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작되던 날
수는 또다시 해가 중천에 뜨고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래도 게으름이 몸에 밴 것 같았다. 그러나 제 품에 파고든 이의 숨결이 따스하니, 이리 사는 것도 나쁘지 않노라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다 큰 몸을 웅크리고, 제 품에 파고든 이의 등을 두드리며 그만 떠날 시간이라 속삭였다.
끼니를 든 후엔 곱게 갠 붓을 들어 서신을 써 내렸다. 그렇게 대신관에게 보낼 서신을 준비했다. 신아는 붓글씨를 써 내리는 스승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선을 인지한 수가 왜? 하고 물으니, 신아는 그저 스승을 따라 미소 지었다.
짧은 서신을 보낸 후에, 수는 수산으로 단숨에 날아갈 생각이니 무복을 입는 게 어떠하냐 제안했다. 그에 신아도 무복을 가져오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허리끈이 손바닥만큼 넓은 화국의 무복이었다. 큰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묶고, 흘러내리지 말라 끈을 둘렀다.
수는 새삼 저는 파랗고 신아는 붉은 무복을 물끄러미 보다 이유가 있느냐 물었다. 신아는 수산을 대표하는 색이 아닙니까, 라고 답했다.
그래? 하고 스승이 되물으니, 사실은 스승님다운 색이라 골랐다고 답했다. 수는 크게 웃으며 너도 적색이 잘 어울린다며 눈을 찡그렸다.
해가 질 때 즈음, 두 신은 서쪽 땅을 향할 준비를 마쳤다. 수는 시선을 올려 제 옆에 선 신아를 보았다. 그러다 아, 하고 잠시 두고 온 게 있으니 기다리라며 탑 안으로 돌아갔다.
돌아온 스승께, 신아는 챙길 게 있으셨냐고 물었다. 수는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옥이 장식된 비녀를 내보였다. 소중한 건데, 큰일 날 뻔하지 않았어.
수가 웃으니, 신아는 숨을 죽였다. 이내 허리를 숙여 스승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스승님, 하고 속삭이니, 수는 응? 하며 웃었다.
스승이 앞장섬에 신아는 얌전히 그 뒤를 따라 도약했다. 두 신의 도약에 세상은 크게 일렁였으나 순식간에 허공에 섞여 존재를 감추었다.
사뿐히 날아가는 스승을 좇으며 신아는 성체를 갈망하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난감한 듯 웃으며 제게 검을 가르치던 순간부터, 기를 알려 주겠노라 입을 맞추던 스승이 머리를 스쳤다.
이제는 이 세상에서도 내로라하는 장인이 만들어 낸 장신구를 선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그 자그마한 아이가 선물한 비녀를 이리도 소중히 여기신다.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스승을 쫓았다. 나란히 걷지 않아도 좋았다. 스승님은 앞서 가시고, 그 뒤를 지키는 건 언제나 저뿐이면 되었다.
어스름 달빛 아래, 수는 신아와 함께 수산의 결계 앞에 섰다. 결계를 거둠에 일족의 의의가 없음을 전달받았으니 이제는 온전히 제 몫의 일이었다.
허공에 묘하게 불투명하게 일렁이는 기를 훑었다. 저도 모르게 신아의 손을 쥠에 신아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두려우십니까?”
스승의 분위기가 차분히 내려앉으니 신아도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뭐가 두려우시냐 묻고 싶었으나, 스승께서 매달리듯 제 손을 움켜쥐심에 조용히 입을 닫았다.
수는 팔을 들어 결계에 손끝을 얹었다. 그렇게 가볍게 움켜쥐듯이 손을 쥐곤 신아를 올려 보았다. 시선을 내어주는 신아에 고동치는 심장이 차츰 안정됨을 느꼈다. 그렇게 다시금 시선을 틀어 수산의 결계를 올려 보았다.
제 어머니께서는, 정인을 죽인 자식을 평생 원망하며 사셨다. 제 자식이 수선이 된다 확신한 것처럼. 제 아비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태어난 악인이라 여기며 증오하셨다.
그러니 꼭 스물셋을 채우고 죽어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었노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저는 기어이 살아서 수선이 되지 않았던가. 그에 기인한 기묘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수선으로서 행동하자면 그 죄악감이 더했다.
“스승님.”
신아의 부름에 까맣게 암전되던 시야가 다시금 초점을 되찾았다. 대답하듯 고개를 들자 신아는 팔을 들어 스승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행동에 책임을 지려 하지 마세요. 스승님께서는 제 청을 들어주셨을 뿐입니다.”
수는 물끄러미 신아를 올려 보았다. 그러곤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다. 걱정을 끼쳤는가. 그리 생각하며 제 안의 어둠이 물러남을 느꼈다.
시선을 바로 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허공을 그러쥔 손을 느리게 끌어내렸다. 그에 온 숲이 물에 빠지듯 일렁이며 흔들렸다. 제 온몸에 차오르는 짙은 힘을 느꼈다. 넘치듯 흘러나오는 힘에 옷자락이, 머리칼이 일렁이며 수선의 권능을 알렸다.
짧은 침묵 뒤, 단숨에 끌어 내리듯 팔을 당겼다. 수선의 손짓에 먹먹하던 공기가 가시고 크게 바람이 불었다. 끝을 모르고 자라난 나무들이 나뭇잎 사각대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바람이 잦아들고, 수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밤의 고요를 되찾았다. 두 일족을 갈라놓은 수산의 결계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신아는 천천히 가라앉는 스승의 머리칼을 두 눈에 담았다. 안타깝게도 제가 살아 있으니, 아무도 보지 못할 신의 모습이었다.
수는 한 걸음을 떼며 신아의 손을 당겼다. 그에 신아가 스승을 쫓아 수산에 발을 디뎠다. 신아가 온전히 수산에 발을 붙임을 확인하니, 수는 옅게 미소 지으며 신아를 올려 보았다. 그 웃음에, 신아도 스승의 손을 당겨 제 뺨을 감쌌다. 따스한 손에 얼굴을 묻으며 나른한 숨을 쉬었다.
“춥진 않… 응?”
수는 제 어깨 위에 얹히는 가벼운 무게감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 순간 내려앉아 작은 머리를 비비는 참새를 발견하곤 웃음을 뱉었다.
“이 시간에 돌아다니네. 어떻게.”
억, 수는 저를 덮치듯 달려드는 동물들에 그만 걸음을 휘청였다. 몸통만 한 크기의 커다란 토끼부터, 갓 젖을 뗀 듯 보이는 작은 흰 멧돼지. 팔뚝만 한 굵기의 비단뱀과 털이 북슬북슬한 여우, 터를 잡아 백 년을 산 고라니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몸을 비볐다.
그에 신아가 스승을 받쳐 들고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오래도록 수선을 그리워한 수산의 영물들은 몸을 떨면서도 수선의 품에 파고들어 그 온기를 좇았다.
“하하!”
수는 바닥에 주저앉아 바들대며 온기를 쫓는 동물들을 다독였다. 털이 보드라우니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 좋았다.
“왜 거기 있어? 너도 이리 와.”
손을 까딱이며 나무 뒤에 숨은 백호를 불렀다. 경계를 세운 백호는 수선의 부름에 연신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널 어려워하나?”
수는 동물들이 신아의 눈치를 살핌을 느끼곤 그를 올려 보았다. 신아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백호가 고개를 숙여 수선의 손길을 그리니, 수는 웃으며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를 보다 못한 신아가 스승을 안아 번쩍 일으켰다.
“억…!”
“밤이 늦었습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셔야지요.”
“그렇지… 근데, 꼭 이렇게 안아야 하나…? 누가 볼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어디로 가면 될까요. 그리 묻는 신아에 수는 별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길을 알려 주려는 듯 손을 들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잠시 몸을 움찔댔다. 본래는 신아와 함께 별천지에 들 생각이었으나 수는 순간적으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고개 숙인 스승이 나설 방향을 가리킴에 신아는 스승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수선이 멀어지자 꼬리털이 북슬북슬한 여우 한 마리가 발 아래 낑낑댔다. 그에 신아가 고개를 돌려 눈을 찌푸렸다. 깨갱대며 꼬리를 내리는 짐승들은 언제 또 볼지 모르는 주인에 한참을 끙끙대며 울었다.
수산의 꼭대기, 그 중심에 위치한 수련원을 둘러싼 민가의 끝. 골목골목을 지나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폐가에 도착하자 신아는 조심히 스승을 내려 두었다. 딱히 잠자리를 가리는 것은 아니나 제 스승을 눕히기 싫을 정도로 스산한 가옥이었다.
민가의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신아는 무언가를 좇는 듯 보이는 스승에 기분이 묘했다. 저는 모르는 길이니, 스승께서 회상하시는 모든 것은 제가 모르는 스승의 과거였다. 제가 없는 스승의 어린 시절이었다.
수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 허물어 가는 집을 이리저리 살폈다. 사랑방으로 추정되는 곳을 기웃거렸다가, 온기가 가신 지 오래돼 보이는 아궁이도 확인했다.
집 뒷마당 구석구석을 훑어보다, 낡아서 다 뜯어진 작은 꽃신을 발견하곤 눈을 흐렸다. 그렇게 손바닥만 한 작은 신을 주워 대청마루 밑에 조심히 내려 두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집에 들어가 한 번도 문턱을 넘어 본 적 없던 방을 흘끔대다, 걸음을 돌려 본채와 조금은 떨어져 있는 창고나 다름없는 방문을 열었다.
끼익 대는 소리와 함께 녹슬어서 너덜거리는 경첩이 덜걱였다. 어두운 내부에, 먼지가 부옇게 쌓여 나는 냄새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작은 집 한 바퀴를 빙 돌고선 다시금 신아를 찾았다.
스승님께서 사시던 곳인가. 폐가와 다름없는 집을 훑어 내리던 신아는 마당 한구석에 꽂혀 있는 검집을 보곤 눈을 찌푸렸다. 스승께서 저를 부르시는 소리에 시선을 거두었으나 추측되는 것이 있으니 상상하기가 못내 불쾌했다.
수는 신아를 끌어다 집 마루에 앉혔다. 신아는 그 이끎에 따라 가만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조금 들떠 보이는, 어린아이 같다 느껴지는 스승을 보았다. 크게 심호흡한 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문을 열었다.
“여긴 내가 살던 집이야. 다른 곳도 있으니 장소를 옮겨도 괜찮아.”
“…스승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수는 제 뜻을 따르겠다는 신아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데려왔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곳에 신아를 재울 순 없었다. 어디로 가면 되냐는 물음에 이곳을 떠올린 제가 우스웠다. 나는 아직도 이 집에 매여 있는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다.”
그렇게 신아를 일으키려다 말고 눈을 흐렸다. 지금 이 집에, 신아가 앉아 있다. 그 사실이 저를 어린 시절로 잡아끌었다. 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시선을 내렸다. 우글대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내가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만 하고 가도 될까…?”
“…그럼요.”
신아는 스승이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해 보이는 스승을 안심시켰다. 그에 수가 흐트러진 표정을 감추어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아는 가만히 스승을 지켜보다, 스승께서 제 시야에서 사라짐에 눈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 밖으로 나서실 줄은 몰랐던 터라 그를 쫓아 발을 떼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에 걸음을 옮기는데, 몇 걸음 떼기 무섭게 대문 사이로 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아는 긴장한 듯 보이는 스승에 걸음을 멈추었다. 제 발치를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드는 스승께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을 하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하며 시선을 마주하는 스승에, 신아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흐리게 웃는 낯이 꼭 아이가 우는 것처럼 보이는 탓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좁은 마당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반겨 주지 않으니, 죽은 듯 살았던 과거에 단 한 번도 뱉지 못한 말이었다.
신아는 짧은 숨을 뱉으며 탄식했다. 살랑이는 바람과 함께 적막이 폐가에 얽혀들었다. 이게 하고 싶었어, 수는 말갛게 웃으며 위태롭던 낯을 지워 냈다.
신아는 천천히 걸어, 스승 앞에 섰다. 민망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짓는 스승에 차분히 시선을 내렸다.
‘나는 가족이 없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어.’
신아는 가족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승의 과거가, 매워지지 않는 공허가 저를 안는 계기가 되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송구하게도, 스승께서 안은 어린 시절의 아픔이 참으로 감사했다.
그러나 불안한 모습을 직접 마주하니 감상이 달랐다.
“…다녀오셨습니까.”
신아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스승을 안았다. 힘을 주면 그대로 부서져 사라질 것 같았다.
수는 따뜻한 품에 잠시 눈을 깜빡이다, 응, 하고 답하며 눈을 감았다. 눅눅하게 얼룩진 기억 속 집에, 처음으로 생긴 따뜻한 추억이었다.
* * *
수는 신아의 손을 쥐고 수산에 올랐다. 아주 익숙한 길이었으나,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크게 달랐다. 그 새삼스러운 사실에 웃음을 흘렸다.
달빛이 스며든 수산은 한밤중에도 두 신의 얼굴을 밝혔다. 빛을 받은 자는 둘이나, 서로는 그를 알지 못했다. 그저 제 눈앞에 반짝이는 존재를 머리에 새겼다.
수선의 존재 아래 꽃잎이 만개한 곳. 오직 수선만의 공간. 별천지 입구에 다다르자 수는 몸을 돌려 신아를 올려 보았다. 조심스레 신아의 손을 당김에, 멈추어 선 신아가 별천지에 발을 디뎠다. 그와 동시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꽃잎은 사락대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수선의 허락에, 산은 기꺼이 별천지에 화선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
수는 잠시 뒤를 돌아보다, 다시금 신아를 올려 보았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시선을 내어 주는 이가 잊어버린 꿈 같았다. 수는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수선된 입장에서 이리 평하긴 우스우나, 제 앞에 선 존재가 꼭 이 땅의 주인처럼 느껴졌다.
신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려 스승을 눈에 담았다. 꽃들 사이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에 팔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저를 안아 드는 신아에, 수는 별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안아 들지 말라는 말랑한 경고에 신아는 눈을 감고 예, 하고 답했다.
수는 신아와 함께 큰 벚나무 아래 자리를 잡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수산의 별천지. 수가 수선으로서 눈뜬 곳이자, 사라진 신아에 절망하고, 반드시 찾아내겠노라 결심한 곳이기도 했다.
스승이 생각에 잠기니, 신아는 조용히 스승의 머리칼을 풀어 내렸다. 머리칼을 건드리는 손짓에 수가 생각에서 빠져나와 웃음을 흘렸다.
“잠깐 기다려 봐.”
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아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곤 붉은 머리띠를 풀어내고, 곱게 쓸어 묶은 머리를 풀어냈다. 그에 신아가 고개를 젖혀 스승을 저지하려 들었다.
“스승님.”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수는 고개를 숙여 신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다음 부드럽게 그 턱을 쥐어 내렸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신아가 눈을 깜빡이다 아, 하고 시선을 내렸다. 저를 다루는 법을 알고 계시니 가슴이 일렁였다.
“싫어?”
“…아니요.”
전과 달리 얌전히 머리를 내어 주는 신아에 수가 웃음을 흘렸다. 고분고분 제 말을 따라주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없었다.
수는 손 빗질로 결 좋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손에 닿는 감촉이 좋으니 저 좋은 일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제게 몸을 맡긴 신아가 못내 불편해 보이자 장난기가 일었다. 편하게 있어도 되는데. 다 자란 신아는 은근히 도움 받는 일을 어려워했다.
“어쩜, 머리칼도 이리 고운지…. 절경의 폭포수가 따로 없구나.”
“…….”
“풍채는 또 어떠하고. 누가 볼까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을 테니 원.”
“스승님….”
“목소리도…!”
듣다 못한 신아가 눈매를 좁히고 몸을 돌리니, 수가 웃으며 신아의 낯을 쥐었다. 이리저리 꼼꼼히 살피곤, 감탄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주억댔다.
“저런. 그중 제일 잘난 건 역시 어둠도 밝히는.”
신아는 스승의 장난을 이기지 못해 그 어깨를 붙잡아 얼굴을 들이 밀었다. 입을 맞추려 든 것이나, 수는 손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입맞춤이 저지당한 신아가 눈을 찌푸리자 수는 하하 웃으며 코를 찡그렸다.
“안 돼.”
단호한 목소리지만 신아도 쉬이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혀는 내지 않겠습니다.”
“못 믿겠다.”
“정사를 꿈꾼 것은 아닙.”
수가 다른 손으로 신아의 입을 막았다. 그러면서 웃는 낯으로 눈을 찡그렸다.
“보는 눈이 많아.”
그 말에 신아가 눈을 찌푸려 주위를 둘렀다. 묘한 시선을 느껴지니, 틀림없는 수산의 영물들이었다. 신아는 제 입을 막은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다가오지 못하는 것을 보아 주제는 아는 듯싶으나, 감히 저를 상대로 질투를 드러내니 우스웠다.
“한없이 다정하셨나 봅니다.”
“…뭐가?”
신아는 제 머리 위에 스승의 손을 얹었다.
“쓰다듬어 주세요.”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수가 눈을 끔뻑였다.
“걱정하시니, 저는 만지지 않겠습니다.”
아아, 수는 아이의 어리광에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의 쓰다듬을 받는 신아는 시선을 돌려 보란 듯이 영물들을 흘겼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그를 알 리 없는 수는 어떻게든 제게 닿으려 하는 신아에 말간 웃음을 토했다.
“스승님께선 제가 제일 좋으시죠?”
“하하, 갑자기?”
“지금은 아닙니까?”
수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몇 번 답해 준 것 같은데, 왜 또 묻는지 알 길이 없었다.
“누굴 좋아한 게 너밖에 없는데….”
말하지 않았었나?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멀찍이 수풀에 숨은 영물들은 충격받은 듯 크게 일렁였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으니, 신아는 방긋 웃으며 스승의 품에 안겨들었다.
“억.”
푹신한 풀밭에 엎어진 수는 다급히 그를 밀어 내려 들었다. 매번 분위기에 홀려 장소를 불문하고 정사를 치렀으니 불길함이 앞선 탓이었다. 그러나 신아는 얌전히 스승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제 스승을 원하는 이들 앞에서 스승의 맨 살을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저도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가 눈을 끔뻑였다. 이내 제가 앞선 걱정을 했노라 이마를 긁적이며 신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수는 제 몸을 누르는 무게에 끙, 하고 시름하다가 시선을 들어 벚나무를 올려 보았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처음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게 꽃이 만개해 있었다.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어섰으나, 지금은 함께 이 자리에 함께 누워 있다. 묘한 기분에 젖어 입을 열었다.
“신아야.”
그 부름에, 신아가 답하듯 스승의 어깨에 고개를 비볐다. 수는 간지러운 감각에 웃음을 흘렸다.
“…아까는, 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어.”
신아는 잠시 눈꺼풀을 들었다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참으로 무방비하던, 꼭 어린아이 같던 스승의 낯이 떠오른 탓이었다.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는 그런 신아의 반응에 옅게 웃었다. 궁금해도 궁금하다고 묻지 못할 테니, 제가 직접 이야기해 주는 편이 옳았다. 손을 들어 느릿하게 신아의 등허리를 다독였다. 이제는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내 어머니께선, 내 존재를 끔찍하다 여기는 분이셨단다.”
수련자. 그 후보에 오른 자가 있거든, 많은 이들이 그 제자로 자식을 올리기 위해 등단 전부터 뇌물을 보내왔다. 그러나 수는 수련자가 그런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알지 못했다. 제 존재를 꽁꽁 감추는 어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승의 말에 눈앞이 어두워진 신아가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수는 신아가 일어나지 못하게 그를 단단히 안았다.
“그 누구도 스승님을 그리 여길 순 없습니다.”
맹목적인 애정이 묻어나는 말에 수가 웃음을 흘렸다.
“허나 신아야. 그 시절 내게 어머니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를 잃으면 내겐 정말 아무도 없었거든.”
“해서 죽음을 강요받으신 겁니까.”
신아의 말에 수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흐리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처음으로 입 밖에 꺼내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건 온전히 내 소원이었다.”
또 한 번 신아가 몸을 일으키려 드니, 수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붙잡았다.
“아니야. 말 안 할 테니 그냥 이대로 있자.”
스승의 속삭임에, 신아가 스승의 품에 파고들어 고개를 묻었다. 듣는 저보다, 말하는 이가 괴로움을 모르지 않았다.
“…괴로우십니까.”
“어떤 게?”
“회상하자면 말입니다….”
신아가 물어오니, 수는 두 눈을 감았다.
“허나, 이젠 다 지난 일이란다.”
수는 제 어미의 낯을 떠올렸다. 냉랭하고, 한없이 위태로운 분이었다.
* * *
나는 절대 수선이 되지 않을 테다. 그리 결심한 날은 몰래 집을 나섰다가 수련자 후보가 어떤 대우를 받는지 보게 된 날이었다.
어미 몰래 집을 나선 날. 채 열 살도 되지 않던 어린 수는 수련자 후보가 사는 집 대문 앞에 줄줄이 늘어선 사람 행렬을 목격했다. 자식을 수련자의 제자로 들이기 위해 온갖 뇌물이 즐비해 있었다. 저마다 온갖 진귀한 물건을 짊어지고, 안 된다 소리치는 시종에게도 돌담에 붙어 대감을 만나고 싶다 빌고 있었다.
그를 보는 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저도 수련자 후보지 않은가. 저희도 형편이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에 어린아이의 마음이 부풀었다. 저 중 보따리 하나만 가져도 일 년은 거뜬할 것 같았다. 그러니 곧장 저도 수련자라며 지나다니는 행인 손을 붙잡고 간절히 내뱉었다.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어 입지 않은 어린아이가 호소하니, 그를 귀담아들을 이는 없었다.
그러나 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저도 수련잡니다. 저도 수련자예요. 그리 외치고 다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어미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혔다. 말없이 외출했지만 큰 수확이 있었으니 벌이 두렵지 않았다. 분명 기뻐하실 거라 생각했다.
제가 수련자이니, 장작이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저는 수선의 후보이지 않냐 벅찬 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어미는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나 보였다. 왜? 수는 기뻐하지 않는 어미에 눈을 흐렸다.
또 밉보였다. 우울해진 수는 독 탄 밥을 싹싹 비워 먹어 예쁨받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어미는 꼬박 보름간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보름간, 수는 제 몫의 밥을 차려 먹고, 어미 몫의 밥을 방문 앞에 내려 두었다. 배곯은 어미가 그 안에서 죽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없는 쌀알을 눌러 담아 어미의 밥공기를 펐다. 몰래 나가는 게 아니었는데, 매일 밤 후회했지만 들어줄 이는 없었다.
그렇게 선대 수선의 기일이자 아비의 기일. 제가 태어난 날. 수는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눈 쌓인 마당을 쓸었다. 고작 여덟 살인 이가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꼼꼼히 집 안을 돌았다.
아궁이를 닦고 오던 길에, 수는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의 틈새를 보았다. 엿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 방 안에서 제 어미가 목이라도 맸을까 초조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결국 기척을 죽이고, 조심스레 방 안을 엿보았다. 그렇게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한참 뒤, 수는 조용히 걸음을 돌려 제 방으로 돌아갔다. 빗자루를 제자리에 두는 것도 잊은 채, 쿵쾅대는 심장을 붙들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이를 물었다.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제 어미가 그를 끔찍이도 싫어하시니 습관처럼 몸에 밴 일이었다.
자꾸만 새는 울음에 결국 혀를 짓씹었다. 피가 터져 나오는 혀에선 비릿한 쇠 맛이 돌았다. 작은 아이가 파들대며 벽을 짚으니 수산의 짐승들이 창을 넘어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서러움에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에 몸이 차게 식어, 손발이 저릿했다.
방문 새로 훔쳐본 안에는 웃는 낯의 여인이 있었다. 시선을 거둘 수 없을 만큼 고운 낯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 한 번도 제게 웃어 주신 적이 없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수련했다. 미움 받지 않으려 애썼고, 가끔 제가 피를 토하면 기쁜 듯 웃어 주셨다. 그러니 나아지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 웃는 낯이 아니었다.
어두운 방 안에 어미의 웃는 낯을 어른댔다. 저는 그런 표정을 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노력이 무의미했다. 제가 잘나도, 못나도. 살아도, 죽어도 어미는 기뻐하지 않으실 테다. 저는 그 하나뿐인데, 그 웃는 낯이 보고 싶고, 그저 예쁨받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에, 끝끝내 인정받지 못할 제가 끔찍했다.
