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성요한 (9)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는가?”
사막 한가운데 선 성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친구야. 우리끼리 싸웠다가는 위에 있는 저들만 좋은 일 시켜주는 거라니까.”
성요한이 위를 가리켰다.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푸른색과 흑색의 두 기운이 여지없이 맞부딪치고 있다.
그런데 나와 성요한이 서 있는 곳을 기점으로 뭉쳐진 기운이 다른 곳보다 훨씬 진했다.
놈들 또한 우리의 전투를 주의 깊게 감상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르릉!
“천둥이 치는군.”
하오란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놈들이 지켜보는 거다.”
“놈들?”
“시스템과 마왕.”
“그래? 그게 보여?”
하오란이 신기한 듯 하늘 위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사이 나는 성요한에게 턱짓하듯 말했다.
“다시 말해봐. 내가 저 둘 사이에 껴서 뭘 하라고?”
“…….”
성요한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투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네놈도 좋지 않느냐. 빌어먹을 시스템, 몬스터를 이 땅에서 몰아내자는 내 말을 이해 못 한 거냐?”
성요한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고집이 센 건지, 멍청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의심이 많은 것인가?”
웃으며 대답했다.
“셋 다라고 해두지.”
“아둔한 자야. 우리 둘의 전투가 벌어지면 저들이 가만 보고만 있을 것 같으냐? 한 사람의 승자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약해진 틈을 타 공격할 것인데.”
“글쎄. 그건 성요한 당신의 경우고.”
“……뭐?”
“나는 저 둘과 사이가 막 나쁜 건 아니라서 말이야. 갈등이 아니라 흥정이라고 해야 할까.”
“…….”
“당신이 그랬잖아. 저 둘도 싸움에 지쳤다고. 이만 승부를 내고 싶을 거라고. 그런데 승부의 키를 쥐고 있는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말을 하면서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반지는 이미 끼워뒀고, 지팡이는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상태였다.
“반면 너는 이미 저 둘에게 미운털이 잔뜩 박힌 것 같군.”
“그런다고 우리의 싸움에 너를 도와주진 않지.”
“멍청한 건 그쪽인 것 같군. 애초에 도움은 바라지도 않았다. 나 혼자서라도 당신을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니까.”
성요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이라도 기회를 줄 터이니 내 손을 잡아라. 네놈 덕분에 내 계획은 물 건너갔으니 시스템과 마왕, 둘 중의 한 놈과 손을 잡아야겠지.”
“싫다면?”
“이야기가 겉돌고 있군. 내 말을 믿어라. 후회하지 않게 해줄 테니.”
놈이 하늘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우리와 손을 잡을 자는 누구인가! 시스템! 아니, 시타둠! 계약을 제안한다!”
하늘 위의 푸른색 기운이 번쩍거렸다. 시스템의 뜻을 성요한에게 전달해주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영 요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낀 것인지, 하오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형제. 이러다가 시스템이 성요한의 손을 잡아주면…….”
“그럴 일은 없다.”
“어째서?”
“시스템은 성요한과 나, 둘 중 한 놈만 남기를 원할 테니까.”
시스템이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던 놈들 때문에 휘둘리기만 했던 시절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인데.
당연히 부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요한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이 멍청한 놈. 일을 이렇게 그르쳤어야만 했느냐.”
“둘 중 살아남은 한 놈의 말을 듣겠다고 하던가?”
“미리 시스템과 계획한 일이더냐?”
“그럴 리가. 나도 저놈 싫어하거든.”
“그런데 왜!”
“당신을 치우지 않고서는 답이 없겠다 싶어서.”
성요한과 손을 잡고 시스템, 마왕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운다?
그런 꿈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분명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로 끙끙댈 바에야, 놈과의 결전일을 내가 정하는 게 낫다.
성요한이 사브르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오만상으로 찌푸려져 있는데, 저 얼굴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내 지난날들을 무던히도 괴롭혔던 놈이 나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짓다니.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성요한의 얼굴이 더 썩어간다.
