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밝히는 불, 뒤덮는 물 (7/15)

7. 밝히는 불, 뒤덮는 물

짹짹대는 새소리에 수가 감은 눈을 들어 올렸다. 말라붙은 눈가는 건조했고 옆으로 누운 몸은 옴짝달싹할 수 없어 답답했다.

여기가 어디지? 의문을 품음과 동시에 벌어진 가슴팍에 시선이 닿았다. 숨이 조일 듯 답답했던 것이 누군가의 팔이 얹혔기 때문임을 깨닫자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깨셨습니까?”

수는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신아는 그런 스승이 편히 숨 쉴 수 있도록 붙든 팔에 힘을 풀어 드렸다.

수는 팔을 들어 신아의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손끝으로 심장 박동이 전해져 오니 이보다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한참을 울다 지쳐 잠들었으나, 다시 눈 뜬 아침에도 지금의 재회가 꿈결처럼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손짓에 신아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 숙였다. 그렇게 스승의 이마에 제 이마를 얹었다. 스승을 마주한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제 꿈을 꾸셨지요?”

익숙한 물음에 수가 눈매를 늘어뜨렸다.

“…그럼.”

저도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살아 있었구나. 그를 확인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달큼한 침묵 후, 수는 제가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낯선 풍경에 눈을 깜빡였다.

하얀 침의 차림의 신아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렇게 당황한 듯 몸을 덜걱이는 스승님을 구경했다.

“…잡혀 있었어? 신은 어딨어? 아니, 지금 몇 시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스승에 눈을 찌푸렸다. 눈이 퉁퉁 붓고도 저리 고우시니, 왕의 눈 또한 가리지 않은 게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연회에 가야 하는데…. 그곳에 화선이 온다고.”

와, 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굳었다. 신아가 계속 말씀하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러기 쉽지 않았다. 수는 신아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어젯밤과 달리, 해가 쨍쨍한 대낮에 다 자란 아이를 마주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제가 수산에서 보았던 모습이 다 자란 외형이 아니었단 말인가. 수는 홀린 듯 신아의 이마에 제 검지를 대었다. 그렇게 반듯한 이마를, 짙은 눈썹을, 높다란 코, 미소 띤 입술, 뚝 떨어진 턱선을 쓸어내렸다.

그때에도 장성한 사내의 외형이었으나, 이리 보니 그때는 청년에 불과한 외형인 듯했다. 눈길 하나에 모두가 마음을 빼앗길 미인이었다. 평생을 억압당하며 살아온 화선은 이리 찬란하게 피어났다.

가만히 얼굴을 내어준 신아는 스승의 멍한 시선에 눈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에 수가 눈을 깜빡였다.

“신이…… 너야?”

얼빠진 물음에 신아가 웃으며 스승을 당겨 안았다.

수는 어안이 벙벙해 신아가 저를 무릎에 앉히는 줄도 몰랐다. 신아는 마주 앉은 스승의 머리를 쓸어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 땅에 화선이 하나뿐인데, 누가 달리 신이겠습니까.”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신과 화선은 하나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는 신아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물었다.

“신궁이 네 거처야?”

“예.”

“여기는 네 처소고?”

신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으로 스승의 물음에 긍정했다.

“하지만… 신의 처소에선.”

비명이 들린다고, 수는 시선을 내리고 웅얼댔다. 그에 신아가 스승의 턱을 쥐어 들어 올렸다.

왠지 시무룩해진 신아의 낯을 마주하자 수는 당황하여 허리를 세웠다. 눈썹을 늘어뜨린 미인의 낯에 어린 신아의 모습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수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그를 살폈다. 순식간에 근심스러운 낯을 보이는 스승에 신아가 작게 웃었다. 십 년이 지나고도 변함이 없으시니 가슴께가 뻐근했다.

수는 다 큰 몸으로 제게 안겨 오는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 들었다. 안아 들고 보니 저보다 한참이나 큰 듯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응? 아아.”

생각해 보니 제대로 된 끼니를 먹은 적이 없었다. 수가 공복을 인식함과 동시에 신아가 그 배에 손을 얹었다. 커다란 손이 판판한 복부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니 수는 당황하여 몸을 들썩였다.

“…신아야?”

“많이 야위신 듯하니 제자의 맘이 편치 않습니다….”

신아의 낯이 진심으로 곤란한 듯 보였다.

“어어…….”

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여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화선이, 동쪽 땅의 신이 자신을 제자라 칭한다. 그를 뒤이어 제가 앉아 있는 곳이 신아의 무릎임을 깨닫곤 표정이 굳었다. 다리를 벌려 앉은 자세가 꽤나 안정적이었다.

화국 땅의 신이 아닌가? 제가 지금 누구의 무릎에…. 꼼지락대며 몸을 물리자 신아가 그런 스승의 어깨를 단단히 눌러 잡았다. 행동을 저지당한 수가 눈을 끔뻑였다.

신아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서운해함을 인지한 수가 아, 하고 몸을 움찔댔다. 이내 별수 없이 신아의 무릎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이제 와서 불편해하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신아는 잇새로 새는 웃음을 감추었다. 폐로 들어오는 모든 숨에 행복이 만연했다.

“스승님.”

“…응.”

“…보고 싶었습니다. 영영 눈을 뜨지 않으시는 줄 알았어요…….” 

“하하, 아니야….”

“어려워 마세요. 저는 그대로인데 스승님께서 어색해하시니, 서운하려 합니다….”

신아는 곤란한 듯 시선을 내렸다. 그런 신아에 수 또한 눈썹을 늘이며 그를 붙들었다. 거리감을 느낀 게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아이를 달래려는 듯 안아 들기 무섭게 수는 신아의 품에 안겨 엉엉 울던 밤이 떠올라 몸을 굳혔다. 뒤늦은 수치심에 얼굴이 달았다. 신아가 울어도 모자랄 판에 제가 왜 운단 말인가.

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신아의 등에 손을 얹었다가, 곧바로 그를 밀어냈다. 저와 거리를 벌리는 스승에 신아가 작게 눈을 찌푸렸다.

“신아야. 너… 엄청나게 컸구나?”

“…아.”

하하, 신아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무슨 얘기를 하시려나 했더니. 잇따른 진실에 움찔대는 몸짓이 사랑스러웠다.

신아가 웃건 말건 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양팔로 안기에도 벅찰 만큼 몸이 컸다. 힘도 그에 버금가는 듯했다. 어제도 제가 잠들 때까지 안아 달래지 않았는가. 저라고 못할 것은 아니나, 제가 아이를 들었다간 신아의 다리가 바닥에 끌릴 것 같았다.

“스승님. 얼굴은요? 용모도 달라졌습니까?”

“…용모?”

수는 다 뜨이지도 않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곤 신아를 보았다. 그 낯을 꼼꼼히 훑어 내리다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인간의 미의 기준이 신을 좇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슬선의 말이 옳았다. 앳된 티를 벗은 신아는 이보다 더 잘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다르지…….”

수는 차마 신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먼 산을 보며 중얼댔다. 수산에서 보여 준 모습은 역시 덜 자랐던 것이 분명했다. 과거엔 완벽한 인간이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신이라는 존재에 가까웠다.

몸짓, 손짓 하나에 압도적인 분위기가 흘러내렸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보이는 어깨가 어찌나 다부진지, 이제는 제가 그를 스승이라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가 아님을 인지하니 또다시 자세가 불편해졌다. 다 큰 성인이 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심지어 저는 그 사내의 무릎에 앉았질 않나.

수는 다시금 몸을 물려 품을 벗어나려 들었다. 그에 단단한 팔이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행동을 저지했다. 수는 난감한 기분에 신아를 흘긋대었다. 장성한 사내 둘이니만큼 본래는 다과상에 앉아 예를 갖추어 만났어야 했다.

“스승님.”

수는 조심스레 신아를 보다 이내 표정을 허물었다. 익숙한 표정에 웃음이 새어 눈을 찌푸렸다. 수는 그런 얼굴을 하는 신아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제는 힘으로 그를 이길 수 없겠으나, 신이기 이전에 그는 신아였다.

“예쁘다, 신아야. 아직도 그 말이 고파?”

눈썹을 늘인 신아의 얼굴이 제가 알던 아이의 낯이었다. 그러니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내 어여쁜 제자. 얼굴만 마주했다 하면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신아는 스승의 대답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아직 제 얼굴이 쓸모가 있는 듯했다.

“미인이구나. 어찌 너를 마주하고도 미워하는 자가 있을까.”

“…달라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불퉁한 목소리에 수가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겉이 좀 변하긴 하였으나, 속은 틀림없는 신아였다.

“어린 티를 벗었는데 같을 수는 없지.”

그치? 어깨를 떼어 웃는 스승에 신아는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렇게 스승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높다란 콧등을 비볐다.

신아는 아찔한 현실에, 십 년을 기다려 온 상황에 눈을 감았다. 과거를 돌이키는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스승이 제 무릎을 깔고 앉아 방긋거리시니 어디까지 인내해야 할지 아득했다. 정말이지 갈 길이 멀었다.

신아는 스승을 안아 내려두고 조용히 침상을 벗어나 일어섰다. 수는 그런 신아를 따라 시선을 올렸다.

“일단, 좀 씻으셔야겠습니다.”

“…응. 나?”

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신아를 보았다. 이내 팔을 들어 다급히 제 소매의 냄새를 맡았다. 새 옷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질 않았다. 하긴, 온 신궁을 다 누비고 다녔으니 먼지덩어리긴 하겠다. 수는 제 무지에 황망함을 감추지 못했다.

신아는 수치스러워하는 스승에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축제날이니 같이 장에 들면 어떨까 해서요. 주무실 때 왕궁으로 연통을 넣어 두었으니 연회는 참석지 않고 편히 쉬셔도 됩니다.”

“그러기엔 너무 무례할 듯하구나…. 직접 뵈어야 할 듯싶은데.”

“스승님. 제가 이 나라 화선입니다. 누구의 허락이 필요하십니까?”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신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는 멍하니 그를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이 기특하기도, 듬직하기도 하니 걱정을 내려두고 편안히 웃었다.

“그래.”

꼬물거리는 몸짓으로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내 제자가 동쪽 땅에서 지존한 화선이라니. 눈빛에 설렘을, 기특함을 담아 신아를 보았다. 아이의 눈을 찾아 시선이 올라가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와.”

키도 엄청 컸구나? 수는 손을 들어 올려 저와 신아와 키 차이를 가늠했다. 저보다 한 뼘 정도는 더 클 것이라더니 그 말에 틀린 것이 없었다.

신아는 웃으며 방을 나섰다. 제 뒤로 졸졸 따라붙는 스승님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제가 앞장서서 걷는데도 멀어지지 않으신다. 신아는 주먹을 쥐어 스승을 품에 안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강제로 취하지 않는다. 스승님 앞에 영원히 아이이고 싶으니 말이다. 모든 것을 알고도 제게 다가올 스승님을 바랐다. 신아는 지금의 걸음이 영원하길 바랐다.

수는 목탑의 층계를 내려가면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신아 혼자 살기에는 너무나 크고 거대한 건물이었다. 한층 전부가 서재인 곳도, 밤을 보냈던 꼭대기 층처럼 칸칸이 나누어져 방이 줄줄이 늘어선 곳도 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내부는 곳곳마다 금칠된 불의 일족의 문양이 화려했다. 신아를 처음 데려왔을 때 부숴 버린 문양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입구 문을 여니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간질였다. 결 좋은 머리칼은 구겨짐 없이 바람에 휘날렸다.

“지상을 잇는 다리가 없으니 도약해 건너셔야 합니다. 스승님께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니 그리하셔도 됩니다.”

“응. 궁인들은 어떻게 와?”

수는 제 어깨를 통통거리며 물었다. 목탑 앞 작은 뜰에는 벚나무가 한가득 피어 있었다. 기껏해야 쪽배나 세울 만한 작은 나루터도 있었다. 먹을 것만 풍족하다면야, 평화롭기로는 수산의 별천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배를 타고 와야지요.”

“불편하지 않은가?”

“수선께서 들 곳이니 함부로 들 수 없음은 당연합니다.”

수는 신아의 대답에 고개를 기울였다. 제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줄 알고 그들을 막는단 말인가. 그에 신아가 말을 덧붙였다.

“화국이 마음에 드셨다 하질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그럼 결계를 내리고 화국을 품으실 것이 아닙니까.”

“…으음?”

“수산의 결계와 가까운 곳에 신궁이 있으니, 스승님께선 이곳에서 저와 함께 지내시면 됩니다.”

저랑요, 신아는 다시금 강조하며 시름없는 얼굴로 입을 당겨 웃었다.

그게 그렇게 되나? 미소 짓는 신아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우니, 수는 그만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국의 평화는 진실이니, 이에 대해선 일족과 의논하면 되었다.

“근데 신아야.”

연못가에 발을 올린 수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신아를 돌아보았다. 감색 도포를 걸친 신아가 수면에 반사된 햇빛으로 반짝였다.

“일 층 아래에 뭐가 있어? 결계로 막아 둔 것 같길래.”

수는 목탑의 일층 바닥에서 옅은 기로 둘러싸인 나무판자 하나를 보았다. 투명한 기. 틀림없는 화선의, 신아의 기였다. 크기가 크고 묵직하니 들어 올리기 어려워 보이지만 들어 올려도 되는 것처럼 홈도 파여 있었다. 해 보진 않았으나 풀 만한 결계기도 했다.

스승의 질문에 신아는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지하가 있습니다.”

“지하가? 화국엔 신기한 게 많구나.”

흥미로워하는 스승에 신아는 시선을 내렸다. 아직은, 그렇게 불안을 감추었다.

“달리 궁금한 것은 없으십니까?”

“음… 아니, 딱히…? 네가 있으니 더 궁금한 게 없구나.”

그 대답에 신아가 힘을 풀고 푸스스 웃음을 흘렸다. 제자의 속도 모르고, 참으로 한결같지 않으신가.

“진짜야. 왜 웃어.”

수가 투덜댔으나 신아는 그런 스승을 뒤에서 안아 머리를 문질렀다. 스승의 말에 거짓이 없음은 저도 잘 알고 있었다.

수는 저보다 커 버린 신아가 어색하여 눈을 흐렸다. 그러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고개 저었다. 성체가 된 화선이 저를 쓰다듬으니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도 몰랐다. 화국 땅에 신아가 살아 있다. 그를 알았으니 더 궁금한 게 없었다.

신아는 스승의 웃음에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짤막한 머리를 쓸어 귀 뒤에 꽂아 드렸다. 신아는 수선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보고받았다. 그러니 결계를 앞에 두고 머리를 자른 행동 또한 알고 있었다.

어떠한 각오를 굳히기 위함이셨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 생각에 오직 저만 있었으면 하니, 신아는 스승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별궁은 어떠셨습니까.”

일상적인 물음에 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별궁…? 솔직히 기억이 잘…….”

기억을 되짚다가 끙, 하고 앓았다. 주위를 경계하느라 바빠 제대로 본 것이 없었다.

탕이 크고 좋았다. 향기도 좋았던 것 같다. 식사는 걸렀으니 밥맛은 모르겠다.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돌아다니는 것만 빼면 별다를 것 없이,

“아, 신아야 원래 화국 땅에선 목욕 시중을 궁인이 들어?”

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신아를 돌아보았다. 그에 신아 또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예. 목욕 시중이 불편하십니까?”

“으음….”

원래 그런 것이라 하니 할 말이 없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목욕 시중을 드는 게 정상인 나라라니. 수는 끝없이 튀어나오는 의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목욕하는데 남이 도와줄 게 뭐가 있는가.

수산에서 동자들이 현수 어른 목욕 시중을 든다고 하면 비슷한 상황일 테다. 으, 수는 상상만으로도 기괴하여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문득 제 반응이 화국의 문화를 욕보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허면 적응하셔야 할 듯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눈을 끔뻑였다. 이는 배려해야 할 화국의 문화였던 걸까? 그래도 목욕 시중은 좀…. 수는 시선을 내려 어색하게 웃었다.

“…난 괜찮다 신아야.”

스승이 거절의 의사를 보였으나 신아는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스승의 어깨를 안았다.

“앞으로 제가 스승님 목욕 시중을 들 테니 말입니다.”

평범한 목욕 시중과는 다르겠지만, 스승님은 평범함의 기준을 모르실 테니 상관없었다.

“…으응?”

신아는 스승의 어깨와 무릎을 단단히 받쳐 들어 올렸다. 막 연못을 밟아 걸으려던 수가 당황하여 신아의 목을 붙들었다.

“제자가 깜빡하고 스승의 겉옷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자의 품이 따뜻하니, 조금만 참으세요.”

곧 탕에 들어가실 테니까요, 신아가 방긋 웃으며 땅을 박차고 날았다. 내려 달라며 가슴팍을 내려치시는 게 나쁘지 않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신아는 곧바로 별궁의 욕탕으로 향했다. 미리 연통을 넣어 두었으니 준비는 끝났을 터였다.

욕탕 문을 열어젖히니 따끈한 탕에 수증기가 가득했다. 크고 두꺼운 문이 닫히자 수가 당황하여 몸을 비틀었다.

“잠깐, 잠깐만. 잠깐만!”

스승의 다급한 부름에 신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일찍이 준비를 마친 욕탕엔 갈아입을 옷도 얌전히 놓여 있었다. 오직 수선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욕탕에 수선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방 씻고 나갈게. 조금만 기다려라 신아야. 응?”

꽤 넓은 욕탕 중앙엔 아래로 움푹 파여 돌로 경계를 쌓은 탕이 보였다. 좁지도, 그리 크지도 않으니 대여섯 명은 거뜬히 들어갈 크기였다. 제 발로 들어왔더라면 단아한 듯 화려한 욕탕에 감탄하였겠으나 수는 주변을 살필 정신이 없었다.

신아는 다정한 손길로 스승을 내려 드렸다. 제 말을 이해한 듯 보이니 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목욕을 채근할 정도로 제 꼴이 엉망인가? 수는 애써 생각을 덮었다.

“제가 목욕 시중을 드는 것이 싫으십니까?”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가 헛헛한 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아가 싫은 것이 아니라 목욕 시중이란 것 자체가 이상했다. 시선을 내린 신아에 가슴이 따끔대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어찌 다 큰 성인이 남의 손을 빌려 목욕을 하겠어. 그게 내 제자의 손이라니 더더욱. 너는 이 나라의 지존한 화선이잖니.”

“수선을 받들고자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스승님이 걸음 하시는 모든 길마다 꽃을 뿌려도 모자랄 일입니다…….”

가라앉는 신아의 낯에 수가 난감하여 눈썹을 쓸었다. 그래도 신아의 기세가 한풀 꺾이니, 다행히 혼자 목욕할 수 있을 듯했다.

안심한 듯 숨을 토하는 스승에 신아가 시선을 들었다.

“제자가 숙련된 궁인이 아니라 걱정하십니까.”

수는 신아의 과한 걱정에 고개를 저었다. 만약 신아가 시중에 서툴다 한들 제겐 그 능력을 평가할 기준이 없었다.

“그럴 리가. 필요가 없다 여길 뿐이란다.”

“허나 수선의 목욕 시중도 들지 못하는 화선을 사람들이 어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내 목욕에?”

수가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대었다. 그에 신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께서 별궁 궁인에게 시중치 말라 하셨음에 왕궁이 크게 시름하였지요. 그에 제가 모실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 일렀습니다. 허나 스승님께선 저 또한 밀어내시니….”

부끄럽습니다, 신아는 시무룩하게 늘어져 입을 닫았다. 그런 반응에 수는 난감하여 손을 움찔댔다. 참으로 이상한 문화가 아닌가. 그러나 타국이니, 함부로 그를 지적하진 못했다.

“사실, 스승님 목욕 시중을 들 수 있는 것은 저뿐이라 생각하여 조금은 기뻤습니다….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지요…….”

“…어? 아니, 잠깐만. 신아야.”

“…바로 궁인을 들이라 이르겠습니다.”

기죽은 목소리의 신아가 문을 향하니 수가 당황하여 그를 붙잡았다. 뭐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아니, 야…. 당연히 네가… 있는 게 좋지…….”

민망한 기분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울한 낯을 해 보인 신아는 그런 스승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두 귀에 담았다.

“너도 목욕 시중을 받아…?”

혼란스러워 보이는 스승의 낯에 신아는 음험한 마음을 숨기고 눈을 찌푸렸다.

“저는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합니다.”

단호한 말에 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싫으면 안 받아도 되는 건가. 생각보다 단순한 해결법에 난감함이 묻어나던 낯이 안정을 되찾았다.