나는, 내 존재는 절대 기쁨이 되지 못하는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아이는 작은 몸을 웅크리고 끅끅대며 울었다. 혹시나 방 밖으로 울음이 새어 나갈까, 숨이 부족해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 온몸이 벌벌 떨려오니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노라 생각했다.
죽을지도 모른다. 그를 깨닫기 무섭게 몸을 일으켰다. 작은 손으로 눈물범벅인 낯을 덮어 숨을 골랐다. 제 어미는, 제가 여기서 죽어도 기뻐하시지 않을 테다. 제 존재는 어미께 어떠한 감흥도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슬퍼하실지도 몰랐다. 제 목숨은 아비에게서 온 것이 아니던가. 제게 남은 그 실낱같은 존재감이 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아이는 눈물범벅 된 낯으로 삶의 목표를 세웠다. 꼭, 수선이 되지 말아야지.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 최선이었다.
그렇게 되면, 어머니께서도 제게 웃어 주실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방 틈새로 보았던 낯으로, 그 시선이 닿는 것이 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제가 오해했노라고. 너는 수선이 되지 못하는, 그런 나약한 아이였노라며.
그러니 어린 수는 이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칼날을 쥔 손으로 피가 빠지고, 희게 질려 죽을 듯 비틀대면 어미의 낯이 환히 트였다. 그에 안심했다. 조금 기쁘기도 했다. 없는 존재가 되는 것보단 그게 더 좋았다.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그러나 어미는 제가 수련원에 등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죽으려 들었다. 산 것은 오직 저뿐이었으니, 이후 모든 삶이 허무했다.
열두 살이 되던 해, 모든 기를 깨우친 아이는 수산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수산의 결계를 넘을 수 없으니 절망했다. 저를 붙잡는 수산이 원망스러웠다. 저는 절대 수선이 되지 않을 텐데. 정말 맹세할 수 있는데.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살 이유가 없었다. 제 삶의 이유는 하나였으나, 어미는 죽어 세상에 없었다. 용서받기 위해 살았으나, 용서해 줄 이는 세상에 없었다.
수는 마른 낯으로 수목을 올려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 떨어지면 온몸이 부서져 죽을 것 같은 나무였다. 그곳에 오르면 수산의 정경이 한 눈에 보이리라. 수산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이 맞닿아 있는 곳이니 말이다. 하늘에서 보고 계실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발끝에 기를 담았다.
서툴고 요령 없는 도약이었으니 몇 번이나 떨어져 흙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기어이 수목에 올라 숨을 골랐다. 고개를 들고, 탁 트인 전경을 눈에 담았다. 멍하니 그를 보다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처음으로, 수목에 올랐다.
여기서 죽으면 되겠다. 그럼 한눈에 보실 수 있으실 테니. 생각을 마친 수는 살 각오와 죽을 각오를 다졌다. 그러니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가, 비좁은 방에 몸을 누였다. 허망한 삶에 생긴 뚜렷한 목표였다.
외로움이란, 삶의 일부였다. 한 번도 외롭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상하지 않았다. 버틸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수산의 연무제, 아비의 기일, 제가 태어난 날이 오면, 그날만큼은 끔찍이 외로웠다. 눈을 감으면 어미의 웃는 낯이 떠올라 버티기 어려웠다. 제가 안은 허무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미 잠겼노라 생각했는데,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날이 일곱 번째가 되던 날, 수는 신아를 만났다.
* * *
“스승님.”
회상에서 빠져나온 수가 정신을 차리곤 눈을 깜빡였다.
“우셔도… 괜찮습니다.”
아. 수는 제 얼굴을 더듬었다. 다행히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슬퍼 보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제가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 같아 미안했다. 신아는 아까 전 제 상태의 이유를 묻지 못할 테니, 직접 말해 주려 했을 뿐이었다.
신아는 스승을 안은 채 몸을 굴렀다. 그렇게 제 몸 위에 스승을 얹어 두었다.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이는 손짓에, 수는 신아의 몸 위에서 힘을 풀고 웃었다.
“…눈물이 나는 건 아니야.”
“떠올리지 마세요.”
“신아야.”
수는 손끝으로 신아의 눈썹을 갉작였다.
“나는 꼭, 죽고 싶었거든.”
신아는 스승의 올곧은 시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은 죽음이 아닌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그러니 탄식을 삼켰다. 제 스승께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저를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보세요, 전 수선이 안 되질 않습니까. 그리 말해 드리고 싶었다.”
“…스승님.”
“허나 신아야. 그보다 간절한 게 생겼으니, 하루하루가 꿈결이구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웃는 스승에, 신아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아를 마주 보고 앉은 수는 내려앉은 분위기에 짓궂은 낯을 보였다.
“무섭지? 꽤 무거운 마음이 아니야.”
“지난 일은 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될 거야.”
“허나…, 스승님.”
말을 멈추는 신아에, 수가 팔을 휘저었다. 분위기가 흐려짐은 원치 않았다.
“지난 일에 매여 있다니, 이해가 안 되지?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수는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신아의 낯에 드러난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다 지난 일이란다. 수는 서둘러 속삭였으나, 목소리가 떨려 와 제대로 뱉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당황하여 심장이 널뛰었다. 어찌 제 어린 시절에 신아가 죄책감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신아는 시선을 들어, 제 스승을 눈에 담았다. 그에 수가 시선을 내어 그 뒷말을 기다려 주었다.
“…그런 아픔이 없었더라면, 저는 스승님을 뵙지 못했겠지요.”
아, 예상치 못한 신아의 말에, 수가 눈을 흐렸다. 신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내렸다. 제가 없던 세상에서 아프셨을 스승님을 생각하면 가슴이 우글댔다.
“잊으셨으면 좋겠으나…….”
그러나 없앨 수 없음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저는 올곧은 마음으로 스승의 아픔을 위로할 수 없었다. 스승님과 저는 서로를 그리는 마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스승님께서는 마냥 제 행복을 바라시지만, 저는 오로지 제 행복을 위한다.
“스승님의 공허가 저를 찾아내지 않았습니까….”
스승님께선 저보다도 더 제 삶의 아픔을 헤아리셨다. 시간을 돌이켜 그 삶을 지울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실 분이었다.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었다. 저는 제 발로 돌아가, 다시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인간에게 피부가 벗겨져 말라 죽던 삶도 견딜 수 있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런 삶이 미래에 존재한다 하면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 저는, 스승님께서 안으신 과거가 무엇이 되었건, 그를 끔찍하다 여길 수가 없습니다.”
스승의 평화를 잃을 수 없어 세상의 평화를 꾸렸다. 저를 안아 다독이는 품을 잃을 수 없어 아무런 힘도 내보이지 않는다. 다 저를 위해, 제가 그런 삶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고개 숙인 신아에 수는 굳은 어깨를 풀었다. 응, 하고 작게 웃으며 신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신아의 말은 제 볼품없던 어린 시절마저 잃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마저도 사랑한다 들리니, 저도 참 곤란했다.
나도 그 삶에 감사한단다. 너를 만났으니 말이야. 그렇게 신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말이 제 삶도 다독였다.
‘그러니 저는, 스승님께서 안으신 과거가 무엇이 되었건, 그를 끔찍하다 여길 수가 없습니다.’
수는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솔직하고도 절절한 고백이며,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한참 동안 신아를 다독이던 수는 풀잎 바스락대는 소리에 눈꺼풀을 들었다. 그렇게 제 눈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너구리 한 마리를 보았다.
연신 제 눈치를 살피며 초조해하니, 아, 하고 눈을 깜빡였다. 익숙한 광경에 추측되는 바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와 신아를 배려하느라 멀리 떨어져 있다가, 제가 우는 것 같으니 놀라 뛰어온 모양이었다.
“고마워라….”
수는 너구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수선의 손짓에 너구리는 연신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수풀에 숨어 용감한 너구리를 응원하던 영물들은 그 광경에 너 나 할 것 없이 수풀을 뛰쳐나왔다.
그에 신아가 조용히 몸을 틀어 제 뒤를 보았다. 우르르 몰려들던 짐승들은 동시에 몸을 굳혔다. 수는 손끝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너구리에 고개를 기울였다.
“왜….”
“저만 좋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수는 너구리에 손을 뻗은 채 신아를 올려 보았다. 신아의 낯이 딱딱하게 굳어 있으니 눈을 끔뻑댔다. 그러다 신아의 말뜻을 깨닫곤 제 귀를 의심했다. 신아가 눈을 찌푸린 채 스승을 안아 제 무릎에 앉히자 영물들은 더 수선께 다가가지 못하고 끙끙댔다.
수는 미간을 좁히곤 한숨 쉬었다. 헛웃음이 샐 것 같으니 제 이야기에 무거웠던 공기가 가벼워졌다. 정말이지. 수는 달큼한 평화에 헛헛한 숨을 내뱉었다.
“신아야…. 뭐 어디까지 견제할 셈이야…. 사람도 아니고. 이는 수산의 영물들.”
“판단할 수 있는 생명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하하!”
수는 고개를 젓다가, 손을 들어 제 허벅지를 탁탁 쳤다. 그에 눈치 빠른 백여우 한 마리가 다급히 뛰어들어 그 품에 몸을 웅크렸다. 수는 단숨에 그를 받아 등을 쓰다듬었다.
“옳지. 예뻐라.”
“어찌 예쁘다 하십니까….”
신아가 스승의 어깨를 붙잡아 시선을 마주하자 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를 못 본 체했다.
“이리 와.”
뒤이은 허락에 영물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수선의 품에 파고들었다. 좋은 자리를 선점하지 못하면 손이라도 뻗어 닿으려 낑낑댔다.
수는 웃는 낯으로 일어나 커다란 토끼 한 마리를 안았다. 품에 안고 얼러 주나 싶더니 조심히 내려 신아의 품에 앉혔다. 모두가 토끼를 부러워하며 시선을 들었으나, 그가 화선의 품에 안기자 눈을 흐리고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털 뭉치가 품에 닿음에 신아가 인상을 구겼다. 그에 토끼도 벌벌 떨리는 시선으로 도와 달라는 듯 수선을 올려 보았다. 수는 커다란 토끼를 안아 눈을 찌푸린 신아에 웃음을 터트렸다.
“두 땅의 교류가 여기서 시작되는구나. 그렇지?”
“…….”
신아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입을 꾹 닫았다. 수는 가만히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신아 옆에 영물들을 데려 앉혔다. 수선의 손길에 영물들은 영문을 몰라 파들댔다.
“너도 이리와.”
수가 수풀 너머로 손을 까딱이니, 백호는 운명을 예감한 듯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왔다. 못내 망설여지는 듯 걸음을 주춤대자 수가 고개를 돌려 신아를 보았다. 그에 신아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지던 영물들은 화들짝 놀라 다시금 화선의 몸에 달라붙었다.
“뭐라 한 건….”
“안 했습니다.”
불퉁하게 답하는 신아에 수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수선 앞에 불이 살기를 띠지 않으니 백호도 조용히 그 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수는 온갖 동물들에 둘러싸인 신아를 보며 말간 웃음을 흘렸다. 수선이 더 없이 행복하게 웃음에, 다람쥐도, 흰 여우도. 조그마한 새앙쥐도, 긴 다리를 접어 앉은 고라니도. 그 중앙에 자리 잡고 앉은 토끼도 도망치지 못했다. 백호는 수선의 말간 웃음에 골골대며 땅에 고개를 묻었다. 그 낯에 대꾸할 수 없음은 화선도 마찬가지였다.
“친하게 지내야 해. 내 오랜 동무들이니 말이야. 그럴 거지?”
“예.”
영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화선을 힐끔댔다. 신아가 조용히 시선을 내리니, 영물들은 화들짝 놀라 수선 앞에 긍정의 뜻을 내보였다.
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곤 신아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 수선 가까이 선 영물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수선의 품에 달라붙었다. 신아가 눈을 찌푸리니, 수가 어허, 하며 그를 안아 몸을 누였다. 그렇게 푹신한 풀밭 위에서, 신아와 함께 따끈한 영물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신아야.”
수는 신아의 손을 쥐었다. 같은 땅 위에 머리를 붙이고 누워, 같은 하늘을 바라본다.
“십 년 만에, 수산이구나.”
신아는 그런 스승을 내려 보다 조용히 시선을 들었다. 위계도 없는 짐승들을 바로 잡으려거든 스승님이 없는 자리여야 했다. 그러니 조용히 스승의 손에 깍지를 꼈다.
하늘대며 떨어지는 벚꽃 잎이 꼭 색을 입은 눈 같았다. 제 스승과 함께하는 삶은 온통 꽃밭이었다.
* * *
평화를 안고 돌아올 수선을 맞으려 일족 무인들이 모여 수산의 경계에 섰다. 저 멀리 화국의 마차가 줄지어 길을 건너니, 곧 수선께서 당도할 터였다.
우현수는 짙푸른 조복을 입곤 결계가 사라진 최전방에 섰다. 그러곤 조용히 손을 들어 허공을 훑었다. 아무것도 손에 걸리지 않으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수선의 말에는 힘이 있다. 당장은 화국과의 교류에 반발할 자들이 있겠으나, 모두가 그 존재 아래 평화를 납득할 터였다. 꽤 기대되는 광경이었다.
하나둘 도착하는 마차에 우현수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맨 앞에 선 붉고 화려한 마차를 보았다. 산길이 험하고 평지가 흔치 않은 수산에선 볼 일 없는 교통수단이었다.
마차 문이 열리니,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박기춘은 만세를 외칠 준비를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땅에 내딛는 발을 보았다. 모두 그 발을 따라 시선을 올리다, 눈을 끔뻑였다.
줄지은 무인 행렬을 마주한 슬선이 몸을 흠칫대며 마차에서 내렸다. 슬금슬금 걸어 우현수 앞에 예를 갖추었다.
“청, 자단 무인 슬선…. 일족 어른 앞에 인사 올립니다….”
쭈뼛대며 고개 숙이니, 우현수가 눈매를 좁혔다. 수선도, 화선도 보이질 않았다. 이가연과 함께 길을 떠난 사절단도 하나 둘 마차에서 내려 일족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가만 보니 대신관도 보이지 않아 눈을 찌푸렸다.
“어찌 혼자 내린단 말이야.”
“대…신관께서는 화국에 남으셨습니다.”
“…왜?”
“수선께서 하루 늦게 오시라 하셨다 했습니다….”
“허면 수선께선?”
“예…?”
슬선은 고개를 들어 의아한 듯 눈을 깜빡였다. 우현수는 어째 불길하여 눈을 구겼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인지한 슬선이 식은땀을 흘렸다. 스승님, 이런 말씀은 없지 않으셨습니까. 원망스러운 마음을 속으로 털어놓았으나 들어 줄 이는 없었다.
한참을 눈치만 살피던 슬선은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수선께선, 화…선과 함께 어젯밤 수, 산에 드셨지 않습니까.”
“…지금 같이 수산에 계신다고?”
그 말에 산이 술렁이니, 슬선은 제가 죄를 지은 것 같아 쭈굴댔다. 일족 모두가, 세 어른이 저만 쳐다보고 있으니 손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수선께서… 연통을… 보내신 줄 아는데…….”
못 받으셨습니까…? 슬선이 눈치 살핌에, 우현수는 탄식하며 눈을 덮었다. 이보다 더한 봉변이 없었다.
서신을 쓴 것은 수선이나, 그를 전한 것은 화선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 * *
이마에 푸른 띠를 두른 대신관이 활 하나를 들고 이학정에 들었다. 머리를 올린 대신관이 층계를 오르니, 궁인들이 흘끔 시선을 들어 그 낯을 훔쳤다.
이가연은 눈앞의 광경에 조용히 시선을 틀어 제자리를 찾았다. 수산과는 조금 다른 화살 깃대를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일찍 온 것은 아닐 텐데요.”
“이제는 인사도 생략하시나 봅니다.”
양팔을 벌려 환복을 도움 받던 연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딱히 별생각 없었으나, 다 뜯어진 등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생각 없기론 그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체라도 해 보시지요.”
“아프셨겠습니다.”
이가연이 덤덤한 투로 답함에 연왕은 뭘 바라겠냐며 고개를 저었다. 화선께서 제 등가죽을 지져 내어 몸에 새긴 각인이나 그에 타당한 권력을 받았으니 억울할 건 없었다. 어차피 볼 일도 없는 등짝이니, 연왕은 코웃음 치며 긴 활대를 들었다.
“수선께서는 참으로 나긋나긋하시니. 좋으시겠습니다.”
연왕은 저와는 다른 이가연이 참으로 편한 팔자라 생각했다. 두 신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는 두 인간이었으나 이가연과 저의 처지는 꽤 다르지 않은가.
“좋은 건 사실이나, 꽤 단호한 분입니다.”
와중에 좋음을 부정하지 않는 대신관에 연왕이 으, 하고 치를 떨었다.
“화국 땅에서 그리 내뱉자면 두렵지 않으십니까?”
“송구하나 그게 제 본분인지라.”
“그 본분, 버리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우실 겁니다.”
“따뜻한 충고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말은. 연왕은 혀를 차곤 자세를 잡아 화살을 들었다. 빡빡하게 고정된 줄에 화살을 메워 시원시원한 몸짓으로 당겨 과녁을 노렸다. 익숙한 듯 손을 놓으니, 화살이 허공을 갈라 그대로 홍심에 꽂혔다.
“관중!”
우렁찬 목소리가 명중을 알렸다. 군더더기 없다는 찬사 아래 활대를 내려 둔 연왕은 제 옆에 선 대신관을 흘겨보았다. 솔직한 말로 그가 오늘의 활 내기에 얌전히 응한 것은 의외였다. 본래라면 오늘 대신관 또한 수산의 사절단과 함께 수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덤덤하십니다.”
어젯밤, 수산의 결계가 사라졌다. 화선께서 수선과 먼저 길을 나서신 것이다. 그도 모자라 대신관의 귀환만 늦추라 하시니 신궁에 쳐들어간 이가연의 패기로 보자면 화국에 발이 묶여 불안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낯에선 불안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덤덤할 리가요. 화국의 정경을 하루 더 즐기라 하시니, 더없이 기쁜 일이지요.”
이가연은 수산보다 몸체가 두껍고, 두 끝이 크게 휘어 있는 활을 훑었다. 다시금 화살을 줄에 메고, 천천히 팔을 당겨 과녁을 겨누었다.
수선의 유력한 후보였다 했다.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는 듯한 움직임에, 모두가 숨을 죽여 그를 보았다. 끌어당긴 손을 놓으니, 화살은 빠르게 허공을 갈랐다.
“낙…!”
그대로 모랫바닥에 꽂히는 화살에, 모두가 눈을 끔뻑였다. 연왕은 맨땅에 초라하게 꽂힌 살을 내려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이학정에 왕의 웃음소리가 퍼지니 궁인들이 시선을 들어 대신관의 눈치를 살폈다.
“기대했으니, 실망이 큽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또한, 꽤 순진하십니다. 어찌 받아 본 서신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십니까.”
활대를 내려 두던 이가연이 고개를 돌리자 연왕은 웃음을 머금고 한쪽 눈을 찌푸렸다. 수선께서는 언제나 화선과 함께 계신다. 그러니 수선의 뜻이 무엇이 되었건,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될 리 없었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지. 연왕은 어째 통쾌하여 턱을 들었다.
“당연히 수산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정경을 즐기란 말을 믿으실 줄이야.”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을 믿는 게 우선이지요.”
“허면 대신관께선 지금의 평화를 믿으십니까?”
연왕의 물음에 이학정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궁인들은 연신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화국의 왕과 수산의 대신관. 둘은 생각이 없는 듯하나, 궁인들은 그 친분을 뿌듯하게 여겼다. 폐하께서 대신관을 만나시거든 유독 편안해 보이시니,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는 성군께서 잠시 그 앞에 위엄을 내려 두심을 모두가 기껍게 여겼다.
역사상 전례 없는, 두 일족의 평화를 상징하는 만남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내궁의 한쪽 건물을 대신관에게 내어 주고 상소 관람을 허하셨을 때엔 모든 궁인들이 망상에 젖어 둘의 친분을 즐겼다.
허나 가끔, 대신관에 짓궂다 못해 아찔한 질문을 던지시면 궁인들은 초조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얼핏 보면 폐하께서 창, 대신관께서 방패이나, 가까이서 보면 둘 다 날카로운 창이었다.
궁인들은 대신관의 입을 힐끔대며 마른침을 삼켰다. 매번 예측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와 기대되기도, 두렵기도 했다.
이가연은 가만히 연왕을 내려 보다, 눈을 깜빡였다.
“자신 없으십니까?”
그 물음에, 연왕이 도리어 눈을 끔뻑였다. 뭐요?
“신의 부재에 무너질 나라를 꾸리셨는지요.”
궁인들은 올 것이 왔노라 걸음을 슬금슬금 물렀다. 보는 눈은 즐거우나 둘의 대화 내용을 감당하기엔 간이 작았다.
연왕은 화를 삭이며 그를 올려 보았다. 뭐라 답해도 문제가 되는 물음이었다.
“내기를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지는 쪽이 머리칼을 자르는 게 어떻습니까.”
궁인들이 기겁하여 고개를 쳐들었으나, 정작 제의를 받은 대신관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송구하오나, 제 몸은 신의 소유인지라. 그분의 허락이 내린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하하…, 방금의 발언을 화선께서 들으셨다면 참 좋았을 텐데요.”
“폐하께서도 화선께 몸을 바치지 않았습니까.”
연왕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입을 닫았다. 교묘하게 맞는 말만 하니 더 약이 올랐다.
“최고 어른이 될 자의 패기입니까? 어찌 그리 겁이 없으신지.”
“송구하나, 저는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없는 이인지라. 없는 자의 패악입니다.”
그래요? 연왕은 권력욕 따윈 없는 사내에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수산의 차기 어른이 될 미래가 확실하니 우스운 답이었다.
“수산의 대장군 후보께서는 화국을 적대시한다지요. 수선이 내린 시대에, 그분이 최고 어른 자리에 앉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수산에 말을 흘리는 자는 없을 텐데요.”
이가연의 낯이 냉랭하게 내려앉음에, 연왕은 입매를 당겨 유순하게 웃었다. 햇빛에 비치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또렷이 대신관을 올려 보았다.
“저런, 제가 업은 분이 화선인지라.”
웃음 띤 답에 이가연은 눈을 찌푸려 시선을 돌렸다. 예상은 했으나, 어른과 주고받은 서신에도 손을 댄 모양이었다.
연왕은 걸음을 돌려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대신관의 활솜씨가 저리 엉망진창인 줄 몰랐으니 흥이 식은 탓이었다. 놀려 봤자 별 재미도 없는 사내였다.
“푹, 쉬시고. 화국의 정경을 즐기다 가세요.”
무심한 투에, 이가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기는 하지 않으시고요.”
“아니요. 대신관께선 계속하시면 됩니다. 열 발을 다 쏘아보면 하나 정도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녁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내리꽂힌 화살이었다. 백 발을 쏘아 봐야 그에게 가망은 없었다.
이가연은 물끄러미 연왕을 보다, 다시금 활대를 쥐었다. 연왕은 자세만 좋다 뿐인 대신관을 삐딱하게 올려 보았다. 저라면 민망해서라도 활을 들지 않을 것 같은데.
“송구하나, 무엇을 부탁하려 하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패배를 예상하는가. 연왕은 웃는 낯으로 대신관의 등에 친절히 답을 내어 주었다.
“저번 과세 관련 상소 말입니다. 대신관께서 내어 주신 답변이 꽤 마음에 들어서요. 떠나기 전, 내일 있을 조례에 드시면 되겠습니다.”
화국의 정사에 직접적으로 존재를 드러내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덤덤한 연왕의 말에, 내시가 놀라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 송구하나 이는 안 될 일….”
“신이 내린 땅에 안 될 일이 있던가. 고집 센 영감들은 더 고집 센 이를 만나야 정신을 차릴 듯싶으니 더 말을 얹지 마라.”
연왕은 별 감흥 없는 투로 대꾸하곤 입을 닫았다. 대신관의 일침에 영감들이 분해하면 꽤 재밌는 광경일 테다.
