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성요한 (6)
늘 침착하고, 속을 알 수 없던 최태성이었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본다.
굉장히 곤란해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화가 난 것에 가까웠다.
어쨌든 우리는 충돌했고 섬의 뒤편까지 날아갔다.
날아가는 동안에도 몇 번의 주먹이 오갔다.
쿠웅! 쿵! 쿵!
최태성이 공격하고 나는 막는 식이었다. 아직 그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해서였다.
마음속으로는 몇번이나 준비했었다. 언제든 최태성을 적으로 상정해두고 그의 힘을 흡수하는 그림을. 그런데 막상 실전이 되자 그것이 영 찜찜했다.
잠시만.
최태성과 싸우며 이런 잡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강해진 건가?
그때 쏜살같은 속도로 최태성의 주먹이 날아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심이 담긴 힘이 실려 있었다.
나 또한 밀려나던 움직임을 바로잡고 주먹을 뻗었다.
콰아아아아!
어지럽게 자라난 수풀과 나무는 우리의 충돌 한 번에 뿌리가 뽑히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내가 궁금한 것은, 최태성이 언제부터 이런 일을 계획했냐는 것이다.
제기랄. 내 다짐과는 반대로 내 본심은 아무래도 최태성을 꽤나 신뢰하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물어봤다.
“언제부터입니까.”
최태성이 무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가 A급 스킬을 들고 왔을 때부터.”
폭음이 터지는 가운데서도 그의 말이 생생하게 귀에 잡혔다.
“적당히 때가 되면 널 가지고 시스템과 협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제가 너무 빨리 강해진 겁니까?”
“부정 못 하겠군. 백인호를 죽이러 갈 때 제대로 말렸어야 했어. 강제해서라도.”
최태성이 아쉬운 얼굴로 그때를 회상했다.
“성요한을 만나 이계로 넘어갈 줄은 상상도 못했지.”
포기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사막에서 S급을 찍은 나를 도무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차라리 노선을 틀까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기회가 생겼지.”
최태성이 미소를 그려냈다. 그것이 굉장히 수상쩍었다.
“불러낸 S급 각성자만 스물이다. 함정인 걸 알고도 온 녀석들이지. 머리는 너만 쓸 줄 아는 게 아니거든.”
다음 순간 전신이 간지러웠다.
백만 분의 일 초가 지난 순간에는 거대한 압력이 전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최태성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녀석 중 하나다.
-총 스물이야.
한쪽 구석에서 하오란이 한 말이었다. 그는 한창 각성자들에게 둘러싸여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내가 다섯 형제가 열 다섯.
-뭐?
-크흠. 내가 일곱?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얼마나 상대할지, 숫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터질듯한 압력을 벗겨내면서 전음을 보냈다.
-내가 열둘, 네가 여덟이다.
-나를 너무 높게 쳐주는데.
-전투에 집중해라.
본능적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푸른색 화염을 달고 오는 각성자 하나가 보였다.
동시에 최태성의 주먹도 금빛을 뿜어내며 내 심장을 노리고 들어온다.
발을 움직였다. 가볍게 주먹의 궤도를 틀었다. 반동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화염을 달고 오는 놈은 달라진 궤도를 빠르게 파악했다.
놈이 가까워질수록 초고온의 열기가 피부를 뒤집었다.
또다시 몸을 짓누르는 압력이 나를 주저앉히려 한다.
아래를 보자 쩌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밑이 얼어붙고 있었다.
섬 주위를 둘러싼 박어막까지 위험할 판이다.
이것들.
세상이 무너지든 말든 관심도 없는 건가?
“우릴 부른 건 너다!”
화염 각성자와 부딪치기 직전 놈이 한 말이었다.
다시 한번 내게 걸린 온갖 저주와 압력을 벗겨내고서는 나 또한 전신의 힘을 풀었다.
오냐.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
직후 하늘에서 떨어진 놈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부딪쳤다.
