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는 미래를 본다-153화 (153/170)

153화 S급 던전 (4)

“다른 곳 가지 말고 여기 있어. 할 거 있으니까.”

심각하게 말해서 그런가, 임한나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빛은 흔들리고 몸은 석상처럼 굳어 있는게 영 불안하긴 한데.

별 일 없겠지.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로 갔다. 다행히 김세린을 포함한 팀원들은 이미 집무실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에게 어깨를 한 번씩 툭툭 두드린 뒤.

문을 열었다.

“형제.”

곧장 놈의 얼굴이 보였다. 하오란. 1년 전에 봤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얼굴도, 능글맞은 웃음도.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당시 놈은 내게 죽기 싫어 팔을 하나 바쳤다. 그런데 그 팔이 얌전히 붙어 있다.

녀석이 손을 흔들면서 내게 말했다.

“이거 하나 붙이는 데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지. 너무 그렇게 나쁘게만 보지 마시오.”

“여긴 무슨 일이냐.”

“우리가 영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나는 그대를 형제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대는 여전히 차갑군.”

“끈 떨어진 신세 주제에 형제는 무슨 형제. 시스템에게 버림받은 기분은 어때.”

“역시 그대였군. 그대가 수작을 부린 것이었어.”

나는 코웃음을 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오란도 앉았을 때.

“왜 그런 짓을 했소?”

“글쎄.”

“굳이 나를 적으로 만드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있는거요.”

그렇게 말한 하오란이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탓하려고 온 건 아니오. 그저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는데. 다행이군. 그대는 나와 싸우길 원하지 않아.”

“탓하려고 온 게 아니다?”

“지금쯤이면 알겠지만 시스템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미래가 아니었지. 무수한 기대값을 합쳐놓은 영상에 불과했어.”

하오란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확실히 시스템은 날 버린 것 같군.”

“시스템? 너는 시스템을 신처럼 여겼던 거 아니었나? 그분이니 뭐니 하면서.”

“한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후회하지만.”

하오란이 아주 오래전처럼 이야기했다.

그 부분에서 확신했다.

이놈. 이계에 갔다 왔다. 나와 비슷한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놈이 갑자기 강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만, 놈과 나의 다른 점이 있었다. 하오란은 나보다 약하다.

놈이 끝끝내 숨기려 애쓴 마력이 내 기감의 끝에 잡혔다. 아주 미약한 파동이 놈의 레벨을 말해주고 있었다.

285레벨 정도.

놈이 내게 덤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그러나 그만큼 확실한 건, 하오란은 죽을 때도 곱게 죽지는 않을 거라는 것.

놈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도 그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시스템이 미래를 보여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둘이 싸우면 일성은 물론이고 도시 하나는 우습게 사라질 것이다.

그쯤에서 상념을 끝내고 말했다.

“여기 온 이유가 뭐지?”

“너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자세히.”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서. 혹시 이계가 있다는 걸 아나?”

“…….”

“침묵은 곧 긍정이지. 너도 다녀왔겠군. 크큭. 어디에 있다 왔지? 제국? 북부?”

“…….”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하지만 괜찮아. 이것도 중요한 건 아니니까. 큭큭.”

“아까부터 뭐가 웃기지?”

“이래서 우리가 형제라는 거다. 비록 뜻은 달라졌지만, 우리가 겪은 과정들은 모두 똑같았을 테니까. 그 끔찍했던 기억들, 살아남으려고 애썼던 기억들. 너도 가지고 있잖아. 동질감이 느껴지지 않나?”

“네놈의 목적이나 말해라.”

“그러지.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것이다. 말했지?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했고, 그에 따라 비슷한 사고방식을 할 수밖에 없다.”

“…….”

“아마 우리의 목적은 똑같을 것 같은데.”

빙긋이 웃은 놈이 다리를 꼬았다.

“성요한.”

“자세히.”

“성요한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

나는 김이 새는 기분을 느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질질 끄나 했더니.

“우리가 아니라 나다. 끈 떨어진 네놈에게는 성요한이 관심없을 테니까.”

“틀렸다. 성요한의 목적은 그런 게 아니야. 단단히 오해하고 있군. 성요한은 시스템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

“아니, 시스템만 미워하는게 아니라 해야겠지. 유치하게 들리겠지만 그래서 무섭다는 거다. 성요한의 목적은, 시스템도 몬스터도 없는 세상을 원한다. 물론 그 세상에는 각성자도 없어야겠지.”

솔직히 깜짝 놀랐다. 성요한의 목적이 어떤 부분에선 나와 똑같아서.

시스템도 몬스터도 없는 세상 말이다.

하오란이 검지 손가락을 들었다.

“성요한의 방식이 정확히 어떤지는 모르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 둘은 놈의 1번이라는 거다.”

“1번?”

“죽여야 할 순번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지.”

하오란이 손을 내밀었다.

“지긋지긋하지 않나? 시스템도, 성요한도, 몬스터도 말이다.”

그것만큼은 동감한다.

“이태진.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는거냐?”

하오란이 자조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성요한을 잡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괴물같은 놈을 말이다.”

“그래서?”

“나와 손을 잡자. 한시적으로 말이다.”

“무슨 뜻이냐.”

“성요한을 죽일 때까지만 동맹을 맺자는 말이다. 나는 우리 둘 다 강해질 방법을 알고있다.”

이건 꽤.

흥미롭게 들린다. 하오란의 속내가 음흉하다 할지라도 말이다.

놈에게 턱짓했다. 하오란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S급 던전, 걔중에서도 아락투스가 있는 던전에 갈 것이다.”

“아락투스.”

“들어본 적 있겠지? 내 뒷조사까지 했으면서 말이야.”

하오란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게 보낸 그놈들은 얌전히 살려줬으니까.”

