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성요한 (1)
“한 번 들어나 본다? 들어나 봐?”
아락투스가 내 말을 되새겼다. 사막에서, 이셀라 옆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때와는 인상부터 달랐다.
차갑고 매정한 눈빛은 건조하기 그지없었고 툭툭 던지는 무정한 음성에 폐부까지 마르는 기분이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예감은 현실이 된다.
“아무래도 그 말버릇부터 먼저 고쳐놔야겠구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족쇄에 가해지는 압박이 거세졌다. 사지를 짓누르는 힘에 대항할 수 없었다.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티끌만 한 것아. 네가 쓸모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만,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줄도 모르고.”
“크아아아악!”
“그래봤자 아직 애송이 주제에 말이야.”
눈이 뽑혀 나갈 것 같다. 사고가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얼마 만에 이런 고통이 찾아온 거지?
기억도 안날만큼 오랜만이라서, 신선하기까지 하다.
“지금부터 너는 대답만 할 수 있다. 알겠느냐.”
인자한 목소리로 돌아오긴 했는데, 그것이 영 살벌하게 들리는 게 문제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아락투스를 쳐다봤다.
“이게 아직도 눈을 부릅뜨네. 뭐, 상관없나. 내 밑에 들어오면,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 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콰앙!
채찍 같은 무언가가 허리를 내리쳤다.
하도 맞아서 그런가, 슬슬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 같다. 아락투스를 올려다보자, 그는 그 나름대로 놀란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한테 악감정이 많은가 봅니다.”
“질문은 나만 한다고 했을 텐데.”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이다.”
“그 말버릇을 고쳐…….”
“누가 혼잣말을 존댓말로 합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에 끼고 있는 반지부터 재빨리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락투스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내 손에 끼워졌던 반지가 사라지자, 그의 미간이 더없이 구겨졌다.
“개인적인 감정을 풀려고 왔습니까? 이건 질문 맞습니다.”
“보기보다 명랑한 면이 있구나. 사막에서 저 혼자 세상 모든 고민을 짊어지더니, 그새 그때의 일은 잊은 모양이지?”
“덕분입니다.”
“뭐?”
“거기서 배운 마법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우울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아락투스는 나한테 원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제 보물창고의 가장 귀한 보물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내가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곱게 말이 나올까. 나 같으면 벌써 죽여도 백번은 죽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락투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되로 주려다가 말로 받은 아락투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다만 족쇄에 가하는 힘만 늘어났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버틸 만했다. 지금 저놈이 나를 죽일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옆을 보자 어째선지 하오란도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말이 나와서 그런데, 저한테 지팡이 좀 빌려주실 수 없습니까?”
놈이 나를 죽일 수 없다면 관계의 역전이 가능하다.
비록 나는 땅에 엎어져 있으나 웃고 있고, 아락투스는 위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으나 얼굴을 구기고 있다.
아락투스가 내 페이스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이유에는 내가 마법사전과 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고.
그러던 문득, 아락투스가 피식 웃었다.
“걱정 마라. 그것들 두 가지 모두 돌려받을 생각이니까.”
“말씀이 다릅니다. 시스템도 줬던 걸 뺏지는 않습니다.”
분명 아락투스의 주인이라는 자가 그랬다. 시스템에 대항할 힘을 주겠다고.
“그건 내 주인께서 알아서 하실 문제다.”
족쇄가 심장을 툭툭 건드렸다.
“나름 마력을 많이 모아놨구나. 건방지게 나를 놀린 대가는 치러야겠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족쇄가 정확히 심장이 있는 곳으로 파고들었다.
문제가 있었다. 내 힘의 근간은 아락투스의 마력이다. 놈이 원한다면 힘을 흡수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마땅히 회수해갈 힘이지.”
“이러면 제가 시스템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너는 지금 당장 죽어야겠다.”
“저를 죽이면 당신의 주인께서 화를 내지 않을까요?”
“이미 엎어진 일이라 생각하실 거다.”
“제가 필요하시다면서요.”
