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종장 (完)
티비 속 아나운서가 말했다.
[정오를 여는 시사, 간단시사 박진호입니다. 첫 번째 주제부터 흥미롭습니다. 오늘로써 새로운 시작의 날, 즉, 엔드맨이 이 세상에 남겨진 모든 몬스터를 멸종시킨 지 꼭 일 년째 되는 날인데요. 임용하 박사님. 맞나요?]
[예. 맞습니다.]
[혹시라도 모르는 시청자들을 위해 자세히 좀 설명해 주시죠.]
[예. 50년 전 갑자기 나타난 던전과 몬스터는,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하. 글쎄요. 저도 알고 싶네요. 하지만 이유는 몰라도 누구 덕분에 던전이 소멸됐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누구죠?]
[엔드맨. 1년 전 오늘 그가 나타나 전세계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더 이상 몬스터는 없을 것이라고. 그게 첫 번째 날이었습니다.]
[박사님. 제가 알기로는, 그가 실제로 나타난 적은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꿈을 매개체로 엔드맨이 나타나, 위와 똑같은 말을 했었죠.]
[전세계인이 한날한시에 같은 꿈을 꾸었다, 맞나요?]
[예. 놀랍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습니까?]
[엔드맨이 꿈에 나타난 지 정확히 24시간 후, 모든 몬스터들이 사라졌습니다. F급부터 S급 던전, 그리고 곳곳에 나타난 게이트들까지요.]
[신기한 일이네요. 그 다음날에도 신기한 일이 하나 생겼었죠?]
[예. 엔드맨이 또다시 전세계인의 꿈에 나타나 너희들에게 준 힘도 돌려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했었죠.]
[24시간 후에 말이죠.]
[예.]
[각성자들의 반발이 엄청났겠습니다.]
[처음에는 엔드맨을 찾으려는 각성자들로 인해 전세계가 초긴장 상태에 빠졌었습니다.]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엔드맨을 찾지 못했어요.]
[비각성자로 살아갈 바에야 죽음을 택한 각성자도 있었나요?]
[예.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남은 24시간 동안, 사람을 해치려는 의도가 보이는 공격은 모두 캔슬됐거든요. 기적이죠.]
[기적이라 표현하셨는데요. 이유가 있을까요?]
[A급 헌터 한 명이 일으킬 수 있는 파괴력은, 소형 핵탄두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강하다고요?]
[예. 더군다나 던전에 묶여 있던 각성자들이 힘을 빼앗긴다 생각하니 사력을 다했을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요.]
[정말 기적이 맞네요. 여기에 의견이 분분한데요. 정확한 물증은 없지만, 이 모든 기적이 엔드맨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혹은 엔드맨과는 상관없다. 둘로 나뉘어 있습니다. 박사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그건 아직 조사 중입니다. 하지만 제 사견이나, 아니면 업계의 주요 여론이나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죠?]
[엔드맨이 이 모든 상황을 종식 시킨 것이 맞을 거라고요.]
[네. 잘 들었습니다. 첫 번째 주제에 들어가기까지 참 오래 걸렸는데요. 어쩌면 엔드맨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다고요?]
[국제 AI연구소에서 만든 성문분석기를 통해 많은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엔드맨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요.]
[목소리가 녹음돼 있던 것도 아니고, 찾을 수가 있나요?]
[그 목소리. 아나운서님은 잊어버리셨습니까?]
[아뇨. 지금도 한 글자 한 글자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 지켜보고 있다고 말 한 건 아직도 오싹하네요.]
[저희도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조사한 것에 불과하지만, 표본의 일치율을 살펴봤을 때 증거로 채택하기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가 나온 게 있습니까?]
[먼저 300만 명 이상의 표본을 통해 최대한…….]
아나운서는 지루한 설명을 잘도 꾸역꾸역 듣고 있었다.
이윽고 박사가 주장한 핵심이 튀어나왔다.
[엔드맨은 아시아인이며, 걔중 한국인일 가능성이 99퍼센트가 넘습니다.]
