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성요한 (4)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
과연 이 세상에 모든 던전과 게이트,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미친 각성자놈들이 세상을 망치겠지.
이건 미래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몬스터라는 공통적인 적이 사라지고 나면 언제든 잔뜩 쌓아뒀던 힘이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른다.
하다못해 A급 각성자만 돼도 도시 하나를 괴멸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데.
과연 S급 각성자들이라고 가만 있을까?
천만에.
그놈들이야말로 미쳐 날뛸 거다.
몬스터가 없다면 레벨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로지 같은 각성자를 죽이는 일뿐이다.
던전이 사라지면 아이템을 얻을 길이 다른 각성자의 것을 뺏는 것뿐이다.
지금보다 국가에 반하는 적대 세력이 훨씬 늘어날 것이다. S급끼리의 전투가 이 땅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기껏 목적을 달성하고 지구에 왔는데 불타버린 도시를 볼 수는 없다.
“내가 다 흡수하는 수밖에. 어쩔 수 없이.”
누가 착한 S급이고 나쁜 S급 구분할 방법이 없다.
착한 S급 각성자가 언제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는 차별 없이 모든 각성자들을 흡수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경험치는 덤 같은 거고.”
절대 경험치가 주된 목표가 아니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일단은 그래도 나쁜 놈부터 걸러야겠지.”
신문에 찍힌 사진을 봤다.
누가 봐도 수상하다. 내가 S급 각성자라면 한 번쯤 궁금해할 만하다.
온갖 회유와 협박이 들어올 것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미끼를 던졌으니 잡으면 그만이다.
혹시나 내가 던진 미끼를 물지 않을까 봐 더 큰 것도 준비해뒀다.
일 장로를 통해서.
S급 각성자만을 대상으로 판 좀 벌여보라고.
***
새벽.
연무장에서 제 키만 한 대검을 휘두르던 율리안 펜슬러가 옆을 눈짓했다.
“살벌해라. 훈련은 잘하고 있어?”
“에밀리.”
“오랜만이야 펜슬러. 혹시 들었나 해서. 시카고의 던전이 사라졌다.”
“들었다.”
“누가 공략했는지도?”
부웅!
대검을 휘두르던 율리안 펜슬러가 멈칫했다.
“동양인이라더군.”
“그냥 동양인이 아니야. 요즘 그쪽 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라고.”
“하오란.”
“맞아. 그리고 이태진이라는 녀석도.”
“…옆에 있던 놈.”
부웅!
펜슬러가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면서 이어 말했다.
“그놈은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하오란 혼자서 그 던전을 공략했을 리도 없고.”
“왜?”
“A급이니까.”
에밀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펜슬러 나으리께서도 모르는 사실이 있군. A급은 이태진이야. 그 옆에 있던 라이벌 하오란은 S급이고.”
“그래. S급에 도달한 지 꽤 됐지.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어?”
“삼 개월 전이다. 분명 우리 가문의 정보로는 놈의 레벨은 190에 불과했었지.”
“그런데?”
“하루아침에 S급이 돼서 나타난 거다.”
“그때부터 중국 기업들을 하나씩 깨고 다녔었구나. 그런데 넌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말 안 했어?”
에밀리가 눈을 크게 떴다. 펜슬러가 몸을 움직이면서 말했다.
“네가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격한 동작에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또 내가 모르는 게 뭐가 있어?”
“놈들 뒤에는 조력자가 있을거다. 하오란을 S급으로 만들어 준 조력자.”
펜슬러가 그것들을 포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슨 말이야? 그 잘난 정보력 좀 나한테도 나눠줘 봐.”
부웅!
펜슬러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에밀리가 대검의 진행 방향으로 다가갔다.
펜슬러가 멈칫하던 것도 잠시, 에밀리의 정수리 바로 앞에서 검을 멈췄다.
닿지도 않았건만 검에서 튀어나온 풍압만으로 에밀리는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그럼에도 저 힘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
“역시. 너는 내가 아는 최고의 전사야. 누구는 성요한이나 동방의 손정연을 그 라이벌로 생각한다지만 말이야.”
