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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68화 (168/170)

168화 종장 (1)

여전히 환상 세계 안이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며, 내일도 그럴 것이다.

더이상 우리가 서 있는 배경은 사막이 아니었다.

암흑천지와 흡사한 끝없는 우주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우리 주위에 남은 인물도 없었다. 그저 놈과 나, 둘만이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성요한과 내가 마주보고 섰다.

성요한의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공허만 가득찬 죽은 눈빛.

아차 싶어 동공에 힘을 주는데, 그것마저 어색했다.

정신을 차린 김에 전투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성요한과 나는 칼을 맞대고 대치 중에 있었다.

놈의 허옇게 죽은 눈빛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방심해서는 안된다.

전투와 의식상태는 상관 없다는 게, 오랜 죽음에서 깨달은 결론이었다.

언젠가부터 의식도 없이 반복된 동작을 수행해나갔다.

그저 끊임없이 검신의 축복의 숙련도를 올리는 반복되는 노가다가 반복됐다.

조금씩 올라간 검신의 축복 숙련도는 마침내 놈과 같은 수준에 올라섰다.

완벽하게 놈과 동수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한 번이다.

이번 턴에 성요한을 이길 수 있다. 그 말이 환상 세계를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희망 하나가 원동력이 됐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순전히 내 감일 뿐인데.

정말 웃기지도 않게도, 어느 순간부터 성요한이 내게 맞춰주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를 하나하나 가르치려는 선생 같은 느낌이랄까.

확실히 몇몇 움직임들은 대련하는 것 이상의 의도가 숨어있기는 했다.

성요한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때였다.

“거의 다 왔군.”

허옇게 죽어있던 성요한의 눈빛이 돌아왔다.

성요한이 침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제 나도 조만간 쉴 수 있겠어.”

“무슨 소리냐.”

“말 그대로다. 어차피 승부가 지속된다는 가정하에, 내 패배는 확정적이었다.”

“내가 버틸 줄 알았다고?”

“그 독기 하나 때문에 시스템이 너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들의 공통점이 무엇인 줄 아느냐. 일장로같은 신봉자와 다른 근본적인 공통점.”

“의심이 많다는 것.”

“그래. 끈질기지. 애초에 시스템이 우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 거지 같은 과정을 버틸 수 있는 놈이 우리 같은 족속뿐이라서다.”

“말이 길어지는군.”

“요는 시스템도 일장로같은 녀석을 원하지만, 우리에게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지.”

“이제껏 무의식에서 고민했던 게 겨우 그따위 것이냐?”

나도 모르게 말이 험하게 튀어나갔다.

그러자 놈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마지막 협상 이후부터 쭉 생각해온 것이 있다.”

“뭐지?”

“우리 둘 다 살 수 없다면, 한 명에게 힘을 몰아주는 편이 낫겠다고.”

“내가 알던 네놈과는 다르군.”

“그래. 원래는 이럴 생각이 아니었다. 네놈을 죽일 수 없다면 온 세상을 파멸시키고 죽을 작정이었지. 현실로 나가자마자.”

성요한이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거기에 침을 뱉어주는 대신, 한번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무슨 개수작이냐.”

“개수작이 아니다. 우리 둘 중 한 명의 힘이 다른 하나를 압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시스템과 마왕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방법은?”

“완성된 검신의 축복과 시스템의 능력, 그리고 마신이 네게 준 마력. 그것들을 하나로 합치는 것.”

솔직히 소름 돋았다.

내가 한 생각과 너무 똑같아서.

300레벨에서 꿈쩍도 않고 멈춘 경험치 통이다.

아마 이것이 인간 본연의 한계겠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각 스킬의 숙련도를 올리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로는 시스템과 마왕에게 이길 수 없다. 겨우 스파이짓이나 하며 빌붙어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놈이 말한 방법이었는데.

성요한이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봤다.

“내가 선택받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지나온 시간을 내 삶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내게 검을 가르치고 있는 게 착각이 아니었군.”

“조금 더 안식을 빠르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네놈이 빨리 강해져야 내가 빨리 죽을 수 있을 거 아니더냐.”

