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죽고 싶은 그대에게
이번 화선은 이상했다. 본래 화선이란 목숨을 조여 오는 저주 앞에 좌절하던 존재이거늘, 살고 싶다며 반란을 예고해 왔다.
“…어림도 없는 소리.”
살고자 하는 화선은 죽여야 함이 그가 아는 화국 땅의 경고다. 신정이 지남과 동시에, 대신관은 화선을 향해 살을 퍼부었다. 죽여야 한다. 그에 모든 신관이 자리를 비켜 신성한 의식을 도왔다. 그게 왕명이었다.
둥근 대신전 바닥 위로 꿇어앉은 대신관이 희열에 잠겨 눈을 떴다.
화선이 죽었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관은 꺼져 가는 화선의 맥박을 느끼며 그 죽음을 확신했다. 숨통을 조이는 불안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죽었다! 하하, 죽었…….”
그리 환호하던 때, 대신관의 얼굴로 한 줄기 빛이 줄을 그었다. 치성을 올리던 하늘의 문, 둥근 계단 위 네모난 문이 절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늘의 문, 인간의 힘으론 열 수 없는 돌문이며 신전 내에는 문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으나, 밖에서 보면 그저 허공에 뚫린 문이었다. 그렇게 움직여선 안 될 구조물이 열리며 대신전 안에 달빛이 들어찼다.
검은 비단 위 화려한 금자수를 새긴 혼례복을 입은 사내가 문틈 사이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대신관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말도, 이건 말도……! 여봐라!”
그렇게 고개를 돌려 사방에 뚫린 네 문을 살폈다. 그러나 문틈으로 짙게 흐르는 붉은 액체에 곧바로 상황을 인지했다. 죽음이 휩쓸고 간 바깥은 숨이 막힐 듯 고요했다.
“분명 죽었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대신관은 뒤로 엎어져 네발로 기었다.
“…말했을 텐데.”
어둡고 가라앉은 목소리, 대신관은 성체가 된 화선을 올려 보았다. 상투를 틀어 망건을 맨 사내의 이목구비가 화려했다.
“아니야…… 아니야.”
대신관은 고개를 저었다. 현왕의 즉위식 때 화선을 태운 것이 자신이었다. 그는 화선의 아이가 어떤 몰골로, 어떤 삶을 사는지 알고 있었다.
“성체가 된 화선이 어찌 되는지는 기록이 없지?”
그러나 제 앞에 선 화선은, 타오르는 불 그 자체였다.
완전해진 화선은 인간에게 쫓기지 않는다. 감히 신의 존재를 인간이 쫓을 순 없었다.
“살고 싶어졌다 해서 산다고? 아니야. 그럼 이제껏 다른 화선들은 왜……!”
“죽고 싶었으니까.”
화선은 계단을 걸어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사신처럼 걸음 하는 화선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뭐……?”
“…단 한 번도 살고자 한 적이 없었으니.”
잔잔한 목소리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대신관은 알 수 없었다.
“이, 무슨……!”
대신관은 팔을 삐끗대며 걸음을 물렸다. 당연하게도, 멀리 도망갈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의 몸뚱이가 화선의 발 아래 놓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옷을 더럽히고 싶진 않은데,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화선은 이미 피범벅인 예복 사이로 다리를 들어 대신관의 가슴을 짓밟았다.
“으, 으아악!”
뼈가 으득대는 소리와 함께 대신관의 얼굴로 피가 몰렸다. 팔다리를 버둥거렸으나 발버둥 칠수록 더해지는 고통에 목엔 핏대가 섰다.
뼈가 부러지기 직전, 화선은 발을 떼고 그 허리를 공 차듯 차올렸다. 허공 위로 날아든 대신관이 그대로 돌벽에 처박혔다.
“으…… 흐윽. 헉.”
“아파?”
부서진 돌가루와 함께 바닥을 뒹구는 대신관의 머리 위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대신관은 몸을 부들대며 바닥을 더듬었다.
“복수…. 복수를, 하는구나…….”
“아프냐고 물었어.”
어느새 다가온 화선이 신발코로 그 턱을 돌렸다. 내려 보는 얼굴엔 짙은 그늘이 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저런.”
