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167화 (167/170)

167화 성요한 (10)

성요한이 까드득 이를 악다물었다.

눈을 굴리는 것이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하오란은 아무것도 모른 채 꿈벅꿈벅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던 문득 성요한이 답을 찾았다.

“차원을 넘으면서였군.”

섬뜩할 만큼 예리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성요한의 말이 맞았다.

나는 차원을 넘어가면서 이미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알았다.

그래서 그의 정신에 환상 마법 하나를 심어뒀다. 정말 은밀한 작업이었으며, 굉장한 마나가 소모됐다.

어느 정도냐 하면, 차원을 넘나드는 대(大)공간마법보다도 그의 의식에 작은 티끌 하나 남기는 게 더 어려웠다.

또한 한 번 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환상마법을 유지하는 힘 때문에 내 마력은 그만큼 깎여나간다.

다른 말로 전투력 손실이 커진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저 악다문 턱근육만 봐도 뿌듯할 지경이다.

-언제 싸우는 거지? 저놈 뭔지는 몰라도 엄청 당황한 거 같은데.

그 사이에도 성요한은 하늘을 한번 봤다가, 하오란을 한번 봤다가, 다시 나를 보기까지.

성요한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환상이 시작됐는지.

성요한으로서 더 지랄맞은 점이 있다.

지금도 환상 속에 있는 건지, 아니면 현실로 빠져나온 건지 알 수 없다는 것.

“모조리 베면 그만일 뿐.”

성요한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런데 그 속에 미약하게 짜증이 섞여 있다.

시스템이 보여준 미래에서 놈을 오랫동안 분석해온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점이었다.

“전투가 오래 지속될수록 네가 이길 거라는 건 착각이다.”

멀리 있던 성요한이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흠칫하는 하오란에게 뒤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검신의 축복은 너만 가지고 있는 줄 알지. 내 쪽과 네놈. 누구의 특성 숙련도가 더 높을까.”

“별거 없던데.”

“인세의 시간으로 따지면 삼천 년이다. 정지된 시간에서 그만큼을 수련했다. 어느 정도인지 감도 오지 않겠지. 햇병아리 같은 놈.”

나는 낄낄대며 웃었다. 박수도 쳤다. 아까 전 성요한이 웃었던 것처럼 똑같이 말이다.

“그 시간이 흘러도 나와 동수를 이루는 거 보면 세간에 대한 평가는 틀렸어. 둔재도 이런 둔재가 없구만.”

세계 각성자 랭킹 부동의 1위?

“옆집 강아지한테도 너만큼의 시간을 주면 그 정도는 이룰 것 같은데.”

“시스템의 원리를 깨우친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야 해.”

“나를 죽이면 가르쳐주마.”

“오냐. 그래야지.”

성요한이 번쩍하며 사라졌다. 나 또한 곧장 인식의 한계를 벗어났다.

느리게 다가오는 성요한의 검술이 낯익었다.

정정한다. 저번보다는 낯익었다.

확실히 삼천 년이라는 숫자는 허세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변화가 이어졌다.

성요한의 검이 나를 공격한다.

뒤로 물러나며 열심히 분석한다.

검이 부딪치며, 폭음이 터진다. 모래가 바닥을 드러내며 수십 키로미터 바깥까지 밀려난다.

마법을 시전한다. 곧장 파훼 당한다.

그 틈을 노린 성요한이 칼을 휘두른다. 어깨까지 이어진 선이 그어진다. 덜컹하고 잘린 팔이 회복 마법으로 인해 다시 붙는다.

또다시 검과 검끼리 맞붙는다.

콰아아앙!

화마가 나를 집어삼키는 기분이었다.

내가 성요한의 검술을 분석했듯, 놈 또한 나의 버릇을 추적하고 있었다.

언제 마법을 쓰는지,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두르는지.

정말이지 거울과 싸우는 기분이었다.

성요한은 이런 식의 싸움에 굉장히 익숙해 보였다.

성요한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네가 처음인 줄 아느냐! 시스템이 나를 죽이러 꼭두각시를 보낸 게 이번이 몇 번째인지는 아느냐!”