“나도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것이 싫구나.”

“제가 만지는 것도 싫으십니까?”

역시 몸을 직접 닦아주는가. 수는 물러설 수 없어 각오를 굳혔다. 제가 애도 아니고, 다 자란 몸을 타인에게 맡길 순 없었다.

“그래.”

그 대답에 신아의 낯이 서럽다는 듯 무너지니 수는 당황하여 눈꺼풀을 떨었다.

“너도 싫다고 했지 않아…….”

“스승님께서 만지는 것은 괜찮습니다….”

“나는, 그래도 혼자 하는 게 좋다….”

한풀 꺾인 목소리였다. 단호함을 잃은 스승에 신아가 허리를 낮추었다. 수는 제 앞에 들이밀어진 미인의 낯에 걸음을 뒤로 물렀다. 그러나 뻗어 온 팔이 어깨를 붙들어 멀어지려는 것을 막았다.

“진정… 싫으십니까?”

못내 서운한 듯, 신아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느리고 섬세한 몸짓에 수는 침도 삼키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한 번도 같이 씻은 적이.”

아, 수는 말을 잇지 못하고 굳었다. 어깨를 붙들던 손길은 노골적으로 스승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골반을 스쳐 앞으로 다가오니 수는 몸을 크게 들썩이곤 신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터질 듯 뛰는 심장이 스승의 손바닥을 타고 신아에게 닿았다.

“신아야….”

그 얘기가 왜…. 수는 현실을 부정하며 입술을 물었다.

“만지는 것만 좋아하신 게 아니지요….”

“그… 좋아한 게 아니고…….”

“허면 너무 아파서 사출하셨습니까…? 제 입에도 만족하시어 그만 기절하지.”

수는 다급히 양손으로 신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깜빡이던 신아는 이내 즐거움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휘어 웃었다. 수치로 물든 스승의 낯이 아름다웠다.

“…웃어?”

수는 주먹을 부들대며 신아의 가슴팍을 내려쳤다. 개미도 못 죽일 만큼 약하게 때리시니 신아는 스승을 안아 그 어깨에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때는 내가 아니라….”

“예. 저를 달래기 위함이었지요. 불충하게도 스승님의 몸에 두 번이나 사출하였습니다…. 한번은 복부에, 또 다른 한 번은 스승님의 손바닥 안이었지요…. 어찌 잊겠습니까.”

으으, 수가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신아는 여전히 수치를 몰랐다. 다 큰 신아가 십 년 전 일을 기억한다 하니 이건 이대로 괴로웠다. 야속하게도, 저 또한 신아의 아래를 쥐고 흔들던 기억이 선명했다.

“신아야…, 나 빨리 장을 구경하고 싶은 듯해…….”

“허면 지금 바로 탕에 드시겠습니까?”

“응…….”

이는 목욕시중을 허락함과 같았으니 신아의 낯이 환히 트였다.

수는 체념하여 고개를 떨구었다. 신아가 제 아래를 물고 사출액을 받아 내던 과거도 있다. 이제 와서 몸을 닦아 내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싶었다.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기억은 목욕 시중 정도의 민망함은 가볍게 덮어 버렸다.

탕 앞에 선 수가 허리끈을 풀어 내려 제 허리춤을 짚었다. 그에 신아가 스승의 양손을 쥐어 양옆으로 들어 올렸다. 대뜸 양팔을 벌리고 신아 앞에 서게 된 수는 몸을 주춤댔다.

경계를 세우는 스승에 신아가 또 한 번 맥없이 웃었다. 성적인 것만큼은 벽이 높은 분이니 하나하나 깨우쳐 드릴 필요가 있었다.

“환복하실 땐 그리 계시면 됩니다. 환복은 수련원에서도 돕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허리끈만 매어 주었잖아.”

목욕 시중에 대해 무지한 수가 말끝을 흐렸다. 신아가 저를 가르치고 있으니 스승 된 입장에 민망함을 감출 수 없었다.

신아는 유연한 손길로 스승의 허리끈을 풀어냈다. 한껏 태연을 가장했으나 속절없이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윗옷을 벗기려던 때, 스승의 손길이 손목을 붙잡았다. 흐트러진 앞섶에 뽀얀 가슴이 드러난 채였으니 신아는 입 안 여린 살을 짓씹었다.

“…그.”

조심스런 목소리에 손발이 움찔댔다. 스승님 동의 없이 함부로 만지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음험한 욕심이 드글거려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그냥 같이 씻으면 안 돼? 네가 목욕을 돕는다는 게…. 사실 조금 부끄럽다.”

솔직한 고백에 이제는 속이 들끓다 못해 차게 식는 것을 느꼈다.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간절하게 저를 올려 보는 스승님은 참으로 무방비했다.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면… 나는 화국의 대접이 훌륭했음을 잊지 않을 텐데….”

무르다 못해 달콤한 협박이었다. 신아는 탄식하며 두 손을 들었다. 애초에 오늘 당장 뭘 하고자 한 것도 아니니 이만하면 물러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지금 더 옷을 풀었다간 물러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스승님.”

서운해하지 않는 듯한 음성에 수는 긴장한 몸을 풀었다. 다행히 제 협박이 먹힌 듯싶었다. 신아는 벌렸던 앞섶을 닫고 스승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쯤은 아무렇지 않은 수가 눈을 깜빡이며 신아를 보았다.

“제자가 애정이 고파 스승님을 피곤하게 했습니다. 타인에게 몸을 맡김이 부끄럽다 여겨질 수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미안할 필요는 없단다.”

수는 신아의 사과에 손을 꿈질댔다. 같이 씻자고 했을 뿐인데 제 마음을 알아주니 어째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꼬리가 있었으면 살랑거렸을 모습이었다. 그런 스승을 내려 보는 신아의 눈동자가 한없이 탁해졌다.

“…저는 스승님의 음경도 입에 품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만할 생각이었는데, 스승님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몸이 근지러웠다.

“스승님의 정액도 빨아 먹었는데 목욕 시중에 무슨 고민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너무 제 입장에서만.”

“신아야!”

수는 당황한 낯으로 신아의 얼굴을 붙잡았다. 그에 신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너…. 그걸 삼켰어…?”

“예.”

“왜…?”

수는 십 년도 지난 일에 충격 받아 몸을 휘청였다. 물을 생각도 없이, 당연히 뱉었을 줄 알았다.

“삼키면 안 됩니까?”

순수한 물음에 수는 말문이 막혀 입을 뻐끔댔다.

“더… 럽잖아.”

“안 더럽습니다. 수선의 파정액이 아닙니까.”

수는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짚었다. 이쯤 되니 그 정돈 삼켜도 될 듯싶었다. 수가 시름하니 신아가 스승 앞에 근심스런 낯을 보이며 고개 기울였다.

“…혹시 맛이 궁금하십니까?”

“아니!”

깜짝 놀라 소리친 후 이내 한계치에 다다른 민망함에 흐물흐물 늘어졌다. 신아는 그런 스승을 안아 다독였다. 제 제자가 원망스러움에도 얌전히 품에 안겨 드시니 만족스러워 눈을 감았다.

“다음에는 목욕 시중을 허락해 주세요. 화국의 도리를 떠나 제가 그러고 싶습니다.”

스승은 기억이 없지만 신아는 스승의 몸을 닦은 경험이 있었다. 그에 스승의 둔부를 훑어 내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래 알았어…. 오늘은 얼른 씻고 나가자.”

수는 제가 뭘 허락한 것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다 풀어진 윗옷을 바닥에 떨구었다. 수산의 수련자답게 균형 잡힌 몸이 신아의 시선을 잡아챘다. 신아는 눈썹을 움찔대다, 난감한 듯 한걸음을 물렀다.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저는 그 후에 씻겠습니다.”

“시간 아깝게 어찌 그래. 같이 씻자. 아직도 김이 나는 게 따뜻해 보여.”

하하. 신아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요?”

제자가 스승의 속살거림에 발정함을 잘 모르시는 듯하니, 곧장 스승의 허리를 감싸고 바짝 당겨 안았다. 영문을 모른 채 순순히 안겨 든 수는 곧장 놀란 듯 몸을 굳혔다. 제 아랫배에 비벼지는 존재감을 부정하고 싶었다.

“먼저 씻으심이 좋겠습니다.”

“…….”

속삭이는 목소리에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수의 눈이 혼란으로 물들었다. 아직도 병이 낫지 않았단 말인가.

신아는 황망해하는 스승을 뒤로한 채 욕탕 입구를 향했다. 커다란 탕은 내딛는 걸음마다 발자국 소리를 울려댔다. 신아는 문을 열다가 천천히 뒤를 돌아 스승을 보았다. 많은 것을 짓누른 웃음이 뿌연 공기 속에도 청아했다.

“스승님. 욕탕 구조가 참 예쁘지 않습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둥그런 천장에 부딪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수는 귀가 간지러워 몸을 움츠렸다.

“목소리가 참 잘 들리지요.”

너무 기대됩니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신아는 그보다 예쁠 수 없도록 환하게 웃었다.

* * *

공기에 섞이듯 고요히 움직인 이가연은 홀로 연회 준비를 마쳤다.

부족함 없이 보필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누구도 이가연의 조촐한 행보를 막지 않았다. 말이 없고 무던한 분이시니 모두가 서쪽 대신관의 뜻을 존중하였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도 묘시이니, 대신관은 익숙한 듯 왕의 서재를 향해 걸었다. 궁인들도 그에 익숙한 듯 놀라는 기색 없이 길을 터 주었다.

이가연은 왕의 침전 옆 소침에 들었다. 본래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쓰임은 왕의 개인 집무실, 또 하나의 편전이자 서재였다. 잠들기 전까지도 붓을 든다는 연왕의 숨 막히는 업무량과 나랏일에 대한 열의를 알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가연은 익숙한 듯 탁자 위 새로이 들어찬 서책을 집어 들었다. 수선과의 만남을 자제해 달라 청하는 연왕에 이가연이 대가로 요구한 것이었다.

차분히 앉아 글을 읽어 내려가기 무섭게 누군가 서재 문을 열어젖혔다.

그 요란한 소리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왕의 침전 앞에 아무런 경고 없이 침입할 수 있는 자는 하나뿐이었다.

연왕은 쾅 소리 나게 나무문을 닫았다. 성큼성큼 걸어 이가연을 내려 보니 이가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고개 숙이던 이가연은 이내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내린 연왕을 보며 눈을 좁혔다. 가만 보니 대례복도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아 흐트러진 채였다.

“…체통을.”

“잃을 위험이 없으니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크게 한숨 쉰 연왕이 주변에 놓인 의자 하나를 끌어 그 앞에 앉았다.

이가연은 조용히 자리에서 비켜섰다. 본래의 주인이 돌아왔으니 나가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연왕은 우아하게 팔을 들어 탁자를 전부 쓸어버렸다.

커다란 벼루와 잡다한 서책, 상소가 뒤섞여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소리에 문밖에 선 지밀상궁이 안절부절못하여 울상 지었음은 당연하다.

“태워 버리려다 치운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내뱉는 말마다 한숨이 섞여드니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임에 이가연은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간밤에 이가연이 든 외전의 서재 앞으로 줄지은 보초를 보낸 연왕이었다. 그에 일족 무인인 슬선이 이상한 낌새를 읽어 제 스승을 보호하려 들었으니, 꽤 큰 소란으로 번지기도 했다.

이가연은 그 줄지은 보초가 저더러 그들을 지켜 달라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에 긴장을 곤두세운 밤이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 쉬는 연왕은 품에서 술병 하나와 잔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술은 좀 하십니까?”

그런 행동에 이가연이 슬쩍 눈을 찌푸리니 연왕은 혀를 찼다.

“저도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연왕은 술병을 들어 이가연의 잔을 채웠다. 그를 보던 이가연이 직접 왕의 잔을 채우려 들었으나 연왕은 피식 웃으며 스스로 제 술잔을 채웠다. 지엄한 군주는 서쪽 대신관 앞에선 초선이라는 민낯을 드러냈다.

“화국에 관해 공부하신 것은 알겠으나 따르려 하진 마세요. 대신관께서 예를 몰라 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수산에서도 따르는 예법입니다.”

“허면 왕과의 겸상 자체가 무도한 일임은 아십니까? 내전에 든 것부터가 왕실 법도를 흐리는 일이지요.”

연왕은 눈을 찌푸리며 잔을 들었다. 그에 이가연도 덤덤히 고개를 돌려 술잔을 기울였다. 코끝에 은은한 꽃 향이 감도는 맑은 청주였다.

“곧 연회입니다.”

이가연은 이른 술상을 지적했으나 연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취소될 참이니 어울려 주세요. 벌써부터 물릴 술상이 아쉬워 들렀습니다.”

수선도, 화선도 없는 연회를 열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관리들에게 술상을 내려 규모를 줄이고 남은 음식들론 궐 밖 백성들에게 잔칫상이나 크게 열어 줄 참이었다. 급히 일정을 틀었으니 궁내에서 원성이 뒤따랐음은 당연했다. 그에 연왕 또한 신을 원망하였다.

“간밤엔 감사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민망할 따름이지요.”

언짢아 보이는 연왕에 이가연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술잔을 쓸었다. 오늘로도 수선을 뵐 수 없단 뜻이었다.

“폐하의 신뢰에 감읍할 뿐이지요. 어찌 신궁의 보초들을 물리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송구하오나, 활동에 제약이 있어 그것까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를 감시하는 시선을 비꼰 말이었다. 초선은 대신관의 무인다운 면모에 웃음을 흘렸다. 모를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수선께서 신궁에 드셨습니다. 그에 흥분하신 화선께서 궁 주변에 있는 것들을 도륙 내실까 봐요.”

연왕은 쓰게 웃으며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허나 궁 안팎으로 성대한 축제를 열라 하시니 만족스러운 재회를 가지셨나 봅니다.”

화국이, 동쪽 땅이 멸망할지도 모른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무할 정도로 비약한 생각이었다. 직접 수선을 모시고 나들이나 가시겠다니 말이다.

목욕 시중을 들거든 입구에서 열 보 떨어진 바닥에 엎드려 있으라던 분이 무슨 생각으로 장에 나서시는가? 목탑의 꼭대기 층 침방에 침상만 한 거울을 올리라 하시질 않나.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신의 의중에 연왕은 진이 빠졌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참으로 헛된 시간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연왕에 이가연은 덤덤히 시선을 내렸다. 저는 대신관으로서 수선을 뵈어야 했다. 하지만 그에 화선이란 존재가 앞을 막고 있으니 쉽지 않았다.

수선의 탄생을 느꼈다 한들 동쪽 땅에선 수선의 존재를 좇을 수 없었다. 당연히 수선의 존재가 흐리게 느껴졌다.

신의 뜻을 대리하는 대리인, 수선. 동쪽 땅에서도 신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화선을 마주한 이후 하늘에 전달받은 뜻이 있는지 여쭈어야 했다. 또한, 수선께선 직접 결계에 닿고도 익사하지 않았다. 뭔가가 이전과는 달랐다.

의문을 감춘 이가연이 조용히 술잔을 들어 올리자 연왕도 같이 잔을 들어 올렸다. 신을 모시는 두 인간은 각기 다른 시름을 삼켰다.

* * *

“신아야…….”

자그마한 목소리에 신아가 고개를 돌렸다. 욕탕 밖으로 눈코입만 빠끔 내민 스승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끼익 대는 경첩 소리가 넓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저런, 신아는 눈썹을 찌푸렸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스승님은 양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정적이었으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신아는 스승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신아가 열 보나 될까 싶은 짧은 거리를 걸어오는데 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신아의 손아귀에 붙잡힌 두꺼운 나무문이 활짝 열렸다. 문가를 붙잡고 선 수는 민망한 듯 시선을 내렸다.

손으로 물기를 짜낸 머리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물기에 젖은 남색 도포는 등에 달라붙어 몸의 윤곽을 드러냈다. 목욕 후 몸을 제대로 닦지 못한 듯 보였다.

신아는 뜻밖의 상황에 시름했다. 제자의 발기에 심란하셔서 목욕이 길어지는 줄 알았는데 이는 아닌 듯했다.

황당한 듯 한숨 쉬는 신아에 수는 눈썹을 늘어뜨렸다. 마른 천이 없어 몸을 닦지 못했다. 그렇다고 신아에게 도움을 청하자니 그를 보낸 건 자신이라 민망하여 그럴 수도 없었다.

찰나의 민망함이 더 큰 민망함을 낳았으니,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다. 수건을 주지 않은 것은 화국인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된 기분에 수치스러웠다. 그것도 신아의 앞에서 말이다.

“수건이…. 마른 천이 없던데…, 뭐로 닦아야 할지 몰라서 일단 입었다.”

제가 신아를 다시 부를 수 없어 자존심을 세웠다는 말과 같았다. 애초에 신아가 도와주겠다 할 때 얌전히 몸을 맡겼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신아가 허리를 굽혀 오니 수는 몸을 움츠렸다. 시선을 맞출 줄 알았던 신아는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옷감을 들어 올렸다. 신아가 두텁게 접혀 있던 옷감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로 똑같은 옷감 하나가 떨어졌다.

“그…….”

혹시 그거야…? 수는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신아는 조용히 두꺼운 천을 펼쳐 스승의 몸을 덮어 드렸다. 수는 한계를 모르고 벌게진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물기를 닦기엔 너무 좋은 천이라… 수건인 줄 몰랐단다.”

수건이 왜 수건인데. 억울했지만 그를 알아줄 사람은 없었다. 수는 커다란 크기의 고급 천이 몸을 닦으라고 놓인 줄은 몰랐다. 그저 보들보들하고 푹신푹신하기에 손끝으로 한번 찔러나 봤을 뿐이다.

흰 무명실이 보풀보풀 나오도록 짠 천은 수로선 처음 보는 재질이었다. 당연히 고급 의복의 옷감이나 제가 알지 못하는 의복인 줄 알았다. 수가 판단하기로서니 이렇게 특이한 재질을 가진 천은 물기나 닦는 수건으로 쓰일 것 같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잘못된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스승님…….”

절절한 제자의 탄식에 수가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가 곧 넓은 품으로 스승을 안아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무게를 실어 안기는 신아에 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섰다.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었다.

“그…, 다음엔.”

“제가 같이 들 테니 괜찮습니다….”

“…….”

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론 제가 모르는 일에는 더 이상 고집을 세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늦은 반성이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스승님에 신아는 눈을 감았다. 이래서야 아래를 가라앉힌 보람이 없질 않은가.

제 스승님은 항상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제자를 곤란하게 만드신다. 참지 말라며 보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기에 젖어 처량하게 저를 보는 스승님은 정말이지, 곤란했다.

신아가 작게 시름하니 수는 몸을 꼼지락대다 입술을 물었다. 저 혼자 분투하느라 보낸 시간에 외출이 늦어질까 미안했다.

“앞으로는 네가 하라는 대로 따르마.”

그 말에 신아가 스승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웃었다. 제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스승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수선의 입국을 축하하는 연회가 성대하니 백성들 또한 큰 잔치를 벌였다. 더불어 폐하께서 직접 국가의 경사를 함께 누리기 위해 음식을 베푸신다 하니 모두가 기뻐했다.

왕궁의 소주방 내인들이 직접 민가에 나서 음식을 퍼다 나누었다. 광장에 늘어선 수많은 탁자는 빈자리가 없이 빼곡했다. 골목마다 지글대는 기름 냄새, 저 멀리 광장에서 들려오는 길거리 악대의 풍악 소리,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수도의 장에 가득했다. 축제를 동반한 장의 규모는 수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컸다.

또한 시장 곳곳에는 색색의 탈을 쓰고 돌아다니는 자들이 흔했는데 이는 근래에 생긴 수도의 유행이었다. 시작은 왕위에 올라 탈을 부수어 낸 성군 연왕을 기리는 것으로, 큰 잔치가 열리거든 백성들은 연왕을 향한 존경을 드러내며 탈을 썼다.

맨 얼굴의 사람들, 색색의 탈을 쓴 사람들 속에서 검은 탈을 쓴 두 사내가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이며 시선을 가로챘다. 존재감으로는 왕족임이 틀림없으나 둘 다 갓을 쓰지 않았으며 그중 한 명은 짧은 머리인지라 신분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것도 먹어 봐.”

수는 진득한 간장 양념이 흐르는 고기 꼬치를 신아의 입에 내밀었다. 먹으라는 듯 아, 하고 재촉하니 신아는 얌전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먹었다.

몇 번 씹기가 무섭게 수는 그의 소매를 당겨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

“맛있지.”