화선은 붕대가 감긴 대신관의 어깨를 짓이기듯 눌러 밟았다. 왕에게 잘린 이후, 뼈마디가 제대로 붙지 않은 팔이었다.
“아아악!”
“여러 번 묻게 하지 마.”
“아파, 으, 아프아아악!”
무게가 실리는 발에, 대신관이 눈물을 쏟으며 울부짖었다. 화선은 피와 식은땀에 얼룩져 더러워진 대신관 앞에 쪼그려 앉았다.
“살고 싶어?”
얼굴에 핏방울을 매단 화선은 표정이 없었다.
“흐윽…, 끄……. 차, 라리…… 죽여라.”
“…그래.”
화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신전 벽에 걸린 칼을 빼 들었다. 그러곤 뒤돌아 멀어지니, 대신관은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흐느꼈다.
신전 계단 위에 걸터앉은 화선은 검 끝으로 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검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와 대신관이 흐느끼는 소리만이 넓은 대신전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절망 앞엔 죽음이 더 편하지.”
“흐윽, 흐…….”
“지금 신전을 빠져나가 살 수 있을 것 같아?”
건조한 목소리에 신관의 흐느낌이 커졌다. 살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런 괴물을 눈앞에 두고 살아 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공포에 떠는 인간을 내려 보는 화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게 죽음이란 게 그랬다. 어차피 닥칠 거, 하루빨리 죽고 싶었지.”
“으으……!”
“하지만, 너희가 그냥 죽인 적이 있던가?”
화선은 건조하게 물었으나 대신관은 공포에 몸을 떨었다. 화선의 아이. 성체가 되기 전까지 끔찍한 고신에 시달리며 죽음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아이였다. 대신관은 살아남은 아이가 제게 똑같은 짓을 할까 두려웠다.
몰려드는 공포에 오줌이 찔끔 새어 나갔다. 그러나 대신관은 이를 부득 물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못할 말이 없었다.
“너는……. 인간이 아냐! 인간이 느낄 고통과 네 고통을 동일 선에 두지 마라. 넌 괴물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신관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고래고래 외쳤다. 당장 목이 잘려 나갈 줄 알았으나 그를 듣는 화선의 반응이 기묘했다. 무감한 표정이, 순간 하나의 감정을 담아 냈다.
‘신아야! 다친 고통도 평범한 사람과 다르니?’
그의 귓가에, 엄하게 꾸짖던 스승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으니 말이다. 정인을 그리는 애달픈 애정이었다.
애정. 애정?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대신관은 그를 비웃었다.
“사람 흉내를……. 사람 흉내를 내는구나.”
피를 울컥거리는 대신관의 비꼼에도 화선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칼날을 들어 허공에 날을 세웠다.
“그래… 인애를 배웠거든. 그게 생을 탐하게 해.”
“하하! 저주받은 신 주제에! 산 제물인 주제에!”
그에 화선은 고개를 저었다.
“난 신이 아니야. 너희는 구원자를 신이라 부르니, 신이 있다면 그는 내 스승님이다.”
“그자는 아는가? 네가 이런 괴물이란 걸? 죽어도,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칼날을 올려 보던 시선이 대신관에 닿으니 그는 더 크게 발악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말을 듣느니 분노를 받아 내는 게 나았다. 죽지 않는 화선. 그딴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누가 너 같은 걸 사랑해. 하하, 누가! 헛꿈을 꾸며……!”
“그만.”
숨통을 조이는 위압감에 대신관은 히끅대며 딸꾹질했다. 화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걸었다. 바닥에 끌리는 칼날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날 사랑하심을 아는데도, 기분이 안 좋거든.”
걸음을 옮긴 화선은 대신관의 눈앞에 칼끝을 들이밀었다. 달빛을 등지고 선 사내에 대신관의 시야가 어둠으로 그늘졌다.
“저주받은 생! 버려진 절망에 허덕이며 혼자 남아 죽어 갈 거다! 괴물과 인간의 차이를 깨닫고 혼자 남아 절망할거다!”