“무슨 짓이냐.”
“가르쳐 줘. 하오란 뒤에 있다는 놈들이 뭐야?”
훈련은 글러먹었군.
그렇게 중얼거린 펜슬러가 대검을 거치대에 꽂았다. 옆에 놓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말했다.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다.”
“그 심증이 펜슬러의 입에서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에밀리가 눈빛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펜슬러를 바라봤다. 펜슬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모른다.”
“뭐?”
땀을 닦은 펜슬러가 윗옷을 갈아입었다. 황당하게 서 있는 에밀리가 닦달했다.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이다. 뒤에 있는 놈들이 어떤 외계인인지 우리도 파악하지 못했어.”
“율리안 가문에서 모르는 건 없어.”
“가문의 늙은이들의 초조한 모습을 보는 것도 신기하더군.”
그때를 회상하듯 펜슬러가 조소를 지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태진, 하오란이야?”
펜슬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세력의 선택기준이야 모르지만 굉장히 치밀한 건 알겠더군.”
“……?”
“두 동양인이 강해진 과정이 우연치고 굉장히 일치했다. 절묘할 정도야. 단순히 특성이 일치한다는 게 아니라, 도플갱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히 이태진 그놈은, 큭. 단기간에 그렇게 빨리 강해진 놈은 처음이다. 그놈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너 치고는 두루뭉술한 말 투성이네.”
“그래도 한가지 파악한 점은, 이태진도 조만간 S급이 될 것이라는 것이지. 더 늦기 전에 놈을 찾아가야 한다.”
에밀리가 눈을 번쩍 떴다.
“잠시만.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잖아. ”
“S급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쉽게 돼?”
“될 거다. 이태진, 하오란 뒤에 있는 세력이 그걸 원하니까. 세상은 정말 천외천이더군.”
“대체 그놈들이 뭐길래? 작은 정보도 없어?”
“없다.”
“좋다 말았네.”
“그래서 알아보러 가야지.”
완전히 옷을 갈아입은 펜슬러가 주머니에서 여권을 흔들었다.
“어딜 간다고?”
“이태진을 만나러.”
“뭐?”
“너도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는 또 거길 왜 가?”
“영감들이 명령을 내렸다.”
에밀리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빌어먹을 율리안 가문의 늙은이들.
그것들이 건 세뇌 마법에서 평생을 묶여 다녔다.
발악해봤자 소용없었다. 기나긴 세월을 그들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소원이 그것들을 산 채로 찢어버리는 거야.”
바로 앞에서 제 가문의 원로들을 죽이니 살리니 해도 펜슬러는 눈 하나 깜박거리지 않았다.
“뭐가 좋아서 실실 웃어? 너도 내가 우스워?”
“그게 아니다. 미리 축하해야겠군. 에밀리. 이게 영감들의 마지막 명령이야.”
에밀리가 눈을 번쩍였다. 방금까지 찌푸리던 미간을 활짝 폈다. 에밀리가 방방 뛰며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 마지막인 거야?”
“이태진을 추궁해 세력의 비밀을 알아내는 게 마지막이다. 네 자유를 허락받았다.”
순식간에 에밀리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네 세뇌도 풀 수 있겠지. 거지 같은 원로들의 몸을 찢어버릴 수도 있고.”
“펜슬러!”
“어렸을 적의 빚을 갚는 걸로 하지.”
펜슬러가 혀를 찼다.
“그래도 원로들의 몸을 찢어버리는 건 참아다오. 평생을 쫓기고 살 수는 없잖아.”
율리안의 가문은 여느 국가 못지않을 정도로 각성자를 많이 배출해냈다.
아무리 가문 최고의 전사라 불리는 펜슬러라 할지라도 그들 모두를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이 일만 마치면 나도 은퇴할 거다. 몬스터도, 각성자도 지쳤어.”
에밀리가 깜짝 놀라며 펜슬러를 바라봤다. 지쳤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펜슬러가 은퇴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만뒀을 거다.”
“…가문의 어르신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쩌면 네게도…….”
