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S급 던전 (6)
-아락투스의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에 진입하자마자 진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락투스의 마력 특유의 찐득거리고 파괴적인 힘.
“역시 이곳은 숨 쉬는 것부터 곤란하군.”
하오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S급 상단의 하오란조차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농도가 짙기는 하다만.
내게는 예외였다.
“처음치고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버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는 더없이 익숙한 힘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폐부에 스미는 마력을 온전히 느꼈다.
여기서 마법을 쓴다면 마력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하오란이 보고 있는 한 마법은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한다.
하오란의 말대로,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여기서만큼은 놈과 동료라 생각해야 한다.
“미리 말해두지. 그 어떤 탈출석도 소용없다.”
하오란이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며 말했다. 창뿐만 아니다. 놈은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 중 최고만 가져온 것이 분명했다.
S급 아이템 특유의 요란한 효과음 뒤로 비장한 녀석의 얼굴에 조금씩 두려움이 깔리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탈출한 거냐.”
“운이 좋았지. 그리고 그 운은 지난번이 마지막이었어. 아락투스가 단단히 화가 났거든.”
“화가 났다?”
“이곳에 세 번 도전했다가 세 번 모두 실패했다. 탈출할 때마다 희한한 메시지가 뜨더군. 다음에 입장할 때는 난이도가 더 높아질 거라고.”
이곳에 도전하는 동안 아끼는 부하들을 모두 잃었다는 말은 들었다.
하오란의 눈에 횃불이 켜졌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 안에 분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완전히 장비를 착용한 하오란이 문득 의뭉을 띄며 말했다.
“검 하나가 끝인가? 나머지는?”
검을 제외한 모든 아이템을 경험치와 스킬, 특성의 숙련도로 바꿨다.
거기에는 헬리오스의 심장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굳이 말해줄 내용도 아니어서, 대충 둘러댔다.
“모두 박살 났다.”
“큭. 손정연과 네로드를 죽인 건 역시 너였군. 괜찮다. 어차피 우리 정도 수준에서 장비는 그렇게 큰 효율도 발휘할 수 없을 테니까.”
“브리핑할 게 남아있나?”
“이번 라운드가 끝나면 이어서 말해주지.”
“굳이?”
“네가 무서워 도망칠 수도 있거든. 큭. 네가 겪었던 어떤 던전보다도 난도가 어렵다는 걸 명심해라.”
거기까지 들은 후 정면을 바라봤다. 샛노란 동공 하나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운명 공동체…….”
녀석의 말을 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299의 레벨임에도 어둠 속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하오란이 말한 SS등급이라는 점에는 의문이 표해졌다.
숫자는 몇이지?
느껴지는 파동은 나를 교란시켰다. 즉, 놈들의 숫자가 정확히 몇인지 알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티끌만큼도 긴장되지 않았다.
아락투스의 부하들이 의례 그렇듯, 리저드 한 마리가 불현듯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고.
서걱-!
외껍질, 내껍질, 놈의 내장까지. 칼질 한 번에 반으로 갈랐다. 몸에 마력이 돌아가자 시야가 조금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흠칫하는 놈들이 보였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대부분이 리저드다.
대부분? 전부가 아니라?
오크족 대전사로 추정되는 놈, 뱀파이어 대공, 듀라한.
잠깐 동안 확인한 종류도 이 정도다. 감각을 집중시키면 더한 것들도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몬스터들의 수준이야 그렇다치고, 어째서 아락투스와 어울리지도 않는 놈들이 여기 있는 거지?
몬스터 도감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전설적인 몬스터들 아닌가?
의문을 담고 뒤따라 들어오는 하오란을 쳐다보자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아락투스가 강력한 네크로맨서라는 말을 빼먹은 것 같군. 이 던전이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다. 하나하나가 언데드 몹이거든.”
하오란이 턱짓한 곳을 쳐다봤다. 방금 내가 반으로 가른 리저드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그것이 하나로 합쳐진다. 촉수처럼 연결된 부분 부분이 결합되는 순간.
