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씨
해뜨기 전 새벽 어스름, 물의 일족의 영산인 수산에는 골짜기마다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수는 일찍이 무복을 차려입고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현수 어른의 방 호롱불이 꺼진 뒤에야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장성한 성인이라면 혼자 눕는 것이 고작일 정도로 작은 방. 창호지 한 겹만 발려 뜯어질 듯 너덜거리는 문은 문고리를 잡는 것만으로도 시끄러운 금속음을 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기름을 먹인 듯 부드럽게 움직여 수의 외출을 도왔다.
물의 일족의 후손이라기엔 그 능력이 너무나 하잘것없어 제자조차 두지 않는 수련자, 수.
다른 수련자들은 일족의 이름에 먹칠을 한다며 수를 부끄러워했고, 수련자들의 제자들조차도 수를 수련자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모두 그가 밤 일탈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는 마을 어귀를 등지고 걸어 산골짜기 수목에 이르렀다. 익숙한 듯 몸에 두른 검은 망토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숨통이 트인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다시 뜬 눈 속 동공이 옅게 스며오는 달빛에 검게 반짝였다. 수는 팔을 들어 어깨를 통통거리다 이윽고 자세를 낮추어 뻗은 발에 무게를 실었다. 십 리나 되는 높이의 나무였지만 단숨에 날아오를 생각이었다.
‘수는 도약도 제대로 못 하지 않습니까! 어찌 이런 자에게 사부님이라 부르라 하십니까!’
가의 제자 중 한 명인 슬선이 어제 제게 소리치던 말이 생생했다. 수는 짓궂은 미소를 걸며 눈썹을 찌푸렸다. 유과를 입에 넣어 주면 울음을 그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수는 가 사형께 혼나 부엌 아궁이 옆에 숨어 울던 슬선에게 유과를 주던 때를 떠올렸다.
‘어찌 이런 맛을!’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저를 올려 보던 슬선이었다. 그 동그란 눈이 생각나 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슬선이 들으면 기겁하고 부정하겠지만 그때엔 저를 사형보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수는 발끝에 기를 실어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 힘에 숲이 작게 술렁였다.
발을 나무에 꽂으며 도약하니 꼭대기 위로 튀어 오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높게 자라 우거진 나무 사이에서도 가장 높은 수목 꼭대기에 섰으니 수산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산을 덮은 새벽안개 사이로 햇빛이 번져 붉게 일렁였다. 산골짜기를 가르고 동이 트고 있었다.
수는 자세를 바로 해 튼튼한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아 앉았다. 수산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수산의 영험한 맥이 흐른다는 수목이었다. 신성한 나무를 밟으며 놀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작디작은 처소마저 회수당하겠지만, 물의 일족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수에게 관심을 보일 자는 없었다.
한 폭의 수묵화나 다름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풍광이었으나 수는 익숙한 듯 덤덤한 낯이었다. 어린아이라면 성별을 착각할 정도로 수려한 외모가 떠오르는 태양 빛에 반짝였다.
수, 물의 일족에서 수선의 후보자로서 수련자의 지위에 있으나 도약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제자를 한 명도 두지 못한 수련자. 그리고.
“제자 한 명 정도는….”
아무도 모르는 선대 수선의 유일한 아들. 그는 수선의 능력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유일한 존재였다.
“…외로운가.”
가라앉은 낯으로 고개를 떨구니 아득한 지상이 발밑에 아른댔다.
도약, 검기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라면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열두 살에는 무인이라면 응당 다루어야 할 모든 기본기를 갖추었다. 아직 최고 어른인 우현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를 제외하고 수를 이길 수 있는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야말로 수선의 적통이었으며 가보다 앞선 유력한 수선 후보였다.
그러나 한 번도 제 능력을 남들 앞에 펼쳐 보인 적이 없었다. 물론 선대 수선에게 자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었다. 그러니 모두가 그를 수련원 제일가는 무능한 수련자로 여겼다.
수산의 연무제, 모두에게 축제인 날이었으나 수에겐 아비의 기일이자, 어미의 기일이기도 했다. 아비는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였고 어미는 아들을 벼랑 끝에 던져 죽이려다 실패했다. 수는 저를 한 번도 품어 주지 않았던 어미가 저를 벼랑에 던지기 위해 안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증오스러운 물의 아이! 너만 없었어도 나는 이리 살지 않았어! 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그러니 매해 돌아오는 이 축제날에, 익숙한 듯 귓가에 반복되는 고함 소리를 벗 삼아 수목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제는 익숙한 허무였다.
본디 신의 사자인 수선은 혼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 부모는, 신의 사자와 인간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애당초 수선은 인간에게서 아득히 먼 존재이나, 아비가 수선이 되기 이전 둘의 관계가 본디 기묘했으며 어미가 대신전의 신관으로 들어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둘은 일족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 그 사이에서 아이가 생겨났다.
어미의 배가 부를수록 아비는 생명을 빼앗겨 바싹 말라 갔다. 감히 수선이 인간과 사랑을 나누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라 가는 정인의 몰골은 어미의 마음을 후벼 팠을 테다. 신의 사자인 수선이 하루가 다르게 바싹 말라 가니 일족의 분위기도 무너져 내렸다.
한창 불의 일족과 주도권 싸움을 하던 때이니 더 그러했다. 아비는 수선으로서의 능력도, 인간으로서의 생명도 잃어 갔고 신의 사자를 잃은 수산 또한 말라 가기 시작했다. 선대 수선은 신전의 뒤편에서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했다. 수는 그렇게 태어났다. 아무도 모르는, 선대 수선의 생명을 빨아먹고 태어난 수선의 후계였다.
본래 수선이 죽으면 그 해, 그 달 수도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수련자로서 이름을 올린다. 열 살 때부터는 모여 수련원 생활을 하며, 스물세 살이 되는 해에 연무제에서 가장 뛰어난 수련자가 신의 선택을 받는다. 자격을 갖춘 수는 수련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고 어미는 그를 막지 못했다. 허나 수련원에 들어가기 전, 수는 열 살 때까지 저를 증오하는 어미의 밑에서 자랐다.
어미가 자식 만지기를 거부하니 갓난아이 시절엔 보모의 품에 안겨 젖을 뗐다. 그마저도 아이 우는 소리가 돌담을 넘자 지나가던 거지가 품삯을 목적으로 오지랖을 피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꺼질 것 같은 여인은 보모를 자처하는 거지에게 맘대로 하라며 손을 휘저었다.
안타깝게도, 돈이 목적이었던 거지가 아이에게 훌륭한 보모가 되진 못하였다. 제가 맡은 아이가 버려진 것과 다름없음을 깨달은 거지는 주인의 눈을 피해 애인을 끌어들여 놀기를 즐겼다. 그를 알게 되던 날, 여인은 날이 부러진 칼을 뽑아다 두 남녀를 죽이려 들었다.
광인이 사는 집. 이후엔 그 누구도 산골 깊숙이 처박힌 집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러니 수가 어미의 낯을 온전히 마주한 것도 세 살이 된 이후의 일이었다.
여인이 자식에게 품은 첫 감정은 허무였으나, 아이가 건강히 자랄수록 속에선 증오가 자랐다. 그러니 밥에 독을 치기도 하고 신에 독 바른 칼날을 박아 두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어미가 세상의 전부였던 어린 수는 그조차도 어미의 관심이라 여겼다. 하여 저를 향한 살의를 모른 척하고 증오를 받아 냈다.
독 내가 진동하는 밥을 먹고 저녁에 피를 토해 냈으며 신 속에 반짝이는 날을 뻔히 보고도 발을 넣어 피에 절은 덧신을 어미가 잘 볼 수 있게 가지런히 문가에 두었다. 어미가 제 피를 보고 조금은 통쾌해하기를 바라였으나, 그녀는 쉽게 죽지 않는 아들을 보고 더욱 절망할 뿐이었다.
어미는 점점 살의를 숨길 의지조차 잃은 채 수를 대했다. 수련을 핑계로 손잡이가 없는 칼을 내밀며 칼집에서 빼내라 했다. 그렇게 손잡이가 없는 칼을 쥐었고 독이 묻은 칼날이 박힌 신을 신고 검술을 배웠다.
수는 손잡이가 없는 검을 쥐거든 손에 힘을 주어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도록 했다. 나무를 상대로 한 연습이었으나 수련이 끝나고 나면 모래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피에 모래가 질어질 정도가 되어서야 수련은 끝이 났다. 오늘 밤에는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 낯이 환하게 틔었다.
수는 그렇게라도 어미가 기뻐하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는 않았다. 제 목숨은 아비에게서 온 것이니 정말 죽어 버린다면 어미가 슬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늦은 밤 수를 보듬어 준 것은 크고 작은 동물들이었다. 수산의 기운을 타고난 아이는 여러 산짐승의 사랑을 받았고 수가 유독 피를 흘리고 들어온 날이면 문틈 사이와 창문 너머로 참새, 토끼, 여우, 사슴 등이 넘어와 차게 식어 가는 몸을 덥혔다. 수산 영물들의 가호를 받는 아이는 쉽게 죽지 않았다.
수가 수련자로서 입단하기 위해 출가해야 할 날이자, 정인의 기일 날 새벽. 어미는 손발이 너덜너덜해진 아들을 찾아가 그를 안아 들었다. 집을 나서기 위해 단장하던 아이는 처음 느끼는 어미의 품에 영문 모른 채 안겨 몸을 굳혔다. 꿈인 듯싶기도 했고, 제가 움직이면 꿈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그만 떠나야 한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못했다.
수련자가 출가 날에 등단하지 않는 것은 중죄였다. 그러나 어미는 수를 안아 기어이 마을을 벗어났다.
어미가 험한 산길로 방향을 틀어 오르기 시작하자 불길함을 감지한 동물들이 그 주변에 따라붙었다. 수가 인상을 찌푸려 그들을 몰아내고자 했으나 크고 작은 산짐승들은 적정 거리를 유지한 채 멀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어미는 절벽 끝에 서서 수를 내려 두었다. 아름답던 여인은 볼과 눈가가 깊게 파이고 입가가 말려 들어가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수야, 그냥… 죽자, 우리……. 수선의 인생은 괴롭단다.’
