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성요한 (2)
아락투스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허공을 바라보는 아락투스의 눈빛이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약속과는 다릅니다. 넘겨줄 수 없습니다.”
그가 발악하듯 외쳤다.
“단지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지 않습니까!”
이미 나와 하오란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었다.
“속지 마십시오. 시스템마저도 당황시키는 놈입니다. 주인님. 제가 요청드리겠습니다. 이놈을 죽여 주십시오. 그 힘을 제게 주십시오. 제가 이태진의 몫까지 일하겠나이다.”
처음 사막에서 만났던 절대자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의 그는 늙고 봉인당한 마법사에 불과했다.
남은 것마저 내게 뺏기기 직전의 마법사.
아락투스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여전히 살기 짙은, 흉흉한 눈빛이다. 살 떨리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신답니까?”
대답은 없었다. 잘근잘근 씹어먹을 듯한 시선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왔다.
S급 각성자가 아니라면 받아내지도 못할 속도였다.
가볍게 물건을 받아챘다.
평범해 보이는 나무지팡이다. 낡은 흔적이 이곳저곳에 새겨져 있어, 언뜻 보면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아락투스의 3신기 중 하나가 맞다.
생명체도 아닐 텐데 쿵, 쿵 거리는 맥박이 지팡이 쪽에서 들려왔다.
이거다.
이것만 있으면 9서클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만 있으면 성요한을 이길 수 있다.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돌아봤다. 하오란이 먹을 것을 바라는 길고양이처럼, 강렬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어째 너 좋은 일만 한 것 같군. 잊지 않았겠지?”
“마법 사전.”
“그래. 나한테도 마법을 배울 기회를…….”
“큭큭큭.”
돌연 아락투스가 웃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사람을 죽일 것처럼 쳐다보던 기세는 사라져 있었다.
아락투스가 우리 둘을 측은하게 쳐다봤다.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태진을 죽여야 할 것이다.”
“……?”
“마법사전은 한 번에 한 명에게만 힘을 허락하니까. 만들 때부터 그렇게 만들었지.”
“……!”
하오란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태진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터. 속았구나.”
아락투스가 나와 하오란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하오란에게는 안타깝다며 혀를 끌끌 찼고, 나한테는 사기꾼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했다.
우리 둘을 갈라놓으려는 거다.
그런데 내가 하오란이라도, 거기에 낚일 것 같다.
과연, 하오란이 황망한 얼굴이 됐다.
“여기까지 내가 어떤 개고생을 했는데. 마법을 못 배운다고?”
하오란의 머리가 터지고, 지방질이 질질 흘러나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미끼가 되기 위해서 꿈틀거렸었지.
충분히 억울할 만하다. 그리고 아락투스가 그 점을 파고들었다.
“배울 수 있다. 이태진만 죽이면 말이야.”
“…….”
“내가 볼 땐 저놈보다 네가 더 마법사로서 자질이 뛰어난 것 같구나.”
아락투스가 귓가에 속삭이듯 하오란을 유혹했다.
하오란이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고민중이란 뜻이다.
혹시나 하오란이 처음의 약속을 배신한다면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하오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도 눈치는 있어서.”
“뭐?”
“지금 이태진을 건드렸다가는 시스템이며, 그쪽 주인이며 할 것 없이 나를 가만 안 둘 것 같은데.”
하오란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내가 알고 있는 소시오패스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무표정한 얼굴.
“어지간하면 당신한테 속아주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똑같은 허수아비 신세밖에 더 되겠어?”
하오란이 나를 쳐다봤다.
“몇 번 죽일 생각은 해봤다만.”
“뭐?”
“내 팔을 가져갔을 때라든지, A급에 올랐을 때, 혹은 S급에 올랐을 때도. 정 안 되면 이번 던전이 끝나고 나서도 한번 시도나 해보려고 했는데.”
개중에는 실행 직전까지 간 것도 있다고, 하오란이 순순히 털어냈다.
녀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이지. 이 빚은 달아 놓는 걸로 하지.”
하오란이 나를 턱짓하며 말했다.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물론.”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온갖 곳에 적이 산재해있는데, 이런 소시오패스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사양이다.
더군다나 하오란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는 뜻은, 자신을 경계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락투스는 이 광경을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법을 배우기 싫으냐?”