고요했던 것도 잠깐일 뿐, 마치 전투기가 공중을 쓸어버리는 듯한 굉음이 터졌다.
299레벨도 여전히 S급 각성자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말이 무엇인가 하면, 저 초고온의 열기가 뜨겁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아무런 고통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S급 각성자가 무려 스물이라고 했으니까.
내가 전능한 300레벨에 도달했더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히 상황이 안 좋았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감상에 젖을 때는 더더욱 아니었다.
다행인 것은 한 놈은 처리했다는 것.
“……!”
공중에 멈춰선 놈이 눈을 부릅떴다.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텐데 그게 안 되겠지.
우리의 손바닥은 자석처럼 꼭 달라붙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그대로 놈의 화염이 내게 빨려 들어왔다. 정확히는 놈의 마력과 경험치를 흡수하는 것이다.
270, 265, 255.
“크아악! 빨리! 이놈이 내 힘을!”
“모두 직접적인 접촉을 피해라!”
최태성의 말에 따라 S급 각성자들이 내게 다가오던 움직임을 멈췄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단합력이었다.
예능 ‘더 게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때는 예능이기도 했거니와 자신들이 살기 위해 배신을 밥먹듯이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나를 던전의 보스몹으로 두고 전투에 임하는 모습.
“원거리 딜 위주로 공격한다! 최대한 근접전은 피해라!”
최태성의 오더에 따라 각성자들이 몸을 뒤로 물렸다.
과연 S급이라 그런지 합을 맞추는 게 능숙하다.
그사이 내 손에 잡힌 화염 각성자는 빠르게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100레벨을 지나쳐 이윽고 각성자의 핵심인 시스템 연결고리까지 끊어냈을 때.
놈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이런 현실을 납득할 수 없다는 거다.
경험치는 여전히 99.9%.
젠장할. 레벨업만 한다면 이딴 것들은.
하오란 쪽을 바라봤다.
“두 놈! 내가 이겼다!”
그렇게 말한 하오란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나를 공격하던 각성자들이 근접전을 포기하며 생긴 빈틈 덕분이었다.
“형제. 이것들을 빨아들여라.”
하오란이 양손에 하나씩 들고 온 각성자를 내려놨다.
꺽꺽거리며 숨쉬기를 힘겨워하는 게, 죽기 직전처럼 보였다.
“각성자를 죽이면 경험치가 오른다.”
“형제.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이 상황에서 최선의 수를 선택하는 것뿐이야.”
그러며 손짓으로 쓰러진 녀석들을 가리킨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사양할 이유가 없다.
쏴아아아-
“크아아악! 잠시만! 잠깐!”
“도전하지 않겠다! 이태진! 살려주십……!”
발악하듯 놈들이 허우적댔다. 내 발에 매달리는 녀석들의 힘을 끝끝내 흡수했다.
겨우 이런 것에 망설일 거면 시작도 안 했다.
하오란이 기대를 가득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참히 그 기대를 꺾어줬다.
“아직.”
“빌어처먹을 일이군.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도 안 되는 건가?”
“…….”
내 몸속 시스템의 구조를 샅샅이 뜯어봐도 추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말 경험치를 먹이면 레벨업을 하는 것이 맞기는 한 건가?
사막에서 S급을 달성할 때처럼, 다른 필요조건이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랬다면 아락투스의 3신기를 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도 반응이 없었어야지.
“그래도 예상한다면?”
하오란이 절박하게 물었다.
“네 명. 그 안에는 할 것 같다.”
“오케이. 내가 몸으로 떼운다. 가자.”
자신 있게 가슴을 탕탕 치며 하오란이 걸어 나갔다.
다섯 걸음도 채 되기 전에 하오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동시에 칠흑 같은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며 와르르 쏟아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금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몸이 어디론가 밀려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도 내가 의도한 대로였다.
잡히는 대로 손을 뻗었다.
갸녀린 목 하나가 손에 잡혔다.