신아가 고개를 끄덕이니 수는 뿌듯한 미소를 보였다. 신아는 스승의 웃는 얼굴이 탈에 가려졌음을 다행으로 여겼다. 스승을 힐끗대는 시선을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다.

백성들의 시선은 둘을 향했으나 신아는 스승님을 향한 눈길에만 예민하게 반응했다. 묘하게 살기를 흘려 깔아뭉개듯 내려 보니 백성들은 신의 위압감에 영문도 모른 채 몸을 떨어야 했다.

그를 알 리 없는 수는 뜻밖의 재미에 시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하루 동안 다 볼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다. 북적거리는 인파에 신아를 잃어버릴까 봐 그의 손목을 꼭 붙잡았다. 화선은 저보다 한 뼘 작은 스승의 손에 붙들려 군말 없이 그를 따랐다.

앞장서서 걷는 스승님에, 따라오라며 저를 당기는 힘에 이보다 설렐 수 없었다.

해가 지고 난 후에도 시끌벅적한 화국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시장을 밝히는 색색의 등이 화려함을 뽐냈다.

만족스러운 구경을 마친 수는 화국 수도를 가로지르는 강이 한눈에 내려 보이는 잔디밭에 앉았다. 내일 있을 뱃놀이 준비를 구경하는 것도 꽤 흥미로운 놀이였다.

신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새에 수는 탈의 끈을 풀어 잔디밭에 내려놓았다.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가려져 있던 이마가 시원했다. 그러니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했다.

화국은 태평성대였다. 신을 업은 왕권은 부강했고 신이 평화를, 왕이 백성을 위하니 모두가 행복하게 웃었다.

평화를 좇는 신이 제 어여쁜 제자 신아이니, 수는 가슴이 간지러워 웃었다. 모두가 홀대했던 아이는 화국 땅에 평화를 불러 왔다.

화국이 조금만 따뜻했더라면 더 이른 시일 내에 평화를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화를 맛보지 못한 불의 일족은 아이를 품지 못했고, 아이는 이제야 다 자라 신이 되었다.

그렇게 학대받고 자랐으면서도 신은 화국을 품었다. 그런 큰 그릇을 가진 자가 제 제자이다. 수는 편안히 숨을 내쉬며 화국의 평화를 즐겼다. 저는 꿈도 꾸지 못할, 신다운 자비였다.

“수선께서 화국을 좋아하실까?”

멀찍이서 들리는 목소리에 수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를 좇으니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린아이들 셋이 보였다.

“응. 울 어머니가 곧 화선과 수선 두 분이 혼인하실 거래.”

“우리 아부지도 그러셨어.”

혼인? 수는 고개를 기울이다 작게 웃었다. 아이들은 둘의 성별이 같음을 모르는 듯했다. 수는 뒤를 돌아 시장을 살폈다. 아직 신아가 보이질 않으니 조금 더 아이들의 대화를 엿듣기로 했다.

“근데…. 수선께선 인간이래.”

간식을 우물대는 아이가 입을 열었다.

“아냐. 그럼 신이 왜 인간을 모셔? 수선도 신이야.”

“아니야 인간이야. 책방 아저씨가 그랬어.”

“털보 아저씨가?”

수는 아이들의 이야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방 주인이 수산에 관한 서책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럼 어떻게 혼인해?”

그 질문에 세 아이가 머리를 맞대고 시름했다. 수는 그 모습이 귀여워 웃음을 흘렸다.

“화선께서 수선을 신으로 만들면 되잖아.”

“오오.”

개중 영특해 보이는 아이가 방법을 찾은 듯 고개를 쳐드니 다른 아이들이 감탄하며 그를 올려 보았다. 그럴싸하군, 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신이 팔을 휘두르면 뭐든 이루어진다 생각할 테니 말이다.

수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으며 웃던 그때, 커다란 손이 수의 시야를 뒤덮었다.

“하하.”

수는 그 손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팔을 들어 익숙한 듯 제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그렇게 환히 웃으며 신아를 반겼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신아에게도 어서 알려 주고 싶었다.

“찾았어?”

“예.”

“그래? 다행이다.”

수는 괜찮다는데도 복주머니를 찾아온 신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 식경 전, 신아를 보며 해사하게 웃던 수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어깨를 부딪쳤다. 그에 눈 깜짝할 새에 손에 들린 복주머니를 도둑맞았다. 맛있다며 웃는 신아에게 정신이 팔려 주위를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그에 신아의 낯빛이 어두워지니, 수가 당황하여 팔을 저었다. 제 부주의로 하루를 망치게 될까 염려스러웠다.

다행히도 신아는 스승이 안심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에 수 또한 안심하곤 그를 따랐다.

장을 누비던 수는 잠시 장을 벗어나 풀밭에 앉았다. 그에 신아는 지나오는 길에 복주머니를 본 것 같다며 스승의 만류에도 홀로 장에 들었다. 불쾌함에 곤두선 신경은 단숨에 좀도둑을 찾아내었다.

감히 수선의 몸에 손을 대었음은 물론이요, 수선께 화국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심은 죄인이었다. 신은 더 볼 것 없이 손목을 비틀었다. 억센 힘에 손목은 물론 어깨까지 비틀려 으스러졌다. 사내의 비명은 시끄러운 환호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죄인을 골목에 던지고 돌아서니, 그를 처리하는 것은 뒤따른 호위의 몫이었다. 신아는 스승을 뵙기 위해 화를 죽이며 걸음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곳에는 스승님이 얼굴을 내놓고 웃고 계셨다. 제가 아닌 다른 이를 보며. 순식간에 심기가 뒤틀려 머리에 피가 돌았다.

땅을 짓밟으며 걸어갔으나 제게 내민 낯이 그보다 더 해사할 수 없었다. 스승이 옆자리를 짚으며 앉으라 재촉하시니 신아는 비집고 나오는 질투를 짓누르며 그 옆에 앉았다.

수는 신아의 어깨를 짚어 귀에다 속삭였다.

“아이들이 우리더러 혼인할 거라고 한다.”

웃음을 머금은 속삭임에 신아의 질투가 맥없이 스러졌다. 신아는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가린 탈을 풀어냈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스승 앞에 미인의 낯을 드러냈다.

저리 기특한 아이들에게 살의를 품었다니. 신아는 아이들을 흘기며 미소 지었다. 장안에 흘려 놓은 얘기가 스승의 귀에 닿은 모양이었다.

“신궁에서 함께 지낸다 하니 혼인한단 말이 도나 봅니다.”

“그런가?”

신아는 그런 것 같다며 납득하는 스승에 옅게 미소 지었다.

“생각해 보면 스승님과 제가 혼인한 부부와 크게 다르지 않지요.”

“하하, 그건 아니지 신아야.”

수는 순수하게 느껴지는 제자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침상에서 잔다고 다 부부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왜 다르다 보십니까?”

신아의 물음에 수는 웃으며 코를 찡그렸다.

“허면 어찌 같다 보느냐?”

제자의 지식을 확인하려는 듯, 수는 턱을 쳐들고 근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에 입가에 웃음이 서려 있으니 신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답하지 못하는 신아에 수는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부부가 무엇인지, 그들이 맺은 관계가 무엇인지 일러 줄 참이었다.

“제가 스승님을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앞선 신아의 말에 스승은 하려던 말을 잊었다. 생각한 것보다 애틋하고, 소중한 관계를 떠올리며 빗댄 것이었다.

“스승님도 절 사랑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운한 듯 목소리가 늘어지자 수는 당황하여 손을 휘저었다. 그런 의미로 부부와 저희를 같다고 말하는 줄은 몰랐다.

“그, 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다르지 않구나.”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정이 있다. 수는 제가 신아의 순수한 마음을 해쳤을까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스승의 긍정에 신아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허면 합방일은 언제로 잡는 게 좋겠습니까?”

합방? 수는 신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턱을 기울였다. 화국은 수산의 속국이 되기를 청하니 나라를 합치자는 합방(合邦)은 아닐 것이다.

수는 떨떠름한 낯으로 검지를 들어 신아와 저를 번갈아 가리켰다.

“합방?”

“예.”

농을 하는 것인가? 신아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어 눈을 깜빡였다.

“합방일에 무얼 하는 줄 알고?”

“미래를 약속한 부부가 정사를 통해 서로의 정을 확인합니다.”

맑게 웃으며 답하는 신아에 수는 한 박자 늦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저랑 뭘 하자고?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스승에 신아가 말간 낯으로 웃었다. 가만 두면 제 스승님은 제가 하는 모든 행동을 제자의 사랑으로 풀어 낼 테니 직접 일러 드릴 필요가 있었다.

“맞지요?”

맞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수가 제 귀를 의심하며 몸을 물리니 신아가 스승의 등을 받쳐 안았다. 그에 수는 화들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신아야, 정사는!”

“사내 간이라고 어찌 정을 나누지 못할까요. 제가 착실히 공부해 두었으니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뿌듯한 미소를 올려 예쁘게 웃는 신아에 수는 무엇을 지적해야 할지 몰라 버벅댔다.

“신아야. 그, 네가 사제 간의 사랑과 부부 간의 사랑을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제가 품은 것은 사제 간의 정이 아니라 스승님을 향한 연정입니다.”

“아니야…! 지금 네가 오해를 하는 게다.”

“아아.”

신아는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아가 만들어 낸 짧은 침묵 동안 수의 심장이 긴장에 두근댔다.

“저는 스승님 그림자만 보고도 사출할 수 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에 수가 깜짝 놀라 신아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러곤 경계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나라 화선이 지금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스승님도 제 손에 사출할 수 있으니 거부감이 있는 것은.”

“윽!”

수는 너무 놀라 제 혀를 깨물곤 신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를 내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가까이 붙어 서로를 마주한 수선과 화선이 다른 감정을 공유했다. 당황하여 시선이 떨리는 스승 앞에 제자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그렇게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린 스승의 손을 내렸다.

“제가 스승님께 욕정합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 담백한 목소리였다.

“…나?”

어안이 벙벙하여 눈을 끔뻑이는 수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신아를 마주했다. 신아는 웃는 낯으로 그 불안에 못을 박아 넣었다.

“사제 간에 입을 맞추는 자들은 없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들었다.

“그건 연인이지요, 스승님.”

스승의 무지를 깨우는 제자의 가르침이었다.

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입맞춤은 기를 넘기기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건 너를 숨기려……!”

“혀도 섞지 않았습니까.”

수는 잔뜩 긴장하여 말소리를 죽였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아는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혀, 그건 수가 생각해도 이상했다. 다른 것들은 다 핑곗거리가 있었으나 그것만큼은 이유가 없었다. 신아가 태연하길래 흘려버린 것들이었다.

민망하여 넘겨 버렸던 기억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를 덮쳤다. 커 버린 신아는 그 모든 게 비정상적인 접촉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시작한 것은 자신이니 수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어찌 이리 상세하게 기억하는지. 수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었다. 땅을 짚은 손을 헛디뎌 몸을 휘청이니 신아가 그 어깨를 재차 받쳐 주었다. 수는 화들짝 놀라 그 손을 쳐냈다.

무의식적인 반사에 당황한 것은 도리어 수였다.

“어…….”

수는 신아에게 한 번도 손찌검을 한 적이 없다. 저를 붙잡는 팔을 밀쳐낸 정도였지만 수는 신아를 밀어낸 자신에 적잖이 충격받았다.

신아가 내쳐진 손을 내려 보며 입을 닫으니 수의 심장이 부서져라 뛰었다. 제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원래라면 신아의 손을 움켜쥐고 그를 살폈겠으나 순간 울컥 차오르는 설움에 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에 신아도 턱을 들어 스승을 올려 보았다.

“먼저 가마.”

매몰차게 등 돌리는 스승에 신아가 눈을 깜빡였다. 말끝이 떨려 오니 분을 참고 계신 것 같지 않은가. 와중에 탈을 챙겨 머리에 묶으시어 신아는 스승 몰래 웃음 지었다.

“스승님.”

신아는 스승을 앞지르지 않고 졸래졸래 뒤를 쫓았다. 한껏 풀죽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봐 주실 법도 한데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이런 제자는 보기 싫으십니까?”

그 말에 수가 잠시 멈추어 섰다. 신아 또한 멈추어 스승을 기다렸다. 그러나 짧은 정적 후, 수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길을 나섰다.

스승님이 저를 피할 수 있음은 예상한 상황이었다. 신아는 주먹을 쥐어 아직 다 낫지 않은 손안의 흉터를 손톱으로 짓이겼다. 그럴 수 있다. 그렇게 되뇌며 미소 띤 낯으로 뒤틀린 속내를 감추었다.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했다 생각했거늘, 저는 스승이 등 돌린 찰나를 견디기 어려웠다.

신아는 이기적인 불의 성정에 혀를 내둘렀다. 혐오를 안더라도 괜찮다던 과거의 화선은 이제 없었다.

스승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신궁이었다. 신아는 제 스승께서 별궁으로 납시면 어쩌나 고민했으니 잠자코 그를 따랐다.

인파를 헤집고 걸을 때면 스승의 머리 뒤로 늘어진 탈의 끈을 보며 안심했다. 제가 보지 못하는 스승의 표정을 그 누구도 보지 못하니 말이다.

앞서 걷는 자와 뒤따르는 자가 아무런 말없이 길을 걸었다. 시끌시끌하던 축제 소리가 멀어지고 어두운 밤이 내려앉은 큰길을 걸었다. 모래 위를 자박대는 수선의 발소리만이 텅 빈 거리를 메웠다. 소리 없이 걷는 화선은 그런 스승의 뒤를 지켰다.

횃불 아래 꾸벅꾸벅 졸던 보초는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에 졸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뻑뻑한 동공에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내가 보였다.

“누구…….”

웅얼거리기가 무섭게 머리가 후려쳐졌다.

“윽.”

머리를 쥐고 인상 쓴 보초는 분노하며 고개를 돌렸다. 돌린 얼굴 앞엔 함께 서서 정문을 지키던 보초가 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왜 이래!”

“쉬이…….”

입에 검지를 붙여 표정을 구기니 보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인가. 표정이 꽤나 심각하여 목소리를 낮추긴 했다.

“지금 당장 문을 열어 뒤를 돌아.”

“왜 이러나…. 야밤에 미친 게야? 어찌 신궁의 문을 함부로 연단 말이야. 폐하의 허가가 없으면.”

“신이 오신다…. 제발…….”

간절한 호소에 보초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입구까지 열 보만을 남겨 둔 두 사내를 보았다. 한 명은 탈을 쓰고 있으니 시선이 자연히 뒤로 향했다.

깔아뭉갤 듯 내려 보는 시선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신궁을 지킨 지가 벌써 오 년이 되었거늘, 신을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일지라도 모를 수 없었다. 저런 존재가 인간일 리 없었다.

두 보초가 신분도 묻지 않고 다급히 문을 열어 두 신을 받았다. 앞에 서서 걷는 분이 수선일 듯싶었다.

궁의 출입이 어떠한 절차로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수는 별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고 문턱을 넘었다. 머리에 들어찬 생각이 많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아는 그런 스승님이 길을 잃기라도 바랐다. 뭐라도 말을 붙일 구실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러나 스승님께선 곧은 걸음으로 곧장 탑으로 향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돌아가는 곳이 제가 마련한 둘의 처소였으니 말이다.

신아의 눈짓에, 스승의 앞길마다 줄지어 선 횃불이 타올랐다. 아무도 없는 신궁에 오직 수선만을 위해 길을 밝혔다.

“침의를 가져오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자가 마음을 어지럽혔나 봅니다.”

고요한 신궁에 화선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래도 같은 공간에 누우셨으면 합니다. 스승님의 동의 없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노여워 마세요.”

스승이 없는 밤은 이만하면 족했다. 거부하신다면 도리가 없지만, 그리되면 창가에라도 앉아 스승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스승 없는 십 년 동안, 신아는 제대로 누워 잠을 잔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송구합니다, 작게 읊조리는 소리에 수의 어깨가 늘어졌다. 연못을 밟다 말고 멈추어 선 수에 신아가 걸음을 멈추었다.

신아는 물 위를 걸을 수 없으니, 더 이상 스승을 좇을 수 없었다. 저로선 도약하는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신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게 지은 것이나, 외부인엔 수선을 제외한 모든 존재가 포함되었다.

수는 천천히 뒤를 돌아 신아를 보았다. 신아로선 마주한 스승의 표정이 탈에 가려 보이지 않으니 애가 탔다. 하루 동안 훌륭히 제 역할을 수행해 낸 탈은 이제 태워 버리고픈 장애물일 뿐이었다.

수면을 밟고 가만히 선 스승에 신아가 눈을 감았다.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저는 기다려야 하니 말이다.

“내가.”

무겁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각오하듯 숨을 다잡았다.

“너를 잘못 가르쳤으면 어쩌지.”

애써 감추려는 듯하지만 스승의 목소리가 떨려 옴을 알 수 있었다. 신아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탄식하며 두 눈을 들어 올렸다. 목소리에 담긴 것은 자책이었다.

여태껏 말없이 걸으며 자신을 책망하셨는가. 어찌 제자를 탓할 줄 모르시는가. 신아는 천천히 걸어 스승께 다가섰다. 걸음을 물리지 않으심에 감사하며 조심스레 스승의 얼굴을 가리는 탈을 풀어냈다.

허공에 드러난 스승의 얼굴을 두 눈에 담았다. 저의 이 얄팍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평생토록 그를 헤아릴 수 없을 테다.

수는 우글대는 마음에 소매 아래로 두 주먹을 쥐었다. 이 모든 게 기묘한 행각을 방관한 제 탓이었다. 사내가 사내를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허나 신아에게는 착각할 만한 많은 상황이 있었고 스승은 그를 방치했다. 지적하기엔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했으니 제일 큰 문제는 입을 닫은 저였다.

“내가 진작 일러 주고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다 내 탓이야.”

“스승님.”

“내가 아닌 다른 이가 가르쳤다면 분명 여인을 마음에 품었을 거다.”

“스승님이 여인이셨다면 그랬겠지요.”

“…….”

수가 시선을 내리니 신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가 마음에 품은 것은 사내가 아니라 스승님이십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께서 저를 거두지 않으셨다면 저는 성체도 되지 못하고 죽었을 겁니다.”

“…신아야. 죽음을.”

입에 담지 마라. 수는 입술을 물었다. 죽어 가던 아이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또한 스승님 없이 성체가 되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화국은 없었을 겁니다. 증오를 품고 동쪽 땅을 멸망시켰음이 분명하지요. 정처 없이 떠돌던 불을 이보다 더 따뜻하게 품을 이는 없습니다.”

“…스승인 내가 너의 이상한 성벽을 키웠음은 사실이다.”

단호한 말에 신아는 한숨을 뱉으려던 것을 참았다. 왜 저는 이런 스승을 앞에 두고도 참아야 할까? 뻔뻔하게도 억울한 마음이 솟았다.

그런 생각을 알 리 없는 수는 신아를 올려 보다 고개를 저었다. 제 그림자만 봐도 사출이라니, 제가 부둥부둥 키우느라 큰물을 보여 주지 못했다. 동자들의 처소에 보내지 않았으니 사회성이 결여됐음이 분명했다. 그 결여가 몸에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수는 시선을 내린 신아를 보았다. 팔을 들어, 검지로 신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신아야.”

그에 신아가 시선을 들어 스승과 눈을 맞추었다. 스승의 눈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각오가 서려 있었다.

“내가 진작 일러 주고 바로잡았어야 했는데, 붙어 있으니 좋아서 굳이 그 의미를 알려 주지 않았어.”

“…….”

“다 내 잘못이다. 원래 사제 간엔 혀… 를 섞지 않고 스승의 아, 래가 섰다고 한들 대신 풀어 주지 않는단다.”

그리 뱉는 수의 얼굴이 민망함에 벌게졌다. 스스로의 죄를 시인하느라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어깨가 부들댔다. 부끄러움을 무릅쓴 스승의 고백에 신아는 현기증이 일었다.

“너는 그럴 수 있어. 잘 몰랐으니 말이야. …내가 가르치고 바로잡아야 했는데 언쟁이 싫어 이를 피했다. 너와 같이 있는 게 좋아서 흘려버렸지.”

제 스승님은 도무지 자각이 없다. 그림자만 봐도 사출한다는 제자 앞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스승님. 저는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신아는 이번 나이로는 스물일곱이었고, 억겁의 생을 산 화선이었다. 다 알고 계실 텐데도 스승님은 저를 어린 제자로 대했다. 그게 좋았지만 과거에 대해서만큼은 더 숨기고 싶지 않았다.

