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S급 던전 (7)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다시 잡았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정신 계열의 마법에 속고 있었던 거지?
그런 의문이 바닥에서부터 샘솟았다.
어떤 의미에선, 성요한의 검술보다도 더한 충격이었다.
“크크큭.”
옆을 보자 하오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왼팔 전체가 누군가에게 뜯겨버려 어깨까지 사라진 녀석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도 억지로 미소를 그려내는 놈이었다.
“그렇게 충격받을 것 없다. 드래곤이 정신세계로 초대한 것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니까.”
“무슨 소리지?”
“저 도마뱀 새끼는 머리를 쓸 줄 안다. 아마 직접적인 힘싸움을 거부한 것이겠지. 이태진. 방금 봤다시피, 지금부터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져도 의심을 거듭해야 한다.”
그때쯤 하오란의 떨리는 몸이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몸의 신경 작용을 끈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깨까지 잘린 녀석의 팔이 서서히 돋아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챈 하오란이 머쓱한 듯 웃었다.
“이계에서 얻은 힘이다.”
“얻을 줄 알고 있었군.”
“그때만 해도 시스템을 섬기고 있었으니 말이야.”
미래를 봤다는 뜻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시스템도, 성요한도 아니다.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드래곤이다.
놈의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겨우 눈동자 하나가 집채만 하고, 하늘까지 솟은 놈의 꼬리는 거대한 산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했다.
비록 놈의 육신이 바다와 비슷한 색을 가지고 있다 해도, 평화로운 바다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뿜고 있는 놈이었다.
그때였다.
놈의 음성이 머릿속에 꽂혀 들어왔다.
-이태진. 기회를 주겠다.
가만히 드래곤을 바라봤다.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절대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하오란을 나에게 주고 원래 차원으로 돌아간다면,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하는 것?”
말을 마치자마자 하오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놈이 말을 걸고 있군. 말을 걸고 있어. 그렇지? 큭. 뭐라고 하더냐. 나를 내놓으라고 하지 않던?”
나는 하오란의 말을 무시한 채 드래곤을 턱짓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놈의 힘을 가늠하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마 정신계 마법의 일종으로 보였다. 놈은, 아니, 놈 또한 나처럼 힘을 숨기는 법을 알고 있다.
“하오란을 어떻게 알지?”
먼저 가볍게 질문한다.
-이계. 네가 그렇게 부르는 곳에서 만났다.
“하오란에게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돌려받을 것이 있다.
드래곤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어서 말했다.
-완전한 재생 능력. 저것은 원래 나의 힘이었다.
“그 힘을 되찾겠다?”
-너만큼은 얌전히 돌려보내 주지.
“그래서 내가 얻는 것은?”
-네가 찾는 것을 주겠다.
“……?”
-아락투스의 지팡이.
생각이 뚝 끊겼다.
문득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옆을 돌아보자 하오란의 두 눈에 횃불이 켜졌다. 녀석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를 배신하지 마라! 이태진!
아마 하오란이 석상처럼 굳어 있는 이유도 드래곤의 어떠한 힘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드래곤의 음성이 이어졌다.
-내가 아락투스의 시선을 잠시 끌어줄 수 있다. 네 품에 있는 열쇠를 사용해라. 그의 창고로 갈 수 있을지니.
드래곤이 말하는 열쇠라는 것은 내가 사막을 통일하면서 시스템에게 얻은 아이템이다.
아락투스의 비밀창고로 가는 열쇠.
드래곤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게 괜찮은 협상 카드 하나가 들어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과연 하오란이 발작하듯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태.진. 약.속을 잊지.마라.”
하오란이 떠듬떠듬 음성을 내뱉었다. 거기에 간절함이 가득하다. 어쩌면 하오란은 이런 상황까지 예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는 것은.
“어지간히 간절한가 보군. 너희 둘 다.”
-선택해라. 이태진.
드래곤이 대답을 재촉했다.
-아락투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때를 노려 아락투스의 창고로 들어가라.
“돌아올 때는?”
-시스템이 너를 도울 것이다.
들을수록 맞는 말만 한다.
이 시점에서 시스템은 절대 나를 버리지 못한다.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모두가 평화로워지는 길이니.
“모두가 평화로워진다?”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모두가 평화로워지는 길이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모두가 평화로워지는 길이니.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모두가 평화로워지는 길이니.
드래곤의 음성이 뇌리에 박힐수록 정신이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드래곤이 말한 모두의 평화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안다.
모두의 평화가 아닌 거래일 뿐이다.
놈은 하오란을 취하고, 나는 9서클의 단초를 얻는다.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하던 목표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다.
“이.태.진. 속.지.마라!”
툭툭 끊어지는 하오란의 애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는 선택할 때다.
그런데 내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드래곤의 말을 들을수록 드래곤에게 신뢰가 생긴다.
비록 놈이 정신계 마법으로 나를 도모하려 했다지만 그것은 하오란도…….
멈칫.
정신계 마법?
이번엔 또 언제부터?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조짐도 없이 마법을 쓴 드래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원래 그렇게 치졸한 수를 쓰나?”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모두가 평화로워……!
퍼억!
드래곤의 말을 끊고, 하오란의 가슴팍을 밀쳤다.
하오란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가 투둑, 거리며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물속에 잠겨있다 빠져나온 것처럼, 하오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면서도 하오란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붉게 충혈된 눈으로는 드래곤을 바라봤다.
“내가 이겼다. 크큭. 빌어처먹을 도마뱀 새끼. 네깟놈을 선택할 줄 알았나?”
창공에 떠 있는 드래곤이 잠잠했다.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어 하오란에게 말했다.
