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성요한 (7)
최태성의 몸에서 시스템의 흔적이 자연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저대로 10분만 놔둬도 모든 마력이 흩어질 것이다.
서둘러 최태성의 몸에 손을 갖다 댔다.
쏴아아악!
공중으로 흩어지던 마력이 뚝 멈춰 섰다. 마치 중력에 이끌리듯 마력 입자들이 내 몸으로 흡수됐다.
그런데 문제점이 하나 있었다.
최태성이 흡입한 각성제의 영향으로 붉은 속성을 지닌 것들이 함께 딸려 온다는 것.
그것들은 불순물이다.
힘을 준다 해도 잠깐일 뿐이고 결국 그것의 부작용에 잡아먹힐 것이다.
불순물을 체에 거르듯 잔재했던 각성제를 걸러냈다.
그러고도 최태성의 순수한 마력은 단 한 톨도 잃지 않았다.
-열하나! 참고로 하는 말인데, 절대 회복이 끝나가고 있어. 그냥 하는 말이니까 너무 부담은 갖지 말도록.
안 봐도 하오란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보인다.
나를 방해하려는 다른 각성자들이 몸을 던지면, 하오란은 바짓가랑이를 잡아서라도 내게 못 오게 하는 식이다.
어쨌든 하오란의 말처럼 최태성의 마력을 음미할 때가 아니었다.
반대편 손으로 최태성이 남기고 간 무기들을 짚었다.
S급 무기들이 점점 예기를 잃어갔다.
거기에 담긴 마력을 내 몸으로 옮기고, 다시 경험치로 전환하는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묵직한 경험치통이 찌르르 울렸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조금만 더!
-커르르륵! 이쪽은 신경 쓰지 마라 이태진! 내가 다 알아서 막으……
퍼억!
결국 각성자들이 하오란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무너지는 하오란은 시간을 두면 다시 살아나겠지만, 그것은 놈들이 내게 도달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경험치를 흡수하는 과정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너무 많은 약점이 노출된다는 것이다.
묵직한 경험치와 흩어지는 최태성의 마력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손을 떼면 놈들을 방어할 수는 있겠지만 최태성의 순도 높은 마력을 모두 놓치게 된다.
그렇다고 계속 마력을 흡수하자니 확신이 안 선다.
정말 최태성만 집어삼키면 300레벨이 될 수 있는 건가?
생각할 시간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도박을 감행하기로 했다.
이러고도 레벨업을 못하면 그냥 죽도록 얻어맞지 뭐.
쏴아아아악!
더욱 거칠게 경험치를 쓸어 담았다. 찰나간에 30레벨의 최태성이 1레벨로 내려갔다.
이윽고 시스템의 연결고리까지 뜯어냈다.
그때는 목 바로 뒤에서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스킬이 날아오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뭔가가 느껴졌다.
꿀렁거리던 경험치통이 찌르르 울렸다. 그것이 긍정적인 신호로 여겨졌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내 안의 경험치들이 터졌다.
아!
잊고 있던 레벨업의 순간이었다.
원래 있던 경험치 통이 깨지고 더 큰 것으로 바뀌는 과정.
과연 300레벨은 다를까?
정말 SS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이제 곧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오던 놈들과 내 표정이 대비됐다.
“안돼!”
선두에 선 놈이 뭔가를 직감한 듯했다.
화악!
***
결론부터 말하자면 SS급은 존재했다.
지금의 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가능한 힘이 내 손에서 넘쳐 흘렀다.
이건.
이건 도가 지나치다.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개인에게 이러한 힘이 주어지는 게 맞나?
시스템은 무슨 생각으로 기어코 나를 300레벨로 올린 것이지?
손정연 협회장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연 SS급 한 명에게 S급 전체가 달라붙으면 누가 이길까, 하고.
그때 손정연이 내린 정답은 SS급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를 좋아하지 않지만, 손정연이 가졌던 몇몇 통찰력에는 감탄이 나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달려오는 놈들이 한없이 느렸다.
A급에 올라서면서 내게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었다.