수는 입을 움찔댔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수선의 인생이 괴롭다면 제가 죽으면 되지, 어찌 어머니께서도 죽으려 하시느냐 묻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았다. 어미의 등 너머로 산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애써 무시했다.
‘미안…. 그동안 고마웠어.’
속으로 감사를 전하자 으르렁대던 소리는 금세 낑낑대는 소리로 바뀌었다. 저를 챙겨 준 짐승들의 소리에 괜스레 서러워진 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미는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수를 들어 올렸다. 수의 눈가는 젖어 있었으나 어미의 눈은 죽은 것처럼 건조했다. 수련원에 입단해야 하는 날, 그날의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어미는 마른 낯으로 수를 들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벼랑 아래로 던졌다. 수는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이 무슨 짓이오, 선하!’
수는 끝없는 허공을 가르다 바위에 부딪혀 자신의 몸이 조각 날 것을 예상했으나, 우레와 같은 호통 아래 알 수 없는 힘에 끌려가 바닥을 굴렀다. 눈을 뜨자 어미는 잔뜩 화가 난 남자의 손아귀에 목덜미가 잡혀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어미를 저지한 남자는 현수 어른이었다.
‘증오스러운 물의 아이! 너만 없었어도 나는 이리 살지 않았어! 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에!’
아들이 살아서 흙바닥을 뒹구니 어미의 몰아치는 증오가 수를 덮쳤다. 수는 바닥에 처박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눈에선 눈물이 흐르나, 슬퍼서 흐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수선이 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악을 쓰며 소리치는 어미의 입에선 피가 터져 나왔다. 수는 제 피가 아닌 남의 피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바로 어미의 피였다. 수는 급격하게 이는 현기증에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저를 책망하는 어미의 목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지며 머리를 울려 댔다.
그렇게 그날의 기억은 끝이 났다. 수가 푹신한 침구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어미는 이미 죽고 없었다. 아들에게 매번 먹였던 독약을 스스로 삼킨 어미의 말로였다.
수는 제 부모가 왜 저를 낳았는지. 어째서 아비가 말라 죽는 과정 속에서도 유산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는지. 그렇게나 혐오하면서 어찌 태어난 아이를 곧장 죽이지 않았는지. 성인이 된 열여덟 이때까지 알지 못했다. 그 물음에 답해 줄 수 있는 존재는 모두 죽어 제 옆에 없었다.
이후 수련원에 들어 죽은 듯 살던 수는 모든 기를 깨우친 열두 살 때 수산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수선의 힘을 타고난 아이는 물의 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린 수는 절망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러니 버티기로 했다. 스물셋까지만, 그때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수선에 오르면 이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처음 수목에 올랐던 열두 살 수는 지금과 같은 풍경을 내려 보며 각오를 굳혔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앞으로 오 년 뒤, 모든 수련자가 스물세 살이 되는 해에 열리는 연무에 나서지 않는다면 다른 이가 수선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올해까지도 무탈했으니 지금까지는 잘 해 온 셈이었다. 수련자 중 그 누구도 수를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으니 말이다. 연무에 나서지 못할 정도로 약한 수련자는 역사 속으로 사라짐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는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보다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미묘하게 흐트러진 낯을 감추려 작게 눈을 찌푸렸다. 매번 옅은 미소를 올린 낯의 수련자였으나 우습게도 오늘만큼은 표정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가 울적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자 따뜻한 털 짐승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목을 간지럽히는 감촉에 시선을 내린 수는 눈썹을 들어 웃었다.
“…언제 따라왔어?”
목을 감싼 털에 고개를 파묻어 비볐다. 털을 내준 백여우가 꼬리를 살랑였다. 우울한 기운이 조금 걷히자 검은 망토의 모자 부분에 숨어 따라온 참새도 고개를 내밀었다.
“너도 왔구나. 위험하게. 앞으론 그러지 마.”
손가락을 들어 제법 타이르듯 목소리를 내었으나 기분이 제법 풀린 걸 아는지 참새가 그의 정수리 위로 날아올라 짹짹댔다. 수가 옅게 웃자 이번엔 작은 뱀이 팔을 타고 올랐다.
“하하…. 미안해. 이제 괜찮아.”
손끝으로 뱀의 머리를 간질이자 뱀이 손가락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수는 코를 찡그렸다. 날이 환하게 밝아 오고 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제자가 한 명도 없는 수련자는 홀로 앉아 자리를 지켜야 했다.
“새삼스럽게, 그치?”
수는 제 목을 감싼 여우를 품에 안아 들고 참새를 손에 가볍게 쥐었다. 뱀은 주머니에 넣은 다음 지상으로 뛰어내렸다. 나무 기둥을 콱콱 밟으며 내려가 흙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수는 제 곁에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는 동물들을 놓아주고 흐트러진 망토를 다시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어딜 갔다 오느냐?’
눈을 좁혀 저를 훑을 현수 어른이 떠올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방향을 틀어 숲을 나서려는데 저 멀리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수는 걸음을 멈추고 망토를 조금 젖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두루미 한마리가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웬 두루미?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두루미의 입에 물린 바구니가 보였다. 꽤 큰 바구니였다.
“하하, 살다 살다 두루미가 바구니를 물고 오는구나.”
애라도 물고 오는 건지. 실없는 농담을 하며 제게 날아오는 두루미를 기다려 주었다.
“조금… 천천히 와야 하지 않아?”
가만히 서 있던 수는 난감해져 주위를 살폈다. 분명 저를 향해 날아드는 것이 분명한데, 커다란 두루미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빠르게 돌진했다. 그대로 서 있으면 맞부딪혀 숲을 뒹굴 것 같았다. 수는 잠시 고민하다 자세를 낮추어 두루미를 잡아챌 준비를 했다.
빠른 속도로 날아들던 두루미는 수 지척에서 크게 날갯짓하여 속도를 늦추었다. 수는 두루미를 올려 보다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눈을 깜빡였다. 바구니?
“윽.”
갑자기 제 위로 던져지는 바구니에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를 받아 냈다. 받아 든 바구니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묵직했다. 어안이 벙벙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개를 들었으나, 두루미는 곧장 길을 틀어 멀어지고 있었다.
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사라지는 두루미를 바라보았다.
“알은… 아니지?”
정신을 차리곤 고개 숙여 바구니 안을 보았다. 꽤 비싸 보이는 비단 보자기가 덮여 있어 무엇이 들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알을 주고 간다고 제가 키울 형편이 되진 않는데, 수는 난감해하며 보자기를 걷었다.
“…….”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확인하자 그대로 굳어 눈을 깜빡였다. 바구니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식은땀을 흘리는 채였다. 갓난아기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 큰 아이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얼굴에 생채기가 잔뜩 나 추운 듯 몸을 웅크려 새된 신음을 뱉고 있었다.
아. 수는 가라앉은 낯으로 바구니를 훑어보았다. 보자기 안에는 불의 일족의 증표가 그려진 손목대가 놓여 있었다. 불의 일족의 아이가 물의 일족의 땅에 있다는 건 두말할 것 없이 버려졌다는 증거였다. 본래 외부인이라면 산의 결계를 넘지 못해 민가로 넘어오지 못할 텐데, 이 아이는 운이 좋았다.
바구니를 땅에 내려 두고 아이의 뺨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얹었다. 열이 잔뜩 오른 뺨에 서늘한 손가락이 닿자 잔뜩 구겨진 아이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에 수의 표정도 경계 없이 허물어졌다.
두 일족의 사이가 살얼음판인 지금, 물의 일족이 불의 일족의 아이를 받아 줄 리는 없었다. 수는 생각에 잠겨 시선을 내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바구니 안에 놓인 손목대를 꺼내었다. 그러곤 기를 흘려 불의 일족의 각인이 새겨진 금속을 산산조각 내어 숲에 뿌렸다. 바구니를 덮고 있던 보자기는 거두고 제가 입고 있던 검은 망토를 벗었다.
벗은 망토를 조심스레 덮어 주자 식은땀을 흘리던 아이는 힘겹게 눈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희망이 꺼진 새까만 눈망울에 수는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다정한 손길이 뺨에 닿자 가쁜 숨을 내쉬던 아이는 차츰 다시 눈을 감았다.
“…나랑 같이 가자.”
다시금 검은 망토를 덮어 아이가 춥지 않도록 꼼꼼히 감싸 주었다.
“마침 내 제자 자리가 비었어.”
큰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어 올렸다.
“걱정 마. 너는 내가 지킬 수 있단다.”
수는 제가 낼 수 있는 목소리 중 가장 다정한 소리를 내었다.
* * *
수련자의 거처 중 가장 끝에 위치한 허름한 방 하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주인을 제외하곤 찾지 않는 곳. 그런 곳이 오늘은 모여드는 아이들의 발소리로 소란스러웠다.
알록달록한 색동저고리를 갖추어 입은 아이들은 다 뜯어진 창호지 너머로 방 내부를 훔쳐보느라 서로의 발을 밟으며 옥신각신했다.
“쟤야? 뭐야. 무슨 거지를 주워 왔어.”
“몰라 그러니까 수 제자겠지.”
“수 사부님 이 멍청아.”
“너나 그렇게 불러. 우리 스승님은 아무 신경 안 쓰시거든?”
“좀 비켜 봐! 안 보여.”
“얼굴이 왜 저렇게 너덜너덜해?”
“그러게. 약 발라 줘야겠다.”
“미쳤냐? 우리가 약을 왜… 악!”
뒷짐 지고 선 수가 아이들 사이에 끼어 웃자 아이들은 귀신을 본 듯 문에서 흩어져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수 사부님을 뵙습니다…….”
아이들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살폈다. 수는 그 광경에 부채를 펼쳐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중에서도 최근 수를 향해 사부님이란 호칭을 생략해 가에게 혼난 슬선이 유독 바들바들 떠는 것이 보였다.