신아는 제 판단이 어리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수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평생을 아이였다. 나는 지금, 내 가르침이 성인이 된 네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거야.”

스승의 화난 투에도 신아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어찌 놓을 수 있겠는가. 저를 품을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을.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이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다시 생각해 보니… 스승님 없인 숨도 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수는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신아는 스승을 품에 안아 뒷말을 막았다.

“잠, 깐만……!”

스승을 들어 올려 단단히 받쳐 안으니 수가 그 가슴을 내려쳤다. 하하, 신아는 스승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내 발로 걸어갈 거다. 그리고 이제는 입을.”

“그리 화가 나시고도 힘주어 때리지 못하시는 게 사랑입니다.”

“…신아야. 나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야.”

“예. 사랑을 노래하고 계시지요.”

“잠깐, 윽.”

신아는 그대로 땅을 짓밟아 하늘로 날았다. 놀라서 품에 파고드는 스승에 신아는 더없는 현기증을 느꼈다.

꼭대기 층 난간에 사뿐히 내려앉은 신아는 그대로 스승을 안아 탑에 들어섰다. 수는 침상을 보자마자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신아는 웃는 낯으로 그런 스승님을 침상에 내려드렸다. 방 안에는 두 대의 초가 피어올라 두 신의 용모를 밝혔다. 신아는 제 스승을 내려 보며 고개 저었다. 제가 모든 상황을 자초했다는 순진한 스승님 앞에 제자가 뭘 더 참을 수 있겠는가.

“잠깐. 신아, 읍!”

신아가 한쪽 팔로 부드럽게 머리를 감싸 안아 입을 맞붙였다. 혀를 내어 부드럽게 그 입술을 핥았다. 달았다. 기억하는 것과 마주하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틈이었다.

입술 사이로 혀를 비집으니 수가 이를 악물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입을 열면 혀가 들어올 것이 뻔했다.

입을 벌리지 않으시니, 신아는 다른 팔로 스승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에 놀란 수가 헛숨을 들이켰다.

“흐윽…….”

벌어진 턱에 신아의 혀가 얽혀들었다. 입을 붙인 채 몸으로 밀어붙이는 신아에 수가 다리를 접어 신아의 복부를 밀었다. 커다란 벽같이 느껴지는 몸은 정말이지 밀려날 줄을 몰랐다.

“으, 잠……!”

입 안 곳곳을 훑어 빨아들이는 감각에 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하라 하고 싶은데 소리 내기가 어려웠다. 그저 질척하게 얽히는 침음이 귀를 괴롭힐 뿐이었다. 욕정이 담긴 행위라 생각하니 배덕감이 몰려와 수를 괴롭혔다.

허리를 안아 든 팔은 어느새 목덜미를 훑어 내리고 있었다. 벌어진 앞섶으로 커다란 손이 들어오니 수의 머리가 하얘졌다. 맨살을 왜 만진단 말인가. 더한 접촉을 상상할 수 없는 수가 신아의 손목을 붙잡고 비틀었다.

“흐으…, 헉.”

손목이 비틀리고서야 스승을 놓으니, 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붉어진 입술이 타액에 번들거렸다.

원망 섞인 눈동자가 신아에게로 가닿았다. 모든 게 제 잘못이었다며 진실을 말해 주었음에도 신아는 혼란스런 기색이 없었다.

신아가 웃는 낯으로 눈썹을 구겼다. 그렇게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니 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모습이 수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스승님. 이보다, 더 잘 키우실 순 없습니다.”

흥분을 짓누르는 투에 수가 눈을 깜빡였다. 옷 안을 비집고 드는 손을 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디까지 갔을지 알 수 없었다.

“불에게 인내를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신아가 손을 뻗어 흐트러진 스승의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다정한 손길과 달리 숨을 토하는 가슴이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수가 당황한 눈으로 신아를 보았다. 그런 눈길에 화답하듯, 신아가 눈을 접어 환히 웃었다.

“그래도 십 년은 너무 길지요…….”

신아는 단숨에 스승을 안아 그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안정을 찾으려는 듯 크게 호흡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세요.”

애달픈 속삭임에 수가 두 눈을 깜빡였다. 잘못 가르쳤다. 맞닥뜨린 진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사내 간에 정사는 불가하다. 애초에 둘 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사내 간의 정사가 불가능한지는 확신이 없으니 말을 흐렸다. 사내 간엔 허벅지에 끼우고 허리 짓함을 정사라 부르는 것일까. 그럼 저는 신아와 벌써 정사를 치른 것인가? 수는 머리가 과열되어 고개를 떨구었다.

신아는 와중에도 저를 바로잡으려 하는 스승님에 웃음을 흘렸다. 준비할 테니 알려 달라는 것처럼 들림을 아실까.

“저도 첫날이 걱정입니다 스승님.”

“아니. 하겠, 다는 게 아니라 안 된다니까…!”

수는 신아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밀어내려 들었다. 그러나 저보다 한참 커진 몸은 당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지금 떼를 쓰는가. 수는 밀어내기를 포기하고 도리질했다.

신아는 포기하듯 저를 다독이는 스승의 손길에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스승님의 반응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같은 침상에 누워서 주무실 것 같으니 말이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스승님께선 제자가 감히 덮칠 수 있다곤 상상치 못하셨다.

신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다가 난감한 듯 눈매를 좁혔다.

“…걱정이.”

자연히 수의 시선이 그를 좇았다. 수는 신아의 시선을 따라 제 배를 내려 보다가 고개를 들어 신아를 보았다.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니 그에 신아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아는 웃는 낯을 가장하여 안에 든 생각을 날려 버렸다.

저 판판한 복부를 비집고 넣자니 윤곽이 비칠 듯했다. 여기까지 말했다간 같은 침상에서 자긴 그른 일이 될 테다.

숨이 진정된 신아가 예쁘게 방긋거렸다. 되찾은 평화에 수는 헛헛한 숨을 내뱉었다. 잠을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꿈이었을 것 같았다.

“근육이 다 빠진 게 아닙니까. 많이 드셔야겠습니다.”

“…내 말을 이해한 게 맞아?”

말을 돌리는 것 같은 신아에 수가 불안을 드러냈다. 포기한 게 맞나? 신아는 스승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해 웃음을 터트렸다. 스승과 보낸 하루가 그 없이 지낸 십 년보다 풍요로웠다.

왜 웃냐며 눈매를 좁히는 스승에 신아가 송구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내 간의 정사가 불가함을 이해했냐 물으시니, 가능한 일인지라 그에 수긍하진 못하였다.

몸을 웅크려 스승의 품에 파고들자 별수 없다는 듯 받아드는 손길이 느껴졌다. 재우려는 듯 등을 다독이는 손짓이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신아는 그 품속에서 평생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정한 스승님은 제게 욕정하는 제자를 버리지 못하신다. 스승님께 욕정한다는 말을 듣고도 잘못된 길에 들어선 아이를 바로잡아 줄 생각만 할 뿐이다. 이 모든 게 고대해 온 순간인 줄 모르고 말이다.

신아는 이 탑의 바닥에 묶여 숨죽인 이를 떠올렸다. 스승님이 알아야 할 두 가지의 진실이 남았다.

‘신아야,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는 거다.’

이제 당과를 받아먹으며 했던 약조를 지킬 차례였다.

* * *

벼랑 끝에 몰린 수가 불안한 눈으로 신아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만 더 물렀다간 정말 떨어질 것 같았다.

“스승님.”

곤란한 듯 미소 짓는 신아에 수는 울상 지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도망쳐야 할 것 같으니 도망쳤고, 저를 쫓는 신아는 급한 기색이 없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추격전이 끝을 보이자 심장이 쿵쿵댔다.

“잠깐…, 오지 마.”

신아를 밀치고 도망칠 수 있을까? 불행히도 스승은 제자를 밀칠 용기가 없었다. 수는 도망칠 거리를 가늠하다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떨어져서.

“떨어지면.”

수는 제 손목을 붙잡은 힘에 몸을 굳혔다. 잠시 한눈판 새 신아가 코앞에 서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번엔 제 아이가 되실까요?”

신아가 눈을 접어 웃었다. 시선을 집어삼키는 미인의 낯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깜빡이자 신아가 그를 안아 움직임을 봉했다. 익숙한 품속에서, 하루 내도록 도망 다닌 수는 힘이 풀려 그만 눈을 감았다.

어깨를 크게 움찔거린 수는 번쩍 눈을 떴다. 코끝엔 익숙한 내음이 느껴졌다. 이내 꿈임을 깨달으니 크게 한숨 쉬며 몸을 굴렀다.

이상한 꿈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위치도 화국이 아닌 수산이었다. 뜬금없는 꿈을 되짚다 수는 웃음을 흘렸다. 이상할 만치 생생하니 잊기 전에 신아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수는 묘하게 휑한 정적에 한쪽 어깨를 일으켰다. 제 옆에 누워 잠든 신아가 없었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들려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기침하셨습니까.”

“예? 예…….”

수는 떨떠름한 낯으로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궁인들을 보았다. 주위를 둘러 살피니 방 안에 든 궁인을 제외하고도 많은 이가 탑에 든 것 같았다. 안에선 타박거리는 발소리가, 밖에선 마당을 쓸어내는 빗자루 소리가 들려왔다.

막 기상하여 침의 차림이었으나 두꺼운 비단옷이었기에 그리 부끄럽진 않았다. 순기능이라 해야 할지,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던 붉은 안대가 궁인들의 눈을 가려 저를 볼 수 없기도 했다.

신아는 어디 갔지? 수는 저를 깨우지 않은 아이가 조금 야속했다. 민망함에 머리를 쓸어 넘기려는데 단단하게 묶인 머리가 손에 걸렸다. 의아하여 고개를 갸웃대던 수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들어찼다.

“하하.”

수선의 맑은 웃음소리에 먼지를 털어내는 궁인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수는 천천히 손을 더듬어 예쁘게 땋아 내린 머리를 훑었다. 이렇게 만지작거릴 동안에도 잠에서 깨지 않은 건가? 포기하고 갈 만하군. 수는 민망하기도, 어째 설레기도 하여 그에 대한 원망을 털어 내었다.

“억.”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어린 궁인의 신음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꽤 큰 소란이었으니, 수는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엎어져 걸레질하던 궁인 하나가 침상을 보지 못했는지 그대로 머리를 들이박은 채였다.

수선을 제외한 모든 이가 궁인의 실수에 숨을 죽였다.

수는 침상에 걸터앉아 어린 궁인 하나를 보았다. 앞을 제대로 못 보는 것 같은데, 왜 눈을 가리게 뒀지? 의아하니 그에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다가가는 걸음마다 낯이 창백하게 질려 제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송, 송구하옵…….”

“저런, 머리에 혹이 나는 게 아닙니까.”

수는 찌푸린 낯으로 아이의 벌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보았다. 조금만 지나면 주먹만 한 혹이 생길 듯했다.

궁인은 그대로 목이 내쳐질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신궁에 들 수 있다 했을 때만 해도 신이 났었는데, 기를 다루는 것이 미숙해 앞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출세를 노릴 머리로 처지를 헤아려야 했다. 후회해 봤자 이미 늦은 일이었다.

“천을 풀어도 됩니까?”

“예…. 예?”

뜻밖의 물음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아이가 몸을 들썩였다. 수선을 마주하거든 그 물음에 토 달지 말라. 상궁의 당부가 떠오르니 더 되묻지 못하고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수는 손을 들어 궁인의 눈을 가린 붉은 천을 풀어내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어린아이였다.

아이는 근심 어린 낯으로 저를 훑는 미인에 숨도 쉬지 못하고 굳었다. 이렇게 생겼다는 말은 없지 않았나. 뵈면 안 될 분을 뵈었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댔다. 그러나 창호 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에 두근대던 아이의 심장이 굳었다.

“신아야.”

수선이 그보다 아름다울 수 없게 웃었다. 방에 들어온 이가 누군지 깨닫기 무섭게 아이는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신의 이름까지, 알아선 안 될 것을 두 개나 알아 버렸다.

“아니! 이러면 혹이 더 크게 나겠습니다.”

아이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수선은 궁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러나 아이는 화선의 얼굴까지 마주할 순 없었다. 그러니 젖 먹던 힘을 짜내어 머리를 박았다.

“스승님.”

스승님?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데 어깨 너머로 수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눈을 가리고 다녀? 너무 구색만 갖춘 복색 같다.”

“…개선하라 이르겠습니다.”

그 대화에 아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을 가리게 된 이유는 오로지 수선만을 위한 것으로 이는 신께서 직접 명한 것이었다. 절대자의 명도 수선 앞에선 철회되니, 정말 수선을 모시는 게 맞았다.

“내가 약이라도 발라 드리고 싶은데….”

다정하나 달갑지 않은 수선의 은혜에 아이가 머리를 박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제 어깨를 쥐어 당기는 힘에 몸이 붙들렸다. 일으키는 힘에 근심 어린 수선의 낯이 보이니 아이는 곧장 죽음을 예감했다. 저를 일으킨 힘이 누구인지 깨달으니 뒷골이 서늘했다. 신궁의 목탑에서 수선을 앞에 두고 움직일 존재는 이 나라의 화선뿐이었다.

“어찌 수선께서 직접 치료하려 하십니까. 기강이 무너집니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기강을 잡는단 말이야.”

제법 엄한 표정에 아이는 어쩔 줄을 몰랐다. 어째 저를 붙든 손아귀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기절했다 옥사에서 눈뜸이 더 안락할 듯싶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직접 치료하여 내려 보낼 테니 노여워 마세요.”

가라앉은 대답에 수선의 낯이 슬픔으로 늘어졌다. 어린 궁인일지라도 그 안에 담긴 것이 애정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화국에도 역사를 따른 법도가 있겠으나 그래도 이는 좀 아닌 듯싶다.”

“…예.”

신이 수선께 혼나는 광경이라니. 궁인은 귀를 닫고 싶어 식은땀을 흘렸다.

“허나, 스승님. 존대는 마세요.”

순식간에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선의 낯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사이에 선 아이는 어쩔 줄 몰라 동공을 떨었다.

“어어, 그… 습관적으로 나온…….”

“수선께서 궁인에 존대하시면 그 아래에 놓인 이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수는 한두 번 들은 지적이 아닌지라 당황하여 고개를 수그렸다. 신아에게 지적받아 마땅한 부분이니 할 말이 없었다.

“응….”

기가 죽어 웅얼대는 수선에 아이가 눈을 끔뻑였다. 낯선 이가 듣기엔 당최 사제 간으로 보이지 않는 대화였다. 그도 그럴 게, 누가 우위에 있는지가 불분명해 보였다.

수선의 답을 끝으로, 아이는 화선의 이끎에 따라 방을 나섰다. 침방을 나서는 일곱 걸음이 죽음을 향한 마지막 걸음처럼 느껴졌다. 신궁으로 선발된 궁인으로서 저를 뽑은 상궁들, 더 나아가 폐하까지 피해를 보실까 눈앞이 흐려졌다.

복도에 들어선 후 화선의 손에 문이 닫히니, 아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깨를 붙든 손이 저를 돌려세웠다.

“너는.”

수선을 마주할 때와는 분명히 다른 울림에 심장이 쿵쾅댔다. 죽는다. 아이는 턱을 벌벌 떨며 시선을 들었다. 그에 붉은 비단옷을 두른 신의 검은 두 눈이 저를 덮칠 듯 마주했다.

“수선의 은혜에 감사해야 할 거다.”

수선을 마주했을 땐 그 외형이 눈에 들어왔으나 화선을 마주하니 공포가 덮쳐 시야를 막았다. 커다란 손이 다가오자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곧 두 눈이 뽑힐 테니, 비명을 참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은 이마에 가닿았다. 그와 동시에 타오르는 듯한 열기에 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으.”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혀를 짓씹으며 신음을 참았다. 나는 신께 직접 처형당하는가. 그리운 부모의 얼굴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더 버티기 힘들어지기 전, 신은 손을 거두었다. 그에 붉게 부푼 이마도 납작해진 채였다. 쯧, 하고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신이 등을 돌려 침방에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긴장이 풀린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음은 당연하다.

조반을 들여 궁인을 물린 방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아 고요했다. 식기 달그락대는 소리만이 간간이 소리를 내었다.

수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도 모를 만큼 마주 앉은 이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아침의 일을 곱씹자면 궁인들 앞에서 이 나라 화선을 꾸짖은 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미안했다. 뿐만 아니라 궁인에게 존대함으로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기까지 했다.

“그…….”

숨 막히는 침묵에 고통받을 바에야 스스로 죄를 시인하는 게 좋았다. 수는 밥 한 덩이를 꿀꺽 넘기고 고개를 들었다. 그에 신아 또한 무감한 얼굴로 시선을 맞추었다. 수는 그 무미건조한 눈빛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까 전은 미안하다. 언성이 조금 높아진 듯싶어…. 애초에 화국 복색은 네 잘못도 아니질 않아.”

스승의 사죄에 신아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의 마음이 저와 다르게 참으로 고상하다 느꼈다. 저는 조금 전까지도 다른 이에게 걱정을 보인 스승에 화가 났으니 말이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화선을 욕보였어.”

답하는 목소리가 우울함에 감겨 있었다. 신아는 그런 스승을 보며 한숨 쉬었다. 그에 스승도 헛숨을 들이켰다.

“화가 많이… 났구나.”

“안아도 됩니까?”

뜻밖의 요구에 수가 눈을 끔뻑였다.

“날씨가 좋지 않아 기운이 빠지는 듯해서요.”

아침부터 귀 따가운 저주를 듣고 왔더니 마음이 그리 온화하지 못했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돌아온 침방에서 스승의 환영을 받지 못해 더더욱 그랬다.

안아도 되냐 묻는 신아의 말투가 여상하여 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의 허락이 떨어지니 신아는 덤덤한 낯으로 밥상을 뒤로 물리고 스승을 안아 들었다. 스승을 안은 신아의 낯이 묘하게 경계를 허물었다. 그 모습에 수는 허락하길 잘했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안긴 자세가 평범하지 못했다. 신아는 한 손으로 스승의 허리를 감싸 제 무릎에 앉혔다. 아무래도 자세가 잘못된 듯싶어 수가 몸을 들썩이니 신아는 그 어깨를 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그렇게 태연한 낯으로 상을 당겨 스승의 밥그릇을 들었다.

“스승님을 안고는 싶은데 밥을 다 못 드셨으니, 제가 먹여 드리면 두 가지가 다 가능하겠습니다.”

“아니. 뭐 그렇게 오래 안을 생각이야. 이제 다 되었지?”

“아, 하세요.”

신아는 스승의 입술 앞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미소 지었다. 어째 단호해 보일 정도였다.

“내가 손을 못 쓰는 것도 아닌데 어찌 제자의 손에 밥을 받아먹겠어. 그리고 나 이제 배불러.”

“정말요? 배가 부르시다면 차라리 침상에서.”

“당, 연히 먹어야지!”

눈에 띄게 밝아지는 신아의 낯에 수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머릿속에 어젯밤 정사를 논하던 신아의 얼굴이 선연했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이러는가. 화국의 신이 사내에게 발정한다며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눈앞이 아찔하니 더한 논쟁을 피하고자 입을 닫았다. 체념한 듯 힘을 푼 스승에 신아가 웃으며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내가 먹을 수 있으니 이리 줘.”

“전 배가 안 고픕니다. 스승님은요?”

그렇게 마지막 항변이 먹혀들어 갔다. 인간을 스승으로 모신 신이 어린 날의 복수라도 하는 싶었다.

삐거덕대는 몸짓으로 입을 여는 스승에 신아가 눈을 휘어 웃었다. 수는 제자의 손에 밥을 얻어먹기가 민망해서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긴 한데, 오늘 아침 제가 지은 죄가 있으니 못 참아 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제 아이가 되실까요?’

그러나 오늘 꾸었던 꿈이 생각나 찜찜했다. 지금의 상황이 그렇지 않은가. 수는 혼란스런 기분에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했다. 얼른 먹고 치워 버려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씹지도 않고 삼키는 스승에 신아가 눈매를 좁혔다.

“체하면 어쩌려 그러십니까.”

“…난 원래 이렇게 먹는단다.”

“어디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들으면 내가 이 다 빠진 노인인 줄 알겠어.”

볼멘소리에 신아가 그릇을 내려 두고 웃었다.

‘아직 모르지?’

속을 들쑤시는 질문에 엉망으로 시작한 하루였다. 이성이 흐려지던 차였으니, 보상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신아는 스승을 옆에 내려두고 상을 정리했다. 본래라면 궁인이 그를 정리하여 들고 나갔겠으나 신아가 그를 막았다.

