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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는 미래를 본다-162화 (162/170)

162화 성요한(5)

“자, 잠시만!”

남자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일본의 몇 없는 S급으로 알고 있다. 율리안 펜슬러와는 한때 같은 던전을 돈 적이 있다던데.

이름이 테츠야였던가.

자세한 사정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그런 걸 알수록 마음이 약해지잖아.

더군다나 저놈은 다짜고짜 나를 죽이려고 했다.

S급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내가 주위에 다가가기만 해도 죽이려고 본다.

펜슬러의 말에 따르면 생존 본능이 시켰다고 하는데.

나는 저벅저벅 걸어가서 일본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는 나 죽이려 했고, 나는 널 살려주는 대신 경험치 좀 나눔하고. 괜찮은 거래 아니야?”

펜슬러를 보면서 이야기했는데, 뒤에 있던 펜슬러가 침을 꿀꺽 삼키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다려! 기다려! 나한테 있는 아이템을 전부 줄 테……!”

발악하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곧이어 그가 멍한 얼굴로 시선을 한 데 고정했다. 그사이 나는 잽싸게 그의 속에 있는 마력을 빨아들였다.

256, 255, 254.

테츠야의 레벨이 낮아질수록 내 쪽으로 힘이 들어오는 식이다.

이윽고 250이 넘는 경험치를 모두 흡수했다.

테츠야는 아예 눈을 까뒤집고 있다.

그의 머릿속을 뒤져 쓸만한 정보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래서 준다는 아이템은 언제 줄 겁니까?”

“……뭐?”

“가지고 있는 아이템 전부 준다면서요. 언제 줄 거냐고요.”

“…아. 그렇지. 아이템을 주기로 했지.”

테츠야가 멍한 얼굴로 인벤토리를 소환했다. 그 속에 있는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번쩍번쩍거리는 것이 그것들이 A급과 S급임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그것들마저 경험치로 전환시킨 뒤 테츠야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제 돌아가세요.”

“돌아, 가?”

“모아놓은 돈은 많죠? 그걸로 유유자적 낚시도 좀 하고 사세요. 보니까 그쪽도 좀 지쳤더만.”

“그래. 많이 지쳤지. 정부의 압력이 아니었으면 나도 진작 은퇴…….”

“테츠야 씨. 오늘 무슨 일이 있었죠?”

“오늘? 눈을 떴더니 모든 능력이 사라져 있었어. 처음 각성했던 그날처럼 말이야.”

“후련하시겠네요.”

“그래. 이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겠어. 늘 쫓기는 기분이었거든. 그나저나 이런 걸 자네한테 왜 말하고 있지?”

기억조작까지 완벽하다.

죄책감 따위는 없다.

각성자들의 세상은 원래 강한 놈이 모든 걸 가지니까. 여기에 민간인들의 도덕이 끼어들 여지는 조금도 없다.

테츠야는 그대로 두고 뒤를 돌았다. 율리안 펜슬러와 에밀리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분위기가 묘했다.

특히 펜슬러 쪽은 완전히 절망으로 일그러져있다. 언제든 틈을 타서 도주할 생각을 하더니, 방금 상황을 보고 그것마저 포기한 듯했다.

나는 나대로 표정이 안 좋았다.

299레벨 99.99%.

현재 내 경험치다.

그리고 이전 S급 각성자 세 명분의 힘을 흡수했을 때도 이 상태였다.

혹시 시스템이 내가 레벨업하는 걸 방해하려고 무슨 짓을 벌인 건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시스템은 한 번 만든 자신의 규칙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어길 수 없거나.

예컨대 누군가의 레벨을 강제로 낮추거나 높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이래서는 얼마나 더 힘을 흡수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벌써 열 명이 넘는 S급 각성자들이 내 손에 힘을 잃었다.

서서히 블랙 마켓 쪽으로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S급 각성자들이 하루 아침에 힘을 잃고 있다고.

아무리 기억조작에 주변 증거들을 모두 없앤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다.

내 정체도 조만간 들킬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되면 일이 언제까지 길어질지 모른다. S급 각성자들이 작정하고 동굴에 숨어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펜슬러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생각을 정리하듯 입안의 말들이 떠도는 듯했다.

그러다가 결심이 선 듯 눈을 부릅뜨고 내게 말했다.