“동무들이 일찍이 찾아와 반겨 주니 내 제자가 분명 기뻐하겠구나.”
“예에…….”
제자래, 진짜 제자로 들이는 애인가 봐. 아이들을 고개를 조아린 채 서로 속삭였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칠푼이 팔푼이가 제자를 들이다니. 혼날까 걱정하던 아이들의 눈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이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청의 제자인 도아였다.
“민가에 내려가 직접 데려오셨습니까?”
용기 내어 질문한 도아에게 아이들의 존경 어린 시선이 따랐다. 수는 난이 그려진 부채를 팔락거리며 대답할까 말까 고민하는 체를 했다.
“흠…. 이건 비밀인데.”
뒷짐 진 채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자 아이들을 그 뒷말을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수는 아이들의 인내를 느긋이 즐기다 제자리에 멈추어 서 부채를 소리 나게 접었다. 짓궂은 낯이었다.
“내가 낳았다.”
“예?”
고개를 조아리던 여섯 명의 아이들이 전부 고개를 쳐들고 수를 보았다.
“수련자의 몸으로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혼인한 것은 아니니 말이야.”
“짝이 없는데 어찌 아이를 낳는단 말입니까?”
“내 자식이 아니고 제자를 낳은 것이니 혼자라도 괜찮다.”
“아…….”
아이들은 깨달음을 얻은 듯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자리에 우뚝 서서 엄한 표정을 꾸며내곤 아이들을 내려 보았다.
“아이가 어찌 온다 배웠느냐?”
아이들이 우물쭈물하자 슬선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발 제가 맞힐 기회를 달라는 듯이 간절하게 팔을 흔드는 모습에 수가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누르고 대답하라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간의 정이 돈독하여 간절히 바라면 황학이 물어다 준다 했습니다!”
“옳지.”
부채를 손바닥에 내려치며 고개를 끄덕이니 아이들 또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제자도 황학이 물어다 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럼 갓난아이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의 제자인 지우가 질문을 더 했다.
“영특한 질문이구나.”
그 질문을 칭찬하자 아이는 뿌듯해서 올라가는 입꼬리를 겨우 단속해 내렸다.
“수련자의 제자가 될 몸이니 갓난아이면 안 되지 않겠어. 내가 너희 또래로 내려 줄 것을 빌었다.”
“아아…….”
아이들은 이 또한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는 아이들의 순수함에 기분 좋게 웃었다. 장난은 이쯤으로 끝내고, 곧 연무가 시작될 테니 그만 아이들을 보내야 했다.
“그나저나 곧 연무가 시작될 시각 아니냐. 현수 어른께서 나서는 것을 보고 나왔거늘. 어찌 다들 여기 있어.”
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자 아이들을 혼비백산하여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어서 가 보아.”
“예…!”
아이들은 작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뛰쳐나갔다. 일 년 중 가장 큰 행사를 벌이는 오늘,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저들 스승에게 큰 벌을 받을 터였다. 수는 너 나 할 것 없이 뛰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멀어지는 등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시선을 돌려 제 처소를 보았다. 그 안에서 겨우 잠들어 있을 아이가 떠오르니 옅게 웃던 수의 낯이 차분해졌다.
오늘 아침, 수련원에 돌아오기 무섭게 아이를 방에 눕히고 현수 어른을 찾아갔다. 그러곤 이제는 제자를 들이고 싶다 고개 숙였다. 어른께선 처음엔 반기는 듯 보이셨으나, 부모에게 버림받아 산 속에서 다 죽어 가던 아이를 데려왔다 하니 곧장 눈을 구기셨다. 데려온 이의 처지가 제 어린 시절과 비슷하니, 동정이라 여기신 모양이었다.
회상하던 수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막상 다 죽어 가는 아이를 목도하니 별수 없다는 듯 치료를 도와주신 분이었다. 그는 곧 제자로 들여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았다. 그런 어른의 아량에 감사하며, 수는 아이들이 쓸고 간 자리를 걸어 조용히 처소 문을 열었다.
오늘 아침나절만 해도 새하얗게 질려 있던 아이는 현수 어른이 열을 거둬 주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수는 솜이 다 터진 얇은 방석을 하나 꺼내어 푹신한 침구 위에 누운 아이 옆에 앉았다. 두꺼운 침구는 현수 어른의 것으로, 아픈 아이에게 덮이기 위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얻어낸 것이었다.
아이의 눈에 박힌 속눈썹은 어찌나 길고 촘촘한지 그 아래에 그늘이 져 있었다. 아파서 희게 질린 줄 알았던 얼굴은 혈색이 돌아오고도 새하얀 것이,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한 듯했다.
수는 품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단지를 꺼내어 뚜껑을 열었다. 안에 든 불투명한 초록빛의 연고를 손등에 덜어 아이의 생채기 난 얼굴에 펴 발랐다.
가만 보자면 얼굴에만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의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와 푸른 멍 자국이 이곳저곳 가득했다. 특히나 손목에 있는 멍 자국은 손목을 강하게 틀어 밧줄로 묶었던 흔적 같았다.
“…….”
쓸개를 입에 문 듯 입 안이 씁쓸했다. 수는 만지면 깨어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얼굴에 연고를 발랐다. 문득 바르던 일을 멈추었다가, 조용히 연고가 든 단지를 바닥에 내려 두었다.
“깨어난 것을 안다. 눈을 뜨렴.”
그래도 괜찮아, 다정하게 속삭이자 아이의 손가락이 움찔댔다.
“곧 옷을 벗길 텐데, 싫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단다. 원래 제 몸의 상처는 보여 주기 싫은 법이지.”
덤덤한 목소리에 아이는 천천히 감은 눈을 들어 올렸다. 두 검은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했다.
“…참 예쁘게도 생겼다.”
수는 눈을 접어 웃었다. 저를 보며 웃는 모습에 아이는 고개를 틀어 그 시선을 피했다.
“하하 부끄러운 건 아니지?”
수는 눈썹을 찌푸리곤 부러 짓궂은 말을 건넸다. 아이가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며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 등을 받쳐 도와주었다.
“몸은 어때?”
온화한 물음이었으나 아이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어려운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나 답을 기다리듯 조용하니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행동에 수가 옅게 웃었다.
“말은 배웠고?”
이불을 쥔 작은 손이 꼼질댔다.
“예….”
“옳지, 목소리도 곱구나.”
아이는 낯부끄러운 말에 시선을 내리다 못해 고개를 떨구었다. 수는 그런 반응이 귀여워 머리를 쓸어주고자 손을 올렸다. 그러나 손을 올림과 동시에 아이가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리니 올리던 손을 거두었다. 이 작은 몸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속으로 혀를 찼다.
학대받은 게 분명했다. 수는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었던 손을 틀어 아이의 시선이 닿을 바닥에 내렸다. 그런 다음 탁탁 소리가 나도록 두드렸다.
“이곳은 물의 일족의 땅이다.”
그 말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전과는 달리 빠른 반응에 수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면 당황할 테니, 어찌 놀려 주면 좋을까 짓궂은 계획을 세운 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마주한 아이의 표정은 의연해 보였다. 죽음을 예감한 표정이었다. 그러한 반응에 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너는 죽지 않아.”
어찌 자기 죽음을 예감하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이의 모습이 제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이라면 조금 더 어리광 부리고 떼쓰고 울어도 괜찮은 것인데. 아이가 겁을 먹을까 봐 수는 애써 제 굳은 표정을 풀었다.
“…나랑 같이 사는 건 어때?”
아이가 놀란 듯 눈을 뜨자 수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아이의 동공은 혼란스러운 듯 여섯 갈래로 흔들렸다.
“왜….”
“내 이름은 수다. 너는?”
수는 아이의 질문을 제 질문으로 막았다. 아이는 갑작스런 질문에 손을 움찔댔다. 한참을 망설이다, 저를 빤히 내려 보는 시선에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말하기 난감한 듯 눈썹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없는.”
“…응?”
“이름이 없는데…….”
수는 그 대답에 또다시 얼굴을 와작 구겼다. 이름도 안 붙여 줬단 말이야?
“이런 썩을…….”
“예?”
“아니, 아니야.”
손을 휘저으며 표정을 관리했다. 학대받은 아이 앞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다. 그러니 목을 큼큼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새벽 동틀 무렵에 만났단다. 그러니 이름에 신 자를 쓰면 어떨까 하는데, 다른 한 자는 네가 지어 보겠어?”
수의 권유에, 아이는 다시금 고개를 떨어트렸다. 수는 그런 아이를 품에 안아 토닥이고 싶었다. 그러나 낯선 환경에 당황했을 테니, 인내심 있게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아이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위태로운 시선에 수가 알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혹시 한자를 잘 모르….”
“아 자를… 예…….”
수는 아이의 대답에 반가워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아?
“아이 아(兒) 자를 말하느냐? 그건 좀 그렇지 않겠어? 너는 클 텐데…. 아, 맑을 아(雅)인가. 그건 잘 어울리는구나. 아니, 산에서 만났으니 언덕 아(阿) 자를 말하는…….”
“…아뇨.”
아이는 목소리를 내어 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럼?”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아이는 시선을 피했다. 수는 쉬이 대답하지 않는 아이를 보며 어리둥절해하다가 손을 펼쳐 아이에게 내밀었다.
“내 손에 무슨 아 자인지 써 주면 둘을 조합해 이름을 만들자.”
아이는 작은 뒤통수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작은 손끝을 세워 수의 손바닥 위에 한자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꼼질대는 몸짓에 수가 웃음을 흘렸다. 다정히 그를 내려 보던 수는 아이가 무슨 한자를 쓰고 있는지 깨닫고 눈을 깜빡였다. 이내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그마한 아이를 와락 껴안았다.
“…그래, 네 이름은 신아로 하자.”
수는 아까 쓰다듬지 못했던 신아의 작은 머리통을 힘껏 끌어안았다. 신아, 예쁠 아(娥) 자를 쓰는 새벽의 아이.