익숙한 듯 상을 정리해 내려 두는 신아에 수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주는 족족 받아먹은 밥에 속이 더부룩했다.

“…배불러.”

“안아서 토닥여 드릴까요?”

“그게 무슨 상관.”

아아, 의미를 깨달은 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밥 먹고 등을 두들겨 주는 건 갓난아이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수는 아직도 화국 땅이 낯설었다. 그러니 신아가 하는 말에 쉽게 수긍하는 경향이 있었다. 부족한 이가 배우는 것은 당연하나, 애 취급은 정도가 지나쳤다.

하하, 침방을 벗어나려는 스승을 신아가 품에 안았다. 그러곤 허리 숙여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신아야. 내가 어제 분명.”

“예, 스승님. 사제 간에는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신아는 순순히 답하며 그 입술에 또 한 번 입을 대었다. 그에 수가 한숨 쉬며 머리를 짚었다. 다 커버린 신아에겐 도무지 학습 효과가 없었다.

스승이 체념한 듯 그를 밀어내지 않으니 신아가 이번엔 그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수는 저를 예뻐하는 듯한 신아의 행동에 눈을 찌푸렸다. 신아가 없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웃긴 꿈을 꾸었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예지몽에 가까웠다.

수는 입을 열어 꿈에 대해 얘기하려다, 도로 입을 닫았다. 그러나 눈치 빠른 신아가 말을 기다리듯 눈을 깜빡였다.

“…오늘 사형을 뵈어야겠다.”

수는 꿈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에 들은 말이 인상 깊었을 뿐, 꿈의 전반적인 내용은 신아를 피해 다닌 것이었다. 아무리 꿈이라 한들 재회를 맞이한 직후에 뱉기엔 그리 달가운 내용이 아니었다.

대신관을 보아야겠다는 말에 미묘하게 틀어진 신아의 낯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니 말을 돌리려 꺼낸 말이, 여우 피하려다 범 만난 꼴임을 몰랐다.

“정신이 없어 인사도 드리지 못했구나. 여유가 생겼으니 찾아뵙는 게 좋겠지.”

“천천히 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미 제가 수선을 모시고 있다 전달해 두었습니다. 못해도 보름은 생각하고 오셨으니 화국을 더 둘러봐 주세요.”

“…그래?”

수는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안일하게도, 신아를 본 순간부터 화국에 대해선 일말의 의심조차 들지 않았다. 더 나아가선 정이 붙으려 하니 지금 당장 수산에 돌아가 화국을 받아들이기로 했음을 공표해도 좋을 것 같았다.

“더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

“아니요…. 그저.”

스승의 물음에 신아가 시선을 내렸다. 침묵이 길어지자 수가 걱정스러운 듯 고개를 들어 신아를 살폈다. 아까 전 날씨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다더니 정말 그렇듯 했다. 간간이 웃긴 하나,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수가 손을 들어 신아의 뺨을 쥐었다. 신아는 스승의 손길에 아무런 저항 없이 얼굴을 내어 드렸다. 눈을 감고 뺨을 부비는 모습이 잘 길들여진 짐승과도 같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예….”

곧이곧대로 답하긴 하지만 신아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지금은 또 괜찮아 보이니 기이했다. 수는 곰곰이 생각하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깜빡였다. 제가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는 건가? 

“내가 나가는 게 싫어?”

그에 신아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왠지 모를 처연함이 흐르는 듯한 눈빛에 수가 작게 탄식했다.

“스승님 없인 숨도 쉬지 못하는 듯하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잠깐 갔다 오는 건데도?”

제자의 어리광에 수가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이거 완전 덩치만 자란 어린애가 아닌가. 수는 당황하여 아이를 올려보다, 풀죽은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 귀엽게 느껴지니 저도 참 문제였다.

그렇게 몸만 커져 버린 아이를 껴안아 넓은 등을 쓸어주었다. 평화를 안은 신을 어리광쟁이로 키웠으니 저는 죄지은 인간이었다.

“누가 볼까 겁난다, 신아야.”

“저도 그렇습니다. 다들 곧 나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신아는 스승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말한 것이나, 수는 그를 깨닫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 거야? 십 년 전에도 이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찌 이래.”

“그때는 그럴 힘이 없었을 뿐입니다.”

불퉁한 목소리로 답하는 신아에 또 한 번 웃음을 터트렸다. 수는 아이를 일으켜 그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신아는 자각 없는 제 스승에 긴 한숨을 삼켰다.

“입 금지입니다 스승님.”

“너도 아까 어겼으니 별수 없다.”

“허면 정사를 금하고 후에.”

“아니 그 얘길 왜 해…!”

수의 얼굴에 경악이 번지니, 신아는 처연한 낯으로 스승을 붙들었다.

“스승 앞에 발정한다 분명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어찌 제자를 달구어 놓고 참으라고만 하십니까?”

입맞춤은 매번 하던 건데. 수는 조금 억울하여 눈썹을 늘어뜨렸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온 듯싶었다. 수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 신아의 아랫도리를 보았다가 급히 시선을 틀었다. 넓은 옷자락에 보이는 것은 없으나 어째 신경이 쓰여 뜨끔했다.

“보고 싶으십니까?”

왠지 한층 밝아진 목소리에 수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신아의 기분을 달래는 법을 배운 것 같아 부정하고 싶었다.

“지금은 스승님 아랫도리만 봐도 만족할 수.”

“잠시 나갔다 와야겠다.”

스승의 협박에 신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통해? 불쾌해하는 신아에 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효과가 확실하니 어째 난감하기까지 했다. 신아는 크게 가라앉은 낯으로 뒤돌아 조용히 침상에 앉았다. 심각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에 수는 제가 심했나 싶어 쪼르르 그 옆에 가 앉았다. 신아는 볼을 찌르는 스승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꽤나 긴 침묵이 계속되니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수였다. 수는 사형을 뵙고 화국 간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해야 했다. 그러나 저를 붙잡는 신아를 두고 나갈 순 없었다.

신아가 연정으로 저를 바라본다 고백한 이후, 수도 나름 심란한 구석이 있었다. 신아를 사랑하는 것은 맞으니 이에 거부감은 없었다. 또, 부끄럽게도 신아와 혀를 섞음에 배덕감을 제한 불쾌감은 없었다. 신아의 말대로 남들이 연인이라 칭하는 관계가 저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사를 치를 수 있느냐로 넘어가면 얘기가 달랐다. 애초에 어떻게 하는데? 신아는 아는 듯했으나 그를 묻는 순간 허락함과 다르지 않은 듯해 꾹꾹 참았다.

수는 신아의 얼굴을 힐끔댔다. 정사는 짐승이 교미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외설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성체가 된 신아는 반듯하고, 지나치게 예쁘고, 더없이 고귀했다.

신아에게는 정사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 정사를 바란다는 신아의 말도 와닿지 않았다. 오늘만 하더라도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한 밤이었으니 말이다.

또 신을 모시는 수선으로서 화국 신과 불미스런 관계를 맺음이 근심스러웠다.

수선은 수산의 신을 모시는 자라 배우고 컸거늘, 제게는 여쭐 신이 느껴지지 않으니 난감했다. 그에 대신관이 된 사형께 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토로할 참이었다.

“…허면 같이 나갈까?”

수는 나름의 타협점을 제시했다.

‘잠시 화선께서 부르시니, 오늘 아침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신아는 가 사형 앞에 수련자 수의 제자였다. 동자였던 자가 신이 되었으니, 만남이 어색할 듯하여 동행을 피한 것인데 연왕의 말을 곱씹어 보면 굳이 그럴 필요 없어 보였다. 둘은 이미 대면을 마친 게 아닌가.

“일전엔 사형을 불러 무슨 대화를 했어?”

입을 닫은 신아에 수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신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스승을 물끄러미 보았다. 대화를 이으려 애쓰심이 보이니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수선은 제가 직접 모실 테니, 마음 편히 화국을 즐기라 했습니다.”

그보다 살벌한 대화가 오고 갔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입을 열어 준 신아에 수가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둘이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갈래? 혹여나 안계시면 산책이라도 다녀왔다 치지 뭐.”

수는 달갑지 않은 듯한 신아의 반응에 눈치를 살폈다.

“그… 것도 아냐?”

신아는 그자를 죽이지 못함이 한스러워 소맷자락에 손을 감추었다. 수산의 대신관, 조용히 죽일 수도 없는 자인지라 수선인 스승 앞에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었다. 또 그자는 물의 신을 직접 마주하거든 한눈에 그를 알아볼 테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했으니 제가 동행함이 나았다.

“아니요. 같이 가요 스승님.”

신아가 스승의 손목을 쥐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는 신아의 화가 풀렸음이 반가워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문득 제 손목이 조금 젖은 듯한 느낌에 별생각 없이 시선을 내렸다. 곧장 피범벅인 신아의 손을 마주한 수가 희게 질려 신아의 손을 뒤집어 잡았다.

“손이 왜 이래?”

칼로 그은 듯 길게 늘어진 흉터 위로 딱지를 뜯어냈는지 검붉은 피가 고이고 있었다. 수는 상처투성이인 신아의 손을 붙잡고 굳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누가 그랬어?”

당황스러움은 순식간에 분노가 되어 번져 갔다. 누군가에게 칼로 그인 것 같았다. 이 땅 위에 화선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자가 존재치 않음을 생각하진 못했다. 수에겐 온몸이 멍투성이던 아이가 아직 선명했다.

수선의 기가 흘러나와 두 신의 머리칼이 일렁였다. 자각 없는 모습에 신아가 눈을 떼지 못했다. 푸른빛을 띠는 투명한 기. 틀림없는 신의 권능이었다.

아침에 신아가 자리를 비웠음을 인지한 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탑에 든 자 중 범인이 있다. 그리 생각하자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분노에 뒤덮인 시야는 아무것도 담아내질 못했다.

신아는 비틀대는 스승을 잡아 시선을 맞추었다.

“…거칠게 뜯긴 나무 바닥에 손이 긁혔습니다. 약을 발라 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움직이다 붙은 살이 뜯어졌나 봅니다.”

신아의 대답에 일렁이던 힘이 기세를 꺾었다. 괜찮습니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딱딱하게 굳은 몸을 풀어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그에 흉포하게 흐르던 기도 자취를 감추었다.

“대체 어디에 긁히면 손이 이렇게 된단 말이야…….”

수는 절절한 목소리로 커다란 손을 들어 살폈다. 깊게 파여 있어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신아는 저를 살피는 스승님이 좋아서 더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이가연을 봐야 함은 알지만 그 앞에 스승을 내보이자니 머리가 지끈댔다. 튀어나오는 질투를 누르려 짓누른 흉터가 터진 듯싶었다.

스승께 보이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나 저를 걱정해 주는 스승님은 좋았다. 더 깊게 쑤셨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안절부절못하던 수는 도자기 아래 깔린 천을 빼어다 신아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꾹꾹 눌러 피가 전부 멎을 때까지 신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수는 피로 얼룩진 천 조각을 보며 마음 아파했으나 신아는 이제는 피가 흐르지 않음에 안타까워했다.

“약을 다시 발라야겠다.”

신아는 울상인 스승을 안아 다독였다. 놀라서 뛰는 스승의 심장 박동 소리가 신아에게 와 닿았다. 그렇게 스승이 살아 있음을 온전히 느꼈다. 스승의 숨이 진정되고 나서야 신아는 품에서 그를 놓아드렸다. 동시에 스승의 머리를 땋아 내린 끈도 풀어냈다.

“그건 왜…? 아까워라.”

머리가 풀어짐을 느낀 수가 아쉬운 듯 머리를 매만졌다. 신아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흐트러져 있어 그랬습니다. 또 묶어 드릴 테니 아쉬워 마세요.”

“그래…?”

신아는 스승의 머리를 손으로 빗어 단정히 늘어뜨렸다. 목덜미를 내보인 스승을 그자 앞에 보일 생각은 없었다.

“스승님…. 어찌 이리 매번 고우십니까…….”

신아는 스승 앞에 튀어나오는 고백을 참았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하고, 저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마음이었다.

“알았어. 지금은 묶어 달라고 안 할게.”

수는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고울 수 없는 사내가 제 이마에 입을 맞추니 이번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 * *

서재로 향하던 이가연이 궁을 지나는 수레 행렬을 물끄러미 보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갖 물건들이 궁 밖으로 실려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가연이 땀을 닦느라 멈추어 선 수레꾼에게 물었다. 그에 서쪽 대신관을 알아본 병사가 다급히 뛰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신전을 이전하여 필요 없는 것들을 처분하는 중입니다.”

필요 없는 것? 이가연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았다. 필요 없는 것을 처분한다기엔 그 양이 무척 많은 듯했다.

“허면 왜 왕궁으로 들여옵니까.”

“이전 신관들의 노고를 기려, 폐하께서 직접 태운다 하셔서 그렇습니다.”

이가연은 제 앞의 잡다한 서책이 그득 쌓인 수레를 내려 보았다. 못해도 동쪽 대신관이 가지고 있었을 법한 서책 같았다. 연도와 일자가 빼곡한 게 기록 일지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리 쉽게 날라다 버릴 것들이 아니었다.

기이한 기분에 수레를 훑어 내리던 이가연은 이내 눈매를 좁혔다. 낯익은 필체가 눈에 띈 탓이었다.

세월에 절어 검은빛으로 눌은 서책들은 복구할 수도 없을 만큼 낡아 있었다. 그중에서 화선(火熯)이라 적힌 책 하나가 눈에 띄었다.

조부의 서재에서나 보던, 마지막 획을 늘여 뒤 한자와 겹치게 쓰는 아주 오래된 과거의 필체였다. 마구잡이로 겹쳐진 한자들이 암호처럼 보여 평범한 이라면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를 해석함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놀이이기도 했다.

“…하나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예? 예에.”

어차피 태울 책이란 생각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대신관을 크게 대우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니 막아설 엄두가 나지 않는 탓도 있었다. 그에 이가연은 낡은 서책 하나를 주워다 소맷자락에 넣었다. 그렇게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곤 다시금 길을 나섰다.

한편, 그 순간 연왕은 직접 나서 신전의 기록들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대외적으로 내려오는 것부터 대신관들이 숨겨 둔 일지까지 전부 말이다. 대개 화선을 향한 맹목적인 혐오를 안은 글들로, 신을 모시는 입장으로선 퍽 우스운 글들이었다.

무감한 낯으로 책을 던져 넣던 연왕은 문득 고개를 들어 타오르는 불길을 두 눈에 담았다. 화국 땅의 주인, 그가 타 죽던 역사가 사라져 간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화국 대신관의 죽음도 멀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수레에서 마지막 서책을 집어 들었다. 그 앞에 기윤이 뛰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곧 수선께서 신궁을 나서 대신관을 보러 간다 하십니다.”

“…그래? 대신관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서화궁 전각에 들어 계시다 합니다.”

“흐응.”

화선께서 제법 점잖게 구시는군. 연왕은 의외라 생각하며 마지막 남은 신전의 흔적을 불태웠다. 구석구석 숨겨진 문서까지 다 뒤져 없앴으니 이제 제물로 바쳐지던 아이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전해 내려오는 하늘의 경고도, 화선의 시작도 말이다.

연왕은 성인 남성의 키만큼 쌓아 올린 마지막 장작더미에 손을 올렸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작은 불씨만이 존재했던 장작더미가 흉포하게 타올랐다. 그 안에서 신전의 흔적들이 역사 속으로 타들어 갔다.

연왕은 타닥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몸을 틀었다. 그에 옆에 선 기윤이 또 한 번 고개를 조아렸다.

“화선께서도 동행하신다 합니다.”

그 말에 연왕이 걸음을 멈추고 기윤을 보았다. 타오르는 불길을 등진 연왕은 미간을 좁히며 제 귀를 의심했다.

“동행하신다고?”

“예.”

“대신관을 보러 가는 것에?”

기윤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니, 연왕은 황당하여 눈을 찌푸렸다. 그럼 그렇지. 궁인들 눈까지 가리는 지독한 연정으로 대신관 앞에 수선을 혼자 보내실 리 없었다. 대신관을 보고 싶으실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이가연은 신을 마주하고도 낯빛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였다. 수선을 마음에 품으려면 그 정도 배포는 되어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둘이서 수선을 사이에 두고 무슨 신경전을 벌일지 모르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댔다. 고래 싸움에 화국이 터져 나가게 생기지 않았는가. 연왕은 이마를 꾹꾹 누르며 기윤을 흘겼다.

“…오늘도 죽이지 않으셨는가.”

옆 사람이나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기윤이 고개를 끄덕이니 연왕은 손을 들어 제 눈을 덮었다. 그렇게 수선의 낯을 떠올렸다.

그분은 화선을 구하려고 신궁에 침입하는 분이셨다. 잔인한 화국이 화선의 아이를 감추어 두었다고 판단하셨음이 분명했다. 그 추측이 어떤 근거를 토대로 했을지는 이해하나, 화선의 손에 목숨이 매인 저로선 꽤나 억울한 판단이었다.

화선은 절대 타인의 손에 구해질 존재가 아니었다. 앞길을 막는 자라면 일말의 동정 없이 산 채로 태워 죽이는 신이었다. 개미를 죽여도 그만큼 무감하진 못할 터였다.

수선께선 분명 어린 화선을 곱게 가르치셨을 텐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선이 직접 고문한 자를 만나면 무슨 생각을 하실지 아득했다.

“…수선께서 계시니 믿는 수밖에.”

연왕은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화선 앞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편전으로 걸음 하는데 상궁 하나가 다급히 뛰어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상궁의 낯이 파리하게 질려 있으니, 연왕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눈을 찌푸렸다.

“폐하. 대신관께서 지금 신궁으로 걸음하고 계십니다. 허가 없이는 들 수 없으시다 만류함에도 길을 비키라 하셔서….”

그자가? 연왕은 뜻밖의 상황에 낯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저를 감시하는 눈이 여럿인 줄 알면서도 입을 닫은 자였다. 확신하건대, 소란을 피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럴 만한 계기가 없고서야.

아아. 연왕은 설마 하는 마음에 기윤을 보았다.

“오늘 대신관이 전각에 들리기 전 들른 곳이 어디냐.”

“없습니다. 조반을 드시고 곧장 전각에 드셨습니다.”

“그 길에 수레 행렬을 보았을 가능성은?”

“…책 하나를 챙겨 가셨다 합니다. 얼핏 보기엔 낙서장일 뿐이라 쉬이 넘겨 드렸다고.”

“그걸 왜 지금!”

연왕의 낯이 분노로 물드니 기윤은 입을 닫아 고개를 숙였다.

“…막아야.”

연왕이 비틀대는 몸으로 걸음 하니 그 뒤로 궁인들이 따라붙었다. 인자한 성군의 분노에 모두의 낯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연왕은 몸을 뒤덮는 불길함에 걸음을 재촉했다. 그자가 수선을 뵙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 화선이 옆에 계시니 더더욱 말이다.

그자가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나, 주워간 서책 안에서 불쾌한 진실을 마주했음이 분명했다. 화선께서 존재함을 앎에도 수선을 향해 걷는 이가연의 심사를 알 수 없었다.

아아. 연왕은 진즉 신전째로 태워 버리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나날이 수명이 닳는 듯하니, 참으로 고단한 삶이었다.

* * *

이가연은 홀로 든 전각에서 조용히 서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곤 촛불에 서책을 갖다 대었다. 다 낡아 습기를 머금은 서책은 천천히 그슬리다 이내 불이 옮아붙었다.

이가연은 타오르는 서책, 화선을 내려 보았다.

‘…감히 인간의 몸으로 끝을 들먹이니.’

그리 뱉으며 저를 흘기던 화선을 기억한다.

신은 저를 키운 스승을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리로 끌어 올렸다. 그러나 인간인 수선의 결말이 죽음임은 변하지 않는다.

신과 인간의 사랑은 유한하다. 그에 화국의 평화 또한 수선의 존재 아래 유한할 것이다. 저는 영원할 수 없는 화국과의 유대를 지적했으나 화선은 끝은 없다는 듯 그를 비웃었다.

그러나 화선의 웃음 속엔 불안이 엿보였다. 처음에는 제 스승께 성체가 될 수 있음을 숨긴 일을 우려하는 줄 알았다. 허나 그게 아니었다.

이가연은 지금에서야 그 불안을 온전히 이해함에, 제 무지에, 안일함에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전각을 나섰다. 화선의 존재가 수선께 위해가 되니, 수선을 모시고 수산에 돌아가야 했다.

