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종장 (2)
이런 기분이었구나.
힘이 넘친다는 느낌이 아니다.
힘 그 자체가 됐다.
굳이 인간의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외형을 버릴 필요도 없었다.
이 형상이야말로 내 근본을 지켜주고 있는 방어막이니까.
당연히 상태창도 사라졌다.
그 말인즉, 내 힘은 시스템의 영향에도 벗어났다는 뜻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아주 가까워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고 할 수 없는 것은 없다.
바르르 떨고 있는 일 장로와 아락투스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멈칫거리기 일쑤다.
자신들의 주인과 같은 느낌이 들겠지.
동시에 그들의 생각과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개중 일 장로에 대한 것은 꽤 흥미로웠다.
이계의 엘더 엘프로 태어나 동족을 인질 잡힌 그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여야 할 엘더 엘프는 그렇게 시스템의 종이 됐다.
낯선 지구에 끌려와 종교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예비한 일이었다.
원래 내가 택하기로 한 미래 중 하나는 시타둠교의 교주였으니까.
아마 시스템이 그린 미래 중 가장 유력한 후보였을 것이다.
아락투스의 과거도 머릿속에 촤르륵 펼쳐졌다.
인간이었던 시절, 리치, 그리고 군단장이 되기까지.
이래서였다.
시스템이 미래를 보는 척할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모든 생명체의 과거를 추적하고, 행동 패턴을 예측하는 것이다.
그때쯤 사막의 두 기운은 모두 내 몸에 흡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붉은빛을 내던 모래는 색을 잃었다.
시스템과 마왕의 꼭두각시들이 수없이 쓰러진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만큼 시스템과 마왕이 차지하려고 애쓴 곳도 이곳이다.
이곳만 차지하면 다른 한 놈을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웬 놈이 그것을 낼름 먹었으니 얼마나 분할까.
하늘을 바라봤다.
두 기운의 충돌이 이전보다 더 자세히 보였다. 그들이 어떤 의사소통을 나누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인간의 표정을 보는 것처럼 뚜렷했다.
놈들의 표정이 어떠냐고?
당혹, 두려움, 긴장, 후회.
특히 시스템의 반응은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왜 이태진이 저렇게까지 되는 동안 가만 있었을까. 마왕의 눈치만 살필 것이 아니었다. 아니, 처음부터 놈은…….’
“크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한때나마 완전무결해 보였던 시스템이 저렇게까지나 추락하다니.
인간이나 할법한 감정을 품은 놈들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다르게 해석하자면, 지금의 나는 놈들이 두려워할 정도가 됐다.
손을 들었다.
아락투스와 일 장로가 움찔거렸다. 도주를 준비하던 녀석들의 마력이 흩어진 것도 그때였다.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허나.”
쏴아아아아-!
일 장로와 아락투스의 몸에 있던 마력이 일제히 내 쪽으로 흡수됐다.
“그것이 너희들을 가만히 놔둘 이유는 못 되는군.”
“자, 잠시만!”
“기다려어억!”
어느 누가 자신의 힘이 사라지고 있는데 가만 있을까.
일 장로와 아락투스가 동시에 내 쪽으로 몸을 뻗었다.
비틀대는 그들의 몸이 내 앞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그들의 힘은 모두 내 안으로 흡수된 상태다.
“힘을 빼앗겼어. 내, 내 힘을.”
“큭. 비로소 완전무결해졌겠구나.”
바닷물에 소금물 한 방울 더 넣는다고 티가 날까.
저것들의 힘을 흡수한 것은 그저 전리품을 취한 것과 비슷했다.
굳이 이유를 덧붙이자면 인세의 일에 시스템과 마왕이 간섭하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고.
일 장로와 아락투스는 이미 마음의 정리를 한 듯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일 장로의 눈빛에 미련이 가득하다.
그녀가 한숨을 털어내며 말했다.
“결국 시타둠께서 실수하신 거다. 처음부터 널 선택해서는 안 됐어.”
“유언은 그걸로 끝인가?”
“한 많았던 세월이다. 드디어 쉴 수 있어 다행이군. 이태진. 가는 마당에 이런 부탁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쪼잔한 네 주인과 다르다. 네 일족은 안전할 것이다.”
“……고맙다.”
일 장로가 눈을 감았다.
굳이 죽이지 않아도 된다. 일 장로 또한 피해자가 아니던가.
허나.
“인정에 사로잡혀 예외를 둘 수도 없는 법.”
굳이 고통을 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의 심장이 일제히 멈췄다.
털썩. 털썩.
일 장로와 아락투스가 쓰러졌다.
사막 밑에 봉인된 수많은 꼭두각시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주인만 믿고 때를 기다리던 것들은 한 줌 모래로 흩어졌다.