신아는 제 몸보다 훨씬 큰 수의 품에 갇혀 순간 긴장하였으나 자신을 도닥이는 따뜻한 손에 이윽고 몸을 기대었다.
“나는 이곳에서 약하고 무시받는 수련자지만 너 하나는 목숨 걸고 지키마.”
수는 신아가 고개를 저으려 드는 것이 느껴져 그의 머리를 더욱 꽉 안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어릴 적 제가 부모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속삭여 주었다.
“…괜찮아. 내가 너를 데려오지 않았니. 나는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거란다.”
수는 신아를 제 품에서 놓아주고 고개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너는 수산에서 태어나 내 제자로 들어온 거야. 그렇지?”
수에게 아이의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곳이 수산임을 아는 동시에 곧바로 죽음을 떠올렸다. 그런 인생을 산 아이라면 더욱이 과거가 필요치 않았다. 그런 아이이니 더더욱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족이 없다. 평생을 외롭게 살았어.”
그 말에 신아가 또렷이 시선을 부딪쳤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부모가 있는 집을 찾아 양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현수 어른을 만나 아이를 제 제자로 들이겠노라 말을 끝내 놓은 상태였지만 아이가 원한다면 언제든 말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아는 부모를 구해다 줄 수 있다는 말에 표정을 굳혔다.
저를 주워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몸에 약을 발라 주는 이였다. 아무도 자신을 이리 따뜻하게,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았었는데. 신아는 저를 거둬 준 수가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그런 수가 자신을 다시 버릴까 봐 다급하게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책임을.”
소매를 잡은 작은 손이 긴장에 부들부들 떨렸다.
“지겠다고….”
신아는 제가 감히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건지 몰라 고개를 떨구었다.
“이름도, 붙여 주시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곧바로 덮쳐 오는 어둠에 몸이 떨렸으나 곧바로 큰 품이 어깨를 감싸 주었다. 따뜻했다. 신아는 제 안의 경계가 무너짐을 느꼈다.
“그래, 나랑 같이 살자.”
수련자 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제자야. 수는 그리 말하며 조그마한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 * *
수선이 없는 물의 일족에서는 우현수가 일족의 최고 어른이자 권위자였다.
색색의 천들로 수놓아진 담장과 흥을 돋우는 음악에 무대 위 분위기가 한껏 오르며 연무제를 알렸다. 우현수는 시선을 돌려 수련자들의 천막을 보았다. 흰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무복을 차려입은 일곱 수련자와 색동옷을 차려입은 동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곧 연무가 시작될 테니 자리를 지켜야 마땅하지만, 우현수는 왠지 착잡한 마음에 자리를 비웠다. 그렇게 연무대를 등지고 걸어 뒷길에 섰다. 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놈 때문에 안 그래도 쑤신 몸은 골까지 지끈댔다.
우현수는 품에서 연죽을 꺼내 물었다. 선하의 아들 수. 우현수가 그를 처음 본 건 선하가 제 자식을 벼랑에 던져 버리려던 날이었다.
팔 년 전 이날, 우현수는 지정된 시간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련자를 찾아 나섰었다. 민가의 가장 끝 쪽에 놓인 수의 집은 허름하기 짝이 없어 괴이했다. 본디 수련자로 이름을 올린 자의 집안에는 각종 뇌물이 들어와 문 앞에 한가득 쌓이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피로 얼룩진 마당이 보이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폐허와 같은 마당 구석에는 피가 말라붙은 손잡이 없는 검이 검집에 꽂혀 있었다. 이러한 집 안 꼴을 보니 한 수련자가 부모에게 학대를 받고 있다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다. 수산에서 수련자로 이름 올림은 더없는 영광이었기에 흘려보낸 소문이었다.
수선의 후계자로서 시간을 보낼 아이를 학대하다니, 이는 중죄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산속에서 산짐승들이 우는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동시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수산의 영물들이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 보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오싹한 광경이었다.
우현수는 본능적으로 동물들이 수선의 후계자를 지키려 든다고 판단했다. 짐승들이 따라오라는 듯 숲으로 걸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빠르게 산을 오르는 짐승들을 쫓아 험한 산길을 올랐다.
도착한 곳엔 아들을 벼랑 밑으로 던지려 하는 제 옛 동무가 있었다. 상황은 무마시켰으나 어릴 적 동무였던 선하는 아들과 같이 죽으려 한 모양인지 독에 위장이 전부 녹아내린 후였다. 선하게 웃던 동무는 독기가 들어찬 눈으로 자식을 저주하며 죽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수선이 돼!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마치 제 자식이 수선이 되는 것이 확실한 듯 말이다.
수와의 첫 만남은 강렬했으나 그 실력은 그렇지 못했다. 역사상으로 무능한 수련자는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우현수는 그의 무능을 부정했다. 영험한 수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지킨 수련자가 무능하다고? 그럴 리 없었다.
부모를 잃은 날 등단한 수는 걸어 다니는 목각 인형 같았다. 묻는 말에는 곧잘 대답하였으나 어떤 수련을 하더라도 ‘못하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라 말하며 검을 내려놓았다. 처연함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의 얼굴에는 수선이 되고자 하는 의지는커녕 살고자 하는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약한 말을 되풀이하는 아이에게 우현수는 지금은 쓰이지도 않는 초라한 창고로 거처를 옮기는 벌을 내렸다. 그 좁고 더러운 방에서 따뜻한 이부자리의 소중함을 깨닫고 삶에 매달리기를 바랐다. 결코 그 방에서 계속 지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는 작고 더러운 방에서 차츰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마치 자신이 있을 곳은 여기라는 듯 평온해 보였다.
그 마음가짐이 어찌 되었건 간에, 거처를 옮긴 이후 아이는 곧잘 웃게 되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주제에 팔자 좋게 늘어진다며 험담도 붙었지만 말이다. 우현수는 그런 아이가 안타까우면서도 화가 났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하지 않는 수련자. 조용히 묻어가기 위해 웃는 법을 배운 것만 같았다.
우현수는 눈을 찌푸리며 한숨 쉬었다. 수련자 수는 어느새 아픈 손가락이 되어 있었다.
수는 그 나이가 열넷이 되던 해부터 매년 열리는 연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의 일족에서 열리는 가장 큰 행사였으나 귀감이 되어야 할 제자가 존재치 않는다는 핑계로 개회식만 참석하고 본식에는 불참하기 일쑤였다.
가장 신성한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수련자는 같은 수련자들 사이에서 무시받았다. 결국 우현수는 그를 불러내어 올해 연무도 참석치 않을 것이냐 꾸짖었다. 말이라도 참석하겠노라 대답하길 바랐지만 수는 죽어도 원하는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네놈 한 명 때문에 격이 떨어질 다른 수련자들을 잊지 마라.’
‘혼자인 게 좋더냐? 그래서 제자를 두지 않아? 책임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수련자는 필요 없다.’
우현수는 어젯밤을 곱씹다가 짧게 한숨 쉬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그렇다고 하룻밤 새 다 죽어 가는 애를 데려와서 제자로 삼아? 처음에는 제 꾸짖음에 대한 고도의 비꼼인 줄 알았으나 제법 진지하게 말을 꺼내는 게 진심으로 보였다.
‘제가 좀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거두는 것을 허락해 주세요.’
‘부모 없이 자란 아이이니 사회성을 길러 주어야 할 듯싶습니다. 부디 동자들의 처소가 아닌 제 처소에서 함께 지내게 해 주십시오.’
‘두꺼운 침구를 하나만 내주십시오. 아이가 고뿔에 들까 걱정입니다.’
‘문에 붙은 창호지를 세 장 더 덧대어 주십시오. 외풍에 아이의 목이 건조할 듯합니다.’
‘흉터에 좋은 연고를 하나만 내어 주십시오. 온몸 상처투성이로 성한 곳이 하나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지낸 팔 년간 한 번도 바라는 것이 없던 녀석이 다 죽어 가는 아이를 데려와 이런저런 부탁을 쏟아 냈다. 무언가를 바라는 수.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지만 스스로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발전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대가로?’
‘열심히 수련하여 본 연무제에 참가하겠습니다.’
‘수련자라면 모든 행사에 참가함은 의무이다. 당연한 소리를 선심 쓰듯이 하니 괘씸하기 짝이 없구나.’
‘허면….’
‘당장 삼 년 뒤부터 연무제에 참가해. 또한 본 연무제 전까진 반드시 연무에서 오등 안에 들어.’
‘예?’
‘싫으냐?’
잠깐 망설임을 떨치듯 손을 모으며 수가 고개를 숙였다.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러지 못할 시엔 산에서 주워 왔다는 아이를 도로 산으로 돌려보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예. 감사합니다, 현수 어른.’
‘또한, 네 제자 놈은 당장 첫 출전할 동자전에서 입상할 실력으로 만들어.’
‘…….’
‘못하겠어? 실력도 안 되는 수련자에, 그에 버금가는 동자를 왜 받아 줘야 하지? 지금 같잖은 동정으로 부모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라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어른.’
그 대화를 끝으로 수는 예를 갖추어 물러났다.
우현수는 오늘 아침 대화를 회상하다 결국 눈을 구겼다. 말을 매섭게 해서 그렇지, 저는 결국 제자를 들이고 싶다는 수의 청을 받아 주었다. 그도 모자라 삼 년 뒤를 기약하며 내어 준 것들이 한 아름이었다. 그런 제게 미안해서라도 연무에 참가할 줄 알았거늘.
수가 신아의 등을 도닥이며 자장가를 불러 주던 때에, 우현수는 아랫놈의 불충에 치솟는 분노를 삭여야 했다.
* * *
“칠푼 팔푼 수 사부님 밑에 어찌 저런 괴물 같은 놈이 들어왔지?”
“말도 안 돼! 저런 놈을 낳은 게 수라니!”
“멍청아, 넌 아직도 그 말을 믿냐?”
“그럼 뭔데? 낳은 게 아냐?”
“사내가 어찌 애를 낳아! 전에 그 말을 고대로 스승님께 전했다가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진짜? 난 아직도 수 사부님이 저놈을 낳은 줄 알았어!”