“캬악!”
다시금 놈이 일어섰다.
서걱-!
“이것들 모두가 이런다고?”
“그래. 이것들을 죽이려면 이렇게.”
하오란의 손이 벼락처럼 리저드의 가슴을 뚫었다. 그때는 이미 리저드가 부활하기 직전이었다.
까뒤집어졌던 리저드의 눈깔이 다시금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
퍼석,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심장에 있는 라이프 오브 배슬을 없애는 것밖에 없다.”
“전투 도중에는?”
“그러니까 두 명 이상이 필요하지. 하나가 살아있는 것, 하나가 죽은 것을 담당해야 한다. 물론 순번을 정해야겠지만.”
하오란이 쉽게 말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쏟아지는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만 해도 힘들 텐데, 부활하는 놈들까지 상대하라고?
“SS급 맞네.”
백여 마리가 넘는 몬스터가 공동 전체에 퍼져 있었다.
사막에서 겪었던 그것들보다도 강하다. 아니, 사막의 몬스터들을 우습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
그럼에도 감상은 아까와 같다. 긴장되지 않는다.
하오란에게 내 전략 아닌 전략을 말해주려고 하던 때.
하오란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흠칫거린다.
“뭐냐 그 눈빛은.”
꿀꺽 침을 삼킨 하오란이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말했다.
“성요한인 줄 알았잖아.”
“뭐?”
“그 눈빛 말이다. 그 눈빛. 다 하찮아 보인다는 그거. 무슨 자신감이냐.”
아마 본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놈이 파동을 퍼트려 내 레벨을 가늠하려 했다.
마법도 아니고, 시스템이 정해준 레벨이라면 응당 팀원에게 알려주는 것이 맞다.
나는 꽁꽁 감춰줬던 힘을 풀었다.
하오란의 경계 섞인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던 문득, 녀석이 목젖을 드러내며 웃었다.
“시스템께서는 널 굉장히 아끼시는군.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성요한의 다음 대체자는 확실히 너로 정해진 것 같아.”
“……?”
“이것들부터 모조리 처리하고 다시 말하자고. 네 뒤는 내가 맡겠다.”
마지막 말을 달리 해석하자면 궃은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뜻이다. 하오란 같은 강자가 할 말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만큼 녀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고.
그때쯤 슬금슬금 다가오던 몬스터들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엿 같은. 이태진. 공격을 부탁한다. 내가 탱커를…….”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놈들을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뭔데.
“고개 숙여.”
콰지지지직!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검 끝에서부터 방출되기 시작한 오러가 원을 그리며 뻗어 나간다.
붉고 푸른색이 뒤엉킨 오러는 일종의 자연현상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을 생각하면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어차피 던전이다. 힘을 아낄 필요도 없다.
쩌저저저적!
캄캄했던 던전에 태양을 던진듯 밝아졌다. 오러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놈들이 반으로 갈라졌다.
정확히 심장만을 노리고 날린 것이다. 높낮이가 다른 것들은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세상으로 보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2700exp!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4600exp!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5500exp!
-획득한 경험치를 특성, 검신의 축복(S) 숙련도로 전환합니다.
-검신의 축복(S) 숙련도 : 99.6%
-스킬, 흑점폭발(S)을 획득하였습니다!
-흑점 폭발(S) : 극한으로 압축시킨 오러를 방출합니다.
-흑점 폭발(S)을 특성, 검신의 축복(S) 숙련도로 전환합니다.
-검신의 축복(S) 숙련도 : 99.7%
-경고! 반복된 스킬 창조는 시스템의 주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순간 모든 마나를 써버려 탈력감이 찾아왔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런 수준에 이 정도 경험치면 아주 괜찮은 수준이다.
파동을 퍼트렸다. 남아있는 생명반응은 나와 하오란 단 둘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든 생각 하나.
지금 하오란이 나를 공격하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하오란이라면 또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심장의 마력을 꺼낼 준비를 마치고 놈을 쳐다봤을 때였다. 하오란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로 콧김을 쉭쉭 뿜어내고 있었다.
