 가세 ! 오늘 할머니 집이 문을 열었나 모르겠군. 너무 늦은 거 아닌지......."
그 시각, 바로 짚차 앞에 있던 권 병장은 이제 모든 일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하면서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도 뒤에 싣고 있는 짐이 좀 신경이 쓰여서 전술 훈련장 길을 가로질러서 후문으로 가고 있었다. 괜히 국도로 가다가 검문이라도 걸리면 문제가 되니까 나름대로 신경을 쓴 것이다. 오후부터 찌푸렸던 날씨가 결국은 빗줄기를 퍼부었다.
'뭐야? 이 시간에 이 길로 오는 차가 다 있네?'
백미러를 통해서 뒤쪽에서 차량이 오는 것을 확인한 권혁 하사는 긴장이 되었다. 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사단이 나서서는 안 되었기에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지프는 권혁을 지나쳐서 앞으로 나갔다.
'휴! 심장 떨려~'
긴장이나 풀 요령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든 권혁이 라이터를 켰다. 그러자 온통 세상이 환해지는 게 아닌가?
"어렵쇼! 뭐가 이리 밝아!"
순간, 고개를 치켜든 권혁은 그것이 라이터 빛 때문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전면에서 엄청나게 밝은 빛 무리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작동했는지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빗줄기를 씻으려고 와이퍼가 쉴 사이 없이 움직였다.
하지만 빗줄기 보다 거대한 빛무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번쩍!
콰콰쾅!
천지사방이 흔들리고 산이 없어지고, 땅이 뒤엎어졌다. 한 공군 조종사가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곧 언론에서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보여준 김 소령에 대한 칭송으로 도배했고, 한국 공군의 문제점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이내 점점 잊혀갔다.
그 무렵, 사고 지점 근처의 한 부대에서도 초라한 영결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바로 권혁 하사의 부대장(部隊葬)이었다. 너무나도 초라하고 슬픈 장례식은 조촐하고 빠르게 처리되었다.
특히 부대 인사계는 부모도 아닌데, 곡을 하는 그 소리가 얼마나 슬펐는지 주위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물론 그가 그렇게 슬프게 눈물을 흘린 것은 권혁이 저질러놓은 일을 수습하려고 하니 억장이 무너졌기 때문이었지만, 부대 간부들 빼고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그렇게 조용히 세상에서 한 사람이 사라져갔다, 이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