“방해하는 놈은 베면 그만일 뿐. 적당한 명분만 있으면 가문에서도 어쩔 수 없을 거다. 지금은 네 세뇌를 푸는 것에만 집중해야 할 텐데. 에밀리.”
“아…깝지 않겠어?”
“전혀. 능구렁이 같은 가문 원로들한테 낚여서 허비했던 세월이 더 아깝지.”
펜슬러가 에밀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여생은 호수에서 낚시나 하며 보낼 거다.”
에밀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도시락을 싸야겠군.”
“그래. 그런 거다.”
펜슬러가 대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결연한 표정이 엿보였다. 겨우 A급 각성자를 잡으러 가는 것인데도 여느 때보다 긴장됐다.
지난 세월 자신을 지켜온 본능적인 생존감각이었다.
S급 던전보다 이 미션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태진의 위치는 확보해놨다. 가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놈의 입을 열어야 하니까.”
***
한국에 도착한 펜슬러는 지체 없이 일성부터 찾아갔다. 정확히는 일성의 맞은편 건물 옥상으로.
에밀리가 망원경으로 건물의 14층을 쳐다보다가 눈을 찌푸렸다.
“보호막이 한두 겹이 아니야. 이래서는 안쪽 확인은커녕 알람 마법에 발각도 못 해.”
“네 마법으로도 불가능하다?”
“이것들. 돈을 얼마나 처발랐는지 15겹으로 블랙실드를 쌓아놨어. 핵탄두가 떨어져도 살아남겠군. 아니, S급 게이트가 터져도 저 안에만 있으면 문제없겠는데.”
“아시아에서도 일, 이 위를 다투는 곳이니까. 어쩌면 당연했을 수도 있겠군.”
“어떻게 할 거야?”
“이태진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포획이 최우선이지?”
펜슬러가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일성의 건물 바깥으로 나온 이태진이 보였기 때문이다.
설렁설렁 차에 올라타는 이태진은 각성자라기보다는 일반인처럼 보였다.
흘러나오는 기세는 확실히 A급에 가까웠다.
에밀리가 펜슬러를 돌아봤다.
“확실히 아직은 A급이야.”
그런데 펜슬러의 표정이 이상했다. 원래도 웃음은 없었지만 유독 얼굴이 굳어있다.
“아니. 최선을 다해 죽여라.”
“뭐? 놈을 붙잡아서 뒤에 있는 세력을 물어본다며.”
“취소다. 죽여야 해.”
“왜?”
“아니면 우리가 죽으니까.”
펜슬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이태진에게서 나오는 기세는 A급이 분명했지만, 그의 생존본능이 말해주는 것은 달랐다.
저놈은 괴물이다.
차라리 영상으로 봤던 하오란을 상대하고 말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 생각해보면 헌터로 살며 이성적인 판단이 도움됐던 적이 별로 없다.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감각이 아니었다면……!
“지금!”
펜슬러가 몸을 돌렸다. 장비를 착용하는 순간부터 대검을 휘두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
예상대로 자신의 궤적 안에 이태진이 서 있었다.
언제 반대편 건물 1층에서 옥상까지 올라왔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전력을 실었다.
이 도시가 부서지든 말든 그것도 상관없었다.
놈을 죽여야 한……!
스윽.
이태진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겨우 손가락 두 개.
도시 하나를 박살 내고도 남을 힘이 겨우 손가락 두 개에 막혔다.
기분이 이상했다.
흩어지거나, 마나홀으로 다시 흡수돼야 할 마력이 이태진에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정작 이태진은 그러고도 짜증 난다는 표정이었다.
“에밀리! 도망쳐라!”
“쯧. 하여튼 S급들은 하나같이 눈치가 왜 이리 빨라?”
이태진이 유창한 독일어로 말했다. 귀찮음이 물씬 묻어 있었다.
“아는 S급 각성자가 몇이야? 그것들 좀 한꺼번에 불러봐. 연기도 하루 이틀이지. 이건 뭐.”
이태진이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대답 잘하면 살려줄 테니까 말해봐. 빨리. 서너 명만 더 흡수하면 레벨업할 것 같은데. 이래서는 한평생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