* * *

침상에 앉아 신아에게 머리칼을 맡긴 수가 소매와 허릿단의 자수를 만지작댔다. 수산과 크게 다르지 않은 복색이나 흰 비단을 아래만 물들여 촘촘히 자수를 둔 점은 특이했다.

조용히 참빗으로 스승의 머리를 내려 빗던 신아는 거울 너머로 스승을 보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수는 고개를 들었다가, 곧바로 거울 속 신아와 눈이 마주쳤다.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빗질하는 신아가 참으로 다정했다.

“응. 예쁘다.”

거울 속 신아를 마주한 스승이 환하게 웃으니 신아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수는 여태 알지 못했으나 가로막힌 침상 왼편은 벽면 전체가 거울이었다. 환복 후 머리를 빗겨 드리겠다며 신아가 보인 거울에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수산에서는 보지 못한, 고온의 열처리가 가능한 화국에서나 생산할 수 있는 최상품이었다.

꼼꼼히 빗어 내린 덕에 머리칼엔 이미 윤기가 흘러 찰랑댔으나, 신아는 할 말을 고르느라 스승의 머리를 몇 번이고 빗어 내렸다. 수 또한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머리를 내어주었다. 늦기 전에는 나가야지, 그쯤 생각할 뿐이었다.

“신아야.”

“예 스승님.”

“이리 가까운 곳에 좋은 거울이 있으니, 누구보다 네 얼굴을 잘 알겠구나.”

장난스러운 낯으로 시선을 마주하는 스승에 신아는 고개를 갸웃댔다. 수는 저 잘난 줄 아는 듯, 모르는 제자에 코를 찡그려 웃었다.

“슬선이 그러던데, 인간이 신의 외형을 좇는다 하더라.”

“…그와 같이 오셨다지요.”

수는 신아의 얼굴을 칭찬하기 위해 말을 꺼냈으나, 신아는 귀에는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어린 동자의 이름만이 어른댔다. 수는 잊고 있었던 슬선이 떠올라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어째 미안하구나…. 화국에 온 이후론 보지 못했으니 말이야. 낯선 문화에 곤란할 텐데.”

“제 스승을 만나 행복해했다고 하니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수는 고개를 들어 신아를 올려 보았다. 저랑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데, 그런 소식은 대체 언제 듣는 건지 의아했다. 스승의 의문을 인지한 신아가 입을 열어 그에 답했다.

“스승님께서 주무실 때 들은 것입니다. 수산에 관련한 일이라면 신경 씀이 마땅하지요.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 까마귀의 다리에 서신을 매달아 주고받았습니다.”

“내가 그렇게나 잘 잤….”

수는 왠지 민망하여 머리를 긁적이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화국에선 까마귀를 길들여? 까마귀는 우두머리를 두지 않아 길들이지 못한다고 아는데.”

동물들을 줄줄이 달고 살았던 수이나 까마귀만큼은 자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동화에서 불운을 상징하는 동물로 등장하니 익숙한 새이기도 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제 말만 들으니까요.”

신아의 대답에 수는 흥미로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옆에 들러붙는 작은 산짐승에도 눈길 하나 준 적이 없어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재능이 아닌가. 내색하지 않았을 뿐 어쩌면 동물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털이 북슬북슬 난 털 짐승들에 둘러싸인 신아를 상상하자 그보다 흐뭇한 광경이 없기도 했다.

“불행을 안고 태어난 신이니, 그들도 주인을 알아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신아의 뒷말에 곧바로 눈을 구겼다. 수는 머리를 빗어 내리던 신아의 손목을 붙잡아 돌아앉았다.

“여태껏 네가 불행을 안은 신이라 생각해 왔어?”

신아가 시선을 내리자 수는 고개를 저었다. 차분히 가라앉은 낯은 스승의 물음에 긍정함과 같았다. 수는 여태 알지 못했던 신아의 마음에 쓸개를 씹은 듯 입 안이 썼다. 내색하지 않으니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삶이 불행했던 것은 맞으나, 존재가 불행한 것은 아니지.”

그러니 여태껏 이리도 당연한 말을 일러 주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정상에 서서 인간을 살피는 신에겐 그를 보듬어 줄 이가 없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신아는 바로잡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굳어진 생각인지 상처받는 기색도 없었다.

“허면 화국이 어찌 이리 평화로울까.”

“스승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의연한 모습에 상처받는 것은 도리어 수였다.

“나는 화국의 예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다. 내가 품은 것은 너뿐임을 어찌 몰라. 신께 감사하는 불의 일족이 신의 말을 들었다면 슬퍼했을 테다.”

“스승님께서 저를 품으셨으니 화국이 평화로운 겁니다. 죽음만을 반복하던 제게 인애란 없었으니 말입니다.”

수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암울한 과거에 표정을 굳혔다. 이런 식으로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유 따위 존재할 리 없던 끔찍한 고신이 아니던가.

“노력한다고 벗어날 수 없는 삶이었잖아. 그에 존재의 가치를 논할 수는 없어.”

“그럴 만한 존재이니 그리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내게는 네가 전부였는데도?”

스승의 절절한 물음에 신아는 그만 입을 닫았다.

이가연을 만나기 전, 제가 직접 일러 드려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저를 향한 신뢰를 드러내시니 더 말을 잇기 어려웠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어 그만 모든 것을 묻고 싶었다.

서쪽이고 동쪽이고, 대신관만 죽이면 끝날 일이 아닌가.

신아는 탁한 눈으로 맑은 마음을 담은 눈을 내려 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모든 걸 알게 되실 테다. 더한 미움을 안을 수 없으니 제가 직접 밝혀야 했다.

“스승님은 제게 행운이 될 수 있으나, 스승님께는 제가 행운이 될 수 없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수는 자신을 낮추어 보는 아이에 속이 상했다.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신에겐 그를 견제할 만한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제어할 수 없는, 불행을 안은 신은 열여덟의 나이까지 인간의 손에 목이 매달렸지요.”

“…네 삶이 합당했다 보는 건 아니지?”

“스승님. 신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신아가 대답 대신 물음을 던지자 수는 인상을 구겼다. 이는 사형께 여쭈어 대책을 마련할 문제였다. 그러나 신아의 물음에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말한 적이 없는데 신아가 제 고민을 알고 있음이 괴이했다.

“어찌 수산에 잠든 수련자가 수선이 되고자 십 년이나 잠들었는지 아십니까.”

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과거를 언급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꺼내는 신아. 직감이 불길함을 알리니 그만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제가 십 년이나 잠들었음은 화선의 저주를 품었기 때문이었다. 제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나, 신아가 죄책감을 가질까 그 앞에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신아는 제게서 거리를 벌리는 스승에 숨을 고르고 조용히 스승의 두 손을 잡았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리 생각하며 붙잡은 두 손을 가져가 제 목을 감쌌다. 스승이 그 목을 조르는 모양새였다. 무언가를 각오한 듯 보이기도, 포기한 듯 보이기도 하는 미묘한 낯에 수는 차마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몸을 움찔댔다.

신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눈을 들어 스승을 보았다. 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숨도 쉬지 못했다.

“…스승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상상조차 하지 못한 말에 수는 신아를 밀쳐 버렸다. 뒤이어 탑 밖에서 들려오는 굉음이 신궁에 울려 퍼져 귓가를 어지럽혔다.

하늘이 우려한 신, 화선. 그는 화국 대신관의 목을 졸라 신이 된 수선이 받을 하늘의 제약을 찾았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로부터 스승을 보호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알아낼 수가 없었다. 화선은 그가 잠든 지 팔 년이 되던 해에야 수선이 안은 제약을 알게 되었다.

후에, 화선은 쓸모가 다한 대신관을 죽이지 못했다. 마주한 진실에 쓰게 웃었다. 감히 제가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선은 인간의 손에 숨이 매이지도 않았고 성체로 성장함이 저지당하지도 않았다. 사랑하는 스승님이 다치지 않을 세상을 꾸리려 했지만 어떤 대처로도 막을 수 없는 저주였다.

수선은 신의 힘을 안고도 하늘에 삶을 견제받지 않았다. 화선의 덕이었고, 그 탓이었다.

수선은 화선이라는 저주를 떠안았다. 그 존재만으로 제약은 충분했기 때문에.

수는 고개를 돌려 밖을 살피려 했다. 굉음의 여파가 상당하니 곧바로 몸을 일으켜 난간 밖을 내다보았다. 그에 신아가 스승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수는 흠칫 놀라며 그 손을 뿌리쳤다. 몸을 피하는 스승에 신아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만 번 상상하고, 예상하고, 대비했으나 피가 차게 식어 이성이 마비되었다.

“스승님.”

수는 다시금 저를 강하게 붙잡는 신아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런 스승에 신아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신궁에서 소란이 생겼으니 불길한 것도 더했다.

수는 신아의 손을 뿌리치고 열려 있던 문으로 뛰어가 난간을 잡고 섰다.

목탑의 꼭대기 층에서 아래를 내려 보니 저 너머로 줄줄이 늘어선 병사들에 길을 가로막힌 사내 하나가 보였다. 고요한 낯에 흩날리는 은발, 십 년이나 흘렀음에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형의 앞에 있던 작은 별채 기둥이 반으로 부러져 무너졌으니, 수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사형은 타국에서 큰 소란을 피울 만한 분이 아니었다. 그에 합당한 판단을 내려서임을 모르지 않았다.

보이는 광경으로, 신궁의 건물을 부순 자는 연왕이었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왕이 신궁으로 걸음 하는 사형을 막아섰다. 왜? 빠르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사형 만나기를 꺼리던 신아가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 소란을 피울 정도로 저를 만나기 어려웠던 건가? 저도 그를 뵙지 못하게 저지당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뻣뻣해졌다.

우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수는 아래로 뛰어들려 자세를 낮추었으나 곧바로 저를 붙잡는 손에 저지당했다. 제 어깨를 강하게 붙드는 손아귀에 눈을 찌푸렸다. 계속해서 저를 붙잡는 신아가 낯설게 느껴졌다.

“신아야.”

고개 돌린 스승과 시선을 마주하니 신아는 그만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스승의 눈빛에 담긴 혼란과 단호함에 가슴이 싸늘했다.

“내게 감추는 게 있어?”

물음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뜻밖의 상황이 십 년을 기다려 온 자백을 망치고 있었다. 이가연, 저자가 무언가를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리 무례하게 신궁에 올 리 없었다.

수선과의 만남이 어려울 줄 알고 소란을 피우는 쪽을 택한 것임이 분명했다. 제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대화하려거든 원하는 의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지금 저자가 수선이 신이 되었음을 깨달았는가? 아니면 수선이 떠안은 저주가 화선임을 깨달았는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제가 아닌 타인의 입을 통해 알릴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머릿속엔 이대로 스승을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만이 팽배했다.

“…다음에 얘기하자.”

“스승님.”

스승이 포기한 듯 돌아서니 신아가 그를 붙잡았다. 간절한 호소에 수가 고개를 돌려 신아를 보았다. 가라앉은 스승의 낯에 신아의 심장이 덜걱였다.

“…수선은 더 이상 신의 대리인이 아닙니다.”

신아는 불안을 짓누르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혼잡하고 엉망인 상황에서 말하게 되었으니 속이 울렁였다. 화가 난 듯 저를 보는 스승의 얼굴에서 미래를 읽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뭔데?”

“…힘의 근원 그 자체이지요.”

저처럼요, 덧붙이는 신아에 수는 눈을 찌푸렸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정보는 귀에 담기지 않았다.

신아는 저를 껄끄러워하는 반응에 숨이 졸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말했어도 불편했을 진실이나 지금보다 더 나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수는 제게 한 걸음 다가오는 신아에 몸을 뒤로 물렀다. 그에 신아가 걸음을 멈추고 표정을 허무니 심장이 목구멍에 걸려 두근댔다.

“스승님은 죽지 않습니다. 평생을 저처럼, 저와 함께 억겁의 생을 보내셔야 합니다.”

수는 신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죄 지은 사람처럼 행동함이 그랬다.

“…그래서?”

“스승님. 죽지 못하는 삶은.”

“왜 내 앞에서 죽음을 입에 올렸어?”

수는 선 자세 그대로 굳어 움찔거리는 신아를 올려 보았다. 지금으로선 신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제 앞에 죽음을 올린 신아가 끔찍하게도 싫었단 것이다. 어찌 제 손에 스스로의 목을 쥐여 줄 수 있는가. 순식간에 차오르는 공포가, 설움이 시야를 덮었었다.

“…하늘에선 화선을 경계하기 위해 성체를 막아 인간 손에 목줄을 쥐었습니다.”

수는 시인하듯 입을 여는 신아에 고개를 저었다. 지금 신아의 태도는 이상했다. 제 반응만을 살피며 크게 긴장하고 있는 점이 그러했다.

“스승님께서 안으신 제약은 접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스승님께선 절 죽이실 수 없어요. 영원한 생 동안에 말입니다. 제가 아무리 미우셔도, 아무리 혐오스러우셔도 죽음에 이르게 하실 수 없단 말입니다.”

“내가 너를 죽이고 싶어 할 리가 없다는 걸 몰라…?”

스승의 대답에 신아가 고개를 저었다. 생은 길고, 어떤 변화가 생길지는 신이라도 확신할 수 없었다. 수선이 안은 제약, 신아에게는 그게 저를 죽이고 싶어 할 스승의 미래로 느껴졌다.

“스승님은 제 과거를 끔찍하게 여기셨지요. 불타 죽는 생을 불행이라 여기셨습니다.”

아픈 기억을 꺼내는 신아에 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수선께 화선이 제약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끔찍한 불행이 화선이라는 뜻이 됩니다. 언젠가 스승님이 저를 죽일 만큼 끔찍하게 여기셔도 죽일 수 없단 말입니다.”

“신아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된 자가 영생을 살아야 함도, 제약을 가진다는 것도 말입니다.”

신아는 한 걸음을 뒤로 물렸다. 제 다리를 잘라서라도 벌리고 싶지 않은 거리였으나 스승이 저를 밀어내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었다. 참아야 한다 생각하니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수선의 힘을 품었으니 이번 생만큼은 성체가 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의 생으로만 스승님을 뵐 수 없어 욕심을 냈습니다. 그러니 저주를 안고 돌아서는 스승님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화선은 스승 앞에 진실을 토로했다. 이대로 날아 사라지실까 급히 내뱉는, 영영 묻어 두고 싶었던 비밀이었다.

“제가 스승님을 속였습니다. 함께 있고 싶어서요.”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못했던 진실이 수선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들리는 폭발 소리에 수가 고개를 돌려 지상을 내려 보았다. 그에 칼을 빼내어 쥔 연왕이 시야에 맺혔다.

스승이 저를 등짐에 신아의 낯에 절망이, 혐오가 뒤섞였다. 도약하려 발을 비틀어 선 수는 자연히 시선을 내려 제 발 아래를 보았다. 마주한 진실에 수는 탄식하며 이마를 쓸었다.

왜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했을까. 지나치게 거대한 힘이 몸을 감싸고 있었음을 말이다. 뿜어 나오는 기가 짙은 푸른빛을 띠고도 투명했다. 수는 그 빛을 모르지 않았다. 그건 화선의 기, 신의 권능이었다.

‘험한 길을 가는구나.’

인지하고 나니 참으로 우습고 허망한 일이었다. 신이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단 말인가. 수는 지난 십 년간 선대 수선을 마주한 것이 신의 권능을 넘겨받기 위함이었을 깨달았다.

그 기억 속 저를 부르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그러자 불타는 목을 붙잡고 타들어 가던 아이가, 제 모든 것을 내어 주고라도 살리고 싶었던 이가 떠올랐다.

‘제가 스승님을 속였습니다. 함께 있고 싶어서요.’

모든 것을 고백하던 목소리도 떠오르니, 수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 짧은 침묵 뒤, 수는 기를 거두고 뒤를 돌아 신아를 보았다. 들어 올리는 시야에, 신아의 손에 말아 두었던 천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속인 것은 죄이나. 맹세코 숨길 생각은 없었습니다. 저 또한 거짓을 고할까 두려워 화국 대신관을 살려 두었으니.”

스승의 한숨 소리에 신아가 말을 멈추었다. 그렇게 두 신이 시선을 마주했다. 수선 앞에 모든 것을 고한 화선은 널뛰는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에 검붉은 피가 손마디를 타고 내려 뚝뚝 흘렀다. 그를 본 수선의 눈동자가 탁하게 변해 빛을 잃었다.

“…그래.”

가라앉은 목소리에 신아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수는 신아의 눈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들어참을 보았다. 이런 아이가 화국의 신이다. 그리 생각하니 헛웃음이 날 듯했다.

“신아야. 솔직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반응을 두려워했다는 건 알겠어.”

“스승님.”

“이건 내가 판단할 일이야. 그렇지? 하나 내가 화를 내는 건, 너를 불행이라 평하는 것과 내 손에 목을 쥐여 준 네 행동 때문이다.”

신아가 시선을 내리니 수는 그만 몸을 돌렸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렇게 난간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신아는 연푸른 기를 두르고 날아가는 스승을 두 눈에 담았다. 붙잡고 싶으나, 지금 그를 붙잡음은 과분한 욕심이었다.

이가연은 저를 막아서는 신궁의 경비를 기절시켜서라도 궁에 들어섰다. 그런 상황에 연왕은 신궁의 안채를 부숴 그를 막아섰다. 남자의 출입이 엄하게 금지된 신궁에 병사가 들어섰으니 연왕은 목탑을 흘기며 신음했다.

궁의 경비가 수선의 후계로 불리던 대신관을 저지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러니 오직 연왕만이 그를 막아설 수 있었다.

“죽음이 기꺼운 것은 아니시겠지요.”

이가연은 저를 빙 둘러싼 병사들을 훑어 내렸다.

“비키세요.”

기껏해야 스물, 못 뚫을 것도 없었다. 수선을 모셔 오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말은 전해야 했다.

[하늘이 신을 견제해 그 숨을 인간의 손에 묶었다.]

부디 수선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길 바랐다. 그의 직감이 바람을 부정했으나, 인간의 손에 목이 매일 수선을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승을 제 곁에 두려는 화선의 이기심에 구역질이 일었다.

연왕은 생각에 이성이 잡아먹힌 듯 보이는 대신관에 이를 물었다. 이 상태로 그를 목탑에 보냈다간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다.

“수산에서는 도둑질이 예에 어긋나지 않는가 봅니다.”

“제가 참고 기다린 것은. 수선을 모신다는 거짓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았길래 이러십니까.”

“…비키세요.”

소통이 되지 않음을 인지한 연왕이 칼을 빼 들어 대신관의 목에 겨누었다. 그 광경에 칼을 빼 들고 경계를 세운 병사들이 숨을 죽였다.

“지금 수선께서 누구와 계신지 아실 텐데요. 대신관께서 그리 아둔하시리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그를 보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다. 제가 아는 화선께선 그리 인내심이 길지 않다. 당연하게도 수선을 데려가겠다 드는 대신관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이가연은 제 목을 겨눈 칼에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연왕은 신실한 대신관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와 나눈 술잔을 생각했다. 그로선 그를 막아섬이 최선의 배려이자 의리였다.

연왕은 이가연의 동공이 잠시나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빈틈을 놓칠 리 없는 연왕이 단숨에 어깨를 베려 들었다.

그러나 흰 손이 칼날을 그러쥠에 연왕은 칼을 빼 든 채 그대로 몸이 굳었다.

“어찌 이러십니까.”

수선의 질책에 연왕은 황급히 칼은 거두고 고개를 조아렸다. 수선이었다. 화선이 오기 전에 이를 중재하려 들었거늘, 수선이 직접 나설 줄은 예상치 못했다. 연왕은 차마 그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걸음을 물렸다.

왕이 손을 드니 경계를 세우던 병사들이 황급히 대형을 흩트려 칼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스스로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수선의 낯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병사들은 혹여나 그 발끝이라도 눈에 담길까 눈을 질끈 감았다.

“…간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수선이 흐리게 웃으니 이가연은 시선을 내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곤란한 듯한 미소가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비추는 햇살에 수선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했다.

그에 이가연은 탄식했다. 제 아무리 수선이라 한들, 이는 인간의 존재감이 아니었다.

“어찌 신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까…….”

대신관 이가연. 인간의 몸으로 신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그로선 수선의 변화를 모를 수 없었다. 목탑에서 뛰어내린 수선이 땅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궁 전체가 물에 빠진 듯한 거대한 힘에 숨도 쉬지 못했다.