“가르쳐 주실 겁니까?”
“이태진을 죽인다면.”
“먼저 가르쳐 주신다면 이태진을 죽이도록 하죠.”
농담처럼 안 들리는 말을 잘도 한다. 아락투스가 혀를 찼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이용당해서라도 살아날 수 있다면 그만입니다.”
“성요한이 하오란 네놈을 쫓아다닌다지?”
“숨길 것도 없습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불러드리고요.”
이판사판으로 나가기로 했나 보다. 하오란은 아락투스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끝내 포기한 아락투스가 몸을 돌렸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확답 한 가지를 받아야 한다.
“아락투스에게 합당한 대가를 받았으니, 이제 주인께서 약속한 것을 주실 차례입니다.”
“뭐?”
“지구에 있는 모든 던전을 없애주겠다는 약속. 언제 지켜주실 겁니까.”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얼마나요?”
“이것들이 진짜.”
아락투스의 몸 뒤로 마기가 치솟아 올랐다.
사막 아래에 봉인 당한 상태, 더군다나 3신기마저 없는 아락투스가 두려울 리 없었다.
심지어 나를 죽일 수도 없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해결해 주실 때까지 그럼 여기에 눌러앉아 있겠습니다.”
“여기가 어딘 줄은 아느냐?”
“아락투스의 던전.”
나는 아직도 힘의 잔재로 인해 개판이 나고 있는 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부작용이 사라지기까지 열 시간 정도가 남았네요. 온 김에 다음 층에는 뭐가 있는지 말해주십시오.”
“…….”
아락투스가 그제야 내 말의 의도를 눈치챘다.
“내 던전을 부수겠다고?”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엄연히 지구에 있는 던전인데.”
“그 짓을 하고 주인께서 너를 가만히 둘 거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아락투스님이 말씀을 잘 전해주십시오.”
“…뭐?”
마치 인심 쓰듯 말했다.
“당장 해결하지 못한다면 열흘을 드리겠습니다. 열흘 안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던전과 게이트를 없애 주십시오.”
“불가능하다.”
“그럼 전 계속 공략을 진행해야겠군요.”
소모전이 이어졌다. 애들이나 할법한 말다툼이었지만, 아락투스에게는 달리 느껴질 것이다.
“강력하게 주장해주십시오. 아락투스님이 말입니다. 제가 마왕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은 그 이후가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그 어떤 명령도 듣지 않을 겁니다. 약속해주실 수 있죠?”
아락투스가 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유일하게 남은 던전이 개박살나는 꼴을 보기 싫다면, 내 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아락투스가 깊은 숨을 토해냈다.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존재에게, 내 변호를 해야 할 생각 때문인 듯했다.
나 또한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시카고를 찾은 주지사가 혀를 끌끌 찼다. 도로는 텅 비었으며 건물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들개만이 이 도시에 생명이 아직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굳게 다문 주지사의 입술이 열렸다.
“개판이군.”
아까부터 옆에서 이런저런 브리핑을 하던 비서가 침음성을 삼켰다.
“시민들은?”
“몇몇 실종자가 있지만 대부분은 도시를 떠난 것으로 확인됩니다.”
“설마 몬스터에 의한 것은 아니겠지?”
“그랬다면 당국에서 먼저 저희에게 확인요청을 했을 겁니다.”
주지사가 한숨을 돌렸다. 그럼에도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내년에 있을 중간선거의 결과가 보였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사태가 더 심각하군. 이 정도일 줄이야.”
주지사가 이마를 짚었다. 의도적으로 기자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도 틀었다.
그때,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사진을 찍은 기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주지사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진은?”
“문제없습니다. 내일 지역지 1문에 실리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주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엔, 빌어먹을 S급 던전이 있는 곳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맑은 호수가 보였다. 그것만 보면 평화로워 보인다.
뒤쪽에 있는 빌어먹을 보라색 던전만 없다면, 관광지로도 손색없을 곳이다.
“당국에 지원요청만 진작 넣었더라도.”
주지사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었다.
1년 전, 그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주지사는 그것을 이용하려고 했었다.
무릇 S급 던전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니까.
S급 던전에서 나올 온갖 보상들.