죽음을 앞둔 대신관이 저주를 퍼부었으나 화선의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알아.”
칼끝을 비트니, 서슬 퍼런 날이 눈앞에 어른댔다.
“그래서 기다렸지.”
턱을 덜덜 떠는 대신관은 시선을 들어 올려 그를 보았다. 그늘진 얼굴은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내가 타고난 저주는 죽음이 아니야.”
그리 뱉는 화선의 몸이 차오르는 기에 일렁였다.
“신의 삶. 끝없이 태어나는 생, 그 무한한 허무지.”
그 기는 칼날로 뻗어 날 선 검을 옅은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그를 알아본 대신관이 동공을 떨며 칼끝을 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넘쳐흐르는 푸른 힘, 틀림없는 수선의 검기였다.
“내 저주는 누가 가져간다고 사라지지 않아. 난 저주에서 태어났으니까.”
화선이 몸을 틀어 허공에 검을 휘저었다. 그에 푸른 궤적이 달빛에 은은히 얽혀들었다.
“그런 날 주운 건 수선의 힘을 품은 인간이었다. 아주 아름답고, 찬란한 분이셨지. 신이 있다면, 그분이 틀림없어. 존재 하나로 내 삶을 보상받는 듯했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눈이 달빛에 그늘졌다.
“너, 무슨 짓을……! 이건 말도, 말도 안 되는…….”
일 년이나 이르게 성체가 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대신관은 상상치도 못한 상황에 절망했다. 애초에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만 수선의 힘을 품은 게 아니다. 입을 맞댄 건 둘이었으니. 화선의 기가 스민 인간은 화선의 힘을 품었고.”
화선은 칼날을 내려 보다 조용히 입을 얼었다. 화를 눌러 참는 듯한, 혀를 짓씹는 투였다.
“그렇게 수선이 된 인간에게, 화선의 저주가 옮았다.”
신아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무슨…….”
정인이란 게, 수선이었단 말인가. 아직 서쪽 땅의 연무제는 일 년이나 남은 줄 아는데도! 대신관은 탄식하며 눈을 흐렸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내 다정한 스승님은… 제자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분이다.”
불을 타고난 아이가 푸른 기를 두르고 눈을 감았다. 신아는 제 스승에게서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안식, 죽음을 빼앗았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그 선택은 바뀌지 않을 거다.
“내 스승님은 죽어도 태어나고, 또 태어날 거다. 앞으로 서쪽 땅의 수선은 영원히 바뀌지 않아.”
[나는 살고 싶어졌다.]
“너…… 일부러.”
살을 받기를 기다렸구나. 사랑하는 인간을 제 옆에 두기 위해 괴물로 만들었어! 모든 의문을 해결한 대신관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속였구나, 속였어…. 불쌍한 인간. 쓸데없이 연민을 베풀다, 저 괴물은 나락으로 끌어들이는 게 목적이었는데!”
“아아, 이전에 보낸 살은 당황스럽긴 했어. 너 때문에 다치셨으니 말이야.”
화선이 손을 들어 머리채를 휘어잡으니 대신관을 비명을 내질렀다. 그렇게 머리털이 뽑혀 나갈 듯 질질 끌려가 돌벽에 처박혔다.
“내 스승님은 죽음을 갈망하며 사셨다. 시선의 끝은 언제나 죽음이었지.”
나랑 같지 않은가, 중얼거리는 화선이 대신관의 머리를 쾅쾅대며 내리찍었다. 억센 힘에 대신관의 코뼈가 부러지고 광대가 내려앉았다.
잔혹한 광경이었으나 화선의 의식은 이곳에 없었다.
화선은 일전, 제가 저주에 헐떡일 때, 희미한 시야 너머로 서늘한 입을 맞추던 스승을 기억한다. 매번 불타 죽는 화선이었지만 몸이 타오르는 고통은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자초한 일임에도…….”
왜 이리 속이 뒤틀리는지. 스승의 손에 살아난 신아는 저주를 품고 나가는 스승을 붙잡지 못했다. 신아는 대신관의 머리를 내려찍던 손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끔찍하나, 기뻤다.