“이거라면! 가능성이 있다! 그놈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성요한을 말하는 거라면 아직은 무리다.”
“그렇겠지. 내가 말한 건 성요한이 아니라…….”
“……?”
“이렇게까지 강할 줄 알았다면 진작 찾아가는 것이었는데. 빌어먹을. 애꿎은 부하들만 죽였어.”
횡설수설하는 하오란의 말을 끊고 검지로 천장을 가리켰다.
“이 다음 층은 뭐가 나오지?”
겨우 1층에서 이 정도 놈들이 나왔다면, 2층부터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쏟아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잔뜩 흥분하던 하오란의 말이 뚝 끊겼다. 녀석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그때쯤 수상함을 느꼈다.
“설마 2층에도 못 올라가 본 거냐?”
“아니! 나를 뭘로 보고!”
하오란이 숨을 들이켰다.
“딱 2층까지였다. 그마저도 매번 실패했지.”
“그래서 누구냐고.”
“……드래곤.”
하오란이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그 빌어먹을 도마뱀이 튀어나온다.”
***
마나홀의 마력을 채우는 데는 딱 하루가 흘렀다. 그동안 하오란은 무던히도 내게 드래곤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지, 또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명하려 애썼다.
“내가 마법을 그토록이나 원하는 이유다. 직접 경험해봤기 때문에 말할 수 있지. 단언컨대 네 검신의 축복보다 위대하다고 말하겠다.”
“놈들의 공격 패턴은?”
“세뇌부터 시작될 거다. 정신계 각성자들은 우습게 여겨질 만큼 자연스럽지. 온갖 저주와 디버프가 너를 막아서겠지만.”
하오란이 큭, 하고 웃었다.
“이것 또한 전초전일 뿐이지. 하늘에서 뿜어대는 불덩이와 뇌력, 땅에서 솟구치는 놈의 수족들은 또 어떻고.”
환상 속에서나 겪었던 드래곤이었고, 내 생각이 맞다는 가정하에 6:4로 승리를 자신했었다.
9서클의 힘이 맞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고.
“직접 겪어봐야 안다는 거군.”
“그래.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말해라.”
그때는 나도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준비라니.
“우리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하오란.”
“…네 말이 옳다.”
결연한 눈빛이 된 하오란이 위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다른 던전과는 달리, 층마다 공간이 분리돼 있는 곳이었다.
즉, 층 하나하나가 다른 던전으로 취급된다는 소리.
공간의 힘에 몸을 맡기고 눈을 번쩍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린 소리는 하오란의 비명이었다.
“크아아악!”
퍼억!
고개를 돌린 순간 하오란의 팔 한쪽이 터져 나갔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도 하오란의 팔에서 터져 나오는 피분수는 원래의 시간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왜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정면을 바라봤다. 흡사 절벽과 비슷한 장소였다. 절벽 뒤로는 맑은 하늘과 바다가 보인다.
이계?
그런데 정작 내가 찾고 있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파동을 퍼트리고, 마력을 잔뜩 끌어내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에 숨은 거냐.
“이태진! 속지 마라아아악!”
옆을 보자 하오란이 악을 쓰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어떤 힘의 작용이 하오란에게 집중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퍼억!
하오란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끔찍한 것들이 이리저리 튀어댔다.
성요한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나와 맞수를 둘 녀석이, 공격 한 번에 죽었다고?
아무리 9서클이 대단하다 할지라도…….
검신의 축복이 번쩍거렸다. 검신의 축복도 지금의 상황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이건.
“환상 마법이군.”
쩌저적!
유리에 금이 간 듯 하늘이 쩍쩍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무너졌다.
땅 밑이 꺼지는 기분과 함께 다시 시야를 잡았을 때.
하오란이 터진 팔 한쪽을 부여잡고 있었다.
맑은 하늘과 푸른빛 바다는 여전한데, 단 하나만큼은 달랐다.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드래곤 하나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