왕의 말이 농이 아닌 듯싶으니 내시는 식은땀을 뻘뻘대며 고개를 조아렸다. 벌써 궁이 뒤집힘이 예상되어 눈앞이 아찔했다.
이가연은 가만히 서 있다, 다시금 활대를 쥐어 들어 올렸다. 일전과 다름없이 곧은 자세에 연왕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텅 빈 수레가 요란하다 이건가. 그리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관중!”
그러나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이가연이 화살집에서 다음 화살을 집어 올리니,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몸을 일으켰다.
“관중!”
정확히 홍심에 박힌 화살은 뒤이어 홍심에 꽂히는 화살에 반 틈으로 쪼개졌다. 연왕이 입을 벌려 대신관의 등을 보니, 이가연은 그만 활대를 내려 두었다. 그에 궁인들 또한 입을 쩍 벌리고 태연하기 그지없는 대신관을 보았다.
이가연은 몸을 돌려, 고개를 까딱였다.
“기권하셔서 다행입니다.”
뻔뻔하다 느껴지니 연왕이 왈칵 얼굴을 구겼다.
“못하는 체를 하셨습니까?”
“활대가 특이하여 특징을 살폈을 뿐입니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연왕은 대신관을 올려보다, 농이 아님을 인지하곤 머리를 짚었다.
“꽤 무시무시한 벌을 받을 뻔하였습니다.”
속단하는 게 아니었는데. 연왕은 시름하며 눈을 찌푸렸다.
“…못 이기는 척 조례에 드시는 줄 알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단호한 대답에 연왕이 한숨을 푹푹 쉬었다. 기권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겼을 테니 아쉽지 않을 리 없었다.
“폐하. 승자의 청을 들어주셔야지요.”
저를 승자라 칭하는 이가연에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 해 보라는 듯 손을 휘저으니, 이가연은 입을 열었다.
“정사로 바쁘실 텐데, 그만 가 보셔야지 않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연왕은 피식 웃음을 뱉었다. 도와 달라 했더니 알아서 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예. 바쁘지요. 신실하신 대신관 손이라도 빌리고픈 심정입니다.”
“송구하나, 그 정사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폐하의 합궁일이 아닙니까.”
그 말에 이학정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누구도 쉬이 언급하지 못 하는 일을 대신관이 꺼냈으니, 내시는 슬며시 대신관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눈을 깜빡이던 연왕은 이를 부득대며 고개를 들었다.
“궁…인들 입이 참 가볍습니다.”
“매일 밤 후궁들의 설움이 끊이지 않은 탓이지요.”
“송구하나, 뭐 문제가 있는 것은….”
“폐하의 마음에 일말의 파장도 일으키지 못하는 이들의 죄가 아니겠습니까.”
하…. 연왕은 탄식하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런 걸 언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기는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단 한 발에 과녁을 꿰뚫으시니. 회임 또한.”
“아아, 대체 어찌 아셨는지!”
연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렀다. 그에 궁인들 다급히 고개를 조아려 왕의 진노를 피했다.
“상소를 보게 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대개 그런 내용이기에 알았을 뿐입니다.”
하, 연왕은 정보의 근원지를 깨닫고 머리를 짚었다.
“대신관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화친을 맺지 않았습니까. 충언이라 여겨 주세요.”
“뭐 대낮에 이런 얘기를…. 수산은 참으로 방탕한 곳인가 봅니다.”
연왕의 비꼼에 이가연이 시선을 내려 예를 갖추었다.
“폐하께서 수산의 예를 지키지 말라 하심에 애써 내려두었습니다. 또한, 폐하의 회임은 경사 중의 경사가 아닙니까.”
평온하기 그지없는 어조에 연왕은 약이 오르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웠다.
“…잔소리는 지겨우니 그에 더 말을 얹지 마세요.”
“충언이라 여겨 주세요.”
“자신을 그리 낮추지 마세요. 정말 낮게 대하고 싶으니 말입니다.”
“허면 친우의 조언이라 여기시면 되겠습니다.”
한마디를 지지 않으니 연왕은 몸을 일으켜 발걸음을 옮겼다. 그에 궁인들이 다급히 그 뒤를 쫓았다. 쿵쿵대며 걷던 연왕은 문득 걸음을 멈추어 이가연을 보았다.
“대신관께서는 순결한 몸이 아닙니까. 맹탕인 사내의 충고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자니 대신관이 제게 정사로 조언함이 우스운 일이었다. 연왕은 한쪽 눈을 구겨 사내구실 못하는 대신관을 올려 보았다.
이가연은 이해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화국에서는 순결을 중요시하여 경험이 없는 사내만 후궁으로 뽑는다지요. 이제 보니 폐하께서 맹탕인 사내를 싫어하셔서.”
“아아! 정말! 제가 졌습니다. 그만 하세요.”
“법도를 바꾸어야.”
“대신관께서 꼭, 화국에서 태어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입 바른 충신에, 활 놀이를 즐기는 친우가 되었을 듯싶으니 말입니다.”
돌려 말하나, 연왕은 저 고고한 낯이 일그러져라 굴리고 싶었다. 손을 부들대며 연왕에 이가연이 곱게 고개를 조아렸다.
“태생이 맹탕인 사내는 폐하가 두려우니, 다시 태어나도 수산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저자는 도대체가 수치란 게 없는가? 전투 의지를 잃은 연왕은 고개를 젓곤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내전에 드십니까.”
“참, 자알 아십니다.”
비꼬는 듯한 투이나, 그를 들은 내시의 낯이 환히 트여 울먹였다. 내시는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대신관에 감사를 표했다. 영영 가지 않으시면 좋을 텐데, 그리 생각하며 다급히 왕의 뒤를 쫓았다.
쓸려나듯 사람이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린 이학정에, 이가연은 자리를 정돈하곤 걸음을 옮겼다.
‘꽤 순진하십니다. 어찌 받아 본 서신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으십니까.’
왕의 말을 회상하던 이가연은 짧게 한숨 쉬곤 층계를 내렸다. 어찌 모르겠는가. 까마귀는 애초에 두 개의 서신을 물어 왔으니 말이다.
이가연은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른께서 꽤 놀라셨겠군. 그리 생각하며 활터를 벗어났다.
* * *
대체 어디 계십니까. 우현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수련원을 서성였다. 수산의 영물들이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으니 수산에 드셨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차마 수선을 찾아오라 명할 수도 없으니, 기다리는 것밖엔 답이 없었다. 착잡한 마음에 마른 낯을 쓸어내리곤 수산의 뒷길에 들었다. 저는 별천지를 찾을 수 없으나, 아무래도 그곳에 계실 것 같았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마주칠지도 몰랐다. 그 막연한 생각 하나로 별천지 입구를 향해 걸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신이 내린 땅에 예측 가능한 것이 하나 없었다.
그러나 한참을 걸어 도착한 수산의 꼭대기에서도 보이는 것이 없으니 암담하기까지 했다. 황망한 마음을 안고 걸음을 돌리던 우현수는 몸을 덮치는 힘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 온몸에 소름이 끼쳐 간담이 서늘했다.
압도적인 힘. 짐작되는 바가 있으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를 내려 보고 선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 숨도 쉬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는 화국의 신이었다.
그 품에 수선이 안겨 곤히 잠들어 계시니 한 걸음을 물렀다. 아무래도 별천지에서 밤을 지내신 듯싶었다. 신분을 밝혀 화국의 신 앞에 예를 갖추려는데, 커지는 위압감에 입을 닫았다. 조심스레 고개 드니 화선은 눈을 찌푸려 불쾌함을 드러냈다.
입을 열지 말라는 듯한 경고에, 우현수가 허리를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화선의 아이. 본 적 있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감이었다. 이질적인 기운은 수선과 같으나 그와 달리 위협적이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우현수가 시선을 내려 수선을 살핌에 화선은 손을 들어 수선의 낯을 감추었다.
“감히…….”
목 긁는 소리에 수산에 크게 바람이 일었다.
[수선께선 화선에게 삶의 공포를 심었다. 또한 화선은 그를 거부하지 않고 도리어 수선을 숭배한다.]
이런 뜻이었나. 노장은 숨통을 조르는 위압감에 시선을 거두었다. 화선은 수선을 숭배한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그만을 섬김과 다르지 않았다.
“…….”
수선의 작은 뒤척임에 온 산을 뒤흔들던 힘이 자취를 감추었다. 화선은 고개를 숙여 조심스레 수선의 낯을 쓸었다. 우현수는 순식간에 기세를 죽인 화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늘이 두려워한 신은 수선 앞에 한없이 유약했다. 대신관의 말이 옳았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 스승이 깊이 잠드셨음을 확인하니, 화선은 시선을 들어 턱을 까딱였다. 그에 우현수는 몸을 돌려 신을 모시기 위해 마련된 신가를 향해 걸었다. 화선이 그 뒤를 쫓음에 온 산이 숨을 죽여 수선을 지켰다.
나른하고 포근한 공기. 저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모랫바닥 잘각이는 발소리, 새들이 짹짹대는 소리에 수가 천천히 두 눈을 들어 올렸다. 곧바로 보이는 것은 바닥에 흐트러진 결 좋은 검은 머리칼이었다.
눈을 깜빡이던 수는 신아가 제 품에 파고들어 잠이 들었음을 깨닫고 웃음을 흘렸다. 스승이 깨어났음을 인지한 신아가 더 깊게 스승의 품에 파고들어 고개를 묻었다. 그런 익숙한 상황에, 수는 제가 어디에서 눈을 떴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언제 일어났어?”
목이 잠겨 낮아진 목소리에 신아가 눈을 감아 숨을 들이쉬었다.
“눈을 깜빡이실 때부터요.”
“하하…, 정말?”
“예….”
입이 눌려 신아의 목소리가 웅얼대자 수가 눈을 휘어 웃었다. 이내 신아의 등을 다독이며 나른한 몸을 깨웠다.
“해가 중천이구나, 이제 그만 일어나서….”
몸을 돌리던 수의 시선이 대나무발에 닿았다. 원래라면 거울 속 저와 눈이 마주쳤을 테니, 지금 어디서 눈을 떴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
깨닫기 무섭게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렀다. 창 너머엔 굵은 가지에 달린 잎의 그림자가 살랑였다. 숲에 섞여 든 집에서는 서늘한 흙내음이 코끝에 맴돌았다. 작으나, 한 명이 눕기엔 커다란 수산의 가옥이었다.
신이 하늘에 없으니, 대신전을 허물어 만든 터에 세운 오직 수산을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화국의 신궁에 비하면 한없이 작으나, 수산에선 더없이 큰 규모였다.
거칠게 다듬어 나무 원형을 유지한 책상 위엔 검토해 보시라는 듯 옥돌로 눌러 쌓아 둔 일거리가 한가득했다. 언제 잠들었지? 별천지에서 신아와 장난치던 기억이 마지막이니 눈을 깜빡였다.
신아는 천천히 일어나 스승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제가 모셔왔습니다. 수선께서 먼 길이 고단하여 피곤하신 듯하니, 모두가 푹 쉬시라며 자리를 물렀습니다.”
수는 어째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틀었다. 상상되는 것이 있는 탓이었다.
“혹…시 신아야, 그 나를 데려올 때 어찌….”
“평소와 다를 것 없었습니다.”
“그, 러니까 그게….”
이렇게…? 수는 양팔을 들어 아이를 안은 듯한 자세를 내보였다. 그에 신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하아. 수는 얼굴을 덮으며 시름했다. 차마 그 꼴을 누가 보았느냐고 물을 자신이 없었다.
“부끄러우십니까?”
의아한 듯한 물음에 수가 당연하지, 하고 울상 지었다.
날려 버린 십 년이 있긴 하나, 평범한 이라면 아이 셋을 두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다 자란 몸으로 아이처럼 안겨 잠이 들었으니 수치스러워 귀까지 붉게 달았다. 신아가 괜찮다는 듯 스승의 등을 토닥이자 수는 신아가 저를 이해할 수 없음에 한숨 쉬었다.
“다음엔 꼭 깨워 줬으면 해…….”
“예 스승님.”
건조한 대답에 수가 그 어깨를 붙잡아 시선을 바로 했다. 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또다시 안으려 듦이 뻔했다.
“신아야.”
그러나 부르기 무섭게 신아가 시선을 내려 우울한 표정을 보이니 당황하여 눈을 깜빡였다. 수의 눈빛에는 단호함이 사라져 걱정만이 가득했다.
“어디 아파…?”
그렇게 순식간에 저를 살피는 스승에 신아가 웃음을 눌렀다. 왜 싫어하시는지는 모르지 않으나, 그리 안아 들면 스승의 낯을 보며 걸을 수 있으니 포기할 수 없었다.
“사실…, 배가 고픈 듯합니다.”
“아….”
수는 제가 안일했노라며 신아의 배를 짚었다. 제가 잠을 자느라 신아의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 죄책감에 아이의 배가 한없이 납작하게 느껴졌다. 그 손짓에 신아가 크게 움찔거렸으리라곤 모를 일이었다.
“괜히 나 기다리느라….”
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신아가 스승의 어깨를 쥐어 부드럽게 당겼다. 기우뚱하고 신아의 품에 안긴 수는 어서 밥을 먹어야 한다며 신아를 밀어냈다. 그러나 신아가 저를 단단하게 안음에, 수가 의아하여 신아를 살폈다.
신아는 그런 스승을 말없이 내려 보다 옅게 웃었다. 잠에서 막 깨어나 부은 눈가를 빨아먹고 싶었다. 저는 그거면 배가 부를 것 같은데. 그를 알았다간 기겁하며 몸을 물릴 분이니 입 밖으로 뱉진 못했다.
이틀은 너무 긴데. 신아는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제 스승께서는 지금 당장 발기한 아래를 들이밀고 서러워하면 어쩔 줄 몰라 고운 손을 내어 주실 분이나, 그를 어겼다간 앞으로의 약속의 무게가 가벼워져 참아야 했다.
아, 어쩌면 입을 내어 주실지도 모르겠다. 신아가 푸스스 웃으니, 수가 영문을 몰라 눈을 끔뻑였다. 그 말간 시선에 신아의 아래가 빠듯하게 부풀어 왔다. 자꾸만 쌓여 가는 욕정에 신아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인내엔 익숙지 못하나, 약속된 보상이 너무도 달았다. 고작 이틀이었고, 아직도 이틀이었다.
처음 보는 듯한 신아의 웃음에 수는 사고가 굳어 눈을 끔뻑였다. 꼭, 목탑에서 신아가 연죽을 들던 모습을 훔쳐보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웃는 게 좀 야하지 않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수는 제 생각이 끔찍하여 몸을 떨었다. 신아가 매번 발기했노라며 엄한 말을 늘어놓으니 저도 생각이 옮은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자다 깬 아이를 보고 이상한 생각을 했으니 미안하기까지 했다.
신아의 팔에 힘이 거두어지니, 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째 민망하여 흔들리는 동공은 숨긴 채였다. 신아는 몸을 삐걱이며 방을 나서는 스승을 따라 일어섰다. 그러곤 그를 뒤에서 안아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최고 어른이란 자가 스승님 뵙기를 기다리니…, 외출할 준비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걸음을 멈춘 수가 몸을 돌려 신아를 올려 보았다. 안긴 꼴을 어른께서 보셨군, 흐린 눈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무시했다.
“배가 고프질 않아. 어차피 창선은 모레이니 조금 늦어도 어른께선 이해하실 거야. 그러니 밥 먼저.”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개의치 마세요. 스승님과 상을 들 수 없으니 아쉬워 꺼낸 이야기입니다. 물론, 끼니는 거르시면 안 됩니다.”
“…어떤 일?”
수는 신아가 저를 순순히 보내는 일이 처음인지라 기분이 이상했다. 신아는 잠시 침묵했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창선이 열리는 곳 말입니다. 자리라도 훑어보고 오려 합니다.”
아아, 수는 수산의 지마당을 떠올렸다. 이는 수선의 존재를 밝히는 창선 때나 사용되는, 수산의 남쪽에 위치한 가장 큰 마당이었다. 한창 창선을 준비하느라 바쁜 곳이기도 했다.
“거긴 지금 사람이 많을 텐데….”
“스승님이 드실 곳이니 한 번 봐 두어야지요.”
“그래…? 허나 뻥 뚫려 있어 훑을 것도 없는 곳이야.”
굳이? 수는 신아의 일에 이유를 알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 신아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과 함께하는 첫 자리가 아닙니까, 설레서 그렇습니다.”
“아…. 그럼 같이 갈까?”
“아니요. 그럴 시간에 스승님과 같이 누워 있음이 더 좋으니 그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으음. 수는 시선을 피해 푹신한 이불보를 힐끔대다, 다시금 시선을 들어 신아를 보았다. 당분간은 한방에 묵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신아야. 네가 묵을 곳은 어디야?”
거기가 여긴가? 수가 눈을 깜빡이니 신아가 의아하단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히 한방을 쓰지 않겠습니까.”
“그리 준비했다 하셨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수는 눈을 깜빡였다. 여기가 화국도 아니고, 다 큰 사내 둘을, 화국의 신을 모셔 놓고 한 집을 내어 줬을 리는 없었다. 수산은 예를 중요시 여기는 곳이었고, 화국처럼 예의 기준이 특이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아니요. 제가 수선을 모실 테니 신경 쓰지 말라 전해 두었습니다.”
“아아….”
수는 저도 모르게 납득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 말했다고?
수가 눈에 띄게 당황함에 신아가 눈매를 좁혔다. 역시. 제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스승께선 저와 방을 달리할 생각이셨다. 아직도 저와 함께하는 밤이 당연한 일이 되지 못했으니, 언짢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신아야. 그리 말하면 내가 너를 부려 먹는다 여기실 거야….”
“아아, 의도한 것은 아니나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백성들이 슬퍼하지 않겠어…! 그리고 나는 네가 그런 평을 듣는 게 불편하고, 또 한방에서 지낸다 하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
“화국 백성들은 신이 수선을 모실 수 있음을 영광이라 여길 겁니다. 또한, 스승님과 저는 평생을 함께 살 텐데 수산에서 이상하게 여길 게 있겠습니까.”
신아가 의아한 듯 물어오니, 수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신아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제가 한방을 쓰는 일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았다. 신아와 같이 묵거든 꼭 일을 치를 것 같으니 저도 모르게 긴장한 탓도 있었다.
하긴. 저는 어린 신아와 좁은 방에 함께 지냈으니, 어른께서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다. 또 앞서 생각했으니, 수는 스승이 음란하기 그지없다며 민망함을 감추었다.
신아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스승을 내려 보고 있자면 가슴이 간질댔다. 그 초조한 눈빛이 무엇을 가늠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더 참지 못하고 말을 입에 올렸다. 스승님께선 빈틈이 너무도 많아, 자꾸만 저를 괴롭히셨다.
“아, 스승님의 신음이 크긴 하지요. 이 일대엔 사람이 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허를 찔린 수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신아는 그런 스승의 손을 쥐어 연신 입을 맞추었다.
“그….”
“역시, 스승님께선 저와의 정사를 고대하고 계셨던 겁니다.”
신아의 낯이 감격에 차오르니, 수는 고개를 틀어 으응, 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수산에서, 제가 태어난 곳에서 음란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한다니. 약속했으니 지키긴 해야 하는데, 차마 상상하지 못하고 어깨를 파들댔다. 고작 닷새 동안 정사를 금한 과거의 제가 원망스러웠다. 당시엔 그 정도 기간만 해도 감지덕지했으니 몰랐던 일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석반은 스승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너무 늦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으응….”
수는 삐걱대며 몸을 돌렸다. 인사도 못 드렸으니, 어서 현수 어른을 뵈어야 했다. 그렇게 문고리를 쥐다 말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신아를 보았다.
“그… 이상한 뜻은 절대 아니고. 너도 씻어야 할 테니…. 같이 갈까? 시간이 아깝질 않아.”
“이번엔 욕탕 벽이 아닌 욕탕을 부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녀올게…….”
신아에게 욕탕이란 대체 뭐 하는 장소인가. 수는 흐린 눈으로 처소를 나섰다. 그에 신아는 웃는 낯으로 스승을 배웅했다.
* * *
우현수는 누각의 이 층 창가에 앉아 연죽을 물었다. 그렇게 신가로 돌아가는 수선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화국에서 보낸 시간이 행복했노라 말씀하시니 그에 얹을 우려가 없었다. 아무런 시름없이 입을 당겨 웃으심에, 전할 것은 즐거우셨다면 더할 나위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곧 창선이니, 제가 나서서 부담을 안겨드릴 순 없었다.
그렇게 짧은 인사는 끝이 났다. 길게 나눌 대화는 존재치 않았다. 아직도 화국의 왕은 믿지 못하겠으나, 수선의 낯을 보자면 화국의 평화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화선의 존재가 의아했다. 대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수선께서 그리 여기는지 알 수 없었다. 우현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켜 연기를 머금었다, 부연 연기를 내뱉었다.
화선이 잠든 수선을 조심스레 만지는 모습은 보았다. 그런 자가 수선께 위해가 되지 못함은 더 볼 것도 없었다. 허나, 그런 이가 수선을 ‘스승’이라 칭하며 좇음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잠든 모습으로 뵈었으니, 부끄럽습니다.’
우현수는 수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민망한 듯 눈을 흐리셨으나, 이내 화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분위기가 뒤바뀌었다. 묘하게 들뜬 어조나, 헤퍼진 웃음이 그랬다.
‘예쁘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우현수가 삼키던 찻물을 뱉을 뻔했음은 당연하다. 제 동의를 바랐다기보다는, 잘 키운 자식을 자랑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수선 앞에 어떤 식으로 굴길래? 우현수는 손끝으로 저를 찍어 죽일 듯 내려 보던 화선과 수선께서 그리는 화선을 연결 지을 수 없었다.
신가의 옷 방엔 두 신이 수산에 머무를 동안 입을 옷이 마련되었다. 화선의 옷 치수를 알 수 없어 다양하게 두었다는 말에 수선께선 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을 짚었다.
‘신장은 이 정도에…, 품과 어깨는 이 정도. 허리는 이쯤? 팔을 벌리고 서면 이 정도겠습니다.’
어깨를 가늠하는 듯 팔을 벌렸다가, 허공을 안으며 허리를 가늠했다. 그 몸짓을 보자면 어찌나 가까이 붙어 지내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연신 창 너머를 내려 보던 수선께선 석반 전에는 돌아가야 한다며 난감한 듯 웃었다. 그 눈빛에 담긴 것이 화선을 그리는 애정이니, 우현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걸음을 물리던 수선은 망설이는 듯 주춤대다, 앞에 놓인 당과를 싸 가도 되겠느냐 물어왔다. 우현수는 수선께서 화선을 어찌 여기는지 깨닫고 웃음을 흘렸다.
‘화선께선 이런 수선의 마음을 아십니까?’
수선께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임에, 우현수는 아닙니다, 하고 웃음을 흘렸다. 꼭 어린아이 대하듯 구시질 않는가.
수는 찜찜한 듯 눈을 힐끔대다, 새것으로 마련하겠다는 말을 마다하며 이정도면 충분하다 답했다.
우현수는 금은보화라도 되는 듯 당과가 싸인 보자기를 끌어안는 수선을 떠올리다 작은 웃음과 함께 연기를 내뱉었다.
수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한 낯으로 창호 문을 열었다. 그에 곧바로 신아와 시선이 마주칠 줄 알았으나, 방 안에는 신아가 없었다.
조금 늦는가. 수는 조심스레 몸을 들이고 방문을 닫았다. 아직 석반을 들지 않았을 테니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보자기를 내려두고 이불보에 궁둥이를 붙여 앉았다.
수는 탁자 위에 옥돌로 눌러 둔 흰 종이들을 내려 보았다. 꽤 양이 되어 보이니 신아가 없을 때 봐두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돌을 치워 첫 장을 읽어 내렸다.
그러나 신아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여덟 장째를 들어 올리던 수는 한숨 쉬며 종이를 내려 두었다. 그렇게 풀썩 이불 위에 누워 멀거니 천장을 보았다.
길을 잃었다면 어떡하지? 신아는 대개 수련원에서 지냈으니 지리를 모를 수 있었다. 수는 시선을 돌려 창 너머를 보다, 해가 지면 나서야겠노라 마음을 다스렸다. 괜히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진정해야 했다.