“제 손바닥 위에 올려 농락했으면서. 가냘픈 척하는구나, 그렇게 꾀어냈겠지. 그렇게 약한 척, 인간인 척!”
부러진 이를 뱉어내는 대신관이 흐려지는 발음으로 발악했다. 화선은 그 머리채를 잡은 채 허리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만큼 그를 위할 순 없어.”
온갖 눈물에 침, 피로 얼룩진 대신관은 덜덜거리는 턱으로 입술 물었다. 저를 보는 눈빛이 흉포한 광기로 젖어 숨통을 틀어쥐었다.
“스승님은 몰라도 돼. 그래도 괜찮아. 어찌 신의 뜻을 거부하겠어.”
“흐으……. 헉, 끄으!”
“스승님이 나를 미워하시면 나는 무릎 꿇어 빌 테다. 죽이고 싶어 하시면 기꺼이 목을 내드리지.”
“미쳤군, 미쳤….”
“하지만 살아 계셔야 해. 나만을 증오하고 나만을 경멸하며.”
살기로 일렁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나만 사랑하셔야지…….”
버려진 짐승과도 같은 모습에 대신관이 눈을 찡그렸다.
“네가 하는 건, 사랑이 아니야…. 그저 흉포한 집착이며 더러워진……!”
“사랑이 뭔데?”
딱딱하게 굳은 화선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사랑이 뭐야? 죽음을 포기하고도 매달리는 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냔 말이야.”
복부를 걷어차는 발길질에 대신관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내장이 터졌는지, 뼈가 부러졌는지, 극심한 고통에 죽지 않는 게 이상했다.
“윽, 억!”
“나는 그 혼마저도 사랑해. 인간의 생 같은 건 몰라. 다음 생이 있을지,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지 말이야.”
화선은 발길질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흐, 흐으…….”
“뭐가 됐건, 스승님께 내가 없을 미래는 없어.”
“인간의 껍데기를 쓴 널 사랑할 자가 있을까? 아니, 아니!”
만신창이로 일그러진 대신관은 사람 꼴로 보이지 않았다.
“내 스승님은 나를 위해 신의 길을 택했다. 죽기보다 살기를 택했어.”
“과연, 그럴까……. 하하! 알고도, 알고도 택했을까?”
그 물음에 화선이 멈칫거렸다. 그러곤 시선을 들어 하늘의 문을 보았다.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보름달이 들어차 있었다.
“…내 스승님은.”
알아도 그리하셨을 테다, 신아는 눈을 흐렸다. 왜 제게 말하지 않았느냐며, 그 외로운 삶 얼마나 고통스러웠냐며 기꺼이 불타셨을 테다. 저보다도 제 삶을 헤아리며, 함께해 주겠다고 찡그리듯 웃어 주셨겠지.
그러나, 지독히도 다정한 스승님이 그러지 않길 바랐다. 그 어떤 생명체보다 고고하신 내 스승님. 제가 더럽히고, 오로지 제가 망쳐 놓았다. 그게 옳았고, 그게 좋았다.
억겁의 생애에, 스승님이 제 선택을 후회할 날이 온다면 말이다. 그때엔 괴물에게 속아 넘어갔다며 저를 원망하길 바랐다. 그렇게 탓할 일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저를 안아 주던 순간만큼은 부정하지 않아야 하니까. 어리석게도 속아,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이다.
대신관은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굳게 닫힌 신전 문을 보았다. 문 사이로 흘러내린 신관들의 피가 어느새 제 앞까지 고여 있었다.
“예언이 맞았다, 경고가…… 불이…….”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절망했다. 그에 화선이 그를 돌아보았다.
“더 하면 죽을까?”
“그냥, 죽여라…….”
화선은 그런 대신관을 비웃었다. 고통에 떠는 생을 잇는 공포를 아는 화선이 그에게 죽음을 베풀 일은 없다.
“죽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지금의 네 위치를 잊지 말라는 거다. 죽기 직전에 의술사를 불러 줄 테니 말이야.”
“으으……. 끄으흑, 으흐……!”
“넌 살아서 즉위식을 진행해야지.”
