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성요한 (3)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과거에는 일 장로가 두려웠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서울역 게이트 때였나?”
아마 그랬을 거다. 그때 일 장로가 보여준 경이로운 이적은 지금도 기억난다.
손짓 한 번에 모든 몬스터들이 경직됐었다.
다음 손짓에는 몬스터들의 대가리가 터졌었다.
그때 나는 몸이 굳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시스템의 종아. 네 주인이 뭐라고 하더냐.”
“이런 건방진…….”
“풀어 보거라.”
“뭐?”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마법이 발현됐다. 내 쪽으로 다가오려던 일 장로가 그렇게 굳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움직이고 싶어도 무엇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거다.
천천히 일 장로 쪽으로 걸어갔다.
“네 힘으로 그 정도는 풀어야 나와 대화라도 할 자격이 생기지.”
“너같이 근본 없는 새끼 장난에 내가……!”
“평생을 거기서 그렇게 있으라고 할 수 있다.”
영원이라고 말해줬다. 마력만 잘 컨트롤하면 무리도 아니다. 그것을 일 장로가 모를 리도 없고.
“은혜도 모르는 놈.”
“그러고 보니 사막으로 건너가기 전, 내 목숨을 살려줬었군.”
“그걸 안다면 풀지 않고 뭐하지?”
“거기에 고통을 더하지 않는 건 그 덕분인 줄 알아라.”
일 장로가 한낱 동정에 호소하는 모습이라니.
한때나마 내 입장에서 절대자의 위치에 있던 녀석이 추락하는 꼴은, 썩 보기에 안 좋았다.
“시스템은 사지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잘도 너를 보냈군.”
“정말 주인님을 배신했군.”
일 장로의 눈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런 일은 그녀의 사전에 있을 수 없다는 듯 두어 번을 더 되물었다.
“아직 확정은 아니다. 네 주인 하기에 달린 거지.”
“시타둠께서는 이미 네게 과할 정도의 은혜를 내리셨다.”
“그렇겠지.”
“겨우 그 정도 고통을 마음에 담아 두고 시타둠께 등을 돌리다니. 네놈도 답답하구나.”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 선택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겪은 고통을, 환상 마법을 통해 보여줄까 했다가 생각을 접었다.
그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시타둠이 원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둔 게 아니다. 그런 알량한 마음가짐이었으면 그놈을 속이지도 못했겠지.”
“……?”
“네가 무슨 죄겠어. 시타둠이 원흉인 것을.”
“……?”
“그리고 배신이 아니고. 알량한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아니야. 묻잖아. 시타둠이 내게 뭘 줄 수 있냐고.”
마계의 주인이 내게 약속한 것들을 말해줬다.
차후, 분명 내가 지불해야 할 값어치가 있겠지만 마계의 주인은 확실히 값을 치렀다.
“네놈의 레벨을 그렇게 높여준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과거의 일을 묻는 자리가 아니야. 앞으로의 대가를 말하는 거지.”
“한 번 배신한 놈이 두 번 배 신하지 못할까.”
“거참. 배신한 게 아니라니까. 아직은.”
혀를 찼다. 그럴수록 일 장로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동정에 호소할 것이라면 나는 이만 가려고 하는데.”
“너 같은 것을 한두 번 보는 줄 아느냐.”
문득 일 장로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녀가 가소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성요한 이전에는 없었을 것 같으냐. 이후에는? 그것들 모두의 최후가 어땠는지 말해줄까?”
“…….”
“죄다 죽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그분을 배신한 놈을 가만히 둘 것 같으냐.”
너도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거라고, 반드시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라고 한다.
일 장로가 악을 쓰듯 외쳤다.
그럼에도 내 마음에는 조금의 파문도 일지 않았다.
그런 게 걱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다기엔 전능하신 시타둠께서 내게 너무 많은 힘을 몰아 주신 것 같아서.”
쯧.
“전지전능하다기엔 사람을 너무 잘 믿던데.”
“언제부터냐. 언제부터 그분을 속였지?”
“사막에서부터.”
사막에서부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시스템이 옳다고, 시스템의 말을 따라가자고.
그때만 해도 시스템이 내 속마음을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 행동, 표정을 보고 마음을 예측하는 것이었겠지만.