대련에 앞서 옹기종기 모여 앉은 동자들이 수의 제자로 들어온 신아에 대한 분을 삼켰다.
수는 제 제자가 다른 동자들에 비해 사 년이나 늦게 들어왔으니, 다른 동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보내겠다며 제자를 들이고 나서도 이 년 뒤에야 그를 연무장에 보냈다. 수련자 수가 이 년간 가르쳐 봤자 뭘 가르치겠냐며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우현수는 뜻대로 하라며 그를 허했다.
훈련에서도 보지 못하고 같은 처소를 쓰지도 않는 신아는 동자들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수련자와 같은 처소를 쓰는 제자에 대해 누군가 항의할 법도 하였으나, 수가 지내는 거처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되지 못하였기에 그 누구도 이를 특혜라 여기지 않았다.
동자들은 내심 수의 제자가 대련장으로 올 날을 기다렸다. 그들이 기억하는 신아는 창고나 다름없는 허름한 수의 거처에서 죽은 듯 누워 있던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도 모자라 무능한 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수가 이 년 동안 걸음마부터 가르치는 게 아니냐며 동자들은 웃었다. 그런 우스갯소리를 떠든 지가 어언 이 년이니, 수의 제자가 얼마나 약할지는 기대되다 못해 설레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신아가 처음 연무장에 등장한 날, 한껏 부푼 동자들의 설렘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끝이야?’
나무 목검을 들고 선 아이는 또래보다 컸다. 다 죽어 가던 그 모습은 여덟 살 정도로 보였었는데, 막상 연무장에 등장한 아이는 그보다 두 뼘은 자란 채였다. 대련을 청한 동자들은 모두 신아의 발아래에서 뒹굴며 눈을 끔뻑였다.
패배를 인지하니, 모두가 수치에 젖어 눈물을 머금었다.
‘재미없네.’
첫 대련 날, 모든 대련에서 완승한 신아는 동자들에게 큰 굴욕을 안겨 주었다. 동자들의 눈에 신아는 도저히 이 년 전 수의 거처에서 죽어 가던 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매주 반복되는 대련에서 수의 제자가 패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의 제자를 이겨 봤자 자랑거리도 안 된다던 동자들은 결국 자존심을 꺾고 신아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그랬는데도 패하긴 마찬가지였으니, 모두 이를 갈며 매주 대련일만을 기다렸다.
신아가 동자들에게 굴욕을 안기는 점은 두 가지 정도로 축약되었다. 하나는 대련에 임할 때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뜬금없이 휘두르던 팔을 멈추고 맞아 준다는 점이었다.
누가 봐도 고의로 목검을 맞는 모습에 동자들은 이를 벅벅 갈았다.
“집중!”
작년 동자전에서 우승한 주철이 호통 치자 동자들은 화들짝 놀라 흩어져 대형을 갖추어 섰다. 수련자 수는 신아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자를 두지 않았기에 신아는 맨 왼쪽에 홀로 가 섰다.
“오늘도 전부 고생했습니다. 다만.”
주철의 시선이 신아에게로 가 꽂혔다.
“더욱더 집중해 대련에 임하도록 하세요. 진심으로 대련에 임하는 동지의 마음을 욕보이지 마십시오.”
신아는 단상 위에서 저를 내려 보는 주철을 물끄러미 올려 보았다. 이는 동자들을 통솔하는 주철이 신아에게 주는 경고였다. 주철은 가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이로 지난 삼 년 연속 동자전 우승을 거둔 수재였다. 다른 동자들은 속으로 이번 동자전 때 주철이 신아를 때려잡아 오만한 그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해산!”
주철이 신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외치자 동자들은 자신들의 거처로 뿔뿔이 흩어졌다.
신아는 수련자 수의 처소로 걸음을 옮기며 제 옷차림을 점검했다. 그가 치른 대련은 전부 싱겁고 단조로운 것뿐이었으나, 격렬하고도 긴장감 넘치는 대련이 있었던 양 도복 끈을 흐트러트리고 마지막 대련 때 내주었던 어깨의 멍이 잘 보이도록 도복의 목덜미를 늘였다.
‘더욱더 집중해 대련에 임하도록 하세요.’
신아는 주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중해 대련하면 분명 상대를 죽일 것 같았다.
멀리 외따로 떨어진 집 한 채가 보였다. 수련자의 거처 중에서도 가장 끝, 가장 허름한 곳은 수와 그 제자의 처소였다. 신아의 발소리가 모래바닥을 잘각이자 이제는 창호지를 네 겹 덧대어 제법 튼튼해진 문이 벌컥 열렸다.
“내 아가!”
수는 버선발로 뛰쳐나와 신아를 품에 안았다. 신아는 품에 안겨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스승님, 아파요.”
신아가 신음하자 수는 화들짝 놀라 품에서 신아를 놓아주었다. 그러자마자 도복 틈 사이로 멍이 든 어깨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 신아를 처소로 들였다.
푹신한 이불보에 신아를 앉혀 두고, 수는 연고를 찾아 작은 방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흉 지면 어쩌나, 저리 큰 멍이 들어서 어쩌나 하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신아를 이리저리 살폈다. 수의 곱고 다정한 눈에 걱정이 담뿍 묻어났다.
그 어떤 생명체보다 고고한 스승이 눈썹을 늘어뜨리고 몸을 꼼꼼히 살피자 신아는 제 안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련이 열리는 매주 목요일은 신아가 즐거이 기다리는 날 중 하나였다. 이 시선을 받기 위해서라면 다른 동자들의 느려 터진 검에 가만히 맞아 주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수는 손을 뻗어 조심스레 신아의 도복을 내렸다. 신아의 오른 어깨에는 목검에 맞아 든 검붉은 멍이 두 줄 그어져 있었다.
“하…….”
수는 한숨 쉬며 제 손에 연고를 발라 신아의 어깨에 손을 대었다. 신아는 제 스승님의 손가락이 제 살결을 스치면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눈썹을 찌푸렸다. 수는 그런 신아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며 제가 더 아픈 듯 울상 지었다.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신아야.”
“예. 스승님.”
신아는 곧잘 대답했지만 상처를 만들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제 스승님은 약한 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여린 성정의 소유자였다. 모두가 수련자 수는 약하고 형편없다 생각하지만 이 년 동안 저를 가르친 스승님은 약하지 않았다. 신아는 본능적으로 제 스승이 뛰어난 무인임을 깨달았다.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고 나간 대련은 시시하기 짝이 없었으며 다른 수련자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아도 스승님만 한 수준의 무인은 없었다. 제 스승님은 이곳에 머문 이래 철저하게 자신의 실력을 감춰 온 듯했으나 어린 제자의 요구에는 한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보통 실력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무예임에도, 제가 알고 싶다 청하면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이시다 결국 검을 드셨으니 말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신아에겐 스승님이 능력을 숨기고 살아 다행이었다. 푸른 검기를 두르고 사뿐히 땅을 짓밟는 스승의 모습은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이 검기를 담은 검무를 세상에 보이면 하늘이 그를 빼앗아 갈 것 같았다.
신아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수재였으나 수는 신아에게 위대한 무인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신아 또한 위대한 무인이 되기보다는 스승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제자가 되기를 택했다. 그러니 신아는 진작 검기를 발현했음에도 이를 철저히 숨겼다. 스승님이 저를 약하다 여기고 감싸 주시는 것. 신아는 그런 대우가 좋았다.
“다른 동자들은 새로 들어온 동자에 대한 예의가 없구나. 조금 살살 해도 될 것을…….”
“스승님.”
“…응?”
신아의 부름에, 수는 제자의 다친 곳을 살피느라 가까이 붙였던 고개를 물렸다. 신아는 스승과 저 사이에 조금의 간격이 생기고 나서야 몸의 긴장을 풀었다. 불러 놓고 입을 닫은 신아에 수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어디가 아파? 혹, 자존심이 상했느냐…?”
수는 제자가 어깨를 두들겨 맞고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헤아리며 끙끙댔다. 신아는 그런 스승님을 보며 눈을 살며시 휘어 웃었다. 한 번도 졌다고 고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신아는 눈썹을 누그러뜨려 제법 시무룩한 표정으로 수를 올려 보았다.
“더, 잘하고 싶습니다.”
신아는 제 스승님이 약한 것들에, 또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 하고 울상 지은 채 그를 껴안았다. 멍이 든 어깨가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다음엔 더 잘할 거란다.”
다정한 속삭임에 신아는 눈을 감았다. 스승님께선 제게 욕심대로 살라 가르쳤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욕심을 위해 살라고. 신아는 그 가르침을 제 식대로 풀어 받아들였다.
그러니 대련을 제외하고 그 어떤 분야에서도 재능을 드러내지 않았다. 매년 열리는 크고 작은 경연에서 승리하면 제법 두둑한 상금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 또한 욕심내지 않았다.
스승님과 붙어 잘 수 있는 작은 처소가 좋았다. 춥다 말하면 가까이 붙어 팔을 내어 주시는 밤이 좋았고 성적 미달로 재시험을 봐야 하는 날이면 가까이 앉아 밤새도록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시구를 외우면 온 세상이 반짝거리듯 환하게 웃으며 기뻐해 주시니 밤이 와도 하늘이 어둡지 않았다.
제가 잘하면 그를 제자로 둔 스승님의 위상 또한 올라가겠지만 신아는 제 욕심을 좇아 살라는 가르침을 따라 둘만의 세계를 지켰다.
신아는 스승의 품 안에서 편안히 숨을 쉬었다. 스승님이 예쁘다고 평하는 대상은 오로지 자신이어야 했다.
* * *
수는 아이가 곧 나가게 될 동자전 때문에 일찍이 골머리를 앓았다. 동자전은 각 수련자의 대표 제자들이 나와 서로의 실력을 겨루는 대련으로, 그날만큼은 모든 동자가 진검을 들고 검기를 보여야 했다.