신아는 어리지 않은데도. 괜히 신아가 걱정되어 마음이 초조했다. 그렇게 조용한 방 안에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느라 몸을 굴렀다.
그러던 중 수의 시선 끝에 붉은 서책 세 권이 걸렸다. 저런 게 있었던가?
수는 이불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탁자 밑에 있어 못 볼 법도 한 책이었다. 왜 책을 넣어 두셨지? 의아해하다, 책이나 읽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꺼내 들었다.
빳빳하고 붉은 표지엔 붓을 휘갈긴 듯 날린 서체로 제목이 쓰여 그를 알아볼 수 없었다. 수는 방에 있으니 뜻이 있었겠거니 생각하곤 중앙을 짚어 펼쳤다.
그렇게 서책을 펼쳐 들기 무섭게 서책을 덮었다. 글이 한 자도 적혀 있지 않으니 그 내용이 직관적이었다.
수는 한참을 뻣뻣하게 굳어 있다, 고개를 돌려 문가를 보았다. 애타게 신아를 기다렸으나 이 순간만큼은 신아가 늦기를 바랐다.
그렇게 세 권의 책을 안아 일어나려던 때, 문이 덜컥이는 소리에 혀를 씹었다. 수는 몸을 덜걱대며 신아를 올려 보았다.
신아는 온몸이 붉게 달아오른 스승에 눈을 깜빡이다, 이내 환한 낯으로 웃었다.
“송구합니다. 잠시 물을 뜨러 간 것인데, 그사이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
“오는 길에 책방에 들러 사 왔습니다. 스승님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재미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대체 어디가…?”
여섯 갈래로 흔들리는 동공에, 신아가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수는 이대로 옷을 벗게 될 것만 같아 고개를 저었다.
“신, 아야. 밥. 우리 배가 고픈…!”
“시장하시죠? 무거우니 이는 내려 두세요.”
신아는 웃으며 스승의 품에서 책을 내려 두었다. 그렇게 스승의 손을 쥐어 방을 나서니, 수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따라 할 생각은 아니지…?”
“그럴 생각입니다.”
수의 손아귀엔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글 하나 없이 그림만 가득한 책이었다. 처음 펼쳐 본 것은 누운 사내 위에 올라탄 이가 다리를 벌리고 쪼그려 앉아 헐떡이는 장면이었다.
“너무 힘들어 하셔서요. 요령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나 안 힘들어.”
다급한 목소리에 신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또한 혼자 좋은 일이 아니라 하시니, 기대되는 것이 많습니다.”
수는 그날을 언급하는 신아의 흠칫 몸을 떨었다.
‘같이 좋은 건데, 감당이 맞는 표현인가?’
저와의 정사를 감당할 수 있겠냐는 신아의 물음에 했던 말이었다. 신아는 잊을 만하면 그날의 말을 꺼냈다. 대개 저를 수치스럽게 하는 말을 수식하기 위함이었으니 뼈저리게 후회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와서 말을 바꾸자면 신아와의 정사는 감당이 불가했다. 좋고 말고를 떠나서 정신이 흐려질 때까지 찧어 댄다는 점이 그러했다.
“그, 그땐 내가 말실수를 한 것 같다.”
“스승님.”
신아가 멈추어 몸을 돌리니, 수는 땀을 삐질 흘리며 응? 하고 그를 달랬다.
“이틀 뒤입니다.”
“그…때는 창선 날인데?”
“하하, 그게 아니라. 지금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수는 무슨 소린지 몰라 눈을 깜빡이다 아, 하고 희게 질려 팔을 휘저었다.
“아니 지금 하자는 게 아니고…!”
“예 스승님. 허나 약조한 기간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신아야….”
“그럼요. 저도 기대됩니다.”
한다면 하는 신아였다. 설렘을 머금은 답에 수는 닥칠 미래를 부정하듯 말을 돌렸다. 그에 신아 또한 더 말을 얹지 않았다.
작은 소란 후, 수선과 화선은 함께 작은 정원에 들었다. 작은 정자 위엔 수련원 때와 찬 수는 같으나, 모든 식자재가 귀한 것들이라 일족 모두가 어찌나 고심했을지 느껴지는 밥상이 놓여 있었다.
고생하셨겠군. 수는 옅게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신아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다 일대가 고요함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사람이 없구나, 하니, 그래서 좋지 않습니까, 하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긴 하지. 수가 납득함에 신아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화선이 무슨 일을 하며 돌아다니는지는 수가 몰라도 될 일이었다. 수는 익숙한 평화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석반을 든 뒤엔 처소로 돌아와 붉은 책들을 힐끗댔다. 스승이 연신 그 눈치만 살피니 신아는 미소를 감추며 책들을 탁자 밑으로 치워 두었다. 수는 신아가 별생각 없어 보임에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니 옆에 놓아두었던 보따리를 풀어 신아 앞에 당과를 내보였다. 네가 좋아하던 거야, 하고 웃으니, 신아는 그 낯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스승님.”
“응.”
“먹여 주세요.”
“응?”
“예쁨받고 싶습니다.”
수는 눈을 깜빡이다, 와, 하고 감탄했다. 갑자기 왜 그래? 가슴이 간지럽다 못해 따끔대니, 신아를 안아 이불에 뒹굴었다. 신아는 그 반응이 기꺼워 스승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수는 당과를 들어 신아의 입에 내밀었다. 아, 하고 웃으니, 신아도 얌전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먹었다. 맛있어? 하는 물음에 눈을 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수는 이불을 팡팡 두들기며 기뻐했다.
수는 앞섶을 여미며 잠자리를 정돈하는 신아를 힐끔댔다. 익숙한 듯 두 퇴침을 나란히 내려 두어 이불보 하나엔 두 사람분의 자리가 놓였다.
“좁지 않을까? 내가 가서 이불을 하나 더 가져오는 게 좋을 듯하다.”
그에 신아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니, 수는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져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빤했다.
“가까이 있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네가 불편할까 봐.”
“불편하면 멀리하실 겁니까…?”
상처받은 듯한 음성에 수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막 목욕을 마친 머리칼에선 시원한 물 내음이 풍겼다.
“아니 나는 좋지만…! 네가 나보다 신장이 크질 않아. 신궁의 침상은 이보다 훨씬 컸으니 말이야.”
“붙어 잠이 들었음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렇긴 한데.”
“저는 스승님께서 저를 깔아뭉개셔도 마냥 행복하나, 스승님께서는….”
수는 다급히 이불에 파고들어 옆자리를 내보였다.
“네가 같이 자고 싶다 하니 다행이구나.”
그에 신아가 예, 하고 꾸물대며 몸을 누였다. 신아가 시선을 맞추지 않으니, 수는 신아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신아야. 나 좀 봐 봐.”
그런데도 시선을 피하는 신아에, 수는 난감해하다 슬금슬금 고개를 내렸다.
입술 위로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에 신아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그렇게 턱을 들곤 스승의 목을 받쳐 안았다. 부드럽게 입을 벌리고 입 안을 탐하니 수는 이럴 줄 알았노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본래라면 숨도 못 쉴 만큼 밀어붙이던 신아이나 이번만큼은 입을 쪽쪽대며 혀를 거두었다.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신아에 수는 몸을 꾸물대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음경도 물어 주셨으면서 어찌 입맞춤을 부끄러워하십니까.”
노골적인 물음에 수는 몸을 돌리곤 신아를 피했다. 그에 신아가 스승의 손을 쥐어 시선을 바랐다.
“스승님.”
“…….”
“가르쳐 드릴까요?”
“뭘…?”
“구음이요. 열심히 공부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수는 그 생각의 흐름을 알 수 없어 눈을 흐렸다.
신아는 스승의 손을 감싸, 검지와 중지를 제외한 손가락을 쥐었다. 작게 입을 벌리곤 스승의 손끝을 제 혀에 얹으니, 수는 뭘 하려는지 몰라 눈을 끔뻑였다.
“스승님 손끝을 귀두라 생각하세요.”
신아가 손끝을 혀에 올리고 말을 뱉음에 수는 머리칼이 쭈뼛댔다. 팔을 빼내려 들었으나 신아가 손을 단단하게 움켜쥠에 몸을 물릴 수 없었다.
신아는 혀끝을 세워 검지와 중지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이가 요도구….”
“악!”
혀를 내어 말을 뱉느라 발음이 죄 흐트러지니, 수는 기겁하곤 발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격렬한 거부에 신아가 아쉬운 듯 힘을 풀어 서운한 표정을 내보였다.
“요령이 없으면 스승님 턱만 아프지 않겠습니까.”
“…….”
“여기까지 넣으셔야 할 텐데요.”
신아는 손을 들어 제 목을 더듬었다. 어디까지? 수가 그를 따라 목을 더듬음에 신아는 친절히 이쯤이라며 스승의 목젖 아래를 짚었다. 그에 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떨었다.
“토하지 않을까…?”
“제가 그리 두겠습니까.”
으음, 수는 모른 채 몸을 돌렸다.
“피, 곤하다. 신아야.”
“하하, 예 스승님. 저도요.”
아닌 것 같은데…. 수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신아는 마냥 아이 같다가도 발정기에 접어든 짐승 같은 면모를 내보였다. 그러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억에 차마 잠들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충격이 꽤 큰 모양이었다.
“신아야.”
작은 부름에 신아가 스승의 허리를 안는 것으로 답했다.
“저 서책….”
“모레 할 일 말씀하십니까?”
“아니…?”
“약조는 어찌하시고요. 이리 오래 참으라 하셔 놓곤….”
실망한 듯 축축 처지는 음성에 수가 어어, 하며 긍정했다. 스승의 긍정에 신아가 방긋 웃는 낯으로 그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그에 수도 체념하곤 말을 이었다.
“저런 일을 남들도 한다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이상한 듯싶어…. 다들 그리 산다니 말이야….”
“저런 일이요?”
“…….”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신아가 의아한 듯 물음에 수는 조용히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에 신아도 더 캐묻지 않고 얌전히 입을 열었다. 더 했다간 쫓아내실 것 같은 탓이었다. 신아는 이미 벌게진 스승의 목에 입술을 묻어 사근사근 속삭였다.
“사내 간의 정사를 말씀하십니까.”
“…….”
“제가 가능하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뭐…. 그렇더라…….”
스승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가니 신아는 눈을 휘어 웃었다.
“스승님.”
“응….”
“저 발기.”
“아 깜빡 졸았구나…. 뭐라고…?”
졸았다기엔 다급한 목소리에 신아가 이를 물어 웃음을 참았다. 어서 주무세요, 그리 뱉으며 호롱불을 불었다. 다 늦은 밤, 신아는 스승이 깊은 잠에 들었음을 확인하곤 욕탕에 들었다. 일상적인 성욕이 없다시피 한 스승을 배려한, 성욕이 넘치는 제자의 익숙한 뒤처리였다.
* * *
검은 삿갓에 검은 천을 내려 쓴 수선이 장의 입구에서 수산의 꼭대기를 돌아보았다.
어제는 외출하고 오시라며 저를 쉬이 보내기에 문제 될 게 없다 생각했는데, 홀로 장에 든다는 말에 신아가 크게 가라앉아 그를 달래느라 진이 빠진 채였다. 기어이 꽁꽁 싸매어 몸을 가린 후에야 못내 고개를 끄덕이니, 수는 오후가 되어서야 방을 나설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신아의 장신구를 사는 길에 그를 데려올 순 없지 않은가. 수산에서 마련한 장신구보다는 덜 할 수 있지만 이번 창선 때 신아의 장신구는 제가 직접 골라주고 싶었다.
수는 검은 도포에 검게 물들인 삿갓, 그도 모자라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서야 장에 들었다. 얼굴을 가리려다 되레 더 튀는 복색이 되었다. 수는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별 희한한 복색이라며 수군대는 이들이나, 그 안에 수선이 들었으리라곤 짐작 못 할 터였다.
수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장을 네 바퀴나 돌았다. 곧 있을 창선에 북적이는 장은 사람들이 들어차 많은 피로를 쌓았다. 막상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니 그 개수가 끝이 없어 상인의 감사를 받았다. 이는 수가 해 본 것 중 가장 고가의 소비였다.
수는 신아의 장신구를 품에 안고 조용히 약방을 찾았다. 연신 그 주위를 살피며 걸으나, 큰 삿갓에 가려 그 낯이 초조해 보임은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장의 구석진 골목에 위치한 약방에 들었다. 씁쓰름한 약재 향이 코를 스치자 괜히 긴장되어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억! 아이고….”
약방 주인은 약재를 옮기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검은 덩어리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약방 주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손을 휘저었다. 얼핏 보곤 저승사자인 줄 안 탓이었다.
“뭐 찾으러 오셨수.”
돌아오는 답이 없으니 약방 주인은 조심스레 그 앞에 손을 휘저었다. 진짜 저승사잔가? 하는 마음이었다.
수는 발걸음을 옮겨, 약방 주인 옆에 딱 붙어 섰다. 그에 놀란 노인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음은 모를 일이었다.
“…밤.”
“예…?”
“밤…일, 에 드는 약이… 있는지요.”
아아, 약방 주인은 휴, 하고 이마를 닦곤 이리 따라오라며 약방 안으로 손을 까딱였다. 들리는 목소리가 음침하지 않으니, 긴장이 가셔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뭐 그렇게 입고 다니는지. 간 떨어질 뻔했지 않아!”
“아. 그…. 취향입니다.”
뭔 놈의 취향이.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곤 서랍을 달각였다.
“거시기가 좀 부실한가?”
“…….”
“부인한테 한 소리 들었나 보네.”
끌끌 대며 웃는 노인에 수는 난감하여 눈썹을 긁적였다.
“내가 알아서 만들어 줄 테니까, 한 잔 쭉 들이켜고 방에 들면 되겄수.”
“아니….”
“부인들이 다 끔뻑 죽으니까 약효는 의심하지 마셔.”
“저…. 그런 약 말고 말입니다.”
“그럼 뭔 약?”
노인은 약재를 한 움큼 쥐고 걸어가다 고개를 돌렸다. 쳐다볼 눈이 없으니 눈을 흐리곤 큼큼댔다.
“좀, 가라앉…히는 그런 약효가 있었으면 합니다.”
“뭘 가라앉혀?”
노인은 탁한 눈을 끔뻑이다 아아, 하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젊은 놈인 줄 알고 쉽게 대했는데 아랫도리가 빳빳한 모양이었다.
살다 살다 이런 일이 다 있군. 노인은 도포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사내의 아래를 보았다가, 부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을 찌푸렸다.
“부럽구만.”
“…예?”
“뭐 시험이라도 준비하능가? 빨리 안 붙으면 부인이 울겠어.”
“…….”
“미안하지만 그런 약은 없수다. 복이라 생각하고 살어.”
그 말에 수가 다급히 손을 들어 휘저었다. 아이고, 손도 곱상하니 크네. 노인은 부인의 사랑을 듬뿍 받을 사내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인이 제 체력을 못 따라와서요.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런 게 어딨어! 젊어서 잘 모르는가? 좀만 더 나이 들면 아이고 내 서방님, 하고 안아 줄 터니 기다리면 될 걸.”
“아…. 예…. 감사합니다…….”
검게 꽁꽁 싸맨 사내가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걸으니, 노인은 어째 마음이 쓰여 눈을 힐끔댔다. 제가 무슨 복을 안은 줄도 모르고, 그리 투덜댔으나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어! 저기! 이리 와 봐.”
그 부름에 사내가 몸을 돌렸다. 노인은 아이고 앞이 어딘지 모르겠네, 하며 몸을 떨었다.
“이거 내 아는 사람이 찾아다 준 건데, 귀한 거라 비싸긴 쫌 비싸.”
수는 작은 복주머니를 받아 들고 눈을 깜빡였다. 무게가 가벼움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가라앉히는 건 아니고, 성감을 돋우는 약.”
수는 약의 용도에 크게 당황하였으나 그를 모르는 노인은 묘수가 아니냐며 껄껄 웃었다.
“부인한테 함 물어보고. 물에다 풀어 마시거나 그냥 침이랑 삼키면 돼.”
“더… 힘들어하지 않겠습니까.”
“에그 쯧쯔. 몸이 흥분하니 같이 좋겠지!”
“부…인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원래가 즈그들 좋으면 안 그려. 피곤한지도 몰르지.”
수는 으음, 하고 복주머니를 내려 보았다. 신아가 정욕이 과하니 약을 찾은 것인데, 도리어 제가 약을 권유받았으니 기분이 묘했다. 제가 신아보다 덜 흥분했던가? 수는 정사를 회상하다 곧바로 눈을 흐렸다. 그러곤 휘휘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건, 듣다 보니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했다. 신아의 정욕을 내릴 생각은 해 봤으나 제가 그를 좇을 생각은 해 본 적 없었으니 말이다.
누가 되었건 비슷한 수준이면 괜찮지 않을까? 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복주머니를 쥐었다.
“가격이….”
“세 닢.”
노인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클클댔다. 수는 고민되는 듯 서 있다, 복주머니를 챙기곤 금화 세 닢을 내밀었다. 은화 세 닢을 말하려던 노인이 떡하고 입을 벌렸다.
“감사합니다.”
“아, 아이고. 내가 감사하지이…. 살펴 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내에 노인은 약방을 박차고 나와 그를 배웅했다. 그렇게 사내가 점처럼 아득해질 때쯤에야 복용량을 설명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수는 인파가 북적이는 장을 비집고 걸었다. 장신구를 잃어버릴까 봐 보자기를 품에 안아 든 채였다. 날이 좋은 가운데 웬 검은 덩어리가 걸어가니 사람들은 흠칫대며 길을 터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수는 문득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왁자지껄한 웃음 속 화선이란 말이 들린 탓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했다. 수산 땅에서 화선이란 말을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지러이 배열된 나무 탁자들 속 유독 사람이 몰린 자리. 그 안에 청년 하나가 손을 파들대며 돈주머니를 내려 두었다. 이번이 마지막 판돈이니 정말 가진 것이 없었다.
그 앞에 앉아 낄낄대는 남자는 술잔을 내려 두고 수염에 묻은 술을 훔쳤다.
“그러니까, 아직 등단도 못 했다는 거 아녀.”
그 말에 주위 선 구경꾼들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청년은 이를 물었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남자는 껄껄 웃으며 사내의 판돈을 가져다 가슴팍에 넣었다.
“이게 무슨…!”
“어차피 또 질걸? 이기면 다섯 배로 쳐서 준다니깐.”
“아가. 그만 고집부리고 그만 가아. 어쩌다 여기 흘러들어서 이래.”
음식을 이고 가던 여인이 고개를 쳐들고 걱정을 전했으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신념을 져 버린 순간 너는 무인이 아니다. 아직 등단도 못 했으나, 청년은 제 어머니께 그리 배우고 컸다.
“…이기면 사과하세요.”
“어어 알았어.”
건성으로 답하는 남자에 청년이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 낯에 아이고 무서워, 하며 웃는 남자가 있었다.
검은 덩어리가 하나가 인파를 비집으니, 주모는 걸음을 돌리다 말고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에 검은 덩어리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의 뜻을 보였다.
“저 대야는 뭡니까…?”
검은 사내가 탁자 위 물이 담긴 커다란 그릇에 관해 물으니, 경기에 눈이 팔린 이들은 아무런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에 잠시 고민하다, 질문을 바꾸었다.
“저 그릇을 부수면 되는 거였죠?”
지켜보고 선 이들 중 하나가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아니지이. 물싸움이 아니야.”
“오늘 누런 이 신났네. 어린 아가만 피 봤어.”
누런니? 수는 고개를 갸웃대가, 청년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씩 웃는 것을 보고 아아, 납득했다.
“저렇게 가끔 애먼 애들 붙잡고 도발해서 쌈 붙이는 양반인데, 쟨 곱게 자라 그런 거 몰랐나 보지.”
수는 청년이 일방적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인지했다. 그러나 도통 물싸움이 뭔지 몰라 고개를 갸웃댔다.
“자. 한다?”
남자는 씩 웃으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에 청년도 침을 꿀꺽이며 탁자 위에 손을 대었다. 그와 동시에 잔잔하던 물그릇 속 수면이 조금씩 흔들리니, 수는 눈매를 좁혔다.
수는 어떤 방식으로 내기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검기가 너무도 약해 색이 보이지 않는 어린 동자들이 검기를 발현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종종 행하는 일이었다.
이는 수면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탁자를 타고 기를 흘려 넣어 그릇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이걸로 내기하다니, 수는 꽤 그럴싸하다 생각하며 눈을 깜빡였다. 신아랑 할 수 있나?
아무래도 제가 질 것 같아 눈을 흐렸다. 뒤이어 신아의 방긋 웃는 낯이 떠올랐다. 내기를 걸고 하면 안 되겠군, 그리 생각하며 머쓱한 미소를 흘렸다.
눈에 띄게 흔들리기 시작한 그릇은 이내 청년 쪽으로 물을 흘렸다. 그에 구경꾼들이 웃으며 그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런 결과에 수는 눈을 찌푸렸다. 애초에 내기하는 둘의 나이 대가 크게 달랐다. 연륜을 무시할 수 없을 터인데, 어린 청년을 붙잡아 돈을 갈취하니 보기가 영 좋지 않았다.
“하하! 이거 줄 테니 전이라도 하나 사 먹고 들어가!”
사내가 품에서 엽전 하나를 꺼내어 던지자 청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사과하세요!”
“이기지 그랬어. 그럼 무릎이라도 꿇었을 텐데.”
“어찌 수선의 뜻을 의심한단 말입니까!”
청년의 외침에 구경꾼들의 눈이 누런 이에게 꽂혔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누런 이가 아니이, 하고 손을 저었다.
“내가 언제 수선의 뜻을 의심했나? 어찌 화선을 믿냐 그랬지.”
그 말에 구경꾼들이 아아, 하고 경계를 거두었다. 분하다는 듯 씩씩댐은 오직 청년뿐이었다.
“같은 뜻임을 어찌 모른 단 말이요! 내일이 창선인데! 불결하여 같은 하늘 아래 살 수가 없소!”
“어어, 나도 너같이 약한 무인이 수산에 등단한다 하면 밤길이 무서워서 두렵수.”
그 말에 구경꾼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가. 내일 지마당이 불바다가 될지, 안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고작 하루를 빌미로 이리 입을 놀릴 수 없습니다!”
“뭘 그래, 아직 모르는 일이지. 수선께서 그리 고우시니, 화선께선 그 반대로 일그러진 낯일 수도 있을, 악!”
“뭘, 으악!”
청년은 제 옆을 보며 소리를 지르는 누런 이에 제 옆을 보았다가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온몸을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매어 사람 같지 않은 형상이 제 어깨를 쥔 탓이었다.
그 검은 도포 자락 사이로 내민 손이 사람 손이니, 청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곤 제게 내밀어진 보따리 하나에 눈을 끔뻑였다.
얼떨결에 받아 들고 걸음을 물리자 검은 덩어리가 조용히 그 자리에 가 앉았다.
이건 뭐야. 누런 이는 눈을 끔뻑이며 그림자처럼 시커먼 이를 훑었다
의문의 존재는 조용히 손을 들어 품에서 복주머니를 꺼냈다. 척 보아도 그 무게가 묵직했다.
검은 덩어리가 금화 한 주먹을 꺼내어 탁자 위에 내려 두니, 누런 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올려 보았다.
“저도 돈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돈…?”
누런 이는 의심스러운 듯 눈을 흘겼으나 딱히 쳐다볼 곳이 없어 시선을 내렸다. 실력은 알 수 없으나, 손이 곱상하니 꽤 젊은 나이에, 말투도 얌전함에 곱게 자란 듯 했다.
“뭘 걸고?”
“이기면 이자의 돈을 돌려주세요.”
곧게 뻗은 손가락이 청년을 가리키니, 청년이 저요? 하고 눈을 끔뻑였다. 누런 이는 제 앞에 앉은 이가 꽤 신실한 놈임을 깨닫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젊고, 어린 무인. 그만큼 낚기 쉬운 이가 없었다.
“난 그만한 돈을 걸 수가 없는데 어쩌나.”
“이제껏 받은 모든 판돈을 걸면 될 일입니다.”