그것들을 워싱턴의 돼지들과 나눌 수는 없었다.
용병들과, 일리노이 자체 헌터들로 파티를 구성했다.
개중 S급 헌터가 두 명이었으며
“어떻게 됐소? 지원 요청은?”
“중앙정부에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만…….”
“워싱텅은 잠잠합니다.”
주지사 옆에 앉은 비서가 냉철한 얼굴로 답했다.
“빨리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던전이 게이트화돼고 말 것…….”
“누가 그걸 모른다고!”
할 수 없어서 문제다. 도시가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다면 얼마를 써서라도 헌터들을 불러 모았을 것이다.
그때였다.
“어?”
호수 주변을 찍던 사진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이 흔들리고 있는데요?”
주지사가 고개를 훽 돌렸다. 진짜였다. 호수 위 둥둥 떠 있는 던전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게, 게이트?”
“아닙니다! 던전이 붕괴되고 있습니다!”
“뭐?”
고개를 숙인 주지사가 다시 머리를 들어올렸다.
그사이 흉흉한 보랏빛을 뿜어내던 던전이 사라져 있었다. 눈을 비볐다. 그럼에도 던전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에 있을 몬스터가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게이트라 아니라는 뜻이었다.
때마침 플래시가 터졌다. 옆에 있던 사진 기자가 홀린 듯이, 본능적으로 찍은 것이다.
“저건 뭐야?”
“남자, 두 명인데요?”
“저놈들이 누군데.”
“글쎄요. 착용한 장비들로 봐선 헌터들인데. 혹시…….”
사진 기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주지사가 숨을 고른 뒤 물어봤다.
“…찍었어?”
“…네. 이거, 어떡할까요?”
***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내가 벌인 일은 명백히 시스템을 배신한 일이다.
그런데 시스템 메시지가 잠잠했다.
“선택지가 없어서야.”
하오란이 킥킥댔다.
“시스템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미래를 보여준 것은 어디까지나 환상 마법의 일종이었지.”
미래를 보지 않은 지 오래됐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이 만들어낸 환상.
그것을 알고 나자 내 자의로 미래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네게 힘을 다 몰아줬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될 줄 알았을까. 불안해도 어쩌겠어. 너를 믿어야지.”
마법을 배울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강해지겠다는 말을 남긴 후였다.
하오란이 조만간 보자며 떠났다. 약속을 잊지 말라는 말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제야 주저앉았다.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잔재까지 없애고 왔지만 그럼에도 정신적 데미지가 남아 있었다.
또 한 가지.
아락투스의 지팡이에 봉인이 걸려있다.
일정 수준이 되지 않으면 열 수 없게끔 말이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푸는데에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임한나에게 받아온 천재박명 특성이 마법의 원리를 풀어헤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 앞에서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전투를 준비했다.
성요한이 나타났을 때 저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롱소드를 쥐고 그 앞을 바라보고 있을 때.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공간을 뚫고 나타난 건 일 장로였다. 언제봐도 적응되지 않는 미녀라는 건 변함없지만, 더 이상 거기에 현혹될 만큼 내 레벨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타이밍이 묘하다고 느껴졌다.
마계 쪽으로 전향을 밝힌 지금, 시스템의 종인 일 장로가 내 앞에 나타난 이유. 아무리 생각해도.
“잔뜩 긴장하기는. 귀엽게.”
일 장로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가 긴장한 건 사실이지만, 그건 생존을 돕는 긍정적인 긴장이다.
반대로 일 장로는.
“내가 무섭나 보군.”
다가오던 일 장로가 우뚝 멈춰 섰다.
“뭐?”
“반응을 보니 진짜인가 보네.”
“내가? 너를?”
일 장로가 황당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레벨 좀 올랐다고 눈에 뵈는 것도 없나 본데…….”
“용건이 뭐지? 시스템이 너에게 무슨 말을 전하라고 했는지 말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일 장로는 옛날의 일 장로가 아니다.
나도 옛날의 내가 아니고. 더 이상 그녀가 무서워 도망칠 일도, 멱살이 잡힐 일도 없다는 뜻이다.
아락투스가 생각났다. 문득 이 여자에게는, 정확히는 일 장로 뒤에 있을 시스템에게는 어떤 것을 얻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