“이래놓고 현실로 돌아가면 수작질 부리는 거 아니겠지?”

“결국 답은 정해져 있다. 네가 나를 이기더라도 그것은 간발의 차이일 수밖에 없다.”

“300레벨의 한계 때문에.”

“그래. 전장을 이계로 고른 이유가 그것 때문 아닌가?”

자신을 믿으라는 소리였다.

자신이 곱게 죽을 것이라는 믿음.

확실히 이제껏 했던 어떤 말보다 신뢰가 가기는 한다.

놈은 행동으로 증명했다.

원한다면 시간을 더 길게 끌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따라잡히고 말았겠지만 꼬장을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네놈 성격이면 충분히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나를 괴롭히겠군. 오너라.”

성요한이 검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놈이 수작질을 부린다.

한석훈이 나를 가르칠 때와 완벽히 똑같은 동작을 취한 것.

나 또한 놈의 놀음에 맞춰주기로 했다.

그 시절 나로 돌아가 자세를 갖췄다.

놈의 말대로 이번 턴에 나는 성요한을 꺾을 것이다. 허나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성요한을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환상세계를 유지할 것이다.

끊임없이 놈을 테스트하고, 의심할 것이다. 완전히 납득이 될 때까지.

***

성요한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드디어 원래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됐다.

드디어.

***

화악!

환상 밖으로 튕겨져 나왔을 때.

아주 오래전 기억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뜨거운 열을 뿜어대는 사막, 아래에서 올라오는 마력, 위에서는 두 기운이 충돌하고 있다.

성요한과 내가 마주보고 섰다.

옆을 보자 하오란이 보인다. 아마 하오란의 시점에서는 원래 세상의 집무실에서 차원을 이동한 뒤, 조금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하오란은 역시 눈치가 빨랐다.

“안 된다. 안 돼! 잠시만!”

문득 하오란이 내 앞을 막아섰다.

“우주 공간, 우주 공간으로 다시 전장을 설계해야 한다. 이곳에서 싸웠다가는 끝장이야!”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하오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의 아내가 이계 어딘가에 살고 있다고 했지.

하오란이 털썩하고 무릎까지 꿇는다.

나와 성요한은 그것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봤다.

성요한이 고개를 다시 돌려 나를 바라봤다.

성요한의 눈에 담긴 적의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다만, 잠깐 하늘을 바라본 성요한이 눈에 횃불을 밝힌 채 말했다.

“너만큼은 성공해라. 꼭 그것들을 도륙내거라.”

그 말이 끝이었다. 성요한이 눈을 감고 차례를 기다렸다.

약속대로, 세상을 부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이제껏 노이로제처럼 나를 괴롭혔던 성요한이다.

예전 같았으면 끔찍하게 고문이라도 했을 것이지만.

싹둑!

내 칼이 깔끔하게 성요한의 목을 갈랐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죽었으리라. 아니,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안식에 들었다고 해야겠지.

옆에서 이 현장을 쳐다보던 하오란은 여전히 떨떠름해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

그의 말에 답해줄 정신이 없었다.

성요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나홀이 자연에 흩어지지 않게, 내 몸에 가두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직접적으로 경험치로 전환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시스템의 손에 다시 성요한의 힘이 들어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

그렇게 마나홀 왼편에 두툼하게 자리 잡은 성요한의 마력까지 모두 확인했다.

그제야 하오란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끝났다.”

“끝? 끝이라고? 이게? 대체 무슨.”

하오란은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녀석을 무시하고 상념에 빠졌다.

나는 시스템과 마왕,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압박에 놓였다.

안 그래도 숨어서 나를 지켜보는 것들이 느껴졌다.

아락투스와 일 장로.

그것들이 조만간 이쪽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시스템을 골랐을 거다.

비록 나를 괴롭힌 의도가 악하다고는 하나,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그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용쓰는 것처럼 보이니까.

멀리서 보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둘 중 어느 놈의 손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얻어낸 것이 많다.

검신의 축복이 완전한 완성단계에 접어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300레벨을 뛰어넘을 방법.