[…조금 충격적인 결과인데요, 혹시 결과에 애국심이 들어간 것은 아닌가요?]
[제 명예를 걸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 엔드맨의 정체가 한국인이라고 합니다. 저 또한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네요.]
[네, 이제 이것을 지역별로 구분해서 주요 각성자들을 특정한다면 아마 어렵지 않게…….]
“요새는 저런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졌어.”
같이 티비를 보던 임한나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빤히 티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임한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이 돼? 엔드맨이 한국인이라니.”
“한국인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겠어. 네 수명을 원래대로 돌려준 사람인데.”
“그러니까 중요하지.”
임한나는 일 년 전 오늘, 천재박명이 빼앗아간 수명을 모두 돌려받았다.
그럼에도 연예인 뺨치게 예쁜 미모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거참 이상하다니까. 나랑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은 다시 원래 얼굴로 돌아갔다던데.”
“…네가 운이 좋았나 보네.”
“그런가? 이게 다 우연이라는 거지? 엔드맨이 한국인이라는 것도, 내 외모가 그대로인 것도.”
“그렇다니까 그러네. 왜, 뭐가 불만인데?”
“아니. 한번 찾아내서 고맙다고 인사나 할까 해서.”
“인사는 무슨. 잘 살면 그걸로 된거지.”
“아니. 난 찾아야겠어. 아카데미 때부터 봤지? 내가 얼마나 독한지.”
알고 있다. 한번 하기로 결심한 건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 독기.
나는 임한나가 못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티비 속에는 한창 각성자들의 그날 이후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엔드맨이라는 사람이 천성은 착한 모양이야. 각성자들에게도 새로운 직업을 줬잖아.”
“아, 그거. 덕분에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어졌지.”
엔드맨은 모든 던전과 몬스터를 일거에 소멸시켰다.
모든 각성자에게서 무자비하게 힘을 뺏어오기도 했다.
딱 봐도 사회에 엄청난 혼란을 야기시킬 것처럼 말이다.
실업자가 된 각성자들, 몬스터를 잡아 얻은 마석으로 발전된 과학 문명 등.
주가는 요동치고 경제는 개박살 난다.
그렇게 커다란 사회적 혼란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그래서 각성자들의 능력을 없애는 대신 바꿔버렸다.
생산직 느낌으로.
치유술사, 포션을 만드는 연금술사, 마나홀에서 마력을 뽑아 온갖 것을 만드는 대장장이 등등.
덕분에 각성자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그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온갖 방면으로 각성자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티비 속 자막에도 나온다.
S급 대장장이가 만든 마력 제어복 덕분에 1인 우주선으로 화성에 안착하는 것에 성공했다고.
물론 이건 이것대로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세상은 전보다 좋아졌고, 더 이상 몬스터에 벌벌 떨 일은 사라졌다.
평화로운 봄날의 햇살을 느끼고 있는데, 임한나가 가자미 눈을 뜨고 있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영 찜찜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임한나의 시선이 떨어지는 칼날 같았다.
“뭐, 조만간 밝혀지겠지. 도대체 누구인지.”
***
오랜만에 찾은 일성은 전과 같았다. 1층 로비부터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없었다.
나를 발견한 직원 중 한 명이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회장님!”
후다닥 튀어온 직원이 허리를 넙죽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신다는 말씀을 전달 못 받았습니다.”
“제가 뭐라고요.”
“회장님이잖습니까.
“거참. 회장 아니라니까.”
“한 회장님이 꼭 그렇게 부르시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직원이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더 말했다가는 나만 손해일 것 같아서 본론을 꺼냈다.
“그 양반은 어디에 있어요?”
“집무실에 계십니다.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따라가 보니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는 가장 위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주현 씨.”
“회장님.”
“회장 아니라니까. 것보다, 지금 안에 있어요?”
“예. 모시겠습니다.”
“아니에요. 일 보세요. 아참.”
“네?”
“요즘에도 지하철 나가서 김밥 팔아요?”
아무리 봄이라도 추울 텐데.