그 결과가 이것이다.
시스템은 온전히 내게 힘을 집중시켰고,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것은 네 착각일 뿐, 너 같은 놈을 한두 번 본 줄 아느……!”
“아마 성요한을 죽이려고 무리한 것이겠지.”
시스템이 무리하면서까지 퀘스트를 내려주고, 나를 극단적으로 강하게 만든 이유는.
“성요한이 도가 지나치게 거슬렸을 거야. 제가 만든 허수아비 1호가 번번이 제 앞길을 막아대니까.”
나를 죽이려 한 것도 성요한이고, 강해진 것도 성요한 덕분이다.
웃기는 노릇이었다.
“다시 말해서, 시스템은 더 이상 여력이 없을 터. 그러니까 말해라. 어떤 것을 줄 수 있는지. 마지막 기회니까.”
***
일 장로가 돌아갔다. 짓눌린 음성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눌러 말했다.
시간을 달라고. 답을 받아오겠다고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급한 건 시스템 쪽이니까.
시스템은 머리 아프라고 좀 놔두고, 나는 나대로 할 일이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텔레포트 마법 몇 번 써주면 될 일.
마법을 쓸 때마다 태평양이 훽훽 지나갔다.
어느새 도착한 곳은 내 집무실이었다.
털썩 주저앉아 인벤토리 안에서 아락투스의 삼신기를 꺼냈다.
마법 사전, 반지, 지팡이까지.
한 곳에 있자 안 그래도 맥동하던 그것들이 쿵. 쿵. 진동을 울렸다.
이것들은 S급 아이템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하다.
SS급, 그중에서도 최상위 아이템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왜 봉인을 걸어뒀는지.”
아락투스가 쓸데없는 짓을 해뒀다. 제 주인 몰래 한 짓이겠지.
마법적 처리가 들어간 아락투스의 지팡이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잡았다.
콰드드득!
저릿저릿한 전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어지간한 각성자들은 접촉한 것만으로 사망했을 힘이다.
화악!
그 힘을 억지로 눌러놓은 다음, 다시 제자리로 뒀다.
이 벼락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9서클은 요원하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작업이 쉽지 않았다.
금방 풀 줄 알았는데, 아락투스가 몇 번이나 마력패턴을 꼬아서 봉인해둔 것이다.
“쯧.”
언젠가는 풀 수 있겠지만, 아락투스가 바라는 것도 얼마간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하다.
혹시나 해서 경험치로 바꿔볼까, 생각해봤다.
실제로 그 미친 짓을 행하진 않았지만, 생각은 할 수 있는 거니까.
결과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삼신기 세 개를 경험치로 치환하면 300레벨에 도달할 수 있다.
300레벨은 299와 한 끗 차이지만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기도 한다.
각성자의 각 등급은 그런 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아까웠다.
아무리 SS등급의 300레벨에 도달할 수 있어도 그렇지, 이것들을 거기에 태우자고?
대가로 마법의 효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것이다.
무력과 동등하던 균형의 추가 한쪽으로 확 기울 것이다.
“잠깐만.”
경험치로 치환이 가능하다면, 반대로 마력으로도 바꿀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어려운 일인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지금의 내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시스템이 만들어둔 구조를 변경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다.
심장이 두근댔다.
한 번 상상으로나마 테스트해봤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심장이 두근댔다.
가상의 내가 삼신기 안에 숨은 마력을 모두 끄집어 낸다.
그 안에 있던, 심지어 봉인된 마력까지도 모두 내게 쏠려 들어 온다.
여덟 번째 고리가 진동할 것이고, 엄청난 고통과 희열 속에서 아홉 번째 고리가 만들어진다.
그것으로 시뮬레이션이 끝났다. 현실로 쫓겨난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환상으로나마 아홉 번째 고리를 본 것이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면서 생각했다.
해 볼까?
아락투스의 표정이 상상 갔다. 미친놈도 이런 미친놈이 없다고 하겠지.
그게 어떤 아이템인 줄 아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를 것이다.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나야 9서클만 만들면 된다. 혹은 300레벨을 찍거나.
지금 당장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망설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시스템과 마왕 때문.
성요한만 생각하기에는 스케일이 상당히 커졌다.