거기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거기에는 성요한이 큰 도움을 줬다.

그와 했던 대화와 유추를 통해 발견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힘과 어둠의 마력을 하나로 합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합칠 수 있다.

심지어 지금 알게 된 것인데, 남겨진 성요한의 마력까지 내가 온전히 흡수할 것으로 보인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아주 찰나면 충분하다.

지금처럼.

화악!

***

모든 힘을 합칠 수 있다는 확신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시스템의 힘은 어디에서 왔고, 마왕은 누가 탄생시켰는가.

지금으로서는 신으로 취급되는 그 둘의 근원지는 과연 존재하는가.

혹시 둘은 하나였지 않을까 하는 순전한 궁금증.

분자의 뱃속을 들여다보니 원자가 있었고, 그것을 갈라보니 양성자와 중성자가 나왔으며, 그것마저 갈라보니 쿼크가 나왔던 것처럼.

근원을 찾았다.

시스템의 정순한 기운과 끈적끈적한 마력을 분해하고 또 분해했다.

입자처럼 작아진 그것을 토막 냈다. 토막 낸 그것을 반으로 갈랐다. 원류가 나올 때까지 그것을 반복했다.

그때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제. 하늘이 수상하다.”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깨달은 모양이지.

과연 고개를 들자 놈들의 움직임이 보였다.

다급해 보이는 푸른색 기운과 흑색 기운이 한데 엉켜 있었다.

그럼에도 놈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먼저 나설 용기가 없는 것이다. 혹시라도 자신이 나섰다가 맞은편에 있는 놈에게 당할까 봐.

그렇다고 나를 가만히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멍 때리는 하오란에게 말했다.

“일장로와 아락투스가 나를 공격할 것이다. 나는 현재 미동조차 할 수 없으며, 공격을 받아서도 안된다.”

내 말을 재깍 알아들은 하오란이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삼십 초. 그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내 절대 회복이 끝나버려.”

“그때까지 내가 움직이지 못하면 너는 죽는 건가?”

“어쩐지 그러길 바라는 것 같은데.”

하오란이 쓴웃음을 지으며 창을 매만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할 수 없군.”

“빌어먹을 저 두 악마를 죽일 방법이 있다. 정말 마지막이다. 하오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하오란은 그 말을 끝으로 손에 든 창을 휘둘렀다.

내 목숨을 노리던 무형의 기운이 튕겨져 나갔다.

콰아아앙!

멀리 날아간 기운이 사구에 부딪혀 폭사했다.

멀리서 일 장로가 보였다. 그 옆에는 아락투스도 보인다. 그러더니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 두 놈. 잠시 힘을 합치기로 한 것 같은데.”

하오란의 말을 무시하고 내면에 집중했다.

거의 다 왔다. 단 한 번만 쪼개면 이 기운들을 합칠 수 있다.

내 심장을 둘러싼 고리는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다.

마나홀에 갇혀 있던 마나 또한 그릇이 깨진 상태였다.

온몸에 두 기운이 엉켜 다녔다.

거기에 성요한의 것까지 섞여들었다.

끝이 아니다. 사막에 잠든 군단장들과, 시스템의 종이었던 자들의 마력이 내게 쏟아져 들어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몰아쳤다.

“흡!”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봤다.

정면에는 일 장로의 얼굴이 확대돼 있었다.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는 그녀의 얼굴 밑으로 손날이 보였다.

일 장로의 손가락 끝이 내 목에 닿기 직전이었다.

하오란이 필사적으로 그것을 막고 있었다.

“형제!”

다 왔다.

완전히 분해된 입자들이 한데 섞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푸른색과 흑색 대신 투명에 가까운 마력의 근원들이 명치 쪽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물과 기름인 줄 알았던 기운들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하나로 합쳐졌다.

찰나간에 만들어진 힘의 공백기가 사라진 순간이자, 300레벨을 뛰어넘어 비로소 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됐다.

시스템과 마왕의 감정을 대신 전달해 주는 걸까.

일 장로와 아락투스가 사정없이 얼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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