죽음보다도 끔찍한 삶이다. 대신관은 이제는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떨며 분노했다.
“왕이 되고 싶더냐? 그래서 이래! 너를 짓누르고 부수던 자들이 죽이고 싶어졌느냔 말이야! 인애는 다 핑계고……!”
화선은 그를 깔아보며 턱을 들었다.
“왕좌엔 다른 이가 오를 거다. 곧 반란군이 성벽을 넘겠지.”
“…….”
“화선의 가호 아래 가장 강력한 왕권이 내린 역사다. 이제 반란 따위 일어나지 않아. 화선이 보호하는 나라, 왕위는 세습될 거다.”
화선이 군림하는 나라라니. 대신관은 절망에 빠져 허우적댔다. 찢기고 터진 목구멍에선 괴이한 소리가 났다.
“화국은 불바다가 될 거야…….”
“아아….”
경고를 아는 화선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눈 똑바로 뜨고 보렴. 물바다가 될 화국을. 아, 눈이 없으니 보지 못하겠구나.”
화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눈을 베어 냈다. 온몸이 찢기듯 뜯어진 대신관은 그렇게 울부짖었다.
“네가 내 스승님을 보고 이래서 살고 싶어졌구나, 하고 깨달을 것이 달갑지 않아 말이야.”
대신관은 너덜너덜해진 손가락으로 제 감은 눈을 덮고 흐느꼈다.
“흐으, 으으…. 끅, 으흑아아……!”
“……왜 스승님은 모두에게 아름다울까.”
절절한 탄식 앞에 두 눈을 잃은 대신관이 정신을 잃고 혼절했다. 동쪽 땅의 왕이, 조카딸이 이끄는 반란군에 목숨을 잃은 날이었다.
* * *
화선, 신이 되지 못한 아이는 고통 속에 살고, 죽음 위를 걸었다. 제 목을 틀어쥐는 인간들에 시야가 막혀 미래를 꿈꾸지 못했다. 오직 온전한 죽음만을 갈망하며, 사를 좇으며 살았다.
불타는 죽음을 앞둔 생이란 그다지도 끔찍한 것이었다.
그 지겹도록 타오르는 삶에 물을 부어 준 자가 있었다. 차갑게 식은 아이는 곧장 품에 안겨 온기를 받았다. 뜨겁지 않고 따뜻한 온도. 그런 건 처음이었다.
아이는 타오르지 않는 삶을 깨달았다.
사랑을 깨달은 불은 살아남기로 했다. 생이 이토록 간절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랑받고 싶었고, 후에는 독차지하고 싶었다. 그렇게 살갗이 맞닿으니, 결국 크게 뉘우쳤다.
불은 하나의 생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영원을 꿈꿨다. 눈에선 눈물이, 입에선 웃음이 새었다.
저주와 같은 신의 삶에, 제 죽음보다 소중한 이를 끌어들였다.
피로 얼룩진 정전에 화선이 일어서니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었다.
[숨어 사는 자여, 내가 너의 권능이 될지니. 세 번째 해가 떠오르는 날, 왕의 목을 하늘에 바쳐라.]
사내를 앞세워 반란을 꾀하던 초선은 그 쪽지에 제 욕망을 인정했다. 가면을 벗고, 직접 화국의 왕좌에 앉았다. 개미들의 수장인 초선은 폭군의 목을 베어 냈다. 제 손으로 살린 아이, 그가 제게 기회를 준다. 초선은 무릎을 꿇어앉아 그 앞에 왕의 목을 바쳤다.
분란이 끊이질 않던 동쪽 땅에 화선이 인정한 최초의 여인이자 왕이 섰다. 초선이었다.
서쪽 땅에 누를 범한 화국은 선왕의 죄를 인정하고 그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식량과 옷감을 조공하고 꾸준히 안부를 물어 왔다.
더 나아가선, 먼저 나서 속국이 되기를 청하니, 수산의 결계가 무의미해지는 날이 오게 되었다.
온 대륙에 평화가 도래한 지 십 년이 되던 때, 수산에 잠든 수선이 눈을 떴다. 신의 대리인이 아닌, 그야말로 신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