이거 완전 밑져야 본전 아닌가. 누런 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
순식간에 배로 불어난 판돈에 구경꾼들이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저 많은 판돈을 상대로 무섭지도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팔을 걷어붙이는 둘을 숨죽여 살폈다.
두 손이 탁자 위에 내려앉자 곧바로 그릇이 덜컥였다.
물이 사내 쪽으로 흘러넘침에 모두가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그리 생각하며 검은 덩어리를 살폈다.
“으하하! 대박이네, 대박 났어!”
누런 이는 금화를 주워 담으며 크게 웃었다. 그에 구경꾼들은 부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아아, 미안해서 어째? 거 댁네 집을 허물 허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으하하!”
검은 형상이 굳어 아무 말 않으니, 청년은 괜히 제가 더 미안하여 쩔쩔댔다.
“그…, 왜 나서셨습니까. 괜한 일을….”
“한 번 더요.”
삿갓을 넘어 드는 목소리에 누런 이가 눈을 깜빡였다.
“으엉?”
“요령이 없었습니다.”
말간 목소리에 모두가 탄식하며 얼굴을 덮었다. 곱게 자라 돈만 많은 호구가 분명했다.
“아이고 그럼요. 얼마든지요.”
누런 이는 킬킬댔으나, 검은 덩어리가 돈주머니를 통째로 탁자에 내려놓음에 눈을 끔뻑였다. 구경꾼들도 놀란 듯 그를 바라보긴 마찬가지였다.
“대신 돈을 더 거세요. 아까 받은 모든 판돈을 걸고, 걸던 돈에 열 배는 더 얹어야 시작할 겁니다.”
“주모! 나, 돈, 돈 좀 빌려줘!”
누런 이의 다급한 외침에 아래, 한 여인이 언짢은 낯으로 은화 꾸러미를 가져와 탁, 하고 내려 두었다.
“거…, 뭐 난 돈 받기만 하면 되긴 하지만. 댁도 참 생각 없수.”
“아아! 초 치지 말고 저리 꺼져!”
여인은 누런 이 배를 불리는 게 싫어 눈을 찌푸리곤 걸음을 물렀다. 구경꾼들은 저 삿갓 내의 낯을 볼 수 없어 참으로 아쉽다 생각했다. 대체 무슨 표정으로 내기에 임하는지가 궁금한 탓이었다.
“얼, 얼른 시작하까?”
누런 이가 소매도 걷지 않고 탁자를 짚으니, 검은 삿갓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동의를 표했다. 안 그래도 인파가 북적이던 작은 주막은 소문을 듣고 몰려든 이들에 소란스러웠다.
누런 이와 이상한 복장의 사내. 두 손이 탁자 위에 내려앉으니, 구경꾼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승패는 뻔하나 판돈의 무게에 제가 더 긴장되는 탓이었다.
그릇 안 물이 조금씩 흔들리며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한 치의 밀림도 없이 평온한 물그릇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아까는 볼 것도 없이 그릇이 덜걱였으나 이번엔 실력이 팽팽하여 요령이 없었다는 말이 진실인 것 같았다.
누런 이의 손에 땀이 축축이 배어들었다. 당연히 이길 줄 알았으니 불길함이 몰려왔다. 흘끔 시선을 들어 앞을 보다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어깨를 떨었다. 눈이 마주쳤나? 그럴 리 없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젖어 들었다. 그릇이 흔들리다 못해 누런 이에게 엎어지니, 모두가 입을 벌려 그 광경을 보았다. 소란스럽던 일대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물에 흠뻑 젖은 누런 이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울상인 채 그를 보던 청년이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물그릇이 엎어진 게 아니었다. 그건 그냥 물이 덮치는 광경이었다.
큰 환호성 소리와 함께 검은 도포를 차려입은 이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손을 내밀어 까딱이니, 누런 이는 벌벌대며 품에 넣은 돈을 꺼내었다.
판돈을 생각하자면 도망치는 게 옳았으나, 붙잡히면 죽을 것 같았다. 분명히 보았다. 그릇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물이 저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삿갓에 검은 천을 덮고, 검은 도포를 입은 이가 금화를 도로 품에 챙겼다. 그러곤 돈 꾸러미를 들어 청년의 품에 안기니, 환호 소리가 더해 온 일대가 요란했다.
“저기…….”
청년은 눈을 깜빡이며 목을 떨었다. 물에 손을 댈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한 분뿐이었다. 추측되는 것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았다.
청년이 숨도 쉬지 못하고 굳자, 검은 도포 사이로 뻗어 나온 손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한없이 다정한 분이라 했다. 청년은 쿵쿵 뛰는 심장을 안고 제 안의 추측을 확신했다. 부드러운 손길이 보따리를 감싸니, 아, 하고 그걸 내어 드렸다.
청년은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걷는 무인의 길에, 더없이 두터운 신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모두의 조롱을 받은 누런 이는 몸을 파들대며 집으로 향했다. 청년에게 쏟아내던 말을 회상하자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날 밤. 아무도 보지 못할 골목 어귀에서, 남자의 어깨엔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았다.
신아는 신가의 입구 돌담에 삐뚜름한 자세로 기대어 산 너머를 보았다. 침의 차림으로 어깨엔 푸른 도포를 걸친 채였다. 느슨하게 머리를 묶어 낸 신아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 물건을 사러 나가시는 것 같았다. 선물 주는 것에 크게 기뻐하는 분이니 막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하루 내도록 신경 쓰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제는 제가 스승께서 나설 길을 닦아 두었으니 보내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현수. 그를 생각하자니 또 불쾌함이 치달아 눈을 구겼다. 그 파리한 존재감으로, 저를 마주하며 수선의 몸에 염려를 얹던 이였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제 스승을 만난 후 일대를 비워 낸 것을 보면 스승께서 얼마나 저를 어여삐 여기셨는지 알 수 있었다. 그전까진 제 말을 따르지 않는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수선께선 안아야 할 이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품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감자면 타인을 마주하고도 다정한 스승님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자면 장을 불태우지 않곤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나설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기다리자니 속이 답답했다.
분명, 없으면 숨도 쉬지 못한다 말씀드렸는데도. 화선은 무감한 낯을 가장했다. 그러나 뒤엉킨 감정들은 수산의 흙바닥을 어지럽혔다.
신아는 크게 박동하는 수산의 기운에 시선을 들었다. 저 멀리 까만 그림자가 보이니, 그는 제 스승이셨다. 제가 내보이는 불안 또한 안으시며 답답한 복색을 흐트러트리지 않는 분.
신아는 자세를 바로 해 스승을 맞으려 했다. 그러나 입매가 당겨지지 않으니 저 스스로도 얼마나 심사가 뒤틀렸는지 알 수 있었다. 신아는 짧게 한숨 쉬었다가, 다시금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검은 천을 거두어 내고 훤한 낯을 내보인 스승의 두 눈을 마주했다. 마주한 스승의 낯이 조금 굳어 있었다.
장을 나서며, 수는 우글대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별수 없지 않은가. 그런 평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분란의 시대는 너무도 길었고, 한순간에 평화를 받아들이기엔 불신이 깊었다.
그러나 못내 서러웠다. 저는 화국 땅에서 수선 욕을 들어본 적이 없거늘. 미안해서 신아를 볼 자신이 없었다. 설움은 곧 죄책감이 되었고, 죄책감은 곧 억울함이, 억울함은 곧 오기가 되었다.
‘아가. 내일 지마당이 불바다가 될지, 안 될지. 그건 모르는 일이지.’
누구나 직접 보아야 진실을 가늠한다. 그리고 저는 보일 수 있었다.
“신아야.”
각오를 담은 부름에 신아가 천천히 걸어 스승의 낯을 쓸어 내렸다. 잘 다녀오셨냐 뱉고 싶었으나, 알 수 없는 분위기에 공기가 무거웠다.
“부탁이 있어.”
“…스승님께선 제게 부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신아는 스승께서 밤을 언급하고 계심을 깨닫고 혀를 씹을 뻔하였다. 무엇을 원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신아는 제가 모르는 일에 눈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그러니까 신아야.”
수는 신아의 두 손을 그러쥐고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신아는 그 낯에서 끝없는 애정과, 설움을 읽어 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어야,
“내일. 강단에 오르거든, 웃어 줬으면 좋겠다.”
아, 신아는 탄식하며 입 안 여린 살을 물었다.
“스승님…. 혹여 누가 제 이야기를.”
“그거면 다 괜찮아.”
신아는 입을 닫고 말없이 스승을 내려 보다, 결국 웃음을 흘렸다. 저를 욕보이는 말을 듣고 오신 것 같은데, 그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너무도 다디달았다. 스승께서 믿는 것을 모두의 앞에 보여 달라는 말이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응.”
“수지 타산이 안 맞을 텐데요.”
“응…?”
“원하는 대로 해 주신다니, 설레서 잠이 안 올 듯합니다.”
“뭐, 얼마나 하고 싶은 게 많아 그래…….”
벌써부터 질린다는 목소리에 신아는 옅게 웃으며 스승을 안았다. 제 웃음 하나에 대체 무엇을 믿으시는가.
화선의 존재가 경악스러움은 당연한 일인데도, 끝을 모르는 깊은 신뢰였다. 하루 내도록 저를 괴롭혔던 불안들은 이리도 쉬이 사라져 빈자리를 메운다.
“그리고…, 이번 밤은 나도 조금 자신 있어.”
우물대는 음성에 신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려 예, 하고 답했다. 그제야 수도 긴장을 내려두고 다녀왔어, 하며 신아를 안았다.
‘내일. 강단에 오르거든, 웃어 줬으면 좋겠다.’
그 한마디에, 화선은 준비하던 모든 것을 바꾸었다.
두 신은 나란히 앉아 호롱불 아래 서책을 들었다. 겉으로 보기엔 지조 어린 문학도처럼 보였으나 조곤조곤한 말소리와 일렁이는 그림자엔 그렇지 못한 이야기가 실렸다.
“신아야….”
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예, 스승님.”
신아가 방긋 웃으며 그 이마에 입을 맞추니 떨떠름한 낯으로 다시금 시선을 바로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수는 온통 나신뿐인 책을 내려 보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다리를 얽어 놓은 자세가 기이하니 균형을 잡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더 깊숙이 넣을 수 있으니 그렇겠지요.”
“그러니까…굳이?”
으음, 하고 눈매를 좁히자 신아가 손을 들어 그를 넓혔다. 다음 장을 펼쳐 들 때마다 반복되는 행동이었다.
“제 눈에도 딱히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게 좋습니다.”
신아가 서책을 팔락여 다음 장을 펼치니, 수가 으으음, 하며 더 깊게 눈매를 좁혔다. 신아는 익숙한 듯 손을 들어 스승의 미간을 다독였다.
“…전보단 낫네.”
“그렇죠?”
신아는 웃으며 스승의 목덜미를 쪽쪽댔다. 그에 수도 익숙한 듯 눈길을 주지 않았다.
신아가 좋다 한 것은, 한 명은 뒤를 짚어 앉고, 한 명은 그 위에 올라타 목을 안은 모양새였다. 척 봐도 뒤를 짚어 앉을 게 신아고, 그 위에 앉을 이가 저였다.
뭐가 팔이고 뭐가 다리인지도 모르게 얽힌 자세들을 보고 온 터라 나름 얌전한 자세라 느껴졌다.
수는 한참을 내려 보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이건 해 본 적 있을 걸…?”
“없습니다.”
고개를 부비면서도 단호한 어조에, 수가 들어 보라며 그를 밀어냈다.
“아니야. 내가 벽에 기대어 있었을 뿐이지 비슷한 모양새였어.”
“이미 넣은 채로 몸을 일으킨 것이니 다른 모양새였습니다.”
수는 신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눈을 끔뻑였다. 그에 신아가 말을 덧붙여 스승의 이해를 도왔다.
“스승님께서 직접 삽입을 솔선하셔야 의미가 있는 자세.”
“와아….”
수가 신아의 입을 손으로 덮음에, 신아가 스승의 손목을 쥐어 내렸다.
“내가 직접 넣어?”
“그럼요.”
“어떻게…?”
신아는 고개를 갸웃댔다.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스승님께서 제 기둥을 쥐시고 둔부를 벌려.”
책상 엎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수가 습관적으로 신아의 입을 덮으니, 신아가 혀를 내어 손바닥을 핥은 탓이었다.
신아는 스승의 위에 엎어져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웃으며 그 품에 파고들었다.
“제가 부드럽게 풀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야….”
“생각만 해도 아래가 빠듯합니다.”
“좋다는 거지…?”
그럼요. 신아는 웃으며 스승을 안아 일으켰다. 스승의 낯이 못내 심각해 보이니, 손을 들어 구겨진 미간을 다독였다.
수는 엉금엉금 기어가 날아간 서책을 주어 왔다. 다른 거. 그리 생각하며 책을 들었다. 그러나 책을 펼쳐 들기 무섭게 충격적인 자세를 마주해 또 집어 던지고 말았다.
엇갈려 누워 서로의 성기를 입에 문 자세였다. 수는 허허 웃으며 아까 본 그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아도 스승을 따라 웃으며 서책을 다시 주워 왔다.
“정한 거 아니었어…?”
“어찌 한 술로 배부르겠습니까.”
“…….”
“원하는 대로 하라 하시니, 아. 이것도 좋겠습니다.”
신아는 배시시 웃으며 책을 펼쳐 보였다. 무릎을 꿇어앉은 이가 선 자의 성기를 물고 있으니, 수가 흐린 눈으로 신아를 마주했다.
“그…, 신아야 조금 양심 없다고는.”
“물론, 이게 접니다.”
신아는 검지를 펼쳐 무릎을 꿇은 이를 가리켰다. 그에 수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도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스승님께서 제 혀 놀림에 사출하시거든 그보다 뿌듯한 게.”
“아니…! 혀로 그리 문지르면 사출 안 할 사내가 어디 있어!”
“송구하나, 스승님만큼 파들대는 이는 세상천지 없을.”
“악!”
“저라고 턱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요령껏.”
“그만…! 나는 네가 입으로 무는 건 정말 원하지 않는단다….”
수가 간절하게 신아의 턱을 그러쥐니, 신아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워서요?”
“얼굴이… 그 아래로 간다는 거부터가 좀… 그렇지.”
“어찌 정사의 기쁨을 앗아 가시는지….”
신아가 서러운 듯 어깨를 떨구자 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벙긋댔다. 대체 신아의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입에는 혀가 있어 맛이 느껴지질 않아….”
“혹여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저는 뭐든 좋습니다. 설령 스승님께서 흥분을 이기다 못해 제 입에 소.”
“안 해.”
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함에 신아가 스승의 손을 쥐어 붙잡았다.
“그만큼 스승님 몸에서 나오는 것은 다 기껍다는 말이었습니다.”
“…….”
“제가 잘못했습니다….”
손을 꿈질이며 스승의 손바닥을 간질이니, 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에 신아도 얌전히 서책을 내려 두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저랑 맨정신으로 정사를 논하셨으니, 이만하면 뿌듯한 성과였다.
신아는 이불을 덮어 스승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그에 한숨을 내려 쉬는 스승 또한 익숙한 자세로 팔을 뻗어 그 어깨를 안았다.
“스승님. 매번, 무슨 복인가 생각합니다.”
“뭘…?”
“이리 굴어도 버리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수는 눈을 깜빡이다, 신아의 머리를 약하게 쥐어박았다. 그에 신아가 웃는 낯으로 스승의 품에 파고들었다.
“노여워마세요.”
“버린다는 표현 금지.”
“예.”
수는 순순한 신아의 대답에 눈을 찌푸렸다. 결국 다그치기 위해 입을 여는데, 입을 열기 무섭게 신아가 옷자락을 쥐어 시선을 바랐다.
“절대, 버려지지 않겠습니다.”
스승을 향한 동공엔 이채가 감돌았다. 수는 말없이 그를 내려 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아야. 네가 나 버리면 어쩌지?”
신아는 눈을 깜빡이다, 웃음을 터트리며 그 목을 안았다. 괘씸하니 당해 보란 마음이셨을 테다.
“윽, 대답해 봐. 네가 나 버리면 나는.”
“설레서 숨이 부족합니다.”
“아니. 안 설레.”
“눈을 감았는데 영영 안 깨어나면 어쩌죠. 행복해서 숨이 막히니 기이한 일입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가 언짢은 마음을 내려두고 한숨 쉬었다. 신아는 알 수 없는 부분에서 한없이 낮아져 저를 슬프게 했다.
“어서 주무세요, 스승님. 제가 일찍 일어나 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손님이 뭘 알고 준비해 둔단 말이야…. 내가 내려가서.”
“옷을 미리 받아 두었습니다.”
“…….”
잘했다는 토닥임에 신아가 몸을 웅크려 스승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불이 같이 말려드니, 수는 익숙한 듯 이불을 끌어 신아의 등을 덮어주었다.
“…이리 태평하게 굴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수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창선. 제가 태어난 해부턴 수선이 없어 겪은 적 없으나, 예법과 절차가 까다로운 행사임을 모르지 않았다.
‘편히 오세요. 수선의 존재 외에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족에서 저를 과하게 배려하니, 도리어 난감했다. 제가 알던 예법을 따르긴 하겠지만 적절할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존재로 타당성을 드러내라니, 부담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저들도 처음 겪는 존엄이니, 조심스러운 것이지요. 스승님께서 직접 걸음 하는 것에 그저 감사해야 할 겁니다.”
수는 잠시 고민하다, 몸을 돌려 신아를 마주했다. 그에 신아도 순순히 시선을 내어 드렸다.
“내가 십 년 전에 비해 바뀐 게 있는 것 같아?”
신아는 그 물음에 응하듯 천천히 스승의 낯을 훑어 내렸다. 조금 민망해하는 스승의 낯을 훔치다, 쓴웃음을 흘리며 스승을 안았다. 그 어느 때가 되었건 참으로 찬란했다. 제가 그에 목을 매니, 인간이 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선을 뵈려거든 당연하게 눈을 파내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스승께서 싫어하실 테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그냥 전부 자결하면 좋을 텐데.
눈도 파내지 못하고 스승을 내보여야 한다니, 고작 눈 하나 잃게 하는 것도 싫으십니까? 그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정말…. 내일이 마지막이어야 합니다.”
신아는 스승의 품에 파고들어 안정을 찾았다.
“다시는 이리 존재를 드러내지 마세요.”
입이 짓눌려 웅얼대는 목소리였다.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지 못한 수는 그 등을 다독이며 눈을 끔뻑였다. 저를 내보이기 싫어하는 신아의 질투임을 인지하자 아아, 하고 입을 벌리다 황당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허면 내일이 마지막 기횐가?”
“그럼요.”
“그럼 집마다 들러 나 좀 봐 달라 해야겠다.”
“스승님….”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을 긁으니, 수가 웃으며 그 등을 다독였다.
“내가 네 존재감 반절 정도는 된다면 좋을 텐데.”
“…….”
“네가 내 옆에 있으니 괜찮을 거야.”
그렇지? 하고 물으니, 신아는 대답하지 않고 스승의 품에서 숨을 골랐다.
“…스승님께선 제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얼굴?”
신아가 아무 말 않고 입을 닫자 수는 농이라며 웃음을 흘렸다. 매번 제가 말려드니, 가끔 신아가 당황하거든 뿌듯했다.
“신아야. 내 앞에 너를 낮추지 말고, 스스로를 악이라 여기지 말아.”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낮은 것이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각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생각을 바꿔야 할 거야.”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건조하기 그지없는 어투에 수가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호롱불을 끄기 위해 몸을 일으키니, 신아가 스승의 소매를 쥐어 조심스레 당겼다.
“제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싫으셨을까요?”
수는 호롱불에 손을 뻗은 채 눈을 끔뻑이다 아아,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불도 끄지 못한 채 아이를 안아 이불을 뒹굴었다.
“농이라 하지 않았어…!”
“얼굴이라도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아니…! 농이래두.”
“제게서 보는 게 얼굴뿐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걸 믿으면 안 되지…!”
“그리 말씀하셨으니 믿어야.”
“신아야.”
그 부름에 시선을 올리니, 수가 말갛게 웃으며 콧등을 찌푸렸다. 예뻐라. 이리 고운데 안 고와도 상관없다 말하기가 우스웠다.
“네 낯이 아닌, 존재에서 빛이 나는구나. 모두가 반하여 수선 대신 돌보아 달라 청하면 어쩌지? 내 너를 볼 틈도 없게 말이야.”
“…그럴 일 없습니다.”
“허면 엉엉 울며, 안 된다고. 내 것이라 해야겠다.”
“스승님.”
“하하, 응?”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뭘?”
“내 것이라고요.”
“하하! 그 말밖에 귀에 안 들어오는 거야?”
“아니요. 타인에게 엉엉 우는 모습도 보이지 마세요.”
“…….”
모두가 반한다는 말은 왜 못 듣는지. 다시금 엉겨 붙는 신아에 고개를 저었다.
“신아야. 너는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어.”
“싫습니다. 스승님께서 가졌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웅얼대는 목소리에 수가 실수했노라며 이마를 짚었다. 버릴 수 있다는 말에 힘을 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스승이 시름하며 몸을 뒤트니 신아가 그를 안아 품을 바랐다. 별수 없이 팔을 벌려 어깨를 다독여 주심에 신아는 웃으며 등불을 꺼트렸다.
“스승님. 타인 앞에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 약조해 주세요.”
“그럼. 그럴 일 없을 거야….”
“약조하신 겁니다.”
“네가 있는데 울 일이 있겠어…….”
수는 별 뜻 없이 입을 열었으나, 신아는 그 말에 가슴이 따끔거려 몸을 웅크렸다. 신아가 스승의 손을 쥐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바람에, 간지러운 웃음과 함께 신가의 밤이 막을 내렸다.
* * *
이른 아침, 거대한 축제에 앞서 시끄러운 수산. 그 꼭대기에 놓인 신가에서 수선은 두 팔을 벌려 환복을 도움 받았다.
넓은 소매에, 아래에 잔주름이 져 크게 부푼 속이 비치는 흰 옷감을 살이 비치지 않도록 다섯 겹을 덧대어 입었다. 그 위로 물빛을 띤 허리띠를 둘러 묶고 남은 천을 허리 뒤로 늘어뜨리니 흰빛과 물빛이 섞여 일렁이는 호수처럼 보였다.
허리띠와 비슷하나 조금 더 짙은 빛이 감도는 천을 어깨에 두르곤 수는 시선을 들어 신아를 보았다. 수산의 전통 옷을 신아가 알고 입히고 있으니 어찌 그리 잘 아느냐 물었다. 그에 열심히 공부했노라는 답이 돌아왔다.
신아는 복색은 같으나, 몸 전체에 두르는 옷 색은 검은빛에, 허리엔 화려한 금자수가 놓인 붉은 천을 덧대었다.
수는 왜 홍색이 아니냐 물으려다가 그 복색이 참으로 고결하여 눈을 깜빡였다. 이리 준비해 주셨어? 하고 물으니, 제가 부탁드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수는 신아를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왜 그랬느냐고 묻지 못했다.
수는 저를 앉히는 신아에 머리를 내어 주다, 신아가 끈을 엮어 머리를 땋아 내림에 웃음을 흘렸다. 제 머리가 화국에서 혼례 때에 하는 머리임을 인지하자 신아의 복색 또한 화국의 혼례복 색상을 갖추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돼?”
“이에 제가 마음의 위로를 받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무슨 위로?”
“제가 스승님 부인이라고요. 이리 남들에게 얼굴을 보이고 계시지만, 결국 제 서방님이라 위안 삼을 생각입니다.”
스스로를 부인이라 칭하는 신아에 수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신아야. 내가 화국의 혼례에 여인이 머리를 땋음을 알고 있는데, 이리 속일 셈이야?”
“…….”
“와아, 정말 속일 작정으로….”
탄식하며 고개를 돌리니, 시무룩하게 늘어진 신아를 마주했다.
“싫으시면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스승님을 보며 눈을 빛내겠으나 참을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무섭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겠지요…….”
수는 눈을 끔뻑이다 슬금슬금 몸을 바로 했다.
“그래…. 둘 다 사내인데 누가 부인인지가 중요하겠어…….”
달래는 어조에 신아가 눈을 휘어 웃었다.