하고 혀를 찼는데, 김주현이 입가를 가리고 웃는다.
“저 그거 그만둔 지가 언제인데요. 집에 있던 빚 다 갚은 이후로요.”
“아. 다 갚았구나.”
“회장님이 첫 월급날에 홍 팀장님 닦달해서, 빚부터 해결한 거.”
“그랬었나요?”
“저한테는 비밀로 하셨어요. 제가 회사 기밀 문건에 있던 거 확인해서 알아냈지.”
당당하게 기밀을 파헤쳤다는 데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회사도 아닌데 뭐 어때.
눈앞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집무실의 문이 보였다.
문득 처음 이곳을 들어갈 때가 생각난다.
A급 스킬 하나를 얻고 벌벌 떨면서 최태성을 마주했던 그날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먼저 문이 열렸다.
“어? 오빠다!”
김세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다들 이것 좀 봐! 이 오빠 아직 살아 있었어!”
“잠시만. 세린아. 누가 들으면 죽은 줄 알겠…….”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각각 박하영, 이지은, 전용철이었다.
“누구? 누가 와?”
“…보고 싶었어요.”
“드디어 등장하셨네.”
한마디씩 내뱉은 사람들이 내 몸을 이곳저곳 만져댄다. 진짜 살아있던 게 맞냐면서.
“귀신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야. 아직 몰라. 이태진이 어떤 양반인데.”
김세린의 말에 박하영이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나를 노려본다.
“이제 일성 같은 건 필요없다는 거지. 그게 아니면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인 게 말이 돼?”
“한번 때려보자. 사람이면 아플 거 아니야.”
“그거 좋은 생각이네.”
그러더니 내 양팔을 철썩철썩 때린다. 가만 보니 이지은까지 가세해서 퍽퍽 쳐댄다.
얘 지금 웃고 있는 건가?
단단히 화가 난 게 이해는 갔다.
내가 그동안 조용히 지내던 건 맞다. 일 년 정도.
임한나와 여행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좀 먹느라.
그래서 가만히 녀석들의 폭행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안 죽었고, 안 까먹었고, 귀신 아니다. 그냥 쉬고 온 거야.”
“흥! 요새 포션 가게 열어서 잘나간다면서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일성이 모르는 건 없어요. 몰라요?”
“그걸 이럴 때 쓰는 거였나?”
“요새 장사 잘돼요?”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
딱 그 정도다.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 너무 손님이 많으면 나도 귀찮거든.
어쨌든 두런두런 그간의 이야기를 하던 도중, 박하영이 김세린에게 눈짓을 줬다.
“스승과 제자끼리 할 말도 남은 것 같은데, 저흰 이만 물러가 드리죠.”
그러더니 김세린의 귀를 잡아끌고 나간다.
이윽고 집무실에 남은 것은 한석훈과 나뿐이었다.
한석훈은 내가 들어오던 순간부터 나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그의 맞은편에 털썩 앉은 순간, 그가 말했다.
“이제 회장 자리 받으러 온 거냐?”
“뭘 받아요. 저 그런 거 관심 없다니까.”
“관심 없어도 받아. 나도 이런 것 못 해 먹겠다.”
“그런 거 치고는 잘하시던데요.”
일성은 몬스터와 던전이 사라진 이후에도 줄곧 한국 제일의 기업으로 남아 있는 중이다.
아니, 최근에는 미국에서도 상장을 준비 중이라고 하니 전보다 더 잘나가고 있다 봐야겠지.
“어째선지 우리 일성에 인재들이 많아졌어.”
“일성이니까요.”
“찜찜할 정도로 말이야.”
각성자들은 고유 능력이 사라진 대신, 생산적인 능력을 얻었다.
S급은 S급에 맞는 능력을, A급은 A급에 맞는 능력을.
걔중, 유독 일성은 능력의 전환이 이상할 정도로 상향조정됐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나한테.
한석훈이 내 위아래를 훑어봤다.
꼭 임한나가 내게 보냈던 시선같다.