수많은 제2의 성요한, 제2의 이태진이 있었다고 한다.

이계에서, 혹은 본토에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시스템이 동굴에서 숨겨 키운 자신의 꼭두각시들.

“그중에서 나처럼 싸운 녀석도 있었나?”

“너처럼 의심 많고 치졸한 수법을 쓰는 놈은 없었지.”

“마법을 배울 생각은 못 했군.”

“배울 필요도 없느니라.”

조롱했지만, 성요한의 검술에 대한 부분은 파면 팔수록 놀라움만 가중된다.

극의에 섰다는 내 착각을 또다시 부숴버렸으니까.

마치 그 옛날 한석훈에게 수업을 받는 기분이다.

성요한의 동작은 크게 보면 단 세 개 뿐이다.

가로 베기, 세로 베기, 아니면 찌르기.

그런데 거기에서 발현되는 변화무쌍함이 검신의 축복이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레벨만 높은 하룻강아지였다.

물론, 지금에 한한다면 말이다.

이번 승부는 성요한이 이겼다.

무너지는 세상 속 성요한이 내 목을 가르기 직전이었다.

승자와 패자가 명백한 상황.

그럼에도 성요한은 돌처럼 굳어있고,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자극했다.

“어서 죽여라. 다음으로 넘어가게.”

“안 그래도 그럴 참이다.”

그가 칼을 휘둘렀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내 시야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때마침 하늘 위가 유리조각처럼 나눠지고 있었다.

내가 만든 환상마법이 또다시 깨지는 순간이었다.

***

“시스템이 했던 짓을 모방했군. 과거로 시간이 돌아가는 착각이 꼭 그때같군.”

멀쩡해진 사막 위에서 성요한이 말했다.

저벅저벅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였다.

“과연 지금은 환상일까 아닐까.”

“그런 도발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네 마력이 동할 때까지 죽이면 그뿐.”

“그런 날이 찾아올까?”

내가 이 전장을 선택한 이유가 뭐 때문인데.

붉은 사막 전체에서 끊임없이 마력이 솟구쳐 오르고 있다.

중력에 이끌리듯 모두 내쪽으로 말이다.

안 그래도 끝을 알 수 없는 아홉 개의 고리가 더욱 두터워지고 있다.

언제까지 환상을 유지할 수 있냐고?

그건 잘못된 질문이다.

“삼천 년이라고 했나? 그 시간에서 수천 배를 곱해봐라. 어디 내 마력이 끝이 나나.”

지금 이 순간에도 환상 마법의 디테일은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검신의 축복은 성요한을 분석할 것이고, 천재박명은 검신의 축복을 보조할 것이다.

그야말로 무한동력인 셈.

내 정신이 온전한 이상 이 싸움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나의 승리로.

“시간이 갈수록 성요한 당신의 조급한 얼굴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그 말이 끝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다가갔다.

콰아아아!

***

천장이 깨지고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숫자 따위를 세는 것은 처음부터 버렸다.

그런 것에 매몰되다가는 내 정신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영겁 같던 사막에서의 시간이 도움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의 시간을 감사하게 여길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내 정신력은 한결 단단해져 있었다.

지금은 내 눈앞에서 성요한이 온 세상을 부수고 있었다.

나와의 전투를 도외시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셀라를 포함한 사막 부족에게 가지는 책임감을 노리는 행동이었다.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성요한이 말했다.

“또 부숴 보거라.”

***

승부는 장기전에서, 초장기전으로 흐르고 있었다.

내 생각보다도 우리의 승부는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중이었다.

단단했던 처음의 의지가 물렁해지기 충분한 시간이 지났다.

나도 성요한도 시작점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한가지 희망을 꼽자면 성요한의 정신상태도 그리 좋지만은 않아 보인다.

언제는 이 세상을 파괴할 것처럼 쏘다니던 성요한이, 이제는 사막 위에 앉아서 한참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기괴할 정도로 네 검신의 축복이 숙련도를 높이고 있다. 임한나의 특성 때문이겠지.”