수는 이가연의 대답에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한눈에 알아보시는군. 사형의 반응에 신아가 대신관과의 만남을 어째서 그리 꺼렸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절개가 넘치십니다. 사형께서 수선이 되었어야 했는데…. 늦은 일이나, 슬선이 꽤나 원통해했겠습니다.”

어찌 신의 모습을 하고 있냐는 물음에도 덤덤하니 이가연은 수선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선이 직접 모든 것을 실토했는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런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선이시여. 이리 의연하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아십니까.”

“화선이 제 스승을 신으로 만들어 숨통을 쥐려 했음을 압니다.”

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말을 들을까 사형 만나기를 꺼려 했는가. 수는 잠시 눈을 흐렸다. 그래서 제 손에 자신의 목을 쥐여 주었는가.

“…사실이 아닌 듯합니다. 제 목숨은 제 것이 아닙니까.”

“어찌 이러십니까. 화선은 수선을 능멸하고 수산의 신을 욕보였습니다. 당장 수산에 돌아가 대책을 강구 하셔야 할 겁니다. 화선은 인간의 손에 불타는 생을 살았습니다. 허면, 수선께선 물에 잠겨 죽는 생을 맞이하셔야 합니까?”

‘스승님께서 안으신 저주는 접니다.’

이가연의 물음을 끝으로 신아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대니, 수는 시선을 내렸다.

“…화선과 저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가라앉은 수선의 답변에 이가연은 눈을 찌푸렸다.

“물의 일족은 평생을 수산의 신을, 그를 대리하는 수선을 모셔 왔습니다. 수산에 직접 신이 내림은 축복할 일이나 그 목에 줄이 매였다면 달가워할 이는 없을 겁니다.”

“…생명이 위협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직도 그자를 믿으십니까? 어찌 한평생 제 몸 아까운 줄 모르십니까…!”

수는 제 앞에 분노를 짓누르는 사형을 모를 수 없었다. 감정을 쉬이 내보이는 분이 아니었다. 수선을 받드는 대신관으로서, 화선을 통해 제게 어떤 위협이 도래할지 가늠하시는 듯했다.

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연왕을 보았다.

“왕이시여. 화국 대신관은 어디에 있습니까.”

“…송구하오나.”

“직접 들었습니다. 왕권이 바뀌고도 바뀌지 않은 듯한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단호한 물음에 연왕은 고개를 수그렸다. 수선은 인간이 아니게 되었는가. 연왕은 생각을 멈추고 신의 물음에 답했다.

“신궁 목탑의 지하에 있습니다. 화선께서 막아 두었으니 말씀드리면 분명 열어 드릴 겁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습니까.”

“목탑이 세워질 때부터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 또한 연유는 알지 못합니다.”

수는 신궁에 울려 퍼지는 비명의 출처를 깨닫고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몸을 돌려 이가연을 마주했다. 단호한 낯을 보이는 수선 앞에 이가연은 먹먹한 우려를 숨기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려 하십니까….”

“아이는 제게 숨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화국이 제게 위해가 있을지는 직접 판단하겠습니다. 제게 지혜롭다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저는 화선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오지 않으시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가연은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는 수선을 마주했다. 그래, 이런 분이셨지. 이가연은 이를 물어, 감히 수선의 걸음을 막고 싶음을 참았다.

“…만에 하나, 수선께서 내일 아침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화선께서 제게 거짓을 고하신거겠지요. 그랬다면 제가 직접 화선을 죽이겠습니다.”

그 말에 연왕이 크게 움찔했으나 이가연은 입을 닫았다.

수선께서는 타인의 죽음을 논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러니 화선이 제게 거짓을 고했을 리 없다는, 화선을 향한 신뢰를 내보이는 대답이었다. 이가연은 제 앞의 수선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더더욱 괴로웠다.

이가연이 짧게 묵례하고 돌아섬에 수가 말을 덧붙였다. 마치 달래는 듯, 온화한 목소리였다.

“오늘 찾아뵐 생각이었는데. 이리 소란스럽게 마주했음을 아쉽게 여깁니다.”

잠시 멈추어 선 이가연은 큰 대꾸 없이 다시금 길을 나섰다. 대신관이 멀어져 감에 수가 시선을 거두었다. 수에겐 몇 없는 은인이었다.

수선은 연왕 앞에 고개 숙여 사죄를 표했다.

“화국의 신을 욕보여 송구합니다.”

연왕은 그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화선을 받드는 입장에서 수선께선 절대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그에 더 나아가 인간의 몸이 아니라니. 가령 수선께서 화선을 죽이려 한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또한, 화선께선 수선의 말에 그 어떤 반기도 들지 말라 하셨다. 그게 자신을 향한 살의일지언정 화선께선 물러가라 명할 신이었다.

“아닙니다. 제게 고개 숙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야말로 수산의 대신관께 칼을.” 

수선이 한쪽 눈을 찌푸리니 연왕은 그만 입을 닫았다. 못 본 것으로 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다시 탑에 드십니까.”

“예.”

옅게 미소 짓는 수선에 연왕이 쓰게 웃었다. 남을 안심시킴이 몸에 밴 분이셨다.

‘화선이 제 스승을 신으로 만들어 숨통을 쥐려 했음을 압니다.’

연왕은 이가연의 말을 회상했다. 이를 알고도 직접 화선을 찾아 가시는가. 당장 목탑에 몸이 묶일 수도 있음을 어찌 예상치 못하시는지. 연왕은 조용히 생각을 덮었다.

“혹…,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늦지 않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수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시선을 내렸다. 그러곤 곤란한 듯 작게 웃었다.

“대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진정 화선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시는가? 연왕은 수선의 곧고 바른 생각에 당황했다. 그러다 이내 머리를 털어내어 생각을 지웠다.

“문배주를 올리겠습니다.”

그에 수선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물러간 신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수선 앞에 부러진 기둥만이 방금 전 있었던 소란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였다. 그 크고 넓은 궁 안에 오직 수선만이 숨을 쉬었다.

홀로 신궁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수선은 해가 질 즈음에야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목탑으로 걸어 들어갔다.

돌아온 목탑은 온 층층이 불이 켜져 있으나 사람의 흔적 없어 허전했다. 신아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니 수 또한 아이를 찾고자 하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옮겨 일 층 층계의 아래에 놓인 나무판자를 보았다.

수는 그 앞에 쪼그려 기로 뒤덮인 나무판을 쓸었다. 손에 닿는 기운에 피부가 따끔하나 위협적일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대로 홈에 손을 집어넣어 기를 흘렸다.

옅은 푸른빛을 띠는 기가 나무판을 감쌌다. 그렇게 문을 막아 둔 결계가 지워져 수선의 출입을 허했다. 수는 쇠 손잡이를 쥐어 판자를 들어 올렸다. 뚜껑처럼 덮여 있던 판자를 치우자 곧바로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래에도 창이 있는지 달빛이 드는 듯했으나 지상보다 어둡고, 공허했다.

수는 몸을 일으켜 서랍 위에 놓인 등화 하나를 들었다. 신아가 놓고 갔을까.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기묘했다. 그렇게 시야를 밝히는 등화 하나를 들고 아이가 내보이기 두려워한 어두운 진실을 향해 걸었다.

돌바닥을 걷는 발소리가 목탑의 지하에 울려 퍼졌다.

수는 불빛을 비추어 줄줄이 늘어선 철장을 둘러보았다. 옥사로 보이나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어 휑한 곳이었다.

길게 뻗은 복도를 걸어가는데 쇠사슬 잘그락 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이 넓고 큰 곳에 단 한 사람만이 존재하는가. 수도 이제는 이 지하에 붙잡힌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화국 대신관. 당연히 왕권이 바뀜에 따라 사람도 바뀌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신아의 말을 곱씹어 보면 그런 것도 아닌 듯했다. 아이를 죽이려던 자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진실을 전달하겠다며 그를 살려 두었다 하니.

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신아는 정말 아이로 살아온 것이 맞았다. 걱정이 많고, 어리광이 잦으며 비약이 심했다. 스승의 판단이 제 속임수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하니 말이다.

“신…. 수선이시여…….”

붉은 등이 길을 밝히니 수는 길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조각조각 난 듯한 목소리가 절절함에 수는 몸을 틀어 제 옆을 보았다. 손을 들어 불을 비추니 아무런 잠금장치도 없이 놓인 옥사 안에 사람 하나가 눌어붙어 있었다.

“드디어…!”

감격이 서린 목소리에 수는 문을 열어 그 안에 들어섰다. 끼익- 금속음이 텅 빈 지하를 울렸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에 화국 대신관 고심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드디어, 드디어. 곱게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악에 받친 혼은 화선의 속을 뒤집어 놔야 편안히 잠들 것 같았다.

화선과 수선은 본질이 다르다. 수선이라면, 화선의 손에 신이 된 자는 분명 진실을 깨닫고 화선으로부터 도망칠 테다. 그게 화선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임을 모르지 않았다.

눈꺼풀 위가 길게 찢어진 대신관이 더듬대는 손으로 다가온 수선을 붙잡았다. 수는 그런 대신관의 손길에 등화를 내려 두고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달그락대며 선 붉은 등 하나가 붉게 일렁이며 좁은 옥사를 비추었다.

“화국 대신관, 고심… 위대한 수선을 뵙습니다.”

목소리가 울먹대니 수는 화국 대신관을 훑어보았다. 이내 다리를 꿰뚫어 놓은 쇠사슬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대신관은 수선이 저를 보았음에 반가운 기색을 억눌렀다. 다 화선이, 그 정신 나간 신이 시작한 일이다. 제 처참한 몰골에 분명 겁에 질렸을 터였다.

“다… 다 화선께서 이리 만드셨습니다. 수선께서 모든 진실을 깨달음이 두려우시니 말입니다. 오직, 오직 수선만이 저를 구원해 주시리라…….”

“화선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예?”

뜻밖의 질문에 대신관은 몸을 굳혔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아무런 감정을 담아내고 있질 않았다. 분명, 순하고 여린 성정의 사내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 멍청하니 화선에게 속아 넘어갔으리라 생각했는데.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딱딱하고도 위압적인 존재감이었다.

“질문이 어려운지요. 아이는 죽어도 태어나고, 죽어도 태어난다 했습니다. 그에 일조한 적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정말 화선을 가엽게 여기는 건가? 대신관은 헛숨을 들이켰다. 뜻밖의 상황에 닳아 버린 손톱으로 돌바닥을 움켜쥐었다.

“화국에 화를 불러오는 신이니 잠재움이 당연합니다. 화국을 수호하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답이 긍정과 다르지 않으니 수는 시선을 내렸다.

이자가 싫다. 신아는 정말이지,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무뎠다. 저를 위해 살려 두었다 한들 아이를 해하려 든 자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타인의 말보다 제 말을 믿고 싶음을 어찌 모르는 걸까.

가늠할 수 없는 수선의 태도에 대신관은 흐느적대는 다리를 끌어다 그 앞에 꿇어앉았다.

“수선이시여…. 그 잔혹하고 포악한 신이 어쩌다 인간의 손에 목이 매였는지 아십니까….”

“…궁금하지 않습니다.”

“어찌…! 정말 홀리신 겝니까. 정신 차리세요. 그자는 목숨을 미끼로 수선을 끌어들이지 않았습니까…. 어찌 믿으려 하십니까? 그리 순진하시니!”

“아이가 죽어 왔음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에 일조하셨을 텐데요.”

“지금 저를 책망하십니까? 화선이 아니라 저를!”

울화가 치민 대신관은 심사가 뒤틀려 소리쳤다. 간절하게 매달릴 생각이었으나 뜻밖인 수선의 반응에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허면 아이에게서 무엇을 책망해야겠습니까. 스승이 저주를 받게 두었음을요?”

그러나 수선의 물음은 어조가 차분하여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예. 죽어도, 죽어도 살아나는. 그 괴물과 평생을 지내셔야 하는 겁니다. 하늘이 우려한 신과 평생을 말입니다……!”

“…부디 화선 앞에서 그리 뱉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대신관은 오싹한 기운에 탄식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벽과 대화하는 듯했다.

수선은 화선과 달랐다. 이기적인 마음은 하나도 존재치 않고, 오직 화선의 안위만을 좇는다. 그 정신 나간 신을 아이라 칭하며 어여삐 여기니, 이런 자에게 이간질이 가능할 리 없었다.

수는 손을 들어 대신관의 턱을 가볍게 쥐었다. 그렇게 고개를 들어 올림에 대신관은 흐린 눈으로 수선과 시선을 마주했다. 해소되지 않는 억울함에 대신관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속았음을 아십니까?”

“속은 적이 없습니다.”

“불의 힘을 품어 신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영생이 달가울 거라 보십니까. 그 지긋지긋한 삶 끔찍하여 길동무를 품었음을 정녕 모르십니까.”

“…아아, 영생을 끔찍하다 여기는군.”

수선은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신관은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으나 바람 빠지는 듯 힘없는 웃음소리에 멀어 버린 두 눈을 깜빡였다.

턱을 들어 시선을 맞댄 수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웃음에 왠지 모를 허무와 애정을 담고 있으니, 대신관의 낯이 일그러졌다.

“아이가 참 여립니다.”

“…수선.”

“제가 선택한 일입니다. 만에 하나, 아이가 저와 영생을 살아 달라 부탁했다면 기꺼이 청을 들어줬겠지요.”

“진심이십니까…. 겪지 않아 쉬이 여기시는 겁니다……!”

“허나 대신관께서도 경험이 없질 않으십니까.”

“수선이시여….”

“진정 아이가 저를 속이려 했다면, 평생을 산다니 기껍지 않겠냐며 행복을 노래했을 겁니다. 인간 중엔 영생을 꿈꾸는 이도 있으니 말입니다.”

“…….”

“신의 삶. 겪어서 끔찍했으니 묻지 못한 게 아닙니까. 속일 생각을 하지 못한 것부터가 스승을 헤아린 것입니다. 그러고도 스승을 속였다 여기니 참으로 순수하지 않습니까.”

“존재가 자체가 해악이 됨을 어찌 모르십니까…!”

“지금의 화국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대신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수선!”

절망이 서린 고함에 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뭘 그렇게 두려워하나 했더니, 아이의 고민은 너무나 여리고 안타까운 것이었다.

“욕심 부리며 살라 가르쳤습니다. 가르침을 행했을 뿐인데, 어찌 아이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가르친 스승을 탓해야지요,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맑은 기운이 서려 있음에 대신관은 허망하여 주저앉았다. 수선의 마음에는 화선을 향한 일말의 혐오도 없었다.

“…그자는 아이가 아닙니다.”

“누구도 키워 주지 않았으니 아이와 다름없지요.”

단호한 답에 대신관의 맥이 풀렸다. 이제 보니 수선이 화선에 홀린 것인지, 화선이 수선에 홀린 것인지가 모호했다.

“제가 화선을 죽일 수 없음은 무슨 뜻입니까.”

“…답하면 무엇을 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만 저를 죽여 주실 수 있습니까.”

수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니 두 눈이 멀어 버린 대신관은 그 기척에 입을 열었다.

“화선이 인간의 손에 목이 묶였듯, 수선께선 평생 그자를 벗어나지 못하실 겁니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수선께서 직접 겪으시겠지요…….”

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가 받았을 고통과 이를 동일 선상에 두고 논할 수는 없다. 자신을 얼마나 저평가하면 이리도 자책하는지. 수는 그에게 더한 자긍심을 키워 주지 못했음을 후회했다. 화선을 괴롭혔던 하늘이 이번엔 그를 제약이라 부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은 우습습니다. 저는 제 발로 아이를 찾았으니 말입니다.”

그 말에 대신관은 눈을 감았다. 수선은 화선을 저주로 여기지 않는다. 화선이 그 앞에 얌전하니, 수선의 존재가 곧 평화가 된다. 화선이 수선을 속였다 느껴지지 않았다. 수선이 화선을 길들였다는 쪽에 더 가까웠다.

“…두렵지 않으십니까.”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자를 사랑하십니까…?”

사제 간의 정을 묻는가. 수는 시선을 내려 한참을 고민하다, 곧 옅게 웃었다.

“예.”

이는 신아의 마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 대답에 대신관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누웠다. 떨리는 숨을 뱉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십 년간… 화선이 당한 것과 같은 고신을 받았습니다.”

“송구하나, 연민이 들지는 않습니다.”

“…연민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냥. 이제 다 끝났다 생각하니…….”

흐리게 웃는 대신관에 수 또한 자리를 옮겨 그 옆에 앉았다. 춥고 음습한 곳. 가만히 고개를 들어 철창을 보았다. 이런 곳에 평생을 갇혀 있었을까.

수는 아이의 삶을 헤아리다가, 조용히 화선의 아이가 받았던 고신에 관해 물었다. 대신관이 답하는 한 자 한 자가 수선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알고 싶지 않았으나, 저라도 알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줄줄이 읊어 내리던 대신관이 입을 닫고 조용히 흐느꼈다. 수선이 더 궁금해하는 게 없으니 죽음이 목전이었다.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만 가세요.”

죽음을 내리는 신의 목소리에 대신관은 눈을 감았다. 간절히 기다려 온 죽음은 참으로 달가우나, 허무했다.

화국 땅에서의 마지막 대신관이 수선의 손 아래 익사해 죽었다. 화선이 살아 있으니, 수선은 그의 죽음을 기리지 않았다.

“저런.”

수는 계단을 내려선 존재에 눈살을 찌푸렸다. 창문 틈으로 흘러드는 빛에 등불 없이도 인형이 선명했다. 수는 등불을 내려두고, 천천히 걸어 아이의 앞에 섰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다그치듯 웃는 스승에 신아는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그에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수는 옅게 웃으며 딱딱하게 굳은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작은 흐느낌도 없이 우는 아이가 참으로 애달팠다.

“신의 삶이라. 솔직히 와닿지는 않는구나. 목이 따끔하긴 했었지.”

“…탓하셔도 됩니다.”

“네가 너무 예뻐서 살고 싶어졌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 젓는 신아에 수가 가볍게 웃었다.

“후회하실 겁니다.”

“후회할 거야?”

신아가 또 한 번 고개를 저으니 수는 아이를 당겨 어깨를 안았다. 신아는 스승의 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스승이 저를 안으신다. 여전히, 예전과 변함없이 말이다.

수는 어깨가 젖어듦을 느끼며 아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신아가 품었던 욕심을 이해한다. 저 또한, 신아를 잃을 수 없어 수산의 혼란을 업고도 도망치지 않았었나.

겨우 얻은 것을 잃을 수 없어 겁먹은 아이였다. 그러나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저도 비슷한 미래를 꿈꿨을 테다.

“간절했던 거지?”

아무런 답이 없으니 수는 웃으며 아이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외로웠구나. 괜찮아.”

수는 천천히 신아의 볼을 쥐어 제 눈앞에 들어 올렸다. 눈가가 촉촉이 젖은 신아의 낯이 달빛에 어른댔다. 수는 젖은 신아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다.

이리 고운 아이가 어찌 제약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늘은 언제나 비겁했고, 그에 화선의 아이를 괴롭혔다. 하늘이 화선의 가치를 모르니 그를 저주랍시고 제 앞에 달아 두었겠지.

수는 눈물을 흘리고도 청아한 아이를 보며 웃었다.

“신아야. 너는 너를 좀 더 소중히 여겨야겠다.”

눈썹을 쓸어주는 손길에 신아는 선 채로 녹아 사라지는 줄 알았다. 웃지 않으시면 좋을 텐데. 자꾸만 웃으시니, 죄를 짓고도 위로받고 싶었다.

수는 문득 지난 꿈이 생각남에 신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에 신아가 눈물 젖은 시야에 스승을 담았다.

“언젠가, 네가 나를 키우기도 할까?”

곤란한 듯 웃는 스승에 신아는 그를 품에 안아 가두었다. 그렇게 스승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천천히 호흡했다.

“내가 네 앞에 아이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저와 함께할 다음 생을 입에 담으신다. 가슴이 벅차 머리마저 쿵쿵댔다.

“…제가 어찌 스승님을 키우겠습니까. 그때도 저를 안아 주실 거라고.”

절절한 호소에 수는 더 듣지 않고 따뜻하게 웃으며 신아를 껴안았다. 그 손길에 신아의 묵은 불안도 쓸려 내려가 달빛에 스러졌다.

십 년을 그려 온전히 찾은 평화에 오래도록 스승의 품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신의 품 안에서, 화선은 영원토록 아이이고 싶었다.

화선에게 탄생이란 또 다른 죽음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없는 세상에서 살았다. 제 죽음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어야 했다.