“대체 이 팔은 왜 돌아와 있는 걸까?”
“운이 좋았던 거 아닐까요.”
“하필 엔드맨이라는 놈이 꿈에 나타난 다음날 팔이 돋아났단 말이지.”
“놈이 아니라 은인 아닐까요?”
“난 이상하게 놈이라고 부르고 싶어져.”
“심보 고약하시긴.”
한석훈이 그렇게 한참 나를 노려보더니, 피식 웃는다.
“어차피 너 아니어도 일성 회장 할 사람 많아.”
“잘됐네요. 누가 한대요?”
“박지현.”
“예?”
김주현이 놓고 간 차를 들이키는데, 뱉을 뻔했다.
“걔가 그걸 왜 해요?”
“하고 싶대. 대충 일 몇 개 맡겨서 시켜주니까 잘하더라. 최근엔 중국 가서 계약도 따내 왔어. 마석이 묻힌 광산, 그것도 독점 계약으로.”
“…돈은 많이 벌었겠네요.”
눈앞에 박지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확실히. 돈 욕심이 많았지 일은 잘했지.
“2조짜리 계약이었으니까. 앞으로 민수정도 일성에 올 거야.”
“민수정이요? 그 아카데미 총장 민수정?”
각성자 아카데미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조금 다른 의미로.
누군가를 죽이는 방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살리고, 만들고, 창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된 것이다.
“정철규랑 윤진아는 각 부회장 자리를 맡을 거고.”
“팀장님은요?”
“팀장은 언제적 팀장이야.”
“형이라고 하기엔 나이 차가 많이 나잖아요.”
“이 새끼가. 됐고, 내놔.”
한석훈이 귀찮은 듯 손짓했다.
“청첩장 내놓으라고. 뭘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이 양반.
이건 또 어디서 들었지?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설만 나한테 감시라도 붙인 건가?
그랬을 수도 있다.
심지어 지금의 나는 대부분의 힘을 일부러 봉인시켜 놓은 상태다.
시스템과 마왕, 그 두 놈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단,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전지전능한 그 힘을 다시 내 몸속에 박아넣을 수 있게끔 준비는 해놨다.
“감시는 개뿔. 임한나 왔다 갔더라.”
“예? 걔가 여길 왔다 가요?”
“음. 부탁할 게 있다고 해서.”
“뭔데요?”
“비밀.”
그러면서 한석훈이 수상하게 웃었다. 매우 수상하게 말이다.
“어쨌든 결혼은 언제 하는 거야?”
“부랴부랴 진행해서요. 다음 달에 합니다.”
“적당하네.”
“그렇죠. 5월일 테니까.”
“아니, 그게 적당한 게 아니라. 어쨌든. 프러포즈는 제대로 했어?”
프러포즈라.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불에 발차기를 한다.
비실비실 나를 보며 웃는 임한나와 떠듬떠듬 고백하는 나.
젠장할.
어찌나 떨리던지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다.
만약 임한나가 받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강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오실 거죠?”
“가야지. 그날이 어떤 날인데.”
킬킬대며 웃는 한석훈이 영 수상했다.
느낌은 모르겠다만, 왜 이러는 거야?
***
5월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뒤로는 푸른 호수가 펼쳐져 있는 숲속.
야외에 차려진 예식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돈 좀 쓴 보람이 있다고나 할까.
“올 사람은 다 왔나?”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부를 사람만 불렀으니까.
가장 의외는, 손영혁과 화이가 온 것 정도?
멀리 있던 손영혁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흠칫하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는 화이가 낄낄대며 그의 등을 치대고 있고, 그 옆으로는 조영은과 음지 3인방이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는 김수정이 그 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고.
“박지현만 빼고 다 온 것 같네.”
내 말에 임한나가 말했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니?”
“무슨 말이야?”
“안 온다더라고. 니가 이겼다고.”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그렇게 말한 임한나가 드레스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벌써 열다섯 번째 묻는 말을, 다시 한번 묻는다.
“괜찮아?”
“예쁘다니까.”