성요한이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버리고 만 것이 후회되는 모양이었다.
“감정을 빼놓고 상황만 생각했어야지. 뒷일까지 도모하기에는 네 그릇이 얼마나 작은지도 모르고.”
“아직도 날 설득할 생각이냐?”
“아니. 결정에는 번복이 없다.”
돌연 성요한이 눈에 힘을 줬다.
“네 장황한 계획은 알만하다. 그런데 그것도 내게서 살아남았을 때의 이야기. 벌써부터 샴페인을 따는 걸 보면 네 최후도 알만하겠군.”
“손정연, 네로드, 최태성.”
“음?”
“모두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내게 죽었다.”
“나는 어떨까.”
그 말과 함께 성요한이 발을 굴렀다.
놈의 발밑에서 모래가 터졌다.
다음 순간 성요한의 얼굴이 확대됐다.
성요한과 나를 중심으로 한 지면은 폭사되듯 터져나갔다. 푹 꺼진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킬 하나를 먼저 썼다.
[아드레날린 부스트를 시전합니다!]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와르르 쏟아지던 모래 더미가 느려졌다. 느려진 것도 모자라 멈췄다.
허나 시간이 정지된 것은 아니다.
하늘 위의 것들은 느려진 시간대를 무시하며 치열하게 세력다툼 중이었고 성요한의 눈동자가 빠르게 내 움직임을 쫓아오고 있었다.
내 주먹을 피한 성요한이 사브르를 찔러 들어왔다. 그런데 마치 거울처럼, 나 또한 놈과 정확히 같은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검신의 축복이 비상벨을 울렸다.
몇 초 뒤의 미래가 그려졌다. 둘 다 목이 잘린 채 허무하게 싸움이 끝나는 장면이.
이 한 번의 충돌로 둘 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한 명은 양보해야만 한다.
남 좋은 꼴 시켜주기 싫다면 나라도 검을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죽어도 그러기 싫었다.
양보할 것이라면, 네놈이 해라!
과연 내 허세가 통했다.
성요한이 이를 까드득 물면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첫 번째 격돌이 있었다.
콰아아아앙!
지면을 박찰 때 공중 위에서 멈춰 섰던 모래들이 밀려 나갔다.
핵폭탄이 터진 듯 먼지 구름이 솟아났다.
이 연약한 땅은 우리들의 힘을 받아낼 수 없다.
우리의 주변으로 방어막을 설치했지만 벌써부터 금이 가고 있는 마당이다.
사막은 물론이고, 행성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어느샌가 내 앞으로 도약한 성요한이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거기에 담긴 오러는 없다. 극의도 없다.
단순한 베기가 모든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놈이 휘두르는 궤도에 따라 공간이 갈라지고 있었다.
저 검을 막아보겠다고 부딪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
일종의 협박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공기가 터져대며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핵폭발에 준하는 충돌이었다. 아니, 공룡을 멸종시켰던 운석이 이러할까 싶었다.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충돌에서 밀려난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불타오르는 작열통이 내 몸을 휘감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랬다. 눈을 뜨자 활활 타오르는 전신이 보였다.
회복 마법을 내 몸에 걸었다. 마력이 쭉 빠져나가며 방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통증이 사라졌다.
반면 성요한은 아직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몸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오케이. 이걸로 하나 알아냈다.
성요한의 치유능력은 나보다 못하다.
“하! 그래! 이셀라든 뭐든 다 죽여보자!”
성요한의 외침이 터졌다.
그때는 하오란이 나를 돕기 위해 성요한에게 다가갔다가, 여지없이 몸이 반으로 갈라진 순간이었다.
꾸물거리며 하오란의 몸이 합쳐지기 시작한다.
두 번째 확인.
하오란은 이 전투에 아무짝에 쓸모없다.
-형, 제. 아무래도 이 전투에 내가 도움될 것 같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성요한의 힘이 더 강하다.