수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 저었다. 저를 위해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다고 하는 아이를 어찌 미워할까. 그건 아이가 겪은 삶의 전부였다. 전부를 내어줌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저 하나쯤은 온전히 아이의 편에 서고 싶었다. 저 하나를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기엔 갖지 못한 생이 너무도 길었다.

* * *

조그만 나룻배에 술과 음식이 한가득이니 수는 연왕의 재치에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에 이렇게라도 술상을 보낸 것 같았다.

수는 먹을 만큼만을 접시를 덜어 둥그런 소쿠리에 담았다. 다행히 손잡이가 있어 신아의 손목을 쥐고도 짐을 들 수 있었다. 잠시도 떨어져 있으려 하질 않으니, 차라리 제가 끌고 다님이 편했다.

그에 신아가 스승을 감싸 안았다.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몸짓에 수는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소쿠리를 넘겨주었다. 길을 막아섬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들어도….”

곧바로 신아의 축 처진 어깨를 마주하니 수는 옅게 웃었다. 뜻대로 하라는 듯 걸음을 옮기자 신아는 소쿠리를 들고 그 뒤를 쫓았다.

수선이 걸음 하심에 목탑 층층이 걸린 등이 환하게 길을 밝혔다. 연못가에 다다른 수는 발끝으로 수면을 찰방이며 신아를 돌아보았다.

“화선은 그리 멀리서도 불을 붙이는데, 수선도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수는 손목을 쥔 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신아는 스승의 온기가 옮겨 옴을 느꼈다.

스승의 머리칼이 옅은 기에 일렁이기 시작하자 신아는 그 낯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달빛에 은은한 푸른 기가 어울리니 그보다 눈부실 수 없이 빛나는 존재였다. 살갗을 통해 물의 기가 스민 신아는 그제야 스승이 하려는 바를 이해했다.

수가 연못가를 밟고 조심스레 신아를 끌어당겼다. 그에 신아도 수면을 밟았다. 발 아래 퍼지는 물결을 확인한 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점이 많구나.”

수가 시선을 맞추고 눈을 접어 웃으니, 신아는 스승이 저를 위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수면에 반사된 등불이, 달빛이 스승을 비추었다. 제 앞에 내린 과분한 축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두 신이 나란히 수면 위를 걸었다. 봄 날씨가 완연함에 밤공기마저 청량했다.

수는 신아를 데려다 작은 정자에 올랐다. 연못가에 조그마한 건물이 있어 봐 둔 것인데, 어찌나 꼼꼼하게 관리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그렇게 정자를 둘러싼 등이 불을 밝히니 신궁 안에 둘만의 작은 축제가 열렸다.

수는 네모난 탁자를 앞에 두고 신아와 나란히 앉았다. 신아가 좀체 떨어지려 하질 않으니 마주 보고 앉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이가 제 얼굴만 쳐다보고 앉았음에 수는 웃으며 직접 술잔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를 채운 잔을 드니, 신아도 잔을 들었다. 그렇게 첫잔을 머금었다.

술자리를 솔선한 것은 스승이나 수는 혀끝에 술이 닿음과 동시에 질끈 눈을 감았다. 이리 독한 술인 줄은 몰랐던 터라 당황한 탓이었다. 그도 그럴 게, 수는 그렇다 할 술 경험이 없었다.

그러나 목 넘김 후 코끝에 맴도는 문배 향에 고개를 끄덕였다. 술만큼 대화에 좋은 것은 없다 하니 견딜 만한 정도였다.

“신아야.”

스승의 부름에 신아가 시선을 마주했다. 수는 잔을 내려 두고 종일 붙들고 오던 신아의 왼손을 쥐었다. 흉터로 얼룩져 엉망인 손바닥은 까끌까끌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수는 신아의 손바닥을 펼쳐 가만히 내려 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또렷하게 저를 올려 보는 시선에 신아가 고개를 수그렸다.

“다음부턴 그러지 마.”

“…송구합니.”

“사과할 일이 아니야.”

다그치던 수는 눈썹을 늘여 아이를 살폈다. 제 몸 아까운 줄 모르고 이러니. 신아가 알아들었는지가 걱정이었다.

“너는 내가 내 몸에 상처 내면 좋아?”

“스승님.”

극단적인 물음에 신아는 스승의 손목을 붙들었다. 눈썹을 찌푸린 아이는 날이 선 듯 예민하게 반응했다.

제 몸 얘기할 때와 확연히 다른 반응에 수가 한숨 쉬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렇게 신아의 이마를 콩하고 작게 쥐어박았다. 대신관을 죽인 수선의 주먹질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또 이러면 나도 내 몸에 피 볼 거다.”

“말이라도 그러실 수 없습니다.”

“신아야.”

수는 고개를 숙여 신아의 양손을 그러쥐었다. 그러곤 양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겨 신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엄한 표정으로 신아를 보던 낯이 순식간에 풀어져 슬픔을 담아냈다.

천천히 이마에 신아의 손을 대고 한숨 쉬었다. 스승의 한숨에 신아는 온몸이 묶인 듯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아파…. 그러니까 그러지 마.”

절절한 목소리에 신아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웅크린 스승을 일으켜 세웠다.

신아는 마음이 우글거려 손끝이 저렸다. 살 수 있음에도 입을 닫았음을 아시고도. 신의 삶에 저주로 떠안은 게 화선임을 아시고도.

“…예.”

신아는 수선 앞에 답했다. 아이의 답에 무게가 실려 있으니 수는 신아의 손바닥에 느리게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제 몸 다치는 것에 무감한 아이를 다독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으니, 이제라도 아끼며 살길 바랐다. 바라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술잔 아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대화들이 오갔다. 내일 사형을 만나 뵙고 오겠다는 말이 얼핏 나왔으나 수도, 신아도 그에 대해 길게 얘기하지 않았다.

수는 신아가 그만 잊기를 바랐고 신아는 스승이 묻어 두심에 그를 따랐다. 이번만큼은 스승을 보내드려야 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 이후의 대화는 전부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것들이었다.

잔잔한 물소리와 식기 달그락대는 소리, 술잔 기울이는 소리와 조곤조곤한 말소리만이 존재했다. 간간이 웃음소리도 들려오니 화국의 평화가 이곳에 있었다.

수는 입 안이 씁쓸함에 침을 삼키며 신아를 올려 보았다. 쓰지도 않은지, 신아의 낯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차마 제가 술상을 벌여 놓고 안 쓰냐고 물을 순 없으니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다.

술을 나누며 신아의 불만을 들을 요량이었으나 신아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곧이곧대로 술을 받아 마시곤 제 입에 음식을 들이미니 수는 속마음을 듣겠다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느꼈다.

수는 내밀어진 육전에도 신아를 빤히 쳐다보며 의중을 파악하려 했다.

“스승님. 속 쓰립니다.”

그러나 단호한 신아의 태도에 별 소득 없이 입을 열었다. 우울한 낯으로 육전을 씹기가 무섭게 눈이 크게 뜨였다. 수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젓가락을 들었다.

“얼른.”

수가 신아에게 육전을 내미니 신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이내 먹으라는 뜻임을 이해하고 얌전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먹었다. 맛있지. 반응을 기다리며 반짝이는 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신아는 시선을 내려 탁자를 훑었다. 이리 기뻐하시니 수라관 규모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모든 진실을 마주한 스승님께서 평소와 다르지 않으심에, 더 바랄 게 없었다.

‘괜찮아.’

그 말에 모든 게 괜찮아졌다. 신이 있음에 더는 생이 공허하지 않았다. 스승이 술병을 들어 올리니 신아도 군말 없이 다음 잔을 받아 마셨다.

한 모금을 삼키고 인상 쓰는 스승을 보며 이번에는 시루떡을 집어 들이밀었다. 수는 별생각 없이 입을 벌리다, 찜찜한 구석이 있는 듯 몸을 물렸다.

“애 취급이 과하다.”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입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을 챙긴다고 입에 음식을.”

“연인이라 생각하심은요?”

수는 그만 체념하고 입을 벌렸다. 씹기가 무섭게 번지는 달콤한 맛에 눈을 번쩍 뜨곤 다급히 젓가락을 들어 시루떡을 집었다. 그렇게 초조한 낯으로 신아 앞에 떡을 내밀었다. 그런 모습에 신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것만 먹었다 하면 저부터 찾으시니 가슴이 간지럽다 못해 아픈 것 같았다.

이후 신아는 스승께서 독한 술을 들이켬을 말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연왕이 독한 술을 올렸음에 스승께서 속을 버릴까 불쾌했으나, 생각해 보자면 지금은 술을 즐기지 않는 스승의 첫 술자리였다. 신이 된다고 해서 무적이 되는 것은 아니니 주량에 따라 취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 인간의 몸으로 술 한 방울도 들지 않았던 스승께선 주량도, 술버릇도 모르심이 뻔했다.

아무도 모르는 스승님의 모습을 볼 수 있음을 깨닫자 신아는 수긍하며 잔을 받았다. 잔을 들며 곁눈질로 스승을 보았다. 눈을 찌푸리면서도 잔을 비우는 스승을 온전히 두 눈에 담았다. 이보다 달 수 없었다.

수는 술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새 잔을 따랐다. 술병이 두 병을 넘어가니, 신아는 가만히 스승의 상태를 살폈다.

“화국은 음식도 음식이지만 술맛도 좋구나.”

아, 술도 음식이던가. 중얼거리는 말에 신아는 스승이 취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희고 젓가락질이 얌전하니 변하신 것은 웅얼거리는 말투와.

“아가. 나도 좋아했을지 몰라.”

뇌를 거치지 않아 지나치게 솔직해진 말뿐이었다.

“…아닌가? 생각을 너무 많이 했더니 이젠 잘 모르겠다.”

신아는 저를 빤히 올려보다 코를 찡그리는 스승에 깊은 시름을 뱉었다. 스승님께선 저와 같은 마음으로 저를 좋아하셨을 리 없었다. 그러니 고개를 저었다. 이런 술주정이 반복된다면 술에 취한 스승님은 위험했다.

저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스승의 발언에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던 신아는 결국 스승을 안아 들었다. 깨어질 듯 조심히 다루어 제 무릎에 앉혔다. 그렇게 멀뚱멀뚱 저를 바라보는 스승의 이마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금지.”

단호하게 뱉는 목소리에도 연이어 눈, 입에 입을 맞추었다. 스승의 손을 가져가 손등에도 입을 대었다. 올려 본 스승이 옅게 웃고 있으니, 머리가 아찔했다. 욕정을 눌러 참기 위해 혀를 짓씹으며 고개를 물렸다. 제어가 안 되는 음심에 눈썹을 구긴 채였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수는 물러나는 신아의 뒷덜미를 쥐고 입을 맞추었다. 뜻밖의 상황에 신아가 뻣뻣하게 굳었다. 수는 말갛게 웃으며 코를 흥흥댔다.

“네가 먼저 어겼어. 피장파장이다.”

의미를 잃어버린 접촉 금지에 신아의 이성이 마비됐다. 신아는 스승의 허리에 팔을 둘러 당기곤 단단히 붙들었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자세에 수가 불편한 듯 몸을 들썩였다.

“스승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수는 저를 덮칠 듯 내려 보는 신아를 보았다. 엄지로 턱을 간질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피장파장입니다.”

아이의 말에 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신아가 입맞춤을 네 번 했고, 제가 한 번을 했으니 좋게 봐줘서 피장파장이었다.

“더 하면 피장파장이.”

입이 벌어지기 무섭게 신아가 스승의 말을 막았다. 파고드는 혀에 놀란 수가 저도 모르게 신아의 혀를 깨물었다. 그에 놀라 턱을 벌린 것은 도리어 수였다.

스승이 힘 조절 불가능한 상태임을 깨달은 신아가 눈을 휘어 스승의 머리를 받쳤다. 혀에 통증이 이니 머리가 오싹했다. 제가 숨을 넣어 줄 때마다 목울대를 꼴깍이심이 만족스러웠다. 술에 취해 이성이 흐려진 스승님이 시선을 피하지 않으시는 것 또한 그랬다.

“흐으…….”

등을 받치던 손으로 목덜미를 끌어 내리니 스승의 곧은 어깨가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옷깃 안을 비집어 열었다. 옷을 벗기는 듯한 행동에 당황한 수가 몸을 들썩였다. 술기운이 날아갈 정도로 놀랐음을 신아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이러……!”

노골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수가 파드득 놀라 몸을 웅크려 신아를 밀었다. 거길 왜 만져? 그리 외치고 싶었으나 입이 막혀 소리가 먹혀들었다.

신아가 엄지 끝으로 유두를 짓누름에 수가 허리를 들썩였다. 내일 당장 사형을 뵙기로 약속했다. 기세를 봐선 이리 흘러가게 두면 안 됨이 분명했다. 신아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노골적이니 뒷골이 뻣뻣해졌다.

수는 술에 절어 팽팽 도는 머리로 결단을 내렸다. 오늘만큼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인정한 순간부터 정사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수는 몸을 빼려던 힘을 멈추고 신아의 얼굴을 쥐었다. 그러곤 되레 신아를 밀어붙여 어색하게 혀를 굴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신아는 힘을 풀었다. 저를 눕히는 힘에 순순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웠다. 스승이 제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는 모양새였다.

“으……. 후윽.”

이제 입만 떼면 되는데, 수는 아이가 저를 놓아주지 않아 울상 지었다. 고개를 빼려고만 하면 다시 잡아당기니 질척대는 침음에 심장이 요란했다.

다 흐트러진 앞섶에 바람이 불어 들자 수는 몸을 움찔대며 몸을 수그렸다. 그러나 둔부에 닿는 존재감을 느끼곤 당황하여 헛숨을 들이켰다. 왜? 대체 어디서 흥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컥!”

곧바로 사레가 들려 컥컥대니 신아는 그만 스승을 놓아주었다.

몸을 일으켜 등을 두들겨 주는 손에 수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신아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니 수가 당황하여 그 어깨를 짓눌렀다.

“…신아야.”

“예.”

“안 돼….”

“무엇을요?”

신아가 눈을 깜빡이니 수의 얼굴에 혼란이 번졌다.

…아닌가? 맞지 않나? 수는 제가 뜬금없이 정사를 떠올렸나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에 신아가 옅게 웃으며 스승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는 정사를 할 참이었는데 스승님은요?”

“…어어. 나도.”

환히 웃는 신아에 수가 당황하여 신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술기운에 한 무의식적인 반사라 억울했다. 그에 신아가 하하 웃으며 스승을 안아 일으켰다.

“스승님. 저 좀 보세요.”

신아가 고개를 수그려 스승의 얼굴을 살피니 수는 그제야 턱을 들어 주었다. 신아는 오늘만큼은 스승님을 곤란하게 두어선 안 됨을 알고 있었다. 이가연, 내일 그자를 만나러 가야 하니 말이다.

스승님께선 못 보신 듯했으나, 아까 전 나룻배에는 화국의 필체로 써진 서신이 묶여 있었다. 상당한 악필이니 곁눈질로 흘겨봐도 연왕의 서신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차마 직접 보내지 못하고 나룻배에 묶어 뒀을 테다.

부디 내일까진 가만히 계셔 달라는 간곡한 청. 주제를 아는 자였으니 쪽지 하나에 목숨을 걸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신아는 스승을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이 모두가 십 년을 고대한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알지만, 보내 드리기 싫었다.

“스승님께서 생각하시기에도 너무하셨죠?”

“…내가?”

“제자가 발기한 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니….”

입을 꾹 다무는 스승에 신아는 훤히 드러난 스승의 가슴팍을 보았다.

스승님께선 타고난 무인이셨다. 드러내지 않으실 뿐 체술이라면 신의 권능을 제하여도 그에 견줄 이가 없었다. 저는 그 모습을 알고 있으니, 저조차도 기를 거두고 맞붙는다면 승패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잠이 많다는 점에 비할 만큼 몸이 예민하셨다. 두 번 사정하고는 기절하시며 손을 스친 곳이라면 온몸이 불긋하게 달아오른다. 성욕이 크지 않을 뿐, 저를 안고도 며칠 밤낮을 뛰어 도망치셨던 분이니 잠보다도 쾌감에 예민하실 듯했다.

스승의 붉어진 가슴팍을 보는 눈이 한없이 탁해졌다. 제 고결한 스승께선, 쾌감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신다.

말수가 줄어든 신아에 수는 불안한 눈으로 아이를 살폈다.

수가 안절부절못하고 시름할 때 신아는 아득한 상상에 젖었다. 저는 두 번으로 만족할 수 없으니 극진히 모셔야 함이 빤했다. 그를 상상하다 눈앞이 아찔하여 인상 씀에 수가 동공을 잘게 떨었다.

“내가… 입… 으로, 해 줄…….”

수는 말을 우물대다 두 주먹을 쥐었다.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니 태연하게 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다 큰 신아는 몽정을 하지 않겠으나, 저리 세운 아이를 돌려보냄이 근심스러웠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죄책감이 더했다.

그러나 신아는 덤덤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반응에 수가 한시름을 내려 두며 뒤이은 걱정을 내비쳤다.

“…괜찮아?”

“그럼요. 지금 스승님과 누울 텐데요.”

오늘이 합방일이네요. 활짝 웃는 신아의 말에 수가 펄쩍 뛰어 팔을 저었다.

“안, 된다…!”

수는 어쩌다 정사가 확실시되었는지는 잊고 쩔쩔맸다. 아이를 건드리고도 못 본 척하니 죄인이 된 것 같았다. 신아가 외설적인 얘기를 태연하게 꺼냄에 무뎌진 탓도 있었다. 제 거부에 신아의 낯이 눈에 띄게 가라앉으니 수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 음. 내일?”

“내일요?”

“으응….”

납득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에 수는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내뱉은 약속보다 지금 신아가 진정되었음에 다행스러웠다. 그러곤 시선을 내려 신아의 아래를 힐끔 쳐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없으나 분명 제가 느꼈었다. 저리 두어도 되나? 

스승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인지한 신아가 스승의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천천히 끌어다 제 아래에 가져다 대었다. 당황하여 손을 빼내려던 수는 옷감 위로 만져지는 것에 굳어 눈을 끔뻑였다.

“스승님.”

신아는 곱게 웃으며 눈을 찌푸렸다. 검지를 들어 수의 입가를 툭 건드렸다.

“하지 마세요.”

곧바로 의미를 깨달은 수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아는 그런 스승의 반응에 웃음을 흘렸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죽음이 두려운 삶이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수는 금세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신아는 웃는 낯으로 그런 스승을 안아 목탑에 들었다. 조심스레 침상에 눕히고, 잠들 때까지 그 등을 다독여 드렸다. 늦은 밤, 신아는 고른 숨을 내뱉으며 잠든 신을 가만히 내려 보았다.

“…어찌.”

이러실 수 있을까. 과분한 행운에 눈을 감았다.

스승이 걸음 하는 모든 발걸음 아래 짓밟히고 싶었다. 불을 안고도 불타지 않는 신이었다. 그 어떤 존재보다도 고결했다. 더 이상은 삶이 저주가 아니었다. 잠드는 게, 눈을 감는 게 아까울 정도로 귀중했다.

신아는 잠든 스승을 한참 내려 보다가, 조용히 목탑의 지하로 향했다. 화선의 발걸음은 텅 빈 지하를 울렸다. 그렇게 반쯤 열린 철창에 들어가 시선을 내렸다.

그 안에는 하얗게 질려 눈을 감은 대신관이 있었다. 온몸이 퉁퉁 불어 익사한 채였다. 화선은 죽은 대신관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그 불어 터진 얼굴을 톡톡 건드렸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희열에 젖어 있었다.

‘알고도 그랬을까?’

지겹도록 들어 생생하게 맴도는 대신관의 저주에 조소했다.

“…봤지?”

다 죽은 시체 앞에 그렇게 읊조렸다.

“혐오하시지 않는다…. 경멸하시지 않아.”

기쁨을 억누르는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화선은 손을 들어 피딱지가 내려앉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에 얼굴을 묻어 크게 호흡했다. 제 손을 감싸 쥐던 수선의 온기를 좇았다.

“평생을 함께할 거야…….”

나만이. 화선은 죽은 대신관 앞에 절절히 내뱉었다. 제어를 잃고 흐르는 기운에 불어 터진 시체가 그을려 검어졌다.

달빛에 그림자의 위치가 바뀔 즈음, 일렁이는 머리칼이 차츰 가라앉아 기세를 죽였다. 화선은 가만히 신의 용서를 두 눈에 담았다.

“…신아.”

그렇게 제 이름을 되뇌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화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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