“그렇죠?”
“으응….”
신아는 꼬아낸 줄을 머리칼에 엮어 남은 줄을 매듭지었다. 다 됐어? 하고 스승이 물으니, 예, 하고 웃으며 답했다. 누가 혼례복인 줄 알면 어쩌지? 하는 물음엔 이것저것 틀린 구석이 많으니 알 리 없노라 스승을 안심시켰다.
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달각였다. 작은 복주머니를 소맷자락에 감추고 큰 보따리를 안아 슬금슬금 돌아와 앉았다. 곧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보따리를 풀어내니, 그 안에 든 장신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민망한 웃음을 감추며 옥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여기.”
신아의 손을 쥐어 왼손 엄지에 끼우니, 신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어찌 제 손 굵기를 아십니까.”
“매일 만지지 않아.”
“매일 만지신다는 말이 듣기가 좋습니다….”
“어째 좀 무섭게 들리면 기분 탓이겠지…?”
수는 신아가 답하지 않음을 애써 무시하며 다음을 꺼내 들었다. 얇은 견사로 촘촘히 짜 내려 붉은색을 입히고, 붉은 자수로 마무리한 댕기였다.
“비녀도 많이 샀는데, 아무래도 무거울 것 같아서.”
“뭐든 기껍지 않겠습니까.”
신아의 말에, 수는 웃으며 신아의 뒤에 가 앉았다. 저는 창선복을 갖추어 입고 머리를 땋았으며, 신아는 색을 달리 입고 머리를 내려 묶었으니 서로의 전통과 선호가 뒤섞여 엉망인 복색이었다.
수는 손 빗질로 신아의 머리칼을 쓸어내려 아래로 머리를 묶었다. 붉은 천이 검은 머리칼에 얽혀 들어 썩 보기가 좋았다.
수는 고개를 빼 이리저리 신아를 살피다, 더는 꾸밀 구석이 없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사 온 것은 한 아름이지만 뭐를 더 덧대기에 이미 너무 화려한 듯싶었다. 그만 되었노라 자리에서 일어섬에, 신아도 그를 쫓아 걸음을 옮겼다.
“스승님.”
“응.”
“기를 흘려주세요.”
수는 문고리를 잡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 신아가 스승의 어깨를 감싸 쥐니 수는 신아의 입에 기를 불어 주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엷은 미소를 올렸다.
“…지금?”
“예.”
“…아 해 봐.”
신아가 얌전히 입을 벌림에 수는 웃으며 그 입에 숨을 불어 넣었다. 신아는 제 안에 내려앉은 푸른 기운을 느끼며 스승을 내려 보았다. 수는 그 시선에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신아야. 사실 기는 이리 넘겨주는.”
신아는 더 듣지 않고 허리를 숙여 스승의 입을 덮쳤다. 수가 어깨를 밀어 거리를 벌렸으나, 신아가 턱을 쥐어 입 안을 탐하니 포기한 듯 맞붙인 입 새로 기를 흘려주었다.
신아는 타액에 섞여 넘어오는 기를 달갑게 삼켰다. 부족한 듯 몸을 붙여 오는 신아에 수는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적응하기 어려운 감각에 몸을 움찔대니, 신아도 그만 웃으며 입을 떼었다.
조심스레 스승의 턱을 쥐어 엄지로 입을 닦았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에 자꾸만 갈증이 일었다. 눈앞이 아찔하여 이를 물려다 눈에 걸리는 옥반지에 정신을 되찾아 웃음을 흘렸다.
수는 입을 움찔대다 물끄러미 신아를 보았다. 신아가 저를 속이려 들었으니, 저도 말하지 않은 게 있었다.
“신아야.”
곧은 부름에, 신아가 시선을 들어 스승을 마주했다. 문 새로 넘어드는 햇살이 수산의 주인을 비추었다.
“수산에선, 혼인한 여인이 엄지에 옥반지를 낀단다.”
“…….”
“자업자득이야. 그렇지?”
수가 입매를 당겨 웃곤 몸을 돌리니, 신아는 멍하니 그 등을 보았다. 아아, 정말 어쩌지. 화선은 웃음을 흘리며 스승의 뒤를 쫓았다.
늦봄에도 꽃이 만개한 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신의 창선 날이었다.
수선의 뜻이 내리는 날. 모두가 집 밖을 나와 부지런히 지마당을 쓸고 닦았다.
수산의 남쪽, 깎아지른 절벽이 한 면의 벽을 이룬 드넓은 평지. 절벽 앞에 놓인 단상과 그 옆으로 줄줄이 늘어진 천막들, 중앙에 고여 있으나 사시사철 썩지 않는 연못은 고결한 수선의 존재를 드러냈다.
오색 천을 절벽에 늘어뜨리고 흥을 돋우는 연례악이 끊이질 않으니 그야말로 축제였다.
화국과의 화친. 마냥 달갑지 않은 명에 모두가 수선의 존재를 그렸다. 수선께서 나서 불안한 마음을 다스려 주길 바랐다.
이른 아침, 중앙의 연못 뒤 경계를 지키는 무인들 뒤로 끝없는 사람 행렬이 지마당을 메웠다.
소란스러운 지마당에 우현수가 앞장서 인도했다. 그 뒤로 두 어른이, 줄지어 일족의 모든 후계가 걸음 함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짙푸른 예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천막 아래 자리를 잡으니, 우현수가 나무 층계를 걸어 단상에 올랐다. 쉬이 마주할 수 없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냄에 모두가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했다.
우현수는 나무 발이 쳐진 단상을 헤치고 푸른 비단이 덧대어진 종이를 펼쳐 들었다.
[신이 내린 땅에 축복이 내리니, 우리는 그를 평화라 여긴다.]
창선의 시작을 알리는 말에, 천막에 앉은 신지공이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대신관.”
그 부름에 이가연이 조용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서쪽 땅 만물의 기원이 수선에 있으며, 그 뜻이 수산의 미래를 뜻한다.]
“화국의 왕은 어떠하냐.”
“모두가 따르는 성군입니다.”
신지공은 찻잔을 내려 두며 쓰게 웃었다.
[또한, 화선이 수선을 좇으니, 불의 일족도 그들의 신을 좇아 평화를 선망한다.]
“불안하십니까.”
수련자 청, 수산의 동쪽 수자단의 수장 기청아가 말을 붙이니, 신지공이 눈썹을 들어 그를 흘겼다.
“내게 불안을 논하니, 많이 컸구나.”
“전장에 서셨으니까요.”
신지공이 쯧, 하고 혀를 차니 단아한 분위기를 흘리는 기청아가 찻잔을 들어 시선을 내렸다.
[그에 우리는. 수선께서 가진 존엄에. 그분이 내린 평화를 깨닫고, 불안을 틔우던 결계를 거둔다.]
“…화선을 직접 보았는가.”
박기춘의 물음이 이가연에게로 넘어갔다. 이가연은 천천히 머금던 찻물을 삼키고, 연못을 내려 보았다.
“예.”
잔잔한 답변에, 모두가 뒷말을 기다렸다.
[나 우현수, 모두의 앞에 겸허히 내뱉으니.]
“…무엇이 되었건, 의심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신이 내린 땅, 평화의 시작이다.]
그를 끝으로, 창선이 시작되었다.
인파에 몰려 지마당에 들어서지 못한 아이가 울상을 지어 아비를 올려 보았다. 그에 사내가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를 안아 목에 태워 봤으나 연못 근처도 보이지 않으니 난감했다.
“흐으….”
“아이고, 사내새끼가 울면 쓰나….”
사내는 그리 말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고 아이를 안아 달랬다.
“나흐, 도 보고 싶었는데….”
“그럼 그럼. 또 이런 기회가 있을 거야.”
“거짓말! 아버지는 거짓말쟁입니다! 일전에도 열 밤이면 수산에 돌아오실 거라 하셨지 않습니까!”
빽, 하고 소리 질러 엉엉 울기 시작하니, 사내는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윤아. 창선 날 우는 이가 어디 있어…. 어른께서 보심 너 잡아간다?”
“아으… 어른은 무슨…! 코빼기도 보이질 않습니다……!”
시끄럽게 울기 시작한 아이에 사내는 당황하여 자리를 피했다. 지마당과 조금 떨어진 바윗길에 앉았으나 그 울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되었는데…. 말을 걸어 주심은 꿈에도 바라지 않았으흐.”
못내 설움을 감추지 못하니 우스우면서도 안쓰러워 머리를 긁적였다. 아가. 그리 말을 떼려던 사내는 흠칫대며 말을 멈추었다.
“저런…. 늦었으니 미안해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사내의 숨이 굳었다. 제 안에 내려앉은 기가 요동쳤다. 처음 느껴 보는 감각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한때, 저도 수산의 무인이었다. 믿을 수 없으나, 제 뒤에 선 존재가 수선인 것 같았다.
그렇게 천천히 몸을 돌린 후, 사내는 아무 말 못 하고 입을 벌렸다.
“윤아….”
“다 밉습니다! 수선이고, 아비고 다 밉단 말입니다…!”
“윤아…….”
“눈물만 닦아 줘도 되겠습니까.”
다정한 속삭임에 사내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곧바로, 저를 깔아 보는 눈을 마주하곤 어깨를 떨었다. 오늘의 사안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 뒤에 선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 않았다.
사내는 다급히 제 아들의 손을 쥐어 시선을 피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이의 소매를 당기는데 아이는 그 손을 뿌리치고 눈을 덮어 울었다.
“으아앙! 일, 찌힉 오자고 내, 흐가…!”
“뚝, 하렴. 아버지가 곤란해하시질 않아.”
“흐… 갈, 길 가흐세요!”
“미안하다. 길을 헤매느라.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어.”
어깨를 다독이는 음성이었다. 아이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쳐들었다. 눈물이 부옇게 들어찬 시야엔 눈가를 쓸어 주는 손길이 맺혔다.
‘아버지는 수선을 뵌 적 있습니까?’
‘그러엄. 하늘의 문을 여시는 모습을 보았거든.’
‘정말 선녀 같았습니까?’
‘하하, 누가 그런 소릴 해?’
‘어머니가요!’
‘으음…, 글쎄…. 아비 눈에는.’
아이는 제 앞에 선 존재를 깨닫고 눈을 끔뻑였다. 곧이어 왠지 모를 설움이 더해져 빽, 하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에 수가 당황한 듯 아이를 안아 등을 쓸어 주었다.
‘선녀라기보다는…. 신 같았지.’
사내는 수선을 앞에 두고도 울음을 터트린 자식에 발을 동동 굴렀다. 폐를 짓누르는 위압감이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 차마 시선을 들진 못하고 아이를 안았다. 화선이 수산을 불태우려 든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못내 마음이 조급했다.
“윤아, 바쁘시니. 어서 인사드려.”
초조한 아비의 음성에, 아이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럴 때마다 굵은 눈물방울이 보드라운 뺨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저는 똑 부러지기론 입 아픈 이 동네의 자랑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제 엄, 머니께선 병상에 누워 계신데, 수선께서 오신, 이후 병이 나으셨습니다. 수산의 정기가, 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결의에 찬 아이의 눈빛에 웃음을 흘렸다.
“그, 수선이시여어…. 그러니, 저는 수선이 너무 좋고… 어.”
“윤아…!”
“저는, 그래서 화국도 좋습니다. 아, 아니 화선이요.”
그래서 보고 싶어서! 말이 길어지니 사내가 고개를 조아려 아이를 안고 뛰어갔다. 수는 멀거니 그 등을 보다 웃음을 터트려 신아를 올려 보았다.
“들었어?”
“…….”
“하하! 정말….”
너도 저만할 때가 있었는데. 수가 웃으며 화선의 손을 쥐어 당기니, 신아가 한숨을 토하며 이마를 짚었다.
“귀여우십니까?”
“그러엄. 네가 좋다는데.”
“…스승님.”
“가자, 다 왔구나.”
아이면 다 좋으십니까? 화선이 물으니, 아마? 하고 수선이 답했다. 그에 화선이 멈추어 서서 뒤틀린 마음을 감추지 못하니 수선이 웃으며 그 등을 다독였다.
꿈쩍 않는 화선에 수선은 주위를 둘러보다 조심스레 귓가에 속삭였다.
수는 민망한 웃음을 감추었다. 그에 화선이 한숨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반칙입니다.”
“으응….”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리 말씀하실 게 아니면.”
“신아야….”
수가 말을 막았으나 신아는 언짢은 듯 말을 이었다.
“정말…. 아이 때부터 보고 정사까지 논할 수 있음이 저밖에 없는 게.”
“늦겠다!”
얼굴이 벌게진 수선이 손을 당기니 화선이 그를 못 이겨 걸음을 옮겼다.
두 신이 인파를 뚫고 걸음 했음에 우현수가 마시던 찻물을 뱉었음은 당연하다.
두 신이 움직이는 지마당이 고요했다. 모두가 그 존엄함에 고개를 조아렸다. 저게 신이구나. 같은 생각을 하며 쿵쾅대는 심장에 손을 얹었다. 이리 가까이서 볼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와닿는 존재감이 더했다.
수선은 흐리게 웃으며 그 사이를 걸었다. 저 멀리 이마를 짚고 시름하는 어른이 보이니, 송구하게도 제가 뭘 실수한 듯싶었다.
수는 고개를 들어 지마당의 절벽을 보았다. 오색 천이 흩어져 수산의 축제다웠다.
창선이라. 그에 설 날이 오는군.
수는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신아의 손을 쥐었다. 순식간에 안정감이 들어차니, 웃음을 흘렸다. 연못에 다다르자 손끝에 기를 담아 신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두 신은 고요히 걸어 연못의 수면을 밟아 건넜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두 신의 옷자락이, 검은 머리칼이 흩날렸다. 어린아이라도 직접 보면 알 수밖에 없었다.
닿을 수 없는 존재감. 인간이 아니라는 위압감. 서쪽과 동쪽 땅을 이끄는 두 주인이었다.
수는 기척 없이 걸어 단상의 계단을 올랐다. 창선이란, 수선이 그 뜻의 타당성을 보이는 날. 그 존재가 곧 수산의 의지였다.
수는 단상에 올라, 조용히 뒤를 돌았다. 그에 연못 끝에 선 화선을 마주했다.
언제 멀어졌지? 수는 멍하니 옆을 보았다. 분명 손을 쥐어 오고 있었는데, 언제 멀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는 문득 제 눈앞의 장면이 참으로 기묘하다 생각했다. 수산의 정경과 연못 위에 선 화선. 그 뒤에 줄을 이은 일족이 한데 섞여들었다.
“…신아야?”
수는 조용히 그를 불렀으나, 그 거리에 목소리가 닿을 리 없었다. 허나 화선이 그 부름에 응하듯 미소 지으니, 수산이 크게 일렁였다.
화선은 조용히 스승을 등지고 주위를 훑었다. 개미 떼. 그리 생각하며 팔을 들었다.
흘러내리는 소맷자락에, 모두가 홀린 듯이 그 움직임을 좇았다. 화국의 신. 당장 수산이 터져 나갈 듯한 존재감이었다.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제아무리 잔혹한 동쪽 땅이라 한들 신은 신인가. 모두가 그 고결한 낯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화선은 허공을 가볍게 쥐어, 그대로 허공을 내려쳤다.
쾅! 하고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연못 위로 불길이 치솟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일족의 비명이 섞여들었다.
“이 무슨!”
“앉아!”
천막 아래 앉은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니 우현수가 일갈했다. 그에 모두가 시선을 돌려 우현수를 돌아보았다.
“어른! 이를 보시고도…!”
“지금 수선께서 계신다. 소란 피우지 말아.”
“어른…!”
“대신관! 이러고도 네놈이 화국에서 홀린 게 아니라 말할 수 있어!”
박기춘이 크게 소리쳤으나, 자리에 앉은 이가연은 불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가연!”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너…!”
보세요. 그 나지막한 부름에, 모두가 시선을 돌려 연못을 보았다.
그에 불길로 걸음 하는 화선이 시야에 맺혔다. 불을 불러 수산을 불태우는 줄 알았으나, 스스로 불기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눈을 의심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꼭, 죽으려는 것 같았다.
그 끝없는 애정 아래 살았으니, 어찌 잃겠습니까. 이가연은 조용히 읊조렸다. 수선의 신뢰가 불을 바꾼다. 그러니 평화는 진실이었다.
수는 신아가 하려는 일을 몰라 숨이 굳었다. 뭐 해? 그리 묻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신아의 웃는 낯이, 무언가를 작정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화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연못을 걸어 불길을 향했다. 모든 것을 덮칠 듯한 불기둥 앞에 머리칼이 크게 일렁였다. 검은 동공에 타오르는 불길이 담기니, 화선은 눈을 감았다.
다 죽이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겁만 주려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웃어 줬으면 좋겠다.’
화선은 웃음을 흘렸다. 제 스승님이 믿으시는 바를, 저는 거스를 수가 없다.
화선이 불기둥에 발을 내딛음에 수의 머리가 하얘졌다.
“신아야!”
급히 튀어나긴 목소리에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화선이 불길 안으로 자취를 감추니 수는 생각을 멈추고 손을 쳐들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널뛰어 갈비뼈가 부러질 것 같았다.
단숨에 손을 끌어 내리자, 연못의 물이 파도치듯 튀어나와 불기둥을 덮었다. 일족은 두 신의 힘을, 맞부딪히는 상극의 힘을 마주했다. 그 순간, 얼핏 보이는 화선의 낯에 모두가 굳어 섰다.
지글대는, 물이 기화되어 흩어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에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숨을 덮치는 물기에 모두가 콜록대며 입과 코를 막았다.
수는 벌벌 떨리는 몸으로 층계를 내렸다. 다리에 힘이 풀릴 듯싶어 걸음이 쉽지 않았다. 왜? 의문을 가지기 무섭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불타는 화선. 그보다 끔찍한 일이 없었다.
절망이 수선의 시야를 덮치기 전, 수산에 큰 바람이 불었다. 그에 시야를 막던 공기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수는 저를 올려보는 곧은 시선에 탄식했다.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고 안심이 들어차니, 어째 서러워져 얼굴을 덮었다.
물 한 방울에도 젖지 않은 화선은 강단을 향해 걸었다. 연못 위를 걸어, 지면을 밟음에 온 수산이 숨을 죽였다. 머리에 묶어 낸 붉은 댕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모두 그 등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물이 불을 뒤덮을 때, 입매를 당겨 웃던 화선이 잔상처럼 어른댔다.
동쪽의 신이 평화를 좇는다. 왜? 화국은 언제나 불안정했고, 수산은 매번 고통받았다. 그러니 초조하고, 불안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선의 뜻이었다.
왜 동쪽 땅의 신을 믿으시지? 왜 화선이 수선을 따르지? 모두가 의심했으나 누구도 함부로 뱉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순간, 불길에 타오르는 화선을, 그를 구하려는 수선을 목도했다.
수선을 향해 걷는 화선이 그 낯에 미소를 올리니, 모두가 입을 막아 탄식했다. 화선이 수선을 따르는 이유를 보였음과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 내보인, 화선의 삶이었다.
“스승님.”
“…오늘만큼은 네가 원망스럽다.”
“…송구합니다. 싫어하실 것 같아서요.”
수는 탄식하며 얼굴을 덮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심장이 나가떨어지는 줄 알았다.
“직접 보아야 믿는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가 불타는 꼴을 보이라는 건 아니었어.”
“두 번이나 구원받았으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래서 기를 달라 했구나…. 애초에 연못에 서서.”
“스승님.”
신아가 스승의 손을 쥐어 조심스레 일으켰다. 그에 수가 몸을 비틀대며 자세를 바로 했다.
“웃는 낯은, 제가 스승님을 따라 하는 모습인걸요.”
“…….”
“잘 따라 했을까요? 허면 모두가 반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아, 정말…….”
수가 시름하며 두 눈을 꾹꾹 누르니, 신아가 웃으며 그 옆에 자리했다.
“창선을 끝내 주세요. 사실, 아까부터 저들이 스승님의 말을 기다리는 게 못내 불편합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음을 깨달았다. 수는 맥이 빠져 웃음을 흘렸다. 신아야, 모두 널 보고 있는 거란다.
수는 눈을 감아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렇게 마음을 진정시켜 제 옆의 신아를 올려 보았다.
“정말이지….”
오직 저만 보며 미소 지음에, 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이기겠는가.
수선이 손을 들어 허공에 얹으니 모두가 그 몸짓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색 창선복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곱게 땋아 내린 머리끈과 함께 흩날렸다. 그 옆에 서서 수선을 내려 보던 화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
그리 뱉으며 손을 내림에, 지마당엔 두 신의 존엄을 그리는 함성만이 가득했다.
이날 이후, 그 누구도 화국의 평화를 의심치 않았다. 모두가 두 신을 마음에 품어 존엄을 새겼다.
진정, 평화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 * *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수는 땀을 삐질 대며 신아의 눈치를 살폈다. 잠깐 인사 좀 드리고 간다는 게, 이리 판이 커질 줄은 몰랐다. 어른께서 당연한 듯 대나무발 아래 자리로 이끄니, 수는 그 아래 신아와 앉아 수산의 술판을 구경했다.
중간에 나가자니 모두의 이목이 쏠릴 것 같아 끝을 기다렸다. 차마 이리 오래도록 술자리가 끝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원래 창선 날 술을 마셨던가? 수는 저희들 몫으로 내려온 술을 네 병째 들이키는 신아에 마른침을 삼켰다. 탁주만 아니면 된다 이건가. 흐린 눈으로 술로는 신아를 상대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수산의 남쪽, 지마당의 옆 작은 누각에서 더는 못하겠다며 자리를 떠나는 이들에 빈자리가 늘어났다. 대나무발을 경계로 수선과 화선도 함께하니, 모두가 끝까지 버텨 같이 술을 마시겠노라는 다짐으로 잔을 들었다가 실려 나갔다.
그 사이에서, 수선은 화선을 향한 칭송만을 귀에 담으며 웃음을 흘렸고 화선은 수선을 향한 칭송만을 귀에 담으며 술병을 깨트렸다.
“하하…, 젊은 놈들은 못 이기겠구만.”
우현수가 비틀대며 연죽을 꺼내 들었다. 그를 확인한 수가 기겁하며 신아의 옆에 의자를 붙이고 앉았다. 그래도 화선이, 손님이 있는데. 이성이 조금 날아가신 게 아닌가? 천천히 걸어 누각을 빠져나가는 우현수에 부연 연기가 대나무발을 넘었다.
신아는 제 입과 코를 덮은 손에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저런 약초 따위는 아무런 효능도 보이지 못하는데도. 매번 제 안위를 챙기는 스승에 눈을 떼지 못했다.
수는 우현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통약일 거야…. 아프지 않은데 향을 맡으면 몸에 안 좋으니까….”
수는 말하다 말고 몸을 움츠렸다. 당황하여 눈을 끔뻑이며 신아를 보았다. 신아가 제 손을 핥은 탓이었다.
“취…, 한 건 아니지…?”
“어때 보이십니까…?”
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아는 그런 스승의 반응에 몸을 숙였다. 수는 신아가 쓰러지는 줄 알고 그를 안아 드는데 신아가 스승의 귓가에 웃음을 흘렸다.
“어찌 취하겠습니까…. 오늘 밤이 길 텐데요.”
사근사근 속삭이는 말소리에 수가 몸을 떨었다. 신아가 멀쩡한 낯으로 웃으며 몸을 일으키니, 얼굴이 홧홧했다. 그 반응에 신아가 만족스러운 듯 술잔을 들었다.
대나무발에 가려, 둘이 아니고서야 보이지 않는 광경이었다.
모두가 나가떨어진 누각엔 강지혁과 이가연만이 멀쩡한 낯으로 잔을 들었다. 둘 다 말이 많은 편이 못되니 마주 앉은 술자리가 적막했다.
강지혁은 대나무발 너머를 힐끔대다 시선을 바로 했다. 그 시선을 읽은 이가연이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웠다.
“수선께선 신경 쓰지 않으실 겁니다.”
이가연의 말에 강지혁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정곡을 찔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저는 수선의 뜻을 의심했다. 그러나 두 신이 안은 힘을, 수선이 화선을 압도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니 못내 마음이 불편했다. 부정했으나, 쉬이 납득당해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불충한 자신에 실망한 것도 있었다.