“S급 각성자들을 모아줄 수 있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율리안 펜슬러의 힘은 남겨뒀다. 그를 미끼 삼아 S급 각성자들을 불러 모으려고.

확실히 짬이 많은 S급이다 보니 아는 각성자들도 하나같이 레벨이 높았다.

그 부분은 마음에 드는데, 역시 속도가 문제다.

“그 속도를 맞춰줄 수 있다는 말이다.”

“……?”

“그 전에 약속받을 게 있다.”

“힘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설득하든 넌 내 힘을 모두 가져가겠지.”

펜슬러가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맞다.

안 그래도 한 톨의 경험치가 아쉬운 마당에 저 경험치 덩어리를 내가 남겨둘 리 없다.

“뭣하면 그 이상한 세뇌… 스킬로 내 기억을 이상하게 만들겠지. 아닌가?”

“지금 네가 하려는 협상의 내용도 알 수 있지. 이상한 거래 따위를 하지 않아도 말이야.”

“……!”

“아직 내가 그 정도로 인간성을 상실하지는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물론 그것도 네가 내게 어떤 걸 줄 수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펜슬러의 얼굴이 대놓고 밝아졌다. 안도의 한숨을 쉰 그가 내게 말했다.

“거의 모든 S급 각성자를 한데 모을 방법이 있다.”

이건 좀 끌리는데.

더 들어보기로 했다.

“퀘스트, 라는 게 있다.”

이건 더 흥미롭다.

퀘스트.

시스템이 내게 줬던 거 아닌가.

“S급 중에서도 몇몇만 알고 있던 내용이지. 반응을 보니 너도 아는 것 같군.”

“계속.”

“퀘스트가 떴다. 너와 관련된 내용으로.”

다시 한번 호흡을 고른 펜슬러가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

“너를 죽이라더군. 공적도에 따라 보상이 나눠지고 보상의 내용은…….”

그가 줄줄이 퀘스트 내용을 읊었다.

[퀘스트 발생 : 이태진을 제거하라(S)

내용 :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는 이태진은 모두에게 잠재적인 위험이 될 것입니다.

동족을 배신한 이태진을 제거하십시오. 힘을 합쳐도 좋습니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올 것입니다.

보상 : 레벨업X30, 특성 : 검신의 축복(S), 스킬 : 아드레날린 부스트(S), 아이템 : 아락투스의 삼신기(S)

남은 시간 : 5일 23시간 59분]

이것 봐라.

다급하긴 어지간히 다급했나 보다. 보상이 화끈하다 못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 정도면 내가 다른 각성자였어도 시도할 만큼 보상이 달다.

그래서 수상했다.

시스템은 절대 바보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급하게 일을 진행한 놈은 더더욱 아니다.

놈의 은밀한 습성은 차라리 나 몰래 제2의 이태진을 만드는 것이 더 어울린다.

심지어 율리안 펜슬러가 내 옆에 있다는 걸 알면서 이런 퀘스트를 줬다고?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결론은 생각보다 금방 나왔다.

초조하게 서 있는 율리안 펜슬러에게 말해줬다.

“너희들한테 주는 퀘스트가 아니라, 나한테 주는 선물이다. 그거.”

***

손정연과 네로드의 싸움을 붙일 때만 하더라도 S급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나에게 무리였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아락투스의 삼신기를 얻고 8서클에 올라섰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S급 각성자를 무더기로 상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거기에 더해 조력자만 있다면.

이건 선물이 맞다.

일 장로가 제대로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시스템이 내게 선불을 지급하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히려 한다.

-형제. 내가 듣기로는…….

수화기 너머 하오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 준다는 데 마다할 수는 없지.”

-나한테도 기회를 주겠지?

“물론이다.”

-오랜만에 레벨업 좀 하겠군.

당장 내 쪽으로 튀어오겠다는 하오란에게 위치를 알려줬다.

곧 도착할 S급 각성자들을 한번에 쓸어버릴 위치.

시스템이 어지간히 애가 탔던 모양이다.

제3의 성요한, 제2의 이태진을 만드는 대신 이미 한 번 배신한 나를 또 선택하는 걸 보면 말이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 받아주는지 궁금하다.