뇌의 연산속도를 극도로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효과였다.
그때만 해도 뇌를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에 그때는 오래 사용하지는 못했었다.
S급에 올라서고는 그 능력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 된 것인지,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느려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세상의 천지만물이 작동을 멈춘 수준이다.
성요한이 나와 싸울 때 이랬을 거라는 말이잖아.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했다.
299레벨이면 충분히 호적수로 둘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물론 정지된 저것보다는 빨랐겠지만,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어쨌든 이것들부터 빠르게 정리하고 성요한에 대한 건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손을 그었을 뿐이다.
좌에서 우로, 딱 한 번.
각성자들의 목에 얇은 실선이 그어졌다.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은, 딱 죽기 좋을 정도로만.
정지된 시간에서 빠져나왔다.
푸확!
일순간 그어진 선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끄억, 하는 단말마도 없이 녀석들이 숨을 거두었다.
굳이 접촉할 필요도 없었다.
손 한 번 뻗으니 녀석들의 마력이 모두 내게 들어왔으니까.
부서졌던 하오란의 몸이 이리저리 붙기 시작했다.
완전히 살아난 녀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목만 떨어져 나간 각성자들과 나를 번갈아가며 보던 녀석이 씨익 웃었다.
“성공했군. 형제.”
녀석은 자신의 일도 아닌데 신나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해방될 길이 보인다. 그 빌어먹을 성요한에게서 해방될 길. 넌 모를 거야. 얼마나 놈에게서 시달렸는지.”
그것은 가짜 죽음이 아니라 진짜였다고 하오란이 덧붙였다.
“수십, 수백 번을 죽였다가 살렸다가. 환장하는 줄 알았지. 지천에 깔린 내 팔다리들 하며,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무정하게 묻는 것 하며.”
“그건 무슨 소리지?”
“내가 말을 안 했던가? 그놈과 두 번째로 만났던 날. 모진 고문이 있었다. 안 그래도 드래곤 때문에 너덜거리던 정신이 무너졌었지.”
하오란이 낄낄댔다.
“그런데 드디어 복수할 길이 열리다니. 이태진. 당장 놈을 부를까?”
아 맞다.
하오란에게는 성요한을 부를 수 있는 아이템이 있다고 했지.
“정확히는 성요한의 위치를 추적하는 거지. 내가 놈한테 심어놓은 게 하나 있거든.”
재잘대는 하오란을 무시하고 상념에 빠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요한은 두 번이나 나를 살려줬다.
처음에 나를 만났을 때 한 번, 이계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한번.
이제 보니 성요한에게 완전히 놀아난 것이다.
나는 할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는 것.
성요한은 언제든 마음먹으면 나를 죽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손정연, 네로드가 그랬듯이 나를 키워서 잡아먹으려 했던가, 아니면 시스템에 반감이 있는 나를 이용하려 했든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고.
그런데 손정연, 네로드, 하물며 최태성의 최후가 어땠지?
기죽을 것 없다.
오히려 기회로 여겨야지.
문득 하늘 위를 바라봤다. 맑은 창공 뒤로 기운 두 개가 얽혀 있었다.
푸른색과 흑색이었다.
하나는 익숙한 시스템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왕의 것이었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영역이었다.
내가 모르던 하늘 위에서 일어나던 싸움.
주인 없는 이 땅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 게 남아있었다.
300레벨을 달성했음에도 아직 내게는 성장의 여력이 남아 있었다.
시스템의 것이 아니라, 마계의 것으로.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 숨겨진 아락투스의 삼신기를 꺼냈다.
우우우웅!
발악하듯 사전과 반지, 지팡이가 진동했다.
아락투스의 마기, 아니, 마왕의 마기가 풀풀 공중으로 흩날렸다.
내 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은 아락투스가 심어둔 바이러스 같은 것이었다.
단숨에 발악하는 삼신기를 휘어잡았다.
개중 가장 발악하던 지팡이가 부르르 떨었다.
그것을 꽉 쥐어 잡았다.
아락투스가 심어놓은 바이러스를 없애려면 그에 맞는 마법적 지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었다.