“하오란. 저놈을 공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탱커를 맡겠다. 주의할 점은, 내가 죽는 것처럼 보여도 죽지 않는다는 것. 공격을 부탁한다. 이태진. 그리고.”
하오란이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나를 선택해줘서 고맙다.”
거기까지 들은 후 하오란이 먼저 움직였다. 그 모습이 마치 몬스터의 어그로를 끄는 탱커와 흡사했다.
하오란이 악을 쓰며 공중으로 도약했을 때. 나 또한 움직였다.
거대한 드래곤의 눈깔이 점점 가까워진다.
-내 제안을 거절하지 마라. 이태진.
“적어도 하오란은 그런 더러운 수는 쓰지 않았지.”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너는…….
정신을 집중하고 집중했다. 그제야 보이는 놈의 마력 한 줄기.
은밀하고 또 실타래처럼 가늘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검을 들었다. 하늘까지 솟은 그것을 내리그었다.
은밀하게 내게 다가오던 실타래도, 드래곤도 한 번에 베어버릴 수 있게끔!
화악!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공간이 일그러졌다. 당연히 나를 쫓아오던 실타래는 검이 닿기도 전에 소멸했다.
길게 뻗은 오러가 드래곤까지 집어삼킨다. 흔들리지 않던 놈의 눈깔에 지진이 일어났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하오란이 비명을 지르며 웃고 있었다.
이곳저곳 몸이 터져가면서도 하오란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래곤의 고민이 느껴진다. 하오란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내 오러를 막을 것인가.
어차피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거대하던 놈의 몸집이 점점 줄어들었다. 허공에서 튀어나온 불덩이가 오러와 부딪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콰과과과!
붉은 불덩이와 푸른 오러가 부딪치면서였다. 불빛이 번쩍거렸다.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섬광이었다.
인세를 벗어났다 해도 S급이라는 한계점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드래곤의 움직임을 놓쳤다.
고개가 멋대로 옆으로 돌아갔다. 극렬한 통증이 느껴진다. 사막 이후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등쪽의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눈을 뜨고 나서야 내가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저 한가운데 폭풍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주위의 모든 생명체들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발바닥에 힘을 준 즉시 튀어올랐다. 그때까지도 나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오란 때문이 아니라, 당장은 마법을 써봤자 파훼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수압을 뚫고 하늘 위로 튀어 올랐다. 하오란이 놈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미 세상은 종말의 날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절벽은 부서진 지 오래였으며, 바다에서는 폭풍우가 생성될 조짐이 보였다.
그러한 것들은 힘의 잔재가 만들어낸 티끌일 뿐이다.
진짜로 우리의 전력이 부딪치면, 이계로 추정되는 이 세상이 완전히 박살 날 것이다.
이셀라의 부족이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든 그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솔직한 심정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드래곤이 더 강하다.
드래곤의 몸집은 나만큼이나 작아져 있었다. 형상은 또 두 발을 걷는 인간과 비슷했는데, 웃기게도 놈이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다.
놈이 변신한 인간의 형상이 돌아가신 부모님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눈을 한 번 깜박거릴 때마다 어머니에서 아버지, 다시 어머니로 놈의 형상이 변했다.
그런 개수작쯤이야 이미 기백 번은 당해본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때는 하오란의 창이 드래곤을 향해 뻗어가고 있을 때였다.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이었으므로, 당연히 하오란의 창이 놈의 복부 한가운데를 뚫어내는 것에 성공했다.
당연히 대가는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 한 줄기가 하오란을 덮쳤다. 손 쓸 새도 없이 하오란이 쓰러졌다.
또한 그와 동시에 하오란의 온몸이 터질 듯 압력을 받았다.
짓눌러 터진 피부 틈 사이, 하오란의 지방질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거르륵, 소리를 내는 하오란의 눈빛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죽. 여!’
있는 힘껏 아래를 내리쳤다.
예상과 달리 드래곤의 푸른 눈에서 뻗친 섬광이 내 검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격돌이 일어났다. 빌어먹을 시야에 또다시 암전이 생겼다. 컴컴한 가운데,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콰직!
순간적인 통증과 함께 드래곤과 내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튕겨져 나왔다.
바닥에서 솟아나온 예리한 어떤 것이 비장과 심장을 뚫고, 오른쪽 어깨까지 관통한 상태였다.
가만히 보니 관통한 그것은 다름 아닌 흙더미였다.
어처구니없을 만큼의 원소마법 활용도였다.
거리낄 것도 없이, 회복 마법을 사용했다.
그 순간 내 마법을 파훼하려는 드래곤의 시도가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치열한 공방 끝에, 회복 마법이 내 몸에 스며들었다. 침침했던 시야가 밝아지고 흐트러졌던 호흡이 돌아왔다.
“거르륵!”
하오란의 상태는 끔찍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럼에도 드래곤에게 뺏은 특성 덕분인지, 조각조각난 하오란의 몸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때쯤 드래곤은 부랴부랴 도주를 시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내가 더 강했던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놈이 떠나가게 놔둘 수는 없었다.
공간마법으로 놈 앞으로 도약했을 때.
드래곤 또한 텔레포트 마법을 완성하기 직전의 상태였다.
눈이 마주친 드래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린다.
놈의 마법이 완성되는 것보다, 내 검이 놈을 갈라내는 것이 더 빨라서였다.
-정녕 끝을 보겠다는 말……!
어머니의 형상을 한 드래곤을 베어냈다.
뚝 떨어진 드래곤과의 전투가 백인호를 죽였을 때와 비슷했지만.
알고 있다.
전투는 이제 시작이다.
드래곤은 아직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