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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65화 (165/170)

165화 성요한 (8)

멈칫거리기도 잠시였다.

그다음 순간부터는 어떻게 일성본사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이 공간에 넘실거리는 힘을 그대로 두고, 죽은 시체들마저 그대로 둔 채로.

헐레벌떡 게이트를 열었을 것이다.

불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로비가 보였다.

그 순간 털썩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내쉬었다.

시끌벅적한 일성 로비를 보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구나.

그 미치도록 구역질 나는 혈향은 아직이구나.

뒤이어 하오란까지 게이트를 타고 넘어왔다.

내가 눈빛으로 물었다.

‘놈은?’

하오란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형제. 일단 진정해.”

“그래. 그래야겠지.”

하오란의 말이 아니었어도 아까부터 차오른 호흡을 다듬고 있었다.

여기서 성요한과 충돌하면 끝이다.

전부 끝.

그걸 성요한도 모를 리도 없다.

그렇다면 성요한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성요한에게도 퀘스트가 떴을까?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싸울 생각이었다면 시스템이 보여준 미래에서처럼, 일성 사람들부터 모조리 죽였을 테니까.

“어! 팀장님!”

로비에서 생각을 마치고 있는데 홍주연이 내쪽으로 왔다.

발걸음이 다급하다.

“여기 계셨네. 후아! 들으셨죠?”

홍주연이 작게 속삭였다.

“성요한. 어라. 모르셨어요? 예약했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저랑 만나기로 한 거.”

“나랑 수법이 비슷하군.”

하오란이 옆에서 혀를 차며 물었다.

“어디있지? 지금 그놈.”

“이 사람은?”

눈을 깜박이는 홍주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무실에 계세요. 아, 팀장님 집무실 말고. 최 회장님 있는 곳.”

“알겠습니다.”

“별, 일. 없으신 거 맞죠? 표정이 너무…….”

표정?

입매를 매만졌다. 아직도 굳어 있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 속 비친 얼굴을 보니 가관이었다.

이래서는 영락없이 겁먹은 모습이다.

쯧.

개싸움도 기세가 반이랬는데. 이래서야 놈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줄 뻔했다.

고개를 턴 후 말했다.

“괜찮습니다. 일 보세요.”

빌어먹을.

괜찮다는 내 목소리마저 딱딱했다. 이런 때에 한석훈 그 양반이라도 만났다가는 또 어떤 추궁을 당할지 모른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오란과 내가 올라탔다. 하오란은 마치 비서를 자처하듯 꼭대기 층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후아! 긴장되면서 두근대는군.”

하오란이 어깨를 털었다. 한껏 달아오른 긴장을 오버스러운 행동으로 풀어보려는 거다.

“친구. 이번에도 전략은 같겠지? 전투가 일어나면 말이야.”

“곧장 게이트를 열거다. 이계 쪽으로.”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진다해도 이곳 일성에서 일을 치를수는 없다.

이계로 가는 게이트를 열고 중력 마법을 수십번 중첩시킬 것이다.

“우리가 싸울 곳은 붉은 사막이다.”

“좋지. 놈을 잡고 나는 바로 떠나면 되겠군.”

“이곳에서는 아무 미련이 없나?”

“지긋지긋해. 몬스터도 사람도. 거기서는 나무꾼으로 살거다.”

“로멘티스트였군.”

“그렇지.”

엘리베이터가 참 느리게도 올라간다.

덜덜 떨리는 하오란의 주먹이 보였다. 그 옆을 바라보자 내 손가락 끝이 떨리는 게 보인다.

손을 바지 뒤로 숨겼다.

“그러고보니 율리안 펜슬러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군.”

“살려만 주면 평생 조용히 살겠다고했지. 정말 살려줄 줄은 몰랐어.”

율리안 펜슬러.

놈은 나를 도와주는 척, 함정을 파놓았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나는 놈을 살려줬었다.

모든 S급 각성자들의 목이 갈라지는 걸 보던 율리안 펜슬러가 무릎 꿇고 빌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다른 S급 각성자들과는 달리, 다시는 허튼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다던 율리안 펜슬러나, 하오란의 말에 공감 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성요한만 처리한다면, 시스템과 마왕 따위는 내 알바가 아니다.