“네 어리광을 받아줄 정도는 아니라서.”
즉, 지금 당장 이 현장의 주권은 자신에게 있으니 까불지 말라는 뜻.
할 말이 없었다. 지금 당장 시스템이 직접적으로 나를 도와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관계가 완전히 역전됐다.
아락투스의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을 때였다.
내내 족쇄에 꽁꽁 묶여 한 마디도 못 하던 하오란이 그때 입을 열었다.
“시스템은 몰라도 성요한은 부를 수 있는데.”
“……?”
나지막이 뱉은 말에 아락투스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를 불러?
굳은 얼굴 그대로 하오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락투스가 하오란을 턱짓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반응이 재밌는지 실실거리던 하오란이 말을 이어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요한을 이곳으로 끄집어낼 수 있다는 말이오.”
“성요한이 나를 죽일 수 있다?”
“도전해보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고.”
“진심인데. 어차피 죽을 거라면 우리도 곱게 죽을 수는 없지.”
하오란이 우리라는 말을 강조했다. 사지가 묶인 녀석이 낄낄대며 웃는 것은 꽤 기괴했다.
그런데 아락투스의 말이 길어지는 걸 보면, 그도 성요한을 이길 자신이 없는 것 같다.
“과연 놈이 여기 등장하면 누구부터 죽이려 들까. 사지가 꽁꽁 묶여 아무 반항도 못 하는 우리? 아니면 바로 앞에 있는 맛있는 먹잇감?”
그렇게 말한 하오란이 히죽히죽 웃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아락투스에게 말했다.
“당장 이것부터 풀어주십시오. 하오란은 제가 잘 설득하겠습니다.”
“꽤 합이 잘 맞는구나.”
“고생 몇 번 같이 했더니 금세 친해지더라고요.”
“시덥잖은 소리로 도발할 생각이라면 거기까지 하거라. 내가 네놈보다 족히 천 년은 더 살았으니.”
말과는 달리 족쇄의 압박이 점점 사라지고 었었다.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스르륵 내 몸을 빠져나간 쇠사슬이 아락투스에게 완전히 흡수됐다.
아락투스는 자존심이 잔뜩 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럴만하다. 성요한이 무서워 발을 뺀 것처럼 보일 테니까.
다시 한번 성요한의 위엄이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하오란에게 눈짓하며 전음을 보냈다.
-정말 성요한을 부를 수 있는 거냐?
-나한테도 비장의 무기 하나쯤은 있지. 혹시라도 네가 배신할까 봐 준비한 거였는데. 이렇게 써먹을 줄이야.
-미친놈.
-형제. 저 표정 좀 봐. 자존심이 상해서 부들부들 떠는 거 말이야. 장담컨대 너는 이해 못 할 거야.
하오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희열에 가득 찬 두 눈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드래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던 세월, 저놈이 미운 시누이처럼 같이 나를 괴롭혔거든. 큭. 그 과정에서 [완전회복]을 얻은 건 천운이었지.
정작 아직 이룬 건 아무것도 없는데 하오란은 벌써 짜릿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다.
-형제. 성요한을 이용해서 뭔가 더 얻어낼 수 없을까?
-말뿐인 협박은 이제 안 통할 거다. 진짜 부르는 게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만 나겠지.
이미 약효는 떨어졌다. 성요한에 대해 한마디만 더 꺼냈다가는 아락투스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 모른다.
채찍으로 때렸으니, 당근을 줄 차례다.
“주인 말입니다.”
“……?”
“아락투스님의 주인. 정체가 뭡니까?”
그렇게 운을 띄웠다. 내가 너의 편을 들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줘야 한다.
“마계의 주인이자 모든 마물들의 왕이시다.”
“마계는 무엇이고요.”
“네놈들이 던전이라 부르는 곳의 근원. 너희들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다른 차원이라 불러야겠군.”
“아락투스님은 몬스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사전에도 인간이라 적혀 있던데요.”
아락투스가 혀를 찼다. 답해주기 싫다는 거다.
