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S급 던전 (8)
이곳저곳 분해됐던 하오란이 점차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마치 영상의 되감기를 누르는 모습 같았다.
꾸물거리는 살덩이과 피, 뼈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까지 지켜본 뒤.
“아직 죽지 않았다.”
“그렇겠지. 드래곤이니까.”
완성된 하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드래곤.”
“뭐?”
“아락투스의 본 드래곤이다. 저놈의 진짜 정체.”
하오란이 목이 잘려나간 드래곤이 고소하다는 듯 낄낄댔다.
“크큭. 이태진. 혹시 알고 있나? 이계에서 드래곤은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다. 중간계의 수호자. 뭐 그런 거지.”
“……?”
“그런 놈이 아락투스 같은 마계의 존재에게 잡혀 이도 저도 못하고 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겠어.”
“얼마나 붙잡혀 있었던 거지?”
하오란은 웃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분노와 원한이 보통이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삼백 년.”
고개를 돌려 하오란을 쳐다보자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실제 시간은 의미없다는 것쯤은 이태진. 너도 알잖아.”
끔찍했던 그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하오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온갖 정신계 마법으로 나를 세뇌시키려 노력하더군. 제 딴에는 좋은 생각이었겠지. 쓸만한 부하 하나를 얻을 수 있으니까.”
“자살하지 않은 게 용하군.”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말하는 거다. 또한, 그것은 오로지 나만 말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하오란이 말한 ‘형제’라는 단어가 비로소 이해됐다.
“모든 게 이날을 위해서였지. 이태진. 저놈의 마지막은 내가 맡겠다.”
“허락한다.”
때마침 목이 잘린 드래곤 쪽에서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
우우웅!
쩌저적!
새하얀 빛이 드래곤의 몸 쪽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성스러운 빛이라고 불러야만 했다.
다만 그 빛이 악랄하게 보이는 이유는, 빛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드래곤의 피부와 근육, 그리고 남아있던 피까지 앗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점으로 모인 빛이 드래곤의 미간 쪽으로 향했을 때.
우드득!
인간의 형태로 있던 놈이 거대해져 갔다. 빛이 앗아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오란의 말이 맞았다. 그것은 본드래곤이라 불러야 했다.
뼈밖에 남지 않은 드래곤이 기지개를 켰다. 나는 그 순간 고막을 닫았다. 모든 소음을 차단했다.
하오란을 보자 녀석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후우웅!
먹먹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지나갔다. 드래곤은 하늘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던 것도 잠시, 녀석이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 본능적인 위험이 느껴졌다.
이제껏 전투와는 차원이 다른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태진!”
“놀라지 마라.”
-프로텍트 실드!
캐스팅이 끝남과 동시에 하오란과 내 앞에 반투명한 보호막 하나가 떠올랐다.
영롱한 빛의 그것은 8서클 방어마법 중 가장 뛰어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직후, 드래곤이 아가리를 우리 방향으로 틀었다. 거대한 불덩이가 다가온다고 느껴졌다.
지옥의 불덩이라 불러야 했다.
흑색으로 칠해진 그것은 분명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아직 충돌하려면 거리가 한참이나 남았는데도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다.
“온다!”
흑색의 불덩이가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 우리에게 쏟아졌다. 그것이 놈의 전력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놈이 전투를 끝내려 하고 있다.
적이지만 칭찬해주고 싶었다. 장기전으로 갈수록 불리해지는 건 녀석일 테니.
그런 생각과 함께 드래곤의 브레스와 내 실드가 충돌했다.
치이이익!
첫 번째 보호막은 충돌 직후 날아갔다. 그것이 몸에 닿기 전, 찰나의 순간에 다음 보호막이 튀어나왔다.
세상이 흑백으로 분리된 느낌이었다. 정확히 절반은 내 쪽으로, 다른 절반은 놈의 브레스로.
진동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하오란이 덜덜 떨고 있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했던 때가 생각나는군. 이태진. 제발!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드래곤의 브레스만큼은 맞고 싶지 않다.
죽지 않는다고 해도 하오란의 말처럼, 죽여 달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통스러울 테니까.
쿠웅!
드래곤이 전력을 다했듯 나 또한 마력을 아끼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수십 겹의 실드가 펼쳐지고 녹아내렸다. 실드 하나가 덧씌워지고 없어질 때마다 하오란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드디어 막았다며 기뻐하다가, 실드가 벗겨지면 다시 부르르 떨기를 반복했다.
나만큼은 이 결과를 알 수 있었다.
마지막 한 겹이다. 이미 브레스의 힘은 약해졌고, 본 드래곤으로 화한 놈은 또다시 도주를 생각하고 있다.
펼쳐진 공간이 흑색 천지여도 놈의 생각을 읽는 것에는 문제없었다.
“준비해라.”
“뭐?”
“브레스가 끝나간다. 내가 도주하는 것을 막을 테니.”
“내가 끝내마!”
고개를 끄덕인 뒤, 실드를 거뒀다.
우리는 동시에 놈이 숨어 들어간 바다 쪽으로 몸을 뻗었다. 다이빙을 하는 선수처럼 우리는 직선으로 바다에 부딪혔다.
풍덩, 같은 귀여운 소리는 없다.
해류가 크게 돌았다.
크게 돈 소용돌이가 본 드래곤을 감싸 돌았다.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허둥지둥, 해류의 통제권을 가져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었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진 놈이다. 놈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차라리 정신 계열 마법으로 나를 공략했어야지.
쏜살처럼 달려간 나는 녀석의 뼈 중 한 곳에 매달렸다. 등쪽이 아닐까 추측하며, 주먹을 뻗었다.
후웅!
쩌저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의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다.
다시 한번 주먹을 움켜쥐어서 강하게 때렸다.