지구 바깥에서 실컷 싸우라고, 내쫓아버릴 것이다.

띠링.

생각이 끝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두근대는 마음으로 대표실의 문을 열었을 때였다.

정면에 두 사람이 보였다.

김수정과 성요한.

성요한이 사브르를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단 말이지.”

“예. 감히 조언 드리자면 왼쪽의 균형추가 조금 어긋났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 그런데 그냥 흘러 들어주세요.”

“그럴수는 없지. 이태진의 검술선생이잖은가.”

“예에? 그럴리가요. 그런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나요?”

“온 사방이 자네 이야기던데. 이태진이 직접 김수정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다.”

“이것 참. 언제 그렇게 소문이 난건지 모르겠네요.”

“호오. 사실인가?”

“노 코멘트 하겠습니다.”

“부정하지 않는군.”

“그나저나 오늘 수업은 재밌었네. 나는 저 친구들이랑 할 말이 있어서.”

김수정이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발견했다.

“아! 저도 즐거웠습니다.”

김수정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일부러 틀린 자세를 한 번 잡아봤는데. 바로 캐치하더군. 정말 간발의 오차였는데. 확실히 탐나는 능력이야.”

성요한이 최태성이 앉던 자리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마치 원래부터 주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일단 앉지. 할 이야기도 있는데.”

성요한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이제껏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영 딴판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수염, 정장까지.

입에는 거미줄을 칠 주 알았는데 말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자네들도 여기서 싸우길 바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못 싸울것도 없지.”

“하오란. 오랜만이군.”

“어때. 지금 한 판 할까?”

“글쎄. 네 ‘형제’께서 그다지 바라지 않을것 같은데.”

성요한이 눈썹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앉아.”

하오란이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고, 나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성요한에게 걸어갔다.

“비켜.”

“음? 아!”

성요한이 큭큭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렴. 어떻게 얻은 자리일텐데. 혹시 최태성의 유언을 들을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내 라이벌을 자처하던 친구들은 모두 네 손에 세상을 떠났군.”

나를 도발하려고 꺼낸 말이겠지만, 웃음이 나왔다.

“너라고 다를까? 너도 무서운거냐?”

내가 다가가자, 아주 잠깐 성요한이 멈칫했었다.

그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었다.

“사극 말투만 쓸 줄 알았는데 말투도 바꿀 만큼 조급했던 거겠지.”

성요한에게서 뺏은 자리에 앉은 다음 등을 눕혔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있을 터. 말해봐라.”

“이런. 다 들킨 모양이군. 맞아. 자네와는 싸우기 싫어졌어.”

“잡아먹기에는 너무 커졌다 싶었겠지.”

“긴가민가했지. 특히 이계에서 돌아온 그때는 정말 죽일 뻔했다. 네가 시스템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일까 봐.”

성요한이 하오란을 잠시 바라봤다. 조건반사처럼 하오란이 움찔한다.

“그러고 보니 자네도 참 끈질기군. 멀리서 보니 절대 재생능력이 어울리던데. 벌레처럼 짓밟아도 다시 일어나던 게.”

“당신 덕분이야.”

“은혜를 갚을 생각은 없나?”

“뭣하면 언제든 받으러 와.”

듣기로는, 하오란이 이계에 있던 시절 성요한의 꾐에 넘어가 드래곤에게 팔려 갔었다고 햇다.

그 억겁의 시절이 지금의 원한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자네 자신감의 원천은 이태진이겠지?”

“요즘엔 백도 실력이라더라고. 너도 친구 한 명 데려와. 아, 우리가 다 죽였나?”

성요한이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역시 말로는 하오란을 따라갈 놈이 없다.

나도 저놈에게 속은 적이 몇 번 있으니까.

성요한이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각설하고. 나는 자네들이, 정확히 말하자면 이태진 자네가 시스템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어. 긍정적인 점은 마왕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지.”

“…….”

“다행이지. 둘 중 하나에게 넘어갔더라면 그 즉시 자네를 죽였을 테니까 말이야. 특히 아락투스에게 지팡이를 받아낼 때. 내가 할리우드 감독이었다면 자네를 캐스팅했을 거야.”