“왜 짜증이 섞여 있지?”
“그건 니 기분 탓이야.”
어느새 시작된 결혼식.
나와 임한나가 마주 보고 섰다.
이제 키스만 하면 그녀와 나는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
“잘 어울린다!”
“예쁘게 잘 살아라!”
그렇게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그녀 가까이 얼굴을 밀착했을 때.
임한나가 속삭였다.
“엔드맨이지.”
“…뭐?”
“사실대로 말해. 엔드맨인 거 다 아니까.”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아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해?”
“어. 궁금해. 미치도록 궁금해. 그래야 고맙다고 할 거 아니야.”
“고맙다고 안 해도 된다니까.”
“아니. 난 꼭 해야겠어.”
임한나의 눈빛이 결연하다. 이러면 키스고 뭐고 다 날아가게 생겼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맞아. 엔드맨. 됐어? 이제 속이 풀려?”
근 1년간 잡아떼던 게 이렇게 날아갔다.
“역시!”
임한나가 쾌재를 부르짖는다. 그런데 어째선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잡은 순간이었다.
임한나가 먼저 내 얼굴을 끌어당겼다.
훅 풍겨오는 향기가 아찔했다. 천국이 있다면 이곳일 것이다.
그러기를 잠시, 임한나가 내 얼굴을 떼어놓았을 때였다.
“그놈이 그놈이래? 임한나!”
옆에서 괴성이 들렸다. 한석훈이 간절한 얼굴로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임한나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준다.
“역시! 끄아아악! 역시! 내 생각이 맞다니까! 왜 안 믿어 준거야!”
한석훈이 미친놈마냥 방방 뛰어다닌다. 저 인간이야 원래 미친사람이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임한나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왜 그래?”
하고 물어보니 얼굴이 더더욱 굳었다.
“사실.”
“사실?”
“내가 목소리를 전달해줬거든.”
“무슨 말이야?”
“사실대로 말 안 할까 봐. 임용하 박사한테 이태진 음성파일과 엔드맨을 비교 분석해 달라고 말했다고.”
임용하 박사?
저번에 티비에 나왔던 그 사람?
드레스를 입은 임한나가 점점 멀어진다.
“혹시 몰라 여기에 불렀어.”
“임용하 박사를?”
“응. 그리고 기자들도.”
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리무진에서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내렸다.
그들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발견했다.
“아! 저기 있다!”
기자 한 명이 외침과 동시에 수십 명이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결과가 나왔을 거야.”
“한나야. 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미안. 솔직히 니가 끝까지 잡아뗄 줄 알고. 이렇게라도 해야 했어.”
슬금슬금 멀어진 임한나가 이내 단상 밑으로 내려갔다.
어째선지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사이 수많은 기자들이 내 앞에 다가왔다.
꿀꺽 침을 삼키면서, 조심스러운 기자들의 태도가 보인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이태진 씨. 혹시 정말인가요?”
“방금 소,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임용하 박사의 말로는 이태진 씨가…….”
차마 끝말은 할 수 없었던지, 기자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펴본다.
그때쯤 예식장에 온 손님들도 수근대기 시작했다.
굳은 표정으로 날 보는 손영혁,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인지 생글생글 웃는 김세린과 박하영,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나를 주시 중인 민수정, 그리고 아직까지 괴성을 부르짖고 있는 한석훈까지.
차라리 여기 있는 모두의 기억을 지워버릴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저 손가락 한번 튕기면 될 일이다.
그런데.
임한나의 저 눈빛을 좀 봐라.
백년 쯤 묵은 체중이 내려가는 동시에, 글썽대며 주룩주룩 눈물까지 흘려대는 저거.
쟤가 저 정도 감정표현을 하는 거면 대성통곡과 비슷한 거다.
한숨을 쉬며 마이크 하나를 잡았다.
기자들은 그때까지도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한숨을 한 번 쉬고. 사람들을 마저 둘러보며 말했다.
이 세상의 평화가 영원히 유지되려면, 이 방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제가 엔드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