원래라면 말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 잔재주는 무의미하다.
잡은 손에 힘을 가했다.
쩌저적!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봉인이 풀렸다. 흔들거리던 지팡이도 발악을 멈췄다.
내게 굴복한 그것이 얌전해졌다.
그 말인즉, 마법사로서 300레벨을 찍을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지팡이에서 힘이 들어왔다. 마법사전의 마지막 장이 펼쳐졌다. 반지도 웅웅댄다.
심장에는 고리 하나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여덟개 를 넘어 아홉 개로.
이전의 성장 과정과는 달랐다. 고통도 희열도 없었다.
그저 고요한 움직임이 다였다.
나도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받은 느낌이다.
단지 아홉 개의 고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
생명체를 창조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것을.
촤르륵 펼쳐진 마지막 사전에 눈이 갔다.
빈 백지였다.
그 뜻을 바로 이해했다.
나는 원하는 마법을 창조해낼 수 있다.
그것은 마법의 원리를 모두 깨우친 드래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아니면 한때 인간이었던 자가 마왕에게 목줄을 채운 대가로 받은 힘이든가.
하오란은 300레벨을 찍었을 때만 해도 열기와 함께 나를 바라봤었다.
드디어 성요한과 한판 붙을 수 있다며 방방 뛰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내가 300레벨에 더해 아홉 개의 고리까지 얻어내자,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아락투스의 던전에서 드래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런 눈빛이었다.
미지의 공포가 느껴졌다. 하오란이 얼마나 드래곤에게 시달렸는지 알 수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하오란이 고개를 털었다.
“네 도움이 컸다. 하오란.”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 형제.”
“그래. 잡아야 할 놈이 남아있지.”
“약속 하나가 필요하다.”
“무슨?”
“모든 일이 끝나도 내 힘만큼은 건드리지 말아다오.”
하오란이 정곡을 찔렀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너는 모르는 사정이 있다. 이계에 남겨두고 온 사연이지.”
“무슨?”
“어차피 일이 끝나면 나는 이계로 돌아갈 생각이니 말해주지.”
돌아간다?
묘한 어감과 함께 녀석이 이어 말했다.
“남겨두고 온 자식이 있다. 여우 같은 마누라도 한 명 있고.”
이건 좀 놀라운데.
저 음흉한 놈이 가정을 이룰 줄은 몰랐다. 그것도 낯선 이계에서.
“대체 거기서 얼마나 있었던 거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오래.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네 허락이다.”
“그런 거라면 허락받을 필요 없다.”
이계에 눌러 산다는 하오란을 무슨 명목으로 말릴까.
나한테는 이 땅에 사는 녀석들로도 벅차다.
“그래서, 성요한은 언제 잡을 거냐.”
안심한 듯 한숨 쉰 하오란이 다시 히죽히죽 웃으며 물었다.
“지금.”
준비는 진작에 끝났다. 더 뒤로 물릴 필요도 없다.
“좋지.”
“성요한을 이곳에 불러내는 식인 거냐?”
“아니. 성요한이 있는 위치를 알 수 있다.”
“……아락투스한테는 성요한을 소환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뻥이었지.”
“전음으로 한 이야기는…….”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하는 법. 이봐, 형제. 아직까지 나를 몰라?”
“이계에 남겨둔 아내와 자식은 진짜냐?”
낄낄댄 하오란이 인벤토리에서 나침반 하나를 꺼냈다.
“간단히 말해 성요한이 평소처럼 차원의 틈새에서 우릴 음흉하게 지켜보는지, 아니면 마계에서 몬스터를 썰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원리를 설명하려면 세시간 정도 필요한데 말해줄까?”
고개를 저으며 턱짓했다. 놈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된다.
그런데 녀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형제.”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공간을 열 준비를 끝마쳤다. 어디든 갈 준비가 끝났다. 그곳이 이계든, 혹은 하오란이 말한 차원의 틈새든 상관없다.
그런데 하오란의 입에서 튀어나온 장소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일성 본사에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