이로써 시스템과 마왕의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성전.
위대한 전쟁을 벌일 자신의 체스말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그 기분이 오죽할까.
“다. 다 끝났어.”
하오란이 털썩 주저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녀석이 생각이 깊어진 듯 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러던 하오란이 정신을 차린 건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하오란은 아까부터 나를 꽤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힘마저 빼앗을까 봐.
그럴 리가.
나는 흡수한 힘들을 다시 원류의 마력으로 바꿨다.
그 후, 하오란에게 주입시켰다.
하오란이 원래 담고 있던 시스템의 흔적은 산산조각 났다.
대신, 내가 준 힘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하오란이 눈을 번쩍 떴다.
이제껏 바라마지 않던 300레벨에 도달한 것이 신기한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기까지 한다.
자신의 손과 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하오란이 히죽히죽 웃었다.
그것도 잠시. 하오란이 결연한 눈빛을 띠며 내게 말했다.
“이 힘을 준 이유가 있겠지?”
“한 가지.”
하오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함께 시스템의 꼭두각시로 어지간히 고생한 녀석이다.
또다시 그 고생이 반복 될까 봐, 녀석은 그게 두려운 것이다.
“이 사막의 부족들을 지켜다오.”
“뭐?”
“그거면 된다. 아마 제국 또한 힘 잃은 모래를 보면 더 이상 이 척박한 곳을 탐내지 않을 터.”
녀석이 황당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그게 끝이냐는 표정이다.
“황제를 찾아가 확답은 받아야 할 거다. 어렵지는 않겠지?”
“어, 어. 어렵지는 않지. 그래서 그 다음은?”
“그걸 왜 물어. 나무꾼인지 약초꾼인지. 살면 되겠지. 아참.”
다시 하오란이 침을 꿀꺽 삼킨다.
“몇몇 드래곤이 너를 주시하고 있을 거다. 도움이 필요한가?”
“아, 아니. 시스템이 간섭만 하지 않으면 그놈들이 나를 건드리지도 않을 거야. 제 목숨 아까운 줄은 아니까.”
300레벨에 도달한 이상 이 땅의 드래곤이라는 것들도 감히 하오란을 이길 수 없다.
늘 그랬듯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드래곤이 아니라면 이 땅에 나를 이길 녀석들도 없고.”
“신나 보이는군. 약초꾼의 꿈은 접는 건가?”
기세만 보면 왕국이라도 하나 건설할 것 같다.
지금 녀석의 힘이라면 이 땅 위의 모든 생명체를 발 아래로 둘 수 있다.
그럴 자격도 충분하다.
더군다나 나도 이셀라의 부족만 아니라면, 이계에 간섭할 생각이 없으니까.
하오란이 눈을 질끈 감으면서, 주먹을 바르르 떨면서 말했다.
“원하지 않는다. 난 평범하게 살 거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 굉장히 원하고 있다. 권력을 휘두르는 자신의 모습마저 그리고 있다.
그런데 약초꾼으로 산다는 말이 거짓은 또 아니었다.
이 무슨 모순된 마음인가 하면서도, 굳이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러든가.”
이계에서의 일은 이제 모두 끝났다.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봤다.
“큭.”
저것들. 손을 잡고 있다.
자신들이 만든 적을 죽이기 위해서, 잠시나마 힘을 합치는 것이다.
“어떡할 셈이지?”
“의미 없는 짓이다. 저것들은 자신의 원류를 찾지 못했어.”
“그럼. 우리가 보는 일도 이게 마지막이겠군.”
“갑자기 감상에라도 빠진 거냐?”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 왔던 일이 이뤄진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하오란의 눈빛이 허둥지둥 갈피를 잡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이태진. 고맙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 불안하다. 이제야 보여. 저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300레벨로는, 겨우 저것들의 일을 방해만 할 수 있을 뿐이야.”
하오란의 불안함을 이해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놈들의 공격은 내가 분해할 수 있다. 분해된 힘을 내 쪽으로 흡수할 수도 있다.
반대로 내 공격은?
불안한 얼굴이 된 하오란에게 말해줬다.
“다시 한번 말해주지. 하오란. 모든 게 끝났다. 우리들의 승리로.”
***
시스템과 마왕은 방심하지 않았다.
내가 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우연이 수억 번 겹쳐진 것에 불과하다.
특히나 성요한이 내 쪽에 붙을 줄은 상상도 못 했겠지.
그러나 결과를 보라.
손을 잡으려던 녀석들은 내가 나타나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 미래조차 못 보는 놈이 하늘 위에 군림하려 했다.
하늘을 뚫고, 가려진 세상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초월자에게만 허락된 세계였다.