검기를 보여야 한다. 수는 이 대목이 걱정이었다. 불의 일족인 신아의 검기는 붉은빛을 띨 확률이 높았다. 지금처럼 두 일족이 냉전인 때에 신아의 뿌리가 불의 일족임이 드러난다면 신아는 분명 산에서 내쳐질 것이다.
‘또한, 네 제자 놈은 처음 출전할 동자전에서 입상할 실력을 거두도록 만들어.’
벌써 이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현수 어른께서 이 같은 주제로 다시 말을 꺼내시기 전에 신아를 동자전에 내보내야 했다. 검기를 쓰지 않으면 꼴등을 면치 못할 테니, 신아의 검기를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그저, 신아의 검기가 붉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많이 쳐 줘야 여덟 살 정도로 보이던 신아는 이 년이 조금 지난 시간 동안 크게 성장했다. 더 나아가 먼저 무예 실력을 닦은 동자들보다 몸이 곧고 발랐다.
‘신아야, 네 나이가 올해 몇이지?’
‘올해로 열셋이 되는 줄 압니다.’
영양 결핍이었던 건가? 수는 그리 생각했다. 이 년 전, 제가 신아를 데려올 때만 해도 열셋이라기엔 지나치게 작았으니 말이다. 물론 커 봤자 제 눈에는 지금도 자그마한 아이였고 이 년이 지난 지금도 열다섯이라기엔 성장이 더딘 듯 보였다.
“수! 어찌 이리 대답이 없으십니까!”
호통 치는 청의 목소리에 수는 생각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매주 금요일 아침, 여덟 수련자가 대나무로 만든 정자인 송정에 모여 학문과 무예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조례 시간이었다. 수는 시선을 내려 예를 갖추었다.
“송구합니다, 사형. 호수 건너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그리로 정신이 팔린 상태였었습니다.”
오늘은 동자들의 검무 연습이 있는 날이었다. 송정 너머로 간간이 피리 소리가 넘어왔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대충 둘러댄 것이었으나 수는 저도 모르게 푸른 검무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을 신아가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에서 작고 귀여운 신아가 사뿐히 춤을 추니 표정을 구기지 않으면 미소를 흘릴 것만 같았다.
청은 집중하지 못했다는 수의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신아라고 했던가요.”
청의 입에서 신아의 이름이 나오자 수는 시선을 들어 올려 청을 보았다. 가진 건 얼굴뿐이라는 욕을 들어먹는 수가 청의 뒷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였다. 쪽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인은 제자의 이름에 집중하는 수를 보고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수련자 수가 제자를 품에 싸고돈다는 말은 사실인 듯 보였다.
“올해 나이가 어찌 됩니까.”
“…열다섯이 되는 줄 압니다.”
“가의 주철과 동갑내기군요.”
“예? 예에….”
수는 신아의 나이가 주철과 같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주철에게는 벌써부터 장군의 기운이 흘렀기 때문이다. 수는 조용히 주철과 신아를 나란히 떠올리다 고개를 기울였다. 온실 속 화초 같은 신아와 잘 훈련된 맹수 같은 주철은 같은 또래라 느껴지지 않았다.
“주철은 기를 보였다는데, 수의 제자는 어떠한가 물었습니다.”
“주철은 삼 년 연속 동자전에서 승리한 동자가 아닙니까. 제 제자는 스승이 미흡하여 아직 기초적인 무예조차 끝마치지 못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스승인 수조차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상태였다. 수는 제 대답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으나 청을 포함한 다른 수련자들은 미묘한 낯으로 말없이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만 검기 발현에 들어가셔도 될 듯합니다.”
정자의 상석에 앉은 가가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신아가요? 수는 어리둥절하여 수련자들을 둘러보았으나 재수가 없으니 아닌 척하지 말라는 눈총을 받았다. 이에 말수가 없는 하가 첨언하였다.
“신출귀몰하여 도깨비 동자라는 말이 붙지 않았습니까.”
“아아….”
수는 어색하게 굳은 입매를 숨기기 위해 찻잔을 들었다. 곤란하게도, 스승인 저는 모르는 이야기였다.
“훌륭한 동자가 수련원에 들어섰으니 축하해야 할 일입니다. 수는 사 년이 넘도록 제자를 들이지 않던 분이니까요.”
신중하셨던 거겠지요, 가가 좋게 포장하자 다른 수련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다른 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일은 자제해야 할 듯합니다.”
다른 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일? 수가 고개를 틀어 가와 시선을 마주하자 가는 덤덤히 시선을 내렸다.
“피할 수 있으나 피하지 않는 일 말입니다.”
맞아 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가는 덤덤한 표정으로 찻잔을 내렸다. 스승인 수는 영문을 모른 채 눈을 끔뻑였다.
* * *
“신아야.”
수의 무릎에 앉은 순진한 얼굴의 아이가 스승님의 부름에 뒤를 돌아보았다.
“아….”
신아의 입에 약과를 대자 아이는 얌전히 입을 벌려 그를 받아먹었다. 평소 같으면 이 같은 평화를 여유롭게 즐겼겠으나 여러 사형들의 목소리가 수의 마음을 어지럽게 했다.
‘도깨비 동자라는 말이 붙지 않았습니까.’
‘다른 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일은 자제해야 할 듯합니다.’
‘피할 수 있으나 피하지 않는 일 말입니다. 맞아 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싶습니다.’
수는 오물거리는 작은 입을 바라보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러곤 결심한 듯 숨을 내쉬곤 신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었다. 곧장 저를 마주 볼 수 있도록 무릎 위로 돌려 앉히자 자세를 고쳐 앉은 신아는 순진한 낯으로 스승을 올려 보았다. 묘하게 서늘한 인상과 청색 옷이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 마치 인형 같았다.
수는 신아의 허리 뒤로 팔을 두르고 그를 내려 보았다. 신아는 올해로 열다섯이었으나, 수는 익숙한 듯 그를 무릎 위에 앉혀 당과를 먹였다. 신아도 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 유과를 우물거리던 신아가 스승의 비장한 낯에 고개를 갸웃댔다.
“신아야.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는 거다.”
“예, 스승님.”
신아는 순순히 답하였으나 스승의 말이 무엇을 위한 서론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비밀을 두지 않아 볼 이득이 많은 쪽은 신아였다.
“대련장에서….”
신아는 저를 끌어안은 스승님의 팔을 통해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동자들을 봐주었어?”
아, 신아는 스승의 물음에 고민하듯 시선을 내렸다. 일부러 맞아 주는 티가 나긴 했다. 그렇게 뚝 멈추지 않으면 동자들이 저를 한 대도 못 때릴 것 같아 그런 거였는데. 신아는 조용히 지나치게 약하던 동자들을 떠올렸다.
‘신아야, 혹시 누가 괴롭히거든 꼭 내게 말해.’
오늘 아침, 제 허리에 검무복 띠를 둘러 주던 스승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저를 배웅했었다. 그러니 스승님은 좀 전에 다녀온 조례에서 제 대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신아는 씹고 있던 유과를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예.”
신아가 그렇다고 답하자 수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왜?”
상처받은 표정으로 신아를 바라보자 신아 또한 덩달아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솔직히 말해 보아…….”
수는 목소리를 꾸며 엄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성대가 떨려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가 모르는 신아의 얘기를 듣고 와 당황한 상태였다. 제 제자가 대련장에서 그리 날아다니는 줄은 몰랐다.
매번 몸에 멍을 달고 들어와 가슴을 아프게 한 신아였다. 다른 동자들에게 꼼짝없이 두들겨 맞다 들어오는 줄 알았다. 위엄 없는 수련자의 제자이기에 더 만만하게 보였을까 서러웠다.
틈만 나면 산으로 데려가 특훈을 시켰는데, 신아는 멍을 더 달고 돌아오면 더 달고 돌아왔지 도무지 그 개수가 줄지를 않았다. 그러니 신아를 연무장으로 보내야 하는 목요일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신아만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데 맞아 주었다니, 수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자식의 첫 거짓말을 목격한 부모가 된 기분이었다. 수는 차츰 열리기 시작한 신아의 입에 마른침을 삼켰다.
“솔직히 이제껏 맞붙은 동자들은 어려운 대련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신아의 음성은 작았으나 그 투가 꽤 단호했다.
“…헌데?”
말을 해 보아. 수가 재촉하자 신아는 망설이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돌아가면.”
신아는 저를 보는 스승의 시선을 피했다.
“스승님께서 동자전 우승까지 기대하실까…. 걱정되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대답을 끝마친 신아의 눈꺼풀이 다시금 아래를 향했다. 잠깐의 침묵 뒤, 수는 탄식하며 눈썹을 늘였다.
“어찌 그런 걱정을…!”
엄한 얼굴로 제 혼란을 감추던 수는 생각지 못한 제자의 대답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리저리 뒤엉켜 혼란스럽던 감정들은 슬프고 애틋한 마음만 남긴 채 사라졌다.
“저는 아직 기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대련에서 좋은 실력을 거두면 모두가 동자전에서의 제 순위에 이목을 모을 것이고….”
“스승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려웠어?”
수가 묻자 신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이유로 저보다 약한 상대에게 맞아 왔다니, 수는 신아의 어깨를 덮은 멍 자국이 기억나 가슴이 저렸다.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웠을 아이가 안쓰러워 조심스런 손길로 작은 머리를 쓸어내렸다. 신아는 그런 스승의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내 분명 너에게 네 욕심대로 살라 가르쳤는데….”
수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신아를 타일렀다.
“너는 먹칠할 스승의 명예가 없어. 네가 원한다면 다른 자에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도울 것이야.”
“스승님…!”
신아는 다른 이에게 무릎 꿇겠다는 스승님의 말에 놀라 두 주먹을 모아 쥐었다. 수는 그러한 신아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단단히 맞잡았다.
“신아야, 다쳐도 되고 져도 된단다. 그러나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그 무엇보다도, 네가 다른 이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단다.”
“…예 스승님.”
“옳지, 그런 생각하게 해서 미안하다.”