그의 입에서 사막처럼 매마른 음성이 튀어나왔다. 고저 없는 톤 때문일까.

오히려 서늘한 감각이 뇌리를 깨웠다.

“임한나. 임한나. 기억났다. 그 계집이 네 약점이었어.”

불길한 말이 들렸다.

“차원을 이동하는 공간 마법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스킬은 알고 있지.”

놈이 사브르를 세워 위에서 아래를 벴다.

종이가 찢어지듯 공간이 찢어졌다.

그것만은 안 된다 싶었다.

이것이 환상 세계임을 알고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는 아래로 향했던 성요한의 검이 내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단 한 번에 찢은 순간이었다.

화악!

또다시 세상이 깨졌다.

***

초장기화됐던 싸움이 영겁처럼 늘어졌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내가 이기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본도를 들었던 성요한의 제자 때처럼. 그의 모든 스킬과 검술과 동작 하나하나를 해부한 다음, 그것을 넘어서는 것.

때문에 검신의 축복과 천재박명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이다.

그 둘의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이, 오래 맞붙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게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상황은 이렇다.

환상에서 깨어난 성요한이 다짜고짜 차원의 틈을 열면, 나는 어김없이 달려가야 한다.

아무리 정신세계 속이어도, 차원을 다루는 고차원적인 스킬이 내 마법을 파훼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달려간 그대로 성요한을 죽이려 들었다. 그때마다 성요한은 거꾸로 나를 죽였다.

나를 죽일수록 성요한의 얼굴은 더더욱 굳어갔다.

자신이 검을 휘두를수록 불리한 것을 알지만 놈으로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지금이 현실이라면?

***

어느 순간부터 내가 조금씩 밀어붙이는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됐다.

아슬아슬하게, 정말 한 치 차이로 성요한에게 죽고 말았을 때.

또다시 되돌아온 사막 위에서 성요한이 말을 건넸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오랜만의 휴전 협정을 요청하는 성요한이었다.

현실에서의 시간은 단 1초도 흐르지 않았지만 성요한의 눈 밑은 푹 꺼져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나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둘 다 폐인 같은 모습으로 마주 보고 섰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라. 어지간한 건 다 수용하겠다.”

그것은 패배 선언이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매말랐던 심장이 쿵쾅댔다.

“네 죽음을 원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너도 알 데.”

“과연 그럴까.”

“죽일 수야 있겠지. 단, 지금까지 흘렀던 시간의 두 배가 더 지나간 후에. 장담컨대 누구든지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요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역시 결심하는 것과 막상 그 일을 경험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처음 환상 마법을 설계했을 때의 다짐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꼭 수면이 아니더라도 휴식이 간절했다.

사막에서 겪었던 시간은 당연히 훌쩍 넘어섰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요한과 손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저 손만 잡으면 시스템과 마왕을 이 땅에서 물리칠 수 있을 텐데.

저 손만 잡으면!

“나라고 이제껏 강해질 방법이 없는 줄 았았더냐. 이 땅의 모든 각성자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죽여 그 경험치를 뺏고 싶지 않았을까.”

성요한이 내 마음을 알아채고, 간악한 혓바닥을 놀려댔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혼란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한다. 내 말을 믿어라. 이태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성요한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내 손을 바라봤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 손을 잡고 싶다.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끝내고 싶다.

성요한에게 말하고 싶었다. 강제로라도 내 손을 잡아달라고. 그렇게 힘을 합쳐 저것들을 몰아내자고.

악다문 입에서 피가 질질 새어나갔다.

“어서 내 손을 잡아!”

빌어먹을.

그냥 모른 척하고 저 손을 잡고 싶은데, 끝끝내 내 이성이 막아섰다.

“네가 각성자들을 집어삼키지 못한 건 시스템과 마왕을 의식해서다. 그 둘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는 네가 허튼짓을 하면 잠깐이라도 손을 잡을 게 뻔하니까.”

“…협상은 물 건너갔군.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태진.”

그렇게 또다시 전투가 시작됐다.

제발.

지금의 이 선택이 후회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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