성요한이 관음증 환자라는 하오란의 말은 사실이었다.

놈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시스템만큼이나 음흉한 놈.

그러던 문득 성요한이 벌떡 일어나 회장실을 빙글빙글 돌았다.

“자네 이야기를 했으니 내 이야기도 해야겠지. 어디서부터 해야할까. 시스템의 선택을 받고 눈물을 흘렸던 날?”

그때를 회상하듯 성요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보니 놀랍도록 자네와 비슷해. 시스템의 저의를 의심하고 곱게 말을 듣는 법이 없었지. 그놈의 취향이란 참으로 독특해. 제 말 잘 듣는 일장로한테나 힘을 몰아줄 것이지.”

“잡설이 길군.”

“핵심만 말하지. 시스템과 마왕. 둘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건 나 때문이다.”

“……?”

“300레벨이 되고 나서 너도 느꼈겠지? 이 위에서 일어나는 싸움. 거기에 우리가 관여할 수 있다.”

“네 목적은?”

모처럼 성요한이 표정을 굳혔다. 정확히는 감정이 없는 메마른 상태에 가까웠다.

건조한 말소리가 들렸다.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몬스터와 각성자들을 제거하는 것.”

예상은 했다만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억겁의 세월에 마모되면 저렇게 될 것 같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그저 목적만을 위해 달려가는 놈.

“그러기 위해서는 자네의 도움이 절실해졌어. 300레벨까지 살려둔 은혜를 잊지는 않았겠지? 일장로의 팔을 벨 때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야 했단 말이야.”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는군. 결론은 시스템과 마왕, 둘 다 내쫓는다는 거잖아.”

“그걸로는 부족해. 완전히 놈들을 소멸시켜야 뒤끝이 남지않지.”

“방법은?”

“시스템이든 마왕이든 한쪽 손을 들어줘. 아니, 들어주는 척을 해야겠지. 그놈들이 속을 수 있게끔 완전히 충성을 맹세해야 할거야.”

변명하듯 성요한이 손을 저었다.

“전지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놈들이야. 나 하나 때문에 싸우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시스템과 마왕이 싸우는 순간, 성요한만 좋은 꼴이 될 거라고 했다.

힘이 빠진 둘을 잡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다며 성요한이 답지 않은 너스레를 떨었다.

“나와 동급인 네가 자기편이 됐다고 생각해봐. 좋아서 버선발로 뛰쳐나올걸? 그 때문에 네게 파격적으로 힘을 몰아준 거고.”

“나보고 미끼가 되라는 소리군.”

“큰 고래를 잡을 땐 미끼도 그만큼 커야지. 혹시 말했나? 제2, 제3의 성요한들은 내가 모두 처리했어. 네가 마지막이야. 이태진. 시스템도 힘이 거의 빠진 상태인 것 같더군. 큭큭.”

“아참, 시스템과 마왕은 너와 내가 만난 줄 모를 거야. 내가 단단히 수를 써놨거든. 그놈들의 눈에 너는 아직 S급 각성자들을 죽인 섬 위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어.”

“원래부터 이렇게 말이 많았나?”

“아무렴. 뜻이 통하는 상대를 오랜만에 만났더니 신나서 말이지.”

“내가 받을 대가는?”

“그쪽으로 고민해봤는데. 역시 당근보다는 채찍이 효과가 좋을것 같아서.”

성요한이 일성마크가 새겨진 문을 가리켰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스템이나 마왕이 했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저놈은 한다면 진짜 하는 놈이다.

그래서 깨끗하게 결심할 수 있었다.

지금껏 시간을 끈 이유.

조용히 준비된 마법이 파훼되지 않게끔, 놈의 개소리를 한참이나 들어줬다.

성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삐걱거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건 예상에 없던건데.”

“너도 한 번 당해봐.”

그 순간 성요한의 앞에 공간이 찢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모은 중력 마법이다.

블랙홀의 힘에 저항할 수 없듯, 성요한이 찢어진 공간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와 하오란도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너머 사막이 보였다.

이제 곧 전투가 시작될거다.

그런데 어째선지 안심이 됐다.

이 승부의 추가 내 쪽으로 기울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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