쿵!
일어나려던 녀석이, 그대로 바다 밑으로 고꾸라졌다.
깊은 바닷속 압력이 상당할 텐데도 녀석이 떨어지는 속도가 빛처럼 빨랐다.
어딜!
다리에 힘을 준 것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주먹에 전력을 담았다.
붉고 푸른 오러가 또 다른 해류를 만들어내면서였다.
거의 다 왔다!
놈이 그토록 방어하던 눈깔에 주먹을 밀어 넣는 것에 성공했다.
-쿠워어어어!
기다렸다는 듯 하오란이 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하오란의 투창이 정확히 드래곤의 미간에 박혔다.
쩌저저저적!
미간에서부터 시작된 금이 꼬리까지 이어졌다. 그것도 잠시, 드래곤의 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파사삭 부서진 뼈조각들이 아직까지 진정되지 않은 해류에 떠밀려갔다.
더 이상 생명 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다. 드래곤을 잡았다는 기쁨도 없었다.
이곳이 겨우 던전 2층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좋아할 것도 없었다.
땅으로 올라왔을 때. 주위는 재앙이 덮쳤다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주변을 휩쓸고 있었다. 운석이 떨어진 듯 움푹 파인 땅은 흑색 불꽃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오란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러던 하오란의 웃음도 내 질문 하나에 뚝 끊겼다.
“이다음 층은 뭐가 나타나지?”
이다음 층.
아락투스의 던전이라 불린 곳이 겨우 여기서 끝날 리는 없고.
분명 뭔가가 더 있다.
드래곤보다 더 강한 것이.
“아락투스. 3층은 아락투스가 있을 것이다.”
“던전이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럴 리가. 내 추측대로라면, 아락투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오란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놈은 자신의 던전이 파괴되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
“아락투스를 만난 적이 있나?”
“그게 놀랄 일인가? 너는 아락투스에게 마법까지 배워놓고서는.”
하오란이 쯧, 거리며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봤다.
“네게 속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진작 말할 것이지.”
“그때는 너를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하오란은 반지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마법 사전은?”
“가지고 있다.”
“나도 마법을 배울 수 있나?”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란의 진위는 이번 전투로 인해 확인했다. 녀석은 원한다면 나를 버려두고 도망칠 수도, 혹은 드래곤과 나를 동시에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과정만 보자면 그랬다는 것이다.
배신은커녕 나를 위해 탱커를 자처했고, 몇 번이나 죽었다가 살아남았다.
하오란의 재생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겪은 고통은 나조차 상상할 수 없는 것일 테니까.
“목숨값치고 비싸게 쳐줬군. 이태진.”
“이곳을 빠져나간다. 휴식부터.”
“그래야지.”
마지막으로 이곳에 잔재한 힘이 더 뻗어 나가지 못하게끔, 전방위적인 실드를 펼친 후였다.
텔레포트 마법을 전개해 놓은 허공으로 몸을 던졌을 때.
“어?”
세상이 뒤집혔다. 발목 쪽에 이질감이 들었다. 차가운 쇠와 비슷한 감촉.
그것이 내 몸을 바닥에서부터 끌어내리고 있었다.
겨우 쇳덩이였다면 내가 반응하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고 환영이나 환상 따위도 아니었다. 실재적인 힘이 나를 속박하고 있다.
어디냐, 누구지?
파동을 퍼트리면서도 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이윽고 바닥까지 다다랐을 때. 먼저 떨어진 하오란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놈이다! 아락투스가 나타난 것이다!”
하오란이 발악하듯 외쳤다. 직후에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어린 것들아. 장난질이 도가 지나쳤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렸다. 꺾이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을 때.
쓰러진 내 위에 노인 한 명이 보였다.
노인의 여유로운 자태와 별개로, 노인의 얼굴이 낯익었다.
“이셀라의 마스터.”
“내가 조심하라고 했지 않은가. 왜 내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이더냐.”
노인, 이셀라의 마스터, 아니, 아락투스가 말을 할 때마다 몸에 묶인 족쇄가 힘을 더했다.
아락투스의 정체를 알아냈다는 충격보다,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일어나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온 힘을 다했다. 아드레날린 부스트까지 아끼지 않았다.
시스템의 속성을 다룰 줄 아는 지금조차 아드레날린 부스트의 잔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꼼짝없이 탈력감에 누워있는 그때.
“이태진. 하오란. 제안을 하나 하겠다.”
아락투스가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말을 했다.
“이태진! 속지 마라!”
“하오란. 드래곤이 괴롭혔던 세월은 나와 관계없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믿을 것이냐.”
“크아아악!”
하오란이 비명을 질렀다. 추측건대 아락투스가 족쇄를 더 조인 듯했다.
“아끼는 펫을 죽였으니 응당 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야.”
아락투스가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 두둥실 떠오른 내 몸이 아락투스와 같은 지점에 이르렀다.
“시스템에게서 얻을 것은 다 얻은 것 같은데. 우리와 손을 잡는 건 어떻게 생각하지?”
“…….”
“약속 하나 하겠다. 이태진. 네가 그토록 원하던 소원. 네 세계에 있는 모든 던전을 회수시켜 주마.”
“…….”
“또한 시스템에 대항할 힘도 주겠다. 우리의 주인께서 너를 선택하셨다. 이태진.”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나를 죽일 것처럼 굴던 아락투스가 지금 내게 뭐라고 말하는 거지?
“너를 허수아비처럼 부려 먹던 시스템과 달리, 우리의 주인께서는 합당하시지.”
슬그머니 파동을 퍼트렸다. 예상대로 이 주위는 아락투스의 마력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즉, 시스템은 우리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내 눈치를 살피던 아락투스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한 번 들어나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