“계속.”

“아락투스의 던전을 공략하면 놈의 힘을 흡수할 수 있다.”

“놈?”

“그곳의 주인, 아락투스의 힘 말이다. 마계 3군단장 아락투스. 큭큭. 모르나 보군.”

모를리가 있나.

어찌보면 내 마법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자가 아락투스인데. 그런데 그걸 굳이 확인시켜줄 이유도 없어서 나는 웃음만 지었다.

“아락투스의 힘을 흡수한다는 뜻은 우리가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뜻이지.”

“그리 구미가 당기진 않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이계에서 마법을 본 적이 없군.”

하오란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혀를 끌끌 찼다.

“마법이야말로 성요한을 넘어 시스템에까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이적은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놀랍군.”

나는 고민되는 척 턱을 문질렀다. 곧장 하오란이 발끈했다.

“안 하면 네 동료들의 목숨또한 보장할 수 없다. 형제.”

“성요한에게 죽고싶다면 얼마든지. 아니, 성요한까지 갈 필요도 없겠군.”

나는 집무실의 문을 열어줬다. 과연 놈은 예상대로 앉은 채로 가만히 나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하오란을 본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내 동료들을 죽인다고?

단언컨대 절대 그럴 수 없다.

협박은 어디까지나 인질의 목숨이 살아있을 때나 유효한 것.

제 목숨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이 놈이 내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을리가.

“어쨌든 흥미로운 제안은 잘 들었다.”

“대답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군. 한 일주일 정도.”

“네게 아락투스가 남긴 아이템을 모두 주겠다.”

“말뿐인 약속은 필요없다.”

하오란의 팔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오란도 찔리는 게 있는지 아무말도 하지 못하며 나를 바라만 봤다.

그러던 중, 놈이 반지 하나를 내게 던졌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억지로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너는 모르겠지만, S급 아이템 이상의 것이다.”

모를리가 있나. 심지어 본 적도 있다. 아락투스의 비밀창고에서. 이 낡은 반지는 비밀창고의 가장 끝부분, 아락투스가 가장 아끼는 삼신기 중 하나다.

아락투스의 마법 사전, 반지, 스태프로 구성된 삼신기.

나는 침을 한번 삼킨 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말했다.

“아무런 상태창도 뜨지 않는데.”

“그렇겠지. 시스템이 허락한 아이템이 아니니까.”

하오란이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아락투스의 세 가지 아이템 중 하나다.”

“세 가지 아이템?”

“마법 사전, 스태프, 반지로 구성된 것. 지금은 알 필요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약속하지. 그건 S급 아이템 이상의 물건이다.”

“이걸 내게 주는 이유는?”

“아직은 나도 사용할 수 없으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그래서 우리가 그 던전에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마법사전을 얻으러.”

“……?”

“아락투스를 잡으면 마법 사전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마법을 배우려면 그 사전을 획득해야만 하는 것이고.”

나는 또다시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오해를 해도 이렇게까지 오해할 수 있다니.

무리도 아니다.

하오란도 아락투스의 창고에 갔다 온 적이 있을 것이다. 걔 중 삼신기 하나가 처음부터 없었을 테니 이런 멍청한 추리를 하는 것이다.

당연히 하오란 앞에서 마법사전을 꺼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너는 반지, 나는 스태프를 갖겠다. 그리고 마법 사전은 공용으로 쓰면 되겠지.”

“마법이 그 정도로 대단한가?”

“큭. 그 놀라운 이적들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공간을 뛰어넘고, 하늘에서 운석을 떨어트리며, 정신을 세뇌시키는 그것들을.”

“이계에서 넌, 어디에 있었지?”

하오란이 그때를 회상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드래곤의 둥지. 내가 알고 있는 정보도 그때 들은 것이다.”

진절머리가 난다는듯 고개를 몇 번 털던 하오란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마음은 굳힌 것 같군. 일주일 뒤, 던전 앞에서 보자. 이태진. 약속하건대, 이 일만 성공하면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웃기는 소리.

만약 아락투스의 던전을 공략하고, 아락투스가 가지고 있는 삼신기를 얻으면, 그 순간 놈은 나를 덮칠 것이다.

믿음의 증거로 내게 반지를 줬다고?

내가 마법사전의 주인이라는 걸 알았어도 저랬을까?

놈이 사라진 후,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복이 이렇게까지 제 발로 굴러올 줄은 몰랐다.

아락투스의 반지를 내려다봤다.

풀풀 피어오르는 마기의 향이 어지러울 정도다.

반지를 착용했다.

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마법사전은 마법의 힘을 일깨워주며, 반지는 고리를 자극시켜 마기의 총량을 늘린다.

아마 아락투스의 스태프는 마법의 효율을 극한으로 늘려주는 것이겠지.

쩌저적!

심장에서 곱게 자고 있던 일곱 개의 고리가 반응한다.

반지의 능력은 마기의 총량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주는 것.

반지 안에 있던 힘이 주르륵 내 심장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여덟번째 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두배는 많은 마기가 필요했었다.

당연하지만 반지 안에 잠든 마기의 양은 일곱 고리를 모두 합친 것보다 두 배를 훨씬 상회했다.

이것들을 모두 한 번에 받아들이면 폭주 현상이 일어날 터.

딱 하나만 올리는 거다.

콰드드드득!

기분 좋은 고통이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기분이었지만, 이 경지에 이르는 동안 수십, 수백번은 겪어본 통증이다.

나는 웃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화악!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싱겁게, 여덟 번째 고리를 만들 줄이야.

그래서 더더욱 하오란의 제안이 달콤하게 느껴졌다.

아락투스의 던전에 가서 놈의 스태프까지 취한다면.

[시스템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시스템의 믿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시스템의 믿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시스템의 믿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큭.”

0