“지금부터 딱. 세 가지 질문만 허용한다. 그 뒤에도 네놈이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우리와 시스템 사이에서 간을 볼 경우 곧바로 죽이겠다.”
굉장히 인심 쓴다는 태도다.
대답만 하라던 처음과는 완전히 상반되기도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것들에게 궁금한 것은 별로 없었다.
당장 아락투스의 태도만 봐도 이것들이 약속을 제대로 지킬 것 같지도 않고.
지금 당장 살아나가는 게 급선무다. 챙길 수 있는 이득을 챙기면 베스트고.
아락투스가 나를 턱짓했다.
“물을 게 없다면…….”
“이셀라가 있는 붉은 사막을 시스템이 정복하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묻힌 우리의 본체 때문이지.”
“우리요?”
“…성전에서 싸우고 봉인된 나와 2군단장의 본체. 그리고 시스템 쪽의 꼭두각시들. 그것들이 거기에 묻혀있다. 하나 남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이제서야 깨닫는 것이지만, 아락투스의 사막에는 내가 모르는 경계가 숨겨져 있었다.
그 속에 이것들의 시신이 묻어져 있다.
잠깐만.
지금의 아락투스는 봉인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의 힘을 소유한 것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잠깐만.
이런 아락투스도 성요한이 이곳에 들이닥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혹시 내가 성요한의 힘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성요한이 얼마나 강한지 말씀해주십시오.”
“너와 나보다는 약간 더, 우리의 주인과 시스템보다는 약하다.”
“레벨로 따지면요?”
“질문은 모두 끝났다.”
“아락투스님도 모르시는군요.”
“건방진 애송아. 네놈이 대답할 차례다. 시스템에게서 우리에게로, 넘어올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언제 튀어나왔는지 모를 지팡이가 아락투스의 손에 들려 있다.
아락투스가 아끼는 3신기 중 마지막 하나였다.
“대답하거라.”
아락투스가 나를 재촉했다.
배신이라는 말도 웃기지만, 여기서 시스템을 배신한다?
상당히 일이 복잡해진다.
시스템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실컷 키워놨더니 다른 곳에 간다는데, 나 같아도 보복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망설였다가는 저놈의 손에 당장 죽게 생겼고.
이렇게 된 이상, 될 대로 되라였다.
“지팡이를 주십시오. 그러면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아락투스가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바람 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옆을 바라보자 하오란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뭘 달라고?”
“들고 계신 지팡이 말입니다.”
“정신이 나간 게냐?”
“멀쩡합니다. 지팡이쯤 되는 물건이 아니라면 제가 뭘 믿고 전향할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시스템은 뭘 쥐여 주고 말을 따르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락투스는 어떻습니까? 무작정 저를 죽이려 했는데, 어찌 반감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아락투스의 눈이 좁아졌다. 그쯤에서 내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제 세상에 던전을 없애주신다고 했지만, 그게 당장은 아니겠지요. 아닙니까? 당장 모든 던전을 없애준다고 약속하실 수 있습니까.”
“네게 건네줄 힘은 그런 종류가 아니니라.”
“이건 약속의 증표이자, 아락투스에 대한 제 복수이기도 합니다. 저를 우습게 보는 아락투스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 주십시오. 이 자와 동등한 취급을 해주시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봉인당한 아락투스가 저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보다 쓰임새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 순간만큼은 시스템이 간섭할 수 없다. 아락투스가 펼친 정체불명의 결계 때문이었다.
아락투스가 수염을 흩날리며 혀를 찼다.
“네 어리광을 들어줄 분이 아니시다.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나부터가 네 목숨을…….”
잔잔하게 말하던 아락투스의 말이 끊겼다. 좁혀졌던 눈매가 벌어진다.
그에 따라 동공이 함지막하게 커졌다.
별안간 아락투스가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주인님!”
갈라진 아락투스의 음성에서 다급함이 묻어나왔다.
심장이 쿵쾅댔다.
설마 이게 통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