수는 신아의 어깨를 당겨 그를 안았다. 그런 스승의 태도에 신아가 서러운 듯 말을 늘였다.
“어찌 미안해하십니까…….”
“그래그래.”
수는 신아를 한껏 귀여워한 뒤 그를 그만 제 무릎에서 내려 주었다. 스승을 실망시킬까 마땅히 자랑해야 할 일을 숨긴 아이였다. 스승이 무능하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 수는 방패가 되어 주지 못하는 제 존재에 쓰게 올라오는 표정을 숨겼다.
본래는 할 일 없는 오후에 신아와 산책이나 다녀올 생각이었으나 신아의 깊은 속내를 마주하고 생각을 바꾸었다. 신아를 지킬 정도의 능력은 보여야겠구나. 이런저런 계획을 정리하던 때, 수는 제 소맷자락을 쥐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신아를 보았다.
“저도… 스승님께 무엇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비밀은 없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신아가 꾸물거리자 수는 입매를 당겨 웃는 것으로 질문을 허했다.
“제가 대련 상대를 봐주었다는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신아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스승을 보았다.
“하하, 그게 궁금했어? 오늘 아침 조례 때 다른 사형들께 들었다. 네게 도깨비 동자라는 말이 붙었던데.”
수가 코를 찡그리며 짓궂게 웃었다.
“사형들이요…?”
“아, 수련자들을 말하는 건데, 나는 높여 부르는 것이 편하여… 입에 굳은 습관이란다.”
“모든 사부님께 문책을 당하신 겁니까?”
“하하, 이젠 또 그런 걸 걱정하는 거야? 모두가 너를 알고 있기는 하였으나, 부러워하는 분위기였고… 또 굳이 말하자면 세 분만이 나와 이야기했단다.”
수는 신아의 보드라운 뺨을 아프지 않게 살짝 쥐고 약하게 흔들었다.
“이젠 좀 안심이 되어?”
“예, 스승님 감사합니다.”
신아는 입을 오므려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래, 어쨌거나 내 제자가 도깨비 동자라는 별호까지 달았으니 기대에 부응하려거든 이제 그만 검기 연습을 해야겠구나.”
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신아가 검기를 꺼내는 일을 서두르기로 했다. 어찌 됐건 간에 검기 발현은 피할 수 없었다. 신아의 검기가 붉을 거라면, 지금처럼 쉬쉬하기보다 현실을 직면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편이 나았다.
“오늘 말입니까?”
신아는 다시 한번 되물어 스승의 뜻을 확인했다.
“그래.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오렴. 매번 가던 곳으로 가자.”
“예.”
신아는 씩씩하게 답한 뒤,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수는 푸른 검무복을 휘날리며 뛰어가는 뒷모습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참으로 애달팠다.
“기특하기도 하지…….”
한 번쯤은 수련하기 싫다 투정 부릴 법도 하거늘. 신아는 기특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제자인 신아는 항상 스승인 저를 배려했다. 수는 일순간 신아에게 거리감을 느낀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을 재촉하듯 뛰어가던 신아는 수련자의 처소가 담 너머로 멀어지자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걸었다. 미소를 머금은 아이는 천천히 스승의 대답을 곱씹었다.
‘굳이 말하자면 세 분만이 나와 이야기했단다.’
세 명. 신아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 * *
“가 사형을 뵙습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신아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수는 수련자 가가 있을 서재에 들렀다. 은빛 머리를 단정히 빗어내려 곧은 자세로 서재에 앉아 있던 가는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수를 맞이했다.
차기 수선의 유력한 후보자인 가와 무능한 문제아 수. 겉보기에 둘은 전혀 접점이 없는 듯 보였으나, 가는 수를 편견 없이 대하는 유일한 수련자였다.
“오늘 제 제자에 대해 일러 주신 말씀은….”
“수께서 알아서 잘 해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는 수의 제자가 왜 동자들을 봐주었는지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단칼에 말을 끊었다. 그다운 답변에 수가 난감한 듯 눈썹을 긁적였다.
“그 말씀을 하러 오신 겁니까?”
“비슷하나, 아닙니다. 제가 가진 능력이 없어 자문을 구하고자 하는데.”
“말씀하세요.”
“…검기를 가르치려거든 무엇을 일러 주어야 합니까?”
수는 누군가의 스승인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민망하여 말끝을 흐렸다. 제자를 여덟이나 거느린 가에게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수는 기를 발현시키는 법을 몰랐다. 수선의 생명을 빨아 태어난 저는 태어남과 동시에 기를 다룰 줄 알았기 때문이다.
수에게 있어 검기 발현이란 오른손을 움직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른손을 어찌 움직이느냐고 물으면 뭐라 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책을 훑어 내리던 가는 시선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많이 보고 본인이 깨닫는 수밖에요.”
“그걸로 안 된다면요?”
묻는 투가 제법 간절해 보였다. 수선이니 수련자니, 세상 미련 없는 듯 굴던 사내는 제자 한 명을 위해 자문을 구하고 있었다.
‘수 사부님이 낳았다고 하시던데요?’
그럴싸한가. 무감한 낯에 옅은 웃음이 스쳤으나 가는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감을 잡을 수 있게 직접 기를 흘려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접촉을 통한 것을 말씀하시지요?”
“예.”
“손을 잡는 것처럼요?”
“그리하면 기가 겉으로 돌아 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허면….”
“내부의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입에서 입으로 숨을 흘려보내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이지요.”
“입이요?”
“예.”
수는 건조한 수긍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답하는 이가 너무도 덤덤하게 대꾸하여 제가 이상한가 싶었다. 입을 맞대라니, 그거 모양새가 꽤나…,
“사형께서도 그리해서 주철에게 검기를 깨우치게 하셨습니까…?”
가는 고개를 저었다.
“주철은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아아….”
수는 난감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에 가가 말을 덧붙였다.
“수께서는 검기가 없지 않으십니까.”
가의 말에 수는 민망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외적으로는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수련자였으니 마땅한 지적이었다.
“예에, 그래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형.”
“본인이 깨우칠 수 있도록 직접적인 기 전달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예….”
그러기에는 시간이 없을 듯한데. 신아는 동자전에서 입상해야만 했다. 가는 떨떠름하게 답하는 수를 보며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급하십니까?”
“예? 아, 제 제자가 등단이 늦지 않았습니까. 뒤처지는 일은 아이에게 괴로운 법이니….”
“현수 어른과의 약조를 압니다.”
“아… 하하.”
알면서 물었단 말입니까? 현수 어른, 비밀 약조는 아니었지만 말을 너무 쉬이 하고 다니시는 것 아닙니까. 수는 왠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입을 꾹 다물었다.
“…정 급하시면, 제가 제자를 조금 봐 드리겠습니다.”
예? 수는 가의 아량에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형이 허리를 숙여 신아에게 고개를 가까이 들이미는 모습이 떠올라 더 세게 고개를 털어 냈다.
“하하, 괜찮습니다.”
“아니면 제 기를 수께 조금 넘겨 드릴까요?”
“기를요?”
수는 얼빵한 얼굴로 가와 시선을 마주했다.
“일시적이긴 하나, 오늘 바로 수련에 들어가실 참이면 제자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수는 손사래를 치며 걸음을 뒤로 물렀다. 어찌나 당황하였는지 등 뒤 책장에 어깨를 부딪치고서야 물리던 발을 멈추었다.
“괜찮습니다. 혹여나 후에 잘 안 되면.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형. 수가 고개 숙이자 가는 가볍게 시선을 내려 그 인사를 받았다.
“언제든 찾아오세요.”
가는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는 그를 등지고 걸어 서재를 나왔다. 문을 닫곤 멍한 낯으로 서서 눈을 끔뻑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조금 선정적인…. 순간 신아의 순수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몸을 떨었다. 아무리 저를 따르는 신아라도 이는 조금… 꺼릴 듯한데.
고개를 붕붕 저으며 민망한 기분을 갈무리했다. 그러곤 환복을 마쳤을 신아를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신아는 영특하니, 제가 검기를 두르는 모습을 보면 주철처럼 스스로 깨달으리라 믿고 싶었다.
입으로 기를 불어넣어? 수는 손을 휘저었다.
입맞춤은 본디 연인들이나 하는 행위가 아닌가. 제 아무리 기를 나누는 행위라 한들, 신아가 의미를 오해하여 동자들에게 입이라도 들이밀면 난감했다. 이는 그런 행위가 아니며, 그렇다고 남들과 쉬이 해서도 안 된다며 가르쳐야 했다.
수는 생각하다 말고 눈을 흐렸다. 배운 적이 없으니 잘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가르침에 대한 신아의 물음을 가늠하자면 말문이 턱턱 막혔다. 처소로 돌아가는 길, 수는 마음이 복잡해져 시름했으나 어디 조언을 구할 데도 없으니 머리만 짚었다.
* * *
사형대에 오르듯 대련 무대에 끌려 나온 슬선은 제 앞의 상대에 두려움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준비하라는 주철의 목소리에 목검을 겨누긴 하였으나, 검을 잡은 손이 애처로울 정도로 바들거렸다. 무대를 둘러선 동자들 또한 그런 슬선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슬선은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리 생각하면서 제 안의 두려움을 다잡고자 했다. 제법 마음이 진정되자 눈에 힘을 주어 앞을 보았다. 그러나 저를 찍어 누르는 검은 눈에 도망치듯 두 눈을 내리깔았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의 공포감에 기권하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주 전 오늘, 신아는 이전과 다르게 제 대련 상대를 직접 지목했다. 그들 모두 가, 청, 하의 제자들로 동자전에서 입상 전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마지막까지 신아에게 대련을 청하지 않았던 자존심 센 동자들은 수련이 짧은 신아에게 지목된 게 언짢은지 인상을 구겼다. 그 광경에, 다른 동자들은 이번에야말로 오만한 수의 제자가 본때를 보겠구나 하며 설레 했다.
그러나 세 차례의 대련이 모두 끝난 후, 대련을 지켜보던 동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털이 곤두서는 긴장감에 대련 내내 숨을 참았으나 경기가 어찌나 빨리 끝나는지 숨이 차지도 않았다.