전 차원을 굽어 살펴볼 수 있는 왕좌이자, 빌어먹을 시스템이 있는 곳이었다.
놈은 왕좌에 앉아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정하고, 죽은 눈빛으로.
끼기긱, 거리는 놈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갔다.
-시스템이 거래를 요청합니다.
놈이 대화를 요청한다. 여전히 자신이 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저 거만함.
저벅저벅 놈에게 다가간 그대로 몸을 움켜쥐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사람 흉내를 내고 있어.”
인간의 형상을 한 시스템을 원래의 형태로 되돌렸다.
뱀처럼 생긴 그것의 눈깔은 하나였다.
그 어디에도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흔적은 없었다.
몇 번이나 확인한 그 부분이 또다시 나를 기분 좋게 했다.
“너 또한 운이 좋아 여기까지 올라온 것뿐이구나.”
근본은 미개한 벌레였을 뿐이다.
조금씩 큰 생명체를 잡아먹으며 힘을 키웠을 뿐.
-시스템이 거래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거래를 요청합니다.
-시스템이 거래를 요청합니다.
놈의 눈이 의사를 전달해왔다.
무정하다거나, 날 아래로 내려다보던 것은 사라졌다.
다급해진 놈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 느껴진 모양이다.
-시스템이 거래를 요청합니다!
“쯧. 거래라는 건 양방향으로 오가는 것이다. 네가 바라는 건 자비겠지.”
콰직!
꿈벅거리는 놈의 눈깔을 터트렸다.
놈의 저항이 없던 것은 아니나 소용없는 일이다.
순식간에 분해돼 내 몸으로 흡수될 뿐이었다.
-이태진! 거래를 요청!
콰드득!
발악하듯 몸을 뒤틀던 놈이었다.
그럴수록 힘을 더했다.
놈에게는 이 짧은 순간이 영원보다 길게 느껴질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놈의 정신에 끝없이 펼쳐진 지옥을 만들어줬다.
그곳을 헤매는 놈이 보인다. 물어뜯기고, 비참하게 굴러다니는 놈이.
그것은 시스템의 과거였다.
놈이 기억하는 가장 끔찍한 부분.
그 부분을 반복 재생하듯 놈에게 밀어 넣었다.
“내가 당한 만큼, 어디 너도 당해 보거라.”
이윽고 내가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던 순간이 찾아왔다.
시스템이 죽음을 바라는 눈깔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영원한 시간 속, 끊임없는 고통 앞에서 놈이 구걸했다.
-나를 죽, 여, 라. 이, 태, 진.
“그래선 안 되지. 이제 시작인데.”
내가 당했던 시간의 곱절의 곱절의 곱절을 돌려줘야 한다.
시스템의 눈깔이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놈의 머리를 붙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혹여나 놈이 자아를 잃지 않도록 세밀하게 주의했다.
그렇게 분이 풀릴 때까지 수없이 반복한 후에.
더이상 죽여달라는 말조차 나오지 않는 놈을 바라봤다.
놈의 작은 아가리에서는 허연 거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놈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나를 이길 것이라는 희망이 아니다.
죽을 수 있다는 희망. 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곳에 처박혀서, 영원히 그곳을 맴돌아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놈이 가진 모든 힘을 빼앗았다.
천만의 하나를 대비해 놈의 몸속에 바이러스를 심었다.
자그마한 힘이라도 하나 얻으면 바로 알람이 오게끔.
그것도 모자라 기계 장치 비스무리한 것도 만들었다.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되면 그 즉시 놈의 대가리를 꿰뚫을 것이다.
절망에 빠진 놈의 눈을 선명히 담았다.
놈은 영원히 죽지도 못하며 지옥을 헤매게 될 것이다.
영원히.
몸을 돌렸다.
아직 할 일이 몇 가지 남아있다.
가장 먼저는 마왕을 치우는 일.
손을 휘두르자 공간이 갈라졌다.
한창 도망치는 마왕이 보였다.
마왕의 모습도 시스템과 다르지 않았다.
무서운 뿔도, 날개도 없는, 그저 제 안위를 위해 도망치기 바쁜 놈.
자신의 자식이나 다름없는 몬스터와 던전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손을 뻗어 마왕을 끄집어냈다.
시스템의 바로 옆에 털썩 주저앉은 놈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왕에게는 듣고 싶은 말도 없었다.
놈의 대가리에 손을 얹고, 시스템과 똑같이 만들어줬다.
놈 또한 영원히 지옥을 만들어주게.
“거기서라도 만난다면 어디 힘을 합쳐 보거라. 가끔 들려서 안부 정도는 확인해 줄 테니.”
그렇게 내 복수는 끝났다.
이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차례다.
환상 세계에 있을 때부터, 나를 지탱해준 존재들.
그들을 만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