-그래. 거기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라.
마법으로 방어막을 재정비했다. 사막에 두른 게 아니라, 이번에는 내 몸 곳곳을 감쌌다.
아니, 감싸려고 했다.
성요한이 검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발현되려던 마법이 파훼됐다.
공중으로 흩어진 마력 뒤로 성요한이 빠르게 쫓아왔다.
“그런 잔재주 말고, 어디 한번 검으로 승부를 보자꾸나.”
쾅! 쾅!
성요한의 사브르가 움직였다. 전력인 줄 알았던 힘은 전력이 아니었다.
성요한이 검을 내지를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세 번째 확인.
단순 검술은 확실히 성요한이 위에 있다.
내가 그와 동수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마법의 유무와, 시스템의 힘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 확인해야 한다.
또한, 지금의 전투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깨달음.
그때쯤 성요한이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놈의 검을 방어하면서, 내가 말했다.
“괜찮겠어? 이 뒤에 시스템이 당신을 죽일 텐데. 나한테 이렇게 힘을 빼도?”
속으로 제발을 외쳤다.
다행이었다. 성요한이 분에 찬 얼굴로 말했다.
“네놈을 죽이고 힘을 흡수하면 그만!”
콰아아아아!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조금 더 힘을 드러내라!
네가 가진 모든 전력을 검신의 축복에 담아가게.
그 이후로 수십번을 부딪쳤다.
사막을 둘러싼 방어막은 깨진 지 오래다.
내 몸을 둘러싼 호신강기도 사라졌다. 심장이 텅텅 비었다.
마나홀도 마찬가지다.
땅이 솟아나며 지각이 무너졌다.
안타깝게도, 하오란의 절대 재생은 더 이상 발동하지 않았다.
하오란은 단말마도 없이 죽어버렸다.
어느 순간 성요한과 나는 힘이 빠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금도 허공에서 검을 맞대고만 있을 뿐, 이렇다 할 공격을 못 했다.
쿨럭하며 피를 쏟은 성요한이, 돌연 웃었다.
“우리 둘 다 죽게 생겼구나. 아니, 이 세상 전부가 파멸하겠구나. 저승길 길동무로 수십억 명이나 생겼으니 비통해하지 말거라.”
성요한의 말을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천재 박명 특성이 검신의 축복에 호응하고 있었다.
검신의 축복의 연산속도가 몇 배나 빨라진다.
성요한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해부했다.
놈도 인간이다. 완벽하지 않다는 말이다.
머리가 뜨거웠다.
세상이 멸망하는 것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뭘 하는 것이지?”
“보일 듯 안 보여서.”
“……?”
“확실히 네 제자에게는 다 가르쳐주지 않았군.”
언젠가 갔던 A급 던전에서, 성요한의 제자를 죽인 적이 있다.
시간을 몇 번이나 거슬러서 말이다.
“무슨 말이지?”
“알아듣지 못하는 걸 보면, 시스템이 너보다는 나를 더 아낀 모양이군.”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성요한이 몸을 뒤로 물렸다.
“너, 설마.”
“진작 의심했어야지.”
“언제부터?”
“그걸 알아내는 게 네 임무지.”
하늘이 쩌저적거렸다. 금이 가듯 세상이 깨졌다. 땅이 무너진다. 암흑천지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성요한. 내가 이 일을 언제부터 준비한 것 같으냐. 네놈에 대한 원한을 따지자면, 시스템보다 내가 더 짙을 텐데.”
화악!
눈을 다시 뜨자, 사막이 보였다.
옆에는 하오란이 성요한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다.
하늘 위에는 두 기운이 구경하듯 뭉쳐져 있다.
온 세상이 성요한과 내가 맞붙기 직전으로 돌아와 있었다.
정면을 바라봤다.
성요한의 얼굴이 똥을 씹은듯 구겨져 있었다.
“빌어먹을 놈. 환영 마법을 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