“…답지 않군.”
강지혁은 생각을 정리하다, 눈썹을 꿈틀댔다. 그에 이가연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네가 위로를 하는 이던가. 답지 않은 호의에 구역질이 일어.”
“호의인 줄은 알고 있으니 구멍 난 머리가 채워졌나 봅니다.”
“또 쌈질이십니까?”
다가오던 기청아가 한숨 쉬며 탁자에 술병을 내려 두었다. 각지에 흩어져 딱히 모일 일 없는 옛 수련자들이니, 가끔 만나거든 생기는 일이었다.
기청아는 탁자 하나를 끌어 앉아 술잔을 들었다. 그 역시 저 멀리 대나무발을 힐끔대다 술을 삼켰다.
“아쉬운 건 별수 없습니다…. 수선과 한 잔이라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거늘.”
그 말과 동시에 대나무발 너머로 술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청아는 그저 손이 미끄러지셨겠거니 여기며 다시금 대나무발을 보았다. 그러곤 소곤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술 한 잔을 올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금방 떠나신다고 하니, 지금을 놓치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그에 이가연은 대꾸하지 않았고, 강지혁은 눈썹을 꿈틀댔다. 기청아는 강지혁의 반응에 웃음을 흘렸다.
“저만 그런 게 아닌 듯한데. 어찌 생각합니까, 동무?”
강지혁이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술을 들이켜자 기청아가 코웃음을 흘렸다.
“저런. 본인이 좀 찌질하다 생각되지는 않습니까. 대장군?”
“…좀 눈치껏 굴었으면 하는데.”
이가연은 대뜸 제게 말을 던지는 강지혁에 시선을 들다, 눈을 깜빡였다. 제가 있으면 자존심이 상해 수선께 가기 어렵단 소리와 같았다.
“아니, 네놈 제자들 말이야. 눈빛이 따가우니 그만 꺼져.”
강지혁은 이를 물어 층계를 가리켰다. 그 앞엔 술병 하나를 들고 선 가의 제자들이 스승의 일과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기청아가 강지혁의 손끝을 따라가다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하지 않은가. 그리 생각하며 괘씸한 제 제자들을 떠올렸다.
이가연이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니, 강지혁은 썩 꺼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이가연은 잠시 탁자를 내려 보다 고개를 까딱였다.
“두 눈이 온전하시길 빕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리고 사라짐에, 둘은 눈을 끔뻑댔다. 대신관이 미래를 볼 수 없는 게 맞는가? 하고 강지혁이 물으니, 기청아는 그렇게는 알고 있습니다만, 하고 답했다.
둘은 잠시 눈빛을 주고받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어깨가 짓눌려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쳐드니, 곧장 저희를 내려 보는 이와 두 눈이 마주쳤다.
강지혁은 제 앞의 화선에 마른침을 삼켰다. 오는 기척도 느끼지 못했으니 뒤통수가 서늘했다. 무인의 본능이 위험함을 알렸다.
“술을 드시고 싶다고요.”
신의 눈매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둘은 화선의 낯을 시야에 담지 못하고 눈을 흐렸다.
수는 강지혁을 부축해 나가는 신아에 머리를 긁적였다. 기특하다 해야 할지.
신아는 갑자기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가 사형들과 술을 들었다. 거리가 멀어 들리진 않으나, 무서운 속도로 술병이 쌓여 갔다. 그냥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 생각하며 어깨를 떨었다.
수는 난감함에 이마를 문질렀다가, 제 소매를 더듬었다. 주위를 살피며 복주머니를 꺼내기 무섭게 대나무발 너머로 뻗어 들어오는 손에 혀를 씹었다.
“수선이시여….”
탁자 위에 엎어져 있던 기청아가 흐물흐물 걸어 수선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그에 수가 쿵쾅대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마른침을 삼켰다. 기청아의 시선에선 보이지 않으나, 수의 시야에선 그가 똑바로 보였다.
“오셔서 기쁩니다….”
그리 말하며 탁자를 짚어 몸을 쪼그리니, 수가 눈을 깜빡였다. 많이 취하셨군. 웃음을 흘리며 예, 하고 답했다.
“화국에서 지내실 생각입니까….”
“…예.”
“그래도… 한 해에 한 번씩은 오셨으면 합니다. 산의 정기가 오직 수선의 존재에 널뛰지 않습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화, 선과 함께 오세요.”
무섭지만, 기청아가 웅얼대니 수가 예? 하곤 코를 찡그려 웃었다. 수는 대나무발을 걷어 기청아와 두 눈을 마주했다. 참으로 찬란하십니다. 기청아는 차마 뱉지 못하고 술병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턱, 하고 내려앉는 소리에 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한 잔만 나눌 수 있다면,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리 내뱉으며 우당탕 소리 내며 나무 바닥에 쓰러졌다. 술기운을 이기다 못해 잠드신 듯하니, 수는 웃음을 터트렸다. 신아에게 온 신경이 팔려 그렇다 할 인사도 드리지 못했으니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청아를 벽에 기대어 앉히고, 그가 가져온 술병을 들어 병 입구를 코끝에 대었다. 달큼하고 쌉쌀한 향이 올라와 으, 하고 눈을 찌푸렸다.
수는 층계를 밟아 오르는 나무 바닥 소리에, 신아가 오고 있구나 생각했다.
‘어찌 취하겠습니까…. 오늘 밤이 길 텐데요.’
수는 민망한 마음을 감추고 복주머니를 꺼내어 그 안에 환 세 개를 내려 보았다.
제가 알던 수선의 존재는 저보다 훨씬 아득했었다. 이리 사람들의 술자리에 끼일 수 있는, 그런 위치가 아니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근본 없는 신은 격이 없으니, 화선이 그 격을 드높인다.
수는 웃으며 환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곤 술병째로 술을 들이켰다. 제 뒤에서 멈추어 선 발소리를 느꼈다. 목구멍을 타고 드는 씁쓸함에 눈을 찌푸려 웃었다.
“신아야.”
그 부름에, 온 누각이 고요했다.
이가연은 저 아래 던져진 강지혁을 보았다. 눈이 멀쩡하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만취한 것으로 보아 기청아도 멀쩡할 리 없었다. 어린 동자들이 높은 지위에 손도 대지 못해 울상 지을 테니, 시신 수습하듯 누각에 올랐다.
이가연은 이미 만취하여 쓰러진 기청아와,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수선에 걸음을 멈추었다. 술병을 째로 들어 고개를 젖히고, 술을 삼키는 소리가 선명했다.
“신아야.”
웃음이 새는 부름에 귓가가 움찔댔다.
“…그만 가자.”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수선은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보았다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건. 더할 나위 없구나.”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리니, 곧바로 시선이 맞부딪혔다. 저를 향하는 시선에서 충만한 애정이 흘러내렸다. 조금 놀라는 듯 커지는 눈동자가, 나른하게 녹아내리는 분위기를 지워 냈다.
등을 태우는 듯한 살의에도 눈을 떼지 못했다. 상상은 했으나, 직접 목도하니 감상이 남달랐다.
…이런 걸 받으며 사는가. 이가연은 제 눈을 덮치는 손에 눈을 감았다.
“그…, 둘이 꽤, 친한가 봅니다.”
수가 나란히 선 신아와 사형을 올려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 신아가 이가연의 눈을 덮었던 손을 치워 스승을 일으켰다. 수는 어째 조금 힘이 실리는 손아귀에 눈을 끔뻑였다.
“그만 가실까요.”
“으,응 뭐….”
수는 신아에게 손목이 붙잡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잠깐 멈추어 서, 고개를 돌렸다.
“사형.”
그 부름에, 이가연도, 신아도 고개를 돌려 수선을 보았다. 수가 입을 벙긋대며 말을 전하니 신아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해 눈을 구겼다.
이가연은 잠시 시선을 들어 화선을 보았다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그 대답에, 수선도 만족스러운 듯 몸을 돌렸다.
* * *
“네가 예쁘지 않냐 여쭤봤대도…!”
수는 신아의 품에 안겨 한껏 그 눈치를 살폈다. 단숨에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니 몸을 웅크려 허리를 붙들었다.
“그걸 왜 속삭이십니까?”
“아니, 당사자 앞에서 말하기 좀… 그래서 그랬지…….”
“허면 그자가 왜 웃는단 말입니까.”
“새삼 네가 예뻤나 보지…!”
신아는 그 말에 눈을 찌푸렸다. 저자가 수긍한 것은 제 스승님의 미소 띤 낯이지 제 낯이 아니었을 터였다. 심사가 꼬인 신아가 속도를 더 하니, 수가 기겁하며 신아를 단단히 안았다.
몇 번이나 헤맸던 수산의 산길을 단숨에 돌파함에 수가 오는 길에 일부러 길을 헤맸느냐 물었다. 딱히 대답하지 않는 신아에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련원 입구를 스치자, 수는 더는 안 되겠다며 신아를 밀어냈다. 사람이 빠져나가 한적해진 수도에 수가 돌담을 붙잡고 숨을 다잡았다.
“토, 할 것 같아….”
스승이 이마를 짚어 시름하자 그제야 신아도 조심스레 그 등을 다독였다.
“…송구합니다.”
수는 속이 들끓다 못해 머리까지 열이 오르니, 더운 숨을 내뱉으며 몸을 웅크렸다.
“속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기세를 죽인 신아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어깨를 주물렀다. 수는 기묘한 감각에 흠칫 몸을 피했다. 옷자락이 스치는 모든 살갗이 예민해지는 것 같았다.
약 기운인가? 성감이라기보단 통각이 커지는 듯한 감각에 눈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신아가 조심스레 스승을 부축해 일으켰다. 스승이 몸을 흠칫대니, 신아는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제게 비밀을 만드시는 것 같아, 서운해서 그랬습니다.”
“…….”
“송구합니다….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습니다.”
수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땀을 삐질댔다. 신아는 보통 같으면 제가 걷겠다 하셨을 분이 순순히 안겨드니, 제가 과하게 속도를 붙였노라며 반성했다.
수련원. 아주 익숙한 길에, 신아는 자연스레 스승과 몸을 붙이던 조그마한 처소로 향했다. 많은 것이 깃든 곳이었다. 모랫바닥을 잘각이며 걸어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수련자들의 처소 끝, 수련자 수의 처소에 다 달았다.
신아는 조심스레 문을 젖히고, 그 안에 스승을 내려 두었다. 곳곳에 스승과 함께 살았던 흔적이 가득했다. 수선이 잠들고도 손대지 않았는지 여전한 곳이었다. 달리 말하면 오래도록 방치된 곳이니, 손끝에 기를 담아 가볍게 끌어 내렸다. 그에 부옇게 쌓인 먼지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갔다.
막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각에 방 안에 호롱불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식은땀에 젖은 스승을 마주하고 몸이 굳었다.
신아가 스승을 벽에 기대어 앉혀 그 이마에 손을 얹었다. 불덩이만치 뜨거우니 심장이 두근댔다. 고뿔인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일에 심장이 쿵쿵댔다.
수는 신음하다 못해 몸을 웅크리고 더운 숨을 뱉었다. 그에 신아가 진정하려 애쓰며 스승을 붙들었다.
식은땀으로 젖기 시작한 이마에 눈앞이 아득했다. 원인을 찾으려던 생각을 지우고 스승을 안으려 들었다. 그에 스승이 기겁하며 몸을 물리니, 신아가 고개를 숙여 스승과 눈을 맞추었다.
“어찌 안 좋으세요. 속이 아프신 겁니까.”
증세를 말씀해 주세요. 또렷한 목소리에 수가 이를 물었다.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의 약효에 이성이 흐려졌다.
차마 신아에게 성감을 돋우는 약을 먹었다 말하기가 수치스러워 헛웃음이 새었다. 원체 아픈 곳이 없어 약을 지어 먹은 경험이 없으니, 너무도 이르게 약을 먹었음이 분명했다.
수는 어지러운 시야를 들어 주위를 둘렀다. 신아와 살았던 방임을 알고 있으니 배덕감이 치솟았다. 이곳에서 정사를? 그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몸 상태로 장소를 옮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신아는 스승의 조소에 공포감이 일었다. 아까부터 참고 계셨던 건가, 제 아둔함에 치를 떨었다. 스승의 몸에서 열이 들끓으니 곧장 자리를 벗어나 뒷산 개울가에서 찬물 한 대야를 떠 왔다. 그러곤 머리를 풀어내어 댕기를 접고, 물을 적셔 스승을 목덜미를 닦았다. 찬물이 닿은 몸이 예민하게 반응해 허리가 퍼뜩 튀었다.
“흐!”
수가 몸을 뒤틀어 눈을 찌푸리니 신아가 탄식하며 스승을 안았다.
“아프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으, 신, 아야….”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듯한 음성에 신아가 이를 물었다. 곧바로 스승의 몸을 닦을 생각으로 스승의 허리를 졸라맨 허리띠를 풀었다. 신아가 스승의 옷을 헤쳐 상체를 드러내니, 아직 이성이 끊기지 않은 수가 기겁하며 도리질 쳤다.
“그 잠, 깐 만지지 마!”
차가운 댕기가 복부에 내려앉자 수가 허리를 퍼뜩 휘어 몸을 웅크렸다.
“헉….”
몸이 잘게 경련하다 곧 귓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신아는 익숙한 반응에 눈매를 좁히다, 설마 싶어 스승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수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덮어 신음했다. 사정하고도 부풀어 선액을 흘리는 아래가 느껴졌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은 처소에, 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신아는 한껏 흐트러진 스승에 눈을 떼지 못했다. 열감의 원인이 성욕에 있으니, 절정에 젖어 한 자 한 자 내뱉는 모습이 끔찍이도 선정적이었다. 물기에 젖어 무거워진 눈꺼풀이 촘촘한 속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네 정욕 좀 따라가려 약을 좀 구했, 는데.”
아, 무래도 실수한 것 같지…? 가슴을 훤히 내놓고, 식은땀에 젖어 실소하는 스승에 신아가 얼굴을 덮어 시름했다.
신아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스스로 약을 쥐어 삼켰다는 말에 성기가 한계까지 부푸니 헛웃음이 새었다. 제게는 스승의 존재 자체가 미약이었다.
“스승님….”
수는 신아가 난감해하는 것 같아 헐떡이면서도 웃음을 흘렸다. 제가 생각해도 제 꼴이 우스웠다.
“잠, 깐 나가……윽.”
점점 더 심해지는 열감에 몸을 뒤틀었다. 몸 전체를 덥히는 간지러움에 괴로웠다.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어 방바닥에 아래를 짓누르자, 그대로 신아의 시야가 뒤집혔다.
신아는 바닥에 몸을 웅크린 스승을 벽에 기대어 앉혔다. 열감에 젖은 스승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신음하니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헐떡이는 입에 입을 맞추었다.
“흐, 으…….”
앞섶이 다 풀어진 옷 새로 손을 넣어 가슴을 쥐었다. 뭉근하게 유두를 짓누르자 몸을 움찔대며 크게 반응했다.
“헉.”
무릎을 세워 앉은 수가 매달리듯 목을 안아 고개를 묻었다.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신아가 웃음을 섞어 속삭이니 수는 벌벌대며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뭐라 말하려는 듯 시선을 맞추는 스승에 신아는 크게 웃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우물대는 입술이, 웃는 게 좋지 않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스승님… 지금 제 상태를 살피실 게 아닙니다.”
신아가 보란 듯 골반을 움켜쥐자 수가 몸을 뒤틀었다. 고작 골반을 잡힌 것으로 쾌감이 치달으니 헛웃음이 새었다. 그러나 제 안에 들끓는 열기에 젖어 차차 이성이 흐려졌다.
성감을 돋우어 신아와 동등한 정욕을 이루고자 했다. 허나 이 정도로 사리 분별도 불가할 줄은 몰랐다. 수는 그만 생각하기를 멈추고 본능을 좇았다.
스승이 원인을 해결하려 스스로 아래를 더듬으니, 신아가 웃으며 그 손목을 붙들었다.
“안됩니다. 어찌 부인이 할 일을 앗아 가시는지.”
초야가 아닙니까. 한마디 한마디에 즐거움이 묻어났다. 수는 그런 신아에 미간을 좁혔다. 저는 마음이 이리 급한데, 신아는 여유롭기 그지없으니 급기야는 울화가 치밀었다.
스승이 눈을 구김에, 신아가 웃으며 스승의 아랫도리를 잡아 한 번에 벗겨냈다.
“으!”
수는 둔부에 닿는 차가운 온도에 눈을 찌푸렸다. 잔뜩 발기하여 선액을 흘려대는 성기가 허공에 드러났다.
“어찌 이리 흥분하셨습니까.”
조곤조곤한 말소리에 수가 신아의 어깨를 밀었다. 같이 즐거우려 했더니, 조롱만 당하는 것 같아 서러웠다. 제가 직접 만지기라도 하고 싶은데 신아가 몸으로 짓누르니 불가능했다.
눈을 찌푸리는 스승을 보며 신아가 웃음을 흘렸다. 뒤이어 스승의 유두를 약하게 깨물었다.
“흐윽…, 이상……!”
“이상한 게 아니라, 좋은 겁니다.”
“헉!”
신아가 한 손으로 스승의 성기 기둥을 움켜쥐니 수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신아는 스승의 무릎을 쥐어 단단히 벌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수는 뒤이을 구음에 몸을 흠칫댔으나 아무런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더운 숨을 내뱉던 수가 몸을 괴롭히는 열감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아무것, 도…….”
신아는 움찔대며 선액을 흘리는 요도구를 빤히 내려 보았다. 그러곤 난감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입으로 물 참인데, 생각해 보니 스승님께선 이를 싫어하지 않으십니까.”
“신, 아야….”
“싫어하시는 일을 어찌 행하겠습니까….”
수는 얼굴을 덮고 신음했다. 신아가 뭘 바라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정사마다 제게 묻던 것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차마 자진해서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워 망설여졌다.
신아는 온몸이 붉게 달아 숨을 시근덕대는 스승이 끔찍하게도 야하다 생각했다. 이미 제 성기도 터질 듯 부풀었으나, 이제는 꽤 익숙한 일이었다. 스승과 잠드는 매 순간이 제겐 발정기지 않았나.
지금이 아니면 매번 참으라 하실 분이니 제 아래를 달랠 시간에 떠올릴 추억이 많은 편이 좋았다. 신아는 차분히 뒷말을 기다렸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수는 결국 수치에 젖어 입을 열었다.
“안… 싫어.”
아아, 이리 좋으니 어찌 멈추겠는가.
“…이상한 것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더 물어오지 않는 신아에 수가 이를 악물었다.
신아는 스승이 수치에 젖어 드는 장면을 두 눈에 담았다. 오직 저만이, 저만 누릴 수 있는 은혜였다.
“……좋, 아.”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목덜미에 신아가 눈을 휘어 웃었다. 가슴이 빠듯하게 부풀어 올라 행복하다 못해 구토감이 일었다.
“흐윽……!”
곧바로 성기를 짓누르는 혀에 수가 허리를 휘었다. 그에 신아의 뒤통수가 짓눌려 더 깊게 성기를 머금었다. 신아는 저를 어깨로 짓누르고 더운 숨을 뱉는 스승에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을 흘렸다. 코에서 흩어지는 간지러운 숨에, 수가 버티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입술을 오므렸다 펴며 쯔읍, 하고 노골적으로 침음을 내보였다. 목구멍을 조여 자극하니 수가 눈을 질끈 찌푸렸다. 스승이 곧 절정에 다다를 것을 인지한 신아가 성기 뿌리 끝을 강하게 쥐어 사정을 막았다.
“흐, 왜…… 으!”
허리를 파뜩이는 수가 사정이 저지당해 신아를 밀어내려 들었다. 그러나 성감에 예민해진 몸은 힘이 빠져 저항이 불가했다. 신아가 얼굴을 들어 귀두 끝을 혀로 할짝대니, 수가 곧바로 몸을 뒤틀었다.
신아는 다시금 스승의 성기를 물어 한쪽 볼에 그를 욱여넣었다. 얼핏 스치는 치열에 수가 달뜬 신음을 토했다.
“지금, 제 입에 싸시는 겁니다.”
다 뭉개지는 발음으로 재차 확인하려 드니, 수가 연신 신아의 어깨를 내리쳤다. 깃털 내려앉는 듯한 감촉에 신아가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스승의 성기를 목구멍까지 들이밀었다.
“헉……!”
단숨에 조여 오는 입 안에 수가 더 버티지 못하고 허벅지를 떨었다. 발가락이 곱아듦을 확인한 신아가 터져 나오는 정액을 받았다. 제대로 된 자극으로 사출된 정액 양이 상당했다.
사정의 여운에 수가 손가락을 움찔댔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나신이 된 저와 온전히 옷을 갖추어 입은 신아가 대비되어 수치스러웠다.
신아는 보란 듯 입을 벌려 제가 받아 낸 정액을 내보였다. 입가를 주륵 타고 흘러내리는 희뿌연 액체에 수가 눈을 덮고 신음했다.
신아는 웃는 낯으로 그를 뱉어 제 손아귀에 담았다. 스승을 안아 뒤로 몸을 누이니, 신아 위에 엎어진 수가 몸을 뒤틀었다.
“윽.”
곧바로 둔부를 갈라 처덕이는 정액에 몸을 떨었다. 가늠하듯 항문을 지분대는 손가락이 뒤이을 삽입을 예감하게 했다.
수는 식은땀에 얽혀드는 옷감에 몸을 바르작댔다. 그를 모르지 않는 신아가 벗겨 주세요, 하고 스승의 귀에 속삭였다.
“으으…….”
수가 겨우 몸을 일으켜 신아의 앞섶을 쥐는데, 곧바로 항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허리를 뒤틀었다. 스승이 제 가슴팍에 고개를 박고 헐떡이니 신아가 난감한 듯 그 등을 토닥였다.
“…급하시죠?”
등을 쓸던 손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 스승의 복부를 다독였다.
“어서 넣으셔야 할 텐데요.”
수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이를 물었다. 한 번의 사출 후에도 진정되는 감이 없으니 두렵기까지 했다. 신아의 말소리가 귀 끝에 닿아 흩어지는 것 같았다.
스승이 점점 초점을 잃어가는 듯하니 신아가 그를 안아 일으켰다. 멍하니 무릎을 꿇어앉은 수는 제 앞에 옷을 풀어 헤치는 신아를 올려 보았다. 두꺼운 몸체가 위용을 과시하니 학습된 듯 제 배를 더듬어 삽입되었는지를 확인했다.
신아는 그런 스승의 행동에 이를 물었다. 더 여유 부렸다간 잡아먹힐 것 같았다.
마음이 조급하니 옷을 찢어 내듯 벗어 던졌다. 흉포하게 발기한 성기가 허공에 꺼떡이자 수는 더 생각지 못하고 그를 입으로 물었다. 삽입 전엔 한 번의 사정. 신아가 매 지키던 순서이니 몸에 익은 흐름에 따랐다.
구음 받을 생각이 아니었으니, 신아는 눈을 찌푸려 사정감을 짓눌렀다. 성욕을 좇는 스승은 위험했다.
“푸흐……. 읍, 하…….”
신아는 숨 조절도 제대로 못 하고 성기를 무는 스승에 눈앞이 아득했다. 이미 선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는 순식간에 스승의 입가를 더럽혔다.
목구멍까지 넣는다 한들 전체를 삼킬 수 없음을 인지한 수가 몸을 물렸다. 곧바로 고개를 틀어 신아의 기둥을 뿌리를 입으로 애무하니, 신아가 눈을 구기곤 목을 긁어 으르렁댔다.
“으……!”
신아는 몸을 숙여 스승의 허리를 들어 올리곤 둔부를 짚었다. 곧바로 손가락 두 개가 항문을 넓히니 수가 허리를 휘어 끙끙댔다. 빡빡하게 다물린 항문은 지독한 애무에 차츰차츰 공간을 마련했다.
수는 신아의 아래를 얼굴을 파묻은 채 시름했다. 스승의 더운 숨이 성기를 간지럽히니 신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손가락을 조이는 스승의 내부가 음심에 불을 질렀다.
“하, 으!”