하오란은 성요한만 죽이면 다 해결될 거라고 했지만 모르는 소리.
시스템과 마왕이 있는 한 제2, 제3의 성요한이 언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따지고 보면 나도 성요한도, 둘의 싸움에서 탄생한 전리품 같은 것이겠지.
세 가지 아이템을 두고 한참을 고심하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임한나가 보였다.
“너, 너.”
임한나가 말을 떠듬거렸다. 할 말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100년 동안 그 자리에 놔둬도 너, 너 외에는 아무 말도 못할 것 같다.
“네 특성? 천재는 박명 어쩌고 하던 거.”
“그래 그거!”
“갑자기 특성이 사라져서 놀랐겠지. 몸이 좀 가벼운 느낌도 들었을 테고.”
“그래 맞아!”
“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현실이었고.”
“그래! 그리고!”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고 상황도 파악 안 돼서, 물으러 온 거겠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임한나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주섬주섬 삼신기를 인벤토리 안에 넣으면서 말했다.
“못 말해줘.”
“뭐?”
“말해도 믿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러게 진작 듣지 그랬어.”
“한 번만 더 기회를.”
“버스 떠났다. 말해준다 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임한나가 황망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쇼파에 몸을 파묻었다.
더 묻지 않는 것이 의외였다. 잔뜩 떼써서 어떻게든 대답을 얻어낼 줄 알았는데.
“그래서 특성은 완전히 사라진 거야?”
“그래.”
그렇게 말했지만 아니다.
천재박명 특성은 내 품안에 있다.
윈윈이라고.
임한나는 거지 같은 특성을 없앴고, 나는 검신의 축복보다 뛰어난 특성을 얻은 것이다.
수명을 패널티 삼아 엄청난 잠재력을 끌어내는 특성.
아마 이것이 없었다면 죽을 때까지 아락투스의 지팡이에 있는 봉인을 못 풀었을 거다.
또한 거기 안에 있는 마력을 회수할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나머진 다 알겠는데, 이 사진은 뭔데?”
임한나가 품속에서 신문을 던졌다. 오늘자로 나온 따끈따끈한 일간지였다..
찌그러지는 보라색 던전, 그곳에서 튀어나온 남자 두명.
시간순으로 정리된 사진이 일목요연했다.
잔뜩 확대돼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기자들이 누구인가.
단 하루 만에 우리의 정체를 파헤쳤다고 한다.
“하오란과 이태진. 적으로 처음 만난 둘이 어떻게 여기 있냐는 건데? 그것도 S급 던전 앞에서.”
임한나가 제 휴대폰을 던졌다. 과연 인터넷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저 던전 지금 엄청 시끄럽던 그거 아님?
-ㅇㅇ 저 던전 게이트화되면 ㅈ된다고 미국에서 난리났음.
-듣기로 핵탄두도 준비했다던데.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쟤들이 왜 저기 있는 거임. 하오란, 이태진.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아니, 그보다 정황이 좀 웃기지 않음? 꼭 쟤들이 던전 공략한 거 같잖아.
-그러게ㅋㅋ 누가 보면 던전 공략한 줄 알겠음.
-……설마.
-내가 아는데 이태진은 잘해봤자 A급임. 그런 말도 안 되는 추리 ㄴㄴ. 사진에는 안 찍혔지만 뒤에 팀원들 더 있음. 이태진은 보조 역할로 S급 던전 들어간 걸로 암.
갑론을박으로 시끄러웠다.
나와 하오란이 저 던전을 공략했다와, 그 일과 나는 상관없다로 나뉘고 있었다.
하나같은 의견은, 하오란과 나 외에 다른 팀원들이 더 있었을 거라는 것.
“어디 갔다 온다던 게 S급 던전? 그것도 하오란?”
임한나가 신문을 흔들었다.
“설마 진짜 S급 던전을 공략한 건 아니지?”
설마하며 묻는데 눈빛은 이미 답을 내린 것 같다. 임한나의 재촉을 받아주면서, 사진이 찍힌 이유를 말해줬다.
“좀 불러모아야 할 것 같아서.”
“뭐? 무슨 소리야?”
“S급 각성자들. 한 자리에 모두 불러야겠어.”
“……왜?”
“힘을 좀 흡수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