술사를 지키고 있던 S급 각성자, 근접 딜러, 레벨은 257.
시야는 암전됐지만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투둑!
계집의 목을 꺾으며 힘을 흡수했다. 쫓아오던 금빛 힘, 그러니까 최태성은 저주 마법 세 가지와 중력 마법으로 지체시켰다.
직후 이 어둠을 만든 주술사 놈을 찾아냈다.
망설이지 않고 심장에 주먹을 꽂았다.
쿵!
빨려 들어오는 경험치와 함께 속도를 올렸다.
세상이 밝아졌다.
시스템의 연결고리 중 경험치를 담당하는 통이 묵직했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오란의 머리가 슬금슬금 살아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꾸물대며 창을 꼬나쥔 하오란이 최태성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일대일이라면 하오란이 이겨야 마땅한데, 희한했다.
최태성이 하오란을 멀리 떨어뜨린 것이다.
최태성의 붉게 충혈된 눈을 보고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한계치까지 각성제를 투여한 모습.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린 최태성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너를 죽이고 다시 선택을 받겠다!”
콰앙!
최태성이 내 앞까지 도착했다. 뒤에서는 최태성의 명령을 듣던 각성자들이 어어, 거리며 동작을 멈췄다.
“원거리 공격만 하라며!”
“탱커를 맡는 건가?”
“최태성은 딜러다. 지금 나설 차례가 아니야. 그냥 저건.”
각성자 중 한 명의 말이 귓가에 박혔다.
“흥분해서 맹수 아가리에 들어간 거야.”
각성자들이 혀를 찼다. 다시 고개를 돌려 최태성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나를 찢어죽이려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손을 부르르 떠는 모습.
전형적인 각성제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쯧.
S급 중에서도 최상위에 올라섰음에도 각성제에 의지하는 모습이라니.
최태성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눈빛이 흔들렸다.
불현듯 내게 뛰쳐나온 것이 후회되는 것 같았다.
잔뜩 부풀어 오른 근육이며 저렇게 대놓고 표정을 드러내다니.
평소의 최태성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망가져도 너무 망가지니까 현실성이 없다고 할까.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습니까.”
“…….”
대답이 없다. 그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만 있다.
나도 최태성을 살려둘 생각은 없다.
시스템과 관련된 이상 힘을 뺏는 것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 정도는 들어드리겠습니다.”
한때나마 내가 되고 싶었던 우상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최태성이 침착하게 답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다듬던 호흡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붉게 충혈된 최태성의 눈빛도 잠잠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각성자들은?
이때쯤이면 내게 저주며, 불덩이며 얼음 송곳이며 날릴 때가 됐는데?
-내가 열다섯!
고개를 돌렸다.
남은 각성자들은 하오란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막고 있었다.
죽이고, 심장이 터져가면서.
꾸역꾸역 쏟아지는 파도를 버텨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을 놔두고 최태성을 바라봤을 때 그가 내게 말했다.
“허무하군. 시스템의 힘을 갈망하던 일 장로와 나는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데, 그것을 저주하던 너는 이렇게 되다니.”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결연한 얼굴이 돼 있다. 그러던 문득 그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거기서 아이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A급도 아니다. S급으로만 구성된 것들이었다.
“여기 온 모든 각성자들의 아이템이다. 네 눈치 빠른 파동에 걸리지 않기 위해 내가 모아둔 것이지.”
“…이걸 왜?”
“내 직원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하지. 성요한에게 가는 길이다.”
그가 말한 길이란 300레벨을 달성하라는 뜻이었다.
최태성이 쌓인 아이템 중 칼 하나를 뽑아 들었다.
“직원한테 죽는 모습을 생각해봤더니 아무래도 너무 추할 것 같아서.”
푹!
그가 자신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었다.
최태성은 끝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거기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빛이 회색으로 변했다.
털썩 쓰러진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열둘! 빨리!
하오란이 재촉했다.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죽은 최태성을 포함해 아이템들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