신아의 다른 손도 스승의 항문을 침범하니, 수가 몸을 비틀어 신음했다. 간지러운 근원을 두고 그 주변만 핥는 듯했다. 제가 답답한 것은 그 안쪽인데, 입구만 지분대니 애가 닳았다.
수는 몸을 비틀대며 몸을 일으켰다. 곧 신아의 어깨를 짚어 꿇은 무릎을 세워 앉았다. 수는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르는 그림을 좇았다.
신아는 제 기둥을 움켜쥐는 스승에 이를 물었다. 스스로 삽입을 솔선하심을 모르지 않았다.
“답…답, 해…….”
수는 자꾸만 미끈대며 어긋나는 성기에 눈을 구겼다.
“괜, 찮아…. 그흐, 만…넣.”
초조하게 제 성기를 쥐는 스승에 신아가 스승을 안아 입으로 입을 덮었다.
“헉!”
벽으로 밀어 붙여져 몸이 일으켜짐과 동시에 수는 턱을 쳐들고 경련했다. 귀두 끝이 빠듯하게 항문 틈을 벌리니 머리를 강타하는 감각에 이를 물었다.
아직 빡빡한 아래는 쾌감보다 고통이 더했다. 찢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날아가던 이성이 잠시 자리를 되찾았다.
“쉬이…, 숨 쉬세요.”
흥분에 젖었으나, 애써 다정을 가장하는 목소리가 스승을 안심시켰다. 수는 천천히 제 안을 비집는 성기에 숨을 어쩌지 못하고 헐떡댔다.
“괜찮습니다…. 들어가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신아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파들대는 스승의 속눈썹을 핥았다. 제 선액으로 번들대는 콧등을, 입가를 핥아 올렸다.
수는 생경한 감각에 몸을 굳혔다. 아직도 제 안에는 열기가 널뛰는데, 찢어질 것 같다는 공포가 앞서 두 눈을 덮었다. 동시에 당장 허리를 내리고 고통받고 싶으니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아픈 건 잠깐입니다.’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에, 수의 정욕이 공포를 앞섰다.
“스…, 승님.”
신아는 직접 허리를 내리기 시작한 스승에 혀를 헛씹었다. 꾸역꾸역 내려가는 허리 짓에, 스승의 둔부가 차츰 성기를 머금었다. 신아는 당황하여 스승의 허벅지를 짚었다가, 움직임을 봉하는 쾌감에 몸을 떨었다.
직접 정사를 원한 적 없는 분이니 기묘한 정복감이 치달았다.
온몸이 예민하시나 그에 몰아치는 쾌감을 부정하셨으며, 엉망인 모습을 내보임을 거리끼셨다. 그러면서도 저와의 정사를 인정하니, 더 바랄 것은 없었다. 도리어 수치에 젖어 몸을 떠시면서도 다리를 벌려 주심이 좋았다.
불평은커녕 마냥 행복했던 부분인데, 제 스승께선 직접 약을 삼키셨다. 그게 제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라니.
신아는 제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다정에 웃음을 흘렸다. 더 견디지 못하고, 스승이 귀두 전체를 머금었을 즈음 스승을 빈틈없이 안았다. 절정에 치달은 사정이었다.
“흐으, 으아……!”
울컥거리며 안을 점령하는 정액에 수가 고개를 저었다. 열기에 열기가 더해져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단단하게 부푼 성기 끝에 도저히 멈출 줄 모르는 사정액이 뿜어져 나왔다.
“으, 헉……!”
곧바로 처박히듯 내리꽂히는 성기에 경련했다. 내부에 흩뿌려진 정액을 가로지르자 배가 빠듯하게 부풀었다. 머리 위로 내려치는 쾌감에 허벅지가 잘게 경련했다.
동시에 절정에 치달아 수가 사정하니, 신아가 웃으며 스승을 단단히 안아 들었다. 제 복부에 비벼지는 스승의 성기가 퍽 좋았다.
단순 삽입으로 사정하시니, 정말 잊지 못할 초야였다.
신아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스승의 가슴을 다독였다. 손을 내려 한계만큼 벌어진 항문을 더듬으니, 수가 이를 악물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어찌 스승님 몸을 해하겠습니까.”
신아는 찢어지지 않았노라 스승을 안심시켰다.
“허리를 흔들까요? 속이 답답하실 테니 말입니다.”
제 성기를 머금은 안이, 오직 저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내부가 아찔했다. 한계까지 벌어져 저를 받아들인 내부가 적응할 수 있게, 얌전히 스승이 숨을 고르기를 기다렸다.
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신아는 식은땀에 젖어 저를 내려 보는 스승에 웃음을 흘리며 입을 맞추었다. 야해라. 어찌 발정하지 않겠는가.
수는 왠지 제 안에서 더 크기를 키우는 듯한 성기에 눈을 찌푸렸다.
“신…, 아야.”
“예 스승님.”
“나, 아직 부, 족해…….”
“…하하!”
허면 어찌할까요? 마냥 웃음을 흘리는 신아에 수가 끙, 하고 시름했다. 놀랄 줄 알았는데, 웃기만 하니 맥이 빠졌다.
온몸을 덥히는 열감을 애써 참았다. 그렇게 겨우 입을 열어 말을 붙이려는데 분위기를 못 읽는 신아가 야속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에 신아가 송구하다며 스승의 허리를 꾹 짓눌렀다. 그에 수가 신음하며 신아의 가슴팍을 내려쳤다. 장난치지 말라는 뜻임을 모르지 않으니, 신아도 마냥 처박고 싶은 걸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 보다… 오래 하고 싶을 수도 있어…….”
신아는 얌전히 뒷말을 기다리다, 웃음을 참다못해 목을 긁었다. 제 스승께서는 지금 저와 비등한 상태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수는 신아가 눈을 구겨 한숨을 쉼을 보았다가, 시선을 내리며 엷게 웃었다. 도통 식을 줄 모르는 제 열기에, 우습게도 꽤 뿌듯했다.
“무…, 섭지?”
더운 숨이 묻어나 덜덜 떨리는 어투에, 신아의 이성이 달아났다.
“으……!”
순식간에 아래를 꿰뚫는 허리 짓에 수가 몸을 비틀었다. 몸을 비틂과 동시에 제 아래를 헤집는 듯한 성기에 괜히 성감만 달아 괴로웠다. 간지러운 곳을 계속해서 긁어내리니 좋다 못해 괴로울 지경이었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 성기가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정액이 마찰하며 울리는 젖은 소리가 작은 방 안을 메웠다. 창고같이 작은 처소가 내려찍는 힘에 크게 들썩였다.
“헉, 흐, 아, 아! 조, 그, 으으… 천! 천, 흐윽!”
수는 제 오금 사이에 팔을 집어넣어 내려찍는 신아에 시야가 헛돌았다. 밀어닥치는 쾌감이 몸을 망가트리는 것 같았다. 잠시 스승을 벽에 기대어 눕힌 신아는 머리를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무섭습니다. 정말…….”
“으! 헉!”
더운 숨에 섞여 든 웃음은 스승의 신음에 묻혀 사라졌다. 신아가 스승의 성기를 움켜쥐고 단숨에 퍽! 하고 허리를 쳐올리니 스승이 또 한 번 허리를 뒤틀어 잘게 경련했다.
“흐으……, 아……!”
절정이었다. 신아는 잘게 떨리며 뭉근하게 부풀어 오른 스승의 복부에, 만족감을 감추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흐윽.”
신아가 배꼽 위를 꾹, 짓누르니 수는 예민해진 내벽에 몸을 뒤틀었다.
“오늘이 지나면 꽤 앓으실 것 같아 걱정입니다….”
“하아…, 으…….”
“이리 땀을 흘리시니…. 이제 약은 드시지 마세요.”
신아는 손을 들어 스승의 고운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그러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냥. 다음에도 꼭, 좋다고 말해 주세요. 그거면 됩니다.”
“으윽……!”
신아가 바닥을 짚고 몸을 뒤로 누이니, 수는 신아의 몸 위에 앉아 허리를 떨었다. 제 무게가 얹혀 더 깊게 처박히는 성기에 어쩔 줄을 몰랐다.
“…허리를 흔들어 주시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귀를 쑤시는 음성에 몸이 바르작댔다. 벌벌 떨리는 몸이 균형을 잃자, 자꾸만 더 깊게 박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신아는 어쩔 줄 몰라 파들대는 스승의 손을 쥐어 입을 맞추었다. 가볍게 허리를 들었다 놓으니, 수가 허리를 숙여 더운 숨을 토했다.
“으, 흐으…….”
수치에 젖은 음성에 신아가 눈을 휘어 웃었다. 약 기운에 젖고도 차마 홀로 움직이지 못하시니, 제 눈엔 그런 것도 좋았다. 간절한, 도와 달라는 듯한 눈빛이 사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위아래로 움직이지 못하시겠거든. 무게를 실어 비틀어 주세요.”
“윽…….”
신아가 할 수 있다는 듯 둔부를 토닥이니, 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눈을 뒤덮는 쾌감에 꼭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흐……, 아.”
신아의 가슴팍을 짚고 앉은 수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숨을 골랐다. 뒤이어 눈을 찌푸려 신아의 아래에 둔부를 지분대니, 정액이 새어 찔꺽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몸을 들썩이는 것보다 자극이 덜할 줄 알았으나 되레 신아의 성기 끝이 내부를 헤집어 놓았다.
신아는 한눈에 들어오는 접합부에, 더운 숨을 내뱉는 스승의 낯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접 허리를 움직여 삽입부를 자극하니 괴롭지 않을 리 없었다.
“그리 움직여 어찌 사정시키려 하십니까.”
수는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어 흥분한 신아의 낯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타박하는 듯한 말에 설움이 북받쳐 허리를 움직였다. 그에 머리 위로 나른한 숨이 터져 나왔다.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 잔뜩 벌어진 항문의 통증이 무뎌졌다.
신아는 두 손을 들어 스승의 골반을 움켜쥐었다. 단단히 붙잡아 뭉근히 돌리니, 스승의 내부가 경련하듯 움찔대어 눈을 찌푸렸다.
“으……!”
처음 겪어 보는 자극에 수가 무너져 내렸다. 휘어진 성기가 난잡하게 안을 휘저었다.
신아가 스승이 숨을 고를 수 있게 배려하려는데, 멈춘 자극에 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뜨거워진 몸은 자꾸만 자극을 좇았다.
“…윽.”
곧바로 작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둔부에 신아가 탄식하며 두 눈을 덮었다. 작게 찰팍이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댔다. 직접 허리를 세워 움직이시니 제 성기 뿌리가 나타났다 스승의 둔부 새로 자취를 감추었다. 성욕을 좇는 스승의 모습이 아찔했다.
신아는 그만 허리를 일으켜 스승의 두 다리를 벌려 단단히 안았다. 활짝 벌어진 다리에 수가 몸을 뒤트니, 신아가 단숨에 허리를 쳐올렸다.
“헉 아, 으……!”
수는 계속해서 허공에 헛발질하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탱할 곳이 없어 입술을 무니 그대로 신아의 손가락이 스승의 입을 파고들었다. 어금니 사이에 자리한 손가락은 스승이 입술을 무는 것을 막았다. 동시에 깨물어 달라는 요구기도 했다.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수는 신아의 손가락을 으득 물어 목을 껴안았다.
통증이 쾌감으로 변하는 이상한 성벽에, 신아 또한 웃음을 흘리며 스승을 단단히 붙잡아 안았다. 퍽! 하고 밀어붙였다 쩍, 하고 떨어지는 소리와 동시에 절정으로 떨어졌다.
“후윽……!”
수는 절정감에 허덕이면서도 제 성기를 움켜쥐고 흔드는 신아에 몸부림쳤다. 한껏 예민해진 몸은 곧바로 묽은 정액을 토했다. 또다시 울컥대며 제 안에 쏟아지는 정액이 신아의 사정을 가늠하게 했다.
점성 없이 뚝뚝 흐르는 스승의 정액은 연이은 사정을 알렸다. 신아는 스승을 안아 그 품에서 사정의 여운을 즐겼다. 제 복부가 젖어 축축하니, 웃으며 성기를 물렸다.
수는 제 안에 한껏 들어차 있다 빠져나가는 성기에 몸을 떨었다. 벼락 맞은 듯한 쾌감에 바닥에 몸을 붙인 채 움찔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신아는 웃으며 제 복부에 가득한 정액을 펴 발랐다. 내가 움직여서, 절정에 달하셨다. 그 증거와도 같은 축축함에 자꾸만 웃음이 새었다.
“더 하실 수 있죠?”
도발하듯 물으니, 열감에 젖은 수가 파들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신아가 크게 웃으며 스승의 품에 파고들었다.
정액에 찌들어 누운 수는 겨우 팔을 뻗어 제 항문을 더듬었다. 잔뜩 벌어진 입구에 심장이 쿵쿵댔다. 손가락 하나도 조이지 못하니 항문이 제구실을 못할까 두려웠다.
약 기운이 가시니 온몸이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이 작은 방 안에 성인 둘이 구겨져 누웠으니, 몸을 맞붙이거든 꼭 팔다리가 벽에 부딪혔다.
수는 정신을 되찾을수록 삽입을 원하며 신아를 끌어안았던 제가 생각나 민망함에 치를 떨었다. 배에 가득 들어찬 정액이 제 정욕을 받아 낸 신아의 욕망을 드러냈다.
제가 약을 먹어야 겨우 따라가니, 수는 시름하며 항문을 더듬었다.
한쪽 손으론 배를 짓누르고, 한쪽 손으론 안을 긁어 내부에 쌓인 정액을 빼내려 들었다. 그를 본 신아가 웃으며 스승을 막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가만히 계세요.”
“…….”
“심려치 마세요. 어찌 성기를 품은 항문이 곧바로 꾹 다물리겠습니까.”
금방 돌아올 겁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수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안 될 크기를 욱여넣은 건 아닐까? 말하고 싶지만 내뱉을 기운이 없었다.
수는 저 멀리 대야를 끌어와 찐득거리는 몸을 닦아 주는 신아에 눈을 흐렸다. 어찌 저리 멀쩡하게 움직이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손끝을 휘어 안을 긁어내는 신아에 몸을 움찔댔다. 집요하리만치 꼼꼼히 긁어내니, 수는 빠져나가는 묵직한 액체에 이를 물었다.
“…좋았어?”
신아는 잠시 멈추었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좋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
“스승님께서는요?”
수는 바닥에 눌어붙은 채 눈을 깜빡이다, 흐늘흐늘하게 녹아 입을 열었다.
“……나도.”
눅눅한 목소리에 신아가 웃음을 흘렸다. 저만큼은 아니었을 텐데요. 웃음으로 생각을 덮었다.
수는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눈을 끔뻑였다. 제 성감이 돋아져 신아의 몸을 더 자극했던 걸까?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도 만족스러워하는 신아에 마음이 뿌듯했다. 이번엔 기절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수는 제 몸을 추스르고 일으켜, 옷을 입히기 시작한 신아에 눈을 찡그렸다.
“오늘은 비슷했다…. 그렇지?”
“그런 것 같습니다. 허나 약은 더 드시지 마세요. 몸이 상할까 걱정입니다.”
“응….”
그래도 좋았지…? 수가 조심스레 물으니, 신아가 신음하다 그럼요, 하고 답했다.
“찝찝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밤이 길지 않습니까.”
“뭘…?”
수는 옷을 입기 시작한 신아에 눈을 끔뻑였다. 반쯤 부푼 성기가 아랫도리에 가려 사라지니, 제가 잘 못 본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곧 사람들이 올 텐데 어찌 스승님 신음을 들려주겠습니까.”
“그으….”
“신가에 서책이 있으니 기대되는 것이 많습니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
“이날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황홀경에 젖은 목소리에 수가 눈을 흐렸다. 몸에 열기가 가시지 않은 것은 저도 마찬가지나, 그건 정말 남은 약 기운일 뿐 정신은 말짱하니 더 하면 아래가 쓰릴 것 같았다.
“입…으로 해 줄게.”
“아니요. 제가 너무 받기만 했으니, 누워 계시면 이리저리 잘 움직여 보겠습니다.”
신아가 상쾌한 낯으로 스승을 안아 일으킴에, 수가 그 품에 안겨 눈을 흐렸다.
“짐승 같다, 신아야….”
“이제 아셨습니까?”
“아니…,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긴 해…….”
“허나 스승님께서도 오늘 허리를 직접.”
“가자….”
얼굴이 붉게 달아 고개를 수그리니, 신아가 머리칼이 달라붙은 이마를 쓸어 입을 맞추었다.
“…네가 컸던 곳이야.”
수가 웅얼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련하고, 또 애틋한 기억이 담긴 집이었다. 그런 곳에서 신아와 난잡하기 그지없게 뒹굴었으니 어린 신아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그에 신아가 문고리를 쥐다 말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문을 열기 무섭게, 잘 다녀왔냐 안아 주던 스승의 모습이 선명했다.
‘신아야.’
간지러운 목소리. 제 세상의 전부가 이곳에 있었다.
“스승님.”
“응….”
매번 돌아오는 스승의 순한 대답에 신아가 옅게 미소 지었다.
“송구하나, 전 어려서부터 스승님 속살만 보거든.”
“빨리 가자….”
재촉하듯 제 가슴팍을 약하게 짓누르는 힘에 신아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약이고 뭐고, 이길 수가 없다. 수는 그리 생각하며 시름하다, 이내 웃음이 옮아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부끄럽게도, 이제는 제가 안아 키운 이의 품이 안락했다.
* * *
수는 벽에 기대어 앉아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에 이마에 놓인 물먹은 천이 툭 하고 떨어졌다. 열이 펄펄 치솟으니 지난밤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아파하기엔, 제가 약을 먹어 일어난 일인지라 민망했다. 당연히 일 회분을 산 줄 알았으니, 몇 알을 먹었냐는 신아의 추궁에 무지가 부끄러웠다.
“누워 계세요.”
수는 시선을 들어 제 앞에 꿇어앉은 신아를 보았다가, 웃음 섞인 더운 숨을 뱉었다. 바닥에 줄줄이 늘어놓은 약탕이며 마른 천들이 신아의 극진한 간호를 내보였다. 집이 다 부서지게 찧어 대던 밤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머리가 엉망이다, 신아야….”
수는 손을 들어 신아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렇게 머리칼을 헝클이며 쓰다듬으니, 신아가 한숨 쉬며 스승의 이마를 짚었다. 오늘 정오, 더운 숨을 토하며 끙끙 앓는 스승에 신아의 심장이 내려앉았음은 당연하다.
신아는 당장 제 스승께서 구했다는 약이 담겼던 복주머니를 털어 냄새를 맡았다. 안 그래도 독한 약을 세 알이나 드셨다고 하니, 탄식하며 머리를 짚었다. 스승의 속이 뒤집어지지 않을 리 없었다.
수는 분위기가 가라앉은 신아에 더운 숨을 뱉으며 눈을 찌푸렸다. 제가 애꿎은 상황을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더듬더듬 손을 내려 신아의 손을 쥐니, 신아가 한숨 쉬며 자세를 틀었다. 그렇게 스승 앞에 죽 그릇을 들어 올렸다.
“아 하세요.”
수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저음에 신아가 눈매를 좁혔다.
“아 하세요.”
“…내가 먹을 테니.”
“앞으론 스승님 손으로 뭐 드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하하, 글쎄…. 내가 애도 아니고 말이야…….”
“싫습니다. 또 탈 나시지 않겠습니까.”
단호한 신아에 수가 코끝을 긁적였다. 열기에 젖어 수의 모든 몸짓과 말투가 물먹은 듯 느릿느릿했다.
“잘 모르는 약이어서 그랬지, 어찌 밥을 먹고 탈이 날까.”
“스승님께서 직접 허리를 흔들어 주신 일은 평생 잊을 수 없겠으나, 아프신 것은 끔찍하게 싫습니다.”
“…….”
“스승님의 고통을 대가로 하는 기쁨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 아플 줄 알았던 것은 아니야….”
수가 말을 우물거리니 신아가 다시금 수저를 들어 올렸다.
“내가 먹을 수….”
“더 싫다 하시면 제가 씹어서 넘겨드릴 생각입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수가 체념하고 입을 벌렸다.
“애초에 제 정욕에 맞춘다 생각 마세요. 스승님이 못 따라오시면 제가 참으면 될 일입니다.”
수는 맑은 죽을 우물대며 신아의 눈치를 살폈다. 이 분위기에 말해도 되나? 그리 생각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가 참는 편은… 아닌 것 같은, 데…….”
그에 신아가 시선을 마주하니, 수가 맛있네, 하며 눈을 피했다. 신아는 그런 스승을 물끄러미 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가 발기하지 않을 때가 언제일 것 같으십니까?”
“…컥.”
사레들린 수가 씹던 죽을 그대로 뱉으려 하니 신아가 스승을 붙들어 부축했다. 수는 겨우겨우 씹던 것을 삼키고 떨리는 눈으로 신아를 보았다. 저와 있을 때라면 매번 발기했다는 뜻으로 해석되니 부정하고 싶었다.
“매일 붙어 있는데…? 그게 흥분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자세를 틀어 누우면 모르시던데요.”
“…….”
“아 하세요.”
다시금 덤덤하게 수저를 내미는 신아에, 수가 입을 벙긋댔다.
“지금도…?”
“궁금하십니까?”
“아, 니…….”
“농입니다. 괜히 밤잠 설치지 마세요.”
“으음….”
수는 찜찜함을 지우며 입을 벌렸다. 신아는 죽이 묻은 스승의 입가를 훔치고 오물대는 입술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스승님.”
신아의 부름에, 수가 죽을 삼키며 시선을 들었다.
“자꾸 머릿속에서 삽입만으로 절정에 달하신 기억이.”
“나 한 술 더…….”
떨리는 음성에 신아가 얌전히 다음 술을 들어 내밀었다. 안 그래도 볼을 물들인 스승께서 귀까지 붉게 달아오르니 그제야 긴장이 가시는 듯했다.
“받아먹는 것도 나쁘지 않으시죠?”
“그런 것 같구나….”
“허면 앞으로도 밥은 이렇게 드셨으면 합니다.”
“그건 좀…….”
스승의 난감한 눈빛에 신아가 죽 한술을 떠서 입에 내밀었다.
“아무래도 스승님 몸에 넣는 건 다 좋은.”
“와하….”
수가 탄식하기 무섭게 수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신아가 어서 드시라는 듯 눈을 깜빡이니 수는 눈썹을 늘여 죽 한술을 삼켰다. 아무래도 오늘은 얌전히 받아먹는 게 정도일 듯싶었다.
“나를 먹이면 너는 언제 먹어?”
“전 먹었습니다.”
그리 말하면 수저를 내미니, 수는 죽 그릇이 맨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를 받아먹었다. 정확히는 신아가 계속 수저를 내밂에 잠결이라 배부르다 말도 못 하고 입을 우물댔다.
죽 한 그릇을 비운 후 수는 스멀스멀 이불로 기어들었다. 그에 신아가 스승을 일으켜 물 잔을 내밀었다. 신아는 스승이 물까지 마시고 나서야 몸을 돌려 자리를 정돈했다.
수는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이불에 누웠다. 제 손으로 약 먹고 간호받기가 퍽 민망했으나, 열이 오른 몸은 금세 잠기운을 불렀다.
잠들기 직전, 수는 제 입술에 내려앉는 따뜻한 감촉에 옅게 웃었다. 미안하다 신아야. 그 말이 입가에 맴돌았지만, 몸이 무거워 차마 내뱉진 못했다. 제 꿈꾸세요, 하고 누그러진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니, 응, 하고 속으로 답했다.
신아는 스승의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고운 이마를 내보였다. 눅눅하게 젖은 눈꺼풀, 쌕쌕대는 숨소리에, 가만히 스승을 내려 보았다.
부디, 아프지 마세요. 스승 앞에 이미 했던 말이나, 혼자 곱씹는 말과는 무게가 달랐다. 그러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아는 조용히 허리를 숙여 스승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고개를 틀어 스승의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였다. 불안한 마음은 지우고 다정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제 꿈꾸세요.”
식은땀에 젖은 스승이 잠시 눈을 찌푸리다, 옅게 웃으니 초조한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밤이 깊도록, 신아는 스승의 더운 몸을 닦아 내며 열기를 식혔다. 천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니, 눈을 뜬 스승은 더 열기에 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