신아는 원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나쁘게 말하면 지루한 무예를 보여 왔다. 그렇기에 많은 동자들은 신아와의 대련에서 패배하더라도 순순히 결과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눈앞에 선 신아는 지난 두 달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신아는 대련이 시작함과 동시에 자세를 낮추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상대가 당황하여 주춤하기도 전에 등 뒤로 신아가 날아올랐다. 검과 검이 적당히 오갔던 이전의 대련들과는 달랐다.
‘그만!’
신아를 저지하는 주철의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정확히 목을 노려 내려치는 검에 뼈가 꺾였음이 분명했다. 모든 대련은 신아의 일방적인 사냥처럼 보였다. 동자들이 압도되는 것은 이러한 실력뿐만이 아니었다. 신아가 연무장을 걸어 들어오는 순간부터 동자들은 그 중압감에 숨이 턱턱 막혔다.
마치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선 짐승 같았다. 그런 신아가 오늘의 대련 상대로 슬선만을 지목했을 때, 동자들은 진심으로 슬선을 애도했다.
슬선은 대련이 시작함과 동시에 연무장에 주저앉았다. 이는 동자로서의 수치였으나 그를 지켜보던 자들은 모두 슬선의 현명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신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슬선이 주저앉아 대련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신아는 주철의 저지에도 목을 내려치는 검을 멈추지 않았을 것 같았다.
“해산!”
주철이 외치자 대형을 맞춰 선 동자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수의 제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피하려고 너도 나도 쫓기듯 연무장을 뛰쳐나갔다.
화제의 중심에 선 신아는 제 스승님이 있을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 발걸음을 틀어 수련원을 나섰다. 후덥지근하던 날씨는 이제 선선하다 못해 쌀쌀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외출복도 갖춰 입지 않은 채 수산에 올랐다. 지금과 같은 상태론 스승님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아는 심사가 뒤틀려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본래, 아무리 더운 날이라도 저를 다독이는 스승의 손길 아래 잠들었었다. 일과가 끝나면 그 무릎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틈만 나면 저를 안아 드는 스승에 살갗이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붙어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러나 요 며칠 새 묘하게 거리를 두는 스승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제 목덜미를 당겨 안았을 상황에서, 스승은 망설이듯 주춤하다 들어 올린 손을 물렀다.
‘너는 더 자랄 테니 이제는 네 몫의 침구가 필요하겠구나.’
이는 더는 한 이불 아래 같이 자지 않겠다는 뜻이었고.
‘내가 너를 너무 어린아이 취급한 듯하여 미안하다.’
이는 더는 저를 무릎에 올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매번 저를 따뜻하게 안아 주던 스승님이 이젠 저를 볼 때마다 몰래 한숨을 흘렸고 좀처럼 저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에 신아의 피가 차게 식었다.
스승님께선 작은 아이였던 제가 좋았던 걸까? 이렇게 쑥쑥 커 버려 아가 티를 벗은 아이는 징그러운 걸까? 어리광 피우듯 손을 뻗었으나 당황한 스승님께 팔이 내쳐진 경험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더는 스승님께 어리광을 피울 수 없나? 더는 스승님께 예쁘지 않은가?
어깨를 띄고 누운 밤이 일주일을 넘어가자 신아는 밀려오는 초조함에 잠조차 제대로 들 수 없었다. 그러한 신아의 마음에 분노를 끼얹은 건 다름 아닌 스승이었다.
‘신아는 수련원을 떠나거든 혼인을 하겠지?’
검기 발현을 위해 연습하던 도중, 신아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신아가 그 질문에 굳어 버렸음은 당연하다.
‘색싯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아이는?’
‘혹여 동자 중에 마음에 드는 아이가….’
‘네가 수련원을 떠나게 되면, 그때엔 동자와 혼인해도 괜찮단다.’
신아는 저와 함께하지 않을 미래를 그리는 스승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 고통스러웠다. 한 번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런 미래는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는데. 차오르는 배신감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스승님은요?’
‘응?’
‘스승님께선 수련원을 나가시면 여인과 혼인하실 겁니까?’
상처받다 못해 오기로 물은 것이었다. 그 질문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태연한 체를 했으나, 이미 손아귀에 힘이 실려 눈앞이 아득했다.
‘글쎄….’
‘…….’
‘뭐, 그렇겠지?’
그리 답하는 스승의 어조는 무심하기 짝이 없었으나 신아의 세상은 쩌적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머릿속에서 선명해지는 회상에 신아는 주먹을 쥐었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매번 대련 날 아침이면 혹여나 다쳐서 돌아올까 오매불망 저만 바라보던 스승님인데, 오늘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 허공만을 좇았다.
‘…잠시 사형을 뵈어야겠다.’
도복의 허리끈을 단단히 매어 주고 다치지 말고 돌아오라며 끌어안아 주던 스승님은 없었다. 신아가 연무장으로 떠날 때까지, 스승은 그렇게 오후 내도록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말수를 줄여 가며 스승님이 생각한 게 가 수련자라니. 분노와 질투에 눈이 먼 신아는 대련장에서 가의 제자라도 잡아다 팰 생각이었지만 대련은 전투 의지를 상실한 슬선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산을 오르는 아이의 기운이 음습했다.
스승님이 저를 버리려 한다. 그러한 결론에 다다른 신아는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뜬 검은 눈이 광기로 형형했다. 스승님이 저를 버리려거든 제 삶에 스승님을 처넣으면 그만이었다.
* * *
수는 낙엽 밟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곳엔 짙푸른 무복을 입은 신아가 서 있었다. 그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쓰게 웃으며 표정을 흐렸다.
이젠 미쳐서 헛것이 다 보이는군. 대련을 마친 신아는 지금쯤 욕탕에 들었을 테니 앞에 선 것은 제 지독한 상상의 부산물임이 분명했다. 수는 말없이 저를 쳐다보는 환각에 헛웃음이 새었다. 정말, 어찌해야 하지. 짧은 숨을 토하며 머리를 짚었다.
다시금 시선을 떨구고 머리를 털어 내자 옆에 앉아 졸던 토끼가 그를 따라 했다. 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줄기에 걸터앉아 땅이 꺼져라 시름했다.
주말마다 신아를 데리고 수산에 올랐지만 신아는 결국 검기를 발현하지 못했다. 고작 이 주 만에 성과를 내려 했으니 성급하기야 했다. 신아가 검기 발현에 실패할수록, 왠지 모를 긴장감이 수의 몸을 덮쳤다.
사형께서 알려 준 검기 발현법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었다.
상상만으로는 이미 수백 번 신아와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신아가 검기를 발현하지 못할 때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신아가 방긋 웃기만 해도, 최근에는 신아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입을 맞대는 상상이 수의 머릿속을 메웠다.
수련자로서 연애 경험이 전무한 수에게 입맞춤부터는 철저히 애인 간에나 나눌 수 있는 접촉이었다. 신아와의 입맞춤을 거리껴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신아가 크고 나면, 입맞춤의 대외적 의미를 알아 버린 제자가 스승을 원망할 것 같아 두려웠다.
‘어찌 어리숙하던 제게 그런 가르침을 하셨습니까! 정말 끔찍합니다…!’
흐릿하게 상상되는 다 큰 신아가 저를 원망하니 수는 덜컥 겁이 났다. 타인에게 성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안 좋은 추측만이 커져갔다.
‘입에서 입으로 숨을 흘려보내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방법이지요.’
사형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덤덤한 투로 말해 보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신아의 얼굴만 보면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어 한숨만 흘렸다.
결과적으론 실패했으나, 입맞춤의 의미를 알려 준 다음 검기 발현에 대한 얘기를 꺼내 보려 시도도 해 봤다. 그리하면 저를 속였다는 원망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아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무얼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기 위해 다양한 미끼를 던졌다. 대충 혼인에 대한 이야기, 관심 있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신아는 이성에 관심이 없었고 질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에 기가 죽어 입맞춤의 의미를 알려 주겠다는 계획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결국, 수는 신아와 눈만 마주쳐도 입 맞추는 상상이 펼쳐져 평소처럼 신아를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급기야는 이제껏 해 오던 살가운 접촉들도 그랬다. 그렇게 어른이 된 신아의 원망을 피하고자 처음으로 아이와 떨어져 자던 밤엔 괜스레 서러워 눈 위로 눈물이 들어찼다.
그러나 수는 신아를 잃을 수 없었고, 붉을지도 모를 검기에 대비하여 계획을 세워야 했다. 현수 어른은 입 밖으로 꺼낸 일을 절대 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미래에 원망을 듣더라도, 더는 검기 발현을 늦출 수 없었다.
수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사형을 만난다는 핑계를 대어 수산에 올랐다. 산 깊숙이 숨겨진 이곳은 신아와 무예 수련을 위해 찾던 곳이었다. 그러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신아와의 추억이 묻어 나왔다.
한참 동안이나 생각을 정리한 수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말해야 한다. 결심을 굳히니 정수리에 앉아 있던 청설모가 쪼르르 숲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산하기 위해 몸을 돌리자 아까 본 환각과 눈이 마주쳤다. 수는 내딛던 발을 멈추어 섰다. 신아는, 환각은 전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수는 잠시 몸을 굳혔다가 시름에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천천히, 수면 위를 걷는 듯 걸어 그 앞에 섰다.
세상이 자신의 결심을 시험하는 듯했다. 수는 냉랭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환각을 내려 보았다. 꼭 화가 난 듯 보였다. 가르치는 이는 미움받는 일에 적응해야겠지. 수는 낯선 신아의 얼굴에 적응하려 했다.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그렇게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신아야.”
이름을 부르자 환각의 동공이 크게 일렁였다. 수는 허리를 숙여 환각과 시선을 맞추었다. 막상 하려니 별거 없지 않은가. 수는 제 앞의 생생한 환각에 옅게 웃었다. 예행연습과도 같았다.
“…그래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환각에, 신아에게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