혹시 이것마저 받고 저쪽으로 넘어가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시스템의 마지막 호의임을 인지하십시오.]

“고맙게 받지.”

시스템에게 남아있는 카드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했다.

놈의 습성상 무턱대고 내게 잘해주는 것은 아닐 테고, 다른 카드가 반드시 있을 텐데.

설마 나를 300레벨로 만드는 것조차 놈의 계획 안에 있는 걸까?

내가 모르는 어떤 음모가 있을 텐데.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옛날과 달리 불안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놈이 오든, 어떤 상황이 닥치든 무서울 게 없었다.

왜지?

이 생각의 근거가 무엇일까.

“일단은 S급 각성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 방금 말했던 계획을 올릴 생각…… 왜 웃지?”

한참 계획을 설명하던 펜슬러가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나도 모르게 내 입가를 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스템한테 남은 카드가 없는 것 같아서.”

***

독인 줄 알면서도 삼키고 싶을 때가 있다.

반드시 삼켜야만 하는 때도 있다.

전 세계의 S급 각성자들에게는 지금이 그럴 것이다.

뜬금없이 나타난 S급 퀘스트와 내용.

수상할 대로 수상한 이태진을 죽이라고 한다.

시카고의 던전에서 빠져나온 장면을 S급 각성자들이 못 봤을 리 없다.

굉장히 수상쩍은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

그렇다고 그놈들이 안 올까?

천만에.

혹시라도 다른 놈이 이태진을 죽이고 보상을 가져갈까 봐 안달이 났을 것이다.

누가 자신보다 위에 있는걸 견디지 못하는 것들이 바로 S급 각성자들이다.

“형제. 뭘 하는 거지?”

“마법진을 치는 거다.”

버려진 무인도 중 한 곳에 자리 잡았다. 하오란이 두근대는 얼굴로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마법? 설명해다오. 나도 배울 수 있는 건가?”

“그럴 리가. 말 그대로 마법진이다. 이곳에 온 놈은 누구도 빠져나갈 수도 없게끔 만드는 거.”

또한, S급 각성자들의 힘이 폭발해도 이 섬 바깥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게끔 만드는 방어 효과까지.

하오란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주 좋은 마법이었군. 빠져나가고 싶어도 못 나간다라. 도망치는 것들은 내가 맡겠다. 어차피 그때쯤엔 힘이 다 빠져있을 거잖아.”

어떤 그림이 펼쳐질지 벌써 보이나 보다.

하오란이 입맛을 다시며 다른 쪽을 턱짓했다.

“저것들은?”

“미끼.”

펜슬러가 주춤대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은 끝난 것 같군.”

“인정한다.”

펜슬러는 각성자들을 그러모은 역할을 맡았다.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내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 것.

또, 적당히 기름을 치며 각성자들을 자극시킨 것까지.

“의심은 하지 않더군. 아마 우리 가문에서 나온 정보력이라고 알 것이다. 물론 의심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왔겠지만.”

펜슬러의 가문은 각성자들의 정보를 사고 파는 데 특화돼 있다고 했다.

“자, 이제 힘을 거둬라.”

펜슬러가 양팔을 벌리며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대신, 약속은 꼭 지켜라. 나와 에밀리의 안전.”

“약속한다. 이놈이랑 다르게 나는 그 정도까지 사이코패스는 아니거든.”

하오란이 뜨끔하며 발끈했다. 그것을 무시하며 펜슬러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힘을 거두려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은 순간.

펜슬러가 침을 꿀꺽 삼켰다.

“펜슬러.”

“빨리 힘을 거둬가라.”

“나를 속였군.”

쯧.

펜슬러의 동공이 커졌다. 다급하게 그가 외쳤다.

“지금이다!”

내 감각을 훼방시켜 놓으려 무던히도 애쓴 모양이었다. 절반의 성공인 것을 보면, 내가 모르는 어떤 스킬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잠했던 섬 곳곳에서 온갖 놈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금빛 물체 하나가 내 쪽으로 쏟아졌다.

롱소드로 가볍게 그것을 쳐냈다.

콰아아앙!

먼지구름이 일어나려던 것이 멈췄다. 느려진 시간대 안에서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물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뚝뚝 끊기는 프레임 뒤로 확연하게 얼굴이 드러났다.

“회장님.”

최태성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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